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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극T AI와 극F 로맨스의 도킹
  • 영화 '만추' 이후 13년 만에 스크린으로 돌아온 김태용 감독의 선택은 AI(인공지능)이다. 전작들에게서 섬세하게 그려냈던 감성과 정반대 느낌이 강한 AI는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신작 '원더랜드'가 어떤 느낌인지 대중에게 공개되기 전까지 호기심을 유발했다.  

     

    스펙터클을 연상케 하는 AI 소재는 '원더랜드'를 만나면서 따스한 느낌을 준다. 김태용 감독의 영화답게 진솔함과 정교함, 그리고 감성적이면서 지적인 느낌이다. 전작인 '가족의 탄생', '만추'로 담아낸 감수성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죽은 사람 혹은 죽음에 준하는 사람을 인공지능으로 복원하는 영상통화 서비스 '원더랜드'를 통해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만나는 이야기가 이 영화의 큰 줄거리다. 이에 따라 어린 딸 지아에게 자신의 죽음을 숨긴 바이리(탕웨이), 깨어나지 못하는 남자친구 태주(박보검)를 복원해 행복한 일상을 보내는 정인(수지), '원더랜드' 서비스 플래너 해리(정유미)와 현수(최우식) 세 갈래로 갈라진다.

     

    '원더랜드'는 각기 다른 에피소드를 병렬한 뒤 '가족'을 통해 인간과 관계를 탐구했던 '가족의 탄생'처럼 3개의 에피소드를 전하면서 AI에 스며든 인간과 관계를 들여다본다. 그러면서 죽음이 무엇이고, 죽음은 인간관계를 종결시키는 것인지, 가상으로 유지되는 관계도 진짜인지, 관계는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지 등 다양한 질문을 던진다.

     

     

    다양한 주제를 담아내고 있어 철학적인 내용일까 생각되지만 '원더랜드'의 기본 바탕은 로맨스, 바로 사랑이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냈지만 계속 사랑하고 싶은 마음에 대해 말한다. 엄마와 딸, 연인 등 인위적으로 이어가는 사랑을 표현하다가 발생하는 혼란, 혼란 속에서 피어난 사랑의 개념, 이를 통해 발견한 새로운 사랑의 방식,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남아있는 공허함, 그렇게 왜곡되는 사랑이다. 단순하게 에피소드를 늘어놓는 것이 아닌, 각 이야기 속 캐릭터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상당히 디테일하게 설정해 놓은 것이다.

     

    '원더랜드'는 AI 소재로 만들었던 명작들의 영향을 받았는지 군데군데 비슷한 느낌을 준다. 결국 이 영화는 멜로로 다가오면서 생각할 거리를 생성한다. MBTI로 표현하자면, 극T와 극F가 적절하게 섞였다. 치밀하게 설계한 김태용 감독의 연출력이 돋보인다.

     

    하지만 '원더랜드'는 관람하는 관객의 성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것이다. 감수성이 풍부하다면 영화가 전하는 사랑의 온기에 쉽게 동기화되겠지만,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이들에겐 '원더랜드'를 보고 난 뒤, 실망할 수도 있다.

     

    또 다른 아쉬운 점은 '원더랜드'의 공개 시점이다. 원래 개봉 시점이었던 2021년이나 2022년에 공개됐다면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겠지만, 코로나 팬데믹 이후 AI 기술이 급성장하는 2024년에 공개하기엔 타이밍이 늦은 감이 있다. 그리고 깊이감보다는 넓은 폭을 선택해서인지 러닝타임 113분 안에 다 담아내다 보니 관객들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동력이 부족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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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섬뜩한 감시자, <그린 나이트>
  •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린 나이트 The Green Knight, 2021

    미국 외, 판타지 외, 130분

    감독: 데이빗 로워


    나의 섬뜩한 감시자, <그린 나이트>


    우린 가끔 '어떻게 살 것인가'와 '어떻게 죽을 것인가'란 두 물음 사이에서 방황한다. 삶과 죽음은 늘 함께 다니는 친구이지만, 현실에서 죽음은 우리에게 언제나 목적을 잃고 떠도는 방랑자였으면 하니까. 누군가에겐 길고 누군가에겐 짧은 어둠을 뚫고 나오면, 두 물음표가 사실은 하나의 느낌표였음을 깨닫는다. 이내 스스로 다시 묻게 된다. "난 이 세상을 살다 갈 나만의 주체적인 방식과 길을 갖고 있는가!" <그린 나이트>는 이 무시무시한 질문을 위해 탄생한, 매력적인 동시에 무서운 걸작이다.    

     

    주인공 가웨인은 뭐 하나 자의로 결정한 게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아서왕의 조카로서, 왕의 자리에 오를 기회가 있는 자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명예와 무용담도 없다. 그는 수많은 전쟁 속에서 생과 사의 경계를 제집 드나들듯 했던 기사들과 함께 어울릴 수 없는 '어린애'다. 그렇다고 가웨인이 기사가 되고 싶어 하는 가? 아니다. 현재로서 그에겐 애인 에셀의 따뜻한 품과 술만 있으면 된다. 물론 그는 자신이 해야 할 몫을 잘 알고 있는 눈치 빠른 자다. 하여 최대한 모른 척하고 편안하게 살고 싶은, 말 그대로 '어떠한 준비도 하고 싶지 않은' 어린 가웨인으로 살고자 한다.


    출처: 영화 <그린 나이트> 스틸컷, 다음

    자신의 이야기를 묻는 아서왕에게 말씀드릴 이야기가 없다며 멋쩍은 표정을 짓는 가웨인.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에피소드가 하나도 없는 왕의 핏줄, 아니 한 인간. 그건 곧 자기 삶을 치열하게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 영화는 자신이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자가 '무용담이 없는 왕의 핏줄'이란 결핍을 덥석 받아들이는 순간을 포착한다. 반드시 걸릴 수밖에 없는 덫을 놓고, 그가 어리석은 선택을 하길 끈질기게 기다결과다. 

    가웨인의 손에 들린, 피 묻은 아서왕의 엑스칼리버. 그 검에 참수당한 그린 나이트는 자신의 잘린 목을 들고 "1년이다."란 말을 남긴 후 유유히 떠난다. 어린 가웨인은 다들 가진 전설적인 무용담을 얻기 위해 그린 나이트의 게임 조건을 승낙했었다. 그러나 게임의 승자가 됐음에도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빠르게 정리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 원탁의 기사들이 보내는 박수와 함성을 들으며 자신이 눈 깜짝할 사이에 운명의 소용돌이에 휩쓸려버렸단 직감만 가질 뿐이다. 어떻게 살 거란 결정을 미루고 또 미뤄왔던 그는, 단 한 번의 감정적 충동을 이겨내지 못 대가를 치러야만 다. 1년 동안 가웨인의 일격은 노래가 되고, 시가 되어 나라 전체로 퍼져나갔다. 다시 돌아온 크리스마스. 더는 어린애로 살 수 없는 현실을 직시한 가웨인은 자신의 즉흥적이고 가벼웠던 행동이 불러올 비극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가웨인의 다리를 움켜쥔 덫은, 자의든 타의든 상관없이 우리의 발목을 잡고 뒤흔드는 초자연적인 힘과 같다. 그건 우리가 선택한 길인 걸 알면서도, 때론 신의 횡포라 믿고 싶게 만드는 '운명'이다. 죽음이란, 이미 정해진 결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따라 삶의 가치와 의미는 달라진다. 하지만, 우리의 가웨인은 죽음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따라서 그의 운명은 녹색 기사, 일명 '그린 나이트'와의 독대 말곤 없다. 


    출처: 영화 <그린 나이트> 스틸컷, 다음

    1년은 짧았지만 빛을 집어삼키며 어둠을 낳는 이끼가 가여운 가웨인의 마음을 잠식하기엔 충분했다. 눈이 내리고,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왕은 그에게 그린 나이트를 찾아갈 것을 권한다. 그는 가웨인이 위업을 달성할 것을 원했고, 그 목표를 위해선 반드시 목숨을 건 모험이 전제되어야 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가웨인은 1년이란 시간 동안 내면 깊숙이 깔린 이끼가 뿜어내는 두려움을 온전히 받아들이지도, 이겨내지도 못했다. 그는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까 봐 초조하기만 한, 여전히 자기 삶에 대책 없는 인간이었다. 

     

    어머니가 주술을 걸어 만든 녹색 허리띠와 연인 에셀이 준 사랑의 증표(방울), 그린 나이트가 남긴 도끼를 갖고 긴 여정에 오른 가웨인. 크리스마스 날에 녹색 예배당에서 자신이 1년 전 그린 나이트의 목을 벤 것처럼 똑같이 목을 내어주면 되는 게임. 단순한 게임일 뿐이지만, 그의 소극적인 삶의 태도를 바꿀 절호의 기회다. 가웨인은 다섯 가지의 시련(기사의 덕목)을 맞닥뜨린다. 잘 와닿지 않는다면 왕, 기사, 왕위, 명예 등 영화가 제시한 (인간의 가치를 명예로 내세운) 특수한 시대 상황에서 한 발짝 물러나서 바라보자. 가웨인이 겪는 고통이 우리가 매일 밤잠을 설친 이유와 같다는 걸 금세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삶은 고난과 선택의 연속이다. 선택과 책임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순간 우린 인간답게 살 수 없다.

    그 말은 인간답게 죽을 수도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린 나이트>는 가웨인이 이를 깊이 깨우치길 바란다.


    출처: 영화 <그린 나이트> 스틸컷, 다음

    사기꾼 소년에게 베푼 작은 친절을, 배신으로 돌려받은 가웨인은 처음으로 극한의 순간을 경험한다. 자신이 가진 모든 걸 빼앗기고 온몸이 묶인 그를 중심으로, 카메라가 360도로 회전하자 해골로 싸늘한 시체가 돼버린 가웨인이 등장한다. 이후 카메라는 다시 반대로 회전해 사력을 다해 떨어진 칼로 기어가는 가웨인을 보여준다. 생을 향한 기와 집착이 상반된 두 장면은 교차로 인해 더 강력한 의미를 전달한다. 힘겹게 죽음의 끝에서 벗어난 그를 보며, 우린 언제든 내 삶을 끝낼 수 있는 건 '내 인생의 주인인 나, 자신'밖에 없음을 다시금 유념할 수 있다. 두려움과 공포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자도 자기 자신뿐이다.


    가웨인은 마침내 가장 나약한 상태 고난의 길을 걷는다. 성 위니프레드의 시험을 통과해 도끼를 되찾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우와 동행다. 미지의 존재(거인)와의 만남에선 여우의 도움으로 자신의 길을 잃지 않는다. 쉼터를 제공해 자신의 발을 묶은 버틸락성 성주에겐 잡혔던 여우를 돌려받고, 성주의 아내에겐 어머니의 허리띠를 받는다. 얼핏 보면, 그가 다섯 가지의 관문을 잘 통과한 것 같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그는 다섯 관문을 통과하면서 지나치게 감정적이었고 중심이 흔들렸으며, 원초적인 본능에 무릎을 꿇기도 했고, 어쩔 줄 모르는 상태에서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하기도 했다. 그는 크리스마스 당일까지도 두려움에 떨고 있는, 하지만 반드시 아서왕의 기사가 되어야만 하는, 미약한 존재였다. 


    출처: 영화 <그린 나이트> 스틸컷, 다음

    성 위니프레드의 머리를 찾아준 건, 이후 똑같은 신세가 될 자기를 향한 연민과 동정의 읍소였다. 성주와 한 '획득물 교환 게임'에선 호의를 받았음에도 아무것도 내어주지 않았고, 오히려 에셀의 얼굴을 한, 성주 아내의 유혹에 넘어갔다. 결전의 날 아침엔 그녀에게서 녹색 허리띠에 걸린 마법(허리띠를 하고 있으면 어떠한 외상도 입지 않는) 얘기를 듣고, 유일하게 꿋꿋이 지켜왔던 사랑의 지조마저 굽혔다. 그린 나이트의 도끼에 잘릴 자신의 목을 보호하기 위해서 말이다. 성주 아내의 비난에 정신이 번쩍 든 가웨인. 그는 집으로 돌아가자는 여우의 마지막 유혹을 뿌리치고 녹색 예배당에 들어선다. 왜? 여기까지 와서 그냥 되돌아갈 수는 없으니까. 그는 이미 자신의 한계를 절감했다. 아서왕 앞에서 아무런 성과 없이 무릎을 꿇고, 이끼로 더럽혀진 기사 작위를 받을 수 없었다. 말하는 여우는 신의 뜻이 아니라 가웨인이 은연중에 남겨둔 그의 여지, 도망갈 구멍이었다.


    녹색 예배당에서 자신을 1년 동안 기다린 그린 나이트를 보며 가웨인은 비로소 삶의 끝에 다다랐음을 깨닫는다. 운명의 시간, 그린 나이트는 무릎을 꿇은 가웨인에게 말한다. "자네가 했던 것처럼 한 번 내리치지." 그러나 여전히 죽음이란 공포에 휩싸인 가웨인 정말 이게 끝이냐고 절규하며 되묻지만, "그럼 뭐가 또 있나?"란 차갑고 날 선 대답만 듣는다. 그래, 죽으면 끝이다. 무엇이 더 생의 공간에 남아있을까, 역사? 명예? 솔직해지자, 그런 건 모두 남은 자, 산 자들을 위한 위로와 희망의 노래이며 그들의 몫이다.


    출처: 영화 <그린 나이트> 스틸컷, 다음

    "안돼, 죄송합니다!!"

    왕의 후계자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맥 빠지는 말 한마디만 녹색 예배당에 남긴 채 가웨인은 도망친다. 이후 아무렇지 않게 집으로 돌아와 모든 이의 보살핌을 받아 건강을 회복한다. 왕에게 기사 칭호를 받고, 죽은 왕을 대신해 새로운 왕위에 오른다. 사랑했던 연인 에셀에겐 돈 몇 푼으로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아들을 빼앗고 그녈 버린다. 사랑을 헌신짝처럼 내던진 그는 신분이 확실히 보장된 왕비를 얻고, 사랑 없는 결혼생활을 택한다. 수없이 이웃 나라와 전쟁을 하고, 전쟁에서 아들을 잃는다. 마지막 왕국마저 적에게 함락되고, 그는 홀로 남아 그동안 자신을 지켜왔던 녹색 허리띠를 제거한다. 그린 나이트에게 도망친 이후로 일어난 비극은 전부 선택의 결과이자 책임이란 걸 가웨인은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의 삶은 주인 잃은 괴물의 폭주로 망가졌고, 악착같이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던 '어른 가웨인'의 이야기는 실패다. 쿵! 마침내 가웨인의 목이 잘려 바닥에  떨어진다. 그 움직임이 너무도 간결해 슬픔과 연민을 느낄 겨를조차 없다대신 초점을 잃은 그의 동공이 읊조린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다시 녹색 예배당. 가웨인은 그린 나이트 앞에서 눈을 번쩍 뜬다. 도망친 자의 말로를 보고 온 그는, 망설임 없이 녹색 허리띠를 제거한다. 달라진 그의 얼굴. 가웨인은 당당히 그린 나이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말한다. "이제 준비됐다!" <그린 나이트>의 첫 장면과 대비되는 순간이다. 스스로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고 실토하는 가웨인이 변화한 것이다. 그린 나이트는 그의 말에 미소를 짓는다. 잘했다 격려까지 한다. 그러나 그린 나이트의 손에 여전히 들린 도끼. "이제 네 머릴 가르마." 가웨인은 자신의 결함을 정면으로 마주했지만, 애석하게도 그에겐 어리석었던 그가 선택한 결과가 남아있었다. 그린 나이트와의 게임이 아직 끝나지 않은 거다. 게임을 끝낼 방법은 성공 아닌 실패, 단 두 가지 옵션뿐이다. 정도란 없는상승과 하강으로 우리 인생의 굴곡을 책임지는 희극과 비극처럼.


    출처: 영화 <그린 나이트> 스틸컷, 다음

    <그린 나이트>는 처음으로 자기 삶의 주인을 찾는 데 성공한 가웨인의 목에 다시금 도끼를 들이밀며 막을 내린다. 가웨인은 이제 막 한 걸음을 뗐으며, 그의 이야기는 계속될  예정이다. 그 힘은 어디서 왔을까. 바로 그의 두려움인 그린 나이트에게서 발휘됐다녹색 기사는 가웨인이 스스로 극한의 공포심에 휩싸인 채 만들어낸 존재였다. 지금까지 가웨인은 내면의 자아와 싸운 셈이다. 이후로도 그는 삶을 계속 살아야 하기에 또 선택하고, 그 결과를 받아들일 것이다. 그린 나이트 역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자기 주인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우직하게 기다리겠지. 그게 제대로 사는 방식이니까.


    영화는 처음부터 왕좌에 앉은 그의 머리를 불태우며 강력하게 말했다. "이 영화는 왕의 이야기도, 왕을 노래한 이야기도 아니다."라고. 그렇다, <그린 나이트>는 왕이 아닌 죽음 앞에 놓인 인간, '가웨인'의 여정을 지켜본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한다. 어떻게 자기 삶을 살고 있는지, 내일을 위해 치열하게 살고 있는지, 계획되지 않은 일과 새로운 일에 여전히 두려움을 느끼는지, 선택의 순간마다 그린 나이트를 만났는지, 이후 어떻게 죽음의 선로에서 빠져나와 다시 살아남고 있는지.


    인간은 죽음이 찾아오기 직전까지 자신만의 목적과 가치를 세우고 이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얼마든지 잔인한 게임을 피하지 않고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이는 곧 나의 진정한 삶이 되고, 나의 유일한 죽음을 안내할 표지판이 된다<그린 나이트>는 이를 확실하고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마지막 한 장면까지 모든 힘을 짜내 완성했고, 목적을 달성했다.


    혹여라도 철학적이고 난해한 이야기에 파묻힐까 불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린 나이트>는 가웨인의 이야기를 쏙 빼놓고 봐도 눈과 귀를 황홀하게 하는 포인트를 무수히 갖고 있다.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으로 무장한 영상미와 장엄한 기운을 내뿜는 음악에만 집중해도 좋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가웨인의 여정에 동행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그의 무용담 곳곳에 뿌려놓은 <그린 나이트>만의 향기가 너무나 매혹적이라 일부로 지나치기도 어려울 거다.)


    가웨인의 새로운 선택을 앞둔 채 극장에서 돌아선 순간, 섬뜩함에 사로잡히더라도 당황하지 말자.

    자기 내면의 감시자, 그린 나이트와의 만남이 번뜩! 떠오른 것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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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존하는 삶의 공포를 뒤로한 마지막 인사!
  • “신세(身世) 지기 싫다!” 나이 들면 자식들이나 손아랫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형식적으로 내뱉는 경우도 있지만, 이 말은 아직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니 걱정 안 해도 된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시니어들이 가진 공포 중 하나는 바로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삶일 것이다. 더 이상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열패감과 두려움은 아래 세대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다. 어떻게 단정 짓냐고? <소풍>을 보면 안다. 극 중 주인공들은 이 두려움과 싸우며, 마지막 결단을 내리기 때문. 영화는 신세 지기 싫어하는 노인들의 마지막 몸부림과 그 선택을 따라간다.

