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5-05-20 15:09:40
우정이 일렁이는 순간을 담은 영화 5선
<해피엔드> 이전에 이 영화들이 있었다!

흔들리는 청춘, 일렁이는 우정...
한 편의 영화에 다 들어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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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사를 바라보는 성찰의 태도
과거사를 바라보는 성찰의 태도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스파이의 아내>는 NHK에서 방영된 TV 드라마를 영화의 형식으로 다시 제작한 영화다. 일본의 어두운 과거를 폭로하고 성찰하는 파격적인 내용 때문에 투자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공영방송 NHK의 제작지원 하에 이 영화는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본래 8K 카메라로 촬영되고 NHK 자사의 4K/8K 채널에 한정적으로 방영 예정이던 드라마는 베니스 영화제 극장 상영을 위해 재작업하는 과정에서 화면비 변경(1.78:1->1.85:1)과 색보정 작업 등을 거쳐 2K로 변환됐다. 8K의 선명한 화질이 2K가 되면서 그 선명도가 떨어진 것임은 분명할 것이나 이 영화가 194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시대극이고, 예산 규모가 그리 크지 않다는 점 때문에라도 둘 사이의 화질 차이를 따지는 것은 어쩌면 무의미한 행위일지도 모른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영화를 만든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 베니스 영화제에서 감독상(은사자상)을 받으며 이 영화는 더욱 회자되었고, 영화화는 잘한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를 보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시대극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모던하게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이 생각은 영화를 볼수록 독특한 영화라는 판단으로 확대됐다. 이 영화는 분명 1940년대 고베를 배경으로 하는 시대극이고, 인물들의 연극적은 대사 톤과 당시대를 옮겨 놓은 듯한 세트, 인물의 동선을 팔로잉하는 연극적인 촬영 방식 이를 분명히 드러낸다. 그러나 여기서 더 나가 이 영화가 전통적인 역사 내지 시대극의 형식이나 스파이 장르물의 공식을 따르고 있느냐는 질문엔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물론 이 말이 이 영화가 과거 사실을 왜곡하거나 어떠한 관점에 편향된 영화라는 말은 아니다. 이 영화가 구성되는 방식에 독특한 지점이 있다는 뜻이다.
먼저, 이 영화의 방점은 어디에 찍혀있나. 보통의 정통 스파이물과는 다르게 이 영화의 방점은 제목대로 스파이보다도 '아내'에 찍혀있다. 보통의 스파이물이라면 범인 찾기 혹은 범인이 범인임을 들키느냐 마느냐 하는 데서 서스펜스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이 영화는 스파이가 누군지를 초장부터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영화의 초점 자체가 스파이가 아닌 그의 아내 사토코에게 맞춰져 있다. 영화는 대부분 사토코의 시점을 따라가고, 관객은 사토코의 심정에 이입을 하며 극을 따라가게 된다. 유사쿠가 스파이라는 것을 알기 전까지, 둘은 섬유무역회사를 운영하며 유복한 생활을 즐겼다. 이들의 집 내부를 보면 유사쿠가 서양의 문화를 동경하고 그에 매료됐다는 걸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 둘은 서로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고, 무척 행복해 보인다.
그러나 이들의 행복은 다가오는 전쟁과 함께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어느 날 유사쿠는 전쟁이 더 심해지기 전에 만주를 보고 오겠다며 급히 만주로 떠나고, 이때부터 두 사람 사이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만주에서 돌아온 유사쿠는 달라져있다. 이상함을 눈치챈 사토코는 그를 추궁하고, 그가 만주에서 일본군이 병균으로 생체실험했고, 그로 인해 죽은 수많은 주검을 목격하고 그 증거를 가지고 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미국으로 가져가 폭로하려는 그의 계획을 듣는다. 헌병대장이 되어 돌아온 사토코의 옛 친구 야스하루의 존재가 부각되는 건 이 시점부터다. 세 인물이 서로를 의심하며 빚어내는 갈등은 이 영화의 서스펜스를 지탱해나간다. 야스하루는 유사쿠를 의심할 만한 정보를 일부러 그녀에게 흘리고, 그녀는 남편을 사랑하지만 풀리지 않는 그의 행동에 점점 의심을 갖게 된다. 이 지점에서 이 영화는 멜로드라마의 형식을 가지기도 한다.
자신은 '코스모폴리탄'이라며 세계시민을 자처하는 유사쿠는 자국 일본의 만행을 세상에 알리려 하고, 사토코는 지금까지 유사쿠의 곁에서 누린 안정적인 삶을 포기하느냐 마느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사토코는 처음엔 그를 배신한다. 남편의 금고에 있던 노트를 야스하라에게 가져가 조카 후미오가 체포되게 만들고, 자신의 남편 또한 의심받게 만든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사랑하는 남편을 택하고, 남편이 스파이라면 자신은 스파이의 아내다 되겠다 선언한다. 그녀를 움직인 것은 '진실'을 밝힌다는 대의보다 사랑이었고, 그녀에게 중요한 건 오직 유사쿠였다. 그러나 대의가 동기가 아닌 것은 아니다. 그녀는 남편이 만주에서 가져온 필름을 영사해 그가 보고 들은 만주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목격하고, 그를 돕기로 마음을 굳힌다.
