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5-05-25 15:41:02
댕겨진 불씨는 반드시 타오른다
영화 <신성한 나무의 씨앗> 리뷰
DIRECTOR. 모함마드 라술로프
CAST. 마흐사 로스타미, 세타레 말레키, 소헤일라 고레스타니, 미삭 자레
SYNOPSIS. 꿈에 그리던 수사판사 승진을 하게 된 ‘이만’, 때마침 테헤란에서는 대규모 히잡 반대 시위가 일어나고 ‘이만’은 가족의 안전을 위해 총을 지급받는다. 그러나 딸들과 논쟁을 벌인 어느 날, 총이 집에서 감쪽같이 사라지고 가족의 믿음에는 균열이 생긴다. 지금 반드시 목격해야 할, 올해 가장 용감한 걸작.
POINT.
✔️ 2022년 히잡 시위를 둘러싸고, 이란의 국가폭력을 비판하는 영화입니다. 감독과 두 딸 역할의 배우는 이 영화 이후로 망명했고, 함께 나오지 못한 엄마/아빠 역할의 두 배우 사진을 높이 올려든 채 레드카펫에 섰습니다. 어머니 역할을 맡은 배우 소헤일라 고레스타니는 2022년 당시 시위에 연대하여 수감되었고, 현재 자택 연금 상태라고 합니다. (해당 내용을 비롯, 영화 외부적 이야기는 배급사 그린나래미디어 SNS에서 참고했습니다.)
✔️ 의미 있는 영화인 동시에, 재미있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인데 전혀 길다고 느껴지지 않았어요. 집안에서 없어진 총을 둘러싼 가족 간의 이야기가 아주 잘 짜여 있는 구조라서, 다음을 궁금해하면서 끝까지 따라가게 만드는 흡입력 있는 영화입니다.
✔️ 영화는 6월 3일 개봉합니다.

체호프의 총이라는 개념이 있다. 1장에서 총이 등장한다면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그 총이 반드시 쏘아져야 하며, 쏘지 않을 총이라면 이야기에 등장시켜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물론 이를 역이용해 신경 쓰이는 위치에 놓여 있던 아이템이 별 의미 없는 맥거핀으로 판명되는 경우도 있지만, 집안에서 총이 사라진 이 영화에서 총은 맥거핀일 리 없어 보였다. 총을 쏘지 않는다 해도 최소한 관객은 총의 행방에 대해 좀 더 알게 되겠지.
이 영화에서 총이 맥거핀일 리 없다는 생각을 한 이유는 하나 더 있다. 맥거핀으로 장난을 치기엔 이 영화가 너무 절박한 메시지를 직설적으로 담고 있었다. 모함마드 라술로프 감독은 체제 비판 영화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감시와 탄압을 받는 상황에서 이 영화를 만들었다. 감옥이냐 망명이냐, 다소 극단적인 두 가지 선택지만 남아있던 상황에서 감독은 망명을 택한다. 칸영화제는 <신성한 나무의 씨앗>에 '심사위원 특별상'이라는, 기존에 없던 상을 만들어 수여했다. 한 해가 지난 올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은 다른 이란 감독인 자파르 파나히 감독에게 돌아갔다. 심사평에는 "저항과 생존"이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어, <신성한 나무의 씨앗>도 함께 떠오른다. 무함마드 라술로프 감독은 "수년간 이어진 노력, 인내, 그리고 저항 끝에 이슬람 공화국 체제 아래에서 썩고 텅 빈 검열의 체계는 마침내 밀려나기 시작"했다며 '검열을 거부하는 영화'들이 "보다 단단한 기반 위에 올라섰"다는 내용이 담긴 축사를 보냈다. 히잡에 대한 검열은 2022년 이전의 이란으로 돌아갈 수 없고, 영화에 대한 검열 또한 2025년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1. 이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요?
이 영화의 배경이 된 사건은 2022년 마흐사 아미니라는 이름의 여대생이 히잡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았다고 '도덕 경찰'에게 끌려가 구금 끝에 의문사한 사건, 그리고 거기서 촉발된 대규모 히잡 시위다. 수많은 사람들이 "여성, 삶, 자유"라는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나왔다. 수만 명이 구금되었고 사망자도 (사망 사유와 숫자는 제각각 다르게 밝히고 있지만) 수백 명에 달한다. 의문사에서 시작된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공개 처형까지 불사하면서, 이란은 '신정일치' 즉 종교와 정치를 접붙인 시스템을 공고히 하려 애썼다.
이 '신정일치'의 나라는 1979년 혁명으로 들어섰다. 이란의 마지막 왕조였던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린 시위였는데, 당시 왕조의 급격한 서구화 정책과 경제적 어려움이 맞물리면서 군주제에 누적된 불만이 폭발한 사건이었다. 비밀경찰이 돌아다니고 반대파가 '정치범'으로 탄압받는 사회를 끝내고자 자유와 민주주의를 부르짖은 시민들이 예상하지 못한 것은, 당시 혼란과 의견 차이의 우여곡절 끝에 설립된 국가가 이슬람 교리와 정치를 내세우면서 도덕 경찰이 돌아다니고 정치적 탄압이 강화되었다는 점이다.
그 과정에서 여성 인권은 그야말로 추락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남성과 동등한 투표권을 누렸고 이란혁명에서도 굵직한 역할을 여성들이 해냈는데, 혁명 끝에 여성들에게 남은 것은 히잡을 뒤집어쓰고 다니라는 강요, 히잡을 쓰지 않고 운전하다가 벌금을 물거나 차량을 압수당할 수도 있다는 현실이다. 시위 이후 수많은 여성들이 히잡을 벗어던지는 시민 불복종을 이어가고 있지만, 이란 정부는 여전히 강경하다. 히잡은 여전히 법령으로 강제되고 있고, 공개 처형과 구금은 셀 수 없으며, 심지어 카타르 월드컵에서 국가를 부르지 않던 남자 축구 선수들에게까지, 선발 제외 소문부터 사형 선고까지 다양한 탄압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짓밟아도, 외치고 버티고 항의하는 목소리는 죽지 않는다. 끝내 살아남아 우리에게 도달한다. 검열과 탄압이 아무리 이어져도 이 목소리는 제 갈 길을 간다. "1명을 죽이면 1,000명이 일어난다!" 하고 분연히 일어났던 이란의 여자들처럼. 검열 시스템은 "공포와 위협으로 마치 모든 걸 감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종의 섬광탄 같은 효과"일 뿐 "실질적으로 모든 걸 볼 수는 없다"는 무함마드 모술라프 감독의 말처럼.

