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예슬2021-11-20 16:08:03
나를 찾는 여정, <걸후드>
영화 걸후드 리뷰
인생은 끊임없이 나를 찾아가는 여정과도 같다. 우리는 살면서 보고 겪는 모든 존재들을 통해 우리 자신을 성장시킨다. <걸후드>는 셀린 시아마 감독이 보여주는 십 대 여성 청소년의 성장기이고, 그 단면을 통해 영화를 감상하는 관객에게 물음을 던진다. 관객은 스스로 돌이키게 된다. 당신은 얼마나 스스로에 대해 알고, 찾았는가?
영화는 생계를 이끄는 모친을 대신하여 동생들을 돌보며 사는 여성 십 대 청소년인 `마리엠`의 이야기를 그린다. 이 영화에서 마리엠이 남성이 아닌 여성이라는 점의 극의 주제를 관통하고 있는 부분이기에 관객은 이를 간과할 수가 없다. 여성의 삶이라는 타이틀로도 고될 수 있는 주제는 십 대 청소년이라는 소재가 더해지며 더욱 주인공을 조인다. 평화로워 보이는 많은 청소년의 삶 중 특별히 흑인인 십 대의 여성 청소년을 그린 이유를 분명하게 인식하며 영화를 관람할 수밖에 없다.
<걸후드>는 마리엠이 성장하면서, 스스로가 그린 삶의 궤적을 더듬어가며 새 발자국을 남기는 과정을 세밀하게 보여주기 위해 세밀한 장치들을 마련해두었다. 친구, 가족, 주변인으로 뻗어나가며 겪는 감정 변화와 그에 따른 연기는, 우리가 이 영화를 감상하며 그 인물의 삶을 사는 것처럼 느끼고 생각하게 만든다.
영화에서의 성장은 마냥 고되거나 우울하지만은 않다. 성장은 삶의 일부 과정이기에 마리엠은 보통의 나날처럼 웃고, 울고, 화내며 살아간다. 누군가는 마리엠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고 또 누군가는 그의 삶에 흔적조차 남길 수 없는 미미한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그에 따라 마리엠은 한 그룹의 주요 인물이었다가 있는 듯 없는 듯 한 존재가 되기도 하며, 자신을 완전히 다잡은 사람이었다가 맥없이 무너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과정은 마냥 초조하지만은 않다. 삶의 일부이며 관객인 우리 자신이 그랬듯 마리엠이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거나 답을 찾아낼 것이라는 기대를 하기 때문이다. 마리엠을 어떻게 살아갈지 갈피를 잡지 못하면서도 온몸을 내던져 세상을 경험한다. 자신과도 타인과도 수없이 부딪혀가며 빛을 내며 단단해진다. 영화 속 다이아몬드 장면이 떠오른다. 러닝타임 내내 몸과 행동으로 외쳐오던 마리엠은 끝끝내 그런 인생을 싫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며 자신의 새 방향을 찾아낸다. 그 방향이 어디인지 관객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우리는 마리엠이 제자리걸음을 멈춰 나아가리라는 것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다. 그리고 결국 마리엠은 찾아낼 것이다. <걸후드>는 그렇게 믿게 하는 영화이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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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착각과 확신, 그 사이에서 <퍼스널 쇼퍼>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담겨 있습니다.
퍼스널 쇼퍼 Personal Shopper, 2016
프랑스 / 미스터리 외 / 105분
감독: 올리비에 아사야스착각과 확신, 그 사이에서 <퍼스널 쇼퍼>
주인공 모린은 자신만의 공간을 갖지 못한 사람이다.
저마다 뽐내기 좋은 취향과 유일무이한 개성조차 없는 인간이란 얘기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그녀에겐 '단단하고 확실한 나만의 가치관'이 없다.
모린은 이란성쌍둥이 형제, 루이스와 같은 영매지만 오빠와 정반대의 삶을 선택했다. 루이스는 자신이 영매란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였고, 이를 부끄럽게 여기거나 바보 같은 행위라 여기지 않았다. 내세가 존재한다고 믿었으며 죽은 자들의 메시지를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인생관은 모린보다 뚜렷했으며 무엇보다 미래를 꿈꿀 줄 알았다. 그는 내일을 생각하며 확고한 목표를 갖고 있었다.'남들처럼', 또 '보통으로서의 개인'처럼.
내가 개인이고, 네가 개인이며, 동시에 우리까지도 '개인'이 될 수 있는.
그리하여 익숙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남들. '사람들이 다 똑같지 뭐' 할 때의 그 사람들 같은.
루이스는 영매(남들과는 다른 인식을 가진 개체)였으나, 수많은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단지 사는 방식과 추구하는 사고가 바로 옆에 사는 이웃과 구분됐을 뿐이다. 누구든 그런 것처럼.
출처: 영화 <퍼스널 쇼퍼> 스틸컷 (다음)
반면, 모린에게 영매는 삶에 혼란과 혼동만 불러올 뿐 특별한 힘이 아니었으며, 중요한 가치는 더더욱 아니었다. 특이한 이력을 가진 평범한 인간, 루이스가 파리에서 심장마비로 죽기 전까지 모린은 갖고 있던 이력(영매)을 내세우긴커녕 보통 사람인척 살고 있었다. 사람들 틈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일상을 보냈지만, 그녀는 사실 홀로 다른 가면을 쓴 '진짜 타자'였다. 어렵지 않게 무리에 소속되고, 일하다가도, 혼자가 될 때면 홀린 듯 스스로를 타자화했다.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배 한 척처럼, 숨 막히는 공허와 고독의 파도에 삶을 맡겼다. 그리곤 당연하게 삶에 관한 질문들을 모른 척 흘러 보냈다. 모린은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사실 확인을 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어떻게 되는 내버려 둔 것이다. 루이스는 그런 모린의 실체를 사람들에게서 숨겨주고 있었다.
가슴이 뻥 뚫린 채로, 배에 구멍이 난 채로 그녀가 침몰하지 않고 지금까지 살 수 있었던 것은 루이스 덕이었다.
루이스가 모린을 보호했다는 것이 아니라, 모린이 루이스의 존재를 자신의 편의대로 '등대'로 정했다는 뜻이다.
그녀는 평범한 사람들이 갖고 있는 삶에 대한 고민의 흔적을 굳이 만들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모린의 등대엔 불빛이 없었다. 암흑 속에서 꼭 죽은 것처럼 빛 없이 선 등대만 있었을 뿐이다. 현실에서 그 등대의 가치가 곤두박질칠 때마다, 그녀는 그것을 자기 나름대로 '안정'이라 여겼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란 근본적인 물음보다 이미 벌어진 사태를 관망하는 걸 택했다. 그게 더 편했기 때문이다. 모린은 자신을 아는 일을 묻어두는 것으로 삶의 고통을 피해 가려했다. 그리고 그건 루이스가 정말 죽기 직전까지 계속됐다.
'나'를 아는 것만큼 괴롭고 힘든 일이 또 있을까. 그녀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과거를 어떻게 기록하고, 내일은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 고려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자신이 고려하고 있지 않은 것이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골치 아픈 일은 뒤로 미뤄두는 일, 모린은 가장 중요한 나를 확립하는 일을 딱 그 정도로 여겼다.
영매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일부터 그녀에겐 어려운 문제였다. 모린은 루이스와 달랐으니까.
결과적으로 '살아있는 루이스'는 그의 의사와 별개로 모린에게 필수불가결한 존재였다.
출처: 영화 <퍼스널 쇼퍼> 스틸컷 (다음)
문젠 '모린의 루이스'가 의사의 언어 그대로 '예외적인 사례'(심장마비)로 죽었다는 것이다.
