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er2021-11-21 22:26:00
영화 '틱, 틱... 붐!' 리뷰
**영화는 넷플릭스에 있습니다. 스포일러가 조금 있습니다.
왜 창작을 할까? 왜 손에 잡히지 않는 글자를 매만지는 걸까. 왜 그 험난한 과정을 인내해가며 버티는 것일까. 글이 잘 써지지 않는 날이면 이빨에 치석이 낀 것처럼 상당히 찝찝하다. 여기선 찝찝하다는 표현이 적절할까? 상쾌하지 않은 상태, 그렇지만 불쾌하다고 표현하면 지나치게 감정적이다. 나는 내 상태를 명쾌하게 진단했으니 좀 더 이성적인 표현이 어울린다. 갑갑한 마음에 아무런 단어나 덧붙일 수는 없다. 글은 오차를 줄이는 방향으로 흘러가야 한다. '치석이 낀 것처럼 잡념이 뇌의 시냅스를 막는다.' 흠, 시냅스를 막는다는 말은 적절한가? 의학적으로 용인될 수 있을 비유인가? 이렇게 한 문장이 막혀버리면 어떻게 남아있는 이 광막한 여백을 채우지?
글을 쓴다는 건 저런 생각들의 반복이다. 나는 저런 생각의 흐름으로 글을 쓴다. 저 과정이 온전히 자판 위에서 벌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지만 자정을 넘어서 두드리는 키보드는 대부분의 조용하다. 책상 위에 너저분하게 놓인 손목시계는 제 모양과는 상관없이 움직인다. 새벽 언저리에 들리는 시곗 소리는 그 웅장함이 천둥 같다. 초침이 분침을 밀어내고, 분침이 시침을 밀어낸다. 주기적으로 울리는 초침 소리는 둔탁하다. 초침이 부추기는 소리에 힘겹게 손가락을 자판에서 떼고 나면, 내가 글을 쓰는지 손가락이 지맘대로 움직인 건지 알 길이 없다.
조너선 라슨도 그랬다. 도저히 2막에 들어갈 곡을 써 넘길 수가 없다. 10분 앉아있다가 집에 날아온 고지서를 확인하고 시리얼을 먹고, TV도 좀 보다가 '자 이제 써볼까~' 하면 쓸 수가 없다. 아무 상관없는 설탕 노래는 그냥 영감이 솟아나서 세 시간 만에 뚝딱 만들었는데 정작 극에 들어갈 곡은 써내질 못한다. 그렇지만 멈출 수는 없다. 8년을 준비했으니까. 열심히 얻어먹고,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버틴 세월이 있으니까. 재능이라도 없다는 걸 미리 깨달으면 어떻게 포기라도 쉬울 텐데 말이다. 먹구름이 짙게 끼어서 비가 오겠거니 싶어 우산을 들고나갔더니 햇빛 한 줄기가 따라오는 모양새다.
전문가의 한 마디나 주변 친구들의 응원과 기대, 재촉하는 시간은 선택으로 밀어 넣는다. 삶에 대한 전방위적 압박에서는 선택의 순서를 매길 수가 없다. 순서가 사라지니 균형은 박살 난다. 과도하게 집착하며 시간을 투자하는 일이 있는가 하면 1초도 내어줄 수 없는 일도 생긴다. 판단의 기준은 이기적으로 바뀐다. 내 시간을 내 일에 투여하기 위해 사투를 벌여야 한다. 바로 앞에 놓인 길도 걷지 못하는데 주변을 살펴볼 수는 없으니까. 그렇지만 시간을 들인 노력이 정량적인 결과치를 보장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궁지에 몰리면 초인적인 기운을 낼 수도 있겠으나 확신할 수는 없다.
조너선은 웃음을 잃어간다. 예전에 친구들과 함께할 때는 웃을 수 있었다. 특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있어도 조너선의 농담은 먹혔다. 그때는 모두가 같이 웃었다. 서로의 인생을 이해할 수 있었다. 대장정의 마무리가 눈앞에 보이기 시작하면서 조너선은 초조해진다. 마지막 스퍼트를 올리지 못하면 무너질 것을 알았고, 지난 세월이 무상해질 것을 알았기에 웃을 수 없었다. 점점 웃음을 잃어가던 조너선이 그나마 웃을 수 있는 건 철저하게 물질적인 순간들 뿐이었다. 능력이 발휘된다고 믿던 때뿐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흘렀다. 그래서 그는 홀로 웃는다. 친구들은 모든 걸 쳐내고 몰두하는 조너선을 공감해줄 수 없었다. 그때의 그는 시간의 주인이 아니었기에.
앤드류 가필드의 연기도 놀랍고 온도가 그대로 느껴지는 화면도 환상적이었다. 빽빽하게 사람들로 구성을 짜서 느껴지는 압박감과 그걸 노래로 발산해내는 장면도 너무 좋다. 농담과 인생의 접점과 인간관계라는 저울이 선명하게 느껴지는 비유가 좋았다. 조너선의 선택 중에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없었다. 촘촘하게 꾸며진 장면들을 통해 묘사는 설득력을 더한다. 영화가 어떤 방식으로 마무리되는지는 반드시 직접 봐야 한다. 창작 활동과 일상생활은 별개의 선로를 달리다 의외의 접점에서 만나 교차한다.
작가는 기획 의도를 다듬어내는 것 이상으로 준비할 것이 없다. 거창한 이유를 늘어놓기 시작하면 만드는 작품들이 교조적이게 된다. 좋아해야만 하는 이유로 가득 찬 작품들만 만들어진다. 당위로 가득 찬 작품은 관객의 시선을 통제한다. 그런 것보다는 실패할 수 있는 작품이 훨씬 낫다. 왜냐면 작품은 언제나 작가의 삶 일부분을 떼어내서 만들어지니까. 주관적인 느낌에서 자신의 창작물이 비루해 보일 수 있어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각자의 인생 트랙을 완주해내려는 것처럼 걸어가야 한다.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틱, 틱... 붐!'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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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월 둘째 주 극장 개봉 & 예정작 ?
푸바오를 대신해줄 '포'바오! 드림웍스의 간판 애니메이션 '쿵푸팬더'의 귀환!
이번주 개봉 예정작 같이 만나보아요!
쿵푸팬더4
Kung Fu Panda 4
ⓒ 네이버영화
개요: 애니메이션, 액션, 코미디 | 미국 | 94분
감독: 마이크 미첼, 스테파니 스티네
출연: 잭 블랙, 아콰피나, 비올라 데이비스, 더스틴 호프만 등
개봉: 2024.03.27.
배급: 유니버설 픽쳐스
시놉시스
오랜만이지! 드림웍스 레전드 시리즈 마침내 컴백! 마침내 내면의 평화… 냉면의 평화…가 찾아왔다고 믿는 용의 전사 ‘포’ 이젠 평화의 계곡의 영적 지도자가 되고, 자신을 대신할 후계자를 찾아야만 한다. “이제 용의 전사는 그만둬야 해요?” 용의 전사로의 모습이 익숙해지고 새로운 성장을 하기보다 지금 이대로가 좋은 ‘포’ 하지만 모든 쿵푸 마스터들의 능력을 그대로 복제하는 강력한 빌런 ‘카멜레온’이 나타나고 그녀를 막기 위해 정체를 알 수 없는 쿵푸 고수 ‘젠’과 함께 모험을 떠나게 되는데… 포는 가장 강력한 빌런과 자기 자신마저 뛰어넘고 진정한 변화를 할 수 있을까?
CINE PICK!
드림웍스의 간판 애니메이션이자 개봉 3주차 2억 6천만 달러를 기록하며, 흥행 돌풍을 일으킨 <쿵푸팬더 4>!
더빙을 맡은 잭 블랙,아콰피나, 더스틴 호프만 등 화려한 라인업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으며, 현재 예매 관객 12만장을 돌파하며 <쿵푸팬더3>의 개봉 이틀 전 예매량 5만장보다 2배 이상 높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
We Made a Beautiful Bouquet
ⓒ 네이버영화
개요: 멜로/로맨스 | 일본 | 123분
감독: 도이 노부히로
출연: 아리무라 카스미, 스다 마사키, 키요하라카야 등
재개봉: 2024.04.10.
배급: ㈜미디어캐슬
시놉시스
“시작은 막차였다” 집으로 가는 막차를 놓친 스물한 살 대학생 ’무기’와 ‘키누’는 첫차를 기다리며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다. 좋아하는 책부터 영화, 신고 있는 신발까지 모든 게 꼭 닮은 두 사람은 수줍은 고백과 함께 연애를 시작하고 매일매일 행복한 시간을 쌓아간다. “내 인생의 목표는 너와의 현상 유지야!” 하지만 대학 졸업과 함께 취업 준비에 나선 두 사람은 점점 서로에게 소원해지고 꿈과 현실 사이의 거리 만큼 마음의 거리도 멀어지기 시작하는데...
