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라별2024-09-29 22:37:56
[DMZ Docs] 전쟁 속 묻혀있던 개인을 만나다
영화 <고지 위의 소년들> 리뷰
[DMZ Docs] 전쟁 속 묻혀있던 개인을 만나다
영화 <고지 위의 소년들> 리뷰
감독] 이미진, 김세미
출연] Charles PRONAFEL, Rick WAUTERS, Tommy CLOUGH, Tommy TAHARA
시놉시스] 열 아홉 살에 고향을 떠나 이름도 모르는 미지의 나라에 온 청년들이 있다. 세계 각국에서 모여 한반도의 전쟁터로 향하는 배를 탄 UN군 청년들. 모험심으로 가득 찼던 그들은 한국전쟁에서 열 아홉 살에 보지 말아야 할 것들을 목격한다. 아흔 살이 넘은 노병들이 인생의 마지막에 평생 잊을 수 없었던 한반도의 고지들을 떠올린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아름다운 풍경이 지나가는 언덕 위에서 그들은 보았고 무엇을 잃었던 것일까. [출처 : 제16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스포일러 유의
이념이 아닌 개인의 역사에 집중하다
사실 한국전쟁에 대한 영화나 다큐멘터리는 많이 봐왔었다. 그래서 과연 고지 위의 소년들이라는 작품이 한국인에게 한국전쟁에 대해 얼마나 다른 정보를 줄 수 있을지 기대와 우려가 섞인 채 영화관으로 들어갔다. 그런 나에게 영화는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말을 건넨다. 나레이션이 깔리면서 순간 고지 위의 소년들이라는 영화 소개글을 내가 잘못 읽고 들어온 것이 아닐까 싶었다. 분명 한국전쟁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왜 나레이션이 영어로 깔리는 것일까 하는 의문 속에서 노병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UN군으로서 한국전쟁에 참여해 수많은 전선을 지켜냈던 먼나라의 사람들. 그들은 벌써 90살이 되어 카메라 앞에 앉았다. 90살이 넘은 그들이었지만 카메라 속에 비춰진 그들은 아직까지도 한국전쟁이 바로 엊그제에 있었던 것처럼 생생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딱 UN군으로 참전한 노병들의 이야기만 담겼다면 이 작품에 대해 박수를 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제까지 많은 한국전쟁에 대한 다큐멘터리와 영화 속에서 개인의 역사를 담아낸 방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지 위의 소년들은 여기서 변주를 준다. 바로 중공군으로 참가한 중국 노병의 인터뷰가 바로 이어지면서 이제까지 한국전쟁을 다룬 작품에서는 들어볼 수 없었던 존재의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물론 나는 반공세대에 태어나지도, 그런 교육을 받고 자라지 않았다. 하지만 학교 역사시간에는 우리가 북한을 대해왔던 방식에 대해서는 상당히 이념적인 부분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세대이기도 하다. 이런 이념적인 갈등의 끝이었던 한국전쟁에 대해 다룬 영화, 서적, 논문들을 볼 때면 UN군에 대한 군사적, 경제적 도움에 대한 부분은 굉장히 깊게 논의되고 있는 반면, 북한군과 중공군, 소련군에 대한 내용은 굉장히 미진했었다. 그리고 그들 개인의 역사에 대한 부분은 큰 관심도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고지 위의 소년들은 중공군으로서 참전한 중국 노병의 개인의 이야기도 담아낸다. 그들이 중공군으로 참여했지만 그들 역시 같은 사람으로서 전쟁에 대한 두려움, UN군으로 인해, 국군으로 인해 자신의 친구가 죽었을 때 느끼는 상실감 등 인간으로서 똑같은 공포에 사로잡힌 그저 한 개인에 불과한 사람들이었다. 이처럼 이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저 한국전쟁에 참여한 개인으로서 다양한 나라의 다양한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엮어낸 점에 있어서 그동안의 한국전쟁에 대한 다큐멘터리 및 학계의 논의 범위를 확대시켜준 작품이 아닐까 싶다.
목소리로 담아낸 노병의 이야기
영화 고지 위의 소년들은 배우 유태오가 나레이션을 맡았다. 알고 본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 크레딧이 올라갈 때 ‘유태오’ 이름을 발견하고 ‘아,,! 담담하면서도 처연한 느낌이 너무나도 잘 느껴진 이유가 여기 있었구나’하고 깨달았다. 고지 위의 소년들은 실제 한국전쟁에 참전한 노병들의 인터뷰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그러면서 그들의 에피소드나 전쟁에 대한 묘사들이 애니메이션으로 구현되고, 그들이 실제 싸웠던 황량하고 공포스러운 고지가 이제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산맥으로 다시 바뀐 광활한 자연이 나올 때엔 어김없이 나레이션이 깔렸다.
나레이션은 담백했다. 하지만 감정이 폭발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현실에서의 노병들은 인터뷰를 하며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감정을 쏟아낸다. 한국전쟁이 자신에게 드리운 트라우마를 말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다. 하지만 그에 반해 그들과 같이 한국전쟁에 참여한 한 인물의 이야기를 1인칭의 시점으로 풀어내고 있는 나레이터는 뭐랄까 나의 이야기를 그저 기억해줬으면 하는 담담한 일기장을 구두로 듣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젠 돌이킬 수 없기에 처연한 마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알려주고 있었다. 다양한 감정들이 오가는 인터뷰이들 사이에서 이 담담하고도 처연한 나레이터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묘한 이질감이 들면서도 계속해서 영화에 집중을 하게 되었다.
그 이질감이 드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이 비밀은 영화 후반 풀린다. 노병들은 살아서 각자의 조국으로 귀국한다. 하지만 나레이터가 읊은 이야기 속 ‘나’는 수많은 고지 어딘가에 묻혀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1953년 7월 27일 그들은 고지에 잠든 채 함께 온 친구들처럼 돌아가지 못했다. '우리는 여기에 묻혔다’라는 나레이션을 듣는 순간 이 묘한 이질감이 해소되었다. 살아있는 노병들의 이야기와 전사한 노병이 이야기를 인터뷰와 나레이션으로 교차하면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면서 생과 사라는 그 간극을 영화에서 내내 잘 보여준 작품이었다. 그리고 그 묘한 이질감을 유태오 배우의 나레이션을 통해 잘 구현되어서 다큐멘터리에서 나레이터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한국전쟁에 대한 개인의 역사를 잘 담아낸 영화 고지 위의 소년. 앞으로 남아있는 다양한 프로젝트를 기대하게 만들었던 작품이었다.
<상영시간표>
2024. 9. 29. (일) 14:30 롯데시네마 주엽 2관
2024. 9. 30. (월) 13:30 롯데시네마 주엽 5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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