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2025-04-23 23:25:17
느리지만 특별한 궤적을 그리는 곤돌라
곤돌라 (Gondola, 2025)
느리지만 특별한 궤적을 그리는 곤돌라
개봉일 : 2025.04.23.
관람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장르 : 멜로/로맨스
러닝타임 : 82분
감독 : 바이트 헬머
출연 : 니노 소셀리아, 마틸드 이르만
조지아의 깊은 산맥, 곤돌라 두 대가 푸릇한 산맥 위를 천천히 가로지른다. 세월을 그대로 품은 거대한 바퀴가 일을 시작하면 케이블에 매달린 곤돌라가 천천히 움직인다. 곤돌라는 일정한 속도와 궤적을 유지하며 시작점과 정상을 오간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다시 올라갔다 내려갔다. 안정적이고 느긋한 움직임이다.
영화의 주인공인 젊은 여성 ‘이바’는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와 이 느릿한 곤돌라에 몸을 싣는다. 그는 곤돌라 승무원이 되어 유일한 동료이자 사수인 ‘니노’와 함께 곤돌라를 운행한다. 두 대의 곤돌라와 두 명의 승무원. 탑승객은 몇 되지 않는 산골 마을 사람들이 전부다.
누군가 전원을 켜면 곤돌라는 돌아간다. 케이블이 있고 전원이 켜진 이상 곤돌라는 계속해서 같은 움직임을 반복해야 한다. 곤돌라와 우리의 삶은 닮아있다. 시작된 이상 마음대로 바꿀 수도 멈출 수도 없고, 멀리서 보면 매일 비슷해 보인다는 점에서 말이다.
실제로 영화 속 곤돌라의 움직임과 그 위에 올라탄 승무원들의 일상은 매일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바이트 헬머 감독은 이 지루한 반복 위에 익살스러운 상상력을 얹어 특별한 궤적을 만들어낸다. 곤돌라가 왕복 운동을 마칠 때마다 새로운 추억이 그려지고 그것은 주인공 니노와 이바의 마음을 단단히 채우는 나이테가 된다.
<곤돌라>는 모든 게 풍부한 이 시대에 보기 힘든 영화다. 이 영화는 인물들이 대사를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 ‘무성영화’고 그렇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해 보기 어려운 영화이기도 하다. 누구도 속시원히 목소리를 내지 않는 스크린을 보며 속이 끓거나 또는 지루하다 싶은 순간이 올 수도 있다. 하지만 잠시 힘을 빼고 기다리다 보면 어느 순간, 그 답답함이 전복되는 즐거움과 더불어 충만한 행복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 아래 내용부터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곤돌라’는 양면적인 의미를 갖는다. 곤돌라는 마을 사람들의 유일한 대중교통이자 첫 경험과 죽음까지- 다양한 삶의 순간을 담는 특별한 그릇이 되기도 하고 어느 순간엔 ‘부당함을 견디는 수동적인 삶’이라는 부정적 의미를 갖기도 한다.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 ‘니노’는 권태로운 일상과 사장의 몰지각한 행동, 말도 안 되는 임금에 지쳐있는 인물이다. 그는 하늘로의 행복한 탈출을 꿈꾸며 항공사에 지원서를 넣는데 그때, 니노의 권태를 깨는 인물 이바가 등장한다. 차후 니노는 항공사로부터 답신을 받지만 끝내 하늘로 날아가는 것 대신 곤돌라에 남는 것을 선택한다.
니노가 더 이상 하늘로의 탈출을 꿈꾸지 않게 된 이유는 반복되는 삶 속에서도 행복을 찾는 법을 알았기 때문이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니노와 이바는 사장이 지시한 곤돌라 승무원의 역할(손님을 태우고 돈을 받고 곤돌라를 운행하는 것)만을 수행한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두 사람은 곤돌라의 문을 열고 연주하기, 곤돌라 꾸미기 등을 통해 매일 다른 하루를 만들어간다.