CINE PICK!
일본에서 개봉 당시 박스오피스 6주 연속 1위를 차지한 영화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는 <지금, 만나러 갑니다>, <눈물이 주륵주륵> 등의 작품으로 잘 알려진 도이 노부히로 감독이 연출을 맡았으며 사랑이라는 주제를 현실적이고 담백하게 담아낸 작품으로 평가됩니다.
골드핑거
The Goldfinger
ⓒ 네이버영화
개요: 범죄, 액션 | 중국, 홍콩 | 126분
감독: 장문강
출연: 양조위, 유덕화 등
개봉: 2024.04.10.
배급: 메가박스중앙㈜
시놉시스
1980년대 홍콩 경제를 주무르던 황금제국 ‘카르멘 그룹’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그동안 자행됐던 불법들이 서서히 드러나며 2조 홍콩 달러에 달하는 대규모 수사가 시작된다. 불법으로 악명 높은 그룹의 수장 ‘청’(양조위), 그를 집요하게 쫓는 반부패 수사관 ‘류치웬’(유덕화)
불꽃 튀는 대결 속, 오로지 한 사람만 살아남는다!
CINE PICK!
20년 만에 보는 양조위 X 유덕화의 조합! <무간도> 시리즈의 각본을 썼던 장문강 감독의 신작 <골드핑거>에서 양조위와 유덕화가 다시 스크린에서 마주한다고 하는데요. 영화는 홍콩의 밑바닥에서 무일푼으로 출발해 금융 범죄로 막대한 부를 쌓아 거대 그룹의 수장에 오른 청이옌의 성공과 몰락을 그린 누아르 영화입니다.
슈가│어거스트 디 투어 ‘디-데이’ 더 무비
SUGA│Agust D TOUR 'D-DAY' THE MOVIE
ⓒ 네이버영화
개요: 공연실황 | 한국 | 84분
감독: 박준수
출연: 슈가
개봉: 2024.04.10.
배급: CGV ICECON
시놉시스
방탄소년단 슈가의 앙코르 콘서트 실황 (슈가│어거스트 디 투어 ‘디-데이’ 더 무비) 10개 도시, 25회 공연, 29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한 월드투어 대장정의 피날레이자 수많은 관중이 뜨겁게 열광했던 ‘SUGA | Agust D TOUR 'D-DAY' THE FINAL(슈가│어거스트 디 투어 디 데이 더 파이널)’ ‘21세기 팝 아이콘’ 방탄소년단 멤버 슈가, 솔로 아티스트 Agust D(어거스트 디)의 경계를 넘나드는 풍성한 음악, 화려한 퍼포먼스, 폭발적 에너지 그리고 방탄소년단 멤버 RM, 지민, 정국과 함께한 특별한 듀엣 무대까지 ‘D-DAY’ THE FINAL, 그 날의 뜨거운 열기와 전율을 스크린에서 만난다!
CINE PICK!
방탄소년단의 멤버 슈가의 2023년 8월 D-DAY TOUR 콘서트를 배경으로 한 공연 영화로 그날의 뜨거운 열기와 전율을 스크린에 담았다고 하는데요. 10개 도시, 25회 공연, 29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한 월드투어 대장정의 피날레, 그리고 방탄소년단 멤버 RM, 지민, 정국과 함께 특별한 듀엣 무대까지 준비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극장 개봉 영화, 총 네 편의 영화를 소개해 드렸는데 어떠셨나요?
그럼 남은 한 주도 건강하게 보내시길 바라며, 지금까지 씨네랩 에디터 Amy였습니다!
https://www.instagram.com/cinep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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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의 균열에 선 이방인들
빅토르 고라야 & 이디스 라이언스
<이어즈 앤 이어즈(Years and Years)>(2019, HBO & BBC)
* 위 작품의 장면과 결말, <잇츠 어 씬(It’s a Sin)>(2021, 영국 채널4)의 핵심 전개 포함.
2021년 공개된 리미티드 시리즈 <잇츠 어 씬>은, 80년대 영국을 배경으로 퀴어 커뮤니티와 에이즈 위기를 다룬다. 마지막 에피소드, 에이즈에 걸린 주인공 리치 토저의 건강이 악화되자, 엄마 밸러리 토저는 아들을 외부와 단절시킨다. 리치의 베스트프렌드 질 백스터가 밸러리를 설득하기 위해 애쓰지만, 밸러리는 퀴어혐오적이고 회피적인 반응을 보이며 질의 호소와 리치의 고백을 무시한다. 리치는 적절한 치료를 받지도,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질은 밸러리에게 말한다, ‘당신이 심어놓은 수치심shame이, 리치와 그 모든 이들을 죽인 거’라고.
부러 암울한 톤으로 소개했지만, <잇츠 어 씬>은 리치와 친구들의 하루하루에 넘쳐나던 슬픔과 기쁨, 사랑과 우정, 눈물나는 연대를 담은, 시끄럽고, 신나고, 풍부하고, 무엇보다 아름다운 작품이다. 부족한 소개 대신 죽어가던 리치의 대사를 인용한다, “거짓말하기 싫어요, 왠지 아세요? 난 진짜 재밌었었거든요, 그 모든 남자들이랑.” 말하려던 건: 작가 러셀 T. 데이비스가 사회적 이슈와 긴밀하게 연결된 작품에서 메인 캐릭터의 목숨을 앗아가는 까닭은, 그저 다른 메인 캐릭터에게 동기를 부여하거나 시청자의 감정적 몰입을 유도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도록”(프랜 백스터) 돕는 스토리텔러다. 죽음이 발생하는 과정, 전후의 맥락, 당사자와 주변 인물들의 액션/리액션을 촘촘히 관찰하며 현실의 시청자가 사회와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2019년, <이어즈 앤 이어즈>에서는 대니얼 라이언스가 죽음을 맞이했다. 영국 공무원인 그는 수용 가능 인원을 훨씬 초과한 알루미늄 갑판 쪽배를 타고 남자친구와 바다를 건너다 익사했다. 이 글은 대니얼보다는 빅토르에 대한 이야기다. 여러 해 난민 신분으로 유럽을 떠돌던, 불법적인 일상이라도 얻고자 약혼자와 함께 바다를 건너다 ‘어쩌자고 홀로 살아남은’, 인간보단 ‘사건’으로 그려졌을 수도 있었던 그에 대해. 그리고 그 곁에 섰던 대니얼의 시스터 이디스에 대해, 기이해져만 가는 세상을 외면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그들의 필연적인 유대감에 대해, 사심과 디테일을 얹어 적었다.
<이어즈 앤 이어즈>는 2019년 기준 근미래 영국을 배경으로, 이후 10+a년 동안 대가족이 맞닥뜨리는 변화들을 다룬다. 말하자면 SF이나, ‘매년 다시 봐야 한다’, ‘거의 다큐멘터리다’, ‘예측이 무서울 정도다’ 등의 코멘트가 붙을 정도로 현실적이고,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상당히 서늘한데, 또 그렇지만은 않다. 인류의 앞날을 비관하다가도 결국 인간을 믿는다. 그 중심에는 거의 판타지적으로 아름다운 두 인물이 있었다. ‘중심’이라고 적으니 조금 어울리지 않는 듯도 하다, 그들은 늘 중심에서 벗어나 있었으니. 시리즈의 오프닝, 로지 라이언스의 둘째 링컨의 탄생과 더불어 메인 캐릭터-라이언스 패밀리-와 시대적 배경이 자연스럽게 소개될 때, 이디스는 일상적으로 부재하고 빅토르는 등장 자체를 않은 상태다. 이들은 ‘이야기 중간에 끼어드는’, 어떤 ‘노말’/‘스탠다드’가 아니거나 아니고자 하는 인물들이다. 이디스 라이언스는 세상의 변두리를 찾아다녔고, 빅토르 고라야는 ‘사회’에서 튕겨져 나가거나 울타리 안에 갇혀 ‘없는 사람’이 되기도 했다.
빅토르 고라야와 대니얼 라이언스
- “You are a beautiful person.”
링컨이 태어나고 몇 년 후, 작품 상 우크라이나에서는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러시아군이 키이우를 장악한다(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 공개된 시리즈다). ‘숙청’이 공공연하게 벌어지며, 성적 소수자도 그 대상이다. 우크라이나 난민 임시 거주지에서 근무하던 대니얼은, 게이라서 ‘불법인간’이 된 빅토르를 만난다. 흔적이 남지 않는 전기 고문을 당한 그는, ‘영국에 망명 신청을 했지만, 정부가 고문당했다는 증명을 요구해 진행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여기서 잠깐 오프닝으로 돌아간다. 아이를 낳으러 병원에 가던 동생 로지의 전화를 받기 직전, 대니얼은 연인 랄프와 함께 TV를 보고 있었다. 정치인 비비언 룩은 카메라를 똑바로 보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 대해) 말한다, “I don’t give a f***.” “내 집 앞 쓰레기만 제때 수거 되면 족하다”는 비비언 룩이 “놀랍도록 멋지다”며 즐거워하는 랄프와, “저 사람은 괴물”이라고 걱정하는 대니얼. 이 커플은 시리즈가 시작하고 5분 만에 갈라설 조짐을 보이지만, 어쨌든 대니얼은 새해를 맞아 랄프에게 청혼한다. 수 해가 지나고, 이 부부는 ‘여전히 가족 모임에서 농담을 주고받지만 친밀한 대화를 나누지는 못하는 관계’가 된다. 랄프는 빅토르와 같은 이들이 ‘안 보이’는 자고, 대니얼은 ‘안 볼 수 없’는 자다.
