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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2025-04-09 17:44:57

악연 | 발버둥칠수록 벗어날 수 없는 업보의 늪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사채업자'(조진웅)에게 진 빚을 아직 갚지 못한 '박재영'(이희준). 기한이 다가올수록 그는 마음이 급해진다. 이에 아버지를 죽인 후 사고사로 위장하고, 사망보험금으로 사채를 갚기로 결심한 재영. 그는 같은 공장에서 일하던 조선족 출신 살인 전과자 '장길룡'(김성균)에게 아버지 살해를 의뢰한다. 하지만 길룡이 아버지의 사망을 사고사로 위장하는 데 실패하면서 재영의 계획은 예상 못한 나비효과를 초래한다.    

 

 

 

한편, 한의사 '한상훈'(이광수)는 애인 '이유정'(공승연)과의 데이트 도중 음주 뺑소니 사고를 저지른다. 사망자가 발생했을 뿐만 아니라, 목격자까지 생기자 상훈은 사고를 숨기려 한다. 시체를 암매장하고 목격자 '김범준'(박해수)의 입을 돈으로 막으려는 것. 그러나 범준이 더 많은 돈을 요구해 오면서 그의 계획은 또 다른 사고를 낳고, 사건과 사고가 연이은 끝에 범준, 재영, 유정, 그리고 '이주연'(신민아)의 악연이 모습을 드러낸다.

 

 

 

 

 

 

 

업보로써 직조한 피카레스크 스릴러

 

힌두교나 불교 같은 인도 계열 종교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개념이 카르마(Karma), 곧 업과 업보다. 이들 종교에서는 모든 지각 있는 존재의 행위와 결과가 그들이 태어난 순간부터 연쇄적으로 묶여 있다고 여긴다. 원인으로 작용하는 그들의 생각이나 언행은 업이고, 업의 결과는 업보다. 업에 따라서 업보는 달라질 수 있다. 선업을 쌓았다면 좋은 업보를, 악업을 쌓았다면 나쁜 업보를 감당해야 한다.

 

 

 

이때 업보는 당장 행위자에게 돌아오지 않아도, 언젠가는 되돌아온다. 이번 생이 아니면 다음 생, 다다음 생, 혹은 사후의 내세에서라도 업보는 행위의 당사자에게 무조건 되돌아간다. 인도 계열 종교는 대체로 한 개체가 죽더라도 소멸하지 않고 윤회하는 세계관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이 업보의 연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하나다. 해탈을 통해 윤회의 수레에서 벗어나는 것뿐이다. 

 

 

 

<검사외전>, <리멤버>의 각본과 연출을 맡았던 이일형 감독의 신작 <악연>은 'Karma'라는 영어 제목에 맞게 업보의 수레바퀴에 갇힌 이들을 조명한다. 무관해 보이는 캐릭터 7명이 어떻게 연이 닿고, 그 악연이 업보가 되어 되돌아오는지를 보여준다. 이 이야기는 에피소드 6개를 앉은자리에서 보게 만드는 지독한 흡입력을 자랑한다. <악연>의 구조와 구성 자체가 업보의 의미와 무게를 체감할 수 있도록 설계된 덕분이다.  

 

 

 

하지만 <악연>의 뒷맛은 개운치 않다. 중독적인 첫맛과는 다른 이질적인 맛이 느껴진다. <악연>은 업보의 굴레에 갇힌 이들만 보여주지 않는다. 후반부에서는 그 굴레로부터 벗어나려는 이들과 그 방법도 보여주고자 한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악인들이 얽히고설키는 피카레스크 장르의 분위기가 깨진다는 것. 그 결과 중반부까지의 임팩트도 빛이 바래고 만다. 

 

 

 

 

 

 

 

설계된 반전

 

<악연>의 첫인상은 독특하다. 수많은 반전 덕분이다. 얼핏 보기에 <악연>의 반전은 장르적 특성 같다. <악연>이 기본적으로 주인공의 악행에 토를 달지 않고, 도덕적 옹호도 하지 않는 피카레스크 장르를 표방하기 때문이다. 주요 인물만 보더라도 주연을 제외하면 빚쟁이, 사기꾼, 살인자, 꽃뱀, 불륜남 등 악인으로 가득하다. 서로서로 뒤통수를 쳐도 어색하지 않은 판이 처음부터 깔려 있는 셈이다. 

