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5-04-17 08:33:06
앳된 얼굴의 청년이 교도소의 왕이 되기까지
영화 〈예언자〉
8★/10★
어느 범죄자 소년이 감옥에서 ‘갱생’하며 '성장'하는 과정을 담은 느와르, 범죄 영화 〈예언자〉(2010)를 보며, 자크 오디아르가 영화적 재미와 정치적 메시지를 배합하는 데 정말 탁월한 능력을 가진 감독이라는 생각을 다시금 했다.
주인공 말리크는 부모가 없다. 어릴 때부터 감옥을 들락거렸다. 아랍계이긴 하나 민족적, 종교적 정체성은 거의 없다시피 하고 프랑스어와 아랍어 모두를 말할 줄 안다. 그러니까, 말리크의 정체성은 ‘혼종적 백지 상태’다. 그래서 감옥의 왕으로 군림하는 또 다른 수감자 세자르의 심부름을 하면서도 이너서클에는 들지 못하고, 아랍계 죄수들에게서는 동포를 팔아먹은 자라고 비난받는다.
그러나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말리크의 정체성은 바꾸어 말하면 어디 한 곳에 속하지 않고 두 세계를 오고 갈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비록 완전한 ‘내부인’은 되지 못할지라도, 즉 확고한 정체성은 갖지 못할지라도 말이다. 말리크는 타고난 순발력과 대담함으로 이를 자신의 무기로 만들어 스승, 아버지, 교도관 등의 역할을 종합해 폭력적으로 군림하던 세자르를 잡아먹고 새로 왕좌에 오른다.
영화에는 세자르와 그 수하들이 감옥에 점차 아랍계 죄수가 많아지는 데 불만을 표하는 장면이 몇 번 나온다. 유럽계 간수들이 자기들 편이라 감옥을 장악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아랍계 죄수들을 자신들 통치하에 두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세자르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말리크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상황과 맞물린다. 동료들이 다른 감옥으로 이송되고, 아랍계 죄수들은 점점 늘어나면서 세자르는 서서히 몰락한다. 그리고 말리크는 ‘타고난’ 인종적 정체성으로 아랍계 죄수 무리에 스며들어 그들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활용한다. 지금까지도 프랑스에 횡행하는 인종주의적 극우의 공포 속에서 ‘백지’ 상태이던 말리크를 아랍계의 수장으로 만든 건 뭘까? 프랑스인을 우대하고 아랍계를 차별한 (감옥) 시스템 그 자체다. 말리크는 다른 모든 죄수와 마찬가지로 시스템 안에서 생존을 도모했고, 특출나게 성공해 왕좌를 대체했을 뿐이다.
앳된 얼굴의 청년 말리크가 몇 년의 수감 기간 중 ‘갱생’ 및 ‘교화’되는 과정, 그리고 마침내 ‘예언자’로 등극하는 과정은 어떠한가? 말리크는 수감되자마자 세자르의 강압적 요구로 아랍계 죄수 레예브를 살해한다. 이후 레예브의 유령과 말리크가 대화하거나 함께 있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죄책감 때문일 것이다. 말리크의 성장은 그가 레예브의 환영을 ‘불태우고’ 자신의 모호한 정체성이라는 약점을 강점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이뤄진다. 혼란스러운 정체성에서 죄책감을 거쳐,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하던 한 남자가 강력한 남성 주체로 우뚝 선다.
말리크의 성장은 극우와 인종주의를 둘러싼 감정 역학과 더불어 젠더 정치의 측면에서도 흥미롭다. 세자르가 그에게 레예브를 죽이라 했을 때, 말리크는 동성애자 레예브의 성기를 애무해주다 입안에 숨긴 면도칼로 그의 목을 공격하려 한다. 계획이 어그러져 그 방법으로 죽이진 못하지만, 세자르가 말리크에게 알려준 살인의 방법은 말리크가 남자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갓 입소한 말리크는 세자르가 아랍계 남성의 성기를 빨다 살해하라고 명령할 수 있는 존재, 즉 ‘호모’ 혹은 ‘여성’이었다. 말리크에게 규범적 의미의 남성성은 부재했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말리크는 죽은 동료 리야드의 아내, 아이와 함께 걷는다. 가장의 죽음으로 위기를 맞은 이성애 핵가족의 구원자로서 행진한다. 그리고 그 뒤로는 수많은 남자가 뒤따른다. ‘여성’이자 ‘호모’였던 그는 수컷 무리의 우두머리이자 한 가정을 책임질 수 있는 ‘남자’로 거듭난다. 〈예언자〉는 이처럼 여러 정치적 주제를 종횡무진 망라하며 장르의 재미를 구축한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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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탁에 둘러앉아 새해를 맞는 과거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고기를 정성스레 펼치는 칼질로 영화는 시작한다. <커밍 홈 어게인>의 이야기를 엮어내는 것은 조심스러운 돌봄의 손길이다. 1997년 쓰인 에세이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는, 꼭 문장을 가만가만 읽을 때처럼 소리 없이 앉아 주인공이 누비는 집안을 둘러본다.
아시아계 이민자의 가시화가 어느 때보다도 많은 지금, <커밍 홈 어게인>은 그렇지 못했던 시대의 이야기에 늦은 보상을 하기라도 하듯 영화관에 나타났다. 주인공이 아침 일과를 마치고 식탁 앞에 앉자 카메라는 돌연 뒤를 돌아본다. 혼자 사는 남자인 줄로만 알았던 창래는 순식간에 암 투병 중인 어머니를 간병하는 아들로서 소개된다.
