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2025-04-11 02:30:45
컨트롤 프릭 휴그랜트와 함께하는 방탈출 시간
이제는 하나의 장르가 되어버린 A24. 영화사 브랜딩이라는 멋들어진 전략에 당해버린 나 역시 그들이 지금껏 보여주었던 차별화 된 작품성을 믿고 <헤레틱>을 보러 갈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미드소마>, <유전>, <보 이즈 어프레이드>와 같은 아리 에스터 감독의 시리즈는 말할 것도 없으며, <톡 투 미>, <램>, <라이트 하우스>, <킬링 디어>, <더 위치>로 거슬러 올라가는 A24의 공포 영화 계보에서는 항상 거칠지만 신선한 장르적 아이디어를 맛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각본과 감독은 <콰이어트 플레이스> 시리즈로 알려진 스콧 벡(Scott Beck)과 브라이언 우즈(Bryan Woods)가 맡았다. 흥미로웠던 것은, 촬영 감독이 박찬욱 감독과 <친절한 금자씨>, <박쥐>, <아가씨>에서 협업한 정정훈 감독이라는 점이다. 감독의 전작을 인상 깊게 본 관객이라면 관람을 추천한다.
<헤레틱> 북미 포스터
<헤레틱> 또한 그동안의 A24식 공포영화들처럼, 첫 입부터 구미를 당기는 자극적인 설정들로 대중을 유혹한다. 모르몬교 전도를 위해 열과 성을 다하는 두 10대 소녀, 팩스턴과 반스가 언뜻 평범한 가정집에 들어가고, 집주인이 아내가 만든 블루베리 파이를 가져오겠다며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책상 위에 올려진 블루베리 파이 향 초를 발견하고 만다… 이후 두 소녀에게 일어날 각종 호러적 환상들과 신앙적 갈등이 가져다줄 서스펜스를 기대하며 관객은 달아오른다. 꼼짝없이 갇힌 신실한 두 소녀와 전지전능한 주도권을 가진 집주인 리드 씨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공포영화의 클리셰. 여성 주인공의 몸부림과 지배 관계에서의 탈피 내러티브는 관객의 기대를 보장하는 흥행 요소 중 하나이다. 여성 피해자화의 스펙터클은 젠더화된 공포와 고통을 관음증적 차원에서 장르적으로 자원화하며, 공포영화의 묵은 관습처럼 자리해왔고, 이제는 장르적 특성을 대표하는 요소로 자리매김했다. 발전적인 차원의 신선한 기획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어찌 되었건 클리셰는 클리셰다.
<스크림> 시리즈의 시드니 프레스콧
다행히 <헤레틱>은 단순히 장르적 안정성만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뻔할 수 있는 장르적 특성에 종교에 대한 사색을 가미했다. 그리고 이는 영화의 전반부를 가로지르는 엄청난 양의 대사를 통해 구현된다. <헤레틱>의 전반부를 감상하며 흥미로울 만한 지점은 인물들의 대사와 대화를 통해 실시간으로 미묘하게 변화하는 상징적 의미와 공기의 흐름을 읽는 재미에 있다. 파격적으로 변신한 휴 그렌트와 소피 대처, 클로이 이스트가 펼치는 공방에 관객들의 눈과 귀는 탁구공처럼 삼각지대를 오간다.
영화가 시작하며 팩스턴과 반스 자매가 나눈 뜬금없는 매그넘 콘돔에 대한 이야기는 종교의 본질에 대한 의구심을 시사한다. 매그넘이 사실 일반 콘돔과 똑같은 크기이자, 마케팅의 산물이라고 말하는 불신. 그리고 지인의 경험담을 이야기하며 실제로 큰 사이즈가 맞다고 이야기하는 믿음. 그러나 둘은 모르몬교의 신실한 신도들이기에 ‘순결의 법’에 따라 자신들의 믿음/비믿음을 검증할 길이 없다. 실제로 볼 수 없고 검증할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믿음/비믿음을 형성하는가. 약간은 불경하지만, 신에 대한 믿음 역시 이러한 질문들과 떨어질 수 없다. 벤치에 적힌 Who says size dosen’t matter? 이라는 카피는 언뜻 씬의 유머 감각을 극대화하는 장치로 보이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는 신성이 더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며 종교의 의미는 사라진 지 오래라는 현대인들에게 아직도 진리-믿음의 문제가 살아있음을 알리는 표지판 같기도 하다. 사이즈처럼 볼 수 없는 것에, 비가시화된 욕망, 신성, 진리에 인간은 휘둘린다.
리드의 집에 들어서면서, 이 질문은 점차 심화되기 시작한다. 모르몬교가 사실은 다른 종교들의 변형인 것을 알고 있냐는 질문으로 시작한 장황한 연설은 기독교의 예수를 페르시아 신화의 미트라, 이집트 신화의 호루스(a.k.a 새대가리), 힌두교 신화의 크리슈나와 연관 지어 기묘한 공통점을 드러내고, ‘표절’과 ‘변주’로 점철된 종교의 허상성을 지적한다. 그의 연설은 모노폴리와 라디오헤드의 creep에 숨겨진 3단 변신까지 더해져 결국 종교의 비본래성, 비본질성을 폭로하는 회의와 의심으로 귀결된다. 반스가 지적한 대로 조악하고 과장된 논리의 파편에 불과함에도, 휴 그랜트의 열연과 음모론적 흥미를 등에 업고 이야기는 영화의 척추를 관통하는 하나의 질문으로 관객을 이끌어간다. 진정한 하나의 종교는 무엇인가. 그 답을 알려주겠다는 리드 씨의 말에 두 소녀는 믿음과 불신의 문 앞으로 이끌린다. 영화의 전반부는 이렇듯 종교에 대해 인류가 갈망해왔던 현학적 질문들로 점철되어 관객의 기대감을 극도로 고조시킨다.