그러나 미국으로 떠나는 날, 사토코는 유사쿠에게 배신당한다. 누군가 사토코의 행방을 고발해 미국으로 가는 배 안에 숨어있던 사토코는 일본군에게 발각되고 붙잡힌다. 사실 그녀가 맞이하는 결말은 암시됐다. 그녀가 유사쿠, 후미오와 함께 찍은 필름에서. 바로 이 필름, 영화 안의 또 다른 영화 안에서 사토코는 연인의 금고를 털다가 연인에게 들키고, 연인은 그녀가 쓰고 있던 가면을 벗겨 배신자가 자신의 연인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달아나는 연인 사토코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고, 사토코는 그 총알에 맞아 죽음을 맞는다. 연인은 죽은 사토코를 안고 슬퍼한다. 이 필름은 영화 마지막에 가서 다시 상영된다. 많은 일본군들 앞에서. 관객은 그때서야 사토코가 봤던 만주의 참상을 담은 영상을 재촬영한 필름의 일부를 보게 되며, 또한 거기에 입혀진 유사쿠의 필름을 다시 보게 된다.
필름이라는 매개의 의의는 사실상 이 영화의 핵심이다. 관객은 만주에서 벌어지는 생체실험을 직접적으로 목격하지 못하고, 유사쿠가 만주에서 가져온 실험노트와 영상을 찍어온 필름을 통해 간접적으로 보게 된다. 진실을 밝히고 전달하는 수단으로써 기능한다. 또한 필름은 사토코가 유사쿠를 적극 지지하게 되는 계기이기도 하다. 단순 전달을 넘어 새로운 의의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다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유사쿠가 만주에서 가져온 필름은 그가 그곳의 참상을 직접 보고 들으며 찍어온 것이 아니라 그곳에 있던 영상물을 재촬영한 결과물이다. 그곳의 진실은 필름 안에 다시금 담겼고, 누군가가 그것을 그 매개를 통해 간접적으로 목격하고 진실을 알게 되도록, 그것에 대한 직시와 판단을 가능토록 만들었다. 유사쿠가 사토코와 함께 찍은 필름이 덧입혀진 필름을 일본군이 다 같이 보게 되는 것 또한 반대의 의미에서 이 영화의 중요 씬 중 하나다.
덧입혀진 필름에 당황하던 사토코는 남편이 자신을 배신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주 훌륭하다"며 실성한 사람처럼 웃는다. 이어서 배를 타고 떠나며 유유히 손인사를 하는 유사쿠의 모습이 보인다. 자신을 배신했던 연인을 역으로 배신한 인물의 통쾌한 복수극으로 끝날 수도 있었겠으나, 이 영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영화는 수감된 사토코에게로 다시 초점을 맞춘다. 패전의 그림자가 고베에까지 드리웠을 때, 사토코가 불바다가 된 조국을 바라보며 뱉는 대사는 당시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미친 나라에서 미치지 않은 사람은 미친 사람이 되고, 미친 사람은 미치지 않은 사람이 된다. 정상적이지 않은 조국의 패전은 그 비정상의 무너짐에 있어서는 기쁨이 되겠지만, 조국의 패배라는 면에서는 슬픔이 된다. 바닷가에 가 그제야 울분을 토하는 사토코의 모습은 그런 조국을 둔 개인이 결국 맞닥뜨리게 된 피할 수 없는 비극이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일본의 군국주의 과거사를 보여주면서 그에 대한 문제의식을, 지금의 일본이 가져야 할 양심과 반성 의식은 무엇인지를 일깨운다.
"전쟁 중인 시대를 배경으로 하면 진정한 자유와 행복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그려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시대물을 작업해보고 싶었다는 감독의 말처럼 이 영화는 자유와 행복이 어떤 것인지를 보이고, 국가 안 개인이 자신의 자유와 행복을 국가에 의해 어떻게 빼앗기게 되는지 그려낸다. 감독의 반성적이고 성찰적인 양심선언처럼도 느껴지는 이 영화는 군국주의의 잔재 속 극우주의가 만연한 일본에도 아직은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 같다. 지식인이자 예술인의 입장에서 자국의 과거사를 드러내 그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작금의 일본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묻는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성찰적 태도는 일본 영화계의 주목할 만한 새로운 물결 중 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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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은 ‘계몽’될 수 있을까
주변에서 넷플릭스 드라마 시리즈 〈소년의 시간〉에 관한 요란한 상찬이 이어졌다. 원래 인기 있는 드라마는 나중에(심지어는 몇 년 후에) 시차를 두고 보는 걸 좋아하는 터라 버텼다. 그러나 도저히 미룰 수 없을 정도로 반응이 뜨거워지고 있다는 느낌에 뒤늦게 그 대열에 합류했다. 작품에 쏟아진 엄청난 반응에 과장이나 부풀림은 없는 것 같다. 얼마 전 화제가 된 글 〈내 아들을 극우 유튜버에서 구출해왔다〉와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작품이었다. 전 세계가 청소년 남성의 극우화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는 듯하다.