#2. 우회하여도 반드시 길은 이어진다
이 영화에서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것은 세대와 성별에 따라 다른 미디어를 활용하고 있는 점이다. 불안한 시위의 소식 앞에서 엄마는 텔레비전을 켜 보지만, 텔레비전은 엄마에게 아주 간단하고 정제된 뉴스 이상의 정보를 주지 못한다. 마치 세상에 아무 일도 없다는 듯한 드라마까지 보고 나면 텔레비전을 끄는 것밖에 도리가 없다. 체제의 수호자인 동시에 체제의 피해자인 기성세대 여성은 가장 혼란스러운 자리에 놓여 있다.
딸들은 SNS로 다양한 소식을 접한다. 온라인에 게재된 영상은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자매는 방 한구석에 앉아서도 거리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안다. 마치 히잡이나 부르카처럼, 두껍고 검은 커튼으로 자신을 가린 채 창 밖을 내다보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자체 검열'의 집안에서도, 자매는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인다. 그뿐 아니라 통제 안에서 우회하는 법을 이미 알고 있다. 빨간 하트로 이름을 저장해 두면 남자친구인 걸 들킬 테니까 하얀 하트를 쓴다든지. 이들에게 미디어는 양방향이고, '모바일'하다.
반면 아버지는 그 어떤 미디어도 접하고 있지 않다. 그에게 그나마 미디어라고 부를 법한 것은 직장 동료와의 대화가 전부이며, 그 또한 세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대화는 아니다. 그의 공간은 눈도 귀도 막혀 있다. 복도 가득 '굳은 믿음'을 보여주는 손동작을 한 이들은 사람이 아니라 등신대이며, 눈을 가리고 손을 묶인 채 고요하게 끌려 다니는 이들의 존재만이 이 공간에서 유일하게 생명을 갖고 움직이는 이들이다. 죽은 공간에서 이들은 자신의 폭력이 자승자박의 미련 일로를 걷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심지어 총이 사라진 후로 "내 집인데도 안심이 안된다"며 불안과 혼란을 체험하고도, 그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와중에 자신의 혐오와 억측만큼은 확신을 갖고 밀어붙인다.

이 미련의 핵심에는 언어의 혼탁이 있다. "여성의 명예를 보호"하기 위해 히잡을 써야 한다고 하는 이들의 언어 논리 그대로다. "가족의 믿음을 회복"하고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아버지가 가족에게 가하는 행동은 이 나라의 여성들이 겪는 일상의 폭력을 여실히 느끼게 한다. 보호라는 귀한 단어가, 명예라는 아름다운 단어가, 이토록 해악밖에 남지 않은 방향으로 혼탁해지고 무너졌다. 이렇게 깨지고 더럽혀진 언어로 짜인 지배구조는 시스템 안의 모든 사람을 옭아매는 폭력밖에 되지 못한다.

#3. 반쪽은 피와 어둠 아래 있어도, 나머지 반쪽은 빛 아래 있기에
이 영화에서 인상 깊은 것은 단연 여성들의 얼굴이다. 과연 셋 중에 누가 총을 가져갔을까 궁금해지는, 어머니와 두 딸뿐 아니라 잠깐 등장하는 큰딸의 친구까지 이들 모두 폭력적인 구조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솔직히 영화 보기 전부터) 관객이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영화에서 이들의 얼굴은 이따금 절반씩 나뉘어 다른 빛 아래 놓인다. 친구의 다친 얼굴은 처참한 피범벅이 되어 있는데, 코를 기점으로 반대쪽에서 보면 그 상처를 눈치채지 못할 만큼 말끔하다. 그 얼굴을 영화는 햇빛 아래 공들여 오래 보여준다. 마치 보라는 듯이. 현실의 참혹한 이 상처를, 보라는 듯이. 이 느낌은 이후 캠코더 앞에 선 큰딸과 엄마의 얼굴에서 재현된다. 캠코더 화면 안에서 이들의 얼굴 절반은 어둠 속에 가려져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나머지 반쪽 얼굴은 빛을 받아 새하얗게 드러난다.

이는 살뜰한 시중 손길을 받던 아버지의 얼굴과 매우 대조적인데, 그의 얼굴은 아내의 세심한 손길을 받지만, 물로 씻고 머리를 빗어 넘기고 잔털 관리까지 꼼꼼하게 이루어지지만, 역실 불빛 아래 클로즈업된 그의 얼굴은 분명 밝은 빛 아래 있음에도 살아있는 신체보다는, 마치 명화 속에 이미 베어버린 목처럼 보인다. 이는 어둠과 피에 절반이 묻히고, 눈물 혹은 불안을 감추지 못한 채로도 생명력이 하얗게 빛나던 여자들의 얼굴과 대조적이다.
어쩌면 이 얼굴이 이란이라는 나라의, 그리고 기본권 수준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는 모든 국가 폭력과 싸우는 나라들의 얼굴이 아닐까 생각한다. 베어버린 목처럼 보이는 얼굴들이 지배구조를 짠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 어둠과 피에 짓밟혀도 빛 아래 생명력이 형형한 얼굴들이 일어나고 있다. 권위적인 반지를 낀 손은 그 빛나는 얼굴들을 결코 파괴할 수 없다.

