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니엘2021-08-06 18:46:42
팜 스프링스 시사회 영화 후기 - 타임 루프로 커플 만들기 어렵지 않아요!
에이브와 탈라의 결혼식에서 무한 타임 루프를 하게 된 나일스는 현재를 반복해서 살게 된다. 모든 죽는 방법을 써봐도 현재로 되돌아오는 타임 루프는 사실 어느 사막에 있는 동굴 입구에서 시작되었는데 로이라는 할아버지가 나일스를 죽이려고 계속 쫓아온다. 하지만 나일스는 세라라는 여성과 사랑에 빠지려다 우연찮게 같이 동굴 입구로 들어가게 되고 둘은 에이브와 탈라의 결혼식 아침 첫날에 깨어나게 된다. 세라는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지 고민을 하다가 나일스를 만나게 되고 둘은 서로 싸우다가 친해진다. 그리고는 무한 타임 루프를 벗어날 방법을 찾으러 세라는 간다. 과연 사막에 있는 동굴 입구에 존재하는게 무엇이길래 타임 루프를 반복하게 될까? 나일스는 로이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까?
타임 루프를 겪게 된다면
얼마나 삶이 피폐해지는지
알려주는 영화!
너를 끈질긴 악연으로 만나다 좋은 인연으로 만났다
그러다 사랑으로 번져가~
나일스는 찌질하고 코믹스러운 캐릭터지만 그런 나일스에게도 타임 루프로 인해 세라라는 인연을 만났다. 둘은 처음에는 끈질긴 악연이 될 뻔했지만 나일스의 재치 있는 입담으로 세라는 나일스에게 매력을 느꼈고 사랑을 나누기까지 했다. 하지만 사랑에도 권태기가 있듯이 둘의 사이가 나빠지기도 했고 벗어날 수 없는 타임 루프로 인해 세라는 자신이 저지른 업보라고 말한다. 나일스는 이에 한 술 더 뜬 채로 상상 속이라고 하거나 꿈속에 있거나 다중 우주를 벗어난 시물레이션 오류까지 언급한다. 그렇다. 나일스의 언급이 일부 맞았는게 이 영화에서는 양자 물리학을 다루는 개념이 나온다. 세라가 타임 루프를 벗어나기 위해 양자 물리학에 대한 공부를 하게 되고 수많은 이론을 바탕으로 동굴 입구에 있는 에너지 존재를 찾아낸다. 그리고는 온갖 방법을 써서 탈출하려고 한다. 또한 이 영화가 주는 메세지는 자신의 현실에서 안식처를 찾는 것과 지독한 인연이라도 나중에는 소중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라는 메세지를 관객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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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회퍼, 선한 능력으로 암흑속에 불을 밝히다
▷한줄평 : 빛을 기다리는 어둠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평점 : ★★★▷영화 : 본회퍼: 목사.스파이.암살자(Bonhoeffer: Pastor.Spy.Assassin), 2025.4월
2022년 12월 31일, 한 해를 마무리하며 새해를 맞이해야 할 시간.
그러나 창궐한 코로나19는 사람을 만나는 것조차 두려운, 마치 지옥에 갇힌 듯한 나날을 이어가게 만들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현실 앞에서 ‘새로운 한 해’란 말조차 공허하게 느껴졌다.
그때 우연히 발견한 노래, ‘선한 능력으로(Von guten Mächten wunderbar geborgen)’는 마치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한 줄기 빛과 같았다.
나는 그 노래를 수없이 반복해서 듣고 또 들었다. 어느 순간 마음속 깊은 곳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말할 수 없는 ‘평화’가 밀려오는 듯했다.
♬ 선한 능력으로 작사 : Dietrich Bonhoeffer / 작곡 : Siegfried Fietz
1. 그 선한 힘에 고요히 감싸여 그 놀라운 평화를 누리며
나 그대들과 함께 걸어가네 나 그대들과 한 해를 여네
2. 지나간 허물 어둠의 날들이 무겁게 내 영혼 짓눌러도
오 주여 우릴 외면치 마시고 약속의 구원을 이루소서
3. 주께서 밝히신 작은 촛불이 어둠을 헤치고 타오르네
그 빛에 우리 모두 하나 되어 온누리에 비추게 하소서
4. 이 고요함이 깊이 번져갈 때 저 가슴 벅찬 노래 들리네
다시 하나가 되게 이끄소서 당신의 빛이 빛나는 이 밤
(후렴) 그 선한 힘이 우릴 감싸시니 믿음으로 일어날 일 기대하네
주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셔 하루 또 하루가 늘 새로워
① 독일 NGO 한국선교사 독일어/영어/한국어버전 : GINA (홍혜진, 2020년)
https://www.youtube.com/watch?v=xwlUtvHLF8U
② 독일 작곡가 버전 : Siegfried Fietz (2012년)
https://www.youtube.com/watch?v=aN7dGz6NH5M&t=111s
‘어둠이 깊을수록 빛은 더욱 밝게 빛난다. 그 선한 힘이 영혼을 짓누르는 고통의 순간에도 우릴 지켜 주실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날은 다시 주어질 것이다.
그날을 기대하며 절망과 고통을 이겨내야 한다. 그분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기에……’
이 노래의 작사가는 바로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2.4~1945.4.9) 목사.
그는 독일 루터교회 목사이자 신학자, 그리고 반(反) 나치 저항 운동가였다.
이 노래는 1944년, 그가 히틀러에 저항하다 감옥에 갇힌 중, 약혼자 마리아에게 보낸 편지에서 비롯되었다.
내 사랑 마리아
1944. 12. 19. Prinz-Albrecht Straße
성탄절에 당신에게 편지를 쓸 수 있고, 이 편지를 통해 부모님과 형제자매, 친구들 모두에게 감사의 말을 전할 수 있어서 매우 기쁘군요.
이 곳 새로운 형무소에서는 아주 적막한 날들이 이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외부에서 아무 소식도 들을 수 없는 순간이 될 때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얼마나 깊이 연결되어 있는지 느끼곤 했습니다.
마치 우리 영혼이 일상생활에서는 알지 못하던 신경체계를 고독 속에서 만들어 내는 듯합니다.
그래서 나는 단 한순간도 내가 혼자라거나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당신과 부모님, 친구들, 전선에 나가 있는 제자들 모두 항상 나와 함께 하고 있으니까요.
