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DAY2024-12-24 08:46:46
하얼빈 | 자욱한 담배 연기로 써 내려간 참회록
<하얼빈> 리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08년, 함경북도 신아산. 대한의군은 일본군을 기습해 승리를 거두지만, '안중근'(현빈) 장군은 일본군 소좌 '모리 다쓰오'(박훈)를 비롯해 사로잡은 포로를 풀어주라고 명령한다. 만국공법에 따른 의로운 선택이었으나 이 결정은 부메랑으로 되돌아온다. 풀려난 모리가 곧바로 일본군을 이끌고 역습을 가해 안중근의 부대원을 전멸시킨 것. 그로 인해 안중근은 대한의군 동료들에게도 의심받고, 본인도 자책감에 시달린다.
하지만 안중근은 좌절하지 않고 두만강을 건너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한다. '우덕순'(박정민), '김상현'(조우진), '공부인'(전여빈), '최재형'(유재명), '이창섭'(이동욱) 등 각자의 이유로 독립운동을 포기하지 못한 동료들도 모은다.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릴리 프랭키)를 사살해 먼저 죽은 동료들의 몫까지 해내기 위해. 하지만 일본군은 밀정을 통해 의거 계획을 입수하고, 모리 소좌가 안중근을 필사적으로 추격하기 시작한다.
안중근의 참회록
독립운동과 참회. 두 단어를 합치면 한 인물이 떠오른다. 윤동주 시인이다. 흔히 그의 시는 자기반성과 성찰의 시로 불린다. 일제 강점기에 평범한 소시민으로서 적극 항거하지 못하는 자기 모습에 대한 부끄러움과 더 떳떳한 삶을 향한 열망으로 가득하니까. '참회록'의 끝이 대표적이다.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슬픈 사람의 뒷모양이/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사실 두 단어는 연관성이 곧바로 보이는 조합이 아니다. 독립운동은 보통 뜨겁게 느껴진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자기 목숨을 희생할 준비가 된 의사와 열사의 용기로 가득한 단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기 때문에 윤동주 시인의 참회록은 오히려 공감하기 쉽다. 다른 독립운동가들이 선망의 대상일 때, 그는 그들처럼 되지 못한 우리에게 위로를 건네기 때문. 때로는 슈퍼맨보다 스파이더맨 같은 히어로가 더 필요한 것과 비슷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우민호 감독의 신작 <하얼빈>은 일반적이지 않다. 가장 유명한 독립운동가인 안중근 장군이 주인공인데, 애국심을 고취하거나 뜨겁게 달아오르지 않는다. 안중근을 선망의 대상이 아니라 윤동주 시인처럼 약점이 많은 인간으로 묘사한다. 그의 내면에 가득한 부끄러움과, 부끄러움을 원동력 삼은 의거를 쫓는다. 그렇기에 <하얼빈>은 연말 상업영화로서는 다소 의아하면서도, 쉬이 잊지 못해 곱씹어 볼 영화다.
뭉게뭉게 피어나는 참회
참회. 윤동주의 <참회록>처럼 <하얼빈>을 관통하는 감정선이다. 모든 캐릭터는 각자 뼈 깊숙이 후회하는 순간이 있다. 우덕순은 어릴 적 자기 자신의 언행을 되돌리고 싶어 한다. '박점출'(정우성)과 공부인은 동생, 남편 대신 전사하지 못한 자기 자신에 대한 후회가 있다. 김상현은 눈앞의 쾌락을 이기지 못한 스스로가 한스럽다. 마지막으로 안중근은 누구도 지키지 않는 국제법을 따른 대가로 동료들을 죽게 만들었다는 회한이 있다.
<하얼빈>은 크고 작은 서로 다른 후회와 회한이 모여 어떻게 독립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는지를 밝힌다. 전반부에서는 제각기 연해주와 만주의 추위만큼 뼈아픈 한을 토해낸다. 후반부에서는 그들이 어떻게 일본군과 일제에게 그 한을 되갚아 주는 지를 보여준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죽일 때, 다른 인물들도 각자의 방식으로 총성을 울린다.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러울수록, 독립운동가들에게 더 크고 중요한 일을 해낸다.
이러한 참회의 서사는 한 소품에 집약되어 있다. 바로 담배다. 정확히는 담배의 연기라고 할 수 있다. 극 중 독립운동가들은 끝없이 담배를 피운다. 두 명 이상이 실내에서 모이면 그 순간 바로 라이터나 담뱃불부터 찾는다. 기차 1등석에서도, 회의실에서도, 안가에서도, 기차역에 숨어서도 그들은 연달아 담배를 피운다. 4D 영화가 아닌데도 스크린에서 담배 냄새가 느껴질 정도다.
그런데 카메라는 흡연하는 사람보다 담배 연기 그 자체에 집중한다. 실내 공간에서는 햇빛, 전등 같은 광원을 카메라 정면에 위치시킨다. 자연히 배우 얼굴은 잘 안 보인다. 모자도 쓰고, 머리도 길다 보니 대부분 검은 실루엣처럼 보일 뿐이다. 이때 어두운 배경과 여러 실루엣 사이로 담배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마치 지난 전투에서, 지난 임무에서 남은 후회와 반성을 담배에 담아 태워 날려 보내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려는 듯이.
인간 안중근과 장군 안중근
담배 연기처럼 인물들 사이를 떠도는 참회는 때로는 답답하지만, 그만큼 절절하고, 또 뭉클하다. 참회가 모이고 모여 인간 안중근의 진면목을 보여주기 때문. 신아산 전투가 끝난 직후, 안중근은 대한 의군 동료들 사이에서 밀정으로 의심받는다. 승전 후 사로잡은 일본 소좌 모리를 포함해 전쟁포로 모두를 만국공법에 따라 석방했기 때문. 모리는 풀려나자마자 안중근 부대의 은신처를 기습해 독립군을 학살해 버린다.
겉보기에 안중근의 선택은 이상적이거나, 순진하거나, 어리석다. 힘겹게 찾아낸 밀정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는 밀정을 처결하지 않는다. 대신 그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이창섭의 말마따나 고결하다. 그의 신념이 결국 이토 히로부미 저격이라는 나비효과를 낳았기 때문.
