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라별2021-04-02 10:45:39
편향성 없이 시대상을 잘 드러낸 영화 《에놀라 홈즈》
넷플릭스에서 셜록 홈즈 전편을 보고 나서 그 이후 셜록 홈즈는 실존 인물처럼 다가와버렸다. 나의 머릿 속에는 셜록-베네딕트 컴버비치가 각인되어 있었던 터라 다른 셜록 시리즈들은 볼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에놀라 홈즈는 셜록 드라마 시리즈에서 마지막에 조금 등장을 했던 터라 그래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보기 시작했다. 물론 캐릭터 설정은 많이 다르긴 했다. 드라마 셜록에서는 여동생이 감옥에 수감될 정도로 똑똑한 아이였지만 영화 에놀라 홈즈는 철부지 같으면서도 소녀미 가득한 진취적인 여성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드라마의 세계관과는 이어지지 않아서 당황스러웠지만, 그래도 괜찮았던 작품이었다.
영화 《에놀라 홈즈》 시놉시스
영화 《에놀라 홈즈》는 에놀라가 사라진 엄마를 찾으러 나서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소식 끊긴 두 오빠들에게 에놀라는 맡겨지고, 보수적인 마이크로프트는 에놀라를 현모양처로 키우려 한다. 하지만 홈즈 가문 답게 에놀라는 두 오빠를 따돌리며 런던으로 사라진다.
하지만 시작부터 도망자 신세인 귀족 청년과 엮이고 만다. 그 와중에 오빠 셜록까지 따돌려야 하는 에놀라. 미스터리가 가득한 이 모험. 과연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큰 줄기는 브레히트의 서사극
영화의 플레이 버튼을 눌렀을 때 정면을 보면서 에놀라가 말을 거는 장면이 나오는 바람에 아주 격하게 놀랐다. 영화의 형식의 중간중간 에놀라가 관객에게 현재 상황을 리포팅해주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연극에서 대표적인 방법으로 활용되던 서사극 형식을 차용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주인공이 연극 속에 있다가 갑자기 관객에게 이야기를 설명해주면서 관객들이 몰입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효과를 주는 방법이다. 영화 《에놀라 홈즈》에서는 이 효과가 제대로 먹혔다. 갑자기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여러분~?하고 에놀라가 관객을 불러댄다. 에놀라의 감정선에 몰입하기 보다는 그 상황과 흐름을 조금 더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장치였다.
그리고 내용이 여성 참정권에 관련된 이야기였기 때문에 여성 화자인 에놀라의 감정선에 너무 몰입하다보면 영화 자체가 억압의 구조로만 보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서사극 형식이 여성 화자가 여성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관객들이 자신의 입장에 맞춰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끔 만든 장치이지 않았나 싶다.
본격 자아 찾기 프로젝트
에놀라는 사라진 엄마를 찾기 위해 런던으로 향한다. 당당하고 진취적인 여성으로 자란 에놀라지만 엄마는 에놀라에게 친구이자 선생님이었기에 엄마에 대한 의존이 상당히 강한 편이었다.
하지만 사라진 엄마에 대한 좌절감에 허우적 거리기보다 에놀라는 스스로 엄마를 찾아나선다. 그런 에놀라에게 런던에서 조우한 엄마의 친구는 충고의 말을 건넨다. “다른 사람 찾는라 인생을 허비하지 말고 네 자아를 찾아.”
이 이후 에놀라는 엄마를 찾는 것에도 몰두하지만 점차 자신의 인생에서 무엇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한가를 깨닫는다. 도망자 신세의 귀족 청년을 다시 찾아내고 그를 도와 여성 참정권이 실현될 수 있도록 한다. 이처럼 에놀라는 엄마의 그늘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신이 해낼 수 있는 것을 찾으면서 “내 인생의 나의 것”이라는 말을 남긴 채 여성 탐정의 길을 떠난다.
