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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귀농에 대한 영화가 아닙니다, <리틀 포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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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틀 포레스트 (Little forest, 2018)
    제작 : 한국, 드라마 │ 감독 : 임순례
    출연 : 김태리(혜원), 류준열(재하), 진기주(은숙), 문소리(혜원母) 외
    등급 : 전체관람가 │ 러닝타임 : 103분

     

     

     

     

    만인의 힐링 영화가 될 줄 알았지

     

    리틀 포레스트.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이 영화가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 힐링 영화로 자리 잡게 되리란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소소하고 슴슴한 맛의 이 영화를, 그래서 나도 무려 다섯 번이나 보았다. 언제 어느 부분에서 틀어도, 또는 배경으로 쭉 틀어놓아도, 모든 장면이 위안이 되는 그런 흔치 않은 영화이기에.       

       

    그러나 나는 이 영화를 다섯 번이나 본 사람으로서 이 영화가 결코 달콤한 영화라고만은 생각하지 않았다. 너무도 어여쁜 시골의 사계절과 요리 장면, 세 청춘의 웃음이 끊이지 않는 관계 등이 주를 이루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 청춘들이 결코 시골에 와서 아무 걱정 없이 지내고 있는 것만은 아님을 느껴서다. 그래서인지 어딘가에서 이 영화를 두고 ‘귀농에 대해 미화하는 영화’라고 부르는 것이 영 탐탁지 않았다. 그 말은 오히려 이 영화를 제대로 보지 못했거나, 보았음에도 영화의 취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에 가까워 보였기 때문에.

        

     

     

     

    그보단 청춘의 성장통을 그리는 이야기

     

      

     

    주인공 ‘혜원’만 보더라도 그렇다. 임용고시에 실패 후 고향인 시골마을로 내려온 혜원은 도시를 떠나왔다고 해서 마냥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다. 얼마간은 정말 순수한 힐링과 도피가 되었을지 모르지만, 곧 통장의 잔고는 바닥을 드러내고 재하의 말대로 ‘그런다고 문제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혜원은 시골에 정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각을 정리하러 내려온 셈이었다. 자신이 잘하고 있는 건지, 행복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불안해하며 자신을 정립하기 위해서.          

     

     

     

    ‘재하’도 마찬가지다. 도시에서 회사생활을 하며 상사의 폭언을 견디지 못했던 재하도 도피하듯 시골로 내려왔지만, 그렇다고 시골에 와서 마냥 이것저것 뚝딱 농사를 성공했던 것은 아닌 걸로 보인다. 그는 태풍으로 사과농사를 망치는 것이 얼마나 익숙한지 아주 덤덤하게 낙과를 정리하는 모습을 보인다. 서울에서 만난 여자 친구와도 시골로 오면서 이별해야 했다.           

     

     

     

    시골에만 붙박이처럼 있었던 은숙의 삶도 만만치 않다. 어르신들이 주를 이루는 은행에서 그녀는 여름이면 공짜로 믹스커피를 타다 바쳐야 하고, 아무리 작은 단위의 은행이라도 회식자리에서 부장을 위해 맘에도 없는 탬버린을 쳐야하는 비애는 똑같다.      

         

    과연 이들의 어떤 지점이, 귀농을 미화한다는 걸까. 이 영화는 시골의 아름다운 사계절을 보여줌과 동시에 세 청춘의 쓰라린 성장통도 훌륭히 보여주고 있는 것을. 단지, 군데군데 자연이 내뿜는 푸르르고 여유로운 장면들이 배치되어 있어 그들의 성장통이 극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뿐이다.          

     

    이런 이야기 방식을 띈 작품들은 많다. 이를테면 <라라랜드>. <라라랜드>는 유쾌 발랄한 뮤지컬 형태를 띠고 있지만 결국 서로의 꿈을 위해 사랑을 포기했던 연인을 노래하는, 그러니까 사실은 ‘슬픈’ 영화가 아니었는가.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도 마찬가지다. 막상 읽어보면 “청춘은 원래 아픈 거니까 쭉 아파라”라고 말하는 책이 아닌데도, 어쩐지 왜곡되는 경우가 많다.           

     

    <리틀 포레스트>도 그런 외형을 띈 영화가 아닌가 싶다. 혜원이 형형색색 아름다운 자연의 식재료로 요리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고 해서, 시골의 풍부한 사계절을 뛰어난 영상미로 담아냈다고 해서, 이 영화가 시골생활을 가볍게 그리는 영화는 아닌데...., 들여다보면 제목 그대로 이 영화는 리틀 포레스트, 즉 청춘남녀들이 자신만의 작은 숲을 일구기 위해 자신의 삶을 아프게 고민하고 성찰하는 이야기에 가까운데, 외피만 놓고 오해하는 경우가 생겼던 게 아닐까.     

     

     

     

     

     

    작은 숲을 가꾸기 위하여

     

     

    물론 나는 이 영화를 오해하는 많은 이들처럼, 혜원이 요리하는 장면을 가장 좋아한다. 얇은 튀김옷을 입힌 아카시아 꽃과, 무지개색으로 쪄낸 시루떡, 보기만 해도 달큼해지는 밤 조림, 꼬들꼬들 말라가는 주홍색 곶감을 보면서 정말 많이도 시각적 힐링을 했더랬다. 그렇지만 그런 요리를 하는 혜원에게 아픔이 있음 또한, 영화를 볼 때마다 여지없이 느낀다. 그러면서 나는 늘 혜원의 행복을, 그리고 혜원에 투영된 나의 행복을 빌었다.           

    영화는 혜원과 재하, 은숙 세 사람이 그래서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밝히지 않는다. 다만, 주인공 혜원이 ‘자신의 작은 숲’을 찾았음을 암시하는 미소로 관객들을 안심시키며 끝이 난다. 영화가 그렇게 시시하게 끝났던 것조차도, 어쩌면 혜원이 찾은 숲이 ‘시골로의 정착’이냐 ‘도시로의 회귀’냐 하는 형식적인 문제가 아님을 시사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나는 그래서 그 시시한 결말과, 처음부터 끝까지 소소하고 슴슴한 맛의 이 영화가 참 좋았더랬다.          

     

     

     

    청춘과 인생은 자연의 섭리를 많이 닮아있는 듯 싶다. 그래서인지 리틀 포레스트에는 ‘인생’에 대입해도 아무런 위화감이 없는 좋은 대사들도 많다. 긴 요리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어린 혜원에게 혜원의 엄마가 하는 말 “기다려, 기다릴 줄 알아야 최고로 맛있는 음식을 맛볼 수 있어”라던지, 재하의 “겨울에 심은 양파는 봄에 심은 양파보다 몇 배나 달고 단단하다”라는 말이라던지. 기다림과 긴 긴 겨울에 대해서 자연은 늘 그렇게 단단한 통찰을 준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귀농을 해야겠다는 생각 같은 건 해본 적 없지만, 때때로 내 숲을 가꾸는 일이 힘들게 느껴질 때 다시금 이 영화를 찾는다. 혜원이 힘들 때 고향을 찾아가 위로받았던 것처럼.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그렇게 기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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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게 호러영화야 서부영화야
  • 각자의 머릿속에 믿고 보는 배우가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는 김윤석 배우가 그에 속한다. <추격자>부터 <암수살인>까지 그 중후한 목소리가 너무 멋있다. 그리고 연기를 조금만 잘하나? 북한 사람부터 연변, 또 도박꾼에 액션 영화까지 가지각색으로 잘하니 그야말로 만능 배우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김윤석 배우는 잘생겼지만, 할리우드에 마찬가지의 맥락을 가진 배우가 있으니 그는 베네딕트 컴버배치라고 생각한다. 역시나 액션부터 멜로, 탐정까지 연기를 고루 잘하니 과연 할리우드의 김윤석이 어색하지 않다.

     

    이런 그가 <모리타니안>에 이어 신작을 발표했다. 내가 좋아하는 커스틴 더스트와 제시 플레몬스와 합작해 서부극 영화에 출연했다. 올해만 해도 <더 스파이>에 <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까지 개봉 예정이거나 이미 했었어서 그야말로 소처럼 일한 셈이다. 내년에 <닥터 스트레인지 인 멀티버스 온 매드니스>까지 나온다고 한다. 아마 그의 팬이라면 아마 눈호강 대잔치가 열리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아. 특히 이 작품에 대해 쓰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 4편의 개봉 예정 및 이미 상영한 작품 중 가장 탁월한 것이 될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마 아카데미나 칸의 남우주연상 후보에도 오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김윤석 배우의 필모그래피로 치면 <추격자>와도 같은, 그야말로 커리어하이를 기록한 작품이 된 것이다. 12월 1일부터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 하니 모바일 환경에서 볼 수 있는 분들의 시청을 권한다.

     

    1) 진짜 호러영화인가요?

    제목에 호러라고 적긴 했지만 사실 서부극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감독 제인 캠피온이 그동안 여성 서사 중심의 영화를 만들어와 이 작품도 그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근데 이 작품엔 그런 것 없다. 완전 상마초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또 영화라는 문화예술 매개체의 근본은 서부극 아닌가? '서부극'과 '마초'의 이미지로 연상되는 플롯이 어느 정도는 딱 알맞게 전개된다. 그리고, 후반부에서 완벽하게 전복된다.

     

    2) 난이도가 있는 영화인가요?

    난 난이도가 있는 편이라 생각한다. 전반부에 필의 동생 조지와 로즈가 결혼한다. 로즈에게는 어쩐지 병약한 아들이 있다. 피터다. 피터는 병약한 존재다. 필은 미망인이었던 로즈뿐만 아니라 피터까지 별로 안 좋아한다. 잘 씻지도, 꾸미지도 않는 필. 1)에서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나르시스트인 필에게 여성이 끼어들 틈이란 없다. 근데 이런 성격이 나머지 세 인물과 잘 맞냐? 아니다. 이 인물의 부정교합에서 오는 성격 안 맞음이 영화의 서스펜스를 좌지우지한다. 근데 이건 어디까지나 시네마에 익숙한 사람들이 봤을 때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말해보자면 영화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이라면 졸릴 수도 있다. 나는 그래서 극장보다 태블릿 PC로 보는 쪽을 더 추천한다. 또 여러 떡밥을 점점 쫓아가며 하나하나 해소하는 작품이기 때문에 놓치면 이해가 어려울 수도 있다. 이 점에서 재생 바를 옮겼다 내렸다 할 수 있으니 극장보다 집에서 보는 게 이해가 더 될 거라고 생각한다.

     

    3) 다른 배우들의 연기는 어떤가요? 

    훌륭하다. 일단 제시 플레먼스와 커스틴 던스트가 부부 역할로 나오는데, 실제로도 이 둘은 연인이라고 한다. 여기서 오는 리얼리티(?) 때문인지 형과 부인 사이에서 영리하게 줄 타는 동생 조지의 모습을 잘 살렸다. 또 커스틴 던스트도 뛰어난 연기를 펼쳤다. 극에서 필이 대놓고 로즈를 괴롭히지는 않는다. 근데 점점 로즈의 정신과 신체가 피폐해져 가는데 이를 보여주는 호연을 펼친다. 완전히 상상력에 의존한 고통 내면 연기인데, 칸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값을 한다. 또 아들 피터 역을 맡은 배우도 후반부에서 내용이 뒤집히는데 주요한 키포인트가 되는 역할을 한다. 이 네 명의 기본적인 특색 외에 네 가지 인물이 각자 던지는 떡밥에서 온 부조화가 극의 서스펜스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이를 구현할 만큼 치열한 기싸움을 연출한다.

     

    4) 어떤 영화로 정의할 수 있을까요?

    나는 혐오에 관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필은 과부인 로즈와 그의 아들 피터를 혐오하는 인물이다. 대놓고 싫어하는 것도 맞는데 한 가지로 일반화한다는 점에서 넓은 의미의 혐오도 적용된다. 마초적인 입장을 고수하며 여성 혐오와 피터에 대한 분노를 터트리는 필. 이렇게 혐오를 내포하는 마음의 기제에 어떤 것이 깔려있는지를 영화는 보여준다. 후반부에 영화가 전복된다고 썼던 부분이 이 이유인데, 필이 그렇게까지 했던 이유가 '마초스러움'을 강요하는 시대에 대한 자격지심에서 왔다는 걸 이해한다면 필의 심리상태와 왜 네 인물이 끊임없이 어그러짐에도 한 가지 키워드로 밧줄처럼 엮이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블랙 위도우>같이 약자에 위치에 있는 인물이 누군가를 구원해주는 줄거리도 아니고, <그린 북>같이 연대를 통해서 극복하는 스토리도 아니다. 그런데 제인 캠피온은 이 작품을 혐오의 비틀기를 통해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은근하게 비꼬고 있다.

     

    5) 플롯 외의 부분은 어떠한가요?

    일단 영상미가 뛰어나다. 뉴질랜드의 아름다운 풍광을 잘 어울리게 찍었다.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가 시너지가 되는 부분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극의 설정상 야생동물이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와야 하는데 전혀 어색함이 없다. 음향은 라디오헤드의 기타리스트 조너던 그린우드가 연출했는데 첼로를 통해서 극의 서스펜스를 유지하는데 크게 기여한다. 

     

     

    1줄 요약 : 예술영화 축에 속하기 때문에 스릴러 장르영화 팬은 살짝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예술영화 맛만 보고 싶다면 좋은 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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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6년과 2021년 사이의 간극
  • 영화 세 친구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그리고 각자의 이유로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세 명의 이야기를 다룬다. 각자 갖고 있는 취미도 가정환경도 다르기에 나는 이들에게서 당시의 어떤 사회 이미지를 볼 수 있었다.

    특이한 점은 이 셋은 영화 내내 서로의 이름을 잘 부르지 않는다. 분명 각자 이름이 있을텐데도 많이 언급하지도 않을 뿐더러 엔딩크레딧에서도 이름이 아닌 별명으로 기재됐기 때문이다.

    무소속인 친구는 그림을, 삼겹은 먹는 것과 비디오 감상을, 섬세는 미용 기술을 배우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이들이 각자 갖고 있는 모습이 당장 생산적인 결과를 내지 못한다는 이유로 집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사회에서 소외되고 그렇게 점차 정상성에서 벗어나 변방으로 내몰린다.

    96년 작품인 이 영화는 당시 여성이 남성에게 성적인 대상으로 소비되고 가정폭력과 데이트 폭력, 성희롱에 노출되는 모습도 함께 보여준다. 그러나 이 명칭은 당시 제대로 된 이름으로 명명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당시 사회가 얼마나 약자들의 존재와 현실에 대해 무지했는지를 보여준다. 25년이 지난 지금은 그 문제와 심각성을 어느정도 인지했으나 아직도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문제인식과 해결과정이 얼마나 더디게 성장하는지를 꼬집어볼 수 있었다.