체호프의 총이 반드시 쏘아져야 하듯이, 불씨가 댕겨진 혁명은 반드시 타올라야 한다. 이란의 여자들도 영화들도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 주요한 분기점을 함께 숨 쉬고 있는 이 순간, 이 '신성한 나무의 씨앗'이 어떻게 피어나 무엇을 뒤덮고 자라나는지 지켜보기로 한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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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마지막 모습
"우리가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사랑의 마지막 모습 "
AMOUR 아무르
음악가 출신의 부부 조르주와 안느는 평화롭고 우아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두 사람은 머리가 하얗게 새었어도 서로에게 변치 않는 애정을 보내는 금슬 좋은 부부다. 제자의 공연을 보고 온 다음 날 아침, 안느는 식사를 하던 중 고장 난 인형처럼 멈춰버린다. 심각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수술을 받지만, 간단한 경동맥 수술에 실패해 반신불수가 된다.
조르주는 그런 안느를 최선을 다해 보살핀다. 하지만 안느의 상태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는데......
피할 수 없는 이별
문을 부수고 들어온 소방관들은 집에서 진동하는 악취에 코를 막는다. 시체가 부패하는 죽음의 냄새는 필멸의 존재인 우리에게 언제나 불쾌할 수밖에 없다. 지독한 악취와 대조적으로 곱게 누워있는 늙은 여성의 시체 다음에 영화의 제목 'AMOUR(사랑)'가 조용히 떠오른다. 첫 시퀀스에서 감독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인생은 아름답고 유려하지만 그와 동시에 지독한 냄새가 나기도 한다는 것, 삶도 사랑도 죽음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조금 불편하겠지만 똑바로 담담하게 담아보겠다는 감독의 태도가 엿보인다.
태엽이 전부 돌아가버린 인형처럼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던 것이 시작이었다. 안느의 마비는 오른쪽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걷는 것은 물론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용변을 해결하는 것과 먹고 마시는 것조차 어려워진다. 안느는 가장 기본적인 생활조차 타인의 손을 빌려야만 한다.
몸이 잠깐 멈추는 것, 의식이 잠깐 사라진다는 것은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신호다. 의식과 육체의 정지가 반복되다 이내 완전히 멈추어 버리면 그것이 죽음이다. 안느는 몸에 대한 통제권을 잃어갈수록 수치심과 분노를 느끼고, 가장 사랑하는 이를 힘들게 해야 하는 상황에 차라리 죽고 싶다고 말하기도 한다.
조르주는 그런 안느를 어떻게든 살려두고자 하지만 이 역시 힘겨운 상황이다. 조르주가 안느와 한 마지막 약속은 절대 병원에 입원시키지 않는 것이다. 조르주는 이 약속을 지키고자 한다. 안느도 조르주도 이 힘겨운 상황이 끝나기만을 바라지만 여기서 안느가 건강하게 살아나는 선택지는 있을 수 없다.
영화에서 우리는 인생에서 앞으로 겪게 될 어떤 장면들을 미리 마주하게 된다. 나이 듦과 병듦 그리고 죽음은 우리 모두가 안고 있는 과제이지만 절대 풀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해결 방법을 찾는 게 아니라 받아들여야 하는 태도의 문제다.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삶과 죽음을 담는 그릇, 집
부부는 음악가지만 영화에서 음악의 사용은 절제되어 있다. 안느의 제자가 치는 피아노 연주와 CD에서 나오는 음악이 전부다. 고요함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소리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이를테면 극 초반에 안느의 이상을 느낀 조르주가 안방으로 들어갔을 때 신경 쓰일 정도로 크게 들리던 싱크대의 물소리 같은 것이다. 카메라는 안방에서 조르주를 비추고 있지만 주방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하게 된다. 한 화면에 있지 않아도 두 사람과 집안 전체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극 초반에 제자 알렉상드르의 공연을 보고 돌아오는 신을 제외하면, 영화의 공간적 배경은 집을 벗어나지 않는다. 카메라는 집 안에서 두 사람을 담고 있다가 누군가 외출을 나서면 이후 외출에서 돌아오는 인물로 바로 이어진다. 병원을 갔다 온 안느와 장례식에 다녀온 조르주를 카메라는 집에서 함께 맞이한다. 조르주가 문 밖으로 나가는 장면조차 꿈으로만 그려진다.
조르주는 안느에게 죽음을 고하고, 그제야 부부는 함께 집을 나선다. 그들이 두고 온 안느의 차가운 육신만이 집이라는 관 속에 고이 남겨져 있다. 집에는 이들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 사랑과 추억, 고통과 죽음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조르주와 안느의 삶과 사랑과 죽음이 오롯이 담겨 있다.
어디까지가 사랑인가
사랑하는 사람의 생이 꺼져갈 때 우리는 무얼 할 수 있을까. 편하게 해주어야 할지 고통스러운 삶을 지속시키는 것이 옳은지 혼란스러워진다. 당사자가 아닌 이상 쉽게 판단해서는 안되지만 어떤 선택이든 자신의 욕심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카메라는 인물과 감정을 깊숙이 파고들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곁에서 담담하게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죽어가는 사람을 그저 지켜보는 영화의 관음적인 속성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안느의 고통과 시들어 가는 모습은 현실적이며
조르주가 내린 결정은 사랑과 책임감을 결과이지만 그럼에도 폭력적이다. 사랑하기에 끝까지 책임지고자 하는 남자와 자신과 남편의 고통이 끝나기를 바라는 여자의 마지막은 결국 그런 것인가 생각하게 된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선택이지만, 선뜻 비난할 수는 없다.
