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2025-01-09 13:57:28
경력자의 오지랖
넷플릭스 [오징어게임 2] 리뷰-1편
이 글은 넷플릭스 [오징어게임 2]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진출처:맥스무비
분명 처음에는 괜찮았다.
한국의 조커 탄생이라 불러도 전혀 모자람이 없는 딱지맨(공유)의 탄생을 지켜보는 내내 소름이 오소소 돋는 팔을 쓸어내릴 때까지는. 비장하면서도 패배감에 물들어 어딘가 입꼬리가 축 내려간 채 죽지 못해 사는 것만 같은 기훈(이정재)을 볼 때까지만 해도.
사실 시즌1에서 그다지 이 시리즈의 재미를 느끼지 못한 시청자였기에. 이번 시즌에선 오히려 재미를 찾을 수도 있겠다는 일말의 희망마저도 느낄 수 있을 만큼. 이 글로벌 오징어의(?) 오프닝은 장대하면서도 짜릿했다.
그러나 애초에 이 시즌 2는 가장 큰 패착을 오프닝부터 모조리 보여주고 시작한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그것이 주인공인 기훈의 존재 자체라는 것과. 그가 아예 시즌 1과는 완전히 다른, 철이 든 데다 돈까지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는데 있다.
사진출처:한겨레
오징어 게임의 본질(?)은 몸뚱이 밖에는 담보 잡을 것이 없는 처지의 사람들을 데려다가 그것을 돈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생기는 인간성과 상품성의 대립. 드러나는 인간들의 욕망과 도덕사이에서의 혼돈. 그리고 과연 누가 진짜 나쁜 놈일까. 나는 저 상황에서 저러지 않을 수 있을까.라는 물음을 던져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기훈의 환골탈태(?)로 인해 이 모든 갈등은, 혹은 갈등에서 오는 재미는 최소화될 수밖에 없다. 기훈이 아무리 봐도 주인공 버프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 첫 게임(지가 제일 많이 움직임. 차라리 뒤돌아 있었으면 이 정도의 짜증은 안 났을 것.)에서 예상보다 더 많은 사람을 생존케 함으로 인해. 주최 측은 다음단계로 갈수록 좀 더 어렵거나. 팀으로 사살이 가능한 게임을 고안해 내야만 한다.
이제 시즌제 드라마가 일상이 되어버린 지금. 듣자마자 지긋지긋하면서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세계관 확장에 따라. 이번 시리즈에서는 당연히 많은 등장인물이 등장하고. 이들이 가진 이야기를 풀어내기 바쁘다. 이로 인해 갈등이 쌓이기보다 각자의 말을 들어주느라 혼돈의 시간들을 보내느라 회차를 낭비한다.
등장인물이 많아짐에 따라 생기는 또 하나의 문제점은. 이미 갈등 자체가 줄어들어버린 데다 갈등 자체가 크게 두 팀으로 나뉘어 버린다는 데 있다. 돈을 벌 것이냐. 아니면 살아 나갈 것이냐.라는 이분법적인 투표가 매 라운드마다 존재하기 때문에, 안 그래도 그저 일확천금 외엔 별 목적도 없어 보이는 인물들이 더 가벼워져 보인다. 그러니 매번 투표마다 다들 내뱉는 이번 라운드 뒤에 나가자.라는 말이 밥 한번 먹자는 말보다 더 비어보일 수밖에.
사진출처:조선일보
이로 인해 시청자들은 두 가지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첫 번째로는 경력직의 활약으로 인해 시즌1에서 느꼈던 종잡을 수 없는 충격들을 느끼기 힘들어진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쇼킹함을 포기할 수 없었던 제작진이 갈등을 조장하기 위해 투입한 빌런인 타로.. 아.. 아니 아니 타노스의 존재를 견뎌야만 한다는 점이다.
오춘기가 지나버린 기훈덕에 기울어져버린 운동장 위에서(?) 타노스는 말 그대로 정의로움이 어색해 보이는 기훈 마냥 한껏 high 한 상태로 방방 뛰어다닌다. 완벽하게 악한 캐릭터냐 묻는다면 이런 류의 작품에선 언제나 눈만 맑은 광인이 한 다발로 등장하기에 그렇지도 않고. 그렇다고 완벽하게 건방지냐고 묻는다면 차라리 타노스를 믿고 깝죽거리는 남규(노재원)에도 못 미치며, 또 그렇다고 해서 캐릭터 자체가 가진 매력이 있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요"인데 뭘 물어.
타노스는 미쳤다기보다 그냥 동네에 하나쯤은 있다는 덜떨어진 사람정도로 밖엔 보이지 않고. 그 역할마저 제대로 해내지 못한 채 자기에게 딱 맞는 어수선한 최후를 맞이하며 다행히 퇴장한다.
사진출처:경향신문
타노스의 경우 개인 연기의 문제이기도 하겠지만. 더 크게 보았을 때 황동혁 감독의 캐릭터 고용이 좀 납작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거의 모든 캐릭터가 1편에서의 파생이며. 아예 극에서의 역할이 정해져 있다. 특히 용식(양동근) 모자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이 눈물을 뽑겠다는 작정을 하고 투입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런 선택이 그다지 달갑지만은 않다.
더 최악인 것은 시즌1에서부터 지적된 여성 캐릭터의 쓰임이다.
애초에 목적이 너무 뚜렷한 데다 심지어 외모적인 특징마저도 아예 빼다 박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전형적이다 못해 아예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 정도로 변화조차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분명히 시즌2에서 새로 등장하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낯섦은커녕 어디선가 시즌1 때 사망한 새벽이가 등장한다 해도 그러려니 하는 생각마저 들게 만든다.
하던 대로 비슷하게 하면 본전은 치겠지.라는 생각을 했던 것인지. 최선을 다해 생각해 낸 캐릭터의 결과였을지. 나 같은 인간은 절대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 고뇌의 방향이 어쨌든 간에. 감독의 선택은 얄팍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마치면서
2024년의 끝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오랫동안 병상에 계셨기 때문에 다들 "호상"이라며 격려 같은 말을 조용히 말을 건넸지만. 할머니가 떠난 자리에 남아있는 온기라는 게 참으로 힘이 세서 나는 그 온기가 날아갈까 두려워 애써 품에 안고 들여다보지도 못하고 꼭 쥔 채 새해를 맞이했다.