예외적인 사례란 말은 모린의 일상을 마구잡이로 흔들어놓는다.
잔잔했던 수면 위로 떨어지는 돌 하나. '예외'적인 '사례'.
마치 신이 이미 결정한 일에 딴지를 걸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되면, 다음은 쉽다.
예외에 희망을 붙이는 거다. 이 작업이 편해질수록 마음의 안정은 빨리 찾아오게 되어있다. 누구나 맞이하는 죽음의 순간에서 벗어나 '예외를 획득한 생'은 '사'를 피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실제로 우린 이 착각을 불안해하면서도 굳게 믿음으로서 자기 자신을 보호하려 한다. 그게 보통 사람들이 가진 불안과 안정의 저울이니까.
물론 이미 깊은 자기 비관에 빠져있던 모린에겐 통하지 않는다. 희망을 품겠다는 선택지조차 없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다. '심장기형'은 의사가 말한 '예외'에 꼭 맞는 결괏값이다. 루이스의 죽음이 예외적인 사례가 된 순간, 모린의 삶 역시 예외적인 죽음이 될 게 분명했다. 그래서 그녀는 6개월 후에 보자는 의사의 말에 자조적인 눈빛으로 "글쎄요, 가능할지 모르겠어요"라 대답한다. 내일 죽을 확률이 이미 나왔는데 어떻게 죽지 않을 희망을, 아니 아직은 죽지 않을 희망을 어떻게 떠올릴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쉽게 희망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희망을 노래하고 싶어도, 모린의 희망은 찬란한 빛이 제거된 흑백이었다. 모린은 자기 자신조차 설명할 수 없는 어른인 동시에 루이스의 죽음으로 분열되어버린 또 다른 자신이었다. 그리고 그 분열된 자아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스스로를 거부하는 일이었다.
출처: 영화 <퍼스널 쇼퍼> 스틸컷 (다음)
"먼저 죽은 사람이 신호를 보내기로 약속했어요."
죽은 오빠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파리에서 키라의 퍼스널 쇼퍼로 일하는 모린. 하루에 몇 번이고 기차를 타고 곳곳을 돌아다니며 키라의 취향에 꼭 맞는 옷과 신발, 액세서리를 구한다. 일이지만, 틈만 나면 반납해야 할 옷을 갖겠다 통보하고, 유명 연예인답게 자기 마음대로 세상을 통제하려는 키라 때문에 모린은 견딜 수 없는 피곤과 빠져나올 수 없는 억압에 허덕인다. 그나마 그녀를 숨 쉬게 하는 건 루이스의 집에서 오빠의 신호를 기다리는 일이다.
모린은 오빠의 영혼을 느끼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직접 영혼의 신호를 포착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는 만족하지 못한다. 계속해서 루이스에게 더 확실한, 더 강력한 신호를 보여줄 것을 요구한다. 유령에게 자신을 어필하란 기이하고도 이상한 모린의 요구. 그녀에게 오빠와의 약속은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같은 영매로서 사후세계가 존재한다고 믿었던 오빠가 정말 옳았다는 걸 증명할 기회를 주고 싶다는 모린의 진심이 결정적으로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가 침묵하는 영혼에 소리를 지르는 그때, 루이스의 집엔 불안해진 자신을 안정시키고자 하는 모린, 자신의 울부짖음만 울려 퍼진다.
모린의 거짓말엔 이유가 있다. 그녀가 (분명 원하지 않았지만) 그제야 자신의 눈앞에 있던 검은 장막을 걷어냈기 때문이다. 눈을 뜬 순간 모린은 자신이 봐왔던 등대가 빛을 내뿜고 있었음을 발견한다. 내 세계에서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진실을 확인한 모린은 자신이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존재라는 걸 깨닫는다.
그렇다면. 정말 나는, 그녀는 누구인가?
출처: 영화 <퍼스널 쇼퍼> 스틸컷 (다음)
모린이 불안을 없애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자신의 욕망을 해방하는 일이었다.
가장 먼저 그녀는 키라가 입을 옷을 자신이 먼저 입으며 금기를 깨트린다. 고용주의 옷을 입으면서 자신의 직업적 능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모린. 묘한 쾌락과 심리적 떨림을 느낀 그녀는 점점 더 과감해진다. 자신을 설명할 수 없는 순간이 올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키라의 옷과 신발을 탐한다. 익명이 보낸 문자가 모린의 고삐를 푼 결정적 계기로 이용된다. 마침내 그녀는 키라의 집에 들어가 키라의 옷을 입고, 키라의 사적인 공간을 자연스럽게 이용한다. 그러나 모린은 여전히 만족하지 못한다. 루이스의 신호를 부족하게 여기는 것처럼, 키라가 누리는 모든 것을 누려도 모린은 불안해한다. 자신이 저지른 일을 책임져야 한다는 두려움보다 별 짓을 해도 채워지지 않는 안정감 때문이다. 그녀는 겉으로 보기엔 루이스와의 이상적인 이별을 원한다. 그러나 모린에겐 오로지 아무것도 드러낼 수 없는 이름도 얼굴도 없는 모린만 존재한다. 모린은 스스로를 '모린'이라 말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였다.
그런 와중에 삶의 목적이 확고했던 루이스와 같은 결말을 맞아야 하는 운명인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억울함이 아니었다.
모린은 언제든 예외적인 사례로 치부될 수 있는 현실에서 차라리 내가 아닌 '완벽한 타자'가 되고자 한다.
그런 의미에서 키라의 퍼스널 쇼퍼는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그녀는 매번 실패한다.
하지만 모린은 포기하지 않는다. 계속되는 고된 일상에도 틈틈이 심령 주의와 영매에 관한 정보를 찾고 습득한다. 자신이 영매이면서, 영매를 공부하는 아이러니라니.. 이는 모린이 단 한 번도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믿고 써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역시 루이스와 비교되는 지점이다. 어떻게든 "끝을 보고 싶다"는 말과 다르게 모린은 루이스의 집에서 오빠가 아닌 다른 영혼을 마주하자 도주한다. 공포에 휩싸인 채 자신이 영매란 사실에 섬뜩함을 느끼며 도망친다. 루이스의 신호를 정말 받고 싶으면서도, 그 메시지가 정말 루이스의 것이라 확신하지 못하는 이유도 역시 같다. 사소한 것부터 중요한 것까지 뭐 하나 확실한 믿음을 가져본 적 없는 모린에게 충분한 만족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출처: 영화 <퍼스널 쇼퍼> 스틸컷 (다음)
결국 모린은 영매의 입으로 사후세계를 의심하며 금기를 또다시 어긴다. 나아가 누군지도 모르는 익명의 문자에 더욱 주도권을 뺏긴 채 질질 끌려다닌다.(그러나 모린은 그것을 위험하다 인식하지 않는다. 그것 역시 욕망을 채우는 수단으로 이용한다.) 그녀는 자신의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했으나, 매번 흑백 프레임에 들어가 죽음과 죽은 자가 보내는 신호에 몰두한다.
"금기 없이는 욕망도 없지."
그녀는 사실 첫 번째 금기를 깨기 전까지 무엇이 금기이고 욕망인지 소신 있게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키라의 옷을 입고 키라의 침대에서 누운 순간, 그녀는 달라졌다. 그러나 결국 실패로 돌아가자, 자신을 휘감고 있는 불안한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위한다. 모린에게 자위는 원초적인 욕망을 채우는데 제일 효과적인 도구로서, 허덕이는 정신을 대신하는 신체의 유일한 방식이었고, 그녀가 그토록 바라던 타인이 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애도만 하는 거 싫어. 충분히 고통스러웠고 이젠 내 삶을 찾고 싶어."
