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서2025-05-22 23:52:18
이 세계의 사랑법
우리의 세계는 이미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해당 리뷰는 씨네랩 초청 시사회 관람 후 작성되었습니다.
<나를 모르는 그녀의 세계에서>는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등 이미 다수의 로맨스 영화를 감독한 미키 타카히로 감독님의 신작이다.
주인공인 리쿠는 베스트셀러 작가이다. 대학시절 운명적으로 만난 아내 미나미와는 결혼한지 8년차. 리쿠는 글을 쓰고 미나미는 음악을 하며 다정히 사랑했던 연애 초반과는 다르게, 이제 그에게 미나미의 내조는 부담스럽기만 하다. 미나미에게 보여주기 위해 소설을 쓰기 시작했던 그였지만, 사회적인 성공을 얻기 시작하며 그때의 마음은 퇴색 되었다. 소설의 마지막 탈고를 앞두고 있던 시점, 엔딩을 보여 달라던 미나미의 말을 무시하고 잠든 다음 날, 눈을 떠보니 자신이 알던 현실과는 전혀 다른 평행세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리쿠. 아내 미나미가 자신을 전혀 알지 못하는 낯선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오히려 성공한 싱어송라이터로서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세계이다. 리쿠는 다시 한 번 그녀와의 사랑을 시작하기로 결심하고, 그녀의 마음을 열기 위해 처음부터 다가간다.
평행세계라는 소재를 끌어왔어도 판타지 영화보다는 로맨스 영화에 훨씬 큰 축을 둔 듯 하였다. 특히 로맨스 영화에서 자주 쓰이는 클리셰적인 연출은 자칫 과하다 느껴질 정도로 부각된 편이다. 클리셰적인 연출이 가장 기능적으로 유려하게 쓰인 부분은 단언컨대 오프닝 타이틀이다. 리쿠와 미나미의 연애 과정은 첫 만남의 파트를 제외하고, 타이틀이 뜨는 동안 전부 관객들에게 보여진다. 뻔하다 느껴질 수도 있으나, 대신 대사 한줄 없어도 '리쿠와 미나미의 행복할 줄 알았던 결혼 생활이 리쿠의 사회적 성공과 함께 빛바랬다'는 긴 시간의 압축을 관객들은 놓침 없이 따라갈 수 있다.
그리고 이미 수없이 다른 영화에서 반복 되었던 클리셰들로 예측 가능한 전개를 만들어내는 이 영화는, 로맨스 장르로써 자신이 지니고 있는 가치를 서브 인물들의 레이어를 통해 만들어낸다. 주인공들 만큼 조연들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지는 영화. 주인공들이 메인 스토리를 끌어가는 사이에 조연들이 다채로운 레이어를 만들어낸다.
조연들의 이야기는 이 영화가 단순히 ‘사랑을 다시 시작하는 이야기’에 머물지 않도록 깊이를 더한다. 리쿠가 도달한 평행세계는 그냥 우연히 생긴 곳이 아니다. 누군가는 슬픔을 껴안고, 누군가는 자신의 상실을 견디며 끝내 이 삶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지되고 있는 세계다.
그중에서도 특히 인상적인 인물은 리쿠의 선배이다. 이 세계의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지만 그 고통을 세상과 단절하는 방식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조용히 자신의 일상을 이어가며 살아간다. 그의 존재는 말하지 않아도 리쿠에게 이렇게 전하는 듯하다. “다시는 사랑할 수 없더라도, 그 사람을 기억하며 살아갈 수는 있어.”
그는 자신의 삶을 멈추지 않음으로써, 이 세계에서 리쿠가 다시 사랑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준다. 리쿠는 그런 이들의 이야기를 곁에서 지켜보며 자신이 살아왔던 세계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감정과 선택 위에 놓여 있었는지를 뒤늦게 알아간다.
더불어 미나미의 할머니는 이 세계의 또 다른 축을 담당한다. 그녀는 젊은 시절 자신이 간절히 원했던 꿈을 내려놓고, 가족의 탄생을 선택한 인물이다. 결국 선대에 존재했던 그녀의 희생 덕분에 미나미가 살게 되고, 리쿠와 만나고, 리쿠가 그녀를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지워진 선택들, 화려하지 않아도 단단한 선택들이 쌓여, 이 세계의 미나미가 지금의 자리에서 노래할 수 있게 되고 저 세계의 리쿠가 미나미를 사랑할 수 있었다. 주인공의 촘촘한 주변 세팅을 통해 이 영화는, 우리가 ‘평범하게 살아간다’고 여겼던 순간들조차 사실은 누군가의 포기와 헌신, 배려 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감성적으로 되짚는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가족일 수도, 친구일 수도, 이름조차 알지 못했던 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결국 리쿠가 도달한 진실은, 자신이 돌아가고 싶어 했던 원래의 세계는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지금 이 세계는 누군가의 눈물과 결단, 그리고 사랑이 모여 만들어진 결과였고, 그는 그 안에서 단지 소비자처럼 사랑을 받아왔을 뿐이라는 자각에 다다른다. 이 영화는 그렇게 말한다. 모든 세계는 결국 누군가가 사랑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고.
그러니 이 영화를 본 우리도 기꺼이 사랑하고, 기꺼이 나를 던져, 누군가의 세계가 되어볼까.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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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 제 28회 부산국제영화제 기대작 모아보기
부산국제영화제 BIFF 가 10.04(수) ~ 10.13일 개최됩니다! 부산국제영화제는 1996년 제1회를 시작으로 현재는 대한민국을 넘어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화제 중 하나로 자리잡았는데요.
초청영화들은 장르에 구애되지 않고 다양하게 선정하는 것이 바로 BIFF가 내새우는 상징성이죠.
할리우드 제작 영화부터 칸, 베를린, 선댄스 영화제 수상작, 애니메이션, 독립영화, 예술영화, 단편영화등 다양한 시각을 경험 할 수 있는 영화의 축제! 2023년도 기대작 같이 보아요
[한국이 싫어서 / 장건재]
cinepick
장강명 작가의 동명 소설 『한국이 싫어서』(2015년)를 원작으로 20대 후반의 ‘계나’가 자신의 행복을 찾아서 어느 날 갑자기 직장과 가족, 남자친구를 뒤로하고 홀로 뉴질랜드로 떠나는 이야기
[공드리의 솔루션북 / 미셸공드리]
cinepick
괴짜 영화감독 마크는 자신을 해고하려는 영화사 경영진으로부터 도망친다. 작은 마을에 도착한 마크는 부족한 자신의 영화와 현실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자신만의 솔루션북을 만들게 된다.
[괴물 / 고레에다 히로카즈]
cinepick
초등학교 5학년 미나토가 담임 선생님에게 입에 담지 못할 말을 듣고 구타도 당했다는 얘기를 듣고 화가 난 어머니가 항의를 하러 간다. 학교는 정확한 진상을 파악하는 대신 형식적인 사과만 반복된다.
[나의 올드오크 / 켄 로치]
cinepick
영국의 북동쪽에 위치한 한 마을, 폐광이후 몇 주민들만이 마을을 지키며 사는데 빈집이 늘어나면서 집값을 계속 떨어지고 영국 정부에서 허가한 시리아 난민들이 이 마을로 집단 이주를 하면서 묘한 긴장감이흐르게 되는데..
[더 비스트 / 베르트랑 보넬로]
cinepick
『정글의 짐승』을 자유롭게 각색, 세 시대에 걸쳐 환생하는한 여자와 남자, 그리고 매번 두려움 때문에 실패하는 이들의 관계를 카메라에 담았다.
[더 킬러 / 데이비드 핀처]
cinepick
이 남자의 정체는 전문 암살자이다. 암살해야 하는 인물이 도착하고 실패할 경우 상상치 못했던 결과가 올 것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수일동안 기다려왔던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마지막 준비를한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 하마구치 류스케]
cinepick
개발이 진행되지 않은 작은 산골 마을. 코로나 위기가 끝나가자 마을에 글램핑 야영장을 건설하겠다는 주민 설명회가 열린다. 주민의 반대 의견이 이어지자 회사는 주민을 설득하기 위한 묘수를 고안해낸다.
