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경2024-11-26 00:48:40
사악한 마녀의 이미지가 허물어진 자리
영화 <위키드> 리뷰
주요 내용
- 영화 소개, 줄거리
- 사악한 마녀의 이미지가 허물어진 자리. 새롭게 시작되는 이야기
- 진실을 짓누르는 거짓을 깨는 엘파바
- 글린다가 엘파바에게 준 모자와 망토의 의미
- 엔딩 결말 해석
위키드 (Wicked, 2024)
사악한 마녀의 이미지가 허물어진 자리
개봉일 : 2024.11.20.
관람등급 : 전체 관람가
장르 : 판타지,뮤지컬
러닝타임 : 160분
감독 : 존 추
출연 : 신시아 에리보, 아리아나 그란데, 조나단 베일리, 에단 슬레이터, 양자경, 제프 골드브럼
개인적인 평점 : 4 / 5
쿠키 영상 : 없음
소설 [위키드]는 고전 명작 [오즈의 마법사]에 등장하는 악당 서쪽 마녀의 어린 시절을 담은 이야기로,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며 영화, 뮤지컬, 연극 등 여러 매체를 통해 리메이크 되었다. 그리고 2024년. 몸집을 제대로 부풀린 실사 뮤지컬 영화 <위키드>가 세상에 나왔다.
6,000만 관객을 동원한 흥행 뮤지컬 원작, 1억 4,500만 달러의 제작비, <스텝 업>, <나우 유 씨미> 등의 영화로 환상적인 영상미를 보여준 존 추 감독의 신작, 아리아나 그란데, 양자경, 신시아 에리보 등 호화로운 오리지널 캐스트와 박혜나, 정선아, 고은성, 정승원 등 탄탄한 국내 더빙 캐스트까지.
말 그대로 소문난 잔칫집이었던 영화 <위키드>는 맛있는 음식을 한가득 차려놓고 뮤지컬 팬과 영화 팬 모두의 배를 든든히 불려주는 작품이었다. 물론 160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의 모든 순간, 모든 조건들이 만족스러웠다고 하긴 어렵지만 최대한 다양한 관객들의 기대에 응답하려는 마음이 한가득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사악함을 상징하는 초록색. 그 초록색의 피부를 타고난 엘파바와 누가 봐도 호감을 느낄 외모를 가진 핑크 공주 글린다. 양극에 위치한 두 사람은 얼떨결에 룸메이트가 된다. 엘파바와 글린다는 서로를 밥맛이라 생각하며 시도 때도 없이 다투지만, 그런 시간이 늘어갈수록 남들은 보지 못하는 상대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며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꿈꿔온 마법사 오즈의 도시, 에메랄드 시티로 가는 기차에 함께 몸을 싣는다. 그리고 환상적인 그 도시에서 새로운 운명을 맞이한다.
사악한 마녀의 이미지가 허물어진 자리. 새롭게 시작되는 이야기
자신이 사악하다고 외치는 사람도 물론 위험하지만 자신의 선함을 필요 이상으로 어필하는 사람 또한 완전히 믿을만한 이는 아니다. <위키드>는 나도 모르게 믿기 쉬운 완연한 선과 악의 경계에 숨겨져 있던 것들을 꺼내 보인다.
영화는 서쪽 마녀가 한 소녀(오즈)가 끼얹은 물에 녹았다는 뉴스와 함께 시작된다. 오즈민들은 “우리가 믿는 선이 악을 이겨냈다”라며 사악한 마녀의 죽음을 기뻐한다. 오즈의 조수인 착한 마녀 글린다는 오즈민들이 부르는 승리의 노래에 동참하면서도 사악한 이의 고독을 생각하는 가사를 흥얼거린다.
마녀의 죽음을 축하하는 의식과 노래가 끝나고 오즈민들은 글린다에게 묻는다. “사악함은 왜 생겨나는 걸까요?", “서쪽 마녀와 정말 친구였어요?". 글린다는 “좀 아는 사이였어요.”라고 대답한다. 이 대답과 함께 엘파바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시작된다. 서쪽 마녀의 그림이 땅으로 떨어지고 그를 따라 만든 거대한 인형이 불태워지는 등, 많은 오즈민들이 믿고 있던 ‘사악한 마녀’라는 이미지가 모두 소멸된 후 그 이미지 뒤에 가려져있던 엘파바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 아래 내용부터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진실을 짓누르는 거짓을 깨는 엘파바
입학식 날 엘파바가 광장을 어지럽히는 장면의 의미
엘파바는 피부 때문에 이상한 오해들을 받으면서도 착하고 단단한 심성을 가진 어른으로 자란다. 동생 네사의 대학교 입학 날, 수많은 학생들의 시선을 받게 된 엘파바는 자신의 피부를 두고 온갖 생각을 하고 있을 그들 사이에서 "그래. 원래부터 난 초록색이었어.”라고 말한다. 엘파바는 ‘초록색 피부’라는 이미지에 주눅 들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을 믿으며 학교 생활을 이어간다. 하지만 엘파바는 여전히 학생들 사이에서 조롱과 폭탄 취급을 받고 그와 방을 나눠쓰는 글린다는 순교자로 취급받으며 더 큰 인기를 얻는다.
엘파바, 글린다, 피예르와 몇 인물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은 보이고 들리는 것을 모두 그대로 믿고 그것을 기준 삼아 상대방을 정의한다. 엘파바의 초록색 피부, 네사의 불편한 몸, 보크의 작은 몸집, 글린다의 아름다운 외모 같은 일차원적인 이미지부터 시작해 사실 무능력하지만 전능하게 포장된 오즈의 모험기, 엘파바가 사악한 마녀고 그의 초록 피부가 사악함의 증거라는 오즈의 말, 학교 광장에 있던 오즈의 석판과 얼굴 동상, 위압감을 주는 오즈의 가면까지. 에메랄드 시티는 이런 수많은 이미지와 가면들로 가득 차 있다. 통치자인 오즈는 이러한 가면 뒤에 숨어 몰래 악한 일을 행하지만 오즈민들은 진실엔 크게 관심을 갖지 않고 그저 누군가의 외면을 평가하고 따돌리기 바쁘다.
엘파바는 다수와 다르게 어떤 가면과 외면이 아닌 진실과 내면을 보는 사람이다. 입학식 날, 네사를 마음대로 데려가려는 기숙사 사감을 말리려던 엘파바가 마법을 쓰며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는 장면. 의자가 하늘을 날아다니며 여러 구조물들을 부수는데, 그중엔 오즈의 모습이 새겨진 석판도 있다. 석판이 부서지자 원래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동물들이 새겨진 석판이 드러난다. 엘파바는 진짜 석판을 짓누르고 있던 오즈의 석판을, 진실을 짓누르고 있던 오즈의 거짓말을 부수고 그에 대항한다.