루이스의 연인이었던 라라는 새로 생긴 남자 친구의 존재를 모린에게 밝히며 다시 살아가려는 의지를 보인다.
모린의 남자 친구 역시 전과 다른 태도를 취한다. 루이스의 신호를 기다리는 모린을 응원하고 위로했던 그는 단호하게 사후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 그들은 모린을 현실로 데려올, 루이스와 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내 삶을 찾고 싶다는 라라의 고백에 모린은 묘한 낯섦과 해결되지 못한 찝찝함을 느끼면서도 이를 비난하자 않는다. 라라의 걱정과 달리 모린에게 중요한 건 루이스의 죽음이 아니었으니까.
모린은 애도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되는 게 목표였다. 루이스가 평안을 찾길 바란다는 그녀의 속삭임은 자신을 위한 반복된 주문이었다. 그렇기에 아무렇지 않게 라라의 남자 친구에게 죄책감을 갖지 말라 당부한다. 라라의 남자 친구는 모린이 자신과 같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생각하지만, 그건 그의 착각일 뿐이다. 정작 모린은 루이스에게 느꼈던 역량의 차이를 고백하며 자신이 부단히 오빠를 따라가려 노력했다는 것을 고백한다. 끝내 오빠와 같은 속도로 같은 길을 걸을 수 없었던 결말까지.
모린은 자신이 벅찰 정도로,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시간을 넘어 죽음에 돌진해버린, 나와 같은 심장기형을 갖고 있던 존재로 루이스를 기억한다. 따라서 "이제 그만 벗어나야죠." 란 말속에, '벗어나야 하는 것'은 루이스를 향한 감정들이 아니라 모린, 자신이 망가트린 마음인 셈이다.
출처: 영화 <퍼스널 쇼퍼> 스틸컷 (다음)
끝없던 모린의 고뇌와 방황은 키라의 죽음으로 멈춘다. 자신을 흔들어놓던 익명의 존재가 키라를 죽인 내연남이었다는 사실에 모린은 곧장 남자 친구가 있는 오만으로 떠난다. 지금까지 자신이 원했던 욕망을 채우는 행위는 이제 더는 어떠한 효과도 얻을 수 없었으며, 사실적으로 그 효력 또한 모린을 드라마틱하게 바꿔주지 못했다. 그녀가 원하는 건 내가 아닌 존재였고, 확신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녀에게 남은 건 피를 흘리며 싸늘하게 죽은 키라의 시신과 키라를 죽인 내연남의 도주뿐이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전부 명백한 사실로 무장한 진짜였다.
오만에 도착한 모린. 현실로 복귀한 그녀에게도 드디어 자신만의 공간이 생기는 걸까?
타인이 되고 싶은 욕망은 사라졌을까? 이젠 자신에 대해 설명할 수 있을까? 안타깝지만, 전부 확신할 수 없다.
모린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이에게 진실과 거짓을 섞어 말하고 있었고, <퍼스널 쇼퍼>는 그녀의 언어를 분석해 진위를 가리는 것보다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을 택했다.
마지막 남은 질문의 답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과연, 정말 루이스는 모린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는 걸까?
"루이스 너야?"
마침내 오만의 한 고택에서 루이스로 추정되는 영혼과 모린은 교감한다. 그녀는 루이스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과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영혼에게 계속해서 질문한다. 긍정을 의미하는 "쿵!" 소리에 힘입어 영혼의 주인이 루이스라고 확신하는 모린. 그러나 그녀는 또다시 질문하는 실수를 범한다. 같은 질문을 또 하고 또 하면서 스스로에게 의심을 주입하는 걸 멈추지 못한다. 브레이크가 고장 나버린 자동차처럼 그녀는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잊어버린 듯 군다. 결국 영혼은 대답하지 않는다. 이어지는 침묵.
무엇을 믿고 어떤 것을 믿지 말아야 할지 구분조차 되지 않는 지경에 이른 모린은 결국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아니면 그저 내 상상인 건가?"
"쿵!"출처: 영화 <퍼스널 쇼퍼> 스틸컷 (다음)
모린의 인생은 온통 흑백이며, 그 안엔 대답 대신 물음이 가득하다.
우린 대답을 찾는 걸 더 선호한다. 대답을 갈구하는 일은 질문하는 것보다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린 의문과 의문이 만든 모호함과 괴이함으로 삶을 살고 있다. 세상의 모든 질문에 정답을 찾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또 있을까. 영화는 루이스의 죽음으로 시작된 모린의 물음표가 꼿꼿하게 세워질 기미가 보이면, 재빨리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까지가 가짜인지 아무도 모르게 방향을 뒤집는다. 모린이 틈만 나면 찾아봤던 심령 주의 다큐나, 영매 작가의 전시회, 빅토르 위고의 작품 등이 이에 해당한다. 손수 조각난 이야기를 삽입해 관객이 착각과 확신 사이에서 길을 잃도록 유도한다.
따라서 우린 루이스가 모린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는지, 정말 모린의 신호에 응답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나아가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전부 모린의 착각일 수도 있다. 모린의 뒤로 둥둥 떠다니던 유리컵을 든 영혼이 루이스가 아닐 수도 있다. 중요한 건 확신할 수 없기에 확신할 수 있는다는 것이다. 답을 요구하지 않고, 먼저 질문하는 건 스스로에게 줄 수 있는 안전한 수단이자 계속 나아갈 수 있는 방식이다.
<퍼스널 쇼퍼>가 모린을 나무라지도 답답해하지도 않는 건, 물음을 가진 것 역시 그녀이고, 의심을 멈추지 못하는 것 역시 그녀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품은 물음표는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그 방식이 또 물음표로 이어지더라도 그것은 '생'의 문제이기에 '사'가 관여할 수 없다.
<퍼스널 쇼퍼>는 믿음을 신뢰하지 않는다. 하여 모린의 마지막 질문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난 그게 불편했으나 고마웠다.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이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영화는 질문하는 것이다"라고.
질문하는 것. 그의 말이 맞다. 영화는 끝없이 질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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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고 작은 부조화와 모순들
내게 있어 <이터널스>(2021)는 의외로 클로이 자오가 연출한 영화로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노매드랜드>(2020) 한 편만 본 나의 편협하고 얕은 식견으로 넘겨짚는 것일 수 있겠으나, 이 영화에서 나는 자오 특유의 스타일이 묻어났다는 생각에 앞서, 영화의 크고 작은 요소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감독의 작가 의식과 제작 환경 간의 괴리뿐만 아니라, 인물과 관객들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자연광을 최대로 활용하고 로케이션을 섬세하게 기획한 뒤 인물들을 공간에 동화되게 만드는 오묘한 질감의 서정성. 사실 <노매드랜드>에서는 이런 요소들을 굳이 힘들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지만, <이터널스>에선 영화를 보는 내내 이게 자오가 연출한 영화라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으면 그런 서정미를 느끼기 정말 힘들다. 인류사 초기 문명의 태동기에 이터널스 멤버들이 한 명씩 우주선에서 천천히 내려오는 익스트림 롱 숏을 떠올려 보면 더욱 명확하게 생각이 정리된다. 장면을 잇는 리듬도 살짝 성급하게 느껴져서 관객과 인물들이 모두 자연 풍광에 스며들 기회를 쉽게 주지 않는 영화인 것 같다. 차라리 최근에 봤던 <듄>(2021)의 아득한 사막이 진득하게 뿜어내는 텁텁한 물성, 그리고 그 속에서 황량한 표정을 제대로 각인시켰던 티모시 샬라메의 얼굴을 감싸는 모래폭풍이 문득 그리워진다.