총 4회로 구성된 이 작품은 모든 회차가 원테이크로 촬영되었다. 실제 원테이크로 촬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시청자 입장에서는 그렇다. 원테이크의 강점은 화면 속 인물들의 경험을 시청자가 ‘실시간’으로 접해 몰입감을 높인다는 점이다. 축약된 시간을 수동적으로 전달받는 게 아니라 주인공들과 ‘함께’ 사건을 경험하고 있는 듯한 효과를 내는 것이다. 청(소)년 남성의 극우화라는 시급한 주제에 걸맞는 연출 기법이다.
열세 살 난 청년 제이미가 친구를 살해한 혐의로 긴급 체포되고 경찰 조사를 받는다(1화). CCTV 등은 확보되었지만 범죄에 쓰인 칼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사건의 동기가 오리무중이다. 이 앳된 얼굴의 남자아이가 도대체 왜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을까? 담당 형사가 단서를 찾기 위해 제이미의 학교로 가서 그와 피해자 케이티의 친구들을 만난다(2화). 드라마가 학교를 그려내는 방식을 눈여겨보자. 학교는 처참하고 황량하며 절망적이다. 학교에서는 구토, 양배추, 정액 냄새가 난다. 학생들은 통제 불능이다. 선생님은 그런 학생을 윽박지르거나 어수룩하게 끌려다니기만 한다. 지옥이다. 학교는 “카오스”고, “동물 우리”다. 정말 학교가 저런 곳이었나? 드라마는 자극적인 뉴스로만 접하던 학교 현장을 ‘증명’한다. (다른 시공간에 사는) 내 학생 시절의 기억과 경험이 붕괴되는 듯했다.
학생들을 어찌할 줄 모르는 건 선생님뿐만이 아니다. 경찰, 부모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학생들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독해할 능력이 없다. 참다못한 경찰의 아들이 몰래 그를 찾아온다(그는 ‘유능한’ 경찰인 아빠에게 “아빠는 애들이 뭐 하는지 못 읽어”라고 말한다). 경찰의 아들을 통해 인스타그램에서 제이미와 케이티가 주고받은 댓글과 게시물이 남성성에 관한 잔혹한 조롱이었다는 게 드러난다. 그들 또래의 세계관에서는 80퍼센트의 여성이 20퍼센트의 남성을 좋아하는데, 제이미는 그 20퍼센트에 들지 못했다. 케이티를 포함한 많은 또래 학생이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제이미를 조롱했다는 것도 밝혀진다. 고작 열세 살짜리 남자애가 여자를 ‘갖지’ 못하는 상황에 절망했고, 그 절망이 조롱당하자 사람을 죽였다. 능력주의 경쟁 사회에서 학교는 지옥이고, 어른은 무능하며, 학생들은 능력주의에 연동된 젠더 질서에 무방비로 노출된 채 서로를 혐오한다. 이것이 ‘교육’ 현장 학교의 모습이다. 2화의 마지막, 부감 숏으로 학교를 비추던 카메라가 케이티가 살해당한 곳으로 추정되는 주차장으로 클로즈업된다. 그곳에는 죽은 케이티를 추모하는 꽃다발이 놓여 있다. 너무 늦은 ‘클로즈업’은 아들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을 어느 ‘유능한’ 형사의 무력감을 대변한다.
얼마 후 심리 전문가가 보호 시설에 수감된 제이미를 면담한다(3화). 전문직 여성인 그녀는 노동 계급에서 태어나 자신을 ‘무시’한 또래 여성을 살해한 제이미와 정반대에 있는 인물이다. 두 사람의 숨 막히는 공방이 이어진다. 제이미는 자신을 ‘파악’하려 드는 전문가에 대한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할지를 궁금해한다(‘전문직’과 ‘노동 계급’ 사이의 긴장은 상담사와 보호 시설의 경비원 사이에서도 드러난다). 제이미는 다른 성별인 그녀가 자신의 범행 동기를 ‘이해’할 수 있을지 우려하기도 한다. 당신이 남자의 박탈감을 아느냐는 것이다. 면담이 진행되며, 제이미의 마음속 깊은 곳에 노동 계급 남성성을 갖춘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자기혐오가 들어 있다는 점이 점차 드러난다. 다르게 말하면 ‘루저 남성성’이다. 제이미는 계급, 지위, 연령 등 여러 측면에서 여성 전문가와 대등하게 맞설 수가 없는데, 그는 특유의 영민함과 살인을 저지른 남성이라는 데서 오는 공격적 남성성으로 종종 상황을 반전시키기도 한다.