모두의 기도와 사랑의 마음, 내게 보내 준 성경 말씀, 그리고 지난날에 나누었던 대화, 음악, 책 등은 내 옆에서 그 어느 때보다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믿음의 눈으로 확신하며 살아가는 보이지 않는 더 넓은 세계가 있는 것이지요.
“둘은 나를 덮어 주고, 둘은 나를 깨워주며”라는 옛 동요에 나오는 천사에 관한 노래처럼,보이지 않는 주님의 선하신 권능의 손이 아침에나 저녁에나 우리를 지켜 주시는 것이지요.
오늘날 우리 어른들은 옛날의 그 아이들 이상으로 선하신 권능의 보호하심을 필요로 하니까요.
내가 불행할거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행복과 불행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사람의 행복과 불행은 환경에 좌우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삶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과 가족, 친구들이 모두 곁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매일매일 기쁘고 행복합니다. (중략)사랑하는 마리아, 우리가 서로를 기다려 온 시간이 벌써 2년이 되었군요.용기를 잃지 말아요! 당신이 부모님 곁에 있어서 기쁩니다.
장모님과 온 가족에게 사랑의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지난밤에 떠오른 생각을 옮겨 보았습니다.
이 시는 당신과 부모님, 형제자매들에게 보내는 나의 성탄 인사입니다.주님의 선하신 권능에 싸여(Von guten Mächten)
신실하신 주님의 팔에 고요히 둘러싸인
보호와 위로 놀라워라
오늘도 나는 억새처럼 함께 살며
활짝 열린 가슴으로 새로운 해 맞으렵니다.
지나간 날들 우리 마음 괴롭히며
악한 날들 무거운 짐 되어 누를지라도
주여, 간절하게 구하는 영혼에
이미 예비하신 구원을 주소서
쓰디쓴 무거운 고난의 잔
넘치도록 채워서 주실지라도
당신의 선하신 사랑의 손에서
두려움 없이 감사하며 그 잔 받으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기쁨, 눈부신 햇살 바라보는 기쁨
다시 한번 주어진다면
지나간 날들 기억하며
나의 삶 당신께 온전히 드리렵니다.
어둠 속에서 가져오신 당신의 촛불
밝고 따뜻하게 타오르게 하시며
생명의 빛 칠흑 같은 밤에도 빛을 발하니
우리로 다시 하나 되게 하소서!
우리 가운데 깊은 고요가 임하며
보이지 않는 주님 나라 확장되어 갈 때
모든 주님의 자녀들 목소리 높여 찬양하는
그 우렁찬 소리 듣게 하소서
주님의 강한 팔에 안겨 있는 놀라운 평화여!
낮이나 밤이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다가올 모든 날에도 변함없으시니
무슨 일 닥쳐올지라도 확신 있게 맞으렵니다.
출처 : 『옥중연서』-디트리히 본회퍼와 약혼녀 마리아의 편지, 정현숙 옮김, pp. 344-347
2025년 4월, 시간이 흘러 나치와 히틀러와 같은 독재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이곳에,
영화 <본회퍼: 목사.스파이.암살자>는 그를 단순한 신앙인이 아닌 ‘저항자’로 소환해낸다.
영화는 그가 어떻게 히틀러 암살 모의에 가담하기까지 되었는지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단지 이념이나 영웅주의로 포장하지 않고, 신앙인으로서의 고뇌와 결단의 과정을 담담하게 따라간다.
영화 <본회퍼: 목사.스파이.암살자> 스틸컷 / 히틀러 암살 모의 가담으로 체포되는 본회퍼(요나스 다슬러)
행동하는 신앙인 본회퍼
본회퍼는 베를린대학교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미국 유니언 신학교 유학 시절,
흑인 교회와 인권운동을 경험하며 정의와 평화, 신앙의 본질에 대해 더욱 깊이 고민하게 된다.
이후 히틀러 치하의 독일로 자발적으로 돌아가, 폭력과 불의 앞에 침묵하는 독일 교회에 맞서며 외친다.
당시 독일교회는 나치 독일에 저항하기는커녕 오히려 히틀러를 메시아로 숭배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악을 대면하고도 침묵하는 것은 그 자체로 악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말하지 않는 것은 말하는 것이다. 행동하지 않는 것은 행동하는 것이다.’
Silence in the face of evil is itself evil: God will not hold us guiltless.
Not to speak is to speak. Not to act is to act.영화 속, 나치 장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본회퍼가 히틀러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장면은 깊은 인상을 남긴다.
설교도중 장교들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자 그의 가족들은 예배가 끝난 후 조용히 격려의 말을 전한다.
“용기를 내, 디트리히.”, "우리는 네가 정말 자랑스럽다.” 그의 신앙인으로서의 고뇌와 두려움을 짐작하고도 남게 한다.
영화 <본회퍼: 목사.스파이.암살자> 스틸컷 / 교회 강단 설교에서 나치와 히틀러를 비판하는 본회퍼이후 그는 짓밟힌 독일 교회를 다시 세우고 무고한 유대인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던져 히틀러에 맞서 싸우기로 결심한다.
정치적 용기는 신앙의 행위이며, 악에 직면하여 침묵하는 것은 결국 악을 행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미치광이 운전수가 차를 몰고 있는 상황에서 사람들을 계속 치게 두고 죽은 사람들만 잘 장사 지내줄 것이 아니라
그 운전대를 빼앗아야 한다’
본회퍼는 결국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대량학살에서 구하기 위해 나치 정보국에서 이중 스파이로 활동하며 히틀러 암살에 가담했고
종전을 겨우 한 달 앞둔 1945년 4월 9일 새벽, 플로센뷔르크 수용소에서 서른아홉의 나이로 처형된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삶의 시작이다’ 디트리히 본회퍼의 마지막 유언
영화 <본회퍼: 목사.스파이.암살자> 스틸컷
오늘, 우리는 어떤 신앙인으로 살아야 하는가?
이 영화는 단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의 현실, 한국 사회와 교회의 상황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다.
영화는 ‘기독교 신앙이란 무엇인지?’,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더 이상 ‘빛과 소금’이 아닌, 세상의 불의에 침묵하고 사회적 약자에 무관심한 종교로 전락했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주기도문의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문장은 추상적 선언에 그칠 뿐이다.