     

     

     

     


    요즘 은심(나문희)은 걱정이 많다. 파킨슨병이 날로 심해지고, 현실인지 꿈인지 돌아가신 엄마가 자꾸 눈앞에 보인다. 이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나밖에 없는 아들 해웅(류승수)은 돈 문제로 속을 썩인다. 이때 고향 절친이자 사돈인 금순(김영옥)이 집에 찾아오고, 이들은 오랜만에 고향인 남해로 향한다. 부모의 죽음 이후 고향을 떠난 지 오래된 은심은 하나둘씩 이곳의 추억을 음미하던 중, 과거 자신을 짝사랑하던 태호(박근형)를 만난다. 

     

     

     

     


    <소풍>은 제목이 갖고 있는 중의적인 의미를 그대로 옮긴 듯하다. 천상병 시인의 ‘귀천’ 중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이란 소절처럼, 이들의 고향 나들이는 그 자체로서의 오랜만에 떠나는 소풍이자, 생의 마지막을 함께하는 소풍이다. 젊은 시절 열심히 살아온 후, 노년이 되어서야 누리는 이 소풍의 분위기는 오랜만에 느끼는 설렘과 즐거움, 따뜻함이 가득한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부분이 부각되는 건 생의 마지막이라는 지점에 있다. 

     


    영화는 명랑한 분위기 속에서도 노인이 겪는 신체적 아픔을 즉시 한다. 파킨슨병에 의한 손 떨림은 물론, 허리가 아파 거동 자체를 못하는 모습, 뇌종양 등 질병으로 인한 고충 등을 가감 없이 전한다. 특히 금순이 허리가 아파 움직이지 못하고 소변을 실례하는 장면은 적지 않은 충격을 전한다. 이처럼 노인들의 치부를 전시하는 측면도 없지 않지만, 이들의 아름답고도 행복한 짧은 여행이 곧 마무리될 예정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신세 지는 일 없이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 삶을 마감하겠다는 이들의 다짐을 굳건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존엄사라는 뜨거운 감자를 수면위로 올려놓은 영화는 윤리적인 잣대가 아닌 당사자들의 고통과 공포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감독은 중반부에 은심과 금순의 미래를 보여준다. 자식이 걱정할까봐 병을 숨기고 살아온 친구의 죽음은 은심의 미래를, 요양병원에서 정신이 온전치 못한 친구가 죽은 듯 사는 모습은 금순의 미래를 보는 듯하다. 이 장면은 현시대를 살아가는 노인들의 모습이기도 하면서 노인들이 가진 고통과 공포다. 두 친구는 이런 공포에 휘감겨 살다가 가느니, 차라리 존엄을 택한 것. 후반부는 이들의 존엄 투쟁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다소 아쉬운 지점은 이 문제의식이 개인만의 문제로 그친다는 점이다. 고령화 사회에 접어드는 시점에서 노인들이 겪는 다수의 문제를 개인이 감내하고 존엄으로서 해결하는 과정에서 시각 자체가 이들에게만 국한된다. 같은 시기에 개봉한 <플랜 75>의 경우 고령화 사회 문제를 사회적 시각으로 넓혔던 것에 비해, <소풍>은 그 부분이 다소 약하다. 물론, 은심과 해웅 사이에 빚어진 중산층 가족의 민낯, 리조트 개발 위기에 놓인 시골 마을 등 가족 및 사회로 눈을 돌리긴 했지만, 이 부분마저 두 주인공이 처한 상황을 부가적으로 설명하는 구실로만 작용한다. 더불어 특별함 보단 안전함을 택한 듯 너무나 밉지만 그럼에도 도와주는 어미의 모습, 그 모든 게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귀결되는 이야기는 기시감을 느끼게 한다. 

     

     

     

     


    그럼에도 이 작품을 지켜보게 하는 건 나문희, 김영옥, 박근형 등 노배우들의 연기다. 자신의 이름을 지우고 실제 은심, 금순, 태호로 살아온 것처럼 느껴지는 이들의 존재감은 영화의 빈 공간을 채우고도 남는다. 특히 세 배우는 현시대를 살아가는 80대 노인들의 고통과 아픔을 연기로 승화시킨다. 여기에 요양병원에 갇혀 사는 이들의 친구 청자 역에 최선자, 은심을 질투하는 맹희 역에 이용이, 마을 터줏대감 영배 역에 한태일 등 스테레오 타입의 역할이지만 각자 자신이 맡은 연기를 수행하는 노배우들의 연기 또한 영화에 힘을 싣는다. 

     

     

     

     


    배우들의 연기만큼이나 큰 힘을 발휘하는 건 임영웅의 ‘모래 알갱이’다. 영화를 위해 만든 곡은 아니지만, 마치 이 영화를 위해 탄생한 곡처럼 은심과 금순의 이야기에 잘 스며든다. “나는 작은 바람에도 흩어질 / 나는 가벼운 모래 알갱이 / 그대 이 모래에 작은 발걸음을 내어요 / 깊게 패이지 않을 만큼 가볍게” 아등바등 가열차게 살아온 삶을 돌아보며, 누군가에게 신세 지지 않고 의존하지 않고, 모래 알갱이처럼 홀연히 떠나며 건네는 이들의 인사. 이 노래와 함께 마주해보길 바란다.  

     

     

     

    사진 제공: 롯데엔터테인먼트 

     

     

     

    평점: 3.0 /5.0
    한줄평: 의존하는 삶의 공포를 뒤로한 마지막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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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울메이트>는 왜 소설이 아닌 그림을 선택했을까?
  • 반가웠다. 그리고 궁금했다. <소울메이트>가 원작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의 어떤 부분을 이어받았고, 어떤 부분을 달리 가져갔을까? 그 답을 찾듯 민용근 감독이 연출을 맡고 김다미, 전소니가 출연한 <소울메이트>를 확인했다. 제주도를 배경으로 풋풋하고 싱그러운 그 시절 소녀들의 사랑과 우정이 가슴에 와닿았다. 그리고 원작에는 없는 사진 같은 그림에 마음을 빼앗겼다. 감독은 왜 그림을 선택했을까? 

     

     

     

     

    1988년생 두 소녀 미소(김다미)와 하은(전소니). 서로 성격은 다르지만 곁에 없으면 안 될 둘도 없는 친구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영원이란 건 없나 보다. 하은이에게 첫사랑 진우(변우석)가 생기면서 이들은 서서히 다른 길을 간다. 자유분방한 성격의 미소는 제주도를 떠나 도시로 나가 살고, 차분한 성격의 하은은 고향에 남아 안정된 삶을 꾸린다. 성인이 되어 오랜만에 만난 이들은 함께 여행을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너무 달라진 서로의 모습을 확인하고, 기약 없는 이별을 한다.

     

     

     

    태생적으로 <소울메이트>는 원작과 비교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녔다. 민용근 감독도 이를 의식했는지 원작과 다른 방식으로 첫 포문을 여는데, 바로 그림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극사실주의 초상화다. 원작은 출판사 직원이 칠월(마사순)이 쓴 인터넷 소설 판권을 구매하기 안생(주동우)을 만나 이야기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소울메이트> 또한 인터넷 소설이 아닌 초상화로 변경해 같은 맥락으로 진행한다. 두 영화 모두 연락이 안 된다는 이유로 각각 안생과 미소를 만나지만 당사자를 모른다는 답변만 오간다.

     

    소설과 그림 모두 이들의 추억 여행을 떠나게 하는 매개체로 사용된다. 다른 부분이 있다면 원작은 소설처럼 우리가 몰랐던 칠월과 안생의 지난한 인생 스토리를 들려주고, <소울메이트>는 이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마주하되, 그림처럼 찬란하고 순수했던 이들의 순간과 감정을 전한다. 감독은 이젠 사라진 과거의 모습과 이미지를 복원시키는 것에 초점을 맞추며, 사랑과 우정 사이에 놓인 이들의 청춘을 되살아나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영화 초반, 미소와 하은의 빛나는 10대 시절은 청춘을 떠올리게 하는 영상미로 가득하다. 청춘을 상징하는 여름이란 계절, 푸른 바다, 돌담길, 숲길 등 제주도를 배경으로 청량미 가득한 영상들이 수를 놓는다. 옛 추억을 상기시키는 펌프, 캔모아 카페, MP3, 디카 등등 2000년대 초반을 떠올리게 하는 소품들도 등장하며 감성을 톡 건드린다. 

     

    후반부로 넘어가며 내용상 밀도가 떨어지는 부분이 있지만, 이를 상쇄시키는 건 그림이다. 친구이기 때문에 말하지 못한 열등감이나 질투, 원망 등의 감정을 텍스트가 아닌 그림으로 표현한다. 스케치북, 캔버스뿐만 아니라 벽지에도 그림을 그리며 각 상황에 처한 감정을 전하는데, 이는 원작에서 느끼지 못했던 부분이라 새롭게 다가온다. 

     

     

     

     

    감독이 그린 스케치에 각기 다른 색을 덧칠하며 이 영화를 빛나게 하는 건 역시나 김다미와 전소니다. 이들은 서로 다른 매력을 보여주며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들의 모습을 잘 그려낸다. 청춘영화답게 그 시절 아름다운 10대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은 물론, 미묘하고 위태로운 감정선을 눈빛과 표정으로 잘 보여준다. 동굴에 다녀온 후, 미묘한 감정의 기류가 느껴지는 장면, 부산 여행 저녁 식사 장면, 후반부 욕실 장면 등은 두 배우의 시너지가 빛을 발한다. 특히 너무나 가까워서 너무 잘 아는 친구일수록 상대방을 무너지게 하는 비밀을 알고 있는데, 부산 여행 식사 장면에서 그 부분을 건드리며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모습, 그리고 호텔 엘리베이터를 문을 사이에 두고 헤어지는 모습 등은 이들 사이에 벌어지는 애증의 관계를 감정적으로 잘 전달한다. 

     

     

     

    시작을 그림으로 했듯이 영화의 마지막 또한 딸과 함께 자신이 그려진 초상화를 미소의 모습으로 마무리한다. 미소는 이 초상화를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과거 “똑같이 그리다 보면 마음이 보여”라는 말을 곱씹으며 사진처럼 그림을 그리는 하은이의 마음을 이해했을까? 아니면 삶에서 가장 빛났던 그 때 그 시절을 추억했을까? 그 답은 알 수 없지만 미소는 제주도를 떠나 더 넓은 세상을 여행하는 하은이가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일 것이다. 관객 또한 이들의 사랑과 우정을 보며 과거 찬란했던 순간을 함께 했던 친구들을 떠올리며 그들의 행복을 바라지 않을까?

     

    사진 제공: NEW

     

    평점: 3.0 /5.0

    한줄평: 너와 나의 찬란했던 순간, 한 폭의 그림이 되어 돌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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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더랜드 | 골대 앞까지 잘 가놓고 헛발질
  •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죽거나 식물인간이 된 사람을 인공지능으로 복원하는 '원더랜드' 서비스. 원더랜드의 수석 플래너 ‘해리’(정유미)와 신입 ‘현수’(최우식)는 고객을 만나 요구사항을 확인하고, 서비스를 관리하며 바쁜 일상을 보낸다. 어린 시절부터 인공지능 부모님과 지낸 해리는 원더랜드의 시스템 문제를 조금씩 느끼기 시작하고, 현수는 새로운 의뢰인으로부터 가족의 비밀을 발견한다. 

     

    #2

    사고로 코마 상태에 빠진 남자친구 ‘태주’(박보검)를 원더랜드에서 우주인으로 복원한 ‘정인’(수지). 인공지능 태주와 함께 행복한 일상을 누리던 어느 날, 현실의 태주가 기적처럼 깨어난다. 하지만 정인은 마냥 기쁘지 않다. 그녀는 낯설기만 한 진짜 태주와 자기를 너무나도 잘 아는 가짜 태주 사이에서 헤매며 혼란에 빠져든다. 

      

    #3

    어린 딸에게 죽음을 숨기기 위해 원더랜드 서비스를 의뢰한 ‘바이리’(탕웨이). 그녀는 어릴 적 장래희망이었던 고고학자로 복원되어 사막 발굴 현장에 투입된다. 생전에 딸에게 친구가 되어주지 못한 게 한이었던 그녀는 매일같이 딸과 영상통화를 한다. 하지만 바이리가 노력할수록 가상과 현실의 괴리는 커져만 가고, 그녀는 예상치 못한 오류를 일으켜 서비스를 종료시키기까지 한다.  

     

     

    SF에 도전한 반쪽짜리 용기

    냉정히 말해 한국 영화와 SF의 궁합은 최악이다. 평단과 관객을 모두 만족시키는 경우가 거의 없다. '수박 겉핥기'가 그 이유다. SF 소재는 겉치장에 불과하다. 그 소재가 초래할 인간적, 사회적 딜레마 대신 다른 이야기를 하기 바쁘다. 

     

    작년 여름 큰 실패를 맛본 <더 문>만 봐도 그렇다. 조난당한 우주비행사의 내면을 살피거나 필사적인 우주 생존기를 보여줄 수 있는 소재를 값비싸고 화려한 신파로 소비해 버렸다. <외계+인> 시리즈에서도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장르만의 매력은 찾을 수 없었다. <전우치>를 조금 더 화려하게 포장하는 수단에 불과했기 때문.

     

    김태용 감독의 신작 <원더랜드>는 다르다. 문제를 피하지 않는다. '원더랜드' 서비스가 초래할 딜레마에 용기 있게 맞부딪혀 입체적으로 풀어낸다. 특히 소재가 지닌 감정의 낙폭을 최대치로 끄집어낸 덕분에 <원더랜드>는 한국 SF 영화 중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설정도, 대사도, 전개도. 

     

    다만 한계도 명확하다. <원더랜드>의 용기는 반쪽짜리다. 문제점을 보여주는 방식에 비해 해결법을 상대적으로 덜 고민한 듯하다. 그 결과 인공지능이 초래한 문제는 스케일에 비해 다소 얼렁뚱땅 마무리된다. 그 대가는 크다. 유사 작품들과의 차별성도, 한 작품으로서의 완결성도 모두 잃은 채 익숙한 맛만 남아 버린다. 

     

     

    그러데이션 같은 감성 SF

    "죽었거나 사실상 죽은 사람을 인공지능으로 복원한다." 이 문장만 봐도 원더랜드 서비스가 초래할 딜레마는 쉽게 예측할 수 있다. 현실과 가상, 진짜와 가짜의 경계선을 어떻게 유지할지가 관건이다. 죽은 이를 그리워하는 이용자가 가상 세계와 현실 간의 경계선을 잊거나 넘기 시작할 수 있으니까. 여기에 SF적인 상상력을 한 숟가락 더할 수도 있다. '극도로 발달한 인공지능이 자아를 갖고 현실로 넘어오려 한다면?'

     

    <원더랜드>는 이 경계선을 개발자, 이용자, 인공지능의 입장에서 다각도로 살핀다. 이때 김태용 감독 특유의 그러데이션 같은 접근법이 눈길을 끈다. 영화는 의미심장한 대사나 사건 대신 주인공의 일상 에피소드를 펼쳐 보인다. 주인공의 그리움이 재회의 기쁨으로, 아픔과 원망으로, 마침내 가상과 현실의 부조화 및 갈등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세심히 그려낸다. 관객이 가랑비에 옷 젖듯이 그들의 감정선 속에 스며들 수 있도록.

     

    비주얼 프로덕션에서도 같은 접근 방식을 엿볼 수 있다. <원더랜드>는 현재나 다름없는 근미래를 배경으로 삼았다. 미래라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은 정인이 사는 아파트의 형태나 지하철 내부 모습 정도가 전부다. 그 덕분에 CG가 순간순간 어색하더라도 원더랜드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자연스럽게 배어들 수 있다. 

     

     

    꿈 때문에 더 아픈 현실

    <원더랜드>의 그러데이션은 꿈의 모티브를 반복하는 연출 덕분에 더 아름답게 빛난다. 같은 구도와 상황을 되풀이하되 구체적인 맥락을 바꿔서 감정선의 변화를 디테일하게 보여주기 때문. 예를 들어 영화는 정인이 침대에 엎드려 있다가 잠에서 깨는 모습을 같은 구도로 잡는다. 그런데 일어날 때 정인의 모습은 매번 다르다. 처음에는 인공지능 태주의 전화를 받고 기뻐하지만, 그를 직접 만지거나 느낄 수 없어서 점점 슬퍼한다. 

     

    현실의 태주가 코마에서 깨어난 후에는 정인이 침대에서 일어나는 순간에 두려움마저 깃든다. 처음에는 태주가 깨어난 현실이 꿈이고, 인공지능 태주가 현실일까 두려워한다. 하지만 뇌인지 기능에 아직 문제가 남은 태주가 계속해서 사고를 치자 정인은 인공지능 태주에게 더욱 의지하면서 위화감을 느낀다. 그녀는 원더랜드라는 꿈과 현실이 뒤바뀌기를 바라지만, 오히려 그 꿈 때문에 현실을 더 날카롭게 직시할 수밖에 없다.  

     

    행복한 꿈 때문에 현실이 더 날카로운 이 낙차는 바이리가 공유하는 경험이기도 하다. '성준'(공유)은 바이리에게 속삭인다. 그들의 세상은 현실이 아니라 꿈에 불과하다고. 처음에는 이 대사가 농담처럼 지나가지만, 다시 등장할 때마다 무게감이 달라진다. 바이리의 자아가 점점 커지고 그녀가 진짜 엄마처럼 말할수록, 딸은 엄마를 만나러 가겠다고 떼를 쓰고, 이 광경을 지켜보는 할머니의 가슴은 찢어지기 때문. 

     

    이처럼 <원더랜드>는 꿈과 현실을 거듭 역전시키면서 인공지능이 초래할 존재론적인 문제를 짧은 순간에 감성적으로 인지시킨다. 그러다 보니 한 번 마음의 문을 열면 <원더랜드>의 이야기에는 깊숙이 빠져들 수밖에 없다. 클라이맥스 전까지는 이용자와 인공지능, 모두의 입장에 공감하면서 함께 아파할 수 있으니까. 

       

     

    나이브한 헛발질

    하지만 정작 클라이맥스는 실망스럽다. 이미 무너진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어떻게 다시 바로 세울지 그 방법에 관한 아이디어가 부재했던 모양새다. 축구 경기라면 골키퍼로부터 후방 빌드업은 잘했지만, 정작 상대팀 페널티 박스 안에서의 세부전술이나 약속된 플레이가 없는 셈이다.

      

    모성애가 강해진 바이리가 현실로 나가려고 하자 원더랜드 서비스는 붕괴될 위기에 처한다. 이에 해리와 현수는 바이리를 통제하거나 삭제하는 대신 다른 선택을 한다. 데이터는 한 번 삭제하면 되돌릴 수 없으니 바이리의 선의를 믿고, 그녀의 자유도를 올려주면 문제가 자연스레 해결될 것이라고 판단한다. 