영화는 제목처럼 집으로 다시, 또 다시 돌아간다. 고기를 손질하고, 야채를 손질하고, 비닐로 꼼꼼히 누르는 손길 사이사이로 그는 어머니가 아프지 않았던 과거를 자꾸만 회상한다. 이건 이렇게 해야지, 저건 저렇게 해야지, 하면서도 다정한 말투와 언제나 편을 들어주는 눈길은 거두지 않는다. 아픈 어머니가 이것저것 혼자 하겠다는 고집을 부리게 되자 그 손길은 창래가 어머니에게 해주는 돌봄의 손길로 변하고, 카메라는 우두커니 서서 그들의 근심과 한숨을 지켜본다.
창래는 결국 어머니와 어떻게 이별할지 정하지 못한다. 새해 전 날, 음식을 한 상 차려놓고 예전 그대로의 모습을 재현해보려 애쓰지만 아버지는 그대로 가부장적이고, 누나는 ‘아픈 엄마’라는 존재에 상심하기만 하고, 엄마는 한 술도 제대로 뜨지도 못한다. 영화는 폭발하고 상실하는 그조차 계속 쳐다보기만 한다.
<커밍 홈 어게인>은 삶에서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경험과 감정을 담담하게 담아낸다. 배우가 연기할 시간을 충분하다 남겨 두는 숏들이 꾸밈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영화는 그렇게 집을 떠난다. 이민자 가족이 새 삶을 꾸리고 자라났던 집. 한편 영화의 길고 긴 숏들은 그 자체로 집 안에 들어온 유령처럼 가만히 앉아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세심히 담아내면 아름다웠을지도 몰랐을 장면들은 원작인 에세이를 아무 각색없이 영상화한 듯 건조하게 담아내는 바람에 관객에게 와닿지 않는다. 영화의 막바지에 폭발해 큰 소리를 내는 창래의 모습은 설정을 잘못한 캐릭터처럼 보일 만큼 갑작스럽다. 한국인 이민자들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보편적인 감정을 다루고 있다는 특별함에도 불구하고, 자기 연민으로 막을 내리는 이야기는 영화가 관객을 떠나고 있다는 감각마저 불러일으킨다. 어머니의 반찬으로만 기억되는 과거는 눈물겹게 감동적일지언정 미래로 가지고 가기는 어렵다. 그래서 관객은 집을 지키던 카메라 유령의 느릿한 걸음으로 극장을 나설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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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리서 보면 희극
소위 '사적 다큐' 작품들을 좋아한다. 나와 공통점도 별로 없는 개인의 삶이 정성스럽게 담겨 있는데, 들여다보면 시대를 관통하는 정서나 보편적인 마음들을 발견하게 된다는 지점에서. 게임을 즐기지 않았어도 <내언니전지현과 나>를 보며 동년배의 마음을 뭉클 느꼈고, 영재교육이나 부동산 투자와 먼 삶을 살았지만 <디어 마이 지니어스>나 <버블 패밀리>를 보며 동시대 사람들의 사랑과 노력, 착잡함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박강아름 감독의 전작 <박강아름의 가장무도회>도 재미있게 보았다. 오랜 세월의 영상을 잘라 모아, 박강아름 감독 자신을 둘러싼 외모 품평부터 소개팅 후기, 복잡한 시선을 담았다. 애정 어린 친구의 조언일 때도 있고, 학생들이 툭툭 뱉는 말일 때도 있지만, 이들 누구의 말도 낯설지 않다. 내게도 익숙한 지식이다. 우리는 아름다움에는 다양한 방향이 있다고 믿고 싶어 하지만, 사실 획일적인 미의 기준을 강요받는 때가 훨씬 많으니까. 그나마 협소한 변주라도 이루어지며 조금씩 미의 기준이 확장되어 온 지금에 비해, 이전은 더했다. 우리는 참 야만적인 사회에 살아왔고, 살고 있구나, 새삼 깨닫게 된다.
<박강아름의 가장무도회>는 한결 편안해진 얼굴의 박강아름 감독을 담으며 마친다. 상대의 무례함을 갈라내어, 그들의 문제지 내 문제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자주 몸무게를 재며 살이 빠지지 않는다고 슬퍼했지만 거기에 카메라 무게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을 마지막에야 깨닫는다. 우리가 보는 우리에게도 그런 시선의 무게가 항상 달려 있겠지. 그리고 분명 카메라보다 무거울 것이다.
그리고 <박강아름의 가장무도회> 끝에 함께 있던 두 사람은 강아지 슈슈와 함께 프랑스로 향한다. 프랑스어를 아는 아름이 행정과 경제를 맡고, 프랑스에 큰 뜻이 없었던 남편 성만이 가사와 이후 육아까지 주로 맡게 된다.
한국에서 한 사람의 여성과 남성이 만나 결혼하는 풍경을 하나의 그림으로만 담아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어떤 보편적인 스토리라인이 존재한다.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라고 흔히 말하는 보편적 삶의 모양새란 게 있기도 하고, 어쩐지 결혼이 가까워 오면 제각각의 연애담들이 소실점 따라가듯 비슷한 길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기도 하다.