나는 할머니의 맏아들의 장녀였고. 딸이 귀했던 집안(6남 1녀)의 특성 덕에 며느리는 자신의 딸을 한 번 안아보지도 못했다며 너스레를 떨 만큼.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품에서 컸던 큰 손녀였다. 나의 식성도. 나의 취향도. 나의 생김새마저도. 할머니를 닮은 모습에 농담처럼 마을 사람들은 나를 할머니의 숨겨놓은 막내딸이라 부르기도 했었으니까.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와중에도. 큰손녀의 이름만 부르면 눈동자가 다시 사람의 것으로 돌아오곤 했다는 말에. 내 마음속 상실의 구멍에 또다시 세차게 찬 바람이 부는 것이 느껴졌다. 이 바람이 이제는 내가 약해져 있을 때는 더 차갑게 느껴질 때가 자주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번의 상실을 겪었는데도. 익숙해지지 않을 것만 같은 이 아픔은. 내가 온전히 사라져야 더 이상 느끼지 않을 것만 같다가도. 그 경험들 뒤에도 여전히 잘 지내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서 또 지나가겠지.라는 체념 같은 위로를 스스로에게 건네는 날들인 것 같다.
무뎌진 기억을 더듬으며 더 이상의 눈물을 삼키지 않는 날이 조금 더 빨리 오기를 기원할 뿐이다.
[이 글의 TMI]
1. 너무 아파서 병원 갔는데 독감이 아니라니. 병가 쓰게 해 줘요(?)
2. 인간적으로 영하 10도 이하면 재택근무 하자 진짜.
3. 오늘 감자탕 먹을 거다 캬캬햐햐햐햐햐햐
#넷플릭스 #오징어게임2 #OTT #영화리뷰 #munalogi #브런치작가 #네이버영화인플루언서 #이정재 #황동혁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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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 소녀가 자란다
이번 주말 태풍 링링이 왔다.(이 글의 초안은 2019년 9월에 작성 됐다.) 집 안에 틀어박혀 잠옷도 안 갈아입은 채로 커피를 내리고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연주하는 프로코피예프와 창 밖의 바람 소리를 동시에 들었다. 몇년에 한번 꼴로 유난히 많은 피해를 남기는 이 9월 태풍이 지나가고 나면 얼마나 청명하고 맑은 가을 하늘이 되어있을지 상상한다.
가을은 아무리 생각해도 여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관문 같다. 매년 느끼지만 겨울은 깔끔히 사라지지 않고 3월이고 4월이 될 때까지 차가운 바람으로 길게 꼬리를 드리우며 물러가는데, 여름은 하룻밤을 기점으로 언제 그런 계절이 있었냐는 듯 자취를 감춰 버린다. 그래서 어느 날 현관문을 열었을 때 갑자기 차가운 바람이 살갗을 때리면 허망한 기분마저 든다. 더위를 피하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쓰며 한 분기를 살다가 찬바람이 불기 시작해야 갑자기 그 계절을 그리워하며, 여름이 어떤 의미였는지 차분히 돌아보게 된다.
사람들은 저마다 계절에 대해 총체적 감각을 버무린 하나의 이미지로 기억한다. 나에게 몇년 전부터 여름은 영화 <콜럼버스> 속 계절이었는데, 오늘은 거기에 <벌새>까지 더해졌다.
<콜럼버스> 속 케이시는 고향인 콜럼버스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떠나고 싶어한다. 콜럼버스의 모더니즘 건축물들을 사랑하고 아직은 자신이 엄마를 돌봐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 도시에서의 삶이 얽매여 있는 것인지 자신이 선택한 것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는다. 답답하기도 하고 괜찮기도 한 일상 속에서 그녀는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 진을 우연히 만나며 새로운 기회를 마주치게 된다. 가족, 현재의 일상, 지나온 삶들과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해 고민하는 두 사람은 푸른 잔디밭과 울창하게 잎사귀를 드리운 나무 아래에서 사리넨의 건축물을 바라본다. <콜럼버스>는 두 주인공 케이시와 진이 각각 선택을 하고 앞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성장 서사인 동시에, 두 사람이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선택을 격려한다는 점에서 버디 무비이기도 하다. 두 동료는 뜨거운 여름의 열기와 쏟아지는 장대비를 머금고 있는 콜럼버스의 녹음 속에서 앞을 향해 나아간다.
<벌새> 속 중2 은희의 여름은 1994년 대치동이 무대다. 은희는 보편적이고 평범한 소녀다. 미도상가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부모님과 언니와 오빠와 대치동의 아파트에 살고 있다. 보편적인 은희의 이야기는 가능한한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묘한 향수와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나는 은희처럼 흰 반팔 블라우스와 체크 치마로 구성된 여름 교복을 입고, 머리는 학칙에 맞춰 단발로 자르고 발목을 덮는 흰 양말과 장식이 없는 검은 구두를 신고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영화에 나온 진선여중과 대청중을 졸업한 친구들과 함께 고등학교를 다녔고,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에는 미취학 아동이어서 기억이 희미하지만 동시에 삼풍 백화점과 세월호라는 사회적 비극의 간접 목격자다.
은희의 구체적인 일상은 그래서 비슷한 시대를 지나온 이들의, 그리고 그 나잇대를 지나온 모두의 성장 이야기다. 영화의 끝에서는 여름이 지나 가을이 오고, 춘추복을 입은 여러 소녀들의 얼굴이 비춰진다. 10대 소녀들에게 세상은 어떤 존재일까. 이해할 수 없고, 폭력적이고, 갑갑하지만 때로는 숨통이 트이는 순간이 있고, 즐겁고 행복하고, 그러다 또 갑자기 비극적이기도 한 세상. 비단 10대 소녀들에게만 그런걸까? 대학생인 영지에게도, 아이를 셋 낳은 숙자에게도, 여전히 세상은 그런 곳이다. 살아남은 우리는 그렇게 복잡한 세상을 응시하며 자라간다.
누군가는 여름을 축제의 계절로 기억할지도 모른다. 여름밤의 낭만이나 해변의 불꽃놀이로 기억할지 모른다. 케이시와 은희처럼, 나에게 여름은 도시의 녹음 속에서 차분하게 주시하는 계절이다. 자신을 주시하고 세상을 주시하는. 뜨거운 햇빛과 숨막히는 수분을 양분삼아 소녀들은 나무처럼 가만히 자라난다. 계절이 바뀌면서 햇빛은 한층 기울고 습도는 사라진다. 갑작스러운 찬바람에 당혹스럽고 허전한 기분이 들면 그제야 알 수 있는 것이다. 여름 사이 우리의 키가 한뼘 자라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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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 홍경이 사랑한 영화
CINE LOVERS CLUB vol.1개인 인스타그램, 지면 인터뷰 등 다양한 매체에서 영화에 대한 깊은 애정을 드러낸 배우 홍경이 사랑한 영화들을 모아보았습니다.
최근 또 다른 소문난 시네필인 장도연 개그우먼과 함께한 웹예능에서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화제 되기도 했죠.
