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필 K2021-03-02 00:00:00
테넷 - 더 탐닉하거나 도망치거나. 선택은 당신의 몫
코로나로 인해 많은 영화가 개봉을 연기하거나 위험을 무릅쓰고 개봉을 강행하는 경우로 나뉘어졌다. 개봉을 강행하는 경우는 대부분 저예산이나 독립 영화였는데, 블록버스터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개봉을 강행한 영화가 있었다. 바로 크리스토퍼 놀란의 '테넷'이다. 감독의 전작들의 평과 흥행에 과연 코로나 시국에도 흥행을 할 수 있을까, 극장가를 살릴 구원자가 될 것 인가 라는 의견들이 나왔지만, 안타깝게도 그러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테넷이 의미 없는 영화는 절대 아니다. 흥행과 평가는 별개이기에, 테넷 또한 감독의 전작들과 함께 주목할만한 영화이다.
필자는 이 영화를 유료 시사회로 개봉 전에 관람했는데, 당시에 영화가 어렵다는 평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영화에서 나오는 주요 용어들에 대해 개념을 숙지하고 관람을 하러 갔으나, 결국 영화에게 패배했다. 여기에서의 패배란, 이해를 못 했다는 것이다. 분명 초반부까지는 문제가 없는데, 중반부부터 난이도가 갑작스럽게 상승한다. 비유를 들어보자면, 수학 문제를 푸는데 처음에는 기초 맛보기 문제 한 두문제 설명하다가 갑자기 블랙라벨 몇권을 통째로 갖고와서 무작정 설명하는 느낌이랄까. 예고편에서 중심적으로 보여주는 인버전이라는 개념 자체는 어려울 것이 없다. 다만 그것이 응용되면서 어려워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관객은 둘로 나뉘어 질 것이다. 더 파고들어 테넷을 탐닉하거나, 아니면 포기하고 도망치거나.
테넷은 일반적인 블록버스터 영화랑은 다르다. 통상적인 블록버스터 영화는 많은 관객들을 포용해야 하기에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직관적인 서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테넷은 그렇지 않다. 영화를 본 관객이 테넷 관계자이거나 천재가 아닌 이상 첫관람에 완벽한 이해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처음봤는데 다 이해했다고 하는 사람은 천재거나,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흥미로운 점은 영화를 재관람함으로서 이해하는 재미, 공부하는 재미가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맞춰지지 않는 퍼즐이, 다시 볼 수록 테넷이라는 이름의 퍼즐이 맞춰지는 쾌감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특성은 일반적인 블록버스터 영화에서는 찾아보기 매우 힘든 특성이기에, 대부분의 관객들은 둘로 나뉘어지는 것이다. 탐닉하는 자는 영화를 다가가기를 원하는 이들이고 도망치는 자는 영화가 다가오기를 바라는 이들일 것이다.
영화 평론가들은 관객이 다가가는 영화를 통해 진보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나도 그것을 동의하는 이들중 한 명이지만), 그렇다고 다가오기를 바라는 이들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영화란 보편적인 잣대도 존재하지만, 취향으로 갈리는 영역임은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렇게 둘로 나눠지기에, 테넷은 더더욱 호불호가 갈릴 것이다. 탐닉한자와 포기한자, 두 그룹의 대조. 다만 확실한 것은 이번 영화도 역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만든 영화들 답게 본인만의 '매력'을 가지고 있으며, 문제는 이번의 '매력'을 탐닉하는 자와 쟁취하지 않는 자로 나뉨으로서 호불호가 갈릴 것이라는 것이다. 또 확실한 것은 이렇게 갈리기는 하지만, 영화를 안 본 사람들이 한번 봐볼까? 라는 생각이 들만큼 확실하게, 또 강력하게 매혹한다는 것이다. 어딘가 모를 은밀한 유혹.
*이 글은 원글 없이 새로 작성된 글이며, 출처란에는 작성자의 인스타그램 주소를 기재하고 있습니다.
Relative contents
-
- <헤레틱(Heretic, 2025)>, 종교는 거들 뿐인 밀실 탈출 스릴러
A24에서 또 한 번 강렬한 공포 영화를 내놓았다. <유전>, <미드소마>, <톡 투 미>와 같은 특유의 신선한 호러 감각이 이번엔 종교를 만났다. 외딴 집을 찾은 신앙심 깊은 두 소녀의 믿음이 흔들리는 이야기, <헤레틱>이다. *필자는 지난 3월 27일, 씨네렙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를 통해 <헤레틱>을 미리 만날 수 있었다.
'헤레틱'은 영어로 '이단'이라는 뜻이고, 바로 내일(2일) 정식 개봉을 앞두고 있다.
● 기본 정보
제목: 헤레틱 (2024)
감독: 스콧 벡, 브라이언 우즈
출연: 소피 대처, 클로이 이스트, 휴 그랜트
장르: 공포, 스릴러
러닝타임: 111분
국내 개봉일: 2025년 4월 2일
제작/배급: A24
줄거리: 어느 눈 오는 날, 몰몬 선교사 자매인 반스(소피 대처)와 팩스턴(클로이 이스트)는 전도를 위해 한 남성의 집 초인종을 누른다. 집 주인 리드(휴 그랜트)는 이들을 호의적으로 맞이하며 날씨가 궂으니 잠깐 안으로 들어와 이야기를 나누자고 한다. 규칙상, 여성이 있어야 집에 들어갈 수 있지만 '아내가 있다'는 말에 두 자매는 의심 없이 문을 넘는다. 하지만 아내는 끝내 얼굴을 보이지 않고, 남자의 대화는 점차 묘하게 불편한 질문들로 이어지는데... 자신들이 이 집에 꼼짝없이 갇혔다는 것을 깨달은 두 자매는 탈출을 감행한다.
1. 믿음과 의심 사이의 긴장감
최근 공포 영화는 점프 스케어보다 서스펜스와 심리적 긴장감으로 관객을 압박하는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헤레틱>도 그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다. 영화는 낯선 남자의 집이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 긴장감을 점진적으로 쌓아올린다. 그리고 이야기의 핵심에는 '종교'라는 소재가 있다. "신이 존재한다면 무섭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무섭다"는 역설적인 명제를 중심에 두고, 영화는 관객을 믿음과 의심 사이 긴장으로 이끈다. 궤변 같으면서도 논리적인 시험 속에서, 관객은 주인공들과 함께 끊임없이 무엇을 믿어야 할지 시험대에 놓인다.
물론 영화가 처음부터 이 철학적 긴장감만으로 공포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궂은 날씨에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외딴집, 그 안에 두 젊은 여성이 중년 남성과 함께 있다는 상황만으로 관객은 익숙한 불안을 감지한다. 이 상황 속에선 성별에 따른 물리적 힘의 위계가 힘의 비대칭을 만든다. 이는 남성이 믿을만한 사람이 아니라면 끔찍한 일을 겪을 수도 있다는 본능적인 불안을 야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두 여성, 그리고 관객이 처음으로 의심하는 것은 바로 남성의 정체이다. 중년 남성 리드가 정말로 겉모습처럼 선한 사람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것은 곧 생사를 가를 수도 있는 문제이다. 제작진은 의도적으로 이 역할에 ‘노팅 힐’로 유명한 휴 그랜트를 캐스팅했다. 그는 젠틀하고 따뜻한 미소의 리드를 연기하며, 두 여성이 기꺼이 스스로 낯선 남자의 집 안으로 향하게 만든다. 물론 그들이 의심 없이 안으로 들어간 결정적인 이유는 리드가 ‘집 안에 아내가 있다’고 안심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아내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리드는 부인이 낯을 가린다며 계속해서 그녀의 등장을 지연시킨다. 리드라는 인물에 대해 신뢰를 거둘지에 대한 판단은 영화 초반부를 지탱하는 핵심이다.