박강아름 감독과 성만 씨의 결혼은 그 보편적 모양새와 조금 다르다. 프랑스로 떠난 영화감독과 그 배우자라는 점도 그렇지만, 맞벌이를 하면 했지 남편이 육아와 가사를 전담하는 경우는 확실히 드무니까. 그럼에도 이 영화에 그려진 정서는 보편적이다. 끝없는 가사는 전쟁 같고, 육아는 눈 뗄 틈조차 허락하지 않고, 생활비는 늘 빠듯하고, 일상은 숨 가쁘게 바쁘다.
<박강아름의 가장무도회>에서 인물들의 말을 평가하고 또 나를 돌아보며, 박강아름 감독의 몸으로 사회의 외모지상주의를 깊이 비춰냈다면, <박강아름 결혼하다>에서는 결혼과 결혼에서 파생되는 노동과 두 사람의 관계를 촘촘하게 이어, 질문을 던진다.
두 사람의 일상에도 먹구름이 낀다. 독박 육아와 끝없는 가사에 지친 성만은 주부 우울증을 앓고, 출산 이후 이전과 달라진 몸으로 (그리고 임신과 출산이 몸에 이런 변화를 가져다준다는 걸 전혀 몰랐던 마음으로) 학교 생활과 영화 작업을 병행하는 아름은 너무 바쁘다.
결혼은 원래 이런 걸까? 왜 결혼을 한 걸까? 결혼이란 무엇인가? 박강아름 감독은 질문하기 시작하고, 그 질문을 해소하고자 자신의 기억도 돌아보고 사람들에게 질문도 던져 본다. 그 수단은 집에 차리는 한 테이블 식당, 외길식당이다. 성만의 주부 우울증을 해소하기 위한 사회생활로 시작했다가 멈춘 프로젝트를 다시 굴려본 것이다.
수없는 질문과 대화가 해답을 찾아줄 수 있을까? 그럴 리 없다. 다양한 부부 혹은 연인에게 그들만의 서사가 있고, 상황이 있고, 입장이 있으니까. 부분적으로 공명할 수는 있다. 프랑스인과 결혼해 프랑스에 거주한 한국인 여성이 성만의 깊은 외로움을 안쓰러워하는 장면에서처럼. 박강아름 감독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공명하며 질문을 던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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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기 직전, 설문 요청을 하나 받았다. 한 문항은 현재 나의 상태와 가장 가까운 것을 고르라고 했고, 보기에는 결혼과 자녀 유무에 대한 다양한 선택지가 들어 있었다. 500자로 서술하라고 해도 답하기 어려운 고민들이지만, 아무튼 질문은 '현재 나의 상태'에 '가장 가까운' 것을 물었으므로 나는 답했다. 결혼과 자녀 둘 다 원치 않는다,라고. 인생은 시시로 몸피를 뒤트니 앞으로 언제 내 생각이 바뀔지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보기 중 제일 가까운 선택지였다.
얼핏 단순한 객관식 선택지 같지만 그 뒤에는 언제나 질문과 고민이 깊다. 결혼이 더 이상 의무가 아닌 지금 결혼 적령기로 분류되는 나이를 살면서 더욱 그렇다. 이십대 내내 생각했다. 결혼이라는 관계는 희망적으로 바라보지만 결혼이라는 제도에 편입하기 위한 목적의 결혼은 할 마음이 없다고. 지금 품고 있는, 아직은 잗다랗게 반짝거리는 꿈의 궤도를 모두 수정해야 하는 결정이니만큼, 잘할 수 없을 바엔 안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이 '잘'은 나의 인력으로 되지 않으니, 현재 나의 상태에 가장 가까운 대답은 '원치 않는다'였다. 그럼에도 이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를 보면서는 저런 결혼이라면 참 좋다, 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이 덩케르크의 바다를 찍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두 사람은 흐린 날 바다를 찾는다. 성만은 몸이 좋지 않아 불편하고, 아름은 성만이 투덜댄다는 느낌이 들어 불편하다. 가볍게 던지는 타박과 잠깐의 침묵. 익숙한 갈등의 언어들. 그러나 그 갈등 끝 두 사람이 하는 것은, 유모차가 슥슥 나가지 않는 모래사장에서 유모차를 들고 낑낑거리며 바다를 보는 것이었다.
손발을 맞추고 수평을 맞춰 원활하게 척척 들고 가는 것도 아니고, 그나마 비바람이 맹렬히 몰아쳐대 바다는 오래 보지도 못했다. 우산도 들어야 하고 사진도 찍고 싶어 두 사람은 또 생각이 일치하지 않고, 소리 없이 멀리 보이는 조그만 모습으로도 두 사람이 티격태격한다는 걸 느낄 수 있다. 그 끝에 굳은 얼굴로 나란히 기차에 앉아있는 두 사람에게, 아기 보리는 스노볼을 내민다. 엄마가 흔들어준 스노볼을 보며 생긋 웃다가 아빠에게 그것을 내민다.
언젠가 스리랑카 바다에서, 나중에 누구 보여줘야겠다 생각하며 사부작사부작 사진과 영상을 몇 개 찍고 돌아섰던 적이 있다. 흐린 날 바다 아니라 맑은 날 청록빛 바다라도 혼자 보고 돌아서는 길은 조금 쓸쓸했다.