기독교 신앙이 살아서는 복을 받고, 죽어서는 천당에 가는 개인의 구원과 축복에 초점이 맞춰진지 오래다.
더 이상 교회 강단에서도 세상을 향한 정의와 평화가 선포되지 않는다. 이러한 사이에 불의한 거짓 선지자의 선동과 영향력만 커져 버렸다.
본회퍼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세상 속에서 잃어버린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시 회복할지 도전한다.
예수께서 그 옛날 선포했던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 여기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무너진 정의와 평화는 회복되어야 한다.
본회퍼는 우리에게 묻는다.
“예수께서 오늘 이 자리에 계셨다면, 어떻게 하셨을까?”
그의 삶은 말한다. 신앙은 행동이어야 하며, 불의 앞에서 침묵하는 것은 결국 악에 가담하는 것임을. 정치적 용기도, 결국 신앙의 표현임을.
그리고 그 선한 능력은 여전히 우리를 감싸고 있다고.
어둠이 깊어질수록 빛은 더욱 선명해진다.
오늘 밤, 나는 다시 그 노래를 듣는다.
그리고 묻는다.
우리 신앙인들은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 실제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2.4~1945.4.9)의 모습
(우하 사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조각된 20세기의 순교자들, 맨 오른쪽이 디트리히 본회퍼
영화 <본회퍼: 목사.스파이.암살자> 포스터
2025.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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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우정 현실엔 없어, 스크린에 있어
듬직한 음악가 곰 ‘어네스트’와 용감한 꼬마 생쥐 ‘셀레스틴’의 빛나는 우정을 극장에서 확인해 보세요 ✨
오는 6월 11일, ‘어네스트’의 바이올린을 고치기 위해 떠난 좌충우돌 뮤직 어드벤처가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
그럼 우린 극장에서 만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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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호실] 음악을, 연인을, 다정함을 향한 사랑은
tick,tick...BOOM!(2021)
세상은 천재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구나
스티븐 손드하임-조나단 라슨-린마누엘 미란다로 이어지는 미국 뮤지컬의 역사를 영화 안팎으로 지켜볼 수 있어서, 린마누엘미란다 세대의 뮤지컬을, 음악을, 영화를 볼 수 있어서 행복한 세대라고 생각했어
담백하고 깔끔하게 tick,tick…BOOM! 3인극 원작과 조나단 라슨의 삶을 동시에 전개해 나가고
뮤지컬씬 연출도, 관객의 감정을 쌓아올리는 길도 잘 깔아놓았다
일상 속에서 빛을 찾아내는 사람들의 삶은 어떨지
흔하고 뻔한 세상 안에서 멋진 언어들을 발견하는 작가들은 어떤 마음일지 가늠해보게 한다
그런 자신의 인생과 가치관을 음악으로 풀어놓는 조나단을 앤드류가필드의 연기와 그의 넘버로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끊임없이 사회를 향해 외치는 말들로 가득한 넘버들이 좋다
같은 장면을 몇번이고 돌려봐도 매번 조나단라슨처럼 가슴이 뛰게 만드는 영화
what does it take to wake up a generation
actions speak louder than words
bones and all(2022)
완벽하게 내 취향의 영화
우선 오프닝. 어디서 본 해석과 내 해석을 종합해보면
일단 송전탑은 집과 집을 연결하는 소재로 미국의 혈관을 의미한대.
잘못 성장한 어른은 한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반의 문제라는 점을 의미하고자 했대
나는 여기에 더해서 오프닝에서 학교 친구가 우리 집은 송전탑 맨 끝에 있어 이러잖아
그 송전탑으로 연결된 선의 끝.
즉 집과 집, 마을과 시람들과 연결된 선 위에 자리하려 하고 속하려 노력한 매런은
결국 송전탑의 맨 끝에서 친구의 손가락 혈관을 끊어버리면서 자신이 이 선 안에 속하지 못할 것임을.
스스로 인간의 혈관을 끊음으로서 자신과 사회 사이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렸다는 걸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또 공식 설정이 이러한지는 알 수 없지만 매런과 리는 모두 부모에게서 그 식성이 온 거잖아
그것 또한 결국 이 영화에서 말하려는 사랑에서 기인했다는 점
사랑을 인생에서 놓을 수 없던 이들이 아이를 갖고 그 아이에게도 자신의 삶을 물려줘야 한다는 점
결국 사랑
사랑이다 참 사랑이 뭐길래
인간의 삶을 살아가게도, 죽게도, 잠시 멈추게도 만드는 건 항상 사랑이다
구아다니노는 콜미바이유어네임에서도, 서스페리아에서도 그리고 이 작품에서도
조용하게 분위기를 자아내는 걸 좋아하는 감독 같았다 그걸 또 잘한다
그리고 티모시 샬라메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나는 그가 출연한 작품들을 봐오면서 그의 매력을 잘 몰랐는데 이번 작품에서 인정할 수밖에 없었어
연기를 잘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인물을 매력적으로 그려내는 배우더라고
특히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던 씬에서
매런의 옷가지를 쥐어뜯을 듯 잡으며 매런에게 매달려 울던 모습에서
리가 마음에 와닿고 그랬다
매런은 어렴풋이 알았을 거야. 그녀의 어머니가 쓴 편지를 읽은 이후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을 거야
그들에게 사랑은 허락되지 않는 것이라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 앞의 상대를 껴안는 처절한 선택을 한 것이고
잠깐이라도 평범하게 살아보자던 둘은. 매런은
침대 위 카라멜 빛깔의 가방을 보고서 지금이 그때임을 마음 아주 깊은 곳에서 깨달았을지도 몰라
결국 자신을 먹어달라던 리는 bones and all 이라 속삭이고
본성에 의해 허락되지 않는 사랑을 하는 그들에게
뼈도 남기지 않고 모든 부분을 먹어달라는 건 사랑의 끝이라 할 수 있는 걸까
자신이 상대에게 온전히 들어갈 수 있도록. 그 안에 자리할 수 있도록. bones and all. 그 모든 것을
마침내 말 그대로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이터들이 느끼는 외로움이란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2022)