안중근 덕분에 목숨을 건진 모리는 군인답게 죽지 못했다는 수치심에 시달린다. 또 민간인을 학살한 자신과 다른 안중근을 보면서 더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 결과 모리는 안중근 추격에만 열을 올리고, 결국 이토를 제때 지키지 못한다. 밀정에게 베푼 자비도 일견 지나치게 순진해 보이지만, 종국에는 이 선택이 또 다른 독립운동가의 목숨을 구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즉, 인간 안중근이 선택이 장군 겸 독립운동가 안중근을 돕는 셈이다.
이처럼 안중근의 신념이 끝내 보상받는 전개는 그의 삶을 압축해 보여주는 듯하다. 후대가 보기에 그는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고결하다. 수감생활 중 일부 집필한 '동양평화론'에서 한중일 3국이 상호 주권을 존중하며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정도다. 하지만 <하얼빈>은 그의 일생 중 가장 중요한 참회의 시기를 살펴보면서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그의 사상과 신념까지도 감정적으로 감싸 안는다.
차갑게, 관찰하듯이
이처럼 이야기의 주제부터가 참회이다 보니, <하얼빈>은 타오르지 않고 냉정하다. 시작만 보더라도 차갑다. 안중근은 얼어붙은 두만강 위를 걸어서 연해주로 넘어가던 중, 얼음 위에 쓰러져서 못 일어날 정도로 고통스러워한다. <하얼빈>은 이런 안중근을 그저 관찰한다. 별다른 부연 없이, 두만강 위에서 마치 삶의 의지를 잃은 듯한 안중근을 비춘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앞뒤 상황을 설명해 준다.
달리 말해 <하얼빈>은 관객이 주인공에게 몰입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일정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들의 선택과 임무를 따라가기를 원한다. 그렇기에 영화는 정적이고, 멀게 느껴진다. 우선 한번 구도를 잡은 카메라는 웬만해서 위치를 바꾸지 않는다. 고정된 구도 안에서 인물의 동선을 담아낸다. 일본군과 추격을 벌일 때도, 만주 벌판을 누빌 때도 컷의 전환이 빠르지도, 많지도 않다.
또 멀리서 관찰한다. 때때로 클로즈업도 활용하지만, 감정적인 대목마다 일부러 한 발씩 뺀다. 절대 관객이 주인공과 함께 불타오르도록 만들지 않는다. 죽은 동료들 사이에서 안중근이 통곡하면서 괴로워할 때도, 마침내 이토를 쏴 죽이는 순간에도 카메라는 거리감을 유지한다. 원거리에서,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앵글로 안중근을 관찰할 뿐이다. 이는 과거 회상을 흑백으로 처리하는 이유와도 맞닿아 있다.
냉정하게 타오르다
그 결과 <하얼빈>은 특유의 분위기를 조성한다. 인물의 감정과 서사를 곱씹게 하는 힘이 여기에서 비롯된다. 일본군과의 전투 시퀀스만 봐도 그렇다. 독립군과 일본군의 육박전을 관찰하면서 승리의 쾌감보다는 생존을 위한 처절함을 느끼게 한다. 이는 결국 자기 선택 때문에 겨우 살아남은 동료들이 모두 죽었다는 안중근의 죄책감, 속죄와 참회로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겠다는 결심 모두에 강력한 설득력과 당위를 불어넣는다.
이는 장르와도 조화를 이룬다. <하얼빈>은 액션이 강렬한 <007>, <제이슨 본> 시리즈보다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같은 클래식한 첩보물에 가깝다. 속마음을 파악하기 어려운 여러 인물의 관계 속에서 그들이 어떤 선택을 할지 아리송하게 만들며 서스펜스를 쌓는다. 기차 안에서 밀정을 찾아내고, 그를 역이용해서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막으려는 일본군을 떨쳐내는 순간이 대표적이다.
이는 김지운 감독의 <밀정>을 연상시키는 시퀀스이면서도, 참회라는 모티브를 장르적으로 영리하게 풀어낸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밀정은 누구인지. 그 배신자는 어떤 이유로 동료들을 버렸는지. 그리고 과연 그는 다른 동료들처럼 참회할 수 있을지. <밀정>에 비하면 투박한 듯 우직한 연출 곁들여지면서 이 장면은 강렬한 서스펜스와 반전을 동시에 선사한다.
그렇기에 관객 입장에서는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다. 같은 위인과 사건을 영상화한 <영웅>과는 정반대 되는 경험이다. <영웅>이 당장 안중근과 함께 하얼빈역으로 떠나야 할 것 같은 느낌을 주고자 했다면, <하얼빈>은 나라면 안중근처럼 선택할 수 있었을까 하고 고민하게 만든다. 혹여 밀정이 된 인물처럼 행동하지는 않았을까 하고 곱씹게 만드는 힘이 있다.
모난 영화의 매력
위 장점이 모두 더해진 결과 <하얼빈>은 2시간 동안 힘 빠지거나 지루한 순간 없이 긴장감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끌고 나간다. 먹먹할 때도, 엄청난 흡입력을 뽐내는 순간도 있다. 다만 이는 상업영화로서 마냥 장점이라고 하기 어렵다. 달리 말하자면 순간적으로 터져 나오는 힘이 부족하다는 의미이기 때문.
감독의 전작과도 대조적이다. <남산의 부장들>은 1시간 반 넘게 쌓아 올린 긴장감을 박 대통령 시해 시퀀스에서 모두 터뜨린다. 그에 반해 <하얼빈>은 그 긴장감을 터뜨리지 않고 마지막까지 끌고 가면서 가슴에 응어리지게 만드는 식으로 마무리한다. 이토를 죽인 후 곧바로 사형 집행 장면으로 넘어간다. 죽음은 두렵지만, 내심 홀가분한 안중근이 참회록에 마침표를 찍는듯한 인상을 남긴다.
