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2025-04-07 23:34:01
<패러딘 부인의 재판>을 보고 <헤어질 결심> 생각을 하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남편을 죽였다는 죄목의 외국인 여성 의뢰인/용의자가 있다. 그녀를 사랑하게 된 남성 변호사/형사가 사건을 잘못된 판결로 몰아간다.
<패러딘 부인의 재판>과 <헤어질 결심>은 유사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보고 나서의 느낌은 아주 다른데, 형사/변호인의 아내 캐릭터가 그 이유를 푸는 실마리가 되어준다.
킨의 아내 게이는 아름답고 착하며 남편을 헌신적으로 사랑한다. 관객은 자연스레 그녀의 심리를 따라가는데, 처음에는 남편의 흔들리는 마음을 의심하고, 그를 심문하고, 응원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결말까지 지켜본다. 사건을 조사하려고 타지에 있는 부인의 집에 방문할 것이라는 킨의 말에 게이는 직감이 발동한다. 처음에는 같이 가자고 설득하다가 그 설득에 킨이 넘어오자 태세를 전환하여, 혼자 가서 조사를 열심히 하고 꼭 재판에서 이기라고 한다. 게이가 입장을 바꾼 이유는 남편이 패러딘 부인을 사랑하니 그녀가 재판에서 져서 사형을 구형 당한다면 그는 죽는 날까지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는 줄 알 것이므로 부인이 이겨서 살게 되는 것이 자신에게도 좋다는 것이다. 남편을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아내의 모습이다. 이처럼 킨에게는 게이라는 돌아갈 따뜻한 집이 있기 때문에 관객에게는 패러딘 부인을 향한 킨의 사랑이 더욱 도발적이고 있어서는 안 될 것으로 보인다.
<헤어질 결심>의 해준의 아내, 정안은 사뭇 다르다. 게이에 비해 극에서 차지하는 비중 자체가 확연히 적다. 그녀 또한 해준을 헌신적으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이지만(예: 보양식 손질 장면) 남편에게서 외도의 낌새를 알아차린 그녀는 두말없이 다른 남자와 집을 떠난다. 이는 박찬욱이 서래와 해준의 러브 스토리, 절절한 멜로 드라마를 그리고자 했기 때문이다. 정안은 관객이 깊이 이입할 만한 대상이 아니다. <헤어질 결심>은 서래와 해준의 첫 헤어짐을 기점으로 1부와 2부로 나뉠 수 있는데, <패러딘 부인의 재판>은 딱 1부에만 해당되는 내용처럼 보인다. 남편을 죽인 것이 패러딘 부인임이 밝혀지는 것이 영화의 결말이고, 극을 추동하는 미스터리도 '정말 패러딘 부인이 자기 남편을 죽였는지'의 여부이기 때문이다. <헤어질 결심>은 그럼 그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2부에 담고 있다. 그리고 2부를 끌고 나가는 미스터리는 '서래가 정말로 해준을 사랑했는지'다.
<헤어질 결심>을 보고 이 영화가 불륜을 미화해서 불쾌했다는 의견들이 있었는데,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아닐 뿐더러 불륜=나쁜 것 이라는 공식, 그리고 결혼 제도에 대해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이탈리아에서 온 어린 패러딘 부인은 시각장애인과 결혼했고 그 이유는 가진 것이 없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외국인 노동자 서래가 한참 늙은 기도수와 결혼해야 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하지만 오직 사회적 약자만이 결혼을 이용하여 생활을 안정시키는 것은 아니다. 특별히 계급 상승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도 결혼이라는 계약 앞에서 모두가 계산기를 두드린다. 특히 '사'자 직업의 경우 직업 세계에서의 신용도를 얻기 위해 결혼하는 경우가 많다. 나이가 찼는데 결혼을 하지 않는 경우 이상하다고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다. 불륜이 나쁜 것이라고 정의 내리기 전에 결혼이란 무엇인지, 왜 결혼이라는 제도가 생겼는지, 배신이란 무엇인지, 사랑이란 무엇이고 그것은 영원한 것인지 생각해 보면 좋겠다.
<패러딘 부인의 재판>은 옛날 헐리우드 영화답게, 결국은 가족의 품에 안길 킨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패러딘 부인의 매력이 아름다운 외모를 제외하면 거의 그려지지 않는다는 것도 의아했다. 부인은 변호인의 앞이나 법정에서도 주눅들지 않는 대단한 카리스마를 갖고 있지만 딱히 킨을 유혹하거나 그에게 끌려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킨의 사랑은 더욱 마녀에 잠시 홀린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반면 <헤어질 결심> 속 해준의 사랑은 공감할 만하다. 서래의 순수하고 소박한 매력, 억압되어 있던 남성을 어루만져 평화를 주는 여성인 점, 가정폭력을 당하다가 결국 치밀한 계획을 세워 그 생활에서 빠져나온 점 등 관객이 서래에게 이입할 수 있는 면이 다양하다. 해준은 직업적 윤리의식이 투철하다 못해 철옹성 같은 형사다. 그 형사가 사랑이 개입된 실수를 하고, 그 실수 때문에 모든 것을 잃는다. 서래는 어쨌거나 고의로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결말에서 두 사람이 웃으며 사랑의 도피를 하는 것을 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해준의 미래도 쉬이 그릴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사랑이 너무나 거대하고 돌이킬 수 없는 운명적인 성격을 띄고 있기 때문이다. 서래와 해준은 헐리우드가 찍어낸 판에 박힌 평면적 인물이 아닌 각자의 고유한 개성을 가진 특별한 인물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사랑하게 된다.
결국은 정상가족주의를 충실히 지킨다는 면에서 <패러딘 부인의 재판>은 실망스러운 작품이지만, 히치콕 영화답게 재미있는 장면들이 있었다.
살인 사건을 조사하려고 패러딘 부인의 집, 그 중에서 부인의 방에 들어간 킨은 침대 프레임에 그려진 부인의 얼굴이 자신을 따라다니는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영상에서 아주 재미있게 묘사된다.
패러딘 부인은 고정되어 있고 다른 것들은 움직이는 구도가 법정에서 한 번 더 나오는데, 부인의 연인 안드레 라투르가 증언을 마치고 나갈 때다. 안드레는 정말 부인을 증오하는지, 왜 그런지, 혹은 뭔가 다른 것이 더 있는지 의심하게 하는 촬영이다.
샹들리에 보석이 화면 상단에 내려 와 있는데, 꼭 괴물의 입 안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패러딘 부인 사건 때문에 한 남자는 자살하고 다른 한 남자는 직업적 명성을 잃게 되니 저 보석은 패러딘 부인의 치아라고 볼 수도 있겠다.
<헤어질 결심>은 박찬욱 영화 중 가장 감정적으로 거리 두기가 힘든 영화다. 사운드 트랙만 들어도 눈물이 난다... 그래서 이에 관해 글도 쓸 수 없었고, 좋은 부분을 짚어내기도 힘들었는데 그 모티브가 된 작품을 보고 나서야 관련 글을 쓸 수 있게 되다니 신기한 경험이었다. 최근 재개봉을 하기도 했으니 극장에서 보고 또 이야기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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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포인트와 소소한 스토리
11.01 에 본영화 .배우들의 다양한 배역과 입체적인 캐릭터, 90년대 후반의 시대를 엿보는 맛은 쏠쏠하지만,다른 성별이 판단한 여자의 모습을 제3자의 입장에서 봤을때, 참으로 어색하고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몇 가지 있는건 어쩔 수 없는 한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