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2024-08-19 21:21:04
우리 숨바꼭질해, 그리고 다신 잡히지 마
알리체 로르바케르, <더 원더스> 리뷰
<행복한 라짜로>(2018)와 <키메라>(2024) 이후에야 우리에게 도달한 알리체 로르바케르의 초기작 <더 원더스>(2014)는 어쩌면 그의 작품 중 가장 놀랍고도 아름다운 영화로 기억될 것 같다. <키메라>까지 무르익어 간 로르바케르의 재능이란 주로 노골적이면서도 섬세한 대비를 활용하는 재주에 있었다. 이쪽과 저쪽, 차안과 피안, 도시와 시골, 빈자와 부자, 순수와 교활을 빈번히 오가며 비추는 데에 누구보다 능숙했던 로르바케르이기에, <더 원더스>의 모호하고 꿈과 같은 상징들은 더욱 예상 밖의 즐거움으로 다가온다.
의도된 침묵, 도망친 벌들과 낙타, 빛을 마시는 동작과 동굴에서의 춤 등은 메인 플롯인 고립된 아이들의 성장 서사에 불쑥불쑥 난입하며 알쏭달쏭한 풍경을 연출한다. 그러면서도 관객을 속이기 위해 철저히 계산되었다거나 일부러 에둘러간다는 느낌 없이 순진하고 투명한 이야기를 전한다. 실증에서 출발해 환상을 얹은 것이 영화라는 매체의 본질임을 생각해보면 대개 직관적이고 거칠은 쪽에서 부드러운 은유 쪽으로 나아가는 게 많은 창작자들이 밟는 전철일진대, 알리체 로르바케르는 처음이 가장 은유적이었고 지금이 가장 직설적인 화법을 발전시키면서 일종의 역행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 더 놀랍다.
<더 원더스>는 군견을 데리고 밤길 수색을 나온 군인들이 등장하는 이색적인 오프닝부터 ‘이야기’에 대한 집중력을 단번에 끌어올린다. 이 군인들은 나머지 서사의 진행과 전혀 무관하며 주연 인물들과 엮이지도 않는다. 이야기 바깥에 위치한 그들은 외딴 곳의 민가를 발견하고 “저런 곳에도 집이 있다”고 소리치기 위해서 아주 짧은 순간만 등장할 뿐이다. 눈이 침침한 어둠 속에서 불을 비춰 시작을 알리는 이들은 곧 우리에게 전해져 올 ‘이야기’를 낭독할 전기수의 바람잡이, 연극의 첫 막이 시작할 때 열리는 무대의 장막, 세헤라자데의 천일야화를 이끌어낼 동생 두냐자데와 같은 역할을 하는 도구다. 군인의 외침 덕에 우리는 “저런 곳”의 거주민인 주인공들을 마주하는 즉시 그들의 ‘이야기’가 해석될 수 없는 동화처럼 미완으로 남으리란 사실을 직감한다.
그 이야기란 이렇게 시작된다. 한밤중 군인들의 수색으로 집 밖이 훤해지자 여자아이들이 하나씩 깨어난다. 큰딸인 젤소미나는 화장실에 가겠다고 떼쓰는 동생 마리넬라를 단도리하고 더 어린 쌍둥이 동생들은 덩달아 깬 금발의 젊은 어머니에게 매달린다. 젤소미나는 동생들을 달래는 어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거실의 하나뿐인 TV를 점령하고 소파에서 잠든 아버지를 익숙한 듯 일으켜 침실로 올려보낸다.
양봉업자인 아버지 볼프강은 문명과의 단절을 추구하는 기이한 라이프스타일을 나머지 가족들에게도 강제하는 가부장이다. 장녀답게 눈치 빠른 젤소미나는 벌을 돌보고 채밀기 밑의 꿀 양동이를 한밤중에라도 갈아줘야 하는 큰 책임을 자연스레 지게 된다. 딸이라기보단 특급 일꾼을 대하는 듯한 아버지의 태도에서도 젤소미나는 부녀 간의 유대를 찾아내고 나름의 뿌듯함을 느낀다. 어머니 안젤리카(알바 로르바케르)는 대체로 다정하지만 더 어린 아이들을 돌보느라 젤소미나에게 면밀히 신경써줄 겨를이 없고, 남편의 기행, 일방적인 통보, 대책 없는 금전 감각에 질리고 포기한 듯 대체로 반기를 들지 않는다.
양봉과 가사에 밀려 학교는 제대로 다니고 있을지 혹은 다녀본 적은 있을지 걱정스럽고, 직접적인 폭력이나 악의는 없더라도 정황상 아동학대와 노동 착취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척박한 환경에 불과 열두 살의 젤소미나는 덜렁 놓여있다. 종종 창고에서 젤소미나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동생 마리넬라와는 살짝 터울이 지고, 또래 친구 조이아와는 많이 다른 가정환경 탓인지 살짝 어색한 거리감이 있기에, 그애는 너무나도 철저히 혼자다. 언제나 고독했 라짜로와 아르투처럼.
토스카나의 새파란 바다와 드넓은 평야는 무척 아름답지만 그것을 ‘자연 상태 그대로’ 보존하는 것은 그 시점에 이미 불가했다는 걸 현대의 관객은 알고 있다. 그러나 볼프강은 아직 다가올 운명을 모르거나 모르는 체 하고 있다. 전통적 농법과 양봉을 고집하느라 늘 돈도 모자라고, 이웃들과도 척 지고, 아침마다 집 밖 침대에서 깨어나 사냥꾼의 총성에 미친듯이 화내며 모두를 쫓아내려 한다. 볼프강은 외부에서 밀려들어온 자본에 ‘농민끼리 단결해 맞서야 한다’고 펄펄 날뛰면서 거대한 흐름에 홀로 맞서고자 한다. 굳건한 반골의 의지만큼은 존경스러우나, 아직 미성년인 자식들마저 투쟁에 억지로 동원되고 있다는 게 문제다.
외골수 아버지와 힘이 부친 어머니 사이, 과중한 노동과 외로움에 조용히 짓눌려가는 젤소미나에게 어느날 갑작스레 외부로부터의 충격이 두 번이나 가해진다. 하나는 그 시골의 계곡까지 커머셜 쇼 프로그램 광고를 찍으러 온 인기 배우 ‘밀리’, 다른 하나는 아버지가 가족들과 상의 없이 데려온 독일 소년 ‘마틴’이다.
