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4-11-04 19:37:57
안아주고 싶은 등짝
영화 <연소일기> 리뷰
SYNOPSIS.
"나는 쓸모없는 사람일까?"
한 고등학교 교실의 쓰레기통에서 주인 모를 유서 내용의 편지가 발견된다. 대입 시험을 앞두고 교감은 이 일을 묻으려고 하고, 정 선생은 우선 이 편지를 누가 썼는지부터 찾아보자고 한다.
"일기야, 안녕? 오늘부터 매일 일기를 쓰기로 했어"
편지와 학생들의 글씨 모양을 비교하던 정 선생은 편지 속 한 문장에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오래된 일기장을 꺼내 든다. 열심히 쓰다 보면 바라던 어른이 될 거란 믿음으로 써 내려간 열 살 소년의 일기. 정 선생은 일기를 읽으며 묻어뒀던 아픈 과거와 감정들을 마주하고, 학생들을 위해 마음을 열기 시작하는데…
POINT.
✔ 홍콩 금마장영화제 신인감독상 수상작
✔ 독특하게도 부산국제영화제 리퀘스트시네마로 첫 선을 보였는데, 평이 좋았습니다
✔ 감독이 하고 싶었던 말이 길 잃지 않고 정확하게 전달되는 영화, 감정의 에너지가 커다랗게 전해지는 영화. 전 요즘 이런 영화가 참 좋더라고요.
✔ 경쟁을 일상으로 여겨 온 한국인이라면, 다소 어렵지 않게 공감할 수 있는 감정들이 있어요
✔ 10살 소년을 연기하는 황재락 배우의 얼굴이 오래 아른거릴 거예요
✔ 11월 13일 개봉
영화 <연소일기>는 계단을 올라가는 아이의 이미지에서 시작한다. 높이를 가늠해 보며 계단을 오르고, 옥상에서 소리를 질러 보는 아이의 등짝. 영화는 이제부터 아이 삶을 따라가며 몇 번의 상승과 하강을 그려낼 것이다.
또 한편에는 '정 선생'이 있다. 영화는 현재의 정 선생과 과거의 아이를 교차해 보여준다. 기억과 현실 사이, 과거와 현재 사이 매개가 되는 것은 어느 날 정 선생의 학교에서 발견된 유서 비슷한 편지이다. 스스로가 쓸모 없는 사람인 것 같다는, 그래서 사라져도 빨리 잊힐 것이라는 말. 그 말은 정 선생을 10살 아이의 일기장으로 데려간다.
정 선생을 잡을 때마다 카메라는 계속해서 불안하게 흔들거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턱을 괴거나 엎드리거나 칠판을 보고 있는 학생들의 마음에는 어떤 생각들이 고여 있는지 종잡을 수가 없다. 10살 아이는 폭력적인 세계를 살아간다. 이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터져 나갈 것 같은 외로움과 괴로움의 시기 안에 있다.
(언제든 우리의 현재가 될 수도 있지만 지금 당신의 현재가 괴롭든 괴롭지 않든) 우리는 과거에 누구나 한 번 이상 괴로움을 겪었다. 형태와 깊이는 제각각이지만, 어떤 것은 금방 잊히고 어떤 것은 영영 생채기로 남지만, 그래서 오늘 우리의 얼굴에서 어제의 괴로움이 다 읽히지는 않지만, 겪지 않는 사람은 없다. 정 선생의 동료 교사들만 보아도 그렇다. 그들에게 유서 비슷한 편지는 공허한 문장으로만 읽힌다. 어릴 때 한번쯤은 하는 생각이라면서. 그들에게도 익숙한 문장이라는 뜻이다. 기억 속에 문장의 기표는 남아 있지만, 그 뒤에서 터져 나갈 것 같았던 기의들은 잊혔다.
그러나 정 선생은 10살 아이의 일기장이 떠올라 버린 이상 그렇게 쉽게 놓을 수 없어, 상담 선생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본다. 유서 편지의 문장과 똑같은 일기장 속 문장을 끈으로 삼아, 교차 편집된 과거에서 10살 아이가 연필로 써내려간 일기장의 기억을 펼쳐 보여준다.
일기를 쓰게 된 계기도, 일기 속 문장들도... 10살 아이의 세상은 녹록지 않다. 필연적으로 부모의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는 나이다. 남들 눈에 비춰지는 성과에 집착하는 아버지와 그 옆에서 히스테릭해져 가는 어머니, 아이와 다르게 뭐든 잘 해내는 동생의 모습은 다소 도식적으로 그려졌지만, 10살 아이의 캐릭터가 선명하여 그 단점을 상쇄한다. 영화를 보다 보면 황재락이 연기하는 10살 아이 요우제를 사랑하게 된다. 아이는 비록 공부를 잘 못하지만, 타인의 마음을 헤아려 보는 데에 재능이 있다. 이야기를 좋아하고 문구를 좋아하는 걸로 보아, 공부 아닌 다른 데 재능이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아버지는 10살 요우제의 재능을 헤아려 보지 않는다. 그에게는 메트로놈에 딱딱 맞는 것만이 올바른 음악이다. 정해진 박자 바깥의 풍성함은 그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정답이 아니라면 모두 틀렸다는 그의 독선은 가족을 차별과 폭력으로 물들인다. 그 독선적 세계 또한 카메라에서 계속해서 흔들린다.
부모의 편협한 시야 안에서, 10살 아이의 세상은 조금씩 쪼그라들고 무너진다. 보고 있노라면 이 일기가 10살 아이의 세상이 무너져간 기록이라는 생각도 든다. 정 선생이 유서의 주인공을 찾아 헤매는 순간에도 일각에서는 폭력이 계속 일어나고 있는 세계를 보며, 얼마나 많은 세상이 이렇게 무너지고 쪼그라들고 있을까 생각하면 아찔해진다. 요우제라는 10살 아이에게 맞춰진 소실점은 수많은 아이들에게로 투사된다.
그 구도 안에서, 이 영화가 관객에게 실어 나르고자 한 감정이 묵직하게 전달되어 온다. 감독이 하고 싶었던 말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특히 골목 사이로 아이들이 뛰는 장면에서, 카메라 앵글을 따라 세상이 뒤집힐 때, 우리는 비로소 메트로놈 박자 바깥의 세상을 느낀다. 무너지지 않은 세상에서 아이들이 건강하게 웃을 수 있는 세상을 느낀다. 거기에는 기꺼이 손 내미는 다정함, 함께 보내는 시간, 솔직하게 터놓은 마음이 있다. 그것만이 우리를 구할 수 있다고 절절한 마음을 담아 던지는 영화다.
영화를 보며 심규선의 <살아남은 아이>가 떠올랐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살아남은 아이인지 모른다. 유서를 발견해도 어린 시절 한번쯤 해보는 생각 아니냐고 말하는 교사들도, 독선적인 형태의 성취만을 인정하는 아버지도, 그런 아버지에게 맞추는 데 눈물도 인생도 쏟아낸 어머니도... 사실 그들 또한 과거의 어느 순간, 터져 버릴 것 같은 외로움과 괴로움을 넘어서 여기까지 왔는지 모른다.
불쏘시개처럼 나를 자꾸만 헤집어대는
어린 시절의 아름답지만은 않던 기억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자라 지금의 네가 되는지
들춘 기억에 귀엣말처럼 속삭여주고 싶다 (...)
너는 살아남은 아이 미움과 무관심 속에서
이 어둠은 너의 별빛을 더 환하게 할 뿐 꺼트릴 순 없어
너는 살아남은 아이 눈물의 반짝임 모아서
저 은하수처럼 흐르며 또 살아갈 거야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영화는 영화일 뿐인데, 자꾸 현실의 아이들이 떠오른다. 우리 모두가 그런 시기를 넘어 바라던 어른으로 자라날 수 있다면. 가끔은 뒤늦은 후회의 눈빛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해도, 그럼에도 다시 시작해볼 수 있는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다면. 그런 소망을 품고, 옥상에 선 아이의 등짝을 끌어안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마 내 안의 <연소일기>에는 그런 문장들이 적힌 페이지가 있을 것이다. 차마 끌어안지 못하고 놓쳐버린 등짝들이. 지금이라도 끌어안고 싶은 등짝들이.