배우들의 연기도 도드라지는 작품은 아니다. 눈에 띄는 캐릭터도 부족하다. 그나마 박정민의 우덕순 정도가 생동감 있다. 나머지 인물들은 예상할 수 있는 독립운동가와 일본군 캐릭터의 전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즉, 배우들이 이야기 전개에 필요한 역할 그 이상의 역량을 보여줄 수 있는 환경은 아닌 듯하다.
하지만 그렇기에 <하얼빈>의 흥행 성적은 더 궁금해진다. 의도한 분위기와 메시지를 살리기 위해 익숙한 클리셰나 흥행 공식은 과감히 내려놓은 영화이니까. 겨울을 배경으로 유사한 화법과 톤을 구사한 <남한산성>이 극찬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실패했던 사례를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오징어 게임 2>와 거의 동시에 개봉되는 <하얼빈>은 과연 관객들을 집밖으로 이끌 수 있을까?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어둠 속 담배 연기가 총구에서 피어오르기까지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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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판 모르는 사람의 여행이랑 졸업식 참가하기
필자는 금빛 모자이크 시리즈를 단 한편도 안 본 사람이라, 관람 전에 메가박스나 네이버 영화 같은 곳을 봤는데 줄거리가 그냥 수학여행 가는 내용 이 정도로만 등재되어있어서 나무위키 같은 위키 사이트에서 이 작품 포지션을 찾아봤는데, 최종장 같은 느낌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일상물 특성상 타 TVA 시리즈인 귀멸의 칼날, 주술회전 같이(한국에서 최근에 큰 규모로 개봉한 TVA 연계 극장판이기에 예로 들었다) 장기적으로 꼼꼼히 이어지는 느낌보다 파편적이고 얇게 이어지는 느낌의 일상물이라 전작을 안 본다 해도 내용이 이해가 안 가진 않았다. 다만, 내용이 이해가 간다는 거지 재미가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인물 소개를 해주는 것도 내 친구는 A, B, C, D 고 학교 쌤은 E, F다 이 정도로만 끝나서, A는 B와 어떠어떠한 관계이고, C는 D를 좋아하고 이런 자세한 설정들이 없다보니 쟤는 왜 저러지? 같은 의심을 계속 들게 만든다. 그리고 일본 애니에서 자주 나오는 츳코미식 개그가 정말 호불호가 갈리는 요소인데, 필자는 이러한 요소가 정말 맞지 않아 보는 내내 부담감을 느꼈다. 타 흥행 애니메이션 극장판인 귀멸의 칼날이나 주술회전에서도 이런 개그 스타일은 안 맞았는데 이 작품에서도 역시 안 맞았다. 또한 애니메이션 하면 작화나 영상미를 중점으로 보게 되는데, 본 애니메이션은 흔히 모에계 애니메이션에서 쓰이는 인물 형태에다가 연출에서도 특별히 애니메이션에서만 보여줄 수 있는 움직임의 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고, 영상미도 특별히 좋은 풍광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말 그대로 시리즈의 팬만을 위한 영화다. 시리즈를 안 봤다고 이해가 안 가는 영화는 아니지만, 시리즈를 안 봤다면 굳이 볼 필요가 없는 영화기도 하다.
*이 글은 원글 없이 새로 작성된 글이며, 출처란에는 작성자의 인스타그램 주소를 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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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터슨〉이 한국에서 나이를 먹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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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이 자신의 부모를 촬영한 다큐멘터리 영화 〈작은새와 돼지씨〉는 여간해서는 거리두기가 어려운 영화다. 가사노동을 하는 작은새와 경비원으로 일하는 돼지씨는 오랫동안 부부로 살았다. 두 딸을 낳고 키웠고, 함께 슈퍼를 운영하며 생계를 이었다. 그들이 거주하는 소박한 아파트에는 그들이 함께한 세월이 묻어난다. 작은새와 돼지씨는 풍족하지는 않지만 떳떳하게 살아온 서민 부부의 전형이다.
작은새는 수줍음 많은 다정한 여자고 돼지씨는 노래와 춤을 좋아하는 호탕한 남자다. 여느 부부처럼 그들은 서로에게 기대기도 하고 투닥거리기도 한다. 배가 볼록 나온 돼지씨가 소파에 누워 작은새에게 발톱을 깎아달라고 하는 장면, 발에 가시가 박한 작은새가 돼지씨에게 이를 빼달라고 하는 장면, 넌지시 그리고 조심스럽게 상대에 대한 묵힌 불만을 털어놓는 장면 등등. 핵가족의 형태로 살아본 적 있는 사람은 이들 장면을 변주할 자신만의 수많은 경험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낯설고 ‘민망한’ 장면도 있다. 사랑보다는 동지애로 살아가는 수많은 평범한 부부가 한때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이었음을 일깨우는 장면 말이다. 영화에는 작은새와 돼지씨가 주고받은 연애편지가 소개된다. 간드러지는 표현으로 서로를 갈구하는 두 사람에게서 우리는 그들이 함께한 세월을 상상하게 된다. 더불어 각박한 현실을 함께 해치며 삶의 토대를 다져온 그들이 지금과는 영 다른(?) 감정을 주고받은 연인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감정이 여전히 그들에게 소중히 간직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맺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관계를 성찰케 한다. 오래 지속되는 관계는 어떻게든 변한다. 여기에 어떻게 깊이를 더할 것인지가 관건이다. 둘만이 가능한 방식으로 서로를 지탱하며 버텨온 작은새와 돼지씨의 관계는 여기에 작고 사랑스러운 참조점이 되어준다.
그리고 이 모든 순간에 예술이 있다. 우리는 보통 새롭고 혁신적인 예술에만 가치를 부여한다.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충격적인 방식으로 확장해주는 예술 말이다. 그러나 예술의 가치는 하나가 아니다. 작은새와 돼지씨는 일상의 감정을 승화시키는 수단으로 예술을 한다. 작은새가 자기 내면을 표현한 서예와 그림, 돼지씨가 경비 노동을 하며 쓴 시는 예술의 가치가 하나가 아님을 보인다.