사실 <이터널스>에선 인물들이 공간에 녹아들 수 없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이건 영화의 존재적 의의와 결부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영역이긴 하다. 바로 서사의 문제다. <이터널스>는 제한된 분량으로 페이즈의 확장 및 세계관의 가교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매우 독특한 포지션에 자리 잡은 MCU 영화다. 자오의 작가적 역량이나 의식과는 별개로 마블에서 <이터널스>에 요구하는 최소한의 충족 기준치가 존재한다.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2021)로 본격화시킨 페이즈 4에서 이 영화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이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이때 영화는 욕심 그득한 선택을 내린다. 드라마에 초점을 맞추되 마블 세계관에 종속된 영화처럼 느껴지게 온갖 장치를 삽입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영화가 핵심으로 고려하는 드라마의 깊이는 매우 얕다. 표면만을 건드리며 듬성듬성 훑는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사실 파편화된 내러티브를 가진 영화들이나 매우 헐거운 다성적 서사를 기반으로 하는 영화들이라도 관객들을 매료시키는 영화들이 얼마든지 있다. 왕가위의 <중경삼림>(1994)은 도통 맥락이라고는 찾기 힘든 낯선 인물들의 사연을 과감히 교차하고 나열하고 있지만, 이 영화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드라마의 측면에서 영화의 화술을 이해하는 관객은 매우 많다. 그런 점에서 <이터널스>는 관객들이 캐릭터와 함께 호흡을 맞출 여지를 남기지 않는 듯 보인다.
물론 이에 관한 변호 혹은 항변의 시도가 예상된다. '이터널스'는 그냥 인간들이 아닌 초월적, 신화적 존재들이며, 칠 천 년 넘게 지구에서 버텨 온 그들의 사연을 우리 입장에서 온전히 파악할 수는 없다. 그래서 오히려 중요 맥락에서만 짚어보는 방식이 훨씬 자연스러울 것이라는 변명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이터널스>는 10명이나 되는 이터널스 멤버들 각자의 사연을 하나씩 챙겨주려고 하면서도 이들과 숙명적인 관계로 얽혀 있는 데비안츠와 셀레스티얼까지 건드려야 하는 엄청난 규모의 대서사를 두 시간 반 만에 단숨에 전개한다. 교차되는 시간대에 있어서도 하루 전이나 일주일 후 등이 아니라, 몇 세기는 기본이고 현대에서 바빌론 문명의 시간대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는 과감한 작법을 선보인다. 인류사의 중요 맥락을 건드리는 시간대 교차라는 겉핥기 화법으로 대서사 전개 시의 맹점들을 최소화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흐름에 종속된 주요 캐릭터들의 감정선을 세밀하게 다루는 방식은 관객들의 호응을 이끌어내기 힘들뿐더러 영화의 화법과는 어울리지 않는 접근이다.
<이터널스>에서 태고의 질감을 불러오고자 신화적 존재들을 대자연의 풍광과 버무려서 담아내려는 시도는 애초에 클로이 자오의 영화가 주안점으로 두던 것들이 아닌 듯하다. 그래서 <이터널스>는 자오(및 제작진과 파이기)의 판단 미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자오의 연출력이 발휘될 수 있는 지점은 바로 인물들의 섬세한 감정을 시공간의 맥락과 연동시키면서 관객에게 스며들게 하는 순간들이다. <노매드랜드>에서 펀과 밥이 햇빛을 받으며 의자에 앉아 잠시 대화를 나누면서 속내를 공유하던 순간이 내게는 생생하게 남아 있다. <이터널스>에서도 역시 그런 지점들이 발견되는가? 아, 의문 포인트가 잘못됐다. 애초에 <이터널스>는 그럴 수가 없는 영화다. 기본적으로 관객과 인물들 사이에서 공유될 수 있는 시공간의 괴리가 엄청나기 때문이다. 인류 문명의 발전과 늘 함께 해온 초월적이고 신비한 존재들을 관객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과연 얼마나 많을까.
그런 미지의 존재들이 갑작스레 인간들처럼 다양한 감정들을 표출하려고 한다. 연인이 섹스를 할 때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는 장면은 사실 많이 오글거리는 데다가 배우들의 합도 잘 안 맞아 보였다. 여기서도 역시 영화의 항변이 소환될 수 있을까? 이들이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관객들은 이터널스 각각의 사연을 보면서 인간의 인식 체계로는 이입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으리라 짐작해야만 하는 걸까? 그러기엔 영화가 이 각각의 멤버들을 너무나 '인간적'으로 묘사하려고 한다는 점은 분명 모순이다. 이터널스 멤버들을 찬찬히 살피면, 겹치는 면모가 하나도 없다. 현대 사회의 다양성을 반영하듯 인종과 성별, 성적 지향성, 신체 특성 등에 따라 열 명의 캐릭터들이 마치 그 자체로 모종의 인류 집단을 표상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이터널스 멤버들은 절대자 같은 능력을 지녔음에도 인간적이어야만 한다. 캐릭터들의 다양성이 정치적인 측면에서 쟁점이 되기 이전에, 이미 영화 내적으로 서사와 결부된 영역에서 다뤄질 수 있지 않은가. 이들은 연약한 수호자들이며, 고뇌와 혼란에 사로잡혀 선택해야 하는 불완전한 자들이다. 그리고 그 정체성에 관한 고민과 딜레마의 문제가 바로 <이터널스>의 서사를 전개하는 동력이 된다.
인물들의 감정 변화와 그로 인한 부산물에 주목하는 <이터널스>에선 그에 따라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정신없이 나열되는 인물들의 사연을 토대로 생성되는 감정선을 단숨에 증폭시킬 매개체들이 적재적소에 유려하게 자리 잡고 있어야 하는데, 그 자리에 타율이 신통치 않은 마블식 유머와 멤버 간의 시너지가 잘 느껴지지 않는 어쭙잖은 액션(길가메시와 테나, 킨고와 마카리 등이 합을 맞추는 장면들은 많이 아쉽다)이 있다는 점은 분명 패착이다. 어쩌면 예견된 운명인가. <이터널스>는 코믹스 원작 세계관 기반의 상업영화라는 속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따라서 <이터널스>는 그 자체로 어정쩡하고 모호한 영화가 된다. 주제가 모호하다거나 영화 자체가 불가해한 매력을 뿜어낸다는 말이 아니다. 말 그대로 방향성이 정해진 각각의 요소들이 어우러지는 과정에서 맥락이 연동되지 않은 채로 마구 뒤섞인 모호한 상태에 놓인 영화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사실 나는 <이터널스>가 어떤 영화일지 궁금했다. 과연 클로이 자오만의 영화가 될 수 있을까, 작가 의식과 상업성 추구를 오가는 줄타기를 얼마나 유려하게 선보일 것인가 등과 같은 의문들은 이 영화에 관한 관심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이터널스>는 여러 군데에 손발을 걸쳐놓은 의뭉스러운 인상만을 남긴다. 규모와 디테일의 부조화, 어필하려는 지점들이 미처 고려하지 못한 모순점들이 매우 아쉽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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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젠 나에게 네가 있어 나의 보물 , 나의 친구
스페인 스캄의 원작은 노르웨이 웹드라마 <스캄> 시리즈이며 스캄은 유럽에서 많은 나라들이 리메이크를 했다. 그중 리뷰해볼 드라마는 티빙에서 공개된 스페인 스캄이다.
스페인 스캄은 원작과는 약간 다른 각색을 시도 하였다.