그래서! 그의 영화 취향이 궁금했던 분들을 위해 준비해 보았습니다!
다만, 언급한 영화들이 워낙 많아 다 적지 못해 아쉬웠는데요.언젠가 ‘홍경이 사랑한 영화’ 2편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그럼 타인이 사랑한 영화를 소개하는
’씨네 러버스 클럽‘은 12월에 다시 돌아올게요!
(혹, 사랑한 영화가 궁금해지는 사람이 있다면 댓글로 남겨주세요)
*인터뷰 출처: 노컷뉴스, 씨네21, 얼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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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을 기억하고 삶을 사랑하고 시간을 간직하라
“여자의 일생을 단 하루를 통해서 보여준다.”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영화 <디 아워스>(2002)는 마이클 커닝햄의 동명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소설이든 영화든 모든 이야기의 시작은 한 작가에게서 출발한다. 바로 18세기의 현대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1882~1941)다.
<디 아워스>는 버지니아 울프가 1925년에 발표한 소설 <댈러웨이 부인>의 세계관을 확장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댈러웨이 부인>이 클라리사 댈러웨이가 파티를 준비하는 하루를 그렸다면 <디 아워스>는 다른 시대의 세 여성이 보내는 각기 다른 하루를 보여준다. 다른 공간, 다른 시대를 살고 있지만 세 여성의 삶은 만나고 겹쳐지며 하나의 이야기로 흘러간다. 각자의 하루를 다루고 있지만 사실 한 세기를 보여주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각 여성의 시간은 한 세대로 확장되어 보편성의 범위를 넓힌다.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읽지 않았다면 먼저 소설을 읽은 뒤 영화 <디 아워스>를 보는 것을 추천한다. 영화는 소설을 읽은 이들을 전제로 만들어져서 소설 속 요소들이 영화에 어떻게 녹아있나를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소설이 클라리사 댈러웨이의 '삶'에 조금 더 집중되어 있다면 영화는 버지니아 울프 혹은 리처드의 '죽음'에 더 많은 무게가 실려있기 때문에 다소 무겁게 느껴질 수도 있다.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으신 분들에게 추천한다. 다만 '자살'이라는 키워드에 민감하거나 현재 심정적으로 좋지 않은 분에게는 권하지 않는다.
디 아워스
1923년 영국 리치먼드에서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는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하고 있다. 그는 런던의 거친 생활을 그리워 하지만, 정신병 때문에 한적한 시골에서 요양을 해야 하는 처지다. 언니와 조카들을 맞이할 준비는 고용인에게 맡겨 둔 채 버지니아는 글을 쓰느라 여념이 없다. 1951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로라 브라운(줄리안 무어)은 <댈러웨이 부인>을 읽고 있다. 로라와 어린 아들은 남편 댄의 생일을 맞아 함께 케이크를 만든다. 케이크 만들기를 실패한 로라는 못생긴 케이크를 쓰레기통에 버린다. 이웃에 사는 친구인 키티가 자궁에 문제가 생겨 입원한다는 소식을 듣고 로라는 가슴이 답답해진다. 2001년 뉴욕에 사는 편집자인 클라리사 본(메릴 스트립)은 친구 리처드를 위해 소설 속 댈러웨이 부인처럼 아침부터 축하 파티 준비를 한다. 작가인 리처드는 에이즈로 인해 몸이 매우 쇠약해졌고, 삶을 지속하고자 하는 의지를 잃었다. 그렇지만 클라리사는 그가 살아주었으면 한다.
본문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닮은 듯 다른, 각자의 감옥
로라 브라운은 둘째 아이의 출산을 앞두고 있다. 아빠가 아들의 아침식사도 챙겨주는 모습이 화목한 가정처럼 보인다. 하지만 로라의 미소는 깨질 듯 불안하고, 댄이 보지 않을 때면 무기력하고 우울한 모습을 보인다. 어린 아들은 그런 로라의 눈치를 조심스럽게 살핀다.
누구나 케이크를 굽는 일이 어렵지 않다고 말하지만 로라에게는 쉽지 않다. 댄을 사랑하고 결혼 생활을 함께 하는 것이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로라는 아마 댄을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다. 케이크를 만들고 사랑스러운 아내를 연기하며 살고 있을 뿐이다. 누군가에게는 쉽고 당연한 일이 어떤 이에게는 죽을 만큼 어려운 일이 되기도 한다. 로라는 가정에서 아내와 엄마의 역할이 그러했다.
이웃에 사는 친구인 사교적인 성격의 키티는 아이를 원하지만 자궁에 문제가 있어 입원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키티를 향한 로라의 감정은 아마 사랑일 것이다. 로라는 남자를 사랑하지 않지만, 그들이 힘든 전쟁을 치르고 돌아왔기 때문에 아내, 여성, 가정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말한다. 남자들의 희생에 대한 보답이 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로라의 행복은 어디에도 없다. 로라가 꿈꿔왔던 생활은 댄이 꿈꾸던 생활과 달랐을 것이다. 로라의 삶은 댄의 꿈을 위해 사라져야만 했다.
버지니아는 언제나 글에 몰두해 있어 주방 일에 소홀했다. 고용인들은 그런 버지니아에게 불만이 많다. 버지니아 역시 고용인들이 불편하고 무섭다. 남편인 레너드는 한가하게 산책이나 하는 버지니아가 부럽다고 하지만, 버지니아는 답답한 시골 생활에 숨이 막혀 죽기 직전이다. 분주한 런던의 거친 생활이 그립다. 버지니아는 그가 느끼는 삶과 죽음의 강렬한 대비를 소설에 담아낸다.
"당신을 만족시키는 게 내 유일한 생존 목적 같아"
클라리사는 리처드의 파티를 열어주려 하지만 시상식과 축하 파티는 리처드에게 아무 의미도 없다. 아침이 오는 것, 햇빛을 쬐는 일, 약을 먹는 일, 자부심과 용기를 연기하는 일은 리처드를 비참하게 만들 뿐이다. 자신의 병과 살아남은 몸을 강조하면 할수록 리처드는 죽음에 강하게 이끌린다.병에 걸린 리처드를 수년간 간호한 사람은 클라리사 본이었다. 그는 리처드가 부르는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호칭에 갇혀 버렸다. 댈러웨이 부인이 되어버린 클라리사는 리처드를 떠날 수 없었다. 리처드가 싫어해도 파티를 열어야 했고, 그가 살도록 만들어야 했다. 클라리사는 리처드와 있을 때에만 비로소 살아있는 기분을 느꼈다.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 속 첫 문장처럼 세 가정의 하루는 꽃과 함께 시작된다. 꽃은 집에 활기를 불어넣지만, 화병에 꽂힌 아름다운 모습은 오래가지 못한다. 좁은 화병에서 며칠, 운이 좋다면 그보다 조금 더 살다 시들어 버린다. 그 유한한 활기와 생명력은 인간의 그것과 흡사하다. 클라리사는 인간의 꺼져가는 생명력을 꽃이 대신 채워주기라도 할 것처럼 리처드의 방을 꽃으로 채운다.
