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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2025-03-15 13:06:56

의심과 확신 그 사이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콘클라베>는 일관적으로 이방인에 주목한다. 영화의 오프닝 크레딧에서 알파벳 ‘I’만이 흰색으로 칠해져 있다. 엔딩 크레딧에서는 다양한 알파벳을 흰색으로 칠하나 각 이름마다 단 하나의 알파벳만이 흰색으로 칠해져 있다. 교황을 선출하는 마지막 투표 전, 하얀 우산을 쓴 추기경들의 행렬 쇼트를 자세히 살펴보자. 한 명의 추기경이 우산을 쓰고 있지 않다. 투표를 앞두고 추기경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의견을 공유하는 씬에서도 마찬가지다. 서너 명씩 모여 있는 추기경들과 달리 추기경 한 명이 혼자 의자에 앉아 있다.

 

 

 베니테즈 추기경은 이방인이다. 콘클라베를 주관하는 로렌스조차 알지 못하고 오직 선종한 교황만이 베니테즈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는 가톨릭 신자가 거의 없는 카불의 대주교로 로마에 온 추기경이며 준비된 명단에 없던 인물이다. 이 이방인은 로렌스의 부탁으로 추기경들의 식사 전 기도를 맡는다. 그는 주신 음식에 대한 감사뿐 아니라 식사 자리에 참여하지 못하는 소외된 이들에 대한 기도, 그리고 음식을 준비해준 수녀들에 대한 기도까지 한다. 그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콘클라베를 운용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안락한 식사 자리가 일상이 아닌 이들을 떠올리고 있다.


 여기서 수녀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수녀들은 콘클라베에 참여할 수 없다. 교황 선출에 영향력을 미칠 수 없고 당연히 교황이 될 수도 없다. 수녀 또한 콘클라베에서의 이방인에 해당한다. 그러나 콘클라베 자체는 수녀들의 노동력 없이 열릴 수 없다. 영화는 이러한 수녀의 역할을 조명한다. 마지막 교황 투표를 위해 사람들이 모이는 씬에서 계단을 오르는 추기경들의 쇼트 뒤로 계단을 내려오는 수녀들의 쇼트가 나온다. 위에서 열리는 콘클라베를 아래서 뒷받침하는 수녀들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로렌스는 트랑블레 추기경의 비리를 알리기 위해 추기경들에게 보여줄 기밀문서를 복사하고자 한다. 로렌스는 무려 콘클라베를 주관하는 단장이나 복사기는 사용할 줄 몰랐기에 아녜스 수녀의 도움을 받아 문서를 복사하게 된다. 이 기밀문서를 공개한 로렌스는 추기경들 사이에서 비난을 받는다. 이때 아녜스 수녀는 트랑블레가 아데예미 추기경을 곤경에 빠트리게 하기 위해 한 일을 증언하며 트랑블레가 교황이 될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이 시퀀스의 핵심은 교황이 될 유력 후보자였던 트랑블레의 몰락이다. 로렌스가 복사기를 사용할 줄 모른다는 사실은 트랑블레의 몰락을 묘사하는 데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영화는 이 과정 속에서 수녀의 역할을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다.



 


 다시 베니테즈의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된 그는 남성인 동시에 여성인 존재다. 그의 성 정체성을 통해서도 그를 이방인이라 규정할 수 있지만 그와 동시에 성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첫 교황이라 해석할 수도 있다. 마지막 투표를 앞두고 베니테즈는 테러를 벌이는 무슬림들을 상대로 종교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테데스코 추기경의 말에 반박한다. 우리의 적은 그들이 아니라 각자의 마음속에 있다며 가톨릭 교회가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베니테즈의 모습은 성경 속의 예수를 떠올리게 한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7:41) 영화는 베니테즈를 이 시대의 메시아로서 재해석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렇다면 베니테즈가 말한 미래로 나아가는 교회는 어떤 교회를 의미하는가? 이 교회는 과연 신 앞에서 옳은교회인가?