또한 엘파바는 네사의 불편한 신체라는 외면에 집중하고 그의 휠체어를 밀어주는 것 대신, 네사가 혼자서도 잘할 거라는 그의 내면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보내는 선택을 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네사의 외면만 보는 어른들은 엘파바에게 무조건 네사를 도와주라 말하거나 허락 없이 네사의 휠체어에 손을 얹는다.)
서로를 채워준 엘파바와 글린다
글린다가 엘파바에게 준 모자와 망토의 의미. 엔딩 결말 해석
하지만 이런 엘파바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는 내면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자신의 내면이다. 주변인들은 엘파바를 ‘남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을 그렇지 않다. 엘파바도 상처를 받고 흔들리기도 한다. 특히 엄마의 죽음에 얽힌 상처와 죄책감은 그가 어른이 될 때까지 마음에 짙게 남아있었는데 이 상처를 보듬고 엘파바에게 용기를 준 건 바로 글린다다.
엘파바와 글린다는 처음엔 상징색인 연두색과 분홍색처럼 서로를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보색인 두 색은 (색상환에서) 거리 상으론 가장 멀리 떨어져 있지만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가장 평행한 관계이기도 하다. 거리를 좁히기만 하면 그 어떤 색보다 맞닿기 쉬운 관계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서로에게 한 걸음 나아간 두 사람은 엘파바를 무시하는 동급생들 사이에서 마주 선 채 춤을 춘다. 이후 엘파바와 글린다는 각별한 친구가 되어 서로의 꿈을 이루도록 도움을 주는 사이가 된다.
엘파바는 에메랄드 시티행 기차가 떠날 때 글린다에게 손을 내밀어 글린다가 에메랄드 시티를 여행하고 오즈와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준다. 글린다는 엘파바의 아픔을 위로하고 그가 새로운 세상에 나갈 용기를 준다. 글린다가 엘파바에게 준 모자는 엘파바가 ‘첫 파티’라는 새로운 경험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엘파바가 창문 너머로 떠나기 전에 둘러준 망토는 통치자에게 대항하는 험한 길을 선택한 그에게 전하는 용기와 온기를 선물한다. 엘파바와 글린다는 진한 우정을 등에 업고 착한 마녀와 나쁜 마녀, 명성을 가진 위대한 마법사와 동물들을 돕는 마법사라는 각자의 길로 날아오른다.
숨겨져 있던 두 마녀의 이야기는 새로운 상상의 나래를 활짝 펼쳐준다. 기세 좋게 시작된 이 환상의 나라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Part1의 성적표는 얼마큼의 상승 곡선을 그릴지 벌써부터 궁금하고 기대된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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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이란 게 지겹긴 해도 좋은 건가 봐'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나 어쩌다 살아있지?'라는 생각이다. 내 삶에 있는 여러 페널티에 대해 생각해봤다. 여러 가지가 있었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역시 이 노예 생활이었다. 주말에 극장도 맘 편히 못 가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선 넘었다. 빨리 이 400여 일이 지나야 나도 직장이란 걸 가져 주말을 잘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다음은 신체적인 문제가 있다. 이 쪽으로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강박증이다. 지금도 글 쓰다 말고 손톱을 바싹 깎았다. 또 지금 리뷰를 작성하는 이유는 무언가에 홀렸기 때문이다. 매주 한 편을 안 봐서 두 번 글을 쓰지 않으면 그 다음주가 굉장히 불안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씌었다. 물론 이게 재밌기도 하다. 그런데 가끔 이런 일들이 단순히 재미로만 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열 받으면 온 몸이 간지러운 두드러기. 요즘 자주 그러는 건망증. 신기할 정도의 이해능력. 뭔가 부족한 사회성. 흥분하면 아무 말 대잔치하는 화법까지. 또 지울 수 없는 후회가 남아있다. 나라는 인간을 감당하기엔 단점이 많은 게 확실하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지금 막 우울하고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행복하지도 않고 불행하지도 않다. 그냥 내가 뭔가 위로를 받고 싶은 마음도 아니다. 그냥 그런 기분이랑 상관없이 가끔은 세상이 날 필요하지 않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 되는 건 없고. 노력해도 달라지는 게 없는 것 같고. 어쩌다 오늘같이 나태한 내가 싫고. 사랑도 우정도 추억도 기쁨도 새롭게 시작하기엔 멀리 온 오늘. 우울하진 않아도 마음이 답답하니 그저 흘러가는 하루를 살뿐이다. 난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일까? 내가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따뜻함은 뭘까? 이런 회의감이 참 지긋지긋도 하다. 잘 안다. 다들 이렇다는 걸. 그래서 이렇게 글로 쓰는 게 사실 조심스럽기도 하다. 읽는 사람에게 어두운 이야기는 부담스럽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쩐지 내 삶의 이유를 찾고 싶다고 생각이 들 때, 역시 최고의 해답은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생각을 한다. 이 영화 역시 좋은 해결방안이 될 수 있다. 우리나라 전주 어디쯤에 사는 춘희 씨를 만나보자.
지갑은 얇아도 마음은 따뜻해
1998년, IMF가 직격으로 대한민국을 강타했던 어느 날이다. 주인공은 평범한 10대 소녀 춘희다. 중학교에 다니고 있다. 한 집에 들어오는 춘희. 일행은 전부 검은색 옷을 입었다. 아마 친척 집에 머무르려고 하는 것 같다. 어디에서 잘까? 대화하는 친척들. 어느 방이 좋겠어. 어느 곳이 괜찮아. 이야기를 하다가, 한 방으로 낙찰이 됐다. 그 방은 다락방이다. 책상도 있고 옷장도 있고 이런 구성이 아니다. 사람이 딱 눕기만 가능한 그런 곳이다. 남의 집 더부살이가 속이 편할 리가 없다. 손에 땀이 많이 나는 춘희. 땀 흘렸던 자국을 없애라고 꾸중 듣기 일쑤다. 거의 침낭 수준의 방에서 숙식하는 것도 모자라 신체적인 콤플렉스까지 춘희의 10대는 영 편하지 않은 것 같다. 그렇다고 교우관계가 좋은 편은 아닌 것 같다. 폴카 댄스도 혼자. 노래방도 혼자. 놀이공원도 혼자. 언제나 혼자였던 춘희. 어머니, 아버지는 왠지 안 계시고, 집에서도 그렇게 환영받지 못한다. 아까 썼듯 다한증까지 있던 춘희. 심지어 학교 선생님까지 춘희의 손에 있는 땀에 질겁해 거리를 둔다. 춘희에게 혼자는 낯선 것이 아니다. 늘 그랬으니까. 아니었던 적이 없었으니까.
