필자는 과거, <수색자>와 <택시 드라이버>를 본 적이 있었다. <택시 드라이버> 시청 당시, 웰메이드 영화임은 분명했지만 왠지 모를 꺼림칙함이 있었는데 그때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채 지나 보냈었다. <수색자>를 보았을 때도 약간의 비슷한 감정을 느끼긴 하였지만 <택시 드라이버>만큼의 불쾌감은 아니었다. 당시엔 두 영화의 관련성을 알지 못하였으나 수업을 통하여 두 영화의 내러티브 구조의 비등함에 흥미를 갖게 되어 더 자세히 알아보고자 두 영화를 선정하였고 그 과정에서 처음 <택시 드라이버>를 보았을 때의 불쾌함의 원인도 알게 되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1956년 존포드의 <수색자(The Searchers)>와 1976년 폴 슈레이더가 각본하고 마틴 스콜세지가 연출을 맡은 <택시 드라이버(Taxi Driver)>, 두 영화에서 같은 주제를 다른 장르를 통해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내러티브 구조를 중심으로 비교하고 의미를 분석해보고자 한다. 우선, 영화 탄생의 시기적 배경과 영화를 통하여 말하고자 하는 바를 살펴본 후에 영화 속의 인물과 환경, 영화적 스타일 면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영화 탄생의 시기적 배경
우선 영화 탄생의 시기적 배경을 알아보고자 한다. 할리우드 시대에 서부극의 시작이자 기존 서부극의 컨벤션을 확립했던 존포드는 1956년, 기존의 30, 40년대 서부극과는 다른 수정주의 서부극을 만들었다. 분위기는 달라졌는데 이전과 같은 스튜디오에서의 고전 영화들이 더 이상은 통용되지 않게 된 50년대, 존 포드 또한 2차 대전 이후 새로운 이데올로기나 사회적 흐름 속에서 스스로 성찰적으로 바뀌게 되면서 역사관, 사고방식에 변화가 있었고 수정주의 서부극의 시작이자 <수색자>를 감독이자 작가로서 개인의 예술적인 작품으로 만들어낸다. 기존 서부극의 평면적인 인물에 더 이상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50년대의 관객의 변화 또한 <수색자> 탄생에 일조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선한 백인과 악한 인디언의 대립구도를 만들어 관객을 백인의 입장에 위치시키던 할리우드 기존의 이데올로기적 전략의 전통방식을 무너뜨린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개봉 당시보다도 1970년대 이후에 걸작으로 재평가받았다.
누벨바그, 뉴웨이브의 영향이 할리우드 쇠퇴기에 영향을 미치고, 새로운 작가주의적이고 개인적인 예술로서 영화를 바라보게 되면서 완벽하게 영화적 세대교체가 일어나고 6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할리우드 영화가 부활하면서 누벨바그 영향을 받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경험을 찍는 개인적인 영화들이 많아지고 이는 영화 체제 변화에 변화를 줌으로써 고전 할리우드 영화를 재해석하는 장르적 만개가 일어난다. 고전 할리우드에서 B급 영화 취급을 받던 장르들을 누벨바그 감독들이 재해석하면서 자기 영화를 불러오게 된다. 이를 뉴아메리칸 시네마에 적용시키며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우디 알렌과 같은 뉴할리우드 감독들이 누벨바그 시대 감독들이 재해석한 고전 할리우드를 또다시 패러디하고 오마주 해내는 와중에 마틴 스콜세지는 존포드의 <수색자> 구조를 가지고 필름누아르식으로 변형한다.
주제 (내러티브 구조 분석)
1868년 미국 텍사스, 남북전쟁이 끝나고도 쉽게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황야를 떠돌던 이든 에드워즈가 어느 날 한때는 연인이었지만 동생 아론과 결혼해 버린 마사와 그의 가족들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이내 인디언(코만치 족)으로부터 습격을 받아 가족들이 살해당하고 조카 데비는 인디언 추장 스카에게 납치된다. 이에 이든은 아론이 양아들로 키우던 인디언 혼혈남아 마틴 폴리와 함께 데비를 찾으러 떠난다. 광적인 열정으로 오랜 수색 작업 끝에 데비를 찾아내지만, 10여 년의 시간이 흐르고 데비는 추장 스카의 아내가 되어 반 인디언의 상태였다. 이에 이든은 데비를 구하러 갔음에도 불구하고 죽일 생각까지 하지만 마지막엔 생각을 바꿔 데비를 구출한 뒤 마을로 데리고 돌아오고 그는 다시 마을을 떠난다.