이 영화를 마주한 당신의 <연소일기>에서는 어떤 페이지가 펼쳐질까. 이 영화는 누군가의 어린 시절 일기인 동시에, 당신 내면의 일기장을 부드럽게 펼치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리고 페이지를 넘겨줄 것이다. Time still turn the page라는 이 영화의 영어 제목 그대로. 과거에 덮어두고 온 상처 투성이 일기더라도, 오랜 시간 흐른 후에 다시 페이지를 고이 넘길 수도 있는 법이니까. 넘어간 페이지에서 다정한 마음을 가득 끌어안고 상영관을 나올 당신의 모습을 그려 본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초청받아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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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FF 데일리] 폭력의 낭만화, 낭만의 폭력화, 예쁜 영화는 아니야
예쁜 영화는 아니야 (Not a Pretty Picture,1976)
이 작품은 마샤 쿨리지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가 들어간 기록이자 ‘강간’이라는 폭력이 어째서 문화가 되었는지에 공론을 시도한 작품이다. 2022년 복원되어, 2024년 전주국제영화제를 통해 한국에서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마샤 쿨리지 감독은 미국에서 영상 창작과 관련하여 다양하게 활동하고 있는 창작자이다. 72년부터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으며, 미국 감독 조합에서 최초의 여성 조합장을 맡은 인물이기도 하다. 여러모로 미국에서 ‘여성 창자가’로서의 위치를 계속 지킨 선배인 것이다.
영화의 계기는 시작과 동시에 바로 밝혀진다. 쿨리지 감독은 자신의 경험을 재현하여, 이를 통해 당시의 감정과 이유를 찾아보고, 이 경험을 나눔으로써 ‘강간 문화’를 공론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강간’에 관한 ‘피해자-가해자’의 구조를 분해하고, 피해자의 수치심에 이의를 제기한다. 또 이 과정에서 가해자의 오류를 짚어내며 (당시) 현대의 뒤틀어진 성문화에 관하여 자연스럽게 고발하는 모습을 띄기도 한다. 이는 기존에 갖고 있던 사고의 흐름과 다른 방식의 해석을 제시한다. 더불어 만티 배우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기에 쿨리지 감독의 프로젝트에 동참하게 된다. 나는 이 프로젝트가 자신의 트라우마를 직면하여 객관성을 찾고, 내가 갖고 있던 주관적 오류를 발견할 수 있는 좋은 시도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 또한 한계가 있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그 트라우마에 대해서 받아들이는 힘이 어느 정도 부축될 수 있어야 실현 가능한 급진적인 치료법이 아닐까.
그래서 내가 실제로 재현(연극)을 통하여 나를 분석하는 시간을 갖기 전에 다른 사례를 보면서 미리 괴로움의 타격감을 낮춰보는 것이다. 영화에서 이 재현의 방식을 숨김없이 적나라하게 보여주므로, 우리는 이런 방안의 존재를 인식하고, 다른 시선의 해석을 고려해 볼 수 있게 된다.
영화의 구조가 독특한데, 쿨리지 감독의 실제 있었던 강간의 경험과 미셸 만티 배우의 경험도 포함하여 이루어진 ‘믹스-다큐멘터리’이다. 픽션이기도 하면서 논픽션이며, 다큐멘터리이면서도 극이 존재하는 새로운 형태의 에세이라고 생각했다. 보통의 다큐멘터리에서 ‘극(재현)’과 ‘내레이션’이 같이 등장하는 경우, ‘극’에 해당되는 장면은 예시로서 등장하고, 이후 내레이션이 설명과 전개를 담당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극’을 통해 이야기를 전개하고, ‘재현’을 극의 밖으로 꺼내온다. 허구성을 최대한 덜어내고, 객관성을 살리고자 하는 방식이지 않았나 싶다. 제4의 벽이 눈앞에 놓여있는 것이다. 우리가 극에 관한 이입에 방지턱을 넣어주는 역할이 되어준다.
‘강간’이라는 주제는 아직도 우리에게 낯설고, 피해자에게 부당한 감정을 당연시되는 고질적인 폭력 중 하나다. 그래서 그런 만큼 우리가 갖고 있는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에 의해서 쉽게 가해자를 동조하고, 피해자를 비난하는 구조에 응할 수 있다. 가해자의 폭력의 무게는 한없이 가벼워지고, 피해자의 수치심은 반비례하게 된다. 여전히 사건의 연장선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역설적인 부당한 폭력인 ‘강간’에 관하여 이야기를 다루는 만큼 재현하는 과정에서 ‘브레이크’라는 장치가 중요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쿨리지 감독은 극과 다큐멘터리의 틀을 깨트리고, 간섭하고, 혼합하여 새로운 구조를 만든 것이다. 어찌 보면 통일되지 않는 비 완성성이 안정성을 부여해 준 것이다.
그래서 내게 구조적으로도 참 매력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다루기 어려운 주제일수록 새로운 방식을 창조하여 순응 대신 어떻게든 반기를 들겠다는 강한 도전처럼 느껴졌다. 이런 강렬한 도전은 파격적인 형태로 비칠 수 있지만, 그만큼 더 강력히 파고들어가 인식해 볼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 영화를 관람하게 된 계기는 요 근래 내가 ‘섹스-강간’에 관한 주제에 관심 많았고, 이에 걸맞은 영화라 안 볼 수가 없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낭만, 설렘이라는 낭만, 성(SEX)라는 낭만에서 얼마나 많은 폭력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고 있을까. 낭만이 폭력으로 다가올 때, 우리는 ‘폭력’이라 인지하기가 어렵다. 언뜻 ‘낭만’이란 포장지가 폭력을 정당화하고, 가해자에게는 면죄부를 피해자에게는 아예 사건을 파악할 수 없도록 교란시킨다. 우리가 사랑하던 낭만이 어째서 폭력이 되는 걸까. 이는 ‘성(SEX)’의 문화가 치밀하게 권력구조를 계속 유지하였기 때문이다.
극중 강간의 장면을 재현하면서 가해자를 맡은 배우와 피해자를 맡은 배우 그리고 그 사건의 당사자인 쿨리지 감독은 중간중간 서로의 견해를 밝히고, 각자의 의견에 반응을 숨김없이 표현한다. 이 과정을 통해서 남성에게는 ‘강간’이란 심각하게 다가와서는 안 되는 성취이자 달성 목표이고, 여성에게 ‘강간’이란 남성의 성취욕을 방해한 치욕의 대가로 작용한다. 오래전부터 이어온 악습인데, 여성과 남성이란 성별 이분법의 권력구조가 ‘강간 문화’를 용인해 줬다. 이 문화를 통해 사건의 제공자는 분명하게 남성이지만, 여성이 자초한 일로 해프닝으로 정리되고, 걸맞지 않은 고통을 부여받는다. 이는 피해자인 여성에게 수치심이라는 잘못된 감정을 심어주고, 불쾌감이라는 권리를 놓쳐 버리게 된다. 이렇게 낙인은 계속 유지되고, ‘강간 문화’는 더욱 견고하게 자리를 잡고 비키지 않게 된다.
이것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여기에 쿨리지 감독은 ‘직시하기’라는 방법을 택한 것이고, 이를 통해 우리의 오류를 파악하고, 놓쳐버린 권리를 깨닫는다. 우리가 폭력을 저지르지 않을 권리, 우리가 폭력을 당하지 않을 권리, 그리고 낭만을 즐길 권리를. 남성은 가해자지만 동시에 그들도 받은 피해가 있다. 그들은 사회가 부여한 가부장에 ‘폭력’이란 잘못의 무게를 한없이 가볍게 해, 이내 저지르게 한다. 폭력을 하지 않을 권리가 필요하다. 그래서 늘 ‘성범죄’와 관련하여 끝마무리를 할 땐, ‘성교육’을 빼놓기가 어렵다. 만약에 남성들이 성교육을 받았더라면 폭력을 인지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여성들은 폭력 이후의 거듭되는 폭력에 벗어날 수 있었을까.