    90년대 후반 평범한 세 남성을 통해 당시 사회의 부조리와 병폐를 봄으로써 2021년인 오늘날 우리 사회가 여전히 안고 있는 문제들은 무엇인지,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그 화두를 던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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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로를 기억하며
  • 불초상은 보면 볼수록 켜켜이 쌓이는 무언가를 보는 느낌이다. 처음에는 스토리에 집중하게 된다면 그다음은 각 인물의 입장에서 다시 한번 보게 되고 어떤 연출 기법을 사용해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등을 말이다. 지브이나 인터뷰 영상을 보면서 영화에 대한 깊이를 더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영화에 나오는 주요 인물인 마리안느, 엘로이즈, 소피가 각자 자신의 삶을 대하는 자세와 태도를 보며 각 개인의 가치관이나 태도 또한 이해하려 노력해보게 됐다. 제한된 시간, 한정적인 공간 안에서 마리안느와 엘로이즈가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고 기억하는 방식은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그들의 사랑의 무게를 관객에게도 온전히 공유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별이란 매우 슬픈 일이지만 그들은 그들의 소통 방식으로 서로를 기억하고 추억할 것이다.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어도 서로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그 방식을 나는 정말 좋아한다. 여성 개인의 이야기와 여성과 여성이 사랑하며 관계를 맺기까지의 서사를 섬세하고 친절하게 연결짓는 스토리를 통해 여성의 이야기는 어떻게 만들고 전달되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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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발한 설정을 진지하게 끝까지 밀어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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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언가에 집중하다 보면 자기 자신의 위치를 잊을 때가 있다. 무언가 이루고 싶다는 의지와 집념은 그것에 몰입하게 만들지만 그 사이에 나라는 자아는 잠시 감춰진다. 어쩌면 그건 몰입이 선사하는 멋진 선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무 그것에 심취하다 보면 자기 자신을 잃게 되기도 한다. 그 아슬아슬한 경계 속에서 그래도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게 만드는 건, 그렇게 강한 의지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를 지키고, 또 무언가가 되고 싶어 그것을 이루기 위한 무언가에 도전하는 과정에서 그 의지는 굉장히 중요하다. 의지와 집념, 그리고 자기 자신이 모두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원하는 곳이 보이기 시작한다.

     

    영화 <유체이탈자>는 자기 자신이 누군지, 내가 지금 어디 있는지 그 위치를 잊은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는 한 남자가 망가진 차 옆에서 깨면서 시작한다. 자신이 누군지 왜 그렇게 부상을 당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어리둥절한 상태로 자신의 집이라고 생각한 곳으로 향하고 이름을 확인하지만 밤 12시가 되자 다른 사람의 몸에서 다시 깨어난다. 그리고 그 남자는 다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 작은 단서들을 찾아내기 시작한다. 맨 처음 깨어났을 때 옆에 있던 노숙자(박지환)가 그 첫 단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강이안(윤계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문진아(임지연)라는 여자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잃어버린 자신의 위치를 찾으려는 사람의 이야기, <유체이탈자>

     

    강이안은 12시간마다 다른 사람의 몸에서 깨어난다. 영화는 그의 정신이 왜 이렇게 다른 사람 사이에서 옮겨 다니는지는 영화 후반까지 알려주지 않는다. 또한 강이안이 어떤 인물인지, 도대체 무슨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려주지 않는다. 이렇게 정보를 제한적으로 제시하면서 관객들이 영화 속 주인공과 똑같은 시점으로 영화를 따라가게 만든다. 가장 처음 알게 되는 건, 주인공의 의지다. 그는 위험한 상황에서도 좀처럼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으려 노력한다. 영화의 첫 목격자인 노숙자를 중심에 놓고 자신이 알아놓은 정보를 저장하고 반복해서 따라가는 등, 그 의지를 놓지 않는다. 그가 가진 의지는 이 영화를 이끄는 가장 큰 힘이자 동력이다.

     

     

    영화 속에서 강이안의 얼굴은 사실 중요하다. 다른 사람의 몸에서 정신을 차린 그가 제일 먼저 확인하는 건 자신의 얼굴이다. 얼굴을 보며 자신이 어느 위치의 사람에게 들어왔는지를 확인하고 주변을 살핀다. 그가 자기 자신을 모르는 것처럼 그 몸의 인물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그렇게 벌어지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나 당황스러운 모습은 영화 초반을 이끌어가는 주요 동력이다. 그래서 꽤 세세하게 그가 몸과 얼굴을 확인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대부분은 강이안의 모습으로 영화가 진행되지만 거울 속의 모습이나 간간히 강이안이 들어간 몸의 모습도 비친다. 어찌 보면 자신의 몸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실제로 영화 속 강이안은 자신의 모습을 모르지만 관객은 그의 실제 모습을 볼 수 있게 구성되어 있다.

     

    강이안의 기억을 찾는데 핵심 역할을 하는 문진아는 과거에 강이안과 가까운 사이로 보이는 인물이지만 실제로 기억을 찾는데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강이안이 끝까지 의지를 가지고 자기 자신을 찾게 만드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리고 노숙자는 사실 초반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강이안을 돕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후반부에는 노숙자와 강이안의 버디 무비처럼 보이기도 한다. 심지어 노숙자는 영화 속에서 이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름이 없는 사람과 몸이 없는 사람이 같이 힘을 합쳐 자기 자신을 찾는 영화라고도 볼 수 있다.

     

    주연을 맡은 배우 윤계상은 혼란스러워하는 강이안의 모습을 잘 담아냈고, 그가 가진 액션 능력을 이 영화에서 한껏 보여주고 있다. 좁은 곳에서 벌어지는 근거리 격투나 권총 액션은 꽤 현란하고 박진감이 넘친다. 다양한 인물들과 벌이는 근접 액션 장면이 영화 마지막까지 이어지면서 끝까지 영화적 긴장을 유지한다. 또한 문진아 역을 맡은 배우 임지연도 꽤 과격하고 빠른 액션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총 7명의 인물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과 표정을 연기에 반영했다. 실제로 촬영 시 다른 배우들과 한 달 넘게 사소한 행동까지 맞추기 위한 노력을 하기도 했다.

     

    단점을 상쇄하는 흥미로운 설정과 박진감 넘치는 액션

     

    영화에서 빌런 박실장(박용우) 역을 맡은 배우 박용우도 인상적이다. 박 실장은 사실 초반에는 진짜 모습을 감추고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영화 후반부에서 비치는 그의 모습은 누아르나 액션 영화에 등장하는 빌런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너무 전형적으로 많이 보아왔던 악당의 모습이라는 점에서 다소 아쉬움은 있지만 영화적 긴장감을 높이는 역할로는 충분하다.  그가 웃음을 짓거나 분노를 표출하는 모습은 그의 다음 행동이 어디까지 갈지 한계를 예측하기 어렵다는 측면에서는 영화에 긴장감을 높이는 요소로 작용한다.  

     

     

    영화 속 강이안은 자신이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의지로 자신의 몸과 기억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가 과거에 해왔던 모든 일,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기억을 잃었지만 과거에 가지고 있던 의지만은 그대로 가지고 있다. 결국 그것이 강이안을 끝까지 버티게 만들고 7명의 인물들의 몸속에 들어가면서 자신이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게 만든다. 어쩌면 그 의지가 누군가에게는 그가 강이안이라는 것을 알아채게 만드는 것일지 모른다. 그가 가진 의지는 영화 초반에 아무런 정보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실마리를 하나씩 찾게 만들고 조각조각 모은 퍼즐 같은 단서들을 조합하여 결국에는 그 일의 원인과 자신을 찾게 만든다.

     

    영화 <유체이탈자>는 꽤 신선한 설정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영화다. 유체를 이탈한 자가 다른 사람의 몸을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는다는 설정은 그동안 보아왔던 기억상실증 서사에 기발한 아이디어를 하나 더 붙인 것이다. 아주 단순하고 결말이 예상되는 영화지만 진행되는 영화적 공간과 인물을 한정적으로 제시하고 그들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관객과 퍼즐을 맞춰 나가는 듯한 느낌을 주는 흥미로운 액션 스릴러다. 영화에는 총기 액션, 격투액션, 카 체이싱 등 다양한 액션 장면들이 포함되어 있어 다양한 볼거리를 포함하고 있다. 특히나 강이안의 몸이 바뀔 때, 주변 환경이 바뀌는 모습은 모션 컨트롤 카메라를 이용해 촬영되었는데 꽤 색다른 장면을 보여준다.

     

    <유체이탈자>는 완벽한 영화는 아니다.  좋은 아이디어를 기반하고 있지만 인물들 간에 이동하며 벌어지는 상황들이 다소 작위적이고, 새로운 인물로 이동될 때마다 벌어지는 일들이 반복되면서 다소 루즈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또한 주인공이 단서를 알게 되는 순간마다 운이 많이 따르기도 해 설득력이 떨어질 때도 있다. 하지만 최근에 등장한 한국 액션 스릴러 영화 중에서 꽤 신선하고 긴장감의 밀도도 높다. 또한 신선한 설정을 끝까지 밀어붙이기 때문에 관객들이 주인공 강이안의 뒤를 끝까지 따라가게 만든다. 영화는 다양한 액션과 함께 이야기의 반전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극장에서 관람할 때 몰입감을 주게 된다.  액션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들이라면 극장에서 관람 시 만족도가 높을 것으로 보인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간단한 리뷰가 포함된 movielog를 제 유튜브 채널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주로 말 위주로 전달되기 때문에 라디오처럼 들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유튜브 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유체이탈자 리뷰>

    https://youtu.be/i8d42Shpn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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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장난 론 / Ron’s Gone Wrong, 2021
  • POSTER

    내심 "폭스"와 "디즈니"의 인수로 기대했던 효과는 "블루 스카이"의 부활이었습니다.
    그나마, 버텨주었던 <아이스 에이지>시리즈가 마지막 5편의 흥행으로 진짜 위기를 맞이했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바램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북미 일자로 19년 <스파이 지니어스>를 마지막으로 회사는 해체되었고, "폭스"뿐만 아니라 애니메이션도 사라졌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고장난 론>의 개봉은 기대가 컸습니다.
    "픽사"의 영입으로 "디즈니"의 작품이 달라졌듯이 말이죠. - 하지만, 이런 바램은 또 그때처럼 무너졌습니다.

    먼저 공개된 북미 박스오피스에서는 5위로 데뷔한 <고장난 론>은 오프닝임에도 1000만 달러를 넘기지 못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국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고요.
    현재까지 15만명으로 앞전 추석 때 개봉해 20만명들을 넘긴 <짱구는 못말려>와 <포켓몬스터>를 생각하면, 역시 자존심이 구길만한 성적입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을 본 이유는 흥행과 반비례하는 평가였습니다. - 북미 현지에서 전문가 79%와 관객 97%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먼저 본 이웃분들의 호평까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과연, 어떤 작품이었는지?' - 영화 <고장난 론>의 감상을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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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심한 성격에 친구가 없는 "바니"는 그 어느 때보다 힘든 학교생활을 보내고 있습니다.
    특히, 다 있는 "비봇"이 나만 없으니 그것 때문이라도 더 소외되니 "바니"의 아빠는 큰맘을 먹고서 생일날에 "비봇"을 선물하게 됩니다.
    하지만 어딘가 이상합니다.
    네트워크 접속이 되지 않아 의도치 않게 자유로운 행동을 하는 "론"때문에 "바니"는 곤경에 처하는데...

    고장은 없어 보이는데?

    1. 고놈, 잘생겼다!
    먼저, 영화 <고장난 론>의 장르와 주 관객층을 생각하면 106분의 분량은 뭔가 맞질 않습니다.
    물론, 연령이 '쪼꿈(?)' 많은 제가 보았지만 '애니메이션'의 경우. 연령이 낮은 관객층이 보는 장르인 만큼 분량은 정말 중요합니다.
    이런 이유에는 영화의 마무리를 영화가 아니라 관객이 직접 맺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영화 <고장난 론>은 어떻게, 몸을 뒤척이고 금방 자리를 박차고 나서지 않게 만들었을까요?

    이렇게 귀여운데, 가실 거예요?

    이런 말이 있습니다. - '언제나 겉으로 파악하지 말고, 내면을 봐라'라고 말이죠.
    하지만 최근 면접을 봐온 입장에서 일단, 내면을 말하기에 앞서 겉으로 사람을 쭉 지켜볼 수 있게는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고장난 론>의 "론", 즉 "비봇"의 이미지는 저를 비롯한 관객들의 이목을 이끄는데 부족함이 없습니다.
    먼저, "비봇"의 외견에는 "디즈니"계열의 스튜디오답게 다양한 IP들이 나오는데요.
    <스타워즈>의 "스톰 트루퍼"와 "다스 베이더", 이외에도 "마블"의 다양한 슈퍼 히어로까지 나와 재미를 더하며, "론"은 "도트"로 표현됩니다.
    이렇게, 말하다 보니 어째 어린이들보다는 성인들이 더 좋아할 만한 요소들이 많네요.

    STILLCUT

    2. 거짓말은 못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얼굴만 뜯어먹고 사는 것은 아니기에 관객들은 <고장난 론>이 '어떤 대답들을 준비해왔는지?'를 질문해야 합니다.
    투명한 바둑돌 같은 표면의 "론"을 보자면, 한없이 긍정적인 작품을 기대하겠지만 해당 작품은 현 상황에서 볼 수 있는 모든 모습들을 가져와 관객들의 공감대를 이끌어냅니다.
    먼저, "비봇"을 살펴보면 "알고리즘"을 통해 취미와 공통점을 통해 유저들을 매칭 시키는 모습은 "왓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보이고 있음을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게 맞지 않는다면, 만남을 꺼려 하는 장면으로 어두운 이면까지 드러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한없이 깨끗한 줄 알았는데...

    이외에도 이번 <고장난 론>의 악역에 포진한 "앤드루"의 모습도 어딘가 익숙합니다.
    "페이스북"을 비롯하여 많은 기업들에서 유저들의 개인 정보로 불법적으로 활용하거나 감시하는 사고들은 비일비재하게 봤을 겁니다.
    이외에도 조회 수 혹은 하트, 좋아요을 많이 받기 위해서 자극적인 콘텐츠를 찍는 모습과 자신의 행복함을 보여주려 사진을 보정하는 장면들은 각색 없이 보아도 잘 전달되니 영화는 "바니"와 "론"의 우정에 대해 잘 말하면 되겠죠.
    하나 앞에서 안 했던 각색을 지금에서 한다고 한들 잘할 수 있을까요?

    STILLCUT

    3. 말솜씨는 아쉬운데, 결과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고장난 론>은 굳이, 각색을 하지 않았어도 자신을 관객들에게 말하는데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 안일한 생각으로 서사한 "바니"와 "론"의 우정은 약하게만 느껴집니다.
    여느 영화에서 보듯이 맞지 않는 첫인상을 시작으로 점점 맞다가 싸우고 갈등을 봉합하고 사건을 해결하고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과정은 똑같습니다.
    "클리셰"로 볼 수 있지만, 마지막 헤어짐에서 그 진부함이 확실하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감정은 ctrl+c, ctrl+v가 안됩니다.