멀티버스 영화의 백미. 과거 이 순간에 내가 다른 선택을 했었더라면
또 다른 우주의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를 실시간으로 경험하는 에블린을 보는 게 슬프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고
멀티버스 영화의 법칙을 잘 지키면서도 참 새로운 멀티버스 영화 같았다
우선 양자경은 말할 것도 없고 웨이먼드 역 키호이콴도 정말 잘한다 연기로 나를 울려 이 사람들이
특히 조이 역의 스테파니 수
조이일때도, 조부 타파키일때도 인물을 너무 잘 살리는 배우 같았다
특히 인상깊었던 부분은 에블린이 아버지에게 조이의 여자친구를 냅다 소개시킨 뒤 조이가 에블린과 다투는 씬에서
두 배우의 연기가 너무도 현실적이고 마음아프고 미치겠는 조이를 너무 잘 표현한 것 같았음
이 씬이 조부에게, 결국 조이에게 닿기 위해 싸우는 에블린과 교차되어 나와서 더 몰입되기도 하고,, 너무 좋았다
키호이콴은 거의 문나이트 오스카아이작처럼 한 테이크 안에서 상반된 연기차력쇼를 하는데 너무 잘하더라고
맞다 해리슘주니어도 너무 반갑고 웃겼다
여러 가지로 할 말이 많은데 일단 이 영화는 황당함이 80을 먹고 들어가는 영화인데
그 황당무계한 것들이 의미하는 바가 다 있어서 영화의 아이덴티티가 된다
챕스틱을 냅다 씹어먹는다거나, 적인 디어드리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야 한다거나 신발을 거꾸로 신는 것.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은 황당한 일도 다른 우주에서는 일어날 수 있는거야
이런 설정이 2부까지 이어져서 조부에게, 조이에게 닿기 위한 싸움에서도
에블린이 단순히 싸움을 선택하지 않고 여러 우주의 황당한 능력의 에블린을 이용해 상대를 다정함으로 이겨내는 전개가 참 좋았다
웨이먼드가 다정함이 우리의 삶을, 관계를 바로잡을 키워드임을 직접적으로 알려주긴 하지만
결국 에블린도 여러 우주의 자신을 겪으면서 이를 깨달았고
모든 것을, 모든 곳에서 한 번에 느낄 수 있다 해도 현재를 선택해 다정함을 무기로 살아가겠다고 결심한 결말이
참,, 좋았다,,
벼랑에서 떨어지는 돌맹이들을 보며 눈물을 삼키게 될 줄이야
이동진 파이아키아 영상 보면서 새로 알게 된 이 영화의 황당한 아이덴티티 또 있다
검정 베이글 사이 흰 구멍과 눈알스티커의 흰자 사이 검은 눈동자는 결국 닮아있지만 상반된다는 점이
베이글로 대표되는 인생의 허무주의와 눈알로 대표되는 다정함은 정반대에 위치해 있었다는 것
그냥 보면 황당한 설정들이 사실 고민을 많이 한 흔적이라는 게 보였다.
빌런인 조부가 단순히 에블린을 죽이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그녀와 함께 베이글에 들어가기 위해 찾으러 왔다는 점도 좋았다
세상을 끝장내고 어쩌고 하고 싶다기보다, 그냥 외로웠던거야
수천개의 우주에 존재하는 나를 모두 맛보고 나서 이런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이 세상에, 온 우주에 나밖에 없다는 외로움을 절실히 느끼면서 끝없이 외로워했겠지
그래서 에블린을 찾아나선 것이고
아무튼 이 영화는 황당함이란 장막을 온 사방에 쳐두었다
그 장막을 열어보면 영리한 설정들을 열심히 숨겨두었다는 점이 막 마음에 이 영화가 차오르게 만든다
다만 1부가 조금 간결했다면 더 즐길 수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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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이 인간다움을 만드는가?
* 본 포스팅은 많은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영화를 감상하신 후에 읽으시기를 권합니다.
셰이프 오브 워터, 포스터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는 어른들의 동화라는 소문대로 정말 아름다운 우화였다. 회화적인 장면들이 인상적이었다. 물속에서 끌어안은 서로 다른 종의 연인의 모습은 그야말로 환상적. 음악 선정도 적절하다. 아름답다.
인간과 비인간의 결합에 대해 다룬 영화는 많았지만, 이 영화는 뭔가 특별하다. 기존의 작품들이 지극히 인간중심적이었다면, 이 영화는 그러한 '인간 중심'의 사고 바깥을 들여다보게 해 준다.
작품 속의 '어인(수륙양용(?)이니 양서인이라고 불러야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편의상 어인이라고 부르겠음.)'은 우리와 다르다. 이질적이다. 그에게는 아가미와 비늘과 지느러미가 있고, 두 눈은 물고기의 그것처럼 크고 둥그며, 사람과는 달리 말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인간의 감정과 언어를 이해하며, 그들의 문화를 즐길 줄 안다. 엘레이자와 교류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관객은 혼란에 빠지게 될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필자는 그랬다. 영화 초반까지만해도 끊임없이 한 물음이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다. '이 사랑을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이들의 사랑을 응원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
우리는 지금껏 많은 비인간과 인간의 사랑에 대한 서사를 경험해 왔지만 돌이켜보면 이토록 이질적인, 그러니까, 인간의 외모, 인간의 유머, 인간의 문화와 동떨어진 존재와의 결합은 그다지 빈번하게 목격하지 못한 것 같다. 미녀와 야수의 야수도 결국은 언어를 구사하고 옷을 입는 존재였고(사실 원래부터 인간이었으니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슈렉은 인간들이 혐오하는 오거이긴 했지만 어쨌든 그의 사정 역시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즉, 인간인 관객이 보기에 그다지 큰 거부감이 없도록 만들어진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는 커녕 기괴한 꺽꺽거리는 소리만 내는 이 생물은 인간과 너무나 다르다. 때론 사납게 으르렁거리고 친구(?)의 애완 고양이를 잡아먹는 그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과연 이 존재를 인간과 같은 선상에서 보아도 좋을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하지만 엘레이자의 절규에 찬 대사는 이러한 고민에 대한 훌륭한 해답을 제시한다.
'나도 그 사람처럼 입을 뻥긋거리고 소릴 못 내요. 그럼 나도 괴물이에요?'