여전히 사회는 피해자에게 범죄를 조심하라고 한다. 그리고 예방법을 알려준다. 그러나 그전에 가해자가 가해를 저지르지 않게 알리는 것이 피해를 줄이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낭만이란 허울에 폭력을 용인하는 사회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것이 폭력의 재생산을 방지한다. 폭력이란 피해를 대처하는 것도 아니고, 피해자가 예방하는 것도 힘들다. 그러니, 부디 폭력의 발생부터 짚어지길 바란다.
영화를 보면서 ‘피해자’의 생각뿐 아니라 ‘가해자’의 생각도 함께 듣게 됨으로 전체적인 틀을 바라보고, 더 큰 시야에서의 불합당함을 찾을 수 있었다. 이런 공론을 시도한 쿨리지 감독의 용기와 도전에 인상이 참 크다. 미시적인 출발이 거대한 가시성을 이뤄냈다. 개인에서 사회 전체로까지 생각을 폭을 넓힐 수 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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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피터 파커다운 스파이더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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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Spider-Man: No Way Home, 2021)
개봉일 : 2021.12.15.(한국 기준)
감독 : 존 왓츠
출연 : 톰 홀랜드, 젠데이아 콜먼, 베네딕트 컴버배치, 존 파브로, 제이콥 배덜런, 마리사 토메이, 알프리드 몰리나
쿠키 영상 : 2개
가장 피터 파커다운 스파이더맨
2016년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를 통해 처음 등장한 톰 홀랜드의 스파이더맨이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의 개봉 2년이 지난 2021년 12월,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으로 돌아왔다. 코로나의 영향으로 “과연 올해 안에 볼 수 있을까?” 기대 반 걱정 반으로 기다린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오래 기다린 만큼 팬들의 기대감도 컸기에 항간에 떠도는 소문도 참 많았다. 그 소문들을 믿거나 너무 기대하진 않으려고 했다. 기대하면 그만큼 실망할 이유들이 많아지니까.
처음 마블에 스파이더맨이 등장한다는 소식을 들릴 때쯤, 나는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에 푹 담가져 있었다. 큰 눈을 가진 앤드류 가필드의 인간미 넘치는 스파이더맨이 좋았고, 비록 악역이었지만 치명적이었던 데인 드한의 연기가 좋았다. 거기에 삼부작으로 완성되지 못하고 끝나버리는 바람에 아픈 손가락처럼 더 애착이 갔던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앤드류를 뒤로하고 새로운 스파이더맨의 등장이라니. 기대도 됐지만 살짝 못 미덥기도 했다. “과연 어떤 스파이더맨이 나오는지 보자-”싶었다고 해야할까?
하지만 톰 홀랜드는 자신이 가진 힘을 힘껏 뿜어내며 새로운 스파이더맨을 만들어갔고, 관객들은 자연히 그에게 스며들었다. 그리고 3대 스파이더맨이 된 톰은 ‘아기 거미’와 ‘톰스파’라는 애칭까지 꿰차며 당당히 어벤져스에 합류했다. 특히 인피니티 워에서는 스파이더맨 때문에 눈물 줄줄 흘리던 관객들도 꽤 많았으니.. 스파이더맨으로서 그의 존재감이 꽤나 톡톡했다는 걸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스파이더맨의 성장
토니 스타크가 떠나기 전까지 어벤져스에서 스파이더맨의 이미지는 완전한 히어로라기보단 막내와 어린아이에 가까웠다. 토니에게 수트를 달라고 어리광을 부린다거나, 토니와의 만남에 신나 셀프 카메라를 찍는다거나, 짝사랑하는 MJ 앞에서 어버버 말을 흐린다거나.. 등등. 히어로 캐릭터들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어렸던 스파이더맨은 항상 조금씩 어설펐다. 나쁜 뜻은 아니라 딱 그 나이대의 감성이 풍부한, 서툰 소년 같았다는 말이다. (역대 스파이더맨 중에서도 가장 어린 나이대인 것도 한몫했다.)
<엔드게임>이후 개봉한 <파 프롬 홈>에서는 멘토였던 토니를 잃은 피터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다 토니의 뜻을 이을 수 있는 ‘히어로’로서의 길을 선택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이번에 개봉한 <노웨이 홈>에서는 스파이더맨의 눈앞에 닥친 위협 속에서, 스파이더맨과 피터 파커라는 두 개의 인생을 두고 갈등하며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피터 파커다운 스파이더맨
“큰 힘엔 큰 책임이 따른다.” “누군가를 돕는 일은 모두를 돕는 일이다.” 사실 이 두 마디 말이 스파이더맨이라는 히어로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음을 살짝 잊어가던 참이었다. 역대 스파이더맨 시리즈에 비해 어벤져스 시리즈의 스케일이 범우주적으로 넓어지기도 했고, 상대하는 악당들과 스파이더맨의 슈트 능력치 또한 크게 상승했기에 톰 홀랜드의 스파이더맨은 내가 처음 접했던 스파이더맨의 모습과는 조금 다르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 또한 매력적이었고, 가끔은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여전히 ‘친절한 이웃’ 스파이더맨의 느낌보다는 ‘우주를 구한 히어로’ 스파이더맨의 느낌이 강했다.
서서히 새로운 스파이더맨에 익숙해지고 있던 찰나, <노 웨이홈>은 피터 파커를 다시 피터 파커답게 돌려놓는다. 토비 맥과이어와 앤드류 가필드가 연기했던 그 ‘친절한 이웃’ 스파이더맨. 사람의 선함을 믿고, 이웃을 구하기 위해 뛰어다니는, 소박하고 친절한 옆집 청년 같은 그 스파이더맨처럼 말이다.
톰 홀랜드의 스파이더맨 3부작
<노 웨이 홈>은 톰 홀랜드의 스파이더맨 3부작의 마무리로서 완벽했다고 말하고 싶다. 오랜 시간 만나온 친구, 스파이더맨의 마지막이자 새로운 시작을 이야기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특히 토비 맥과이어가 연기했던 시절부터 ‘스파이더맨’이라는 히어로와 오랜 시간을 쌓아왔기에 세 번째 마무리가 더욱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꾸준히 이야기를 진행해온 프랜차이즈 영화와 오랜 시간을 함께해 준 캐릭터가 가진 가장 큰 메리트가 이런 게 아닐까 싶다. 시간과 정이라는 게 이렇게 대단하다. 스파이더맨을 보면서 울고 웃었던 시간을 이렇게 한 번에 다시 선물 받다니. 이 영화를 어떻게 아끼지 않을 수 있을까?
사적인 감정을 모두 제외하고 본다면 영화에는 아쉬운 부분이 있다. 너무 많아 일회성으로 소모된듯한 빌런의 존재와 가장 임팩트 있어야 할 장면이 다소 심심하게 그려졌다는 것. 닥터 스트레인지의 포지션이 살짝 아쉬웠다는 것.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의미인가. 그게 대수인가! 스파이더맨이 이렇게 돌아왔는데. 실망할 시간 같은 것은 없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 하고 싶지만 글의 상단에선 참겠다. 영화를 보기 전 꼭 당부하고 싶은 말이라면 “그 어떤 스포도 듣지 말고, 아무것도 모른 채 감상하라.”정도가 있겠다.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시놉시스
‘미스테리오’의 계략으로 세상에 정체가 탄로난 스파이더맨 ‘피터 파커’는 하루 아침에 평범한 일상을 잃게 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닥터 스트레인지’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지만 뜻하지 않게 멀티버스가 열리면서 각기 다른 차원의 불청객들이 나타난다.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드디어 열린 멀티버스
앞선 스파이더맨 시리즈와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어벤져스 시리즈>를 거치며 꾸준히 언급됐던 ‘멀티버스’. 그 멀티버스가 드디어 <노 웨이 홈>에서 열렸다. 닥터 스트레인지의 포탈을 통해서 말이다. 피터 파커가 스파이더맨이란 사실이 온 세상에 퍼지고 피터는 스파이더맨인 자신이 소중한 사람들의 인생을 망쳤다며 자책한다.