두 자매는 이러한 의심 속에서도 그들의 본래 목적대로 리드에게 전도를 하려 한다. 하지만 대화의 주도권은 점차 리드에게 넘어간다. 그는 점점 종교적 신념을 정면으로 겨누기 시작하고, 미묘하게 불편한 이야기를 꺼낸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리드는 계속해서 두 여성의 신념을 흔든다. 그리고 두 여성은 점점 그가 만들어낸 심리 게임의 룰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이 모든 과정을 따라가는 관객 역시 자연스럽게 리드의 질문에 동참하게 되고, 함께 시험을 받는 듯한 감각을 체험하게 된다.
이처럼 <헤레틱>은 단순히 종교적 메시지를 전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실존적인 위협에 기반한 상황을 통해 스릴러라는 장르적 재미를 유지하면서, 그 안에서 믿음에 관한 심리 게임을 풀어나간다. 영화에서 긴장과 불안을 조성하는 방식은 매우 치밀하며, 배우들의 연기 역시 이 설계 속에서 유기적으로 작동한다.
2. 치밀한 설계
영화는 상당히 치밀히 짜여져 있다. 결말에서 치밀한 설계는 단순히 장르의 플롯을 넘어서 주제의식으로 발현된다. 동시에 관객으로서 이 치밀함 덕분에 이야기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는 즐거움도 준다. 먼저 캐릭터의 균형이 잘 맞춰졌다고 생각했다. 팩스터와 반스는 모두 독실한 몰몬교 신자이다. 그들은 속옷마저 교회가 규정한 의상을 입고, 교회의 공동체에 기반하여 생활한다. 반스는 현실감이 없이 순진한 전형적인 신자처럼 보인다. 반면, 팩스터는 상대적으로 눈치가 빠르고 현실 감각이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팩스터는 리드의 말에 휩쓸리지 않고 반박할 수 있는 논리적 인물이다. 이러한 캐릭터 설정 덕분에 일방적으로 리드에 의해 '이끌려' 가는 것이 아닌, 맞서는 모습을 기대하게 만들고 탈출의 가능성을 상기시킨다.
또한 인물들이 상당히 실행력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의심이 거두어진 순간에 망설임 없이 행동한다. ‘저건 믿으면 안 될 거 같은데’하는 답답함이 들 때쯤, 타이밍 좋게 인물들도 움직여준달까. 그런데 그 순간마다 절묘하게 새로운 변수나 불가항력적 상황이 또 던져진다. 결국 그들이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을 치밀하게 설계한 덕분에 영화에 더욱 몰입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빈틈 없다고 느낀 부분은 대사이다. 감독들의 전작 <콰이어트 플레이스>가 '소리를 내면 죽는다'는 설정 아래 대사를 최소화하며 긴장을 유도했다면, <헤레틱>은 그 정반대 지점에서 대사로만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감독들 역시 이런 극적인 대비를 하나의 창작 실험으로 삼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 영화에서 대사는 '말맛'이 살아있는 그 자체로 즉흥적인 재미를 주는 것은 아니다. 대신 모든 대사가 계산된 구조 안에 유기적으로 배치되어 있다는 인상이다. 예를 들어, 초반부 리드가 반스에게 "큰 힘에는 책임이 따른다"고 말하자 반스는 ‘스파이더맨’이 말한 것이라고 받아친다. 리드는 이를 ‘볼테르’가 말한 것이라 정정한다. 처음 이 장면에서 이 대사는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흘러갔기 때문에, 자그마한 유머라고 생각하고 웃고 넘겼다. 그러나 이후 영화가 반복적으로 원형과 복제, 신념의 계승과 변형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앞선 대사가 단순한 농담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처럼 영화는 대화를 통해 서서히 분위기를 조이고, 이후 그 대사들이 퍼즐처럼 맞물려 돌아올 때 강한 카타르시스를 안긴다. 심지어 음악마저 아무 의미 없이 삽입되지 않고 있다. 이런 지점들이 감상 이후 곱씹을수록 서늘함을 안겨준다.
3. 총평
<헤레틱>은 스릴러 장르 특유의 긴장감을 정교하게 설계한 작품이다. 한정된 공간 안에서 오직 대화만으로 긴장을 구축하는 연출이 인상 깊었고, 이야기 자체도 흡입력이 있어 몰입하며 감상할 수 있었다.
다만, 극의 대부분이 대사 중심으로 진행되다 보니, 일부 장면에서는 다소 과하게 설명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특히 리드라는 인물의 특성상 몇몇 장면은 마치 신학 강의를 듣는 듯한 인상을 주는데, 대사의 길이나 논리적 구성이 그러한 인상을 더욱 강화한다. 다시 보면 더 깊이 있는 감상이 가능할 것 같지만, 솔직히 말해 이 ‘강의 장면’들 때문에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는다.
게다가 리드가 주도하는 그 ‘강의’가 실제로는 힘의 위계와 물리적 위협 위에서 작동한다는 점은, 그의 논리에 대한 신뢰를 흔든다. 앞서 언급한 실존적 위협은 장르적으로는 훌륭한 장치지만, 영화가 내세우는 주제적 메시지(믿음과 확신에 대한 탐구)와는 결이 어긋난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결국 인물들이 마주하는 상황은 믿음에 대한 철학적 시험이라기보다는, 살기 위한 몸부림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이런 지점 때문에 미묘한 뉘앙스만 주던 초반부에서 다소 노골적인 중후반부로 넘어가면서 영화의 매력이 한풀 꺾인다. 결말 또한 만족스럽다고 하긴 어렵다. 여러 버전의 결말을 놓고 고민하다 최종적으로 덧붙인 듯한 인상을 준다. 믿음이라는 주제에 대한 해답을 끝내 찾지 못한 채, 결국 캐릭터가 가진 ‘선(善)’의 속성에 기대어 마무리한 느낌이기 때문이다. 믿음을 의심하는 리드가 실은 누구보다 믿음을 갈구하는 인물처럼 마무리되는 아이러니도 다소 예측 가능한 부분이다.
배우들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휴 그랜트는 로맨틱 코미디의 상징과도 같던 자신의 이미지를 이번 작품에서 기민하게 비틀었다. 그가 완전히 다른 역할로 변신한 것은 아닌, 기존의 친근하고 젠틀한 이미지를 미묘하게 왜곡해 섬뜩한 설득력을 만들어낸 점이 인상 깊었다.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당신이 알고 있던 '로맨틱한 휴 그랜트'의 잔상은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팩스턴을 연기한 소피 대처는 어딘가 낯익은 인상이다 싶었는데, 제나 오르테가와 안야 테일러 조이를 반씩 섞은 것 같다. 실제로 과거 몰몬교 신자였다고 하는데, 그런 배경이 캐릭터의 미묘한 디테일을 풍부하게 만든 것 같다. 최근 개봉한 <컴패니언>에서도 색다른 연기를 보여줬는데, 배우에 관심이 생겼다면 해당 작품도 꼭 보기를 권한다. 개인적으로는 <컴패니언>에서 더 다채로운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 반스를 연기한 클로이 이스트는 <파벨만스>에서도 얼굴을 비췄던 배우다. 그녀 역시 몰몬교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흥미롭게도 "다른 삶을 살았으면 자매 선교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인터뷰한 바 있다. 소피 대처와 클로이 이스트 모두 2000년생으로 비교적 어린 배우들이다. 실제 나이와 캐릭터가 잘 맞아떨어지며, 두 사람의 호흡도 매우 자연스럽다. 전반적으로 캐스팅이 탁월하게 어우러졌다는 인상을 준다.
