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5-02-12 15:43:18
마음이 달달해지는 로맨스 영화 -7-
발렌타인 데이 큐레이션
❣️[CineLab Curation] ❣️
이번 주 씨네랩의 뉴스레터 씨네-뉴스에서는 발렌타인 데이를 맞아 달달한 로맨스 영화를 준비해 봤어요!
우리 모두 혈당 스파이크 조심해야 하니까..
초콜렛 대신 씨네랩이 준비한 영화와 함께 달달한 발렌타인 데이 보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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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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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2주 차, 최신 씨네 뉴스
2주 전부터 엄청난 예매율을 자랑했던 <오펜하이머>! 하지만 어제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오펜하이머>를 제치고 예매율 1위를 기록했습니다. 또 북미에서는 <바비>는 승승 장구중인데요. 이외의 영화 핫한 소식들 같이 만나러 가보실까요~?
<콘크리트 유토피아>, <오펜하이머> 밀어내고예매율 1위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예매 관객수 17만명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다음 주 공개되는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오펜하이머>에 예매 순위에서 밀려나
2위에 머무르다가 전날 예매 순위 최상단을 차지했습니다. 현재 추세라면 개봉일에 무난히 박스오피스
정상에 오를 거로 예상됩니다. 영화는 오는 9일 개봉예정입니다
<바비> 누적 매출 10억 달러 여성 감독 최초 기록
<바비>는 3주 연속 주말 박스오피스 1위를 달리면서 전세계 누적 매출액 약 10억 3천만 달러를 기록했습니다. 올해 공개된 영화 중 누적 수익 10억 달러를 넘긴 작품은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바비> 2편입니다. 또 <바비>는 역대 여성 감독이 연출한 영화 최초로 매출액 10억 달러는 넘긴 작품이 되었습니다.
<밀수> 300만 돌파, 400만 향해 순항
<밀수>가 300만 관객을 넘어서면서 13일째 366만명을 기록했습니다. 2주째 정상을 유지하고 있어 이번주중 손익분기점 400만을 가뿐히 넘길것으로 전망합니다. <밀수>는 바다에 던져진 생필품을 건지며 생계를 이어가던 사람들 앞에 일생일대의 큰 판이 열리며 벌어지는 일을 그린 해양범죄활극입니다.
<달짝지근해: 7015> 유쾌한 웃음과 사랑을 전하는 영화
김희선은 “우리나라에서 유해진씨 안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로맨스 상대역이 저라고 했을 때 고민도 안 했다”고 밝혔습니다. 유해진은 “시나리오가 되게 재밌었고 어떻게 보면 성인 버전의 소나기 같은 느낌도 있어서 훈훈함도 줄 수 있겠구나”해서 선택했다고 밝혔습니다.
<비공식 작전>, <더 문> 사실상 참패
<밀수>가 개봉 2주차 주말에 100만명에 가까운 관객을 끌어모으며 누적 관객수 360만명을 넘기면서
순항한 반면 <비공식 작전>과 <더 문>은 개봉 첫 주 주말 최악의 성적표를 기록했습니다.
<비공식 작전>은 44만명 <더 문>은 18만명이 보는데 그펴 4위에 머물렀습니다.
누적 관객수는 각각 70만명, 36만명 입니다.
제천국제음악영화제 태풍 영향으로 개막식 장소 변경
충북 제천시와 제천국제음악영화제는 카눈의 한반도 상륙 예보에 따라 오는 10일 제천 청풍랜드 특설무대에서 제천시 화산동 제천체육관으로 변경했다고 7일 밝혔습니다. 제천지역은 강풍반경에 들면서 9~10일 제천을 비롯한 충북지역에는 많은 비가 내릴것으로 예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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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을 마주 하는 태도
우리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 ‘그림 같은 풍경’이란 말을 쉽게 쓰지만, 예전부터 그림은 아름 다운 풍경을 한 폭에 담기 위해, 자연을 보고 그린 것이니, 그 말은 조금 이상한 말일지도 모른다. 현실에서 믿을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지면 ‘영화 같은 일’이라고 말하는 것 역시 어딘지 ‘그림 같은 풍경’ 이란 말만큼이나 기괴하게 느껴진다. 보통의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을 만들어 내는 것은 누군가의 상상보다는 결국 현실 세계의 누군가다.
실화 바탕의 영화는 대체로 한 시대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그야말로 ‘영화 같은 사건’ 일 확률이 많고 그런 일엔 으레 피해자와 가해자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실화 바탕의 영화를 볼 때마다 마음이 조마 조마해지는 것은 이 종합 예술이라는 작품이 만들어지고 선보이는 과정에서 또 다른 누군가가 2차 가해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영화가 필요 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 건 ‘도가니’ 때문이었다. (나는 줄거리만 읽고도 너무 많이 울어서, 아직도 보지 못했지만) 한국의 최초 사회고발물 영화였던 ‘도가니’가 만들어지고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현실을 알려주었기 때문에, 실제 사건은 영화 개봉 후인 2011년 9월 재수사가 시작되었고, 관련된 법을 제정하고 2012년 광주 인하 학교는 폐교되었다. 때로 용기를 내어 어렵게 만들어진 영화는 현실을 바꾸기도 하고, 잊혀지지 않아야 할 사건을 남겨 주기도 한다.
영화 <도가니>가 한국 사회에 해당 사건이 직접적으로 진행되는 방식으로 만들었다면 (물론 실제 사건은 더 충격적이어서,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완화 했다고는 하지만) 영화 <스포트라이트> 그 사건을 취재하는 기자팀을 중심으로 사건을 취재하며 진실에 다가가는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의 3대 일간지 중 하나인 보스턴 글로브 내 ‘스포트라이트’ 팀은 가톨릭 보스턴 교구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 사건을 취재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더욱 굳건히 벽을 쌓고 있는 권력 때문에 진실을 마주하기가 어렵다. 언론도 정치인도 교장도 학교도 모두 종교와 연결되어 숨겼던 사건.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은 대교구.
“교회가 수세기 동안 막아 온 일입니다. ‘글로브’지가 버텨낼 힘이 있을까요?”
하지만 사건을 파헤쳐 조사하면 할수록 엄청난 규모에 기자들은 더욱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그렇기에 인생을 함께한 종교적인 믿음에 균열이 생기고, 내 가족과 공동체가 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묵묵히 ‘진실’에 다가가려 한다.
영화는 충격적인 사건을 파헤치면서도 취재 과정에 집중한다. 머리가 띵 할 만큼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때도 기자들은 이성적이고 담담하게 그리고 묵묵히 취재해 나간다. 자극적인 연출 웅장한 음악은 없었다. 우리는 이 사건을 누구보다 진심으로 진정성있게 대하고 있음이 연출에서도 드러난다. 회의 하는 장면이나 취재 장면을 롱테이크로 보여주어 마치 현장에서 함께 회의에 참여 하고, 취재 결과를 직접 보고 받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다. 취재하는 과정에서 기자들이 겪는 어려움 그리고 진실을 향한 단호함 그리고 무엇보다 취재의 과정에서 피해자를 대하는 태도를 보며 언론인이란 무엇인가 생각하게 한다. 감정에 휩쓸리지 않게 이성적으로 취재하려고 노력하면서도
따듯함을 잃지 않는 태도는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다.
영화가 보여주는 이런 태도들은 관객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나처럼 감정적인 인간이, 눈물 콧물 쏟게 오열하도록 만들지 않으면서도 사건의 심각성을 크게 전해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언론의 책임의식, 언론의 윤리의식, 기자정신을 잘 보여주는 영화라 말한다. 하지만 오히려 나는 이 영화를 통해 영화가 ‘실화’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 두렵지만 끝까지 집요하게 파헤치고, 그 과정에서 그 어떤 누구도 상처 입지 않도록 따듯함을 가진 마음으로, 그리하여 실제 사건이 영화화 되었을 때 누군가에게 위로와 힘이 될 수 있는 그런 영화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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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5+10 = 사랑’, 누가 뭐래도 사랑!
