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4-12-03 15:34:27
12월 첫째 주 극장 개봉 & 예정작
순위 싸움 치열한 극장가, 한국 영화 대거 개봉!
<모아나 2>와 <위키드>가 치열한 순위 싸움을 하고 있는 가운데, 금주에는 한국 영화들도 경쟁에 참전합니다!
송강호, 박정민, 장윤주 배우를 필두로 탄탄한 출연진과 배구계의 전설 김연경 선수가 출연 소식을 알려 화제가 된 <1승>과 홍제동 방화 사건을 배경으로 한 <소방관>이 오는 4일 개봉을 앞두고 있습니다. <소방관> 역시 주원, 유재명, 이유영, 김민재, 이준혁, 장영남 등 믿고 보는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여 어떤 앙상블 연기를 펼칠지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독창적인 데뷔작 <더 길티>로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던 구스타브 몰러 감독이 이번에는 교도소로 공간을 옮겼습니다. 한정된 공간에서 강렬한 서스펜스를 만들어냈던 구스타브 몰러 감독이 신작 <아들들>에서는 어떤 연출을 보여줄지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위키드>에 이어 금주에도 음악 영화가 개봉합니다. 존 레논, 척 베리, 더 도어즈 등 전설적인 뮤지션들을 무대에 세웠던 1969년 '토론토 로큰롤 리바이벌'을 다룬 다큐멘터리 <리바이벌 69'>도 12월 4일부터 극장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1승
One Win
개요: 드라마 | 대한민국 | 107분
감독: 신연식
주연: 송강호, 박정민, 박명훈, 장윤주, 이민지
개봉: 2024.12.04.
배급: ㈜아티스트유나이티드
줄거리
"그래도 한 번은 이기겠죠?"
지도자 생활 평균 승률 10% 미만! 파직, 파면, 파산, 퇴출, 이혼까지 인생에서도 ‘패배’ 그랜드슬램을 달성 중인 배구선수 출신 감독 ‘우진’은 해체 직전의 프로 여자배구단 ‘핑크스톰’의 감독을 맡아 달라는 제안을 받는다. 에이스 선수의 이적으로 이른바 ‘떨거지’ 선수들만 남은 팀 ‘핑크스톰’은 새로운 구단주 ‘정원’의 등장으로 간신히 살아나지만 실력도, 팀워크도 이미 해체 직전 상태.
그 와중에 막장, 신파는 옵션, 루저들의 성장 서사에 꽂힌 ‘정원’은 ‘핑크스톰’이 딱 한번이라도 1승을 하면 상금 20억을 풀겠다는 파격 공약을 내세운다. 모두가 주목하는 구단이 됐지만 압도적인 연패 행진을 이어가는 ‘핑크스톰’. 패배가 익숙했던 ‘우진’도 점점 울화통이 치밀고, 경험도 가능성도 없는 선수들과 함께 단 한번만이라도 이겨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데…
소방관
FIREFIGHTERS
개요: 드라마 | 대한민국 | 106분
감독: 곽경택
주연: 주원, 곽도원, 유재명, 이유영, 김민재, 오대환, 이준혁, 장영남
개봉: 2024.12.04.
배급: ㈜바이포엠스튜디오
줄거리
살리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하루하루가 마지막 현장인 소방관 팀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화재 진압과 전원 구조라는 단 하나의 목표로 의기투합한다. 어느 날, 다급하게 119 신고 전화로 홍제동에 화재가 발생했다는 긴급 상황이 접수되자 팀원들은 위기를 직감하는데…
누군가의 가족, 친구, 사랑하는 사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그 이름 <소방관>.
2001년 가장 빛났던 그들의 이야기를 기억하겠습니다.
아들들
SONS
개요: 드라마 | 덴마크, 스웨덴 | 98분
감독: 구스타브 몰러
주연: 시드 바벳 크누센, 세바스찬 불 사르닝, 다 살림
개봉: 2024.12.04.
배급: 해피송
줄거리
재소자들과 원만하게 지내는 성실한 교도관 ‘에바’(시드 바벳 크누센). 어느 날,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살인자 ‘미켈’(세바스티안 불)이 그녀가 일하는 교도소로 이감된 사실을 알게 된다. 평범한 일상이 무너진 ‘에바’는 그가 수감된 최고 보안 시설인 중앙동으로 자진해 근무지를 옮기고, 그를 직접 마주하기로 결심하는데...
“내 아들을 죽인 살인자, 나는 그를 마주해야 한다”
리바이벌 69’
Revival69: The Concert That Rocked the World
개요: 다큐멘터리 | 미국 | 98분
감독: 론 챕맨
주연: 존 레논, 오노 요코, 리틀 리처드, 척 베리
개봉: 2024.12.04.
배급: 스튜디오 에이드
줄거리
존 레논, 척 베리, 리틀 리처드, 더 도어즈, 보 디들리 그리고 오노 요코 1969년, 무모한 전화 한 통에서 출발한 전설의 뮤직 페스티벌 ‘토론토 로큰롤 리바이벌’.
그 믿을 수 없는 시작과 전 세계를 뒤흔든 열광적인 무대의 기록.
Let’s Do it, Let’s Rock N Roll!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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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실과 환상 사이
캐스팅과 뮤지컬이라는 장르만을 놓고 볼 때 <아네트>는 레오 카락스가 만드는 상업영화처럼 보인다. 예술영화에도 얼굴을 비추지만 이제는 상업영화 배우에 더 가까워 보이는 아담 드라이버와 특히 헐리웃에서 영어 연기를 할 때 상업영화 출연 빈도가 높은 마리옹 꼬띠아르는 <아네트>가 일반 관객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잘 알려진 배우들과 노래가 함께 하는데도 <아네트>는 상업영화라고 보기에는 난해한 구석이 있는데 특히 액자구성과 무대와 현실을 오가는 영화의 형식에서 더욱 난해함이 두드러진다. 영화가 시작할 때 레오 카락스는 직접 등장해서 이제 시작하자고 속삭인다. 그리고 영화의 캐스트가 한꺼번에 거리로 쏟아져 나와 이제 시작할까요(May we start?)라고 노래하는 장면은 <라라랜드>를 연상시킬 정도지만 오프닝에 비해 영화가 조금도 친절하지 않다는 사실은 시작한 지 채 30분도 지나지 않아 알 수 있다. 영화가 시작하고 등장인물이 소개되면 관객은 제목이기도 한 아네트가 언제 등장하는지를 기다리느라 더욱 혼란에 빠진다. 서사를 시작하는 건 아네트가 아닌 안(마리옹 꼬띠아르 분)과 헨리(아담 드라이버 분)이고 아네트는 이들 사이에 태어난 딸인데 무대 소품처럼 보이는 인형으로 등장하는 신이 훨씬 더 많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질문은 왜 레오 카락스 감독이 이런 난해한 구성을 취했는가다. 연극과 영화를 오가는 건 아네트 뿐만이 아니라 안이 헨리와 싸우는 장소인 배에서도 나타나는 연출이다. 흥미로운 건 안과 헨리 모두 무대가 주된 삶의 터전인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오페라 가수로 등장하는 안은 무대에서 유사 죽음을 수도 없이 경험하고 관객을 구원한다. 코미디언인 헨리는 무대에서 죽음을 맞이하지만 바로 부활하며 관객에게도 죽음을 선사한다. 이는 안과 헨리가 나누는 대화에서 두드러지는데, 오늘 무대가 어땠냐는 질문에 헨리는 '죽여줬어(I killed them)'라고 대답하는 반면 안은 '관객을 구원했어(I saved them)'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결혼해 부부가 된 이들은 정 반대의 노선을 걷는다. 관객에게 죽음을 선사하던 헨리는 죽음에 대해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순간 무대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안은 점점 더 잘나가는 오페라 가수로 자리매김한다. 헨리는 그 이유를 자신이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라 단정짓지만 관객들은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냉정할 정도로 잘 알고 있다. 즉 무대라는 극중 장치는 영화의 형식을 서사에 그대로 반영하면서 헨리의 사고가 현실과 환상을 오가도록 만드는 수단으로 기능한다.