빅토르 고라야의 첫인상을 어떻게 묘사해야 좋을까. 자연스럽고 당당한 태도, 반짝이는 눈동자와 유머감각. 대놓고 던지는 플러팅에 대니얼은 당황하면서 사로잡히고, 시청자도 마찬가지다. 거기엔 한 점의 위화감도 없다. 대니얼을 먼저 유혹함과 동시에 빅토르는 ‘착한 외국인’의 자격을 잃는데, 이야말로 바라던 바다. 빅토르는 자신의 처지, 대니얼의 “남자친구”(이건… 대니얼이 잘못했다.), 따위를 생각지 않고 그저 ‘나와 너의 끌림’만을 똑바로 응시한다. 누군가는 비꼬는 투로 ‘자유롭다’고 할 수도 있겠고, 비도덕적인 시작이었다고 수식할 수도 있겠으나- 두 사람의 첫 만남을 목격했다면, 그 사이 흐르는 공기가 숨막히게 특별했음을 부정하기는 힘들 것이다.
빅토르는 첫인상 그대로인 인물이다. “신변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희망과 유머를 잃지 않고, 타인을 이용하려 들지 않으면서 호의는 기꺼이 받아들인다. 곧은 잣대와 마음의 균형을 유지하며 날카롭고 유연하게 판단한다. 내면의 아름다움이 외면으로 투명하게 드러나는 현자.”[Indiepost에 게시된 필자의 글에서 인용] 전개상 자세히 서술되진 않으나 단편적인 언급들로 미루어 보면, 빅토르는 어딜 가나 스스럼없이 사람들과 연결되고 커뮤니티를 만드는 이인 듯하다. ‘햇살처럼 주위를 환하게 밝히는 이’, 뮤리얼의 표현대로 “아름다운 사람 beautiful person”이라고 할까. 이러한 설정은 그의 프레젠스와 엮여 버린 불행을 사적인 것으로 ‘느낄’ 여지를 완전히 걷어내려는 제스처로 보이는데, 작품은 그가 마냥 낙관하는 것이 아니라 타들어가는 속을 식히며 현재에 충실하려 애쓰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 또한 잊지 않는다. 빅토르가 화면에 잡히면 빛의 아우라와 어둠의 예감이 공존한다. 전자는 인간성과 로맨스, 후자는 그 외의 것들이다.
대니얼이 빅토르와 랄프를 두고 내적 갈등을 키울 무렵, 국제 정치적 갈등도 심각해진다. 중국은 인공 섬 홍샤다오를 짓고, 미국은 그 섬이 핵 군사기지라고 주장한다. 뮤리얼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가족들이 모인 자리, 트럼프가 핵미사일을 발사했다는 소식이 들리고 영국에서도 사이렌이 울린다. 세계가 끝날지도 모르는 날, 누구와 있을 것인가- 대니얼은 망설임 없이 빅토르에게 달려간다. 뮤리얼의 집도 빅토르의 거주지도 카오스인데, 두 남자의 사랑만 분명하다. 이후 빅토르는 일단, ‘대니얼의 외국인 남자친구’ 위치에 있게 되는데, 작품은 그를 거기 묶어두지 않는다.
이디스 라이언스와 세계의 균열
- “Tear the world down.”
미국이 홍샤다오에 미사일을 떨어뜨리기 직전- 시청자는 이디스를 처음 만나게 된다. 오랜 부재로 존재감을 먼저 드러낸 그는, 나쁜 소식을 들고 화상 통화 화면으로 등장한다. 그의 첫인상은 강렬한 감정들로 뒤덮여, 캐릭터를 파악하기 힘든 종류의 것이다. 가족들이 반가움을 쏟아내는 와중, 울먹이며 안부를 묻는 그의 실루엣은 이질적이다. 이디스는 ‘섬이 보이는 베트남에 시위하러 왔지만 이미 늦었다’고 설명하고, 곧 방사능에 피폭된다. 이디스의 두 번째 출연 역시 화면 속 화면이다. 그는 방송에 출연해 미국의 핵미사일 발사와 그 영향에 관해 이야기하고, 가족들은 그것을 보며 이디스에 관해 이야기한다. 빅토르는 대니얼에게 묻는다, “이디스는 어떤 사람이야?” 대니얼은 “조금 진지하다”고 답한다. 스티븐은 “어려서 갔던 여행에서, 이디스는 몰래 나가 담배를 사고 해변에서 자고 싶어했다”고 기억한다.
마침내 화면이 아닌 실물로 가족들을 만난 이디스, 그는 ‘훙샤다오 영상을 거액에 팔았다고 오해하는 무리’와, ‘정말로 거액에 팔자고 하는 무리’를 떠나 영국으로 돌아왔다. 빅토르는 그에게 “북극이 거의 녹았던데, 그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줘야 해요.”라고 말한다. 이디스는 시니컬한 유머를 섞어 “우리는 계속 호소해 왔고, 지금은 너무 늦었다”로 시작하는 스토리텔링을 늘어놓는다. 분위기가 가라앉고 모두 농담을 던지는 가운데, 화제를 꺼낸 빅토르만큼은 그 의미를 알아들은 듯하다. 스티븐이 “우리 태어나고 30년 정도는 살기 좋았잖아.”라며 동의를 구하자, 이디스는 “전쟁이 몇 번 있었지.”라며 쉽사리 동의해주지 않는다. 다시, 이디스는 어떤 사람인가?
비비언 룩에게 환호하는 로지 옆에서, 이디스는 삐딱하게 서서 눈을 부릅뜨고는 천천히 박수를 치며 말했다, “세상을 무너뜨려 버려. Tear the world down.” 비비언 룩의 ‘사성당’이 출마한 총선 투표, 그는 투표지 전체를 가로지르는 대각선을 긋는다. 이디스는 때로 세상을 냉소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누구보다 세상을 사랑하기에 다른 이들이 지나치는 장소를 들여다보게 되는 것에 가깝다. 이디스는 비비언 룩처럼 인간사가 굴러가는 방식을 꿰뚫어보고, 비비언 룩과 정 반대에 선다. 세계가 이미 ‘찢어지고’ 있음을 아는, 그 갈라진 틈에 빠진 것들을 테이블에 올려 놓으려는 자. 지구 곳곳의 균열을 찾아 몸을 던져 싸워 온 그는, 국가의 틀을 넘어 사유하고, 법이 아니라 정의를 따른다.
이디스는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만큼 상대방의 심리나 됨됨이도 빠르게 파악한다. 주변 사람을 아끼지만 덮어두고 응원하지는 않는다. 그는 오래 전 엄마와 형제들을 배신하고 새 가정을 꾸렸던 아버지의 장례식 뒤풀이에서, 용해된(작품에 등장한 새로운 장례법이다.) 아버지를 리쿼 샷인 양 마셔버린다. 그는 후에 빅토르를 강제 이송시킨 스티븐에게 실망하고, “스티븐은 내 우선순위가 아니”라며 칼 같이 잘라내기도 한다.
이디스는 직설적이고 시니컬하고 유쾌하다. 과감하면서도 무신경하지는 않으며, 그 섬세한 대범함을 타인에게 전염시키곤 한다. 링컨에게 처음 치마를 입히고 양갈래 머리를 해 준 이도 이디스고, “치마인지 티셔츠인지 모를” 옷을 입고 링컨이 신나게 뛰어다닐 때, “어느 쪽이든 상관 없다”고 한 이도 이디스다. 다 아는 듯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모르겠다I don’t know”, “아마도maybe”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자만하지 않음에서 오는 자신감와 여유, 올바른 감수성을 동반한 정치적 유머로 정곡을 찌르는 이디스. 그의 농담이 낡지 않는 것은 끊임없이 고민하고 실행하는 그의 삶에 닿아 있어서다. 마지막 화, 뮤리얼은 ‘세상이 이렇게 된 건, 1파운드 티셔츠에 가려진 것들을 외면한 우리 모두의 잘못’이라고 연설한다. 이디스 혼자만이 변명없이 고개를 힘차게 끄덕인다. 그 ‘잘못한 우리’에 미포함되는 자가 있다면 그일 터임에도.