버지니아는 레너드를 위해 살았고, 로라는 가정을 위해 살았고, 리처드는 클라리사를 위해 살았다. '서로를 위해 산다'는 말은 서로를 에워싸는 감옥이 되기도 한다.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빛나는 삶
영화의 가장 첫 장면은 1941년 영국에서 시작된다. 버지니아 울프의 병세는 점점 더 악화되었고, 결국 최선의 선택을 한다. 레너드는 좋은 남편이었고, 이들은 많은 역경을 넘어온 끈끈한 부부이자 동료였다. 버지니아는 자신 때문에 레너드의 삶이 힘들어지는 것을 더 이상 원치 않았다. 그는 레너드에게 편지를 남긴 채 강가로 향한다. 편지에 죽음을 선택하는 이유 같은 것은 적혀 있지 않았다. 얼마나 사랑했고, 행복했었는지만 남아 있을 뿐이다. 버지니아의 죽음과 편지는 영화의 처음과 끝에서 영화의 메시지를 강조한다.로라가 자살을 결심하고 이웃에게 리처드를 맡겼을 때 아이는 알았다. 어쩌면 그 이전부터 짐작하고 있던 진실은 엄마가 자신을 떠나리라는 것이다. 로라는 결국 삶을 선택했다. 하지만 가족을 떠났다. 삶을 선택한 로라와 죽음을 택한 아들 리처드는 더욱 강렬한 대조를 이룬다.
영화의 리처드는 소설 <댈러웨이 부인> 속 셉티머스와 가장 흡사한 인물이다. 전쟁의 후유증과 의사들에게 고통받던 그는 아내 레치아 앞에서 창문으로 몸을 던진다. 리처드가 클라리사 앞에서 창문으로 몸을 던졌듯이 말이다. 자신이 느끼는 모든 감상을 쓰려는 작가로서 리처드의 모습은 버지니아와 비슷하다.
반면 클라리사는 삶을 사랑한다. 세 명의 여성 중 소설 속 클라리사 댈러웨이와 가장 비슷한 인물이다. 리처드의 죽음은 벅차다. 그렇지만 곁에 있어 주는 샐리와 딸이 있어 버틸 수 있다. 죽음으로 인해 과거의 행복했던 순간들은 선명해진다.
로라와 클라리사는 어떻게든 삶을 선택하기로 마음먹은 인물들이다. 로라는 엄마이기를 포기했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감내해야 할 선택으로 받아들인다. 누구도 용서해 주지 않겠지만 로라는 삶을 선택했다. 리처드의 죽음은 로라에게 죄책감과 책임감이다. 클라리사와는 다른 방식으로 삶을 선명하게 느끼게 한다.
버지니아의 죽음으로 시작해 인물들의 삶을 관통하고 다시 그 모든 이야기의 시작인 작가의 죽음으로 끝나는 영화의 구성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라고. 죽음 속에서 빛나는 삶의 소중함을 느끼라고 말한다.
결국 1800년 대 여성의 이야기는 2000년대 여성에게도 전해져 함께 흘러간다. 이는 <댈러웨이 부인>이 가진 메시지가 가진 보편성을 증명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시대가 지나도 빛이 바래지지 않는 이야기를 만들었다. 기나긴 소설의 생명력은 짧디 짧은 작가의 삶과도 대비된다. 버지니아는 죽었지만 <댈러웨이 부인>은 살아남았다.
영화 속 레너드가 '왜 누가 죽어야 하느냐'라고 묻자 버지니아는 '죽은 이들로 인해 살아남은 이들이 삶의 소중함을 깨닫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죽음을 맞이하는 건 시인이자 선지자'라고 대답한다. 위대한 시인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그의 빛나는 메시지는 앞으로 100년은 더 남아 많은 이들의 삶의 소중함을 일깨워 줄 것이다. 클라리사이자 리처드이자 셉티머스이자 로라인 버지니아 울프는 삶을 사랑했다. 삶을 있는 그대로 사랑한 뒤 영원히 그 시간을 간직했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코두 작가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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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CFF 데일리] 1시간을 가득 채운 배우의 힘
Information
1. 빨래 Laundry
Korea | 2020 | 27min | G
Director
김혜진 Kim Hea-Jin
Cast
문승아
Synopsis
가족사진을 찍는 날, 옷을 한 번에 넣고 돌리는 가족들의 습관 때문에 혜수의 와이셔츠만 줄어들게 된다. 무심한 가족들에게 혜수는 작은 복수를 결심한다.
2. 새벽 바다 노을 The Golden Hour
Korea | 2021 | 23min | G
Director
김영 Kim Young
Cast
문승아 유가은 김지환 최자인 최묘견 오윤수
Synopsis
노을은 엄마 그리고 할머니를 따라 사촌 언니 새벽의 집에 놀러 가지만 어른들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다. 새벽의 팔찌에만 관심을 보이던 노을은 어른들 탓에 새벽이 상처받고 있음을 깨닫는다.
Review
제11회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에서는 어린이 배우가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영화를 많이 선보인다. 그중 한 배우를 선정해 특별전을 기획했는데 그것이 바로 ‘어린이 배우 특별전: 문승아’이다. 그녀의 연기력을 엿볼 수 있는 2편의 장편과 2편의 단편으로 프로그램이 준비되었는데 방문했던 9월 15일에는 단편인 빨래’와 ‘새벽 바다 노을’이 1시간 동안 연달아 상영되었다.
그녀가 바랐던 가족사진이란_영화 ‘빨래’
가족이 세탁소를 하는 혜수는 학교에서 가족사진을 찍어오라는 가정통신문을 가지고 온다. 세탁소에 붙어있는 가족사진은 그녀가 태어나기 전 엄마, 아빠, 오빠가 찍은 사진뿐 사진관에서 제대로 찍은 사진은 없다. 가족사진을 찍어야 하는 숙제를 잘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가족 모두가 흰 셔츠를 입고 화목하게 찍는 사진을 누구보다 기대한 그녀는 사진을 찍는 날만 기다린다. 가족사진을 찍는 날, 옷 구분 없이 세탁기에 한꺼번에 옷을 넣고 돌리는 가족의 무심함으로 그녀의 와이셔츠는 줄어들고 만다. 엄마와 아빠에게 물었지만, 세탁소 일로 바쁜 그들은 답변을 그르치기 바빴고 PC방에 있는 그녀의 오빠 또한 오히려 화를 내며 모르쇠로 일관한다. 그래서 그녀는 가족들의 와이셔츠를 자신과 같이 줄여버리기로 귀여운 복수를 실행한다.