아름다운 백금발에 여신 같은 차림의 밀리(모니카 벨루치). 그는 네 자매의 이름을 물어봐주고 가장 수줍어하는 젤소미나를 다정히 쳐다보며 예쁜 머리핀을 선물한다. 밀리와의 만남으로 인해 젤소미나는 바깥 세상과의 교류를 더욱 갈망하고 밀리가 홍보하던 ‘전원의 기적’ 쇼에 출연하고 싶다는 소망을 남몰래 품게 된다. 그 와중 소년원에 다녀온 아이들의 재사회화를 위한 위탁 가정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마틴이 이 가족에 배정되는데, 기관 담당자가 “어긋난 아이들이 흔히 그렇듯” 방화나 절도 전력이 있다고 태연하게 부연하자 엄마 안젤리카가 딸들이 걱정되지도 않냐며 볼프강에게 불같이 화를 내기 시작한다. 네 딸들은 커가는데 진정한 일꾼이 되어줄 ‘후계자’ 아들은 태어나지 않자 부족한 노동력에 초조해진 볼프강이 제멋대로 위탁(이라고 말하고 합법적 아동착취라고 불러도 모자라지 않을)을 신청해놓곤 당일이 되어서야 말하는 걸 잊었다며 실토한 것이다.
휘파람으로 노래할 줄 알지만, 이탈리아어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 불청객인 마틴. 마리넬라가 “잘생겼다”며 소근거릴 정도로 진한 외모로 소녀들에게 이상한 긴장을 불러일으킨 마틴. 로르바케르 영화 속 꾸준히 수수께끼의 존재로 그려지는 ‘이방의 남자’에 대한 아이디어가 여기서도 발견된다. 직계 가족이 아닌 성인 여성 코코 외에 한 사람의 군식구가 더 늘자 젤소미나 가족의 역학은 빠르게 변화한다. 키는 작지만 힘센 마틴을 보며 아버지가 흡족해하는 표정, 자기들을 보며 “계집애들이란!”하고 내뱉는 표정을 비교하며 젤소미나와 마리넬라의 얼굴은 점점 더 일그러진다.
단박에 아버지의 신뢰를 뺏어간 마틴을 향한 젤소미나의 질투, 아버지를 향해 피어나는 반항심, 그런 딸을 두고 “쟤가 없으면 난…” 안될 거라며 친구에게 조용히 드러낸 볼프강의 진심, 마틴과 젤소미나처럼 외로운 이들끼리 필연적으로 품게 되는 서로를 향한 호감 어린 호기심, 잠깐씩 어그러지는 젤소미나와 마리넬라의 우애까지. 어지러이 뒤섞이는 감정들 속 아버지는 여전히 강경하게 젤소미나가 나가고 싶어하는 ‘전원의 기적’ 쇼에 신청하지 말라고 명령하지만 아이는 이미 멈출 수 없는 격정에 몰래 신청서를 써낼 각오도 불사한 채다. 꿀을 팔러 나갔던 어느 날 시내에서 마주친 폭풍우는 잦아들지 않고, 바람에 날리지 않게 몸으로 벌통을 꽉 누른 트럭 안에서 젤소미나는 돌연 “우리 거기 참가해요”라며 눈물을 흘리고 만다. 그러니까 그건 더이상 삶의 고독과 혼란을 혼자 감당할 수 없어진 아이의 몸을 뚫고 나온 절규에 가까웠을 것이다.
결국 가족은 우여곡절 끝에 ‘전원의 기적’ 쇼에 양봉업 대표로 출연하게 되긴 한다. 젤소미나가 몰래 신청하고 심사위원이 다녀갔단 걸 뒤늦게 알게 된 볼프강이 말을 잃을 정도로 분노하고 상처받긴 했지만. 여기서 알리체 로르바케르 특유의 아주 섬세한 터치가 정념을 제대로 건드린다. 아이들이 꿀을 엎고 마리넬라가 다치고 심사위원을 맞이하고 난장판을 수습하는 한나절 동안 볼프강이 시내에 나가 큰딸에게 선물할 낙타를 사서 의기양양하게 돌아왔기 때문이다. 감정적 위기가 최고조에 달한 이때, 마틴의 등장 이후 소원해진 큰딸과의 사이를 풀고자 아버지가 기껏 드물게 다정을 발휘했는데 이 ‘선물’을 반기는 이는 아무도 없다. 안젤리카는 힘겹게 모은 돈을 고작 낙타 따위에 다 써버린 남편에 분노하며 이번에야말로 헤어지겠다고 선포하고, 젤소미나는 아버지가 가장 싫어할 만한 유형의 외부인 - 지적 권위를 갖고 자본의 호위를 받는 남성 심사위원 -을 들였다며 고백하는 것이다.
어릴 때는 낙타를 갖고 싶어했던 큰딸은 이제 그게 ‘불법’이란 걸 알게 됐고, 아버지가 뭔가 이상한 사람이란 걸 의식하며 바깥 세계로의 탈주를 염원하게 됐다. 그리고 그 아버지는 무엇이 됐든 분명 자신이 질 싸움이란 걸 차차 직감하고 있는 중이다. 코코가 볼프강에게 맞서며 젤소미나가 불쌍하다고 했을 때, 친구 에이드리언이 젤소미나를 밀라노로 데려가겠다고 농을 던지고 젤소미나가 수줍게 좋다고 할 때, 볼프강의 고집 센 얼굴 위로 스쳐가는 회한이나 자기의심을 카메라는 놓치지 않는다.
젤소미나의 반항에 볼프강은 망연자실 밖으로 나가 낙타를 끌어내려다 포기하고 추적추적 비를 맞으며 혼자 노동을 계속한다. 이를 멀리서 바라보는 젤소미나의 표정 역시 말이 아니다. “아빠 제가 뭘 할까요? 저 뭘 하면 되나요?” 그렇게 받고 싶던 아버지의 사랑이 주어지던 바로 그 순간 그걸 단박에 기뻐하며 받지 못했다는 미안함에 눈물 흘리며 외치지만 아버지는 “하지 마”라며 불퉁하게 거절할 뿐이다. 자기 쓸모를 증명해야만 부모의 관심을 끌 수 있다고 여기는 아이를 보며 서럽기도 하지만, 이 어른의 마음도 어렴풋이 짐작되는 우리가 과연 볼프강의 속좁음을 탓할 수 있으랴. 그도 안젤리카도 ‘바깥’의 세상에서 된통 두들겨맞고 자신들만의 낙원을 구축해보려다 실패한 어른들임을 영화는 곳곳에서 암시하고 있다.
<더 원더스>는 아이의 혼란과 상처뿐 아니라 어른들의 상처도 조밀히 들여다보는데, 네 딸들의 부모만큼이나 코코라는 어른의 존재도 흥미롭게 다뤄진다. 처음에는 코코가 안젤리카의 사촌 혹은 먼 모계 친척인가 싶었지만, 에트루리아인의 흑발 흑안과 로마인의 도드라진 ‘금발’을 늘 코드화하는 로르바케르의 습관을 생각하면 아마 친척은 아닐 듯 싶다. 그렇다면 볼프강과 안젤리카, 코코와 에이드리언은 모두 원래 밀라노 출신의 소꿉친구였다가 각자의 방황 끝에 긴 사연을 안은 어른이 되어 토스카나 시골로 찾아들었을 거라고 짐작된다.