[가여운 것들 / 요르고스 란티모스]
cinepick
젊고 아름다운 여성 벨라와 함께 살고 있는 해부학 교수 고드윈 벡스터. 그의 제자인 맥스는 벨라에게 마음을 뺏기게되고 고드윈 박사로부터 벨라는 얼마 전에 자살한 여자를 자신이 의학적으로 되살린 것이라는 충격적인 말을 듣게되는데
[영화의 황제 / 닝하오]
cinepick
홍콩 영화 스타 라우 웨이치는 홍콩필름어워즈에서, 이번에도 남우주연상을 놓친다. 진지한 영화로 영화제 수상을 노리기 위해 린하오 감독과 영화를 찍게되지만 뜻대로 풀리지 않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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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멈추지 않는 것들은 저마다의 속도가 있다
행복의 속도
줄거리
'천상의 화원'이라 불리며 일본 자연경관을 대표하는 '오제 국립공원'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차량이 통제되는 이곳에는 산장으로 물건을 배달하는 '봇카'들이 있다.
그들은 지게에 높은 짐을 쌓아올리고 묵묵히 하루하루를 걸어나간다.
24년차 베테랑 봇카 '이가라시'와 9년차 봇카 '이시타카', 두 사람이 걸어가는 '행복의 속도'는 과연 얼마일까?
멈추지 않는 것들은 저마다의 속도가 있다
숨은 의미 찾기
"속도"
영화는 봇카를 바라보며 속도에 주목한다. 당연해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봇카라는 직업을 통해 관심을 갖는 키워드는 '무게'일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무게가 아닌 속도에 초점을 맞추며 그야말로 입체적인 시각을 통해 '봇카'라는 직업을 우리네 보편적인 삶의 궤도에 올려 놓는다.
24년차 베테랑 봇카인 이가라시.
영화는 이가라시의 가족들이 함께 둘러앉아 저녁을 먹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칭얼거리는 둘째 아들,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첫째 아들의 만화영화, 주방과 거실을 왔다갔다 하는 아내. 복작복작하고 정신 사나운 와중에도 가족은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며 밥을 먹는다. 마치 제멋대로인 구성원 각자의 시간들이 식탁이라는 중심점을 기준으로 일정한 패턴을 유지하며 은하수를 구성하는 것처럼.
이가라시의 가족은 각자만의 고유한 시간들이 존재한다.
봇카를 하는 이가라시는 산장에 짐을 가져다주고 홀가분한 어깨로 오제를 내려올 때면 카메라로 주변 풍경을 담는다. 이가라시의 아내는 일을 끝내면 밭에 콩을 심고, 거실에 앉아선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낸다. 첫째 아들은 주로 게임을 하거나 만화를 보고, 아직 어린 둘째 아들은 형의 리모콘을 빼앗아 엄마 주변을 맴돈다. 이렇듯 그들에겐 각자가 살아가는 루틴이 있고, 그것은 도무지 합치되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한데 어우러져 하모니를 이룬다.
중요한 점은 그들에게 있어 각자의 시간이란 결코 침범당해서는 안 되는 존중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침범하지 않는다고 해서 벽을 치고 사는 것은 아니다. 여름방학을 맞은 첫째 아들과 함께 자신이 물건을 가져다주는 산장에 묵으며 하룻밤을 보내기도 하고, 온 가족이 가을길 산책을 나서서 잠자리를 잡으며 즐거운 한 때를 보내기도 한다. 이렇듯 각자의 시간을 추억이라는 케이블 선으로 공유하면서 행복이라는 에너지를 충전하는 가족이 있다.
한편 9년차 봇카인 이시타카가 있다.
그는 '일본청년봇카대' 대표로서 봇카라는 직업을 널리 홍보하고자 애쓴다. 봇카 일이 없는 날이면 도시로 나가 관광업체와 미팅을 하는 등, 그의 일상은 쉴 새 없이 바쁘다. 그래서일까, 그의 가정은 보다 이시타카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경향이 있다. 전업주부인 아내는 항상 앞치마를 하고 밥상을 차리느라 바쁘고, 아이는 냉찜질을 하고 파스를 바르는 아빠 곁에 붙어서 하루를 보낸다.
이시타카는 자신의 시간을 최대한 남들에게 권유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사실 그의 나이대를 생각했을 때, 함께 맥주를 마셨던 친구들을 떠올려봤을 때, 그는 분명히 도시에서 숨가쁘게 살아가던 한 명의 청년이었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그가 왜 봇카라는 직업을 선택했는지,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영화에서 다루지 않았으므로 알 순 없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그는 마구잡이로 내달리는 도심의 현대인들에게 조금 더 천천히 가면 어떻겠느냐고 권유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지게에 주로 음식을 지는 이가라시와 달리, 이시타카는 가스통 같은 물건을 지는 장면이 많았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가족을 부양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있음을 의미한다. 아직 자라려면 한참 남은 아이, 집안을 돌보느라 직업을 가질 수 없는 아내. 무릎과 발목은 점점 아파오는데 봇카 일을 하려는 사람들은 점점 사라져가고.
젊은 이시타카로서는 어떻게든 봇카를 알리는 일에 미래가 걸려있다.
그는 봇카를 홍보하며 '도심의 속도에서 벗어나자'고 말하지만, 몸소 실천하고자 자신도 오제에 정착했지만, 자신 스스로도 여전히 도시의 무자비한 속도에 공포를 느낀다. 그는 런닝머신에서 뛰다가 막 땅으로 내려온 사람같이 빠른 걸음을 걷는다. 그것이 이시타카의 발걸음을 클로즈업했을 때, 이가라시보다 불안정한 이유다.
이들의 '시간'에 대한 구성방식이 다른 이유는 그들의 부모를 통해서 유추할 수 있다.
이시타카는 오랜만에 내려간 부모님의 집에서 잔소리를 듣기 바쁘다. 몸이 상하면 어쩌니, 회사원이 더 안정적이지 않겠니, 아내는 너에게 온전히 의지하고 있잖니... 이시타카와 그의 아내는 죄인처럼 고개를 떨군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다. 그들을 진심으로 걱정한다기보단, 그들 가족이 시간을 채워가는 방식이 불만스러운 듯 하다.
어쩌면 이시타카가 더욱 봇카를 알리는데 힘쓰는 것이 여기에서 나오지 않았나 싶다. 그는 이전 세대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강요당한다. 그래서 더더욱 본인의 직업에 대해 미래지향적인 태도를 띄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인정받고 싶기 때문에.
그에 반해 이가라시의 어머니는 그저 아들이 찍어온 사진을 구경하는데 여념이 없다. 아무도 걷지 않은 아름다운 겨울의 오제를 보며 감탄하는 어머니. 그리고 그 사진을 어떻게 찍게 되었는지 설명하는 아들. 함께 눈싸움하는 며느리와 손주들. 더불어 어머니의 집에는 아들의 흔적이 가득하다. 자랑처럼 벽에 걸린 아들의 사진까지. 이시타카와 달리 이가라시는 이전 세대로부터 자신의 시간을 존중받았기에, 인정받는 데에 집착하지 않는다.
"우리가 봇카를 할 때, 더 틀을 잡아놨어야 했는데."
이가라시가 제설작업을 할 때 만난, 지금은 봇카를 은퇴한 선배는 이가라시에게 말한다. 자신들이 미안하다고, 자신들이 제대로 하지 않아 봇카가 사라져서 남은 사람들이 더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다고. 하지만 그건 미련한 사과다. 물론 이전 세대가 노력함으로써 다음 세대가 짊어질 짐을 덜어줄 수는 있었겠지만, 그 때 제대로 된 틀을 잡아놨다고 해도 지금 봇카가 많이 남아있으리란 보장은 없다.
다음 세대는 다음 세대만의 속도가 있다.
