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2025-04-22 16:58:48
용서하면 누구나 천국에 가나요?
인간은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성질이 있기에, 일상을 위협하는 자극을 경계한다. 적당한 낯섦은 건강한 스트레스를 만들어 발전의 동력이 되지만, 실연이나 시한부 선고처럼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만큼의 거대한 사건은 안정 궤도를 이탈할만큼의 큰 충격이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이런 고통은 한 번에 받아들이기엔 너무 독하므로 꼭꼭 씹어삼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탄성을 잃고 축 늘어진 고무줄처럼 망가진다.
인간은 다섯 단계를 거쳐 비애(悲哀)를 소화한다.
<죽음의 5단계(Five Stages of Grief)>
스위스 출생 정신과 의사 Elisabeth Kübler-Ross가 저서 <죽음과 죽어감>에서 설명한 인간의 슬픔 수용 모델. 죽음을 선고받은 뒤 이를 받아들이기까지의 과정이 담겨있다.
부정(Denial):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분노(Anger) : "이 세상 수 많은 사람 가운데 왜 나야?"
협상(Bargaining): "한 번만 봐주시면 정말 착하게 살게요."
우울(Depression): "세상 모든 것 다 부질 없다."
수용(Acceptance): "여생을 잘 정리하자."
마주하기에 너무 큰 사건 앞에서 인간은 도망친다. 마치 꿈을 꾼 것처럼,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고 믿는다. 바꿀 수 없는 현실임을 깨닫고는 분노하기 시작한다. 많고 많은 사람 중에서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며 온 세상을 원망한다. 그러다가는 이내 죄인으로 변해 하늘에 용서를 구한다. 전생을 탓하거나 일상의 업보를 운운하며 절대자에게 빌기 시작한다. 절대자는 부름에 응하지 않고, 좌절한 인간은 현실로 돌아온다. 이미 벌어진 일 어쩔 수 없다며 마음껏 슬퍼하고, 뚫린 구멍을 매만지며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이창동 감독 <밀양>의 주인공 신애의 삶에서 거대한 고통을 마주한 인간의 모습을 면밀히 살펴볼 수 있다. 신애는 아주 기구한 사건에 휘말렸고, 끊임없이 시험에 든다.
서울에 살던 신애는 남편을 잃은 후, 하나 뿐인 아들 준과 함께 남편의 고향인 밀양에 내려가 살기로 결심한다. 이방인 신애에게 밀양은 낯설고 모진 동네였다. 주민들은 남편을 잃은 과부의 처지에 동정하면서도, '돈 많은 서울 여자'라는 이유로 은근히 배척한다. 어느 날 준이 납치되면서 신애의 삶은 완전히 붕괴된다. 신애는 준을 품 속으로 되돌리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지만, 준은 끝내 돌아오지 못한다. 삶의 이유를 잃은 채 방황하다가 김 집사의 전도로 종교에 귀의한다. 신애는 깨달음을 얻고 납치범을 용서하고자 교도소로 면회를 가는데, 이미 신에게 용서를 청하고 구원받았다는 그의 이야기에 다시 무너진다. 병원에서의 긴 치료를 받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신애는 기분전환을 위해 미용실을 찾는다. 미용사는 다름 아닌 납치범의 딸. 매정한 삶이 신애에게 다시 시험을 시작한다.
신애는 거대한 상실 앞에서 어떤 과정을 통과했을까. 궤적을 따라가본다.
부정
신애와 준은 이따금씩 숨바꼭질을 하며 놀았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지만, 오늘따라 장난이 지나친 것이라고 믿었다. 때문에 밤새 배회하며 준을 찾아다닌다.
분노
유괴범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신애는 준이 살아있다는 것에 안도하면서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에 분노한다. 유괴범은 요구 사항만 늘어놓은 채 전화를 끊어버리고, 신애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덩그러니 남겨진다.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순간, 차도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핸들을 매섭게 때리며 울부짖다가 이내 진정한다. 사이드 브레이크가 걸려 있었을 뿐이었다.
