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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 2025-05-02 00:22:40

[스크린 너머 세계 속으로… 독일] 사랑은 세상도 바꾼다.

작년 이맘때쯤, <퍼펙트 데이즈>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았던 나는 빔 벤더스의 다른 영화들에도 자연스레 시선이 갔다. OTT로 볼 수 없는 영화들이 많다는 점은 제약인 동시에, 그만큼 희귀한 경험이 되라는 생각은 뇌리에 박혀 이따금 나를 시네마테크로 향하게 했다. 커트 코베인이 가장 좋아했던 <파리, 텍사스>를 보고선 커트의 불꽃 같았던 인생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고, 대표작인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느꼈던 여운은 쉽게 잊어지지 않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빔 벤더스의 국적을 알지 못했다. 일본, 미국, 그리고 독일. 그의 영화 속의 다양한 나라들은 언제나 매력적이고 설득력 있었기 때문이다. 어떨 때는 일상, 어떨 때는 회한, 그리고 어떨 때는 사랑. 그의 방대한 세계관 속에서 나라라는 경계는 크게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다만 독일이라는 나라의 특수성과 그의 영화적 스타일을 비교해 본다면 그가 독일인이라는 걸 이해할 수 있다.

 

 

 

<베를린 천사의 시>

 

 

 

 

 

인간을 돌보는 천사들이 베를린을 활보한다. 그들의 임무는 항상 사람들의 곁에서 기운을 불어주고 따뜻함을 전해주는 것. 기본적으로 인간은 천사를 볼 수 없고, 천사는 인간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다. 천사 다니엘은 여느 날처럼 동료와 함께 임무를 수행 중이다.

 

 

 

과거의 상흔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속은 여전히 문드러진 베를린. 전쟁과 분단으로 인한 가난과 좌절, 그리고 끊임없는 자기혐오로 둘러싸인 그곳은 치유가 필요한 공간이자, 빔 벤더스가 국민으로서 포착해야만 하는 광경이었을 것이다. 마치 천사의 모습처럼. 영상을 통해 독일인들을 지켜보고 위로해 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인간의 상처가 그러하듯 언제나 똑같은 천사의 임무. 위태로운 사람들을 따뜻하게 안아주고 긍정의 말들을 속삭인다. 물론 인간은 천사를 볼 수 없음에도 용기를 얻을 수 있지만, 해결하지 못하는 일들도 있다. 천사는 감각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통과 배고픔, 그리고 수명. 모든 것이 그들에게 무의미하다.

 

 

 

굉장히 슬픈 설정이다. 인간의 나약한 면을 극복하게 해주는 존재가, 나약함을 이해할 수 없는 모순이라니. 눈앞에서 나가떨어지는 나약한 존재들을 끝까지 지켜볼 뿐이라니. 유일하게 아픔을 느끼는 방법은 임무를 저버리고 인간이 되는 것이다. 체스를 두던 사람이 체스 말이 되는 짓, 사랑은 그 어리석은 짓을 가능케 했다.

 

 

 

동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사랑을 찾아 인간으로 변한다. 영원할 수 없지만, 아니 어쩌면 영원함이라는 족쇄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아픔도 기쁘고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도 즐겁기만 하다. 무엇보다 그 미친 짓을 가능케 한 사랑이 있으니.

 

 

 

엄숙한 천사의 세계와 역동의 인간 사회를 대조하듯. 이 영화에서 천사의 시점은 흑백, 인간의 시점은 컬러로 표현된다. 덕분에 더욱 극적인 기분을 느끼고 감독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기본적으로 창작자는 보고 느낀 점을 쓰는 사람이다. 마치 천사가 인간 세상에 대한 정보를 노트에 기록하듯, 창작자도 본인의 시선으로 세상을 재구성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과정에서 세상과 거리가 더욱 벌어질 수도 있다. 창작과 시선에만 몰두한다면, 정작 타인의 고통과 환희에 공감할 수 없다면. 창작자는 우월감이라는 큰 착각의 늪에 빠진 채 세상을 배회하는 데에만 그칠 것이다.

 

 

 

빔 벤더스는 <베를린 천사의 시>를 통해 열변한다. 창작자 본인의 시선에서 벗어나야 함을. 그리고 그 껍질을 깨는 힘은 천국이 아니라 이 세상의 사랑이라는 불변의 진리를. 증명이라도 하듯 <베를린 천사의 시>를 포함한 그의 영화들에서 어떤 오만함도 느껴지지 않는다. 독일 영화의 오랜 기조인 표현주의를 새롭게 해석하듯. 빔 벤더스의 영화에서 격양된 인물들은 지양되고 모든 사건은 담담하되, 여운은 그 어떤 표현보다도 강렬하다.

 

 

 

 

 

 

 

 

"영원히 살면서 천사로 순수하게 산다는 건 참 멋진 일이야. 하지만 가끔 싫증을 느끼지. 영원한 시간 속에 떠다니느니 나의 중요함을 느끼고 싶어. 내 무게를 느끼고 현재를 느끼고 싶어. 부는 바람을 느끼며 지금이란 말을 하고 싶어. 지금... 지금..." -다니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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