     

    그런데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영화의 완결도를 저해한다. 일단 개연성이 약해진다. 개발자의 선택에 대한 설명이 없다시피 하기 때문이다. 데이터 삭제의 부작용을 언급하기는 하나, 그에 대한 복선이나 암시는 앞선 이야기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 결과 두 개발자는 무능력한 데다가 불필요한 캐릭터처럼 보인다. 바이리의 서사도 모성애를 앞세운 익숙한 신파로 마무리되는 것 같아 긴장감이 역효과만 남는다. 

     

    '신체만 없을 뿐, 자아를 지닌 인공지능을 인간과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도 흐지부지된다. 인공지능의 선의와 이용자의 성찰적 태도에 기대면 된다는 나이브한 결론만 남기 때문이다. SF 세계관을 활용하는 상상력과 용기가 끼어들 공간은 찾아볼 수 없다. 결국 <원더랜드>에는 호아킨 피닉스 주연의 <그녀> 같은 작품으로부터 한 발 더 나아간 부분이 없는 듯하다. 배경이 한국화 됐을 뿐이다.

     

     

    차라리 시리즈였다면?

    물음표가 남는 결말은 감정에 취해 지나친 단점도 다시 보이게 만든다. <원더랜드>는 중반까지 큰 사건 없이 일상을 잔잔히 비춘다. 중반부를 넘어서야 비로소 갈등선이 명확해진다. 달리 말해 주인공의 일상에 감정이입을 하지 못하는 순간, 퍽 지루할 수밖에 없는 영화다. 

     

    문제는 몰입을 깨는 지점이 감정 이입을 돕는 장치만큼이나 산재해 있다는 것. 특히 전체적인 구조와 형식이 아쉽다. 정인, 바이리, 그리고 해리와 현수의 이야기는 따로 전개될 뿐만 아니라 중심이 되는 포인트도 다르다. 정인의 이야기가 씁쓸한 로맨스라면 바이리는 눈물겨운 가족 드라마다. 반면에 해리와 현수의 플롯은 코미디에 가깝다. 이 사이를 왔다 갔다 하니 분위기가 엇갈리고 흐름도, 템포도 끊길 수밖에 없다. 

     

    차라리 챕터를 끊어서 옴니버스 영화나 OTT 시리즈로 만들면 어땠을까 싶다. 서로 다른 주인공의 이야기를 3개의 챕터로 나눈 뒤, 마지막 챕터에서 후반부 클리이맥스를 다루는 식으로. 그러면 원더랜드가 사람과 사회에 끼치는 다양한 영향력을 더 밀도 있게 다룰 수 있었을 테니. 서로 다른 감정선을 더 깊이 맛보고 나면 클라이맥스의 폭발력도 더 커졌을 것이고.  

     

     

    캐릭터 대신 배우만 보인다

    또 애매한 비중을 지닌 채 사라진 몇몇 캐릭터마저 살릴 수 있었을지 모른다. 공유가 연기한 성준이 대표적이다. 그는 원더랜드 서비스 안에서 관리자 겸 안내자 역할을 하는 인공지능이다. 역할은 <오징어게임> 양복남과 비슷하지만, 단순 특별출연은 아니다. 바이리에게 중요한 깨달음을 주는 조력자에 가깝다.

     

    하지만 중요도에 비해 성준 캐릭터는 미완성 같아 보인다. 바이리와 처음 만날 때나, 그들이 데이트를 즐기는 모습을 보면 성준에게는 조금 더 의미심장한 역할이 있는 듯하다. 원더랜드에서 인공지능끼리 새로운 인생을 즐길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과 같은. 그런데 다른 캐릭터의 서사를 풀어내기에도 시간이 촉박한 나머지 성준의 이야기는 잘려 나간 느낌이 강하다. 

     

    결국 <원더랜드>에서는 헛헛한 감정과 눈물, 그리고 섬세하고 현실적인 연기력을 뽐낸 수지 같은 배우만 남고 만다. 이야기의 깊이도, 메시지도, 장르적인 쾌감도 마지막 순간에는 증발되어 원더랜드로 떠나고 만다. SF다운 소재와 섬세한 접근법이 빛난 만큼 <원더랜드>의 마무리는 더욱 허망하다.  

      

     

    Acceptable 무난함

    깊이 빠져들다가 어이없이 깨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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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편적이지만, 그래서 특별한 K 엄마의 독립선언!
  • 살고 있는 집이 내 집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적 있나? <다섯 번째 방>의 주인공인 김효정씨는 그렇다고 말한다. 3대가 사는 집에서 겪은 30년간의 시댁살이, 여기에 남편과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삶 속에 놓인 그녀는 안타깝게도 자기만의 공간이 없다. 이 부재는 눈덩이처럼 커져 본인 자체가 내 집이라는 개념을 부정한다. 알게 모르게 김효정씨와 비슷한 삶을 산 엄마들은 이 부분에 고개를 끄덕일 듯. 이같은 보편적인 이야기를 다룬 이 다큐멘터리는 보통의 K 엄마의 특별한 독립 과정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것도 딴 사람이 아닌 실제 딸이.  

     

     

     

    김효정씨가 사는 집은 시부모 소유의 2층 양옥집이다. 여기서 30년 동안 시부모, 남편, 그리고 3명의 아이와 함께 살았다. 살고 있으니 내 집이라 생각하며 살아왔던 그녀지만, 이게 바보 같은 자기 합리화라는 걸 뒤늦게 깨닫는다. 계기는 남편의 소파 사업이 실패하고, 전문 상담가로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 역할을 하면서다. 일을 하면서 자신만의 업무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절실하게 필요한 그녀는 자신만의 방이 필요했고, 힘든 설득 후 2층에 그 공간을 마련한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남편은 불쑥불쑥 그곳을 침범하는 일이 잦아지고, 급기야 실소유주인 시어머니가 자신의 딸에게 집 지분을 상속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는다. 그녀는 가장임에도 자신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은 이 집과 가족에게 서운함을 느낀다. 그리고 비로소 독립을 선언한다.

     

     

     

     

    날 돌봐주는 사람은 이 집에 아무도 없어.

     

    김효정씨의 이 말 한마디가 다큐의 시작이었다. 엄마의 뼈 있는 말을 듣는 순간 카메라를 든 전찬영 감독은 지난 2018년부터 2022년까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너무나 몰랐던 엄마를 카메라에 담았다. 단편 <바보 아빠> <집 속의 집 속의 집> 등 아빠의 이야기를 담은 전작들과 달리, 감독은 이 집에서 위기에 처한 엄마를 보여준다. 보통의 엄마, 가족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보이지 않았던 가족간의 미세한 균열이 보이고, 그 틈 사이로 보이는 진짜 엄마, 아니 자신이 아닌 가족을 위해 자신의 이름을 버렸던 김효정이란 여성을 마주한다.  

     

     

     

    김효정씨가 자아를 찾는 방법은 ‘방’이다. 이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다섯 번째 방’은 비로소 엄마가 찾은 자기만의 공간을 뜻한다. 시댁살이를 하면서 타의로 방을 3번 옮겼고, 자의의 노력으로 2층 방을 사무 및 휴식 공간으로 만든 그녀이지만, 결국 자기만의 공간이 되지 못한다. 사랑하지만 너무나 가까워서 그 공간을 엄마의 방이라 인지하지 못하는 가족들의 침범은 이 공간과 공간의 주인인 그녀를 가만 놔두지 않는다. 

     

    아이러니 한 건 엄마가 가장이 되어 가정을 이끄는 주체가 되었음에도 가족들은 이를 인식하거나 인지했어도 그렇게 행동하기를 꺼린다는 것에 있다. 가부장적 체계에 익숙해져 있는 구성원들에게 엄마는 돈을 버는 가장인 동시에 집안의 살림살이를 도맡아 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엄마가 차려준 밥을 먹고, 설거지도 안 하는 가족들의 모습, 노동을 하고 와서도 집안일을 해야 하는 엄마의 모습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엄마의 독립은 자기 공간을 갖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도 보인다. 자신의 욕망을 잠재우고 가족을 위해 헌신했지만, 알아주는 이 하나 없이 가장의 역할까지 부담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그녀의 울분은 후반부로 갈수록 이내 폭발한다. 시어머니에게 집 처분에 대한 울분을 토하고, 친정아버지 장례식에서 술 마시고 소란을 핀 남편에게 그동안 쌓였던 불만을 퍼붓는다. 감정의 파고를 넘나드는 후반부를 보면 전반부는 태풍의 눈 안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모든 집에서 비일비재한 사건처럼 보이는 작품 속 이야기지만, 이 다큐가 조금 특별하게 다가오는 건 뒤늦게라도 가부장적 제도에 용기 내 목소리를 낸 엄마와 이를 카메라로 독려하며 연대의 손을 내민 딸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심리상담사이자 가정폭력 예방 강사인 김효정씨는 많은 이들 앞에서 얘기하는 바를 비로소 실천한다. 견고하게 쌓인 가부장적 제도에 맞서 내는 작지만 강단 있는 목소리는 여성인 딸의 카메라에 가감없이 담긴다. 화려한 카메라 워킹이나 편집 없이 사실적으로 보여지는 엄마의 모습은 그 자체로 큰 울림을 준다. 피하지 않고 부딪히고, 어떻게든 소통하며 합일점을 찾는 그 과정을 결혼 후 30년 만에 처음한 그녀는 비로소 자유를 찾고, 자기 공간을 찾는 동력을 얻는다. 한 명이 희생하면 가족 모두가 편하니까 딸이자 여성임에도 엄마의 책임과 힘듦을 묵인했다 말한 감독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듯 딸로서, 여성으로서 그 누구보다 강한 엄마와 김효정씨의 모습을 오롯이 담는다. 

     

     

    제24회 부산독립영화제 관객심사단상, 제20회 EBS국제다큐영화제 시청자&관객상을 받는 등 <다섯 번째 방>은 보편성의 힘이 강한 작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이야기를 공감케 하는 인물은 악역을 자처하는 아버지 덕분이다. 그의 행동은 자연스럽게 이 집의 문제를 들여다보게 하는 계기가 된다. 엄마, 아빠를 객관화하기 어려웠다는 감독은 최대한 부모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이들을 대하는데, 이 노력으로 아버지는 단순히 문제의 온상으로만 비치지 않는다. 후반부로 가서는 좀 더 입체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이는 이 다큐가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의 가족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보편성을 확보하게 만든다.  

     

    영화를 보면 애정과 애증의 눈빛으로 이들을 바라보는 자기 자신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김효정씨의 인생이자 전찬영 감독의 가정사이며, 우리가 모두 공감하는 삶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사진제공: 씨네소파

     

    평점: 3.5 /5.0

    한줄평: 보편적이지만, 그래서 특별한 K 엄마의 독립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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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퓨리오사가 지켜낸 희망의 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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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자신만의 희망이 있다.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 언젠가 자신을 구원해 줄 그 희망은 삶을 이어나갈 수 있는 힘을 준다. 몇 번이나 찾아오는 절망적인 상황은 삶을 더 이어나갈 힘을 빼놓는다. 더 나아갈 힘이 없다고 느끼는 그 순간, 마지막까지 감추어두었던 희망은 꺼내어들 수 있는 마지막 무기다. 그 희망을 생각하면서 다시 앞으로 나아갈 힘을 조금씩 되찾아간다. 만약 희망조차 없다면 그 삶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있을까. 먹고 자는 문제만 간단히 해결할 뿐, 나쁜 상황만이 앞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2015년에 개봉했던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는 희망을 무기로 꺼내든 이들이 앞으로 나아가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의 퓨리오사(샤를리스 테론)는 자신이 알고 있는 생명의 땅으로 가기 위해 임모탄(휴 키스번)에게 갇혀있던 여성들을 모두 데리고 탈출을 감행한다. 퓨리오사는 모든 여성들의 희망이었고, 그 희망의 여정에 맥스(톰 하디)가 우연하게 끼어들게 되면서 다각도로  전개되는 추격전이 펼쳐졌었다.

     

    이번에 개봉한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는 전편에서 희망의 전사였던 퓨리오사의 성장 서사를 다룬다. 사실 성장 서사라기보다는 그녀가 겪었던 모든 절망들을 보여주면서 그런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과정을 보여준다. 모든 이야기를 다 보고 나면 이 영화의 퓨리오사(안야 테일러 조이)에게 행복한 순간은 어린 시절 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짧은 행복의 기억 때문에 그녀가 수많은 어려움을 견딜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럼 이 영화는 그녀의 어떤 감정들을 전달하면서, 그가 겪었던 수만은 절망들을 보여주고 있을까.

     

    [첫 번째 감정] 퓨리오사의 절망

     

     

    영화의 대부분은 절망으로 가득 차있다. 핵전쟁으로 황폐화된 지구는 끝없는 사막으로 바뀌었고, 그 안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살기 위해 누군가의 물과 식량을 탈취한다.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시대, 이 시기에 아직 푸르름을 간직한 공간이 있었다. 바로 퓨리오사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 그런 곳이다. 이곳의 사람들은 외부인을 강력하게 경계하지만 그 안에서 자급자족하며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다.

     

    퓨리오사가 외부 침입자들을 발견하고 그들에게 납치되면서 그녀의 절망이 시작되었다. 영화 초반 퓨리오사의 엄마가 납치된 퓨리오사의 뒤를 따라가는 길고 긴 추격장면은 절망을 맞이하지 않게 하려는 몸부림이다. 여기엔 두 가지 절망이 섞여 있다. 유일하게 존재하던 푸른 지상 낙원이 외부에 노출되어 버렸다는 것과 그곳 출신 아이인 퓨리오사가 납치되었다는 것이다. 엄마는 끝까지 퓨리오사를 찾기 위해 추적하지만 결국 그 집단의 우두머리인 디멘투스(크리스 햄스워스)에게 붙잡히고 만다. 퓨리오사는 바로 앞에서 엄마가 죽임을 당하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게 된다. 퓨리오사는 행복의 상징인 낙원에서 멀어졌고, 점점 더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녀의 고통은 커진다. 초반의 긴 추격장면은 긴 안전끈이 늘어나가 끊어져버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엄마가 죽임을 당한 후 십여 년이 지난 후, 성인이 된 퓨리오사는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존재였던 잭(톰 버크)을 눈앞에서 잃게 된다. 그 역시 디멘투스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이다. 퓨리오사에게 가장 큰 절망을 선사한 디멘투스는 그저 자신을 귀찮게 한 존재를 하찮게 보고 그저 자신의 재미를 위해 제거해 버렸을 뿐이다. 그렇게 퓨리오사의 절망은 더욱 커지고, 그 절망을 준 존재를 향한 복수심은 더욱 커져만 간다. 영화 내내 디멘투스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압도적인 자동차들로 퓨리오사와 일행을 누르고 파괴한다. 영화는 거대한 디멘투스의 차량이 퓨리오사의 자동차를 짓밟는 모습을 담으며 퓨리오사의 절망을 처절한 액션 장면에 담고 있다. 

     

    [두 번째 감정] 퓨리오사의 분노와 복수

     

     

    절망은 당연하게 분노의 감정으로 바뀐다. 퓨리오사는 임모탄이 지배하고 있는 시타델에 숨어 살면서 분노를 표출할 수 있는 기회를 찾는다.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는 퓨리오사의 분노가 조금씩 쌓여가는 과정을 점진적으로 보여준다. 그 과정은 십여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진행된 것이어서 단번에 폭발적으로 쌓인 것은 아니다. 퓨리오사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복수를 하기 위해서는 꽤 긴 시간이 필요했고, 자기 자신을 단련하고 성장하지 않는다면 복수의 기회조차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말도 극단적으로 줄일 수밖에 없다. 자신의 정체를 최대한 숨기고 시타델의 시스템 속에서 조용히 지내면서 탈출의 기회를 엿볼 수 있는 위치를 노렸다. 결국 수송 트럭으로 탈출을 감행하려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는 않는다. 그 과정에서 만난 잭은 <매드맥스> 시리즈의 모든 남자 가운데 가장 믿을만한 인물이다. 그는 퓨리오사 내면에 숨어있는 분노를 발견해 내고, 그것을 적절히 조절하면서 살아가는 방법을 무심하게 알려주는 인물이다. 

     

    영화 중반부에 잭과 퓨리오사가 무기 농장에서 디멘투스 일행에게 습격을 받는 장면이 있다. 무기 농장의 거대한 탑이 무너지는 가운데 두 사람은 서로를 의지해 그 상황을 겨우 벗어나지만, 그 액션 장면처럼 그 두 사람은 붕괴되고 있었다. 완전히 붕괴되어 버린 퓨리오사는 결국 마음속에 복수만이 가득한 상태가 되어버린다.

     

     

    [세 번째 감정] 모두의 희망이 된 퓨리오사의 희망

     

     

    영화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의 마지막 하이라이트 액션 장면은 영화의 처음과 비슷한 추격장면이다. 이 추격을 하기 위해 퓨리오사는 바퀴가 하나 없는 자동차를 타고 가게 된다. 마치 팔 하나가 없는 퓨리오사의 모습과 흡사해 보인다. 그렇게 추격을 시작한 퓨리오사는 영화의 초반 자신의 엄마가 끝까지 자신을 추적해 왔던 것처럼 끝까지 디멘투스를 추격해 낸다. 그리고 자신의 엄마 그리고 유일한 믿음을 주었던 잭의 복수를 하기 위해 애쓴다. 

     

    사실 이런 복수의 전체 과정에서 퓨리오사는 희망을 잃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어머니가 준 복숭아나무 씨앗 하나를 잊지 않았다. 그녀가 입안에 넣어 보호하는 그 작은 씨앗은 그녀가 지켜야 할 최후의 희망이다. 이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이야기 직후에 벌어지는 내용을 다루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까지 이어서 보고 나면 퓨리오사가 지켜냈던 그 희망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의 희망이 되어가는 과정을 볼 수 있다. 퓨리오사는 그 희망을 지켜냈고, 많은 사람들에게 그 희망의 동력을 나눠주었다. 

     

    영화 속 빌런인 디멘투스의 희망은 무엇이었을까. 사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디멘투스는 희망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인물이다. 또 다른 빌런인 임모탄은 정상적인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희망을 따라가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엄청난 독재력으로 대중을 사로잡아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디멘투스에겐 그런 희망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재미있는 것만 추구하며 삶을 이어온 인물이다. 그가 잭을 죽이는 장면에서 혼잣말로 재미없다고 웅얼거리는 장면에서 그의 그런 태도를 엿볼 수 있다. 퓨리오사는 자신의 희망으로 무작위성, 혼란, 무계획의 대표적인 인물인 디멘투스에게 일종의 형벌을 내린 셈이다. 

     

     

     

    퓨리오사의 서사는 이번 영화로 완성되었다. 앞으로 <매드맥스> 시리즈가 더 이어질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2015년부터 시작된 <매드맥스 사가>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궁금한 인물이었던 퓨리오사에겐 숨겨진 이야기가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이번 영화에도 다양한 액션 장면들이 담겨있고, 한 액션 시퀀스가 꽤 길게 이어진다. 전작을 좋아했던 관객이라면 충분히 만족할만한 프리퀄 영화다. 전작이 액션으로 서사를 완성했다면, 이번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에서는 액션과 음악 그리고 퓨리오사의 성장이야기로 길게 서사를 이어 완성했다. 전편이 직렬로 이어진 영화라면, 이번 영화는 병렬로 펼쳐 다각도로 퓨리오사의 경험과 생각을 전달한다.  퓨리오사의 희망이 어떤 식으로 펼쳐지는지 끝까지 시선을 잡아두는 영화다. 