인기없는 코미디언이 되고 공연이 취소된 헨리는 태어난 아네트를 키우며 점점 현실을 잃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이를 보다가 아이 위에 앉는 장면이 대표적인데(babysitting을 이용한 언어유희) 이 장면은 관객에게도 현실인지 아닌지 불분명해 보인다(실제라면 아네트가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안 또한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모습을 잠깐이나마 보여주는데 공연장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헨리의 전 연인들이 헨리의 폭력성을 고발하는 인터뷰를 하는 장면을 보는 장면이 그것이다. 안은 차에서 잠들었다가 이 뉴스를 보게 되는데 뉴스가 끝나고 안은 잠에서 깨어난다. 이 장면 또한 관객에게도 혼란을 불러일으키는데 헨리와 안의 환상은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가 중요하지 않다. 이러한 장면들이 암시하는 것은 안과 헨리가 서로에 대한 불신을 키웠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원인은 태어난 아네트와 힘든 육아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승승장구하는 안에 대한 헨리의 열등감과 질투다. 공연이 취소되기 전 헨리가 야유를 받았던 공연의 내용은 자신이 안을 죽였다는 것이다. 극중극에서 헨리의 살해 방법은 놀랍게도 간지럼 태우기인데 관객은 말도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쩌면 정말 헨리가 안을 그 때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게 된다. 아내를 죽여 스스로의 부활을 꾀했던 헨리는 도리어 그 공연으로 야유를 받고 무대에서 영원히 퇴장하고, 이는 이후 서사의 복선으로 활용된다.
아네트가 태어나기 전에는 무대에서 퇴장하면 편안한 집에서 휴식을 취했던 이들은 아네트가 태어나고 부부관계가 불안정해지자 불안정을 상징하는 태풍이 부는 배로 무대를 옮겨간다. 이 배는 앞서 말한 연극의 공간이다. 누가 봐도 배경은 태풍이 치는 바다를 스크린으로 띄운 것이며 흔들리는 배와 쏟아지는 물은 전혀 현실적이지 않다. 그리고 이 장면 이후부터 안 없이 살아남은 헨리가 목격하는 것들은 대부분 현실처럼 보이지 않는다. 특히 아네트와 함께 등장하는 장면에서 아네트는 여전히 목각인형이기에 불쾌한 골짜기와 같은 감정까지 불러일으키는데 아네트가 노래하는 장면에서 감독은 의도적으로 아네트의 얼굴을 비추지 않는다. 움직이는 입술을 목각인형으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취한 방식으로 보이지만 동시에 아네트의 노래가 헨리의 환상임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잠시나마 헨리의 환상인 것처럼 보이던 아네트의 노래는 안을 사랑했던 지휘자가 이를 함께 듣고 놀라는 장면과 더불어 전세계 관객들을 충격에 빠트리면서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만일 노래하는 아네트가 헨리의 환상이라면 아네트의 노래를 듣고 놀라는 지휘자와 관객 또한 헨리의 환상이 된다. 아네트는 극이 끝날 때까지 현실과 환상을 오가며 관객을 혼란에 빠트리는데 이는 헨리의 생각 자체가 착각일 수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헨리가 자신의 무대를 잃은 것이 안과 아네트 때문이라는 착각은 안이 죽은 이후에 극명하게 드러나지만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헨리뿐이다. 기실 헨리의 무대는 안과 결혼하기 전에도 그닥 재미있지 않았다. 이를 스스로도 알고 있는 것처럼 헨리는 무대에서 자신이 안을 사랑하는 이유는 분명하지만 안이 자신을 사랑하는 이유는 모르겠다고 중얼거린다. 매 무대마다 새로운 농담을 생각해내어 관객을 '웃겨 죽여야' 하는 헨리와는 달리 안은 같은 무대를 여러번 반복한다. 죽여야 하는 상대가 자신뿐이고, 무대에서 스스로 낙하함으로써 관객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안과는 달리 헨리는 매일 죽여야 하는 상대가 바뀌는 데다 그 수도 많다. 심지어 무대에서 자신이 죽는 시늉을 하더라도 관객이 반드시 웃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헨리가 진행하는 코미디쇼의 질이 낮아진 것은 헨리 자신의 문제도 있지만 코미디쇼라는 형식에 그 원인이 있다. 하지만 무대에서 사람을 죽이고 그 자신마저 죽었던 헨리는 이제 무대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 영화의 형식이 연극과 현실을 오가는 것은 헨리의 이런 정신상태를 반영하는 것이다. 헨리는 분명히 배에서 안을 죽음으로 몰고 갔지만 그 자신조차도 정말 그랬는지 헷갈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마침내 헨리가 극이 끝났음을 인정하고 아네트를 현실로 받아들일 때 그 현실은 파도처럼 한꺼번에 덮쳐온다. 아네트를 월드투어로 혹사시키는 것이 아동학대라는 것을 받아들인 헨리는 최후의 공연을 기획하고 그 곳에서 공연자로서의 최후를 맞이한다. 그리고 마침내 아네트가 목각인형이 아닌 현실의 아이가 되어 헨리에게 노래할 때 헨리는 가장 현실적인 공간에서 아네트를 맞이한다. 하지만 이제 현실을 받아들인 헨리 앞에서 환상 속을 헤매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아네트다. 헨리는 아네트에게 널 사랑해도 되겠냐고 물어보지만 아네트는 헨리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아네트와 헤어질 때 헨리는 마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처럼 다시 목각인형이 된 아네트를 목격하는데 이는 이 모든 것이 헨리의 환상이었음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신의 아이지만 자신의 아이가 아니었던 아네트는 존재했던 것인가? 아네트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헨리가 죽인 이들은 왜 죽었는가? 결국 <아네트>는 자신의 쇠락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환상을 헤맨 코미디언의 최후인 셈이다.