시즌1에서는 사이버 불링에 대한 심각성을 다루고 시즌2는 원작 스캄과 다른 리메이크작은 퀴어 시즌이 남성 퀴어 청소년을 다루었다면 스페인은 처음으로 여성 바이섹슈얼 청소년들을 다루고 있다. 시즌3는 노라가 대학생 남친으로 부터 당한 가스라이팅, 사이버 성범죄를 다루며 시즌4는 무슬림 흑인 청소년으로 살아가는 아미라의 삶을 다룬다. 나랑 정반대의 나라의 청소년 드라마를 보고 이상하게도 공강 되었고 같이 슬퍼하고 같이 기뻐하고 나를 위로해주기도 한 드라마였다. 제각각인 네명이 졸업 여행을 가기 위해 돈을 모으겠다는 목적 하에 모였다. 이들은 도덕적이지도 그렇다고 비도덕적이지도 착한 사람도 나쁜 사람도 없다. 우리가 청소년기에 저지를 수 있는 실수들, 그리고 화해와 반성, 성장, 고민들을 다루고 있다.
시즌1 주인공인 에바는 친한 친구의 남친과 사귀게 되어 평생의 절친과 사이가 흐트러지고 친구가 없는 외로움을 남친과의 사랑으로 달래려고 한다. 하지만 남친도 친구가 따로 있고 남친의 모임에 낀 이방인 같은 존재가 된다. 에바는 남자친구와 있지만 굉장히 외로워 보인다. 여성들의 우정은 이성과의 사랑으로 대체할 수 없다는 점이 깊게 공감 되었다. 에바는 어떤 사진에 의해 사이버 불링을 당하고 그 범인이 자신의 친구인 비리라는 것을 알게 된 후 자신보다 먼저 나서주는 크리스,노라,아미라가 곁에 있었다. 하지만 에바 -비리 둘의 관계를 여성의 적은 여성으로 다루지 않는다. 결국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 비리가 저지른 실수를 다시 본인이 수습을 하며 끝낸다 . 비리의 찌질한 모습 조차도 한국에서 10대를 보낸 여성이라면 이해가 되게끔 연출 했으며 둘은 화해를 한다. 또 에바는 자신의 절친 한테 찾아가 진심 어린 사과를 하고 화해의 손길을 건내고 에바는 자신을 위해 잠시 남자친구와의 거리를 두기로 한다.
이렇듯 여성 청소년들의 실수를 무조건 나쁜 것 으로만 표현하기 보다는 아직 어리기 때문에 우리는 넘어 질 수 있고 넘어지면서 생긴 상처를 통해 한 단계 더 배우는 과정을 담고 있다.
시즌2 에서는 양성애자인 크리스와 요아나의 로맨스를 다루고 있다. 크리스와 요아나가 사랑하는 과정에선 요아나의 정신적 질환으 로 인해 사이가 멀어지기도 하는데, 그 과정을 이상하거나 특이하게 그려내지 않았다.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 들이고 기다려준다. 자신이 헤테로인줄 알았던 크리스가 전학생 요아나로 인해 흔들려하는 모습, 무슬림 친구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할것 같다고 고민하는 모습들이 현실적이기도 하였고 귀엽기도 하였다. 아직 10대 여성 청소년을 다룬 퀴어 드라마는 적기에 이 드라마는 뜻깊은 드라마 였다. 그 외에도 여성들이 다 같이 피임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들, 여성의날 시위에 나가는 장면들 등 여성 감독님으로써 다루고 싶어 하신 여성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담아내셨다.
이 다섯명의 주인공들이 힘들 일을 겪으면 옆에서 같이 울어주고 안아주고 응원해주는 친구들이 있다. 이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10대 시절에 내 친구들에게 저렇게 까지 진심이었나, 조금만 더 잘해 줄 걸 후회가 되기도 혹은 아직도 남아 있는 친구들이 있음에 고맙다는 감정이 들기도 하였다. 스캄의 주인공들은 약간은 특별하다고 불리우는 인물들이지만 이들은 이 드라마 속에서 특이한 존재로 보이지 않는다. 그냥 남들과 똑같이 일상 생활을 하고 그들은 평범하게 하루하루를 보낸다. 우리의 일상 속 평범한 하루에 이들은 어디에나 존재 하고 있다. 이들은 아직 미성숙하고 삐끗되는 청소년기지만 서로와 서로가 있기에 의지할 수 있고 앞으로 성장할 미래를 기대하게 된다. 이 드라마는 끝났지만 언제 어디서나 행복한 에바,크리스,노라,아미라,비리 이길.
+ 이 리뷰에서 다루지 않은 다른 시즌들도 정말 의미 있는 시즌이고 원작의 각본이 워낙 좋기 때문에 리뷰를 읽어보시고 흥미 있으시면 원작도 꼭 보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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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챌린저스 | 테니스 코트 위에서 피어난 삼각 로맨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주니어 시절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대학 시절 부상 때문에 일찍 은퇴한 비운의 테니스 천재 ‘타시’(젠데이아). 그녀는 테니스 선수인 남편 '아트'(마이크 파이스트)의 코치를 맡아 테니스와의 인연을 이어간다. 그러던 중 커리어 그랜드 슬램을 눈앞에 둔 아트가 좀처럼 연패 슬럼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자 타시는 남편을 챌린저급 대회에 참가시킨다.
그러나 타시는 자기 선택을 이내 후회한다. 아트의 어릴 적 절친이자, 자기 전 남자 친구인 ‘패트릭’(조쉬 오코너)의 대회 참가를 깨달았기 때문. 패트릭과의 만남을 가능한 피하려 한 타시. 그러나 테니스에 대한 열망이 사라진 아트와 달리 여전히 테니스를 사랑하는 패트릭을 보면서 그녀의 마음은 조금씩 흔들리고, 아트와 패트릭은 코트 안팎에서 타시를 사이에 둔 랠리를 시작한다.
로맨스일 수밖에 없는 테니스 영화
팬데믹을 거치며 선풍적인 인기를 모은 스포츠, 테니스. 과연 테니스의 매력은 무엇일까? 김기범 KBS 테니스 전문 기자에 따르면 테니스의 본질은 심리전이다. 정신적 무장이 흔들리는 순간 승부는 뒤엉킨다. 네트 앞 선수를 상대로 쉼 없이 뛰면서도 다음 수를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위대한 챔피언들은 무섭도록 냉철한 평정심을 유지하는 심리전의 마스터들"인 이유이기도 하다.
달리 말해 테니스는 다른 스포츠에 비해 유달리 코트 위 두 사람의 관계가 눈에 띄는 스포츠다. 단순히 공을 치는 게 아니라 상대와의 관계에서 어떻게 우위에 서느냐가 핵심인 것. 여기에 테니스만의 독특한 규칙을 더하면 테니스에는 새로운 의미가 깃들기도 한다. 테니스에서 0점이 '러브(Love)'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테니스는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라 누가 사랑의 우위를 점할지 결정하는 승부이기 때문.
이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이 테니스 영화를 만들겠다고 결심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의 작품은 대체로 인물 간의 관계, 특히 사랑의 감정과 에너지로 스크린으로 가득 채우는 데 집중하한다. 그의 신작 <챌린저스>도 마찬가지다. 스포츠 영화의 탈을 썼지만, 본질은 로맨스다. 테니스 랠리의 묘미를 120% 이끌어내되, 관객을 승패가 아닌 사랑과 우정, 욕망의 랠리 속에 빠뜨리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단순한 구조로 극대화한 캐릭터의 힘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한 가지 특징은 '금기'다. 그는 사회적으로 널리 용인되지 않는 소재를 자주 다룬다. 동성애, 성인과 미성년의 사랑, 식인 등. 그래서 그의 작품은 소재를 관객에게 어떻게 납득시키느냐가 늘 관건이다. 관객이 구아다니노의 관점을 수용하면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처럼 대중적인 작품이 탄생한다. 반면에 관객과 구아다니노가 어긋나면 <본즈 앤 올>처럼 외면받는 작품도 나올 수 있다.