헬기 회사의 경영 상황이 악화돼서 철수하면 봇카들은 더 많은 짐을 지게 된다. 그럼에도 지금 남아있는 봇카들이 계속 짐을 나르는 이유는 무얼까. 자신이 선택했기 때문이다. 선택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봇카의 자식들을 바라볼 수 있다. 봇카의 자식들은 봇카가 될까? 그건 모른다. 이가라시와 이시타카의 자녀들이 도시로 내려갈지, 오제에 남을지는 본인들이 선택할 몫이다. 이전 세대는 다음 세대의 길에 결코 관여해서는 안 된다. 타임머신이 발명됐다고 해서 역사를 바꿔서는 안 되는 것처럼. 자신만의 길을 자신만의 속도로 걸어갈 수 있도록 묵묵히 지켜보고 응원하는 것 밖에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없다.
이가라시와 이시타카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그들이 살아가는 시간이 현재냐, 미래냐에 있다.
이가라시에게 속도는 그가 딱 24년간 유지하고 있는 그 속도를 말한다. 그는 오랜 시간을 들여 결국 자신에게 딱 알맞은 속도를 찾아낸다. 유독 이가라시 가족이 나올 때면 스크린에 자연경관이 가득하다. 이는 이 가족이 자연의 속도, 즉 계절의 흐름에 발맞춰 걸어가고 있다고 말함과 동시에 그들이 걷고 있는 길이 곧 행복임을 뜻한다. 그러니 그들은 서두르지 않고 그저 현재를 살아간다. 행복이 움직이지 않고 늘 발밑 그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이가라시 가족에게 있어 행복은 현재진행형이다.
그에 비해 이시타카의 속도란, 조금 더 복잡하고 단계적이다. 그의 행복은 현재와 미래에 걸쳐 나눠져있다. 느긋하고 여유로운 이가라시를 보다가 이시타카를 보면 초조하고 급박한 마음이 든다. 이시타카가 원하는 행복은 앞서가고 있고, 이시타카는 그것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는 결코 이시타카를 동정하는 눈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미래의 행복에 다다르기 위해 걸음의 속도를 높이지만, 그가 지금 디디고 있는 땅에도 현재의 행복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시타카에게 '위로'가 아닌 '격려'를 던진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 중 하나가 무거운 짐을 지고 일어나는 이시타카를 이가라시가 지켜보는 것이었다. 짤막한 이 장면에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가라시는 계속 휘청거리는 이시타카를 도와주지는 않지만, 그가 자기 힘으로 일어날 때까지 묵묵히 옆에서 기다린다. 그가 일어날 수 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믿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두 사람이 나아가는 길은 다르다. 그러므로 이시타카가 미래를 위해 걸어가는 것은 이시타카 나름의 속도이다. 행복이 어떤 명확한 물체로 존재하지 않듯이 속도도 마찬가지다.
걸어가든 뛰어가든 속도는 우리가 멈춰있지 않는 한 언제나 존재한다.
'아무도 걷지 않은 길 위에 서 있는 모든 사람을 응원한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전, 스크린을 가득 채웠던 문구다. 백 명의 사람 앞에는 백 개의 길이 있다. 누구나 자신만의 시간, 자신만이 짊어질 무게,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속도, 그 모든 것을 유지하며 자신만의 길을 걸어간다. 아무도 걸어가지 않은 길 위를 걸어간다고 좌절하지 말자. 어쩌면 그 길은 오로지 나만을 위해 준비된 길일지도 모를 테니까.
그들은 왜 오제로 갔을까
감상평
"보통 베테랑 봇카는 몇 kg이나 매요?"
영화 속에 등장하는 관광객은 자연경관을 설명하는 이가라시에게 묻는다. 영화에서 이 무게가 아닌 속도에 초점을 맞춘 것은 대단하지만, 다르게 보면 현대인들이 느끼는 묵직한 무게감을 외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에서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그들이 왜 오제에서 봇카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이 가는 길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어쩌다가 이런 속도를 유지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는 그들이 걸어가는 속도를 온전히 받아들이기란 어렵다. 더불어 그들이 짊어진 삶의 무게 역시 속도와 연관이 있기 때문에 '왜'는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걸어가는 길을 우리네 인생으로 확대시켰다는 점에서는 좋은 영화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롯이 하나의 메세지만을 던지는, 잔잔하게 울려퍼지는 그런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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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좌수사 이순신 그의 난중일기
책 한 권을 빌렸다. 바로 호란과 임진왜란에 대해 조사한 책이었다. 갑자기 자타공인 역덕이 되고 싶은 나. 냅다 깊게 파는 나의 역사덕후적 호기심이 빛을 발한다. 아니. 역사 이야기 능수능란하게 푸는 사람들 멋있지 않아? 어느 년에 뭐가 일어났고 어떤 것 때문에 발생했고 이런 거 줄줄줄 설명하면 왠지 모르게 멋지다. 역사가 약하다는 말은 사실 거의 모든 것이 약점이라는 말을 한 누군가의 명언이 생각난다. 그래. 맞는 말인 것 같아. 왠지 이 부분을 파면 다 잘 풀릴 것 같다.
풀릴지 안 풀릴지는 미래의 내가 아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모르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나 싶다. 어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굴러다니는 짤들 보다 책으로 읽는 게 훨씬 더 생산적이지 아닐까? 반지성주의가 판치는 이 시대 지성에 그나마 다가가는 것이 민주사회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 믿는다. 이 영화라는 문화예술도 사실 이 '지성'이라고 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영화를 봐도 역사적 맥락과 관련 있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우리나라는 시대극 만들기 좋다. 위대하고 극적인 인물이 많이 나와서 그런게 아닐까 싶다. 이 영화는 이 시대극 만들기 좋은 한국사를 소재로 했다. <외계+인> 1부에 이은 여름 대작 두 번째, <한산 : 용의 출현>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다음 1달 후의 조선으로 가보자.
해저 괴물 복카이센
문제가 뭘까? 다 알 것도 같았다. 일본의 장수 와키자카는 해저 괴물 거북선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쉽게 끝날 것 같았던 전쟁. 이웃나라 조선은 당파싸움에 여념이 없었다. 전쟁에 대한 대비가 단 조금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쉽게 이길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답답함이 아쉽다. 갑자기 느닷없이 나타난 이순신이라는 존재에 머리가 아프다. 와키자카는 해저 괴물 복카이센이 전장을 휩쓸고 있다는 말에 여러 번 생각을 되뇌인다. 할 수 있어. 전염병 같은 두려움만 이긴다면.
‘해저 괴물 복카이센’을 이끌던 장수의 관점으로 돌아간다. 전쟁 중이었던 해전. 거북선이 일본의 배에 부딪혔다.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조선의 거북선. 일본의 배와 조선의 거북선이 붙은 상태에서 백병전이 열렸다. 거북선에서 배를 이끌던 장수 나대용은 방패 하나와 무기를 들고 들이받은 배의 일본 장수 둘을 제거하려 배의 위로 올라간다. 조총이 빗발치던 전장. 방패로는 한계가 있었다. 왼쪽 허벅지에 총알이 박힌 나대용. 위기의 순간, 일본 장수와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어디에선가 날아온 화살이 나대용을 구해줬다. 나대용을 구한 사람은 이순신이다. 처절한 전투 끝에 부하를 구한 이순신. 그렇게 임진왜란의 어느 전장을 보여주고 카메라는 1달 후를 비춘다. 이순신은 전투에서 생포한 포로들을 심문하다 왜나라가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예감한다. 이순신은 열세의 전장을 뒤집어 조선을 구할 수 있을까?
자주 봤었지
사실 이순신 장군의 위대함은 다들 알고 있다. ‘우리에겐 12척의 배가 있소’부터 시작해서 우리 역사에 수많은 명장면을 만들어낸 이순신 장군. 우리나라의 위대한 전쟁영웅 하면 늘 들어가는 이름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순신 장군이라는 소재는 적지 않게 사용됐다는 뜻이다. 우리나라 영화 역사상 가장 많은 관객이 들어갔던 것이 <명량>이다. 또 내 나이 또래라면 다들 기억하는 <불멸의 이순신>도 있다. 굳이 영상매체가 아니더라도 한능검이나 교과서에서도 임진왜란 이야기는 자주 본다.