〈작은새와 돼지씨〉를 보며 짐 자무쉬 감독의 영화 〈패터슨〉이 떠올랐다. 주인공은 미국에서 버스 기사로 일하는 패터슨이다. 그는 매일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고, 똑같은 버스를 운전하며, 같은 동료의 불평을 듣는다. 퇴근 후에는 아내의 실험적인(맛없는) 요리를 먹고, 어제 간 길로 개를 산책시키며, 어제와 같은 술집에 가서 어제와 같은 술을 마신다. 그러나 다른 것도 있다. 그는 매일 조금씩 다른 시간에 일어난다. 버스에 탄 승객과 그들이 나누는 대화 내용도 매일 달라진다. 동료의 불평 내용도 바뀐다. 아내는 매일 집을 새롭게 꾸미고, 그녀가 만든 머핀 위 하얀 설탕 물결도 매일같이 달라진다. 술집의 대화는 어제와 이어져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패터슨은 매일 다른 시를 쓴다. 패터슨에게 시는 따분하고 지루해 보이는 일상을 평온하고 소박한 차이의 반복으로 인식하게끔 해주는 새로운 언어다.
아마도 패터슨이 한국에 산다면, 그가 나이를 먹는다면 작은새, 돼지씨와 닮은 모습이지 않을까 싶다. 특별할 것 없는 삶이지만 예술을 통해 발견되지 않은 의미를 들춰내고 스스로를 빛낸다는 점에서 말이다. 돼지씨와 작은새가 오래도록 예술과 함께 일상을 살아내기를, 그리하여 그들을 닮은 모든 가족의 일상을 특별한 것으로 만들어주기를 바란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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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을 요리하라, 이들처럼
요리는 정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만드는 것이 웬만한 마음으로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저도 누군가에게 요리를 해주고 나서야 깨달았는데요. 마음을 다해야 한다는 점에서 요리는 사랑과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요리에 사랑이 더해진 영화는 어떤 모습일까요? 트란 안 홍 감독은 <프렌치 수프>라는 영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았습니다.
※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은 <프렌치 수프>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프렌치 수프>는 2024년 6월 19일 국내 개봉작입니다.
프렌치 수프
The Taste of Things
Summary
20년간 최고의 요리를 함께 탄생시킨 '외제니'와 '도댕'. 그들의 요리 안에는 서로에 대한 존경과 배려, 그리고 사랑이 있다. 인생의 가을에 다다른 두 사람, 한여름과 자유를 사랑하는 '외제니'는 '도댕'의 청혼을 거절하고, '도댕'은 오직 그녀만을 위한 요리를 만들기 시작한다. (출처: 씨네21)
Cast
감독: 트란 안 홍
출연: 줄리엣 비노쉬, 브누아 마지멜 외
이 영화의 한국어 제목은 <프렌치 수프>, 영어 제목은 <The Taste of Things>입니다. 제목에서부터 요리에 관해 작정하고 이야기하겠다는 다짐이 느껴지는 듯한데요. 코스 요리를 만드는 과정을 섬세하게 담아낸 오프닝 시퀀스는 그 다짐을 현실로 만들어 버립니다. 밥을 먹고 영화관에 들어갔기에 망정이지, 밥을 먹지 않았더라면 분명 제 뱃속에서는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요동쳤을 겁니다.
10초 건너뛰기가 당연해진 오늘날이지만, <프렌치 수프>는 건너뛰는 것 하나 없이 요리의 과정을 차분히 보여줍니다. 식기들이 부딪치는 소리, 물이 팔팔 끓는 소리, 재료들이 지글지글 구워지는 소리로 가득한 '외제니'와 '도댕'의 부엌은 고요하면서도 소란합니다. 쉼 없이 움직이며 음식을 만들어내는데도 부산스럽기보단 우아합니다. 그들이 얼마나 긴 세월을 이 부엌에서 보내왔는지 알 수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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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렌치 수프 같은 연애의 맛
'외제니'는 '도댕'이 상상한 레시피를 최상의 맛으로 구현해 내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지난 20년간 환상의 파트너로서 지내왔죠. 그 과정에서 사랑도 꽃폈습니다. 두 사람은 인생의 가을을 지나는 나이에 이를 때까지, 부엌과 인생에서 서로와 함께해 왔습니다. 언제나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며 신뢰하는 두 연인의 사랑은 마치 프렌치 수프와도 같습니다. 한 번 걸러 불순물을 제거한 수프는 맛이 다소 약해지지만, 맑고 부드러우며 색이 진한 수프가 됩니다. 그들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뾰족한 부분은 모두 걸러내고, 부드럽고 다정하게 서로를 대하죠.
미디어 전체를 통틀어 어른의 '어른다운' 연애를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습니다. 근래 나는솔로, 결혼지옥, 고딩엄빠와 같이 자극으로 점철된(혹은 얼룩진) 사랑들, 또는 현실에서는 절대 없을 우연과 구원과 운명의 연속인 사랑들만 봐왔기 때문이겠죠.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자극에 무뎌지기 마련입니다. 처음에는 '저래도 되나?'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저런 사랑도 있으니 나 정도는 괜찮아.', '저런 사랑이 어딨어? 이런 게 현실이지.' 싶어집니다. 불순물을 거른 듯이 순하디순한 사랑이라니, 참으로 낯설고 반가웠습니다.
요즘 세상은 너무 강한 맛만을 선호해서 서글픕니다. 그 맛에 익숙해지는 저 자신도 싫습니다. 부드럽고 진한 수프를 더 많이 맛보고 싶은데, 머지않아 그런 수프를 먹어도 '에잇, 밍밍해!' 할까 봐서 걱정이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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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요?
극 중에서 '도댕'은 여지없는 사랑꾼입니다. 언제나 애정을 표현하고, 한없이 상대방을 걱정하며, 청혼하고 또 청혼합니다. 그러나 '외제니'는 조금 다릅니다. '외제니'를 사랑하는 모습이 분명하게 묘사되는 '도댕'과 달리 그렇다 할 애정 표현이 없습니다. 유독 등을 돌리고 있는 '외제니'에게 다가가는 '도댕'의 모습도 자주 보입니다. '외제니'는 선뜻 뒤도는 법이 없죠. 몇 차례의 거절 끝에 '도댕'의 청혼을 받아들인 이후에는 몸이 거부라도 하는 듯이 지병이 악화되기도 합니다.