‘75+10= 85’가 아니다. 사랑이다. 누가 뭐래도 사랑! T는 도저히 이해 못 하는 이 답의 도출 과정을 보여주듯 <달짝지근해: 7510>는 MBTI는 물론, 성향도 성격도 다른 치호(75)와 일영(10)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다. 10~20대의 달콤한 사랑은 아니지만, 이에 못지않은 풋풋하고 순수하고, 달짝~지근한 40대의 사랑은 가슴을 요동치기에 충분하다.
신은 그에게 외모와 친화력 대신, 미각을 줬다. 절대 미각으로 두부 과자를 만들어 회사 성장에 큰 공을 세운 치호(유해진). 그는 오로지 집, 회사만을 오가는 단조로운 일상을 보낸다. 그가 좋아하는 건 맥도날드 드라이브 스루와 과자, 그리고 하나밖에 없는 형 석호(차인표)다. 도박에 빠져 살며 매번 돈만 가져가는 못난 형이지만, 치호에겐 소중한 가족. 그러던 어느 날, 석호는 캐피털에서 일하는 미혼모 일영(김희선)의 대출 상환 요청 전화를 받고, 치호에게 이를 해결하라고 말한다. 형의 빚을 갚기 위해 캐피털을 찾은 치호는 우연한 사고로 일영과 연을 맺게 되고, 점점 가까운 사이가 된다.
<달짝지근해: 7510>은 로맨틱 코미디의 공식을 따르면서도 남과 다른 성향과 과거를 지닌 이들을 사려 깊게 바라보고 응원하는 작품이다. 굳이 나누자면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보단 <펀치 드렁큰 러브>에 가깝다. 서로 다른 성향의 남녀가 만나 사랑을 이루는 과정은 같지만, 사회에 잘 융화되기 어려운 이들(치호는 사회적 관계가 단절되어 있고, 일영은 미혼모라는 점)이 만나 서로의 빈 곳을 메우고, 사랑하고, 힘이 되어주는 부분은 아웃사이더를 자처하는 <펀치 드렁큰 러브>의 베리(아담 샌들러), 레나(에밀리 왓슨)의 러브 스토리와 닮았다.
영화의 전반부는 두 캐릭터의 상반된 성격과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충분히 할애한다. 서로 다른 이들이 만나 사랑하는 로코 공식은 그대로 따라가면서도, 이들이 얼마나 사회적 편견과 시선에 시달리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치호는 그냥 쳐다봄에도, 째려보고 꼬나본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상대방에게 미안함을 전한다. 일영은 미혼모라는 사회적 편견에 시달리지만, 치호와 반대로 미소와 해탈 어법으로 대응한다. 마치 예전부터 받았던 편견에 생긴 마음의 굳은살을 매만지며 말이다.
이런 사회적 편견의 대상으로 살아가는 치호와 일영은 서로의 공통점을 차차 알아가고, 각자의 빈 곳을 메워준다. 치호는 일영에게 장롱면허 탈출을 도와주고, 일영은 치호에게 건강을 위한 집밥을 제공한다. 서로 붙어 있는 시간이 많아짐에 따라 더 가까워지는 이들은 뒤늦게 사랑의 감정에 빠진다.
영화는 뻔한 사랑을 보여주는 듯하지만 남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는 이들의 사랑 방법으로 차별화를 꾀한다. 틈만 나면 아재 개그를 날리고, 밥 먹다가 방귀를 뀌는 등 눈살 찌푸리게 하는 행동들이 이어지지만, 이들은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서로를 배려, 이해하며 사랑을 키워나간다. 누가 뭐라든 이들 애정행각의 주체는 남들이 아닌 자기 자신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석호의 반대와 일영의 대학생 딸에 관련된 이슈로 인해 위기를 맞이하지만, 한 번 맺은 인연은 끊을 수가 없고, 한 번 나눈 마음을 돌려받을 수 없는 게 인지상정. 사랑에 서툴지만 서로를 기다리고 배려하며 그 연을 계속해서 이어나간다.
별나 보이지만 아름답고, 풋풋해 보이지만 성숙한 이 로맨스가 관객들의 마음을 이끄는 건 좀처럼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한(연출, 각색), 이병헌(각본) 감독의 시선에 기인한다. 두 감독의 연출 스타일은 다르지만, 이들은 영화를 통해 모두 사회 울타리 안 보다 밖에 있는 이들에게 주목하고, 응원과 희망을 아끼지 않았다. 마치 치호와 일영처럼 서로 다르지만 숨겨진 공통점을 알고 손잡은 두 감독의 사려 깊은 시선은 영화에 잘 녹아 흐른다.
배우들의 호연도 빼놓을 수 없다. 유해진과 김희선은 그 자체로 치호와 일영이 되어 우연히 만나고 서로를 알아가며, 사랑으로 무르익어가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그린다. 특히 유해진은 치호가 가진 순수한 소년의 이미지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연기하고, 김희선은 드라마 <토마토> 등 1990년대 보여줬던 캔디형 캐릭터를 바탕으로, 긍정적 에너지를 뿜어내는 등 각각의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여기에 차인표, 한선화, 진선규는 물론, 정우성, 염혜란, 임시완, 고아성 등 카메오 배우들의 앙상블 연기도 보는 맛을 더한다.
숏츠가 주류인 시대, 도파민 중독 시대에 <달짝지근해: 7510>은 긴 시간 우려내야 하는 사골국 같은 영화처럼 보인다.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는 로코이고 이는 단점으로 보이기 쉽지만, 남을 향한 이해와 배려가 상실된 각박한 세상 속에서 영화는 오히려 빛을 낸다. 화려하지 않지만 따뜻한 감동의 수프처럼, 치호와 일영의 사랑은 감동과 위로를 동시에 전한다. ‘75+10= 85’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공식도 함께~사진제공: 마인드마크
평점: 3.5 / 5.0
한줄평: 별나 보이지만 아름답고, 풋풋해 보이지만 성숙한 로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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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잘라야 할 텐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바다 너머, 인간이 사는 육지 세상이 궁금한 인어공주 '에리얼'(할리 베일리). 어느 날, 그녀는 우연히 바다 위로 올라갔다가 폭풍우를 만나 난파된 배에서 '에릭 왕자'(조나 하워킹)의 목숨을 구한다. 에리얼은 첫눈에 그와 사랑에 빠지지만, 아버지이자 바다의 왕 '트라이튼'(하비에르 바르뎀)은 절대로 바다 위 인간 세상에 나가서는 안 된다고 엄명을 내린다. 이에 에리얼은 바다 마녀 '울슐라'(멜리사 맥카시)와 거래해 목소리를 잃는 대가로 다리를 얻어 육지로 향하고, 새로운 운명을 찾아 나선다.
모두를 실망시킨 <인어공주> 재해석
2010년대 초중반부터 디즈니는 자사 애니메이션 영화를 실사화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이 프로젝트는 많은 흥행작을 만들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정글북>, <알라딘>, <라이언 킹>, <미녀와 야수>는 전 세계에서 10억 달러 이상을 벌었다. 하지만 논란이 가장 많은 영화는 따로 있었다. 바로 <인어공주>다.
<인어공주>는 제작 단계부터 논란의 중심에 섰다. 원작 파괴가 문제였다. 주연을 맡은 할리 베일리는 애니메이션 원작 속 에리얼과 달리 흑인이었다. 에리얼의 빨간 머리도 흑인 특유의 드레드 머리로 바뀌었다. 한쪽에서는 시대적 변화를 반영한 재해석이라고 옹호했다. 반대쪽에서는 원작 파괴라고 비판했다. 에리얼을 닮지 않은 배우가 출연해 리메이크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었다.
영화를 보니 어느 쪽도 만족하지 못할 것 같다. 일단 흑인 인어공주는 나름 자연스럽다. 덴마크가 미국령 버진아일랜드를 식민지로 삼은 역사를 반영해 배경을 카리브 해로 바꿨기 때문이다. 에리얼을 닮은 외모는 아니지만, 할리 베일리의 연기와 노래도 전반적으로 나쁘지 않다.