후속작이 나올까?
그래서 든 의문은 후속작이 나올 것인가?였다. 에놀라 홈즈는 원작 소설이 6권이라고 한다. 에놀라 홈즈를 보면서 느꼈던 것은 셜록처럼 그 추리의 세계를 깊게 담아낸 것도 그 시대상을 반영하기 위해 여성들의 삶을 면밀하게 보여준 것도 아니었다.
즉, 이미 그 시대상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맞제. 그 땐 그랬었지.’하는 감상을 할 수 있는 영화였다. 그 소재를 되게 러프하게 다루면서도 재밌게 풀어냈고, 여성의 입장에서만 편향적으로 보여주지 않는 작품이었다.에피타이저 같은 작품이랄까?
그래서 과연 에놀라 홈즈가 이제 에놀라의 인생과 그 시대상을 면밀하게 보여주는 후속작으로 찾아올 수 있을지에 대해 기대감과 함께 궁금증이 들었다. 그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후속작이 나왔으면 좋겠다.
어찌보면 무거운 소재를 가벼운 마음으로 볼 수 있었던 영화 《에놀라 홈즈》. 후속작이 기대되는 작품이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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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괴의 미학으로 비틀어 끝내 내리꽂는 욕망의 여정
화녀 火女 | 1971 | 김기영 | 98분
※당시 영화의 시대상에 통용되었던 단어를 일부 사용하고 있습니다.
1960년대 〈하녀〉로 한국 영화계의 강렬한 인장을 남긴 김기영 감독은 10년이 지난 뒤 1970년대라는 시대상과 여전히 유효한 자신만의 메시지를 전달하려 자신의 이전 영화를 리메이크한다. 기존 시나리오에 많은 수정을 가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1971년 작 〈화녀〉의 흥행에는 단연코 당시 신인으로 첫 영화에 도전한 스물다섯의 윤여정 배우가 역할을 톡톡히 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하녀〉와 〈화녀〉, 〈충녀〉로 대표되는 김기영의 ‘여(女) 시리즈’는 물론 당대에도 흥행하였지만 9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그의 천재성과 영화적 의미를 정리 발굴하며 한국 영화사의 한 지류를 형성한 감독의 대표적인 문제작으로 꼽힌다. 그는 산업화와 근대화, 독재와 억압의 현실적 맥락에서 영화를 통해 자본과 계급으로 얽힌 대립과 파국, 성적 욕망으로 뒤틀린 인물, 특히 이상하고 기괴한 여성을 전면으로 내세워 가학성 짙은 자신만의 개성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 〈화녀〉는 시골에서 올라온 명자가 중산층 가정의 '식모'로 들어가며 욕망을 분출하고 가정을 파괴하는 내용이다. 감독은 흑백의 〈하녀〉를 지나 원색적인 컬러의 〈화녀〉에 붉은 빛을 비춘다. 그는 세 중심인물인 명자와 동식, 정숙을 욕망의 끈적한 구렁텅이에 집어넣고 지독한 파멸의 순간까지 몰아세운다.