아무튼, 재밌게 감상했다. 필자는 종교에 큰 관심이 없어 처음엔 관람을 망설였지만, 막상 보고 나니 종교적 맥락보다는 심리 스릴러로서의 완성도와 장르적 매력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종교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더라도, 한정된 공간과 인물 간의 긴장감이 주는 재미만으로도 충분히 몰입할 수 있는 작품이다. 반대로 말하면, 종교에 대해 관심이 있는 관객이라면 아쉬울 수 있는 영화이다.
-
- 우연이 만든 관계의 변수들
우리는 무심코 상상한다. 로또에 당첨되면, 당장 떠날 수 있다면, 과거로 돌아간다면 어떨지. 생각은 여기서부터 꼬리에 꼬리를 물어 온갖 곳을 들렀다가 현실로 돌아온다. 이런 우연은 내게 벌어질 수 없다고. 어쩌면 영화 <우연과 상상>에서 하는 이야기의 출발점도 이와 비슷해 보인다. 초점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라는 게 조금 다를지언정. 이를 테면 오랫동안 보지 못한 옛 친구와의 재회, 가장 가까웠던 사람이 나의 주변인과 아주 가까운 사람이 된 상황 말이다.
상상했던 대로만 일이 벌어지면 자신의 예측 범위 안에서 결말까지 맺어지리라는 착각이 든다. 그러나 여기, 또 다른 변수가 존재한다. 우연. 우연히 만나거나 우연히 실수하거나 우연히 알아차리거나. 문득 이 우연과 상상을 적재적소에 쓴 넷플릭스 드라마가 떠오른다. <굿 플레이스>. 그 어떤 경우의 수를 만들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우연히 벌어지는 일을 막을 방법이 없다는, 일종의 진리 같은 교훈을 내세우던 드라마였다. 이번 영화는 그보단 교훈적인 메시지를 덜하다고 느꼈다. 그저 일어나는 일을 관망하듯 보여주는 연출 때문인지도 모른다.
옴니버스로 연결된 세 영화를 이제 하나씩 살펴보고자 한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1막.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
세 작품의 전개 방식은 모두 대화였다. 눈에 띄는 건 대부분 두 사람의 대화였다는 점이다. 잠시 세 사람이 맞닥뜨리는 장면도 있기는 했다. 1막에서 벌어진 일은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두 사람은 알고 한 사람은 모르는 삼자대면이었으니까.
어느 길거리. 그곳에서 주인공 메이코는 포즈를 취하며 사진 촬영에 임한다. 이때 카메라는 한 사람을 유독 보여준다. 메이코의 절친이면서 스타일리스트인 츠구미. 그렇다. 이건 두 사람의 관계에서 시작하는 이야기다. 촬영을 마친 둘은 차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도란도란 대화를 나눈다. 대화 주제는 츠구미가 최근에 우연히 만난 남자.
츠구미는 그의 이름을 메이코에게 말하는 대신 애칭 같은 호칭을, 첫 만남에 가진 느낌을, 자신의 연애관을 들뜬 눈으로 조잘거린다. 종종 진지한 눈빛을 제외하고 츠구미는 내내 웃기만 했다.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얼굴이다. 그런 모습을 보는 메이코의 눈은 오묘하다. 츠구미와 눈을 맞출 땐 마주 웃지만, 츠구미가 말하느라 메이코에게 집중하지 못할 때 혹은 차창 밖에서 들어오는 빛의 양이 적을 때 혼자 골몰한 표정을 짓는다.
관객 입장에선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연애담, 그것도 얼굴도 모르는 어떤 남자의 연애담을 듣는 게 썩 흥미롭지 않을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컷 전환도 얼마 없고, 그마저도 어둡고 꽉 막힌 공간 안에서 벌어진다. 이때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바깥의 풍경과 빛, 마냥 좋아하는 츠구미와 이상하게 음침한 츠구미의 대조가 새로운 몰입을 불러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말이 밝혀진다. 그런데 아주 명확히, 원인에서부터 결과까지를 보여주는 게 아니다. 두 사람의 대화로 관객은 추측할 뿐이다. 예전에 메이코와 남자가 만나는 사이였고, 메이코가 바람을 피웠고, 남자는 깊은 상처를 받았다. 그래서 불쑥 찾아온 메이코를 뿌리 치려 하지만 메이코의 이런저런 말에 결국 시인한다. 여전히 메이코를 사랑한다면서.
이 대목은 <결혼 이야기>의 격렬한 싸움 씬을 떠올리게 했다. 물론 표현의 폭이 그들만큼 크지 않았으나, 사무실을 맴돌며 계속 위치를 바꾸는 메이코와 그에 맞추어 움직이는 남자의 모습이 연출적으로 닮았다고 느꼈다.
파국으로 치달을 듯한 이야기는 의외의 끝을 맞이한다. 우연히 카페에서 만난 세 사람. 메이코가 남자와의 관계를 다 밝히고, 츠구미에게 상처를 주고, 그래서 친구를 잃은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이건 다 메이코의 상상이자 예측이었다. 현실로 돌아온 메이코는 무난한 선택을 한다. 두 사람을 응원하며 자리를 비켜주기로.
이때 1막의 제목을 다시 본다. 마법 혹은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 보통 사랑은 마법 같다고들 하지 않는가. 그런데 사랑보다 더 불확실한 것이 있을까. 보이지 않는 마음에 이름을 붙이고 가장 좋은 것이라 명한다고 한들 끝에 다다를수록 질척이고 지저분하다. 끝을 기점으로 새롭게 시작하려고 해도 잘 모르겠는 것이다. 나의 상상과 상대의 상태가 같을지. 이번엔 다를지. 알 수 없기에, 메이코는 알 수 있는 것을 택했다.
2막. 문은 열어둔 채로
가장 불쾌한 감상이 남은 2막이다. 대학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나오는 동기인 사사키와 파트너를 맺으며 결핍을 채우려 한다. 이미 결혼한 데다가 아이까지 있는 나오이기에 옳은 선택과는 거리가 멀다. 사사키도 이 사실을 알고 대놓고 약점으로 부리진 않지만, 학교에서 누구 하고도 가까이 지내지 못하는 나오의 쓸쓸한 마음을 이용하려 든다.
바로 자신의 앞 길을 막은 세가와 교수의 명성을 밑바닥으로 끌어내리는 일. 정확히는 사사키가 그토록 피해자 행세를 할 일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다른 교수들이 그러하듯 편의를 봐줄 거라는 생각으로 학점을 이수할 최소 조건을 이행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융통성이나 동정심 있는 사람에게 통했을 부탁은 누군가 자신의 영역에 들어왔을 때 문을 활짝 열어두는 세가와 교수에겐 말짱 도루묵이다.
사사키의 머릿속에서 나온 방법은 나오를 이용 해서 세가와 교수가 성적으로 문란하고 더럽고 옳지 않은 사람임을 녹음본으로 증명하는 것이었다. 사사키의 부탁대로 나오는 담당 교수인 세가와를 찾아 가 그의 신간 이야기를 하며 대화를 이어간다. 책 구절이 참 좋다며 몇 페이지를 천천히 낭독하며, 나오는 문을 스리슬쩍 닫는다.
그런 나오에게 다가온 세가와 교수는 문을 다시 열고 남은 문장을 마저 듣는다. 사사키의 계획이 모두 어그러진 것 같을 때, 나오는 자신이 하려던 일이 무엇이었는지 밝힌다. 세가와 교수는 그에 분노를 표하지 않고 오히려 흥분한다. 낭독하는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소장하고 싶었다며. 나오는 이상한 조건을 건다. 책 전체를 낭독해서 이메일로 보내는 대신 그걸 들으며 자위를 해달라고.