 

 

 교황은 선종 직전까지 가톨릭교회를 의심했다. 이 의심은 교황 자리를 향한 추기경들의 욕심과 각종 비리로 인한 교회 내부의 부패를 의미한다. 추기경들은 신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교황을 선출하는 데보다 세간의 평가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교황을 선출하는 데 더 관심을 가진다. 전통주의자들은 로마의 전통을 강조하고 자유주의자들은 변화하는 현대사회에 발맞추어 교회 또한 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두 주장 모두 같은 성서를 근거로 하기에 양측 중 하나의 주장만이 옳다고 우리는 감히 판단할 수 없다.


 

베니테즈의 미래로 나아가는 교회는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관용과 포용을 강조한다. 영화는 베니테즈의 교회를 양측을 모두 포용하는 옳은 방향의 교회로 그리며 베니테즈는 자신이 확신들 사이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는 영화가 로렌스를 통해 계속해서 강조하는 의심과 확신의 질문에 대한 베니테즈의 응답이기도 하다. 그러나 베니테즈의 입장 또한 끊임없는 의심보다는 확신에 가깝다. 인간은 모두 불완전한 소인배이기에 어느 것이 옳은 방향의 신앙인지 영원히 알 수 없다.



 


 제가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죄는 바로 확신입니다. 의심 없는 확신은 관용의 가장 치명적인 적입니다.” 로렌스는 첫 번째 투표를 앞두고 추기경들 앞에서 연설을 한다. 예수의 12제자 중 의심하는 제자로 알려진 도마처럼 (토마스) 로렌스는 영화 내내 의심한다. 그는 교황이 될 유력 후보자들의 결점을 하나하나 의심하고 있으며 기도가 잘 되지 않는다는 로렌스의 말에 비추어 우리는 그가 신의 존재까지 의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침내 베니테즈를 교황으로서 가장 적합한 추기경이라 확신하는 순간 다시 의심이 찾아오기도 한다. 과연 간성(intersex)인을 교황으로 세워도 되는 걸까. 베니테즈의 성 정체성이 앞선 추기경들처럼 하나의 결점에 해당하진 않을까.


 

영화에는 거북이가 두 번 등장한다. 첫 투표가 끝난 날 밤, 거북이들을 보고 있는 베니테즈에게 로렌스는 전대 교황이 생전에 거북이들을 아꼈다며 자꾸 도망치려 하는 게 문제라고 이야기해준다. 교황이 선출된 뒤 베니테즈의 성 정체성을 알고 혼란스러운 로렌스는 성당 안까지 도망쳐온 거북이를 다시 마주친다. 로렌스는 거북이를 물가로 돌려보낸 뒤 미소 짓는데, 이 거북이는 마치 로렌스 그 자체 같다. 추기경들뿐 아니라 자신의 신앙까지 의심했던 로렌스는 길을 잃은 거북이, 물가로부터 도망치려는 거북이다. 콘클라베가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로렌스는 죽은 교황의 뜻을 알 수 없어 괴로워하고 끊임없는 의심에 휩싸인다. 마침내 그는 베니테즈의 비밀을 받아들이고 베니테즈의 교황 선출이 신의 뜻임을 인정한다. 영화는 이를 물가로 돌아온 거북이와 그 앞에서 미소 짓는 로렌스로 표현한다.


 

영화 <콘클라베>는 성스럽고 경건한 의식 이면에 교차하는 인간의 이해관계와 정치적 복잡성만을 다루지 않는다. 거기서 더 나아가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과 그 신앙의 형태를 깊이 고찰한다. 종교가 추구하는 진리는 불변하나 그 진리를 추구하는 삶의 과정은 단순히 확정될 수 없다. 끊임없이 의심하자. 의심 없는 확신을 멀리하자. 의심과 확신 사이에서야 종교는 진리에 더 가까워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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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 쿠니
    2020.10.13. 19:14

    반전포인트와 소소한 스토리

    쿠니
    2020.10.13. 19:14

    11.01 에 본영화 .배우들의 다양한 배역과 입체적인 캐릭터, 90년대 후반의 시대를 엿보는 맛은 쏠쏠하지만,다른 성별이 판단한 여자의 모습을 제3자의 입장에서 봤을때, 참으로 어색하고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몇 가지 있는건 어쩔 수 없는 한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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