비록 당일에는 굳어진 입매와 편치 않은 침묵으로 기억되더라도, 언젠가 훗날 돌아보면 유모차를 들고 낑낑거리다 비바람에 휩쓸린 기억에 웃음 짓게 된다면. 결국 함께 있다는 것, 함께 산다는 것이 결혼 아닐까. 어쩌면 순적하고 매끄러운 삶은 유니콘처럼 환상에만 존재하는 것 같다. 늘 우당탕쿵탕 굴러가는 게 삶이려니 받아들인다면, 초연하고 호젓하지는 못해도 스노볼처럼 작게 반짝이는 일상을 즐길 수는 있을 것이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 꼭 비극과 대치하지 않더라도 맞는 말 같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초대받아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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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 안되는 소리 같은데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이 없는 영화
이 글을 읽는 몇 안 되는 여러분, 혹시 최근에 웃었던 적이 언제인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간은 2022년 1월 2일이다. '올해 처음으로 언제 웃었어요?'나 '혹시 어제 웃은 적 있나요?'라고 물으면 답을 못할 수도 있다. 그만큼 웃는 건 참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애인이 있거나 자제분들이 있는 집안이라면 쉽겠지만 나 같은 솔로남들에겐 웃기란 더더욱 어렵다. 생각해보면 공포영화를 보고 무섭다고 느끼는 것도 어렵지 않나? 비단 작년에 봤던 <랑종>의 경우 나는 극장에서 뛰어나오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무서웠다. 근데 누구는 안 무서웠다고 말하는 걸 보니 감정은 이렇게 사람마다 가지각색이다. 이건 당연하게도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르고 살아온 환경이 다르니까 필연적이다. 또 인간사에 당연하게 통하는 공식이란 없잖아? 무조건 웃기고 무섭고 이런 건 웃음의 신이 와도 굉장히 어려울 것 같다.
이런 맥락에서 분노와 공감은 가지각색으로 다양하기 마련이다. 이 말은 사람마다 관심 있는 사회문제가 다를 수밖에 없단 것을 의미한다. 나 역시 관심 있는 사회이슈가 있겠지? 만약 내가 일하는 곳의 환경을 반영해서 '치매 환자분들과 가족들의 처우를 더 낫게 개선해준다'라고 한다던가 '사회복무요원 월급 인상과 복무기간을 단축해준다'면 내 표가 올해 대선에 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이렇게 누군가의 목소리가 사회로 반영되는 과정이란 가지각색이라 당연히 생각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근데 가끔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는 가치관에 의해 일상을 사는 게 아니라 하루가 일상에 잡아먹히도록 놔두는 것 같다. 가령 정치인들이 하는 심한 욕설이나 막말, 위선들을 보면 그런 기분이 들지 않는가. '굳이 저렇게까지 해야 돼?' 같은 뭐 그런 것들 말이지. 이런 안타까움은 단적으로 우리나라에만 나타나는 상황이 아닌 것 같다. 저 멀리 있는 미국에서도 정치현실에 사고방식이 잡아먹힌 사람이 있는 것 같으니. 짱짱한 배우들과 아담 맥케이라는 나름 굵직한 감독이 이 미국 사회에 대해 할 말이 있는 것 같다. 뇌 비우고 볼 수 있는 코미디를 보고 싶은 분들이라면 추천하는 작품이다.
1. 무엇에 대한 작품인가요?
서두에서 쓴 바와 같이 '미국 사회에 대한 풍자'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미국 대통령은 조 바이든 대통령이다. 그 전의 대통령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다. 이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에피소드를 아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얼굴 빨개진 게 상수가 돼서 망언을 늘어놓았다는 기사가 하나, 둘이었나? 그의 어록들 중에 나에게 기억에 남는 것은 코로나19를 무시하고 백신 접종도 안 하다 전염병에 걸렸다는 일화다. 자기만 병에 걸리면 뭐 크게 피해가 없다고 볼 수 있겠지만 이걸 나라 전체의 의사결정에 반영해 미국의 경제산업에 참사를 일으키는 결과를 만들었다. 영화는 (내 기준에) 코로나19와 유사해 보이는 재앙을 보여준다. 운석이 지구에 떨어져 우리가 사는 이 터전이 파괴될 수도 있음을 예견하는 랜디와 케이트. 그러나 이 둘은 백악관과 방송계의 헛스윙 때문에 경고를 전하는데 여러 어려움에 부딪히게 된다. 영화는 이때 '어떻게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는가?'와 '이때 만난 사람들이란 어떤 종자들인가?'를 보여준다. 이 인물을 보고 이게 말이 되나? 싶은 분도 있을 것 같다. 근데 머지 않아서 머릿속에 한 생각이 들 것이다. 이런 비슷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단순히 위에서 비슷해 보이는 재앙을 대처하는 두 대통령을 대비시킨 것은 아니다. 이렇게 바보같은 정치인을 지지하며 취하는 스탠스는 무엇인지, 모난 이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틱톡과 인스타그램이 쥐고 흔드는 쇼츠 문화가 낳는 단점은 무엇인지 지적한다.