전쟁영웅의 이야기라 봐도 봐도 좋은 이야기겠지만 이는 곧 창작의 어려움을 의미하기도 한다. 어떻게 관객에게 어필하지?를 생각해보자. 여러분과 내가 각본가라고 해보자. 이야기를 2시간가량으로 구성하고자 하면 뭔가 신선한 아이디어가 생각나지 않는다. "1) 일본이 우리나라에게 명분 없는 침략전쟁을 일으킴 2) 한산도, 노량, 명량 해전에서는 조선이 승리한다" 같이 두 결론을 내고 논리관계를 만든다는 것 자체도 충분히 어렵다. 근데 이에 틀어맞게 이야기를 만든다는 것은 난이도가 한 단계 올라가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보기 전에 이런 점이 마음에 걸렸다. 이거 또 봤던 이야기 하는 거 아닌가? 또 전작 <명량>에서 흔히 말하는 ‘국뽕’ 마케팅은 이런 우려에 부채질을 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이런 단점들을 적당히 잘 보완했다.
좋은 기획
일단 영화는 조선의 관점에서 풀지 않는다. 전적으로 일본 장수 와키자카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 영화의 간단한 배경과 결말은 우리 모두 다 알고 있다. 바로 한산도 대첩은 조선의 압승으로 승리한다는 것이다. 보통 어떤 일의 긴장감은 결과를 모르기 때문에 느껴진다.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저>에서 버키와 캡틴이 맨몸액션을 벌인다. 둘 다 호각세의 능력자들이기 때문에 합을 주고받는 것이 어떤 결론으로 향할지 예상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영화는 이 ‘결과를 알 수 없음’의 서스펜스를 과감히 포기했다. 그 대신 후반부 하이라이트 신을 위해 최대한 반대편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러니까 이순신 장군이 기획하고 싸운 전쟁영화임에도 주인공이 두 명이 되는 셈이다. 그것도 물리적인 분량은 와키자카 쪽이 더 많다.
이렇게 되면 갖는 이점이 생긴다. 앞에서 썼듯 왜 나라의 관점에서 이순신의 지략가적 면모가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이 덕에 같은 소재의 전쟁영화가 있더라도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보다 신선하다고 느끼기 쉬울 것 같다. 구체적으로 써보자면, ‘반전’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기본적으로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일어나는 게 반전이다. 당시 일본의 관점에서는 이 전쟁이 불가사의했다. 조선은 거의 준비가 안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반영하는 대사도 나온다("전쟁은 금방 끝난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 전쟁 준비 잘해간다. 이를 일본 관점에서 풀어가니 그 준비성이 더 도드라진다. 그렇게 일본 장수 와키자카의 관점에서 철저한 전쟁 서사를 묘사하면 '와 이걸 어떻게 이기지?'싶은 의문점이 든다. 또 이순신에 대한 정보가 일본 내부에는 거의 없다 보니 와키자카에 몰입하게 된다. 마치 <어벤저스> 시리즈의 '타노스'같은 느낌? 영화 전체적으로 이순신을 깨러 가는 느낌이 강하다. 영화는 이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하는 의문과 이순신에 대한 미스테리를 후반부의 해전 신을 위해 쓰고 있다. 이야기 구성에 있어 보다 신선한 접근방식을 채택한 것이다. 초중반까지 일본 내부의 권력투쟁과 첩보 대결만 봐도 이야기 보는 데에는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이는 굉장히 효과적이었다. 이 영화가 전작 <명량>과 다른 지점이 있어 비교당할 이유가 없는 것이 이 점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또 '의'를 표현하기 쉬운 것도 이 영화의 형식의 강점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일본 관점에서 전개해야 내적 논리의모순을 관객이 알 수 없다. 이를 통해 일본의 입장에서도 명분 없는 침략전쟁이라는 것을 표현하기 용이하다. 일단 영화 초반부에 왜 '의'가 중요한지 제시된다. 다른 측면에서 우리는 이 전투의 결과를 알고 있다. 이 '의'라는 것이 어디 쪽에 있는 걸까? 쉽다. 이순신에겐 있고 일본의 장수들에게는 없는 것이 이 '의'일 것이다. 흰 종이에 붓 한번 살짝 찍어보자. 그럼 그 점이 선명하게 보인다. 의와는 거리가 먼 일본 내부의 상황을 조명하다가 조선을 쨘하고 보여주면 두 나라의 내부 상황이 대조적으로 보일 것이다. 일본 장수들이 하는 말을 잘 보면 거의 명분이 없다. 누가 싫거나. 그냥 꼴 보기 싫어서. 아래 군사들 죽든지 말든지 알바 아니니까. 거의 이런 식이다. 그러니까 의가 없는 왜의 명분과 이에 물든 일본 장수들의 냉정함이 더 도드라지는 것이다. 전작 <명량>이 민족주의(속칭 '국뽕')를 위해 영화 전반적인 장면을 희생한 것과는 다르게 뾰족한 기획을 통해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특별한 무언가를 위한 발상이 아니라 '이런 영화를 만들 거야!'라는 아이디어에 기반한 좋은 선택이었다.
이를 위해서
이 신선한 방식의 이야기를 위해서라면 역시 배우들이 영화를 잘 이해해야 한다. 일단 박해일-변요한-김성규-박지환 네 배우의 극 이해도가 굉장히 뛰어났다. 일단 박해일 배우는 한국영화의 지난 역사를 말하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기라성 같은 배우들'할 때 그 '기라성'을 담당하고 있는 박해일 배우. <살인의 추억>, <국화꽃 향기>, <연애의 목적> 많은 영화에 출연했다. 그중 올해가 그의 경력 중 최고점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 영화에서도 그의 전성기를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상대역의 변요한 배우가 섬뜩한 연기를 워낙 잘해서 좀 심심하다고 느끼는 분이 많을 것 같다. 그런데 나는 박해일 배우가 연기를 잘했다고 느낀 것이, 1) 가벼워 보이지도 않으면서 2) 뭔가 고뇌하고 있는 내면을 묘사하고 있으며 3) 조선 내부의 상황으로 인해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심리상태까지 극의 배경이 되는 좋은 연기를 수행했다. 비교적 와키자카에 비해 물리적 비중이 적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의 존재감이 후반부까지 느껴지는 이유는 박해일 배우의 눈빛, 표정, 발성이 이 영화에 잘 어울리기 때문 아닐까 생각한다. <헤어질 결심>과 <명량>까지 참 좋은 배우다.
