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2024-05-20 07:39:38
차이콥스키가 결코 떨쳐내지 못할 이름

여기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여자가 음악원에 가는 것보다는 시집가는 게 남는 장사라고 말하는 남자다(그러나 이 말의 대상인 미래의 아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보면, 그의 말은 틀렸다). 자신보다 훨씬 어린 나이의 결혼할 여자에게 자신은 여자를 사랑한 적이 없으며, 결혼하더라도 형제 관계처럼 지내야 할 거라고 거듭 확인시키는 남자다. 결혼식 당일 성당 앞, 남루한 차림의 어느 ‘미친 여자’가 설레는 마음의 신부에게 절대 그와 결혼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남자다. 또 다른 누군가 역시 신부에게 그에게서 도망치라고 조언하는 남자다. 남성에게만 다정하고 그들과만 시간을 보내는 남자다. 아내가 지참금으로 가져오기로 한 돈의 융통이 어려워지자 그 돈만 믿고 있었다며 윽박지르는 남자다. 음악가를 꿈꾸는 아내가 남편의 친구들 앞에서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면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남자다. 독수공방에 지친 아내가 침대로 다가오자 경멸하는 표정을 짓더니 결국에는 목을 졸라버리는 남자다. 마침내는 너의 집착 때문에 더는 창작할 수 없다며 자신의 ‘재능 보존’을 위해 아내에게 떠나라고 말하는 남자다. 친구들을 앞세워 아내의 존재가 ‘신경 쇠약’의 원인이라고 공공연하게 선포하며 ‘태양’인 자신의 재능을 갉아먹지 말라고 말하는 남자다.

그러나 그의 아내, 만만치 않다. 그녀는 남편의 재능을 추앙한다. 아니, 숭배한다. 적극적인 구애 편지로 처음 미래의 남편을 만난 자리에서 남자의 까다로운 요구를 모두 수용하고 자신의 지참금 규모를 어필한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해 적극적‧자발적으로 자신을 남자에게 상납한다. 그녀의 ‘과잉’은 구애 과정에서 그치지 않는다. 너 때문에 자기 재능이 좀먹고 있다고 모욕하며 이혼을 요구하는 남편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그녀는 남편이 자신의 외도가 이혼의 원인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문서를 보내왔는데도 단호하게 이혼 서류 서명을 거부한다. 자신만이 유일한 그의 아내이기 때문이란다. 그렇다고 그녀가 ‘정숙한 아내’였던 것도 아니다. 내내 남편에게 외면받고 별거하는 동안 육체적 관계만 나누던 남자를 따로 두었고, 그 남자의 아이를 셋이나 낳았다. 아이는 모두 고아원으로 보내진 후 유년기에 사망했다. 남편이 보내주는 돈으로 근근이 연명하면서 아내라는 지위를 끝끝내 포기하지 않았고 종국에는 정신병원에서 사망했다. “당신은 나와 못 헤어져요”라고 말하는 그녀는 남편에게 사랑받을 수 없다면 다른 방식으로라도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기로 작정한 듯하다. 그녀는 자신의 집착이 증오, 경멸, 멸시 등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품을 수 있는 가장 부정적인 감정의 총체로 되돌아오더라도 남편에게 두려움, 소름 끼침 등을 줄 수 있다면 어쨌든 남편과 함께하고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 그녀는 남자가 결코 떨쳐내지 못할 이름이 되기로 결심했고 죽을 때까지 그 결심을 삶으로 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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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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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포인트와 소소한 스토리
11.01 에 본영화 .배우들의 다양한 배역과 입체적인 캐릭터, 90년대 후반의 시대를 엿보는 맛은 쏠쏠하지만,다른 성별이 판단한 여자의 모습을 제3자의 입장에서 봤을때, 참으로 어색하고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몇 가지 있는건 어쩔 수 없는 한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