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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 2025-04-30 16:03:14

안녕을 위한 안녕

포비 연구원

출처.

* 해당 리뷰는 ‘씨네랩’의 초청으로 4월 29일 CGV 용산아이파크몰에서 진행된 <해피엔드>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되었습니다.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일부 존재합니다.

 

 

 

<해피엔드>의 배경은 가까운 미래의 일본 도쿄이다. 그리고 영화는 그 시간, 그 공간에서 생기는 그 순간을 포착한다. 그저 흘러갈 것처럼 보이는 자그마하고 의미 없어 보이는 순간들. 하지만 그 순간은 누군가에게는 특별했다. 적어도 ‘코우’와 ‘유타’, 두 사람에게 그 순간은 잊혀지지 않았다.

 


 

 

 

흔들림을 따라

 

 

 

 

 

 

영화 속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지진이다. 조그마한 흔들림과 지진경보에도 두려워하는 사람들. 하지만 단 한 사람, 코우만은 다른 생각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코우는 흔들림을 두려워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지진을 두려워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 앞에 놓인 책상을 계속해서 흔든다. 마치 지진이 일어나길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 코우는 재일교포 4세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코우 본인은 분명 태어난 곳부터 시작하여,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까지 완벽한 일본인이지만 사회는 그를 일본인, 그리고 그들의 국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의 초반 디제잉 공연을 보러간 코우와 유타. 클럽에 경찰이 들어 닥치게 되고, 공연은 중단된다. 그리고 경찰들은 고등학생인 코우와 유타의 신원을 묻는다. 경찰은 일본인인 유타의 신원을 확인하고 나서 유타에게는 그냥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하지만, 코우에게는 휴대의무도 없는 체류 허가서를 요구한다. 분명 같은 자리에 있었고, 같은 감정을 느꼈던 사람이지만 코우와 유타는 외부인과 내부인으로 구분된다.

 

 

 

재일조선인인 코우를 비롯하여 대만 혼혈인 밍, 그리고 흑인 혼혈인 톰까지 이들은 모두 그 사회에서 철저한 외부인이었다. 극우 정치인이 권력을 잡고, 총리의 권한을 집중시키는 해피엔드 속 사회, 그리고 그곳에서 철저하게 외면받는 사람들. 그들에게는 어느 순간 ‘비국민’이라는 경멸적인 호칭까지 붙게 되었다. 함께 음악 감상 동아리를 하고, 서로가 함께 있는 것만 해도 좋았던 친구들. 하지만 사회는 잔인했다. 권력은 자신들의 두려움과 위기를 돌리기 위해서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것들을 강조하기로 했다. 눈에 보이는 피부색과 종이에 적힌 출신성분. 그것들은 차별이라는 금을 조금씩 만들고, 금은 공고해 보였던 코우와 유타의 우정에 자리 잡았다. 그렇게 자리잡은 금을 보며, 코우와 유타는 흔들림에 대해 조금씩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된다.
 

 


 

 

 

두가지 외로움

 

 

 

 

 

 

어차피 망해버리는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끼리 남은 시간을 즐기자고 말하는 유타, 그리고 망해버리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나서자는 코우. 세상이 망해버릴 것이라는 것에 대한 확신은 서로가 같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방법은 너무나도 달랐다. 작품을 보면 유독 유타는 환하게 웃는 장면이, 코우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 무표정을 짓고 있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실제로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더라도, 유타는 환하고 넓으며 편안해 보이는 새하얀 아파트에 살고 있다. 이에 반해 코우는 땀냄새와 음식냄새, 그리고 낯선이들의 고성이 오가는 식당에 살고 있다. 이러한 그들의 개별적 삶이 보여주는 극단적인 차이는 우리가 잠시 놓친 것들을 다시 상기시켜준다. 그들이, 또는 우리가 아무리 누군가를 사랑하고 평생을 약속할 정도의 영원한 사랑과 우정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바꿀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바로 그것이 그들 개인의 삶에서 천천히 커져간 가치관과 생각들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들은 누군가가 아무리 노력해도 마음 속 끝에 남아, 결코 채워줄 수 없는 그들 개개인의 것이었다.

 

 

 

영화의 초반부, 경찰이 오니까 클럽에서 나가자는 코우. 하지만 유타는 여기까지 왔으니 더 즐겨야겠다면서 음악에 몸을 맡긴다. 그러자 코우는 고민하는 듯 하지만 유타의 말을 따른다. 그렇게 작품 처음부터 유타는 굉장히 주도적이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고 싶어한다. 유타는 유독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인지 유타는 자신의 집에서 친구들을 자주 부른다. 이에 반해 코우는 친구들을 자신의 집에 부르지도 못하며, 엄마와 교장의 말을 따르는 모습을 보여준다. 과연 그들의 차이는 무엇일까. 바로 어떤 외로움을 가졌는지이다. 만약 코우가 느낀 것이 ‘사회 속 개인으로서의 외로움’이라면 유타가 느끼는 외로움은 ‘개인들 속 개인으로서의 외로움’인 것이다. 그들은 서로의 외로움을 이해하기 어려웠고 자신들의 외로움의 심연 속에 빠져들었다.