다음은 변요한 배우다. 앞 문단에서도 썼듯 이 와키자카가 영화의 진주 인공이다. 물리적으로 분량이 아마 제일 많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박해일 배우는 잔잔한 파도처럼 극을 이끈다. 이와 대조적으로 변요한 배우는 감정적으로 화려한 연기를 보여주머 이야기를 전개한다. 일단 갖고 있던 감정선이 다양했다. 전쟁 준비는 또 착착 잘 되어가고 있다. 근데 반대쪽에서 승전보를 울렸던 이순신에게 묘한 열등감을 품고 있다. 또 이순신이 한편으로는 궁금하기도 하다. 자신감까지 있다. 선조의 입장 변화를 위시한 조선의 내부 상황이 시끄럽기 때문이다. 또 일본 내부에서 권력 교통정리가 안 됐다. 이를 묘사하는 연기까지 해야 한다. 이렇게 전반부의 감정연기를 넘어가면 하이라이트가 있다. 중반부가 넘어가서 이순신과의 한바탕에서 이 사람의 처지는 여러 번 바뀌게 된다. 이때 분출했던 감정표현들이 선명해서 기억에 남는다. 자기가 주체로 이끄는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던 한 인간의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데 변요한 배우는 정말 열 일했다. 아마 이 배우의 최고작으로 남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김성규-박지환 배우도 기억에 남는 연기를 했다. 두 배우는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한 조연이다. 이 역할을 살리는 좋은 연기였다. 일단 김성규 배우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건 <범죄도시> 시리즈였다. 그리고 <악인전>에서도 봤었다. 이 두 작품만으로도 연기 정말 잘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악인전>에서는 뭔가 난잡한 이야기 톤 사이에서도 빛났던 기억이 있다. 이때 단순히 연기만 잘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느낀 건 똑똑한 배우라는 점이다. 이 준사라는 캐릭터는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하다. 임진왜란이 왜 일어났고, 어떤 점에서 이순신이 전투를 승리할 수 있었는가?를 묘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리액션 연기가 좋아야 한다. 몸짓 하나, 눈빛 하나가 무언가 외롭고 상처받은 사람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박지환 배우 역시 뛰어난 연기였다. <범죄도시> 시리즈의 장이수 캐릭터로 유명한 이 박지환 배우. 솔직히 영화 보면서 '내 아임다' 생각이 안 난다면 거짓말이다. 그런데 영화는 전반적으로 이 캐릭터를 경제적으로 활용한다. 이 사람이 잘할 수 있는 연기만 딱 잘라서 보여준 느낌? 이 사람을 개인적으로 알았던 게 아닐까 싶었던 캐릭터 연출법이었다.
단점이 없지는 않아
영화가 개봉하기 이전에 시사회 평을 몇 개 봤었다. 일단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던 건 '<명량>의 단점을 극복했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솔직히 기대 좀 하고 갔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극복하긴 했다'다. 영화에는 엄청 큰 단점은 없다. 그 대신 아쉬운 건 몇 개 있다.
그중 하나는 역시 극 중에서 옥택연-김향기 배우가 연기하는 임준영-보름 역의 서사 전부다. 난 이게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 일단 영화 안에서 스파이가 있어서 얻는 이점이 있다. 그런데 이 스파이가 단지 <명량>의 프리퀄이라고 해서 이런 이야기를 할당받는 게 그게 완성도에 도움이 되는가? 는 의문이다. 조선 측의 특정 인물과의 대비를 이루기 위해? 굳이? 일본의 스파이가 있는 것까지 대칭을 이룰 필요가 있나? 영화를 보다 보면 중반부까지 이순신-와키자카의 전략적 선택이 재밌다가 임준영이 나오면 산만하다는 느낌이 강하다. 이는 배우의 퍼포먼스와도 연관이 있다. 음.. 잘 모르겠다. 이 배우를 캐스팅한 게 좋은 선택인지. <외계+인> 1부의 썬더가 생각나는 연기였다.
그리고 후반부 하이라이트 해전 신에서 CG 티가 난다. 아마 바다와 실제 배에서 찍으면 다칠 수도 있으니 그랬던 건 이해한다. 그런데 사람이 없는 신 정도는 실물로 찍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 초중반부는 일본의 관점에서 전개하지만 중후반부는 조선의 학익진과 거북선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만든다. 그래서 전반부의 살짝 느리더라도 신선한 템포가 후반부까지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은 아쉽다. 오잉? 호기심이 가는 이야기가 식상한 촬영기법으로 치환되니 뭔가 김샌 느낌이 든다.
그리고, 영화 전반적으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질척임이 있다. 분명 전작에서의 '국뽕'요소를 많이 뺀 것도 안다. 불필요한 사족 많이 쳐냈다. 근데 살짝 유치하고 예전 느낌이 나는 연출법이 장면 장면마다 보인다. 완성도에 치명타를 가하는 것은 아니나 확실히 아쉬운 지점이다.
그래도 좋았어
이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영화 좋다. 잘 만들었다. 일단 두말할 필요 없는 후반부 해전 신은 쾌감이 대단하다. 부분 부분마다 꼼꼼하게 동선을 잘 짜 놔서 보는 맛이 있다. 이 액션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사운드와 표정이 될 것이다. 적의 변수에 당황하는 일본군, 급변하는 전쟁 상황, 포격 소리까지 CG를 많이 사용한 만큼 소리에 집중해야 현실감이 든다. 이 현실감은 유효하게 작용한다. 후반부 전투 신에서 우리나라 말도 자막처리를 할 정도로 집중했던 소리 연출은 러닝타임의 반을 할애한 만큼 제 몫을 다한다. 티켓 가격이 많이 오른 극장가 이 액션신만 봐도 가격 값을 한다.
또 영화에서 묘사하는 또 다른 주인공이 있다. 극에서 나오는 군사집단은 이순신의 수군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중반부를 넘어가면 특별한 존재들이 조선의 땅을 지키며 왜적과 항전하는 모습이 묘사된다. 주인공이 이순신 장군인 것도 맞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의 위대함을 말하는 것도 영화가 하고 싶은 말을 전개하는 방식일 수도 있다. 그런데 제목이 한산이다. 이 한산도대첩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싸워온 만큼 이들을 조명하는 것도 영화가 하고 싶은 말을 전하는 좋은 방식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가볍지 않은 톤으로 배우들의 연기까지 깔끔하니 임진왜란의 무게감에 잘 어울리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극장가, 두 번째 여름 대작으로 부모님과 함께 가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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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린 나이트>, 현실이 영화로 이행되는 과정
<그린 나이트>, 현실이 영화로 이행되는 과정
활짝 열린 사각의 창틀 너머를 관망하던 카메라가 그 배면에 잠들어 있는 주인공의 얼굴을 담기까지, <그린 나이트>의 도입부는 <이창>(알프레드 히치콕, 1954)의 그것과 유사하게 구성되어 있다. 두 영화의 카메라는 모두 누군가의 시점처럼 운용되다가 그 시점의 주체를 다른 차원의 것으로 전환시킨다. <이창>에서 건너편 아파트 내부의 은밀한 공간을 훑으며 관객의 ‘훔쳐보기’ 욕망을 자극하던 카메라는 돌연 휠체어에서 잠을 자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을 비추면서 해당 쇼트가 특정 인물의 시점과 아무 관련이 없음을 탄로한다. 이 쇼트는 다름 아닌 관객의 시점 쇼트였다. 그렇게 히치콕은 <이창>이 영화와 관계하는 관객의 관음증적 욕망을 다룬 메타 영화임을 드러낸다.