중후반부의 장르적 서스펜스를 넘어, 살아남은 팩스턴 자매가 얻은 답은 ‘진정한 하나의 종교이자 신은 통제’라는 것이었다.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일리 있는 해답임에도, 어쩐지 초반부에서부터 쌓아 올렸던 기대감은 충족되지 못한 채 헛헛한 마음을 남긴다. 그 헛헛한 마음을 나 몰라라 밟고 지나가는 후반부의 Predictable 한 마무리까지. 궁지에 몰린 팩스턴의 모습에서 처음 지하실을 탈출하려다 떨어뜨렸던 각목의 잔상이 연상되자 앞으로의 일들이 눈에 선히 펼쳐졌다. 클리셰로 흥(?)한 자, 클리셰로 망하리라. 결국, 수많은 공포영화 속 여주인공들처럼 반스의 기적적 도움을 얻은 팩스턴은 기지를 발휘해 저택을 탈출하고, 설경 속 나비와 함께 이교도의 일탈은 막을 내린다.
다시 돌아와, 진정한 하나의 종교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통제’라는 답을 내놓으며 종교를 구조주의적으로 해석한 돌파구는 흥미롭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공포영화라는 장르적 특성과 사회학적 아이디어는 의미론적으로 충돌하며 그 한계를 갖게 된다. 리드가 설파한 통제는 외압과 폭력에 의한 강압적 통제라기보다는, 푸코적 의미에서의 통제에 가깝다. 즉, 리드가 주장한 통제의 본질은(자신이 통제 안에 있다는 것조차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야 깨달았던 팩스턴의 경우에서처럼) 자기 통치에 의해 자유롭게 행위하는 타자들의 행위에 대한 행위 양식이라는 점에서 드러난다. 권력과 규제의 진정한 호러적 면모는 타인의 의지를 억압하고 묵살하는 힘이 아닌, 스스로 통제의 규범에 따라 행위하고자 하는 유순한 신체의 생산에서 발견된다. 리드는 결국 선택지를 통제하고 자유로운 선택의 자유를 보장하는 방식과 같이 구조주의적 통제의 방식을 종교의 본질이라고 인식한 것이다.
이러한 종교의 특성은 흡사 푸코가 주장한 판옵티콘과 같은 감시 권력의 체제와 닮아 있다.
감시가 불연속적으로 작동할지라도 감시의 효과가 지속되도록 하며, 개개인이 감시 권력을 내재화한 주체이므로 형식적으로 감시 권력이 작동할 필요가 없다는 판옵티콘의 특징은 리드의 고백으로 신앙을 가슴에 품고 스스로 신실한 신자의 주체를 생산하는 종교인의 모습과 얼핏 겹쳐 보인다. 신(권력)의 눈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고 믿으며 감시 관계의 내면화를 행하는 것이 종교의 본질이라는 냉소적 관점이다.
푸코와 판옵티콘
그러나 과연 리드의 일련의 행동들을 푸코가 주장한 비가시화된 통제성이라고 볼 수 있는가? 팩스턴과 반스라는 클리셰적 여성 캐릭터를 피해자-여성의 정체성으로 설정한 덕분에, 즉 공포영화라는 장르적 특성을 가져갈 수밖에 없는 까닭에, 관객은 두 소녀의 선택을 ‘자유롭다’라고 인식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처음 두 가지 문 중 하나를 선택해 지하실로 들어가는 장면에서 특히 이 모순이 증폭된다. 두 인물이 문을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리드는 암묵적으로 강제력을 행한다. 어느 문을 선택하든 해치지 않을 거라는 말로 자유를 주었다고 하기엔, 두 인물에게 부과된 폭력을 행사할까 두려워하며 순종하는 공포영화에서의 피해자-여성의 양상은 리드가 주장한 구조주의적 통제의 의미와 조응하지 못하며 이중 축을 형성하고, 영화의 긴장감을 와해시키는 결정적 맹점이 되어버린다. 이러한 맹점으로 리드의 캐릭터는 진심으로 자신의 가설을 시험하고자 하는 종교적 믿음이나 사명이 있는 ‘이교도’라는 정체성보다, 그저 자신의 조악한 가설에 자기 위로를 구하는 사이코패스에 가까워지면서 신비주의적 아우라가 사라지고, 어쭙잖은 변명으로 자신을 포장하고자 하는 흔한 범죄자로 전락하고 만다. 때문에 구조와 통제로부터의 탈피가 우연이나 자유의지, 반스의 희생을 통한 영성의 존재로 이루어진다는 영화의 종결부는 정작 구조로부터의 탈피와 바깥에서의 사유가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 거론하지 못한 채로 힘을 잃고 마무리된다. 2시간에 달하는 영화의 흐름이 쏜살같이 지나가는 긴장감이었음에도 약간이 아쉬움이 남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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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포인트와 소소한 스토리
11.01 에 본영화 .배우들의 다양한 배역과 입체적인 캐릭터, 90년대 후반의 시대를 엿보는 맛은 쏠쏠하지만,다른 성별이 판단한 여자의 모습을 제3자의 입장에서 봤을때, 참으로 어색하고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몇 가지 있는건 어쩔 수 없는 한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