헨리는 자신의 코미디쇼에서 자기 자신에게 끝도 없이 묻지만 결코 대답하지 못하는 질문을 되뇌인다. 왜 헨리는 코미디언이 되었는가? 서사 전체에서 보듯이 헨리는 코미디에 소질이 없다. <아네트>는 코미디언이 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고, 결국 애꿎은 이들을 희생시키고서야 현실을 받아들이는 한 남자의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영화의 제목이 <아네트>인 이유는 아네트야말로 헨리가 만들어낸 환상의 종착역이기 때문이다. 정말 존재했는지조차 영화가 마무리될 때까지 불분명한 아네트는 헨리와 안을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그 이유는 자신을 환상으로 만들어낸 헨리가 자신을 없애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뮤지컬의 선율을 기반으로 아담 드라이버와 마리옹 꼬띠아르의 호연을 볼 수 있는 <아네트>는 현실에 기반한 위험한 환상을 조금은 기괴하게, 하지만 아름답게 보여준다.
*이미지 출처는 모두 네이버영화입니다.
*해당 글은 씨네랩의 시사회 초청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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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블과의 안녕이 정말 이별은 아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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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분위기 아담 워록
어느 날의 노웨어. 가오갤 멤버들은 평화로운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딱 한 명은 다르다. 가모라를 떠나보낸 스타로드. 타노스와의 일전 도중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것이다. 사실 가모라는 살아있다. 다른 평행우주선의 가모라일뿐. 스타로드와 사랑에 빠졌던 적이 없던 세계의 가모라. 스타로드를 보더라도 모르쇠 한다. 마음에 구멍이 난 스타로드. 수많은 은하수들 속에서 별이 되어 반짝였던 가모라는 이제 추억이 되어버렸다. 술로 하루를 지내는 스타로드. 그 어떤 일로도 상실감을 채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시 노웨어. 로켓은 과거를 회상하고 있다. 트라우마처럼 피어오르는 기억들. 로켓은 애써 머릿속을 지우기로 한다. 무작정 스타로드의 zune에 이어폰을 연결한다. 들리는 노래는 라디오헤드의 ‘Creep’이었다. 스치듯 지나가는 사람들. 로켓의 시선에 맨티스와 드랙스가 보이고, 네뷸라와 그루트도 보인다. 그래. 현재에 집중하는 거야. 스타로드와 mp3인 zune을 건드리지 말라고 티격태격 말다툼을 벌이는 로켓. 시간이 지나 로켓도 일과를 마치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가 노웨어에 쳐들어온다. 빠른 속도로 달려온 아담 워록. 느닷없이 로켓을 공격한다. 당황하는 노웨어 사람들. 네뷸라가 대응하지만 역부족이었다. 드랙스 역시 마찬가지다. 겨우 상황을 정리했지만 로켓이 치명상을 입은 건 어쩔 수 없었다. 다시 한번 뭉치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스타로드는 가오갤의 리더로서 로켓을 구하기 위한 모험을 떠나자고 독려한다.
퇴사 5분 전
6년 만에 돌아온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이다. 그동안 <어벤저스 : 인피니티 워>와 <어벤저스 : 엔드게임>으로 나름대로의 서사를 이어갔던 가오갤 멤버들. 최근 마블이 새로운 히어로들을 출시함에 따라 이들의 행보를 궁금해하는 분들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 제임스 건이 메가폰을 잡는 게 확정이 됐고 이내 이 작품이 시리즈를 끝내는 작품이 되는 것이 확정됐다. 이 말은 즉슨 제임스 건이 이 영화를 마무리하고 MCU에서 하차한다는 말이 된다.
영화는 감독의 이 입지를 잘 활용하듯 기존 마블영화에서 약간 벗어난 것 같이 보인다. 우선 첫 번째. 영화에서 액션 비중이 덜 중요하다고는 보기 어렵지만 다른 시리즈물들에 비해서는 살짝 약하긴 하다. 이는 여태까지 만들어진 페이즈 4,5의 영화들이 갖고 있던 패턴을 깨려고 했던 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럼 그 액션 쾌감을 어디서 채웠나? 로켓의 과거회상과 SF적 상상력이다. 전자 로켓의 과거회상은 영화가 갖고 있는 윤리적인 문제를 표현한다. 이 전자도 중요하지만 후자 'sf적 상상력'은 특히 더 중요하다. 사실 4 페이즈 이후 마블 영화들이 시각적 상상력이 약했다는 것은 아니다. <블랙 팬서 : 와칸다 포에버>의 탈로칸, <샹치 : 텐 링즈의 전설>에서 만다린이 이끄는 마을, <앤트맨과 와스프 : 퀀텀매니아>에서 양자역학 월드 등 나름대로 성의 있는 묘사가 있었다. 그러나 이 영화들이 갖고 있는 시각화의 단점은 뭔가 어디서 본 것 같다는 느낌이다. 탈로칸은 <아바타> 시리즈에서, <샹치 : 텐 링즈의 전설>은 할리우드가 바라본 동양문화에 대한 동경을 어느 정도 따라왔다는 점이, <앤트맨과 와스프 : 퀀텀매니아>는 <스타워즈>에서 봤다는 기시감이 느껴진다. 글쓴이는 이 작품이 이 영화들과 다른 차이점을 갖는다는 것이 예상이 안 됐다는 점에서 왔다고 생각한다. 뭐 일부 크리처는 드니 빌뇌브의 <컨택트>, <제5 원소>에서 본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어떤 소재를 어떻게 전개하느냐에 따라 영화의 개성이 달라진다고 볼 수 있다. 우주선에서 어떤 파일을 가져가기 위해 도착한 한 장소가 그렇다. 여기서 전개되는 거의 모든 이야기는 클리셰를 뒤집는다. 이렇게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 시각화가 영화의 중심이고 가장 큰 장점이 된다고 해서 액션이 약하나? 그건 또 아니다. 아담 워록이 갖고 있는 액션은 생각해 보면 좀 익숙하다. 멀리 안 가도 '이터널스'의 이카리스나 '캡틴 마블'이 갖고 있는 특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빨리 달리기형 빌런중에서는 이 아담 워록이 가장 매력적이었을 정도로 영화는 상상력을 충분히 가진 채로 질주한다.