안느가 죽음을 맞이한 순간 실제로 그것을 원했는지 알 수 없다. 그저 살고자 하는 힘없는 버둥거림만 보였을 뿐이다. 영화는 마지막 조르주의 결단에 동의할 수 있게끔 그의 입장을 충분히 말해주었다. 그에게 느껴지는 연민은 우리의 미래에 건네는 자기변명과도 같다. 우리는 조르주와 안나 둘 중 누구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관객은 일련의 과정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태에 놓인다. 카메라가 인물들에게 갖는 거리감은 죽음 앞에 무력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게 영화는 모든 것을 관객에게 남겨두고 등장인물들을 함께 퇴장시킨다. 부모님이 떠난 집에서 검은 옷차림으로 홀로 앉아 있는 딸 에바는 조르주와 안나의 삶과 사랑의 결실이다. 그리고 이들의 죽음을 감당해야 하는 남겨진 존재이다. 우리는 텅 빈 집에 홀로 앉아있는 에바처럼 적막함을 느끼며 두 사람을 생각한다. 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생각하고, 나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그려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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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틴 스튜어트 버젼의 다이애나는? 영화 <스펜서>
- 스펜서 (SPENCER, 2021)
장르 : 영국·미국, 드라마 │ 감독 : 파블로 라라인
출연 : 크리스틴 스튜어트(다이애나), 잭 파딩(찰스왕세자), 샐리 호킨스(매기) 외
등급 12세 관람가 │ 러닝타임 : 116분
이 영화의 제목은 왜 스펜서인가
금발에 파란 눈, 훤칠한 키에 감각적인 패션, 수많은 파파라치. 엄숙함이 지배하는 영국 왕실에서 헐리웃 스타처럼 반짝이던 인물이 있었다. 바로 비운의 왕세자비, 다이애나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훌쩍 지났지만, 사람들의 입에는 지금도 다이애나가 오르내린다. 패션의 아이콘으로, 영국 왕실의 이단아로, 그리고 만인이 사랑해마지않을 친숙하고 소탈한 성격의 한 여인으로. 그런 다이애나를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연기했다기에, 한 걸음에 영화관으로 달려갔다.
다이애나의 일대기를 다룰 줄 알았던 영화는, 뜬금없이 크리스마스이브에서 시작한다. 이미 두 아들을 낳아 길렀고, 남편의 오랜 외도를 알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묵인하는 시댁 식구들을 견디며 행복을 연기해야 하는 시점의 다이애나다. 동화 같았던 세기의 결혼식으로부터 너무나 멀찌감치 떨어진 시점을 다루고 있는 것에 다소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몰입할 수 있었다. 이 영화의 제목은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아니라 ‘스펜서’니까. 왕실의 며느리이기 이전에 고유한 인간이었을 다이애나 스펜서를 우선적으로 조명해준 덕에, 그녀가 겪었을 고통을 더 깊이 헤아릴 수 있었다.
공주는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그 고통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날이 크리스마스였던 걸까. 영화는, 모두가 행복한 크리스마스 날조차 살얼음 같은 불행을 걷고 있는 다이애나를 비춘다. 남편과 싸우고, 자해를 하고, 변기에 몸을 구부려 음식물을 토해낸다. 그리고는 온 가족이 모여 행복해 ‘보이는’ 사진을 찍는다. 국민들에게 따뜻한 왕실의 크리스마스를 보여줘야 하니 그에 걸맞게 몸무게도 1.4kg 찌워야 한단다. 왕세자비의 삶은 그런 것이었다. ‘왕자와 결혼해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장면을 연출하기 위한 반복의 일상. 정해진 옷을 입고, 몸무게를 통제받고, 마음대로 궁전 밖을 나가거나 개인적인 행동을 해서는 안 되는 삶. 그 억압에 짓눌린 다이애나의 크리스마스는 당연히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녀는 ‘앤 불린’의 귀신과도 마주한다. 오명을 뒤집어쓰고 목이 잘려 처형당한 헨리 8세의 두 번째 왕비, 그 앤 불린 말이다. 그녀는 왕실의 일부이면서도 영원히 왕실의 사람이 될 수 없는 자신과, 왕과 결혼했지만 결국 왕에 의해 처형된 앤 불린을 동일시했던 모양이다. 앤 불린의 환영을 보기도, 자기 자신이 앤 불린이 되기도 하면서 영화는 그야말로 미치기 일보 직전의 다이애나를 보여준다. 불안이 극에 달했던 고작 3일간의 시간을 비추고 있기 때문에 마땅히 촘촘한 줄거리가 있지도 않다. 하지만 이 두서없고 심란한 내면 상태를 편집증적으로 나열하는 방식 덕분에, 관객은 다이애나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피부로 느낄 수 있다.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진정한 자유와 행복은 궁전 밖에 있음을
많은 이들이 생각한다. 왕자랑 결혼하면 얼마나 행복할까, 재벌가에 시집가면 얼마나 많은 것들을 누릴까. 하지만 매일매일 값비싼 의상에 둘러싸여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은 그야말로 단편적인 이미지에 불과할 것이다. 영화 말미, 다이애나는 자신을 옥죄던 비싸고 아름다운 옷 대신 야구모자를 뒤집어쓰고 아이들을 차에 태워 KFC로 향했다. 궁전에는 일반 서민들은 맛보지도 못할 오케스트라와 최고급 요리가 즐비하지만, 굳이 다이애나가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건 귀가 터지도록 떼창하는 대중가요나 KFC 치킨 같은 것들이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우리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른다는 것. 언제든 원하는 복장으로 원하는 음식을 먹으며 마음껏 넷플릭스를 봐도 되는 우리들의 이 삶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이고 행복이라는 것 아닐까.
우리가 사랑했던 건 스펜서
왕족들은, 언제나 왕실의 위엄을 드높이며 그 성벽을 굳건히 유지해왔다. 다이애나를 며느리로 들였던 영국의 윈저 가문 역시 자신들의 이미지를 엄격히 통제하며 그 위엄을 유지해왔다. 하지만 그건 더는 왕이 필요치 않은 이 자유평등의 시대에 걸맞는 방식이 아니었다. 다이애나가 지금 이 순간까지도 사랑받는 이유는, 단연 다이애나가 그 틀을 깨고 불행한 왕세자비에서 걸어 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스스럼없이 국민들 앞에 자신을 드러내고, 에이즈 환자들의 손을 잡거나 노숙인을 찾는 등 친근하고 자주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일 테다.