서울의 한 중산층 이층 집에서 식모 명자(윤여정)와 주인집 남편 동식(남궁원)이 사망한 채 발견된다. 범인은 곧 경찰서에 잡혀 들어왔고 간밤에 절도를 시도하다 칼을 찔러 죽이게 되었다는 자백을 받아내며 수사는 마무리되는가 했다. 그러나 안주인 정숙(전계현)의 태도를 의심쩍게 본 형사(최무룡)는 그에게 정황을 추궁했고 곧 엄청난 사실을 털어놓는다. 1960년 작 〈하녀〉에서는 일련의 사건들이 결국 남성 주인공의 꿈이었다는 미완의 결말을 제시했지만 〈화녀〉는 이미 벌어진 파국의 서사를 정공법으로 직시하며 현실의 기이한 모순이 고스란히 담긴 세계의 광경을 애써 외면하지 않는다. 미스터리 서사의 얼개로 관객의 시선을 집중한 뒤 본 이야기를 이어가는 방식은 모호한 표현주의적 서사로부터 조금은 친절한 방식을 선택한다. 내화에서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과감하고 독창적인 작법은 김기영 특유의 뒤틀린 상황과 심리 묘사, 강렬한 색감의 대립으로 관객의 예측을 한참 벗어난다. 거기에 중간중간 플래시백에서 외화로 돌아오는 영화의 완급 조절은 간단치 않은 서사에 관객의 한숨을 돌리게 만든다.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려 고향에서 도망친 후 상경한 명자와 경희(김주미혜)는 서울에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까마득한 31빌딩을 바라보며 돈을 벌어 성공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이야기한다. 경희는 빠의 여급으로, 명자는 양계장을 운영하는 정숙과 작곡가 동식 가족의 식모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모든 것이 낯설었던 명자가 당돌하며 순수한 특유의 성정으로 고된 식모살이를 이겨내던 중 동식에게 겁탈을 당한다. 성적 순결을 잃었다는 죄책감과 절망도 잠시, 동식은 아내 정숙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명자는 원치 않은 임신과 낙태를 경험한다. 충격적인 사건의 연속에 피폐해진 정신적 트라우마는 그릇된 욕망으로 자라났다. 동식과 아이, 나아가 집 전체를 차지하겠다는 그의 의지에 동식과 정숙 역시 불안과 공포에 휩싸인다. 거기에 끔찍한 사건을 경험한 후 분노와 욕망으로 질주하는 세 사람의 세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김기영은 당대 한국 영화계의 틀을 벗어나 특유의 인장과 세계관으로 그로테스크한 독보적 영역을 구축한다. 당시 〈화녀〉와 결이 비슷한 멜로드라마의 중심 관념이란 가부장 전통의 속박과 여성의 정절, 정상가정의 유지와 남성성의 건재였다. 그 안에서 여성의 통속이란 남성이 지어놓은 화목한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평범한 부녀자로 살아오다 남성의 불륜이나 다른 남성의 등장, 근대화의 혼란 등 특정한 계기로 기존의 삶을 도전받는다. 변화의 시대에 전통 가정의 해체만큼은 단호히 거부하던 사회에서는 아내의 도리에 맞게 갈등과 고난에도 결국 모성애의 ‘정상성’을 회복하는 교훈적 결말이 있는가 하면 유혹을 견디지 못한 불순한 여자가 타락하는 호스티스 영화나 청춘남녀의 애절하고도 순수한 사랑을 그린 로맨스 영화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 틈바구니 안에서 김기영의 멜로드라마는 변화하는 시대 달라지는 여성상을 날카롭고도 파격적으로 보여준다.
끊임없는 비유와 변주, 분절된 이미지의 사용은 영화의 비현실성을 극대화한다. 대상의 내면에 갇힌 인습을 과감히 폭로하며 비웃듯이 이를 과장하는 영화적 스타일은 흔들리는 카메라와 극적인 명암, 비현실적 연기로부터 파생된다. 그의 세계에 어울리는 작위적 대사와 행동은 배우의 연기로 구현한다. 시체스 국제 영화제 여우주연상에 빛나는 윤여정 배우의 연기는 그 점에서 김기영의 메시지를 담아내기에 더할 나위 없다. 예측 불가의 디렉팅에도 윤여정 배우는 자신만의 기운으로 전에 없던 여성 캐릭터를 창조해 파국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낸다. 버스 안 31빌딩의 거대함에 압도되기는커녕 "떨어져 죽기 편리한 높이"라며 킬킬대는 당돌한 모습은 관객과의 첫인상부터 전형적인 여성상을 철저히 거부할 것이라는 즐거운 상상을 심어준다. 수직으로 높이 솟은 빌딩의 이미지로 이어지는 공고한 남성성과 계급의식은 명자에게는 그저 농담거리일 뿐이다. 하지만 그의 비극적 운명을 스스로 내뱉는 통한의 전조는 시대의 억압이 명자의 삶을 그냥 두지만은 않겠다는 역경의 출발선과 같다. 미시정치학을 관통하는 억압 기제에 놓인 영화는 비정상적인 충동과 질투, 살인과 범죄를 다루며 한국 사회의 집단 무의식에 드리운 트라우마를 스크린에 구현한다.