     

       

    *영화의 스틸컷은 [왓챠]에서 다운로드하였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https://www.notion.so/Rabbitgumi-s-links-abbcc49e7c484d2aa727b6f4ccdb9e03?pvs=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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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질라 마이너스 원 | 괴수물은 합격, 시대극은 불합격
  •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카미카제 파일럿으로 출격한 '시키시마'(카미키 류노스케). 그는 살아남으라는 부모님의 애원에 명령을 지키는 대신 오오도 섬에 비상착륙하지만, 바로 그날 고질라가 섬을 습격한다. 그나마 전투기에 달린 기관총이 유일한 희망인 상황. 그러나 시키시마는 두려움에 빠진 나머지 끝내 사격하지 못하고, 종전 후 일본으로 귀국하는 순간까지 전우를 지키기 못한 죄책감에 괴로워한다. 

     

    고향에 돌아온 후 '노리코'(하마베 미나미)를 만나 새로운 가족을 꾸린 시키시마. 돈이 부족한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전쟁 동안 설치된 기뢰를 제거하는 일에 자원하고, 새로운 동료 '아키츠'(사사키 쿠라노스케), '노다'(요시오카 히데타카), '미즈시마'(야마다 유키)를 만난다. 

     

    그러던 어느 날, 시키시마와 동료들은 파괴되어 뒤집힌 전함을 목격하고, 곧이어 방사능 때문에 더 거대해진 고질라를 조우한다. 이에 시키시마는 결심한다. 고질라를 죽이고, 지긋지긋한 트라우마를 끊어내겠다고. 

     

     

    준수한 첫인상, 찝찝한 뒷맛

    한국에서 가장 찬밥 대우받는 영화 장르를 하나 꼽으라면 당연 괴수물이다. 마찬가지로 인기가 없는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보다도 심하다. 그나마 스페이스 오페라는 꾸준히 관객을 불러 모으고 관심을 환기하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으니까. MCU와 결합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리즈, <듄> 시리즈, 이정재가 출연한 디즈니+ <에콜라이트> 등. 

     

    그에 반해 괴수물은 반등 포인트조차 잡지 못하는 중이다. 봉준호의 <괴물>, 피터 잭슨의 <킹콩>, 길예르모 델 토로의 <퍼시픽 림> 정도를 제외하면 유의미한 흥행 성적을 낸 경우가 많지 않다. 이름값으로는 누구한테도 뒤지지 않을 <고질라> 시리즈도 예외는 아니다. 할리우드가 만든 몬스터버스의 <고질라> 시리즈만 해도 최근에는 100만 관객 돌파도 버거워한다. 

     

    그래서일까? 고질라 시리즈 70주년 기념작 <고질라 마이너스 원>의 국내 개봉 소식은 좀처럼 들려오지 않았다.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비영어권 영화 최초로 시각효과상을 받고, 북미에서만 5,642만 달러를 벌며 역대 북미 개봉 비영어권 작품 사상 3위의 흥행을 기록했는데도. 

     

    그 <고질라 마이너스 원>이 6월 1일에 느닷없이 한국에 상륙했다. 넷플릭스를 통해 접한 <고질라 마이너스 원>의 첫인상은 기대 이상이었다. 괴수물로서의 매력은 출중했다. 괴수물이 흔히 간과하는 인간 캐릭터의 스토리도 몬스터버스가 배워야 할 정도로 탄탄했다. 하지만 <고질라 마이너스 원>의 뒷맛은 그리 개운하지가 않다. 일본이 전범국이라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는 태도가 의심을 자꾸 키우기 때문이다.     

     

     

    괴수물로서는 합격

    괴수물로서 <고질라 마이너스 원>은 합격점을 주고도 남는다. 물론 기술적인 부분은 아쉬움이 없지 않다. 아카데미 시각효과상 수상작이라기에는 어색한 CG가 종종 보인다. 일례로 긴자 습격 장면에서는 고질라가 배경과 분리되는 듯한 부자연스러움이 숨겨지지 않는다. 또 고질라가 방사열선을 내뿜기 전에 등지느러미가 발광하면서 돌출될 때도 미니어처를 조종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고질라의 외형도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할리우드 표 고질라는 동물의 움직임을 본 딴 모델링을 토대로 움직임을 구현했다. 반면에 이번 고질라는 특촬물 느낌을 살리기 위해서인지는 두 발로 직립 보행한다. 할리우드의 자연스러운 CG를 선호하느냐, 아니면 일본의 고질라 시리즈를 오마주 했다고 보느냐에 따라 달리 보일 지점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어색한 CG는 금세 잊힌다. 비록 자주 등장하지는 않지만, 등장할 때마다 고질라의 분위기가 압도적이기 때문. 오오도 섬에서의 첫 조우, 긴자 습격 시퀀스, 바다에서의 마지막 결전까지.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꺾을 수 없는 괴수의 아우라를 제대로 각인시킨다. 가렛 에드워즈의 <고질라(2014)>처럼 아포칼립스적인 분위기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또 고질라가 방사열선을 쏜 후 열폭풍과 검은 비가 이어지는 연출도 인상적이다. 어찌 보면 가장 고질라스럽다. 본래 고질라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과 비키니섬 핵실험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은 존재니까. 모든 <고질라> 시리즈가 핵을 비롯해 인류가 개발한 기술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실제 핵폭발을 보는 듯한 경험은 이 메시지에 다시 한번 힘을 더해준다. 

     

     

    드라마는 기대 이상

    인간 캐릭터들의 서사도 기대 이상이다. 보통 괴수물에서는 인간 캐릭터가 잘 안 보인다. 괴수와 인간을 이어 줄 관계성을 부여하는 데 실패하기 때문. 액션을 보는 쾌감만 남는 반쪽짜리 영화인 경우가 잦은 이유다. <고질라 마이너스 원>은 다르다. 고질라 그 자체보다는 고질라라는 자연 현상을 주인공이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그 덕분에 물리적으로는 대적할 수 없는 괴수와 인간 사이에 갈등 구도가 만들어진다. 

     

    카미카제 파일럿 시키시마는 비상착륙한 오오도 섬에서 고질라를 만난 뒤 간신히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는 기뻐하지 않는다. 두려움에 빠져 전투기 기관총 한 번 쏘지 못하는 사이 다른 일본군들이 고질라에게 무참히 학살당했기 때문. 일본에 돌아온 후에도 고질라는 시키시마를 괴롭힌다. 간신히 새로운 가족과 함께 일상을 재건하지만, 이내 일본에 상륙한 고질라 때문에 그는 사랑하는 이를 잃는다. 

     

    즉, 시키시마에게 고질라는 좀처럼 떨치지 못하는 전쟁에 대한 두려움,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과 PTSD를 형상화한 존재다. 따라서 <고질라 마이너스 원>에는 고질라의 액션을 즐기는 단순한 쾌감 대신 아직 끝나지 않은 자기만의 전쟁을 시키시마가 어떻게 끝내는지 지켜보는 맛이 있다. 다만 후반부 전개는 물음표다. 죽은 아내가 살아 돌아오는 전개처럼 해피엔딩을 위해 부자연스러운 신파를 남발하기 때문. 

     

     

    극우는 아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고질라 마이너스 원>은 흠잡을 데 없는 괴수물이다. 하지만 한 가지 단점이 영화 전체의 인상을 불편하게 만든다. 제2차 세계 대전 직후의 일본이 배경인데도 의도적으로 생략하는 지점이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작품이 극우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고질라 마이너스 원>은 일본군과 정부에 대한 불신과 비판을 드러내면서 군국주의를 비난하고 반전주의, 생명 존중 사상을 강조한다.

     

    전쟁이 조금 더 지속되었으면 좋겠다는 미즈시마의 말에 시키시마가 멱살을 잡을 정도로 분노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그 외에도 군부나 정치인의 입장이 아닌 일반 시민들의 관점에서 전쟁을 조명하며 시키시마의 이야기에 힘을 더한다. 일본군은 카미카제처럼 생명을 경시해 왔지만 고질라와의 전투에서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란다는 노다 박사의 대사, 전쟁 중과는 달리 전투기에 낙하산과 탈출 장치를 달아주는 정비대 모습 등등. 

     

    고질라가 다시 나타날 수 있다는 불길한 암시가 엔딩을 장식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는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을 사로잡은 군국주의 광기가 언제든 고질라처럼 부활할 수 있으니 항상 경계해야 한다는 메시지다. 그러지 못하면 카미카제나 옥쇄처럼 생명을 경시하는 사회를 전쟁 이후 세대도 살아가야 할 테니까.  

     

     

    시대극으로서는 불합격

    하지만 <고질라 마이너스 원>은 마지막까지 근본적인 문제점을 회피한다. 영화는 일본 군부와 민간인을 철저히 분리한다. 도쿄 대공습으로 고통받은 민간인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역사적 책임을 슬그머니 감춘다. 당연히 설득력은 없다. 일본 제국은 식민지 주민까지 징병, 징용한 군국주의 국가였으니까. 고질라 격퇴 작전을 입안한 노다 박사만 해도 일본 해군 소속으로 무기를 개발했는데, 그를 평범한 민간인으로 볼 수는 없다.

     

    그 결과 영화 자체가 피해자 코스프레처럼 보일 여지가 충분하다. 제목부터가 그렇다. '고질라 마이너스 원'이라는 제목은 전쟁 때문에 일본이 제로(0)가 된 상태에서, 고질라가 등장해서 -1이 되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일본이 태평양 전쟁의 가해자라는 걸 고려하면, 피해자의 관점에서 고질라의 습격은 그저 합당한 처벌일지도 모른다. 도쿄대공습을 당하고 원자폭탄을 맞은 게 자업자득이듯이. 

     

    그러나 <고질라 마이너스 원>은 전쟁 이후 일본인의 집단적 트라우마만을 강조하면서 이러한 맥락과 시점을 철저히 외면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질라 마이너스 원>의 해피엔딩은, 특히 과거 식민지 사람 입장에서, 그리 와닿지 않을 수밖에 없다. 일본의 과거사와 절대 떼 놓을 수 없는, 고질라라는 복어를 제대로 요리할 용기까지는 <고질라 마이너스 원>에게 없었던 셈이다.  

     

     

    Acceptable 무난함

    고질라는 훌륭하다. 고질라와 태평양 전쟁을 떼 놓을 수 없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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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잘못 설계해서 대참사가 났네
  • '설계자'에서 빛나는 건 강동원의 '비주얼'이다. 이 말은 즉슨, 영화의 매력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설계부터 잘못해서 결국 대참사가 난 꼴이다.

     

    '설계자'는 의뢰받은 청부 살인을 사고사로 조작하는 설계자 영일(강동원)이 예기치 못한 사건에 휘말리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요즘 개봉한 영화들에 비해 비교적 짧은 러닝타임(99분)인데 배우 라인업은 꽤나 화려하다. 강동원을 비롯해 이미숙, 이무생, 이현욱, 김신록, 탕준상, 이동휘 등 연기로는 날고 긴다는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다.

     

    탄탄한 배우진이지만, 이 영화의 서사와 소재가 문제다. 팀플레이를 예상하긴 했지만, '선수 입장' 급의 구성으로 '영화 제작 시 하지 말아야 할 요소'를 저지르고 말았다. 소재도 마찬가지다. 부패한 공직자, 영혼을 판 기자, 비자금 논란 등 다른 작품에서 숱하게 다뤘던 소재이기에 기시감이 강하다. 그래도 살인 청부업자로 등장하는 강동원은 그나마 신선하긴 했다.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스릴러 장르의 생명인 긴장감이 점점 느슨해지고 지루함이 짙어진다. 의뢰받은 건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같은 패턴이 계속 반복되는 데다, 받아들여야 하는 정보값이 지나치게 많기 때문. 그래서인지 대사도 투머치하고, 어느 시점부턴 극 중 유튜버들이 전기수처럼 전달한다. 심지어 이들은 비중 있는 것처럼 등장했지만, 막상 기능적 역할에 불과했다.

     

     

     

    고증(?) 면에서도 허점이 많다. 초반에 제법 그럴싸하게 설계했던 살인과 달리 뒤에 벌어지는 일들은 우연이 일어나야만 성립되는 허술함이 드러난다. 그래서 반전을 주어도 크게 터지지 못하고, 결말 또한 허망하다. 이걸 보려고 99분이라는 시간을 할애했나 싶을 정도로 현타를 느낀다.

     

    서사가 부실하니 캐릭터들도 크게 도드라지지 않는다. 쏟아지는 정보값에 비해 인물 간 관계성 또한 매력적으로 비치지 않는 속 빈 '깡통' 케미를 그릴뿐이다. 여러 질문과 의문점을 남기려 애쓰지만, 관객들에게 크게 와닿진 못한다.

     

    '설계자'를 이끌어 갈 주연 배우 강동원의 장악력 또한 아쉽다. 영화 장르나 설정상 주인공에게 몰입해 그가 보고 믿는 것들을 따라가게 만들어야 했으나, 영화 속 영일의 생각과 반응을 따라가기엔 쉽지 않다. 맞지 않은 옷을 입어서인지 좀처럼 몰입할 수 없다. 그나마 이무생, 김신록만 눈에 띄었을 뿐, 다른 배우들도 존재감을 피력하진 못했다.

     

    결국 '설계자'는 설계를 잘못한 바람에 부실한 공사로 인해 와르르 무너지는 대참사를 일으켰다. 게다가 음모론만 잔뜩 늘어놓고는 극을 마무리해 갑론을박만 일으켰다. 여기서 '갑론을박'은 좋은 의미가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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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가 갖추지 못한 것들
  • 6★/10★

     

      이 이야기의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다. 퓨리오사는 핵전쟁이 야기한 문명 붕괴 후 황무지의 지배자로 군림하는 시타델의 임모탄에게서 탈출한다. 임모탄에게 건강한 아이를 낳아주는 것만이 중요한 그의 아내들도 함께한다. 그 과정에서 떠돌이 맥스를 만나 녹색의 어머니 땅으로 향한다. 그러나 그녀 기억 속 녹색의 땅은 사라지고 없다. 사막에서 유일하게 풍요롭던 퓨리오사의 고향은 다른 모든 곳처럼 황폐해졌다. 또 다른 녹색 땅을 찾아 떠나는 퓨리오사와 임모탄의 아내들. 그때 맥스가 말한다. 당신들이 가야 할 곳은 시타델에서 멀리 떨어진 환상 속의 녹색 땅이 아니라 바로 시타델의 심장부라고. 퓨리오사는 운전대의 방향을 바꾼다. 그리고 초남성 계급사회 시타델의 수장 임모탄을 죽이고 시타델을 차지한다. 여기까지가 체제 밖의 혁명과 변혁이 아닌, 모순의 핵심으로부터 시작하는 혁명과 변혁의 이야기*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이야기다.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는 이야기의 시곗바늘을 되돌린다. 퓨리오사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그녀가 어쩌다 녹색의 땅에서 납치되어 임모탄 아래서 총사령관 역할을 하게 되었는지, 그녀에게 녹색의 땅의 의미는 무엇인지, 왜 그녀의 한쪽 팔은 살‧뼈‧피가 아니라 기계 장치인지, 무엇이 그녀를 혁명과 변혁의 길로 이끌었는지, 왜 혼자 시타델을 탈출하지 않고 임모탄의 아내들과 함께했는지 등의 물음에 대한 답을 내놓는다.    

      

     

      어린 시절, 황무지의 약탈자 디멘투스 일당에게 납치된 퓨리오사는 자신을 구하러 온 어머니가 녹색의 땅 위치를 추궁당하다 살해되는 장면을 목격한다. 퓨리오사의 마음속에 분노와 증오가 깊게 새겨진다. 이제 그녀에게 중요한 건 생존해 복수하는 일이다. 뜻밖에도 기회는 여성, 노인 등 전투에 적합하지 않은 모든 사람을 악랄하게 착취하고 그 위에 군림하는 임모탄에게서 온다. 임모탄의 또 다른 요새 가스타운을 점령한 디멘투스는 임모탄과의 협상장에 퓨리오사를 데리고 가는데, 그녀를 발견한 임모탄이 협상 성사의 대가로 퓨리오사를 자신의 아내로 삼겠다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퓨리오사는 초남성 계급사회의 동맹을 가능케 하는 상징적인 재화, 방사능 오염으로 희귀해진 유전적으로 건강한 아이를 낳아줄 가치 있는 상품으로 교환‧증여되며 두 남성의 일시적 동맹을 성사시킨다.     

     

      그러나 퓨리오사는 건강한 사내아이를 낳아주는 도구라는 역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임모탄의 아내들을 가둬둔 방에서 빠져나온 그녀는 머리를 깎고 남성 노동자 행세를 하며 임모탄 수하에서 복수를 위해 자신이 자원화할 수 있는 것들을 빠르게 습득한다. 타고난 재능과 후천적인 노력이 맞물려 차근히 역량을 쌓아나가던 중 현직 총사령관 잭의 눈에 들어 그와 가까워지고, 그의 도움으로 온갖 고난 끝에 마침내 복수에 성공한다. 그러나 디멘투스에 대한 복수는 헛헛한 공허함만을 준다. 퓨리오사는 자기 마음을 다른 동력으로 채워야 함을 깨닫는다. 그렇게 그는 임모탄의 아내들과 함께 시타델을 탈출한다. 즉 〈퓨리오사〉는 〈매드맥스〉에서 보여준 퓨리오사의 선택과 개성이 우연이 아닌 필연적 운명이었음을 알려주기 위한 또 하나의 매혹적인 이야기다.     

     

     

      〈퓨리오사〉가 웬만한 범작은 너끈히 뛰어넘는 수작이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굳이 전작을 보지 않았더라도 쉬이 즐길 수 있고, 이번에도 노장이자 거장인 조지 밀러의 펄펄 끓는 열정과 그가 선사하는 영화적 황홀경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영화의 절대적 기준은 〈매드맥스〉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기준을 놓고 본다면, 〈퓨리오사〉는 여러모로 아쉬움을 남긴다.     

     

      먼저 서사다. 전작의 핵심은 변혁과 혁명으로 나아가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의 우정‧사랑‧연대였다. 한편 이번 영화의 핵심은 성장이다. 퓨리오사가 개인적 복수심을 넘어 더 큰 목적으로 나아가는 과정 말이다. 그런데 퓨리오사가 육체적‧정신적으로 강해지는 과정의 연결고리가 그리 튼튼하지가 않다. 단계적으로 차근히 진행된다기보다는 점프하듯 보여준다는 느낌이랄까? 퓨리오사가 강해지는 과정을 체감하지 못한 상태에서 ‘언제 저렇게 강해졌지?’라는 의문이 솟는 장면이 반복된다.     

     

      ‘미투 운동(혁명)과 그 이후의 페미니스트로의 집단적 정체화(성장)’라는 사회 조류가 각각의 흐름을 대변하는 두 영화의 개봉 시기와 기묘하게 맞물린다는 점이 흥미롭다. 하지만 바로 이것이 이번 영화에 전작처럼 피를 끓게 만드는 요소가 부재한 이유다. 혁명 서사는 현실에 불만인 사람 모두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지만, 성장 서사는 특정 인물(혹은 누군가의 삶)에 대한 애정이 있는 사람에 제한된 소구력을 갖는다. 이야기의 전제와 완성도 두 측면 모두에서 〈퓨리오사〉는 전작에 비해 불리한 위치에 있다.     