‘얹혀살려면 밥값을 해야 한다’며 볼프강에게 싫은 소리를 듣던 군식구 코코는 분명 제대로 된 어른은 아니다. 젤소미나 편을 들며 “아이들을 그만 부려먹으라”며 이제는 ‘바깥’으로 내보내야 한다고 볼프강에게 화를 내긴 하지만 정작 코코는 부모의 부재시 보호자 노릇을 젤소미나만큼도 해내지 못한다. 이상한 요가 동작에 심취하느라 마리넬라가 채밀기에 손을 베일 때에도 아이들 옆에 없었고, 병원이나 방송사 관계자 같은 ‘진짜 어른’들 앞에서는 당황한 나머지 변명도 못하는 식이다.
그러나 아기들과 함께 집에 남은 엄마 안젤리카를 대신해 섬에서 촬영하는 ‘전원의 기적’ 프로에 함께 참가한 코코는 바로 그곳에서 진가를 드러낸다. 가난하고 힘 없는 목축업자, 양봉업자, 낙농업자 등등 가지각색의 가구를 불러다놓고 우스꽝스럽게 치장시킨 쇼 프로. 그 옛날 고래의 무덤으로 불렸다는 자연 동굴 안에서 인공적인 불빛과 스탭들의 말소리가 울려퍼지고, 마치 가장 무도회처럼 동물 탈이며 월계수 화관을 쓴 농민들은 얼빠진 채 긴장한 채 서있다. 사회자인 밀리는 시골 소녀들을 불러내곤 과장된 말투로 “귀여운 에트루리아인”이라 호명하더니, 정작 그 지역에서 평생 살아온 할머니들이 아름다운 전통 민요를 부를 때는 살며시 옆으로 빠져 피곤한 얼굴로 귀를 막아버린다.
또 가족들 사이에선 그토록 폭군 같던 볼프강은 십수 대의 카메라와 양복 입은 도시인들 앞에서 굳은 채로 “돈보다 중요한 게 있다”고 더듬거리며 허망한 믿음을 역설한다. 몸으로 익힌 신념이, 무언가 포기할 수 없는 가치가, 가장 천박한 자본이 가장 고귀한 노동을 파괴하는 것을 목격한 후 굳어진 “세상은 곧 멸망할 것”이라는 깨달음이, 그의 단단한 육체 안에서 부글거리고 있지만 비극적이게도 볼프강에겐 그것을 ‘제대로’ 설파할 만큼의 학식이 없고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이어 “보여줄 공연이 있다”며 젤소미나가 황급히 밀리를 불러세운다. 밀리를 다시 보길 몇 달 내내 바라온 젤소미나가 입안에서 벌을 꺼내 얼굴에서 춤추게 하는 자신의 특기를 선보인 것이다. 그러나 그애의 진지한 예술은 아버지가 방금 전 기인 철학자처럼 더듬거린 신념과 함께 무참히 무시당한다. 부녀는 ‘수습’의 대상으로 격하될 뿐이다.
그 모든 기이한 난장판을 지켜본 코코는 누구보다 먼저 알게 된다. ‘진짜 이탈리아인의 전원생활’을 조망하고 격려한다는 TV 쇼의 명분은 다 허울 뿐이고, 이제는 농민 개개인의 삶까지 (볼프강이 보던 TV 속 조잡한 재연 프로그램처럼) 서사화되어 도시인들의 한낱 유흥으로 무참히 착취되고 무시당할 거란 진실을. 그래서 코코는 돌연 울기 시작한다. 방금 전 밀리와 도시인들에게 민망하리만큼 외면당한 젤소미나를 바깥으로 끌고 나온 코코는 “넌 정말 예뻐, 그 무엇보다 아름다웠어”를 몇 번이고 말해준다. 그 순간 코코는 진실을 먼저 깨닫고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외마디를 외치는 선지자다. 그 외침은 젤소미나에 투사한 자기 젊은 시절에 보내는 위무이기도 하다. 곧이어 “나도 아름다워. 난 정말 아름다운 여자야”라고 발작적으로 반복하는 그를 보며, 관객은 코코 또한 정말이지 고단하고 외롭고 아픈 여자였단 걸 비로소 알게 된다.
코코는 젤소미나의 (가장 불행한) 미래를 암시하는 인물로서 존재한다는 게 이 장면에서 비로소 명확해진다. 동생 마리넬라, 루나, 카타리나처럼 엄마의 아름다운 금발을 물려받지 못한 큰딸이 계속 제 의지에 반해 유폐된다면 곧 맞이하게 될 운명을, 불쌍한 흑발의 미친 여자 코코가 대신 보여주고 있던 것이다.
에트루리아인 이웃들에 찰싹 붙어 엮여있으면 먹고살 길이 열린다고 말하던 볼프강. 우리 ‘밀라노인’들은 누가 신경 써준 적 있냐는 볼프강의 서러운 고함에 에이드리언은 ‘밀라노인!’이라 곱씹으며 한 번도 그렇게 분류된 적 없다는 듯 낄낄 웃는다. 익숙지 않은 호명은 곧 그들이 표준화된 복지 체계 내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지방/민족/인종 출신이란 의미다. 도시 생활과 자본의 침범에 상처 받고 그 어떤 ‘문명’의 덕도 보지 못한 어른들은 스스로를 고립시키거나, 때론 애완견을 부르는 듯 ‘귀여운 에트루리아인’이란 모멸적 호칭을 빌려서라도 생계를 이어가려 한다.
섬에서 코코에게 기습적으로 키스 당한 마틴이 온 힘을 다해 도망친 다음 실종되자, 기관 담당자가 방문해 볼프강과 언쟁을 벌이다 “상식적인 규율이란 게 있는데 알기를 거부하시네요. 세상 물정도 모르시고요”라며 잔인한 선고를 내린다. 하지만 그는 바로 직전 자기 관리상의 허점을 숨기기 위해 “아이에 대한 기록은 싹 덮어서 지워버렸다”고 부끄럼없이 자료 조작과 공모 행위를 털어놓은 직후다. 위선자 같은 그가 잘 안다던 ‘세상 물정’이란 과연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 법칙일까.