미국 대법원이 동성 결혼을 금지하고 ‘로 앤 웨이드’ 판례를 뒤집자(후자는 작품 공개 이후 실제로 일어났고…) 이디스는 미국으로 날아가 시위대 맨 앞에 서고, 그 결과로 미국 출입금지를 당한다. 그가 “정부는 아무것도 안 한다”고 가족들에게 토로하자, 대니얼은 공감한다. 빅토르가 스페인에서 (또) 추방당할 위기에 처해 있는데, 스페인의 “극좌” 정권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물어도 영국 정부는 묵묵부답이기 때문이다. 대니얼이 사랑에 빠진 후 넘나들게 된 ‘갈라진 틈’, 이디스는 오래 전부터 거기 발을 딛고 있었다.
대니얼의 죽음과 ‘탓blame’
이 시점에서 빅토르의 존재는 우크라이나에서 비공식적으로 불법이고, 곧 공식적으로 불법이 될 예정이다. 그렇다면 영국, 프랑스, 스페인에서 그는 법적으로 보호 받을 수 있었는가? ‘망명 신청자’라는 그의 신분은 해당 국가가 정해 놓은 바운더리에서 조금만 벗어나거나, 그 법적 범위가 좁아지면 순식간에 박탈당하는 종류의 것이다. 몇 년이 흐르는 가운데, 빅토르의 거처는 내내 불안정하다. 우크라이나에서 고문당한 후 영국에 망명 신청을 하고, 영국에서 추방당하고, 우크라이나에 있다가 체포당할 뻔 하고, 국경을 넘고 또 넘어 스페인에서 다시 망명 신청을 한다. 마침내 재회한 대니얼과 그곳에 정착하기로 약속하지만, 곧 쿠데타가 발생하고 정책이 바뀐다. 프랑스의 우익 정권도, 스페인의 “극좌” 정권도, 빅토르와 같은 이들을 내친다.
대니얼은 빅토르를 영국으로 데려오기 위해 이디스에게 도움을 청한다. 영원히 범죄자로 살게 되더라도, 살 수는 있지 않겠냐며. 이디스와 프랜은 그를 돕고, 대니얼은 빅토르를 데리러 간다. 홀로 오가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연인과 함께 돌아오기는 너무나 어렵다. (하나, 빅토르의 말대로 대니얼은 “여권을 도둑맞았다고 세관에 말하면” “Ok, this way sir.”이라는 안내를 받고 집에 갈 수 있었을 테다. 둘, 두 번째 ‘실패’는 브로커의 게이혐오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원했던 “지루한 삶”, 작품은 그 바람을 시스템의 실패와 의도적 부재가 죽이는 과정을 담는다.
대니얼과 랄프는 법이 보호하는 결혼을 했었다. 대니얼과 빅토르의 로맨스는 법적으로 (어쩌면 사회적으로도) 영원히 ‘허용’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들의 시간은 늘 충분치 않다. 그들의 사랑은 지속적인 싸움과 은둔, 체포와 탈출로 이어진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줄곧 방법을 찾고 다음 걸음을 고민한다. 이처럼 애를 태우는 관계성은 픽션 상에서 ‘매력적으로’ 다가오는데, 그 ‘매력’은 외국인/비백인/이방인이 ‘상대방’, ‘객체’의 자리에 위치하며 그와 관계 맺는 ‘주인공’의 자리를 위협하지 않을 때까지만 유효하다. 그가 ‘구출’ 된다면 주인공은 (죽더라도) 영웅이 되고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야 한다. 이방인의 죽음이 주인공의 ‘동기’로 작용하는 방향도 있다. <이어즈 앤 이어즈>의 경우는 둘 다 아니다. ‘영국인을 위험에 빠뜨리고 그에게 구해지는 외국인’, ‘인간이 아닌 사건’: 빅토르는 그것들이 아니다. 작품은 처음부터 그리고 갈수록 명확하게, 그의 대상화를 거부한다.
이 연인의 장면에서 상호 또는 대니얼 단독 시선을 주로 취하던 작품은, ‘구조 작전’이 잘 풀리지 않는 동안 빅토르의 시선에 주목한다. 그는 지폐를 세는 대니얼의 손을 바라보고, 좌절하며 욕하고 벽을 치는 대니얼을 바라보고, 값을 흥정하는 대니얼을 바라본다. 빅토르는 주장도 감정도 ‘차마 강하게 꺼내지 못한다’. 그에겐 돈도, 여권도, 집도, ‘존재할 자격’도 없다. 무기력, 근심, 자책, 주저- 그가 지닌 절박함의 속성은 희망에서 절망으로, 자신의 생존에서 대니얼의 상태에 대한 걱정으로 흐른다. 소중한 이가 ‘나 때문에’ 패닉에 빠지는 모습에 힘겨워한다. 그러나 끝내는, 사랑을 붙잡는다. 쪽배에서 내리자고 대니얼을 설득하지만- 다음 순간, 바다를 건너기를 고집하는 대니얼을 바라본다. 거기엔 상대에 대한 믿음이 비친다.
이어, 작품은 시청자가 ‘항해’의 카오스와 대니얼의 죽음을 빅토르의 입장에서 겪도록 연출한다. 빅토르는 대니얼의 시체를 초점 잃은 눈동자로 응시하며, 우크라이나어로 ‘모르겠다’고 반복해 중얼거린다. 그 상태 그대로 대니얼의 집으로 ‘돌아온다’. 그곳에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가족 그룹 통화 연결이다. ‘대니얼의 전화’를 받고 가족들이 쏟아내는 -다양하지만 유사하게 일상적인- 노이즈를 받아내는 빅토르의 정서는, 이질적이다. 겨우 틈을 찾은 빅토르는 바짝 마른 톤으로 죽음을 전하고 상황을 설명한다. 그리고 묻는다. “나는 집에 왔는데, 여기가 집인가요?” 충격과 슬픔에 잠긴 가족들은 달려와 문을 두드린다. 빅토르의 이름을 외치는 소리가 공포스럽다. 그것이 4화의 엔딩, 빅토르는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는가, 아니면 또다른 방식으로 존재를 위협받고 있는가. 서구적 표상에 길들여져 있던 시청자는 시험/갈등에 빠진다.[참고: 러셀 토비, VULTURE]
다음 화는 이전 화와 시간적 거리를 두고 열린다. 영국 총리는 이제 비비언 룩이고, “사라진 자disappeared”들에 대한 소문이 떠돈다. 작품은 대니얼을 애도하며, 그의 죽음에 집착하는 스티븐을 조명한다. 수용소에 갇힌 빅토르를 면회하러 온 스티븐, 다소 일방적인 대화 사이에- 대니얼이 죽던 날 라이언스 가족과 빅토르의 대면이, 짧은 컷들로 나뉜 플래시백으로 끼어든다. 비난을 퍼붓는 로지와 스티븐, 엉망으로 움츠러들어 무어라 답하거나 하지 못하는 빅토르, 대사는 뮤트 처리돼 있다.(짐작 가능하고, 중요하지 않다.) 그 끝에 로지와 빅토르는 서로를 끌어안고 엉엉 울지만, 스티븐은 ‘탓’에 사로잡힌다.
우연히 “어스트와일”(‘골라낸’ 자들을 가두는 열악한 비밀 수용 시설)의 내부자가 된 스티븐은, 회사 네트워크에 접속해 빅토르를 이송자 명단에 넣어 “사라지게” 한다. 몇 년 전, 빅토르는 어쩌다 영국에서 추방당했던가, 대니얼에게 빅토르의 일터 정보를 들은 랄프가 보복성 리포트를 해서다.(규칙을 어긴 빅토르의 잘못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애초에 그 규칙은 ‘고문 증명’을 요구하는 이들이 만들었다고 답하겠다.) 두 사람의 행동은 겹쳐 보인다. 랄프는 작품이 ‘돌아보는’ 인간 유형이었다. 자발적으로 무지했던 그는 ‘행복’과 자극만을 좇았고, 안전하고 좁은 특권 바깥을 볼 의사가 없었다. 리포트 사건에 앞서, 랄프가 빅토르의 억양을 놀리듯 따라하는 컷이 있었다. 가볍게 지나가는 대사였으나, 그가 빅토르(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를 대하는 태도가 상징적으로 드러났다. 랄프는 남편에게 배신당했고, 크게 상처받았다. 그러나 ‘복수’의 구체적인 방법이 (아마 인지한 적 없었을) 특권을 이용해 누군가를 안전망 밖으로 내쳐버리는 것이라는 점이, 그 사고방식과 실행력이 무섭다. 랄프는 아마 제 행동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고, 궁금해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스티븐은 어떤가, 빅토르가 ‘대니얼의 남자친구’였을 때, 그는 친절한 지지자의 태도를 보였다. 대니얼의 죽음 후 스티븐은 균형을 놓친다. 그는 빅토르에게, “전부 당신의 탓이다, 당신은 끔찍한 사람이다, 나는 당신이 이곳저곳을 전전하는 동안 너무나 질렸다”고 말한다. “awful”, “bored”: 그 단어들을 빅토르에게 덧씌운다.(빅토르와 대니얼이 “boring life”를 바랐다는 점을 떠올리며 이 워딩을 씁쓸하게 곱씹게 된다.) 동생을 잃은 스티븐이 얼마나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었겠냐만은- 랄프보다 훨씬 ‘똑똑한’ 그가 빅토르를 바라보았던 시선은, 어쩌면 랄프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어선다. (다행히 작품은 스티븐을 버리지 않고, 후에 내부고발이라는 기회를 준다.)