    이런 이유에는 "바니"와 "론"의 우정을 깊이 설명하지 못한 것도 있지만, <고장난 론>의 전체를 살펴보면 제대로 설명이 된 캐릭터가 없습니다.
    "바니"와 "론"이 해당 작품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나 "바니"는 이외에도 아빠와 할머니, 그리고 "시바나", "리치", "노아" 등의 실 친구들과의 관계까지 뻗어나갈 이야기가 정말 많습니다.
    그렇기에 이것저것 건들다 보니 갑작스레, 협력을 한다든지 급전개들이 이뤄져 공감은커녕 설명도 제대로 이뤄내지 못합니다.
    결국, 마지막 엔딩은 캐릭터 스스로 "복사"를 말하지만 "왜, 안되는지?"를 설명해 주지 않는 통보식 신파는 앞서 보여준 인상과 다르게, 아쉬움을 남깁니다.
    결국, 이름값을 마지막에 보여준 <고장난 론>의 마무리가 더더욱 안타까움으로 비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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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어 너머의 언어로
  • 언어를 배운다는 건 단지 말의 외형만을 익히는 일이 아니라, 다른 층위의 세계관을 맛보는 일이 아닐까. 프랑스어를 배우면 자동차, 달, 바다는 여성이 되고 비행기, 해, 땅은 남성이 된다. 모국어가 한국어인 사람으로서는 참으로 낯설게도, 사물에 성별을 붙여 규정하게 되는 것이다. 프랑스어를 배우기 이전과 이후의 관념은 은근하게 달라진다.

     

    한편 일본어를 배우면 존댓말의 형태는 두 갈래로 번져간다. 자신을 낮추는 겸양어와 상대를 높이는 존경어. 우리말에서도 ‘나’를 ‘저’로 부르는 등 낮춤말이 있지만 상대적으로 적다 보니, 동사를 3개씩 외우는 일이 힘든 건 둘째치고 마음이 갑갑하다. 결재 도장까지 깍듯하게 상사 이름 쪽으로 기울여 찍는 문화를 얼핏 느낀다.

     

    언어는 사회성과 역사성을 갖기에, 쓰는 사람들에 의해 규정되고 변형되기 마련이다. 언어의 층위는 그렇게 오랜 시간의 마디마디가 쌓여 이루어진 것이다. 한 인물이 시간과 성별을 뛰어넘어 존재한 400년의 시간을 담아낸 영화 <올란도>는 그 모양을 잘 보여준다.

     

    영화는 자못 간단한 구조로 보인다. 한 젊은 귀족 올란도가 여왕에게 찬사를 보낸 후, 여왕이 저택과 함께 내려준 ‘영원히 죽지도 늙지도 말라’는 말이 고스란히 이루어졌다. 영화에 담긴 400년의 시간은 연극 막처럼 명확한 텍스트 제목으로 나뉘어 있으며, 각 타이틀은 올란도의 삶에서 주요 화두가 어떻게 이동하는지를 보여준다. 올란도를 둘러싼 세상의 언어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살펴보자.

     

     

    영화가 시작되면 수직적인 관계를 고스란히 담아낸 언어들이 눈에 띈다. 여왕이 올란도의 아버지에게 “그대의 것은 이미 내 것이었다”라고 말할 때도 그렇지만, 올란도를 지칭하는 말은 모두 소유격이 도드라진다. “내 아들, 수족, 마스코트”이자 “나의 승리”. 변하지도, 병들지도, 늙지도 말라는, 말도 안 되는 명령이 실제로 이루어진 것은 그래서였을까? 이 말은 단지 물리 법칙을 어겨서 이상해 보일 뿐, 말도 안 되는 명령들이 ‘까라면 까야지’ 안에서 이루어지는 현실과 그렇게 다르지도 않다.

     

    이 수직성은 훗날 러시아 대사의 딸 사샤를 사랑하게 된 올란도에게서도 보인다. “내가 너를 사랑하기에 너는 내 것”이라는 말에 사샤의 주권은 들어있지 않다. 사샤를 만나기 전 약혼했던 상대가 올란도의 “배신”을 탓할 때는 “남자는 자기 마음을 따를 줄 알아야 한다”라고 가뿐하게 넘겼으나, 얼음이 녹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고 분명하게 피력했던 사샤가 나타나지 않았을 때는 “여자a woman가 배신했다”라고 한다. 고유명사였던 사샤는 일반명사가, 수많은 여자 중 하나가 된다. 소유도 박탈도 올란도의 의지로만 이루어졌다.

     

     

    훗날 올란도에게 청혼하는 해리와의 대화에서도 비슷한 대사가 재현된다. 여왕이 했던 “집을 주겠다”는 말이나 “내가 곧 영국이고 너는 내 것”이라는 말. 올란도가 했던 “I’m offering my hand”라는 말. 해리뿐이 아니다. 남성 귀족들의 대화는 허세와 과시, 권위로 꽉 차 의미나 감정이 들어갈 여지가 없다. 다리가 아프다는 말을 들어도 공감과 위로는 없고, 과학이나 예술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저 성별에 비유한다. 폄하하고 재단하며, 자신이 조금이라도 더 수직적 우위를 점하고자 끊임없이 재배치를 꾀하는 대화다.

     

    이러한 세상에서, 올란도는 소통의 가능성을 간직한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세상과 공명할 수 있었다. 러시아어에서 프랑스어로, 프랑스어에서 영어로 언어를 바꾸며 사샤가 소통을 모색할 때 “그냥 영어를 더 크게 말했”던 대부분의 귀족과 달리, 올란도는 사샤와 프랑스어로 대화하며 둘만의 공간을 만든다. 사랑이 끝난 후 잠에 빠졌다가 새로운 챕터로 나아갈 때도 마찬가지다. 시를 탐구하고, 정치의 세계로 나아가 향한 오스만 제국에서도 아랍어 인사말을 익혀 시장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고 있다.

     

     

    올란도가 간직하고 있던 소통의 가능성은 전쟁을 겪으며 뜻밖에도 성별 전환이라는 방식으로 발아한다. 쓰러져 죽어가는 이를 “적”으로 규정하는 해리와 달리 올란도는 그냥 죽어가는 사람으로 바라보았다. 이것은 균열의 조짐이다. 피아의 위치와 높이가 ‘명징하게 직조’되어 있는 세상의 균열. 아기 울음소리와 비명 같은 고통의 소리들 사이, 전쟁이 낸 균열 사이로 걸어가며, 올란도는 이제 또 다른 언어의 세계로 건너간다.

     

    먼지가 축복처럼 빛나며 내리고, 물과 볕이 얼굴을 적시는 모습은 마치 세례라도 받는 모양 같다. 프랑스어로, 아랍어로 타인과 계속 대화를 시도해왔던 올란도는 이제 전쟁과 지배의 언어를 버렸다. 그때 여성이 되었다는 점은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책 제목을 떠올리게 한다. 단지 성별만 다른, 여전히 같은 사람이다. 평소 큰일이 있었을 때처럼 7일 간 자고 일어난 점도 같다. 그러나 이제 사회가 그를 다르게 대한다. 올란도는 언어의 수직선에서 자신을 끌어내리려는 끊임없는 도전을 받는다. 그 도전을 피하는 길은 남편, 아들처럼 사회가 정한 우산 아래로 들어가는 길이라는 종용을 받는다. 이에 올란도는 자기 자신으로 굳게 서는 방법으로 응전한다. 설령 자신과 닮아 있고 이해의 구석이 있는 셜머딘이 상대라 해도, 올란도는 타인의 일부가 되길 택하지 않는다.

     

    그 무엇의 곁에도 머물지 않고, 올란도는 계속해서 박차고 달린다. 그가 박차고 달리는 것은 과거에 버리고 온, 전쟁과 지배의 언어다. 미로 같은 정원을, 안갯속 들판을 계속 달리며 그는 새로운 세상으로, 새로운 언어의 세계로 나아간다. 영화의 초입부터 불을 든 사람들의 반대 방향으로 걷고 뛰고 있었던 그는, 이제는 임신한 몸으로 전쟁의 포화 속을 달린다. 전쟁의 이름은 밝히지 않는다. 시기의 힌트조차 주지 않는다. 이건 보통 전쟁이 사용하는 언어와는 반대 방식이다.

     

    전쟁은 전쟁만을 명시한다. 보불 전쟁이라든지 펠로폰네소스 전쟁 같은 식으로 승자와 패자를 딱 잘라 명시하고, 뒤켠에 있던 민간인과 피해자들의 기록은 남기지 않는다. 그렇게 모두를 익명성에 가두고 만다. 이 영화는 넘어지면서도 포화를 뚫고 가는 올란도만을 오롯이 비추고, 역으로 전쟁을 익명성에 가둔다. 이는 올란도의 달리기와 나란한 방향이다.

     

     

    그렇게 영화 <올란도>는 시간을 따라 촘촘히 배치한-사회성과 역사성을 가진- 지배의 언어를 역방향 달리기로 틀어버린다. 억압적인 층위 안에서 유린되어 온 언어의 사필귀정을 꾀하는 시도다. 동시에 이 시도는 자체로 완성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점임을 명확히 한다. 출판사에 건넨 두툼한 원고 더미가, 딸의 손에 들려 있는 카메라가 그 방향성을 드러낸다. 일방적이고 수직적인 소통의 수단으로만 기능하던 언어는 소통을 풍성하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제 예술의 경지로 나아간다. 거기서 생명은 피어난다. “더 이상 운명에 붙들리지 않”고, “삶이 시작되는 것”이라는 대사는 그래서 유의미하다.

     

    오토바이 사이드카에 딸을 태우고, 한때 자신의 것이었던 저택에 유유히 걸어 들어서는 올란도의 모습. 그 걸음은 딱딱한 액자 프레임에 갇힌 초상화와는 달리 분명하게 살아있다. 초상화 바깥의 인간 올란도의 얼굴. 남자의 얼굴도 여자의 얼굴도 아닌, 천사의 노래 가사처럼 “인간의 얼굴”이었다. 딸이 손에 든 카메라 속의 천사. 400년을 살아온 이는 앞으로도 “영원히 죽지도 늙지도 않”을 테고, 언어도 그러할 것이다. 발화와 문자 그 너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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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생커플의 로맨스 추억 여행 영화 <실 : 인연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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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다마사키와 고마츠나나의 결혼이 현재 일본 연예계의 가장 큰 화제일 것이다. 나도 스타벅스에서 과제를 하다가 갑자기 고마츠나나의 인스타에 올라온 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두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결혼'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른 나이에? 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솔직히 나는 두 사람이 연인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고 생각한다. 둘의 외모적 조합은 너무 완벽해서, 다양한 작품과 광고를 함께해왔다. 가장 최근 작품 중 두 사람의 조합을 볼 수 있는 작품은 바로 '실: 인연의 시작'이다. 

     

     

    # 뻔하지만 뻔하지 않은 대사

     

    일본 드라마나 영화나 애니나,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대부분 가지고 있는 것은 '이것이 명대사입니다'라고 말하는 듯한 대사가 항상 있다는 점이다. 물론 나의 개인적인 생각으로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이 영화도 그런 대사들이 있었다. 많은 일본영화들이 그런 대사들의 억지스러움이 보여서 거부감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잘 어우러진 것 같다.

     

     

    "내가 아오이를 지켜줄게"

    일본영화의 단골 클리셰 100% 대표 대사이다. 남자주인공이 여자주인공에게 "守る(마모루, 지키다)"한다는 대사. <실 : 인연의 시작>은 초반에 불꽃놀이가 나오면서 클리셰 범벅으로 영화를 시작한다. 거기다가 이 대사까지 나오는 순간 나는 이 영화에게 굉장히 실망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 대사가 너무 자주, 여러 사람의 입에서 나오기 시작하자, 감독이 뭔가 전하고자 하는게 있을거라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이 영화에서 "마모루"에 대한 상대방의 반응은 이 영화에게 특별함을 더해준다. 첫번째로 렌이 아오이를 지켜준다고 했을때, 아오이는 렌이 자신의 손을 잡자, 이렇게 말한다. "손이 아파" 이 대사가 누군가에게는 그냥 넘어가는 대사였을 지도 모르지만, 이 대사는 곱씹을 수록 엄청난 깨달음을 주었다. 두번째로, 아오이가 동업친구 레이코에게 지켜준다 했을 때, 레이코는 스스로 살고 싶다고 말한다. 아, 지켜준다는 말이 얼마나 이기적인 말인지 깨달았다. 함부로 누군가에게 책임감을 가진다는게 남을 위한 거라고 착각하지만 사실 매우 자기 중심적인 사고였다. 나는 그 사람의 손을 놓치지 않으려고 꼭 잡은 것 뿐인데, 그 사람은 그 손이 아프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걸.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전해준다. 

     

     

     

    "울고있는 사람이나, 슬퍼하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안아줄 수 있는 사람이 되렴."

    이 대사는 렌의 치즈공장에서 만난 아내, 카오리가 자신의 딸 유이에게 항상 해주는 말이다. 이 대사는 이 영화의 눈물 포인트가 되어준다. 후반부에 아오이가 큰 성공에 이은 배신과 실패를 경험하고 지칠대로 지쳐서 어릴 적 자신을 챙겨주던 할머니에게 돌아간다. 할머니는 어릴 적 자신에게 음식을 내어주던 경험에서 시작하여 아이들에게 따뜻한 한 끼 식사를 제공하는 활동을 하고 있었다. 할머니와 재회한 뒤, 조그마한 책상에 앉아 밥을 먹으며 지난 날의 고통을 곱씹으며 슬퍼하는 아오이. 그녀를 보고 유이는 엄마가 말해준 대로 슬퍼하는 아오이를 안아준다. 

     

     

    # 배우들의 연기

     

    유명한 배우 총출동이다! 주연부터 조연까지, 일본드라마나 영화를 꽤 본 사람들이라면 못알아볼 배우는 없다. 따라서 연기력에 대해서 사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오랜 스다마사키의 팬으로서, 그의 연기를 잘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사실 이번 작품은 조금 실망스러웠다. 연기력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저 그의 특유의 강렬한 연기 스타일이 이번 영화에는 잘 어우러지지 않았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카오리 역을 맡은 에이쿠라 나나 배우의 연기가 개인적으로 매우 만족 스러웠는데, 그녀가 엄마라는 역할에 너무 잘 어울리게 연기한 반면, 스다는 아빠라는 역할에 잘 어울리지 않았던 것 같다. 에이쿠라 나나는 지금까지 연기력 논란이 많았던 배우인데, 이번 역할은 실제로 두 아이를 둔 엄마라서 그런지 소화력있는 연기를 선보였다. 고마츠 나나도 역할이 조금 안어울린다는 느낌이 살짝 들긴 했지만, 연기는 감명깊었다.  특히 위 사진의 타지에서 고향의 음식을 먹으며 무너져버린 자신의 인생에 고통스러워하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정말 완벽했다. 최악에 가정에서 자라, 어린 나이에서 부터 스스로의 삶을 책임지기 위해 고생하고, 겨우겨우 이뤄낸 성공을, 친구의 배신으로 다 잃어버린 아오이의 마음을 관객들이 정확히 읽어낼 수 있게 표현했다.