둘만의 비밀처럼 끝날 것 같던 일은 나오의 실수로 끝이 난다. 아이의 말에 대답을 해주며 이메일 수신인을 적다가 학교 관리인의 계정으로 잘못 보낸 것이다. 어찌어찌 사사키의 바람대로 세가와는 어그러졌다. 나오까지 수렁텅이에 들어간 건 예상 못했겠지만, 그건 사사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버스에서 우연히 만난 둘. 사사키는 버젓이 잘 살고, 결혼까지 앞둔 상태다. 나오는 모든 것을 잃고 그저 피곤한 하루를 버틸 뿐이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만 보일 수 있는 치기일까. 혹은 불륜의 굴레인가. 나오는 사사키에게 입을 맞추고 버스를 내린다. 이제 대학생 때와는 정반대의 위치에서 나오의 복수가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3막. 다시 한번
꼭 다시 보고 싶은 사람과 우연히 만나는 상상을 해본 적 있는가. 말도 안 되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진 3막이다.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가던 나츠코는 건너편에서 올라가던 사람과 눈이 마주치고, 다급하게 에스컬레이터를 올라 그를 뒤쫓는다. 20년 만에 만난 동창생, 아야를 놓치지 않으려고.
손을 꼭 맞잡은 둘은 부산스레 대화를 잇는다. 고등학교 동창회에 참석하느라 도쿄에 들린 나츠코와 가정을 꾸린 아야. 아야의 초대로 둘은 아야의 집에서 대화를 마저 하기로 한다. 고등학교의 추억을 이야기하면서 무언가를 보여줄 듯 보여주지 않던 나츠코. 그러다 속마음을 드러낸다. 자신이 아야에게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
20년. 이미 늦을 대로 늦은 시기인 만큼 애처로움이 가중될 것 같을 때에 사실이 밝혀진다. 아야는 아야가 아니다. 그러니까, 아예 다른 사람이었다. 둘이 나온 고등학교도 다르고, 아야의 본명도 아야가 아니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을 보고 서로 아는 사이로 착각한 것이다. 얼마나 보고 싶은 사람이었기에 똑 닮았다고, 그 사람이라고, 나츠코는 확신에 찼을까.
어정쩡한 기류는 아야의 아들이 들어오면서 뚝 끊긴다. 이제 가보겠다는 나츠코와 역까지 바래다주겠다는 아야. 엄마 나갔다 오겠다는 말에도 아들은 아무 대꾸 없다. 가정 내에서 별 다른 애정을 주고받지 못하는 아야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아마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한 나츠코를 보고도 별 말 못 하고 받아준 건 그 때문 아니었을까.
둘은 다시, 그들이 처음 만난 지하철역까지 간다. 나츠코는 에스컬레이터를 다시 내려가고, 아야는 육교에서 뒤돌아 걷는다. 둘 중 한 사람이 용기를 냈으면 하는 마음이 그득해질 무렵, 나츠코가 처음에 그러했듯 등 돌려 걷는 아야에게 뛰어간다. 이미 놓친 인연이 있으니까 반복하고 싶지 않았을 거다. 둘은 다음을 기약하며 그렇게, 안녕을 고한다.
원하는 사람을 다시 만난 건 아니었지만, 이런 생각이 든다. 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학생 시절 추억으로 존재하게 내버려 두고, 지금 새롭게 만날 수 있는 인연을 찾는 게 좋다고 느꼈다. 추억은 추억일 때 가장 아름답기도 하니까.
**
세 가지의 이야기가 모든 면에서 마음에 들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부분 부분 공감 가는 상황은 어느 막이든 있었다. 살아가는 것도 비슷하다. 오늘 하루가 마냥 좋진 않아도 좋다고 꼽을 점은 늘 있으니까.
*씨네랩 시사회에 초청받아 참석 후 기고한 글입니다.
-
- 퓨리오사가 지켜낸 희망의 씨앗
누구나 자신만의 희망이 있다.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 언젠가 자신을 구원해 줄 그 희망은 삶을 이어나갈 수 있는 힘을 준다. 몇 번이나 찾아오는 절망적인 상황은 삶을 더 이어나갈 힘을 빼놓는다. 더 나아갈 힘이 없다고 느끼는 그 순간, 마지막까지 감추어두었던 희망은 꺼내어들 수 있는 마지막 무기다. 그 희망을 생각하면서 다시 앞으로 나아갈 힘을 조금씩 되찾아간다. 만약 희망조차 없다면 그 삶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있을까. 먹고 자는 문제만 간단히 해결할 뿐, 나쁜 상황만이 앞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2015년에 개봉했던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는 희망을 무기로 꺼내든 이들이 앞으로 나아가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의 퓨리오사(샤를리스 테론)는 자신이 알고 있는 생명의 땅으로 가기 위해 임모탄(휴 키스번)에게 갇혀있던 여성들을 모두 데리고 탈출을 감행한다. 퓨리오사는 모든 여성들의 희망이었고, 그 희망의 여정에 맥스(톰 하디)가 우연하게 끼어들게 되면서 다각도로 전개되는 추격전이 펼쳐졌었다.
이번에 개봉한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는 전편에서 희망의 전사였던 퓨리오사의 성장 서사를 다룬다. 사실 성장 서사라기보다는 그녀가 겪었던 모든 절망들을 보여주면서 그런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과정을 보여준다. 모든 이야기를 다 보고 나면 이 영화의 퓨리오사(안야 테일러 조이)에게 행복한 순간은 어린 시절 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짧은 행복의 기억 때문에 그녀가 수많은 어려움을 견딜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럼 이 영화는 그녀의 어떤 감정들을 전달하면서, 그가 겪었던 수만은 절망들을 보여주고 있을까.
[첫 번째 감정] 퓨리오사의 절망
영화의 대부분은 절망으로 가득 차있다. 핵전쟁으로 황폐화된 지구는 끝없는 사막으로 바뀌었고, 그 안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살기 위해 누군가의 물과 식량을 탈취한다.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시대, 이 시기에 아직 푸르름을 간직한 공간이 있었다. 바로 퓨리오사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 그런 곳이다. 이곳의 사람들은 외부인을 강력하게 경계하지만 그 안에서 자급자족하며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다.
퓨리오사가 외부 침입자들을 발견하고 그들에게 납치되면서 그녀의 절망이 시작되었다. 영화 초반 퓨리오사의 엄마가 납치된 퓨리오사의 뒤를 따라가는 길고 긴 추격장면은 절망을 맞이하지 않게 하려는 몸부림이다. 여기엔 두 가지 절망이 섞여 있다. 유일하게 존재하던 푸른 지상 낙원이 외부에 노출되어 버렸다는 것과 그곳 출신 아이인 퓨리오사가 납치되었다는 것이다. 엄마는 끝까지 퓨리오사를 찾기 위해 추적하지만 결국 그 집단의 우두머리인 디멘투스(크리스 햄스워스)에게 붙잡히고 만다. 퓨리오사는 바로 앞에서 엄마가 죽임을 당하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게 된다. 퓨리오사는 행복의 상징인 낙원에서 멀어졌고, 점점 더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녀의 고통은 커진다. 초반의 긴 추격장면은 긴 안전끈이 늘어나가 끊어져버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엄마가 죽임을 당한 후 십여 년이 지난 후, 성인이 된 퓨리오사는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존재였던 잭(톰 버크)을 눈앞에서 잃게 된다. 그 역시 디멘투스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이다. 퓨리오사에게 가장 큰 절망을 선사한 디멘투스는 그저 자신을 귀찮게 한 존재를 하찮게 보고 그저 자신의 재미를 위해 제거해 버렸을 뿐이다. 그렇게 퓨리오사의 절망은 더욱 커지고, 그 절망을 준 존재를 향한 복수심은 더욱 커져만 간다. 영화 내내 디멘투스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압도적인 자동차들로 퓨리오사와 일행을 누르고 파괴한다. 영화는 거대한 디멘투스의 차량이 퓨리오사의 자동차를 짓밟는 모습을 담으며 퓨리오사의 절망을 처절한 액션 장면에 담고 있다.
