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무엇일까. 사랑은...
사랑은 전칭명제로 규정할 수 없다. 그것은 언제나 개별적인 사례로(만) 존재한다. 그래서 '사랑은 무엇이다'라고 말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며, 다만 '무엇도 사랑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신형철 - <정확한 사랑의 실험> 中
절대적이지 않으며 항상 개별적으로 존재한다. 귀납적으로 증명할 수 밖에 없다. '이것도 진정 사랑일까?'라는 당신의 고뇌에 절절한 사랑을 했던 로미오와 줄리엣도, 시대의 사랑꾼으로 여겨지는 최수종 씨도 정답을 줄 수 없다. 자신의 감정이 사랑을 설명하는 가장 강력한 근거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사랑이라고 느끼면, 누가 뭐래도 그것은 사랑이 된다.) 천 만명이 사랑을 한다면, 천 만 가지의 사랑이 있다. 사랑을 노래하는 작품이 넘쳐나는 이유는 이러한 사랑의 귀납성과 맞닿아있을 것이다. 창작의 출발은 독창성이기에, 아무래도 사랑은 창작의 재료로써 제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정의하려는 시도는 늘 존재해왔다. 현대 통용되고 있는 사랑의 보편적 속성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타자(Otherness) - 사랑은 나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향한다. 타인을 목적 그 자체로 존중한다.
초월(Transcendence) - 사랑은 개인적 이익, 자기보존을 넘어선다.
배타(Exclusivity) - 사랑은 특정 대상을 향해 독점적으로 집중한다.
욕망(Desire) - 사랑은 갈망을 내포한다. 단순한 소유가 아닌, 존재 자체에 대한 갈망.
시간(Temporality) - 사랑은 순간적 열정(eros)일수도, 지속적 신뢰(agape)일 수도 있다.
윤리(Ethicality) - 사랑은 타인의 존엄을 지키고자 하는 윤리적 긴장을 동반한다.
취약(Vulnerability) - 사랑은 스스로를 드러내고 다치기 쉬운 상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여러 속성 중에서도 다수가 이견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배타성일 것이다. 사랑의 가장 중요한 전제는 '두 사람 사이에서 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다자 간의 사랑은 박애라고 칭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넌 내 꺼야.
배타성의 위반은 사랑에 중대한 위기를 초래한다. 배타성은 사랑의 속성 중 그 어떤 것보다 엄격하게 도덕적 판단을 받는 경향이 있다(불륜은 관계의 근간을 뒤흔드는 신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사랑이라는 복잡한 개념 속에서, 유일하게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는 부분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간통이라는 죄목의 법적제재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 중요성이 더욱 명백해진다.
<헤어질 결심>은 배타성을 어긴 두 사람의 사랑을 다뤘다는 점에서 관객평이 극단으로 나뉘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불륜 vs 절제를 통한 품겨있는 사랑'
한국에서는 결혼했다고 좋아하기를 중단합니까?
영화 속 해준과 서래는 배우자가 있는 상태에서 서로에게 끌렸다. 배신자의 비겁함을 애틋하게 포장해 미화한다는 입장과 선을 지키면서 감정에 솔직한 인간적인 이야기라는 입장의 충돌이다. 무엇이 옳다고 말할 수 없다. 도덕적 판단과는 별개로 분명한 것은, 해준과 서래는 서로에게 사랑을 느꼈다는 점이다. 두 인물의 행태를 절대적으로 비난하거나 옹호하는 것은 사랑을 명제화하는 어리석은 일이다. 다만, '그것도 사랑이었겠거니' 라며 이해해볼 뿐이다.
서래는 위 대사를 통해 사랑의 배타성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해지지만 논리적으로는 타당하게 들린다. 결혼은 사랑의 종착점으로 여겨진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평생을 함께한다는 숭고한 서약이다. 그렇다면 결혼한 사람의 삶에 더 이상 새로운 사랑은 없는 걸까? 설렘을 주는 새로운 사랑이 찾아올 수 있다. 사랑은 감정의 한 갈래이며, 감정은 늘 죽 끓듯 변덕스러운 속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혼 후에는 새로운 사랑이 '없어야 한다'는 당위에 더 가깝다고 말해야겠다. 마음이 피어나는 것을 사람의 의지로 막을 수는 없으므로. 그러나 약속을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 노력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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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래는 해준과 헤어질 결심을 하려고 쓰레기같은 남자만 골라 결혼을 했다. 물리적으로라도 떼어내야 충동을 막을 수 있을 테니까. 그게 더 우아한 방식이니까. 해준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일테니까. 해준은 깨끗한 사람이라서 늘 선을 지킨다. 사랑한다는 말 대신 잠복을 하고 창 너머로 살펴보고 중식 볶음밥을 해준다. 그것이 해준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이다.