<그린 나이트>의 도입부에서 창틀 너머의 이름 모를 기사 부부와 가축들을 한동안 관조하는 쇼트는 마치 움직이는 그림을 감상하는 누군가의 시선처럼 형상화되어 있다. 불현듯 카메라가 뒤로 물러나는 순간까지만 해도 특정 인물의 뒷걸음질로 여겨졌던 쇼트는 후진의 움직임을 계속하면서 그 주체가 작중 인물이 아님을 밝힌다. 동시에 바깥의 세계를 투사하는 틀이 스크린 모양의 사각 창틀이라는 점을 넌지시 드러내며, 여자 친구의 물세례를 받고 번쩍 잠에서 깨어나는 주인공 가웨인의 모습을 하나의 흐름으로 잇는다. 그렇게 카메라는 하나의 움직이는 그림(영화)처럼 표현된 예술 세계와 차가운 물의 성질을 즉각 몸으로 받아들이는 현실 세계를 연계하며 두 세계의 물리적 단절과 내적 긴밀함을 동시에 암시한다. 현실에서 예술을 바라보다가 이내 그 세계를 흐릿하게 처리하며 온전한 현실로 돌아오는 카메라의 시점은 그런 점에서 감독 데이빗 로워리의 시점으로 읽힌다. 그리고 그 카메라가 투신하는 대상인 가웨인은 데이빗 로워리의 분신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린 나이트>에서 데이빗 로워리가 자신의 분신 가웨인을 경유하여 도달하려는 곳은 어디일까, 더 중요하게는 그곳에 가닿기까지의 지난한 여정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가웨인과 녹색 기사, 현실과 영화
크리스마스 연회가 열리는 예배당에서 왕은 부패한 기사 가웨인에게 무용담을 들려 달라 요청한다. 처음에는 그저 친분을 쌓기 위함인 듯 보였던 이 요청은 이내 원탁의 기사들을 두고 “무용담 하나 없이 어울려선 안 된다.”라고 조언하는 왕비의 말을 통과하면서 “무용담 없이 왕위 계승은 꿈도 꾸지 말라.”라는 일종의 압박이자 명령으로 변모한다. 이로써 가웨인은 왕이 되기 위해 무용담이 필요한 현실적 자리에 머문다. 그는 방탕한 성적 유희로 얼룩져 있는 남자이고, 권력을 노리는 탐욕가이면서 한편으론 엄마와 여자 친구를 사랑하는, 남루하면서도 지극히 평범한 현실적 존재이다. 그런 그의 앞에, 즉 가웨인이라는 현실 앞에 나무 형상의 초현실적 존재 ‘녹색 기사’가 등장한다. 가웨인의 현실성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녹색 기사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녹색 기사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크리스마스 연회가 열리는 예배당 시퀀스의 포문을 여는 주체가 카메라라는 점을 복기할 필요가 있다. 카메라는 아무도 없는 예배당 앞에 서서 수직의 각도로 눈발이 흩날리는 하늘을 잡은 채 예배당 입구로 들어선다. 입구에 다다른 카메라가 내부의 어둠 속으로 점차 들어갈 때, 계단식 구조로 설계되어 있는 문틀로 인해 그 움직임은 마치 깊은 심연 속으로 하강하는 듯 느껴진다. 그렇게 어둠은 기준점이 되어 이전의 쇼트와 이후의 쇼트를 분리하면서 다른 세계로의 진입을 선언한다. 이에 조응하듯 곧이어 문이 열리고, 카메라에 붙잡힌 가웨인은 예배당 상층부에 뚫린 원형의 창에서 사선 아래 방향으로 내려오고 있는 푸르고 투명한 빛을 바라본다. 빛은 원탁의 중심부를 성스럽게 비추는데, 이 형상은 마치 스크린에 투영되는 영사기 렌즈의 광원처럼 보인다. 그렇게 본다면 원탁의 중심부는 그 빛이 가닿아 무대화된 스크린이다. 그리고 이 무대 위에 출연하는 녹색 기사는 스크린에서 퍼포먼스를 행하는 영화적 존재, 혹은 영화 그 자체이다.
그렇다면 녹색 기사가 자신과 겨뤄 승리한 자에게 본인이 당한 만큼 다음 해 크리스마스에 똑같이 되갚아 준다는 황당무계한 목 베기 게임은 영화와 현실 간의 역학에 관한 메타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다. 왕위를 계승해야 하는 가웨인은 이 게임에 참가하여 녹색 기사의 목을 내려치고, 일 년 뒤 그가 기거하는 녹색 예배당으로 여정을 떠난다. 이로써 남루한 ‘현실’이 성스러운 ‘영화’로 다가가는, 그 긴 이행의 과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네 가지 시험
여정을 떠난 가웨인은 전쟁으로 참혹하게 전사한 병사들의 시신을 목도하고, 머지않아 정체불명의 소년병과 조우한다. 소년병은 가웨인에게 다가가 전쟁으로 두 친형을 잃은 자신의 암담한 처지를 설명한다. 그러나 가웨인은 그의 신세한탄에 전혀 귀 기울이지 않는다. 피폐해진 전장을 무감하게 지나치던 가웨인은 소년병이 녹색 예배당이 있는 북쪽 길을 안내하자 그제야 그에게 관심을 준다. 다만, 그것은 소년병에 대한 인간적인 관심이 아니라 녹색 기사를 만나야 하는 개인의 이기적인 욕망의 산물이다. 결국 가웨인은 길을 알려준 소년병에게 ‘작은 친절’을 베풀지 않은 죄로 그의 무리에 포박당하고 소지품을 전부 빼앗긴다. 그런데 이 장면은 어딘가 이상하다. 왜 소년병은 처음부터 강도 무리를 끌고 와 가웨인을 포박하지 않았을까. 만일 허허벌판이 아니라 우거진 숲에서 범행을 계획한 것이었다 해도 구태여 작은 친절을 바랄 필요가 있었을까. 또한 가웨인이 그것을 베풀지 않았다고 분노할 필요가 있었을까. 곰곰이 생각할수록 이 장면은 일종의 시험처럼 느껴진다.
이 대목의 서두를 여는 자막 ‘작은 친절’을 한 단어로 축약하자면 ‘연민’일 것이다. 가웨인은 전쟁에 희생된 자들과 그 포악함의 절대적 피해자라 할 수 있는 소년병을 보고도 전혀 연민의 감정을 느끼지 못한 채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데에만 혈안이었다. 그런 점에서 포박당한 가웨인을 카메라가 시계 방향과 반시계 방향을 오가며 360도 회전하는 쇼트는 백골이 된 미래의 형상과 복원된 현재를 교차함으로써 연민의 정을 하사하지 않은 가웨인에게, 그러니까 연민이 거세된 현실에게 가하는 카메라의 협박이자 경고는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녹색 기사와 재회하는 시퀀스를 제외하고, 이 여정을 구성하는 네 개의 시퀀스는 곧 네 개의 시험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시험들은 현실이 영화로 이행되는 과정에 필요한 덕목들에 대한 탐구이자 점검일 테다.
이후, 가웨인은 잠을 자기 위해 들어간 빈집에서 정령처럼 보이는 의문의 여자 위니프레드를 만난다. 그녀는 가웨인에게 연못에 빠진 자신의 머리를 건져와 달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탁을 한다. 그녀 목에 멀쩡히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머리가 허상이라는 얘기인가. 만일 그렇다면 그녀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가웨인은 물을 수밖에 없다. “아가씨, 당신은 사람인가요? 정령인가요?” 달리 표현하면, “보이는 것을 믿어야 하나요? 보이지 않는 것을 믿어야 하나요?” 위니프레드는 지금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을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를 출제하고 있는 것이다(로워리는 전작 <고스트 스토리>에서 초현실적 존재인 ‘고스트’의 가시화를 통해 관객들에게 보이지 않는 존재의 실존을 믿어 달라 하소연한 적 있다). 다행히 가웨인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기로 결정한다. 그는 위니프레드의 부탁대로 물속으로 들어가 그녀의 두개골을 건져 올린다. 시험에 통과한 가웨인은 그 보상으로 소년병에게 약탈당했던 녹색 기사의 도끼를 돌려받는다.
여정의 세 번째 시퀀스는 영화를 통틀어 가장 초현실적이고 몽환적이다. 가웨인은 이 기이한 시퀀스에서 여우의 하울링을 따라하는 인간 형상의 거인족을 보게 된다. 이는 그간 거쳐 왔던, 문제가 주어지고 그 난관을 헤쳐나가는 식의 시험 유형과는 사뭇 다르다. 이때 눈길을 끄는 건 거인족을 따라 묵묵히 길을 걷고 있는 가웨인의 뒤에서 느닷없이 180도로 몸체를 돌려 상하를 반전시키는 카메라의 움직임이다. 더 흥미로운 건 카메라가 상하를 완전히 뒤바꾼 다음 점차 전진해 나갈 때, 조금씩 희미해지던 거인족의 형상이 마침내 완전히 사라진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화면이 180도 뒤집혔을 때 비로소 거인족이 지배하는 환상이 깨지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카메라가 180도 회전하기 전의 화면은 온전한 환상인 것이다. 이와 연계하여 우리는 이 시퀀스의 도입부에서 가웨인이 환각의 버섯을 먹었다는 사실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환각의 버섯은 앞선 두 시퀀스에서 소년병과 위니프레드처럼 일종의 출제자 역할을 한다. 시험지를 받아든 가웨인은 환각을 통해 자신의 상상력을 검증받는다. 그러니 엉뚱하게 튀어나온 거인족들은 가웨인의 상상력이 빚어낸 환영이다.