또 히어로 무비의 기본문법을 살짝 벗어났다는 느낌이 든다. 이 부분은 영화에서 장점이자 단점으로 작동할 수 있는 부분이다. 우선 빌런의 활용법이다. 본작의 빌런은 아버지와 아들이다. 원래 슈퍼히어로 영화 하면 빌런이 선량한 인물들을 공격하거나 이야기의 전개를 뒤엎는 경우가 많다. 가령 같은 mcU에서 <캡틴 아메리카 : 시빌 워>에서 아이언맨이 캡틴아메리카에 대응했던 방식은 빌런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아이언맨이 얼마나 정의로운 인간인과는 별개로). 또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저>에서도 버키가 스티브의 오랜 친구인 것과는 별개로 작중에서 빌런 롤을 맡았다고 해도 무방하다. 아이언맨이나 버키처럼 무력이 강한 인물도 빌런이 될 수 있지만 반대의 측면도 있다. <캡틴 아메리카 : 시빌 워>에서 어벤저스 간의 분쟁을 조장하는 인물 제모 남작은 무력이 그렇게까지 뛰어난 인물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세치 혀 놀리는 능력과 뛰어난 기획력으로 어벤저스 간의 갈등을 유도한다. 이런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에서 빌런 활용법은 연작들이 첩보/스릴러 영화같이 느껴지게 만드는 연출방식 중 하나가 되었다. 이렇게 변박을 주는 빌런 연출법은 이 영화에도 쓰인다. 영화가 전체적으로 함의하고 있는 후반부의 한 대사가 있다. 또 어떤 장면이 반복됨으로써 주는 감동이 있다. 이 두 장면을 보여주기 위해서 빌런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봤는지를 주목해서 관람한다면 영화의 신선함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반대측면에서 이 지점은 영화의 단점이 될 수도 있다. 가오갤 멤버들의 서사에 집중했다는 점에서 슈퍼히어로 장르의 특성을 어느 정도는 취한 듯 보이지만 빌런의 존재감이 약하게 느껴진다는 건 기대에 못 미치는 지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 같이 함께
우리들 중 많은 사람이 '어벤저스'시리즈들을 좋아했다. 글쓴이가 좋아했던 이유는 '액션을 잘 뽑아서'였다. 그러나 시리즈에서 가장 인상 깊던 장면들은 '연대'라는 가치에서 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뭐 대표적으로 <어벤저스 : 엔드게임>의 일부 장면이 생각난다. "어벤저스! 어셈블" 장면은 타노스와의 전투를 앞두고 슈퍼히어로들이 하나 결집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면이다. 바로 전작이었던 <어벤저스 : 인피니티 워>에서 타노스의 핑거스냅으로 슈퍼히어로들이 사라지는 장면은 히어로들이 힘을 합쳐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관객들 역시 봐왔기 때문에 느껴지는 감정선이었다. 이 작품은 어느 부분에서는 슈퍼히어로물의 클리셰를 부쉈지만 한 편으로는 그 어떤 영화보다 강하게 특색을 유지했다. 무슨 말이냐. 영화에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멤버들, 그리고 내지는 모든 등장인물들이 강박적으로 반복하는 행동이 있다. 당연히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인데, 이 장면은 온갖 판이한 세상이 판치는 영화의 세계관에서 유일하게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행위라는 점에서 폭넓은 공감대를 가진다.
이 공감대는 제임스 건이 얼마나 변태적인 인간(?)인가를 느끼게 한다. 첫째. 영화의 등장인물들을 '사람으로 국한 짓지 않았다는 점'이 그렇다. 아니 뭐 sf영화에 등장인물이 사람이 아닌 것이 그렇게 대단한 일이냐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작품에서는 이것이 강점처럼 느껴진다. 왜냐. 이 낯선 세상을 몰입시킬 공감대는 전적으로 인간적인 감정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영화의 이해가 쉽다는 이점이 되고, 또 간단한 이미지인 원형(O)의 형태가 인물들끼리 반복되기 때문에 주제적인 측면에서도 관객이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게끔 한다. 이 연대의 이미지는 영화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소재인 동물 실험과도 관련이 있다. 인간과 동물이 큰 차이가 없어서 이런 일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역시 윤리적인 문제에 부딪힌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따뜻한 가족 영화
뭐 다른 마블의 시리즈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이 작품 역시 가족영화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 <앤트맨과 와스프 : 퀀텀마니아>에서의 찐 부녀관계나 <블랙 위도우>에서의 대안가족적인 특성이 그 예시다. 당연히 온 가족이 가서 보기 좋은 영화를 목표로 이런 작품들을 만들어 왔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모름지기 칭찬도 1절만 해야 한다. 사실 마블이 페이즈 4에 돌입하고 나서 이런 가족영화적인 특성을 사골국 우려먹듯이 반복했던 것도 사실인 듯하다(그래서 가족의 해체를 다뤘다는 점에서 <문나이트>가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렇게 매번 반복되는 지루한 루틴을 제임스 건은 어떻게 주파했을까? 이 아저씨는 동물과 인간의 연대, 그리고 캐릭터 간의 떡밥수거로 해소했다.
우선 로켓이 개조실험을 받기 전후에 만나는 친구들이 있다. 이 동물 친구들은 종류가 엄연히 다르기 때문에 가족이라 보기 어렵다. 그러나 영화에서 이 네 캐릭터가 쌓아 올린 서사는 <블랙 위도우>의 대안가족을 연상케 한다. 사실 이 네 등장인물들이 갖고 있는 이야기는 우리가 알던 인물 서사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물들이 왜 이런 상황에 있을까를 생각해 보면 익숙한 이야기임에도 변주를 줬다는 걸 알게 한다. 단순히 동물보호에 대한 이야기만 있는 것? 그런데 이게 슈퍼히어로 장르에서, 특히 마블 영화가 이런 플롯을 갖고 있었다는 점은 가족영화로서의 틈새시장을 잘 설계한 것으로 보인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서 송태섭 서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짠 것과 궤를 비슷하게 하는 셈이다.
이 부분은 대조적인 측면에서도 이어진다. 가오갤 멤버 중에 유일한 사람이 누굴까? 스타로드다. 스타로드는 사실 비극적인 가족사를 갖고 있다. 이기적이었던 친부와 실질적 아버지 역할을 했던 욘두와의 서사는 우리가 1,2편을 보고 난 다음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이 아버지 같지도 않은 아버지와 아들 간의 서사는 영화에서 반복되는 지점이 있다. 이 부자관계 모티브는 위에서 서술했던 영화의 원형 이미지와 시너지가 있다. 인물들 간의 대비를 더 강조시키는 느낌? 이 대조를 활용한 함께의 이미지는 영화의 쿠키영상까지 이어지는 따뜻함과 이어진다. 이렇게 정석적인 가족영화 클리셰의 반대지점을 정확하게 찔러서 이야기를 펼쳤다는 것이 이 영화의 메시지나 가오갤 멤버들의 개성과도 어울린다는 점은 제임스 건이 얼마나 똑똑한 사람인지 알게 한다.
그나마 뽑자면
오랜만에 마블 영화의 정수가 나왔다고 생각하지만 아쉽게 느껴지는 지점은 있다. 바로 빌런인 하이 에볼루셔너리다. 이 사람의 내면묘사가 조금 더 들어가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고 싶은 걸 하기 위해서 이 인물이 이런 능력과 성격을 가져야만 한다는 건 대안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인물이 몇 없는 패턴으로 후반부까지 끌고 간다는 점은 이게 최선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더 철학적인 소재들이 더 들어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인물들이 살짝 연극적인 느낌이 있다. 특히 스타로드 쪽이 그렇다. 영화를 보면서 살짝 끊긴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어떤 대사들은 마음을 알린다. 후반부 그루트와 워록의 대사가 그렇다. 그러나 워록과 하이 에볼루셔너리 이야기나 트랙스 쪽의 연기나 서사는 살짝 작위적인 느낌? 그러나 앞서 두 가지가 영화 관람에 있어 발목을 잡지는 않는다.
