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2025-04-17 09:07:20
불완전한 기억이 마주한 그날의 진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The Sense of an Ending, 2012) – 불완전한 기억과 ‘나’
줄이언 반스, 2011년 맨부커상 수상작
★★★
“야, 이 닭 대가리야!”
신입사원 시절 회식자리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가다 선배 K에게서 들었던 말이다.
얼마나 화가나고 분통했던지 씩씩거리며 따져 들었다.
“내가 왜 닭 대가리요?, 그럼 선배는? 붕어 대가리처럼 생겨 가지고는…”
(물론 끝엣 말은 2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추가하는 말임을 알아주기 바란다.ㅋㅋ)
내 기억의 저장소에 등록된 ‘특별한’ 순간들
사실 내가 그때 화가 났던 것은 나는 기억력이 좋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아주 오래 전 일을 눈앞에서 보듯이 선명하게 읊조리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경멸하듯 뭔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볼 때가 많다.
그러나, 아주 아주 가끔은 나에게도…
갑자기 반짝이는 번개 빛이 순간적으로 특정 지역을 훤히 드러내듯,
활짝 되살아 난 나의 기억이
과거의 특별 했던 그 순간의 의미를 떠오르게 해 줄 때가 있다.
‘하하, 나도 아직 죽지 않았단 말이지!’
그때마다 나는 나의 뇌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었을 그 ‘특별한’ 기억의 조각들이
어느 순간 적절한 타이밍에 되뇌임 되기 위해서 오랜 시간 사라지지 않고,
잘 보관되어 왔다는 점에 뿌듯함을 느낀다.
그 수많은 기억들 속에서,
그 선택된 기억의 조각은 나에게 의미 있는 특별한 삶의 순간이었겠지!
내 기억의 파편들, 그 진실은 어디까지일까?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이런 ‘특별한’ 기억에 관한 책/영화이다.
이제 책에서 이야기 하고자 하는 중요한 질문을 해보자.
①우리의 기억은 항상 올바른 것일까?
②우리의 기억은 올바른 것일까?
위 두가지 질문 중 어떤 것이 답하기 쉬운가?
첫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대개 '항상'이라는 글자에 방점을 두고
'그렇지, 항상 올바르지는 않겠지, 한두번은 틀릴 수 있지 않겠어?'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두번째 질문은 참으로 답하기 어렵다. 다시 두번째 질문을 던져보자.
우리의 기억은 올바른 것일까?
더군다나 40년이나 지난 어떤 일에 대한 것이라면?
이제 60대 중반에 들어선 주인공 토니는
옛날 고등학교와 대학생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한 통의 편지를 받아 들고선,
과거의 잊어버렸던 기억을 소환하기 시작한다.
# 주인공 토니는 ‘평균치’ 삶을 살고 있는 카메라 수선공으로 나온다. 기억을 찾는 과정에서 다시 마주한 옛 연인 '베로니카'.
영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스틸컷
기억은 고등학교 역사수업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 선생님이 던졌던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두 주인공의 답변은,
‘기억의 진실’을 탐구하고자 하는 이 책의 주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입니다.” (33p, 토니)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입니다.” (34p, 에이드리언)
얼핏 비슷해 보이는 두 사람의 엇갈린 답변은
이 소설의 결말을 예상해 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책이 거의 끝나가는 지점에 이르러서야 이를 알게 된다.
그래서 다들 책을 두 번 다시 읽게 된다고 한다.)
구분하자면 토니는 역사(=기억)란 ‘의도적인 거짓말’일 가능성에,
에이드리언은 ‘부정확한 확신’에 무게를 두고 있다.
영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스틸컷 / 에이드리언(좌) 과 토니(우)
영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스틸컷
이렇게 ‘특별한’ 기억의 핵심 사건은 주인공 토니의 대학시절,
자신과 결별했던 연인 베로니카가 그의 절친 4인방 중 하나인 에이드리언과
사귀게 되었다는 편지를 받아드는 장면으로 전환된다.
쉽게 말하자면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과 같은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그때, 토니는 이미 헤어진 사이라며 쿨하게 둘 사이의 관계를 축복하는
엽서를 보냈다고 기억하고 있다.