‘그 모든 일들이 꼭 빅토르의 탓인 것만 같은’ 이 모호한 감각. 만약 스티븐처럼 그 ‘탓’의 감각을 지우기 힘들다면, 분석을 시도해야 한다. 왜 그의 탓인가? 그의 탓이 있다면 무엇인가? 남자에게 끌리는 것? 그래선 안 되는 이와 사랑에 빠진 것? 살아남으려고 애쓴 것? 살아남은 것? 하나하나 살피며 걷어내다면,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거기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을. 허면 그 감각의 원천은 무엇인가. 로지가 사는 곳을 ‘범죄 구역’으로 지정한 시스템은 빅토르를 범죄자로 만든 시스템과 다르지 않다. 문제를 해결하기보단 감추려는 권력자들이 온갖 지표를 끌어와 ‘보호 대상’과 ‘위험 요소’를 구분하고, ‘적절’한 그룹에 성공적으로 낙인을 찍은 결과다. 또한, 너무 피곤했던, 지나치게 절망했던, 현재가 충분히 안락했던- 개인들이 그것을 의심치 않고 받아들인 결과다.
빅토르는 그 못난 만남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고, 그저 스티븐을 ‘let go’한다. ‘당신의 탓’이라는 스티븐의 말에 수긍하면서도, 대니얼의 죽음은 ‘나 때문이지만 내 탓은 아님’을 알고, 받아들인다. ‘내 존재를 골칫거리로 만든 시스템’을 인지하고, 애도에서 ‘거짓된 탓의 감각’을 분리해 낸다. “어스트와일”에서 재회한 친구가 ‘대니얼이 너를 꺼내 주지 않겠냐’고 묻자, 빅토르는 “할 수 있었다면 그랬겠지”라고 답하며 미소짓는다. 그에게 대니얼은 죄책감보다는 사랑의 기억이고, ‘내가 택한 가족’이고, 그를 살게 하는 동력이다.
이방인들의 연대와 사랑
낙인이 찍힌 당사자인 빅토르, 그리고 이디스는, ‘의심치 않는 것이 불가능한’ 이들이다. 첫 만남부터 공감대를 형성했지만 주로 ‘대니얼이 이디스에게 빅토르와 관련해 도움을 청하는’ 식으로 연결되던 두 사람은, 대니얼이 죽은 이후 본격적으로 한 화면에 잡힌다. 거기엔 단순히 가족-지인 간의 친밀감과는 다른 무언가가 섞여 있다. (대니얼-이디스의 것이 그러했듯 퀴어 피플 간의 유대도 포함돼 있을 테다.)
1화 엔딩, 까마득한 해안에 홀로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던 이디스. 흥분과 분노로 범벅된 축제가 열리는 가운데, 빽빽한 군중 사이에서 고개를 떨군 채 멍하니 있는 빅토르가 거기 겹쳐 보였다. 하나 더: 홍샤다오에 미사일이 떨어지기 직전 화상 통화를 건 이디스와, 4화 엔딩에서 대니얼의 죽음을 전하기 위해 가족 그룹 통화를 건 빅토르가 있다. 앞서 두 장면을 각각 묘사하며 동일하게 ‘이질적’이라는 수식을 붙였다. 구도가 다른 두 시퀀스에 작품이 부러 유사한 뉘앙스를 부여했다는 해석은 비약일 테지만, 역시 겹치는 데가 있었다. 이들은 어쩔 수 없이 불운과 불안의 기운이, ‘나쁜 뉴스’가 된다. 빅토르와 이디스는 ‘분위기를 깨는 자’[Sara Ahmed]들이다.
난민인 빅토르와 피폭당한 이디스의 신체는 이디스의 조모 뮤리엘보다도 죽음에 가까이 있다. 빅토르는 살아남을 방법을 고민하는 와중 오늘을 소중히 즐기고, 이디스는 죽음을 예감하며 세상의 그림자들을 조명한다. 이디스는 가족들이 모일 때마다, 잊지 말자는 듯 갇혀 있는 빅토르를 언급한다. 그는 ‘분위기를 깨기를 자처하는 자’, ‘비밀’을 끄집어내는 자, 자발적 아웃사이더다. 불평등하고 부당한 룰에 순응하길 거부하고, 불평하기도 전에 무너뜨릴 궁리를 시작하는 그는, 제 어머니의 딸인 동시에 누구의 딸도 아니다.
빅토르는 ‘그 자리에 있거나 언급되는 것만으로 분위기를 깨는 자’다. ‘햇살처럼 주위를 환하게 밝히는 이’ 임에도 그렇다. 비자발적 아웃사이더인 그는 둘 이상의 국가가 솎아내고 감춘 그림자, 비밀 그 자체다. 그는 자신을 고발한 친부모의 아들이 아니다. 그의 가족은 그를 숨겨 준 우크라이나의 친구들이고, 대니얼이고, “너의 부모는 역겨운 사람들”이라고 해 준 뮤리얼이다. 곁에 나란히 서서 손을 내미는 이디스다. 어떤 면에서 그는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지만, ‘아웃사이더’적 판단력을 유지하는 채로다. “우릴 가둬 놓고, 전염병을 들여와 퍼지게 내버려 둬. 아주 영국적이야.”, “영국에 있는 가족들이 날 찾을 거야.”: “어스트와일”에 갇힌 빅토르가 한 시퀀스에 각각 던지는 대사다. 고향에서도 타국에서도 기득권층의 룰에 들어맞지 않는 자였던 빅토르는, 라이언스 가족relatives을 자신의 가족family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섞여 용해되지 않고 ‘당당히 아웃사이더로 남는다.’
<이어즈 앤 이어즈>에서 혁명적 변화는 한쪽이 한쪽을 구하는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디스는 바깥에서, 빅토르는 수용소 안에서, ‘비비언 룩 정권 하에서 사라진 자들’에 대해 수소문한다. 빅토르가 전한 “어스트와일”이라는 이름은 중요한 단서가 된다. 스티븐에 의해 그가 “사라진 자”가 되자, 이디스와 프랜, 빅토르의 변호사 이본, 동생이 “사라진” 아흐메드, 아빠의 행동을 온라인으로 목격한 스티븐의 딸 배서니… 많은 이들이 모여 ‘빅토르를 건져내는 김에 세상을 뒤집는 작전’에 동참한다. 여기서 빅토르는 ‘구해지는 자’인 것 뿐 아니라 함께 세상을 뒤집는 자다. ‘구해진’ “어스트와일” 수용자가 카메라를 들어야만, ‘가로막힌’ “레드존” 주민들이 펜스를 들이받아야만, 그들이 “보여져야”만 혁명은 성공한다-고 작품은 말한다.
“지루한 일상”을 갈망했던 빅토르와 “지루한 일상”을 의심하던 이디스는 닮아 있었다. 빅토르는 (아마 난민이 되기 전부터) 안전망 바깥에서 살아 왔고, 이디스는 그 안팎을 오가며 균열을 가시화해 왔다. 그들은 ‘으레 그렇다고 믿어온 것들’ 너머의 세상을 꿰뚫어보며, 그것을 외면하지 않는다. ‘감시카메라 위치를 교묘하게 피해 입모양을 숨길 줄 아는’ 두 사람은, 빅토르가 대니얼의 남자친구가 아니었더라도 어디에선가 만나 ‘일을 꾸몄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디스에 대한 서술이 끝내 프랜에 닿듯, 빅토르를 설명하다 보면 대니얼을 돌이키게 된다. 그들은 연인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한다, 이방인으로 불리며, 기꺼이 이방인인 채로.
* 사라 아메드가 쓴 <행복의 약속>(2021년 후마니타스 번역본)을 읽다 쓰기 시작한 글이다. 빅토르와 이디스의 ‘이방인성’을 종합하는 데에 특히 도움을 받았다.