하지만 비판을 피할 수는 없다. 원작 설정을 재해석하고 변경한 이유를 제대로 납득시키지 못한다. 오히려 당위와 설득력을 부여할 수 있는 대목을 외면한다. 그렇게 월트 디즈니 컴퍼니 100주년 기념작 <인어공주>는 새로운 해석을 기대한 관객도, 원작의 실사화를 바란 관객도 모두 실망시킨다.
공허한 재해석
새로운 <인어공주>가 힘을 준 대목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다양성이다. 에리얼과 에릭의 로맨스는 소통과 다양성을 추구하자는 이야기다. 영화는 에리얼과 트라이튼의 갈등을 통해 다른 문화를 포용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에릭 왕자의 서사를 더해 메시지를 뒷받침한다. 그와 '셀리나 여왕'(노마 두메즈웨니)의 대립을 통해 세상에 존재하는 편견과 선입견을 깨야 한다고 말한다.
에리얼과 에릭의 로맨스는 동병상련에서 시작된다. 편견과 선입견으로 무장한 부모는 자녀를 억압한다. 트라이튼은 인간이, 셀리나는 바다의 신과 인어가 잔인하고 야만적이라고 말한다. 반면에 두 주인공은 그들의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를 동경한다. 다른 문화를 궁금해하고 기꺼이 수용하려 한다. 두려움 없는 그들은 서로의 세상을 배우면서 사랑을 싹 틔운다. 더 나아가 완고한 부모까지도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인어공주>의 재해석은 공허하다. 원작과 다른 이야기가 두드러지지 않아서 메시지가 밋밋하다. 바다와 육지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있었다는 설정이 대표적이다. 트라이튼 왕은 인간이 에리얼의 엄마를 죽였다고 암시한다. 인간 왕국의 왕도 바다 때문에 죽었고, 에릭 왕자도 표류하다가 구조됐다고 언급된다. 영화는 육지와 바다 사람이 서로 배타적인 이유를 설명하면서 갈등을 극복하는 로맨스를 강조한다.
그런데 정작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법이 너무 평이하다. 육지와 바다 사이에 있었던 일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없다. 대사 몇 마디로 그친다. 그러다 보니 추가된 서사는 뇌리를 잠시 스쳐 지나갈 뿐이다. 전반적인 흐름에도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한다. 결국 영화는 인어와 인간의 운명적인 사랑이라는 큰 틀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인간과 인어가 화해하는 결말도 그저 동화다운 교훈을 주는 결말에 그치고 만다.
흑인과 카리브해의 역사
더구나 다양성이라는 주제를 깊게 파고들 수 있는 소재를 손에 들고도 제대로 활용하지 않는다. 흑인 인어공주를 비롯해 카리브 해라는 공간적 배경과 드레드 머리는 손쉽게 소비된다. 이들을 이용해 다양성과 관련된 사회적, 역사적 문제를 깊숙이 살펴보려는 시도는 없다. 그저 관객의 상상력과 지식에 맡길 따름이다.
카리브해는 역사적 맥락이 깃든 장소다. 덴마크 작가 안데르센이 <인어공주>의 원작 동화를 썼고, 덴마크는 제국주의 시대에 카리브해 일대를 식민지로 삼은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령 버진아일랜드가 대표적이다. 중심지인 '샬럿아말리에이'만 해도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5세의 왕비인 헤센카셀의 '샤를로트 아말리에'로부터 이름이 유래했다. 작중 에릭 왕자가 유럽과 교류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총리를 비롯한 지배층 대다수가 백인으로 묘사되는 이유다.
이때 덴마크와 카리브해, 그리고 흑인 주인공이라는 조합은 곧장 한 가지 역사적 키워드를 떠올리게 한다. 바로 노예무역이다. 구체적으로는 아프리카, 유럽 열강,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어지는 삼각 노예무역이다. 덴마크는 영국, 포르투갈 등과 함께 노예무역 당사자 중 하나였다. 카리브해는 아프리카 출신 흑인 노예들의 종착지 중 하나였다. 19세기에 법적으로 금지하기 전까지는.
그런데 <인어공주>는 이런 역사적 맥락을 제거한다. 흑인 노예가 수입되는 시대에 흑인 여왕은 백인 왕국을 통치하고, 백인 왕자는 흑인 인어공주와 결혼한다. 시대상을 고려하면 어색할 수밖에 없는 광경이다. 흑인 인어공주를 등장시키고 배경을 카리브 해로 변경해 놓고도 마치 제작진이 그 함의나 맥락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도 보인다. 영화가 흑인이라는 키워드를 고민 없이 편의적으로 활용하는 듯한 인상이 남는다.
드레드 머리는 단순한 헤어스타일이 아니다
이에 더해 <인어공주>는 에리얼의 머리도 표피적으로 활용한다. 사실 드레드 머리는 단순한 헤어 스타일이 아니다. 아메리카에 정착한 흑인 노예들에게 아프리카 특유의 헤어 스타일은 부끄러운 대상이었다. 드레드(Dread)라는 용어 자체가 '끔찍하다(Dreadful)'는 단어에서 비롯될 정도였다. 그래서 그들은 백인 헤어 스타일을 따라 하려고 노력했다. 약품을 동원해 머리를 피다가 상처를 입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20세기 중반 흑인 인권 운동이 힘을 가지면서 흑인들은 자기 본연의 헤어 스타일을 유지하기 시작했다. 드레드 스타일도 이맘때 퍼져 나갔다. 즉, 드레드 머리는 백인 중심 사회에 동화, 통합되지 않겠다는 흑인 사회의 의지를 보여주는 정치적 상징이다. 동시에 아메리카 흑인들의 아픈 역사를 함축한 상징이다. 따라서 카리브해, 흑인 인어공주, 드레드 머리라는 헤어 스타일이라는 소재를 종합하면 새로운 인어공주는 흑인 인권 운동을 상징하는 강력한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아이콘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영화는 이러한 복합적인 의미에 전혀 주목하지 않는다. 의미심장한 소재를 그저 표피적인 의도로 활용할 뿐이다. 주인공이 흑인이라는 사실을 강조할 목적으로. 포크 사용법을 모르는 에리얼이 포크로 드레드 머리를 다듬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대신 운명적인 사랑이라는 안전한 스토리에 의존한다. 캐스팅 논란이 무색할 정도다. 흑인 인권 운동과 관련된 다양한 쟁점을 영화에 녹여낸 <블랙팬서>와 비교해 보면 새로운 <인어공주>는 더 안일해 보인다. 칼을 뽑았는데, 무도 자르지 못한 셈이다.
큰 도움은 되지 않는 완성도
심지어 영화 자체의 완성도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장점보다 단점이 눈에 띄기 때문이다. 우선 <라이온 킹>과 비슷한 문제점이 있다. 동물을 너무 사실적으로 묘사하다 보니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 심지어 이번에는 포유류가 아닌 해양 생물이라서 더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화면도 어둡다. 실사 영화로 구현된 어두운 바닷속은 광원이 부족해서 어둡다. 장면을 부각할 조명도 마땅치 않다. 결국 흑인인 에리얼은 어두운 배경 속에 갇혀 버린다. 그녀를 지켜보기가 어렵다. 할리 베일리에 맞추어 연출하려는 노력이 부족해 보이는 대목이다.
그래도 디즈니 영화로서 최소한의 재미는 갖췄다. 에리얼과 에릭이 거대해진 울슐라와 맞서 싸우는 후반부 해상 전투신은 인상적이다. <캐리비안의 해적: 낯선 조류> 경력자답게 롭 마샬 감독이 클라이맥스에 걸맞은 스펙터클을 그려냈다.