시간이 지나 춘희는 어른이 됐다. 여전히 그 집에서 숙식하는 춘희. 왠지 외삼촌 가족은 집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춘희는 뚜렷한 직장이 없다. 집에서 혼자 마늘을 열심히 까 외사촌의 가게에 납품하는 것으로 돈을 모으는 모습이 제시된다. 이 뿐만이 아니다. 다한증 수술을 하기 위해 돈도 꼬박꼬박 모았던 춘희. 여러모로 괴로웠던 10대 생활을 뒤로하고 꿋꿋하게 삶을 살아가는 듯한 그녀다. 춘희는 정도 많다. 지나가던 노숙자에게 선물 받은 건강신발도 주기도 하고, 심리치유 프로그램에서 만난 말더듬이 남자에게 '말을 잘하시네요'라며 빙긋이 웃어 보이기도 한다. 삶은 어렵지만 마음은 따뜻했던 춘희. 춘희에게 새로운 인연이 생기는 것 같다. 외로웠던 유년시절을 뒤로하고 이제 누군가가 자기를 사랑해주는 상황까지 오게 됐다. 춘희에게 새로운 봄이 찾아오는 것 같다. 사랑스러운 춘희 씨는 뭔가 다른 삶을 찾을 수 있을까. 영화는 새롭게 시작된 인연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모든 삶에게 바치는 따뜻한 손 하나
그러니까. 다들 그럴 때 있지 않나. 이 세상의 불행이 나에게 다 몰빵 된 것 같은 기분. 마음대로 되는 건 없고. 난 과연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인가?라는 의문이 들고. 사실 혼자가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 그렇게 세상에게 선택받은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 그러면 항상 분기점이 되는 트라우마로 기억이 향한다. 시간을 돌린다고 해서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같은 곳에서 나를 자학하고 있다. 이 영화는 그 지점에 관한 작품이다. 이유와 목적을 찾지 못했기에 계속해서 나에게 그 원인을 묻는다. 멍청한 놈. 네가 그런건 다 그 시기 때문이야.
그런데 사실 삶의 의미나 목적이라고 하는 것이, 언제는 의미가 있었나?라고 반문할 수 있다. 목표 좋다. 나도 이 글 써서 반응이 좋았으면 좋겠다. 또 좋은 곳에 취업해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처럼 잘 살고 싶다. 근데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 잘 안다. 만약 내가 원하는게 이뤄졌다 치자. 소집해제를 하면 자취를 해야 한다. 그럼 거기에서 만들어지는 문제가 있을 것이다. 또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겪어야 할 일이 있다. 내 뒤에서 글을 쓰고 있는 부모님도 언젠가 내 곁을 떠날지도 모른다. 이런 부정적인 일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그게 환기가 될까?라는 생각을 한다. 솔직히 난 지금도 세상이 내 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내가 뭘 이루건 내 안에 부정적 에피소드가 쌓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그토록 잘 써왔다고 자부했던 내 인생의 역전극의 엔딩이 어찌 됐건 아무 의미 없을 거 같다. 그렇게 삶이 어두워지는 게 아무렇지 않게 성격이 변한다. 그런데. 인생이 엔딩으로 끝나는 게 전부가 아니다. 해피엔딩으로 삶이 끝나서가 아닐 것이다. 엔딩이 나면 일단 인생이 없는데, 그게 과연 중요할까? 아닐 것이다. 난 말을 못 한다고 생각했는데, 어디서 만난 여자가 내가 달변가라고 칭찬했다. 그럼 행복한 거다. 비슷한 맥락으로, 세상에 닳고 닳아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이유는 수천 가지인데, 행복한 건 그 단 한 가지면 된다. 영화는 이런 행복의 과정을 반복되는 자기혐오 속에 내던진다. 내가 불행했던 이유를 어린 시절의 나에게서 찾는 것에 대해 '그게 인생의 전부가 아니야'라고 말한다. 밝은 삶도, 어두운 삶도 괜찮으니 이제 자기 학대는 그만두라는 땀 가득한 손을 건넨다. 어차피 우리에겐 많은 빛이 남아 있다는 말과 함께.
말 더듬이 주황
두 주인공의 인물 설정이 좋았다. 특히 쓰고 싶은 건 홍상표 배우가 맡은 주황이다. 주황은 유물에서 문지기를 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잘 사는 집안 아들이 아니었던 남자. 주황 역시 어떤 트라우마를 안고 말을 더듬게 됐다. 이 더듬는다는 단점이 갖는 탄력이 좋았다. 사람이 갖고 있는 다른 단점이야 수 없이 많다. 예를 들어 키가 작거나, 피부가 안 좋거나 등등. 단순히 말더듬이가 아닌 다른 것을 보여줘도 큰 전개에는 무리가 없었을 것 같다. 그러나 말더듬이로 설정한 건 여주인공과 유사점이 있다. 말더듬이가 되면 불편한 게 뭘까? 세상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일 것이다. 나를 싫어하는 듯한 세상에 씩씩하게 살아가는 춘희와 공통점을 갖는다. 이를 기점으로 설정 하나로 인한 각본의 탄력이 물 흐르듯이 이어진다. 여주인공 춘희의 따스함, 주황의 지난했던 삶, 특정 집단에게 받았던 상처, 코미디 요소, 후반부 클라이맥스까지 내용의 전개가 부드러웠다. 감독의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물론 영화 내적인 측면에서도 말더듬이라는 설정이 탁월했지만, 이 영화에서 이 인물이 좋았던 건 그냥 매력이 있었다. 왠지 모르게 정이 가는 사람이었다. 주황은 연애 경험이 그렇게 많을 수 없는 사람이다. 말을 심하게 더듬으니 사람 만날 일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그 덕에 엄청 소심하다. 그런데 이 사람의 행동은 확실히 진심이다. 캐릭터 자체가 이런 순박함이 보였다. 그 덕에 행동 하나하나가 머릿속에 남았다. 극의 전개상 춘희의 이야기가 영화의 중심이지만 주황 캐릭터의 서사도 궁금할 정도였다.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들어갔을 법한
일단 첫 번째. 인물 직업 중에 '영화감독' 있다. 이거 아마 자기를 투영해서 만든 캐릭터일 것이다. 그리고 주황이 수문장으로 있는 '경기전'은 감독이 지금 살고 있는 전주에 위치해 있다고 한다. 또 HOT나 폴카 댄스 같은 요소도 왠지 최진영 감독이 마음에 들었던 소재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또 춘희의 코디가 맘에 들었다. 텍스트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인데, 빨간색을 활용한 느낌이 '이 사람은 꾸밀 줄 안다'는 느낌이 들기 충분하다. 그리고 일부 대사에서 감독이 왠지 자기가 듣고 싶은 말을 넣은 게 아닐까 하는 부분이 있다. 여러분이 영화를 보시면서 '이 부분은 그런 거 같다'라고 생각이 드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엔딩에 나오는 음악도 감독의 취향이 반영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영화가 좋긴 했지만
영화 좋았다. 엔딩까지 보고 나서 기분 좋아지는 느낌이 기억에 남았다. 그런데, 단점이 없지는 않다. 좋은 작품이라는 걸 인정하면서도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드는 기시감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게 뭐 보는데 큰 지장이 있는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쉽고 재밌게 잘 짜인 영화라 삶에 지친 이들에게 따뜻한 손난로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독립영화계의 국밥들
