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ECTOR. 이자벨라 브루네커
CAST. 야나 맥키논, 빌 케이플
SYNOPSIS. 늦여름. 20대 후반의 젊은 여성 이가가 이상적인 행복을 꿈꾸며 공상에 잠기는 시기다. 그녀는 차를 몰고 스코틀랜드로 가기로 결심한다. 여행 중 이선이라는 서른 살의 영국 남자와 동행하게 되면서 이가는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되고 자신의 목표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새로운 인연을 맺게 만드는 로드무비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을까. 2010년대에 <비포 선라이즈>를 보며 나는 몇 번이나 생각했다. 얘들아 기차에서 모르는 사람이랑 대화하면 위험해. 그리고 잔디밭에 누우면 쯔쯔가무시의 위험이 있단다… 하지만 애초에 내겐 그런 로맨스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차에서는 내가 예매한 자리에만 얌전히 앉아있을 것이며, 옆자리 사람들이 시끄러우면 조용히 이어폰의 노이즈 캔슬링 기능을 켜면 그만이니까.
그리고 이 차가운 시대에, 전주국제영화제에 도착한 자동차 로드무비 한 편. 영화 <슈거랜드>의 스토리라인은 자못 단순하다. 한 여자가 휴게소에 잠시 멈춰섰다가, 불을 빌리며 히치하이킹을 청하는 남자를 만난다. 내키지 않았지만 고민 끝에 여자는 남자를 태우고, 두 사람은 일련의 자잘한 사건들을 겪고 대화를 나누며 조금씩 가까워진다. 모르는 곳에서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이야기는 수많은 이야기의 전형이고, 이 영화 속 사건들은 진폭이 크지 않음에도, <슈거랜드>는 시선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다.
물론 <비포 선라이즈>를 보며 쯔쯔가무시를 우려하던 나의 마음은 <슈거랜드>를 보면서도 드러난다. 라이터 빌려주지 마! 모르는 남자 차에 태우지 마! 내릴 때 차키를 왜 두고 내리는 거야, 그 사람이 차 끌고 도망가면 어쩌려고! 그러나 다행히 여정은 계속된다. <비포 선라이즈>의 시대를 지나버린 관객의 우려를 이해한 듯, 주인공 두 사람도 조금씩 쭈뼛거리고 망설인다. 단지 그 작은 망설임을 조금씩 넘기고, 서로의 친절함에 대해 이야기할 뿐이다. 두 사람의 대화는 심심하지만, 그렇게 조금씩 서로를 알아 가게 된다.
경계하고 벽을 세우는 게 자연스럽고 안전하게 받아들여지는 시대에 잊혔던 사실이, 그렇게 새삼스럽게 드러난다. 관계는 결국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고, 마음을 쓰면서, 장벽이 낮아지면서 시작하는 거란 것. 그러다 보면 결국 상대를 버려두고 갈 수 없게 된다. 이런 세상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의아해 한다. 친절이 사라지고, 그 냉기가 나의 숨통을 위협하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답답한 세상.
그 시대는 에단(이라 불린 남성)의 입에서 “탈낭만주의” 시대라고 정리된다. 그 시대에도 여전히 진정한 사랑을 믿고 싶어하는 이가(Iga), 그리고 현실은 다르다고 말하는 에단(Ethan) 두 사람 모두 사실 본질은 비슷하다. 친절의 가치를 아직 믿고 싶어하는 서로를 알게 된다. 이런 세상에서 서로를 “미쳤다”고 말하면서. 이런 시대에 사랑의 가치를 믿는다는 건 거의 종교적인 측면이 있다. 그런 지고지순한 아름다움은 인간의 세속적인 풍경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이런 시대에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은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작은 음악 소리를 듣고 “좋아하는 노래”라며 벌떡 일어나 웃을 수 있는 용기, 그리고 같이 일어나 같은 동작으로 춤 출 때, 우스워질 위험을 기꺼이 감수할 때 그 음악이 선명해지는 현상이다. 다시 말해 그런 용기가 없으면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한 용기, 서로의 문을 두드리지 못하는 망설임이 뒤섞이면서 그 안에서 무엇이 선명해지는지를 천천히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나 생은 우리의 유리창을 깨뜨리고, 그때 설렘만큼 선명해지는 무언가가 있다. 서로에 대해 알아간 내용이 커지고 많아질수록, 유리창처럼 깨져 서로를 찌르는 파편들도 커질 수 있다. 어차피 모든 성향과 성격은 양면적으로 평가될 수 있기에.
사랑이라고 부르기에 아직 어린 감정이지만 힘이 세다. 잠시 내 경계를 잊게 하고, 그 모든 경계를 넘어서 다른 세계로 데려가 준다. 사랑은 그래서 위험하다. 둘이 넘어선 경계는 단순히 행정구역의 경계만은 아닐 것이다. 영화에서 일일이 열거하지는 않지만, 남들이 보기엔 멀쩡해 보이지만, 두 사람 모두 각자 뛰어넘고 싶은 삶의 경계와 고민을 가득 안고 있었다. 삶은 그런 곳이니까.
이 영화 속 날은 늘 흐리고 안개가 끼어 있다. 채도가 낮은 16mm 필름의 색감 안에서, 물기 어린 시각으로 우리는 두 사람의 세상을 본다. 삶은 쩌면 그토록 모호한, 미지의 세계이고… 우리는 그 안에서 자동차 한 대처럼 유유히 차곡차곡 나아간다. 가끔은 유리창도 깨지고, 가끔은 대화도 나누면서. 가본 적 없는 곳에도 거침없이 달려가면서.
그렇게 뛰어들었다가 돌아 나오면, 세상의 경계선은 한층 넓어져 있다. 그리고 나면 비로소, 이가의 앞에 해가 뜬다. 지난 시간을 딛고, 지금까지의 시간 밖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힘. 푸르스름한 질감 너머 그 힘의 빛이 전해지는 영화였다.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2025.04.29-05.09) 상영일정]
2025.05.02 11:00 CGV전주고사 7관 (상영코드 209)
2025.05.05 14:30 CGV전주고사 7관 (상영코드 527)
2025.05.08 21:30 CGV전주고사 7관 (상영코드 8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