2. 배우들의 연기 합은 어떤가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제니퍼 로렌스, 조나 힐, 케이트 블란쳇, 티모시 살라메, 메릴 스트립까지 할리우드의 국밥 같은 배우들이 나온다. 얼굴만 봐도 든든해지는 배우진들이 모여 잘 짜인 코미디 한 편을 만들어냈다. 많은 이들의 머릿속에 '미남 배우'하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떠오르지 않나? 그는 이번에 살짝 다른 역을 맡았다고 생각한다.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나 <캐치 미 이프 유 캔>같이 대놓고 방탕한 캐릭터가 아닌 소심한 과학자 역할을 맡았다. 얼굴이 그냥 딱 봐도 조각미남인 사람이라 처음에야 살짝 엥? 이런 역도 하나? 싶었지만 꽤나 잘 맞는다. 그리고 이런 소심한 캐릭터가 후반부의 어떤 결정에 영향이 가는데, '이 사람은 이렇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라고 납득이 갈 정도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는 뭐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음은 제니퍼 로렌스다. 돌아이 연기 권위자답게 그녀 다운 역을 잘 소화해낸다. 또 다른 배우 케이트 블란쳇 역시 말할 필요도 없다. 아빠한테 서운한 게 많은 신(토르 : 라그나로크), 레즈비언 로맨스(캐롤), 사회성 떨어지는 건축가(어디 갔어, 버나뎃) 등등 다양한 역을 맡았던 것을 많은 분들이 기억할 것이다. 근데 나는 이런 역할에 비해 '섹시한 뉴스 진행자'는 좀 덜 개성 있다고 생각했다. 굳이 이 배우가 들어가야 할 이유가 있을까? 싶긴 했지만 뭐 연기를 잘했으니 미스캐스팅이라고 보기 어렵겠지. 이 외에도 메릴 스트립 역시 베테랑답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연상시키는 대통령 연기를 잘 해냈다. 근데 이런 기라성 같은 배우들 만큼이나 좋은 퍼포먼스를 보여준 배우가 있다. 나는 이 것을 조나 힐로 꼽고 싶다. 점점 장면이 쌓이고 러닝타임이 지나가면서 얼굴만 봐도 웃기는 과정을 여러분도 겪게 될 것이다. 별 대화 안 하는데 그냥 웃긴다. 이 조나 힐의 퍼포먼스를 보는 것으로 영화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3. 이해하는 게 어렵지는 않나요?
이게 어떻게 설명해야 맞냐면, 대사의 양이 많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줄거리는 어렵지 않은데 말이 많아서 이해능력이 떨어지는 나 같은 분들은 상황을 받아들이는 게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런 문제가 아니라면 극이 어렵다거나 그러진 않을 것이다. 또 우리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모바일 환경에서만 이 작품을 볼 수 있지 않나? 재생 바가 왔다 갔다 하니 모바일 환경에서 보는 것도 그렇게 썩 나쁜 선택은 아닐 것이다.
4. 보기 전에 알고 가야 할 지식이 있나요?
사실 있지만 내가 서두에 써버렸다(ㅋㅋ). 미국 영화이기 때문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코로나19를 어떻게 대처했는지에 대해서 알면 좋을 것이다. 그 외적인 건 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어떤 층이 지지했는가? 에 대한 이야기다. 흔히 미국의 백인 남성이 그에게 표를 줬다는 말이 많다. 트럼프가 당선되기 이전, 다문화 사회를 표방했던 미국에 불만이 많았던 미국 국민들은 백인 중심으로 사회를 재건하겠다!라고 말한 그에게 표를 줬다. 이런 투표의 작동과정이 영화 내부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반면에 난 단순히 이 공화층 지지자들만 비판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유성이 날아오는 걸 세상에 알리고 백악관이 어떤 태도를 견지하려고 하는데, 이 관계자들이 '특정한 논리'를 내세워서 반대한다. 난 '특정한 논리'가 민주당 지지자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몇 정치인들에게도 적용되는 풍자라고 생각한다. 이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그냥 네이버 들어가서 시사 뉴스 몇 개 보고 가면 될 것 같다. 그럼 알 것이다. 감독이 사회의 어떤 모습을 공격하고 싶었는지를. 아, 이 외에 알고 가야 할 사실이 있다. 이 영화에 크리스 에반스 나온다. 한번 찾아보시길.
5. 어떤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나요?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휩쓸어 여행이고 나발이고 발이 묶인 요즘이다. 백신이 보급화되서 해치웠나? 싶었지만 오미크론이 확산되며 전염병 문제가 점점 더 심해진다는 말이 들려온다. 이에 따라 각국의 정부의 리더십이 비판대에 올랐다. 영화는 이 지도자들의 위선을 웃음으로 삼는 작품 아닌가? 당연히 이 사회에 할 말이 많은 분들이라면 속이 엄청 시원할 것이다. 이게 나쁜 것도 아니고 충분히 그들의 주장이 일리 있기 때문에 이들은 그야말로 사이다를 느끼게 될 것이다. 다른 지점이라면 역시 그냥 뇌 뺀 코미디를 보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영화는 그냥 재미있다. 배우들의 연기가 자연스러운데 그 안에 코미디도 담겨있고 사회비판적인 메시지도 있는 그런 작품이라는 뜻이다. 이때 후자, 그러니까 사회비판적인 메시지가 살짝 우선순위가 덜해 보여서 그렇지 영화는 오락성의 측면에서 좋은 기능을 한다. 넷플릭스에서 할 거 없을 때 보기에 좋은 작품이란 뜻이다. 아, 티모시 살라메 좋아하는 분들 많지 않나? 팬들은 이 영화 보면서 만족할 수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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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날씨에 딱, 밤을 걷는 영화 -7-
❣️[Cinelab Curation]❣️
요즘 밤은 조금 쌀쌀하지만 걷기엔 딱 좋은 날씨인 것 같아요.
그래서 종종 목적지 없이 걷고는 하는데요.
여러분들은 걷는거 좋아하시나요?