MJ와 네드의 대학 입시가 좌절되고 사람들은 피터의 집에 벽돌을 던진다. 죄책감에 마음 아파하던 피터는 닥터 스트레인지를 찾아가 기억을 지우는 주문을 부탁한다. 하지만 피터의 의도치 않은 방해로 인해 주문이 흩어지고 그 결과 평행 우주에서 ‘피터 파커’를 아는 온갖 인물들이 몰려오게 된다.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빌런 그린 고블린과 닥터 옥타비우스, 샌드맨.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빌런 일렉트로와 리자드맨. 그리고 가장 중요한 역대 스파이더맨 두 명까지. 빌런들이 우르르 등장할 때부터 이 둘이 등장하지 않을까.. 기대하긴 했지만, 실제로 앤드류 가필드가 등장하는 순간 “내가 이걸 보려고 이 시간들을 견뎠나 보다..”싶으면서 감동이 밀려왔다.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시리즈가 이도 저도 아닌 채로 끝나버린 그때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을.. 이걸 보려고 버텼나 보다.
삼 스파이더맨의 등장
(이하 톰 홀랜드 = 톰스파, 토비 맥과이어 = 샘스파, 앤드류 가필드 = 어스파로 표기)
메타버스를 통해 만난 스파이더맨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특별한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심장이 하늘로 솟았다 곤두박질치듯 강하게 뛰었다.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인 걸까. 벅차오른다는 말밖엔 할 말이 없었다. 거기에 영화에 가득한 이전작들의 오마쥬 장면들과 고민하고 있는 톰스파에게 건네는 선배 스파이더맨들의 위로까지. 눈물이 안 날 수가 없었다.
같은 고민과 비슷한 아픔을 겪고, 결국엔 성장하는 스파이더맨들
‘두 개의 삶’은 역대 스파이더맨 모두가 공통으로 고민했던 문제다. 히어로 스파이더맨으로서의 삶 or 평범한 피터 파커로서의 삶. 스파이더맨은 소중한 사람들을 지킬 수 없고 피터 파커로 산다면 내가 가진 특별한 능력을 세상을 위해 사용할 수 없다. 거기에 시시각각 닥쳐오는 위험과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선한 히어로이기 전에 분노할 줄 아는 인간의 본성까지 끄집어내게 된다. 하지만 이 사건들 속에서 흔들리는 피터와 끝까지 피터를 잡아주는 소중한 사람들의 말 한마디가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가장 큰 감동 포인트다.
“큰 힘엔 큰 책임이 따른다.” “한 사람만 노력해도 세상은 달라진다.” 그리고 피터는 누구보다 특별한 힘을 가졌다는 응원까지. 피터는 사랑하는 이들의 말을 양분 삼아 자신이 지니고 있는 특별한 능력과 선한 본성을 세상을 위해 사용하게 된다.
샘스파는 벤 삼촌과 친구 해리를 잃고 슬픔에 빠졌다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줬고, 어스파는 아버지와 거미에 대해 얽힌 비밀과 두 개의 삶 중에서 고민을 반복하다 선택을 하는 순간에 사랑하는 그웬을 잃게 된다. 포탈을 타고 다시 등장한 그는 여전히 아픔을 극복하지 못한듯한 모습을 보인다. MJ와 서로를 의지하고 있는 톰스파를 지켜보는 그의 눈빛이 다소 씁쓸하다.
하지만 영화의 후반부, <어메이징 스파이더맨2>의 한 장면처럼 먼 바닥으로 추락하는 MJ를 구해낸 어스파는 오랜 시간 자신을 괴롭혀온 죄책감에서 한걸음 벗어난다.
톰스파는 빌런들을 고칠 수 있다며, 인간의 선함을 믿다 메이 큰엄마를 잃는다. 선함을 믿고 모두를 도와야 한다던 메이의 말을 따르며 많은 이들을 도와온 피터의 믿음이 깨지고 그는 폭주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앞서 같은 아픔을 겪어본 선배 스파이더맨들은 톰스파의 분노를 막고, 마음을 되돌려놓는다.
도덕성과 선함은 약점이 아니다
피터가 여러 평행 우주에서 온 빌런들을 되돌려보내지 않은 이유는 그들을 고칠 수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사람의 본성과 운명은 바꿀 수 없다며 주문을 강행하려 하지만 피터는 달랐다. 피터는 메이 큰엄마의 말을 따라 빌런들을 고쳐놓기로 결심한다.
피터는 모두가 믿지 않고, 모두가 안될 거라 말한 일을 해낸다. 정확히 말하면 세 명의 피터 파커가. “너의 약점은 도덕성”이라고 비웃던 빌런을 고치고, 미스테리우스가 옳았다며 스파이더맨을 비난하는 세상을 한 번 더 구한다. 스파이더맨은 남들이 약점이라 생각하는 ‘선함’을 가슴 중심에 품고 오늘도 묵묵히 누군가를 구한다.
다시 처음으로
막을 수 없을 만큼 몰려오는 평행 우주의 존재들을 보며 피터는 큰 결심을 한다. 사랑하는 이들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안전한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다. 멋진 슈트와 비록 익명이지만 우주를 구한 스파이더맨이라는 명성, 집과 친구들. 모든 걸 포기한 피터는 소중한 친구들이 남긴 흔적을 들고 작은 방에서 새롭게 시작한다.
네드와 조립했던 레고 캐릭터와 MJ가 건넨 커피. 그리고 책상에 널브러진 천 조각들과 새로운 스파이더맨 슈트.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스파이더맨이 해야 할 일’은 그 어느 때보다 명확하게 보인다.
이제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다. 이렇게 자연스레 스파이더맨이 어벤져스의 세계관에서 퇴장하게 될 것인지, 아니면 발로 뛰고 구르며 다시 어벤져스의 스파이더맨이 될지..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3편을 추가 계약한 게 아니냐는 말도 있고, 톰 홀랜드의 말을 보다 보면 그의 피터 파커를 보내줄 때가 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또다시 만날 날이 온다면 <노웨이홈>은 새로운 시작을 위한 적절한 쉼표로 기억될 것이고, 이렇게 끝나게 된다면 아름다운 마침표로 기억될 것이다.
스파이더맨이라는 히어로는 어째 항상 짠하고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초월적 힘을 가진 히어로라기보단 어딘가 있을 것 같은 인간적이고 친절한 이웃의 느낌이 더 강해서 그런 걸까? 처음으로 스파이더맨 시리즈를 접한 지 10년이 더 지났다. 나의 첫 번째 히어로 스파이더맨, 그와 쌓아온 시간이 내 마음속에 이렇게 거대하게 자리 잡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앞으로 이 시리즈가 어떻게 될진 몰라도, 난 이 영화를 끊임없이 찾고, 또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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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온한 공동체를 지탱하는 온기
불온한 공동체를 지탱하는 온기
-고레에다 히로카즈, <어느 가족>(2018) 비평
<앙: 단팥 인생 이야기>와 일련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영화에 출연하며 국내 관객들에게도 친숙한 배우 기키 키린이 2018년 9월 15일 향년 75세에 세상을 떠났다. 30대부터 연극과 영화를 넘나들며 할머니 역할을 도맡아왔던 그녀는 유작 <어느 가족>에서 부쩍 수척해진 얼굴로 등장한다. 영화에서 그녀는 “다들 고마웠어.”라는 말을 남기고 죽음을 맞이하면서 실제 배우의 육체와 겹쳐 묘한 감상을 길어 올린다. 그러나 죽음을 암시하는 배우의 신체와는 별개로 시바타 하츠에의 죽음은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들을 차근히 밟아온 나에겐 다소 의문스러운 죽음이다. 이전 히로카즈의 가족영화들은 영화가 시작하기 전 사망한 가족의 자장을 좇거나, 결말부에 가족 구성원이 죽을 수밖에 없었던 과정을 담아왔다. <어느 가족>의 하츠에처럼 서사 중간에 죽음을 맞이하는 인물은 그의 영화 목록에서는 이례적이다. 특히 그 대상이 그간 그의 가족들을 정신적으로 지탱해온 어머니라는 점에서 더 마음에 걸린다. 그렇다면 하츠에는 왜 영화 중간에 죽어야 했으며, 왜 하필 그녀가 죽어야 했는지 영화 전반을 둘러보며 그녀의 사인을 밝혀보자.