베트남전에서 생사의 극한 경험을 하고 뉴욕으로 온 트레비스는 홀로 외로운 시간을 보낸다. 불면증에 시달리던 그는 택시운전사로 취직하여 밤새워 근무를 하지만 여전히 쉽게 잠들지 못하고 근무가 끝난 아침엔 극장으로 가 포르노를 보며 시간을 보낸다. 뉴욕의 밤거리를 달리는 트래비스는 다양한 사람들을 보면서 거리의 쓰레기라고 생각하며 나날을 보내던 중, 공화당 선거운동캠프에서 일하는 베시에게서 본인을 구원해 줄 천사의 모습을 느끼고 다가가지만 첫 데이트에서 포르노 극장에 데려가면서 둘의 관계는 깨져버린다. 그런 상태에서 트레비스는 우연히 13살의 어린 창녀 아이리스를 만나게 되고 아이리스를 구해야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다양한 시도를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정신이상자 수준의 망상에 빠진 상태로 대통령 후보를 암살할 계획으로 체력단련을 하고 총까지 구입하지만 이 또한 실패해 버린다. 그 길로 아이리스가 있는 곳으로 가서 아이리스를 구하고 포주들을 살해한 뒤 본인도 자살하려 했으나 경찰에 체포되고 이는 매스컴에 알려지면서 그는 영웅으로 등극하게 되고 그는 다시 택시 운전사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내용으로 케네디 대통령 암살, 워터게이트 사건, 베트남전 패배 등의 사건을 통해 극심한 가치관의 혼란을 겪고 있던 70년대 미국 사회의 분위기가 잘 나타나 있다.
이든이 남북전쟁에서 패한 후,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는 남군 장교로서 절망감과 외로움에 사무친 인물이라면 <택시 드라이버>의 트레비스는 베트남전의 후유증으로 절망감과 외로움에 빠져있는 인물이라 볼 수 있다.
두 작품의 서사적 구조를 보면 ‘사회의 쓰레기 제거'로 할리우드식 영웅전 서사 구조를 가지고 있다. <수색자> 같은 경우는 평화로운 마을이라는 질서에서 코만치로 인해 무질서가 되고 회귀하여 다시 질서를 되찾지만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의 질서이다. 이를 <수색자>는 서부극이라는 장르를 통하여, <택시 드라이버>는 필름 누아르라는 장르를 통하여 보여주고 있다. 또한, 50년대 이후, 작가주의적 성향이 더욱 깊어지면서 서브텍스트 또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평면적인 이야기뿐만 아니라 주인공의 전사, 다른 인물들의 스토리 등 심층적으로도 볼 필요가 있다. <수색자>에서 이든과 마사의 관계에서 이든의 채울 수 없고 말할 수 없었던 사랑이 이든의 분노의 원천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러한 내재된 분노가 이든이 돌아오지 못하고 황야를 떠도는 이유를 더 깊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두 영화는 국가(남북전쟁과 베트남전)란 이름으로 불려 갔다가 돌아왔을 때, 이들을 수용하지 못하는 사회와 정상적이고 일상적인 삶에 복귀하지 못하고 주변을 맴도는 자의 외로움과 분노를 보여주고 있으며 이를 통해 미국의 폭력성과 영웅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인물과 환경 (인물 분석)
<수색자>의 이든은 기존 서부극, 과거의 영웅적인 총잡이와는 다르게 문제를 가진 인물로, 극 중에서 데비에 대한 태도로서 자신의 정체성이 깨지는 것을 발견한다. <택시드라이버>의 트레비스 또한 서부극의 총잡이 같은 인물이지만 실은 부정적인 인물로 같은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존 포드의 서부극 시대까지만 해도 미국의 영웅주의가 팽배하였지만 60~70년대로 넘어가면서 영웅주의를 깨는 영화들이 등장한다. <수색자>의 이든 또한 정의와 명예에 목숨을 걸었던 기존의 영웅적인 총잡이와는 다르게 사랑하는 여자 때문에 떠난다(극 중에서 여자는 초반에만 등장하지만 이후에도 그러한 의미들이 등장한다). 동생과의 관계에서도 약간의 문제가 있는, 돈으로 거래하는 관계임을 암시하기도 한다. 트레비스 또한 망상과 현실의 구분에서 혼돈하다 결국 극한에 이르러 폭발하는 인물로 그 폭발의 결정적 계기는 베시와 아이리스라는 두 여자로부터 받은 배신감이라고 할 수 있다. 베시에게 거절당한 뒤, 구원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영웅이 되고자 한다. 트레비스가 아이리스를 구해주려 하지만 거절하는 아이리스는 이미 인디언이 되어버려 자신을 구하러 온 이든을 경계하는 데비의 모습의 변주라고도 할 수 있다.