‘제임스 건’ 해버렸다
뭐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이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리즈의 하이라이트는 음악이다. 이 부분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처팝송의 p도 모르는 글쓴이마저도 알고 있는 제일 첫 번째 삽입곡부터, 극후반부까지 영화를 더 따뜻하게 만드는 연출 지점이 된다. 글쓴이는 이런 음악의 활용을 보면서 제임스 건이 영화라는 매체를 아주 잘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편으로는 마블이 다시 전성기를 맞을 수 있을까? 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 제임스 건 같은 인재가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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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범한 사람을 위로하는 최고의 솜씨
- 7★/10★
1970년. 크리스마스 방학을 앞둔 고급 사립학교 바튼 아카데미는 잔뜩 들뜬 마음과 깊이 실망한 마음이 교차하는 중이다. 들뜬 학생들은 저마다의 방학 계획이 있다. 실망한 학생들은 저마다의 사정으로 학교에서 방학을 보내야만 한다. 털리는 그중에서도 유독 더 심하게 좌절한 상태인데, 예정되었던 어머니와의 휴가가 방학 직전에 취소되었기 때문이다. 절망적인 소식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방학 기간 중 학교에 남아 학생들을 지도할 선생이 폴이라는 것. 고루하며 융통성 없는 고대 문명사 선생 폴의 지도하에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일은 털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일이다. 털리의 고난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나마 몇 명 남아 있던 친구들조차 예고 없이 방문한 학생 부모의 제안으로 스키장으로 향하고 만다. 털리는 어머니가 전화를 받지 않아 스키장에 함께 가도 된다는 허락을 받지 못한다. 이보다 더 나쁠 순 없을 크리스마스다.
폴에게도 사연은 있다. 고지식한 폴은 동료들에게 늘 무시당한다. 이번에 학교에 남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원래 크리스마스에 학교를 지켜야 할 순번인 동료가 가족이 아프다는 거짓말로 폴에게 순서를 떠넘긴다. 이를 모르는 폴은 동료를 걱정하며 자애로운 태도로 그의 책임을 떠맡는다. 그러나 이런 태도마저 동료들에게 조롱거리가 된다. 그가 감독할 학생이 하필 털리인 것도 문제다. 일상의 모든 순간을 고대 문명과 연결해 교훈을 끄집어낼 줄 아는 폴은 반항심이 충만하고 극도로 예민한 상태인 털리와 사사건건 부딪친다. 폴이 조금은 애잔해진다.
학교의 급식을 담당하는 주방장 메리도 있다. 흑인 여성인 메리는 한때 아들이 바튼 아카데미에 다녔었다. 아들이 좋은 교육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일념으로 메리는 어려운 형편에도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던 중 전쟁이 터졌고, 아들은 대학 등록금을 벌기 위해 참전했다. 그리고 죽었다. 학교는 해마다 메리의 아들을 기리는 예배를 진행하지만 메리는 여기서 위안을 받아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부잣집 도련님들이 주로 다니는 바튼 아카데미에서 요리하며 불평을 듣는 일이 늘상인, 슬픔에 젖은 가난한 흑인 여성 메리는 바트 아카데미에서 늘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아들을 위한 예배는 공허하고 허망하다.
사연 많고 상처 많은 세 사람의 크리스마스 연휴는 예상대로 영 순탄하지 않다. 분위기가 좋아질 듯하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갈등이 생긴다. 그러나 이 말썽과 소동, 혼란의 과정에서도 세 사람은 계속 같은 공간에 머물며 공통의 경험을 조금씩 쌓아 나간다. 여전히 서로를 이해할 수 없어 노려보고 한숨 쉬다가도 피식 웃게 되는 관계가 만들어진다.
털리와 폴은 의도치 않은 사고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메리를 그녀의 동생 집에 내려주고는 보스턴으로 향한다. 엄마와 이혼한 후 죽었다던 털리의 아버지가 정신병동에 입원해 있는 곳이다. 예민한 반항아 털리가 휘말린 소용돌이의 한복판이 드러난다. 상처는 털리만의 것이 아니다. 늘 고전이 전하는 감동을 설파하며 고고하던 폴 역시 자신의 졸업논문을 훔친 후 떵떵거리며 잘 사는 친구 앞에서 거짓 허세를 부린다. 두 사람은 깨닫는다. 누구나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의 어두운 구석이 있다는 것을, 인간은 모순적 희로애락의 존재라는 것을. 그저 서로를 반항아와 꼰대 선생으로만 보고자 했을 때는 결코 알지 못했을 깨달음이다. 방학이 끝난 후 털리의 어머니가 자기 승인 없이 아이가 정신이 불안정한 아버지를 방문했다고 격분하며 이것이 교칙 위반이라고 지적할 때, 폴이 털리를 보호하기 위해 어른만이 할 수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있던 건 이 깨달음 덕분이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뭉클하고 따뜻하다. 이 단어가 담아낼 수 있는 최대치를 실감할 만큼.
알렉산더 페인 감독과 배우 폴 지아마티의 만남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5년 작 〈사이드웨이〉에서도 둘은 이미 평범한 사람을 위로하는 최고의 솜씨를 선보인 바 있다. 일상적이지만 가볍지는 않은 일에 치이며 점점 궁지에 몰리던 주인공은 자신을 뺀 모든 것이 ‘제대로’ 굴러간다는 느낌에 낙담한다. 그러나 영화는 와인 향 물씬 풍기는 쌉싸름한 위로로 결국 주인공, 그리고 그를 지켜보는 관객을 웃게 만든다. 대단할 것 없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긍정하고 여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을 설득력 있게 해내기는 쉽지 않다. 게다가 〈사이드웨이〉와 〈바튼 아카데미〉처럼 이 소재를 온기가 전해지는 웃음으로 마무리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삶이란 그 체계를 결코 완전히 해석할 수 없을 구조적 폭력에 짓눌린 채 끙끙대는 무엇이라 보는 입장에서, 따스한 웃음으로 삶을 긍정하게 만드는 이런 유의 영화는 내 취향이 아니다. 조금 거칠게 말하면, 이런 영화가 일시적 자기기만이라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러나 알렉산더 페인과 폴 지아마티의 놀라운 솜씨 앞에서는 생각을 고쳐먹지 않을 도리가 없다. 적어도 이 영화를 보고 기억할 때까지 가슴 속에서 무언가 뭉클거리는 느낌을 간직할 수 있다면 그 시간 동안에는 적어도 따스한 행복, 설령 ‘마취’에 불과하더라도 기꺼이 만끽할 그 따스한 행복에 젖어 있을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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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늘 삼각형 안에."
*본 게시물은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 초청받아 작성되었습니다.*
1월부터 그렇게 보고 싶었던 영화 <슬픔의 삼각형> ?