이 영화하면 기억에 남는게 관객들이었다. <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 이후 극장에 사람이 많은 경우를 처음 봤다. 그런데 배우들이 통통 튀고 사랑스러웠다. 어린 춘희 역을 맡았던 박혜진 배우가 기억에 남았다. 물론 어색한 부분도 있었지만 이 정도면 주인공 역을 잘 소화했다고 볼 수 있다. 아. 위에서도 썼듯 홍상표 배우도 연기가 좋았다. 내가 제주 사람이라 기억할 수 밖에 없는 이름이기도 했지만 이렇게 연기를 잘하는 분인지는 몰랐다. 연기를 사랑해서 하는 느낌? 또 강진아 배우도 역할에 맞는 온화함과 사랑스러움이 느껴졌다. 이런 독립영화에 자주 나오시고 상영관도 많이 잡혀서 볼 기회가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늘 하루도 고생 많았어요, 여러분 ^_^
세상을 이겨내는 모든 춘희씨에게 박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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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대한 감동을 초과하는 퀴어 영화
- 7★/10★
사실 〈퀴어 마이 프렌즈〉의 소개글을 보고 ‘적당한’ 감동을 기대했다. 보수적인 기독교 공동체에서 성장한 감독 아현과 남성 동성애자 강원, 강원의 커밍아웃으로 세계가 흔들리는 듯한 충격을 받은 아현, 그리고 카메라를 들고 7년간 강원의 모습을 담는 아현……. 몰랐던 세계를 조금씩 알아가며 서로를 이해하고 마침내 행복해지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그러나 〈퀴어 마이 프렌즈〉는 기대한 감동을 초과한다. 이 영화가 퀴어‧우정을 다루는 영화의 전형성을 비껴 가기 때문이다. 핵심은 ‘실패’다. 강원과 자신이 지나온 혼란의 시간을 갈무리한 뒤, 아현은 퀴어문화축제 무대에서 공연하는 강원의 모습으로 영화를 마무리하려 계획했다. 여러 어려움을 자긍심으로 승화하는 강원의 공연과 이를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카메라에 담는 아현의 모습은 영화의 완벽한 결말, 꽤 괜찮은 해피엔딩이 되어줄 터였다. 하지만 정신적‧심리적 문제로 힘겨워하던 강원은 무대에 서지 못한다. 그리고 〈퀴어 마이 프렌즈〉는 여기서부터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우정과 성장이란 무엇인지를 질문한다.
퀴어문화축제에 참석한 아현이 축제 참가자들과 반대편의 혐오세력을 번갈아 바라보는 장면이 있다. 아현은 생각한다. ‘강원이 아니었다면 나는 어디에 서 있을까?’ 그녀가 편안함과 당위성을 느끼며 성장해온 세계에서 동성애는 죄악이었다. 친한 친구였던 강원의 커밍아웃이 아니었다면 아현은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오히려 확신에 찬 표정으로 길 건너편에서 축제 참가자들에게 소리를 질렀을지도 모른다. 아현이 그들과 달랐던 건 딱 하나, 강원이 그녀의 친구였다는 점이다. 즉, 아현은 강원과의 관계맺음으로 자신이 속했던 세계를 '배반'하고 세계를 확장해왔다.
이 확장은 아현과 강원 관계의 ‘역전’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대학원을 졸업했지만 30대가 되도록 번듯한 직장을 구하지 못했고 결혼도 하지 못한 아현은 ‘정상적인’ 성인에게 으레 기대되는 삶의 궤적에서 자꾸 멀어지는 중이다. 그런 아현의 서사는 미국 시민권 취득해 미군으로 복무하고, 애인과의 오랜 파트너십을 형성한 강원의 서사와 대비된다. 이성애와 동성애라는 차이에만 주목했을 때는 삶의 무게추가 아현 쪽으로 기운 듯 보이지만, 구체적 삶의 조건을 쌓아가는 과정에서는 이 관계의 균형의 뒤집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강원은 삶에 온전히 안착하지 못한다. 명확한 이유를 알 수 없는, 아마도 퀴어라는 정체성과 관련이 있을 정신적‧심리적 문제가 계속 그를 붙잡기 때문이다. 요컨대 둘은 모두 ‘실패’하고 무너진다.
서로 다른 두 인물의 실패는 기묘한 방식으로 포개진다. 강원이 퀴어문화축제 무대에 서지 못한 날 밤, 둘은 지금껏 하지 못한 말을 털어놓는다. ‘속 깊은 대화’라기보다는 ‘격정적 토로’에 가까운 대화였다. 아현은 영화감독과 강원의 친구라는 두 정체성이 혼동되는 상황, 즉 영화가 아니었다면 자신이 강원을 살뜰히 챙기지 않았을 거라는 의심에 반박한다. 강원은 미칠 것 같이 힘들고 혼자 있기만으로도 벅찬데 카메라와 아현을 자기 삶에 들여야만 하는 상황에 부담을 표한다. 이 장면에서 ‘두 실패한 자’들은 자신의 바닥을 내보인다. 그리고 ‘실패’를 토대 삼은 둘의 우정은 더는 끊어낼 수 없을 정도로, 축축하고 질척하게 다져진다.
만약 강원이 아현의 기대대로 퀴어문화축제에서 멋지게 무대를 마무리하고, 영화가 거기서 끝난다면 어땠을까? 물론 그것만으로도 적당할 것이다. 모든 퀴어가 불행할 필요는 없고, 자신이 겪은 문제를 춤으로 승화해내는 강원의 모습은 분명 감동을 자아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피엔딩’은 아현과 강원의 현실을 '왜곡'한다. 그들은 현실에서 불안하고 괴롭기 때문이다. 그날 하루의 공연이 모든 것을 반전시켜 줄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패’의 순간에 천착한다면? 아현과 강원, 그리고 영화가 애초에 계획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과정은 개별 관객이 가지고 있을 실패의 순간과 접속하며 그들의 위치를 ‘관람자’가 아닌 ‘참여자’로 전환해낸다. 그리고 영화는 망해버린 자리, 남은 건 서로밖에 없는 상태에서 끙끙대며 버텨낼 방법을 함께 고민하자고 제안한다. 이것이 바로 〈퀴어 마이 프렌즈〉가 기대를 초과하는 감동을 자아내는 지점이다. ‘모든 실패한 자’들이 아현과 강원의 여정에 동참할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다. ‘나에게 너의 세계를 열어줘서 고마워’라는 아현의 내레이션은 관객이 강원과 아현에게도 똑같이 건넬 수 있는 말이다. 불행한 현실을 비트는 해피엔딩도 좋지만, 그런 현재마저도 긍정하는 ‘실패’에 관한 영화도 좋다. 〈퀴어 마이 프렌즈〉가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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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만난 두 토르, 로맨스를 완성하다
일생에 한 번은 자신을 완전하게 만들어주는 사람을 만난다.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그것에 대해 인정하지 못하지만 그 사람과 이별의 순간을 맞은 이후에 그것으로 인한 공허함이 마음을 채운다. 그 공허함은 나 자신의 진짜 모습을 잊게 만든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의 위로를 받고 또 할 일을 해나가지만 과거와 같이 잘 맞는다는 느낌을 받기 어렵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 지난한 마음의 혼란스러움이 정리된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그건 마음의 성장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완벽한 짝이라고 믿었던 사랑과 이별하게 되었을 때, 그것을 극복하는 건 그렇게 자기 자신을 온전히 들여다본 후에나 가능하다.