이때 구아다니노는 영화를 극 예술 이전에 영상 예술로 대하는 듯하다. 정교한 스토리텔링으로 관객을 이해시키지는 않는다. 어차피 금기에 도전하는 입장에서 논리적인 접근은 역효과가 날 가능성이 크니까. 대신 그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에너지를 극대화해 관객으로 하여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영화에 빠져들도록 유도한다.
<챌린저스>도 마찬가지다. 한 여자를 사랑하는 두 절친. 두 절친을 가지고 노는 한 여성. 자칫 막장 드라마로 빠지기 쉬운 삼각관계다. 구구절절 설명해도 공감하기 어렵다. 그래서인지 구아다니노는 <챌린저스>의 구조에는 크게 힘을 주지 않는다. 마지막 시합을 가장 먼저 보여준 후에, 플래시 백을 다수 삽입해 과거와 현재의 연관성을 부각하는 익숙한 구성을 취한다.
대신 <챌린저스>는 캐릭터를 빚어내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명확히 구분되는 세 캐릭터의 특징을 강조하고, 그들의 차이점이 빚어내는 갈등을 원동력 삼아 이야기를 끝까지 밀어붙인다. 특히 그 갈등은 주로 테니스 코트 위에서, 다양한 랠리의 형태로 드러난다. 서로 다른 사랑의 방식과 사랑의 대상을 의인화한 뒤 코트 위에 맞부딪히는 식인 셈이다. 극 중 "테니스는 관계"라는 타시의 대사가 의미심장한 이유다.
코트 위에서 피어나는 삼각형
우선 <챌린저스>는 두 절친을 대조한다. 아트는 계산적이다. 단 1%라도 열세라고 판단하면 섣불리 나서지 않는다. 첫눈에 타시와 사랑에 빠졌지만, 그녀가 자기에게 넘어올 완벽한 기회가 올 때까지는 친구로 남는다. 코트 위에서도 마찬가지다.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면 굳이 전력을 다하지 않는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한계가 찾아왔다고 판단하자 미련 없이 테니스 코트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반면에 패트릭은 본능적이다. 고로 직선적이다. 마음에 드는 여자가 생기면 앞뒤 따지지 않고 달려 나간다. 코트 위에서도 마찬가지다. 타고난 천재인 그는 마음 가는 대로 라켓을 휘두른다. 코트 위에서의 규칙과 매너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러니 두 친구가 한 여자를 두고서, 또 네트를 사이에 두고 치열하게 맞부딪히는 건 놀랍지 않다. 추로스를 먹는 장면만 봐도 알 수 있다.
타시는 이들과 또 다르다. 오직 테니스만 사랑하는 타시는 함께 테니스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에게 마음의 문을 연다. 그래서 아트를 꺾고 US 오픈 주니어 대회에서 우승한 패트릭을 선택하거나, 메이저 대회 우승을 위해 그녀를 코치로 영입하겠다는 아트와 사랑에 빠진다. 이는 높은 랭킹에도 불구하고 열정을 잃은 아트와 순위는 낮지만 여전히 테니스를 사랑하는 패트릭 사이에서 계속 갈등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스포츠 영화 클리셰를 포기한 이유
따라서 <챌린저스>는 로맨스일 수밖에 없는 스포츠 영화다. 테니스와의 사랑과 타시와의 사랑을 나눌 수 없으므로. 두 절친의 우정도 마찬가지다. 아트와 패트릭은 테니스가 이어준 절친이다. 타시가 눈앞에 나타난 후로 관계가 끊어진 그들. 하지만 다시 한번 타시를 사이에 두고 경기를 펼치면서 그들은 코트 위에서 함께 한 추억을 비로소 되찾는다. 이는 둘의 치열한 랠리에 타시가 아낌없이 박수를 보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연장선상에서 보면 누가 승리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트와 패트릭의 마지막 시합이 셋의 관계를 파멸로 이끌지 않기 때문. 오히려 셋 모두의 인생에서 사랑, 우정, 테니스를 향한 욕망이 완성되는 순간에 가깝다. 달리 말해 머리로는 쉽사리 이해하기 힘든 셋의 사랑과 우정, 곧 '폴리아모리(Polyamory)'를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순간인 셈이다.
이 관계성에 집중하기 위해 <챌린저스>는 스포츠 영화의 몇몇 클리셰를 포기한다. 중계진의 부재가 대표적이다. 보통 스포츠물에서는 중계진이 선수나 감독에 관한 정보를 알려주며 극적인 상황을 조성한다. 하지만 <챌린저스>는 해설자를 없앴다. 대신 그 빈자리를 관객에게 양보한다. 세 주인공의 역사를 이미 알고 있는 관객이 자기만의 관점에서 경기를 읽어 내도록 유도한다. 그 덕분에 세 주인공의 갈등은 더 첨예하게 느껴진다.
또 스포츠물에서 뺄 수 없는 라이벌 관계도 암시에 그친다. 천재 패트릭과 노력파 아트는 주니어 때부터 라이벌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재회한 순간, 영화는 라이벌리에 크게 주목하지 않는다. 아트가 패트릭의 낮은 랭킹을 지적할 뿐이다. 그들의 게임은 사실 타시가 누구를 진정으로 사랑하느냐가 핵심이니까. 다만 그 대가로 이야기를 풍성하게 꾸밀 기회는 놓쳤다. 패트릭이 타시를 코치로 원하는 이유 등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기 때문.
눈과 귀로 받아들이는 이야기
더 나아가 영화는 세 주인공의 관계를 감각적으로 보여주려 애쓴다. 일례로 그들의 관계가 코트 위에서 가장 단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가능한 역동적인 테니스 경기를 보여주려 한다. 선수 같은 느낌을 내려다가 실패할 지점은 아예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공에 카메라를 붙인 구도로 랠리를 보여주거나, 감정이 실린 공을 3D 영화처럼 카메라를 향해 돌진시킨다. 그 결과 랠리 장면은 주인공들의 섹스 장면 못지않게 긴장감 넘친다.
'나인 인치 네일스'로 활동 중인 트렌트 레즈너와 애티커스 로스가 담당한 영화 음악도 인상적이다. <소설 네트워크>, <소울> 등의 영화 작업에 참여했던 그들은 앰비언트 스타일 음악으로 필요한 순간마다 긴장감을 고조한다. 특히 소셜 네트워크>에서 페이스북의 두 창립자 간의 갈등과 배신을 음악에 담아냈듯이, 이번에도 사랑의 작대기가 엇갈리는 순간마다 그 균열감을 탁월하게 부각했다.
젠데이아의 인생 연기
마지막으로 배우의 연기를 빼놓을 수 없다. <더 크라운>에서 찰스 왕세자를 연기한 조쉬 오코너, 토니 상과 에미 상을 모두 석권한 마이크 파이스트의 연기도 훌륭했다. 하지만 특히 젠데이아가 인상적이다. 그녀는 HBO 드라마 <유포리아>나 넷플릭스 <맬컴과 마리>에서 주연으로서 확실한 존재감을 이미 보여줬다. 반면에 조연으로 참여한 <스파이더맨>, <듄> 같은 블록버스터에서는 미묘하게 어색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직접 제작자로 참여한 <챌린저스>에서는 다르다. 유독 빛난다. 구아다니노 감독과 협업이 신의 한 수로 보인다. 상술했듯이, 그의 영화에서는 사랑의 주도권을 쥔 캐릭터가 빛나야만 관객을 설득할 수 있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티모시 샬라메가 일약 스타덤에 오를 수 있었던 배경이다.