     

     

    # 추억 여행

     

    이 영화는 아마 외국인들에게는 크게 인상깊지 않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본 사람들에게는 지난 날을 추억할 수 있는 감동적인 영화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헤이세이 시대는 일본인들에게 '상실의 시대'였다. 동일본 대지진, 후쿠시마 원전사고, 지하철 사린사건 등 많고 거대한 사건 사고가 있었다. 일본에 있는 나의 한 친구는 원전사고로 입은 피해로 인해 현재까지도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영화 '실 : 인연의 시작'은 헤이세이 시대에서 레이와 시대의 전환점까지 긴 시간을 다루고 있다. 연출적인 면에서도 뭔가 촌스럽고, 옛날을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다. 또한 이 영화는 일본의 국민가수 나카지마 미유키의 '실'이라는 곡을 모티브로 한다. 영화 내내 이 곡이 배경음악으로 들려오는데, 이는 관객들을 추억 여행으로 데려다주는 듯 하다.(많은 가수들이 이 노래를 리메이크 했는데 이 영화를 통해 스다마사키도 이시자키 휴이와 함께 리메이크 앨범을 냈다.) 영화 속 캐릭터들이 '파이트'라는 곡을 카라오케에서 부르기도 한다. 이 곡을 부르는 씬들은 청년들의 현실에서의 고통을 표출하는 듯해 마음이 짠해진다.

    ファイト! 闘う君の唄を闘わない奴等が笑うだろう

    파이팅! 싸우고 있는 너의 노래를 싸우지 않는 녀석들이 비웃겠지.

    ファイト! 冷たい水の中をふるえながらのぼってゆけ

    파이팅! 차가운 물속을 떨면서 올라가라

    暗い水の流れに打たれながら 魚たちのぼってゆく

    어두운 물살을 맞으면서, 물고기들은 올라 간다.

     

     

    사실 이 영화가 한국사람들에게, 특히 일본 영화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인상깊은 작품으로 남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일본 국민들에게는 헤이세이 시대의 청년들의 아픔과 그 시대의 향수를 느끼게 해주는 감동적인 영화로 다가왔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사실 렌과 아오이 두 사람이 함께 나오는 장면 보다 두 사람 각각의 인생에 대해서 얘기하는 장면들이 많아 로맨스를 기대하는 사람들은 실망할 지도 모르겠다. 또한 과도한 우연적으로 엇갈리는 상황들의 연속이 조금 불편하게 느껴질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스다마사키X고마츠나나의 조합을 보는 것 만으로도 나는 재밌었다. 

     

    평점: ★★★☆☆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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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 번째 기회라는 <엔칸토>의 마법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콜롬비아의 깊은 산속에 위치한 마법이 가득한 마을 ‘엔칸토’에는 저마다 특별한 능력을 지닌 마드리갈 가족이 살고 있다. 그러나 ‘미라벨(스테파니 베아트리즈)’만큼은 엔칸토의 마법 덕분에 초인적 괴력이나 치유력 같은 힘을 지닌 가족과 달리 아무런 능력도 가지지 못한 채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미라벨은 엔칸토를 둘러싼 마법의 힘이 위험에 처한 것을 발견하지만, 할머니 '아부엘라(마리아 세실리아 보테로)'를 비롯한 가족들조차 자신의 말을 믿지 않자 평범한 자신이 오히려 가족과 엔칸토를 구할 마지막 희망일 것이라 생각하며 마법을 되살릴 방법을 찾아 나선다.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60번째 작품인 <엔칸토: 마법의 세계>는 디즈니에게 기대할 수 있는 매력이 총망라된 영화다. 디즈니 애니메이션답게 '가족'과 '성장'이라는 보편적 키워드가 여전히 중심을 잡는 가운데, 브로드웨이 뮤지컬 <해밀턴>과 넷플릭스의 <틱, 틱.. 붐!> 등을 제작하며 가장 핫한 뮤지컬 음악가로 떠오른 린-마누엘 미란다의 라틴풍 음악은 마드리갈 가족의 이야기를 다채롭게 꾸며준다. 이에 더해 폴리네시아 문화를 녹여낸 <모아나>와 동남아시아를 배경으로 한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의 뒤를 이어 콜롬비아의 마을 엔칸토의 모습을 그려내면서 보편적인 감성에 문화적 다양성을 더하려는 시도 역시 눈에 띈다.

     

    그러나 <엔칸토: 마법의 세계>는 그저 가족 간의 사랑과 우애를 재확인하고 평범한 주인공이 스스로의 가치를 깨닫는 전형적인 동화에만 머물지 않는다. <주토피아>로 소수자와 약자의 정의와 진정한 역차별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겨울왕국 2>에서는 노르웨이의 '알타 분쟁'을 재해석해 서구 중심의 제국주의적 시각을 비판했던 바이론 하워드 감독의 작품답게 <엔칸토>도 현실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엔칸토> 속 마법은 뒤쳐질까 두려워하고 밀려날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든 이들에게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지기를 바라는 소망의 상징처럼 보인다.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악역이 존재하지 않는 <엔칸토>는 가족 중 본인만 능력이 없는 미라벨의 내면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녀는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할머니 아부엘라를 비롯한 가족들에게 무시당하고 중요한 일에서 배제당하기 일쑤이며, 가족이 아닌 이들로부터는 동정과 위로를 산다. 무엇보다도 능력의 유무가 자신의 노력과 관계없이 선천적으로, 또 우연히 주어진 것이기에 미라벨의 아픔은 나날이 커져간다. 그래서 사촌동생인 안토니오가 능력을 받는 날 그녀는 실패로 끝났던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며 동생을 온전히 축하하지 못한다. 동물과 소통하는 능력을 얻은 안토니오와 가족들이 사진을 찍을 때 함께 끼지 못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보면서 그녀의 고통과 트라우마는 절정에 달하고, 엔칸토의 마법에는 균열이 생긴다. 

     

    이때 미라벨의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트리거로 사진기와 사진이 등장하는 대목은 특히 인상적이다. 이는 과거 콜롬비아의 작은 마을에 사는 한 소녀와 2021년을 살아가는 관객이 같은 아픔을 공유할 수 있음을 일깨워주는 디테일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작중 사진기는 현실 속 인스타그램의 메타포처럼 보인다. 이전까지의 SNS와 달리 인스타그램은 텍스트가 아닌 사진과 짧은 영상을 통해 내용을 전달한다. 문제는 사진과 이미지에 가득 담긴 자랑거리나 화려함이 여과 없이 전달되다 보니, 절망이 보이지 않는 가상의 공간 속에서 사용자들이 열등감과 정신적 피로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특히 그 화려함이 마치 마드리갈 가족에게 주어진 능력처럼 우연 혹은 선천적인 이유로 가능한 것이라면, 인스타그램을 보는 이들은 미라벨처럼 더 크게 좌절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접점은 결국 <엔칸토>가 미라벨을 통해 현대 사회를 들여다보고 있음을 암시한다. 

     

     

    흥미로운 것은 미라벨의 깊은 좌절감을 보여준 후, 영화가 일반적인 전개대로 흐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엔칸토>는 미라벨을 마음속 상처를 치유하고 숨은 능력을 찾기 위한 여정에 떠나보내지 않는다. 대신 그녀를 매개로 다른 가족들이 마음속 깊이 숨겨둔 이야기를 끄집어내며, 이를 통해 특출 난 능력을 지닌 이들도 능력이 없는 미라벨 못지않게 깊은 흉터를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미라벨의 두 언니인 루이사와 이사벨라는 자신의 솔로곡을 통해 자신의 사연을 풀어놓는다. 누구보다도 강한 괴력의 소유자인 루이사는 마을의 모든 사람을 돕고 다가오는 그 어떠한 위험도 자신이 막아야 한다는 기대에 지쳐가고 있으며, 자신의 힘이 점점 약해지는 것 같다고 고백한다. 그 누구보다도 아름답고 완벽한 외모를 지니고 있는 이사벨라는 설령 원하지 않는 상대와 결혼한다 해도 항상 같은 모습을 유지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자신의 본모습을 가로막고 스스로를 피폐하게 만든다고 토로한다. 

     

    영화는 미라벨의 입을 빌려 이러한 가족들의 상처가 엔칸토를 만든 마법을 지켜온 할머니로부터 비롯한다고 지적한다. 갑작스러운 침략자들의 공격으로 인해 살던 집을 잃고 남편인 페드로와 사별해야 했던 그녀는 항상 가족과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는 능력을 받아야만 하고, 그 능력을 완전히 다룰 수 있어야 한다고 아이들을 가르쳐왔다. 그러나 그녀의 신념이 낳은 기대와 의무감 때문에 능력을 받지 못한 이는 무시당하고, 능력이 있는 이들도 실패해해서는 안 되고 더 완벽해져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며 점점 피폐해진다고 미라벨은 말한다. 또 능력이 없는 자신이 불행의 원인이라는 할머니에게 과도한 부담이 한 명 한 명의 개인을 억누르는 사이 공동체의 유대, 곧 마드리갈 가족의 유대와 가족을 감싸고 있던 마법의 힘이 무너진 것이라고도 항변한다. 

     

     

    사실 미라벨의 지적과 항변은 그저 영화 속 이야기로만 보이고 들리지는 않는다. 미라벨과 두 언니의 모습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과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마이클 센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에 따르면 실패한 이들을 위한 마땅한 구제책이 없는 현대 사회에서 능력이 뛰어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실패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불안증, 강박적 완벽주의, 취약한 자부심"에 시달린다. 한편 능력이 없다고 판단된 이들은 "극심한 사기 저하와 함께, '나는 실패자야'라는 굴욕감"에 시달린다. 전자가 미라벨의 두 언니라면 후자는 미라벨이라 볼 수 있고, 이 경우 세 자매가 속한 마드리갈 가족은 결국 현대 사회에 대한 비유나 다름없다. 즉, <엔칸토>는 신자유주의가 만든 경쟁 체제와 이를 지탱하는 담론인 능력주의, 그로부터 배제되어 분노한 이들과 그로 인해 피폐해진 이들의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로 가득한 작품인 것이다. 

     

    그와 동시에 <엔칸토>는 실패한 이들을 위한 재도전의 기회와 서로 다른 개인 간의 연대 의식과 책임이라는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 중심에는 미라벨의 삼촌인 예언자 브루노가 있다. 불길한 예언을 하다 보니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했고, 심지어 가족의 미래를 잘못 보면서 할머니의 기대에도 부응하지 못했던 그는 가족과 마을을 떠나는 것을 선택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처럼 가족 내에서 이질적으로 여겨지는 미라벨을 만난 후 자신의 실패를 만회할 두 번째 기회를 잡기로 결정하고, 미라벨의 조력자가 되어 마법이 약해지는 문제를 바로잡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이외에도 영화는 두 번째 기회를 잡은 다른 이들의 모습도 비춘다. 미라벨에게 능력을 얻을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나, 할아버지의 죽음 이후로 다시금 위기에 처한 마드리갈 가족이 그간 도움을 주었던 마을 사람들로부터 역으로 도움을 받으며 재기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지는 모습이 대표적인 장면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왜 <엔칸토>에서 미라벨이 집과 엔칸토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는지, 왜 다른 디즈니 작품 속 주인공과 달리 여정을 떠나 성장하는 원형적인 영웅 서사를 따르지 않는지도 쉽게 알 수 있다. 미라벨의 할아버지가 침략자들에게 맞서다가 사망했을 때 할머니는 주어진 마법 덕분에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었으니, 엔칸토라는 마을과 그 마을을 만든 마법은 자체로 두 번째 기회다. 따라서 미라벨이 마주한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은 모두 엔칸토 안에 있다. 그래서 엔칸토에 깃든 마법과 그 마법이 만들어낸 화려함은 단순한 시청각적 즐거움보다 더 깊고 큰 감흥과 통찰, 더 나아가 위로를 선사할 수 있다. 

     

    물론 <엔칸토>가 결점이 아예 없는 작품은 아니다. 마드리갈 가족에 속한 인물이 너무나도 많아서 각 능력의 조합이 보여주는 재미와는 별개로 전개가 다소 산만하게 느껴지는 것, 뮤지컬 애니메이션인데도 강렬하게 뇌리에 남는 넘버가 없다는 점은 아쉬움이 남는다. 또 결국 마법이라는 환상적인 수단을 통해서만 암시하고 있는 현실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디즈니스러운 결말이 내포한 근본적인 한계가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했거나 실패해서는 안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엔칸토: 마법의 세계>가 충분한, 어쩌면 충분함 이상의 위로를 건네는 디즈니다운 매력이 가득한 우화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A(Acceptable, 무난함)

    배제당하거나 완벽해지는 것에 이골이 난 모두를 위한 두 번째 기회의 땅, 엔칸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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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답고 처연한 몸짓 <무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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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본/감독: 안재훈 | 목소리 출연: 소냐, 김다현, 장원영, 안정아, 달시 파켓 외 | 제작: 연필로 명상하기 | 배급: ㈜씨네필운 | 러닝타임: 85분 | 개봉: 2021년 11월 24일]

     

    1982 년 노벨문학상 후보에도 오른 바 있는 한국문학의 거목 김동리의 대표 단편소설 [무녀도](1936)는 그동안 1972 년 개봉해 제 18 회 아태영화제 기획상, 인기여우상 수상의 영예를 얻은 실사영화와 다수의 드라마, 한국 록밴드 전설 ‘산울림’의 노래, 뮤지컬 등 다양하게 변주되며 세기가 변해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회자되며 사랑받아온 불멸의 콘텐츠다. 안재훈 감독이 한국 단편문학 마지막 프로젝트로 선택한 단편소설 [무녀도]가 이번에는 주인공 무녀 ‘모화’의 한을 음악과 작화로 표현되어 뮤지컬 애니메이션이라는 새로운 장르로 다시 피어난다.

     

     

    <무녀도>는 한 가족의 운명적인 갈등을 그리면서도 시대적 모순에 부딪힌 주체적인 존재 무녀 ‘모화’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다룬 입체적인 여성 서사 애니메이션이다. 김동리 작가의 원작 [무녀도]는 여성 중심 서사가 드물었던 1920~30 년대 소설 중 여성 주인공을 통해 이야기하는 특별한 소설이다. 주인공인 ‘모화’는 샤머니즘을 섬기는 직업 종교인 무녀로, 모든 여성들이 시기하면서도 남성들이 허투루 대하지 못한 근대 전문직 여성이다. 마을에서 이름난 무녀 ‘모화’는 원인 모를 병환을 굿을 통해 해결하려고 하지만 영험이 점점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마을 사람들로부터 그의 능력을 의심받는다. 영화는 이 대목에서 기독교라는 새로운 종교가 조선에 등장하면서 한국 전통문화와 외래 문물의 대립이 시작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직업의 사멸에 대한 이야기에 집중한다. 무녀 인생을 건 ‘모화’의 마지막 굿판을 담은 엔딩은 시대의 흐름 때문에 사멸해가는 직업을 마감하는 ‘모화’의 모습으로 여운을 안기며 압도적인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현역 뮤지컬 배우인 소냐, 김다현 등 실력파 배우들의 절절한 목소리로 귀를 사로잡는 소울풀한 음악은 영화에 신비감을 더한다. 굿과 소리, 춤사위, 구음, 수묵화 같은 전통과 뮤지컬 장르라는 현대적 요소가 공존하는 독특한 스타일의 작품은 뮤지컬 애니메이션이라는 실험적인 태도가 돋보인다. <무녀도>는 애니메이션과 뮤지컬, 두 개의 시나리오로 완성됐다. 노래하듯 대화하는 신, 뮤지컬 앙상블 신, 뮤지컬 안무를 공들인 연출 등 애니메이션뿐 아니라 뮤지컬 팬들에게도 공연을 보듯 확실한 재미를 준다. 굿판에 뮤지컬적인 화법을 넣어 관객들에게 듣는 재미를 선사하는 영화는 뮤지컬 판타지 신을 통해 훨씬 부드러운 방식으로 무속의 세계를 관객에게 전달한다. 장면마다 어울리는 소울풀한 음악과 앙상블 등 실제 뮤지컬을 보는 듯한 만의 세계관은 스크린을 통해 만나볼 수 있다.