<실제 다이애나와 두 왕자들>
그리고 이는 다이애나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두 왕자를 통해 묻어나는 중이다. 어머니의 발취를 따라 사회적 약자에 대한 운동을 끊임없이 이어가고 있는 왕자들의 발자취를 보노라면, 다이애나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두 왕자에게도 아마, 경호원도 대동하지 않고 켄터키 치킨을 먹던 그 시간이 가장 행복한 기억이 아니었을지.
스펜서의, 스펜서에 의한, 스펜서를 위한
그녀가 원하던 방식대로 기억해주고 싶은 바람을 담아서인지, 영화는 샤넬백에 펌프스를 신고 있던 불안한 다이애나에서 시작해, 야구모자에 점퍼를 입은 채 웃는 다이애나로 마무리된다. 그녀는 너무나 고고해서 깨질 것 같은 존재가 아니라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을 것 같은 친숙한 존재였다. 또, 행복해 보이고 수동적인 동화 속 여성상을 벗어나 자유를 향해 소신 있게 살아간 한 여성이기도 했다. 우리가 사랑했던 건 왕세자비 타이틀과는 무관한 그녀의 인품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바람대로 그녀를 영원히 ‘스펜서’로 기억해주고 싶다.
글쓰는 우두미
인스타그램 @woodumi
브런치 https://brunch.co.kr/@deum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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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옥 2 | 넓어졌지만 얕아진 종교 디스토피아 세계관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천사가 죽을 날을 고지하고, 고지받은 이를 사자가 시연하기 시작한 뒤로 혼란에 빠진 대한민국. 새진리회의 교리를 거부하는 화살촉의 만행이 극심해지고, '민혜진'(김현주) 변호사를 중심으로 한 소도와 새진리회의 충돌도 잦아지자 청와대 정무수석 '이수경'(문소리)은 결단을 내린다. 정부가 개입해 혼란을 잠재우기로. 이에 그녀는 부활자 '박정자'(김신록)를 내세워 새진리회의 새 교리를 공표하고, 화살촉을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이수경의 계획은 뜻대로 흐르지 않는다. 예상치 못한 또 다른 부활자, '정진수'(김성철)가 등장했기 때문. 지옥에서 수천 번의 시연을 경험한 뒤 되살아난 그는 재빠르게 이수경과 소도의 계획을 파악하고, 화살촉과 힘을 합쳐 새진리회의 교리 공표식을 습격하기로 결심한다. 목적은 단 하나. 새진리회가 감금하고 있는 박정자를 만나 자기가 부활한 의미와 이유를 알기 위해서.
3년 전, <지옥>이 좋았던 이유
2021년 11월, 넷플릭스로 공개된 연상호 감독의 오리지널 시리즈 <지옥>은 충격적이었다. 디스토피아적인 분위기에서 종교의 탄생 과정과 의미를 추적하는 스토리라인이 뇌리를 사로잡았기 때문. 죽을 날을 아는 정진수라는 인물을 예수에 빗대며 보여준 고찰은 장르적 재미와 메시지의 깊이 두 마리 토끼를 잡아냈다. 이해 못 할 현상을 죄악과 정죄의 관계성으로 해석하는 대목은 기독교적 세계관의 재해석으로 보기에 충분했다.
<지옥>은 자기 해석에 관해 자문자답했기에 더 인상적이었다. 박정민 캐릭터가 대표적이다. 그는 시연이 낳은 두려움과 혐오를 악용하는 종교조직을 언론인답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파헤쳤다. 온 세상을 삼킨 종교적 광기에 맞서 의문을 제기한 셈이다. 더 나아가 그와 그의 아내는 목숨을 던지면서까지 맹목적인 믿음 외의 길도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면서 <지옥>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한 비판의식도 보여줬다.
<지옥>의 두 번째 시즌은 첫 시즌의 연장선상에 있기에 여전히 흥미롭다. 특히 한국적 맥락에서는 부자연스러울 수 있는 종교와 정치의 관계를 독특한 이미지로 녹여냈기에 더욱 눈길이 간다. 종교라는 사회적 체계에 대한 창작자의 의견이 보다 적나라하게 드러나기도 하면서, 세계관의 확장도 함께 진행되었기에 의미심장한 장면도 적지 않다. 다만 그 과정에서 본연의 색채를 일부 잃어버린 결과 여러 아쉬움도 함께 남기고 말았다.
정치와 종교의 분리
원론적으로 현대 한국인에게 종교와 정치는 철저히 분리된 영역이다. 이유가 있다. 근대화 과정에서 한국인에게 종교는 정치와 결코 섞여서는 안 될 존재로 인식되었기 때문. 19세기말 아편 전쟁 이후 조선은 근대화의 일환으로 기독교를 수용, 인정했다. 이는 달리 말해 유럽적 종교관을 수용한다는 말이었고, 곧 정교분리와 신앙 자유의 수용을 뜻했다. 즉, 근대적 개념의 종교는 철저히 개인의 내면적 범위로 한정되는 게 핵심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기독교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조선의 전통적인 사상체계에도 영향을 끼쳤다. 정치사상으로서의 ‘학(學)’과 믿음으로서의 ‘교(敎)’가 공존하던 기존 사상체계도 근대적 종교로 거듭나야 했다. 그 과정에 유학과 동학 같은 전통적인 학들은 철저히 믿음으로서의 영역에 충실한 유교나 천도교와 같은 형태로 변했다. 그 외에 무속과 같은 전통 신앙들은 종교 영역 외의 사이비 종교와 같이 인식됐다.