제이미는 이 대화가 불편하면서도 즐겁다. 대화를 이후에도 계속 이어가고 싶다. 그가 지금껏 해보지 못한 진솔하고 깊이 있는 대화를 통해 ‘이해’받는 느낌을 얻고, ‘전문직 여성’과의 ‘관계’를 통해 루저 남성성의 결핍을 메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문가는 몇 번의 긴장감 넘치는 밀도 높은 대화로 자기 일을 끝낸다. 그래서 더는 제이미를 만날 필요가 없다. 그녀는 면담을 마친 후 힘든 과제를 마쳤다는 듯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다시 제이미를 마주할 필요는 없다. 제이미는 폭주한다.
이 드라마에서 3화가 제일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 아들을 극우 유튜버에서 구출해왔다〉의 글쓴이와 3화의 전문가는 같은 입장을 취하고, 같은 정보를 전한다. 그들은 묻는다. 저 남자아이들이 도대체 왜 저러지? 대화 후 ‘이해’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보거나 들은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고는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 남자아이는 다시 외롭게 남는다. 기존의 분노와 박탈감은 더욱 커진다. 이 회차를 보고 나서, 수많은 글의 ‘분석 대상’이 되는 남자아이들이 왜 자신들을 ‘이해’하려 드는 사람들에게 그토록 커다란 반감을 갖는지 ‘이해’가 됐다. 누군가가 세계를 이해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데 퍼즐 조각처럼 활용된다면, 나 역시 같은 기분을 느낄 것이다. 제이미의 분노는 다른 방식으로 ‘그들’과 접속하고 대화하며 관계 맺을 필요성을 분명하게 환기한다. ‘계몽’의 의도를 내포한 접근이 아닌 그들의 생각과 마음에서 출발하는 내재적 접근, 즉 카메라의 방향 전환이 필요해 보인다.
드라마는 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마무리된다(4화). 아빠의 생일날, 누군가가 가족의 자동차에 ‘강간범’이라는 낙서를 남긴다. 제이미의 가족들은 평생을 살아온 곳에서 낙인과 손가락질을 받는다. 아빠는 비눗물로 이 낙서를 지우려다 실패하고, 결국 분노에 차 페인트를 통째로 낙서 위에 쏟아버린다. 깔끔하지 않게, 얼룩덜룩 지워져버린 낙서는 이 가족이 마주한 현재와 미래의 은유다. 자동차가 달리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계속 저 차는 왜 저렇게 더럽냐며 수군거릴 것이다. 엔딩은 그래도 자동차가 ‘달릴 수 있다’는 데 더 초점을 둔다. 부모는 이 모든 게 자신의 책임이 아닐까 자책하고, 특히 아빠는 남성성의 ‘건전한’ 계승이 실패했다는 데 좌절한다. 그러나 그 자책과 좌절 속에서도 남은 가족이 어떻게 용기와 희망을 길어낼 수 있는지를 작위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제시한다. 이렇게, 어느 청소년 루저 남성과 연관된 하나의 세계(학교, 가족, 남성성, 범죄)가 갈무리된다.
〈내 아들을 극우 유튜버에서 구출해왔다〉의 글쓴이는 아들을 ‘구출’했고, 〈소년의 시간〉에서 남은 가족은 아들과 떨어진 채로 힘겹게 자기 자신을 지탱한다. 현실과 드라마라는 각자의 무대에서, 계급적·문화적 자원의 차이로 서로 다른 결말을 맞이한 이 두 가족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여러 물음과 과제를 남긴다. 내가 얻은 결론은 이렇다. 〈소년의 시간〉과 같은 드라마는 카메라의 방향을 바꾸어서, 즉 ‘루저 남성’이 그에게 박탈감을 주는 대상을 바라보는 방향으로도 나와야 한다. 그래야만 ‘이해’ 혹은 ‘공감’ 혹은 ‘계몽’이 가능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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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명함으로써 탄생하는 예술과 투쟁
'Nan One Month after Being Battered', Nan Goldin, 1984, Tate
대학 교양 수업에서 낸 골딘(Nan Goldin)의 작품을 처음 보았다. 곱슬머리와 80년대 유행 그대로 얇게 다듬은 눈썹, 진주 목걸이, 드롭 귀걸이를 한 여자가 카메라 렌즈를 응시하고 있다. 그러나 의연한 표정, 붉은 립스틱을 깔끔하게 바른 입술과는 달리 그녀의 눈은 격투라도 하고 난 사람처럼 혈관이 터져 붉어졌고, 눈가에 멍이 잔뜩 들었다. 모델임과 동시에 데이트 폭력의 피해자인 자신의 모습을 담은 이 사진 한 장, ‘Nan one month after being battered’(1984)은 그녀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녀는 카메라로 이런 대상을 담는다. 교외에 장만한 집, 푹신한 카펫과 잘 정돈된 잔디, 백인 가족으로 대표되는 안정적이고 바람직한 가족상이 아니라 그곳에 속하지 않는 젊은이들, 그들의 문화를 찍고 또 사진을 통해 권력관계를 가시화한다. 제도와 언론, ‘주류’ 미술계가 모른 척 하는 것들이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낮은 웅성임을 찢고 전시관 입구에 떡하니 걸린 이름을 규탄하는 외침이 들려 온다. 펜타닐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오피오이드계 약물로 인한 수많은 죽음에 책임이 있는 이름을 박물관에서 내리라며, 시위대는 목소리를 높인다.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는 그녀의 이러한 시도에 주목한다. 어느 날 화이트 큐브에 도발적인 작품을 걸어 놓은 용감한 작가일 뿐만 아니라, 견고한 벽을 넘어뜨릴 수도 있을 만한 작가로서의 그녀를 보여줌으로써 관객과 연결되는 것이다. 80년대부터 사진 작업으로 경력을 쌓아 온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리라 기대했던 관객이라면 난데없는 시위 현장을 담은 도입부에 당황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과 그 영감의 원천은 주류에 반하는 이런 힘과 멀리 있지 않다.