그녀의 이러한 발언은 '무엇이 인간을 정의하는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답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스트릭랜드는 인간을 '신에 가장 가까운 존재'로 정의 내린다. 그리고 어인을 인간과 구별되는 야만적인 짐승으로 치부한다. 이러한 구분은 우리에게 그다지 낯선 것이 아니다. 이러한 서열화 혹은 자기우열화는 우리 인간 내부에서도 다시금 되풀이 되기 때문이다. 그의 세계에서는 흑인보다는 백인이, 여성보다는 남성이, 성소수자보다는 성다수자가 우월하고, 더 '신의 모습에 가까우며' 따라서 더 '완벽한 존재'이다. 그에게 '인간답다'는 것은 요약하자면, '서구 가부장 사회의 백인이자 헤테로 섹슈얼인 남성답다'라는 것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서열화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들 사이에서도 끊임없이 우열을 가린다. 그 악독한 스트릭랜드도 결국 호이트 장군의 아래에 있다. 호이트 장군의 위에 또 누가 있을지 모를 일이다. 누군가를 끝 없이 자신의 아래에 놓고, 위로는 끊임없이 '더 인간다운', '더 완전한', '더 그럴싸한' 삶을 갈구하는 그들(스트릭랜드와 호이트 장군을 비롯한 많은 인물들)의 삶은 강박적이고 피로하며, 속에서부터 썩어들어있다. 결국 썩어버린 스트릭랜드의 두 손가락처럼.
반면 엘레이자와 그 친구들은 앞선 인물들과는 다른 시각에서 '인간'(혹은 인간에 비견되는 지적 생명체)을 바라본다. 엘레이자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자일스는 늙은 게이이며, 젤다는 흑인 여성이며,드미트리는 냉전시대의 러시아인 스파이이자 과학자다. 이들은 모두 냉전시대 미국 사회에서의 사회적 약자로, 스트릭랜드의 정의에 따르자면 열등하거나 배척되어야 할 대상들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러한 '불완전한 존재'로 정의될 수 있을지도 모를 이들이야말로, 우리가 '인간성 혹은 인간애(humanity)'라고 부를 만한 어떤 관념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엘레이자와 자일스의 나이와 성별을 초월한 우정을 보라. 그리고 엘레이자와 젤다의 끈끈한 유대감과 의리를, 어인을 살리고자 했던 드미트리의 노력을 보라. 이들은 불합리한 권력에 저항하는 동시에, 선뜻 타인을 위해 손을 내밀고 그를 돕기 위해 애를 쓴다. 그것이 가장 '인간다운' 일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언어와 감정을 이해하는' 어인이 이들에게 하나의 아름답고 경외로운 지적 생명체이자,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시각에서 비롯된다. 어인이 처한 상황은 그들이 처한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엘레이자와 어인의 결합은 이들에게 그다지 꺼림칙한 일이 아니다. 두 존재는 정신적인 교감을 하는 것에서 나아가 육체적인 결합까지 이루어내지만, 그것은 두 지적 생명체가 서로의 고독을 이해하고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장면이다. 엘레이자와 어인 본인은 물론, 드미트리도, 젤다도, 자일스도 이들의 사랑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편협한 사고에서 벗어나 인간 그 바깥으로 눈을 돌리면, 우리는 비로소 인간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3. 이 작품은 어인과 여인의 사랑을 다룬 우화를 통해 인간 군상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러나 아름답게 그려냈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인물들의 선악구도가 매우 명확한 편인데, 극 중 스트릭랜드는 지독하게도 악랄하면서도 현실에 최소한 하나쯤은 있음직한 악역이라는 점에서 소름이 돋았다. 화장실에서 손 안 씻고 나오는 데다 부하 여직원에게 추악한 시선을 던지는 남자, 다른 인종, 성별, 성소수자 등을 열등하게 여기는 편협한 우월주의자, 멀쩡하게 평범한 가정에서 잘 살고 있으면서 더 나은 삶을 끊임없이 갈구하는 허영덩어리... 작품 속에서는 소련과 미국이 살벌하게 경쟁하는 냉전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글쎄, 오늘날 우리나라의 사정도 크게 달라보이지는 않는다. 세계 어느 곳을 가도 이런 사람은 꼭 있으니까.
4. 어인이 자일스의 고양이를 잡아먹은 장면이 정말 충격적이었다. 필자는 자일스가 충격에 휩싸여 어인을 비난할 줄 알았다. 그러나 자일스의 태도는 이 얼마나 관용적이었던가. '그는 야생이니 고양이를 먹은 건 어쩔 수 없어.'라고 이야기하는 자일스의 모습은 작품이 추구하는 '인간성'에 대한 관념을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그는 엘레이자와 마찬가지로 문화적인 우월성을 가지지 않고 어인을 대한다. 그에게 어인은 좀 다른 문화를 가진 대상일 뿐이다. 그는 어인을 용서했고, 어인은 그에게 사죄한다. 진정한, 성숙한 문화와 문화 간의 교류다.
이 장면은 언젠가 시끄러웠던 한 네덜란드 선수의 '개고기를 먹는 한국인들'에 관한 발언과 비교된다. 자일스에 비하면, 문화적 차이에서 비롯된 다름을 '틀림'으로 섣불리 단정짓고 비난했던 그 선수의 태도는 이 얼마나 편협하고 오만한가. (필자는 개고기를 먹지 않지만, 개고기 문화 자체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데에 동의한다. 비판받아야 할 것은 비윤리적인 도축과 유통 과정이지, 문화 그 자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5. 엘레이자는 정말 사람이었을까? 강에서 발견되었다던 그녀의 목에 있던 아가미같은 흉터는 극의 후반부에서 정말 아가미로 변한다. 그녀의 조상 중에는 어인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아니면 단순히 어인의 전지적인(??) 능력으로 바다 생활에 적합하게 변하게 된 걸까? 오픈 엔딩이니 상상의 여지가 있어 좋다. 확실한 것은, 그 둘이 행복했으리라는 사실이다. 그 둘은 더 이상은 고독하지 않을 것이다.