[두 번째 감정] 퓨리오사의 분노와 복수
절망은 당연하게 분노의 감정으로 바뀐다. 퓨리오사는 임모탄이 지배하고 있는 시타델에 숨어 살면서 분노를 표출할 수 있는 기회를 찾는다.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는 퓨리오사의 분노가 조금씩 쌓여가는 과정을 점진적으로 보여준다. 그 과정은 십여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진행된 것이어서 단번에 폭발적으로 쌓인 것은 아니다. 퓨리오사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복수를 하기 위해서는 꽤 긴 시간이 필요했고, 자기 자신을 단련하고 성장하지 않는다면 복수의 기회조차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말도 극단적으로 줄일 수밖에 없다. 자신의 정체를 최대한 숨기고 시타델의 시스템 속에서 조용히 지내면서 탈출의 기회를 엿볼 수 있는 위치를 노렸다. 결국 수송 트럭으로 탈출을 감행하려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는 않는다. 그 과정에서 만난 잭은 <매드맥스> 시리즈의 모든 남자 가운데 가장 믿을만한 인물이다. 그는 퓨리오사 내면에 숨어있는 분노를 발견해 내고, 그것을 적절히 조절하면서 살아가는 방법을 무심하게 알려주는 인물이다.
영화 중반부에 잭과 퓨리오사가 무기 농장에서 디멘투스 일행에게 습격을 받는 장면이 있다. 무기 농장의 거대한 탑이 무너지는 가운데 두 사람은 서로를 의지해 그 상황을 겨우 벗어나지만, 그 액션 장면처럼 그 두 사람은 붕괴되고 있었다. 완전히 붕괴되어 버린 퓨리오사는 결국 마음속에 복수만이 가득한 상태가 되어버린다.
[세 번째 감정] 모두의 희망이 된 퓨리오사의 희망
영화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의 마지막 하이라이트 액션 장면은 영화의 처음과 비슷한 추격장면이다. 이 추격을 하기 위해 퓨리오사는 바퀴가 하나 없는 자동차를 타고 가게 된다. 마치 팔 하나가 없는 퓨리오사의 모습과 흡사해 보인다. 그렇게 추격을 시작한 퓨리오사는 영화의 초반 자신의 엄마가 끝까지 자신을 추적해 왔던 것처럼 끝까지 디멘투스를 추격해 낸다. 그리고 자신의 엄마 그리고 유일한 믿음을 주었던 잭의 복수를 하기 위해 애쓴다.
사실 이런 복수의 전체 과정에서 퓨리오사는 희망을 잃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어머니가 준 복숭아나무 씨앗 하나를 잊지 않았다. 그녀가 입안에 넣어 보호하는 그 작은 씨앗은 그녀가 지켜야 할 최후의 희망이다. 이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이야기 직후에 벌어지는 내용을 다루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까지 이어서 보고 나면 퓨리오사가 지켜냈던 그 희망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의 희망이 되어가는 과정을 볼 수 있다. 퓨리오사는 그 희망을 지켜냈고, 많은 사람들에게 그 희망의 동력을 나눠주었다.
영화 속 빌런인 디멘투스의 희망은 무엇이었을까. 사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디멘투스는 희망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인물이다. 또 다른 빌런인 임모탄은 정상적인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희망을 따라가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엄청난 독재력으로 대중을 사로잡아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디멘투스에겐 그런 희망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재미있는 것만 추구하며 삶을 이어온 인물이다. 그가 잭을 죽이는 장면에서 혼잣말로 재미없다고 웅얼거리는 장면에서 그의 그런 태도를 엿볼 수 있다. 퓨리오사는 자신의 희망으로 무작위성, 혼란, 무계획의 대표적인 인물인 디멘투스에게 일종의 형벌을 내린 셈이다.
퓨리오사의 서사는 이번 영화로 완성되었다. 앞으로 <매드맥스> 시리즈가 더 이어질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2015년부터 시작된 <매드맥스 사가>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궁금한 인물이었던 퓨리오사에겐 숨겨진 이야기가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이번 영화에도 다양한 액션 장면들이 담겨있고, 한 액션 시퀀스가 꽤 길게 이어진다. 전작을 좋아했던 관객이라면 충분히 만족할만한 프리퀄 영화다. 전작이 액션으로 서사를 완성했다면, 이번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에서는 액션과 음악 그리고 퓨리오사의 성장이야기로 길게 서사를 이어 완성했다. 전편이 직렬로 이어진 영화라면, 이번 영화는 병렬로 펼쳐 다각도로 퓨리오사의 경험과 생각을 전달한다. 퓨리오사의 희망이 어떤 식으로 펼쳐지는지 끝까지 시선을 잡아두는 영화다.
*영화의 스틸컷은 [왓챠]에서 다운로드하였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https://www.notion.so/Rabbitgumi-s-links-abbcc49e7c484d2aa727b6f4ccdb9e03?pvs=4
-
- 토르 X 타이카 와이티티는 계속되리..
토르 X 타이카 와이티티는 계속되리… <토르 러브 앤 썬더>
ⓒ 네이버 영화
정보
개요 액션 | 미국 | 119분
감독 타이카 와이티티
출연 크리스 헴스워스, 나탈리 포트만, 테사 톰슨 등
줄거리
슈퍼 히어로 시절이여, 안녕! 이너피스를 위해 자아 찾기 여정을 떠난 천둥의 신 ‘토르’
그러나, 우주의 모든 신들을 몰살하려는 신 도살자 ‘고르’의 등장으로 ‘토르’의 안식년 계획은 산산조각 나버린다.
‘토르’는 새로운 위협에 맞서기 위해, ‘킹 발키리’, ‘코르그’, 그리고 전 여자친구 ‘제인’과 재회하게 되는데,
그녀가 묠니르를 휘두르는 ‘마이티 토르’가 되어 나타나 모두를 놀라게 한다.
이제, 팀 토르는 ‘고르’의 복수에 얽힌 미스터리를 밝히고
더 큰 전쟁을 막기 위한 전 우주적 스케일의 모험을 시작하는데...누가 출연하나요?
토르 | 크리스 헴스워스
@IMDB
<어벤져스: 엔드게임> 이후,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멤버들과 우주로 떠난 ‘토르’.
신들을 향한 ‘고르’의 무차별 학살에 우주가 위험에 처하자 토르는 우주를 누비며 ‘고르’의 행적을 쫓으며,
그의 복수심에 얽힌 미스터리를 밝히고 우주를 구하고자 한다.
마이티 토르 / 제인 포스터 | 나탈리 포트만
@IMDB
아스가르드에서 지구로 추방당한 ‘토르’를 제일 처음 발견하고 그를 내면적으로 성장시킨 ‘제인 포스터’.
그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그녀가 파괴되었던 ‘토르’의 상징인 묠니르를 들고 ‘마이티 토르’로 거듭나 ‘토르’와 재회한다.
발키리 | 테사 톰슨
@IMDB
‘토르’가 새로운 여정을 떠나며 뉴 아스가르드의 왕이 된 ‘발키리’는 그곳의 평온한 일상에 지루함을 느낀다.
그러던 중, ‘고르’로 인해 아스가르드인들이 위험에 처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전사의 본능을 일깨운 ‘발키리’는 망설이지 않고 합류한다.
고르 | 크리스찬 베일
@IMDB
우주의 모든 신을 없애겠다는 강렬한 복수심에 사로잡힌 ‘고르’는 사악한 고대의 무기를 들고 신들을 무차별 학살한다.
어느덧 ‘고르’는 자신의 행적을 쫓던 히어로 군단 ‘팀 토르’와 맞닥뜨린다.
