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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LAB2021-03-18 00:00:00

진부한 듯 새롭게

디즈니가 서사를 변형시켜 가는 방식에 대하여

진부한 듯 새롭게

디즈니가 서사를 변형시켜 가는 방식에 대하여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은 동남아시아에서 영감을 받았을 뿐 디즈니의 전형적인 서사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않는다. 그 탓에 비슷한 시기에 개봉하게 된 픽사의 <소울>과도 비교되어 아쉽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전형적인 서사가 어떤 식으로 영화 안에서 작동하는지도 볼 수 있다. 서사는 비록 전형적이지만 서사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의 의의는 조금 뻔하지만 짚고 넘어갈 만하다. 디즈니 최초로 동남아시아에서 영감을 받은 이야기라는 점 이외에도 프로타고니스트와 안타고니스트, 조력자가 전부 여성 캐릭터라는 점은 시사점이 있다. 서사 속 남성 캐릭터들은 대부분 큰 역할을 하지 않거나 초반에 돌로 변해버린다. 그러면서도 여성 캐릭터에게 주어지는 전형적인 감정적인 모습도 크게 드러나지 않아, 라야(켈리 마리 트란 분)와 나마리(젬마 챈 분)의 멋진 격투신을 볼 수 있다는 건 굉장한 장점이다. 디즈니의 전작에서는 서양을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도 프로타고니스트와 안타고니스트가 모두 여성인 적은 없었다(인어공주 얘기하지 말구요..). 다만 동남아를 배경으로 한다면서도 메인 성우 대부분이 한국계 혹은 중국계라는 점은 여전히 헐리웃이 아시아를 세밀하게 구분해서 보지 않고(전문 용어로 '퉁쳐서') 있다는 점을 보여 주기도 한다. 참고로 주연인 켈리 마리 트란은 베트남계지만 시수 역의 아콰피나는 한국과 중국 혼혈계이며 벤자 역의 대니얼 대 킴, 비라나 역의 산드라 오는 한국계이고 젬마 챈은 중국계다.

 

전형적인 디즈니 공주님 서사를 따르고 있긴 하지만 디즈니가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을 통해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신뢰에 관한 이야기다. 말 그대로 속고만 살아 세상에 대한 불신이 가득한 나로서는 으이그 저런 쯧쯧.. 싶은 장면이 많기는 했지만 기본 관객층이 어린 연령대를 향하는 만큼 세상을 향한 따스한 메세지를 전달하는 디즈니의 진심을 무시할 생각은 없다. 조력자로 나선 마지막 드래곤 시수는 속고 속아도 사람들의 진심을 믿는다. 디즈니 서사에서 순수한 캐릭터 하나쯤은 있어야 하기에 학습 효과라고는 전무해 보이는 시수가 필요했겠지만 그 캐릭터 대부분이 인간이 아니라는 점은 짚고 넘어갈 만하다. <알라딘>의 지니, <인어공주>의 세바스찬, <겨울왕국>의 올라프 등 타인을 속일 줄 모르고 순수 그 자체에 가까워 보이는 캐릭터들은 디즈니에서는 언제나 인간이 아니었다. 언젠가 동물 영혼은 너무 순수해서 인간으로 잘 태어나지 않고, 인간으로 태어나더라도 다음 생에서는 다시 동물로 태어나게 되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디즈니 애니메이터들도 이렇게 생각하는걸까?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 인간을 깨우치는 건 언제나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 않다. 바꿔 말하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노답(..)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현실 세계에는 시수도 올라프도 세바스찬도 없으니 디즈니랜드를 벗어나는 순간 악몽이 시작되는 건 당연해 보인다.

 

 

시수의 인간을 향한 믿음은 절대적으로 강력해서 자신의 남매들이 희생해서 만든 드래곤젬이 부숴지고 다섯 조각으로 나눠져 드룬을 도로 불러왔다는 말에도 굴하지 않는다. 이쯤 되면 시수를 포함한 모든 드래곤들이 돌로 남아서 인간이 파멸해도 할 말이 없을 지경인데 시수는 자신을 찾아낸 라야와 라야를 쫓는 나마리에 대한 신뢰를 놓지 않는다. 어쩌면 시수가 인간에 대한 신뢰를 놓지 않는 데는 신뢰란 결국 불신을 타파하고 태어나는 것이라는 데 있을지 모른다. 분을 믿지 못하던 라야는 아기 사기단에게 속고 분과 사기단이 배에서 평화롭게 지내는 것을 보고서야 경계심을 내려놓는다. 라야가 태어난 시대는 드룬이 언제든 출몰할 수 있는 시대였으며 모든 드래곤이 돌로 변하거나 잠든 시대였다. 드래곤젬이 있었는데도 돌로 변한 드래곤이 돌아오지 못한 데는 인간들의 불신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드래곤젬이 작동되는 방식은 영화의 시작과 후반부가 동일하지만 유일하게 다른 점은 작동시키는 주체다. 서사적으로 라야에게 모험을 제공하기 위해 제작진은 라야가 어느 정도 평화로운 과거를 기억하되 죄책감에 기반한 동기를 제공해야 했고, 이를 위해 '드래곤은 없지만 드룬도 없는' 세상에서 이야기가 시작하도록 만들었다. 결과적으로는 드래곤이 존재하는 세상으로 돌아가야 했기에 같은 드래곤젬을 작동시키는 주체를 변경하는 방식으로 서사구조가 완성된다.