 


 

 

 

뒤집어진 우리

 

 

 

 

 

 

이미 조금씩 흔들리던 그들의 세상에 지진이라는 개념이 가시화되어 나타난 것은 뒤집혀진 무언가였다. 디제잉 공연을 보고 학교로 돌아온 유타와 코우, 그리고 친구들. 그들은 평소 수직적이고 권위적이었던 교장의 스포츠카에 장난을 친다. 그런데 그날 우연히도 지진이 일어나고, 교장의 차는 뒤집힌다. 다음날 뒤집혀진 차를 본 교장은 노발대발하며 학교에 인공지능을 이용한 감시 카메라 체계를 도입하게 된다. AI로 학생들을 감시하고, 벌점을 매기는 감시카메라. 이것이 학교에 도입이 되자, 학교와 사회를 나누던 얇은 벽마저 무너졌다. 학문을 위한 곳을 넘어서 사람이 되는 법을 배우는 곳인 학교. 하지만 이곳에 ‘안전’이라는 명목으로 감시 카메라가 설치된 순간 사람이 되는 법을 배운다는 학교의 가치는 희미해지게 된다. 누구나 실수하고, 싸우고, 무너지고 눈물 흘리면서 배우는 사람들. 그러한 과정들이 없었더라면 그들은 사람다운, 아니 사람다운 척조차도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안전이라는 고결해보이는 말로 그들의 모든 것을 감시하는 순간. 그들은 배움의 과정조차도 평가받고 제한된다.

 

 

 

학교 밖에서는 수많은 시위가 발생하고, 정부와 국민이 충돌했다. 그러나 그러한 혼란 속에서 학교가 학생들을 보호해줬던 것은 그들이 결과보단 ‘성장’이라는 가치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었다. ‘무너져도 괜찮아.’ 실수해도 괜찮아.’ ‘우린 더 나아질거야’라는 그 가치들. 그 가치들은 안전과 같이 편리를 위해 지어진 허황된 말과는 다르게 고귀했다. 그러나 감시가 시작되고 결국, 그들이 성장을 위해 무너지고 실수하는 과정들조차 모두 실패로 여겨지게 되었다. 성장이라는 말은 결국 뒤집혀졌고 실패라는 꼬리표가 매시간, 매분, 매초에 붙여졌다.

 


 

 

 

조금씩 일어나는

 

 

 

 

 

 

학교 안과 학교 밖, 인간이라는 존재의 가치에 상처내며 일어나는 불합리적인 일들. 어른들과 사회에게 들려오는 사회부적응자, 양아치, 꼴통, 불량아라는 말들. 그렇게 아이들은 그 어느 곳에서도 그 누군가에게도 위로 받을 수 없었다. 그들에게 힘이 되던 것은 같이 있던 그들, 그리고 우리였다. 학교에 어느날 한 자위대 청년이 찾아온다. 잘생긴 청년의 외모에 웅성거리던 그때,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안보교육을 해야 하니 일본 국적이 없는 이들은 교육을 들을 필요가 없다며 다른 교실로 이동하라고 말하며 아이들을 분리시킨다. 학교 밖에서만 일어났던 차별과 계급화. 그것이 학교로 들어온 순간. 아이들은 더이상 참을 수 없었다.

 

 

 

시위에 참여했다며 원래 담임선생님이 교체되고, 징계를 받기도 했지만 참아왔던 아이들도 하나의 세대를 의미하는 하나의 반이 두 눈 앞에서 분리되는 순간을 견딜 수 없었다. 어쩌면 하나의 반의 분리가 결국, 우리 세대의 분리를 의미할 것이라는 사실을 눈치챈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아이들은 교장실에 찾아가 감시카메라 제도 철폐를 요구한다. 그러나, 교장은 안전이라는 이유로 거부한다. 하지만 점거시위까지 하면서 단호했던 아이들. 교장은 어차피 감시카메라가 철폐되어도 너희들이 졸업하고 나서 철폐된다고, 이럴수록 너희들만 손해라고 말한다. 교장의 회유는 배고픈 아이들에게 건네는 초밥을 통해 부각된다. 달콤하지 맛있어보이는 초밥. 그 값비싼 초밥이 갖는 의미는 명확했다. 그렇게 조금씩 무너지고 고민하는 아이들. 하지만 그 순간, 교장실로 오토바이 헬멧을 든 누군가가 나타난다. 김밥을 가지고 말이다.