울슐라와 트라이톤 왕의 역할도 지대하다. 코미디 배우로 알려진 멜리사 맥카시는 선입견을 제대로 깼다. 오빠 트라이톤의 권력을 갈망하고 복수를 꿈꾸는 마녀 울슐라라의 광기와 카리스마를 제대로 보여준다. 하비에르 바르뎀도 무게를 잡아준다. 그의 연기 덕분에 가족을 지켜야 하는 아버지의 슬픔과 외로움은 극대화된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디즈니
<인어공주> 애니메이션 영화는 디즈니의 상징과도 같은 작품이다. 20세기 중후반 침체기를 겪은 디즈니가 새로운 전성기인 '디즈니 르네상스'를 알린 시작점이 <인어공주>였기 때문이다. 이는 디즈니가 창사 100주년을 맞이한 올해에 <인어공주>를 공개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인어공주>는 그 상징성과 중요도에 미치지 못했다. 과감하지 않은 사회적 메시지는 원작의 도전 정신에 미치지 못한다. 1989년에 애니메이션이 보여준 능동적인 여성상에 비하면 이번 영화가 무슨 메시지를 담았는지 의문스럽다. 만듦새와 볼거리 역시 현재 디즈니의 위상과 자본력을 생각하면 아쉬움이 크다. 그 결과 100주년을 맞이해 더 화려하고 세밀해진 디즈니 성의 미래는 마냥 밝지 않아 보인다.
Dreadful 끔찍한
충분한 고민 없는 재해석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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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선으로 압축된 스파이 세계
영국의 비밀정보부 요원 ‘조지 스마일리’(게리 올드만)는 소련의 이중 첩자를 색출하는 미션에 실패한 후 은퇴한다. 그러나 소련의 고위급 장교를 감시 중이던 현장요원 ‘리키 타르’(톰 하디)는 서커스라 불리는 MI6의 최고위급 간부 중 팅커, 테일러, 솔저라는 코드 네임을 부여받은 '퍼시(토비 존스)', '빌(콜린 퍼스)', '로이(키어런 힌즈)' 중 한 명이 스파이임을 본부에 알리고, 이에 본부는 조지에게 다시 한번 비밀 색출 작전을 맡긴다. 유일하게 믿을 만한 동료 '피터(베네딕트 컴버배치)'의 도움을 받으면서 조지는 어제까지 동료였던 정보부 모든 이들을 상대로 한 작전에 다시 나선다.
에스피오나지 장르, 곧 첩보물은 통상적으로 두 가지 서사를 기본 골격으로 삼아 살을 붙여나간다. 거시적 관점에서의 냉혹한 서스펜스와 미시적 관점에서의 씁쓸한 개인사가 그것이다. 영화 속 스파이들은 소속된 국가와 기관의 이해관계에 따라 동료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같은 편인지 아닌지를 거듭 분간해 내야만 한다. 실패의 대가가 목숨일 수도 있는 만큼 이 과정은 그야말로 손에 땀을 쥐게 한다. 한편 적군과 아군이라는 철저한 흑백의 이분법만으로 이루어진 스파이의 세계는 첩보원이기 이전에 다양한 색을 지닌 개개인의 이야기를 짓밟으며 연민을 자아내기도 한다. 이러한 두 이야기 사이의 균형은 시리즈 중 최고의 흥행 기록을 세운 <007 스카이폴>이 보여주듯 잘 만든 첩보물의 기준이 된다. 2012년 이후 9년 만에 재개봉한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역시 이 균형을 아주 잘 잡은 영화 중 하나다.
사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낯설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서스펜스를 보여주는 방식이 트렌드에서 벗어나 있다. 많은 첩보물들은 특유의 서스펜스를 액션씬에 담아 직관적으로 제시하는 데 힘을 기울여 왔다. 실제로 상술한 <007> 시리즈를 비롯해 <미션 임파서블>, <제이슨 본>, <킹스맨>과 같은 첩보물 프랜차이즈들은 나날이 거대해지고 기상천외해지는 화려한 액션을 통해 명장면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한다.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와 같은 슈퍼히어로 영화와 첩보물의 만남도 이러한 트렌드에 일조했다.
하지만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멋진 액션 대신 등장인물들의 동선에 집중한다. 그들이 특정 공간에 도착하는 순간을 에피소드의 시작점으로 삼고, 그전까지는 그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만나는 이들이 누군지, 목적인지를 좀처럼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인물들이 걷는 장면은 그 자체로 긴장감을 자아낸다.
더 나아가 영리한 카메라 워킹을 통해 스파이의 세계를 표현한다. 카메라는 인물들이 거리를 좌우로 움직이는 모습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면서 영화의 내용이 하나의 직선 위에 놓여 있는 듯한 느낌을 주려고 노력한다. 실제로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부다페스트 작전에서도, 런던에서 목적지를 향할 때도 작중 첩보요원은 항상 좌우로만 걸으며, 카메라 역시 그들을 쫓아 좌우로만 움직인다.
이처럼 마치 인물들을 하나의 직선 위에 올리는 듯한 연출은 꼭 액션이 아니어도 긴장감이 팽배한 스파이들의 세계를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왜냐하면 타인이 아군인지 아닌지를 끊임없이 분간해야만 하는 영화 속 스파이들은 양쪽 끝을 향해 뻗어 있는 하나의 직선 위를 살아가는 이들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매튜 본 감독의 <킹스맨> 속 첩보 요원인 해리와 전 세계 인구의 반을 죽이려는 빌런 밸런타인 대화를 보자. 밸런타인이 본래 제임스 본드와 같은 젠틀맨 스파이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고 말하자, 해리는 007 시리즈 속 악역이 되는 것이 자신의 꿈이었다면서는 둘 모두 꿈대로 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받아친다. 긴장감과 유머스러움이 같이 녹아든 이 장면은 서로가 서로의 적대자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 스파이의 속성을 꿰뚫는다. 단지 <킹스맨>과 달리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에서 스파이의 삶과 세계의 본질로부터 고조되는 서스펜스가 간단하면서도 영리한 카메라 워킹에 담겼을 뿐이다.
더불어 이러한 연출은 영화의 배경인 시대상과도 조화를 이루며 양 극단으로 갈린 세계에 사는 이들이 느낄 긴장감을 끌어올린다. 액션이 배제된 것은 냉전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전면적인 충돌은 일어나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서로의 편을 확인하고 포섭하려던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적절히 묘사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매 등장마다 좌와 우를 넘나드는 영국의 첩보 요원들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잃고 미국과 소련 사이를 바쁘게 움직이며 새로운 위치를 설정해야 했던 냉전 당시 영국의 국제 정치적 상황에 대한 비유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편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낯설게 느껴진 두 번째 이유는 영화의 비중이 스파이들 간의 갈등이 아닌 스파이 개개인의 씁쓸한 이야기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미국과 소련의 존재로 대변되는 상이한 이념 간의 갈등이 개개인의 아픔들을 다루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는 점은 첩보물 블록버스터들의 전형적인 서사 구조를 전복시킨 것 같기도 하다.
분명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열심히 편을 가른다. 누가 소련의 이중첩자인지를 찾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러나 중간중간마다 현재의 맥락과 상황에서 다소 어긋난 장면들을 삽입하며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다는 신호를 숨기지 않는다. 영화는 현재 상황과 과거의 기억을 유려하게 넘나들고, 중간중간에 새로운 인문들을 등장시키면서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오다가 잠깐 끊는다. 이런 교차 편집이 한두 번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수 차례에 걸쳐 반복되며 현재 상황을 진행하다가 필요할 때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
이 신호들은 직선 위에서의 편 가르기가 끝나는 찰나에 마침내 온전한 생명력을 부여받는다. 마지막 5분 사이에 인물 들 간의 과거는 전모를 드러낸다. 리키가 러시아 여성과 나눈 비운의 로맨스, 소련과의 첩보전으로 인해 파괴되어 버린 조지의 가정사와 2차 세계대전 참전 전우들의 우정, 사랑하던 두 남성 중 한 명이 다른 한 명을 죽여야만 모두 행복해질 수 있는 운명에 휘말리는 것까지 모든 퍼즐 조각이 제자리를 찾는다.