젠데이아도 마찬가지다. 타시는 테니스라는 목적을 위해 두 남자를 부추기는 인물, 곧 킹메이커다. 테니스 코트 위에서 게임은 두 남주가 하지만, 정작 주인공은 타시다. 이처럼 본인이 중심에 서고, 상황을 통제하고, 가장 빛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자 젠데이아는 스크린을 자기 리듬대로 거침없이 휘어잡아 버렸다.
결정적인 전략 실패
다만 개봉일은 몇 안 되는 아쉬움이다. 과거에는 외화의 개봉 전략 중 2등 전략이 유효했다. 전체 개봉 영화 중 2등, 혹은 외화 중 2등 포지션을 차지한 뒤 낙수 효과를 살려 관객 수를 야금야금 늘리는 방식이다. <아바타>, <전우치>와 같이 개봉했는데도 2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셜록 홈즈>가 대표적이다.
문제는 코로나 이후 한국 극장가에서 2등 전략이 유효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제 낙수효과는 사라졌기 때문. <서울의 봄> 이후 개봉한 <노량>은 흥행에 실패했다. 설 연휴 이후 개봉한 <파묘>는 7주간 1위를 차지하며 천만 영화가 됐다. 관객이 재미와 만족감이 담보된 대형 영화에 집중되는 경향은 나날이 강해졌다.
그렇기에 굳이 <범죄도시4>와 같은 날에 개봉해 초반 관객을 늘리기도 어렵고, 입소문을 퍼뜨리기에도 불리한 환경을 자초할 필요가 있었나 싶다. 감독의 명성으로 보나, 배우의 연기력으로 보나, 전체적인 완성도로 보나 <범죄도시4>의 흥행 광풍에 밀려 사라지기에는 아까운 작품이기에 아쉬움이 더 크다.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공이 아닌 사랑, 우정, 욕망을 치고 달리는 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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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왓챠에서 볼만한 학교 폭력을 다룬 영화들 BEST 7
넷플릭스 왓챠에서 볼만한 학교 폭력을 다룬 영화들 BEST 7
넷플릭스와 왓챠에서 볼만한 영화시리즈입니다. 요즘 벌어지는 '학교폭력 폭로사태'라는 테마에 맞춰서 '피해자' 관점에서 학교폭력을 다룬 영화들을 모아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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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시절의 너 (少年的你·2019)
[줄거리] 빚쟁이 어머니와 떨어져 홀로 대입을 준비하는 고3 천니엔(주동우)와 어린 시절부터 홀로 길거리에서 생활한 샤오베이(이양천새)는 둘 다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사랑을 키워가지만...
<소년 시절의 너>는 20세기 홍콩영화처럼 학원폭력을 과잉된 정서로 전시한다. 과잉된 연출 방식이 노리는 것은 ‘입시제일주의’를 주입하려는 어른들을 정 조준한다. 교육의 목적이 자기 계발이 아니라 지위 상승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중국 어른들은 중국 아이들에게 ‘계층에 대한 욕망’을 주입한다. 그 아이들은 친구를 존중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보다는 자신이 밟고 올라서야 할 ‘경쟁자’로 취급한다. 이것이 우리나라 청소년이 전 세계에서 행복도가 가장 낮은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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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의 왕 (The King Of Pigs·2011)
[줄거리] 회사 부도 후 충동적으로 아내를 살인한 ‘경민(오정세)’은 자신의 분노를 감추고 중학교 동창이었던 ‘종석(양익준)’을 찾아 나선다. 소설가가 되지 못해 자서전 대필작가로 근근히 먹고 사는 종석은 15년 만에 찾아온 경민의 방문에 당황하는데...
소위 ‘일진’, ‘짱’, ‘캡’, ‘학교 통’이 폭력으로 군림할 수 있는 이유는 뭘까? <돼지의 왕>은 힘 센 학생의 횡포에 침묵으로 동조하는 아이들은 ‘돼지’라고 묘사하며 학교 폭력의 이면에 대한 성찰을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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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꾼 (Bleak Night·2010)
[줄거리] 한 소년이 죽었다. 평소 아들에게 무심했던 소년의 아버지(조성하)는 아들의 갑작스런 공백에 매우 혼란스러워하며 뒤늦은 죄책감과 무력함에, 아들 기태(이제훈)의 죽음을 뒤쫓기 시작한다. 아들의 책상 서랍 안, 소중하게...
10대 소녀보다 더 예민하고 섬세한 소년들의 갈등과 균열을 이보다 더 사실적으로 그릴 수 있을까? <파수꾼>은 명확한 해답을 공개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래 집단 내의 암묵적인 권력관계는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예민하고 복잡하다. 단순해보였던 역학관계의 복잡성과 통제불능성을 보여주면서, 견고해보였던 권력구조가 생각보다 허술하고 붕괴되기 쉬움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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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告白·2010)
[줄거리] 자신이 근무하는 중학교에서 어린 딸 ‘마나미’를 잃은 여교사 ‘유코’(마츠 다카코)는 봄방학을 앞둔 종업식 날, 학생들 앞에서 차분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자신의 딸을 죽인 사람이 이 교실 안에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고백한다...
<고백>은 피해자의 부모가 가해자들을 응징하는 이야기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가해자로 드러나는 학생들은 결국 부모들의 무관심 또는 과도한 관심에 의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학교 폭력'이란 게 결국 기성세대가 떠안아야할 문제라고 확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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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Our Twisted Hero·1992)
[줄거리] 40대의 한병태는 회사를 그만 두고 시작한 지 1년 된 학원 강사다. 사회 속의 권력, 암투에 적응하지 못하고 폐쇄된 학원 공간에서 소극적인 삶을 살아가는 병태에게 어느날 국민학교 동창생인 황영수로부터 최선생(신구)의 부음 소식을 듣는다. 그런 그에게...
"일진"인 엄석대와 그 패거리가 한병태를 "왕따"로 만들고, 복종시킨 다음에는 "빵 셔틀"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치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소설은 수십년 전 작품임에도 오늘날 교실 내에서의 폭력의 본질이 무엇인지 매우 정확히 바라보고 있다. 집단따돌림을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이들 스스로가 아니라 결국 어른들과 공권력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
한편, 영화는 원작보다 훨씬 더 현대사에 빗대어 어떤 대상을 비판한다. 영화가 비판하려는 대상은, 엄석대 밑에서 부조리에 순응한 자들이 때때로 그 앞잡이 노릇까지 하면서 질서를 수호하려 했던 ‘독재에 순응한 구성원’들이 일말의 반성도 없이 끈 떨어진 권력에 손가락질 하는 군중심리이다. 이때 가장 모자라 보이는 친구 영팔이 ‘니네들도 나쁘다’며 울먹인다. 부조리는 엄석대가 옳지 못함을 알면서도 대항하기를 포기해버렸던 ‘이름 모를 녀석’들에 의해 유지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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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죽거리 잔혹사 (Spirit Of Jeet Keun Do - Once Upon A Time In High School·2004)
[줄거리] 1978년 말죽거리의 봄, 현수(권상우)는 강남의 정문고로 전학온다. 정문고는 선생 폭력 외에도 학생들간 세력다툼으로 악명높은 문제학교. 이소룡 열혈팬이라는 이유로 금새 죽고 못사는 친구가 된 모범생 현수와 학교짱 우식(이정진). 하교길 버스안에서 올리비아 핫세를 꼭 닮은...