물론 정교분리가 항상 지켜지지는 않았다. 기독교를 수용해 근대화를 이루듯이, 종교를 활용해 일제에 맞서려는 시도도 있었다. 일례로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면면만 보더라도 종교가 민족 개념과 결합해 민족적 정치체로 자처한 사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일제 강점기 때 정교분리와 종교의 사적 영역화는 법제화됐고, 그 이후로도 ‘종교-세속’ 이분법은 어길 경우 사회적 비난을 피하지 못하는 금기로 자리 잡았다.
역사를 역행하는 도전
따라서 <지옥> 시즌 2의 스토리는 신선할 수밖에 없다. 근대화라는 역사적 맥락 안에서 철저히 분리되었던 종교와 정치의 영역이 다시 만나면 발생할 상황을 그려내고자 노력하기 때문. 시즌 1에서 예수의 공생활을 본 따 정진수의 포교활동을 묘사했듯이, 기독교가 정치와 관련을 맺게 되는 과정을 본 따 한국적으로 풀어낸 듯 싶다. 그렇기에 두 번째 시즌은 정교분리라는 원칙을 파괴하고, 역사를 역행하는 상상력으로 가득하다.
특히 <지옥> 시즌 2는 로마 제국을 재통합한 콘스탄티누스 1세를 연상시킨다. 그는 기독교가 공인된 후에 삼위일체 교리를 둘러싼 논쟁이 극심해지자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열고, 삼위일체 교리를 주장하는 아타나시우스 파를 지지해 사회를 안정시켰다. 중요한 것은 콘스탄티누스 1세의 결정이 신앙심의 발로가 아니라, 철저히 정치적 결단이었다는 점이다. 즉, 그에게 종교는 단지 로마 제국의 안정과 평화를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수경이 <지옥> 시즌 2의 주동 인물인 이유를 엿볼 수 있다. 청와대 정무수석인 그녀는 종교를 정치의 영역으로 포섭한다. 정확히는 종교를 정치의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한다. 그녀에게는 시연, 천사, 지옥의 존재는 중요한 게 아니다. 단지 청와대와 정부에서 새진리회와 화살촉, 그리고 소도를 정치적으로 관리해 사회적 혼란을 해소하고, 종교적 광기를 이성으로써 통제하여 시스템을 바로잡고자 할 뿐이다.
그래서 그녀는 예측할 수 없는 광신도 집단인 화살촉을 제거하기 위해 종교의 영역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가장 크고 안정적인 교단인 새진리회와 종교적 해석을 거부하는 소도에게만 발언권과 영향력을 주려고 갖가지 계획을 꾸민다. 새진리회의 교리를 국가적으로 재정립하여 국교 수준의 정통성과 권위를 부여하는 한편, 이와 같은 종교적 해석을 거부하는 시민들에게는 무신론에 가까운 소도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속편다운 정체성
이처럼 종교와 정치의 접점이라는 새로운 소재를 다루는 한편, <지옥> 시즌 2는 종교 자체에 대해 더 깊이 탐구하며 시리즈의 정체성도 이어간다. 시즌 1이 새진리회와 같이 믿음을 악용하는 체계와 사람을 비판했다면, 이번 시즌은 종교 자체에 대해 근원적인 회의감을 표한다. 특히 '초월적인 신이 전지전능하다면, 인간이 신의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을까?'과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다룬다. 그 중심에는 정진수와 박정자가 있다.
부활한 정진수는 어떻게든 박정자를 만나려 한다. 끊임없이 시연받는 지옥의 의미와 자신이 부활한 이유를 알려줄 사람을 찾으려고. 하지만 박정자에게 답이 있을 거라는 그의 기대는 산산조각 난다. 둘의 지옥은 서로 달랐고, 부활 후 그들에게 주어진 것도 달랐으니까. 신의 뜻을 알려고 노력한 정진수는 사자가 된 반면, 주어진 상황을 그저 받아들인 박정자는 그토록 염원하던 아들을 만나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정진수와 박정자의 대비는 마치 신의 의도나 계획을 알고 싶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특히 결말에서 아이러니가 극대화된다. 초자연적 현상과 종교 체계를 통제하려는 이수경의 시도가 전부 실패로 귀결되는 순간, 그녀 역시 죽을 날을 고지받기 때문. 수만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일제히 고지가 내려지는 광경 역시 새진리회와 화살촉이 그토록 싸우면서 만들어 온 서로의 교리를 모두 무의미하게 만드는 듯 싶다.
이렇게 보면 <지옥> 시즌 2는 종교의 무의미함을 말하는 담대한 작품이다. 종교를 믿거나 이용하는 이들 모두 허상에 빠져 있다고 지적하고 있으니까. 이는 아내 오지원이 정진수 때문에 죽었다며 그를 원망하던 천세형이 죽기 직전 "신은 지금 지옥을 이 세상으로 옮기려고 한다!"라고 외치는 이유이기도 하다. 화살촉에 빠진 오지원처럼 종교에 휩쓸리지 않을 자신만의 기준점이 없다면 종교가 창궐한 세상은 곧 지옥이나 다름없을 테니.
넓어진 만큼 얇아진 이야기
다만 <지옥> 시즌 2의 대담한 상상력은 지난 시즌에 비해 큰 충격을 주지 못한다. 사실 속편인 만큼 신선함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시연과 사자들은 더 이상 신기하지 않다. 물론 이를 방지하기 위해 지옥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고, 정진수의 박정자를 대비하며 사자와 천사의 존재에 대해 복선을 암시하기도 했다. 전편에 비해 액션의 비중을 늘리고 스케일도 키워서 보는 맛을 살리려는 노력도 눈에 띈다.
문제는 이야기의 깊이와 밀도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 특히 단체 간의 갈등과 대립 구도를 그려내는 방식이 다소 평면적이다 보니 주제와 소재의 흥미가 떨어진다. 새진리회는 이수경의 말대로 움직이는 허수아비에 불과하고, 소도 역시 지나치게 민혜진의 관점에서 묘사되다 보니 내부의 갈등이 억지스럽다. 이에 더해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고려하더라도 화살촉의 테러나 방송 연출 방식은 다소 극단적이고 작위적으로 느껴진다.