또한 이 담당자는 앞서 마틴을 데려왔던 날, 허술한 농가를 한 차례 둘러보곤 제대로 된 교화를 위해 ‘체계성’ 있는 기록과 교육을 제공하라고 당부한 바 있다. 즉 다시 요약하자면 <더 원더스>는 결국 재래성과 체계성의 대립에 관한 영화다. <키메라>를 제작하며 에트루리아의 유적과 무덤가에서 자매와 뛰놀던 유년기 기억을 참고했다고 밝힌 알리체 로르바케르 감독은, 초기부터 ‘발전’된 문명이 미처 고려하지 못한 어두운 구석의 시간에 깊이 천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그의 질문은 누가 어떻게 정상성을 정했는가부터 시작된다. 어떤 질서가 문제와 문제 아닌 것, 익숙한 것과 이질적인 것, 발전한 것과 낙후된 것, 문화재로 보존될 것과 쓰레기로 퇴거당할 것을 구분하고 있는지, 우리가 뭔가를 스스로 판단한다고 착각할 때 그 권위에 실은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더 원더스>는 농민들이 삶의 터전에서 밀려나기 직전, <행복한 라짜로>는 밀려나는 중, <키메라>는 밀려난 직후를 다루는 연작이라 해도 좋겠다. <키메라>의 톰바롤리들이 “일만 하다 돌아버린 노인”이라고 조롱하던 피로의 삼촌에게서 우리는 늙은 볼프강의 최후를 본다. ‘효과 좋은’ 최신 농약도 볼프강에겐 땅과 벌을 다 죽일 끔찍한 화학 무기에 지나지 않는다. 가족들과 평온히 자족하는 생활을 추구하고 싶지만 세상은 아이들에게 자꾸만 화려하게 빛나는 것들을 보여주고 아이들은 부모의 질서로부터 탈주를 꿈꾼다. 피할 수 없는 결과에 온몸으로 저항하는 볼프강과 안젤리카의 강경한 자세에서 이상하게도 품위를 느낀다. 도시의 방송사 카메라로는 잡아낼 수 없었던 그것을.
바로 그래서 마틴이 젤소미나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영원히 그 동굴에 남는 것이다. 여전히 포착되지 않고 언어화되지 않은 이탈리아 시골의 생동처럼, 도시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의 품위처럼, 끝까지 문명의 규칙에 포섭되지 않으려고 도망친 ‘밀라노인’ 가족처럼 마틴 역시 영원히 붙잡히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잃어버린 과거의 언어나 노래 혹은 유적을 찾아내면/기록하면 필연적으로 도굴꾼의 돈벌이가 되고 부자들의 눈요깃감으로 소비되며(키메라) 믿는 자들의 맹목을 부른다는 것(라짜로)을 알리체 로르바케르는 처음부터 알았던 듯하다. 그래서 그는 마틴을, 아이들을, 가족들을 잡히지 않는 유령으로 만들어버린다.
화내고 싸우고 경계하는 어른들의 말이 흘러넘칠 때 아이들은 오히려 한 마디 말도 없이 소통한다. 아이들의 대화는 아직 무음의 신체 언어 쪽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젤소미나가 마틴에게 벌의 춤을 보여줄 때도, 두 아이가 동굴 안에서 고대인의 그림자잡기처럼 춤을 출 때도, 마리넬라가 젤소미나의 무반주 노래에 맞춰 춤을 출 때도, 젤소미나의 ‘빛을 마셔보라’는 아름다운 주문을 마리넬라가 순순히 따를 때도(이 장면은 자연스럽게 <키메라>의 무덤 속 아르투가 맞이한 베니아미나의 빛을 연상시킨다).
마지막 장면에서도 젤소미나는 어떻게 그 험한 바다를 서핑보드에 의존해 맨몸으로 다녀왔는지 별다른 설명 없이 들판에 놓인 가족의 침대로 파고든다. 모든 게 젤소미나의 꿈 같았던 시간. 엄마도 아무 질문 없이 그애가 잘 다녀올 줄로 믿었다며 따뜻이 안아주고, 처음으로 엄마 품에 안긴 아이는 그제야 비로소 어린 아이처럼 보인다. 젤소미나는 마틴처럼 속을 알 수 없이 그윽한 눈빛의 알파카를 바라보며 마틴의 휘파람을 따라한다.
이윽고 그들은 뼈대만 있는 침대를 남기고 증발한다. 그들을 지켜보던, 남루하지만 어딘지 다정한 시선을 보내는 것처럼 느껴지는 집도 벽 몇 개만 남기고 낡아버린다. 언젠가 그 집은 흰수염고래의 무덤처럼 먼 과거의 시간을 상징하는 스펙타클이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 ‘현대인’을 얌전히 기다릴 것이다. 하지만 거기 살던 사람들은 이제 다시는 탐욕스러운 카메라에 붙잡히지 않는다.
영화관을 나오며 <고스트 스토리> 또는 <퍼스트 카우>에서 보여준 탁월한 애도를 겹쳐보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 서부를 개척한 이들의 유골을 통해, 그들이 살았던 집의 잔해나 이를 지켜보는 지박령 같은 존재를 통해 억겁 같은 시간을 애처로이 붙잡아두고 재소환하려던 영화들. <더 원더스>는 조금 다른 쪽으로 애도의 개념을 확장한다. 이건 이탈리아에 마지막 남았던 순수를 영원히 해방시켜 영영 잡히지 않는 곳으로 도망가게 하는 선택을 감행한 영화다. 아마도 그것이 언제나 피안으로, 신성의 영역으로 인물을 숨게 했던 로르바케르 식의 사랑일 수도 있겠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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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반의 칼은 백성에게, 백성의 칼은 적에게
과거 한국 사회는 양반과 노비로 철저하게 나뉜 계급 사회였다. 이런 계급적 대비는 많은 한국 영화에서 주요 소재로 사용되곤 했다. 예를 들어 <사도>는 왕과 그의 일족이 주인공이 되어 왕권의 억압과 굴레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야기를 다루며, <관상>은 다양한 계급의 인물들이 얽히며 당시 사회 구조의 이면을 드러낸다. 또 <변호인>은 권력자와 일반 국민의 대립을 현대적 맥락에서 보여주면서, 권력과 억압 속에서 국민들의 삶이 얼마나 억눌려 있는지 조명한다. 이런 계급적 대립 구도는 한국 사회의 역사적 맥락을 기반으로 하여 관객들에게 친숙한 주제를 다루며,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극적인 이야기를 제공한다.
이번에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영화 <전, 란> 역시 양반과 백성 간의 대립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의 불일치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단순히 양반과 노비의 갈등을 묘사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양반과 노비가 서로 이해하고 친구가 되어가는 과정도 포함이 되어 있으며, 그 과정에서 진정으로 서로가 섞일 수 있는지, 친구가 될 수 있는지를 계속 고민하게 한다. 영화 속에서는 양반인 종려(박정민)와 노비인 천영(강동원)이 등장하여 그들의 관계가 변화해가는 과정을 통해 당시 임진왜란 시기의 복합적이고 아이러니한 상황을 조명한다. 양반과 왕, 그리고 노비들이 각기 다른 선택을 하며 서로 엇갈리는 모습은 전쟁의 혼란 속에서 계급과 권력이 어떻게 얽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첫 번째 감정: 노비 천영의 허망함
천영은 억울하게 노비가 된 인물이다. 그의 아버지는 양인이었지만, 가난 때문에 어머니가 노비로 팔려가면서 천영도 덩달아 노비가 되고 만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억압된 삶을 살게 된 천영은, 아버지의 자살을 목격하면서 삶의 허망함에 깊이 빠져들게 된다. 그는 모든 것을 잃은 상태에서 자라왔기에, 그가 느끼는 세상은 차갑고 무의미한 곳이었다. 모든 행동에 감정이 없는 듯 보이는 천영은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쌓인 허무함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차가운 인물로 그려진다.