모든 사진 출처: H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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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억눌린 자아가 만들어낸 비극
<싸이코>, 억눌린 자아가 만들어낸 비극
<싸이코>는 알프레도 히치콕 감독의 대표작 중 하나로서 긴장감을 유발하는 서스펜스와 영화 후반부에 드러나는 반전으로 유명한 작품이다. 영화의 초반에는 등장인물 마리온의 횡령이 극을 이끌어가는 중심점이지만 마리온이 베이츠 모텔을 방문하게 되면서 마침내 영화 제목 <싸이코>가 관객에게 보여진다. 중반부를 지나 영화는 베이츠 모텔에서 일어나는 살인 사건을 담고 있으며 영화 초반에는 살인마가 미스 베이츠라고 확실하게 드러나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살인마의 정체가 모호해진다. 결국 살인마는 노먼 베이츠임이 밝혀지고 동시에 그가 미스 베이츠의 인격을 가지고 있는 이중인격 살인마라는 점도 같이 알려져 충격을 준다. 노먼 베이츠가 이중인격을 가지게 된 배경에는 미스 베이츠의 과도한 의존과 괴팍한 성격이 있었고 그녀의 아들에 대한 지나친 의존과 억눌림은 노먼의 정신병을 초래했다. 나아가 어린 시절 억눌린 노먼의 자아를 비롯한 남성성은 살인이라는 끔찍한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노먼의 인격과 공간적 배경의 연결성
영화 속 등장하는 공간적 배경은 고립되고 억눌린 노먼의 인격을 묘사하고 있다. 베이츠 모텔의 위치, 노먼 베이츠의 저택과 모텔의 위치 그리고 베이츠 저택 내부 모친의 공간과 노먼의 공간 차이는 노먼이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 보여준다. 따라서 각 공간이 어떻게 노먼과 연결될 수 있는지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겠다.
베이츠 모텔과 저택의 위치
먼저 모텔과 저택이 어디에 존재하는지를 살펴보면 그들은 유동 인구가 많은 고속도로에서 떨어진 곳에 있으며 찾기 힘든 곳에 있다. 마리온과 아보가스트가 잘못 들어온 줄 알았다는 대사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사람들과 거의 교류가 없는 고립된 공간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사람과의 교류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그들의 거주지는 노먼의 유년 시절부터 이어진 그와 그 모친의 고립을 표현한다. 또한 그 고립의 정도는 얼마나 노먼이 다른 사람과 소통할 기회가 없었고 그 결과 모친에게 자아가 통제될 수밖에 없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모텔과 저택의 위치는 노먼의 모친이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았다는 보안관의 말을 그대로 드러내는 동시에 노먼의 정신 상태가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위치에 놓여 있음을 나타내기도 한다.
베이츠 저택과 베이츠 모텔의 위치는 노먼 베이츠에 내재된 두 인격의 상하관계를 보여준다. 영화에서 미스 베이츠의 모습과 존재는 창문에 비친 그녀의 실루엣으로만 오직 확인할 수 있다. 그녀가 밖을 돌아다니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저택 내부에만 머무르는 것처럼 나타나고 노먼이 저택에 있는 모습도 거의 나오지 않는 점에서 영화에서 저택은 미스 베이츠의 공간처럼 묘사된다. 반면 모텔은 노먼의 공간이다. 노먼은 모텔의 주인으로 그가 통제할 수 있는 곳이다. 그에게는 모든 객실을 열 수 있는 열쇠가 존재하며 투숙객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고 휴게실에는 그의 취미 생활이 담긴 박제품들이 가득하다. 또한 그가 스스로 만든 엿보기 구멍으로 투숙객을 관찰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저택은 미스 베이츠의 공간으로 모텔은 노먼의 공간으로 분석할 수 있다.
이어서 베이츠 저택과 베이츠 모텔이 어떻게 위치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저택은 계단을 올라가 모텔보다 높은 곳에 있고 모텔은 따라서 반대로 저택보다 낮은 곳에 있다. 또한 저택의 창문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면 모텔을 한눈에 볼 수 있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파악할 수 있지만 반대로 모텔에서는 저택의 외관만 볼 수 있고 다른 정보는 전혀 얻을 수 없다. 따라서 베이츠 저택은 마치 모텔을 감시하기 위해 있는 감시탑과 같은 존재로 인식되며 아래를 내려다보며 지켜보는 공간과 위치가 주는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미스 베이츠의 공간으로 분석될 수 있는 저택이 위에 있고 노먼의 공간인 모텔이 아래에 있다는 공간성은 노먼의 두 가지 인격 중 모친의 인격이 지배적이고 우위를 점하고 있음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노먼의 방과 미스 베이츠의 방
노먼의 자아보다 모친의 자아가 노먼 내부에서 더 우세하다는 것은 저택 내 미스 베이츠의 방과 노먼의 방 차이에서 더 극명하게 나타난다. 영화 후반에 라일라가 저택에 몰래 들어감으로써 밝혀지는 미스 베이츠의 방은 매우 넓으며 가구나 옷들 모두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다. 반면 노먼의 방은 마치 소년의 방과 같은데 침대는 성인 남성이 자기에는 좁아 보이고 침구도 낡았으며 정돈되어 있지 않고 나이에 맞지 않는 어린아이들이 가지고 놀 것만 같은 인형들이 있다. 노먼의 방과 비교하여 지나치게 화려하고 넓은 미스 베이츠의 방은 노먼 내면에 자신보다 모친이 더 크게 자리잡고 있음을 나타내며 특히, 어린아이의 방을 닮은 노먼의 방은 결국 모친의 과도한 의지와 성격으로 노먼은 유년 시절에서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그대로임을 나아가 삐뚤어졌음을 보여준다.
노먼은 누구인가
미스 베이츠의 아들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노먼을 지배하여 모친에 대한 노먼의 집착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의 집착은 그가 이중인격의 살인마로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결말로 이어졌다. 노먼은 이제 고립된 모텔과 저택에서 벗어나 다른 환경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자신의 유년 시절의 결과가 교도소가 된 노먼, 모든 진실이 밝혀진 지금 노먼은 과연 누구인가? 미스 베이츠인가 노먼 베이츠인가. 마지막 노먼의 독백 또는 미스 베이츠의 독백은 그들이 통제했던 공간에서 벗어나 직면하게 된 새로운 곳에서의 그들의 모습을 나타내고 노먼의 상태를 모호하게 만들어 그의 존재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사진: 네이버 영화 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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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재의 강박으로 새롭게 재구성한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이거 재판받는 거 맞지
이 영화의 시점은 두 가지다. 컬러파트인 ‘핵분열’ 흑백파트인 ‘핵융합’이다. 컬러파트의 시점은 1954년이다. 원자력 협회 건물의 어느 방 안. 좁은 공간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있다. 이유는 주인공 오펜하이머의 청문회 때문이다. 오펜하이머가 국가기관에서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접근 승인을 받아야 한다. 그냥 평범하게 살았더라면 승인에 큰 문제가 없었겠지만 오늘의 주인공은 그동안 어려운 선택지만 골라왔다. 세계 2차 대전을 끝내는 데에 두 번의 항복이 있었다. 첫 번째는 나치였고 두 번째는 일본이었다. 나치보다 먼저 원폭을 만들었고 일본의 항복을 유도하는데 큰 기여를 한 오펜하이머. 전쟁영웅이라고 봐도 무방한 오펜하이머가 소련의 첩자라는 의심을 받고 있다. 영화는 컬러 파트를 통해 ‘왜 오펜하이머에게 이런 위기가 들이닥쳤는가’를 보여준다.
핵융합 파트의 주인공은 루이스 스토로스다. 1959년. 루이스 스토로스는 상무부 장관 취임을 위한 절차를 밟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단계만 남았다. 청문회를 앞두고 있는 루이스 스트로스. 형식상의 절차라는 보좌관의 말이 들리기는 해도 왠지 삶을 재판받는다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뭐 장관 뽑는 게 쉽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긴장되는 마음이 사그라들지는 않는다. 이렇게 떨리는 스토로스에게 변수 하나가 생겼다. 익명의 과학자가 증언을 앞투고 있다는 점이다. 평범한 선택지만 골라온 삶이라면 이렇게까지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을 것이다. 스토로스의 청문회에서 그의 삶에 가려져있던 어떤 음모가 드러난다.
플롯의 마술사
‘플롯의 마술사’ 크리스토퍼 놀란이 감독의 장기를 활용해 작가의 인장이 쾅 박힌 신작을 발표했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플롯을 자유자재로 활용해 자기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사람이다(플롯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법’을 다루는 영화 용어다). 놀란이 ‘플롯의 마술사’라는 별명을 얻었다는 것은 각자의 필모그래피가 갖고 있는 다양한 전달방식이 있다는 것이다. <메멘토>는 흑백/컬러의 색채가 대비되는 장면들을 병치시켜 사건의 진실을 쫓는다. <덩케르크>는 ‘전쟁 반대’라는 테마 아래 액션장면을 거진 다 지워버리는 승부수를 뒀다. 전쟁영화에서 '반전'이라는 키워드를 설득시키기 위해 살아 돌아가는 과정의 어려움을 플롯으로 삼은 것이다. sf 영화인 <인터스텔라>에서 가족영화라는 테마와 블랙홀의 심연은 사실상 동격이다. 이 일종의 멀티버스 세팅은 ‘아버지가 딸을, 반대로 딸이 아버지를’ 생각하는 형태가 우주의 모습과도 같다는 점이 유사점을 갖는다. 최근작 <테넷>은 초기작 <메멘토>를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난해한 구조를 보여준다. 기점 찍고 전후반의 사건관계가 대칭을 이루고 있다. 이는 ‘주인공이 운명의 주연으로 어떻게 똑바로 서 걷는가’에 대한 이야기 전개방식을 시간관계를 뒤틀어서 보여준 것이다.