<빨래>는 27분의 러닝타임 내내 카메라는 혜수의 시선을 따라간다. 가족사진을 찍는다는 설렘, 작아진 와이셔츠로 인한 속상함, 그녀가 줄인 와이셔츠를 입고 불편해하는 가족의 모습에 대한 통쾌함 등 혜수가 느꼈을 감정들을 솔직하고 가감 없이 영화는 담아낸다. 결국 가족들은 작아진 와이셔츠를 견디지 못하고 사진관에 마련된 옷으로 갈아입는데 이에 혜수는 사진관을 뛰쳐나간다. 방황하던 그녀는 와이셔츠가 아닌 다른 옷을 가지고 사진관으로 가지만 이미 사진관은 문이 닫혀있었고 결국 그녀는 집으로 돌아온다. 영화는 그녀는 작아진 와이셔츠를 세탁기에 넣고 돌아가는 세탁기를 바라보며 끝이 난다.
가족 모두가 와이셔츠를 입는 그런 단순함으로 인해 그녀가 그런 복수를 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가족 모두가 함께 같은 옷을 입고 웃는 모습으로 한 장의 추억을 남기는 것이 그녀가 바란 모두였을 텐데. 왜 그들은 그녀의 작은 마음을 몰라줬던 것일까? 이런 혜수의 속상함, 허탈함 등이 문수아 배우의 연기력으로 여실히 느껴져 더욱더 영화 속에 빠져들었다. 사진관에 마련된 가족사진을 보면 모두가 흰 셔츠를 입고 서로를 마주 보거나 카메라를 응시하며 미소를 짓는다. 흰 셔츠가 주는 통합은 단순히 사진의 깔끔함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닌 모두가 같은 색깔을 입음으로써 ‘가족’이라는 단어에 의미를 부여한다. 혜수의 엄마가, 아빠가, 그리고 오빠가 그녀의 이런 마음을 알았다면 이날이 혜수에게 평생 기억하고 싶은 추억으로 남아있지 않았겠냐는 생각이 든다.
웃기에도 바쁜 그들을 울 게 만드는 것은_영화 ‘새벽 바다 노을’
사촌의 집으로 엄마와 할머니를 따라가는 노을은 그저 사촌 언니인 ‘새벽’에게 자신이 만든 팔찌를 줄 생각엔 마냥 기쁘다. 새벽을 만나 기쁜 노을이지만 새벽은 어딘가 불편한 내색을 보인다. 새벽과 집에서 놀고 싶었지만, 밖으로 나가서 놀자고 하는 그녀로 인해 새벽, 바다, 노을은 놀이터에서 함께 놀게 된다. 계속 밖에서 놀자는 새벽, 알고 보니 새벽의 새엄마와 할머니, 노을의 엄마가 싸우는 걸 지켜보는 것이, 그들의 고함을 듣는 것이 힘들었기에 그녀는 그 상황을 피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새벽은 노을에게 노을이 갖고 싶어 했던 비즈 팔찌를 이용해 어른들의 싸움을 멈추고자 제안하고 노을은 고민 끝에 계획을 실행한다. 집으로 돌아와 싸우는 연극을 하는 새벽과 노을. 하지만 어른들의 언성은 사그라지지 않고 오히려 걷잡을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다. 노을은 결국 서럽게 울며 그녀의 엄마와 할머니는 새벽과 바다의 집을 나오게 된다.
새벽, 바다, 노을. 참으로 아름다운 이름이다. 티 없이 맑은 아이들을 표현하기에 순수하게 놀이터에서 함께 놀고 비즈 팔찌를 만들고 행복한 추억으로 가득한 장면들을 담아내기에 적합한 이름이었다. 이렇게 순수한 아이들과 다르게 어른들을 서로를 비난하고 그들의 싸움으로 인해 아이들이 상처받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 한 체 서로를 향해 화살을 겨눈다. 새벽과 노을은 서로를 너무 좋아하고 함께 있음에 행복함을 느끼지만, 어른들의 논리 아래서 함께할 수 없는 존재로 치부되고 만다.
정말 놀랐던 점은 문승아 배우의 연기력이다. 어린 배우이지만 다작과 주인공을 여러번 했기에 기대를 많이 했었다. 아무리 중견배우여도 1시간 남짓의 러닝타임동안 자기 얼굴이 클로즈업되는 작품을 촬영한다면 어색함이 보일 수도 있는 부분인데 그녀는 당당했다. 날것의 느낌을 주며 작품 속 캐릭터에 완전히 녹아드는 느낌을 받았다. 빨래와 새벽 바다 노을은 다른 장르이며 그녀가 맡은 캐릭터 또한 매우 다르다. 연달아 작품이 상영됐기에 어떤 식으로 보일지 매우 궁금했는데 전혀 다른 인물처럼 느껴졌으며 섬세하지만 강렬하고 거침없지만 당당한 그녀의 표현력에 감탄을 자아낼 수밖에 없었다. 자기 연기력에 자신감을 갖고 연기하는 배우만큼 훌륭한 배우는 없다고 본다.
SICFF
WE KID, 우리는 모두 어린이다!
“세상에 수많은 사람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건 바로 ‘어린이’가 아닐까요? 우리는 모두 어린이였기 때문이죠.”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SICFF)는 아이들이 즐길 수 있는 건강한 콘텐츠를 발굴하고, 다음 세대를 위해 다양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습니다.
SICFF를 통해 아이들은 세상을 발견하고, 어른들은 더 나은 미래를 꿈꾸기를 바랍니다.
-제11회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 소개 일부 발췌
제11회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는 2023년 9월 13일부터 9월 20일까지 롯데시네마 은평, 은평문화예술회관, 은평한옥마을 등에서 진행됩니다.
*본 포스팅은 영화 전문 웹매거진 〈씨네랩〉의 프레스로 초청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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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계+인 2부 | 발버둥칠수록 더 빠져드는 총체적 난국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인간 몸속에 가둬진 외계인 죄수 설계자의 탈옥을 막으려다 고려시대에 갇혀버린 ‘이안’(김태리). 우여곡절 끝에 시간의 문을 여는 '신검'을 되찾은 그녀는 '썬더'(김우빈)을 찾아 미래로 돌아가려 한다.