천영은 양반 계급에 대한 분노를 내면에 쌓아가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는 다른 노비들과 깊은 연대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처지를 부정하고 싶어하며, 자신이 노비라는 사실에 대한 억울함과 허무함 속에서 끊임없이 어디론가 도망치고자 한다. 천영은 뛰어난 무술 실력을 갖추고 있었기에, 이를 통해 양반인 종려에게 무술을 가르치고 대신 과거 시험을 치르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천영의 내면에 있는 허망함은 더욱 커진다. 그는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압박감을 느끼는 종려에게 연민을 느끼지만, 결국 자신의 노력이 종려를 왕의 최측근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게 되면서 더욱 허망함을 느끼게 된다.
천영의 삶은 그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만 흘러간다. 그는 자신이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노력할수록 그 결과가 다른 사람의 성공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며 점점 더 깊은 무력감에 빠져든다. 천영에게 삶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며, 그의 존재는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점점 더 강해진다. 그의 허망함은 단순히 억울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고 이용당하는 현실 속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점에서 천영은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며, 그의 내면은 점점 더 차갑고 어두워져 간다. 변해가는 그의 모습에서 점점 어둡고 부정적으로 변해가는 일반 백성과 노비의 모습이 스쳐지나간다.
두 번째 감정: 종려의 분노
종려는 계급적 위선이 없는 인물로, 천영과 더 가까이 지내고 싶어한다. 양반으로 태어났지만 권력욕이 많지 않은 종려는, 백성이나 노비에게도 따뜻한 시선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과 공감하고자 노력한다. 영화 전체에서 종려는 양반 중에서도 비교적 순수하고 긍정적인 시각을 가진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양반이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노비와 함께하고 싶어하며, 그들에 대한 인식 개선을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종려의 태도는 천영과의 관계에서도 드러나며, 그는 천영을 단순한 노비로 보지 않고 진심으로 친구로 대하려고 한다.
그러나 시대적 강요에 의해 종려의 삶은 달라지게 된다. 그는 원치 않게 벼슬을 가지게 되고, 왕의 곁에서 권력자들의 위선적인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종려는 자신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그는 권력자들의 위선을 보면서도 특별히 노비나 백성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지 않으며, 오히려 그들에 대한 연민과 인식 개선을 바라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의 이상은 점점 현실의 무게에 눌리게 되고, 그는 점점 더 혼란스러워진다.
노비들의 반란이 일어나면서 종려의 상황은 급격히 바뀐다. 반란 속에서 그의 가족들이 모두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종려는 그 충격과 슬픔 속에서 결국 권력자들의 위선을 받아들이게 된다. 특히 왜군이 쳐들어오면서 왕과 권력자들을 호위하며 도성을 떠나는 장면은 매우 인상적으로 그려진다. 이 장면에서 종려는 처음으로 제대로 칼을 휘두르게 되는데, 그 칼끝은 모두 백성들을 향하고 있다. 분노에 사로잡힌 종려는 자신도 모르게 권력자들과 같은 길을 걷게 되며, 백성들을 억압하는 데 일조하게 된다. 그의 변화는 시대의 무게에 짓눌려 원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무리 선한 마음과 좋은 의도를 가졌던 인물이라도, 하나의 오해와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백성들에게 해를 가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세 번째 감정: 왕의 위선
<전, 란>에서 천영과 종려의 관계가 중심에 있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왕 선조(차승원)의 위선이다. 영화 속 선조는 당시 백성들의 고통과 왜군의 침략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불타버린 왕궁을 다시 화려하게 재건하는 것이며, 백성들이 따르는 장군이나 영웅을 제거해 나가는 것이다. 그는 백성들이 자신 이외의 영웅을 따르는 것을 극도로 혐오한다. 그는 백성들이 오직 자신만을 우러러보기를 원하며, 그들이 다른 누군가를 영웅으로 여기면 그것을 견디지 못한다. 전쟁 중에도 그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것에만 몰두하며, 전쟁의 영웅들과 백성들의 목숨을 가볍게 여긴다.
왕의 모습은 전쟁 속에서 백성들을 위해 싸우는 다른 인물들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천영과 종려가 각자의 방식으로 고군분투하는 동안, 왕은 오직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며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한다. 이러한 왕의 위선적인 모습은 종려와 같은 양심적인 벼슬아치들조차 악당으로 변하게 만든다. 왕은 자신에게 반대하는 신하가 있으면 쉽게 그들을 처형해버리며, 백성들을 위한 정치가 아닌 자신을 위한 정치를 펼친다. 이는 결국 권력이 어떻게 사람들을 변하게 만들고, 그 권력이 백성들에게 어떤 고통을 가져오는지를 보여준다.
왕의 위선은 현재의 정치 상황과도 연결될 수 있다. 여전히 많은 권력자들이 백성을 위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모습은 과거와 다르지 않다. 영화 속 선조의 모습은 권력의 본질이 얼마나 쉽게 타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며, 권력자들의 위선이 백성들에게 어떤 고통을 주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의 모습은 시대를 초월해 반복되는 권력의 어두운 면을 상징하며, 관객들에게 권력의 본질과 그로 인한 고통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양반과 노비는 친구가 될 수 있는가?
영화 <전, 란>은 나라를 위해 싸우는 노비 천영과 백성들을 베는 양반 종려를 대비시키며, 역사와 사회의 아이러니를 잘 보여준다. 천영은 노비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고, 나라를 위해 싸우겠다고 나선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사회가 그를 그런 방향으로 몰고 갔다. 종려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스스로 양반이라는 계급을 선택한 것이 아니며, 권력을 원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관직을 얻고, 계급적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 영화 속 모든 인물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상황은, 마치 임진왜란이라는 혼돈의 시대 속에서 아무도 얻은 것이 없다는 것을 상징하는 듯하다.
특히 천영과 종려는 서로를 아끼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친구로서 서로를 바라보며, 그 관계는 매우 애틋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서로에게 칼을 겨누게 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향한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서로를 이해하면서도 시대의 흐름에 휩쓸려 적이 되어야 했던 그들의 눈빛은 영화의 마지막까지도 깊은 여운을 남긴다.
영화는 김상만 감독의 연출로, 당시 시대의 혼란과 인간 사이의 복잡한 감정을 뛰어난 색감과 캐릭터 대비를 통해 잘 표현해냈다. 강동원과 박정민, 그리고 차승원 등의 배우들은 각자의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해내며,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특히 액션 장면들은 그들 간의 갈등과 시대적 배경을 잘 반영하며 관객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영화 속 인물들의 복잡한 감정과 시대적 상황은 현대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권력과 억압,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인간 간의 연대와 고뇌를 진지하게 성찰하게 만드는 이 작품은 역사적 배경을 좋아하는 관객들에게 깊은 감동과 여운을 남길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XqTnCGpfnZ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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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0회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 추천작] 인사가 주는 힘
안녕하세요는 김환희 배우, 이순재 배우, 유선 배우, 이윤지 배우 등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배우들이 출연하며 제가 개인적으로 기대했던 작품입니다.