명자는 태연하게 쥐꼬리를 잡고 흔드는 과감하고 야생적인 모습과 함께 쥐약을 설탕물과 바꿔치기해 정숙의 의도를 간파하는 얄궂은 지적 면모를 드러낸다. 평범한 부녀자의 삶을 누리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절규하지만 이내 주인집의 약점을 잡고 내면의 본능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감정의 급격한 등락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윤여정의 연기는 순수하고 서늘한 광기로 가득하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눈빛의 수줍은 몸짓은 곧 욕정과 복수의 감정을 담아 여러 이미지로 폭발한다. 과거 고향에서 동네 남성들에게 당했던 트라우마는 성적 욕망과 끊임없이 충돌하고, 이를 기괴한 신체의 뒤틀림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삶의 마지막 순간 욕망을 분출하는 명자는 이층 집 계단을 타고 거꾸로 추락한다. 붙잡은 동식의 걸음에 맞춰 계단 계단마다 머리를 찧는 명자의 장면은 비참하고도 강렬한 의지의 각인처럼 뇌리에 남는다. 이상한 여성들의 신체 훼손과 악다구니는 역설적으로 영화 곳곳의 비정상성에서 드러나듯 가부장이라는 거스를 수 없던 억압에 분열된 여성으로 사회의 정상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불의 여자’라는 제목이 무색할 만큼 영화는 물의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사용한다. 고통과 욕망의 장면마다 물은 명자를 괴롭히는 갈급의 메타포로 사용된다. 공허를 채우는 물은 명자를 가득 메운다. 욕망과 고통의 액체는 곧 독약이자 생명수다. 정화와 죽음, 생명과 파멸처럼 물의 이미지가 가진 다중의 의미는 덧없는 가부장제의 반작용과 변주, 계급의 전복으로 나아가는 김기영식 사회비판의 한 축을 담당한다. 그밖에도 나비와 쥐, 닭의 이미지 등 그의 필모그래피 전반에 반복하여 인용하는 상징들은 근대화 과정에서 물질과 생산 기계로 전락한 생명력, 무지의 충동과 위험한 유혹 같은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다.
영화는 개성 있는 여성을 전면에 내세워 인간과 사회를 노골적으로 바라보는 영화의 주제의식을 노출한다. 윤여정 배우 못지않게 극의 감정과 서사를 지탱하는 정숙 역의 전계현 배우의 에너지 역시 놓쳐서는 안 된다. 비극을 목도하는 반동 인물로서 정숙은 단지 전통적 여성상으로 신진 여성 명자와 대립하는 일차원적 인물로 남지 않는다. 홀로 양계장을 운영하는 직업여성이자 허울뿐인 가부장의 권력에 순종하는 그는 달리 보면 명자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스스럼없이 내보일 기회를 얻는다. 정숙은 뒤틀린 가정의 보호 강박에 사로잡힌 채 사회적 평판이라는 대전제를 위해서라면 가정의 침입자를 언제라도 닭 모이로 만들 준비가 되어있다. 명자의 친구 경희 역시 전형적인 호스티스 영화의 흐름을 벗어나지 않지만 유의미한 장면으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정숙이 모든 사실을 밝히고 비 오는 거리에 쓰러져 통곡하다 신발 한 짝을 잃는 마지막 장면은 50년 전이라고 믿기 어려운 모던한 연출을 보여준다. 정숙을 부축하는 경희의 뒷모습과 저 멀리 보이는 31빌딩은 억압과 통제의 사회라는 고고한 첨탑은 건재하며, 그 밑바닥에서 욕망을 억누른 채 뒤틀리며 살아남은 여성의 쓸쓸한 걸음만 남아 바뀌지 않는 시대의 모순을 상징한다.