코르그 | 타이카 와이티티
@IMDB
‘토르’와 유쾌한 케미를 보이며 엉뚱한 모습을 보이곤 하지만 알고 보면 뛰어난 검투 실력을 가진 검투사 ‘코르그’.
그는 ‘발키리’와 함께 ‘토르’를 도와 아스가르드인들을 구한 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토르’의 곁을 지키며 친구가 되어주었다.
최대한 스포를 뺀 리뷰
ⓒ 네이버 영화
마블 히어로 중 유일하게 솔로 무비가 4편까지 만들어진 히어로가 바로 토르이다.
이렇게 4편의 걸친 영화는 매번 다채로운 이야기를 풀어가며 토르의 매력을 한 층 한 층 끌어올렸다.
그래서인지 북미 영화 예매 사이트 '판당고'가 실시한 '2022 여름 가장 기대되는 영화 히어로 - 빌런 - 사이드킥'에
관한 설문에서 토르의 주인공들이 1위를 석권하기까지 했다.
토르 시리즈가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을 만나며 더 돋보이게 된 매력이 바로 OST와 유쾌함이다.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이 처음으로 맡은 토르 시리즈인 <토르: 라그나로크>를 봤다면 알 것이다.
툭툭 던지는 듯한 개그가 담긴 대사로 유쾌함을 선사하며 작품에 어울리는 곡을 삽입하며 짜릿함을 두 배로 만든다.
이번 <토르: 러브 앤 썬더>에서도 이러한 매력을 볼 수 있었다. 영화 속 OST는 작품의 매력을 한 층 더 끌어올렸고,
코믹 요소의 비중도 크게 늘어나며 유쾌함 또한 두 배가 되었다.
코믹 요소의 비중이 많다 보니 이번 영화는 지난 시리즈보다 더욱 더 가볍게 보기 좋은 영화가 될 것 같다.
<토르: 러브 앤 썬더> 바로 전에 나왔던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는 다크하고 무서운 분위기의 영화였다면
이번 영화는 가볍게 보기 좋은 코믹 가득한 히어로 무비다.
ⓒ 네이버 영화
마이티 토르, 고르, 제우스 등 다수의 새로운 캐릭터의 등장하며 영화는 새로운 재미를 선사하였다.
새로운 캐릭터가 등장하며 새로운 케미를 볼 수 있었고, 새로운 캐릭터의 등장과 함께 볼 수 있었던
새로운 장소들 또한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해주었다. 캐릭터와 함께 더욱 더 커져가는 세계관은 앞으로의 마블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지금까지 <토르: 러브 앤 썬더>의 간단한 정보를 살펴보고, 리뷰를 해봤는데
어떠셨나요?! 여러분들도 얼른 보시고 리뷰 올려주세요!-!
<토르: 러브 앤 썬더>는 토르 시리즈를 안 보셨던 분들도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영화가 될 것 같습니다.
이전 시리즈를 모두 보고 간다면 좋겠지만, 정말 시간이 없다면 <토르: 라그나로크>를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씨네랩 에디터 Hizy
-
- 남한 표류기
그림자꽃
줄거리
평범한 평양 시민 김련희 씨는 2011년, 간 치료 차 중국에 방문한다.
병원비는 예상보다 비쌌고, 그녀는 브로커에게 ‘한국에선 금방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을 듣는다.
그 말에 속아 북한 여권을 뺏기고 한국에 들어온 김련희 씨.
그로부터 11년이 지났지만, 그녀는 여전히 가족들 품에 돌아가지 못한 채 한국에 머무르고 있다.
남한 표류기
숨은 의미 찾기
영화 속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김련희 씨가 한국을 떠나 북한의 가족 품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인권보호 시위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간첩은 돌려보내서는 안 되고 강력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그녀를 돕거나, 상처 준다.
김련희 씨는 대놓고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에는 익숙한 듯했다. 물론 댓글을 읽는 그녀의 표정은 서글펐지만. 들리지 않는 척 무시하기도 하고, 맞서 싸우기도 한다. 사실 그보다 그녀를 더 아프게 하는 사람들은 표면적으로는 위로하는 척, 이야기를 들어주는 척하면서 은근슬쩍 그녀를 상처 주는 사람들이었다.
"북한 여자들은 왜 다 획일화되었느냔 말이야."
그저 분위기를 띄우자고 노래를 한 구절 불렀을 뿐이다. 그랬더니 북한 노래는 하나같이 똑같다며 체제를 들먹이는 사람들. 다 같이 즐기자고 노래해 보라며 그녀를 일으켜 세우더니 노래가 끝나니 체제가 문제라며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
그 말을 듣고 있는 김련희 씨의 표정은, 대놓고 욕지거리를 날리는 사람을 바라볼 때보다 몇 배는 더 씁쓸해 보였다. 이야기를 나누었다 생각하고, 예술로 하나가 될 거라 믿었던 사람들에게 당한 배신의 몫은 훨씬 컸을지도 모르겠다.
사람마다 생각은 다르다. 다를 수밖에 없으니 때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마주할 수도 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상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권리를 갖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때때로 그것을 잊고 살아간다.
이승준 감독은 멀게만 느껴지는 북한과 우리나라의 비슷한 점을 찾아보자고 생각해서 이 영화를 찍기 시작했노라 고백했다. 그 의도에 충실하게, 영화는 체제에 대한 토론이나 정치적 싸움을 담기보단 우리네 모두가 살아가는 영상을 담아내려 애썼다.
그들 역시 사람 가득한 출근길을 지나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퇴근하면 친구들과 맥주 한잔하며 회포를 푼다. 특히 김련희 씨와 그의 딸인 리련금 씨가 지하철을 이용하는 모습이 겹쳐 보이는 장면에서는 의문이 들었다. 이토록 비슷한 삶을 살아가는, 다를 것 하나 없는 사람들이 왜 떨어져 살아야 하는가?
더불어 주인공인 김련희 씨는 가지 못하는 평양의 모습을 영화에서 담아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게 다가왔다. 김련희 씨의 가족인 리금룡 씨의 리련금 씨가 생활하는 모습은 이승준 감독과 친분이 있는 핀란드 영화감독이 찍어온 것이라고 한다. 같은 나라 사람인 이승준 감독도, 평양이 고향인 김련희 씨도 만나지 못하는 가족을, 다른 나라 사람이 대신 만나고 온다는 것이 어딘가 모순적이지 않은가.
김련희 씨가, 또한 우리가 그들의 가족을 만날 수 있는 건 오직 페이스북 메시지를 통해서였다. 영화 내에서 김련희 씨가 가족들과 영상통화를 했던 장면은 예정에 없던 장면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더더욱 반갑고 아쉽게 느껴졌을 통화가, 분단된 쓰라린 현실을 한 번 더 각인시켜준다.
"너가 북한에 돌아가는 것은, 그거는 이제 안 되는 거야."
고된 타향살이에 지친 김련희 씨는 오랜만에 한국 땅을 밟을 당시 함께 건너온 동지들을 만났다. 그동안 못 나눈 안부와 한국에 건너올 때의 급박한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꽃을 피우던 중이었다.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던 동지들은 김련희 씨에게 북한은 더 이상 갈 수 없노라고 못을 박았다. 그 말은 앞서 자신을 상처 주던 남한 사람들의 것보다 훨씬 묵직하고 날카로웠다. 한때는 목숨을 의지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앞장서 그녀더러 포기하라는 가혹한 현실을, 그녀는 견디기 힘들어 보였다.
그녀는 자신을 평양 시민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이 남한의 체제가 잘못되었고 이념과 사상이 달라서 견딜 수 없기 때문은 아니다. 평양시민이라는 단어는 '어디의 누구'가 아닌 '누군가의 누구'로 살고 싶은 그녀의 소망을 에둘러 표현하는 것뿐이다.