하지만 미래로 가는 길은 멀기만 하다. 과거 이안을 구해준 은인 '무륵'(류준열)은 자기 몸속에서 느껴지는 이상한 존재에 관해 묻기 위해 그녀를 찾는다. 삼각산 신선 ‘흑설’(염정아)과 ‘청운’(조우진)은 무륵 몸속에 요괴가 깃들었다고 의심한다. 신검을 찾아 눈을 고치려는 맹인 도사 ‘능파’(진선규)와 설계자와 함께 미래로 돌아가려는 ‘자장’(김의성)도 이안을 뒤쫓는다.
그 사이 2023년 서울은 '설계자'가 터뜨린 외계물질 '하바' 때문에 혼란에 빠지고, 우연히 외계인의 정체를 확인한 '민개인'(이하늬)은 더 큰 사고를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기 시작한다. 모든 하바가 터지기 48분 전, 드디어 과거로부터 시간의 문이 열리고 세계의 운명은 이안의 손에 떨어진다.
<외계+인 2부>, 뒷심도 부족했다
2022년 여름에 개봉한 <외계+인 1부>는 관객 150만 명을 겨우 넘기는 흥행 성적을 기록했다. 손익분기점이 730만 명이었고, 흥행에 실패한 적 없는 최동훈 감독 작품이었기에 더욱 충격적인 성적표였다. 비평적으로도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 원인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장르, 다른 하나는 이야기였다.
<외계+인 1부>는 무협 판타지와 SF라는 장르를 섞어내려 했다. 하지만 두 장르의 근본적인 특성과 차이를 무시한 채 익숙한 CG로 도배해 버렸다. 결국 낯선 세계관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지도 못했고, 화려한 볼거리도 할리우드 영화를 보는 듯한 기시감을 벗어나지 못했다. 고려시대와 현재를 오가는 이야기도 혼란스러웠다. 두 시간대 사이의 관계가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 자연히 최동훈만의 개성도 좀처럼 자리를 못 찾았다.
이는 1년 반 만에 돌아온 <외계+인 2부>의 과제이기도 했다. 두 문제를 해결하면 반등을 기대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일부 단점은 해결된 듯 보인다. 전편에서 시작된 서사는 설득력 있게 끝맺었다. CG와 액션도 규모에 걸맞은 퀄리티를 자랑한다. 그러나 전편의 평가를 반전시키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개선점은 예상 못한 문제를 유발했고, <외계+인 2부>만의 새로운 문제점도 튀어나왔기 때문.
터널 끝 빛은 찾았다
가장 눈에 띄는 개선점은 편집이다. 전편과 달리 과거와 현재가 보다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주인공이 현재로 넘어가거나 새 캐릭터를 소개하는 대목처럼 이유가 확실할 때만 화면이 전환되기 때문. 그 덕분에 마지막에야 전체 윤곽을 간신히 볼 수 있었던 1부와는 달리, 2부의 전체 내용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1부 줄거리를 요약한 대목도 영리한 선택이다. 전편 내용을 환기하고, 새 관객의 진입 장벽도 낮추는 데 성공했다.
이는 최동훈 감독의 스타일이 살아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도 한다. <외계+인 2부>는 전편에서 미스터리로 남겨둔 이안과 무륵의 인연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이때 두 주인공 몸 외계인의 정체를 활용해 나름의 반전을 선사하고, 긴장감을 고조하는 전개가 꽤 효과적이다. '안옥윤'(전지현)과 미츠코가 쌍둥이라는 사실을 살려 이야기를 비틀었던 전작 <암살>을 연상시킨다.
1부에서 호평받은 액션은 한 층 더 발전했다. 특히 날아다니는 칼을 활용하는 능파 캐릭터 덕분에 액션이 더 육체적이고 과격해졌다. 능력이 확연히 구분되는 캐릭터들이 합을 맞추는 클라이맥스도 과장 보태 <어벤져스>를 보는 듯한 인상을 순간적으로 준다. 다만 아쉬움도 있다. 기대에 비해 액션 스케일이 크지 않고, 괴물과 도사들이 싸우는 모습도 <전우치>에서 본 액션과 유사해서 새롭지는 않다.
빛이 강한 만큼 그림자도 짙다
그런데 편집이 부메랑처럼 되돌아오는 대목도 있다. 전체 스토리를 직관적으로 편하게 이해하도록 얼개를 짜는 과정에서 여러 장면이 잘려나간 듯 보인다. 이처럼 설득력을 더할 분량이 곳곳에서 사라진 결과, 흐름은 급하고 세밀함은 부족하다. 그러다 보니 주인공들이 특정 상황에 처하거나 새로운 사건이 발생했을 때, 관객이 그 여파를 음미할 시간도 충분치 않다.
이안이 무륵의 정체를 깨닫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무륵이 자기를 구해준 소년이었음을 깨달은 이안은 크게 기뻐한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그녀의 표정은 어두워진다. 무륵의 몸속에 외계인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 이에 이안은 무륵을 홀로 남겨두고 떠난다. 이 일련의 과정에는 5분가량의 분량만 배정된다. 생명의 은인과 십수 년 만에 다시 만나고 헤어지는 이야기치고는 지나치게 빠른 전개다.
새 캐릭터인 능파의 묘사도 비슷하다. 자장에게 눈을 잃고 밀본에서 쫓겨난 그는 신검을 찾아 헤맨다. 신검으로 눈을 고친 후 자장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그런데 영화는 그의 과거사를 자장의 수발을 들던 한 노파의 말과 능파의 대사로 가볍게 짚고 넘어가는 데서 그친다. 결국 두 편의 영화를 보고 나서도 등장인물들의 내적 변화는 잘 보이지 않는다. 자연히 그들의 감정선을 따라가기도 쉽지 않다.
여전히 부족한 일관성
이에 더해 <외계+인 2부>는 전체적으로 톤이 불안정하다. 이는 1부와 공유하는 단점이다. 다만 원인은 다르다. 1부는 무협 판타지와 SF라는 장르 간의 부조화가 문제였다. 고려시대를 주 배경으로 삼았고, 가드와 썬더를 제외한 모든 인물이 판타지 세계에 속해 있었다. 그런데 정작 극 중 비중은 가드와 썬더에게 집중됐다. 그렇다고 그들의 SF 이야기가 매력적이지도 않았다. 그렇게 1부는 판타지와 SF 사이에서 부유했다.
2부에서는 다행히도 판타지와 SF의 간극이 작다. 과거와 현재의 연계가 확실해지고, 관객이 세계관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 하지만 이번에는 유머 때문에 전반적인 톤이 흔들린다. 이는 감독의 전작인 <전우치>와의 차이점이다. <전우치>는 유쾌하나 가볍지 않았다. 자유분방한 '전우치(강동원)'의 반대편에서 '화담(김윤식)'과 '천관대사(백윤식)'가 무게를 잡아줬으니까. 덕분에 후반부에 분위기가 무거워져도 어색하지는 않았다.