     

     

      매력적인 캐릭터가 전작보다 현저히 적다는 점도 아쉽다. 메인 빌런이라 할 수 있을 디멘투스는 절대 빌런 임모탄을 마주한 순간 포스를 잃고 한없이 가벼워진다. 전작에서 극의 핵심 동력이었던 임모탄의 아내들과 그녀 중 한 명을 사랑하는 워보이, 주름진 여전사 같은 눈길을 끄는 캐릭터도 없다. 가장 큰 문제는 퓨리오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베푸는 임모탄의 총사령관 잭의 역할이다. 도대체 그는 왜 위험을 무릅쓰고 퓨리오사를 도울까? 단지 퓨리오사의 전투 능력이 출중해서? 혹은 (달랑 대사 한 줄로 전달되듯) 그의 부모님이 혼란한 세상에서도 정의를 추구한 군인이었기 때문에? 영화는 전작에서 맥스가 담당한 여성 혁명의 남성 조력자 역할을 잭에게 부여하려 하지만 잭 캐릭터의 입체성과 주변 인물과의 관계성 모두에서 이 시도는 실패한다(이는 뒷모습으로만 짧게 등장하는 맥스로 추정되는 남자의 존재감이 커다란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 시리즈만의 압도적인 사막 드라이빙 액션신도 이 모든 것이 제대로 뒷받침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긴장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명장면은 영화의 다론 모든 요소가 유기적으로 맞물릴 때에만 가능하다.     

     

      이쯤에서 이 영화에 대한 아쉬움의 절대적 근거가 전작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할 필요가 있겠다. 전작의 아우라와 감동을 기대한다면 어쩌면 실망은 ‘당연한’ 일이다. 〈퓨리오사〉가 웬만한 영화보다는 훨씬 재밌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음 작품을 고대할 정도로 말이다.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으니, 조지 밀러가 시타델 혁명 이후의 이야기를 다룬 세 번째 영화로 건강히 돌아오길 염원한다.  

     

             

    *조지 밀러 감독은 페미니스트 철학자에게 영화 전반에 대한 심도 있는 자문을 구했다고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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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음증 남자와 관종 여자의 잘못된 만남?
  • 관음과 관종. SNS 중독 시대를 살아가면서 두 단어가 지니는 부정적 무게감은 더 커지고 있다. 뉴스 등 미디어를 통해 두 단어로 촉발된 범죄 등 SNS의 폐해는 더 심각해지고 있는데, 이런 상황을 알고 있음에도 사회관계망에 의존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늘어만 가고 있다. “SNS는 시간 낭비다”라는 명언을 남긴 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 알렉스 퍼거슨의 말은 이제 무용지물. 이를 반영하듯 영화 <그녀가 죽었다>는 SNS 중독 시대 속 병든 관음증 남자와 관종 여자의 잘못된 만남(?)을 그리고 있다. 과연 이들의 진짜 모습은 무엇일까? 그리고 우리는 그들에게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직업은 공인중개사 취미는 남의 일상 훔쳐보기. 심각한 관음증에 빠진 구정태(변요한)는 자신의 직업을 이용해 부동산 매물을 맡긴 이들의 집에 몰래 들어가 사소한 물건을 가져오기까지 한다. 심지어 외딴 창고에 그 물건을 전시해 놓는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레이더망에 SNS 인플루언서 한소라(신혜선)가 걸려든다. 편의점 소시지를 먹으며, 샐러드 이미지를 SNS에 올리는 소라의 모습을 본 정태는 반은 호기심, 반은 팬심으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이런 노력(?)에 하늘도 감동한 걸까? 집을 내놓기 위해 구정태의 공인중개사를 찾은 한소라는 고맙게도 그에게 키를 맡긴다. 더 활발한 취미생활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구정태. 하지만 여느 날처럼 소라의 집에 몰래 들어간 그는 흉기에 찔린 채 누워있는 그녀의 시신을 발견한다. 

     


    관음과 관종이 만연한 SNS 중독 시대의 병든 남과 여. 이들이 주인공인 미스터리 스릴러 <그녀는 죽었다>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사회적 문제, 더 나아가 시선의 수가 많아질수록 더 강력해지는 권력의 폐해를 미스터리 장르로 보여준다. 정태가 소라의 실제 모습을 보기 위해 몰래 따라다니거나, 집 비밀번호를 알아내려고 하는 등의 이상한 고군분투를 하는 것처럼, 관객 또한 과연 진실이 무엇인지 감독이 만든 미스터리에 ‘좋아요’를 누르며 동참한다. 특히 소라의 시신을 본 이후 정태를 향한 협박과 이름 모를 범인의 출현 등 과연 진범은 누구인지 영화는 이 미스터리를 계속 지켜보게 한다. 

     

     

     

     


    시선의 권력에 대한 이야기를 소재로 한 만큼, 영화는 정태의 시선만이 아닌 소라의 시선으로 또 하나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퍼즐은 소라의 이야기가 보인 후에 맞춰진다. 

     


    정상인이라 보기 힘든(정작 극 중 본인들은 정상이라 생각하는) 두 주인공은 각각 전, 후반부 내레이션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재미있는 건 각자 왜 이런 행동을 했는지에 대한 변론이 점점 궤변처럼 느껴지고, 자기합리화의 최대치를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SNS 게시물 내 작위적 연출과 멋스러운 필터로 보이지 않던 오리저널 이미지가 명확히 보이고, 자칫 죄의 무게가 한 쪽으로 치우쳐지는 것을 미연의 방지한다. 여기에 감독은 오영주 형사(이엘)를 통해 윤리와 법에 입각한 시선을 관개에게 부여하며, 최대한 두 캐릭터를 미화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다만, 장르에 입각한 연출이 강하다 보니 스테레오 타입의 캐릭터 활용도와 추리 과정에 대한 디테일은 아쉬움을 남긴다. SNS의 부정적 측면에 집중해 익명성에 기댄 인간 본성의 어두운 면을 부각하려고 했다는 감독의 의도에 맞춰 두 주인공이 전사는 깊이 있게 그려지진 않는다. 이는 전사로 인해 이들을 행위 자체가 용인되는 걸 미연에 방지하려는 연출이라고 이해된다. 하지만 그로 인해 캐릭터를 표면적으로만 보게 되어,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병적인 문제를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한다. 정태 보단 소라가 불우한 가정사 등 과거의 이야기가 나오지만, 그 또한 빈약해 보인다.  

     

     

     

     


    다행히 이 단점은 변요한, 신혜선의 연기가 채운다. 이 영화에서 두 배우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은 급변하는 상황에 맞게 두 얼굴의 모습을 연기로 잘 보여준다는 점에 있다. 변요한은 관음증으로 너무나 재미있는 삶을 살아가다 그로 인해 나락으로 떨어지는 상황을, 소라는 소셜미디어와 현실의 모습, 결이 다른 내외면의 모습을 빠르고 긴장감 있게 보여준다. 이들의 모습 자체가 소셜미디어 세상 속 사람들의 표상까지는 아니지만 어두운 단면을 잘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를 끝까지 보게 한다. 

     


    관음을 소재로 한 알프레드 히치콕의 <이창>이 개봉한 지 70년이 흘렀지만, <그녀가 죽었다>가 개봉하는 걸 보면, 소셜미디어라는 새로운 플랫폼을 제외한다면 예나 지금이나 우리는 관음의 포로인 셈이다. 영화 자체가 남의 삶을 보는 행위라는 점에서 이 작품을 보는 것은 물론, 소셜미디어에 이 영화를 보고 단평을 올리는 이들은 아마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관음 자체가 문제라기 보단 그 지나친 행위 자체와 도덕과 윤리의 기준선을 모호하게 하는 자기 합리화가 문제다. 인간이라면 사회 구성원이라면 이 기준선을 잘 지켜야 한다. <그녀가 죽었다>의 마지막 장면의 두 주인공처럼 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사진제공: 콘텐츠 지오 

     

    평점: 3.0 / 5.0
    한줄평: SNS 중독 시대가 낳은 병든 이들의 웃지 못할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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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턴트맨이 느낄 모든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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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겉에서 잘 보이지 않는 노력들이 있다. 그 사람들의 노력으로 우리 사회가 돌아가고 또 좋은 결과가 나타난다. 엄청나게 좋은 결과가 나온다면 그들의 노력이 드러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노력들은 하나의 흐름에 묻히고 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은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나간다. 그리고 일상을 산다. 물론 적정한 금전적인 대가를 연봉으로 지급받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의 완성이나 성공은 눈에 띄는 몇몇 사람에게만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생각해 보면 정말 다양한 분야에 그런 숨은 노력들이 많다. 하지만 대부분은 드러나지 않는다. 병원에서도, 직장에서도, 예술가의 영역에서도 무수한 사람들의 노력이 숨어있다.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영화 제작 현장에도 다양한 사람들의 노력이 숨어있다. 그중에서도 스턴트맨은 배우를 대신해 위험한 장면을 촬영하는 일을 한다. 일반 대중들은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그들이 없으면 영화가 완성되지 못한다. 그들의 일은 무척이나 위험하지만, 그들이 누군지 얼굴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대중에게는 알려지기 어렵다. 영화 <스턴트맨>은 그렇게 숨겨져 있던 스턴트맨의 노력과 고민을 담는다.

     

    첫 번째 감정 - 스턴트맨이 주는 긍정적 기운

     

     

    주인공 콜트(라이언 고슬링)는 업계에서 훌륭한 스턴트맨으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그는 유명한 배우들의 스턴트 더블을 맡는데, 그중에서도 특급 스타인 톰(아론 테일러 존슨)의 대역을 주로 맡고 있다. 콜트는 늘 위험한 장면을 마무리하고 나면, 엄지를 척하고 올린다. 어딘가는 다치고 아플 텐데도 일단 큰 사고가 없었다면 괜찮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일단 주변을 안심시킴으로써 영화 촬영 현장의 긴장을 줄인다. 기본적으로 그들의 마음속엔 영화 촬영 현장에 대한 존중이 포함되어 있다.

     

    영화에서 그가 스턴트 하는 장면을 묘사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크게 위험한 액션 장면을 촬영해야 할 때, 그는 일단 모든 장비가 괜찮음을 확인하고, 스턴트 직전 심호흡을 여러 번 한다. 그렇게 호흡을 천천히 가다듬은 그는 ‘오케이’를 말하며, 사인한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그가 스턴트를 시작한다. 차가 구르고 폭탄이 터지고, 점프를 뛰는 다양한 스턴트가 끝나고 나면, 주변이 조용해진다. 그때만큼은 모두가 스턴트맨의 안위에 신경 쓰고 있다.

     

    안전요원들이 스턴트맨의 안전을 확인하고 나면, 스턴트맨은 엄지 척을 한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일어나 헬멧을 벗고 살짝 미소를 보인다. 그 이후 촬영 현장엔 박수소리와 환호소리가 가득해진다. 스턴트맨이 촬영 현장에 다시 긍정의 분위기를 불어넣는다. 기본적으로 스턴트맨은 긍정적이다. 아마도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모든 위험한 스턴트 장면들을 무사히 마치고, 또 주변에도 그런 긍정적인 기운을 전달하는지도 모른다. 영화는 그런 스턴트맨의 긍정적인 기운을 관객에게도 전달하고 있다.

     

     

    두 번째 감정 - 스턴트맨이 분노를 느끼는 이유

     

     

    영화 속에 등장하는 스턴트맨들은 철저하게 자신의 일에 집중한다. 촬영현장에서 누군가를 무시하거나 태도다 좋지 않아도, 같은 장면을 수십 번 반복해서 찍어도 그들은 크게 불만을 드러내지 않는다. 주인공 콜트도 마찬가지다. 몇 번이고 몸에 불이 붙고 몸이 바위에 던져저도 엄지 척을 보이며 계속 그 행위를 반복한다. 이 영화의 설정상 콜트는 자신이 사랑하는 감독 조디(에밀리 블런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그 스턴트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그건 스턴트맨으로서 그가 가지고 있는 직업 정신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스턴트맨을 크게 인정하지 않는 인물이 있다. 바로 최고의 스타로 등장하는 톰이다.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톰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스턴트 더블인 콜트의 액션 장면이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다. 자신이 최고의 스타라는 것을 본인도 잘 아는 듯한 그의 거만한 모습은 스턴트맨에 대한 태도로 이어진다. 그는 그의 스턴트 더블이 자신이 만든 그늘에서 활동하는 노동자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개인적인 파티를 할 때 스턴트 더블에게 위험한 장난을 치기도 하고, 여러 번 위험한 스턴트를 반복해서 시키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스턴트맨에 대한 존중은 없다. 톰은 모든 스턴트맨들의 액션 장면들을 자신이 했다고 이야기하고 다닌다. 모든 액션 장면을 본인이 직접 연기했다는 인터뷰를 아무렇지 않게 하고 다니는 그의 모습은 무척 거만하고 무책임해 보인다. 모든 스턴트맨들은 그의 거만함에 분노한다. 하지도 않은 연기를 자신이 했다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누가 좋은 시선으로 볼 수 있을까. 특히 이 영화에서 톰은 스턴트맨을 거의 소모품처럼 취급한다. 스턴트맨이 사고를 당하면 바로 다른 사람으로 교체해 버린다. 기존 스턴트맨에게는 어떤 위로도 없다.

     

     

    세 번째 감정 - 스턴트맨과 사랑에 빠지는 순간

     

     

    영화 <스턴트맨> 에는 로맨스가 포함되어 있다. 콜트와 조디의 얼굴에는 사랑이 있다. 조디는 촬영감독이었고, 현재는 새로운 영화의 연출을 맡았다. 콜트가 큰 사고로 일을 계속하지 못하게 되면서, 조디와 잠시 멀어졌지만 두 사람 모두 서로를 잊지 못한 상태다. 거의 2년 만에 다시 영화촬영장에서 만난 두 사람의 얼굴에는 반가움과 당황스러움이 동시에 보인다. 

     

    조디는 콜트에게 반할 수밖에 없었다. 콜트는 촬영장에서 늘 최선을 다했고, 그 모든 위험한 스턴트 촬영을 하고서도 늘 괜찮다는 말을 먼저 전했다. 촬영감독이었던 조디는 그 모든 장면을 보면서 콜트의 따뜻함과 전문성을 발견했다. 업무적은 전문성도 서로의 마음을 이끌었지만, 무엇보다 모두에게 보이는 존중감과 태도는 조디가 사랑에 빠지게 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스턴트맨은 모두 전문적이고 긍정적이다. 한 장면, 그것도 자신이 등장하지 않는 장면의 촬영을 위해 방법을 연구하고 집중한다. 수십 번을 굴러 떨어지는 자동차 안에서 나오면서 엄지 척을 하는 그들을 관객이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 영화는 관객도 수많은 스턴트맨들과 사랑에 빠지게 만든다. 이런 감정은 결국 주인공인 콜트와 조디의 사랑을 응원하는 큰 동력이 된다. 

     

     

    영화 <스턴트맨>은 영화 촬영장에서 가장 위험한 일을 하지만 얼굴을 드러낼 수 없는 스턴트맨의 고충과 마음가짐을 보여준다. 콜트와 조디의 러브스토리에 악당 노릇을 하는 배우를 등장시켜 다양한 액션 장면들을 보여주고, 그것을 만드는 과정까지 살짝 추가하여 보여주면서 진짜 이들의 얼굴을 드러내 놓는 영화다. 그들이 작업에 임할 때 갖게 되는 감정, 그들을 이용한다고 느낄 때 갖게 되는 감정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게 되는 순간들을 극에 녹여내면서 결국은 모든 스턴트맨을 응원하고 사랑하게 만든다. 

     

    이 영화를 연출한 데이비드 레이치 감독 본인이 스턴트맨 출신이다. 전작은 <존윅> 1편과 <아토믹 블론드> 같은 다양한 액션 영화를 연출한 경험이 있는 그는 이번 영화에서 그가 겪었을 감정들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카체이싱, 근접격투, 총격전 같은 다양한 액션 장면들이 로맨스 장면들과 적절하게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무척 즐겁게 영화를 볼 수 있게 구성했다. 

     

     

     

      

      

    *영화의 스틸컷은 [왓챠]에서 다운로드하였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https://www.notion.so/Rabbitgumi-s-links-abbcc49e7c484d2aa727b6f4ccdb9e03?pvs=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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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단 천만 찍고, 진실의 방으로~
  • <범죄도시4>가 천만 관객을 동원할 거라는 건 당연시되고 있다. 얼마나 빠른 시간안에 천만을 찍을 것인지가 더 중요해 보인다. 국내 액션프렌차이즈 영화로서 새로운 기록을 만들고 있는 <범죄도시4>는 마동석과 제작진이 생각한 대단한 기록을 찍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이를 위해 간과한 부분들이 변수로 작용하며, 시리즈의 매력을 딸어뜨린다. 영화의 단점을 아무리 얘기한다고 해도 아무런 타격이 없을 것이기에 부담을 내려놓고, 시작한다. 마석도 형사님! 일단 천만 찍고, 진실의 방으로~~

     

     

     

     


    마약에 이어 도박이다. 마석도(마동석)와 광역수사대 동료 형사들은 필리핀에서 의문의 죽임을 당한 한 청년이 살해되는 사건을 접한다. 그의 죽음은 온라인 불법 도박 범죄 때문. 이 범죄의 중심에는 특수부대에서 퇴출당한 용병 출신 백창기(김무열)가 있다. 그는 경쟁사 온라인 불법 도박장이 생기기라도 하면 불도저처럼 밀고, 반항하는 이들은 모조리 제거하는 극악무도한 놈이다. 한국 IT 업계에서 신동으로 불렸던 장동철(이동휘)은 이런 백창기를 고용해 막대한 이윤을 얻고 있다. 그 이윤을 공정하게 나눠주면 좋으련만, 그럼 범죄자의 정체성에 혼란이 간다고 생각한 것 같은 장동철은 백창기에게 나중에 챙겨주겠다고 말 만한다. 참고 참고 또 참다 ‘참을 인’자 세 번 이상을 넘긴 백창기는 장동철을 만나기 위해 서울에 온다. 그리고 마석도는 이들을 잡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인다. 

     

     

     

     


    <범죄도시4>에서 관객들이 바라는 건 한 가지다. 마석도가 극악무도한 범죄자들을 빅펀치로 날리는 것! 영화는 이 간단하고도 명료한 관객들의 니즈를 충족하기 위해 이곳저곳에서 묵직한 펀치를 날린다. 휘두른다고 다 된다면 좋으련만, 이번 시리즈에서는 그 적중률이 낮다. 적중률이 낮으니 묵직한 타격감이 주는 액션의 매력은 반감된다. <범죄도시4>를 본 이들이라면 기억에 남는 액션이 있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라. 