시놉시스는 보육원에서 자란 수미가 호스피스 간호사 서진을 만나게 되며 삶의 마지막을 보내는 사람들을 만나고, 삶을 살아갈 용기를 얻는 이야기입니다.
영화는 시놉시스의 내용처럼 감동적인 이야기였습니다. "자살할 용기가 있으면 그 힘으로 더 열심히 살아라" 라는 말과, 죽는 방법을 알기 위해 호스피스에 찾아가고 부부, 할아버지, 할머니 등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할아버지에게 한글을 가르쳐 주며 사람들과 친해지게 됩니다.
곡성 이후 성장한 김환희 배우의 모습과 이순재 할아버지의 연륜있는 연기를 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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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탄소년단 RM이 주목한 사진작가 낸 골딘의 다큐 영화
영화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는 사진작가이며 액티비스트인 낸 골딘(Nan Goldin)의 삶과 예술, 그리고 편견과 부조리를 향한 투쟁을 담았다. 영화는 다큐멘터리임에도 2022년 베니스영화제서 최고 영예의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걸작이다.
연출은 아카데미에서 장편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한 감독 로라 포이트라스(Laura Poitras)가 맡았다. 그녀는 낸 골딘을 가리켜, “인생에서 용감한 사람들을 많이 보았지만, 낸과 같은 사람을 결코 만난 적이 없다.”라고 찬탄했다.
첫 장면부터 충격적이다. 낸 골딘이 연대해 투쟁하는 단체 <P.A.I.N>은 골리앗 새클러 가문과 그들의 기부금을 받아 이미지 세탁을 도운 대형 미술관에 드러누워 행동으로 성토한다. 낸 골딘과 <P.A.I.N>은 마약성 진통제를 무분별하게 판매하여 엄청난 부를 축적한 거대제약 회사와 그 회사를 소유한 새클러 가문이 죽음의 대가로 얻은 돈으로 기부한 자선기금을 거부할 것을 미술관과 대학에 요구하였다. 그녀의 활동으로 제약회사는 파산하였고, 세계적인 미술관에서 새클러 가문의 이름이 지워져 갔다.
영화는 그녀의 사진예술이 세상을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절망에 처한 자신도 살렸음을 그려낸다. 낸 골딘은 50여 년 전 정치적 검열과 차별이 노골적이었던 시절에도 카메라에 세상의 터부를 담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에이즈로 죽어가는 친구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고, 사회적 금기와 직면하고 소외된 이들의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이러한 사진들은 정치적 행위라는 이유로 전시가 금지되었다. 낸 골딘은 사진이 예술인지 정치적 행위인지는 정부와 의회권력이 아니라 예술가와 관객이 결정한다고 소리 높였다.
낸 골딘에게 성정체성으로 집에서 쫓겨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언니가 있었다. 동성애자에게 가혹했던 시절 부모는 언니의 삶과 죽음을 감추기에 급급했다. 낸은 언니가 흔적 없이 죽은 후, 평생에 걸쳐 자신의 자취를 남기려고 몸부림쳤다. 낸에게 사진은 인생에 흔적을 남기는 수단이었고, 언어였다. 그녀는 가난과 차별, 생존을 위한 몸부림들, 남친에게 코뼈가 으스러지도록 폭행당한 얼굴도 사진으로 남겼다. 사진은 자신을 살리는 해방구였으며, 고통과 두려움을 헤쳐나가는 생존 행위였다.
영국의 저명한 현대미술 전문지 <아트리뷰(ArtReview)>는 2023년 세계 미술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을 선정하며 낸 골딘을 1위로 올렸다. BTS RM도 인스타그램에 낸 골딘의 사진집을 올려 그녀의 예술과 인생 여정에 관심을 드러냈다.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는 편한 마음으로 감상하기 힘든 영화다. 하지만 가장 밑바닥의 삶에서 고통스럽고 힘든 현실을 드러내는 사진들이 그 자체로 사람의 영혼을 건드리는 울림이 있음을 깨닫게 하는 소중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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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납치된 아내를 구하러 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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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은 리사와 함께 자동차의 기름을 충전하기 위해 주유소에 간다 윌이 기름을 충천하고 있을 때 잠시 화장실에 간 리사는 누군가에게 납치되고 윌은 사라진 리사를 찾기 위해 주유소 부근을 둘러본다. 아무리 찾아도 없는 리사를 찾기 위해 가까운 편의점 직원에게 CCTV를 보여달라고 하지만 안된다는 직원의 말을 듣고 실종된 리사가 혹시 처가에 갔는지도 살펴본다. 그러나 리사의 행방을 알 수가 없어 답답한 윌은 수사관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급한 마음에 경찰서까지 간다. 그런데 수사관은 애꿎은 윌에게 이상한 질문들을 던지고 책임을 돌리는데... 과연 윌은 자신의 아내인 리사를 무사히 찾을 수 있을까?
실종된 아내에 대한 행방을 따라가 보여주는 액션 영화!
리사는 윌과 결혼을 했지만 둘만의 휴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잠시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리고 윌은 리사가 바람을 피운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모든 방법으로 실종된 리사를 찾기 위해 총력을 다한다. 사실은 성공한 부자이면서 부동산 개발업자인 윌에게 무엇에 불만이 있었길래 리사는 그랬던 걸까? 결국엔 리사가 자신의 동창인 너클스에게 납치를 당하고 프랭크에게 끌려가게 되면서 윌은 그들의 행방을 뒤쫓게 된다. 수사관도 편의점 직원도 자신에게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윌은 무기를 챙겨 너클스를 찾아가 무차별 폭행을 하고 납치한 뒤 차에 태우고 가던 중에 경찰의 단속에 걸려 도망을 간다. 한참 숲을 지나간 윌은 그곳에 마약을 제조하는 불법 시설이 있는 걸 보게 되고 그곳이 자신의 아내를 납치한 무리들의 집합소라는 것도 알게 된다. 너무나도 힘든 윌에게 왜 이런 시련이 주어졌을까? 이 영화는 자신의 아내를 납치당한 어느 남자의 복수극이자 통쾌하면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원망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화나게 만들었는지 영화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아내를 납치당한 한 남자의
정의 구현 복수극!