이별은 마음속엔 늘 채워지지 않았던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생각하게 만든다. 영화 <토르> 시리즈에서 연인 관계였던 토르(크리스 햄스워스)와 제인(나탈리 포트만)은 서로 잘 맞는 커플이었다. 하지만 토르는 인간을 뛰어넘는 신적인 존재였고 제인은 조금 똑똑한 인간이었을 뿐이다. 둘은 어느 시점 이후 관계를 정리한다. 하지만 이별 후 이들은 과거의 상대방에게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토르는 세상의 반이 죽어나가는 극한의 경험을 하면서 정신적으로 자신을 가두었고, 제인은 자신의 연구에만 몰두했다. 토르는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구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제인은 자신에게 슈퍼히어로 같은 극한의 능력이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각자의 위치에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건강함을 잃었다.
토르와 제인의 재회를 보여주는 네 번째 단독 영화
영화 <토르 러브 앤 썬더>는 토르와 제인이 다시 재회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담는다. 마블의 1세대 히어로인 토르는 이번 영화가 네 번째 시리즈다. 다른 히어로 영화들과는 다르게 가장 많은 단독 영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1편과 2편에 등장했던 제인 캐릭터를 3편에는 등장시키지 않았다가 이번 4편에는 다시 등장시키게 되는데, 그래서 이번 영화에는 로맨스적인 요소가 상당 부분 다시 포함되었다. 3편이 유머와 경쾌함을 극대화시켰던 영화라면, 이번 4편은 유머와 경쾌함은 조금 톤을 낮추고 로맨스에 좀 더 집중하게 된다.
영화 속 다시 등장하는 제인은 암 말기로 건강을 잃은 상태다. 반면 토르는 여전히 심리적으로 혼란을 겪고 있다. 자신이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확신을 하지 못해 명상을 하거나 다른 친구들을 도우면서 그저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런 시기에 제인은 지구에 있는 아스가르드 마을에 있는 망치 묠니르가 자신을 부르는 듯한 느낌을 받고 그 묠니르를 얻게 된다. 적어도 묠니르를 들고 영웅으로 활동할 때는 그에게 아픈 모습은 없다. 활기차고 건강해 보이는 모습이지만, 망치를 놓는 순간 다시 말기 암 환자의 핏기 없는 모습이 나온다.
제인과 토르가 다시 만나게 되는 건 영화의 빌런인 고르(크리스찬 베일)가 하려는 일 때문이다. 누군가와 거래하여 온 세상의 신을 죽이고 다니는 빌런 고르는 자신의 딸이 죽은 이후 신들에게 반감을 가지게 되는 캐릭터다. 이 영화에서 그가 신들을 죽이는 목적은 결국 우주의 절대적 존재인 이터널과 소통하여 죽은 딸을 다시 살리는 것이다. 그의 목적에 따른 행동은 토르를 지구로 불러들이고 과거 연인이었던 제인과 다시 만나게 만든다. 그리고는 이들이 다시 대화를 나누고 관계를 풀어나가는 과정에 좀 더 집중하여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기능적으로만 활용되는 빌런 고르
영화는 빌런 고르가 가지게 되는 분노에 대해 이해시키려 하고 그가 신들을 죽이는 행동을 계속해서 보여주면서 긴장을 만들어가려 노력한다. 하지만 그것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가 죽이려는 신들의 모두가 타락한 것은 아닐 것이고 그 방법 자체도 너무나 폭력적인 방식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그가 아스가르드의 아이들을 납치하여 토르를 협박하는 장면은 딸을 잃은 아빠가 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영화가 시작하면서 고르가 왜 빌런이 될 수밖에 없는지 그의 사연을 먼저 보여주고 시작하게 되는데, 그것이 가진 설득력은 영화의 말미 아이들을 납치하고 협박하면서 없어져버린다.
앞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빌런 고르는 단지 제인과 토르를 만나게 하는 기능적인 역할로 보인다. 마블에서 만들어가고 있는 전체 마블 유니버스 안에서 봐도 고르의 역할은 매우 한정적으로만 소비된다는 인상이 강하다. 그렇게 빌런을 소비하면서 영화는 마이티 토르가 된 제인과 토르가 만나면서 벌이는 로맨스에 좀 더 집중한다. 전작인 <토르 라그나로크>에서 보여줬던 재치와 유머들이 여전히 이번 영화에도 포함되어 있다. 토르의 우스꽝스러운 말투와 슬랩스틱 코미디 같은 행동은 제인과의 재회 순간에 활용되며 독특한 웃음을 선사한다. 또한 두 토르가 같이 전투를 벌이면서 서로 도와주는 장면은 꽤 완벽해 보인다.
그렇게 힘을 얻어 마이티 토르가 된 제인과 토르는 비슷한 힘을 가졌고, 서로 만나며 정신적으로도 성숙해졌다. 결국 이 영화에서 이들이 다시 만나 서로가 겪은 혼란과 정신적인 성장을 서로 확인하고 진정한 사랑을 발견해 낸다. 과거 <토르> 1편과 2편에서의 제인은 상황에 대한 결정권을 가지지 못하고 토르에 의지해야 했지만 이번에 다시 등장한 제인은 자신의 운명을 자기 자신이 결정한다. 위기의 상황에서 토르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결정한다는 점에서 좀 더 주도적인 캐릭터로 거듭나게 된다.
유머는 줄이고 로맨스는 늘리고
사실 토르라는 캐릭터는 초기 마블 세계관에서 그렇게 인기 있는 영웅은 아니었다. 케네스 브레너 감독이 연출했던 <토르 천둥의 신>은 너무 어둡고 심각한 스타일의 영화였고, 마블 특유의 경쾌한 느낌이 그렇게 많이 들지 않는 영화였다. 알랜 테일러 감독으로 연출자를 변경하고 완성한 <토르 다크 월드>도 마찬가지였다. 분위기는 너무 심각하고 어두웠다. 영화 완성도에 대한 평가도 좋지 않았다. 마블은 다시 감독을 타이카 와이티티로 바꾸고 <토르 라그나로크>를 내놓는다. 과거 토르 시리즈와 다르게 유머와 경쾌한 음악이 들어간 영화는 많은 사람들이 즐기면서 볼 수 있는 영화로 성공적으로 재탄생되었다.