그녀의 이야기는 ‘숨 막히는 교외’ 지역에서 시작된다. 이 백인 중산층 가족은 자아를 키워 나가는 딸을 고아원과 정신병원으로 내몰았다. 언니인 바바라가 그렇게 쫓겨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것을 본 낸 골딘은 역시 자라며 집 바깥으로 내몰리고, 위탁 가정과 기관을 전전한다. 그렇게 그녀는 뉴욕의 하위 문화 한 가운데로 흘러 들어갔고, 그곳에서 예술가로 자라났다. 사진이라는 예술 형식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속한 문화,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기록한 그녀는 마치다가오는 시대가 예술가를 알아보듯, 상자 안에 담겨 온 사진을 눈여겨 본 미술관의 관심을 끌어 작가로서 커리어를 쌓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만큼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바로 ‘행동(act-up)’하는 모습이다. 낸 골딘은 60~80년대 하위예술, 자유롭고 낭만적으로 보이기만 하는 젊은이들의 이미지로 기억되는 역사에 머물며 전설적인 아티스트로 남는 것이 아니라 직접 거리로 나서는 운동가, 자신의 영향력을 올바르게 발휘하는 방법을 강구하는 인물로 거듭났다. 그녀는 80-90년대의 에이즈 공포의 한복판에 서 있으면서 친구들이 죽어가는 것을 목격했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제도와 언론이 그것을 모른 체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맥락 속에서 그녀가 찍은 사진은 단순한 기록, 미학적인 가치에 더해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죽음을 세상에 드러내는 창이 되기도 했다.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는 그녀의 삶과 맞닿아 있는 작품 활동을 서술하지만, 사진을 한 장씩 살피면서 촬영 비화를 듣는 방식을 채택하지 않았다. 대신 도입부의 메트로폴리탄 시위에서 시작해 영화는 그녀가 주력하고 있는 오피오이드 약물과 관련된 활동과 집회 프로젝트를 조명한다. 이전에는 캐주얼하게 즐기던 약물은 점점 용량이 늘고, 실수로 단 한 번 들이킨 펜타닐에 곧바로 중독되어 재활한 경험이 있는 낸 골딘은 이번에도 보이지 않는 죽음을 알리고자 한다. 그리고 메트로폴리탄, 구겐하임, 국립 초상화 박물관 등 여러 장소에서 시위를 하여 점점 심각해지는 이 오피오이드계 약물 중독에 대한 인식과 논의를 확장하려 한다. 과거에는 제국주의를 발판 삼아 아시아 등지의 유믈을 수집하고 이후 제약 산업으로 쌓은 막대한 부를 유지해 온 새클러 가문의 이름을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내리는 시도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자신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기관에 가서 시위를 벌이는, 어쩌면 예술가로서의 경력에 영향을 미칠지도 모르는 시도를 그녀는 어떤 죽음들은 두고만 볼 수 없다는 신념을 위하여 감행한다. 그래서 영화를 통해 이 동시대 예술가의 행보를 지켜보는 동안 어떤 문제에 대해 직접 행동에 나서는 것의 가치, 선한 영향력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다.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 all the beauty and the bloodshed’라는 제목은 자신이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 예술을 하기 위한 시발점이 되어 주었다는 그녀의 언니 바바라와 관련된 문구이다. 신기하게도 낸 골딘의 삶과 연결되는 이 말은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작품을 만들어내는 예술가로서의 그녀, ‘유혈사태’를 지나치지 않는 인물로서의 그녀를 절묘히 가리킨다. 그리고 관객 역시 아름다움 뿐만 아니라 유혈사태, 즉 오피오이드계 약물(펜타닐) 중독 문제의 이면에는 거대 제약회사와 그들의 로비가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는 동시대 관객에게 낸 골딘이라는 예술가를 각인시킴과 동시에 개인이 가진 영향력에 대해 고민하게 하는 복합적이고도 매력적인 작품으로서 막을 내린다.