     

     

    <무녀도>는 애니메이션인만큼 작화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모화'가 안개 낀 숲에서 흰 천 옷을 입고 춤을 추는 강렬한 롱테이크 오프닝 씬은 압도적인 스케일과 정서적 울림으로 표현됐다. 또한 원인 모를 병으로 아파하는 환자를 치유하는 굿을 하고 칼로 악귀를 쫓는 행위와 집안에 액운이 있을 때는 작두를 타며 굿을 하는 등의 원시적인 굿판은 에서 무녀 ‘모화’의 질곡의 삶과 응축된 한이 발현되는 다양한 정서의 퍼포먼스로 완성됐다. 철저한 고증과 자료조사, 심혈을 기울인 그림에서의 디테일이 있었기에 가능한 장면들이다. 영화의 제작을 맡은 연필로 명상하기 스튜디오는 모든 것이 디지털로 바뀌는 시대에 종이와 연필로 작업을 이어가는 보기 드문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그림에서 느껴지는 정성과 아날로그적 감성이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애니메이션계의 칸이라고 불리우는 안시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한 우리 애니메이션 <무녀도>는 우리나라도 애니메이션 영화를 이만큼이나 빼어나게 만들 수 있다는 저력을 확인시켜주는 작품이다. 아름답고 처연한 '모화'의 마지막 굿판에서 울려퍼지는 노래는 이 걸출한 애니메이션 영화가 꼭 극장에서 보여져야 하는 이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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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과 방 사이의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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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갖 유형 테스트가 범람하고 있다. 각종 심리테스트나 백문백답처럼 옛날 싸이월드에서 하던 것들이 여전히 0과 1의 세계에 돌아다니는 걸 보면 유행이 정말 돌고 도나 보다. 대부분은 시중에 돌아다니는 MBTI 테스트 변용이라 크게 새로운 내용은 없지만 가끔 해본다. 나도 뭐라고 언어화해본 적 없는 취향을 딱 표현하는 말을 찾아내기도 하고, 친구들이랑 공유하면서 내가 아는 그들의 성향과 내용을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어서.

     

    국내 유수의 영화제들도 ‘영화 취향 테스트’ 같은 걸 많이 하던데, 무의식 중의 취향을 확인하곤 한다. 지난 5월 전주에서 내 영화 고르는 기준에 ‘포스터’가 상당히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정확하게는 분위기. 포스터나 예고편 영상에서 풍기는 분위기나 느낌이 좋으면 일단 본다. 설령 시놉시스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시놉시스에 다 담기지 않는 감정이나 장점들을 발견할 가능성이 높으므로.

     

     

    <킬링 오브 투 러버스>도 포스터가 마음에 들었으나 시놉시스 읽고는 볼지 말 지 고민했다. 서로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에 동의하고 별거 중인 부부, 결혼과 육아로 단절된 꿈을 되찾기 위해 다시 일을 시작한 아내, 같은 건물에서 일하는 새로운 애인, 그리고 거기서 펼쳐지는 감정의 자기장. 음, K-드라마로 다수의 삼각관계 클리셰에 단련된 K-유교걸은 이런 오픈 릴레이션십의 쿨한 면면이 편치 않다고.

     

    그래도 포스터나 예고편 영상에서 풍기는 분위기 때문에 일단 보고 생각하기로 했다. 선댄스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은 점, 최근 <기생충>이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등 아트영화에서 손꼽히는 작품들을 계속 배급해온 북미 배급사 NEON에서 선택한 작품이라는 설명도 고민을 끝내는 데 일조했다.

     

    영화를 보는 동안은 짧은 시 한 편의 전문을 떠올렸다.

     

    <섬>, 정현종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내가 이 영화에서 본 건 오픈 릴레이션십 안에 놓인 세 사람의 쿨한 감정 놀음도 관능적인 육체 관계도 아니었다. 그보다 좀 더 초라하고 보편적인 인간 감정,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려는 노력과 그 실패에 대한 고민들이었다. 문이 굳게 닫힌 각자 마음의 방, 그리고 방과 방 사이 놓인 섬이었다.

     


    영화는 기승전결을 천천히 쌓아 올리는 게 아니라, 긴장의 한복판에서 대뜸 시작한다. 잠들어 있는 아내 니키와 그 연인 데릭에게 총을 겨누다가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에 한숨을 푹 쉬고는 창문으로 집을 빠져나와 달리는 남편 데이빗의 모습에서.

     

    흐리고 눈 쌓인 회색 지면에서 데이빗은 달리고, 음산하고 불안한 음악이 그 뒷모습을 따라간다. 흔히 생각하는 화성 악기의 느낌이 아니라, 일상의 소음들을 기묘하게 조합해 낸 느낌의 음악이다. 삐걱거리는 소리들이 무너져가는 관계를 드러내고, 차 문 닫는 소리들이 총소리처럼 쾅쾅 울린다. ‘체호프의 총’을 떠올리게 하는 동시에, 그 법칙을 뒤집는 총이라는 생각도 든다. 첫 시퀀스는 그렇게 영화 전체를 멋지게 끌고 가며 영화의 짜임새를 단단히 한다. 시작된 긴장감은 영화 내내 사람을 콱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다.

     

     

    음악과 함께 사람을 영화에 가둬놓은 건 화면 비율이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4:3 비율의 화면이었다. 사실 나는 화면 비율이나 사운드 등을 예민하게 인지하는 사람은 아니다.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4:3 화면비는 모를 수가 없다. 옛날 텔레비전 드라마 비율이었으니까. 극장에서는 무성영화 시절에나 쓰던 비율이었고,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도 사용하지 않은 지 한참이라, 이제 와이드 스크린에 익숙해진 내 눈에는 화면이 좁다고 인식된다.

     

    영화 배경으로 보이는 들판은 너무나 광활하여, 적막하고 쓸쓸할 만큼 넓게 펼쳐져 있는데, 정작 인물들은 운전석에 꽉 끼어서 대화한다. 영화의 많은 순간 운전석에서 같은 각도로 잡히는 데이빗과, 모처럼 잡은 데이트를 자꾸 뚝뚝 끊는 것 같은 아내 니키. 타이트하게 잡힌 얼굴로, 운전석에 고정된 옆얼굴로, 피로한 표정으로, 눈을 보지 않은 채로 하는 대화. 좁은 화면 비 안에서 좁게 멈춰 나누는 대화. 답답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교착 상태가 두 사람의 관계를 고스란히 대변한다.

     

     

    여전히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안정감이라곤 없이 불편하고 어긋난 두 사람의 삐걱거리는 관계 속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의 데릭은 비집고 들어서려 한다. 여기까지는 전형적인 세 연인의 감정싸움이다.

     

     

    이 영화를 전형적인 감정싸움 이상으로 넘어가게 하는 데에는 아이들의 존재감도 한몫한다. 어떻게 저렇게 딱 그 나이 아이들의 대화가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지. 막내들의 옹알거리는 대화나 행동들, 사춘기에 맞아 엄마아빠의 분위기를 정확하게 파악한 큰딸의 혼란스럽고 짜증 나는 마음 같은 것들이 그들의 대사와 표정에 너무나 잘 들어가 있다.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겠다고 나온 공원에서, 로켓에 흥미를 보이다가도 잘 되지 않으니 토라지는 큰딸의 복잡한 마음도,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뒤돌아서는 누나를 보며 민망한 웃음을 지으면서도 아빠에게 “고마워요”라는 말을 잊지 않는 동생의 뻘쭘해진 마음도.

     

     

    아이들이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고 돌아보는 그 순간들이 이 영화의 파편 같은 관계들을 끌어모은다. 니키와 데이빗의 전사가 자세히 묘사되지 않지만, 두 사람과 아이들 사이 몇 마디 대사에서 성긴 추측이 가능하다. 서로를 사랑한다 하며 어린 나이에 결혼했고, 아이를 넷 낳았고, 터울이 좀 있는 걸 보니 육아의 무한 굴레에 빠져 있었을 것이고, 당연히 힘들어 허덕이는 순간들이 있었을 테고… 그러다 보니 이 선택을 위해 기각되었던, 사랑에 비해 빛을 잃은 듯 보였던 다른 선택지들을 돌아볼 요량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게 된다.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에도 동의하는 기이한 행태의 별거를 시작한 데까지. 그 후로도 시간이 점점 소용돌이치며 위태로워질 때까지.

     

     

    일상의 소리들이 음산하고 불안한 음악을 이뤄낸 것처럼, 불행은 그렇게 일상의 크고 작은 틈에서 쌓이는 것인지 모른다. 차 문 닫는 소리가 끝내 총소리에 이른 것처럼. 배려의 겉옷을 입은 그 마음은, 딱히 크게 누구 잘못도 아니었던 마음들은, 아이들만큼도 못했다. 아장아장 걷는 걸음을 이제 막 벗어난 아이만큼도 서로에게 이르지 못했다.

     

    잘해보고 싶었던 마음들이 실패로 돌아갈 때, 이것이 최선이었나 돌아보게 될 때, 스스로가 초라해질 때, 구질구질한 마음들이 복잡하게 안을 메울 때, 차라리 지지부진한 관계에 깔끔하게 선을 긋는 게 낫지 않나 하는 생각마저 들 때. 더 잘해보려고 내린 선택이 회오리처럼 더 휘몰아쳐, 더 이상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을 때. 그때 삶의 문제를 녹이는 실마리는 무엇일까.

     

     

    긴장감에 휩싸여 보던 영화에서 한 줄기 미소 지을 수 있었던 순간은 아이들 때문이었다. 아이가 넷이나 있는 부부이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라 아이들이 보인 마음 때문이었다. 갑자기 화를 팩 내며 돌아가 버린 누나의 행동에 당황하면서도, 누나의 마음이 좋지 않음을 이해하고, 덩달아 마음이 좋지 않아진 아빠를 헤아려 “고마워요”라는 말로 어색한 공기를 뚫는 아이의 마음을 생각한다. 소용돌이치며 끝도 없이 높아져만 가는 긴장감의 끝, 보는 내내 궁금했던 결말에서 툭 터지던 마음도 함께 생각한다.

     

    나의 방을 벗어나 서로의 사이에 있는 섬으로 나아가는 것. 더없이 차가운 온도일 것만 같았던 이 ‘트랜스픽싱(transfixing; 두려움이나 경악으로 얼어붙게 만드는)’ 로맨스의 끝에 발견한 건 초라한 마음까지도 내려놓고 문을 여는 마음, 사랑이었다.

     

     

    https://youtu.be/duwSyHGX9c8

    영화 킬링오브투러버스 X 케빈오 Oh My Sun 콜라보 뮤비. 쓸쓸한 배경과 조용한 사랑이 잘 묻어나 있어 좋았다.

     

    *영화사 블루라벨픽쳐스에서 시사회에 초대받아 영화를 감상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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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셀린 시아마 유니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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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셀린 시아마 감독이 〈쁘띠 마망〉으로 또 한 번 해 냈다. 여성들의 내밀한 감정‧관계를 섬세한 시선으로 탁월하게 연출해 왔던 셀린 시아마가 이번에 주목한 건 모녀 관계다. 넬리가 자신과 같은 나이의 엄마 마리옹을 만나며 벌어지는 일을 담은 이 판타지 영화는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여성 경험‧관계에 주목한다. 〈쁘띠 마망〉에서 시작해 셀린 시아마 감독의 영화를 거슬러 읽음으로써 그녀가 구축한 세계를 소개하고자 한다.

     

      외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엄마가 어린 시절 살던 집에 온 넬리는 숲에서 놀다가 자신과 닮은 또래 친구를 만난다. 그녀는 넬리의 엄마 마리옹이다. 마리옹과 친구가 되고 이야기를 나누던 넬리는 그녀가 자신의 엄마임을 알아차린다. 우연히 만난 어린 시절의 엄마는 유전병을 예방하기 위한 수술을 앞두고 있다. 넬리는 그녀의 수술이 잘 될 것임을, 건강이 좋지 않은 넬리의 외할머니(마리옹의 엄마)가 앞으로 오랫동안 살아 낼 것임을 마리옹에게 알려 주고 싶다.

     

      여기서부터 셀린 시아마의 강점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엄마 마리옹 앞에 꽤 괜찮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주려 노력하는 넬리의 말‧행동‧마음을 담아내는 영화의 시선은 관객에게 서로 연결된 존재에게 주어진 책무를 환기시킨다. “네 뒤로 난 길을 따라왔어.” “이미 내 마음속엔 네가 있거든.” 각각 넬리와 마리옹의 말이다. 저 말로써 넬리는 자신이 엄마 마리옹으로부터 기인한 존재임을, 마리옹은 미래에 출산할 넬리를 아주 오래전부터 품고 있음을 선언한다. 시차를 가진 두 존재(엄마와 딸)의 동시대적 포개짐이라는 판타지를 통해, 어느새 희미해진 타인과 나의 근본적 연결성이 복원되는 것이다.     

     

    셀린 시아마 감독.

     

      〈쁘띠 마망〉은 셀린 시아마가 지금껏 만들어 온 영화의 궤적 속에서 더 적확하게 이해될 수 있다. 셀린 시아마는 오랫동안 여성들이 맺는 관계와 감정의 문제에 천착해 왔다. 〈워터 릴리스〉(2007), 〈톰보이〉(2011), 〈걸후드〉(2014),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의 여성 주인공들은 우정, 사랑, 정체성 등을 치열하게 고민한다. 고통스러운 과정이었지만 이들은 무너지지 않았다. 셀린 시아마 영화 속 여성들의 여정을 좇다 보면, 〈쁘띠 마망〉이 여성 관계의 세대적 확장임을 보다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워터 릴리스〉의 주인공은 사랑‧욕망에 눈 뜬 여성 청소년 마리와 안나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두 친구의 소중한 마음은 안타깝게도 대상에 도달하지 못한 채 착취당하지만, 아픔 이후 이들은 자기 옆에 같은 상처를 지닌 친구가 있음을 알게 된다. 항상 옆에 있었기에 특별함을 상실했던 마리와 안나는 사랑‧욕망의 좌절이라는 공통의 테마를 바탕으로 단단한 우정을 만든다.     