이번 <토르 러브 앤 썬더>는 3편의 감독인 타이카 와이티티가 다시 연출을 맡았다. 유머와 경쾌한 음악이 포함되어 있지만 전편에 비해서는 조금 강도를 낮췄고 로맨스를 추가시키면서 조금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그런 시도가 그렇게 성공적이라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유머와 로맨스가 균형 있게 들어가 있지 않다는 느낌이 들어 애매한 느낌이 든다. 빌런 고르가 만들어내는 긴장감 있는 분위기도 적절하게 살아나지 않는데 긴장감이 올라갈 때마다 유머나 로맨스 장면이 이어지면서 그 분위기를 가라앉힌다.
영화 <토르 러브 앤 썬더>는 결국 일생에 한 번은 만나는 완벽한 연인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이다. 토르와 제인이 만들어내는 우스꽝스러운 재회와 러브스토리가 영화의 마지막 전투까지 이어진다. 이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 확인한 이후 보여주는 각자의 모습은 심리적으로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 모든 이야기를 토르의 성장과 치유의 이야기로 재탄생시켰다. 전반적으로 유쾌하게 볼 수 있는 마블 영화지만 호불호가 나뉠 수 있는 분위기다. 토르가 던지는 유머와 상황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들에게는 조금 유치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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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멸종된 순수에 대하여
이 글은
영화 [9명의 번역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글을 퍼가거나 인용 시 출처를 반드시 남겨주세요.
코로나의 기세가 꺾일 줄 모르던 불과 1년 전 그때.
많은 국민들은 코로나로 인해 불철주야 일하던 의료진들을 향한 <덕분에 챌린지>를 펼쳤었다.
터진 댐에서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방대한 물을 맨몸으로 막는 듯한 불가항력을 느꼈던 의료진들에게, 이 수줍지만 진심을 담은 챌린지는 아주 잠깐 숨을 돌릴 수 있는 도피처가 되어 주었다.
그러나 이 챌린지의 뒤에는 간접적으로 코로나의 종식에 힘쓰고 있지만 그 어떤 혜택이나 칭찬에서도 한 발짝씩 멀어져 있었던 연구원들도 있었다.
냉정한 잣대를 들이밀자면 의료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코로나의 기세를 꺾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기에. 늘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보다는 그림자 안이 더 편하다며 씁쓸하게 웃어야만 하는 연구진들의 알 수 없는 섭섭함은 지금도 풀지 못한 숙제처럼 마음속에 쌓여있을 것이다.
영화 [9명의 번역가]들은 출판업계에서 독자들에게 가장 원색적인 모욕을 많이 들으면서도 늘 영광의 중심에서는 슬그머니 멀어진. 마치 영화처럼 벙커 속에 있는 듯한 번역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심지어 그런 푸대접을 받는 것도 억울한데 아직 출간되지도 않은 신간의 원고를 누출시켰다는 누명까지 쓴 채로.
해커의 정체를 밝혀가는 과정은 고전적인 밀실 추리 방식을 지니고 있고. 9명의 용의자들은 어떤 방식으로 스스로의 알리바이를 증명하는지 살펴보는 재미도 함께 느낄 수 있다.
2인자의 삶;숨어 있는 것들을 향해.
사진출처:다음 영화번역가들은 신간 <더덜리스>의 번역을 완성할 때까지 계약서의 비밀유지 조항 때문에 벙커 밖으로 나올 수 없다.이 갑갑한 벙커 안에서 번역가들이 받아야 하는 대우는 사실 사는 데는 아무 지장 없지만, 한편으로는 참 서운하고 비참하다 불러도 할 말은 없어 보인다.
절대 빛이 들지 않을 것만 같은 벙커(지하)에서 영원히 2인자의 삶을 살아야만 할 것 같은 번역가들의 처지는 그들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숨겨놓은 욕망의 모습과도 비슷하다.
그 욕망이 헬렌의 경우는 작가가 되는 것이고. 카테리나(올가 쿠릴렌코)는 작가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 로즈메리에게는 아름다운 문학의 정점에서 일하는 것. 그리고 알렉스(알렉스 로더)에게는 에릭의 멸망.
이들 마음속에는 자신 안의 욕망이 벙커에서 빠져나와 빛을 보기를 바라면서도. 자격 미달이라거나. 혹은 아직 때가 아니었다는 말을 들을까 봐 두려워하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런 비밀스러운 장소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최소한의 선은 지키려 하지만. 에릭(램버트 윌슨) 만은 다르다.
에릭은 이 영화를 통틀어 거의 완벽하게 자신의 속과 겉이 같고. 스스로의 모습을 숨기는데 가장 적은 힘을 들이는 사람이므로. 번역가들이 안전하게 숨겨 놓은 마음속의 비밀스러운 욕망을 맘껏 비웃는다.
자신의 위치가 물리적인 장소인 벙커 안의 번역가들을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 있다는 생각과 동일하게. 그들의 꿈마저도 휘두를 수 있다고 착각해 무차별적 폭언을 일삼는다.
그러나 자신의 꿈을 해석하고 곰곰이 들여다볼 장소가 없었던 에릭의 행동은 그 누구보다도 성급하고 깊이가 없었으며 예측 가능했기에. 악인에게 허락된 예정된 결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꿈은 실패할 가능성도 많지만. 그만큼 성공할 가능성도 많다는 것은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자신이 그렇게 무시해 마지않던 알렉스의 꿈은 보기 좋게 에릭을 추락시켰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순수한 것들은 모두 죽었다.
사진출처:다음 영화영화에는 크게 두 부류의 집단이 등장한다.
한 집단은 문학에 대한 순수한 마음을 상징하고 있다. 에릭의 비서이자 책임감 외에는 인간적인 면을 많이 볼 수 없는 로즈메리와, 작품에 대한 애정으로 책 속 인물인 레베카처럼 꾸미고 다니는 카테리나. 번역가로서의 삶 이외에도 작가로서의 삶을 꿈꾸며 몰래 소설을 쓰던 헬렌이 이 집단에 속한다.
악, 혹은 속세로 대변되는 인물은 두말할 것도 없이 에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가는 곳마다 존재하는 순수에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죽이거나 해를 가한다.
충실한 로즈메리는 에릭을 결국 가장 필요한 순간에 떠났고. 헬렌은 에릭의 차가운 말에 스스로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움으로 벙커 안에서 목숨을 거두었다. 카테리나의 생사는 에릭의 총알에 의해 알 수조차 없게 된다.
거침없는 에릭만큼이나 참을성이 없는 총알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기어코 <더덜러스> 원작자의 가슴팍에도 한 발의 총알을 명중시킨다.
카테리나보다도 먼저 사경을 헤매었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을 위치였지만. 알렉스는 자신이 가슴팍에 품었던 책으로 인해 목숨을 건진다. 마지막 순간까지 알렉스의 목숨을 구해준 책은. 알렉스에게도. 또한 <더덜러스>의 창조주에게도 마지막 순수를 상징하는 책(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이었다.
결국 에릭은 자신의 눈길이 닿는 모든 곳에 있는 순수의 존재를 모조리 말살시켜 버렸다.
결말에 대하여;처벌은 합당한가.