6. 생각의 여지를 많이 남겨주는 영화를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간만에 정말 좋은 영화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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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이 만들어낸 가장 마법적인 공동체의 신화
안토니아스 라인 Antonia's Line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안토니아(빌레케 반 아믈로이)는 어머니(도라 반 더 그로엔)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온다. '목소리 큰 남자들이 조용한 여자들을 짓밟는' 한적한 마을은 안토니아를 반기지 않는다. 강인하고 주체적인 안토니아는 딸 다니엘(엘스 도터만스)과 함께 땅을 일구고 공동체를 꾸려나간다. 안토니아는 너른 품으로 마을의 소외된 인물들을 끌어안는다. 안토니아의 긴 식탁은 풍요와 사랑으로 가득 찬다.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은 안토니아부터 사라까지 4세대에 걸친 모계의 일대기를 그린다. 목가적인 농촌의 풍경을 바탕으로 펼쳐지는 이들의 삶은 계절의 변화처럼 순환하며 계속해서 이어진다.
식탁의 공동체
이들의 주요 생계수단은 땅, 즉 농사다. 안토니아의 곁에 모여든 사람들은 자연스레 농사일을 함께 하게 된다. 처음에 농사일을 도울 사람은 딸 다니엘뿐이었으나 루니 립이나 디디와 같은 사람들이 함께하기 시작하며 일손은 점점 늘어났다.
안토니아의 사람들이 모이는 구심점은 단연 식탁이다. 넓은 마당에 놓인 기다란 식탁은 마음 놓고 먹고 마시며 웃고 이야기할 수 있는 휴식처이다. 식탁을 중심으로 한 이들의 관계는 혈연관계에서 벗어난 진정한 의미의 '식구'이다. 식탁 중심의 공동체 안에서 구성원들은 각자의 방향으로 성장한다. 이들을 살찌우는 것은 테이블 위의 음식이 아니라 안토니아를 기반으로 다져진 단단한 신뢰다. 누군가 갑작스레 이 식탁의 손님으로 찾아오더라도 문제는 없다. 자리에 숟가락 하나만 더 놓으면 그만이다.
안토니아는 마치 건국 신화의 주인공처럼 느껴진다. 안토니아의 정착기는 황무지를 일구어 새로운 마을을 만드는 것과 다름없다. 안토니아를 주축으로 한 공동체는 기존의 남성 중심적 질서의 흐름을 바꿔놓는다. 어떤 여성도 소나 돼지처럼 대우받지 않고, 조금 느리거나 튄다는 이유로 돌을 맞지 않는다. 안정과 풍요 속에서 자라나는 사람들의 바탕에는 안토니아라는 굳건한 땅과 식탁의 공동체가 있다.
경계의 리더십
안토니아는 힘과 폭력에 의한 굴복이 아니라 받아들임의 방식으로 사람들을 모은다. 안토니아의 방식은 기존의 남성적 방식과도 다르고 흔히 여성에게 기대하는 '헌신적인 모성'의 성격과도 다르다. 안토니아는 무리의 우두머리로서 책임을 지고 구성원들을 이끌어나간다. 그와 동시에 이들의 의사를 존중한다.
안토니아의 리더십은 경계를 지어주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어떤 관계에서든 협상의 태도를 보인다. 이를테면 결혼을 청하는 농부 바스가 찾아왔을 때의 대화가 그렇다. 일단 그의 요구를 듣는다. 아내와 엄마를 원하는 바스의 제안을 안토니아는 단호히 거절한다. 남편도, 아들도 필요 없다고 딱 잘라 이야기한다. 다만 남자가 해줄 수 있는 일을 도와주면 식사에 초대하겠다고 제안한다. 상대가 원하는 것과 자신이 원하는 것을 분명히 파악한 뒤, 자신이 줄 수 있는 만큼의 것을 제시한다. '너는 여기까지 올 수 있고 나는 여기까지 내줄 수 있다.'는 태도다. 서로의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걸로 그만인 것이다. 힘으로 제압하거나 상대를 깔보지 않으며 서로의 의사를 존중하는 세련된 리더십을 보여준다.
폭력적인 남성성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피트에 맞서는 시퀀스도 안토니아의 리더십과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중요한 대목이다. 안토니아는 총을 가지고 가지만 그 용도는 위협에 그친다. 총구는 시종일관 피트를 겨누고 있지만 그에게 발사되지는 않는다. 안토니아는 피트에게 경계를 정해줌으로써 그를 처벌한다. 마을을 떠날 것, 다시는 눈에 띄지 말 것. 다만 여기에 협상의 여지는 없다. 자신의 무리에 위해를 가한 자에게 내리는 심판에 협상은 필요 없다. 총구를 단단히 겨눈 팔과 저주를 퍼붓는 단호한 얼굴 뒤로 마을 남자들이 서 있는 장면은 안토니아가 이미 마을에서 리더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신이다.
신화와 창조성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아들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익숙하다. 단순히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딸의 이야기를 한다고 특별하다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여성들에게 새로운 신화를 선물한다. 그리고 그 신화의 바탕에는 여성들의 고유한 능력인 임신과 출산이 있다. 4대에 걸쳐 펼쳐지는 모계의 이야기가 가능한 것은 여성이 지닌 창조성 덕분이다.
다니엘이 딸 테레스를 가지게 되는 경위를 생각해보자. 다니엘은 아이를 원했지만, 남편과 결혼은 원치 않았다. 다니엘과 안토니아는 아이를 얻기로 한다. 여기서 남자의 역할은 한 번의 성관계를 함께 하는 것이 전부다. 그 남자가 누구인지 우리는 알 필요도 없고, 남자 역시 자신의 아이가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없다. 딸 테레스는 다니엘의 딸이 분명하다. 이 모든 과정은 자연스럽고 산뜻하게 그려진다. 감독은 중요하지 않은 아버지의 역할보다 생동감 넘치는 여성들의 모습에 주목한다.
이들의 창조력은 비단 임신과 출산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다니엘은 그림으로, 테레스는 음악과 수학으로, 사라는 글로써 창조력을 뿜어낸다. 이들의 삶에는 폭발적인 창조력이 꿈틀거리고 있고 계속해서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안토니아의 죽음이 '끝'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이야기는 자손들에 의해 불멸할 것이다. 안토니아 개인은 그저 필멸의 생을 지닌 인간이지만, 그가 창조한 자손과 질서와 공동체가 이어져 불멸할 것이다. 필멸하되 불멸하는 인간의 기나긴 흐름이 담겨있다. <안토니아스 라인>의 신화적인 면은 이 불멸성에서 드러난다.