살인과 피가 있어야 행복한 해준에게 서래는 영원히 피의자여야 한다. 그래야 깨끗하게 사랑할 수 있다. 해준은 서래를 끊임없이 의심해야한다. 그러면서도 붕괴되지 않기 위해 진실을 좇아야 한다. 서래는 끊임없이 무고를 증명해야한다. 감방에 들어가면 해준을 아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사건이 종결되지 않기 위해 고의적으로 해결을 지연시켜야 한다. 두 사람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사건이 해결되기를 바란다. 해준은 붕괴되지 않기 위해서, 서래는 감방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 두 사람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사건이 미결되기를 바란다. 깨끗하게 사랑하기 위해서.
기도수 살인사건이 해결되고 해준은 붕괴했다. 왜. 사건이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또, 사건이 잘못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사건이 해결되므로써 해준은 서래를 만날 수 없게 되었다. 서래가 사무쳐서 해준은 괴롭다. 사건이 잘못 해결되므로써 해준은 품위를 잃었다. 여자에 미쳐서 직업윤리를 잊었기 때문이다. 왜 그런 쓰레기 같은 남자를 만나서 고생했을까. 경찰에 신고를 하면 되었을 것을. 왜 경찰을 믿지 못해서 직접 사람을 죽이고 이 지경까지 왔는가. 해준은 여기서 멈춘다. 서래의 과오가 담긴 휴대전화를 바다 깊은 곳에 던지라고 말한다. 그래도 서래의 안녕을 바랐기 때문일까. 죄책감과 수치심에 몸부림치면서 지난날을 부정한다. 서래는 우리 일을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이야기 한다. 서래는 아직 '우리'의 일을 바다에 봉인할 생각이 없다.
서래는 해준 앞에 다시 나타났다. 새로운 쓰레기 남자와 함께. 그리고 그 남자를 또 죽인다(죽게 만든다). 해준은 서래에게 다그친다. 이러려고 이포에 왔느냐고. 해준은 복잡해진다. 왜 또 쓰레기같은 남자를 만났을까. 그 쓰레기 남자는 왜 또 내 관할구역에서 죽었을까. 나를 또 무너뜨리려고 이러는 걸까. 내가 보고 싶어서 온 걸까. 서래는 비슷한 방식으로 무고를 증명한다. 해준은 더 엄격한 방식으로 서래를 의심한다. 이번에는 해준이 승리한다. 사건이 제대로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서래는 명백한 살인범이 됐다.
핸드폰 두 개가 해준에게 돌아온다. 하나는 서래의 과오가 담긴 것, 다른 하나는 해준의 사랑이 담긴 것. 해준은 서래를 지키기 위해 과오가 담긴 휴대전화를 바다 깊은 곳에 버리라고 했다. 서래는 해준을 지키기 위해 사랑이 담긴 휴대전화를 바다 깊은 곳에 버리라고 했다. 바다 깊은 곳에 빠져 아무도 찾지 못하면 우리 둘 만 아는, 영원한 사랑이 될 테니까. 그리고 서래는 제 자신을 바다 깊은 곳에 묻는다. 자신이 몰고 온 모든 사건을 미결로 남기기 위해서. 해준에게 영원한 피의자로 남기 위해서. 더 이상 헤어질 결심을 할 필요가 없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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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준이 사랑한다고 말할 때 그 사랑은 끝이 났고, 해준의 사랑이 끝났을 때 서래의 사랑이 시작됐다. 해준은 붕괴하면서 사랑을 남겼고, 서래는 그 붕괴를 단서삼아 사랑을 틔웠다. 다시 서래는 해준을 재건하고자 소멸을 택했고, 해준은 안개 속 영원한 사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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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랑은 영원하다. 어떤 사랑은 채 5분이 걸리지 않고, 어떤 사랑은 이어지지 않아서 아름답다.
사랑할 결심을 하는 것은 죄가 되지 않지만, 사랑을 완결하는 것은 죄가 된다. 결심은 미완이다. 아직 행해지지 않았으므로. 마음을 먹었다고 해서 행동을 보장하지는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