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2025-05-05 18:54:42
아름다운 영혼을 위한 소나타
아름다운 영혼을 위한 소나타
1984년 동독, 개인의 삶은 존중 받지 못했다. 사회주의 체제 아래, 개인을 억압하기 위한 비밀경찰의 감시는 날로 심해졌고, 당시 국민의 3~5%가 비공식 정보원으로 활동했다고 추정될 만큼 이웃, 친구, 연인, 심지어는 가족까지도 신뢰할 수 없는 사회였다. 비즐러는 대학교수이자 비밀경찰로 일하는 인물이다. 그는 사회주의에 대한 강한 신념이 있으며, 그 신념을 바탕으로 세워진 국가 체제에 철저히 복종한다. 그에게 있어서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이는 '사회주의의 적'일 뿐, 하나의 '인간'으로 취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드라이만을 감시하게 되면서, 비즐러의 삶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드라이만은 동시대의 다른 예술인들에 비해 비교적 체제에 순응하는 편이었다. 국가를 노골적으로 찬양하지는 않지만, 정치적 탄압에 대해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가 적극적으로 체제에 저항하게 되는 계기가 생긴다. 드라이만의 친구 예르스카는 국가로부터 위험인물로 간주되어 연출가로서 활동을 금지당한다. 자신의 자유 의지를 빼앗긴 예르스카는 삶의 의지 또한 잃고, 결국 자살을 택하다. 정확히는, 국가에 의해 극단적인 선택으로 내몰린 것이다.
또한, 드라이만의 연인 크리스타는 배우로서의 경력을 안정적으로 이어가기 위해 문화부 장관의 도움을 받는다. 예르스카는 억압된 사회에서 스스로 벗어난 인물이라면, 크리스타는 원치 않는 성적 관계를 감내하면서까지 예술을 통한 생존을 꿈꾼다. 드라이만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허위적인 신념 아래 고통받는 개인의 삶을 고발하기 위한 글을 쓰기 시작한다. 글의 내용은 이러하다. 1977년 동독은 자살 관련 통계 공개를 중단하였다. 그해, 유럽에서 동독보다 자살률이 높은 나라는 헝가리뿐이었다. 이는, 개인의 삶을 안전하게 보호해야 할 사회 체제가 오히려 폭력을 휘두르고 있음을 드러낸다.
비즐러는 드라이만의 삶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자신이 복종하던 사회 체제의 허구성을 점차 깨닫는다. 그의 동료 그루비츠는 이미 신념에 지배당하여 당 서기 호네커와 전화를 동일시하는 모습에서 보이듯 인간을 사물화하고 타인을 억압한다. 문화부 장관 헴프 역시 허구적인 신념 위에 군림하며 타인의 삶을 훼손한다. 체제의 모순성과 허구성을 느끼기 시작한 비즐러는 드라이만에 대한 감시를 중단한다. 그때, 그는 드라이만의 삶과 연결되기 시작한다. 예술의 힘이 바로 여기에 있다. 예술은 인간과 자연, 인간과 세계, 인간과 인간을 연결하다. 따라서 예술에 진정으로 마음을 바친다면 결코 개인주의적인 인간이 될 수 없다. 비즐러가 크리스타의 삶에 연민을 느끼고 적극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가 예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술은 더욱 강력하게 비즐러의 마음을 흔든다. 동독은 예술이 가진 힘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집착했을 것이다.
생존과 개인의 존엄 사이에서 갈등하던 크리스타는 결국 자신의 연인인 드라이만을 배신하게 되지만, 끝내 생존하지 못하고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다. 신념에서 벗어나 타인을 인간으로 마주하게 된 비즐러에게 타인의 삶은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실현된다. 크리스타의 죽음 앞에서 비즐러는 진정으로 슬픔과 죄책감을 느낀다. 타인을 체제의 적으로 규정하고 비인간적으로 고문하던 초반의 모습에서 변화하여 신념에서 해방되고 주체적인 삶을 찾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다. '추구하고 싶은 이상과 혁명할 대상이 사라진 사회'에서 신념에 지배당한 사람들은 과거를 그리워하지만 비즐러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살아나간다. <아름다운 영혼을 위한 소나타>는 비즐러와 같이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개인 주체에게 주어진다.
어떠한 신념도 개인의 삶을 앞설 수 없다. 신념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허구적인 개념이며, 온전하지 못하다. 아름다운 영혼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삶을 생생하게 경험해야 한다. 타인과의 연결이 희미해질 때, 예술에 취해보는 것도 좋다. 타인과 공존할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주체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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