     

      〈톰보이〉도 정체성과 관계의 문제를 다룬 수작이다. 주인공 미카엘은 축구와 수영을 잘해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다. 친구들에게 ‘로레’가 본명임을 들키기 전까지는 그랬다. 미카엘이 로레임이 드러난 후, 미카엘은 ‘남자같이 구는 여자’라는 이유로 엄마‧친구들에게 모욕적인 방식으로 성별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신문당한다. 리사는 그런 미카엘에게 손을 내민다. 미카엘은 자신이 미카엘인 동시에 로레로도 살아갈 수 있음을 리사로부터 배운다. 리사는 자신이 좋아했던 ‘미카엘’이 ‘로레’였다는 사실, 즉 자신이 ‘역겨운’ 동성애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에 불쾌해했다. 하지만 이내 미카엘과 연인이 될 수 없다면 로레와 친구로 지내면 되지 않겠냐는 듯 마음을 연다. 이번에도 미카엘/로레의 마음속 깊은 상처를 보듬어 주는 건 여성들 사이의 관계다*.     

     

    리사와 미카엘/로레(〈톰보이〉).

     

      앞의 두 영화가 관계로 서로를 보듬는 여성의 이야기를 다뤘다면, 〈걸후드〉는 이를 밑절미 삼아 앞으로 나아가는 여성의 성장에 초점을 맞춘 영화다. 경제형편이 넉넉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난 흑인 여성 청소년 마리엠은 폭력적인 오빠와 삶에 지친 어머니 대신 또래 여성 친구들과 어울린다. ‘비행 청소년’처럼 굴며 큰 해방감을 맛보는 마리엠을 묘사하는 장면은 사회의 관심에서 벗어난 존재(가난한 자, 흑인, 여성)가 어디서 자유를 느끼는지를 비꼬듯 질문한다.     

     

      하지만 마리엠은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머물 수 없다. 그녀는 친구들이 선물해 준 자유를 바탕으로 다른 미래를 꿈꾸기 시작한다. 흑인 여성 청소년으로서 어떻게 성장해 나갈 것인가? 해결되지 않을 혼란을 품은 채, 마리엠은 다부진 표정으로 앞을 향해 나아간다. 어설프고 어리숙한 일일지라도, “네가 원하는 걸 해”라는 말을 믿는 마리엠. 그녀가 과거를 품은 채 도달할 미래가 어떤 곳일지는 모른다. 다만 도래할 미래가 그녀가 꿈꾸던 것과는 다를지라도, 마리엠은 친구들에게 선물 받은 자유를 바탕으로 당당히 삶을 살아 낼 것이다.     

     

    〈걸후드〉의 마리엠.

     

      마지막으로 여성 서사와 레즈비언 서사가 강렬하게 결합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시선의 평등이 곧 관계의 평등임을 증명하는 대단히 인상적인 영화다. 원치 않는 결혼을 앞둔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의뢰받은 마리안느는 기존의 관습(남성의 시선)으로는 엘로이즈의 생명력을 그림에 담을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녀에겐 새로운 시선이 필요하다.

     

      하지만 시선은 마리안느의 화두만이 아니었다. 엘로이즈는 마리안느 그림의 객체이지만 동시에 마리안느를 관찰하는 주체이기도 하다. 엘로이즈는 화가와 대상이라는 관계의 일방향적 문법을 거부하고,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무의미한 곳으로 마리안느를 인도한다. 쌍방향적이고 평등한 시선의 결과는 사랑일 수밖에 없다. 엘로이즈와 마리안느는 레즈비언이라는 특수한 위치에서 가장 보편적인 사랑을 성취한다. 사랑의 범주에서 배제된 자들이 도달한 압도적 사랑이라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테마는 익숙한 젠더 문법에 기댄 어쭙잖은 멜로 영화와 이성애규범적 편견에 휩싸인 세상에 대한 가장 고상한 조소다. 이성애자들이 낡은 관습에 무덤덤해져 사랑에 실패하는 동안, 레즈비언은 그 실패한 사랑의 가능성을 극한으로 밀고가 사랑하는 데 성공하는 것이다. 서로를 보듬고, 북돋아 주고, 응원해 온 셀린 시아마의 여성들이 사랑의 관계에 도달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보는 동안, 스스로를 ‘정치적 레즈비언’이라 선언했던 페미니스트들이 꿈꾸고 갈망했던 여성들의 관계가 셀린 시아마의 영화 궤적에 온기를 품은 유려함으로 펼쳐져 있는 것만 같아 황홀했다.     

     

      여기까지가 〈쁘띠 마망〉의 계보다. 〈쁘띠 마망〉은 남자들의 세계에서 관계‧감정을 나누며 버티고 성장해 온 여성들의 이야기가 엄마와 딸, 즉 세대의 문제에까지 확장된 결과물이다. 〈걸후드〉에 대한 어느 평론가의 말마따나 “셀린 시아마의 세계에서 십대 여성은 망하거나 죽지 않고 성장해낸다.” 그리고 자신들이 구축한 세계를 확장해 낸다. 셀린 시아마의 영화를 아끼는 사람들이 그녀의 모든 영화를 봤으면 좋겠다. 차근히 진행되며 펼쳐지는 셀린 시아마의 촘촘하고 단단한 세계관이 마블 유니버스나 가수 에스파(aespa)의 세계관만큼이나 많은 팬덤을 거느리길 바란다. 그럼으로써 관계는 평등해지고, 우리는 단단해지며, 세계는 다채로워질 것이다. 여성의 경험에서 출발해 성별 권력을 넘어 모두에게 다정한 세상에 대한 상상력으로 나아가기. 셀린 시아마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을 기쁜 마음으로 열어 보자.          

     

     

    *영화는 미카엘/로레가 트랜스젠더인지 레즈비언인지 단정 짓지 않음으로써 어떤 미래든 가치 있고 소중하다고 말한다. 다만 여기서는 미카엘에게 ‘원래 이름’이 뭐냐고 묻는 리사의 질문, 즉 미카엘/리사를 관계 내부로 호명하는 리사의 질문에 초점을 맞춰 미카엘/로레의 성별을 여성으로 독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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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돈으로도 채우기 힘든 사람의 마음
  • 난 오늘도 크림 앱을 켜서 사고 싶은 물건을 구경했다. 보통이면 여러 개 찾아 보겠지만 근래의 나는 하나만 검색한다. 이제 물건은 나를 더 이상 기쁘게 해주지 못하는 것 같다. 어느 신발은 당근에 내놓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신는 것은 덩크 2족과 컨버스, 로퍼 4켤레다. 살 필요가 없던 것에 돈을 써왔다. 아. 이럴꺼면 그냥 우리 엄마 가방이나 사 줄걸. 무엇이든 경험해 보고 나서 후회하는 것이라곤 하지만 요즘 신발장만 보면 씁쓸하다. 결국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건 내면이었다. 최소한의 사람구실만 할 정도로, 그러니까 흔히 말하는 TPO만 맞는다면 일상을 사는데 큰 문제가 없었다. 남들 사춘기때 하는 걸 안하고 살았으니 그 만큼의 댓가를 겪었다고 생각하면 편할 것이다. 이 합리화에 살을 더 붙힌다. 에잉. 그래도 뭐 먹는것보단 낫지. 물건이라도 남았으니까. 큰 손해는 아니라고 스스로를 위안해본다.

     

    근데 이 합리화도 얼마 못 갈거라는 생각이 든다. 원래 금전감각이란 큰 돈과 친해지면 친해질수록 무뎌지기
    때문이다. 난 머지 않아 요즘은 뭐가 나왔나? 하는 마음에 스니커즈를 보고 있을 것이다. 또 아직 사회인도 아닌데 단일품목에 그정도를 태우는건 선 넘었지 하며 그거보다 싼 것들을 위시리스트에 넣을 것이다. 그리고 돈을 쓴다. 담배를 안 피우고 밖에서 밥을 잘 안 시켜먹는 내 생활패턴이 이 돈을 마련해 주었다고 생각하며 내 자신을 속인다. 그리고 호구가 된다. 리셀가로 웃돈을 주고 산다. 이번엔 다를거라 생각하지만 여전히 마찬가지다. 이걸 산다는 의미가 나의 어떤 것을 증명해주는게 아니라는걸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내가 마음에 드니까 산다!라는 핑계로 난 나를 속인다. 이 세상은 내가 알아서 만들어 가는 것이다. 남이 나를 만들어 주지 않는다. 되게 잘 아는 인생의 교훈인데 가끔 나는 알아서 멀리 돌아간다. 가끔 내가 하는 행동이 코미디같다.

     

     

    <블루 재스민>은 자아의 붕괴에 관한 영화다. 영화의 주인공은 재스민과 진저다. 진저와 재스민은 자매 사이다. 자매 사이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바로 재스민의 남편이 진저의 돈을 갖고 사기를 친 것이다. 사실 사기꾼은 재스민의 남편 할이었어서 언니의 책임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구석이 있긴 하다. 이에 따라 언니를 그렇게 미워하지는 않지만 진저는 수천의 빚에 명확한 일자리도 없는 언니가 루이비통 가방과 일등석을 타고 왔다는 사실에 황당해한다. 여러모로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 재스민. 정신 차리기는 커녕 재스민은 과거 회상에 자주 빠진다.

     

    과거 회상에 자주 빠진다는 것은 현재가 행복하지 못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재스민은 사실 오갈 데 없는 처지다. 동생 부부가 복권으로 딴 20만 달러를 사기당해 모두 날렸고 전남편은 남 등쳐먹은 사기꾼이었기 때문에 기댈 가족이 없다. 심지어 이에 대한 충격으로 아들 대니와도 멀어졌으니 낙동강 오리알이 딱 어울리는 표현이다. 돈 흥청망청 쓰던 과거에서 돌아와 현실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재스민은 드와이트라는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드와이트는 정계 입문에 관심이 있는 외교관으로 품격 있는 미모의 재스민과 완전 찰떡인 커플이다. 둘의 연애 초기는 이렇게 잘 어울리는 커플이었다. 근데 이 알콩달콩한 분위기는 오래 못 갔다. 우연히 만난 진저의 전 남편(그러니까 남편 할의 사기 피해자)에게 재스민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듣고 드와이트는 이별을 고한다. 어려운 이별을 받아들이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재스민은 화를 불같이 낸다. 진저와 칠리가 깨를 쏟아내며 알콩달콩 사랑에 빠진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돌아버린 재스민은 진저 커플에게 악담을 내뱉고 밖으로 달려나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이 영화를 보자마자 '자아의 붕괴'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지금 당장 네이버에 '자아'라는 단어를 검색해보면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과 관념이라는 뜻이 나온다. 이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과 관념'은 구체적으로 딱 떨어지는 단어가 아니다. 그래서 각자가 생각하기에 따라 다른데, 나는 이 자아라는 단어를 삶의 기준이라고 적용하고 싶다. 내 자아가 무너졌을 때도 내 기준이 없어서 사람들이 규정한 것을 따라갔다. 재스민에게 있어 명품은 이 자아를 흐리게 만든 도구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나도 비싼 스니커즈들 좋아하고 아직도 신는 입장이라 잘 안다. 비싸다라는 기준은 애초부터 타인에게서 온다. 내가 싸다고 생각하면 싼거고 아니면 아닌 것이다. 또 이것은 상대적이다. 내가 어떻게 목표를 설정했느냐에 따라, 또 현실 지갑 상황에 따라 갈리는게 싸다 혹은 비싸다라는 관념이다. 이런 식으로 타인이 설정한 기준이 부조리하다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을때가 있다. 나는 내가 비싼 스니커즈들을 사면서 느꼈던게, 이것들을 사다보면 사람의 돈이 쉬워진다. 넷플릭스 구독료가 올라간다고 하면 '와 얘들 돈독 제대로 올랐구나'라고 생각하면서도 30~40만원대 스니커즈들은 '괜찮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건이 주는 기쁨이 되게 신선한 것이라서 사치품을 사는 것이 자아가 혼자 설 수 있는 환경이라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더 중요한건 내가 누구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일텐데. 그것들에게서 받는 기쁨보다 중요한 건 맛있는거 먹고 좋아하는 사람 만나며 영화 재밌게 보는, 그런 사람의 근본적인 지점이었다. 내가 살아온 삶이란 이런 '나는 누구인가'를 채워과는 과정이었다.

     

    재스민은 명확한 직업 교육도 못받았고 무너지는 현실에 대한 대처능력도 없어서 이런 것에 대해 탐구하지 못했다. 결국 그녀는 자아가 붕괴됐다. 오갈데 없는 입장인데 자기가 부자라는 환상에 빠진 채로 끝나는 결말이 그 예시다. 원래 자기가 만든 자아라는게 있었다면 돈을 해프게 쓰지도 않았겠거니와 동생의 복권 당첨금을 다 날려버리는 결과도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이 뿐일까? 돈 많은 남자랑 연애한다고 몸을 움츠리며 울 일도 없었을 것이고 사기꾼 남편을 만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영화는 쉬운 구조를 통해 현실감각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우디 앨런식의 코미디가 아닌 현실의 한 단면을 잘라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다. 내가 누구라는 물음은 굉장히 중요하다. 그리고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살아있게 도와준다. 물건? 있으면 좋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내 자신이 어떻게 서있을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앞을 정확하게 바라보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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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으깨진 살점 위에 짓는 집
  • 영화 <사상, 2020>은 부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내가 부산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 몇 가지 정보를 검색해보았다. 먼저, 부산에는 사상구(沙上區)라는 지역이 있는데, '모래 위에 지은 집'이라는 부제처럼 한자 역시 모래 사, 위 상을 쓰고 있었다. 다음으로 이 지역과 오랜 인연이 있는 장제원 국회의원이 세 번째 당선되어 직무 수행 중인 곳이다. 마지막으로 작품에서 환경정비지역으로 지정되어 재개발이 추진되는 만덕5지구는 사상구가 아니라 북구에 속한다.

     

    영화 <사상, 2020> 포스터

     

     <사상 공단과 성희의 살>

     감독의 아버지이기도 한 성희는 사상 공단에서 열심히 일했다. 사상 공단은 낙동강 주변 저지대에 조성된 공업단지로 1970년대 중반부터 부산 경제의 한 축을 담당했다. 계획적으로 공장들을 모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업체들도 열악한 환경이었고, 난개발로 심각한 도시문제들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성희는 이곳에서 일하며 가정을 꾸리고, 아버지의 이름을 얻었다. 아버지의 이름값을 치르고자 환갑이 가까운 나이까지 열심히 일했지만, 집 한 채도 손에 쥐지 못했다. 거기에 더해 사상 공단은 성희의 손가락까지 잡아먹었다. 무시무시한 기계가 깨문 자리는 살점이 으깨져 이어 붙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손가락이 있던 빈자리에는 형체를 알 수 없는 통증이 둥둥 떠 있다.  

     

    성희는 사상 공단에서 열심히 일했다.