 

 

 

그러나 <악연>의 반전은 장르적 특성과는 별개의 작법에 가깝다. 단순히 주인공들이 변심하거나 상대를 배신하는 전개를 보여주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반전의 효과를 최대한으로 유도하기 위한 구조적 설계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악연>의 반전은 일관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사건의 결과를 먼저 보여주고, 사건의 원인을 나중에 보여주면서 드라마가 의도적으로 숨기고 있는 앞의 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드는 식이다. 

 

 

 

일례로 상훈과 유정은 처음에 연인처럼 보이지만, 이내 유정이 범준과 작당해서 상훈의 돈을 털어먹으려는 사기꾼임이 드러난다. 심지어 상훈도 일방적인 피해자가 아니라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한참 후에 등장하면서 더 큰 충격을 안긴다. <악연>은 이러한 반전의 결과를 각 에피소드의 마지막에, 원인은 다음 에피소드에 배치하면서 작품의 유기성과 몰입도를 동시에 끌어올린다. 

 

 

 

 

인과의 역순으로 풀어낸 업보

 

<악연>의 반전은 그 자체로 영화 제목이자 주제의식인 'Karma(업보)'라는 개념을 영상화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업보라는 개념은 단순히 직선적인 인과관계를 뜻하지 않는다. 하나의 원인이 있을 때, 그 원인이 다방면으로 영향으로 끼치면서 두 개 이상의 결과를 만들어낸다는 게 핵심이다. 그렇기에 업보는 의도치 않은 나비효과를 유발하고,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언제나 행위자에게 되돌아온다. 

 

 

 

<악연>의 반전은 업보의 나비효과를 직관적으로 설명해 준다. <악연>은 시간을 역행한다. 결과를 먼저, 원인은 나중에 보여준다. 또 그 원인을 만들어낸 그 이전의 원인도 나중에 알려준다. 이를 몇 차례 반복하면 모든 사건의 기점인 하나의 사건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다. 하나의 원인이 서로 다른 사건에 영향을 끼치면서 서로 전혀 연관 없어 보이는 인물들과 사건이 결국 하나의 실로 이어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상훈과 유정의 데이트는 유정과 범준의 범죄행각과 상훈의 불륜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상훈의 부인이 사설업체를 통해 남편을 뒷조사하는 과정에서는 범준의 신원이 밝혀진다. 범준의 행적을 역으로 추적하면 그와 유정이 과거에 저지른 악행이 드러나고, 아무런 접점이 없어 보이던 재영과 주연이 그들과 악연으로 얽힌 최초의 사건 또한 수면 위로 올라온다. 

 

 

 

즉, 한 사건의 파장이 사방으로 퍼지면서 서로 무관해 보이는 결과들을 초래하고, 그 결과가 행위자들에게 되돌아온다는 업보의 개념 그 자체가 스토리텔링의 구조를 이루는 셈이다. 따라서 그저 이야기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시청자는 지독한 악연과 업보의 무게감을 자연스럽게, 저절로 체감할 수 있다. 심지어 <왕좌의 게임>이 연상될 정도로 주인공들을 거침없이 퇴장시키기에 그 업보는 더 직관적으로 느껴진다.

 

 

 

 

 

 

 

해탈하지 못하고, 해방되다

 

문제는 그다음부터다. 업보가 쌓여서 돌아오는 과정을 보여주는 방식은 스타일리시하지만, 업보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세련되지 못했다. 후자를 전담하는 이주연 플롯의 완결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일견 모순적인 '수동적 능동성'에 기반한 각성을 보여줘야 할 그녀의 서사는 수동적인 이미지로만 가득하다. 그 결과 주연은 업보의 굴레로부터 주도적으로 해탈하기보다는 해방되는 것처럼 보이고, 그 쾌감도 크지 않다.

 

 

 

겉보기에 주연은 분명 수동적인 인물이다. 각자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다가 예상치 못한 업보를 쌓는 다른 캐릭터들과는 다르다. 그녀는 강간 피해자였을 뿐이고, 그 이후로는 착실히 경력을 쌓은 의사일 따름이다. 그러다 보니 오프닝 장면부터 등장했고 모든 사건의 시작점에 있는 주요 인물인데도, 그녀의 이야기는 중심부에서 동떨어져 있는 듯하다. 