 

때문에 서사는 진부한 방식으로 전개되지만 그동안 보지 못했던 배경과 주요 캐릭터들의 성별을 여성으로 설정하는 방식으로 신선함을 더한다. 그럼에도 디즈니가 골라잡은 주제가 '신뢰'라는 데는 박수를 보낼 만하다. 지금껏 디즈니가 다뤄온 주된 주제는 <겨울왕국> 정도를 제외하면 모험과 (주로 이성간의)사랑이었다. 픽사와 결합한 초기작 <메리다와 마법의 숲>에서는 모녀지간의 사랑으로 살짝 변형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디즈니는 모험과 사랑이라는 주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디즈니의 주인공이 대부분 공주(로 대변되는 여성)이기에 모험과 사랑을 지속적으로 다루는 것이 나름의 의의는 있지만 성인 관객에게 소구하기에는 진부한 주제다. <겨울왕국>에서는 자매애로 살짝 변형시켰지만 안나의 연애 서사가 빠지지 않았기에 엘사로 대변되는 능력녀는 그에 걸맞는 상대를 부여받을 수 없는지, 아니면 여성에게 연애가 반드시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있기도 했다. 이에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은 모든 메인 캐릭터에서 연애 서사를 제거하고 프로타고니스트와 안타고니스트를 모두 왕국의 후계자이자 성인과 청소년의 경계선으로 설정한다. 라야와 나마리는 왕국의 후계자이지만 후사를 걱정할 나이도 아니며 무너진 쿠만드라의 현실에 연애따위 걱정할 겨를이 없는 인물들이다(그냥 라야랑 나마리가 사겨도 될듯하다..). 이렇게 연애 서사를 제거한 디즈니는 그 자리에 신뢰라는 새로운 주제를 위치시킬 수 있었다.

 

 

라야의 출신지가 심장의 땅으로 설정된 데는 아마도 주제의식 강화를 위해서였을 것이다. 전신에 혈액을 공급하는 기관이자 감정을 느끼는 기관(실제로는 뇌지만)으로 상징되는 심장부는 쿠만드라의 재건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벤자에게 어울리는 출신지다. 그런 벤자를 닮은 라야는 처음 보는 나마리를 믿고 드래곤젬을 보여주지만 공격을 상징하는 송곳니의 땅 출신인 나마리는 보자마자 라야를 배신한다. 이 배신은 후에 시수를 통해 신뢰로 거듭나게 되는데 거시적으로 라야와 나마리의 불신과 신뢰 회복이라는 과정을 통해 드래곤젬이 작동된다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나마리가 라야를 배신하지 않았다면 시수는 깨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라야가 죽을 때까지 쿠만드라는 분열된 채로 남았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쿠만드라의 재건은 나마리의 배신에서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어린 나이부터 배신이나 배운(..) 나마리에게 라야가 시수를 믿고 신뢰를 보여준다는 점은 드래곤이 실존한다는 것보다 더한 판타지에 가깝지만 디즈니 계열의 서사에서는 필수적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아무리 시수가 나마리를 믿었다 한들 라야는 나마리에게 결코 신뢰를 보내지 않았을 테지만 드룬이 쿠만드라를 잠식해 라야에게(나마리에게도) 선택지가 남지 않은 상황으로 서사가 진행됨에 따라 라야는 나마리를 믿을 수밖에 없게 된다. 나마리만이 남은 상황에서 나마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하지만 이를 신뢰로 포장하는 것 또한 디즈니의 능력이리라.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이 디즈니가 아닌 <얼음과 불의 노래>의 저자인 마틴옹의 손에서 탄생했다면 쿠만드라는 결코 재건되지 못했을 것이다. 드라마 <왕좌의 게임>의 원작인 소설 <얼음과 불의 노래>는 장르가 판타지임에도 인간에 대한 비관적인 시선과 정치 풍자로 현실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라야와 나마리가 청소년과 성인의 경계에 있었기에 서로에 대한 신뢰라는 순수한 믿음이 가능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기엔 메인 캐릭터 중 하나인 대너리스는 설정상 소설 초반부 10대 초반의 소녀다. 디즈니의 순수한 서사는 현실에서 도피하기에는 좋은 수단이 되기도 하지만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현실과의 괴리까지도 감싸안아야 한다. 디즈니의 서사는 현실로 나아가지 못하기에 진부하지만 그만큼 서사의 기본 구조에 충실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조금씩 다양성을 시도하는 디즈니가 언젠가 주어진 틀 안에서나마 새로움을 제시하길 기다려본다.

 

*이미지 출처는 모두 네이버영화입니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레이 작가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작성자 . CINELAB

출처 . https://brunch.co.kr/@screenholic/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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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 쿠니
    2020.10.13. 19:14

    반전포인트와 소소한 스토리

    쿠니
    2020.10.13. 19:14

    11.01 에 본영화 .배우들의 다양한 배역과 입체적인 캐릭터, 90년대 후반의 시대를 엿보는 맛은 쏠쏠하지만,다른 성별이 판단한 여자의 모습을 제3자의 입장에서 봤을때, 참으로 어색하고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몇 가지 있는건 어쩔 수 없는 한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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