안그래도 높은 기대, 더욱 더 재밌게 보고 싶은 마음에 예고편과 줄거리도 모른 채 씨네랩 시사회에 갔다. 첫 시작부터 강렬했으며 결말을 보고선 이마 짚으면서 상영관을 나왔다는,, 이 영화를 개인적인 감상평과 함께 한 줄로 남기자면 "새롭진 않았지만 새롭다"!!
⭐삼각형, 슬픔의 삼각형
영화에서 "슬픔의 삼각형"이란 단어는 한 번밖에 안 나온다. 그러나 제목으로 대두되었을 만큼, 강조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영화의 러닝타임은 2시간 30여분으로 1부~3부를 포함하므로 개인에 따라 '길게' 다가올 수도 있다. 이 짧고도 긴 시간 동안 영화는 관객에게 늘 외치고 있다, "우리의 삼각형은 여전히 그대로야."라고. 여성과 남성 / 부와 가난 그리고 끊임없이 딸려오는 '신분'이라는 고정된 꼬리표. 2023년이 된 지금, 피상적으론 '평등'을 표하지만 실질적으로 우리의 삼각형은 불변한다, 바뀌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 아픔을 1부부터 3부까지 우스꽝스럽고도 잔인하게 표현한 이야기 아닐까 싶다.
우리는 슬픔의 삼각형 안에서 살고 있다. 위로 가든, 밑으로 가든 어쨌든 삼각형 안에 갇혀있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대체 무엇을 바라고 평등함을 표하는 동시에 서로를 이렇게 미워할까. 특정 인물들에 공감을 하기도, 혐오감을 가질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새로운 익숙함
사실 드라마 <석세션>부터 시작해서 부와 가난 등의 차별 등을 비꼬는 미디어 콘텐츠들을 수없이도 많이 봐왔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새로웠다. 이목을 집중시켰던 1부, 보는 내가 아찔했던 2부 그리고 무한한 불안감으로 끝내었던 3부. 개인적으로 3부 결말로 본 영화를 n차 돌 생각이 충분하지만...! 영화가 다소 길었다. '그들만의' 다큐멘터리를 조용하게 지켜보고 있었던 기분. 한 마디로, 무서사가 만들어낸 서사였다. 피식거리던 웃음은 곧 슬픔으로 바뀌었던 그 마지막 10분의 아찔함을 잊지 못 한다.
눈 앞에선 형체 모를 불꽃들이 남발했던 영화였다.
그러나 기묘하게도, 내가 그걸 즐기고 있었다. 익숙한 새로움에 빠지고 싶은가?
당신 안의 슬픔의 삼각형을 다시금 지각하고 싶은가? 지금 당장 <슬픔의 삼각형>을 보러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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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울> 가장 픽사다운 위로를 어른들에게 건네다
뉴욕에서 음악 선생님으로 일하던 ‘조(제이미 폭스)’는 꿈에 그리던 최고의 밴드와 재즈 클럽에서 연주할 기회를 잡는다. 인생의 목표를 이룰 수 있어 잔뜩 흥분한 바로 그 순간, 그는 예기치 못한 사고로 영혼이 되어 ‘태어나기 전 세상’에 떨어진다. 인간으로 태어날 자격을 획득한 영혼들에게 지구 통행증을 발급하는 ‘태어나기 전 세상’에서 그는 지구에 가고 싶어 하지 않는 시니컬한 영혼 ‘22(티나 페이)’의 멘토가 된다. 수많은 위인들도 가르침을 주는 데 실패한 영혼 22와 함께 조는 지구로 돌아가 프로 뮤지션이 되고 꿈의 무대에 서기 위한 모험을 시작한다.
픽사 애니메이션은 여러 공통점을 갖는다. 픽사는 누구나 한 번은 경험해야만 하는 시기나 사건을 특정 소재 안에 담아 풀어낸다. 예를 들어 <온워드>는 마법, <코코>는 망자의 날, <토이스토리>는 장난감, <인사이드 아웃>은 감정을 통해 제각기 성인식, 사별, 유년기, 사춘기에 대해 이야기했다. 또한 픽사는 늘 선택된 소재와 관련된 환상의 공간을 선보이며, 그곳에서 펼쳐지는 모험은 <토이스토리 3>에서 청년이 된 앤디가 장난감들과 아름답게 이별한 것처럼 현실에서의 위로, 성장, 그리고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픽사 애니메이션은 유달리 어른들에게 감동적인 것으로 유명하다. 각각의 작품이 다루는 시기나 사건을 경험한 이들에게 픽사 애니메이션이 선사하는 환상 속 현실의 울림은 결코 작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피트 닥터 감독의 신작 <소울>은 픽사의 DNA가 가장 뚜렷하게 발현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소울>이 직접적으로 다루는 시기는 삶의 이전과 이후다. 영화의 주된 배경 역시 태어나기 전과 죽음 후에 영혼이 마주해야 하는 환상의 공간이다. 그러나 <소울>이 진정으로 말하고 싶은 이야기는 사람의 탄생과 죽음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탄생과 죽음은 수단일 뿐, 무엇보다도 현재와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가 본질에 가깝다. 이는 셸리 케이건 예일대학교 교수가 본인의 저서 <죽음이란 무엇인가>에서 (영혼이 실재하든 안 하든) "우리는 죽는다. 때문에 잘 살아야 한다. 죽음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행복한 고민을 할 수 있다"라고 내린 결론과 일맥상통한다. 갑작스럽게 죽기 직전에 처한 조와 지구로 내려가기를 거부하는 영혼 22가 함께 뉴욕에서 모험을 펼치며 지난 삶의 과오를 되돌아보고, 새로운 삶을 향한 희망을 발견하며, 당장 그들이 마주한 현실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는 것이 영화의 주된 내용이기 때문이다.
학교 음악 교사로 일하지만 언제나 재즈 밴드로 활동하는 프로 뮤지션을 꿈꾸던 조는 동경하는 아티스트와 클럽에서 멋진 즉흥 연주를 펼치며 실력을 인정받지만, 매일 공연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마음 한편에 자리 잡은 공허함을 떨쳐내지 못한다. 지구로 내려가는 것을 거부하던 영혼 22 역시 조의 몸을 통해 처음으로 삶이 무엇인지를 체감하지만, 자신의 경험을 부정당한 뒤 삶의 의욕을 잃고 괴물로 변해버린다. 그러던 와중에 둘은 단풍나무 씨앗으로 대표되는 순간의 아름다움, 사소한 일상의 소중함과 따뜻함을 마주한 후에야 진정한 삶을 살기 시작한다. 인생은 무언가 거창한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을 즐길 때 의미가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이러한 메시지는 영화의 구성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영화 음악의 활용 방식이 대표적인 예시다. 사실 <소울>에서 재즈 음악의 비중은 개봉 전에 이루어진 프로모션과 그로 인한 기대에 비해 그리 크지 않다. 초반부 재즈 클럽에서의 연주 장면, 뉴욕에서 펼쳐지는 조와 22의 여정, 일상의 소중함을 조가 깨닫는 장면을 제외하면 재즈 음악은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는 <소셜 네트워크>의 ost로도 유명한 트렌트 레즈너와 애티커스 로스의 스페이스 음악을 주로 들려주며, 이는 제2의 <라라 랜드>를 기대한 이들에게는 약간의 실망으로도 이어진다.