서울에 사는 사람이 자신을 '서울시민'으로 칭하는 것을 두고 우린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에겐 서울에 마음을 뉠 집이 있고, 의지할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건 스스로를 '서울'이라는 공동체에 속해있음을 약속하는 단어에 불과하다. 김련희 씨는 서울 어딘가에 누워 있어도, 서울에 사는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어도 진정 쉬지는 못한다. 그녀가 속해있는 공동체는 평양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말하는 '평양시민'이란 평양에 있는 나의 집, 나의 가족들의 김련희로 살고 싶노라고 말하는 것임을, 왜 우리는 또렷이 바라보지 못하는 것일까.
영화가 끝나기 직전, 스크린에는 탑골공원 근처를 배회하는 김련희 씨의 뒷모습으로 가득 찼다. 문득 해외여행을 갔던 때가 떠올랐다. 나와 다른 생활을 공유하는 사람들, 그 속에 이방인으로 존재하는 나. 그 순간의 나는 설렘과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어지러운 거리를 방황하는 김련희 씨의 뒷모습에 담긴 것은 설렘이나 기대가 아닌, 혼란과 당혹스러움이었다.
나는 내가 원해서 그 거리로 나섰다. 거리를 가득 매운 인파 속에서 나는 아무도 나를 모른다는 그 사실에 짜릿함을 느꼈다. 하지만 김련희 씨는 자신의 의지로 한국에 온 게 아니다. 원치 않았던 여행, 길을 잃었지만 아무에게도 길을 물을 수 없는 게 그녀의 처지다. 내겐 너무나 익숙한 풍경, 익숙한 사람들의 스침이 그녀에게는 지독한 외로움과 고독이 되어 지나갔을 일이다.
"길어야 1년, 2년일 거야."
종각 거리를 배회하는 뒷모습에는 김련희 씨가 딸과 통화하는 음성이 겹쳐서 흘러나왔다. 언제쯤 오냐는 딸의 물음에 김련희 씨는 길어야 1, 2년이라며 딸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11년째 남한 땅에 표류 중이다.
'북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닌, '가족에게 가는' 길
감상평
“안녕하세요. 저는 평양 아줌마 김련희입니다.”
영화를 보기 앞서 이승준 감독님과 김련희 씨 두 사람이 함께 올라 짤막한 무대인사를 남겼다. 그때 김련희 씨는 자신을 ‘평양 아줌마’라고 소개하며 수줍은 듯 웃었다. 그 짧은 단어를 듣는 순간부터 가슴속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울림이 가득 퍼져나갔다. 맹숭맹숭한 그런 기분으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영화는 15년도부터 찍기 시작해 19년도에야 완성된 작품이라고 한다.
김련희 씨는 혼란스러운 한국 역사의 중심에 서서 모든 것을 겪고 느끼며 살아왔다. 간간이 느꼈던 절망과 희망들의 폭이 너무나도 커서, 나까지 눈시울이 붉어질 것 같았다. 북한과 멀어지는 것 같아 초조하다가도 다시 가까워지는듯해 안심하고. 이제 곧 돌아갈 수 있겠구나 싶어 설레다가도, 계속해서 출국금지명령을 받아 절망하는 과정이, 비단 김련희 씨 개인의 것이 아닌 한반도 전체의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가족이 있잖아요. 그 누구도 가족을 뺏겨선 안 돼요."
김련희 씨의 말마따나, 인간은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다. 살았든 죽었든, 좋든 싫든 누구나 가족이란 것이 있다. 이념과 체제 너머, 그녀는 인류가 기본으로 누려야 할 '행복'이라는 권리를 빼앗겼다고 호소한다. 그녀는 영화 속에서 자신을 비난하고, 자신의 북행을 반대했던 수많은 사람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의 가족이 북에 머물러 있어도, 지금은 대립 상태이니 평생 거기에서 살라고 할 수 있느냐고.
우린 그녀의 문제를 확대해석할 필요가 없다. 있는 그대로 지켜보면 그만이다. 가족하고 살고 싶다는 말, 나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은 잘못된 게 아니지 않은가.
기막힌 우연처럼, 영화관을 나서며 이어폰을 꽂았더니 투애니원의 '컴백홈'이 흘러나왔다. 평소라면 그저 흥얼거리며 들었을 그 노래를 가사 한 자, 한 자 곱씹어가며 들었다. 나는 김련희 씨가 '북한으로 돌아가길' 바라진 않는다.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길',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길' 간절히 소망할 뿐이다.
이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시사회에 참석하였으나, 솔직하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리뷰임을 알립니다.
-
- 풋풋한 종이 내음 첫걸음
누가 봐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천재들이 있다. 그들의 영역은 확고하지만, 아무에게나 허락되지는 않는다. 좁은 문을 여는 이들은 강렬하다. 때론 자신을 불태워 버릴 만큼 이글거리기도 하고, 모난 정처럼 망치를 맞는 경우도 있다. 꿈꾼다고 이룰 수 있는 것 같지도 않지만, 이런 삶을 꿈꾸는 이도 현저히 적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라고 말하고 싶어지는 마음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감각적인 언어로 소설을 쓰는 일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상태에서 막연하게 동경만 하는 이가 있다면. 그가 꿈꾸는 작가 상도 분명 그런 파괴적 천재는 아니기가 쉽다. 보기 좋은 카페에 앉아, 멋진 도구(노트북이 됐든 만년필이 됐든 연필이 됐든)로 글을 쓰고 있는 모습에 가깝기가 쉽다. 겪어보기 전까지는 '창작의 고통'이라는 말조차 달콤해 보인다. 이 문장은 저격이라기보다 자아비판이다. 내게도 낯설지 않은 감각이므로.
<마이 뉴욕 다이어리>가 시작되면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며 풋풋한 미소를 짓는 조안나도 그런 단계에 있다. 5개 국어를 하고 여행을 다니고 소설을 쓰는 삶을 살고 싶었다고 말하며 웃는다. 그리고 지금은 조안나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그의 사회생활 초년기다. 잡지에 시를 투고해 등단했고, 친구를 만나러 왔던 뉴욕에 눌러앉는다. 싸구려 아파트에서, 카페에서 글을 쓰는 작가의 삶을 살고 싶은 마음에. 그리고 이 삶을 이어가기 위해 일자리도 구한다. 작가 에이전시에서 일하면서, 작가(이자 작가 지망생)인 자신의 정체성은 숨겨 두어야 하는 이중생활이다.
<마이 뉴욕 다이어리>는 뚜벅뚜벅 혼자 삶을 개척해 가는 젊은이의 성장을 담으려 했다. 해리와 샐리의 설왕설래 없이 혼자서 걷기에도 뉴욕은 아름답다는 것을, 악마도 프라다도 아닌 상사 아래서 충분히 단단한 시간을 쌓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 인간의 젊은 날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풋풋한 종이 내음 안에서 따스한 톤의 색깔로 펼쳐 보인다. 다만 영화의 전개도 어쩐지 그만큼 풋풋하여 아쉬움을 남긴다.
이 영화의 원제는 <My Salinger year>다. 여기서 샐린저는 "그 유명한" 소설가 J.D. 샐린저. 이런 "그 유명한" 이들의 작품을 안 봤다고 하면 사람들은 "그걸 안 봤다고?" 하며 놀라는데, '나만 안 본 천만 영화', '나만 안 본 베스트셀러'는 사실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나름대로 열심히 읽고 쓰며 지내온 조안나지만, 미국 십대라면 읽지 않을 수 없다는 <호밀밭의 파수꾼>을 비롯해 샐린저의 책은 한 권도 읽지 않았다. (이런 걸 말할 때는 좀 부끄러운데, 나도 그렇다.) 뉴욕에서 새로 사귄 남자친구도 "믿을 수가 없다"라고 반응하지만, 어쩌겠는가. 안 읽은 걸.