반면에 <외계+인 2부>는 강박에 사로잡힌 듯하다. 무륵, 민개인, 썬더 모두 관객을 어떻게든 웃기려 한다. 물론 두 신선이 현대에 온 장면처럼 웃음이 터질 때도 있지만, 그보다는 유머에 대한 집착 때문에 잃는 게 더 많다. 당장 톤이 불안정하니 몰입도가 떨어진다. 이는 시작과 동시에 확인할 수 있다. 주막에서 이안은 자기를 쫓는 도사 둘과 싸운다. 이때 상황에 비해 도사 둘이 너무 가볍다. 다른 영화 캐릭터라 해도 안 놀랄 정도다.
영화는 마지막까지 균형을 못 찾는다. 빌런도 무게감을 잡지는 못한다. 자장은 설계자의 부하일 뿐이라 존재감이 약하다. 설계자 역이었던 소지섭도 회상씬에만 등장한다. 그렇다고 CG로 만든, 말 못 하는 외계인에게 역할을 기대할 수도 없다. 자연히 클라이맥스에서는 전 세계를 구해야 한다는 결연함, 비장미가 거의 안 느껴진다. 결국 <외계+인 2부>에는 더 화려해진 <전우치>를 보는 즐거움만 있을 뿐, 큰 감흥이 없다.
캐릭터 교통정리에 실패하다
캐릭터 교통정리에 또 한 번 실패하면서 영화는 더 꼬인다. 원래도 등장인물이 많은데, 여기에 새 캐릭터가 추가된다. 능파와 민개인처럼 1부에서 얼굴만 비췄거나, 등장하지 않은 인물들의 서사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기존 캐릭터의 이야기도 미처 끝맺지 못한 상황이니 영화는 자연히 과부하에 걸릴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외계+인 2부> 곳곳에서는 우연과 억지가 등장한다. 민개인이 경찰 대책 본부에 불쑥 쳐들어가서 억지를 부리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완성도만 깎아 먹은 불필요한 장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장면이 없더라도 그녀의 행적을 이해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기 때문. 비록 1부만큼은 아니어도, 중반부까지는 정신없는 지점이 적지 않은 이유다.
이번에도 최동훈 감독 작품 답지 않은 대사 역시 문제를 키운다. 최동훈은 본래 명대사 제조기로 유명했다. 극 중 인물이 바로 옆에서 말을 걸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말 맛을 살릴 줄 알았다. "묻고 더블로 가!"나 "내 몸속에 일본 놈들의 총알이 여섯 개나 박혀 있습니다." "구멍이 두 개지요." 같은 대사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외계+인 2부>에서는 외려 대사 때문에 몰입이 깨진다. 대사가 상황을 설명하는 도구에 그치기 때문이다. " ~~로 갑시다", "~~를 합시다/해야 돼", "저게 뭐지?"처럼 상황을 설명하기 바쁜 작위적인 대사가 쏟아진다. 자연히 캐릭터는 설명 기계에 불과해지고, 안 그래도 등장인물이 많은 가운데 제각기 매력이나 존재감을 뽐낼 기회도 잡지 못한다.
<외계+인>이라는 늪
애초에 <외계+인> 시리즈는 기획부터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었다. 판타지 액션과 SF를 합치고, 10명 넘는 캐릭터가 한 데 등장하는 최동훈 스타일을 더했다. <신과 함께> 시리즈처럼 원작이 있는 작품도 아닌데 한 번에 촬영을 마친 후 1부와 2부로 나눠서 개봉했고, 막대한 제작비까지 쏟아부었다. 성공만 하면 기념비적일 수 있었던 블록버스터였다. 단지 1부에서는 도박수가 통하지 않았고, 2부에서 실패가 확정됐을 따름이다.
어찌 보면 <외계+인 2부>는 늪이나 다름없다. 가능한 범주 내에서 1부의 피드백을 반영하고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사투를 벌인 흔적이 역력하다. 하지만 그 노력이 또 다른 문제를 키우고, 2부 만의 문제도 더해진 이상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보이지 않는다. 벗어나려 노력할수록 수습하기 어려워지는 늪이자 총체적 난국인 셈이다. 어떻게든 결말에 도달한 최동훈 감독의 뚝심만이 그의 차기작을 기대케 할 뿐이다.
Poor 형편없음
우여곡절 끝에 겨우 다다른 우당탕탕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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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 상실을 겪은 사람들에게 건네는 인사말
-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 시사회를 관람한 후 작성한 리뷰글입니다.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
살면서 우리는 내 삶 속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던 이들과 이별하곤 한다. 이 이별의 순간이 잦을수도, 혹은 아직 경험을 못했을 수도 있다.
'이별', '상실'이라는 단어는 언제 마주해도 항상 낯설고 슬프기만 하다. 만약 이 단어가 '가족처럼 소중한 이', '내가 사랑하는 이'를 가리킬수록 그 슬픔은 배가 된다.
영화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는 반려견인 '루'를 떠나보내면서 처음으로 '이별'을 겪은 8살 소녀 사야카(닛츠 치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이다.
일본 나오키상 수상 작가 이주인 시즈카의 동명의 단편소설을 각색한 작품이다.
사야카는 운명처럼 '루'를 만났다. 길을 걷다가 '꽥꽥-' 소리에 이끌려 간 곳에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놀림을 받는 강아지 루가 있었다. 남들과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놀림을 받던 사야카는 루를 보고 동질감을 느낀다.
루를 데려오고 싶다고 말하는 사야카에게 부모님은 '강아지는 사람보다 적게 살기 때문에 강아지와의 이별까지 모두 감당해야 한다'라고 신신당부했다.
마침내 사야카와 루는 함께 살게 되었고, 그렇게 둘은 많은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언제나 루는 사야카에게 선물을 선사해주었다.
루와 함께하는 모든 시간들이 행복했고, 소중했다.
사야카와 루는 함께 전철이 지나가는 것을 한참이나 멈춰서서 지켜보기도 했고, 루가 발견한 비밀통로를 통해 엄청나게 넓은 초원을 발견하기도 했다. 함께 여름밤에 불꽃놀이를 보기도 했고, 지나가는 비행기를 빤히 올려다보기도 했다.
사야카가 혼자 하던 것들을 루와 함께 하고, 혼자 보던 것들을 루와 함께 보는 모든 시간들이 즐겁고 새로웠다.
루와 함께 하는 순간들은 벅찰 정도로 항상 행복하고 따스했다.
하지만 따스한 봄날, 사야카가 체험학습을 간 사이에 루는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야카의 세상에서 너무나 큰 빈 자리가 생겼다. 루와 함께 산책하던 길을 혼자 걷고, 텅 비어버린 루의 집을 가만히 쳐다보고, 루와 함께 뛰어놀던 초원을 혼자 가고, 루와 함께 보던 하늘을 혼자 바라봤다.