김기영은 자신의 괴팍한 본성을 적극적으로 영화에 표출하며 사회의 무의식을 짓이겨 근대화의 뒤편에 적재된 계급과 성별, 자본을 고발한다. 욕망이라는 절대자를 향한 파국의 행렬 한가운데 인물을 떨어뜨린 그의 결론은 한결같은 추락이다. 닿을 수 없는 갈증의 끝에는 거대한 31빌딩 옥상이 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다. 오늘날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과 배우에게 영감을 준 김기영의 영화는 윤여정이라는 대배우의 탄생을 열어젖혔고, 영화 속 그의 추락은 50여 년이 지나 지금의 자리에 도약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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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이지 에드가 존스의 영민한 본능
<천국의 깃발 아래(Under the Banner of Heaven)>(2022, FX)
<가재가 노래하는 곳(Where the Crawdads Sing>(2022, 올리비아 뉴먼)
<프레시(Fresh)>(2022, 미미 케이브)
* 위 작품들의 핵심 전개 포함
데이지 에드가 존스는 펜데믹 속에서 스타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연기에 관심을 두었던 그는 십 대 때 <Cold Feet>에 캐스팅 되며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후 HBO와 Fox, 연극 무대를 오가며 커리어를 쌓았다. 세상이 그를 주목하게 된 계기는, hulu 시리즈 <노멀 피플>. 상대역 폴 메스칼이 이후 <로스트 도터>나 <애프터썬> 등에 출연하며 인디/아트 필름 씬의 사랑을 받은 반면 데이지 에드가 존스는 메이저 방송사에 조금 더 머무르게 되었는데, 선택한 서사와 캐릭터에 어쩐지 겹치는 데가 있었다. 이 글에서는 그 특정한 작품들과, 에드가 존스의 영리한 연기가 빛을 더한 인물들을 다룬다.
<프레시>의 노아로 그를 처음 만났다. 특유의 솔직한 유쾌함, 단호함과 확실함이 인상적이었다. 현대적인 이미지와 능숙하고 몰입력이 뛰어난 퍼포먼스로 그를 기억했다. 다음번 스크린에서 만났을 때 에드가 존스는 몇십 년 전 분장을 하고 있었다. 한 작품에서는 살인 사건의 피해자, 다른 작품에서는 용의자였으나, 오히려 비슷한 위치에 있었다. 폐쇄적인 집단에서 대놓고 혹은 암묵적으로 낙인찍힌 여성들이었다.
60년대 작은 시골 마을, 숲 속 습지대 근처의 집에서 홀로 자란 카야는 마을 사람들에게 평생 따돌림을 당했고,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몰린다.(<가재가 노래하는 곳>) 80년대 유타 주, 이름있는 모르몬교도 가문의 막내아들과 결혼한 브렌다는 남편의 형제들에게 살해당한다.(<천국의 깃발 아래>) 현대 미국 어딘가, 우연히 만난 멋진 남자와 연애를 시작한 노아는 ‘인육 사업’을 하는 그의 집 지하실에 갇혀 ‘고기’로 팔릴 위기에 처한다.(<프레시>) 단편적으로 에드가 존스의 인물들을 설명했다. 카야와 브렌다는 아름다운/불경한 이방인 취급을 받았고, 카야와 노아는 데이트 상대였던 남성에게 배신당하고 위협당했다. 셋 모두 여성혐오적 폭력을 겪었다. 이 공통점의 원인은 외부에 있다.