※ 씨네랩의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초대받아 리뷰를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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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이민자 철수씨가 남긴 유산
삶을 우리의 선택대로만 살아갈 수 있다면 어떨까. 우리 모두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지만 태어난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준 생명을 가지고 태어나 일단 살기 위해 발버둥 친다. 어린 시절엔 부모님과 친지들이 살 수 있는 도움을 주고, 조금씩 자의식이 생기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표현한다. 그렇게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얻고 싶은 것을 취한다. 그렇게 자유의지가 생긴 우리는 주변의 상황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겠지만 최대한 자신이 할 수 있는 자유를 최대한 누리면서 살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주변 상황이 강력하게 개인을 흔들기 시작하면 당사자의 삶은 크게 바뀐다. 새로운 환경과 조건에서 다시 적응하면서 스스로 일어서야 하지만 그건 꽤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주변에 도와줄 존재가 많지 않을 때, 같이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땐 그저 삶의 위압감에 압도되어 그저 방관하고 있게 된다. 그렇게 삶은 흘러가고 몸은 서서히 나이가 들어간다. 그 삶에서 우리는 자유를 찾을 수 있을까. 삶은 어쩌면 완전한 자유를 찾기 위한 여정일지도 모른다.
억울하게 감옥에 가게 된 미국 이민자 이철수의 이야기
다큐멘터리 영화 <프리 철수리>는 197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살인사건 용의자로 몰린 이철수 씨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실화인 이 영화의 이야기는 사실 현재까지도 한국에 그렇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 당시 한때 한국에서 이슈가 되긴 했지만 이후 꽤 많은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잊혀간 사건이다. 영화는 그 당시의 철수 씨가 미국으로 가게 된 과정을 시작으로 감옥에 갇혔다가 다시 풀려나 삶을 이어나가는 과정이 담겨있다.
철수 씨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삶을 계속 살아왔다. 한국 전쟁 중에 태어난 그는 엄마가 누군가에 성폭행 당해 가지게 된 아이였고, 결국 엄마는 그를 친척에게 맡기고 혼자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러다 철수 씨가 12살이 되던 해 엄마는 그를 데리고 미국으로 간다. 하지만 철수 씨는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었고 제대로 교육을 받기도 어려웠다. 당시 미국 사회는 이주 한국인이 많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에 철수 씨는 차이나타운에서 중국인이나 일본인들 속에서 살아갔다.
그러다 어느 날 차이나타운 거리 한복판에서 중국 갱단이 저지른 살인 사건에 용의자에 오르고 빠른 속도로 구속되어 재판에 넘겨진다. 그때 거리에 철수 씨가 있지 않았고 선뜻 나서서 증언할 수 있는 용기 있는 목격자도 없었기 때문에 그를 도와줄 한국인이나 아시안계 지인이 거의 없었다. 그의 선한 모습과 성향을 알고 있는 일본인 친구 랑코만이 유일하게 그를 도우려 애썼지만 결국 그는 폭력의 세상인 감옥에 갇혀버리고 만다. 억울한 상황에서 그는 서투른 영어와 주변의 도움을 받지 못해 소명할 기회를 거의 얻지 못했고, 그저 그 상황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는 철수 씨의 개인적인 상황과 초기 이민자들의 어려움을 보여준다. 미국 내 한국 이민자가 많지 않은 시기, 그들이 겪었을 어려움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이렇게 영화 초반에는 미국 이민자들이 이민 초기 겪을 수 있는 어려움을 보여준다. 그러다 중반이 되면 한국 이민자들이 사회적인 운동을 만드는 과정이 등장한다. 바로 ‘프리 철수 리’라는 구호를 내세운 이철수 씨 구명운동이다.
미국 이민자 사회에 처음 등장한 사회운동
이 사건을 가장 먼저 관심을 가지고 미국 이민자 사회에 알린 사람은 이경원 기자다. 그는 철수 씨 재판과정이 엉터리로 진행되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 사건을 신문사 새크라멘토 유니언에 톱기사로 세상에 폭로한다. 그 이후 한인 교회를 중심으로 한국 이민자들이 뭉치기 시작했다. 조금씩 늘어난 이민자들의 운동은 그 이전에 보지 못했던 최대 규모로 조직되어 진행되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그들의 구호가 문구 그리고 사람들의 절실한 표정에서 그 당시의 생생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결국 이 구명 운동은 철수 씨에게 큰 힘이 된다. 하지만 그에게 다시 불행한 상황이 이어진다. 감옥에 갇혀 갱단의 위협 때문에 상대를 살인하게 되어 다시 재판을 받는 상황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 사람들과 변호인단은 철수 씨가 감옥에 가게 된 자체가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그 살인은 일종의 정당방위라고 주장한다. 그렇게 다시 긴 재판이 이어지고 원래 차이나타운의 살인사건에 대한 재심도 진행하게 된다.
초반은 철수 씨가 예상하지 못한 사건에 휘말려 감옥에 가는 과정, 중반부는 한국 이민사회의 이철수 구명운동이 일어나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이 흥미롭게 진행되고, 후반부에는 감옥에서 나온 이후의 철수 씨가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를 보여준다. 평생을 걸쳐 그는 자신이 주도적으로 선택하는 삶을 살지 못했다. 엄마 때문에 미국으로 왔고, 엄청난 불행으로 억울하게 감옥에 적응해야 했다. 그러다 우연히 한인들에 의해 영웅이 되어 엄청난 기쁨의 순간들을 맞는다.
그래서인지 그는 삶의 후반부에 제대로 된 선택을 하지 못하고 방황했다. 그 과정에서 보이는 철수 씨의 얼굴은 무척이나 외롭고 괴로워 보인다. 젊은 시절 철수 씨의 얼굴이 영상에 등장할 때, 그가 무척 좋은 인상을 가졌고 선한 인물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인생 후반부의 모습은 왠지 지쳐 보이고 힘이 없어 보인다. 그의 얼굴에 있는 화상 자국이 그의 지친 얼굴을 더욱 우울하게 보이게 만든다. 그는 죽음이 그를 찾아오기까지 진정으로 자유로운 느낌을 받았을까. 영화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 자꾸만 그의 삶을 되짚어보게 만든다.
철수 씨는 과연 자유를 얻었을까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이야기 전체를 다시 돌아보면 희망적인 느낌이 든다. 적어도 철수 씨 주변에 그를 도우려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원해서 미국에 간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런 불운의 상황에서 그는 그 자신을 도울 방법이 없었다. 대신 그의 주변에 그를 적극적으로 돕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경원 기자가 대표적이다. 그는 아버지가 없는 철수 씨에게 아버지나 다름없는 사람이다. 그는 기꺼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철수 씨에게 도움을 주려 애쎴다.
그다음으로 그의 일본인 친구 랑코가 있었다. 철수 씨는 랑코에게 이성적으로 호감을 느꼈지만 실제로 그 사랑이 성사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랑코는 철수 씨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는 모습을 보고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실제로 변호사가 되어 몇 년 후에 진행된 철수 씨의 재심재판에 변호인단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철수 씨가 풀려나기 전까지 진심이 가득 담긴 선의로 그를 도왔던 진정한 친구다.