* 본 리뷰는 하이스트레인저 씨네랩에서 초대받아 시사회 참석 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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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모든 엄마와 언니를 위한 기도
7/10
모녀 관계, 자매 관계는 가부장 사회에서 여성 관계의 복잡한 역동이 가장 명료하게 드러나는 장소 중 하나다. 이들은 서로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안다. 아들, 남자 형제는 ‘바깥 일’만 잘하면 가족의 자랑이 되지만 딸, 여자 형제는 여기에 더해 관계를 유지하는 물질적·감정적 노동까지 잘 수행해야만 인정받는다. 불리한 위치에서 불평등한 노동을 떠맡은 이들은 서로를 깊게 이해하지만, 서로를 닮기는 거부한다. 이 관계만 벗어나면 더 좋은 삶이 가능하다는 듯 자꾸 그 관계 밖으로 나가려 한다. 하지만 오랜 시간 얽힌 혈연이라는 관계는 지겹도록 끈끈한 것이어서 이들을 쉽게 놔주지 않는다.
〈라인〉은 바로 이 모녀, 자매 관계를 다룬다. 영화는 딸 마르가레트가 엄마 크리스티나를 구타하기 위해 미친 듯이 쫓아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엄마가 딸을 때리려는 게 아니다. 성인이 된 딸이 엄마를 때리려는 거다. 격렬한 난투극 끝에 두 사람 모두 큰 부상을 당하고(심지어 크리스티나는 장애를 얻는다), 마르가레트는 경찰로부터 석 달간 크리스티나에게 100미터 이내로 접근하지 말라는 행정 명령을 받는다.
또 다른 주인공이 있다. 마리옹은 마르가레트의 막냇동생이자 크리스티나의 딸이다. 앳된 얼굴의 마리옹은 언니와 엄마를 모두 사랑한다. 둘 사이에 더 큰 문제가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집 주위 100미터를 파란색 페인트로 동그랗게 칠해 ‘라인’을 그리기도 한다. 화가 많은 마르가레트와 예민한 크리스티나가 또다시 맞붙으면 두 사람과 함께하기가 영 어려울 것 같기 때문이다.
모녀 관계와 자매 관계는 아슬아슬하게 길항하며 좁힐 듯 좁혀지지 않는다. 영화에는 마르가레트와 크리스티나가 왜 몸싸움을 벌였는지는 분명하게 밝히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이유를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늘 남자를 바꾸며 연애하느라 어린 마리옹에게 소홀한 크리스티나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쉽게 주먹다짐에 휘말리는 마르가레트가 모녀로 만났다면, 갈등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크리스티나는 딸 셋을 출산한 이후 경력이 망가졌다. 앨범까지 발표한 촉망받는 피아노 연주자였던 그는 출산과 육아를 하며 일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피아노 강습으로 근근이 세 딸을 키웠다. 크리스티나는 딸을 사랑하지만 딸들의 존재로 자기 삶이 망가졌다는 생각을 떨치기가 영 어렵다. 크리스티나가 애인을 자주 갈아치우며 세 딸보다 그에게 더 많이 의존하는 데서도 그녀가 딸들에게 느끼는 거리감을 짐작할 수 있다. 크리스티나는 불안하고 예민하다. 반면 마르가레트는 어머니의 음악적 재능을 물려받았으나 쉽게 분노하는 성격 때문에 동료들과 원활한 팀 활동을 이어가지 못한다. 크고 작은 싸움으로 작고 조용한 마을에서 늘 문제아 취급을 당하기도 한다. 하지만 동생 마리옹만큼은 끔찍이 아낀다. 매일 마리옹이 그려 놓은 선 밖을 서성이며 동생에게 음악을 가르쳐주는 마르가레트의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말이다.
그런 둘을 모두 사랑하고자 하는 마리옹의 마음은 간절하다. 마리옹은 ‘유일한 친구’인 하나님에게 애타게 기도한다. “엄마와 언니를 동시에 사랑하고 싶어요.” 마르가레트가 파란 선을 넘지 못하도록(엄마와 새로운 갈등이 생기지 않도록) 엄격하게 감시하던 마리옹은 3개월의 분리 기간이 끝나자마자 가장 먼저 나서 자신이 힘들게 그린 선을 지운다. 마침내 어색한 표정으로, 별일 없었다는 듯 대면하는 마르가레트와 크리스티나의 뒤에는 마리옹이 있다. 서로를 향한 애증으로 잔뜩 엉킨 크리스티나와 마르가레트가 모녀 관계를 이어갈 수 있는 건, 미성숙하고 불안한 어른을 보듬고자 온 힘을 다한 마리옹 덕분이다.
마리옹이 짊어진 책무는 그녀 홀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일이다. 모녀/자매 관계의 복잡다단함은 당사자 간의 내밀한 소통과 더불어 그녀들의 실존 조건 역시 바뀌어야 조금은 ‘가벼워’질 수 있다. 언젠가 어른이 될 마리옹이 부담에 짓눌리지 않기를, 자신이 품은 성숙함의 깊이를 더할 수 있기를, 엄마·언니와 조금은 더 편안히 공존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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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어로써 영화, 감독의 목소리
현재 활동하는 전 세계 영화감독 목록을 뒤져봐도 홍상수만큼 다작하는 감독을 찾기 어렵다. 그는 매년 1, 2편의 영화를 시장에 내놓는다. 그가 15년 동안 성실히 쌓아둔 필모그라피 중 <강변호텔>(2019)이 유독 내 눈길을 끄는 이유는 늙은 예술가로서 홍상수의 목소리가 담겨있다는 심증 때문이다.