사진출처:다음 영화표면적으로 봤을 때 모든 죄를 뒤집어쓰는 쪽은 에릭이다. 첫 장면에서 강렬하게 타오르는 서점의 살인마저도 에릭의 짓인 것이 자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벌이라는 면에서 보면 알렉스도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단지 두 사람의 처벌이 그들의 처지와 살아온 모습에 맞게 변형된 것일 뿐이다.
에릭에게 내려진 처벌의 형태는 그 어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세속적이며. 벗어날 수 없고. 또한 적절하다. 에릭은 감옥에서 소위 하는 말처럼 썩게 될 것이고. 자신이 한없이 견고하다 생각하며 쌓아올린 명성은 녹슬다 못해 삭아내릴 것이기 때문이다.
알렉스에게 내려진 처벌은 이에 비하면 형태가 없어 보이지만. 오히려 더 가혹해 보인다.
작가로서의 삶으로 본다면, 이 가명을 쓰는 작가는 두 번 다시는 <더덜러스>같은 책을 쓸 수 없을 것이다. 아니. 다시는 글을 쓰지 못할 것이라 말해도 좋다. 이 베일 속의 작가는 늘 숨어 있을 누군가가 필요했고. 자신에 대한 용기가 없었다. 그는 스승의 뒤에 숨어있을 때야 자신의 모습을 겨우 드러낼 수 있었고. 그 뒤에서의 삶에도 겨우 만족했다. 그러나 이제 자신을 위한 방파제가 사라진 지금. 글을 쓸 베짱이 있었다면.이라는 말이 평생 그의 벙커 속에서 메아리처럼 울려 퍼질 것은 명약관화하듯 뻔하다.
또한 알렉스로서의 삶도 비참하다.
알렉스의 가장 큰 자부심이자 스스로를 감추는데 적합했던 투명 망토인 <더덜러스>의 원작자라는 사실은. 에릭의 총알 한 발에 의해 숨통이 끊어져 버렸다. 그는 이제 맨 얼굴인 채 세상을 살아가야 하지만. 이미 불법 번역을 했다는 사실로 인해 경찰서에 출입한 경력이 있고. 이번 사태로 인해 경찰의 의심을 일정 기간 동안은 받으며 살아야만 한다.
멀고 먼 인생의 종점을 바라보며 현재의 알렉스 상태를 진단해 본다면. 에릭의 미래보다도 암울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마치면서
많은 반전을 두고 있는 영화는 좋다. 관객들이 가진 고정관념을 깨는 것도 좋다.
에릭에게서 원고를 뺏기 위해 벙커에 갇히기 전부터 계획을 세워왔다는 설정이 기발하긴 하지만. 그 후반부는 전반부의 정통 추리와는 결이 달라 많은 감정을 깨뜨린다.
또한 해커의 이메일에 대한 설정 추리도 조금 아쉽다. 물론 에릭의 바보 같음, 혹은 후반부의 결이 달라지는 장면을 위한 것이었겠지만. 그 상황에서 이메일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은 외부밖에 없으므로 가장 먼저 의심했어야 한다.
또한 에릭의 경우는 자신이 저지른 죄에 있어서는 모조리 처벌을 받았지만(혹은 이제 받겠지만) 알렉스의 경우는 마음이 매우 복잡해진다.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다른 번역가들을 모두 이용했다는 점에서 보면. 주인공도 결국은 번역가들을 가장 앞장서서 도구로 사용했음에는 틀림이 없고. 이것이 과연 에릭과 비교했을 때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은 알렉스가 울컥이며 외롭게 길을 걷는 모습을 비춘다.
그 복잡한 표정에 담긴 감정은 다행이라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에릭의 여생을 성공적으로 감옥에 저당잡혔음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뉘우침과 참회의 감정이 지배적이다. 알렉스의 마음이 궁금해진다. 에릭의 총알이 책에 박혀 목숨을 구했을 때. 분명 자신은 살았다고 안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부터 자신의 비극이 시작될 것이란 걸 알았을까.
에릭의 형벌과 함께 스스로의 형벌도 그의 생을 관통하며 시작된다는 것을. 알렉스는 그 길을 걸으며 어렴풋이 느꼈으리라.
[이 글의 TMI]
1. 보는 내내 속도감이 꽤 빨라서 긴장이 많이 되었음.
2. 두 시간짜리 영화가 귀해지는 마법이라니.
3. 이제 추워져서 슬슬 가을 옷 정리도 해야 할 듯.
4. 친구랑 보러 가기로 했는데 얘 늦잠 자서 인생 하직할 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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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재는 끝내지 못한 과거의 기억.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잊지 말아야 할 과거와 현재로 표현해 기존에 더 나아가지 못했던 길을 조금은 나아간 영화 리멤버는 10월 26일 개봉 예정이다. 이 영화의 원작은 <리멤버: 기억의 살인자>로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한 남자가 가족을 대신해 복수에 나서는 이야기이고 영화 <리멤버>는 일제강점기에서 살아남은 한 남자가 가족을 대신해 복수에 나서는 이야기이다. 잊을 수 없었던, 아니 잊지 말아야 할 그의 기억의 끝엔 무엇이 있는 걸까. 이성민 배우가 열연이 빛나는 영화 '리멤버' 시사회 리뷰를 시작하려 한다.
잊을 수 없는 기억은 울컥하고 튀어나오는 감정들을 차마 막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지켜야만 하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새기고 또 새기는 그 주름진 손이 떨리면서도 우직하다. 틀린 것을 틀렸다고 하는 그 우직함이 인상적이다. 그 칼날이, 총구가 나를 가리킨다고 하더라도 이 기억만큼은 끝까지 안고 가리라 다짐한다. 기억해야만 하지만 계속해서 잊히는 그 기억을 이어갈 수 있을까. 계속 돌고 도는 기억 속에 잊지 말아야 할 그 기억을 향해 계속해서 나아간다. 가족을 죽게 만든 이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그는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었다.