히로카즈 감독은 국내 한 잡지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일본어로 ‘만비키’(万引き)라는 ‘shoplifters’는 ‘도둑질하는 사람들’이라는 뜻과 동시에 ‘그들 자신이 여러 곳에서 도둑질을 당한 사람들’이라는 뜻도 있다.”(<씨네21>, 2018.5.30.)라고 밝혔다. 후자의 의미를 따르면, 원제 <万引き家族>은 ‘훔쳐진 가족’으로 번역된다. 그렇다면 누구에게서 훔쳐진 가족인가. 시바타 가족은 혈연이 아닌 사회 혹은 실제 가족에게서 버려진 구성원들로 이뤄진 유사 가족이다. 유리(사사키 미유)와 쇼타(죠 카이리)는 오사무(릴리 프랭키)와 노부요(안도 사쿠라)를 아버지와 어머니라고 부르진 않지만, 가족 외부의 사람은 쇼타와 함께 거리를 지나가는 노부요를 “어머니”라고 부를 정도로 가족의 형상을 충족하고 있다. 그러나 어설프게 형태만 충족한 이 가족은 사회 시스템 앞에서 철저히 무기력해진다. 사회는 영화 종반부에 그들을 프레임 속 각자 다른 자리에 불러 세우고 유사 가족의 무능을 지적하면서 시바타 가족을 해체한다. 즉, 사회는 혈연이 아니라는 명분으로 유사 가족을 훔쳐낸다. 그런데 그 역도 성립한다. 시바타 가족은 동기의 무고함을 차치하고 보면 진짜 가족에게서 구성원들을 훔쳐 온 가짜 가족이다. 오사무는 차에 방치된 쇼타를 주워오고, 노부요는 유리에게 폭력을 가하던 진짜 가족에게서 아이를 법적 절차 없이 입양한다. 하츠에 역시 아키(마츠오카 마유)가 전 남편의 손녀인 것을 알면서도 아키의 가족에게 묵인하고, 시바타 부부도 오사무가 노부요에게 폭력을 가하던 남편을 죽인 뒤 사회적 계약 없이 맺어진 관계다.
그런데 하츠에가 시바타 부부를 집으로 들인 사연은 불투명하다. 단지 하츠에가 그들을 선택했다는 대사만 주어질 뿐 구체적인 동기는 말해지지 않는다. 하츠에는 전 남편이 죽은 뒤에도 그가 재혼하여 낳은 아들을 찾아가 위자료를 받아내는 속물적인 인물이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연금을 목적으로 집에 얹혀살며 그녀의 돈을 노골적으로 노리는 시바타 부부를 가족으로 선택한 이유가 의뭉스럽다. 하츠에의 진짜 아들은 그녀에게 연락 한 통 없는 무심한 아들이고, 그녀는 보험을 들어서라도 누군가에게 자신의 부고를 전하고 싶어 한다. 정황상 그녀는 자신의 노후를 함께 해줄 가족이 필요했던 인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가짜 가족에게는 '워크셰어(Workshare)'라는 공동의 규칙이 존재한다. 오사무가 쇼타에게 하는 “유리도 뭔가 도움이 되어야 같이 살기 편하지 않겠어?”라는 발언에서 시바타 가족은 암묵적으로 그 공모를 준거로 구성원이 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연금으로 경제적 자족성을 갖춘 하츠에가 시바타 부부를 받아들인 이유는 시바타 가족의 속물적인 규칙과 어긋난다. 이 불균질을 감수하고서라도 히로카즈 감독이 그녀를 유사 가족 안에 편입시킨 이유가 뭘까.
하츠에는 이름의 존재에서도 다른 가족들과 궤를 달리한다. 하츠에를 제외하고 시바타 가족의 구성원들은 가족 외부에서 불렸던 이름과는 다른 가명을 하나씩 갖고 있다. 유리를 찾는 TV 뉴스를 보고 그녀를 몰래 키우기로 합의한 가족들은 유리에게 ‘린’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 그녀를 숨긴다. 영화가 시작되는 시점보다 전이지만, 친부모에게서 받은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쇼타 역시 오사무로부터 그의 본명인 ‘쇼타’라는 이름을 이어받았다. 시바타 부부와 아키 역시 본명과는 다른 이름을 갖고 있다. 쇼타-오사무, 유코-노부요, 사야카-아키. 숨겨야 하거나 숨기고 싶은 이름을 가진 인물들의 본명이 사회와 진짜 가족에게서 밀려났을 당시의 이름이라고 본다면, 그들은 가명을 지어 과거의 이름을 숨기려 한다(가족이 해체되는 취조실에서 사회로부터 숨겨진 이름이 끄집어내지는 귀결도 같은 맥락이다). 그리고 그들의 새로운 이름은 하츠에로부터 이어진 ‘시바타’라는 성으로 묶인다. 즉, 과거의 이름들을 은닉하기 위해 지은 새로운 이름들은 하츠에의 성을 받아 온전한 이름으로 기능한다.
이름 외에도 아이들은 어른으로부터 무엇인가 유전된다. 쇼타와 유리는 각각 가족을 부양하려다 다친 오사무의 오른발과 가족으로부터 받은 노부요의 상처가 유전처럼 전해진 아이들이다. 오사무는 공사현장 텅 빈 공간에서 “다녀왔어” “어, 쇼타”라고 자문자답한다. 오사무의 본명이 쇼타라는 것을 뒤늦게 확인한 관객들은 그가 불이 꺼진 곳에서 자신을 반겨줄 누군가를 바라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빠라는 호칭에 집착하던 오사무는 버려진 아이를 어린 시절 외로웠던 자신의 분신으로 삼아 “어, 쇼타”라고 반겨줄 아버지가 되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남편에게서 폭력을 당한 기억이 있는 노부요는 유리가 친부모에게서 폭력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녀를 다시 집으로 데려온다. 그녀는 욕실에서 자신의 상처와 닮은 유리의 상처를 보고 아이를 끌어안아 몸에 품는다. 어쩌면 시바타 부부는 아이들에게서 과거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들의 바람과는 다르게 비가역적인 가족력처럼 쇼타는 다시 고아가 되고 유리는 다시 폭력적인 가정으로 돌아간다. 그렇다면 남은 하츠에로부터 아키에게는 무엇이 유전되었을까. 쇼타와 유리가 다시 시바타 가족이 되기 전 상태로 돌아가는 것처럼 아키는 아무도 없는 하츠에의 집으로 돌아온다. 그녀가 섹스 노동을 할 때 가명으로 동생의 이름을 쓰는 것으로 보아, 아키는 동생에게 악감정을 느끼는 인물이다. 그녀는 하츠에가 자신의 가족으로부터 금전적 원조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진짜 가족이 아닌 하츠에의 집에 다시 돌아올 정도로 실제 가족에게 감정의 골이 깊다. 그래서 그녀는 하츠에와 같이 실제 가족이 존재하면서도 그들과의 관계를 끊고 홀로 살아가려 한다. 애정결핍이 있고 속물적인 가족의 규칙에 반감을 표했던 아키는 하츠에에게서 집을 이어받아 새로운 대안 가족을 만들어 하츠에의 자리를 대신할 혐의가 있다. 즉, 집의 소유주이자 재개발을 넌지시 바라는 부동산 업자로부터 집을 사수하는 하츠에는 아키에게 다른 가짜 가족이 거주하게 될지도 모르는 집을 물려준다.
