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완벽한 복수는 무엇일까. 똑같이 되갚아주는 것? 보란듯이 잘 사는 것? 아무래도 받은만큼 돌려주는 쪽에 마음이 동한다. 내가 아팠던만큼 상대도 아파야 평등한 것이니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고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에서는 사람의 팔을 부러뜨린 자는 팔을 부러뜨리고, 눈을 멀게한 자는 눈을 멀게 한다는 동태(同態)복수 원칙을 명시했다. 암 역시 그렇고 말고. 그렇지만 이 원칙이 개인적 복수의 당위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복수를 끝마친 피해자는 다시 가해자로 법 앞에 서서 심판을 받게 될 테니까. 가장 정의로운 방식처럼 보이지만, 본인이 다시 복수의 대상으로 전락한다는 부작용이 있다. 안타깝게도, 복수는 위임된 권력이 대신 행할 때에만 정당성을 갖출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복수의 칼날은 제자신에게 돌아온다. 복수는 달콤한만큼 유독하다.
복수의 유독성이 가장 강력하게 분출하는 때는 아이러니하게도 복수가 성공하는(혹은 성공했다고 믿는) 순간이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는 복수의 이중성을 잘 담고있다. 복수라는 덫에 갇혀 허우적대는 두 남자의 이야기. 한 남자는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파멸했고, 다른 한 남자는 (어쩔 수 없이) 멈췄지만 영원히 구속된다.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사는 남자 '오대수'가 평생 수습하지 못할 과오를 저지르며 벌어지는 복수극이다.
이우진은 오대수에게 복수하기 위해 15년 간 그를 감금했다. 오대수가 함부로 혀를 놀렸기 때문이다. 오대수는 이수애(이우진의 누나)와 이우진이 관계를 가지는 것을 목격했고, 친구에게 소문을 퍼뜨렸다. 이수애는 학교에서 깨끗하지 못한 여자로 소문이 났고,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이 때문에 이우진은 오대수를 몹시 증오했다. 그래서 좁은 골방에 가두고는 군만두만 먹였다. 심지어는 오대수의 부인을 살해하고 그가 범인인 것처럼 꾸미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이우진은 멈추지 않았다. 평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우진은 최면을 걸어 오대수와 미도가 서로 사랑에 빠지도록 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순간에 두 사람이 부녀관계였음을 폭로한다. 오대수가 불편한 진실을 마주했을 때 비로소 이우진의 복수는 평등해졌다. 이우진은 자살함으로써 한 발 더 나아간다. 오대수는 홀로 덩그러니 남은 채 혀를 자름으로써 인과응보를 받아들인다.
"누나하고 난 서로 알면서도 사랑했어요... 너희도 그럴 수 있을까?'
이우진이 오대수를 15년 간 감금한 것은 더 '잘' 복수하기 위해서다. 오대수를 죽이거나 그의 딸 미도를 해코지할 수 있었음에도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은 것은 평등을 실현하기 위함이었다. 오대수와 미도가 사랑에 빠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두 사람이 부녀 관계임을 밝힘으로써 마주하게 될 죄책감과 수치심을 온전히 느끼기 바랐기 때문이다. 오대수가 이우진을 일찍이 죽이지 않은 것 역시 마찬가지다. 감금한 이유가 너무 궁금했기 때문에, 복수의 명분을 밝히기 위해서 게임에 끝까지 참여했다.
공교롭게도 복수가 완성되는 순간 붕괴는 시작된다. 오대수가 감금의 이유를 알아내고 의기양양하게 이우진을 몰아붙이는 순간, 알고보니 모든 재앙이 스스로 몰고 온 것임을 인식한다. 오대수가 혀를 잘라냄과 동시에 이우진은 일생의 후련함을 느끼지만, 이내 삶의 이유를 상실하고 자살한다. 복수가 달콤함 뒤에 숨겨둔 독이빨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두 사람은 모두 복수의 피해자다.
이우진은 멈출 수 없었다. 누나를 잃은 뒤로 삶은 피폐해졌고 오직 복수만이 구원이라고 믿었다. 복수에 중독되고부터 어쩌면 누나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자결로써 복수를 완성한 것일지도 모른다.
오대수는 멈출 수 밖에 없었다. 15년의 세월을 빼앗아 간 이우진이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오대수는 복수의 대상을 잃었고, 삶의 추동을 상실한 채 방황하게 됐다. 역설적이게도, 그토록 증오했던 이우진이 죽음으로써 살 이유가 사라졌다. 다만 그에게 남은 것은 불편한 진실을 감내하는 일 뿐이다.
복수에서 승자는 없다. 복수에 성공했지만 삶을 멈추게 된 이우진도, 목숨을 부지했지만 복수에 실패한 오대수도 행복해보이지 않는다. 복수의 달콤함은 끝내 두 사람에게 독이 됐다. 복수는 상처의 처방전이 될 수 없다. 상처의 근본적 해결은 환부를 치료하는 것이지, 남에게 똑같이 상처를 내는 것이 아니다.
복수를 멈추고 용서를 한 자만이 자유롭다. 용서만이 구원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과연 그 자유는 정말 행복할까? 다음 편에서는 용서라는 덫에 빠진 한 여인, 이신애의 이야기를 들여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