     


    액션의 묵직함이 줄어든 건 이미 3편에서 예견된 바 있다. 이 때 마석도의 액션은 1, 2편과 달랐다. 공분을 살 정도의 사회적 약자에게 피해를 준 장첸(윤계상), 강해상(손석구)은 공공의 적이고, 직간접적으로 마석도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상해를 입힌 이들은 공항 화장실에서, 버스 안에서 최후를 맞이한다. 비주얼적으로 확실한 액션 시퀀스를 자랑하는 이들 장면을 지금도 우리가 기억하는 건 두 빌런의 전사를 켜켜이 쌓았기 때문이다. 마석도의 주먹으로 이들을 심판해야 하는 당위성이 제공되었기 때문에 마지막 액션 장면은 빛을 발한다고 할 수 있다. 

     


    근데 3편에는 공분을 살 수 있는 부분이 극히 일부분이다. 밥그릇 싸움을 하는 부패 경찰과 야쿠자의 세력다툼이 빌런들의 주된 이야기인데, 관객들은 이들의 싸움에서 공분을 살 수 있는 포인트를 찾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마석도의 액션도 그 명분을 잃어버린 것처럼 헤맨다. 물론, 묵직한 주먹으로 캐비닛이 움푹 들어갈 정도의 파괴력을 보여주지만, 금방 휘발되어 버린다. 그만큼 이전 시리즈에서 느꼈던 속 시원함도 반감된다.

     

     

     

     


    4편에서는 이런 단점을 상쇄하는 그 무언가가 나올 거로 생각했다. 그 주요 이유 중 하나는 시리즈의 액션을 담당했던 허명행 무술감독이 메가폰을 잡았기 때문이다. 좁은 공간 안에서의 강한 임팩트를 살리는 액션 장인으로 정평이 나 있는 그였기에 3편의 아쉬움을 달래줄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3편과 마찬가지로 이번 영화에서 기억에 남는 액션은 별로 없다. 마지막 니킥을 날리는 마석도의 모습(액션 구성이 아니다.)만 기억될 뿐이다. 이는 3편의 단점을 상쇄하지 않고 그대로 답습한 문제에서 비롯된다. 역시 이번에도 자신들의 밥그릇 싸움에 혈안이 된 빌런들의 싸움이 부각될 뿐, 공분을 사게 만드는 이야기들이 부재하다. 극 초반 백창기에게 죽임을 당한 아들과 억울한 죽음을 꼭 파헤쳐달라는 그 엄마의 마지막 편지가 이를 대신하지만, 턱 없이 부족하다. 광역수사대 소속인 마석도가 사이버수사까지 하며 이들을 잡아야 하는 이유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도 액션의 보는 맛을 떨어뜨린다. 응당 관객이 이해되어야 하는 부분이 충족되지 않은 상황에서 액션에만 치중된 질주에만 집중한 느낌이다. 

     

     

     

     

     

     

     

    액션의 빈약함을 알아서인지 4편에서도 코미디 요소를 강조한다. 트레이드 마크인 마석도의 슬랩스틱과 말장난 코미디는 물론, 3편 초롱이(고규필)의 바통을 이어받은 이는 장이수(박지환)의 코미디가 이어진다. 장이수의 고군분투가 빛을 발하는 지점은 인정하지만, 전체적으로 코미디 또한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시리즈를 거듭할수록 웃음 포인트는 기시감이 들고, 적중률도 많이 떨어진다. 

     


    액션 프랜차이즈 시리즈라는 점에서 편수가 거듭될수록 얻게 되는 어려움은 이해한다. 관객들이 좋아하는 액션, 코미디 등의 부분을 가져가야 하지만, 그에 따른 자기복제, 기시감 등의 비판은 감수해야 한다는 것. 결은 다르지만 <분노의 질주> 시리즈, 그리고 마블 시리즈도 이 매너리즘에 빠진 지 오래다. 이는 시리즈의 숙명으로 볼 수 있지만, 그럼에도 양적, 질적 차별화를 가져가야 하는 것도 시리즈의 숙명이다. <범죄도시> 시리즈는 매너리즘의 수렁에 빠졌다. 3편부터 이미 빠져 있는지 모르겠다. 만약 이 매너리즘을 갖고 다음 시리즈를 만든다면, 과연 극장에 갈 사람은 얼마나 될까? 시리즈의 팬들은 몰라도 필자는 가고 싶지 않을 것 같다. 

     

     

     

     


    총 8편으로 기획했다는 이 시리즈는 이제 반환점을 돌았다. 다행인 건 5편은 내년이 아닌 재정비 후 2026년에 개봉한다는 소식. 기존 잘 된 것만을 답습하기보단 단점을 명확히 바라보고, 이를 어떻게 개선할 수 있는지 머리를 맞대어야 한다. 더 나은 시리즈를 위해 모두 진실의 방으로 가길 바란다. 천만 관객 돌파를 자축하더라도 진실의 방에서 하길~~

     

     

     

    사진제공: 에이비오엔터테인먼트

     

     

     

    평점: 2.5 / 5.0
    한줄평: 알고도 맞은 빅펀치! 다음편은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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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챌린저스 | 테니스 코트 위에서 피어난 삼각 로맨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주니어 시절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대학 시절 부상 때문에 일찍 은퇴한 비운의 테니스 천재 ‘타시’(젠데이아). 그녀는 테니스 선수인 남편 '아트'(마이크 파이스트)의 코치를 맡아 테니스와의 인연을 이어간다. 그러던 중 커리어 그랜드 슬램을 눈앞에 둔 아트가 좀처럼 연패 슬럼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자 타시는 남편을 챌린저급 대회에 참가시킨다. 

     

    그러나 타시는 자기 선택을 이내 후회한다. 아트의 어릴 적 절친이자, 자기 전 남자 친구인 ‘패트릭’(조쉬 오코너)의 대회 참가를 깨달았기 때문. 패트릭과의 만남을 가능한 피하려 한 타시. 그러나 테니스에 대한 열망이 사라진 아트와 달리 여전히 테니스를 사랑하는 패트릭을 보면서 그녀의 마음은 조금씩 흔들리고, 아트와 패트릭은 코트 안팎에서 타시를 사이에 둔 랠리를 시작한다. 

     

     

    로맨스일 수밖에 없는 테니스 영화

    팬데믹을 거치며 선풍적인 인기를 모은 스포츠, 테니스. 과연 테니스의 매력은 무엇일까? 김기범 KBS 테니스 전문 기자에 따르면 테니스의 본질은 심리전이다. 정신적 무장이 흔들리는 순간 승부는 뒤엉킨다. 네트 앞 선수를 상대로 쉼 없이 뛰면서도 다음 수를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위대한 챔피언들은 무섭도록 냉철한 평정심을 유지하는 심리전의 마스터들"인 이유이기도 하다. 

     

    달리 말해 테니스는 다른 스포츠에 비해 유달리 코트 위 두 사람의 관계가 눈에 띄는 스포츠다. 단순히 공을 치는 게 아니라 상대와의 관계에서 어떻게 우위에 서느냐가 핵심인 것. 여기에 테니스만의 독특한 규칙을 더하면 테니스에는 새로운 의미가 깃들기도 한다. 테니스에서 0점이 '러브(Love)'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테니스는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라 누가 사랑의 우위를 점할지 결정하는 승부이기 때문. 

     

    이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이 테니스 영화를 만들겠다고 결심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의 작품은 대체로 인물 간의 관계, 특히 사랑의 감정과 에너지로 스크린으로 가득 채우는 데 집중하한다. 그의 신작 <챌린저스>도 마찬가지다. 스포츠 영화의 탈을 썼지만, 본질은 로맨스다. 테니스 랠리의 묘미를 120% 이끌어내되, 관객을 승패가 아닌 사랑과 우정, 욕망의 랠리 속에 빠뜨리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단순한 구조로 극대화한 캐릭터의 힘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한 가지 특징은 '금기'다. 그는 사회적으로 널리 용인되지 않는 소재를 자주 다룬다. 동성애, 성인과 미성년의 사랑, 식인 등. 그래서 그의 작품은 소재를 관객에게 어떻게 납득시키느냐가 늘 관건이다. 관객이 구아다니노의 관점을 수용하면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처럼 대중적인 작품이 탄생한다. 반면에 관객과 구아다니노가 어긋나면 <본즈 앤 올>처럼 외면받는 작품도 나올 수 있다.

     

    이때 구아다니노는 영화를 극 예술 이전에 영상 예술로 대하는 듯하다. 정교한 스토리텔링으로 관객을 이해시키지는 않는다. 어차피 금기에 도전하는 입장에서 논리적인 접근은 역효과가 날 가능성이 크니까. 대신 그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에너지를 극대화해 관객으로 하여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영화에 빠져들도록 유도한다. 

     

    <챌린저스>도 마찬가지다. 한 여자를 사랑하는 두 절친. 두 절친을 가지고 노는 한 여성. 자칫 막장 드라마로 빠지기 쉬운 삼각관계다. 구구절절 설명해도 공감하기 어렵다. 그래서인지 구아다니노는 <챌린저스>의 구조에는 크게 힘을 주지 않는다. 마지막 시합을 가장 먼저 보여준 후에, 플래시 백을 다수 삽입해 과거와 현재의 연관성을 부각하는 익숙한 구성을 취한다. 

     

    대신 <챌린저스>는 캐릭터를 빚어내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명확히 구분되는 세 캐릭터의 특징을 강조하고, 그들의 차이점이 빚어내는 갈등을 원동력 삼아 이야기를 끝까지 밀어붙인다. 특히 그 갈등은 주로 테니스 코트 위에서, 다양한 랠리의 형태로 드러난다. 서로 다른 사랑의 방식과 사랑의 대상을 의인화한 뒤 코트 위에 맞부딪히는 식인 셈이다. 극 중 "테니스는 관계"라는 타시의 대사가 의미심장한 이유다. 

     

     

    코트 위에서 피어나는 삼각형

    우선 <챌린저스>는 두 절친을 대조한다. 아트는 계산적이다. 단 1%라도 열세라고 판단하면 섣불리 나서지 않는다. 첫눈에 타시와 사랑에 빠졌지만, 그녀가 자기에게 넘어올 완벽한 기회가 올 때까지는 친구로 남는다. 코트 위에서도 마찬가지다.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면 굳이 전력을 다하지 않는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한계가 찾아왔다고 판단하자 미련 없이 테니스 코트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반면에 패트릭은 본능적이다. 고로 직선적이다. 마음에 드는 여자가 생기면 앞뒤 따지지 않고 달려 나간다. 코트 위에서도 마찬가지다. 타고난 천재인 그는 마음 가는 대로 라켓을 휘두른다. 코트 위에서의 규칙과 매너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러니 두 친구가 한 여자를 두고서, 또 네트를 사이에 두고 치열하게 맞부딪히는 건 놀랍지 않다. 추로스를 먹는 장면만 봐도 알 수 있다. 

     

    타시는 이들과 또 다르다. 오직 테니스만 사랑하는 타시는 함께 테니스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에게 마음의 문을 연다. 그래서 아트를 꺾고 US 오픈 주니어 대회에서 우승한 패트릭을 선택하거나, 메이저 대회 우승을 위해 그녀를 코치로 영입하겠다는 아트와 사랑에 빠진다. 이는 높은 랭킹에도 불구하고 열정을 잃은 아트와 순위는 낮지만 여전히 테니스를 사랑하는 패트릭 사이에서 계속 갈등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스포츠 영화 클리셰를 포기한 이유

    따라서 <챌린저스>는 로맨스일 수밖에 없는 스포츠 영화다. 테니스와의 사랑과 타시와의 사랑을 나눌 수 없으므로. 두 절친의 우정도 마찬가지다. 아트와 패트릭은 테니스가 이어준 절친이다. 타시가 눈앞에 나타난 후로 관계가 끊어진 그들. 하지만 다시 한번 타시를 사이에 두고 경기를 펼치면서 그들은 코트 위에서 함께 한 추억을 비로소 되찾는다. 이는 둘의 치열한 랠리에 타시가 아낌없이 박수를 보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연장선상에서 보면 누가 승리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트와 패트릭의 마지막 시합이 셋의 관계를 파멸로 이끌지 않기 때문. 오히려 셋 모두의 인생에서 사랑, 우정, 테니스를 향한 욕망이 완성되는 순간에 가깝다. 달리 말해 머리로는 쉽사리 이해하기 힘든 셋의 사랑과 우정, 곧 '폴리아모리(Polyamory)'를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순간인 셈이다. 

     

    이 관계성에 집중하기 위해 <챌린저스>는 스포츠 영화의 몇몇 클리셰를 포기한다. 중계진의 부재가 대표적이다. 보통 스포츠물에서는 중계진이 선수나 감독에 관한 정보를 알려주며 극적인 상황을 조성한다. 하지만 <챌린저스>는 해설자를 없앴다. 대신 그 빈자리를 관객에게 양보한다. 세 주인공의 역사를 이미 알고 있는 관객이 자기만의 관점에서 경기를 읽어 내도록 유도한다. 그 덕분에 세 주인공의 갈등은 더 첨예하게 느껴진다. 

     

    또 스포츠물에서 뺄 수 없는 라이벌 관계도 암시에 그친다. 천재 패트릭과 노력파 아트는 주니어 때부터 라이벌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재회한 순간, 영화는 라이벌리에 크게 주목하지 않는다. 아트가 패트릭의 낮은 랭킹을 지적할 뿐이다. 그들의 게임은 사실 타시가 누구를 진정으로 사랑하느냐가 핵심이니까. 다만 그 대가로 이야기를 풍성하게 꾸밀 기회는 놓쳤다. 패트릭이 타시를 코치로 원하는 이유 등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기 때문. 

     

     

    눈과 귀로 받아들이는 이야기

    더 나아가 영화는 세 주인공의 관계를 감각적으로 보여주려 애쓴다. 일례로 그들의 관계가 코트 위에서 가장 단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가능한 역동적인 테니스 경기를 보여주려 한다. 선수 같은 느낌을 내려다가 실패할 지점은 아예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공에 카메라를 붙인 구도로 랠리를 보여주거나, 감정이 실린 공을 3D 영화처럼 카메라를 향해 돌진시킨다. 그 결과 랠리 장면은 주인공들의 섹스 장면 못지않게 긴장감 넘친다.

     

    '나인 인치 네일스'로 활동 중인 트렌트 레즈너와 애티커스 로스가 담당한 영화 음악도 인상적이다. <소설 네트워크>, <소울> 등의 영화 작업에 참여했던 그들은 앰비언트 스타일 음악으로 필요한 순간마다 긴장감을 고조한다. 특히 소셜 네트워크>에서 페이스북의 두 창립자 간의 갈등과 배신을 음악에 담아냈듯이, 이번에도 사랑의 작대기가 엇갈리는 순간마다 그 균열감을 탁월하게 부각했다.

     

      

    젠데이아의 인생 연기

    마지막으로 배우의 연기를 빼놓을 수 없다. <더 크라운>에서 찰스 왕세자를 연기한 조쉬 오코너, 토니 상과 에미 상을 모두 석권한 마이크 파이스트의 연기도 훌륭했다. 하지만 특히 젠데이아가 인상적이다. 그녀는 HBO 드라마 <유포리아>나 넷플릭스 <맬컴과 마리>에서 주연으로서 확실한 존재감을 이미 보여줬다. 반면에 조연으로 참여한 <스파이더맨>, <듄> 같은 블록버스터에서는 미묘하게 어색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직접 제작자로 참여한 <챌린저스>에서는 다르다. 유독 빛난다. 구아다니노 감독과 협업이 신의 한 수로 보인다. 상술했듯이, 그의 영화에서는 사랑의 주도권을 쥔 캐릭터가 빛나야만 관객을 설득할 수 있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티모시 샬라메가 일약 스타덤에 오를 수 있었던 배경이다.

     

    젠데이아도 마찬가지다. 타시는 테니스라는 목적을 위해 두 남자를 부추기는 인물, 곧 킹메이커다. 테니스 코트 위에서 게임은 두 남주가 하지만, 정작 주인공은 타시다. 이처럼 본인이 중심에 서고, 상황을 통제하고, 가장 빛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자 젠데이아는 스크린을 자기 리듬대로 거침없이 휘어잡아 버렸다.

     

     

    결정적인 전략 실패

    다만 개봉일은 몇 안 되는 아쉬움이다. 과거에는 외화의 개봉 전략 중 2등 전략이 유효했다. 전체 개봉 영화 중 2등, 혹은 외화 중 2등 포지션을 차지한 뒤 낙수 효과를 살려 관객 수를 야금야금 늘리는 방식이다. <아바타>, <전우치>와 같이 개봉했는데도 2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셜록 홈즈>가 대표적이다. 

     

    문제는 코로나 이후 한국 극장가에서 2등 전략이 유효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제 낙수효과는 사라졌기 때문. <서울의 봄> 이후 개봉한 <노량>은 흥행에 실패했다. 설 연휴 이후 개봉한 <파묘>는 7주간 1위를 차지하며 천만 영화가 됐다. 관객이 재미와 만족감이 담보된 대형 영화에 집중되는 경향은 나날이 강해졌다. 

     

    그렇기에 굳이 <범죄도시4>와 같은 날에 개봉해 초반 관객을 늘리기도 어렵고, 입소문을 퍼뜨리기에도 불리한 환경을 자초할 필요가 있었나 싶다. 감독의 명성으로 보나, 배우의 연기력으로 보나, 전체적인 완성도로 보나 <범죄도시4>의 흥행 광풍에 밀려 사라지기에는 아까운 작품이기에 아쉬움이 더 크다.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공이 아닌 사랑, 우정, 욕망을 치고 달리는 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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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송사고로 감추기엔 매혹적인 '악마와의 토크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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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마와의 토크쇼

     

    이 영화의 주인공은 1970년대 미국 토크쇼를 진행하던 아나운서 잭 델로이(데이빗 다스트말치안)다. 유명인사인 잭 델로이. 젠틀한 목소리 톤과 말끔한 매너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의 첫 번째 쇼는 1971년이었다. 꿈을 이룬 잭 델로이. 코미디부터 가족드라마, 연극까지 다양한 소재를 포용하는 토크쇼를 진행하며 대중들의 지지를 받았다. 어려운 시간을 보냈던 1970년대의 미국인들은 그의 토크쇼에 큰 위안을 받았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다. 성공가도를 달리는 잭 델로이. 당시 최고의 토크쇼였던 조니 카슨 쇼와 맞대결을 펼치는 것과 동시에 그래미 상에 노미네이트 되기도 했다. 하지만 밝은 빛과 어둠은 함께 따라온다고 했던가. 높은 인기 덕인지 톱스타 여배우 매들린(조지나 헤이그)과 결혼하기도 했지만 잭이 사이비 종교와 관련이 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서서히 치닫았던 위기는 잭의 인생의 큰 장애물이 된다. 비흡현자였던 매들린. 폐암에 걸렸다. 그리고 잭의 곁을 떠났다. 슬픔 속에 잠긴 잭. 하지만 잭에게 쉬는 시간이 그렇게 길지 않았다. 서서히 낮아지는 시청률. 그리고 더 침몰하는 잭. 다양한 논란에 그의 전성기가 끝나가고 있는 듯하다. 묘수가 필요하다. 색다른 토크쇼 콘텐츠를 기획하는 잭 델로이. 그가 꺼낸 아이디어는 악마와의 토크쇼다. “잭. 걱정하지 말아요. 이 토크쇼는 분명 유명해질 테니.”