그러나 세 사람이 상황을 인식하고 반응하는 방식 역시 닮아 있었다. 이들은 저항했다. 고통에 둔감한 것은 아니었다. 상처입고 괴로워하며 딛고 일어났다. 노아와 브렌다는 비슷한 처지의 여성들과 공감하고 연대했다. 카야와 노아는 끝내 제 손으로 프레데터를 처단했다. 브렌다는 결국 살해당하지만, 그의 행동은 타 여성들을 지켰고, 남편을 깨닫게 했고, 가해자들을 단죄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그들의 내면에서 나오는 에너지의 모양은 유사했고, 그 색은 각자 다르고 고유했다.
<천국의 깃발 아래> 첫 화, 시청자가 처음 목격하는 브렌다는 이미 죽어 있다. 피해자인 줄로만 알았던 그의 서사는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깊어진다. 주로 남편 엘렌의 회상을 통해 그려지나, 작품은 그를 외부의 해석이 들어간 대상보다는 의지와 감정을 지닌 한 사람으로 생생하게 다루기를 택한다. 주체적으로 모르몬교 원리주의자들에게 맞섰던 사람. 용기와 야망이 있고, 똑똑하고, 다정하고, 사교적이고, 센스있고, 판단과 대처 능력이 뛰어나고, 종교를 초월하는 올곧은 잣대를 지닌 여성. 에드가 존스는 엘렌이 알아채지 못했을 우울함이나 흔들림까지 기억의 단면에 녹여내는 데에 성공한다.
대부분의 시청자는 어떤 식으로든 브렌다와 데이지에게 반하고 말 것이다. 피범벅이 된 제이컵의 손을 조용히 닦아 주는 따스함과 사려깊음, 자신을 성적으로 착취하려는 교수를 도리어 이용하는 기지, ‘래퍼티가 와이프들’이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고 불평등한 관계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설득력과 용기… 배우의 집중력과 재치로 인해 더욱 돋보이는 장면들이다. 이미 한참 전부터 내 마음에 들어와 있었던 그에게 마침내/완전히 반했던 것은, 마지막 화, 브렌다가 생을 마감한 날의 순간들이 화면에 재생되었을 때였다.
남편의 형제들에게 살해 협박을 받는 상태,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브렌다의 뒷모습에는 불안한 망설임이 있다. 다이애나의 편지를 발견하자 온 몸이 가벼워진 듯 즐거워하고, 답장을 쓰며 생각에 잠긴다. 그 일련의 미묘한 심리 변화는 에드가 존스의 몸과 얼굴이 지닌 다채로운 결로 표현된다. 그리고 댄 래퍼티가 문을 두드린다. 건장한 두 남자에게 짓눌려 정신없이 울부짖지만, 틈이 보이자 기어가 아이가 있는 방문 앞을 막아서는 브렌다의 중심은 무너지지 않는다. 울며 설득하고 애원하다 어느 순간(아마도 저들이 자신을 죽이고 말 것임을 깨닫고), 가쁘게 몰아쉬던 숨을 서서히 다스린다. 저들의 멸망을 예언한다. 눈물과 피로 덮인 눈에 어린 빛은 성스럽고, 음성은 떨리지만 서늘하고 차분하며, 애절하고 풍부하다. 신적인 존재가 있다면 분명 그의 말을 들었을 것이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2022)
<천국의 깃발 아래>는 있었던 일을 따라가며 ‘피해자 브렌다 래퍼티’가 ‘누구’였고 무엇을 해냈는지 보여 주었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 또한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의 구성을 띠는 작품이다. 이번에 데이지 에드가 존스의 첫 포지션은 ‘용의자 캐서린 클라크’다. 영화는 에드가 존스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보안관을 피해 나무 뒤에 숨은 모습으로 처음 시각적 등장을 한 그는 이후 한동안 입을 열지 않는다. ‘표현’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힘껏 달아나고, 모터보트를 몰고, 물 속에서 헤엄치는 동작들에 묻어나는 것은 급박함보단 간절함. 그 정서는 이후 유치장이나 법정에서 고요하게 허공을 응시하거나 눈을 내리까는 제스처들과 연결되는데, 거기 말 못할 사연이 어려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마을 사람들의 시선으로 그를 “습지 소녀”로 응시하던 영화는, 오래 지나지 않아 그의 ‘목소리’를 돌려준다. 캐서린 클라크가 입을 열고 스스로를 ‘카야’로 칭하며, 이야기는 그의 입장에서 전개된다. 관객은 카야의 감정과 심리를 따라가며, 그가 무서워하면 공포를 느끼고, 상처 받으면 아파하고, 마음을 열면 함께 열게 된다. 그리고 무언가 숨기는 것이 있다면 감지하게 된다.