<수색자>에서 마틴에 대한 이든의 태도에서도 이든의 불완전함이 드러난다. 마틴이 자라면서 피부색이 어두워지자 ‘널 몰라보았다’며 이후 마틴에 대한 태도가 차가워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구하러 간 데비가 인디언의 여자가 되자 굉장한 적대심을 드러냄으로 이든의 인종차별적인 행동들을 볼 수 있다. <택시 드라이버>에서는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특징이기도 한 특징으로 트레비스를 굉장히 마초적인 남성으로 그려내면서 자신이 더러워진 도시의 구원자라는 망상에 사로잡힌 살인자이자 영웅으로 그려낸다. 이런 구조를 통하여 <수색자>는 영웅처럼 보이지만 비도덕적이고 문제 있는 인물로, 인물 자체를 통해 미국의 폭력성과 영웅주의를 비판하고, <택시 드라이버>는 트레비스와 뉴욕의 상반된 거리라는 공간적 배경을 통해 비판하고 있다.
영화적 스타일 (영화의 형식)
각 영화들이 어떤 영화적 스타일을 통해 주제를 드러내는지, 메타포와 촬영 기법 등을 통해 알아보겠다.
캄캄한 집 안에서 마사를 따라 문 밖을 나가 이든을 보여주는 도입부와 데비를 데리고 돌아온 이든을 반기는 사람들이 데비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갈 때 카메라도 어두운 집 안으로 들어가 황야에 홀로 남은 이든을 찍는 마지막 장면은 <수색자>의 형식상의 특징 중 그 형식을 가장 잘 보여주는 수미상관의 구조를 취한 형태이다. 여기서의 ‘문’ 또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영화의 모티브가 되기도 하는 ‘문’은 가정과 황야, 문명과 야생 등 문 안과 문 밖의 세상이 완전히 다른 선과 악을 구별해 주는 이항대립 구조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때까지의 서부극에서 분명하게 보여주었던 경계이기도 하다. <수색자>의 도입부와 마지막 장면에서는 ‘문 안’이 가정이지만 문명화된 사회를, 밖은 야생, 즉 무질서를 의미한다. 그래서 영화에서는 줄곧 문 안과 밖을 항상 구분시키도록 한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데비를 발견하고 끌어안으며(사진 1, 사진 2) ‘집으로 가자’는 장면도 동굴의 문 밖은 야생을 의미하며 데비와 이든은 문명으로 문 안에서 대화를 한다. 이와 같이 야생과 문명사회를 구분시킴으로써 미국의 이중성을 고발하는 것이다.
<택시 드라이버>에서는 뉴욕의 낮과 밤의 상반된 거리를 이중적인 공간으로 볼 수 있는데, 조국을 위해 싸우고 돌아왔으나 모두가 부담스러워하며 그가 설 자리가 없기 때문에 야간 택시 기사로 근무를 하며 밤거리만을 다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는 <수색자>의 도입부에서 남북전쟁이 끝나고 군복을 입고 찾아왔으나 아무도 환영하지 않는 고향으로 홀로 찾아온 이든과 대응되기도 한다.
트레비스의 군복 또한 의미가 있는데, (사진 3)의 일자리를 구하러 간 트레비스는 군복을 입고 있고, 후보를 암살하러 가는 장면(사진 4)에서도 군복을 입고 모히칸 스타일의 머리를 하고 있다. <수색자>의 직접적인 변형이기도 하며 트레비스가 본인이 베트남전 군인이었음을, 인디언의 존재를 상기시킴으로 미국이 가지고 있던 폭력성을 그래도 드러내는 장치로 작용한다. 군복은 그가 그가 베트남전에서의 후유증을 더 잘 보여주고 있으며 (사진 3)은 뉴아메리카시네마의 특징 중 하나인 이중프레임으로 구성된 프레임이기도 하다. 체력 단련을 하는 장면에서 보이는 그의 등 뒤의 큰 상처(사진 5)는 전쟁에서 얻은 것으로 짐작되고, 불면증에 시달리며 포르노 극장(사진 6)에서의 첫 영화는 교육받지 못하고 홀로 살며 아무런 배경 없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여가 수단으로, 일상에 복귀가 어려움을 극대화시켜주고 있다. (사진 7)은 첫 데이트에 베시를 포르노 극장에 데려간 뒤 베시에게 성토당하는 장면.