오늘은 밤을 걷는 주인공들을 만날 수 있는 영화를 가져와 봤어요.
낭만의 봄밤을 오늘 큐레이션 해드린 영화와 함께 즐겨보세요! 🧡______________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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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요히 내려앉는 한 줌의 선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 (Small Things Like These,2024)
고요히 내려앉는 한 줌의 선의
개봉일 : 2024.12.11.
관람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장르 : 드라마
러닝타임 : 98분
감독 : 팀 밀란츠
출연 : 킬리언 머피, 에밀리 왓슨, 아일린 월시, 미셸 페어리, 클레어 던, 헬렌 비언
개인적인 평점 : 3.5 / 5
쿠키 영상 : 없음
겨울은 몸을 움츠리게 만드는 차가운 계절이다. 하지만 잘 찾아보면 겨울에도 따스함이 있다. 한낮에 머리 위로 내려앉는 햇빛, 빠르게 지는 해를 대신해 집안을 밝히는 전등의 색, 두꺼운 옷의 포근함과 유난히 반가운 누군가의 온기. 이렇게 차가워 보이는 계절에도 작은 따스함이 깃들어 있듯이 어둠만 가득해 보이는 현실에도 잘 찾아보면 작은 희망과 온기가 존재한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그 작고 소중한 온기를 조명한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작가 클레이 키건의 동명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원작으로 하고 있으며 아일랜드 출신 배우인 킬리언 머피가 주연과 제작을 맡았다. 원작의 내용을 몰랐을 땐 그가 왜 이 소설을 선택한 걸까? 궁금했는데 소설을 읽고 나니 딱, 과연 킬리언 머피 다운 선택이었다 싶었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난 후엔 킬리언 머피였기에 가능했고, 완벽히 킬리언 머피라는 배우를 위해 만들어진 영화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1985년 아일랜드의 소도시. 석탄 장수 빌 펄롱은 아내, 다섯 딸과 함께 소소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돈 나갈 구석에 대한 고민을 놓을 순 없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빌은 생각한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며 부쩍 추워진 날씨 덕에 석탄 주문이 밀려오고 빌은 해가 뜨기 전부터 해가 질 때까지 쉬지 않고 석탄을 배달한다. 그는 불평 한 마디 없이 가족과 직원들을 위해 성실하게 몸을 움직인다. 그리고 그 바쁜 와중에도 주머니에서 짤락거리는 동전을 어린 이웃과 나누는 작은 선행도 잊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수녀원에 석탄을 배달하러 간 빌은 한 모녀의 심상치 않은 실랑이를 목격한다. 그래도 남의 가정일에 함부로 뛰어들 수는 없는 일이니 그는 우선 집으로 향한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그 순간이 남긴 불편함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빌은 석탄가루로 까매진 손을 씻듯이 자신의 마음도 거칠게 벅벅 긁어내보지만 마음 깊이 낀 불편함이 사라지긴커녕 검은 물만 죽죽 흐를 뿐이다.
그렇게 불편함이 덕지덕지 낀 마음을 안고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던 빌은 결국 용기를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한다. 그의 선택과 행동은 당장 세상을 바꿀 만큼 거대한 힘을 가지진 못했지만 그것이 주는 울림은 결코 작지 않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시간적 배경만 크리스마스인 영화가 아닌 크리스마스에 담긴 은총과 사랑의 의미를 다시 한번 떠올려 볼 수 있었던 진정한 크리스마스 영화였다.
- 아래 내용부터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모두가 외면하는 그늘
이야기의 소재가 된 막달레나 수용소는 18세기-20세기 말까지 아일랜드에서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은밀하게 운영되었던 여성 수용소다. 사람들은 교정 시설, 여성에게 거처를 제공한다는 겉포장에 속거나 수용소의 실체를 알면서도 쉬쉬했다. 그 때문에 막달레나 수용소는 다른 국가들의 유사 시설들 중 가장 오랜 시간 살았다고 한다. (마지막 수용소는 1996년까지 운영됐다.)
극 중에서도 마을 사람들이 수녀원(수용소) 이야기를 회피하는 듯한 미운 모습이 나오는데 사실 이게 보통 사람의 모습이다. 그냥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세탁소구나~하고 모르는 척 믿으면 모든 게 평소와 같이 평탄하게 흘러갈 텐데 굳이 그걸 파헤치려 할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사람들은 수녀원을 애써 아무 의심 없이 믿고, 아름답게 바라보려 한다. 그들이 종교를 방패 삼아 어떤 일을 행하고 있는지, 그 뒤에 어떤 그늘이 따라붙어있는지 어느정도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실체가 된 의심의 그림자
빌은 성실하고 선한 사람이다. 그는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가장이자 고용인들을 배려하는 고용주고 굶주린 아이들을 지나치지 못하는 어른이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1985년 아일랜드다. 그 당시 아일랜드는 역대 최악의 실업률을 기록하는 등 엄청난 경제 공황을 겪고 있었는데 그런 와중에도 빌이 선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혼자가 된 어린 빌을 거두어준 윌슨 부인과 네드의 사랑 덕분이었다. 빌은 두 사람에게 받은 사랑을 그대로 품고 자라 어려운 아이들을 지나치지 못하는 어른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빌도 처음엔 마을 사람들처럼 수녀원을 모르는 척하려 했다. 그런데 계속해서 떠오르는 유년의 기억과 말간 얼굴로 식탁에 앉아있는 딸들을 보고 있으니 도저히 수녀원에서 본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빌은 어린 빌 펄롱과 소녀를 생각하며 수녀원으로 돌아간다.