<말죽거리 잔혹사>는 <비트>나 <친구>처럼 남학생들의 폭력세계를 다뤘지만, 사내들의 의리와 우정을 찬양하는 영화가 아니다. 내적으로는 영웅(역할모델)이 필요한 십대 사고방식을 탐구한다. 청소년기에 유독 연예인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기 때문이다.
외연은 어떠한가? 독재 체제는 모든 국민들이 독재자 개인을 위해 움직여주기를 바라지만, 대부분의 국민은 자기 자신을 위해 행동한다. 권력에 저항하는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불합리와 불의가 횡행한다. 교실 내의 권력관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이들은 비겁한 어른들을 닮아가거나 폭력에 호소한다. 그래서 “대한민국 학교 X까라 그래!”라는 대사가 유달리 사이다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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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의 형태 (映画 聲の形·2016)
[줄거리] 초등학생 시절 그 애를 정말 많이도 괴롭혔다. 청각 장애가 있던 그 여자애는 늘 웃기만 했지. 그때의 잘못을 지금이라도 바로잡을 수 있을까. 용서받을 자격 따윈 없겠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서 사과할게. 너무 늦지 않았다면...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어떻게 용서를 구해야할까? 관객들은 가해자 이시다의 사과를 지켜보면서 타인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 곧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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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 스토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1984년 4월,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첫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1985년까지 짧은 시간에 무려 열세 명을 살해했으며, 수십 건의 폭행, 강도, 강간 범죄를 저지른 범죄가 발생했다. LA경찰은 처음 살인사건이 발생한 이후, 몇 건의 살인사건이 더 발생할 때까지 이들 살인 범죄가 연쇄살인이라고 판단하지 못하고 있었다.
민완 형사 프랭크와 신참 형사 길버트가 이 사건을 맡아 수사를 시작했다. 범인이 미쳐 날뛸 때는 열흘 사이에 다섯 건의 범죄를 저지르기도 했다. 범인은 매우 주도면밀해서 지문을 포함한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지만, 발자국은 어쩔 수 없었다.
생존자가 증언한 인상착의를 바탕으로 몽타쥬를 그리고, 범행 장소에서 발견한 여러 개의 족적을 확인하면서 범인이 신은 신발이 매우 특이한 신발이라는 걸 밝혀냈다. 그 신발은 나이키나 아디다스 같은 유명 메이커는 아니었고, 그리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회사에서 만든 제품으로, 모두 여섯 켤레가 대만에서 미국으로 들어왔고, 다섯 켤레는 다른 지역으로, 오직 한 켤레만 캘리포니아에 도착했다. 따라서 그 신발은 신은 사람이 범인인 것은 확실했다.
범인은 키가 약 180센티미터, 백인 또는 밝은색 피부의 남미 계열 사람이며, 신발 크기는 295밀리미터였다. 경찰은 비밀수사에서 공개수사로 전술을 바꾸고, 범인에 관한 정보를 미디어를 통해 공개했다. 한번은 가장 핵심 증거인 신발에 관한 내용은 빼고 언론에 알렸으며, 두번째는 LA시장이 직접 범인의 정보를 공개하는 자리에서, 형사들이 알고 있던 모든 정보를 공개했다.
수사를 하고 있던 형사들은 시장이 언론을 통해 말한 정보로 인해 범인이 자취를 감출 것이고, 수사는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경찰에게 퍽 운이 좋았던 상황이었다. LA시장이 생방송으로 범인의 정보를 언론 앞에서 알리고 있을 때, 범인은 LA를 떠나 다른 지역에 살고 있던 형을 만나러 갔고, 그 다음 날, 그레이하운드를 타고 다시 LA로 돌아온다.
단 하루 사이였지만, 모든 신문, 방송에서 범인의 얼굴 사진이 큼지막하게 박혀 있었고, 거리에서, 버스에서 시민들은 범인 리처드 라미레스를 알아보고 그를 뒤쫓기 시작했다. 결국 범인은 도주에 실패하고, 시민들에게 둘러싸여 린치를 당해 쓰러지고, 나중에 신고를 받고 달려온 경찰에 잡혀 경찰서로 이송된다.
범인 리처드 라미레스는 1985년에 체포되지만, 정식 재판은 1989년에 하게 되고, 그에게 적용된 43건의 사건이 모두 유죄로 선고되면서 리처드 라미레스는 사형 선고를 받는다. 하지만 그는 2013년 병원에서 암으로 자연사하는데, 그가 저지른 범죄에 비하면 행복한 죽음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리처드 라미네스는 1960년 생으로 멕시코인이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불우하고 불행한 환경에 둘러싸여 자랐다. 그를 둘러싼 부모, 친척들 모두 폭력적이고,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이었으며, 마약, 살인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는 모습을 어렸을 때부터 봤다고 했다.
그는 시민들에게 체포되고, 경찰의 심문을 받으면서도 아무런 죄책감이나 죄의식을 드러내지 않았다. 즉 인간의 모습을 한 '악마'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의아한 장면이 있었는데, 그가 체포되어 대중과 언론 앞에 나서는 장면에서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건 자신이 저지른 행위가 떳떳하지 못하다는 걸 의식하고, 인지하고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그 장면을 제외하고, 리처드 라미네스가 재판을 받는 장면을 보면, 일말의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는 수치심이 사라진 인간으로, 싸이코패스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인간의 외피를 한 '다른 존재'라는 걸 알 수 있다. 이런 표현이 비과학적이라는 건 알지만, 달리 표현하기 어렵다.
과학적 입장으로 보자면, 리처드 라미레스 같은 인간이 나오는 것 역시 사회가 한 '개인'에게 그런 영향을 끼친 것이고, 인간은 주위 환경의 영향을 직접 받으며 성장하기 때문에, '개인'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사람들과 살았느냐가 그 사람의 행동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된다는 것은 당연하다.
2009년, 미국의 '라이프'는 '세계의 살인마 31인'을 발표했다. 이 목록에 당연히 '나이트 스토커'인 리처드 마리레스도 있다. 이 목록에 등장하는 연쇄살인마들의 범죄를 보면, 오히려 리처드 라미레스의 악행은 밑바닥에 있을 정도로 끔찍한 살인귀들이 많다.
한국에서도 유영철, 이춘재 같은 연쇄살인범들이 존재하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가정환경이 매우 불행하고 불우했다는 것이다. 가정환경이 불우하다고 모두 연쇄살인범이나 범죄자가 되는 것은 아니니, 이것을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성장 환경과 과정이 개인의 삶에 깊은 영향을 끼치는 것만은 분명하다.
어린이 한 명을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함께 한다는 말은 과거의 공동체가 존재했을 때, 사람들이 사회적 관계를 긴밀하게 유지하며 살았음을 의미하는 말인데, 오늘날,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공동체를 해체하고, '개인'을 내세우며, 개인들의 연대와 협동을 구조적으로 파괴한다. 그것이 '자본주의'의 주인인 자본가들이 더 많은 이윤을 차지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범죄를 단지 개인의 성향, 일탈, 인성과 같은 비과학적 분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이 존재할 수 있는 사회적, 구조적 역학 관계를 들여다보는 것이 사회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고, 개인의 삶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여기에 '개인' 고유의 특성이 결합하게 되는 것이고, 극악한 범죄자들은 이런 '개인의 특성'이 그의 사회적 성장 배경과 결합해 범죄를 저지르는 인간으로 진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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띵-동? [댓글부대] 티저 예고편이(가) 업로드 되었습니다❗ ??인터넷에서 본 글, 어디까지 믿으세요??? 온라인 여론을 조작하는 #댓글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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