그런 조안나지만 문학 전공을 따라 작가 에이전시에서 일하게 되고, 맡게 된 작가가 하필 샐린저다. 보통의 작가와 달리 계약 관계를 검토하거나 출판 현황을 체크하는 업무보다, 작가의 은둔 생활을 보호하는 것이 주요 임무다. 세계 곳곳에서 보내오는 팬들의 편지는 잘 검토한 뒤 갈아버리고, 정해진 양식대로 답장을 보내야 하며, 다른 시간에는 타자기로 녹취록을 풀어내는 단순 업무가 대부분이다. 정작 타자기도 칠 줄 모르고, 에이전시에서 선호하지 않는 '작가'지만, 그 사실은 잘 숨긴 채 무사히 취업에 성공한다. 그리고 가끔 샐린저와 통화할 기회가 생긴다.
시고니 위버가 분한 사장 마가렛은 이미 산전수전 다 겪고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성공한 직장인이다. 배경인 1995년 기준으로 사무실에 컴퓨터를 들이고 싶지 않다며 타자기 사용을 고수할 만큼 변화를 좋아하지 않지만, 감각은 기민하다.
분명한 마이 웨이를 가진 상사와, 정석대로는 가지 않지만 아이디어 반짝이는 신입이라는 클리셰. 샐린저의 팬들에게 '진심 어린' 답장을 보내고 싶다는 조안나는 마가렛과 의견이 부딪고, 그 과정에서 서로의 장점을 인정하게 되겠지. 상사는 신입을 키워볼 만한 좋은 젊은이로 인정하고, 신입은 상사의 연륜과 보호에서 더욱 성장할 것 같은 느낌이다. 동시에 샐린저를 통해 문학을 향해 힘찬 도약을 이루게 되겠지.
게다가 그 배경은 90년대의 정취가 담긴 아름다운 소품과 의상, 낭만을 가득 담은 뉴욕의 정경, 그 안에서 펼쳐지는 싱그러운 초년의 시절. 아름다운 정서를 담뿍 전달하기에 더할 나위가 없다.
그 기대는 살짝 아쉬운 선에서 충족된다. 마가렛과의 관계도 샐린저와의 관계도 또한 팽팽한 힘 없이 축 늘어진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유가 뭘까. 나는 조안나라는 캐릭터의 설정에는 공감했지만, 그 설정은 영화 속 언행과 매끄럽게 이어지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시로 등단했다는 점, 대학원을 중퇴하고 뉴욕으로 왔다는 점, 글을 쓰고 싶어 한다는 점을 대사로는 설명하는데, 극 중 모든 행동에선 드러나지 않는다는 느낌. 마치 내가 처음 썼던 단편 시나리오 같다. 내용을 전달해야 한다는 점에 급급해서 정작 사건으로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고, 설정해둔 캐릭터 특성을 대사에 마구 욱여넣었던…
샐린저라는 작가를 맡은 에이전트임에도 러닝타임 후반부에서야 샐린저를 읽기 시작하는 인물이, 샐린저의 책에 감명을 받고 편지를 써오는 사람들에게 대체 무슨 답장을 하고 싶어 하는지? 조안나는 '진심' 어린 답장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가 보내고 싶은 진심이 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글을 쓰지 못하는 자신을 괴로워한다는 설정도,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잘 아는 감정이기에 넘실넘실 다가올 뿐 영화에서 잘 보였는지는 모르겠다.
물론 영화 속 인물이 꼭 실제 직장인처럼 행동할 필요는 없다. 조안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보여줄 수도 없다. 그러나 결말까지 가는 동안 조안나에게 일어나는 변화는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 배경이 직장이고 직업적 성취에 대한 이야기라면, 어느 정도 일에서도 글에서도 보여줘야 하는 영역이 있지 않을까? 바둑 두다 낙하산 타고 대기업 들어간 장그래도 '쟤는 언제 자나?' 싶을 정도로 노력하는 모습들을 함께 담아, 가까스로 쌓은 기초 지식에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붙여 자기 자리를 확보해간다는 설정에 개연성을 확보했듯이. 그런 개연성의 노력이 없는 채로 조안나는 엉성하게 그려지다 말았다. 그럼에도 얼기설기 풀려나가는 조안나의 시간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말로 스토리를 눙쳐 버리는 수준이다.
샐린저와 마가렛에게 각각 문학 조언과 업무 조언을 들으며 성장의 양 날개를 펴는 지점에서는 다소 의구심이 일지만, 동시에 그 미숙하고 모자란 면면은 조안나라는 캐릭터의 매력이기도 하다. 미숙하고, 엉망진창이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일단 발을 떼어 보는 것. 그 시기가 아니라면 차마 가질 수 없는 마음. 많이 계산하지 않는 속내. 그래서 어쩐지 응원하고 싶어지는 단계. 그때 동경하는 삶을 따라 뚜벅뚜벅 걸어간다는 건 축복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이 마음이 문학을 사랑하는 마음과 명확한 연관 관계가 있는지 그건 모르겠다. 다만 나는 문학과 얽힌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길 잃은 기분도, 그걸 박차고 풋내 나는 발걸음을 떼기 시작할 때의 기분도. 멋진 어른을 보며 존경하기도 하지만 결국 나는 내 길을 갈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과 동시에, 불어오는 바람이 머리칼을 날리고, 내가 여기 있구나, 새삼스러운 그 기분. 막연함과 외로움, 설렘. 그 자리에 함께 놓여 있는 문학.
미묘한 아쉬움을 그렇게 젊음과 문학이라는 단어가 벌충한다. 포스터 카피대로 여기는 인생의 마지막 페이지가 아니라 첫 페이지니까. 그렇게 자신을 알아가고, 세상을 알아가고, 그렇게 자라날 테지. 내게 이 이야기가 멋진 성장기로 다가오진 못했지만, 그럼에도 씩씩하게 발을 떼는 조안나의 첫걸음에서는 풋풋한 종이 내음이 났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에서 시사회에 초대받아 감상하고 작성한 글입니다.
-
- 《킹스맨 : 퍼스트 에이전트》 영국 역사 속 실제 기록 그리고 1차 세계대전 역사ㅣ킹스맨 프리퀄ㅣ
? 영화 '킹스맨:퍼스트 에이전트 (King's Man, 2020)' 예고편 분석영상
- 스태프
제작사: 20세기 폭스, 마브 스튜디오, 클라우디 프로덕션
배급사: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 모션 픽처스,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장르: 액션, 스릴러
감독: 매튜 본
제작: 매튜 본, 데이빗 리드, 애덤 볼링
각본: 매튜 본, 칼 가이듀섹
원안: 매튜 본
출연진: 해리스 디킨슨, 레이프 파인스, 젬마 아터튼, 다니엘 브륄, 자이먼 혼수, 스탠리 투치 외
음악: 헨리 잭맨
개봉일자: 2020년 9월 18일-킹스맨 시리즈 프리퀄
1차 세계대전 배경
#킹스맨퍼스트에이전트 #킹스맨 #킹스맨퍼스트에이전트예고편
-
- 7년만에 돌아온 슈퍼배드 4 / 메가 미니언즈의 탄생 / 미니언즈 없는 슈퍼배드는 없다!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슈퍼배드 4" 후기입니다.
*메가 미니언즈의 재롱이 담긴 쿠키영상 있습니다.
-
- 영화 <싱글 인 서울> 티저 예고편
혼자가 좋은 이동욱 VS 혼자는 싫은 임수정 극과 극 싱글라이프 티저 예고편 공개! 웰메이드 현실 공감 로맨스 [싱글 인 서울] 11월 29일 극장 개봉
-
- 왓챠 <와이 우먼 킬 시즌 2> 독점 공개 영상
[2021년 7월, 왓챠 독점 공개]
올 여름, 살인의 꽃이 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