빌이 막 수녀원에 들어갔을 때까지만 해도 ‘수녀원에 갇힌 불행한 소녀’는 대략 옅은 그림자 정도로만 존재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있을지도 모르는 그런 것. 그런데 저 건너편 어두운 방안에 있던 그림자가 슬슬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빌 앞으로 튀어나와 눈을 맞추며 말한다.
“저희 좀 도와주세요. 강까지 데려다주세요. 집으로 데려가 주면 뭐든 할게요.”. 이때 빌은 ‘수녀원에 갇힌 불행한 소녀’가 실존함을 알게 된다.
이때 소녀를 보며 느낀 놀라움과 불편함은 빌의 오래된 기억까지 헤집어 놓고, 그는 또 다른 진실을 보게 된다.
빌의 선택
빌이 머리를 자르지 않은 이유
빌이 아내 아일린에게 수녀원에서 본 것을 털어놓으며 우리 딸이었다면 어땠을지 물었을 때 아일린은 “우리 딸이 아니잖아.”, “사람이 살아가려면 모르는척 해야 하는 일도 있는 거야.”라는 차가운 답을 내놓는다. 이때 빌은 “윌슨 부인이 당신 같지 않아서 다행”이라며 윌슨 부인의 따뜻함을 한 번 더 상기한다.
빌은 소녀를 구해주고 싶다. 윌슨 부인과 네드처럼. 빌은 새벽에 수녀원으로 돌아가 소녀에게 자신의 코트를 입혀주고 함께 수녀원의 문을 두드린다. 빌의 의도를 눈치챈 원장수녀는 안은 따뜻하다며 빌을 자신의 사무실로 불러들인다. 그는 빌을 저지하기 위해 은근한 협박과 멸시의 눈초리를 보낸다. 빌은 원장수녀가 내민 돈과 카드를 들고 겨우 사무실을 나오면서도 끝까지 소녀에게 말을 걸고 서로의 이름을 남긴다.
그런데 이후 빌은 잠시 흔들린다. 너무 갑작스레 새로운 진실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빌이 아내의 지적을 받으면서까지 주머니를 털어 아이들에게 동전을 나눠주고 수녀원과 척을 질 각오를 하면서도 소녀를 구하려고 했던 건 모두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이었다.
빌은 지금껏 윌슨 부인과 네드가 조건 없이 100% 선의로 자신을 보살펴 준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기억을 차근차근 되짚어가다보니 당시엔 느끼지 못했던 미묘하게 어색한 지점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누가 봐도 네드와 닮은 빌의 얼굴, 창 너머로 봤던 어른들의 모습과 자신을 바라보던 네드의 눈빛. 빌은 어릴 적 어머니에게 물었던 아버지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아낸다.
무조건적인 선의라고 믿어왔던 것이 알고 보니 아들이었기에 받을 수 있었던 부정(父情)이었다니. 빌은 잠시 고민한다. 그리고 머리카락과 함께 소녀를 향한 의지를 잘라내기라도 하려는 듯 미용실에 앉아 검은 미용 가운을 두른다. 한순간 빌의 얼굴에 모든 시선이 집중되고, 빌의 입술이 떨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내 눈물 한줄기가 흘러내린다.
그는 결국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고 미용실을 나와 다시 어머니와 같은 이름의 소녀, 세라에게로 향한다. 네드에게 받은 것이 아버지의 사랑이었든 타인의 무조건적인 선의였든 상관없이 어쨌든 그의 사랑이 빌을 키워냈으니 빌 또한 사랑을 나눠주는 어른이 되기로 한 듯 보인다.
빌은 세라와 함께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깨끗이 씻은 손을 세라에게 내민다. 이제 그의 손엔 검은 가루가, 그의 마음엔 불편한 때가 남아있지 않다.
불투명한 유리와 그늘을 향한 빛
빌 펄롱이 보여준 작은 온기와 용기
원래 타인의 불행과 사회의 어둠은 잘 보이지 않는다. 빌이 아내를 위해 샀던 네이비 구두, 가방, 크리스마스 케이크같이 행복을 상징하는 것들은 남에게도 잘 보이는 유리 쇼케이스에 진열되는 게 보통이지만 소녀들을 향한 학대와 막달레나 수용소라는 사회의 어둠은 빛이 만든 그늘 어딘가에, 불투명한 유리 뒤(극 중 수녀원 입구의 유리도 불투명하게 표현된다)에 숨어있기 때문이다.
입체적인 물체를 하나 두고 빛을 한줄기 쏘면 명과 암, 밝은 곳과 그늘진 곳이 생긴다. 이때 시선은 자연히 광원과 빛을 받은 곳을 향하게 된다. 이 현상은 우리 사회에서도 그대로 일어난다. 항상 밝은 곳만 주목받고 그늘진 곳은 소외되고, 어둠은 우리 몰래 조용히 그늘진 곳을 노려 내려앉는다 이럴 때 그늘을 바라보고 다른 각도에서 새로운 빛을 비춰준다면 그늘을 없애는 것은 물론 그 안에 숨은 어둠도 찾아낼 수 있다.