“이십일일자로 온 자네의 서신을 수령하면서,
본인은 모든 것을 유쾌하고 즐겁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명시하고자
상찬과 기원을 간절한 마음으로 바치네, 벗이여.” (77p)
물론 그때 감정의 동요가 없진 않았다.
자신의 감정을 감출 요량으로 엽서를 보냈다는 것을 뒤늦게서야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그의 편지를 읽은 후에 내 본심을 감출 요량으로 보낸 엽서를 기억해 냈다.
모든 것이 다 좋아, 이 친구야 운운하며 평정을 가장했던 문장들을.
그것은 클리프턴 현수교 사진이 인쇄된 카드였다. 매년 수많은 사람들이 그 다리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171p)
이 정도다.
여기까지 보면 토니의 기억 속에 자리잡고 있는 그 옛날 한 순간의 추억은
그리 문제될 게 없어 보인다.
기억을 다시 떠올려낸 순서는 뒤죽박죽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편집되었을지라도
크게 사실을 호도하거나 의도적으로 왜곡 한 것 같지는 않다..
그도 그럴 것이 토니는 지나온 자신의 인생을 돌이켜 볼 때,
누군가에게 크게 해악을 끼치지 않을 정도로
보통 사람들 수준에서 벗어나는 삶을 살지는 않았다고 자부하고 싶기 때문이다.
“평균치, 학교를 떠난 후 나란 인간은 줄곧 그랬다. 대학에서, 직장에서 평균치. 우정과 사랑에서 평균치, 섹스에도 의심할 여지 없이 평균치였다.
(중략) 그러나 평균치의 법칙에 따르면 우리는 불가항력적으로 평균치가 될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평균치 인생. 평균치 진실. 평균치 윤리관.” (174p)
물론 그러한 평가 조차도 나 자신을 위한 합리화일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나이가 들면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듣지 않게 되고
고집불통이 되어 간다는 것을 인생의 경험을 비추어 볼 때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면서 우리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할까. 그러면서 얼마나 가감하고, 윤색하고, 교묘히 가지를 쳐내는 걸까.
그러나 살아온 날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이야기에 제동을 걸고, 우리의 삶이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다만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우리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도 적어진다.
타인에게 얘기했다 해도 결국은 주로 우리 자신에게 얘기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165p)
그렇기에 솔직하게 말하자면 자신이 없다.
과거의 기억이 어디까지 진실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불행하게도, 우려했던대로
잊어 버렸던 아니, 애써 잊고 싶었던 기억에 대한 진실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영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스틸컷 / 기억에서 사라졌던 장면들
그 당시 옛 연인 베로니카와 에이드리언의 교제를 쿨하게 인정했었던 엽서에 대한 기억은
사실은 윤색되고 각색된 기억에 불과했던 것이다.
기록은 기억을 뛰어넘어 사실을 보여준다.
아래 편지 글에서 볼 수 있듯이, 얼마나 큰 차이를 가지고 있는 왜곡이었던가?
“에이드리언에게, 아니, 에이드리언과 베로니카에게. (베로니카, 개 같은 년. 잘 지냈나? 너도 이 편지를 읽도록) 내가 너희를 소개해 준 날을 저주하게 되길…
(중략) 각자의 인간관계에 독처럼 작용하는 고통이 평생 이어지길…
(중략) 너의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기길 바라고 있어. 이유인즉 내가 시간이 대대손손 복수를 가한다는 걸 굳건히 믿는 인간이라 그래…
너도 이미 그 여자가 남자 잡아먹는 요물이라는 사실쯤은 알았겠지.
내가 너라면 ‘모친’에게 이런 사실들을 확인해 볼걸? 오래전에 그 여자가 상처를 받은 경험이 있는지 물어보라고…
(중략) 에, 또, 허세 덩어리이기도 하니, 명심하라고… 그리고 기원컨대 너희의 관절과 성유를 바른 머리통에 산성비가 쏟아지기를 (토니)” (165p)
# 토니의 기억에 조차 남아 있지 않던 당시에 보낸 편지
영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스틸컷
‘내가 정말 이런 편지를 썼을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두 사람에 대한 저주의 글을 보고 토니는 소스라치게 놀랄 뿐이다.