홍상수는 배우에게 화면과 상황을 비교적 자유롭게 열어주는 감독이다. 그의 카메라는 역동적으로 움직이거나 화려한 기교 대신 우두커니 서서 인물들을 응시한다. 그래서 홍상수의 영화가 성립하는 지점은 '통제'가 아니라 '전복'에 가깝다. 그리고 인과가 전복(혹은 반복)하는 그곳에 자신의 목소리를 담아내곤 한다.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2016)에서 개연성 없는 자기부정이나,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의 2막 구조 등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강변호텔>에도 전복되는 두 상황이 있다. 하나는 같은 공간에서도 서로를 찾지 못하는 아버지와 두 아들. 다른 하나는 벽 너머 영환(기주봉)의 죽음을 느끼고 눈물을 흘리는 두 여인의 얼굴이다.
강변호텔에 거주하는 늙은 시인 영환은 자신의 죽음을 느끼고 두 아들을 호텔로 부른다. 호텔로 찾아온 두 아들은 로비에 앉아 있던 자신의 아버지를 발견하지 못한 채 꽤 오랜 시간 아버지와 같은 장소에서 서로를 기다린다. 배경이 된 호텔의 규모를 고려했을 때 그들이 서로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 다소 아이러니하다. 더욱이 작은아들인 병수(유준상)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영환을 찾지 못해 호텔 이곳저곳을 맴돌고, 함께 저녁을 먹은 식당에서도 두 아들은 아직 식당 근처에 남아 있던 아버지와 만나지 못하고 따로 호텔에 돌아온다. 그렇게 아버지와 두 아들은 같은 공간에서도 서로의 이름을 부르기만 할 뿐 조금씩 어긋난다.
그들의 대화 역시 결정적인 한 걸음을 내딛지 못한다. 큰아들인 경수(권해효)는 이혼한 사실을 고백하지 않고, 병수는 영환을 찾아 호텔을 헤맸었다는 사실을 숨긴다. 영환 역시 두 아들에게 방으로 돌아간다고 말하지 않아 병수를 찾아 헤매게 하고, 식당에서 나와 혼자 호텔로 돌아간다는 거짓말로 두 아들을 먼저 호텔로 보낸다. 대화의 결여와 오인은 소통의 실패로 이어진다.
그런데 줄곧 소통에 실패하던 두 아들과는 다르게 <강변호텔>에 등장하는 두 여인은 벽 너머에서도 영환의 죽음을 느낀다. 그 직전 장면에서 영환은 두 여인 앞에서 자신이 쓴 시 한 편을 낭독하는데, 영환의 목소리 뒤로 시의 화자로 추측되는 제3의 인물이 등장한다. 앞서 두 아들과의 대화에서 삽입된 두 번의 몽타주컷에서 영환이 호텔 주위를 거니는 모습이 등장한 것과는 대비를 이룬다. 두 아들과의 대화에서 등장한 몽타주컷에선 영환이 존재하지만 두 아들은 그 시점에 존재하지 않았다. 즉, 이 몽타주컷은 영환의 기억이지 두 아들과 함께 공유하는 기억이 아니다. 반면 마지막 몽타주컷은 영환과 두 여인 모두 그 시점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장면은 영환과 두 여인이 공유하는 기억이 아니라 영환 역시 두 여인과 같은 목격자이다. 같은 장면을 상상한 그들은 교감에 성공한다. 두 아들과의 소통이 실패로 돌아갔던 걸 고려해봤을 때, 말이 아닌 예술(시)로써 이뤄지는 소통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장면으로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늙은 시인 영환은 대중인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 홍상수와 여러모로 겹쳐 보인다. 전 부인을 버리고 새로운 여자와 사랑에 빠졌고, 그런 자신을 전 부인이 죽도록 원망한다는 설정이 그렇다. 이런 점에서 나는 감독이 늙은 시인의 몸을 빌려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다. 그래서 내겐 <강변호텔>이 자신의 목소리가 오인될 '말'이 아닌 자신이 늘 하던 대로 '예술'로써 발언하겠다는 홍상수의 영화적 선언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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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풋사랑의 시작부터 마침표까지, 변화하는 삶의 궤적 속 찾아오는 감정을 잘 표현한 영화 <여름날 우리>
풋풋한 사랑 이야기를 기대하면 본 영화 <여름날 우리> 하지만 생각보다 가볍지 않았고, 청량함 속에서도 삶의 변화와 감정을 고스란히 잘 담아낸 작품이었다.