<택시 드라이버>가 야생에서 들어온 남자를 배척해 버리는 도시에 대한 이야기라면 뉴욕이라는 도시는 미국사회 특수성을 대변하는 공간이자 서구 현대문명의 일면을 상징하는 공간이고 문화이며 경제의 중심이지만 영화에 등장하는 뉴욕의 거리는 그런 뉴욕의 거리와는 다르다. 이러한 뉴욕의 거리의 상반됨을 강조하는 요소 중 하나가 베시가 근무하는 ‘공화당’ 캠프이다. (사진 8) 우연히 대선 후보와 비서를 태우는데, ‘공화당’은 트레비스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천사가 일하는 곳이고 정치 행보상 미국의 미래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실상은 지저분한 썩어빠진 이야기들이었다. 이러한 사건과 총은 트레비스에게 동기부여가 된 것이다. 트레비스는 낮-꿈꿔왔던 천사 같은 외모의 대선 캠프에서 일하는 여자-과 밤-13 살의 창녀, 포주화된 뉴욕의 뒷골목-을 떠돌며 미국의 이중성을 본 것이다.
(사진 9) 자신의 방에서 대통령 후보 저격을 위해 거울을 보며 연습을 하는 트레비스는 일종의 의식을 치르며 극단적인 나르시시즘에 빠져들고 정작 암살에는 실패하고 도망치는 모습과 대조를 이루며 영화의 주제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뉴욕의 택시 기사 트레비스는 뉴욕의 밤거리를 돌아다니며 관찰하는 관찰자의 시선으로 충분하게 보여진다. 뉴욕의 밤거리를 보며 트레비스가 내뱉는 독백(사진 10)은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전체적인 구조를 가장 잘 나타내주는 대사라고도 볼 수 있다. 너무나 어둡고 쓰레기 같은 뉴욕을 보면서 ‘이 사람이 과연 무엇을 위해 싸웠나’에 대한 의심, 생각을 하게 만들고 소시민이 스스로 성찰하게 하는 얘기로 이 영화를 완성시켜 준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그는 ‘인간쓰레기’인 포주들을 죽이고 자신의 손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자신의 머리를 겨누며(사진 11) 미소를 짓는다. 그의 미소에선 천사 같은 순진성과 악마 같은 잔인성이 공존하며, 여기까지 트레비스가 보여주었던 망상과 행동은 위기에 빠진 전통적인 미국적 가치를 회복하고자 하는 욕망의 징후이자 절망적인 시도라고 볼 수도 있다.
바깥세상과 단절된 채 억눌리고 비틀린 한 외로운 인간의 내면적 광기를 탐색하면서, 베트남 전쟁 이후 영웅이 존재할 수 없는 세계에서 집단적인 정신분열증에 시달리는 미국 사회의 병폐를 담고 있는 두 영화를 통해 단순히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만 느껴져서 처음에는 느끼지 못하였던 것, 전쟁 이후 국가를 위해 자신은 내어 바친 개인조차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회로 돌아온 인물들의 외로움이 이제야 조금은 감응되는 듯하다.
<택시 드라이버>는 고독감과 좌절감으로 망상에 빠져든 한 퇴역한 군인의 모습을 통해 70년 미국 사회가 앓고 있던 베트남 전쟁 후유증을 탁월하게 그려낸 사회 심리 드라마이지만 기존의 영웅물에만 적응하고 있었던 나에게 기존 영웅물들과는 다른, 비도덕적이고 문제 있는 인물을 그대로 표현한 인물설정으로 적잖이 당황하게 했다. 영웅주의를 비판하고 미국이 가지고 있는 폭력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필름 누아르의 표본의 영화임을 볼 수 있었다. 어쩌면 <택시 드라이버>가 서부극에서 필름 누아르가 되기 전에 이미 <수색자>는 서부극의 형태를 한 필름 누아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