     

    이런 장르물 기다려왔어

     

    이 <악마와의 토크쇼>는 훌륭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왜 훌륭해? 아주 재미있기 때문에. 왜 재미있을까? 그러니까 글쓴이가 이 영화에 애착이 가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하면 굳이 생각을 두, 세 번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더 큰) 영화 노동자가 되기 위해 글을 쓰는 나는 감상에 있어 이런저런 사소한 부분까지 캐치해야 한다. 작은 부분까지 눈에 담아야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악마와의 토크쇼>는 이 과제들을 염두할 틈도 주지 않고 내내 강력하게 몰아친다. 영화가 몰입감이 좋은 것이다. 그리고 그 이전에 사소한 부분을 챙겨가며 영화를 볼 필요가 없다. 왜? 영화가 에너지의 근거를 친절하게 다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이 영화는 영화의 톤 측면에서 기괴한 톤을 유지한다. 그 근원지가 어디일까? 바로 우리가 아는 공포영화의 이미지들이다. 이 이미지들을 비틀어서 기괴함을 증폭시킨다. 글쓴이는 크리스투(파이살 바지)의 역할이 뛰어났다고 생각한다. 이 캐릭터는 메시지의 측면이나 이야기의 측면이나 영화의 분위기를 단단하게 만드는 역할인데 <악마와의 토크쇼>를 안 본 분들도 이 캐릭터에 매혹될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장르영화의 팬이라면 살짝 실망할 수도 있다. 이 영화가 강력한 미스터리로 똘똘 뭉친 영화인 것은 사실이다. 그 미스터리 영화 안의 기괴한 톤과 시너지가 있기 때문에 미스터리물로서의 쾌감이 어마어마하다. 그러나 그 내실을 따져보면 영화 안의 형식만 신선하고 원래 기획의도였을 것 같은 호러영화로서의 톤은 부실하다. 왜? ‘어떻게’는 충분히 신선하지만 ‘무엇’의 결과물이 이에 호응하지 못한다.  그래서 <유전> 같은 장르물을 기대하고 가면 실망할 수도 있다. 특히 이야기의 후반부에서 핵심을 보여주고 마무리지어야 하기 때문에 호러영화로서의 장르적인 특성은 포기한 흔적이 보인다.

     

    있는 그대로를 믿을 것?

     

    이 인간과 미디어의 관계에 카메라를 비추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그 핵심을 위해 영화가 설정한 것 중 가장 강력한 부분은 주인공 잭 델로이다. 잭은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100% 적합한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왜? 이 왜 적합한지에 대한 부분이 영화 초반부에 나온다. 이 프로그램을 운영하던 잭의 태도가 진지한 건 당연하다. 하지만 그 이면에 깔려있는 잭의 여러 히스토리들이 영화의 배경처럼 제시된다. 이 장면들은 굉장히 중요하다. 영화가 초반부부터 메시지의 측면에서 근거를 깔고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 장면을 통해 인물이 미디어를 어떻게 활용하는지를 영화가 코멘트한다는 점을 주의 깊게 염두하고 보시길 바란다. 그리고 어떤 매개체가 영화의 첫 장면에 등장하는지가 이 작품의 진주인공을 보여주는 방식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영화가 극 중 토크쇼를 관객이 초대받은 것 같은 형식을 띠고 있지만 그 이면을 탐구해야 한다. 누굴 위한 토크쇼일까? 사실상 이 영화 안의 토크쇼는 단 한 사람의 리액션을 위해 설계되어 있는데 그게 누구이며 또 그 과정이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선택이 제시되는데 이 과정을 묘사하는 방식이 흥미로웠다.

     

    또 주인공 외의 인물 관계도 이야기의 핵심을 전달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가령 주인공의 보조 mc 거스(리스 오테리)의 모습이 영화에 전면에 등장한다. 이 거스를 대하는 인물들은 무대 안에서나 밖에서나 일관성을 가진다. 이 일관성을 흐리는 선택이 아주 흥미로운데 이 둘의 공통점을 묘사하는 연출에 어떤 것이 들어갔는지 염두하고 보면 재미있으실 것이다. 또 이 인물이 어떤 존재에 의해 영향받는지도 이야기 안에서 굉장히 진하게 밑줄이 그어져 있다. 이 존재를 오고 가는 연출이 사실상 영화를 이끄는 플롯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 현실과 그 나머지의 세상을 잇는 감독의 박력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러닝타임이 다 끝나있다. 이 인물들을 보여주는 방식은 거스가 아닌 다른 캐릭터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다. 이 인물들은 어떤 존재 때문에 특정한 사건을 겪는다. 영매사 크리스투, 초능력자 사냥꾼, 모녀관계라고 볼 수 있는 릴리(잉그리트 토렐리)와 준(로라 고든)의 관계, 그리고 가장 중요한 주인공 잭까지. 인물들은 미디어라는 틀을 넘어 현실의 우리에게 침입한다. 가령 릴리가 카메라를 응시하는 눈빛은 기괴해서 장르적 원동력이 될 뿐만 아니라 핵심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단순한 이야기에서 천착하는 것이 아니라 다층적인 비유를 새겨놓은 각본가와 감독의 능력이 돋보이는 것이다.

     

    미디어 = ?

     

    영화 안에서 흥미로웠던 세 번째 지점은 핵심과 장르를 겹치게 연출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이야? 이 영화는 하나의 거대한 토크쇼다. 가장 중요한 단어는 ‘거대한’이다. 이 영화의 틀을 이루고 있는 미디어, 그러니까 토크쇼라는 존재는 관객에게 초자연적인 일을 묘사하는 원동력임과 동시에 이야기의 형식이다. 무슨 말이냐? 초반부에 1970년대 미국의 정치사를 보여주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사실적인 맥락을 넣은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의 마무리를 생각해 보면 이 영화의 틀을 부순다는 점이 재미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카메라로 담는다. 이 모든게 토크쇼인 것이다. 이 두 요소로 인해 영화의 톤이 상충하는 듯 하지만 이야기에는 걸림돌이 없다. 왜? 카메라의 존재 때문이다. 카메라의 의미가 영화의 플롯을 이끄는 것과 동시에 초자연적인 행위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이 카메라의 존재는 영화가 왜 영화인지를 보여줌과 동시에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거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은 수많은 정보가 쏟아지는 2024년의 관객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라 생각한다.

     

    또 <악마와의 토크쇼> 안의 토크쇼 관객과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의 관계가 흥미롭다. 이 둘은 사실상 동일시되기도 하고, 전후관계에 있어 전제조건이 되기도 한다. 무슨 말이냐? 각각의 관객(토크쇼/영화)의 성격을 미디어의 성격을 통해 분류한 것이다. 토크쇼의 관객은 쇼를 만드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 같지만 그 이면에는 제작자들의 이해관계가 관련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영화의 관객들은 카메라가 이끌리는 대로 향할 수밖에 없다. 이 두 가지를 엇갈리는 연출이 흥미로웠다. 이 엇갈리는 연출이 무엇인지 딱 겹쳐지는 지점이 있다. 장면이 무엇인지를 애둘러 써보자면, 이야기의 폭력적인 것을 지양한답시고 그 전부를 담는 뉴스를 여러분도 본 적 있지 않나? 이 영화의 카메라는 그런 느낌이다. 영화는 카메라를 통해서 이야기의 외면을 비추다가 어느 지점을 벗어나 시점을 급격하게 바꿔버린다. 이건 중요하다. 관객들의 관계를 영화가 뒤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급격하게 바꾸는 시점에서 느껴지는 쾌감이 대단한데, 토크쇼가 존재했기 때문에 1977년부터 2023/2024년에 이르는 영화의 메시지가 전달될 수 있는 것이고 ‘악마와의 토크쇼’가 가능했으며 관객을 향한 무언가가 가능했다는 점에서 이 장면이 중요하다는 것은 여러분 모두 다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을 전달하기 위해 어떤 분들은 영화의 엔딩이 납득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글쓴이는 이 영화의 이런 마무리야 말로 꼭 필요했던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언론홍보학과 출신 글쓴이가 전공 공부를 하며 배운 것이 있다. ‘서브리미널 효과’라는 것이 기억에 생생한데 이것이야 말로 미디어가 관객에게 끼치는 영향 그 전부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이 서브리미널 효과에 대해 다루고 있다. 우리가 봤던 미디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이 우리 삶에 틈입하고 있지 않은지를 끊임없이 탐구하는 영화인 셈이다. 어쩌면 이런 미디어의 속성이야 말로 진짜 공포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범죄도시 4>보다 더 재미있고 흥미로운 극장 나들이가 될지도 모르겠다. 강력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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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투쟁과 예술, 그리고 삶
  • 전설적인 사진작가 낸 골딘의 삶, 예술, 투쟁, 그리고 생존 언니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후, 사진은 나의 유일한 언어였다. 나는 생생하게 반짝이는 뉴욕에서 죽어가는 친구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포착했고, 있는 그대로의 내 얼굴을 솔직하게 담아냈다. 이제는 내 모든 명성을 걸고 거대 제약회사에 맞서 싸운다. 생존과 투쟁의 기록이 담긴 나의 일기장을 당신에게 펼쳐 보인다.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 줄거리

     

    

    낸 골딘(Nan Goldin)

    중상류층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난 낸 골딘은 10대에 카메라를 접했다. 1970년대에 그는 뉴욕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낸 골딘은 자신과 주변인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는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의 사진에는 당시 미국의 언더그라운드 문화가 적나라하게 담겨있었는데, 예술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전시가 취소되기도 했으나 그의 개인적이고 내밀한 작품들은 결국 '새로운 장르'라 칭해지며 낸 골딘은 동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가 중 하나로 뽑히기도 했다.

     

    

    새클러(Sackler)

    레이몬드 새클러, 모티머 새클러, 그리고 아서 새클러는 제약사인 퍼듀파머를 인수해 1957년부터 약을 판매했다. 그러다 1990년대에 그들은 오피오이드 약물인 옥시콘틴을 개발해낸다. 옥시콘틴은 새클러가의 전폭적인 지지하에 중독성 실험도 제대로 거치지 않은 채 대중들에게 판매된다. 그들은 의사에게 옥시콘틴 처방을 유도하기까지 하며 옥시콘틴이 세상에 퍼지도록 더 적극적인 활동을 이어간다.

    하지만 옥시콘틴을 처방 후 사망한 환자들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옥시콘틴에 대한 사람들의 의심이 불거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클러가와 퍼듀파머는 도리어 '마약 중독자들에 의해 벌어진 일이지 옥시콘틴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는 식의 논리를 펼치며 홍보를 계속해나갔다.

     

    

    P.A.I.N(Prescription Addiction Intervention Now)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는 세클러가에 대한 시위로 시작한다. 마약성 진통제인 옥시콘틴은 새클러가에게 막대한 부를 가져다줬지만 동시에 이 약이 안전하다 믿고 처방받은 많은 사람들을 중독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낸 골딘 역시 수술 후 옥시콘틴을 처방받았었고, 중독에 의한 극심한 고통을 견디다 겨우 살아났다.

    낸 골딘은 결국 살아남았지만 그러지 못한 사람이 몇십만 명이다. 그렇기 때문에 낸 골딘과 생존자들은 P.A.I.N이라는 단체를 만들게 된다. 영화에서는 이들의 투쟁을 계속해서 따라가는데, 특히 낸 골딘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가'라는 자신의 권위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바바라(Barbara)

    그리고 영화는 곧 낸 골딘의 가족사로 넘어간다. 낸 골딘의 언니인 바바라의 이야기를 하며 그가 유년 시절을 보낸 가정의 가장 내밀한 얘기를 풀어나간다. 낸 골딘은 바바라가 겪은 시련과 고통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자신의 이야기의 시발점으로 잡는다. 집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바바라의 삶과 죽음이 낸 골딘의 작품 세계와 연결되며 누군가의 삶은 결국 투쟁의 반복임을 보여준다. 낸 골딘이 그의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 이전부터 누군가는 투쟁을 이어나가고 있었으며, 그의 삶에 함께한 누군가들 역시 투쟁을 해나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영화를 찍는 동안과 그 이후에도. 이는 영화를 보고 있는 나에게까지 넘어오며 내가 몰랐던 때에도 알게 된 지금도 누군가의 투쟁은 계속되고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삶(Life)

    21세기를 지내고 있는 지금 낸 골딘이 적극적으로 찍어낸 20세기의 모습에서 얼마나 바뀌었을까. 많은 변화가 생겼다 말하는 이도 있을 테고 아직 변화는 멀었다 말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성 정체성, 약물중독, 에이즈 등 낸 골딘이 담아낸 수많은 소수자들의 삶은 여전히 선입견에 시달리고 있다. 바뀌긴 할까, 죽음이 나을 수도 있는 삶의 반복에도 그들은 투쟁을 이어간다.

    낸 골딘 역시 마찬가지다. 그의 투쟁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결국 많은 박물관에 새클러의 이름을 지웠다. 좌절이 계속되는 시대에 이는 실로 반가운 소식일 수밖에 없다. 과거의 삶은 투쟁으로 남고 이는 다음의 삶으로 이어져 나간다. 그렇게 '이어져 나간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약물중독에 고통받던 이들의 삶은 낸 골딘을 비롯한 다른 피해자들에게 이어졌고, 기약 없을 것만 같던 투쟁은 결국 실낱같은 성공을 이끌어냈다. 끝없는 삶은 결국 반복을 변화로 이끌어 낼 것이라는 희망을 이 영화에서는 보여준다.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All the beauty and the bloodshed)

    개인의 삶은 각자의 투쟁을 가지고 있다. 바바라의 가정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한 자신의 정체성에 의한 투쟁부터 낸 골딘의 주변 인물들이 가지고 있던 각자의 투쟁들, 그리고 낸 골딘 자신이 겪은 중독 등에 의한 투쟁까지. 이것들은 모두 사람들이 꺼려 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개인에게 내밀한 것이 된다. 하지만 낸 골딘은 이것들을 있는 그대로 사진으로 찍고 예술로 만들어냈다. 예술이 아름다움을 표현해 내기 위한 활동이다. 그리고 낸 골딘은 사람들이 꺼려 하는 투쟁의 모습들을 가감 없이 드러냄으로써 더이상 외면할 수 없는 도리어 눈을 뗄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가 보여주는 삶과 그 안의 투쟁을 목격한 자들은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를 본 관객들은 이제 자신의 삶과 그 안의 투쟁을 바라볼 때이다. 이 영화의 끝이 낸 골딘이 아닌 자신과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투쟁이길 바란다.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 시사회에서 관람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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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없는 농담에 가려진 소비와 환경에 대한 메시지
  • 사실 프랑스 영화에 대한 편견이 있다. 철학을 논한다는 명분 아래 귀신 씨나라까먹는 소리하는 것 아닌가 싶었던 영화도 꽤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다분히 주관적이고 편견 가득한 말이다. 인정한다.) 하지만 철학도 현실에 적용할 수 없다면 그저 한 사람의 궤변이 될 수 있고, 누군가 정의를 외치며 극단적으로 도덕을 들이밀게 된다면 그는 내 말을 들어달라고 떼쓰는 어른으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정의로운 명제일지언정 현실 사람들에게 크게 와닿지 않는 외침이 얼마나 정의로울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기도 한다. 이처럼 프랑스 영화들은 수많은 철학적인 관점에서 고민하게 하는 영화들을 많이 만들어낸다는 인식이 있다. 환경 문제, 채식, 인종차별, 젠더갈등 등 수많은 문제들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대처해야할까 고민하게 되는 그런 영화들, 말이다. 가끔 딱히 서사가 있지 않으면서 대사에 온갖 철학적인 내용으로 가득한 내용의 영화를 볼 때의 길을 잃어버린 내 눈동자는 어떻게 숨길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간만에 적당한 유머와 함께 가볍게 볼 수 있으면서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를 고민하게 되는 영화를 만났다. 영화의 주인공은 3명이다. 대출빛에 허덕이며 가족들에게 짐 취급 받고 있는 브루노와 알베르 그리고 과도한 소비를 하는 현대인의 문제를 꼬집으며 인간의 소비가 환경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 시위를 주도하는 비영리단체장인 캑터스다. 인간의 과도한 소비의 결과를 대표하는 두 남자와 극단의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캑터스의 상반된 모습이 의외로 웃기다. 당장 돈이 없으니 온갖 방법으로 돈을 벌기 위해 악착같이, 어쩌면 비굴해 보일만큼 살아가는 두 남자에 반해, 넓은 집에 살면서도 흔한 소파와 의자 마저 없어 바닥 생활을 하는 캑터스를 보고 있자면 정말 세사람 다 별나다 싶다.


    그리고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당장 밥먹을 돈도 없어서 비영리단체를 돕고 있으면서 이 와중에 알베르는 캑터스를 이성적으로 좋아하기까지 하다니, 참 이 남자 살만한가 싶었다. 철이 없는 것인지, 즉흥적이라고 해주어야 할지 참 어이가 없으면서도 막판에 귀여워보이기까지 한다. 참 한심하다 싶다가도 또 무슨 사고를 칠지 지켜보게 된달까. 그 장단을 브루노가 맞춰주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참 두 사람 죽이 잘 맞는 커플 같아 보인다. 러브라인은 알베르와 캑터스가 그리고 있는데, 왠지 내 눈에는 이 두 남자가 찐사랑이다.


    그리고 이 영화 속에서 웃긴 장면을 꼽아보자면, 두 남자의 채무 면제를 도와주는 남자 마저 알고보니 도박 중독으로 블랙리스트에 올라있는 사람이었다는 설정이다.  매번 카지노에 입장 금지 당하면서도 끝까지 들어가보려고 온갖 변장을 하는 모습이 꽤나 코믹하다.

    캑터스 캐릭터도 참 특이하다. 인간의 소비로 인한 환경 문제를 꼬집는 사람인 만큼, 극단의 미니멀리스트를 추구한다. 개인적으로 캑터스는 아예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모든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게 캑터스의 맹점이라고 생각하는데, 미니멀리스트를 '생활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다는 물건을 하나 구매하고, 그 하나를 잘 관리하면서 사는 사람'이라고 규정짓고 있는 나로서는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긴 했었다.


    <주의! 여기서부터는 개인적인, 편견에 가득찬 주관이 가득합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 취향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그것을 충족하고 사는 것도 인간다움의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캑터스의 논리는 환경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며 인간의 기본적인 취향 찾을 권리 조차 묵살하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물론 인간의 과도한 소비는 환경을 망친다는 대전제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블랙프라이데이의 소비자들을 막아가며 돈 쓰지 말라고 앞을 막는 행위는 도를 넘는 것 아닌가 싶었다. 정말 필요한 물건을 사러 왔을 지도 모르는데, 무조건적으로 소비는 나쁘다고 규정짓고 당신들도 참여하라고 강요하는 듯한 강력한 시위를 계속하는 것은 거부감을 일으킬 수 있지 않나 생각했다.