반추 끝에 이런 질문이 남습니다. ''외제니'는 '도댕'을 진정으로 사랑한 걸까?' 누군가는 '도댕'에게 아내보다는 요리사로 남길 바란다는 '외제니'의 사랑을, 사랑을 나누고자 방문을 두드리는 '도댕'을 진심으로 맞이한 것은 단 두 번뿐이었다고 말하는 '외제니'의 사랑을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외제니'는 '도댕'보다는 요리를 더 사랑했을지도 모르지요. 요리를 더 자유롭게 사랑하기 위해, '도댕'과의 사랑을 선택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외제니'가 '도댕'을 분명히 사랑했다고 생각합니다. '외제니'는 '도댕'을 뼛속까지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도댕'의 음식은 오직 '외제니'에 의해서만 진정한 맛을 냈거든요. 상대를 뼛속까지 이해하는 마음은 사랑이 없다면 불가능합니다.
제 결론이 너무 단순하고 지나친 비약이라고 생각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제게 사랑은 완전한 이해인 걸요. 서로 다른 답을 마음에 둔 채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영화를 보는 재미지요. 영화를 보신 분들께 묻고 싶습니다. 당신의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요? 당신은 '외제니'의 사랑을 어떻게 보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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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인물들은 사랑을 요리하고, 사랑을 먹습니다. 눈으로 보았지만, 오감으로 사랑의 맛을 느낄 수 있는 따뜻한 작품입니다. 다만, 사랑과 함께 입맛도 돋우는 영화이니 꼭 식사하고 보시길 권합니다.
One-Liner
사랑은 프랑스 부엌에서 만나, 프렌치 수프를 먹으며, 매일 같이 요리를 하다가 온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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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오르는 여인의 신작
칸 영화제 각본상 수상에 빛나는 셀린 시아마 감독의 화제작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능가할 마스터피스, <쁘띠 마망>이 올 가을 개봉을 확정지으며 센세이션을 예고하였습니다.
셀린 시아마 감독은 2007년 <워터 릴리스>로 데뷔한 이후 <톰보이>, <걸후드>까지 성장 3부작을 완성,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정체성과 욕망을 세밀히 탐구하며 연출가로서의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는데요. 그리고 2019년 연출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제72회 칸영화제에서 첫 공개된 직후 각본상과 퀴어종려상을 수상하며 전세계 평단의 폭발적인 지지를 이끌어냈습니다.
국내에서는 제목이 정해지기 이전부터 '불초상'이라는 제목과 함께 큰 화제가 되었는데요. 부산국제영화제 상영 당시부터 뛰어난 작품성에 대한 입소문이 더해지며 다양성 영화로는 이례적인 15만 명이라는 관객을 동원하며, 이후 정식 개봉된 적 없는 셀린 시아마 감독의 전작들이 모두 개봉되는 진풍경을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국내를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가장 주목해야 할 시네아스트(Cineaste)로 자리매김한 셀린 시아마 감독의 신작 <쁘띠 마망>은 지난 3월 제71회 베를린국제영화제를 통해 처음 공개되었는데요. <쁘띠 마망>은 8살 소녀 '넬리'가 외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잠시 머물게 된 엄마의 고향집에서, 동갑내기 친구 '마리옹'을 만나게 되면서 벌어지는 마법 같은 시간을 그린 작품입니다. 영화제 공개 직후 "완벽한 영화, 베를린에서 발견한 보석"(The Guardian), "영화제 최고의 작품"(Otroscines.com) 등의 호평이 이어지며 로튼토마토 신선도 지수 100%, IMDb 메타스코어 93점을 유지며, 전작을 능가하는 마스터피스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특히 셀린 시아마 감독의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라 불리며, 그가 가진 섬세한 연출력이 극대화된 것은 물론, 보다 넓어진 세계관이 전 세대를 아우를 것으로 예상되며 올해를 장식할 최고의 아트버스터로 자리매김할 것을 예고하였습니다.
한편 개봉 소식과 함께 공개된 런칭 포스터는 팬들을 매료시킨 셀린 시아마 감독의 작품들을 상기시키며 , 신작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는데요. '젠더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데뷔작 <톰보이>부터 퀴어 로맨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까지 착실히 세계관을 넓혀 온 셀린 시아마가 신작 <쁘띠 마망>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풀어갈지 그 귀추가 주목됩니다.
씨네랩 에디터 Camm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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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가디슈> - '이념과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본 그들의 탈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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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가디슈 (Escape from Mogadishu, 2021)
개봉일 : 2021.07.28
감독 : 류승완
출연 : 김윤석, 조인성, 허준호, 구교환, 김소진, 정만식, 김재화, 박경혜
'이념과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본 그들의 탈출기'
7월 28일 개봉 이후로 2주 동안 굳건히 박스오피스 1위 자리를 지키며 꾸준한 흥행을 이어가고 있는 영화 <모가디슈>. 코로나로 인해 어려운 상황임에도 개봉 7일차에 100만 관객을, 글을 쓰고 있는 날짜 기준(2021.08.10)으로는 178만 관객을 동원한 이 영화의 매력은 무엇일까.
개인적으로 <모가디슈>는 몸집이 크고 화려하지만 상당히 인간적인 영화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박력 넘치는 카 체이싱 장면, 쉴 새 없이 고막을 강타하는 총소리, 실감 나는 로케이션과 화려한 배우진, 전작 <군함도>에서 논란이 있긴 했지만 여러 작품을 통해 능력을 인정받은 류승완 감독까지. 당연히 시선이 갈만한 관람 포인트들에 약간의 전우애와 인류애 같은 것을 더한 게 바로 이 영화의 색인 것 같다.