<어느 가족>에서 버려질 법한 물건들을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집의 풍경은 마치 버려진 시바타 가족의 은유처럼 보인다. 일본 가족영화의 뿌리인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다다미방처럼 히로카즈의 영화에서 집은 미학적으로나 상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가족은 그 단어의 피상적인 뜻처럼 집으로 묶인 집단이다. 따라서 사회 시스템 속 가족의 형성과 위기를 탐구해온 히로카즈의 영화적 관심사에서 집은 포기할 수 없는 무대일 것이다. 그리고 그의 집은 사회의 공간과 대비하여 의미를 형성해왔다. <어느 가족>의 집도 사회와 시바타 가족을 구분하는 경계처럼 존재한다. 영화 초반부 집 내부는 가족의 형성이 주는 안온한 기운이 형형한 공간이다. 오사무의 자상한 얼굴과 노부요의 모성은 관객에게 시바타 가족 사이에 복류하던 도덕적 균열을 가리는 알리바이로 작용한다. 그들은 관계에서부터 사회의 윤리를 비껴가지만, 외부의 시선이 닿지 않는 집 안에서는 문제없는 가족처럼 보인다.
과거를 숨기려는 이름들에 성을 주고 가족을 사회와 경계 지어주는 은닉처를 제공하는 하츠에는 시바타 가족 구성원들에겐 집과 같다. 그래서 집 밖의 공간인 해수욕장에서도 서로의 손을 잡으며 가족이 되려는 그들을 보면서 하츠에는 마치 임무를 완수한 것처럼 안녕을 고한다. 그 이후 집에 묻힌 하츠에는 시바타 가족이 사회로부터 해체되는 취조실 시퀀스 도중 그녀 역시 집에서 꺼내진다. 하츠에가 집이고 그 집이 사회로부터 시바타 가족을 지키는 울타리였다면, 하츠에의 죽음으로부터 가족이 사회에 노출되는 건 자연스러운 연결이다. <어느 가족>은 집 내부에 편재했던 따스한 온기를 결말까지 안일하게 이어가지 않는다. 영화는 하츠에의 죽음 이후, 피가 아닌 마음과 유대로 연결되었다고 말하던 가짜 가족들의 옆구리 바짝 서늘한 공기를 밀어 넣는다. 하츠에가 죽자 오사무와 노부요는 애도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녀를 묻기 위해 욕실 바닥을 판다. 양심의 가책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들의 얼굴은 벽 너머로 할머니의 시체를 쓰다듬는 아키의 슬픈 손짓과 대비되어 섬뜩하다. 뒤이어 시바타 부부는 하츠에의 유산을 발견하고 뛸 듯이 기뻐한다. <아무도 모른다>에서 아이들을 방치한 어머니를 악인으로 비추지 않음으로써 사회 시스템의 부재를 지목했던 히로카즈 감독은, <어느 가족>에선 어른을 포함한 가족 안으로 카메라를 끌고 와 문제를 가족내부에서도 진단한다. 단순히 사회를 적으로 두고 투쟁하는 가족을 숭고하게 그리지 않고 가족 내에 산재한 위태로움을 기어코 들춰내는 이 영화는 가족의 실패를 사회 시스템만의 잘못으로 몰아가지 않는다.
유사 가족의 나체는 아이 쇼타에 의해 드러난다. 늙은 하츠에가 불온한 가족을 지탱하는 온기였다면 어린 쇼타는 태만한 가족의 폐부를 찌를 냉기다. 홍수정 비평가의 “누군가는 가족 모두를 경찰 앞에 불러모으는 역할을 맡아야 했다.”라는 말에 동의하면서도, "영화가 한 세계의 문을 여는 방법이 진정 어린아이의 몸에 상처를 새기는 것뿐인가."(<씨네21>, 2018.08.16.)라는 의견에는 함께할 수 없다. 쇼타는 도덕적 규범에 게을렀던 다른 가족들과는 달리 유일하게 가족 외부에 호기심을 피력하는 인물이다. 하츠에가 죽자 그녀가 가려주던 가족의 불온을 감지한 쇼타는 유리에게 도둑질의 전이를 한 차례 막아준 문방구 주인의 죽음을 목격한다. 그래서 이제 아이는 두 어른의 도움 없이 스스로 나선다. 마트에서 유리의 도둑질은 들키지 않았지만, 쇼타는 양파를 들고 도망치며 주의를 끈다. 다시 말해, 쇼타는 유리가 걸릴 걸 두려워한 게 아니라 도둑질하는 행위 자체를 막기 위해 도망친다. 그는 길 위에서 어디로 가야하는지 자문했을 것이다. 결국 아이는 가짜 가족의 집이 아닌 막다른 다리를 선택한다. 홍수정 비평가의 의문이 생긴 이유는 상처를 피해의 흔적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쇼타의 상처가 시바타 가족이 편안하게 이어가던 잘못된 내력에서 절연하려는 결연한 성장통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는 새로운 가족을 예비할 어린아이 손에서 이뤄져야 한다. 오히려 주목해야 할 것은 쇼타의 환부다. 영화는 쇼타가 다리에서 떨어져 다친 발을 오사무의 다친 발과 같은 오른발로 슬며시 겹쳐둔다. 오사무의 발은 사회 서비스인 산재보험에 적용되지 않는다. 반면, 쇼타의 다친 발은 쇼타를 버리고 도망치려는 다른 가족들에 의해 방치된다. 그들의 환부는 부위만 같을 뿐 각각 사회와 대안 가족에 의해 곪아간다. 즉, 영화는 쇼타와 오사무의 환부에 외면하는 방관자를 다르게 지목한다. 이 뒤바뀐 진술 사이에 하츠에의 죽음이 있다. 사회 시스템의 부재가 가족의 내부결함으로 도치되는 경계에서 가족을 아슬아슬하게 이어주던 집으로서의 하츠에가 사라지는 건, <어느 가족>이 함께 지목하려 했던 두 의문을 스크린 위에 세우기 위한 서사적 결단인 셈이다.
유사 가족의 무력함 이전에 가족 내에 떠돌던 생기를 목격했던 나로서는, 취조실의 조사관이 시바타 가족에게 묻는 “아이에게 도둑질을 시킨 게 양심에 걸리지 않았나요?” “아이에게는 부모가 필요해요.”와 같은 선명한 발언들이 시바타 가족에게 심정적 면죄부를 부여하는 것 같아 아쉽게 느껴진다. 그런데 조사관의 물음은 언젠가 시바타 가족이 스스로 물었어야 하는 지연된 질문이었다. 이 질문에 대한 오사무의 “가르칠 게 도둑질밖에 없었다.”와 노부요의 “누군가가 버린 걸 주워왔을 뿐이다.”라는 답변이 아프게 다가오는 이유는 오사무가 아버지로서의 해야 한다고 믿었던 역할이 오인된 착각이었고, 자신의 상처가 아이에게 이어지지 않게 하려던 노부요의 애처로운 자기방어였기 때문이다. 사회로부터 끝끝내 가족으로 불리지 못하고 다시 부모를 잃어버린 쇼타와 아파트 난간으로 내몰린 린의 얼굴로 마무리되는 영화는 가족의 형성과 해체만 보여줄 뿐 아이들은 시작과 무엇 하나 달라진 것이 없이 막을 내린다.