더군다나 40년이 지난 지금
그 편지가 불러일으켰던 후폭풍을 이제서야 마주하고서야
토니는 기억의 저편에 남아있는 진실과 그 결말에 참담함을 금할 수 없다.
후회와 회한이 밀려온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고통스럽다.
“인생에 대해 내가 알았던 것은 무엇인가. 신중하기 그지없는 삶을 살았던 내가. 이긴 적도, 패배한 적도 없이, 다만 인생이 흘러가는대로 살지 않았던가.
흔한 야심을 품었지만, 야심의 실체를 깨닫지도 못한 채 그것을 위해 섣불리 정착해버리지 않았던가.
상처받는 게 두려웠으면서도 생존력이라는 말로 둘러대지 않았던가. 고지서 납부를 하고, 가능한 한 모든 사람들과 무난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았을 뿐,
환희와 절망이라는 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소설에서나 구경한 게 전부인 인간으로 살아오지 않았던가.
자책을 해도 마음속 깊이 아파한 적은 한번도 없지 않았던가. 이 모든 일이 따져봐야 할 일이었고, 그러는 동안 나는 흔치 않은 회환에 시달렸다.
그것은 상처받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큰소리쳤던 인간이 비로소 느끼게 된 고통, 그리고 바로 그랬기 때문에 느끼게 된 고통이었다.” (242p)
그 옛날 저주의 편지를 받아든 베로니카, 에이드리언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그 다음 이야기는 '스포일러'에 해당하여 여기서는 생략하겠습니다)
영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스틸컷
기억의 왜곡, 그것은 스스로의 존엄을 보호하고자 하는 생존본능
이 책은 우리가 얼마나 기억에 대해 불완전한 존재인지
인간에 대한 성찰을 담아내고 있다.
내가 지금 믿고 있는 그 옛날의 기억들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아래 그림에서 A기억 저장소에 저장되어 있는 기억은
A'라는 기억으로 대체된 지 오래지만
우리는 그 대체과정을 살필 만큼 여유롭지 못하다.
그 과정에는 나 자신의 존엄을 보호하고자 하는 심리적 방어기제가
잠재된 윤리적 저항의식 보다는 강하게 작동하기에
나에게 유리한 방향으로의 작위적 기억의 편취에 대항할 의지가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오래된 기억일수록 나 자신과 합의된 ‘합리화된’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
#그림 – 기억이 왜곡되어져 가는 과정
저자는 이 책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The Sense of an Ending)를 통해
‘깊은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기억의 저편에 남아 있을 진실을 마주하자’는 식의
상투적인 교훈을 남기고자 한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인간은 기억에 한해서는
우리 모두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환기시키고 싶을 뿐이다.
우리는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이던가?
자신만만해 하던 ‘내 기억’은 사실 짜집기된 나의 주장에 불과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상처가 깊을수록 그 기억의 왜곡도 심해진다.
혹 이러한 사실을 안다고 해서 우리가 100% 순도의 기억을 남길 방법은 없다.
자기 생존 방어 본능에 따라 나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기억은 왜곡되고 윤색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억에 한한 우리 자신은 불완전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불확실한’ 미래를 예측하는 것 만큼이나
‘불완전한’ 과거를 확신하는 것에 겸손한 태도를 갖는 것이다.
어쩌면 20년전 K선배가 말했다고 하는 ‘닭 대가리’에 대한 나의 기억도
나 자신을 위로하고자 하는 자기방어적 편집된 기억일 수도 있겠다.
아무도 모르는 그날의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 책 표지
# 영화 포스터
작성자 . nu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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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포인트와 소소한 스토리
11.01 에 본영화 .배우들의 다양한 배역과 입체적인 캐릭터, 90년대 후반의 시대를 엿보는 맛은 쏠쏠하지만,다른 성별이 판단한 여자의 모습을 제3자의 입장에서 봤을때, 참으로 어색하고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몇 가지 있는건 어쩔 수 없는 한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