     <만덕5지구와 수영의 살>

     수영이 사는 만덕5지구는 북구에 속하는 지역이지만, 사상 공단이 형성되던 시기 동구와 영도구에 살던 무허가 판자촌 주민들을 강제로 이주시켜서 만든 동네이다. 변두리 지역의 땅을 겨우 얻은 주민들은 자신들이 살 집을 직접 짓고 제반 시설을 만들었다. 그로부터 30년이 넘게 지나고 보니 소위 없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던 마을은 도시의 경관을 해치는 지저분한 것이 되어있었다. 새롭고 깔끔한 아파트는 헌 집뿐 아니라 그 속에 들어있는 헌 사람들까지 밀어낸다. 때때로 이 사람들은 잘 보이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수영은 굴삭기를 돌리는 생업을 포기한 채 위태로운 탑을 쌓고 그 위에서 빠진 앞니로 치킨을 뜯으며 개발 논리 앞에 묵살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온몸으로 외쳤다. 결국 만덕5지구는 수영의 허리를 비틀어놓았다.

     

    수영은 만덕5지구에서 행복하게 살았다.

     

    <으깨진 살점과 도시의 불협화음>

     만덕5지구를 비롯한 모든 개발은 으깨진 살점 위에서 이루어진다. 곳곳에 설치된 지뢰처럼 영화 속 공간의 살점을 밟을 때마다 작품은 비명과도 같은 불협화음을 내지른다. 창문 프레임으로 보여주는 색 빠진 그림도 어딘지 모르게 스산하고 을씨년스럽다. 성희와 수영처럼 쇠를 주무르고, 땅을 파며 이 나라에 돈이 잘 돌게 했던 아버지들의 몸은 지난 시간을 담은 하나의 기록이자 증거가 되었다. 사상구가 아니더라도 으깨진 살점의 비명은 여기저기에서 들을 수 있다. 

    불협화음에 귀를 기울이면 으깨진 살점의 비명이 들린다.

     

    132분의 러닝타임 속에 9년의 시간이 흐른다. 하나의 이야기로 쭉 연결되는 서사보다는 특정 공간을 중심으로 조각난 파편을 모으는 작업으로 구성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마치 으깨진 살점처럼.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 활동, 10년의 기록 <오지에서 온 다큐멘터리> 온라인 기획전이 10월 27일 수요일까지 열린다. 성희의 아들, 박배일 감독의 다른 작품도 감상해볼 수 있다.

    https://www.indieground.kr/indie/notice.do?mode=view&articleNo=1189

    [인디그라운드X오지필름] 오지필름 10주년 기획전 '오지에서 온 다큐멘터리' (10.14(목)~10.27(수)) |

    인디그라운드의 사업 소식, 공지사항, 뉴스레터를 제공합니다.

    www.indieground.kr

     

     

    * 해당 리뷰는 씨네 랩(CINE LAB) 크리에이터 시사회 참석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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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2012)> 리뷰
  • 사랑을 단념해야 하는 두 사람이 있다. 둘의 차이는 전 연인이 살아있느냐, 살아있지 않느냐 정도에 불과해 보인다. 당연히 살아온 시간과 환경이 다르니 다른 점은 더없이 많겠지만, 동네 주민들에게 둘은 그저 ‘이상한 사람’ 일뿐이다. 한 명은 새벽에 결혼식 비디오를 찾다가 난동을 피우기도 하며, 다른 한 명은 처음 보는 손님이 있는 저녁 식사 자리마저 순식간에 망쳐놓는 재주를 지녔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포토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팻(브래들리 쿠퍼)은 이별의 계기가 썩 좋지 못했음에도 자신과 그가 천생연분이었다는 사실을 신봉한다. 접근금지 처분을 빠르게 극복해 불륜을 저지른 아내와 재결합하여 서로를 완전케 할 사랑에 다시 빠질 수 있으리라 철썩같이 믿는다. 그렇다면 티파니(제니퍼 로렌스)는 어떤가? 그는 사별한 남편을 잃은 후 느낀 허망함과 우울에 자신을 세상에 내던졌던 나날을 느리게 갈무리하는 중이다.

     

     

    사실, 영화의 장르가 로맨틱/코미디인 만큼 결론은 뻔하다. 두 사람은 두 시간 동안 여러 굴곡을 겪을 테고, 서로가 자신에게 완벽한 짝이라는 것을 발견하며 끝날 것이다. 하지만 데이비드 O. 러셀 감독의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은 수많은 로맨틱 코미디 영화들과 결이 다소 다르다. 남녀 주인공이 서로를 포용하는 과정은 그들이 겪은 상실과 우울의 치유 여정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포토

     

    이상異常: 보통과 다른

     

    이상하지 않은 상태란 무엇일까? 일상에 파문을 일으키는 일이 전혀 없다는 걸 의미할까? 그렇다면 사랑에 빠진 상태도 어떠한 의미에선 이상한 일일 테고, 누군가와 결별하는 것 역시 안전한 보통의 나날을 영위하는 이에겐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일 것이다. 그러하므로 이상과 정상은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수용 가능한 경계가 있을지라도, 개개인의 세계관에 따라 달라지는 유동적인 상태라 볼 수 있을 터다. 물론, 그의 아버지인 패트리치오(로버트 드 니로)가 전 재산을 거는 도박 행위 역시 마냥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단 걸 생각해보면, 사회가 관용을 베푸는 이상과 정상의 경계조차 뚜렷하게 말하기 어렵겠지만. 

     

     

    어쨌든 영화 초반의 가장 큰 문제는 팻의 이상행동이 타인에게 위협적일 수 있다는 점이며 조울증으로 감정을 통제하지 못해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다분하다는 점이다.  프로이트는 상실과 애도의 과정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사랑을 쏟아부은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할 때, 우리는 대상에게 투여한 리비도를 회수해야 하는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고. 또, 이 과정은 대개 순탄하지 않고, 현실 부정이나 대상에 대한 집착과 같은 강력한 반작용을 겪을 수도 있다고. 프로이트가 말한 애도에 대한 이론을 생각한다면 영화 초반의 팻을 조금 더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동네 주민에게 팻은 이미 오래전에 깨어져 돌이킬 수 없게 된 사랑을 어떻게든 붙여보려 하는 이상한 사람일지라도, 팻에게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 자신이 안전한 사람임을 증명하는 데에 집착하는 것이 당연하다. 팻은 어머니 때문에 일찍 집에 돌아왔을 뿐, 여전히 주기적으로 의사를 봐야 하는 환자이며 여전히 전처 니키와의 완벽한 사랑이 가능하리라는 환상 속에 사는 남자니까.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포토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은 흔히 떠올리는 '이상하지 않은' 사람보다는 극단적인 기질을 지닌 인물이 여럿 등장하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팻의 상실감 -혹은 상실에서 비롯된 우울이라는 일탈-을 이해하는 이는 극소수다. 팻의 어머니인 돌로레스(재키 위버)나 친구인 로니(존 오르티즈)는 친절하지만 사랑을 잃은 이가 유지하는 참담한 환상을 없애주진 못했다. 팻의 형인 제이크(셰어 위검)는 간만에 본 동생 앞에서 되려 우월감을 느끼기만 할 뿐이고, 아버지 패트리치오는 팻이 말썽을 피우지 않도록 집 안에 있을 것을 거듭 권하는 정도에 그친다.

     

     

    그러나 상실한 사랑, 토미로부터 벗어나던 티파니는 팻에게 거침없이 다가간다.  댄스 대회 파트너가 되어달라는 요청은 팻에게 이끌림을 느낀 티파니가 시간을 벌기 위한 방법이었던 게 분명한데, 그는 팻의 언어를 반복하며 유인한다. '니키를 위해서, ' '니키에게 당신이 더 좋아졌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니키에게 편지를 전하고 싶다면': 당신은 댄스대회에서 나의 파트너가 되어야만 해. 타인의 언어를 적재적소에 활용할 수 있다는 건 그 사람의 세계를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다. 동시에 티파니는 팻의 손에서 니키가 읽는다는 책을 앗아가고 춤을 가르침으로써 팻에게 자신의 언어를 체화시키기까지 한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포토

     

     

    이상理想: 완전하고도 궁극적인

     

    티파니가 아마추어 댄서였던 것은 팻에게나, 티파니에게나 큰 행운이었다. 실제로 우울증을 개선하는 데에 신체활동이 도움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상에서 하지 않는 몸짓 언어를 개발시키는 과정에서 신체뿐만 아니라 정서/인지적 측면의 개발이 가능하다고 한다. 당장 니키에게 편지를 전하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지만, 팻은 주기적으로 티파니와 댄스 연습을 하며 거부감 없이 우울증을 치료했던 셈이다. 특히 초반에는 연습만으로 기진맥진한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영화 속에서 자세히 묘사되진 않았으나 체력적 요소 등으로 오로지 춤에만 매달려야만 했던 연습 초기엔 팻이 전처 니키를 떠올릴 겨를이 없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아마 이러한 부분 역시 그가 상실한 대상에게서 벗어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반면 티파니는 팻이라는 사람을 통해 토미라고 하는 옛 연인에게 집중되어 있던 자신의 감정, 혹은 옛 연인에게 쏟아부었기에 이젠 오갈 길 없게 된 자신의 애정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었다. 특히 춤이라는 예술이 비언어적 표현에 기반한 소통 행위라는 것과 티파니가 날 선 말을 잘하는 캐릭터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팻과 다양한 감정을 나누며 서로를 알아가는 데에 춤보다 더 좋은 수단을 찾긴 쉽지 않았을 듯하다.

     

     

    이렇듯 팻과 티파니는 최초의 끌림이 바로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고 지연된 덕분에, 둘은 더욱 어울리는 한 쌍으로 거듭났다. 다만, 이데아란 존재하지 않는 세계이기에, 현실을 사는 우리가 최선의 세상을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만 하는 것처럼, 둘의 사랑이 영원토록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토미와 티파니의 사랑 역시 한때엔 이상적이었을 테고 니키와 팻 역시 그림 같은 커플이었던 시절이 존재했지 않은가. 그렇기에 영화의 결말부에서 둘의 행복한 결합이 그려졌다 해도 이 아름답고도 이상적인 사랑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 우리는 모른다. 치유 과정 속에서 서로에게 상대방이 단 하나뿐인 사람이었을지라도 다시금 세상에 나갔을 때, 둘의 심경이 어떤 방향으로 변화할지 누가 알겠는가?

     

     

    하지만 이 둘이라면 영화 필름 밖에서도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으리라 믿게 되는 건 왜일까. 팻의 아버지가 말했듯 티파니가 팻을 바라보는 눈빛에서 깊은 사랑이 느껴졌기 때문일까? 단지 그 이유 때문은 아닐 것이다. 둘은 댄스 대회에서 다른 경연자처럼 규격화된 음악과 안무를 택하지 않는 과감함을 지닌 이들이며, 5점에 아쉬움을 내비치지 않고 세상을 다 가진 듯 환호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게다가 다듬어지지 않은 것처럼 보였던 팻과 티파니 개인의 어떠한 부분은, 두 사람이 함께 하자 긍정적인 시너지로 탈바꿈하였다. 타인 앞에서 굴하는 일이 없던 티파니에겐 팻이 비뚤어진 채로 서 있을 때 다가가 바로 설 수 있도록 돕는 힘이 있었고, 완전한 사랑을 믿던 팻에겐 티파니가 거짓으로 써준 답장을 모른 척 눈감아주는 이해심이 있었지 않은가. 심지어 로니 부부로 끝날 수 있었던 공동의 지인 역시 늘어나 단단하고도 따뜻한 안전망까지 넓어졌으니, 팻과 티파니는 타인의 시선에 개의치 않고 자신들의 리듬에 맞춰 '이상한' 사랑을 별 탈 없이 이어나갈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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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맨틱 코미디 장르가 세상에 나온 지도 오래되었으나 여전히 다양한 변주로 관객을 기쁘게 하듯, '만남'이라고 뭉뚱그려지는 단어조차 유심히 살펴보면 동일한 사례는 하나도 없다. 손쉽게 둘의 마주침을 허용하는 운명도 있겠으나 일정 거리 밖에서 서성이며 자신이 안전한 사람임을 부단히 증명해야 하는 과정이 필요한 만남도 세상 어딘가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또한 꼭 그만큼, 누군가에겐 멀리서 애써 찾아오는 인연이 있을지 모른다. 티파니가 팻의 동선을 알기 위해 그의 집에 전화를 걸고 똑같이 달려 나간 것처럼.

     

     

    그러니 필연적인 우울이 길어져 힘겨워도 그대, 가끔은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는 여유를 가질 수 있기를. 찬란한 한 줄기 햇빛은 오로지 당신만을 만나기 위해 일억오천만 킬로미터를 달려왔다. 다시는 똑같이 반복되지 않을 찰나의 위로, 어쩌면 당신의 짐을 덜어내고 당신을 바꿔놓을 가능성조차 외면하기엔 우리의 삶이 너무도,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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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들과 달라 소외된 모든 이들에게
  • 집에 가는 길이었다. 나는 거북목이 있다. 같은 반 친구들이 자세가 비틀어져 있다고 했다. 복숭아뼈와 맞지도 않은 바지 총장이 신경쓰였다. 난 아래를 내려다 보는것이 습관이었다. 용돈을 한푼 두푼 모아 샀던 스탠스미스 기름이 반질반질했다. 아. 오늘은 애들이랑 피시방 갔었지. 구토가 심하게 올라와서 나 먼저 집에 오는 길이었다. 학교 근처에 벛꽃이 폈다. 난 내가 나온 초등학교 근처 중학교에 가고 싶었는데. 친구들이라면 아주 좋아했던 내가 먼 동네에 와서 이러고 있다는게 슬프기도 했다. 애들이랑은 사이가 멀어져 보기가 힘들다. 아니 사실 나는 휴대전화도 없어서 연락할 방법도 없었다. 오다가다 만나면 잘지내니 인사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애들이랑 멀어져갔다. 초등학교 졸업하고 나서는 거의 얼굴을 본 적이 없는것 같다. 난 버스를 타서 미술학원으로 갔다. 엠피쓰리 이어폰이 있어 심심하진 않았다.

     

    난 오늘도 그렇게 집에 왔다. 이어폰이 에어팟이 됐고, 무거운 책이 가득하던 책가방에는 신입생부터 고대하던 맥북이 있다. 누군가에게 연락이 와도 답장을 안할때가 많고, 사실 먼저 하기에도 할 말이 없다. 주위에 누군가가 있으면 있는거겠지. 난 관계맺기에 서툰 사람이 맞는것 같다. 한동안은 부당한 따돌림에 나를 숨기고 싶어서 나를 속여왔지만 이제는 그냥 그런대로 흘러두는게 제일이라고 생각했다. 좋게 말하면 엉뚱함이고 나쁘게 말하면 나밖에 모르는 소통방식에 그렇게 많은 사람을 떠나보냈다. 에어팟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사가 있다. 솔직히 세상과는 어울린 적 없어. 누군가의 대단한 인생 멘토라도 되거나 좋은 친구와 동생인 양 하지만 나는 어쩌면 루저에 가까운 인간일지도 모른다.