1991년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에서 독재와 탄압에 저항하는 내전이 일어난 날의 기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의 주인공은 UN 가입을 위해 노력하던 그때의 대한민국과 북한 대사관 직원, 그 가족들이다. 이들은 남한과 북한이라는 선명한 선을 중심으로 서로 다른 이념 아래 자라온 사람들이다. 두 나라 모두 UN 가입을 위해 소말리아 정치인들에게 열심히 손바닥을 비비고 서로를 견제하고 있을 때, 갑작스레 발생한 내전은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을 한곳으로 모이게 만든다. 교육받은 이념이 머리에 자리 잡기 이전, 본능에 새겨진 절대적인 목표 ‘생존’을 위해서 말이다. 탈출과 생존을 하나의 목표로 정하고 정치적 이념과 국가의 구분, 계산을 모두 내려놓으니 이들은 결국 비슷한 사람이었다. 생과 사를 함께 오간 동료들과 믿음을 나누고 그와의 이별에 아쉬움을 느끼는, 그런 감정이 있는 사람 말이다.
<모가디슈>는 전쟁의 한복판에 서서 박진감 넘치는 액션 장면을 보여주기보단 인물들의 감정과 시선, 모가디슈에 일어난 내전의 시발점에 집중하는 연출을 보여준다. 영화는 독재와 탄압에 지쳐 내전이 일어난 소말리아의 모습을 통해 우리 국민들이 겪었던 아픈 기억을 상기시키기도 하고, 빵야 빵야-으아악! 하며 장난감 총을 들고 놀아야 할 아이들이 진짜 총을 들고 웃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며 전쟁의 참혹함을 표현하기도 한다. 그리고 한 나라의 대사임에도 우스울 만큼 빠르게 외면당하는 한신성 대사관을 보여주며 그 시절 힘이 없었던 우리나라가 겪어야만 했던 설움을 은근히 내비치기도 한다.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다면 정치적으로 비칠 수도 있는 주제들을 적당한 선을 지키며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이 표현해낸 연출이 참 좋았다.
영화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롱테이크 촬영기법이 극의 몰입도를 높이고, 그 사이에 껴 넣은 작은 감동 포인트들이 가슴 뭉클하게 다가온다. 슬픈 음악을 넣어놓고 "여기서 울어라!" 자리를 펴는 게 아닌 소소하게 쌓아 올린 공통점과 서로의 눈을 바라보는 순간들이 만들어낸 자연스러운 힘이 마음을 끌어당긴다. 영화는 순식간에 나를 그 긴박함 속에 끌어당기고 마지막쯤엔 긴장감을 탁 풀어내며 압축돼있던 감정을 마음껏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한다. 박진감과 인간미를 함께 갖춘 <모가디슈>의 매력이 궁금하다면 이 영화의 흥행 열풍에 함께 해보시길 추천한다.
모가디슈 시놉시스
내전으로 고립된 낯선 도시, 모가디슈
지금부터 우리의 목표는 오로지 생존이다!
대한민국이 UN 가입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시기
1991년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에서는 일촉즉발의 내전이 일어난다.
통신마저 끊긴 그곳에 고립된 대한민국 대사관의 직원과 가족들은 총알과 포탄이 빗발치는 가운데, 살아남기 위해 하루하루를 버텨낸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북한 대사관의 일행들이 도움을 요청하며 문을 두드리는데…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한신성 대사관(이하 한 대사관)은 여러 경쟁을 이겨내고 소말리아의 한국 대사관 자리를 차지한다. 등장인물 들의 말을 따르면 소말리아는 '(우리 사람들이)6명만 남은', '언제든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나라'이지만 그는 자신의 자리와 명예를 지키기 위해 꿋꿋하게 버틴다. 북한의 림용수 대사관(이하 임 대사관)또한 태준기 참사관과 함께 조국의 득을 위해 일하고 있다. 대사관답지 않게 작고 소박한, 커다란 선풍기 하나 없아 손부채질과 조악한 선풍기로 버텨야 하는 대사관 안에서 그들은 각자 나라의 이득을 위해 머리를 굴린다.
여느 때와 같이 '저 나라 대사관이 어떤 로비질을 하는가-'하고 견제하고 있던 오후, 소말리아에 내전이 발발한다. 옅은 카키 베이지 빛과 하늘색 정장을 입은 한 대사관, 강 참사관과 연한 네이비, 진한 카키 계열의 정장을 입은 임 대사관과 태 참사관이 갑자기 발생한 폭동에 놀라 뒤로 물러서는 이 장면에선 인물들이 남 / 북의 구분대로 정렬되는 게 아닌, 자신의 의상 색과 비슷한 대립국 인물의 옆에 서며 남과 북의 구분이 흐트러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며 생각했다. '이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함께 구분 없이 섞이겠구나.'
어제까지만 해도 서로를 견제하며 기사를 내고, 더 먼저 로비를 하기 위해 눈치싸움을 하던 인물들이 대한민국 대사관에 모인다. 오랜 독재로 인해 쌓여버린 독을 뿜어내고 있는 반군들에게 당한 북한 대사관 사람들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대한민국 대사관에 온 것이다. 거리엔 분노와 광기가 가득하다. 대한민국 대사관에선 "우리는 친구가 되기 위해 왔습니다. 친구 같은 가족, 가족 같은 친구.."와 같은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지만 눈에 보이는 건 평화, 친구와는 거리가 먼 폭력뿐이다. 국가 간의 평화를 위해 오갔던 돈은 독재를 도왔고 부패한 정부와 분노한 국민이 대립한다. 평화를 위해 오간 돈이 그 나라의 국민을 괴롭게 만들다니. 아이러니하다.
“지금부터 우리 투쟁 목표는 생존이다.”