협상
신애는 유괴범에게 요구를 다 들어주겠다고 말한다. 다만, 준이 건강한지 알 수 있도록 목소리만 들려달라고 요청한다. 부당한 협상이지만, 테이블을 떠날 수 없다. 협상 테이블을 떠나는 순간 준이가 잘못될지도 모른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유괴범에게 매달린다.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요. 근데 먼저 우리 준이 좀 바꿔주세요. 목소리라도 들어야죠.'
우울
준이 시체로 발견되자 신애는 실성한다. 범인은 잡혔지만 준은 세상을 영영 떠나버렸다. 심지어 범인은 가깝게 지내던 웅변 학원 원장이었고, 더 이상 의지할 데가 없다는 슬픔에 좌절한다. 준은 아빠가 보고싶을 때면 소파에 누워 자는 척을 했다. 생전 아빠가 코고는 소리까지 그대로 따라하며 그리운 마음을 표현했다. 이제 홀로 남은 신애가 두 사람을 그리워하며 오지 않는 잠을 청한다.
수용
신애는 신앙의 힘을 빌려 용서를 통해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한다. 마음으로 용서하라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직접 죄를 사하고자 교도소에 찾아가는데, 유괴범은 예상과 달리 이미 편안해보인다. 마찬가지로 종교에 귀의해 하나님께 용서를 얻고 구원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신애는 혼절한다.
유괴범의 이야기에 신애는 다시 속이 메스꺼워진다. 지난한 시간을 통과하며 겨우 소화를 하나 싶었지만, 단 한 마디에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절대자는 모두에게 평등하다고 했다. 어떤 아픔도 다 보듬어줄 수 있는 든든한 내 편이라고 했다. 역설적이게도 절대자는 나의 편이기 이전에 모두의 편이었다. 나의 편임과 동시에 원수의 편이었다.
큰 상처를 마주했을 때 용서는 가장 고결하게 인간성을 실현할 수 있는 방식이라고 했다. 먹고 먹히는 복수의 굴레에서 해방될 수 있는 궁극의 행복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게 웬 걸. 용서가 진정 행복한가. 모든 것에 달관하여 무감해지는 것이야말로 인간성을 상실하는 것 아닌가. 희노애락에 얽히는 것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모습일테다. 제아무리 가깝고 전지전능할지언정, 내가 아닌데 내 마음을 아주 알아줄 수 있을까. 신도 내 마음을 모른다. 모두에게, 세상에서 가장 힘든 사람은 제 자신이다.
<작가의 단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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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께 죄를 사면받아 구원받았다는 유괴범의 뻔뻔한 궤변을 듣고 신애는 절대자의 존재에 의구심을 품는다. 당사자인 내가 아직 용서를 하지 않았는데, 신이 무슨 자격으로 죄를 사하는가. 신애는 김 집사의 남편(장로)을 유혹해 간음을 유도하고, 야외 부흥회에서 목사가 설교할 때 김추자의 <거짓말이야>를 크게 틀어 신앙을 조롱한다. 평등한 것이 공정하지 않을 수 있다는 아이러니. 모두가 구원받을 수 있다면 왜 선함을 노력하는가. 인간은 신이 아니므로 결코 달관할 수 없다. 삶이라는 시험에서 영원히 투쟁해야 한다. 선함을 노력하는 투쟁의 과정에서 인간은 존재한다.
"그 사람은 이미 용서를 받았대요. 근데 내가 어떻게 다시 용서를 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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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포인트와 소소한 스토리
11.01 에 본영화 .배우들의 다양한 배역과 입체적인 캐릭터, 90년대 후반의 시대를 엿보는 맛은 쏠쏠하지만,다른 성별이 판단한 여자의 모습을 제3자의 입장에서 봤을때, 참으로 어색하고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몇 가지 있는건 어쩔 수 없는 한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