이 영화 역시 크리스토퍼 놀란이 플롯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고유의 연출법이 그대로 들어가 있다. 우선 영화가 색채대비를 통해 이야기를 전달한다는 점은 전작 <메멘토>가 연상된다. 이 <메멘토>에서 인물이 처절하게 사건의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을 묘사했던 것과는 반대의 방식을 구사하고 있다. 본작이 이런 방식을 쓰는 것은 대단히 합리적인 것으로 보인다. 오펜하이머와 스트로스가 갖고 있는 내면의 모순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미국의 한 행정부 장관이 되는 일은 어마어마하게 큰 사건이다. 또한 원자폭탄을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는 세계사에 기록될 만큼 큰 이벤트다. 하지만 두 사람은 관계에 서툴러서 위기를 스스로 자초한다. 오펜하이머나 스트로스의 서사 하나만을 콕 찝어서 전개하기보다 대칭되는 두 사건을 보여줌으로서 감독이 보여주고 싶었던 것에 집중한 것이다.
위대하면서도 끔찍한
이 영화의 컬러 부분인 ‘핵분열’ 파트는 아이러니를 다루고 있고 이는 영화에 작동하는 핵심 모티브다. 이 파트에서 다루는 가장 큰 줄기는 오펜하이머가 중심이 되어 원자폭탄을 만드는 과정이다. 오펜하이머는 이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도중에 수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실제로 오펜하이머는 만났던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던 건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로브스를 위시한 군사전문가들과 과학자들에게 원자폭탄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장면이나 과학자들 앞에 서서 연설하는 장면은 '거대한 일은 이뤘지만 사소한 건 놓친' 한 인물의 입체성을 보여준다. 오펜하이머에게 아이러니가 작동하는 것이다. 이 아이러니는 우리가 오펜하이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명대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오펜하이머가 TV 앞에서 한 유명한 대사가 있다(자료화면으로도 남아있다). ‘난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라는 문장이다. 이 문장은 한 인물과의 사랑이 가장 정점일 때 처음으로 등장한다. 원자폭탄을 발명해 전쟁을 멈춘 한 사람의 서사가 사랑이 가장 불타오를 때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영화가 이 인물을 묘사하는 방식은 20세기 당시 미국사회가 얼마나 폐쇄적이었는가 대한 암시로 보인다. 영화에서 중요한 시간적 배경은 매카시즘 광풍이 몰아치던 1950년대이다. 시대적 배경을 이루는 ‘매카시즘’을 아주 쉽게 설명하면 ‘반공주의의 극단’이다. 한국전쟁 및 소련과의 냉전으로 인해 미국 내에 공산주의에 대한 비호 여론이 들끓었다. 매카시라는 미국의 상원의원이 자국 내 공산주의자를 색출하기 위해 비열한 방식을 사용한다. 이를 '매카시즘'이라고 하는데,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은 이 광풍을 정통으로 맞은 오펜하이머를 주인공으로 뽑았다. 이 인물을 주인공으로 선정한 것이 소모적이지 않게 감독은 부지런할 정도로 시대적인 배경이 어떻게 한 인간을 괴롭히는가를 후반부에 보여준다. 구체적으로 핵분열 파트의 청문회 부분은 '너 공산주의자지?'를 정해놓고 조사위원들이 오펜하이머에게 질문한다.
아날로그 변태
기존의 필모그래피와 유사한 측면에서 감독은 폭발 효과를 직접 구현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전작 <테넷>에서 중고 비행기를 직접 구매해 실제로 부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또 <인셉션>에선 촬영 도중에 직접 세트장을 뒤집었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크리스토퍼 놀란은 영화의 리얼리티를 위해 작중에서 제시되는 폭발을 직접 구현했다. 이 폭발은 단지 크리스토퍼 놀란이 영화적 기교를 부리기 위해 이런 연출법을 사용한 것이 아니다. 폭발을 눈으로 보여주고 폭발음을 몇 초 있다가 들려준다. 이는 연쇄작용이 서서히 일어나는 오펜하이머 개인 서사의 은유처럼 보인다.이 영화의 음향과 촬영이 인물의 드라마를 보여준 것이다.
교과서 찢고 나온 듯
이 영화에 등장하는 과학자들은 관객들이 어디서 들어봤던 사람들이다. 일단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한 조연이자 세계사에서도 족적을 남긴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그렇다. 영화 초반부에 나오는데 똑같이 생겼다. 하지만 단지 교과서에 나오는 인물 똑같이 구현하는 것 자랑하려고 이 인물을 이렇게 보여준 것이 아니다. 이는 아인슈타인이 영화에서 스트로스/오펜하이머의 차이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데, 이 분기점을 보여주려고 감독이 어떤 선택을 뒀는지 주의깊게 본다면 흥미롭다. 그 외에도 어니스트 로렌스, 리처드 파인만, 닐스 보어, 아이도어 아이작 라비 등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과학자들이 등장한다. 특히 베니 샤프디가 맡은 에드워드 텔러는 배우 개성과 과학자의 캐릭터 세팅을 높게 흡착시킨 예시가 될 것이다. 트루먼 대통령 역을 맡은 캐릭터는 놀랍다. 글쓴이는 솔직히 못 알아봤다.
영화의 다른 주인공인 '루이스 스트로스' 역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탁월한 연기를 보여줬다. 이야기의 반쪽을 담당하는 입장에서 영화의 긴장감, 서스펜스를 혼자 이끌고 가야 한다. 구체적으로 후반부에 이 모든 이야기의 잔상이 밝혀질 때 목소리 톤에 변주를 둔 장면은 배우의 해석능력이 돋보인다. 내년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조연상 후보가 유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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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작년에 돌아가신 미국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는 내내 감동과 흐믓한 기분이 들었다. 루스의 삶을 보면서, 역사에는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인물이 나타나 역사의 진보를 이뤄내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즉, '루스'는 특정한 개인이면서 역사발전의 단계에서 나타나는 필연적 인물의 현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개인 '루스'이면서 동시에 역사적 존재로서의 '여성'이자 사회적 약자로서의 '여성'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멋진 드라마다.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는 초기 공동체 - 모계사회 - 를 제외하고 줄곧 남성이 주류였던 사회였다. 즉, 같은 인간이면서도 단지 '성'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남성은 여성은 착취하고 억압하고 학대했다. 남성이 권력을 갖게 된 시기를 마르크스는 '잉여생산물'이 발생하면서부터라고 했다. 이건 인류가 채집경제를 벗어나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부터를 말하며, 농경, 정착, 집단화의 과정을 거치며 인류는 문명을 이루기 시작했다.
잉여생산물의 발생은 노동생산성이 증가한 결과이며, 이는 공동체 시기에 모든 구성원이 채집 활동을 했던 것과 달리, 집단의 우두머리는 더 이상 노동하지 않고, 다른 구성원이 생산한 잉여생산물의 일부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잉여생산물을 취득한 집단의 우두머리는 지혜롭고 경험이 많은 노인이었고, 그는 신과 대화하는 무당이기도 했다. 그 우두머리가 꼭 남성은 아니었다.
잉여생산물의 집적, 농업에서 남성노동력의 우월성, 여성의 생리, 임신, 출산으로 인한 노동력 상실 기간, 여성의 생리와 임신, 출산이 갖는 남성의 여성에 대한 신비로움과 두려움, 공동체에서 존재했던 다부모, 다자식 형태에서 일부일처 또는 일부다처제로 나아가는 원인 역시 남성이 잉여생산물을 독차지하고, 여성을 사회적 존재에서 대상화, 소외시키면서 경제적, 사회적 권력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핏줄에 대한 집착으로 발생한 사회적 계약이었다.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규정하는 건 모든 인종, 모든 지역, 모든 사회에서 공통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잉여생산물을 독점하려는 남성 집단의 담합과 여성을 소유하려는 남성 집단의 연대가 암묵적 또는 공공연하게 진행되었고, 그 결과 '가부장제'가 굳건하게 뿌리내린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남성이 권력을 차지하는 방식은, 초기부터 현재까지 일정한 패턴을 갖는다. 잉여생산물이 발생하던 초기에 남성(집단)은 물리적 폭력으로 여성을 억압하는 동시에 금기(터부)를 만든다. 여성의 생리를 부정한 것으로 규정하고, 집단에서 배재하는 방식으로 시작한 금기는 점차 다양하고 세분화하면서 여성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 존재'로 규정해 나간다.