그 결과 영화는 더 이상 첩보원들의 눈치와 두뇌 싸움을 다루지 않는다. 그보다는 스파이의 세상, 그 직선 너머에 있는 개인들의 입체적인 세계를 들여다본다. 냉혹한 서스펜스의 첩보물은 애절한 드라마가 되고, 흥겨운 음악을 만난 결말은 아이러니가 가득한 비극으로 장식된다. 이는 실질적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인물이 첩보 활동 외의 과거사가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 피터이고, 첩보전에서 손을 뗐다가 다시 돌아오며 가슴 아픈 과거를 모두 보여준 조지가 정작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이처럼 낯설고 장르의 주류와는 조금 거리가 있다고 느껴지는 대목을 통해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첩보물의 현실적 감각, 그리고 그 안에 내재된 인간사에 대한 통찰을 모두 담아 장르 영화로서의 균형점을 확실하게 잡는다. 그리고 거대한 시각에서 하나의 직선으로 표현된 세계와, 그 세계가 온전히 담을 수는 없는 개인들의 현실이 충돌하는 모순이 담긴 이 균형점은 9년 만에 재개봉한 영화가 여전히 빛이 나는 이유다. 국가와 공동체의 이익이 화두인 팬데믹 상황에서, 두 번째 냉전의 시작을 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가득한 세상에서, 100년이 넘게 이어졌던 역사와 전통이 자본의 이름으로 공격받는 세상에서 개인의 삶과 권리가 우선순위에서 밀릴 때 생길 비극을 보여주는 장르 영화는 그 자체로 유의미하기 때문이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스파이의 삶을 스릴 있으면서도 가슴 아프게, 거시적이면서도 미시적으로 보여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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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누구도 보여주지 않은 '조커'와 '아서'의 내면세계
<조커 : 폴리 아 되>와 <조커>에 대한 강력한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에 대한 설왕설래가 굉장하다. CGV의 에그지수는 진작 박살 난 지 오래고, 로튼토마토 지수도 예상외로 낮게 나오고 있다. 일부 평론가들은 영화 안에서 아서가 취한 태도가 빌런 '조커'와 상충된다고 주장한다. 심지어는 '조커;를 인질 잡아 토드 필립스가 객기 부린 것에 불과하다는 유튜브 속 평론가도 있다. 그들의 주장은 간단하다. '조커' 보러 왔으면 악랄하고 강력한 빌런을 보고 싶어 하지 이런 내용을 원하는 게 아니다는 점이다. 관객들이 기대한 건 자신의 악함을 깨달은 조커가 사회를 뒤집어 1편과 유사하게 반향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이 <조커 : 폴리 아 되>는 충격적인 플롯을 띄고 있다. 그 충격의 방향이 <조커> 1편의 형태가 아니다. 그 <조커> 1편의 위에서 아서의 뇌를 들여다보는 듯한 플롯으로 많은 팬들에게 충격을 선사하는 줄거리를 띄는 것이 이 <조커 : 폴리 아 되>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글쓴이는 위에서 언급한 이 영화 <조커 : 폴리 아 되>에 대해 '1편의 후속작이 아니다'라는 비판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완벽하게 조커가 된 아서 플랙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첫 번째 근거. 두 영화의 플롯은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우선 <조커>의 플롯부터. 아서 플랙은 어머니와 함께 사는 남자다. 인생에 재미라곤 없다. 우울한 아서 플랙. 번듯한 직업이나 모아놓은 돈 같은 거 없다. 대신 있는 건 정신질환이다. 느닷없이 하하하하 웃는 아서 플랙. 뜬금없이, 그것도 기괴하게 웃는 터라 사람들이 이상한 사람 취급한다. 이런 아서에게도 꿈이 있다. 바로 코미디언이 되는 것이다. TV에 나오는 인기 스타 머레이 프랭클린(로버트 드 니로)을 동경하는 아서. 사실 아서는 머레이가 자기의 두 번째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첫 번째 아버지는 누구냐고? 바로 고담 시의 실력자 토머스 웨인이다. 어머니가 말해준 바에 의하면 아서는 웨인 가의 숨겨진 아들이었다. 꿈속에 사는 아서. 아니 꿈속에서 나오기 싫은 아서. 비참한 현실에 혹시?라는 희망이 점점 아서의 망상장애로 발전한다. 내가 대단한 코미디언이라는 망상. 도시의 실력자가 내 아버지라는 망상. 그리고 사랑도 마음대로 얻을 수 있을 거라는 망상이 아서를 지배한다. 영화 <조커>는 아서의 망상에 대해 다룬 영화다. 망상이 끌고 가는 대로 도착하다 보면 지옥 같은 세상이 펼쳐져 있고 우리는 그 엔딩에 각자의 의견을 내놓는다.
이 과정에서 영화가 전면에 배치한 것은 아서의 자의식이다. 존재감이 없던 아서. 유리 자동문을 지나갈 때도 문에 부딪힐 정도로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한다. 영화는 이렇게 존재감이 없는 아서가 세상에게 자기 자신을 알리는 과정을 핵심으로 삼았다. 소위 말하는 '자의식 과잉'과 '인정욕구'의 표출이 이야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초반부. 아서의 굽은 등을 보여주며 주인공의 위축된 내면을 보여준다. 주인공 뒤의 라디오 방송에선 '청소 노동자들이 쓰레기를 치우지 않아 전염병이 창궐한다'라는 뉴스가 나온다. 시각적으로 아서의 정신상태를 보여주면서 청각적으로는 이 사회가 노동권에 있어 약자를 존중하지 않다는 걸 암시한다. 연이어 조커가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상담치료 과정에서 상담사에게 "내 얘기를 듣지 않는군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상담사가 입 밖으로 꺼낸 말. "사회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어요"라는 대사다. 앞 장면과 연이어 아서 플랙은 개인적으로도 사회구조적으로도 구제받지 못한다. 그럼 희망을 품어야 한다. 뭐 같은 현실에 희망이 없으면 안 된다. 아서가 생각한 해결책은 코미디다. 머레이 프랭클린 쇼에 출연하는 걸 목표로 삼은 아서. 혼자 일기장에 끄적이며 농담거리를 만든다. 공연에 대한 경험을 하나 둘 쌓다 보면 언젠가 성공해서 멘토인 머레이의 쇼에 나올 거라고 희망을 품는다. 그러던 어느 날. 아서가 웨인의 회사에 근무하는 직원 세 사람을 총으로 살해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 사건이 내면에 있던 분노를 세상 밖에 드러냈다는 사실도 굉장히 중요하다. 본질적으로 코미디언 같은 예술가들은 자신이 체화한 무언가를 표현하는 것이 직업이다. 따지고 보면 아서 플랙이 코미디언 '조커'로서 처음으로 성공한 것은 이 살인사건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앞에서 안 웃기다고 온갖 조롱을 다 듣고 총기가 바닥으로 떨어져 해고당한 공연에 비하면 홀가분한 마음에 춤까지 춘다. 조커의 자의식이 처음으로 상승한 사건이다. 심지어 고담 시의 언론사에 보도도 되고 사회가 이 살인마를 칭송하기까지 한다. 조커의 퍼포먼스가 처음으로 먹힌 것이다. 이 춤은 후반부 계단에서 춤을 추면서 내려가는 장면에서 반복된다. 아무 관객이 없는 야외무대다. 아니 모든 관객이 지켜보고 있는 야외무대에서 계단을 내려가며 춤을 춘다. 이 춤의 리액션 중 하나는 경찰이다. (이후의 사건이지만) 어머니 페니 플랙을 살해해도 쫓아오지 않았던 경찰이 양아치 세 명 죽였다고 아서를 따라온다. 일부 시민들은 조커 가면을 쓰고 아서를 지지하기까지 한다. 이제 사회를 움직이는 인간이 됐다. 그리고 여기에 힘입어 들리는 소식. 머레이는 아서의 과거 스탠딩 코미디 이력을 보고 조롱한 바 있는데, 이 아-무도 웃지 않았던 영상을 보고 토크쇼에 초대한 것이다. 서서히 팽창하는 자의식. 바람만 맞췄던 첫 번째 아버지 토마스 웨인과는 다르게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을 초대한 것이다. 토크쇼에 초대된다. 이후 토크쇼에서 광대 분장으로 나타나 "나를 조커로 불러줄래요?"