루가 제일 좋아하는 행위는 지나가는 전철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사야카는 혼자서 그 전철을 바라보며, 이 자리에는 없는 루를 기다리곤 했다.
모든 풍경이 다 그대로인데 루만 없었다.
그러던 중 사야카는 루를 통해 알게 된 비밀 장소에서 새로운 강아지인 '루스'를 만나게 된다.
루스를 따라간 곳에는 후세 할아버지(오이다 요시)가 있었다.
후세 할아버지는 동네의 작은 음악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루를 떠나보낸 사야카처럼 사랑하는 존재인 '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사람이었다.
'사랑하는 이의 상실'이라는 같은 상처를 간직하고 있던 둘은 각자 그리워하는 이를 만나기 위해 루스와 함께 가까운 바다로 소풍을 떠난다.
바닷가에 도착한 사야카는 루와 함께 보냈던 시간을, 후세 할아버지는 아들 고이치로와 함께 보냈던 시간을 떠올렸다.
실은 허상에 불과하지만, 이들은 각각 루와 고이치로를 직접 만나서 함께 따스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사야카가 현실에는 없는 루를 떠올리며 산책을 했던 것처럼 후세 할아버지는 아들 고이치로를 떠올리며 어릴 때 즐겨했던 캐치볼을 했다.
그리고 후세 할아버지는 병환으로 돌아가셨다.
아마도 사야카와 후세 할아버지가 떠난 이 짧은 소풍은 먼저 떠난 사랑하는 존재와의 '완전한 이별'을 준비하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루가 찾은 비밀공간에서 사야카와 루는 짧은 철로를 발견했다.
왜 이 철로는 짧은지, 왜 끊어져 있는 것인지, 사야카는 도통 알지 못했다.
하지만 영화의 후반부에서 사야카는 마침내 깨닫게 된다.
어느 날 밤, 철로에서 사야카는 반대편에 서 있는 후세 할아버지, 고이치로, 루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가고자 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벽이 있는 것일까? 사야카는 도저히 그쪽으로 갈 수가 없었다.
그리고 빨간색의 열차가 하나 들어오기 시작했고, 후세 할아버지와 고이치로, 루는 그 열차에 탔다.
사야카도 가고 싶은데 갈 수가 없었다. 무언가가 자꾸 사야카를 막기 때문에.
주위를 둘러보니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엄마, 부인을 떠나보낸 남편, 할머니를 떠나보낸 할아버지의 모습들이 보였다. 그들은 모두 열차에 타 있는 먼저 떠나보낸 이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후세 할아버지와 고이치로, 루도 사야카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사실 그 열차는 저승으로 가는 열차였다. 루와 사야카가 발견한 곳은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태워가는 간이역이었다.
죽은 이들이 떠나는 역, 산 자가 죽은 이를 배웅하는 역.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경험한 사람은 모두 이 역을 안다.
그렇게 열차는 보이지 않는 저 너머로 멀리멀리 떠났다.
'훗날 내가 사랑하는 존재를 잃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라는 사실만큼 아픈 문장은 없는 것 같다.
이별을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 보편적인 사실이지만 너무 가혹하다.
이 영화는 '사랑하는 존재의 상실'과 '상실(이별)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존재를 보내주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건네고 있다.
어린 소녀인 사야카는 사랑하는 반려견인 루의 이별을 겪고, 루의 빈 자리를 느끼고 그리워하는 과정을 통해 마침내 완전한 이별을 인지하게 된다.
이 점에서 한 소녀의 성장과정을 다루고 있는 이야기라고 봐도 될 것 같다.
동시에 이 영화는 사야카와 후세 할아버지처럼 사랑하는 이와의 상실을 겪은 관객들을 토닥여주기도 한다.
열차 안에서 눈빛으로 마치 '난 이제 괜찮아', '먼저 가서 기다릴게'라는 인사말을 전하는 듯한 먼저 떠난 이들을 통해,
그리고 간이역에서 먼저 후세 할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던 '어린 소년'으로 남아 있는 고이치로를 통해 (상실을 겪은)관객들을 간접적으로 위로해준다.
이 장면들을 볼 때 실제로 먼저 떠난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 내게 따스하게 웃으면서 인사를 건네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서 나는 그저 펑펑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간이역에서 마지막 인사를 하며 루를 보내준 사야카는 '루스'라는 강아지와 함께 현실을 살아간다.
사랑하는 존재를 '보내주는' 것은 단순히 그 존재를 '잊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존재와의 이별을 받아들이고, 그와의 추억들을 마음 속에 간직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평생 그 추억만을 잡고 산다는 것이 아니다. 그 추억을 마음 깊이 새기고, 드문드문 떠오르는 기억들에 간간히 웃으며 지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실의 순간이 매우 아프고, 슬픈 기억으로 남아있을 테지만 어쨌든 우리는 열심히 현실을 살아가면 된다.
기억이 흐릿해지면 흐릿해지는대로, 또렷이 기억나면 또렷하게 기억나는대로 그 추억들을 마음 속에 새기고 그냥 그렇게 살아가면 된다.
사야카도 앞으로 그럴 것이고, 나도 그럴 것이고, 다른 이들도 그럴 것이다.
따스한 봄날 같은 영화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는 2월 17일에 개봉한다.
점점 겨울이 걷히고, 봄이 다가오기 시작하는 이 시점에서 이 영화를 꼭 관람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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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상 전투가 아니었다 - GHOSTS OF WAR
흥해라 이 영화
고스트 오브 워 (2020)
- 2차대전 막바지 크리스와 4명의 분대원들은 한때 나치가 점령했던 프랑스 대저택에 도착한다
휴양지 같은 그곳에서 편하게 지내려 했으나 정체불명의 소리와 의문의 사건들과 마주하게 되는데...
적군과의 교전도 모자라 정체불명의 존재와 싸워야 하는 군인들의 퇴마미션 '고스트 오브 워' 이 영화 흥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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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스픽 노 이블> 메인 예고편
"낯선 사람의 친절함은 조심할것" 숨죽여 봐야 할 제임스 맥어보이의 스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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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소설가 구보의 하루> 메인 예고편
자신의 작품 세계를 고집하며 글을 써오고 있는 소설가 구보(박종환)는
선배 기영(김경익)이 편집장으로 있는 작은 출판사에 자신의 소설 출간 여부를 결정지으러
부푼 마음을 안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선다.
기대치 못한 소식을 들은 구보는 허탈한 마음으로 거리를 배회하면서
다양한 지인들과 우연 혹은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