<어느 가족>의 돌아온 결말은 말하지 않음으로써 생략된 세계를 보여준다. 시바타 가족은 쇼타를 버리고 도주하려다 한 빛에 포착되는데, 조명을 든 주체가 등장하지 않아 마치 객석에서 뻗어 나온 것처럼 보인다. 마치 쇼타를 버리려는 시바타 가족의 이기심이 관객에게 들킨 것처럼 보이는 이 장면에 이어서, 취조실 장면에서도 시바타 가족은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다. 그래서 흡사 그들이 관객에게 답변하는 듯 보인다. 사회와 유사 가족, 두 집단 모두의 불완전함을 전시하며 끝나는 영화는 막연한 낭만주의적인 희망을 품지 않는다. 다만, 영화의 시작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유리가 침묵으로 거부의 의사를 표하고 스스로 난간 밖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과 쇼타가 이제는 아빠를 추억하며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또한 유리를 구해줄 새로운 가족의 부재와 쇼타의 속삭임이 오사무에게 닿지 않았다는 점에서 완벽하진 않지만, 쇼타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고 유리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는 목격자로서 관객이 존재한다. 시바타 가족의 자기변호와 사회 시스템의 모순을 언급한 영화는 그 이상 말하지 않는다. 이제 유리와 쇼타가 자라 오사무와 노부요가 될지도 모르는 심증만 남은 재판에서 유일한 증인인 관객이 발언할 차례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헤운 작가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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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둘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안녕하세요, 씨네픽입니다! :)
주말은 건강히 잘 보내셨나요?
오늘은 2월의 둘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를 알아보는 시간입니다.
씨네픽과 함께 하는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과 한 주동안 진행했던 씨네픽 예측 이벤트인
'주말 박스오피스 예측(결과) 콘텐츠'도 같이 알아보도록 할게요!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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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주말 박스오피스]
1위. <나일 강의 죽음>(NEW)
▶<나일 강의 죽음>이 2월 2주차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습니다.
주말동안 (2월 11일~13일) 관객 수 9만 4613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14만 1198명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이번 주말 극장을 찾은 관객 수는 현저히 떨어졌다고 합니다.
이번 주말 극장을 찾은 관객 수는 35만 7천여명으로 주말 관객이 40만명 아래로 떨어진 것은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개봉 직적인 2021년 12월 둘째 주(38만 8천여명)이후 두 달만이라고 하는데요.
다시 국내 극장가의 활기를 되찾을 수 있을지 걱정도 됩니다. 한편 <나일 강의 죽음>은
추리소설의 여왕인 '애거서 크리스티'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추리 드라마 장르로 '케네스 브래너' 감독,
'케네스 브래너', '갤 가돗' 주연의 영화입니다.
2위. <해적: 도깨비 깃발>(▼1)
▶이번 주 주말 박스오피스 2위는 <해적: 도깨비 깃발>입니다.
주말동안 (11일~13일) 주말 관객 수 6만 5298명을 동원했고, 총 누적 관객 수는 121만 2392명입니다.
<해적: 도깨비 깃발>은 올해 개봉작 중 첫 100만 관객을 돌파한 작품으로 기록됐는데요.
영화 <나일 강의 죽음>이 개봉을 하게되면서 지난 주에 비해 박스오피스 순위는 1계단 하락했지만
극 중 배우들이 선사하는 유쾌한 에너지와 재미, 그리고 매력으로 관객들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3위. <킹메이커>(▼1)
▶주말 박스오피스 3위는 <킹메이커>입니다.
같은 기간(11~13일)동안 주말 관객 수 4만 8709명을 동원했으며, 충 누적 관객 수는 70만 7272명입니다.
코로나 팬데믹, 특히 변이 바이러스인 오미크론 여파로 다시 한번 극장가의 관객이 현저히 떨어진만큼
<킹메이커>의 앞으로의 박스오피스 순위는 계속해서 떨어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씨네픽의 이번 주 87회 예측 이벤트는 2월 2주 차 박스오피스 예측입니다.
한 주동안 많은 분들이 참여해주셨는데요. 씨네픽 참가자분들이 예측해주신 박스오피스 결과는 어땠는지 다같이 확인해보도록 할게요!
그럼 제87회 씨네픽 주말 박스오피스 예측 이벤트에"에 한 주동안 참여한 씨네픽 유저들의 결과는 어땠을까요?
▶위의 표에서 보시는 것과 같이 한 주동안 씨네픽 참가자분들은 박스오피스 순위를 예측해주셨습니다.
또한 이번 주 박스오피스 순위 예측 이벤트에 참가하여 모든 순위를 맞힌 분들은 모두 32명으로 5,718P의 상금이 주어질 예정입니다.
참여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씨네픽은 다음 주에 더 재밌고 유익한 제 88회 씨네픽 이벤트로 인사드리겠습니다! :)
4위.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1)
▶주말 박스오피스 4위는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입니다.
주말동안 주말 관객 수 2만 1692명을 기록, 총 누적 관객 수는 748만 9384명을 기록했습니다.
꾸준히 박스오피스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는 가운데 지난 주에 비해 순위는 1계단 하락했습니다.
또한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는 곧 누적 관객 수 750만명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5위. <355>(NEW)
▶ 주말 박스오피스 5위는 박스오피스에 첫 진입한 영화 <355>가 차지했습니다.
주말동안 1만 7963여명의 관객 수, 총 누적 관객 수는 3만 545명을 기록했습니다.
영화 <355>는 화려한 할리우드 캐스팅과 압도적 액션 규모로
개봉 첫날부터 실관람객들의 폭발적인 호평 리뷰를 얻으며 입소문 흥행을 이어가고 있는 작품인데요.
영화 <355>는 인류를 위협하는 글로벌 범죄조직에 맞서기 위해 전 세계에서 뭉친
최정예 블랙 에이전트 팀355의 비공식 합동작전을 그린 초대형 액션 블록버스터로
제시카 차스테인, 다이앤 크로거, 페넬로페 크루즈 등 할리우드 최고의 배우들이 출연합니다.
[북미 주말 박스오피스]
▶ 북미 박스오피스 1위는 국내 박스오피와 동일한 <나일 강의 죽음>이 차지했습니다.
주말동안(11~13일) 북미기준 $12,800,000 (한화 약 153억)의 매출액을 달성했습니다.
▶ 새롭게 북미 박스오피스 3위에 진입한 작품은 <Marry Me>입니다.
영화 <Marry Me>는 제니퍼 로페즈, 오웬 윌슨 주연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입니다.
북미의 2009년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으며, 서로 알지 못하는 남녀가 결혼을 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입니다.
북미에서는 2월 11일 개봉했고, 국내에서는 아직 개봉 미예정인 것 같습니다.
▶ 북미 박스오피스 5위는 영화 <Blacklight>입니다.
영화 <Blacklight>는 테이큰 시리즈로 유명한 '리암 니슨'의 새로운 액션 영화입니다.
'트래비스 블럭'이라는 정부 요원으로 등장하며 시민들을 노리는 정부의 음모를 알게됨과 동시에
FBI국장의 계략에 걸려들어 자신의 가족들마저 위험해졌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인데요.
테이큰 시리즈와 비슷한 결의 영화로 예상되는 가운데, 국내 관객들의 잦은 '리암 니슨'표 액션영화에 대한 피로도가 있는 가운데
국내에서도 영화가 흥행을 할지는 지켜봐야할 것 같습니다.
<북미 박스오피스 TOP 10> (2022년 2월 11일 ~ 2022년 2월 13일)
1. <나일 강의 죽음> 1280만 달러 (박스오피스 첫 진입)
2. <잭애스 포에버> 805만 달러 (누적 3742만 달러)
3. <매리 미> 800만 달러 (박스오피스 첫 진입)
4.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715만 달러 (누적 7억 5900만 달러)
5. <블랙라이트> 360만 달러 (박스오피스 첫 진입)
6. <씽2게더> 295만 달러 (누적 1억 4338만 달러)
7. <문폴> 285만 달러 (누적 1515만 달러)
8. <스크림> 283만 달러 (누적 7317만 달러)
9. <리코리쉬 피자> 92만 달러 (누적 1399만 달러)
10.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 43만 달러 (누적 3674만 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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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픽의 2월 둘째 주 박스오피스 분석 콘텐츠는 여기까지입니다.