한 대사관은 북한 대사관과 사람들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가장 가깝지만 가장 위험한 적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을 한 집에 들이다니.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오지만 당장 눈앞에 있는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이 걱정보다 앞서 한 대사관과 가족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2배로 늘어난 인원수, 좁아진 식탁과 부딪히는 젓가락. 평생 한솥밥을 먹을 일 없는 적이라고 생각했는데, 불신을 잠시 접어두고 함께 앉아보니 그들은 살인 병기도 반역자도 아닌, 그냥 같은 사람이었다. 조국도, 수교국과도 당장 연락되지 않는 고립된 상황에서 어쩌다 식구가 되어버린 이들은 서로를 의지하고 의기투합하게 된다. 함께 밥을 먹는 행위는 참 마법 같은 효과를 발휘한다. 같은 밥을 먹는 식구가 되는 것만큼 끈끈하고 질긴 사이도 없는 것 같고, 함께 밥을 먹는 것만으로도 그들 사이의 감정을 바로 공감할 수 있게 되다니. 역시 한국인은 밥인 건가.
"같이 살 방법이 있는데, 해볼 건 다 해봐야지."
우린 이태리, 너넨 이집트. 살 사람은 살자고 다짐했지만 한 대사관과 강 참사관은 북한 대사관 사람들을 외면하지 못한다. 고립된 상황이 얼마나 두려운지, 이곳을 빠져나갈 기회가 얼마나 절실하게 느껴지는지. 같은 상황을 해쳐온 그들의 마음이 어떨지 알고 있기 때문일까.
이태리 대사관에서 구조선 소식을 기다릴 때, 한 대사관이 강 참사관에게 묻는다. "(북한 사람들)내쳤어야 했는데, 그치?" 강 참사관은 이렇다 할 대답을 하지 않는다. 강 참사관은 태 참사관과 대립각을 세우며 북한 사람들을 같이 살아나가야 할 동료가 아닌 정치적인 의미의 복덩이라고 인식하는 모습을 보여줬는데, 이 침묵은 그의 마음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단번에 설명해 주는 역할을 한다.
마지막 기회를 잡은 인물들은 버스를 타고 모가디슈를 탈출한다. 버스에 앉아 신기함과 두려움으로 가득한 눈을 빛내고 있는 우리 아이들과 거리에서 총을 들고 서있는 소말리아의 아이들. 영화는 마지막까지 이 씁쓸한 풍경을 놓치지 않고 복기한다. 북한 대사관 사람들이 대한민국 대사관으로 향하던 길에 만난 소말리아 아이들이 사람을 향해 총을 들이대며 장난을 치는 장면이 있다. 그 순간 북한의 아이들은 소말리아 아이들에게 맞춰 으악-하면서 쓰러지는 시늉을 하고 소말리아 아이들은 그를 보며 웃는다. 우리 아이들과 다르지 않게 총을 쏘고 쓰러지는 시늉을 하며 웃을 수 있는 소말리아의 아이들의 손에 진짜 총을 쥐게 하고 그들을 거리로 내몰아낸 현실의 맛이 참으로 씁쓸하다.
더불어 다른 이념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서로를 바라볼 수 없었던 우리 아이들의 모습도 참 인상 깊었다. 북한 대사관 사람들이 위험을 피해 대한민국 대사관에 들어갈 때, 북한 대사관의 어른들은 아이들의 눈을 가린다. 북한의 아이들은 화려하게 진열된 88올림픽의 기록과 대한민국의 모습을 볼 수 없었고, 탈출에 성공한 후 비행기에서 내려 각자의 길로 갈라지는 순간엔 생사고락을 함께한 정이 든 친구와 인사를 나눌 수도 눈을 맞출 수도 없었다. 같은 길을 걸을 수 있고, 비슷한 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뚜렷하게 갈라진 두 갈래 길로 걸어가게 만든 하나의 다름이 가진 힘이 이렇게 강력하다. 하지만 잠시나마 그걸 뛰어넘은 우정과 인류애가 묘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생존이란 본능 앞에, 결국은 같은 사람이란 이해 아래에서 힘을 합친 인물들의 우정이 아름답고 결국엔 조용히 이별할 수밖에 없는 결말이 처연하다.
영화를 보면서 등장인물들과 함께 달리는 느낌이었다. 함께 뛰고 호흡하고 이해했다. 마지막에 닿아서는 함께 탄식했고, 여러 감정을 조금씩 깎아낸듯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특히 태 참사관이 유명을 달리하는 장면을 볼 땐 바짝 올랐던 긴장이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공격적이고 예민한 모습을 보이며 극의 긴장감을 높이던 인물이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조용히 사라지는 순간, 그게 참 마음 아팠다. 무거운 책임감으로 이뤄낸 탈출과 생존이라는 결과물 앞에서 함께 안도의 한숨을 내쉬지 못한 그가 못내 안타까웠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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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너져 내린 서울 드림(dream)과 영원한 이방인
이 글은 씨네랩 크리에이터로 초청 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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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나오면 개고생'이라는 말이 있다. 문자 그대로 안락한 보금자리를 벗어나면 고생을 면치 못한다는 소리다. 잠깐의 외출도 그럴진대 평생을 지내오던 고향을 떠났을 때는 오죽할까. 고향을 떠나 새로운 터전에서 삶을 꾸려나가기 시작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고향을 그리게 되는 것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타향살이는 본질적으로 사람을 고독하게 만든다. 새로운 환경에서 뿌리 내린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개인이 물리적으로 그곳으로 이동한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이미 존재해 온 사람들과 그들이 꾸려나간 사회에 적응하고 받아들여지는 것을 뜻하는데, 그것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이주민은 숱한 '문화 충격'을 감내해야 하며, 대개 '박힌 돌들'은 '굴러들어온 돌'들에게 그리 살갑지 못한 경우가 많으므로 '굴러 들어온 돌'인 스스로를 어떻게든 '박힌 돌' 중 하나로 신분 상승 시키기 위해 수 없이 스스로에게 정을 내리쳐야만 한다. 그것이 이주민이 감내해야만하는 외롭고도 고된 통과의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통과의례는 타향살이를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뼈아픈 과정 중 하나일 것이다. 필자만 하더라도 20대 중후반에 지방에서 서울로 상경해 '서울살이'를 해 왔는지라 이런 이야기가 남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국내에서의 이주도 이럴진대, 하물며 국경 너머로 이주한 사람들의 사정은 어떨까? 그것도 고향으로 돌아갈 기약조차 없는사람들의 이야기라면?