영화는 지금 이 이야기에 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되는지 이야기한다. 현재까지 우리는 비슷한 사건을 수없이 봐왔다.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감옥을 간 사람들, 그리고 한국에 살고 있는 수많은 이민자 역시 철수 씨와 비슷한 상황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누군가 억울한 상황이 생기면 도움을 주고 싶은 사람이 하나 둘 모이고 그것이 어떤 사회운동으로 번져간다. 우린 이런 일을 무수히 봐왔다. 어쩌면 <프리 철수 리>가 보여주는 미국 내 한국 이민자들의 구명 운동은 가장 극적인 과정과 결과를 가져온 사회운동일지도 모른다.
이 다큐멘터리를 완성하기 위해 6년의 시간이 필요했다고 한다. 실제로 영화는 대역을 이용한 재연장면 없이 과거에 찍어둔 화면을 최대한 이용한다. 단지 내레이션은 세바스찬 윤이 맡았는데, 그는 한인 2세로 그 역시 감옥에 생활한 경험이 있다. 그는 철수 씨의 상황을 이해했고 그 역시 내레이션에 참여하길 원했다. 그렇게 탄생한 1인칭 시점의 내레이션은 실제 철수 씨가 이야기하는 듯 영화에 사실감을 더한다.
비록 지금 이철수라는 인물이 살아있지 않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여전히 현재에도 유효하다. 그가 완전히 프리해졌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이 영화로 인해 미국 한인 사회의 변화와 철수 씨의 삶이 많은 관객들에게 닿을 수 있길 기원한다. 그의 삶의 궤적은 충분히 영화 속 이야기처럼 흥미롭다. 많은 관객들에게 추천하는 영화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다운로드하였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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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살아갈 기회와 용기를 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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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맥스 예매를 실패하고 4DX로 보고왔던 영화 <스파이더맨: 노웨이홈>. 전작들을 보지 않았음에도 눈물 가득했고, 재밌었던 작품이었다. 그만큼 새로운 팬과 기존 팬들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영화 <스파이더맨: 노웨이홈> 시놉시스
미스테리오의 계략으로 세상에 정체가 탄로난 스파이더맨 피터 파커는 하루 아침에 평범한 일상을 잃게 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닥터 스트레인지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지만 뜻하지 않게 멀티버스가 열리면서 각기 다른 차원의 불청객들이 나타난다. 닥터 옥토퍼스를 비롯해 스파이더맨에게 깊은 원한을 가진 숙적들의 강력한 공격에 피터 파커는 사상 최악의 위기를 맞게 된다.
*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에는 영화 <스파이더맨: 노웨이홈>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스파이더맨의 모든 전작을 보지 않았기에 홈 시리즈의 스파이더맨이 고등학생이라는 사실을 듣고 고딩이 영웅라니..! 하며 당황했었다. 그리고 닥터 스트레인지가 말끝마다 “아,, 내가 까먹었다. 너 애지..?”라고 말하며 Kid를 강조하면서 미성년의 이미지를 강조하고 있었다. 아직은 어른의 책임에 대해 알지 못하는 어린 피터 파커에게 필요한 것은 그를 믿어주는 존재들이었다. 세상을 구한 영웅이긴 하지만 그와 동시에 주변에서 자꾸 안 좋은 일이 일어나다보니 악당으로, 사고뭉치로 프레임이 지어지는 상황 속에서 아직 어린 피터 파커가 세상을 견디고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그를 진실되게 믿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피터 파커가 지켜내야할 것들이 오히려 피터 파커를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기억을 지워달라고 하면서도 자신을 가장 생각해주는 사람들은 자신을 잊어서는 안된다며 자꾸 주문을 수정하려는 시도를 보면서 아이같은 모습을 볼 수 있으면서도 아직 사람들에게 기대고 그들로부터 힘을 얻는 모습을 잘 보여준 장면이 아니었나 싶다.
어른이 된다는 것, 책임을 진다는 것
하지만 멀티버스가 열리면서 다른 세계관에 있던 악당들이 (스파이더맨 시리즈와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에 존재했던 악당들이) 홈 시리즈의 스파이더맨이 있는 세계관으로 흘러들어온다. 이들을 처단하는 과정에 있어서 고딩 피터 파커는 점차 성장을 거듭한다. 능력면이라기보다는 내면적으로 자신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어야 하는지 많은 고민과 고뇌를 하는 듯 보였다. 영웅으로서의 삶과 자신의 일상으로서의 삶. 이렇게 2가지가 대립되고 그 2가지를 모두 쟁취하고 싶다는 어린 욕심과 달리 현실에서는 그 모든 것을 이루기에는 힘들다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잊게 해 달라는 주문을 닥터 스트레인지에 부탁하면서 그 동안 자신을 지켜주던 사람들의 믿음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자립하고 독립하여 기억에서 잊혀진 영웅으로 세상에 남기를 선택한다. 솔직히 이 과정이 영웅에만 해당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 역시 어느 정도 성장하면서 독립과 자립을 할 때가 되어 온다. 물론 스파이더맨처럼 고립되어 모든 사람의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언제나 무조건적인 응원과 지지를 받으며 어린 아이처럼 살 수는 없을 것이다. 나이가 들고 점차 성장하면서 사회에서 지녀야할 책임이 많아지고, 언제나 무조건적인 응원과 지지는 지속되는 것이 아님을 잘 보여준 작품이었다.
후회를 바로 잡을 기회
사람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다양한 것들을 선택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선택을 후회하며 지난 날을 회상하기도 한다. 영화 <스파이더맨: 노웨이홈>은 1대, 2대 스파이더맨이 멀티유니버스를 통해서 다른 세계관의 스파이더맨을 찾아온다. 다른 세계관에서 온 빌런들에게 또 다른 기회를 주고자 노력했지만 결국 돌아온 것은 그토록 자신을 아껴주던 이모의 죽음이었다. 그 속에서 좌절감을 느낀 어린 스파이더맨을 향해 다른 세계관 속의 스파이더맨은 자신의 후회를 털어놓으며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용기를 준다. 아마 이 영화는 전작 스파이더맨들이 가지고 있었던 후회와 슬픔에 대해 이 응어리를 풀고 다시 새롭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려고 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이러한 후회를 딛고 다시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넌지시 알려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스파이더맨: 노웨이홈>은 작품 자체가 가진 교훈과 그 퀄리티가 모두 높았던 수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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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라는 매게체가 주는 시각적 청각적 황홀경의 최대치
*해당 영상은 씨네 랩 크리에이터로 활동하며 10월 27일 개봉하는 작품 ‘아네트’의 돌비시네마 시사회를 다녀온 뒤 제작한 영상입니다. 예술가들의 도시 LA, 오페라 가수 `안(마리옹 꼬띠아르)`과 스탠드업 코미디언 `헨리(아담 드라이버)`는 첫눈에 서로에게 이끌린다. 함께 인생을 노래하는 두 사람에게 무대는 계속되지만, 그곳엔 빛과 어둠이 함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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