     

     

    <문라이트>는 흑인, 동성애자, 학교폭력 및 가정폭력 피해자를 중심으로 한 3부작 영화다. <라라랜드>와 함께 이 해에 열렸던 시상식이란 시상식은 모두 휩쓸었다. 이에 대한 이유가 소수자와 약자를 중심으로 한 영화라서는 아닐거다. 작품이 갖는 장점이야 아주 많다. 흑인 피부 질감에 대한 표현, 멘토 후안과 그의 여자친구 및 주인공 어머니에 대한 연출,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명대사까지. 이 영화가 주요 시상식에 이름이 오르락 내리락했던 이유는 분명하고, 그 중 내가 생각하는 건 확실하다. 이야기의 전달 방식이다. 영화는 주인공의 일대기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이 전달방식은 소수자인 주인공의 처지가 왜 사람들에게 공감받을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대표적으로 1부에서 후안과 어머니가 만나서 대화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에서 어머니는 후안에게 '당신이 내 아들 키울꺼야?'라고 묻는다. 후안은 째려본다. 어머니는 '너는 그래서 나에게 약 계속 팔거야?'라고 반문한다. 샤이론의 삶이 어떤지 이 장면으로 요약이 가능하다. 따돌림으로 마음을 닫았던 주인공이 정신적으로 기댈 수 있는 멘토를 만나지만 그가 우리 어머니에게 마약을 팔던 마약상이었다. 설득력이 있는 우연이다. 샤이론의 외로움을 단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 왜? 이런 상황은 주인공에게만 있거든. 샤이론의 관점에서 생각해본다면 기댈 곳이 없어진 셈이다. 감독은 이렇게 일대기를 주르륵 나열하는것이 아닌, 성장하는 과정의 단면만을 보여주어 주인공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보여준다.  이는 주인공이 첫사랑에게 받은 상처와도 연결된다. 정체성에 혼란을 겪던 주인공은 오도가도 못하는 처지에 방황하다 앞과 비슷한 방식으로 상처를 입는다. 영화는 이렇게 사건을 서술하며 주인공이 겪을 외로움을 관찰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게 한다. 보다보면 분명해진다. 주인공은 남들과 달라서 자주 넘어진 사람이었다.

     

    감독은 이렇게 삶에서 상처를 받은 후를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됐을지를 우리에게 추측하게 할 뿐이다. 이런 연출의 의도는 분명하다. 영화가 일대기를 연속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고 했다. 삶의 변곡점이 되는 사건들로 데려가 함께 관찰한다. 이 후의 모습은 관객이 직간접적으로 만들어온 인생관에 비추어 추측할 뿐이다. 이 외의 경우가 딱 한게 있다. 엔딩 직전에 두 주인공이 만나서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말하는 장면이 있다. 남들처럼 살다가 삶을 놓쳤다는 말을 했다. 그렇게 먼 길을 돌고 돌아서 두 주인공이 선택한 답은 서로의 진심을 터놓는 것이다. 각자의 정체성을 다시 확인하면서 말이다. 사후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던 영화는 주인공의 대사 한마디로 그들의 미래에 대해 비교적 분명한 답을 보여준다. 난 이게 감독이 주는 메세지라고 생각한다. 리틀과 같이 남들과 달라 마음의 문을 닫았던 이들을 밤바다 아래로 초대해 파란 빛으로 위로하는 셈이다. 이것은 엔딩신에 있는 사람이 '리틀'이라는 것과도 궤를 같이 한다고 생각한다. 리틀은 주인공이 상처받기 전의 내면세계다. 감독은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 남들과 달랐기에 아팠던 이들을 하나로 공감해주고 있다. 난 이래서 이 영화를 좋아한다. 난 게이도 아니고 흑인도 아니다. 대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서툴렀고, 미안해도 미안하다고 똑바로 못했다. 누군가에겐 상처줬던 내 자신을 혼내면서도 이해해주는 영화가 이 <문라이트>라고 생각했다.

     

    4월 20일까지 이 작품을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 난 이 영화를 다들 한번 쯤 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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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순하게 살자. 로맨틱 코미디 영화처럼
  • * 이 글은 영화 시사회에 초대받은 후 작성되었으며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내용을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글을 읽을 때 참고해 주세요 : )

     

    머릿속이 시끄럽다. 갑자기 떠오른 생각은 또 다른 생각을 낳는다. 학업부터 직장, 돈, 사람까지 신경 써야 할 일이 너무 많은 현대인에게 영화 '나의 흑역사 로맨티카'의 주인공 '마르타'가 말한다. 그렇게 많은 것을 고민하며 망설일 시간이 없다고.

     


    영화 <나의 흑역사 로맨티카>

     

    영화 <나의 흑역사 로맨티카, Out of My League,  Sul più bello>는 희귀 유전병 '낭포성 섬유증'을 앓고 있는 '마르타(루도비카 프란체스코니)'의 우정과 사랑을 그린 로맨틱 코미디이다. 이탈리아 토리노를 배경으로 지역 랜드마크인 몰레 안토넬리아나(Mole Antonelliana)와 포 강(povor)을 아름답게 표현하여 유럽 특유의 낭만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영화는 개봉 당시 이탈리아에서 우수한 흥행 성적을 거두며 속편 제작이 확정되었다. 이어서 넷플릭스가 판권을 구매하며 유럽 전 지역에 공개되었고 세 번째 시리즈가 제작될 예정이다.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키싱부스> 등 인기 있는 로맨틱 코미디를 제작한 넷플릭스의 선택이니 앞으로의 이야기도 기대할 만하다.

     

    영화 <나의 흑역사 로맨티카>를 1분 30초 만에 확인하기▼

     

    영화의 구성은 주인공 '마르타'를 둘러싼 두 가지 이야기로 나눌 수 있다. 먼저 그녀의 소꿉친구 '페데리카(가야 마시알레)', '야코프(요체프 기우라)'와의 우정이다. 세 사람은 한 집에 살며 일상생활을 공유하고 서로의 편이 되어준다. 심지어 3살 때 부모님을 잃은 '마르타'의 가족을 만들어 주기 위해 '페데리카'와 '야코프'는 아이를 낳으려는 계획을 세운다. 두 번째는 '아르투로(주세페 마조)'와의 사랑 이야기다. 집안과 학벌, 외모 등 빠지는 부분 없이 완벽한 그는 마르타를 까칠하게 대하지만, 곧 그녀에게 빠져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랑꾼이 된다.

     

     

    익숙한 로맨스 클리셰는 요즘 감성에 알맞은 연출과 영화 미술이 합쳐져서 톡톡 튀는 개성을 지닌다. 다채로운 카메라 구도와 편집으로 인물의 시선과 행동을 지루하지 않게 담아낸다.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세련된 영상미와 음악으로 젊은 세대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시몬스 침대의 광고와 비슷하다. 인물의 의상이나 소품은 강렬한 원색 계열이되 빈티지한 색감을 사용해서 감각적이다. '페데리카'가 화려한 빨간 머리에 대비된 초록색 재킷을 입어도 주변의 색감과 어우러져 홀로 튀거나 어색하지 않다. 

    또한 <나의 흑역사 로맨티카>는 일상과 밀접하면서 로맨스 코미디에서 흔하게 등장하지 않은 장소인 마트를 활용한다. 마트는 '마르타'가 할인 상품 안내 방송 아르바이트를 하는 장소로 그녀의 매력이 극대화되는 장소이다. 첫 데이트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아무도 없는 마트를 헤매는 '아르투로'의 모습은 새로운 느낌을 준다.

     


    Q. 생각이 너무 많아 머릿속이 복잡한가요?

     

    '아르투로'를 만난 순간부터 '마르타'의 행동은 거침없다. 그에 관한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학교와 조정 클럽을 따라다닌다.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아르투로'의 질문에 당당하게 '저녁 식사'를 외치며 데이트 신청을 한다. 그녀의 직진 본능은 스스로 인생을 선택한 적 없던 '아르투로'의 사랑을 얻는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

     

    안타깝게도 '마르타'의 병세는 악화되고 그녀는 '아르투로'에게 부담이 되고 싶지 않아서 이별을 고민한다. 연애를 통해 달라진 '아르투로'는 사랑은 원래 수많은 헤어질 이유가 있으므로 지금 이 순간만 신경 쓰자며 그녀를 안심시킨다. 결국 그들은 현실적인 이유를 고민하기보다 서로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무한한 사랑을 약속한다.

     

    단순하고 거침없는 그들의 사랑 이야기는 시종일관 해맑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행동할 용기를 준다. 그러니 영화가 끝난 후엔 복잡한 생각은 내려놓고 마음 가는 대로 단순하게 행동해보자. 영화 속 '마르타'와 '아르투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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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혼 더 파이널 / 銀魂 THE FINAL, 2021
  • 영화뿐만 아니라 드라마 혹은 소설까지 전체적인 맥락에서 조금은 세세하게 구분 짓는 걸 "장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액션"이나 "코미디"와 같은 명칭이 그런데 이를 거부하고 그 자체로 불리는 장르들도 존재합니다.
    오늘 소개할 <은혼>이라는 작품도 특정 장르보다는 "은혼"이라는 이름으로 소개하는 것이 더 편할 만큼 특정 장르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굳이 분류하면, "SF"이고 "대체 역사물"로 볼 수 있겠지만 '제4의 벽'을 깨는 유머는 실제로 "2008년 서브 프라임 사태로 '선라이즈'가 도산했다"라는 말로 회사의 주가가 떨어지는 건 <은혼>밖에 못하지만요.

    근데, 이번 <은혼 더 파이널>은 쉽사리 바라볼 작품은 아닙니다.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을 1위에서 끌어내린 작품이 이전에 소개한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뿐만은 아니었으니까요.
    특히, 일본 개봉 1주차 특전으로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의 그림을 배부하는 기상천외한 모습으로 마지막까지 "은혼"스러운 퇴장을 했습니다. (이유에는 흥행 때문에...)
    아무튼, 국내에서는 실사가 아닌 처음으로 애니메이션 극장판으로 어떤 시작과 마무리를 보여줄지 - <은혼 더 파이널>의 감상을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서로 각자의 위치에서 2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후, 지구 멸망을 앞두고서 "긴토키"와 해결사, 그리고 모든 캐릭터들이 한데 모입니다.
    부활을 앞둔 "우츠로"를 막기 위해서라도 꼭대기에 올라가려 하지만, 적들의 거센 저항에 도리어 위협을 느끼는데...

    은혼을 은혼스럽게!

    1. 이거, 은혼 맞나요?
    앞서 말했듯이 <은혼>은 "은혼"으로 설명하는 것이 더 쉬울 정도로 크게 이해를 바라는 스타일의 작품이 아닙니다.
    그도 그럴 것이 "2년 후"라는 단어로 <드래곤볼>과 <원피스>의 그림체를 그대로 가져와 그들의 명칭까지 인용하는데요.
    특히, "야무치"의 "낭낭풍풍권"을 대문짝하게 박거나 특유의 재배만 포즈까지 보여주며 "패배자"로 지칭하고 <드래곤볼>의 원작자 "토리야마 아키라"까지 직접 언급하는 등 저작권 인식을 아찔하게 만드는데요.
    이에 캐릭터들이 직접 '은혼이 아니라 드래곤볼의 아류작으로 알겠다'라는 대사로 뒤늦게 정체성을 잡으려 하는데 이에 익숙한 팬들은 "평소의 은혼"으로 인식할 겁니다.

    여전히, 웃기는 놈들이구나!

    그래서 <은혼 더 파이널>을 받아들이는데 호불호가 존재하는 게 바로, 이 유머를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달려있습니다.
    시종일관 심각한 분위기를 내뿜어도 갑작스레, 유머를 보여주니 상황의 언밸런스함을 '그대로 받아들일지, 불필요할 요소로 받아들일지'에 <은혼 더 파이널>을 넘어서 <은혼>이라는 작품을 보는데 당락이 결정될 겁니다.
    <데드풀>에서 유명하게 된 "제4의 벽"을 깨는 행위는 "메타 유머"를 끌어오는 장치로 소위 아는 만큼 재밌게 볼 수 있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제4의 벽"이라는 건 해당 이야기의 현실성을 지키는 방벽으로 이를 깬다면 관객들에게는 몰입이 해칠 수 있어 이야기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참 어렵습니다.

    2. 이야기 예습하고 오세요.
    앞에서 말했듯이 "2년 후"라는 단어로 많은 이야기를 함축시켰지만, 설명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느껴지는 건 <은혼 더 파이널>의 104분이 부족하다고 느껴질 만큼 설명이 제대로 이뤄진 모양새가 아닙니다.
    이런 이유에는 앞서 말한 "유머"의 사용으로 분위기가 흐트러지는 것도 있지만, 정작 큰 이유는 이들의 관계가 영화가 의도한 만큼 관객들이 따라와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제목에서 생략된 "극장판"이라는 글자에 관객들은 <은혼 더 파이널>에 편차를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극장판'이라는 한계치?

    영화 <은혼 더 파이널>은 기존 TV 에피소드를 "극장판"으로 옮긴 작품으로 해당 극장판만으로 전부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저처럼 <은혼>을 즐겨온 팬들에게는 "긴토키"를 비롯해, "신파치 - 카쿠라"의 해결사, "카츠라", 그리고 "타카스기"까지 이외에 "신선조"와 다른 조연 캐릭터들까지 안면이 익숙하고 관계도 다 알 겁니다.
    그렇기에 눈물도 날 것이고, 가슴도 울렁울렁하겠지만 이를 이번 <더 파이널>만으로 이해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만큼 이번 <더 파이널>은 기존 TV에서 방영된 모든 에피소드까지 포함시켜 말하는 것이니 공부가 필요해도 많이 필요한 영화입니다.

    3. 언제든 돌아와도 어색하지 않다.
    가뜩이나 <은혼>이라는 작품이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는 작품인데, 이야기에 느끼는 몰입마저 편차가 존재하니 많은 사람들이 즐기기에는 어려움이 많은 <은혼 더 파이널>입니다.
    그래도, 이 모든 것들을 알고서 보는 <은혼 더 파이널>은 어떤 작품일까요?
    흔히, 마지막이라고 하면 작품들이 진지해지기 마련인데 <은혼>만큼은 "은혼"으로 장르를 소개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보여줍니다.
    마지막 일상 에피소드를 비롯하여 쿠키 영상으로 준비된 "긴파치 선생"까지 "은혼"만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다 보여주고 맙니다.

    네버 세이 네비?

    이렇게, 마지막이라고 못을 박았지만 이를 쉽게 믿지 않는 것에는 <은혼>이라는 작품의 특성 때문입니다.
    한없이 진지해지는 몇몇 장기 에피소드를 제외하면, 일상 이야기를 내세우는 작품이라 언제든지 돌아와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마지막이라 믿고 싶지가 않는데, 어떤 모습이 되었든 <은혼>은 또 "은혼"스러운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어봅니다.

    ※ "엘리자베스", 너무 분량이 없는데... 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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