빌 펄롱은 사회에 새로운 빛을 비춰주는 사람이다. 빌의 선택이 당장 마을과 사회를 모두 바꿔놓을 수 있을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세라의 인생은 변했으니 그만큼의 그늘이 줄어든 것이다. 사회엔 빌 펄롱 같은 사람이 많이 필요하다. 어둠이 내려앉은 곳에 빛을 비추고 작은 온기와 용기를 모아줄 사람.
혼란한 정세 속에서 이런 영화를 만나고 이런 글을 쓰고 있으니 괜스레 마음이 일렁인다.
*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 참석 후 작성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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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젠틀'해져버린 가이 리치의 ‘언젠틀 오퍼레이션’
신사답지 못한 작전(‘언젠틀 오퍼레이션’, 원제는 ‘The Ministry of Ungentlemanly Warfare’)은 어쩌면 가이 리치를 위한 최고의 영화였을지도 모른다. 가이 리치의 이전 영화는 종종 감독 특유의 인장과도 같은, 영화의 전체적인 질감과 어울리지 않는 튀는 연출로 비판을 받았다. 이를테면, 〈맨 프롬 UNCLE〉과 〈킹 아서: 제왕의 검〉 같은 영화에서 가이 리치는 각각 진지한 스파이물, 시대물에 게임 액션처럼 보이는 과장된 장면을 넣어 영화의 톤을 깨뜨리곤 했다. 그러나 점차 원숙해지면서는 〈알라딘〉과 같은 대형 프로젝트를 능숙하게 성공해내는 감독의 면모도 보였고, 무엇보다 〈젠틀맨〉, 〈캐시트럭〉과 같은 범죄 영화에서는 자신이 남성성과 남성성이 순환하는 세계를 장르 영화로 만들어내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는 점을 입증해 보였다. 심지어 〈젠틀맨〉의 성취에 힘입어 감독 자신이 이를 시리즈화해 넷플릭스에서 〈젠틀맨: 더 시리즈〉를 선보이기도 했다(아쉽게도 완성도는 영화에 한참 못 미친다.) 그래서 기대가 됐다. 영화의 제목이 감독의 스타일, 재능과 잘 어우러질 것이라는 기대감이었다.
그러나 아쉬웠다. 〈언젠틀 오퍼레이션〉은 가이 리치가 만든 좋은 영화가 보여준 덕목 중 제대로 갖춘 것이 거의 없어 보인다. 실화에 바탕을 둔 ‘신사답지 못한’ 작전의 내용은 이렇다. 나치의 유보트가 바다를 장악해 해로가 막힌 상황. 처칠은 불리한 전세를 뒤집기 위해 유보트에 꼭 필요한 보급품을 실은 배와 그 배가 정박한 항구, 독일군을 소탕할 계획을 세운다. 불가능에 가까운 난이도였기에 작전은 거칠 수밖에 없었고, 이 작전이 국내의 화친파를 자극할 수 있기에 극비여야만 했다. 이에 목숨을 버려서라도 나치에 대항할 만한 사연이 있는 사람들과 자기만의 특기가 있는 ‘문제 있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문제는 메인 임무를 수행하는 이들의 작전보다 이들이 수월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항구에서 사전 정지 작업을 하는 자들, 즉 보조 작업을 하는 요원들의 임무가 더 매력적이라는 점이다. 이들의 역할은 전통적인 스파이가 할 법한 일이라는 점에서는 ‘젠틀’하다. 또 나치에게 보급품을 대는 흑인 사업가와 팜므파탈로 분한 비밀 요원의 캐릭터 완성도, 이를 소화하는 배우들의 연기도 매력적이다. 그러나 ‘언젠틀 오퍼레이션’에서 이들의 역할은 어쨌든 ‘보조적’이다. 가장 중요한 임무를 맡은 요원들은 카리스마도, 긴장감도, 선사하는 액션의 재미도 그럭저럭인 데 반해, 영화에서 보조적인 역할을 맡은 자들, 그러니까 ‘신사다운’ 자들은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부수적 작전이 주요 작전을 잡아먹어버리는 것이다.
자꾸 외적인 요소로 요원들이 펼치는 작전의 위험성을 강조하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화친을 목적으로 비밀 작전을 방해하려 드는 장군과 처칠의 명에 따라 작전을 성공적‧비공식적으로 지원하고자 하는 자들 사이의 갈등이 나오는 장면이 ‘언젠틀 오퍼레이션’의 긴장감과 중요성을 환기할 뿐, 정작 작전의 주인공들이 그 위험성을 입증해 보이지는 못한다.
그러니까, 역설적이게도 실화 배경, 매력적인 서브 플롯을 비롯한 극의 구성 등의 요소가 빛날수록 정작 영화에서 가장 빛나야 할 것들의 평범함이 폭로되고 만다. 이왕 실화라는 알리바이를 획득한 이상, 조금 더 가이 리치의 솜씨를 듬뿍 발휘해 스펙터클을 극대화하거나 독특한 캐릭터의 케미를 극화하는 방식으로 과감하게 나아갔으면 어땠을까 싶다. 반대로 실화라는 무게감에 눌렸기 때문이었을까. 가이 리치가 어울리지 않게 다소 ‘젠틀’했다는 느낌이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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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말포함】어른은 없다, 주름진 아이만 있을 뿐
#기쿠지로의_여름 #스포일러_없는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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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he has tested me,
I will come forth as gold.
Job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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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일 극장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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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집단 살인사건 이후 폐쇄된 귀사리 수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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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당할 수 있다면 ‘귀문’을 열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