    어느 나라든 환경운동이든 젠더 갈등이든 도덕적 잣대로 내가 맞네, 네가 맞네 끊임없이 토론하게 되는 운동들을 주도하는 운동가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의 과격한 운동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이 동요하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내 나름대로 생각해본다면, 극단성에 있지 있나 생각한다. 그들이 요구하는 도덕적 기준이 너무 극단적이어서 일반적인 사람들이 전적으로 동의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 환경 문제의 경우, 환경을 지켜야 한다는 큰 명제에는 동의하지만 환경을 지켜보겠다고 이미 만들어진 제품들을 사지 않고 극단적으로 소비 지출을 줄이라는 요구에는 응해줄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캑터스가 진두지휘하는 이 비영리단체에서 정말 환경운동만을 위해 참여하는 사람들은 몇 명이나 될까. 브루노, 알베르 외에도 다른 한 명의 회원도 캑터스를 좋아해서 맴돌기 위해서 하는 거 아닌가 싶은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삼각 관계가 아닌, 사각관계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싶다. 캑터스만이 진심이고, 모두가 약간의 군중심리로 움직이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게 되는 장면도 있었다. 인간의 신념은 생각보다 유약하고, 신념이라고 외치는 사람들 중에서 진짜 신념은 몇 명이나 될지 이런 쓸데없는 생각도 스쳤다.


    무엇보다 빛더미에서 벗어나기 위해 프랑스 은행을 상대로 사기를 치는 두 남자의 허술함이 참 웃기다. 그 사기를 칠 머리로 돈을 벌었다면 진작에 갚을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알베르가 돈이 궁해서 공항에서 압수된 중고 물품을 파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뭐라도 해서 먹고 살았겠구만 싶은데, 또, 프랑스 은행에서 공적 문서의 중요 정보를 화이트로 지우고 있는 꼴을 보고 있자면 '내가 괜한 인간에게 기대를 걸었다' 싶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친구와 했던 말이,

    '영화 속의 인물이니 웃고 재밌어하지, 실제로 내 주위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 미쳐 돌아버리고, 끝내 손절치지 않았겠냐'였다. 이런 사람들은 픽션에서만 엮였으면 좋겠다.


    총평


    가끔 심각한 서사만 찾아다니다 보면, 이런 가벼운 영화를 찾게 된다. 킬링타임으로 적당한 영화다. 그리고 캑터스 역의 여배우가 예쁘게 나온다. 이 배우,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도 인상적으로 봤었는데, 현대물에서보니 새롭고, 자연스럽게 예뻐서 보기 좋았다. 가벼우면서도 가볍지 만은 않게, 토론을 유발하는 적당히 괜찮은 영화를 만나게 되어 기쁘다.


    *해당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 참석 후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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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배종인 인간의 존재의미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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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화한 유인원(Ape)과 퇴화된 인간들이 살아가는 디스토피아 행성. 유인원은 세상의 지배종이 되었고 인간들은 사냥의 대상에 불과하다. <메이즈 러너> 시리즈의 웨스 볼 감독이 연출하고, <아바타: 물의 길> 조쉬 프리드먼이 각본을 썼다. 제작비는 1억 6천만 달러, 한화로 약 2200억 원이다. 평균제작비 약 100억(홍보비 추가 총제작비는 약 125억)이 드는 한국 상업 영화를 20개 이상 만들 수 있는 대작이다. 

     

     혹성탈출 시리즈는 리부트(Reboot)  영화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이 리부트 영화의 유행을 가져왔다. 놀런 감독은 오래되어 폐기 수준에 있던 배트맨의 캐릭터에 새롭게 스토리를 입혀 대박 흥행을 가져왔다. 이후 많은 리부트 영화 시리즈가 시도되었고 혹성탈출 시리즈도 그중 하나다.    

     

     혹성탈출 시리즈처럼 한국에서도 마동석의 <범죄도시> 성공으로 시리즈 영화에 관심이 많아졌다. 개별 독립된 영화는 유명감독의 대작 영화일지라도 흥행을 장담할 수 없다. 시리즈 영화의 장점은 예측가능성이다. 경험을 토대로 제작비 규모와 개봉 시기를 정하기가 쉽다. 

     

    캐릭터를 관객에게 설명하는 시간 등 영화 초반의 빌드업 과정을 과감하게 줄이고 바로 본론에 들어가 관객을 몰입하게 할 수 있다. 충성도 높은 팬덤이 형성되면 흥행의 강력한 엔진이 된다. 시리즈 영화는 스핀오프(번외 편)와 프리퀄(전사) 등 다양한 형태로 변주할 수 있어 확장성도 크다.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는 인간 세상이 어떤 방식으로 망할 수 있는 지의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태양계 행성의 지배종이 된 유한한 존재인 인간. 영화는 인간의 욕망과 교만으로 결국 문명을 잃어버리게 될 디스토피아 세상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화면 크기가 감동을 다르게 한다.’는 아내의 말에 동의한다. 영화를 방구석 1열이 아닌 극장에서 보는 주된 이유다. 우리는 용산 CGV 아이맥스 관에서 영화를 보았다. 마치 실제 유인원들이 영화에 출연한 듯 얼굴에 나타나는 섬세한 감정표현, 거대한 숲이 된 고층 빌딩, 프록시무스 군단의 거처인 폐기된 크루즈선 등을 큰 화면에서 실감 나는 영상으로 즐겼다. 

     

     러닝타임은 다소 긴 145분이다. 이 정도의 상영시간이라면 놀라운 영상만으로는 부족하다. 이야기(Story)와 서사(Narrative)가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관객이 중간에 피로도를 느끼게 됨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굳이 옥에 티를 찾자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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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성 마늘 홍보영화인가? 로맨스 영화인가?
  • 이 달달한 유치함에 웃었네요.

     

    곱씹어 볼수록 꼬집을 것들이 난무한 영화였지만, 왜인지 그리웠던 무해한 영화가 제 마음을 녹였나 봅니다.     

     

    감동을 받으면 안 되는 희귀한 병에 걸린 여자와 중요한 순간마다 다른 일이 생겨 매번 쓴 고배를 마셔야 했던 남자의 사랑 이야기인데요.     

     

    오랜만에 스크린으로 돌아온 홍수아 배우가 희귀한 감동 병을 앓는 전보영을, 오래전 박카스 CF 훈남이자 드라마에서만 얼굴을 보인 최웅 배우가 참 운이 없는, 최철기 역을 맡았습니다. 어리지도 않고 적당히 무르익은 86년생 두 동갑내기 배우는 꽤 호흡이 잘 맞는 것 같네요.    

     

     

     

     

     

     

    영화는 이미 알려준 그들의 약점으로 행복함을 방해하더군요.

     

     

    사랑의 힘으로 다시 꿈을 찾아 컬링을 하는 보영이는 감동을 받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점을 이용해 적당한 불편함과 위기를 심어주었죠.. 철기는 겪어왔던 여러 불운한 일들로 인해 그간 벌이도 시원치 않은 데다, 결혼해 살아야 할 집 한 채는 남의 이야기만 같습니다.   

     

     

    오래전 로맨스/멜로 영화의 단골 소재인 희귀병과 경제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를 이 커플이 어떻게 헤쳐나가는지가 하나의 재미가 되어야겠죠. 그러나, 김우석 감독은 매우 단조롭고 쉬운 방법을 선택했네요. 운으로 해결지어진 그들의 문제 때문에 재미도, 캐릭터의 매력도 반감이 되었답니다.    

     

     

    관심을 모았던 희귀병에 대한 응급 처치는 의성 마늘로 해결을 했고. 집 문제 역시 이 지역 이웃의 좋은 인심으로 임시처방 되었습니다. 이쯤 되면 의성군 홍보 영화였네요.   

     

      

     

    영화가 제작될 때. 의성군은 ‘팀 킴’을 앞세운 컬링과 마늘 홍보에 주력했는데요. 촬영 장소도 90% 이상이 의성군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의성군의 <감동주의보> 사랑이 남달랐던 만큼, 영화도 의성군에게 가뜩이나 충분했던 마늘 사랑으로 화답하고요.     

     

     

     


     

     

     

    사실, 영화로만 보면 흠이 참 많은 작품입니다.

    뻔한 이야기에 익숙한 감동이기도 하고요. 유치했지만, 저는 이런 순수한 두 청춘의 모습이 아름다웠답니다. 커플의 (마늘) 사랑보다도, 부족한 환경 속에서도 밝게 웃으며, 행복하게 사는 그들의 환한 모습에 마음이 참 따뜻했네요. 

     

     

     

    이미지 출처 : NAVER 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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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퓨리오사 | 모래맛과 쇠맛은 덜고, 눈물맛은 더하고
  •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문명 붕괴 45년 후. 풍요로운 ‘녹색의 땅’에서 지내던 ‘퓨리오사’(안야 테일러-조이)는 '디멘투스'(크리스 헴스워스)의 바이커 군단에 납치돼 가족과 행복을 모두 잃어버린다. 인질이 된 퓨리오사는 디멘투스의 어깨너머로 황무지에서 살아남는 법을 익힌다.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킬 날만을 기다리며.  

     

    그러던 어느 날, 퓨리오사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황무지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 '가스타운'을 점령한 디멘투스가 '시타델'의 지도자 '임모탄 조'(러치 험)와 평화 협정을 맺으면서 그녀를 임모탄 조에게 넘겨 버린 것. 믿음직한 동료 ‘잭’(톰 버크)의 도움을 받으면서 퓨리오사는 시타델의 전사로 거듭나고, 그녀는 아껴두었던 복수의 칼날을 마침내 꺼내든다. 

     

     

    형 만한 아우 여기 있다

    2015년 여름에 개봉한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이하 <분노의 도로>)는 신드롬이었다. 강렬한 모래맛 영상미와 쇠맛 액션은 센세이셔널했다. 드라마를 최소화하고 액션에 집중하는 <매드맥스> 시리즈 중에서도 유달리 액션에 힘을 잔뜩 준 덕분이었다. 전작이 <해피 피트>와 <해피 피트 2>인, 70세 노감독 조지 밀러 만들었다고 믿기 힘들 정도였다.  

     

    관객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국내에서는 390만 관객, 월드와이드 3억 7천만 달러 이상의 흥행을 기록했다. 평단도 다르지 않았다. 제8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의상상, 분장상, 미술상, 편집상, 음향편집상, 음향효과상을 싹쓸이했고, BBC가 100대 21세기 영화에 선정하기도 했다. 

     

    자연히 속편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이하 <퓨리오사>)를 향한 기대는 컸다. <퓨리오사>는 <분노의 도로>에서 주인공 맥스보다도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은 퓨리오사의 과거사를 다룬 프리퀄로, 제77회 칸 영화제에도 공식 초청됐다. 9년 만에 돌아온 프리퀄은 그 기대에 부응한다. 비록 전편만큼의 모래맛과 쇠맛은 아니지만, 큰 문제는 아니다. 처절한 복수극을 펼치는 퓨리오사의 눈물이 그 빈자리를 훌륭히 채우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궁금했던 모든 것 

    <퓨리오사>는 <분노의 도로>를 보고 한 번쯤 가졌을 의문점을 해소하는 데 주력한다. 늪지대로 변하기 전 녹색의 땅의 모습. 그곳에서 보낸 퓨리오사의 유년 시절. 그녀가 납치당한 계기와 시타델에서의 성장기. 그가 임모탄 조의 전적인 신뢰를 받는 장군으로 거듭나는 서사시와 의수를 달게 된 사연. '버자드'와 '바위 라이더'의 정체. 심지어는 맥스와의 잠시 스쳐 지나간 인연까지. 

     

    과거를 단순히 설명하는 데서 그치지도 않는다. 전편과의 연계점을 명확히 보여주며 퓨리오사의 전체 서사를 곱씹게 만든다. 어머니를 죽인 빌런 디멘투스에게 복수하는 퓨리오사. 그녀는 복수를 통해 그에게 빼앗긴 어머니와 유년 시절을 되찾고, 구원을 얻고자 한다. 이는 본편에서 그녀가 유독 임모탄 조의 여자들, 곧 엄마가 될 여성을 구원하려고 애쓴 동기로 작용한다. 

     

    또 그녀가 디멘투스를 응징하는 방식은 그녀가 시타델을 점령한 후 새로운 녹색의 땅으로 만드는 전편의 결말을 더 의미심장하게 만든다.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와 <스타워즈: 새로운 희망>처럼 <퓨리오사>의 결말이 전편의 시작으로 곧장 이어지기에 더욱 그렇다. 특히 <분노의 도로>의 하이라이트가 삽입된 엔딩 크레디트 덕분에 그 감흥은 배가 된다. 

     

     

    모래맛과 쇠맛이 덜한 이유 

    물론 전편과의 차이가 작지는 않다. 전편이 퓨리오사의 탈출 계획이라는 사건을 쫓은 반면, <퓨리오사>는 퓨리오사를 캐릭터에 주목하기 때문. 전자가 직선적이라면, 후자는 곁가지 더 많고 서정적이다. 정키 XL이 다시 참여한 음악만 봐도 접근법의 차이가 분명하다. 웅장하고 공격적이었던 <분노의 도로>의 음악과는 달리 <퓨리오사>의 음악은 간결하고 단순하다. 이는 빨간 기타리스트의 존재감이 전편 같지 않은 이유다. 

     

    액션도 마찬가지다. 물론 양과 질은 진일보했다. 4륜 이상 차량 35대와 바이크 110대가 동원된 액션 시퀀스의 스케일은 압도적이다. 연출도 더 입체적이다. 패러글라이딩과 차 아래 공간을 활용해 전편보다 더 입체적이고 공간감이 느껴지는 액션을 보여준다. 하지만 드라마를 다루는 분량이 늘어나다 보니 액션 시퀀스 사이 공백은 상대적으로 길다. 그 결과 전체적인 임팩트가 덜하고, 모래맛과 쇠맛이 약하다고 느낄 여지가 있다. 

     

    접근법의 변화는 캐릭터를 다룰 때도 일장일단이 있다. 퓨리오사를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면서도, 그녀만의 특별함은 사라지는 듯하다. 퓨리오사는 기존 할리우드 여전사와는 분명히 구분되는 캐릭터였다. 싸우는 목적이 달랐다. 퓨리오사는 현재의 삶 대신 더 나은 삶과 구원을 찾았다. 그래서 맥스를 만나기 전까지 그녀는 임모탄 조의 여자를 빼돌려 새로운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 땅을 향해 달릴 생각만 했다. 

     

    하지만 <퓨리오사>를 보고 나면 전편에서 목격한 퓨리오사의 서사가 장대한 복수극의 일부임을 알 수 있다. 곧 그녀 역시 빼앗긴 삶에 대한 복수와 모성애 때문에 싸우는 일반적인 여전사 중 하나로 전락한다. <에일리언>의 리플리나 <터미네이터>의 사라 코너처럼. 퓨리오사에 대해 너무 많이 알게 된 나머지 그녀의 신비감, 아우라까지 약해지고 만다. 프리퀄의 근본적인 한계까지는 넘지 못한 셈이다.   

     

     

    현재와 미래 사이에서

    하지만 퓨리오사의 복수극을 곱씹어 보면 약간의 아쉬움은 금세 자취를 감춘다. 그녀가 흘리는 눈물에 응축된 이야기를 뜯어보는 재미 덕분이다. 특히 새 빌런 디멘투스와 퓨리오사의 관계가 흥미롭다. 의외로 둘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가족을 잃었다. 디멘투스는 아이를, 퓨리오사는 어머니를 떠나보냈다. 그렇게 악만 남은 둘은 복수와 생존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한 채 발악한다. 

     

    그런데 발악의 방향성은 정반대다. 디멘투스의 발악은 파괴적이다. 딸의 유품인 인형을 망토에 매단 채 사막과 황야를 헤집고 다니면서 약탈하고, 자기 같은 피해자를 다시 만들어낸다. 퓨리오사는 다르다. 그녀는 현재를 딛고 새 미래를 꿈꾼다. 고향에서 가져온 열매의 씨앗을 심어 새 나무를 키우려 한다. 즉, 디멘투스가 절망적인 현재에 갇힌 반면, 퓨리오사는 현재의 모래 폭풍을 뚫고 미래를 바라본다. 

     

    이 대목은 전편 못지않게 인상적인 여성 서사다. 디멘투스와 퓨리오사의 대립은 파괴적인 부성애와 재생산의 모성애의 대조나 다름없으니까. 그래서 퓨리오사는 아버지를 자처하는 디멘투스와의 관계를 끊어낸다. 그를 단순히 고문하거나 죽이지 않고 그의 몸 위에 나무를 심어 그를 살아있는 거름으로 삼는다. 그녀가 잭과 동료이자 연인이 되는 이유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잭 역시 다음 세대를 먼저 생각할 줄 알기 때문. 

     

     

    액션을 넘어 정치극까지

    더 나아가 퓨리오사의 복수극은 정치 드라마로 확장된다. 퓨리오사라는 렌즈를 통해 보면 임모탄 조와 디멘투스의 차이는 명확하고, 그 덕분에 그들의 합종연횡을 지켜보는 묘미도 커진다. 사실 퓨리오사는 디멘토스보다도 임모탄 조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들은 미래에 대한 비전이 있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단지 물과 같은 자원의 독점 여부를 두고 비전의 모습과 방법론이 달랐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임모탄 조는 퓨리오사가 그러했듯이 디멘투스와 싸울 수밖에 없다. 미래를 걱정하는 자와 현재만 사는 자의 충돌은 필연적이니까. 실제로 임모탄 조가 물, 가스, 식량, 무기 공급을 유지하며 장기적인 생존을 추구하는 반면, 디멘투스는 지금 당장 먹고살고 자원을 소비하기에 급급하다. 문명 붕괴 45년 후라는 시간대를 고려하면 이 전쟁은 자연스러운 수순처럼 보이기도 한다. 

     

    정치극의 묘미는 <매드맥스> 세계관이 확장하는 데도 공헌한다. 두 빌런은 전편에서 짧게 언급된 공간을 오가며 전쟁을 펼치기 때문. 전작이 사막과 황무지라는 자연환경을 적극 활용했다면, 이번에는 세 개의 도시가 전면에 등장해 권력의 삼각형을 묘사한다. 재등장한 시타델은 물론, 유전 한가운데에 위치한 가스타운과 거대한 광산을 연상시키는 무기 농장의 이미지가 뇌리에 박히는 이유다. 

     

     

    마지막으로 두 주연의 연기도 일품이다. 안야 테일러-조이의 경우 샤를리즈 테론의 존재감을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연약한 소녀부터 냉철한 여전사까지 더 폭넓은 이미지를 소화하며 미완의 퓨리오사를 성공적으로 탄생시켰다. 디멘투스는 잔인함과 유머 사이에서 미묘한 균형을 잡아낸 크리스 헴스워스 덕분에 임모탄 조에 비견될 만한 빌런이 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퓨리오사>는 전편 못지않은 걸작이다. 사건이 아닌 인물을 다루다 보니 덜 직선적이고, 그래서 호불호가 갈릴 수는 있다. 하지만 더 풍성해진 <매드맥스> 세계관을 맛보고, 퓨리오사의 복수극을 두세 번 곱씹어 보는 경험은 거부하기 어려운 영화적 경험이다. 전편에 열광한 관객이라면 더더욱.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분노의 도로> 그다음 이야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모래와 쇠를 달구는 그녀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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