그러나 영화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한 바를 생각하면 기대와 다른, 재즈 음악 영화를 표방하면서도 분량 면에서 재즈를 많이 들려주지 않는 <소울>의 행보는 필연적이다. 햇살을 맛보고, 단풍나무 씨앗을 손에 쥐고, 재즈가 아닌 일상의 이야기를 미용사와 나누고, 또 과거에 있었던 모든 일상의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달은 조에게 재즈는 인생의 전부가 아니기에 오히려 더 소중하며, 그렇기에 그는 클럽에서의 연주 후에도 남은 공허함을 채울 수 있다. 이러한 조의 서사처럼 영화 역시 전체적으로 재즈를 배치하지 않으면서 역으로 재즈 음악의 의미도, 예상과는 달랐던 ost도, 영화 1분 1초까지도 모두 즐기고 기억에 남길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재즈 음악을 들려줄 때에는 즉흥 연주와 다른 연주자와의 하모니에 중점을 두며 지금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살자는 메시지를 강조하고, 이외의 장르를 통해서는 영혼들의 세계와 조의 절실함, 22의 좌절감까지도 생생하게 제시한다. 이렇게 <소울>은 스브스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피트 닥터 감독이 말한 대로 영화 음악의 장르 선택과 배치를 통해 가장 직관적으로 감정과 이야기를 전달한다.
또한 <소울>은 두 주인공 안에 현대인들의 처지를 녹여내며 관객들이 영화의 메시지를 자연스럽게 체감하도록 유도한다. 조와 22는 전혀 다른 유형의 인물처럼 보인다. 한 명은 확실한 인생의 목표를 지닌 채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열정으로 가득하다. 반면에 다른 한 명은 지구에서 태어나지 못할 정도로, 또 본인도 지구에 갈 생각이 없을 정도로 열정이 부족하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결국 둘은 확신을 갖지 못해 우울하다는 같은 문제 상황에 처한 이들이다. <피로사회>의 표현을 빌리면 조는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믿는 지구에서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해 "자기 자신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인간"이라서 우울하며, 22는 '태어나기 전 세상'에서 스스로를 발전시키기 위해 강제된 자유로부터 성과를 내지 못한 채 낙오한 인물이다. 열정이 있는 이와 아닌 이, 목표를 향해 내달리는 인물과 시작조차 두려워하는 인물이라는 차이 이면에는 "(삶을) 보는 법에 대한 특별한 교육"을 받지 못해 사색적 삶을 누리지 못하는 인물이라는 공통점이 존재하는 것이다. 성과를 내야 하고, 그 성과로 사회에서 인정받는 긍정 과잉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비록 양상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자신의 목적에 치여 함몰되어 가는 두 주인공의 이야기는 스스로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과 다르지 않고, 따라서 관객들은 영화에 몰입할 수밖에 없다.
이에 더해 조와 22라는 캐릭터가 현실을 반영하듯이, 주 배경으로 묘사되는 공간도 현실의 비유로서 감정이입과 공감에 큰 도움을 준다. 지나치게 열정에 집착하여 괴물이 된 영혼들이 떠돌아다니는 공간인 어둠의 구역을 보자. 지나친 열정 때문에 주식 거래에 미쳐버린 한 남자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 결과 두 주인공과 같은 문제를 겪는 인물이다. 이때 이 남자와 22처럼 자신의 삶을 잃고 괴물이 되어 버린 이들이 '문윈드'와 같은 개인의 도움에 의해서만 구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어둠의 구역은 개인이 스스로를 하나의 부품이자 도구로 여기게 하며 실패할 경우 재도전의 기회를 거의 주지 않는 사회상의 반영이다.
또 다른 배경인 '태어나기 전 세상'도 현실의 그림자를 반영한다. 이 곳은 언뜻 영혼들의 성장과 배움의 공간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간이라면 갖추어야 한다는 조건들을 정해놓고 그 조건을 맞춘 영혼만 지구에 갈 수 있게 하는 시스템은 개인의 개성을 인정하기보다는 엇비슷한 인간상을 만드는 공장이나 다름없고, 그 공장에서 낙오한 22와 같은 영혼이 괴물이 되는 것을 방치하는 대목에서는 특정 스펙과 조건으로 삶의 성공과 실패가 재단되는 현대 사회의 모습이 엿보인다. 이러한 공간들의 특성과 인물들이 처한 어려움을 연관 지어 생각해보면 현재의 사회구조를 만드는 데 공헌한 과거의 위인들로부터 22가 아무런 가르침을 얻을 수 없었던 이유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소울>이 픽사 애니메이션 중에 가장 완성도가 높다고 볼 수는 없다. 이 영화는 <업>처럼 뜨거운 눈물을 흘리게 하지 못하며, <토이 스토리>처럼 십수 년 후에도 추억을 회상할 수 있는 뭉클함을 선사하지도 못한다. 또한 육신과 영혼의 관계, 죽음과 삶의 관계, 죽음이 갖는 의미 등 다소 현학적인 소재로부터 매 순간 마주하는 현실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도출하는 데 있어서 음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영리하고 효과적이지만 주제나 소재가 갖는 깊이를 온전히 담아낼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떨쳐버릴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울>은 픽사의 최전선에 서 있는 작품이다. 사실 영화의 다양한 목적과 기능 중 하나가 현실에서의 도피인 만큼, 현실의 아픔과 불편함까지도 영화 안으로 끌고 들어온 <소울>의 선택은 바람직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할리우드를 꿈의 공장이라고 부를 만큼 영화는 현실과 다른 세상을 보여주면서 관객들에게 위안과 위로를 건넬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가 제공하는 위안과 위로가 단지 현실 회피와 환상의 충족을 담당할 뿐이라면 영화는 마약과 다를 것이 없으며, 지금처럼 사람들에게 힘이 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언제나 끝이 나기 때문에 영화는 관객들을 그들의 현실로 되돌려 보내야만 하고, 그렇기에 결코 현실에서 완전히 도망치라고 말할 수 없다.
결국 영화는 도피처가 아닌 피난처이자 안식처이고, 새로운 출발을 위한 충전소 혹은 주유소다. 그렇기에 앞서 살펴봤듯이 환상 속의 세계를 펼쳐 보이지만 언제나 현실로 되돌아오는 것을 잊지 않는 픽사 애니메이션은 언제나 큰 기대와 뜨거운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이는 삶에 지쳐 자기 자신을 원망하고 비난하며 황량한 사막을 떠도는 이들을 향해 따뜻한 위로를 건네며 냉철한 성찰과 비판의 메시지도 남기는 <소울>이 유독 어른들을 위한 동화이자 가장 픽사다운 영화일 수 있는 이유다.