환상의 이미지
작품 속에서 다니엘과 사라는 종종 환상의 이미지를 마주한다. 안토니아의 어머니 일레곤다의 장례식에서 다니엘은 관에서 일어나 흥겹게 노래 부르는 할머니의 환상을 본다. 예수 조각은 고개를 움직이고 천사 동상은 날개로 신부를 내리친다. 라라에게 사랑에 빠지는 순간 다니엘의 눈앞에 펼쳐지는 이미지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다. 교회의 교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서도 다니엘은 이미 절대자의 허락이라도 받은 듯 당당하고 유쾌하다. 그렇기에 교회의 세속적인 신부가 아무리 다니엘과 안토니아를 힐난해도 자리를 박차고 나올 수 있다. 다니엘은 종교와 신화의 위에서 자유롭다.
다니엘이 미술적인 환상을 본다면 사라의 환상은 조금 다르다. 안토니아의 증손녀인 사라가 가족의 구심점인 식탁을 보며 죽은 이들의 환상을 보는 신은 이 작품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일레곤다, 크룩 핑거, 미친 마돈나와 신부, 레타, 디디의 남자 형제들, 루니 립은 사라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식탁 옆에서는 젊은 모습의 안토니아와 바스가 춤을 춘다. 감독은 높은 곳에서 모든 것을 아우르며 지켜보는 사라의 시선을 따라 하이앵글의 풀숏으로 이 장면을 담아낸다.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이 꿈같은 장면은 안토니아의 가족을 거쳐간 죽은 이들을 다시 식탁으로 소환한다. 실제로 사라가 그들을 아는지 상관없다. 안토니아의 삶의 궤적은 사라에게도 각인되어 이어진다. 마당에서 펼쳐진 환상적 이미지는 안토니아의 죽음으로 이어지며 작품의 마지막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우리는 영화의 내레이터이기도 한 사라가 모든 것을 지켜보며 훗날 자신의 언어로 표현해내리라는 것을 안다. 안토니아의 마지막 아침에서 시작해 주마등 같은 그의 젊은 날들은 사라를 통해 계속해서 이야기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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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채로운 모성애의 면면을 들춰보는 영화
로스트 도터
감독 매기 질렌할
출연 올리비아 콜맨, 다코타 존슨, 제시 버클리
※씨네랩 크리에이터로 초청받아 영화제 참석해 관람한 작품입니다.
개인 평점 : ⬛️⬛️⬛️⬜️ (3.5 / 5)
*7월 14일 개봉 예정작
로스트 도터 리뷰 3줄 요약
1. 다채로운 모성애의 면면을 들춰보는 영화
2. 극 중 인물들이 느끼는 불안이 영화 내내 깔려있다.
3. 서사보다는 인물들의 감정과 분위기로 메시지를 전하는 영화
+ 뛰어난 여배우들이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연기력을 폭발시키는 영화
+ 가정적이고 아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조금 색다른 정서가 낯설 수 있음.
<로스트 도터> 영화 포스터 [출처: 씨네랩]
매기 질렌할의 감독 데뷔작
배우 매기 질렌할의 감독 데뷔작으로 매기 질렌할은 이름부터 짐작할 수 있듯 제이크 질렌할의 누나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나이트>에 레이첼 도스로 출연한 것이 유명하다.
<로스트 도터>는 이탈리아 작가인 엘레나 페란테의 소설 <잃어버린 사랑>이 원작이며 감독인 매기 질렌할이 각본(각색)과 감독을 맡은 작품이다.
<제31회 고담어워드 수상> (작품, 신인감독, 각본, 주연상) 매기 질렌할 감독 [출처: 네이버 영화]
매기 질렌할은 첫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베니스 국제 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했고, 그 외에도 전 세계 37관왕을 달성했다.
최근 국내에서도 그렇고 해외에서도 그렇고 배우들이 영화를 연출하는 경우를 종종 보곤 하는데, 배우들이 작품을 연출할 경우 조금 더 개성 있는 작품들이 많이 나오는 것 같아서 즐겨보는 편이다. 그런 의미에서 곧 개봉하는 이정재 감독의 영화 <헌트>도 기대 중이다.
<로스트 도터>는 배우와 감독을 보면 알겠지만 연출, 각본, 촬영, 주연까지 모두 여성으로 구성된 트리플 F등급 영화이다. (트리플 F등급: 감독, 작가, 주요 캐릭터가 모두 여성인 작품) 또한 스토리 역시 원작보다 여성에 대한 다양한 시선과 서사를 담아내었다고 생각되는데, 아직 원작을 읽어보진 못했지만 원작 리뷰와 영화 스토리를 비교해본 결과 영화가 조금 더 모성애에 대한 일반적인 시선을 비트는 일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로스트 도터> 스틸컷 젊은 레다(제시 버클리)와 현재의 레다(올리비아 콜먼) [출처: 네이버 영화, 씨네랩]
화려한 배우진의 밀도 높은 연기
우선 주연부터 2019년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빛나는 올리비아 콜먼이 주인공 레다 역할을 맡았다. 그녀는 아카데미, 골든글로브, 에미상 등 여러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을 만큼 뛰어난 연기력으로 유명하고 <로스트 도터>에서도 아주 수준 높은 연기를 선보인다.
나는 오히려 그녀보다는 젊은 레나 역을 연기한 배우 제시 버클리에게 더 눈길이 갔는데, 처음 보는 배우였음에도 젊은 시절 레나의 복잡한 감정들을 몹시 잘 담아내서 인상적이었다. 특히 가족을 상대로 세상 귀찮은 표정과 짜증을 부리던 모습과 원하는 삶을 살며 환하게 웃는 그녀의 표정은 이따금씩 아이들을 바라보며 짓곤 하는 미소와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들 외에도 다코타 존슨이나, 에드 해리스 등 유명 배우들이 대거 등장한다. 물론 위의 2명이 이야기를 대부분 끌고 가는 역할이긴 하지만 조연부터 아역까지 뛰어난 연기력을 보여주는 영화였다. 참고로 극 중에서 젊은 레다와 함께 등장하는 하디 교수는 감독인 매기 질렌할의 실제 남편인 피터 사스가드이다.
진한 스킨십을 하는 장면도 있어서 알고 나니 신기했던 캐스팅이었다.
<로스트 도터> 스틸컷 왼쪽은 배우 피터 사스가드 [출처: 네이버 영화, 씨네랩]
<로스트 도터> 스틸컷 [출처: 씨네랩]
같지만 다른 두 엄마의 이야기
모성애를 다루는 영화다 보니 여러 모습의 엄마들이 등장한다.