자, 여기, 20대 탈북민 한영의 이야기가 있다.
1. 20대 탈북민 한영의 실패한 서울 드림
동생과 함께 북한을 떠나 온 한영은 어떻게든 서울에 안착해서 살아가고 싶은 20대 청년이다. 더 나은 삶을 위해 국경 너머로 온 그는 가족과 함께 남한땅에 성공적으로 정착하고 싶다. 뼈 빠지게 공부해 관광 안내사 자격증도 따고, 어찌저찌 취직도 했다. 이제 꿈 같은 '서울라이프'가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친구 왈, 한국은 '인맥빨'이라고 했던가. 이렇다 할 인맥 하나 없는 한영에게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제 밥그릇을 빼앗을지도 모를' 낯선 이에게 살갑게 구는 이는 흔치 않으며 설령 그런 척을 한다고 한들 그를 온전히 '내 사람'으로 받아들일 사람은 더더욱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영은 더욱 고군분투한다. 불합리와 부조리를 받아들이는 굴복과 순응, 포기의 과정을 숱하게 견뎌내면서.
한영의 숱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러 해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이방인이다. 말씨와 행동거지를 남한 사람처럼 바꾼다고 한들 그의 등 뒤에는 '탈북민'이라는 꼬리표가 언제나 뒤따른다. 국적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는데 어쩐지 받는 취급은 이도저도 아니다. 면접처에서는 '탈북민을 함부러 믿기는 좀 그렇다'는 말이 되돌아오고, 혹시라도 문제라도 일으켰다치면 '이래서 탈북민들을 고용하면 안 된다'는 폭언이 쏟아진다. 이 삭막하고 박터지는 서울 땅에서 한영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은 영원한 2등 시민 자리를 면치 못한다.
그리하여 한영의 '서울살이'는 더욱 고달파진다. 더 나은 삶을 위해 떠나 온 남한 땅은 외롭고 고되다. 돈은 좀 벌지언정 그의 곁에는 함께해 줄 이가 드물다. 어머니는 휴전선 너머에 있고 비슷한 처지로 방황하던 동생은 연락두절, 아끼던 친구마저 멀리 떠나버린 그때, 한영은 온전히 고독해진다. 만리타향 서울 땅, 아는 이 하나 없어졌을 때 그는 더는 타향살이를 할 자신이 없어진다. 그곳에서 그는 없는 사람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사라진다. 익명의 사람들 사이로.
2. 서울을 살아가는 어느 소수자들의 삶
서울의 삶은 바쁘고 화려하다. 미국에서는 로스앤젤러스가 '라라랜드'였다면 한국에서는 서울이 그런 역할을 하는 셈이다. 잘만 하면 그럴싸한 성공을 거두고 그럴싸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들 하던데-... 글쎄, 정말로 그런 깔끔하고 보기 좋은 삶을 사는 사람도 물론 있겠지만 서울에 그런 사람들'만'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실상은, 극 중 한영이나 정미, 리샤오와 같은 이주/이민자, 혹은 실적에 따라 수입이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었다 하는 관광안내사인 청아의 사례처럼 그렇지 않은 삶들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체로 후자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눈부신 서울의 광채의 이면에서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느라 이렇다할 존재감을 뽐낼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혹은 그럴 기회가 주어지지조차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사유야 어찌되었든 간에, 분명한 것은 이러한 삶들은 좀처럼 조명되지 않고 지나치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20대 여성 탈북민인 한영은 이러한 소수자들의 삶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기존 사회에 어떻게든 발을 디디고자 하는 젊은 사회 초년생이자, 낯선 타지 생활에 적응해야만 하는 이주민이고, 그와 동시에 이 가부장적인 대한민국 땅에서 상대적 약자로 살아가는 여성이기도 하다. 그런 그의 '실패한 서울 적응기'는 어쩐지 남 일 같지 않다. 그는 어떤 면에서든지 간에 관객 중 누군가와 닮아있을 것이므로. 이것이 이 영화가 우리 사회의 소수자들을 조명하는 방식이 아닐까 한다. 영화는 그의 삶을 보여줌으로써 한국 사회가 미처 간과한 어느 삶의 존재성을 밝히고, 그러한 삶에 대한 건조한 위로를 건넨다. '이런 삶도 여기에 있다'는 것을 밝혀내는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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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극장판 포켓몬스터DP : 기리티나와 하늘의 꽃다발 쉐이미> 1차 예고편
끝나지 않은 전설의 포켓몬들의 배틀로
위험에 빠진 반전 세계와 현실 세계를 구하기 위해
감사포켓몬 ‘쉐이미’와 ‘지우’, ‘피카츄’가 나서면서 시작되는 모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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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이세계 삼촌> 공식 예고편
《이세계 삼촌》, 7월 일본에서 넷플릭스 스트리밍 시작. 전 세계 공개 결정! 2017년 가을...... 열일곱 살 때 트럭에 치인 뒤로 17년간 쭉 혼수상태였던 삼촌이 눈을 떴다. 그리고 병실을 찾은 조카 타카후미가 만난 것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대며 자신이 이세계 '그란바하마르'에서 돌아왔다는 삼촌이었다. ......그렇다, 삼촌은 머리가 이상해진 게 분명했다. 할 말을 잃은 타카후미. 하지만 삼촌은 마법을 사용해 이세계에 있었다는 증거를 보여 주고, 타카후미는 그런 삼촌의 능력을 활용해 돈을 벌기로 결심한다. 도움을 청할 다른 친척도 없는 처지라, 삼촌을 한집에 받아들이고 함께 살기 시작한다. 타카후미는 삼촌과 함께 살면서 삼촌의 이세계 모험은 물론 세가 게임에 대한 끝없는 사랑에 대해 알게 된다. 고독하고 가혹했던 삼촌의 지난 세월을 들을 때면 내심 즐거워하면서도 마음 아파하고. 이제, 세대가 다른 이 두 남자가 동영상 콘텐츠 제작에 뛰어들고, 평범한 아파트 단지 한구석에서 신감각 이세계 코미디가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