공교롭게도 이 환영들은 영화의 어떤 존재보다 컴퓨터 그래픽의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이때 방점은 기술 자체가 아니라 그 기술이 화면에 기입되면서 생기는 생경함에 있다. <고스트 스토리>에서 로워리가 초월적 존재인 유령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재현하지 않은 건 실재하지 않는 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구현했을 때 생기는 간극, 말하자면 그로 인해 촉발되는 생경함이라는 감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로워리에게 중요한 건 디지털 기술 자체, 혹은 아날로그 자체가 아니라 그 둘 사이에서 벌어지는 화학작용이다. 정리하면 가웨인이 치르는 세 번째 시험은 상상력을 발휘하여 생경함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에 대한 역량 측정이다.
가웨인이 여정을 떠난 후 처음으로 마주한 대상은 기억 속의 여자 친구 에셀이다. 그는 에셀에게 받은 징표의 소리를 매개로 자신에게 청혼을 하는 그녀의 과거 모습과 대면한다. 그러나 가웨인은 수줍게 진심을 고백하는 그녀에게 어떠한 답도 건네지 못한다. 그런 그의 앞에 에셀과 똑같은 얼굴을 한 성주 부인이 나타나 매혹적인 자태를 뽐낸다. 이때 성주 부인과 에셀이 신분의 격차로 구별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성주 부인의 역할은 명료해 보인다. 네 번째 여정에서 가웨인은 사랑의 윤리에 관한 시험을 치른다. 이 어려운 싸움에서 가웨인은 에셀이 준 징표를 두고 사랑의 징표가 아니라고 말한 뒤 이를 성주 부인에게 헌납한다. 그리고 다음 날, 그녀와 불온한 성적 관계를 맺는다. 가웨인은 사랑의 윤리에 관한 한 완벽한 낙제다.
다만, 이 장면에서 더 중요한 것은 성적 욕망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겹쳐진다는 점이다. 가웨인이 성주 부인에 의해 욕정이 해소되는 과정은 성주 부인으로부터 녹색 허리띠를 선물 받는 과정이기도 하다. 차고 있으면 누구에게도 공격받지 않고 영영 상처 입지 않는 녹색 허리띠는 죽음을 거스르려는 욕망이자 의지이다. 말하자면 현실은 욕망으로 팽창하지만 존재의 소멸을 두려워하는 나약한 세계이다. 이때 죽음은 성주에 의해 사냥된 짐승의 이미지로 재현된다. 이 이미지는 가웨인이 성을 떠나기 전날 밤 자신이 사냥감으로 표현된 그림을 보는 장면에서 강하게 대두된다. 그는 그와 유사한 그림을 전에도 본 적 있는데, 그때 사냥감으로 채택된 대상은 여우였다. 그렇다면 가웨인과 여우는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 걸까.
여우는 가웨인이 두려움에 잠식될 때, 예컨대 시신이 널브러져 있는 황막한 숲속을 지날 때나 연못에서 위니프레드의 두개골을 건져 올렸을 때, 그리고 동굴 안에서 배고픔에 허덕이고 있을 때, 녹색 예배당을 목전에 두었을 때 불현듯 등장한다. 말하자면 여우는 가웨인이 녹색 예배당에 당도하기 전까지의 모든 여정에 동참하며 네 번의 개별 시험과 별개의, 혹은 그 모두를 관통하는 시험을 내는 출제자다. 이 시험의 핵심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극복 가능성이다. 성안에서 여우가 보이지 않았던 것은 성주의 말대로 집은 ‘안전한’ 곳이기 때문이다. 가웨인이 성을 떠날 때, 성주가 그에게 여우를 선물하는 것은 그간 잡아두고 있던 그의 두려움을 다시 돌려주는 것을 의미한다.
필멸의 과정
마침내 녹색 기사 앞에 당도한 가웨인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죽음을 기다린다. 그러나 아직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완벽히 극복하지 못한 가웨인은 녹색 기사가 휘두르는 도끼를 계속 피하면서, 그곳에서 도망쳐 집으로 귀환한 뒤의 미래를 상상 속에 그려본다. <그린 나이트>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집으로의 여정’ 몽타주 시퀀스에서 중요한 것은 그간의 여정에서 끝내 체현하지 못한 덕목들, 예컨대 (전쟁 피해자에 대한) 연민, 사랑의 윤리,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극복 부문에서 고스란히 문제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그는 전쟁을 벌이며 국민을 희생시키고, 여자 친구 에셀을 가혹하게 배반하며, 전쟁통에 끝까지 성안에 머물면서 홀로 쓸쓸히 죽는다. 그런 점에서 이 몽타주 시퀀스는 필수 덕목들을 놓친 현실이 영화로 이행되었을 때의 끔찍한 결과를 상상 속에서 미리 상연해 보는 것이다. 잘못을 깨닫고 진실을 알게 된 현실만이 영화로 이행될 자격을 얻는다.
<그린 나이트>는 <고스트 스토리>와 다른 과정을 거쳐 동일한 결론을 도출하는 영화다. <고스트 스토리>에서 응시와 시간성이라는 감각 기능을 탑재하며 영화 그 자체로 환유되던 고스트는 현실의 물질적 기반 위에 살아가는 아내 곁을 맴돌다가 그녀가 문설주 틈에 새겨 넣은 메시지(현실의 진실)를 발견하곤 돌연 소멸된다. 현실의 진실을 알게 된 영화는 그 순간 영화가 아니며 현실의 다른 버전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녹색 기사가 끝내 가웨인을 참수하는 것은 영화의 진실을 알게 되는 순간 현실은 더 이상 현실이 아닌 영화의 다른 버전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현실 앞에서 무릎 꿇고, 현실은 영화 앞에서 무릎 꿇으며 자신의 소멸을 받아들인다. 어느 쪽이든 두 세계는 필멸의 과정을 거쳐 독자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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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코 명가 넷플릭스의 개봉예정작
넷플릭스는 다양한 영화 및 드라마 시리즈 등을 통해 로맨틱 코미디의 부활을 이끌며 New 로코 명가로 떠올랐는데요. 넷플릭스는 자체 제작 작품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에 이어 배급 시장에까지 뛰어들어 라인업 맛집을 예고하였습니다.
과연, 넷플릭스가 직접 pick한 신선한 로코 작품엔 어떤 작품들이 있으며,
어떤 작품이 개봉을 앞두고 있을지
지금부터 같이 알아볼까요?
잇츠 CINE PICK!!
<키싱 부스 3>, 2021
코미디, 멜로/로맨스 | 영국, 미국 | 113분 | 15세 관람가
감독 : 빈스 마셀로 | 출연 : 조이 킹, 조엘 코트니, 제이컵 엘로디
? 82% • 230만 명 평가
절친이 있는 버클리? 아님 남친이 있는 하버드?
둘 중 어디에 입학할지 못 정한 엘.
역대급 여름을 위한 버킷 리스트부터 세운다.
근데 구 썸남의 등장으로 묘해진 이 분위기, 어쩔거야?!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언제나 그리고 영원히>, 2021
코미디, 드라마, 멜로/로맨스 | 미국 | 115분 | 15세 관람가
감독 : 마이클 피모냐리 | 출연 : 라나 콘도어, 노아 센티네오, 저넬 패리시
? 90% • 3.22천 명 평가
한국으로 가족 여행을 다녀왔다.
대학 입시는 결과만 기다리면 된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라라 진.
하지만 새로운 고민이 시작된다.
나의 미래, 거기에도 피터가 있을까?
<나의 흑역사 로맨티카>, 2021.9.22 개봉 예정
코미디, 멜로/로맨스 | 이탈리아 | 91분 | 12세 관람가
감독 : 알리체 필리피 | 출연 : 루도비카 프란체스코니, 주세페 마조
? 83% •Google 사용자
언제 죽을지 몰라도 뜨거운 사랑은 하고 싶은 마르타.