영화 <여름날 우리> 시놉시스
처음이었다, 사랑이 싹트는 기분. 너에게 풍덩 빠져버렸던 17살의 여름. 너를 두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21살의 여름. 그리고 몇 번의 여름이 지나고 다시 만난 너, 이젠 놓치지 않을 거야. “널 만난 건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었어”
고등학생 수영선수였던 저우 샤오치의 눈에 들어온 요우 용츠. 요우 용츠는 중국어로 수영장과 발음이 비슷하다. 그래서 자우 샤오치는 매일같이 가는 수영장을 갈 때마다 그녀 생각이 떠오른다. 그녀의 눈에 들기 위해 애를 쓰던 저우 샤오치는 수영반의 1등 샤크와 수영대결을 하게 된다. 샤크와의 수영대결에서 졌지만 이를 계기로 저우 샤오치는 용츠와 더욱 가까워진다. 그렇게 친해지나 싶었지만 집안 사정으로 학교를 전학가게 된 용츠를 떠나보내고 다시 활력을 잃었던 샤오치는 용츠가 대학에 입학했음을 알고 사력을 다해 공부를 시작한다. 같은 대학에 입학한 저우 샤오치, 과연 사오치는 용츠와 다시 이어질 수 있을까?
*해당 내용은 네이버 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여름날 우리>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나의 기대와 다른 상대방, 하지만 그런 상대방도 존중하는 배려
저우 샤오치는 상당히 순수하다. 요우 용츠를 만나기 위해 공부에 뜻이 없었지만 그리고 수영에 딱히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지만 요우 용츠가 있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사력을 다해 노력을 했고 입학에 성공한다. 그런 저우 샤오치는 요우 용츠 역시 자신을 만나면 좋아할 것이라는 빗나가는 센스를 발휘하고 요우 용츠 앞에 나타나지만 요우 용츠는 이미 남친이 있기에 그런 저우 샤오치를 조금은 부담스러워한다.
하지만 실망은 접어두고 저우샤오치는 자신 나름 요우 용츠에게 최선을 다하며 남학생으로는 유일하게 여학생회에 들어가고, 함께 치어리딩을 하며 자신의 존재를 계속 각인시킨다. 이런 저우샤우치의 모습을 보면서 남성성만 부각하는 것이 아니어서 좋게 다가왔다.
변화하는 삶 속에서 때때로 등장하는 후회의 감정들
영화 <여름날 우리> 속에서 주인공들의 사회적 위치는 계속해서 변화한다. 고등학생이던 용츠와 샤오치는 공부를 잘하는 용츠와 공부에는 뜻이 없는 샤오치로 등장한다. 대학에 진학해서까지 비슷하게 유지되다가 대학 졸업 후 촉망받는 수영선수 샤오치와 디자이너라는 꿈을 접고 모델일을 해야만 했던 용츠로 그 관계는 역전된다. 그간 어리광을 부리던 샤오치를 받아주는 누나같은 용츠였는데 졸업 후에는 어느샌가 듬직한 샤오치로 성장하고 용츠가 여기에 기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부상을 겪은 샤오치는 더이상 선수생활이 힘들어지고 그 과정에서 용츠는 디자이너로서 차근차근 장해가며 다시금 관계가 역전된다. 이렇게 변화하는 지위 속에서 등인물들은 후회를 하게 된다. 내가 만약 그 때 안그랬으면 어땠을까? 혹시 그냥 시합에 나갔더라면? 이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게끔 만들면서 이 후회의 감정은 두 사람을 갈라놓게 된다. 어떤 사람이든 언제나 성공을 할수도 그리고 언제나 실패 속에 머물러 있지도 않는다. 그러한 삶의 과정들을 특히 20대에 겪을 수 있는 과정을 영화 여름날의 우리는 잘 표현해주고 있었고, 그 속에서 사소하게, 그리고 관계를 뒤흔들 수 있는 후회라는 감정을 잘 녹여낸 작품이었다.
단 한 끝차이, 너를 위해서와 너 때문에
영화 <여름날의 우리>는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도 변하지 않을 수 있는 마음이라는 게 있을지에 대해 질문을 잘 던진 작품이었다. 용츠가 꿈을 향해 한걸을 내딛을 때 샤오치는 꿈으로부터 멀어지는 좌절을 경험한다. 이렇게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변화하면서 상대방이 잘못한 것은 없지만 연인을 '위해서' 한 과거의 행동을 연인 '때문에' 했다며 책망하는 모습을 보인다.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점점 자신의 세계와 멀어져 가는 듯한 상대방을 보면서 언제나 같은 마음으로 사랑하고 위하는 마음을 같기는 어렵다. 더욱 노력을 해야하고 배려를 해야한다. 하지만 이 과정은 말처럼 쉬운일이 아니다. 자신의 환경이 변화하면서 그 원인의 화살을 남으로 돌리는 이 이기적인 마음이 연인 뿐만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얼마나 큰 상처로 다가갈 수 있는지, '너를 위해서'와 '너 때문에' 라는 이 한끗차이가 얼마나 커다란 것인지 다시금 되새겨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영화 <여름날 우리>는 가벼운 풋사랑 같은 이야기라 생각했지만 그 속에서 굉장히 다양한 감정과 변화하는 삶의 궤적을 살펴볼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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