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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2025-04-23 22:15:05

물렁하지만 유연하게

  네오 소라의 <Happy End>는 제목 그대로 종국에 행복을 발견하는 영화다. 행복이 작은 불씨로 틔워진 채 영화는 막을 내리고, 관객은 아주 개운하지는 않는 상태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소중한 불씨를 횃불로 키우기 위한 고민이 현실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것이다. 모든 영화는 끝이 있지만, 인류의 삶은 (멸망하지 않는 이상) 계속되기 때문이다. 영화는 현실이 되어 극장 바깥에서 다시 상영된다. 

 

  코우와 유타를 중심으로 한 다섯 명의 음악동아리원은 학교에서 유명한 사고뭉치다. 고3임에도 불구하고 음악을 듣기 위해 클럽을 드나들정도로 대담하며, 교장 선생님의 훈계에도 지지 않고 오히려 대들정도로 무모하다. 이들이 이토록 자유로울 수 있는 이유는 다양한 삶의 배경을 가졌기 때문이다. 재일한국인, 미국인, 중국계 일본인, 토종 일본인이 모인만큼, 고유한 개성이 섞여 마치 히피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존재감을 분출한다. 다양성은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지만, 의견을 모으는 데 큰 어려움이 생긴다는 단점이 있다. 코우와 유타 사이에서의 균열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이 히피클럽도 위기에 봉착한다. 

 

 

  클럽에 다녀온 새벽, 코우와 유타는 교장 선생님의 자동차를 세로로 세우는 기행을 저지른다. 교장 선생은 눈엣가시였던 히피클럽 무리를 불러 강하게 압박했고, 특히 재일 한국인인 코우에게 인간종의 차이를 운운하는 등 혐오 표현을 일삼으며 조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립이 계속되자, 동아리 방을 폐쇄하고 AI시스템 파놉티(Panopty)를 가동하여 카메라를 통해 학교 곳곳에서 학생들을 감시하고, 언행을 검열하도록 했다. 히피클럽원들은 동아리방이 폐쇄된 것에 분개하며 감시 시스템을 피해 클럽 앞으로 음악 장비를 옮기기 위해 의기투합한다. 코우는 힘을 보태면서도 교장의 모욕적인 언행에 큰 반항심을 느끼며 더 큰 움직임을 꾀한다. 

 

  코우의 반항심에 더 큰 불을 지핀 것은 총리의 긴급 담화문이었다. 수차례 울리는 지진 경보에 대국민 긴급사태조항을 발효하면서, 지진 때마다 불법 입국자와 범죄자들이 판을 쳤다는 기울어진 역사적 사실을 환기한다. 총리의 담화 이후로 교내 일본인과 비일본인을 분류하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지면서 비일본인 학생들의 자유가 위협받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들은 좌시하지 않고 행동한다. 교장실을 점거하고 농성하며 판옵티의 철거를 요구한다. 코우가 사회를 바꾸려는 움직임에 힘을 쏟는 동안 순수 일본인인 유타는 방황한다. 코우와 멀어진 것이 속상하면서도 사회 시스템에 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비일본인 학생들의 농성이 성공하고, 교장은 강당에서 학생들에게 판옵티의 조건부 철회를 약속한다. 자동차 테러 주동자가 자수할 것. 교장의 발언을 두고 판옵티의 철회를 찬성하는 무리와 반대를 주장하는 무리가 갈라져 뒤엉킨 가운데, 유타는 본인의 혼자 저지른 소행이었음을 밝히고 퇴장한다. 이후 판옵티는 철거되고, 유타는 퇴학당한다. 코우와 유타는 졸업식을 마치고 화해하며 작은 화합을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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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appy End>는 하이틴 주인공이 등장하는 여느 학원물처럼 성장 영화의 외피를 하고 있지만, 인류의 과거와 현재를 환기시키는 역사,사회극의 내용을 담고 있다. AI 감시 시스템인 판옵티는 공리주의 철학자 벤담이 제시한 교도소 '판옵티콘'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며, 나아가 조지 오웰의 '1984' 빅브라더를 교내에 이식한 것이라고 어렵지 않게 연결지을 수 있다. 또한 총리의 왜곡된 발언은 마치 관동 대지진 당시 조선인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뜨려 학살을 자행했던 역사를 되풀이하는 방식과 비슷하며, 제국주의 시대 자국민 중심 정책을 펴는 독재자들을 연상케 한다. 먼미래 이른바 지구촌 사회가 도래하여 다인종이 하나의 국가에 공존하는 시대에, 획일화를 강조하며 폭력을 일삼는 현상은 반복됐다. 그러나 이들은 행동했고 자유를 쟁취했다. 더 기쁜 것은 인류의 미래인 학생들이 변화의 주인공이었다는 점이다.

 

 

  지진 경보음은 위기감을 조성하면서 전국민을 미지의 공포로 밀어넣는다. 공동의 위기를 헤쳐나가기 위해 한 데 모이게 함과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일본인과 비일본일을 구분하며 분열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인 코우의 자백은 큰 의미를 가진다. 기득권이라고 말할 수 있을 순수 일본인이 자신의 특권적 지위를 내려놓고 공동선을 위한 행동을 한 것이다. 부분적으로는 판옵티 철회라는 작은 변화에 불과할 뿐이지만, 넓은 차원에서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를 향한 첫걸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인 유타와 비일본인 코우의 화해가 이를 암시한다. 이 작은 화합으로부터 내진설계의 위대함을 발견한다. 대판 싸워도 우스운 장난으로 풀어내는 남학생들처럼, 불안하게 흔들리지만 중심만은 지키고 있는 내진설계는 전인류적 공포인 지진을 효과적으로 방어한다. 경직되지 않고 유연하게 흔들리는 이러한 태도는 다양성이 피어날 미래 사회에서 효과적으로 작동할 것이다. 유타와 코우가 일구어낸 작은 불씨를 마음 속에서 보살피며 우리의 횃불로 키워낼 수 있도록 끊임없이 사유하고 반추해야 한다. 

 

딱딱한 것보다 물렁한 것이 더 잘 찌끄러지지만, 충격을 잘 흡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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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 자격으로 참석한 시사회 관람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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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 쿠니
    2020.10.13. 19:14

    반전포인트와 소소한 스토리

    쿠니
    2020.10.13. 19:14

    11.01 에 본영화 .배우들의 다양한 배역과 입체적인 캐릭터, 90년대 후반의 시대를 엿보는 맛은 쏠쏠하지만,다른 성별이 판단한 여자의 모습을 제3자의 입장에서 봤을때, 참으로 어색하고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몇 가지 있는건 어쩔 수 없는 한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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