몰입도를 유지할 인물도 부족하다. 배우가 바뀐 정진수는 속을 알 수 없어서 신비스럽고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잃었다. 그에 반해 이수경은 거의 모든 사건을 좌지우지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어서 캐릭터가 일차원적으로 보인다. 그 결과 <지옥> 시즌 2는 세계관을 확장시켰을지언정, 확장되는 과정이 느슨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복선 회수보다도 시즌 1의 분위기와 깊이를 되찾는 게 시즌 3의 최우선 과제가 아닐까 싶은 이유다.
Acceptable 무난함
종교적 디스토피아를 지탱하려는 광기와 통제하려는 이성의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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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면 차박은 위험할 수도 있다?
시놉시스
수원과 미유는 결혼 1주년을 맞은 부부이다. 둘은 결혼 기념 여행으로 산으로 가서 차박을 하기로 한다. 하지만 차박을 하려고 할 때 이상한 사람들만 자꾸 나타나고 차박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결국 차박을 하게 되고 그곳에서 실종 사고가 발생했다는 아까 만난 의문의 남자의 말이 떠오른다. 한편 미유는 수원에게 아까 그 실종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혹시 토막 살인범이 나타나면 어떻게 하겠냐고 묻자 수원은 산 높은 곳까지 올 리가 없다며 다독인다. 그러나 차 안에서 잠든 사이에 미유는 수원이 없어졌다는 걸 알게 된다.
큰 걱정을 하는 미유가 수원을 찾기로 하는데 그녀의 앞에 가면 쓴 살인마가 나타나 죽이려고 한다. 과연 차박을 한 곳에서 수원과 미유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미유에게는 수원에게 말하지 못할 비밀이 있는데 그건 바로 아는 남자와 잠자리를 가졌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안 수원은 자신만의 계획을 짜서 미유와 함께 차박을 하는 것을 유도하고 가면 쓴 살인마와 미유가 아는 남자를 불러 사건을 일으켰다. 둘의 사랑은 변함없는 사랑이지만 어긋나버린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아내의 외도를 바라본 남편의 관점에서 복수심이 불타오른 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 영화에서는 차박이라는 일상생활에서 있을 수 있는 일들을 담아서 공포심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영화의 형인혁 감독은 로맨스와 스릴러를 합친 영화라고 한다. 근데 스릴러보단 로맨스의 비중에 조금 더 두었다고 기자 간담회에서 밝혔다.
딱히 완전히 스릴러 장르라고 보기는 어렵고 로맨스물이 첨가된 장르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 미유 역을 맡은 김민채 배우는 포틀랜드 호려 영화제에서 최우수 연기상을 받았다. 김민채 배우가 선보이는 호러 연기와 수원 역을 맡은 데니 안 배우의 감미로운 발라드 노래도 볼 수 있다.
또한 의문의 남자 역을 맡은 홍경인 배우의 스산한 모습도 이 영화를 보는데 매력을 더한다.
차박 - 살인과 낭만의 밤은 대형 블록버스터는 아니지만 저예산으로 만든 스릴러 영화이다. 그래서 만약 9월 영화 중에 연인끼리 스릴러와 로맨스물을 결합한 영화를 보고 싶다면 이 영화를 추천한다!
차박을 이용한 스릴러+로맨스 영화!
※ 씨네랩의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초대받아 작성한 영화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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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2주 차, 최신 씨네 뉴스
“지금 너무 많은 일을 하고 있어요. <라마와의 랑데부> 작업 중인 것은 사실이고, 그 각본은 천천히 진행되고 있어요. <클레오파트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듄: 메시아>도요. 다시 카메라 뒤로 돌아갈 날을 기대하고 있어요. 다음에 어떤 일이 있을지는 두고 봐야겠죠.”
-드니 빌뇌브-
최근 빌뇌브 감독은 <라마와의 랑데부>를 ‘강화된 <컨택트>’라고 묘사했는데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창조자인 클라크가 원작자이기 때문에, 이 작품도 상당한 정신적 충격을
줄 만한 SF가 될 것으로 기대가 됩니다.
9월 2주차 씨네뉴스 시작합니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더 룸 넥스트 도어> 황금사자상 수상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첫 영어 장편 영화 <더 룸 넥스트 도어>가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습니다. 줄리앤 무어와 틸다 스윈튼이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삶과 죽음, 안락사와 여성의 우정에 대해 다루며 영화가 상영됐을 때 18분간 기립박수가 터져나왔다고합니다.
알모도바르 감독은 “이 세상에 존엄하게 안녕을 고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기본 권리”라며 “안락사는 정치적 문제가 아닌 인간의 문제”라고 수상소감을 밝혔습니다.
드니 빌뇌브 <라마와의 랑데부> <클레오파트라> 프로젝트 “천천히 진행중”
드니 빌뇌브 감독은 <라마와의 랑데부>, <클레오파트라>, <듄: 메시아> 프로젝트를 모두 진행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최근 그는 <라마와의 랑데부>를 ‘강화된 <컨택트>’라고 묘사했으며, <라마와의 랑데부> 각본은 <듄>을 작업했던 에릭 로스가 맡고 있다고 합니다.
<클레오파트라>는 <1917>의 각본가 크리스티 윌슨-케언스가 각색을 맡았으며 캐스팅 목록이 유출되며 젠데이아가 ‘클레오파트라’역을 맡기로 했다는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12분간 기립박수 받은 <조커 폴리 아 되>
토드 필립스 감독의 영화 <조커: 폴리 아 되>가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후 12분간의 기립박수를 받으며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호아킨 피닉스와 레이디 가가의 강렬한 연기가 돋보였으며, 새로운 인물들과 깊어진 서사가 관객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영화는 기존 슈퍼히어로 장르를 재해석하며 아카데미 주요 부문 후보로 오를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고 있습니다.