한태주, 그는 뇌종양 말기에 알츠하이머로 인해 기억을 잃어가고 있다. 살아가고 있는 이 순간이 마지막이 되기 전에 60년 동안 계획한 일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친해진 인규에게 일주일 동안 운전을 부탁하게 된다. 사라지는 기억을 곳곳에 새기며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더욱 선명해지는 현재의 모습은 끝내지 못한 과거로 인해 색이 바래지고 말았다. 과거는 그저 지나간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전히 반성하지 않고 고개를 빳빳이 들고 사는 이들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수많은 동포들을 죽음으로 내몰고도 여전히 호위 호식하며 살아가고 있는 이들은 지나간 과거는 그저 허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사회에서도 성공해 존경받는 이들은 과거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사람들에게는 '선동'이라는 말로 치부하며 기억이라는 단어 자체를 허용되지 않는 것으로 만든다. 우리의 기억이 뚜렷하지 않을수록 그들은 진정으로 뉘우쳐야 할 과거를 영광의 기억으로 덮으며 현재를 그리고 미래를 살아갈 것이다. 누군가는 잊어도 누군가는 잊을 수 없는 기억이 힘은 무엇보다 강해서 그 힘과 의미를 퇴색시킬 수는 없다.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우리나라 역사의 아픔을 신파로 끝맺지 않으려는 시도는 좋았으나 후반부에 흐트러지는 이야기의 전개가 조금 아쉬웠다. 빠른 이야기의 전개만큼 휘리릭 지나가버린 인규의 감정과 소재로 이용되는 역사의 상처의 공백이 꽤 크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그 허탈함의 공백을 이성민 배우의 연기가 묵직하게 채우며 차분함과 건조함의 조화를 맞춰간다. 무겁지만 명확한 메시지와 타이밍이 기가 막힌 개봉일이 이 영화를 기억하게 만든다. '리멤버'. 과거가 이은 현재를 끊임없이 '기억'하고 또 '기억'하여 지나간 과거가 아닌 현재에 이어지고 있는 역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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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호 돌봄'이라는 새로운 부녀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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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0
11살 딸 소피와 30대 초반의 아빠 패터슨이 소피의 방학을 맞아 함께 여행을 떠난다. 부부의 이혼 후 소피가 엄마와 함께 살기에 두 사람 모두에게 아주 소중한 여행이다. 행선지는 튀르키예. 매끄럽지만은 않다. 두 개의 침대를 확인하고 예약한 호텔 방에는 침대가 하나뿐이고, 호텔 바로 옆에서 진행 중인 공사는 부녀의 신경을 긁는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여행의 기쁨이 더 크다. 패터슨은 다정한 얼굴과 몸짓으로 딸에게 선크림을 발라주고, 소피는 그런 아빠에게 의지하며 둘이 함께 만들 추억에 들뜬 상태다.
11살은 애매한 나이다. 어린이와 청소년 그 사이 어딘가. 소피는 아빠와 함께 노는 것도 좋지만 수영장에서 만난 언니 오빠들과 어울리며 그들처럼 놀고 싶기도 하다. ‘소피의 오빠가 아니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젊은 아빠인 패터슨 역시 그런 소피의 마음을 알고 보호자와 친구 역할을 오가며 소피를 배려한다.
어른이 되어가는 소피와 젊은 아빠라는 패터슨의 부녀 관계는 미묘하다. 소피가 절대적 보호가 필요한 나이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고, 젊은 청년인 패터슨 역시 소피 말고도 신경 쓸 일이 많기 때문이다. 부녀 관계를 따뜻하게 담아내는 〈애프터썬〉이 흥미로워지는 건 이 지점이다. 성장 중인 딸과 여전히 방황하며 인생의 갈피를 잡지 못한 아빠가 만들어내는 관계에서는 기존의 부녀 관계와는 다른 역동이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소피 앞에서는 늘 밝고 당당하게 행동하지만, 패터슨은 고통의 시간을 겪는 중이다. 최근 사업에 실패한 패터슨은 미래가 두렵다. 딸에게 많은 것을 해주고 싶지만 돈은 넉넉하지 않고, 당장 자신의 미래조차 확신할 수 없다. 딸은 자신과 다른 인생을 살기를 바란다. 소피도 아빠가 어려운 시기를 통과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아빠의 간섭과 참견을 귀찮아하면서도 ‘어린아이’ 같은 천진함을 활용해 아빠에게 위로를 건넨다. 그녀가 더는 어린아이가 아님에도 말이다.
일상적 배려와 스치듯 지나가는 다정한 말 한마디로 서로를 응원하는 부녀. 그런 그들에게도 위기가 찾아온다. 위기는 두 사람의 정체성이 엇갈릴 때마다 찾아온다. 어린이이자 청소년이고, 아빠이자 (위태로운) 청년인 부녀. ‘어린이’와 ‘아빠’, ‘청소년’과 ‘청년’이 만날 때는 좋은 시너지가 난다. 하지만 ‘어린이’와 ‘청년’, ‘청소년’과 ‘아빠’가 만나면 불협화음이 난다. 지금 이 순간의 정체성이 무엇이냐에 따라 돌봄의 화살표가 바뀌기 때문이다. 두 정체성 사이를 오고 가는 둘은 매 순간 서로를 면밀히 탐색하며 미세하게 관계를 협상해야만 한다. 정체성을 오인하면 감정이 상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주고받는 상황이 생긴다. 함께 무대에 올라 춤추고 노래하자는 소피의 제안을 패터슨이 거부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어린이’ 소피는 어린 시절부터 해왔던 가족의 전통을 거부하는 아빠에게 서운하고, ‘청년’ 패터슨은 남들 앞에서 가무를 하는 게 부끄럽기 때문이다.
서로를 아끼면서도 때로는 상처주는 말을 주고받는 장면이 이어지는 동안 부녀 관계의 깊이와 갈등 모두 고조된다. 더불어 패터슨의 아픔과 상처가 서서히 부각되며 소피와 패터슨의 부녀 관계는 점차 ‘청소년’과 ‘청년’의 관계, 즉 돌봄의 화살표가 딸에게서 아빠를 향하는 것으로 전환된다. 〈애프터썬〉의 성취는 바로 여기에 있다. 아빠에서 딸로 향하는 일방적‧일반적 부녀 관계를 거스르며 상호 돌봄의 부녀 관계를 형상화하는 것이다.
아빠/아버지는 늘 강인한 존재일 것을 요구받는다. 이 요구가 내면화되어 남성이 스스로를 그렇게 재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부장적 젠더 이원론의 각본에서 태생적‧본질적으로 강한 존재는 없다.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지는 각본에 자신을 맞추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개별자들이 있을 뿐이다. 〈애프터썬〉은 방황하는 청년이라는 보편적 인간에게 ‘아빠’ 정체성을 더함으로써 ‘아빠/아버지’ 역시 취약한 존재임을, 즉 누군가의 돌봄을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보인다.
영화에는 패터슨과의 상호 돌봄 관계가 소피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 짧게 나온다. 성인이 된 소피가 동성 애인과 함께 아이를 양육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그녀가 패터슨과 서로 기대며 버티고 지나온 시간을 바탕으로 성숙한 돌봄의 관계를 꾸렸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돌봄이 필요하다. 자신의 취약함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고꾸라질 수밖에 없다. 친밀한 사람에게 기대는 사람만이 무너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을 돌본다. 이것이 상호 돌봄의 부녀 관계를 감동적으로 영상화한 영화 〈애프터썬〉의 메시지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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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에버 퍼스트 러브 - 가치관이 맞지 않는 사람과 함께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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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은 배급사 [콘텐츠패밀리]와의 저작관 협의를 통해 제작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작품 [포에버 퍼스트 러브]는 12월 9일 개봉하는 드라마, 로맨스 영화인데요!
여러분들은 가치관이 맞지 않는 사람과 맞춰가며 관계를 이어나간 적이 있나요?
오늘 이 두 남녀는 보다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로맨스를 보여주며
서로 충돌하고 화해하기를 반복하며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요.
무엇보다 어른들을 위한 솔직한 로맨스라는 점이 인상적인 작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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