라고 부탁한다. 이 질문에 읽히는 가장 강력한 의도는 '조커'라고 부르는 것이 굉장한 의미가 있고, 나는 그런 굉장한 사람이라는 자신감이다. 이후 토크쇼가 진행된다. 아서는 머레이에게 "당신은 무례하군요"라며 머리에 총알을 겨눈다. 세상이 뒤흔들린다. 슈퍼스타 머레이의 바닥을 방송에 노출시키고 살인까지 했으니 당연하다. 조커의 자의식이 폭발한다. 조커가 벌인 퍼포먼스에 세상이 열광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돌아보면 <조커>는 재능 없는 예술가가 사회를 병들게 하는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보여줘 병든 사회를 담은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조커 : 폴리 아 되>는 이 1편의 플롯을 그대로 가져왔다. 2편의 초반부. 여전히 자존감이 낮은 아서. 낮은 자존감이 사람 살인한다고 채워질 리가 없다. 본질적인 문제도 있지만 사실 환경 문제도 크다. 아캄 수용소의 모든 교도관들이 아서를 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담배도 그냥 주면 되는데 "오늘은 농담 없냐?"면서 강아지 손 내밀라고 하듯 사람을 아래로 깔본다. 감옥에는 화장실도 없다. 양동이 같은 곳에 볼일 보고 정해진 시간이 되면 비워야 한다. 사람 사는 환경이라고 보기 어렵다. 당연히 위축된다. 글쓴이는 이 설정, 초반부가 보여주는 영화의 배경이 1편 초반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아예 겹쳐지는 장면(마르고 굽은 등을 보여주는)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인물의 내면이 그대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이렇게 무기력한 아서는 어떤 계기를 만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희망에 부푼다. 그 계기는 할리 퀸젤이다. 혼자가 아니라는 희망으로 가득 찬 아서. 여기서부터 자존감이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한다. 농담을 하고 싶어도 도무지 떠오르지 않던 아서에게 살아갈 의미가 생긴다. 글쓴이는 이 할리퀸(레이디 가가)이 안겨주는 희망이 1편의 코미디와 유사한 맥락이라고 본다. 아서에게 코미디는 미래다. 코미디를 사랑한다. 그래서 미래에 코미디로 먹고사는 걸 꿈꾸고 있다. 이 코미디에 대한 사랑이 할리퀸에게 옮겨온 것이 2편이다. 이 공통점은 아서가 코미디와 사랑에 서투르다는 점에서도 유사성을 띤다. 또 결정적으로 아서가 품고 있는 사랑이 어떻게 커지는가가 두 영화가 공유하고 있는 가장 강력한 공통점이다. 그건 바로 망상이다. <조커> 초반 머레이가 관객석에 앉아있는 아서를 불러 '자네 같은 친구가 있어 다행이야'식의 말을 하는 장면이 있다. 또 다른 장면에선 아서가 혼자 스탠딩 코미디를 하고 있는데 소피만 혼자 흐뭇하게 웃는 장면이나 갑자기 하하 호호하고 웃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조커> 1편이 아서가 현실과 망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인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이 망상은 중요하다. 아서가 후반부까지 코미디를 놓을 수 없는 이유 중 하나가 이 이유(현실과 망상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이기 때문이다. 이 코미디에 관한 망상은 후반부에 해체되면서 아서의 무리수로 이어진다. 코미디를 보며 혼자 흐뭇하게 웃던 소피라는 애인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고, 아서는 코미디에 재능이 없었다. 현실을 받아들인 아서는 전 국민이 보는 앞에서 머레이를 살해한다. 이 부정적인 현실 - 망상과 사랑 - 부푼 자아를 충족하기 위한 무리수라는 구조는 2편에서도 이어진다. <조커 : 폴리 아 되>에서도 아서의 희망인 리와의 관계가 망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번에는 '폴리 아 되'라 아서 혼자만의 망상이 아니다. 하지만 망상은 망상이다. 그 망상이 어떻게 표현되어 있느냐. 이번엔 뮤지컬이다. 현실에서 뮤지컬 같은 상황이 벌어질 리는 없다. 뮤지컬 신은 전체적으로 영화 같은 상황이다. 감옥에 갇혀 한정적인 동선 때문에 나눌 수 없는 사랑을 음악과 춤으로 망상을 공유한다. 이미 전에 꿈꿔왔던 망상이 시간이 지나 더 영화적이고 깊어진다. 후반부 아서가 조커를 포기하자 그의 망상이 해체된다. 망상 속 공연에서 리는 아서를 쐈고 현실 속 할리퀸은 조커를 차버렸다. 조커로서의 이름도 잃고 자아까지 포기한 아서. 하지만 이 1편에서 이 과정을 겪고 아서 플랙의 조커가 탄생했던 것처럼 새로운 빌런이 등장한다. '넌 죽어도 싼 놈이야'라는 말과 함께 악의 축을 살해하는 남자가 영화 후반부를 마무리짓는다. <조커 : 폴리 아 되>의 후반부를 적어도 <조커>와 겹쳐지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조커 : 폴리 아 되>가 진짜 <조커>의 후속작이 맞냐는 비판에 동의하기 어렵다. 플롯이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아니 이 <조커 : 폴리 아 되>는 뮤지컬이라는 비현실적인 시퀀스를 넣어서 망상의 깊이를 더 진득하게 뽑아냈다. 1편에서 작동했던 핵심 모티브 사랑과 망상 그리고 빌런의 탄생을 2편에서 그대로 이어 더 발전시켰다. 여기서만 그치는 게 아니다. 플롯의 내밀한 부분까지 들여다보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세 가지 특성 역시 전작 1편을 그대로 승계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세 가지 특성 중 첫째. 정체성에 관한 부분이다. 이 <조커 : 폴리 아 되>에서는 할리퀸이 등장한다. 첫 번째 할리퀸은 할리 퀸젤이다. 할리퀸은 조커에게 '당신은 조커예요'라며 조커로서의 정체성을 잊지 말라고 강조한다. 처음부터 리는 아서로 접근하지 않고 조커로 접근한다. "나 당신이 주제인 영화 20번은 봤어요"라는 말, "머레이 프랭클린 쇼에서 머레이의 머리를 날렸으면 했다"는 말이 그렇다. 결정적으로 리는 아서를 처음 만날 때 머리에 총을 겨누는 제스처를 보여준다. 리는 아서를 만날 때 아서에 대한 이야기를 별로 안 한다. 하더라도 "나 당신 만나서 기뻐"라는 식의 감상만 드러내는 말만 한다. 심지어 몇 마디는 거짓말이다. 조커를 만나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사랑에 서툰 아서. 리의 존재 때문에 조커와 아서 사이에서 조커를 고른다. 후술 할 리와 메리언 사이의 대립으로 보여주는 정체성의 충돌이 서툰 사랑 때문에 이도저도 아니게 됐는데, 이 요인에 리가 있는 것이다. 이 정체성 대립이라는 측면에서 반대편의 할리 퀸이 등장한다. 바로 변호사 메리앤(캐서린 키너)다. 메리앤이 직업인으로서 펼친 주장은 간단했다. 아서는 인격이 분리됐고, 조커로서의 자아가 사람을 죽이고 다녔다는 점을 강조하는 일종의 심신 미약 논리다. 메리앤은 변호사로서만 아서를 돌본 것이 아니라 진짜 진심으로 그를 위하기도 했다. 교도관들이 아서에게 우산을 씌워주지 않는 것을 보고 "우산 안 씌워주면 누가 죽냐"라고 핀잔 섞인 한마디를 건네는 것이 그렇다. 또 아서와 조커가 분리됐다는 논리에 근거를 덧붙이는 작업도 했었다. 인터뷰를 잡는다거나 의사와의 상담이 그랬다. 법정에서도 하비 덴트의 논리를 공박할 때 '당신이 아서에 대해 뭘 아느냐'라는 식의 논리를 펼친다. 리가 아서를 버린 것과 반대로 매리앤은 진정성 있게 아서를 대한 것이다. 단지 아서는 리가 부풀린 조커로서의 자아 때문에 무리수를 뒀을 뿐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아서가 현실적인 걸 고르지 않았나? 아니다. 매리언은 할리퀸이 극에 끼친 영향처럼 아서가 후반부에 선택하는 데 있어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할리퀸이 조커에게 '당신은 조커예요'라고 말하듯 아서에게 '당신은 아서예요'라고 말했던 것이 효과가 있던 셈이다. 이 두 할리퀸이 가로지르는 정체성의 딜레마는 <조커> 전작이 가졌던 딜레마기도 하다. 아서 플렉, 그러니까 조커는 어떤 존재일까? "당신은 죽어도 싸!"