집단(사회)의 규정은 남성 중심, 남성 위주로 재편되고, 여성에게 불이익을 강요하며, 모든 기득권, 권력의 독점, 경제적 이익을 남성이 차지하도록 구조를 만들어 가고, 공고히 한다. 이런 지배 규칙은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사회제도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즉, 모든 사회경제 제도, 노예제, 농노제, 자본제에서 주류는 남성이었고, 그들의 사회는 가부장제를 핵심으로 한다.
'여성과 계급'의 문제는 어느 시대든 가장 급진적이며 본질의 문제였다. 둘 사이에 어느 한쪽이 더 중요하고 우선 해결해야 할 문제인지 여부는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성 문제는 늘 계급 문제에 가리거나 덜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계급 해방은 극소수 착취 계급을 무너뜨리며 착취 구조를 해체하는 것이지만, 여성 해방은 인류 보편의 평등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이며 여성 해방은 자연스럽게 계급 구조도 해체할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즉, 경제적 착취 구조는 문명의 발달과 함께 형태를 달리하며 노예제, 농노제, 자본제 등으로 옮겨갔지만, 여성의 차별, 착취는 계급 발생과 함께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규정하는 사회는 불행한 사회다. 어느 시기를 막론하고, 성차별, 성불평등이 강제되는 사회는 멸망했으며, 자본주의 체제 역시 성차별, 성불평등이 강화된 사회구조여서 계급 갈등과 함께 체제의 모순을 드러내는 두 개의 핵심 요소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서, 자본주의 체제도 오래 유지되지 못할 것은 분명하다.
'페미니즘'이 공산주의 이론에서 나타난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공산주의 이론은 계급해방과 인간해방을 동시에 주장하며, 이때 인간해방은 양성평등을 기본 전제한다. 또한 성소수자, 장애인, 노인, 어린이 등 사회적 약자의 해방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
즉, 공산주의는 계급의 철폐와 함께 인간 평등을 기본으로 하는 사회체제다. 지금까지 몇 나라에서 실험한 공산주의는 실패했다. 그래서 '현실 사회주의'가 가능하지 않다는 주장도 있지만, 인류의 미래가 지금과 같은 소수 착취자가 부와 권력을 독점하는 사회를 폐기한다는 건 지극히 당연한 결론이다. 그것이 꼭 '공산주의'가 아닐 수도 있지만, 소수에 의한 다수의 착취, 남성에 의한 여성의 착취 같은 착취 구조는 점차 평등을 향해 나가고 있음을 역사의 발전 과정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여성이 사회적 존재를 드러내고, 자신의 위치를 확장하려는 노력을 할 때마다 가부장 사회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런 시도를 방해한다. 가장 쉬운 방법은 남성과 여성을 적대적 관계로 만드는 것이다. 어리석은 남성 대중은 자신들이 누리는 기득권이 여성에 의해 침범당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살아온 남성들에게는 남성우월주의가 마치 물속에서 물고기가 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현상처럼 느껴지지만, 여성의 입장에서는 물고기가 물 밖으로 나와 있는 것처럼 괴롭고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여성들이 자신의 숨 쉴 권리를 찾으려 하는 당연한 행동을 남성 일반은 자신(남성)을 공격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체제에 안주한 기득권자인 남성은 여성을 억압하는 지금의 사회구조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남성은 단지 '성'이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사회의 기득권에 소속되며, 특혜를 누린다. 반면 여성은 똑같은 능력을 가졌거나 더 나은 능력이 있어도 남성보다 적은 보상,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
그런 점에서 여성은 본질적으로 진보적이며, 사회 변화의 주체다. 그럼에도 여성은 여성만으로 세계를 변혁하지 못한다. 계급 투쟁이 여성운동보다 근본적이지 않다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 나는 물론 둘 다 근본적이라고 본다 - 보편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여성운동은 계급투쟁과 동행하거나 포용해야만 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계급투쟁에서 여성운동은 별개의 과제가 아니라, 동시적이며 본질적인 과제인 것이다.
페미니즘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백인 부르주아 여성'이 주도하는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그보다 앞서 사회주의 혁명을 이루기 위한 노동계급 투쟁에서 페미니즘은 여성해방과 노동계급해방을 동시적 과제로 선정했다. 노동계급은 8시간 노동, 주5일 노동, 생리휴가, 동일노동 동일임금, 기업에서 성차별 철폐, 가사노동의 사회적 보상 등 양성평등을 위한 투쟁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 그 결과 지금은 적어도 공식적으로 성차별 금지, 여성노동의 착취 금지, 여성의 사회적 노동의 인정 등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만, 이것도 현대 자본주의 초기부터 노동계급이 피흘리며 싸워온 결과였다.
루스 긴즈버그의 삶은 여성의 지위 향상과 양성평등에 크게 기여했다. 한 사람의 뛰어난 능력과 의지가 사회를 어떻게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꿔가는가를 잘 보여주는 모델이기도 하다. 루스 긴즈버그가 체제-미국 자본주의-내에서 가능한 여성의 권리를 확장하는 노력을 했다면, 로자 룩셈부르크는 체제의 변혁을 통해 인간해방을 이루려는 시도를 하다 참혹하게 살해 당한 경우다. 사회주의 변혁운동에서도 여성은 비주류였으며, 중요한 결정에서 소외되거나, 더 탁월한 재능을 가졌음에도 지도부에서 배제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오늘날 여성운동은 체제에 매수 당하거나 자발적으로 남성기득권에 투항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여성(과 여성운동)은 본질에서 진보적이지만,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며, 부르주아 여성운동은 남성 기득권에 기생 또는 공생 관계로 만족한다. 이들 부르주아 여성(운동)은 자신을 '명예남성'으로 인식하며, 남성 권력이 던져준 부스러기 권력에 만족한다.
여기에 극히 일부 여성(운동)은 남성을 '적'으로 상정하고 무차별 공격한다. 남성우월주의, 가부장제, 남성기득권 구조가 비난받아야 하는 건 당연하지만, 남성 일반을 '적'으로 규정하고 공격하는건 19세기 아나키스트의 테러를 떠올린다. 그들은 권력을 가진 적을 살해하면 혁명을 이룰 수 있다고 여겼지만, 체제와 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사회는 변하지 않는다.
남성 일반은 여성(운동)의 동지이자 지지자이자 동지이며,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여성의 지위 향상과 양성평등은 여성이 남성을 공격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어리석은 남성 일반을 견인해야 하며, 각성한 남성과 함께 힘을 모아 사회를 변화시켜야 궁극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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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다양한 형태
-헤어질 결심-
"최연소 경감 승진자이지만 불면증을 앓고 있는 경찰. 그의 앞에 나타난 젊은 중국인 과부. 남자는 남편 살인 사건의 피의자 신분인 그녀를 염탐하면서 사랑을 느끼게 된다. 때론 연민을 느끼고, 때론 의심과 불안감 사이 어딘가에서 방황하기도 하지만 결국 두 사람은 사랑하는 듯 보인다. '사랑하는 듯'. ‘헤어질 결심’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지, 불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우리의 머릿속엔 박찬욱 감독이 보여주고자 했던 선홍빛의 태양, 습습한 회색빛의 안개, 순백의 설산들이 가득 찬다. 서사보다 이미지가 더 각인되는 영화다. 그리고 가끔씩 우리 삶엔 불륜이라는 스토리보다 사랑이라는 본능 혹은 본질 같은 것들이 더 선명해질 때가 있다. 붕괴와 희생의 순간을 배우들의 연기로 원자 단위까지 쪼개버린 듯한 이 영화 '헤어질 결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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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퀴어] 끝장리뷰 | 육체와 정신 | 종교적 해석 | 뱀, 죄수복, 권총, 야헤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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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2025)에 대한 헐거운 리뷰
Chapter 1 육체와 정신
Chapter 2 종교적 해석
00:00 CGV 단독개봉
02:05 육체와 정신
06:22 종교적 해석
11:17 별점 및 한 줄 평
11:36 다음 리뷰 예고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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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밝혀지는 라이온 킹의 대서사 / 무파사: 라이온 킹 / 라이온 킹의 프리퀄 / 형제에서 적으로 / 감춰진 스카의 이야기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무파사: 라이온 킹"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이 따로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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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제8일의 밤> 티저 예고편
[2021년 7월 2일, 넷플릭스 공개]
놈이 온다. 인간을 사로잡아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 그것.
수천 년 된 영혼이 깨어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이런 운명을 타고난 승려가 움직인다.
한 손에는 염주, 한 손에는 도끼를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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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 'NEW 히어로 탄생' 60초 예고편
마블의 새로운 강력한 히어로 ‘샹치’의 탄생과 베일에 싸여 있던 전설의 미스터리 거대 조직 ‘텐 링즈’의 실체를 다룬 첫 번째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