씨네픽은
다음 주 이 시간에 또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씨네랩 에디터 camm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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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목소리를 내는 프랑스 여성 영화 앵그리 애니
앵그리 애니는 줄리엣 비노쉬 주연의 2023년 개봉작 '슬기로운 아내 수업'과 연결 선상에 있다. 비록 장르는 드라마와 코미디로 다르지만, 페미니즘이라는 카테고리로 묶을 수 있다. 전통적인 관습에 의해 남편을 즐겁게 해주는 역할이 여성의 가장 큰 미덕이요 삶의 목적인 프랑스 사회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남녀 관계에서 성적 결정권이 남성에게만 있는 것은 결혼 전이나 후나 동일하다.
원치 않는 임신과 원하는 임신이었을지라도 남편이 원치 않아 자신의 몸을 다치게 하는 그리고 죄악이라 여겨지는 결정을 한다. 그래서 그녀들은 죄책감과 고통 가운데 살지만, 합법적으로 수술을 받을 수 없어 생명까지 위협받는 상황에서 배 속 생명에 대한 결정을 내린다.
영화는 성에 있어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존중받아야 하며, 피임에 의한 자유로움을 어필한다. 피임에 의한 무분별한 성생활이 영화의 주제라기 보다 남녀가 동등한 입장에서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관계를 맺어가야 함을 이야기 하고 있다.
영화를 보는 중 여성의 특성과 여성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적힌 여성 잡지를 정작 남성이 아닌 여성이 읽는다는 아이러니함에 관한 글을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여성의 결정권은 여성이 바라는 영역이지만, 이러한 주제를 다룬 영화 관람은 대부분 여성들이다. 앵그리 애니 시사회 역시 여성이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세 네명의 남성 관객이 있어 남성과 여성이 함께 이 문제를 긍정적으로 바라볼 희망의 작은 불씨처럼 보였다.
남성이 여성을 존중하고 같은 선상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대해줘야 함을 어려서부터 알아가고 배워가길 바래 8사 아들과 함께 시사회에 참석했다.
남편의 기쁨이 자신의 기쁨이라는 등식을 가진 아내에게 여성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운동에 참여하며 자신과 같은 고통스러운 경험을 한 이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도움을 주는 것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발견해간다.
가정을 내팽개친다는 조롱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가사 일에 참여할 수 있음을 피력하며 그녀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또 다른 자리로 간다.
안전한 방법으로 자신의 목숨을 지켰다고 안도할 즈음 자신과 동일한 상황 안에서 목숨의 힘이 점점 약해져 간 친한 친구의 일을 경험하며 애니는 삶을 바라보는 시선과 결정이 달라진다.
나 또한 애니와 비슷한 일을 겪은 뒤 삶을 바라보는 관점과 결정을 내리는 선택이 달라지고 있다.
"사람들은 이제까지 이렇게 살아왔고, 즈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가는데 왜 유독 너만 이렇게 하냐?"라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란 나는 더 이상 이 말이 부정적으로 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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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리와 로키타/Tori et Lokita, 2023>
다르덴 형제의 신작 <토리와 로키타>를 시사회를 통해 관람하고 왔습니다. 요새 씨네랩에서 좋은 영화들의 시사회를 많이 열더라고요. 덕분에서 좋은 작품들을 일찍 만나고 있습니다. 지금껏 탁월한 영화들을 많이 만들어왔던 다르덴 형제인 만큼, 이번 <토리와 로키타>도 굉장히 훌륭한 영화입니다.
<토리와 로키타>는 다르덴 형제의 필모그래피 중에서 가장 애절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벨기에 체류증을 두고 벌어지는 남매의 모습을 담은 이 이야기는 내내 처절하다가 끝내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할 무력감을 선사하는데, 이제껏 희망과 성장을 이야기했던 다르덴 형제가 사회의 치부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느낌이랄까요. 그렇다고 일종의 해답을 내놓지 않는 다르덴 형제의 태도는 좋은 영화를 만드는 법을 꿰뚫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다르덴 형제의 바로 전작인 <소년 아메드>에서는 파죽지세로 달리는 듯하다가 갑작스레 희망을 보는 듯한 태도가 약간은 아쉬웠는데, <토리와 로키타>에서는 이 둘의 발자취를 담담하게 따라가는 카메라의 활용이 굉장히 탁월합니다. 그저 목격자의 역할을 하는 듯한 <토리와 로키타>의 카메라는 그들이 겪는 풍파를 옆에서 고스란히 바라보는 듯이 만듭니다. 마치 <아들>에서 보여주었던 카메라의 경이를 다시 목도하는 듯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다르덴 형제는 <토리와 로키타>에서 이전의 작품과 달리 사회의 악을 직접적으로 드러냅니다. 영화 내내 토리와 로키타는 누구에게도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합니다. 그들을 착취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그들을 벨기에로 들여보내 준 브로커, 심지어는 그들의 엄마까지 토리와 로키타를 돕기는커녕 그들의 돈만 원할 뿐이죠. 이 둘은 결정적인 순간에도 도움을 받지 못하는데, 이후 맞이하는 영화의 가장 아릿한 장면이 안타까움을 더합니다. 다르덴 형제는 이 영화를 통해 사회 곳곳에 만연한 무시와 단절이 세상을 어둡게 만드는 존재라는 것을 담담하지만 강하게 피력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 영화가 데뷔작이기도 한 파블로 쉴스와 조엘리 음분두의 연기는 매우 생생하고 탁월하게 영화에 깃들여져 있어 이 감동적인 이야기에 생동감을 더합니다. 이외에도 종종 다르덴 형제의 영화들에서 모습을 비추었던 조연들도 좋은 연기로 작품을 탄탄하게 받쳐줍니다.
다르덴 형제의 전작들만큼이나 훌륭한 영화고, 매번 전작들 사이에서 다시금 변주해 흥미롭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점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5월 10일에 개봉하는데, 꼭 보셨으면 하는 작품 중 하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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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vielog #4] 자살을 선택한 사람에 대한 세심한 접근
Rabbitgumi 입니다! 김혜수 배우가 주연한 영화 내가 죽던 날 을 보고 왔어요.
자살한 아이에 대한 수사를 종결시키기 위해 마무리 수사를 하는 이야기를 보여주는데요.
한 사람이 자살로 이르는 심리묘사가 탁월합니다.
결국 살아간다는 것이 자살보다는 좀 더 나은 선택이라는 것을 사람의 믿음과 도움을 통해 보여주려 합니다.
김혜수, 이정은, 노정의 배우의 연기가 정말 좋은 영화입니다. 좋은 드라마를 보고 싶으신 분들에게 추천드립니다.
자세한 내용은 영상을 봐주세요!^^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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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시그널 X : 영혼의 구역> 메인 예고편
끔찍한 방화와 폭력으로 경찰에 연행된 후
연락이 두절된 엄마.
어느 날 한 통의 연락이 온다.
엄마가 코마 상태라는 것.
의료진은 정신과 정신을 직접 연결하는 새로운 치료 기술을 제안한다.
이제껏 경험하지 못 한 새로운 구역의 발을 디딘 순간,
기이한 현상이 연이어 벌어지고
현실과 가상의 경계는 불분명해지는데..
감히 열어서는 안 될,
새로운 차원의 구역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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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싱크홀> 2차 예고편
사.상.초.유! 도심 속 초대형 재난 발생!
서울 입성과 함께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룬 가장 ‘동원(김성균)’
이사 첫날부터 프로 참견러 ‘만수’(차승원)와 사사건건 부딪힌다.
‘동원’은 자가취득을 기념하며 직장 동료들을 집들이에 초대하지만
행복한 단꿈도 잠시, 순식간에 빌라 전체가 땅 속으로 떨어지고 만다.
마주치기만 하면 투닥거리는 빌라 주민 ‘만수’와 ‘동원’
‘동원’의 집들이에 왔던 ‘김대리’(이광수)와 인턴사원 ‘은주’(김혜준)까지!
지하 500m 싱크홀 속으로 떨어진 이들은 과연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까?
“한 500m 정도는 떨어진 것 같아”
“우리… 나갈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