영화 <내부자들> 시리즈 확정 송강호 주연
영화 <내부자들>이 배우 송강호 주연의 시리즈로 만들어집니다.
제작사 하이브미디어코프는 내년 크랭크인을 목표로 시리즈 <내부자들> 제작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드라마에서 송강호는 백윤식이 연기했던 ‘이강희’ 역을 맡아 대한민국의 판을 짜고 조직하는 인물을 연기합니다. <부부의 세계>,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를 연출한 모완일 감독이 연출을 맡고, <모가디슈>와 <암살>의 이기철 작가가 극본을 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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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 - 자발적으로 입문해서라도 받고 싶은 양질의 팬서비스
2021년이 되었지만 코로나로 인한 여파는 극장가에 아직 남아있고 회복될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극장가에서 장기적 흥행을 보이고 있는 영화가 있다. 바로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 이다. 필자는 원래 일본 애니메이션은 특정 감독과 작품을 빼면 지지하지 않는 편이다. 다만 일본에서 보인 놀라운 흥행과 한국에서도 개봉 전부터 보이는 범상치 않은 예매율이 흥미롭게 느껴졌다. 일본에서는 일종의 사회 현상이자 신드롬이라고 평가 될 정도이니. TVA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는 작품이라 개봉 며칠 전부터 TVA를 정주행했다. TVA를 보고 든 생각은, 영상미와 독창성이 가미된 B급이라는 생각이었다. 이렇게 평하는 이유를 말해보자면, 가장 크게는 스토리이다. 스토리를 풀어놓고 보면 정말 진부하다. 시련을 견뎌내고 강해지는 주인공과 추가되는 일행, 그리고 마치 게임의 보스 레이드마냥 적(혈귀)과 싸우는 내용의 반복. 크게 생각할 것 없이 정말 단순한 서사이다. 다만 이를 보충해주는 것은 상당히 공들인 것이 보이는 작화와 때때로 사용되는 적절한 3D의 사용, 그리고 반복되어 나오는 혈귀들이 상당히 다채롭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반복이지만 즐겁고 흥미로운 반복이라 생각이 들었다. 다만 이것을 극장판으로 관람한다면 어떨까라는 기대감과 의구심이 동시에 들었다. TVA의 러닝타임은 30분인데, 이 영화의 러닝타임은 거의 2시간(117분)이다. 영화를 보고나니, 필자가 예상했던 장점과 단점이 그대로 나왔다.
TVA의 연장선답게, TVA를 보지 않으면 감흥을 느끼기 어렵거나 이해하기 어렵다. 영화의 시작부터가 이미 TVA를 보고 인물들의 관계와 사건들을 이해하고 있다는 전재하에 시작을 하기 때문이다. 흔히 '팬'들만을 위한 팬서비스이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기회에 자발적으로 입문해서라도 받아야 하는 수준의 팬서비스라고 생각한다. 상술하였다시피 서사의 독립성이 낮을뿐더러 연출이 아닌 설명과 독백을 통해 풀어나가는 방식은 정말 진부하고 안일하기 짝이 없지만, 이를 보충하는 캐릭터들의 개성과 힘준 것이 보이는 액션씬은 정말 만족스럽다. TVA에서 보여준 훌륭한 작화를 극장판에서도 안정적으로 잘 보여주는데, 극장판답게 전투씬의 규모가 커져서 재미를 더해준다. TVA가 만족스러웠다면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영화이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팬덤이 말하는 것 처럼 명작이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다. 상술하였던 서사와 전개의 반복과 안일함의 단점이 장점으로 일부 덮혀질 뿐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서사적 헛점은 팬덤측에서도 보일 정도인데, 극장판으로 만들기위해 불필요한 장면과 연출로 시간을 끈 것이 확연히 느껴지며, 빌런의 교체와 등장이 정말로 뜬금없다. 웬만해선 호평을 남기는 팬덤에서도 비판점이 나올 정도면 일반 관객들은 대체 얼마나 크게 이 단점을 느낄 것이란 말인가. 영상미 측면에서도 애니메이션계의 획을 그었다고는 말하기 힘든 수준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에 한정시켜보자면 이미 한참전에 아키라와 같은 뛰어넘을 수 없는, 아직도 영향을 끼치는 혁신이 존재하며, 예술성 측면에서는 유럽 애니메이션들에 한참 밀리고도 남는다. 팬서비스라는 것이 이 영화의 전부를 설명하는 것이므로, 철저히 팬덤을 저격한 상업성만이 존재할 뿐, 예술적 측면에서는 칭찬할 점이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괜찮은 오락성 영화라 평할수는 있겠지만, 애니메이션계에 획을 그었다는 것은 절대 동의할 수 없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로나로 인해 처참해진 극장가에 활기를 불어넣었다는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하며 아직 애니메이션화되지 않은 원작의 분량이 상당히 많고, 벌써 2기 발표가 났다는 점을 들어 귀멸의 칼날 프랜차이즈의 미래를 충분히 주목할 만 하다.
*이 글은 원글 없이 새로 작성된 글이며, 출처란에는 작성자의 인스타그램 주소를 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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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언어의 정원> 예고편
사랑보다 훨씬 더 이전의 고독한 사랑의 이야기!
구두 디자이너를 꿈꾸는 고등학생 ‘다카오’는
비가 오는 날이면 도심의 정원으로 구두를 스케치하러 간다.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유키노’라는 여인과 정원에서 만나게 되고,
예상치 못한 만남은 비가 오는 날이면 계속 이어진다.
그리고 비록 이름조차 모르지만 걷는 법을 잊어버린 그녀를 위해
‘다카오’는 구두를 만들어 주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장마가 끝나갈 무렵, 그들 사이에는
뭔가 말하지 못한 것들이 남아 있는 듯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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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놉> 2차 예고편
자,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