비행기, 버스, 배 등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하는 곤돌라의 겉모습과 누군가 정상에 도착할 때마다 모습을 바꾸는 체스판은 두 사람의 하루가 ‘단순한 반복’이 아닌 ‘작은 변화들’로 채워지고 있음을 상기시키고, 두 사람은 곤돌라에 다양한 삶의 순간들을 담으며 권태를 극복해간다.
니노와 이바는 곤돌라 위에서도 삶의 순간들을 즐기려 노력한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을 방해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부당함으로 똘똘 뭉친 인물. 그들의 사장이다. <곤돌라>는 두 종류의 탈출을 그린다. 앞서 언급한 권태로부터의 탈출, 두 번째는 반복되는 부당함으로부터의 탈출이다.
곤돌라 사장은 말 그대로 ‘나쁜 놈’이다. 여성 직원의 탈의 장면을 훔쳐보려 하는 건 기본이고 임금도 제대로 지불하지 않으며 지위를 이용해 애정과 관심을 갈구한다. 그리고 정당한 이유 없이 휠체어를 탄 남성을 차별하고 계단 아래로 밀어버린다.
니노는 얌전히 케이블을 따라 도는 곤돌라처럼 이 부당한 인물의 지시에 따라 매일 같은 하루를 반복해왔다. 하지만 이바가 등장하고 그와 상호 작용하며 천천히 사장이 정해둔 선을 벗어난다. 니노는 이바와 함께 곤돌라의 문을 열고 그다음엔 곤돌라를 멈추고 이후엔 곤돌라의 지붕까지 올라탄다. 그리고 마지막엔 함께 곤돌라를 탈출해 허공이 아닌 땅을 밟으며 당당히 걸어간다.
극 중엔 니노가 사장이 건넨 꽃다발을 곤돌라 밖으로 버리고 그걸 본 사장이 니노와 이바의 체스판을 엎어버리는 장면이 있다. 이때 체스판이 난간 쪽으로 엎어지고 받침으로 쓰이던 나무 박스만 남게 되는데 그 위에 검은색, 흰색 체스 말이 하나씩 남아있는 걸 볼 수 있다. 이는 사장이, 부당한 사회가 아무리 큰 충격을 준다 해도 니노와 이바는 끝까지 함께 살아남을 것임을 의미하는 장면이라 할 수 있겠다.
니노와 이바는 곤돌라를 운행하며 식료품을 배달해 주거나 장례식을 함께하는 등 주민들과 다정하고 건강한 공동체를 형성한다. 두 사람은 이후 곤돌라가 추락할 때, 앞서 식료품 배달을 위해 깔아 놨던 짚에 안착하며 목숨을 건진다. 반대로 사장은 그 누구와도 제대로 된 관계를 형성하지 않았고 마지막엔 이성을 잃고 홀로 자멸한다.
‘다정한 이들은 아름다운 결말을, 욕심쟁이는 최악의 결말을 맞이한다’ 케이블이 끊어짐과 동시에 경로를 벗어난 곤돌라는 이러한 올바른 엔딩을 향해 마음껏 내달린다. 그리고 곤돌라의 충돌은 큰 통쾌함과 대리만족을 선사한다.
현실에선 여기저기 이어진 선 때문에 ‘인과응보’ 엔딩을 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모두 함께 탈출을 꿈꾼다면 언젠가는 이 부당한 선들이 모두 곤돌라 케이블처럼 뚝- 끊어지는 날이 오지 않을까. 나는 그런 희망을 가져보고 싶다.
*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 참석 후 작성하였습니다. *
작성자 . null
- 1
- 200
- 13.1K
- 123
- 10M
-
반전포인트와 소소한 스토리
11.01 에 본영화 .배우들의 다양한 배역과 입체적인 캐릭터, 90년대 후반의 시대를 엿보는 맛은 쏠쏠하지만,다른 성별이 판단한 여자의 모습을 제3자의 입장에서 봤을때, 참으로 어색하고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몇 가지 있는건 어쩔 수 없는 한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