라는 논리 하에 유명하면서도 무례한 사람만 골라 처단하는 인물일까? 아니다. 조커는 그냥 자의적으로 죽이고 싶은 사람을 죽여야 세상에게 내가 인정받을 수 있다고 믿는 인물이다. 하지만 조커는 살인마와 소시민 사이에서 널뛰기한다. 단지 후반부에 아서가 조커를 골랐을 뿐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두 명의 아버지를 경유한다. 이 <조커 : 폴리 아 되> 역시 <조커>와의 유사성을 띤다. 두 명의 아버지가 조커와 아서 사이의 정체성을 널뛰기하다 1편의 아서로 귀결 짓듯 두 명의 할리퀸이 2편의 아서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세 가지중 둘째. 망상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이 영화에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 부분은 뮤지컬 파트다. <조커: 폴리 아 되>에서 아서 플랙의 망상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것이 그렇다. 전작 조커에서 아서는 망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점차 자신의 어두운 본성을 드러낸다. 그가 망상과 현실을 구분하는 기점이 있다. 후반부에 이르러 어머니 페니를 살해하며 아서 본인이 망상이 심하다는 것을 자각한다. 이 과정에서 아서는 자신이 현실과 망상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점을 어느 정도 인지하게 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사실(현실과 망상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점)을 알면서도 망상을 현실같이 표현할 필요 있을까? 글쓴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망상을 망상답고 더 내면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영화의 '폴리 아 되'를 표현하는 핵심 키워드다. 아서가 현실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지 않더라도, 영화 내에서는 아서가 여전히 망상 속에 빠져 있다는 점을 뮤지컬 형식으로 명확히 시각화한 것이다. 이를 통해 감독은 아서의 내면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싶은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 망상의 정도를 표현하면서 얼마나 아서가 허황된 꿈에 취해있는지를 암시하는 것이다. 관객도 처음부터 그가 망상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뮤지컬 장면이 아서의 캐릭터성을 설명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누군가는 이런 장치가 지나치게 직관적이라는 비판을 할 수 있다. <조커>에서 망상과 현실사이를 널뛰기하는 플롯으로 '뭐가 진짜지?' 토론하는 재미도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영화 속 망상 장면을 뮤지컬로 표현한 것은 단순히 아서의 망상을 설명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조커: 폴리 아 되>는 아서가 현실과 망상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전제를 이미 깔고, 그 구분이 없는 아서의 내면을 관객이 더 직관적으로 체험하게끔 뮤지컬을 사용했다. 그 결과, 이런 방식의 연출은 아서의 심리를 보다 생동감 있게 전달하며, 오히려 아서가 망상 속에 얼마나 깊이 빠져 있는지를 더 확실히 보여준다. 이 선택은 1편의 플롯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아서의 내면을 효과적으로 드러낸 좋은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세 가지중 둘째. 이 영화가 가진 문제의식이다. 우선 영화 <조커>가 다룬 문제의식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 있다. 전작 <조커>가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이유 중 하나는, 이 작품이 한 사회의 단면을 가감 없이 다뤘기 때문이다. 아서 플랙이 조커로 흑화 하게 된 이유는 (행위의 악함과는 별개로) 인간적인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어머니 페니의 학대로 인한 망상장애, 노동환경의 열악함, 사회구조적으로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그의 처지, 그리고 조커를 조커로 만든 사람들이 그 예다. 이 모든 요소를 관통하는 중요한 키워드는 '미디어'다. 미디어는 아서가 '웨인 엔터프라이즈' 직원 세 명을 살해한 사건만 보도하고, 페니의 죽음 같은 일은 전혀 주목하지 않는다. 또한 아서가 코미디언으로서의 자아를 포기하는 사건인 '머레이 쇼'의 방송분 역시 미디어를 이용한 폭력이다. 셋째로 영화의 첫 장면에서 "청소부들이 쓰레기를 안 치워서 쥐가 들끓는다"는 대사는 미디어가 노동 현장에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보여주는 대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영화가 담고 있는 미디어는 성실하지 못한 존재다. 페니의 죽음에 대해 취재하지도 못했고 아서를 조커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이러한 미디어의 악영향이 아서의 개인적인 불행들과 시너지를 이루어, 조커라는 캐릭터가 관객 입장에서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전작의 문제의식을 이어받은 조커: 폴리 아 되에서도 미디어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가장 대표적인 장면은 아서, 조커 둘 다 카메라를 통해 비치는 장면이 있다는 점이다. 매리언이 아서에게 '당신은 조커가 아니라 아서예요. 아서를 보여주세요'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면 이 과정을 카메라로 녹화한다. 아서를 진짜 위했던 매리언조차도 보이는 이미지를 신경 쓰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녀는 미디어를 통해 재판 승소를 노린 것이다. 법정 장면에서도 아서는 판사가 아닌 카메라를 의식한다. 굳이 따지자면 판사에게 '나는 조커가 아니다'라고 말해야 설득력이 있다. 판결 내리는 건 판사니까. 그런데 아서는 카메라에 대고 굳이 말한다. 조커라는 존재가 인정받았던 계기가 미디어였다는 걸 아서가 스스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내린 행동이다. 아서가 "난 할리를 사랑해"라고 말할 때, 할리 퀸이 TV를 보며 유리창을 깨고 TV를 가져가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아서에게 연락을 하는 게 아니라 TV를 가져가는 것이 할리퀸이 조커를 사랑하지 아서를 아끼는 건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이 미디어의 존재에 따라 갈리는 인물들의 리액션은 극후반부의 폭탄 테러와 아서가 군중들에 의해 탈출을 시도하는 장면에서 명확해진다. 아수라장이 됐다. 조커는 정신을 잃은 채로 길을 배회한다. 지나가던 조커 추종자가 차에 탑승해서 아서를 탈출시키려고 한다. 여기서 아서는 조커로서 선택받게 된다. 하지만 아서가 내린 판단은 전적으로 아서의 것이다. 군중들이 원하는 조커라면 법정을 탈출해서 사람들을 조종해야 하는데 냅다 도망가버린다. 이 장면에서 영화는 미디어를 통해 보이는 것과 관객이 알고 있는 실제 현실 사이의 괴리를 명확하게 그린다. 가짜 조커들이 아서에게 기대한 모습이 '폴리 아 되(망상)'이었더는 걸 보여주는 것이다. 이 괴리가 발생한 이유? 아서는 처음부터 관객들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 영화 세계관의 군중들은 아서를 미디어를 통해서가 아니면 접할 수 없다. 카메라를 통해, 미디어를 통해 보이는 모습이 인물들의 행보를 가른 걸 단적으로 보여준 셈이다.