 


 



 

흔들리며 피어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흔들리며 피는 꽃>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꽃은 흔들리며 핀다는 그 말, 그리고 흔들려야 꽃이 핀다는 그 말. 그 말을 아이들도 알고 있었을까. 아이들은 흔들리고 또 흔들려도, 그리고 너무나 흔들려 뒤집혀져 버렸을지라도 꽃 피우고자 했다. 김밥을 들고 오토바이 헬멧을 쓴 채로 나타난 사람은 코우였다. 그리고 그 김밥은 아이들에게 힘이 되어 결국 감시카메라 제도의 폐지를 이끌어낸다. 기득권층의 양심으로 요구가 관철되었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하는 후미. 하지만 이럴 때는 웃어도 된다고 말하는 코우. 그는 늘 웃던 유타처럼 웃었다.

 

 

 

졸업식날, 교장은 감시카메라에 대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자신의 자동차를 뒤집은 범인이 나와야지 감시카메라 철폐를 검토해보겠다고 입장을 바꾼 것이다. 그러자, 후미와 코우를 비롯한 아이들은 반발한다. 그 순간 자신들은 안전을 위해 감시카메라 철폐를 반대한다고 말하는 아이들도 나타난다. 그 결과를 분명 어른들이 의도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감시카메라를 설치하고, 일본인과 외국인을 구분하고, 내부인과 외부인을 나눈 것이 만들어낼 당연한 결과는 졸업식장에서 일어난다. 그러자 자리에서 일어나는 누군가. 바로 유타였다. 그리고 유타는 자신이 교장의 자동차를 뒤집었다고 말한다. 시위와 감시 카메라 철폐 요구에 참여하지 않았던 유타. 망해버릴 이 사회에서 남은 삶이라도 즐기자는 유타. 하지만, 결국 세상을 바꾸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유타였다. 자신이 사랑하는 친구들을 위해, 그리고 결국 감시카메라를 없애고 이 사회를 바꾸는 것이 그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유토는 그 선택을 한다. 그리고 유타는 언제나처럼 웃는다.

 

 

 

유타의 희생으로 아이들의 바램은 이루어진다. 하지만 유타는 퇴학당하고, 유타가 그렇게 두려워했던대로 친구들은 하나 둘씩 흩어지게 된다. 그리고 늘 헤어지던 그 육교 앞에 선 유타와 코우. 그들은 언제나처럼 작별한다. 누구보다 행복하게, 장난치고 또 웃으며. 영원히 서로를 사랑한다고 말하며, 그렇게 하나가 된 그들, 아니 우리는 ‘안녕’을 말한다.

 


 


 

결국 해피엔드

 

 

 

 

 

 

<해피엔드>는 네오 소라 감독의 첫번째 극영화이다. 자신의 아버지, 류이치 사카모토의 마지막 연주를 담은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오피스>를 통해 섬세한 연출과 시선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그의 극영화가 이렇게까지 좋은 작품일지 예측한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첫번째 극영화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작품의 음악이나 비주얼적 요소들 모두 탁월했다.

 

 

 

그러나 결국 영화가 이토록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큰 의미를 지녔다고 평가받는데 가장 중요했던 것은 해피엔드만의 이야기였다. 영화를 만들 때, 감독은 자신이 살아가면서 본 여러가지 사건들을 반영했다고 말했다. 동일본대지진으로 인한 반원전 시위나 2016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 등이 그러했다. 또한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과 같은 역사들도 감독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사건과 역사를 통해 감독은 해피엔드를 만들었고, 과거에 대해 반성 하지 않는 일본의 미래를 그려냈다.

<해피엔드>는 미래를 그려냈다는 점에서 분명 SF 영화이지만 우리에게 익숙했던 SF 영화와는 다른 느낌을 준다. 가까운 미래를 그렸다는 점에서도 그러하지만, 영화 속 도시와 사람들의 모습은 지금의 일본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가끔씩 보이는 도시 전경에 섞인 사이버펑크적인 요소를 볼 때가 되어서야 이 영화가 SF 영화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만약 먼 미래를 그렸다면 감독의 상상력이 더욱 가미될 수 있었고, 영화의 가치와 철학에 대한 반박들에서조차도 훨씬 자유로웠을텐데 왜 감독은 가까운 미래를 영화의 시점으로 택한 것일까. 아마 그것은 영화가 다루고 싶었던 것은 결국 개인이었기 때문이다. 사회는 변하고 가치는 달라진다. 하지만 모든 것들이 변해도 바뀌지 않는 것은 바로, 모든 것들 안에 개인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영화가 원하는 것은 그 개인의 안녕, 그들만의 ‘해피엔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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