주인공인 레다는 엄마를 졸업하고 혼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느낌의 인물이고, 젊은 엄마인 니나는 한참 아이와 가정 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과거의 레다는 지금의 모습과는 또 다른 엄마를 보여준다.
틈틈이 등장하는 니나의 친척 컬리 역시 새롭게 엄마가 되는 인물이다.
원작에서는 주인공인 레다의 엄마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 있다고 하니 원작을 읽어보면 더 풍부한 이야기를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다양한 엄마들의 모습은 엄마라는 존재가 느낄 수 있는 다양한 감정을 서로 다른 상황과 인물을 통해서 보여준다. 그 모든 복합적인 감정과 선택이 모두 모성애라는 단어로 귀결되면서 우리가 평소 관습적으로 생각하는 모성애의 모습과는 다른 더 풍부하고 복합적인 엄마의 모습을 느껴볼 수 있는 영화였다.
메인 예고편
<로스트 도터> 메인 예고편 [출처: 그린나래미디어 유튜브]
※ 아래는 주관적인 감상평과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조금 이해하기 어려웠다.
영화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로 보러 갔고, 영화에서 전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한 채로 영화관을 나왔다.
그러고 나서 영화 포스터에 적힌 문장을 보면서 영화를 복기해보니 영화가 조금씩 읽혔던 것 같다.
“아름답지 않고 희생하지 않는 엄마에 대하여”
극 중에서 이 메시지를 가장 강력하게 전달하는 인물은 젊은 시절의 레다이다.
레다는 번역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꽤 커리어를 잘 쌓아가고 있었는데, 그런 레다에게 두 명의 아이는 계속 돌봐줘야 하는 불편함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가정을 떠나서 일과 자유를 선택한다.
자신의 실력을 알아봐 주는 유명 교수와 사랑에 빠져 가족을 떠난다.
아이들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녀가 아이를 대하는 모습에서 조금은 불편함이 있었다.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을 받으면서 큰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크게 의지하고 많은 관심을 갈구한다. 물론 이런 부분이 부모에게 때때로 귀찮고 피곤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아이가 엄마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레다를 때리는 모습을 보고 <금쪽같은 내 새끼>나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가 떠올랐다.
가끔 문제 아이들의 행동의 원인이 부모의 무관심에서 비롯된 경우가 있는데 아이가 엄마가 싫어하는 행동으로 부모의 관심을 끌고 있는 모습이 너무 현실적이라서 약간은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영화 속에서 레다의 첫째 아이 비앙카는 마치 사고로 죽은 것처럼 묘사된다. 이는 레다에게 상처받은 비앙카의 모습을 표현한 것처럼 느껴지는데, 어쩌면 레다와 비앙카의 관계가 끊어졌던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는 물건이 있으니 바로 인형이다.
처음에는 니나의 딸인 엘레나가 아끼는 인형이 중요한 물건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후 이 인형을 레다가 충동적으로 훔치게 되는 것이 주요한 사건인데, 이는 약간의 죄책감과 자신이 놓았던 모성에 대한 집착처럼 느껴졌다. 이후 젊은 레다가 첫째 비앙카에게 자신이 아끼던 인형 미니 마마를 물려주는 장면에서 인형이 한번 더 등장하게 되는데, 여기서 인형은 엄마에게서 아이에게까지 이어지는 사랑의 되물림처럼 등장하지만 곧 레다의 무관심으로 인한 관계의 단절을 의미하는 물건이 된다.
레다는 아이와 놀아주는 대신 자신이 아끼는 인형과 놀고 있으라는 말로 비앙카에게 소홀하게 대하고 화가 난 비앙카는 레다의 인형인 미니 마마에게 낙서하고 괴롭히는 것으로 화를 표출한다.
하지만 레다는 자신이 준 인형을 아끼지 않는 비앙카에게 오히려 화를 내며 나무라다가 이럴 거면 버리자면서 밖으로 던져버리고 인형은 산산이 부서진다.
이 장면은 자신보다 인형을 더 아끼는 듯한 모습으로 비앙카의 산산이 부서지는 마음을 대변함과 동시에 아이에게 실망하고 완전히 부서져버린 레다의 모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에 피를 흘리는 레다가 해변에 누워서 두 딸과 통화하는 장면을 보면 두 아이는 어엿한 어른으로 잘 자랐고, 서로 안부를 나누고 대화하는 여느 가족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로서 모성이랑 가족이라는 관계 역시 한순간에 마법처럼 생기는 것이 아닌 여러 시간과 많은 노력을 통해 형성되는 다른 관계와 다르지 않으며, 우리가 가족 간의 사랑을 무조건적으로 강제할 수는 없다는, 모두가 힘든 현실과 육아 속에서 부담을 느끼면서 무한한 사랑을 품어낼 수는 없다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끝으로 뛰어난 연기력과 함께 모성이라는 단어 속에 가려진 엄마라는 존재가 가지는 다양한 감정을 엿보고 싶다면 추천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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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급 빌런들의 어벤져스 데뷔기 / 썬더볼츠 / 볼만한데 호불호도 있음 / 어벤져스: 인사이드 아웃 버전인줄..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썬더볼츠"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이 엔드크레딧 전에 1개, 끝나고 1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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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84제곱미터> 공식 예고편
84제곱미터 아파트로 내 집 마련에 성공한 영끌족 우성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층간소음에 시달리며 벌어지는 예측불허 스릴러 넷플릭스 영화 《84제곱미터》 7월 18일, 오직 넷플릭스에서 #넷플릭스 #84제곱미터 #WalltoW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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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킬링 카인드> 메인 예고편
줄거리
베트남 갱단에 의해 잔혹하게 부모를 잃은 ‘안나’(매기 큐)는
암살자 ‘무디’(사무엘 L. 잭슨)에게 거둬져 최고의 킬러로 길러진다.
어느날, ‘안나’는 세상의 유일한 가족 ‘무디’의 죽음을 목격하게 되고
그의 죽음에 거대한 세력의 배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모든 것을 잃은 ‘안나’는 피의 복수를 결심하는데…
친절하고 잔혹하게
받은 만큼 돌려준다!
<존 윅>을 잇는 원히트 킬링 액션을 확인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