셋째. 전작을 승계하면서 전적으로 부정하는 이미지들이 <조커>와의 연속성과 차이점을 불어넣는다. 전작 조커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는 계단을 내려오며 춤추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조커의 추락을 직관적으로 표현한 장면이면서, 그의 홀가분함이 담겨있었다. 하지만 <조커: 폴리 아되>에서의 계단(장소도 같은) 신은 다르다. 이번엔 계단 장면에서 더 이상 무겁거나 상징적인 춤도 없고, 오르락내리락하는 고된 과정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그저 할리 퀸이 계단에 서 있고 아서는 할리퀸을 좋아하니까 아무 생각 없이 올라간다. 이 영화처럼 조커 내면의 아서 플랙을 그리고 싶었다 하더라도 계단 신에 의미를 부여해도 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전적으로 그걸 거부한다. 전작에서 그렇게 상징적인 장면으로 성공을 거뒀는데, 이번에는 그 이미지를 완전히 뒤집어버린 것이다. 전작에서 계단을 내려오는 장면은 조커의 추락과 흑화의 이유를 면밀하게 보여주는 하강의 이미지를 상징했는데, 이번에는 상승에 이유를 붙이지 않는다. 아서가 범죄를 저지르는 데는 많은 이유가 필요할지 몰라도, 우리가 행복한 이유에는 그리 복잡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느낌이랄까.
영화는 이런 식으로 전작의 이미지를 비튼다. 예를 들어, 전작에서 아서가 두들겨 맞았던 길거리를 전속력으로 질주해서 조커로서의 자아를 할리 퀸 앞에서 표출하는 장면도 있었다. 아서의 이야기가 처음 시작됐던 곳에서 조커의 자아가 붕괴된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또 생방송 중에 조커 분장을 하고 "아캄의 돼지 같은 교도관들"이라고 외친 후 굳이 두들겨 맞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도 전작의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오면서도 부정하는 요소다. 전작 <조커> 1편에서도 생중계되는 방송에서 머레이를 공격했다 아무 지장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아서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묘사했다. 이렇게 영화는 전작의 연속성과 차이점을 동시에 표현하면서 스스로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다. 굉장한 창의성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영화에 대해 쓰고 싶으면서 가장 좋았던 점은 바로 조커의 캐릭터성을 영화 안에 구현했다는 점이다. 기존에 조커가 미디어에 나온 경우를 생각해 본다. 히스 레저가 연기한 <다크 나이트>의 조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였지. 조커가 전하는 가족 이야기는 매번 달랐고, 목표가 돈인 것도 아니라 악행을 펼치고 사회를 혼란시키는 것이 캐릭터의 욕망이었다. 캐릭터를 규명하지 않는, 즉 어디로 튈지 모르는 느낌이 조커의 본질이었지. 팀 버튼의 '배트맨' 시리즈의 조커(잭 니콜슨)는 유희적인 면모가 강조된 인간이었다. 그저 자기가 재밌으니까 나쁜 짓을 하는 인물이다. 죽을 때도 까르르 웃고 죽을 정도로 이상한 면모가 가득한 캐릭터였다. 맷 리브스의 조커 역시 그가 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설명 없다. 배트맨과의 대화 장면만 짧게 보여줄 뿐이었다. 나는 조커라는 캐릭터의 핵심이 바로 규명할 수 없다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기존에 조커를 실사화한 영화들이 그랬듯 말이다.
하지만 이 '조커' 시리즈는 전적으로 다르다. 아서 플랙에게 명백한 이유가 주어지고, 그가 악당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상세히 보여준다. 이미 이 영화의 조커는 처음부터 기존과는 다르다. 완벽하게 대치된다. 그 대신 우리가 아는 조커의 이미지를 구현해야 제목과 캐릭터에서 배트맨 세계관을 빌려온 근거가 성립된다. 이걸 어디서 찾았을까? 글쓴이는 1편과 2편 사이의 관계에 있다고 본다. 기존 '조커'와 판이하게 다른 캐릭터를 보여주는 것, 그러니까 전통적인 조커의 특징을 뒤엎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1편의 조커가 그려왔던 2편의 망상이 원인을 뭉개버린다는 점에서 전형성을 거부하는 '조커'의 전통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또한 이야기 내적으로 망상에 빠져있는 아서 플랙의 캐릭터성을 살리는 데에도 생동감을 부여한 선택이었다. 영화가 1편이 있어 2편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1편의 상황이 망상이 되어 2편이 만들어진 것처럼 보인다. 두 영화의 연속성을 처음부터 망상으로 이은 것이다. 이것이 기획의도라면 사실 굳이 조커의 캐릭터를 강조할 이유가 없다. 기획의도에 충실할 것이라면 아서에 집중하는 쪽이 합리적이다. 이것은 할리퀸이 언급하는 '조커가 주인공인 영화'에서도 심화되는 지점이 있다. 사실 이 영화에서 이 대사 굳이 필요 없다. 조커가 나온 뉴스 40번 읽었다고 해도 이야기상의 결함이 있는 건 아니다. 그런데 굳이 영화였어야 했던 이유. 영화가 상상에서 그린 예술이라는 점을 상기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1편에서 조커 추종자들이 그린 악의 이미지가 허상이었던 것처럼 <조커>라는 영화에서 그린 조커의 이미지를 극 중 극의 형식으로 통렬하게 조롱한다는 단면이 여기서 읽힌다. 이 망상으로 1편과 2편을 이으면서 충돌시킨 선택은 영화가 악을 보여주는 데 있어 아주 좋은 선택이기도 했다. 1편에서 꿈꿔온 2편, 1편에서 기억하는 대중들의 조커에 관한 이미지, 할리퀸에 대한 아서의 생각, '이렇게 하면 먹힐 거야'라는 법정에서의 안일함 등 1편에 근거한 2편의 판단이 얼마나 허무맹랑한지를 보여주는 장치였다.
이런 점에서 엔딩은 굉장히 의미심장하게 보이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규명할 수 없는 악이 조커라면서, 영화의 마지막에 조커가 죽는 건 명확한 결말 아닌가?"라고. 하지만 난 이 영화에서 조커가 의인화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규명할 수 없음 / 조커의 정체성 둘 다 동시에 살렸다고 본다. 마지막 아서를 살해하는 남자는 초반부부터 소름 끼치게 웃는다. 여기서부터 아서와 공통점을 가진다. 결정적으로 마지막 장면에서 “넌 죽어도 싸!”라고 말하면서 아서를 살해한다. 영화가 고의적으로 아서와 남자를 겹치게 보여준 것이다. 글쓴이는 이 남자가 아서 플랙의 후임, 즉 또 다른 조커라고 생각한다. 그는 조커 추종자가 아닌 아서 플랙의 계승자가 된 것이다. 이 장면은 아서가 머레이와의 토크쇼에서 자살을 시사하다가 결국 머레이를 살해했던 장면과 오버랩되면서, 영화가 두 사람을 통해 "공유된 광기"를 조커라는 캐릭터로 보여줬다고도 읽을 수 있다. 결국, 영화는 악을 의인화하기보다는, 조커라는 이름 아래 공유되는 광기와 혼란 그 자체를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이 영화는 조커가 아닌 아서의 이야기를 다뤘지만, 그 방식은 전례를 따르지 않았고, 조커처럼 규명할 수 없는 캐릭터를 새롭게 정의했다는 점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 되는 것이다.
불호평이 압도적으로 많은 영화다. 누군가는 진짜 조커가 아니라고 부정하고, 전작의 장력을 스스로 거부했다면서 영화에게 야유를 보낸다. 글쓴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전작만큼은 아니지만 이 영화는 충분히 현대사회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면서 감정적인 폭이 넓고 조커의 캐릭터성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단지 뮤지컬 시퀀스들이 그렇게까지 완성도가 높지는 않아보인다는 점과 난해한 플롯, 느린 템포가 대중영화로서 합격점을 가지기 어렵다는 점은 동의한다. 하지만 글쓴이는 이 영화가 충분히 좋은 후속작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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