데이트 앱을 켜 운명의 남자를 찾기 시작하는데
마음에 드는 사람이 어째 단 한 명도 없다?!
하지만 포기 직전의 마르타에게도 기적은 있었으니...
이 시대의 안벽남 아르투로가 눈앞에 나타났다!
첫눈에 사랑에 빠진 마르타는 아찔한 흑역사를 생성하고,
그 대가로 단 한 번의 저녁 식사 기회를 얻게 되는데...!
우리가 사랑에 빠질 확률 9.5%
마르타의 목숨을 건 작전은 성공할 수 있을까?
로코 맛집 넷플릭스의 명성을 이을 영화 <나의 흑역사 로맨티카>는 이탈리아에서 엄청난 인기를 자랑하며, 속편 제작까지 확정된 로맨틱 코미디 영화인데요. 넷플릭스로 직행한 다른 나라와는 달리 한국에서는 극장에서 볼 수 있어 더욱 기대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9월 22일 개봉할 영화 <나의 흑역사 로맨티카>를 기다리며,
오늘도 영화로운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씨네랩 에디터 Camm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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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달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좇아서
언제나 미디어는 여성의 몸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90년대에 태어난 나는 어릴 적부터 미디어 중독자였다. 유이의 ‘꿀벅지’를 기억하고, 설현의 완벽한 뒷모습을 기억한다. 한 통신사의 설현의 입간판은 숱한 남성에게 도둑을 맞기도 했다. 지금의 흐름은 양분화되어 있다. 누가 봐도 마른 몸의 슬렌더형 여성상과 글래머러스한 몸매를 가진 여성상은 함께 유행한다. 취향의 차이라지만, 글래머러스한 몸매를 가진 여성 또한 사실은 마른 몸을 가진 여성이다. 카메라 뒤에 서는 일을 꾸준히 해왔기에 방송용 카메라가 가지는 한계를 안다. 카메라는 피사체를 현실보다 조금은 부하게 비추며, 화면상의 모습은 실제와 일치하지 않는다. 그렇게 카메라 앞에 서는 여성들은 미디어에 보여질 기준에 맞춰 자신의 몸을 옥죄여 관리한다.
<서브스턴스>는 여성의 몸과 노화에 대한 이야기다. 인기 에어로빅 쇼를 진행하던 주인공 엘리자베스는 중년을 맞이한 스타다. 여전히 사람들에게 선망이 될만한 몸을 가졌음에도, 노화는 어쩔 수 없다. 남성 프로듀서들은 그녀의 모습에 더 이상 만족하지 못하고, 새로운 얼굴을 찾는다. 그 역학 속에서 엘리자베스는 ‘왕년의 스타’가 되어 쇼에서 내쳐진다. 이 영화는 그 순간에 절망하는 중년의 여성을 비추는 쇼가 아니다. 바디호러라는 장르를 이용해 그녀에게 새로운 젊음의 몸을 주는 특이한 양태를 취한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서브스턴스’라는 도구를 통해, 엘리자베스는 젊은 몸을 얻는다. 그러나 조건이 있다. 일주일은 엘리자베스의 몸으로 살아야 하고, 일주일은 젊은 몸을 가진 ‘수’로 살 수 있다. 앞은 조건이고, 뒤는 가능이다. 그 룰을 어기면, 균형은 무너진다.
그렇게 얻게 된 젊고 아름다운 몸으로 수(엘리자베스)는 엘리자베스(수)의 자리를 빼앗는다. 소프트웨어는 같은 사람이기에, 보여주는 에어로빅은 다를 바 없을 것임에도 남성 프로듀서들은 수는 무언가 다르다며 열광한다. 그리고 카메라는 수의 신체를 파편화해서 재현한다. 성행위를 연상시키는 동작들을 여성의 몸에서 주로 대상화되는 ’부위‘들을 중심으로 클로즈업하여 보여준다. 수의 에어로빅 씬은 ’소프트 포르노‘와 다를 바 없다. 이전의 영광을 누리게 된 엘리즈베스는 수의 몸을 탐하고, 규칙을 어기게 된다. 그렇게 바디 호러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수의 시간을 늘릴수록 엘리자베스의 시간은 줄어든다. 그렇게 수의 신체에서 엘리자베스의 신체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노화를 넘어 붕괴를 겪고 있는 자신과 마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못하는 욕심은 결국 엘리자베스의 신체를 부식시키고 영화는 파국으로 흘러간다.
결말부에 대해서는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겠다. 이 영화는 끝까지 가는 영화다. 멈출 때가 됐다고 생각할 때에도 영화는 브레이크를 절대 밟지 않는다. 이 작품은 결국 중요한 것은 외면이 아닌 내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든지 하는 교훈적인 영화가 아니다. 끝까지 가는 이 작품의 방향성은 오히려 현실적이다. 이 사회에서 여성으로 태어나는 한, 젊음과 미에 대한 추구는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코랄리 파르자 감독은 “중요한 건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악몽의 세계가 스스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결국 이 작품은 바디 호러라는 장르를 빌렸을 뿐, 그 어떤 작품보다도 현실적인 작품이다.
앞서 여성의 몸에 대해 주로 얘기한 바 있다. 하지만 요즘 가장 눈길이 가는 이슈는 ’중안부‘ 이야기다. 과거 작은 얼굴, 큰 눈, 높은 코, 브이라인 턱에 대한 추구가 컸다면, 이제는 ’중안부‘라는 말도 안 되는 영역까지 미에 대한 기준은 침범했다. 여성들은 그렇게 매일 거울 앞에 앉아 그녀들과 다른 자신의 얼굴에 절망한다. 그리고 그 부족함을 조금이나마 덜어내기 위해 화장을 한다. 그럼에도 덜어지지 않는 부족함은 시술로, 수술로 이어지며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추구미’ 를 좇는다. 끝없이 바뀌는 미의 기준 속에 우리는 어디를 좇아가야 하는가.
나는 여타 여성들보다는 외모 강박이 심하지 않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누군가의 피사체가 되는 순간, 이야기는 달라진다. 오랜만에 카메라 앞에 설 일이 있었다. 카메라 앞에 비춰진 나의 모습 속에 나의 단점들이 보였다. 언제나 마음에 들지 않는 작은 턱으로 인해 납작한 편인 옆모습이라든지, 좁은 어깨에 비해 큰 얼굴이라든지 하는 것들. 그런 것들을 변화시킬 의지는 없지만, 더 아름다운 나를 원하지 않냐고 물으면 말끝을 흐리게 될 것 같다. “너 자신을 사랑하라”라는 공허한 말만을 외쳐서는 세상은 변하지 않을 것 같다. 어떻게 해야 이 뫼비우스의 띠를 끊어낼 수 있을까.
로라 멀비는 일찍이 <시각적 쾌락과 내러티브 영화>라는 저작에서 미디어 속 ‘Male gaze’에 대해 비판한 바 있다. 이 작품은 여성 감독이 ‘Male gaze’를 갖고 놀며, 그 시선이 망쳐놓은 세상의 끝의 끝까지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녀가 이 작품을 어떻게 바라볼지 무척이나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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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르노빌 1986 영화 후기 /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 / 실화바탕 / 생각보다 안 국뽕임
영화직관하는 남자 영직남의 “체르노빌 1986”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은 없습니다~ 장엄한 클래식 OST 가 흐르는 엔드크레딧이 제법 기네요.#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폭발사고, #러시아영화, #재난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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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극장판 미소녀 전사 세일러 문 이터널> 공식 예고편
새로운 달이 태양을 가리고 지구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다.
그러자 모습을 드러내는 악의 세력.
각자의 꿈을 좇던 세일러 전사들이 세상의 빛을 되찾으려 이제 다시 힘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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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싱글 인 서울> 메인 예고편
한 마디로 설레는 타입 맞죠? 네 맞습니다 플러팅 장인들의 케미터지는 메인 예고편 공개! 현실 공감 로맨스 [싱글 인 서울] 11월 29일 극장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