<소울>은 엔딩 크레디트가 다 올라간 후 테리가 "영화는 끝났어. 이제 집에 가"라고 말하는 쿠키 영상으로 끝난다. 이는 마치 <데드풀>에서 데드풀이 왜 아직도 앉아 있냐면서 혹시 다음 편 떡밥을 기대한 건 아니냐며 약 올리는 것만큼이나 유머스럽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한 장면이다. 하지만 어찌 되었건 현실에 충실해야 한다는, 매 순간을 귀중하게 여기며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품의 마무리이기 때문일까? 실컷 환상의 세계를 맛보고 그 감흥에 취해 있을 관객에게는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는 이 대사마저도 다시금 현실을 살아갈 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이렇게 <소울>은 현학적이고 깊이 있는 소재를 다루면서도 그 어느 때보다도 직접 가슴에 와 닿는, 가장 픽사스러운 격려와 위로를 전해주는 영화로 남는다.
O(Outstanding, 특출함)
마블이 <아이언 맨>을 넘어서야 한다면, 이제 픽사는 <소울>을 넘어서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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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해한대도 곱씹게 되는 프렌치 영화 첫 경험
난 그저 영화티켓이 생겨서 들어갔을 뿐이었다. 시놉을 보아하니, 로맨스인 것 같았다. 하지만 크레딧이 내려갈 때쯤 내머릿속은 혼돈으로 가득찼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 영화는 프랑스영화라는 것을. 프랑스 영화하면 일반적으로 생각나는 그런 느낌이었다. 내가 뭘본건가 싶은 느낌. 하지만 곱씹어보니, 뭔가 영화 속에 담긴 은밀한 상징이 있었던 듯하다. 지금부터 내가 쓰는 글은 그저 헛소리일 수도 있다. 영화가 하도 난해했던 바람에 생각을 거듭하다 결론낸 내 주관적인 해석이기 때문이다.
1. 우연을 의도한 만남의 의미
학교도 지루하고, 또래들이 그저 한심할 뿐인 수잔, 평소와 다를 바없이 별일없이 지나가던 하교길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남자를 보게 된다. 왜인지 모르게 계속 시선이 그에게 향하는 것은 어쩔 수 없어서 계속 그를 알게모르게 미행한다. 그의 공연장을 맴돌고, 그의 시선이 교묘하게 빗나가는 곳에서 항상 서있다. 그녀에게는 우연이 아니지만 그녀가 꽂힌 남자, 라파엘에게는 그녀가 우연히 마주친 사랑으로 보이게끔 말이다.
그녀의 당돌한 미행을 보고 있자니,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사랑하는 상대가 운명의 상대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운명이란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두 사람 중 하나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을 연출해서 두 사람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항상 내 부모님께 농담조로 던지는 말이 있다.
"이 중에서 누군가는 연애할 때, 사기 수준으로 거짓말을 한 거야. 둘 중 누구야, 엄마야, 아빠야?"
사랑이 발전하는 양상과 그 결과는 모두가 다르겠지만 사랑의 첫 시작은 생각보다 우연보단 연출이 더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의 호감을 연출한다는 것은 둘 중 한 명은 우연을 가장할만큼 상대가 마음에 들었다는 방증이니까.
2. 빨간 레모네이드의 의미
영화의 첫 시작은 수잔이 친구들에 둘러싸여 음료나 마시며 딴짓하고 있는 모습에서 시작된다. 수잔은 친구들의 소소한 수다가 재미없다. 어지간히 재미가 없었는지 자신이 마시고 있던 빨간 레모네이드를 빨대로 물고있다가 휴지에 뱉으며
하얀 휴지를 빨갛게 물들이며 놀고 있다.
계속 이 장면이 머리에 맴돌았는데, 이 장면을 곱씹다가 여자아이들의 초경이 생각이 났다. 수잔은 16세이기에 초경을 할 법한 나이이긴 하지 않은가. 초경이 상징하는 바가 있다면, 이성에 눈을 뜰 나이라는 것이기에 이 첫 장면에서 감독은 수잔이 소녀에서 여자로 발돋움 중이라는 표현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라파엘이 수잔이 좋아하는 빨간 레모네이드를 먹어보는 장면은 그녀의 여성성을 받아들였다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녀의 취향을 이해해보는 장면일 수도 있지만, 그녀의 여성성을 강조해 섹슈얼하게 생각해본다면, 라파엘의 몸에 그녀가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
3. 영화는 도대체 뭘 말하고 싶었던 걸까.
영화가 끝나기 직전, 수잔은 극장을 흘낏 보고 웃는다. 그걸 본 나는 이 영화의 후반부가 특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갑자기 왜 사랑하는 남자를 생각하면 울게 되고. 뒤이어 그 남자에 대한 관심이 식어보이는지에 대해서 그 과정의 인과관계가 매끄러워보이지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를 시간을 두고 곱씹어보니, 이 영화는 소녀가 여자가 되는 과정을 그린 하나의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또래들이 시시해 어른스러운 남자에 끌리는 수잔이 그려낸 사랑과 이별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 템포 더 어른이 된 그녀를 마지막 장면의 미소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보니, 이 영화는 로맨스를 가장한 성장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의 시작은 소녀였지만 영화의 끝에서의 수잔은 여인으로 보였으니까.
누군가를 사랑하던 그녀는 누군가를 사랑하며, 한낮의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마치 그녀의 아빠가 그녀에게 한 말처럼 말이다. 하지만 사랑의 시간이 끝나면, 그녀의 한낮의 시간은 그저 아득한 꿈이었음을 깨닫고, 왈칵 울음이 터지는 것이다. 그와 함께한 춤, 합치의 순간들 모두 아득한 꿈이었음을 깨달았기에.
총평
하지만 여전히 그녀가 울었던 이유가 이별말고 무엇인지 짐작이 가지 않는 건 나에게 사랑의 경험이 없어서일까. 사랑은 내가 관심이 없어 그렇지 참 심오한 세계인가보다. 여주인공이 부른 것으로 추정되는 엔딩곡은 꽤나 무디하다. 그 곡을 들어본다면, 영화가 좀 더 이해될지도 모른다. 나와 다른 해석을 해주시는 분이 있다면, 얼마든지 두 팔 벌려 환영이다.
* 해당 영화의 시사회는 씨네 랩의 크리에이터로서 참석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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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돈 룩 업> 티저 예고편
혜성 충돌이 임박했다. 《돈 룩 업》의 주인공은 무명의 두 천문학자. 혜성이 지구와 충돌할 거란 사실을 발견한 두 사람은 언론사를 있는 대로 찾아다니기 시작한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재앙을 온 인류에 경고하기 위해. 애덤 매케이 각본과 연출. 《돈 룩 업》, 올겨울 공개 예정. 오직 넷플릭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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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한마 바키> 공식 예고편
지상 최강의 격투가, 아니 지상 최강의 생명체라는 한마 유지로.
하지만 한마 바키에겐 아버지란 이름의 벽일 뿐.
지금 이 벽을 넘어서기 위한 바키의 특훈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