 

 

 

그런데 이 수동적 이미지 이면에는 능동적인 이주연이 숨어있다. 성폭행을 주도했던 재영이 자기 환자로 입원했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그녀는 재발한 트라우마와 치열하게 맞서 싸운다. 재영을 향한 살의는 점점 커져 가고, 그녀는 살의를 행동으로 옮기기도 한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그녀는 그를 죽이지 않기로 결심한다. 더 나아가서 그와 관련된 모든 사건을 잊고, 고통과 복수심에 집착하지 않는 다른 삶을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업보의 굴레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하는 이 장면은 주연의 능동성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하지만 <악연>은 이 기회를 놓친다. 주연이 결단을 내리는 그 순간, 드라마는 그녀의 남자친구 '윤정민'(김남길)에게 먼저 주목한다. 살인을 저지르면 그들처럼 삶이 망가진다며 만류하는 그의 설득이 그녀의 변화보다 부각되는 것. 그 대가로 <악연>의 의도는 흐려진다. 메시지를 담아내야 할 주연의 능동성이 수동적 외양에 전부 가려진 탓이다. 이는 흰 눈이 내리는 세상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주연이 장식하는 마지막 장면이 공허한 이유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역효과

 

윤정민의 존재는 또 다른 역효과도 유발한다. 과거의 고통과 트라우마에 집착하는 대신, 그 갈망을 멈출 때 새롭고 더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주연의 깨달음은 다른 방식으로도 묘사된다. 그녀가 직접 관여하지 않았는데도 가해자들이 인과응보를 받는 식이다. 주연을 강간한 재영도, 그를 이용한 유정도, 그녀를 부추긴 범준도 각자의 업보를 죽음으로 되돌려 받는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윤정민의 존재와 역할은 업보라는 주제의식을 약화한다. 재영의 사채 빚을 몰랐던 범준은 재영 행세를 하다가 난데없이 사채업자 패거리에게 납치당한다. 얄궂게도 윤정민은 사채업자 조직에서 장기밀매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결국 정민은 범준의 모든 장기를 떼어내고 그를 죽이면서 주연의 복수를 대신한다.  

 

 

 

이 전개는 두 가지 문제를 낳는다. 일단 윤정민이라는 캐릭터가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써 기능하면서 극의 완성도를 저해한다. 주연을 설득해서 그녀를 각성시키도 하고, 여자친구를 대신해서 복수도 자행하면서 모든 갈등을 편의적으로 종식하기 때문이다. 불법 장기 밀매 사업에 관여한 그가 정작 업보를 받지 않는다는 점도 큰 틀에서는 주제의식에 어긋나는 묘사라고 볼 수 있다. 

 

  

 

김남길이라는 배우를 특별출연시킨 반전의 효과도 기대에 못 미친다. 드라마는 그가 수상한 전화를 받고, 친척 핑계를 대는 모습을 계속 보여주면서 그가 불법 조직과 연이 닿아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다 보니 범준이나 재영이 업보를 돌려받을 때 그가 어떤 방식으로라도 참여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다. 즉, 마지막 반전은 앞선 반전들과는 달리 반전을 위한 반전이라서 뻔하고, 작위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잘 만든 스릴러가 아쉬운 이유

 

이일형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같은 주제의식을 공유한다. 사회적 복수, 정의, 방벌이다. <검사외전>은 사법과 정치 영역의 부패 문제를, <리멤버>는 친일파 청산 문제를 정리, 해결하는 영화였다. <악연>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다. 과연 사회가 청소년 범죄를 충분히 정의롭고 응분히 처벌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악연과 업보라는 흥미로운 소재로써 제기하는 드라마니까. 

 

 

 

그렇기에 작위적 스토리텔링과 캐릭터 구축으로 인해 완결성이 무너진 <악연>의 아쉬움은 작지 않다. 흥미롭게 곱씹어 볼만한 메시지와 소재가 장르적 쾌감으로만 소비되면서 불명확해지기 때문이다. 분명 잘 만든 스릴러이고, OTT 시청자 입장에서는 크게 흠잡을 데 없는 오락인데도 <악연>의 몇몇 단점이 유독 눈에 잘 띄는 이유이기도 하다.  

 

 

 

 

 

 

 

 

Acceptable 무난함 

 

진단은 맞았지만 처방이 잘못된 탈업보 스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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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 쿠니
    2020.10.13. 19:14

    반전포인트와 소소한 스토리

    쿠니
    2020.10.13. 19:14

    11.01 에 본영화 .배우들의 다양한 배역과 입체적인 캐릭터, 90년대 후반의 시대를 엿보는 맛은 쏠쏠하지만,다른 성별이 판단한 여자의 모습을 제3자의 입장에서 봤을때, 참으로 어색하고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몇 가지 있는건 어쩔 수 없는 한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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