하나 고백하자면, 영화의 중반부 테이트와의 로맨스 서사가 이어지는 동안, 카야가 남성 중심 판타지의 영향을 받은 캐릭터는 아닌지 의심했다. 외딴 곳에 혼자 사는 ‘순수하고 순진한‘, 모든 것이 ’내‘가 처음인, 평소엔 티셔츠에 오버롤을 입다 ’나‘를 맞이할 때는 하늘하늘한 블라우스나 원피스를 입는, 전형적 뷰티 스탠다드를 착실히 갖고 있으면서 ‘야생적인’ 매력을 추가로 지닌, “다른 여자들과 달리 깃털을 보면 무슨 새인지 아는”(카야) 괴짜, 체이스의 대사를 빌리면 “somethin’ else”, “my marsh girl, nobody know, nobody sees, but me”. 의심은 곧 해소되었다. 카야는 입체성을 갖고 성장하는 인물, 앞선 묘사는 체이스가 왜곡한 “습지 소녀”일 따름이었다. 의심이 감동을 뒤덮지 않게 한 것은 에드가 존스의 진정성 있는 연기였다.
테이트가 떠난 후 카야는 체이스와 연애를 시작한다. 유해한 남성성의 표본인 그가 행하는 당연하고 일상적인 기만에서는 악의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두 남자와 카야의 관계를 묘사할 때 대놓고 대조적인 연출이 사용됨에도, 카야의 감정을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는 없었다. 그 차이를 설명하려면 구구절절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 테이트를 향한 카야의 감정적 제스처에는 주저가 섞였을지언정 늘 일종의 확신이 있었다. 경계심은 점차 사라지고, 편안한 애정과 설렘이 들어섰다. 에드가 존스의 연기가 더 돋보였던 부분은 테이트보다는 체이스를 향한 표현의 흐름에 있었다. 경계와 의문, 단순한 흥미에 점차 관심이 더해지는데, 거기엔 한동안 불안이 함께한다. 체이스의 무례에 대한 거부감과 그 역시 떠나리란 불신 사이에는, 스스로의 마음에 대한 불확신 또한 있다. 시간이 흐르고 신뢰가 쌓이며 점차 익숙한 애정과 즐거움이 싹트지만, 거기엔 무언가 결여되어 있다. 몇 년 만에 돌아온 테이트를 바라보는 눈빛에 그- 언어로 모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체이스에게 오래된 약혼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카야는 호흡곤란 증세를 보인다. 그 정서는 테이트가 돌아오지 않았을 때의 아픔과는 종류가 다르다. 테이트에게 느낀 배신감과 서운함이 그의 특정한 행동과 떠난 가족들에 대한 기억이 엮이며 발생된 것이라면, 체이스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는 인간 자체의 됨됨이에 대한 깨달음으로부터 오는- 상대의 진심, 함께한 기억 전부를 뒤집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테다. ‘그들’이 “I can explain!”이라고 한다면 이후의 말을 들어 볼 의향이 생기는가/아닌가의 차이라고 할 수도. 에드가 존스의 심리 묘사가 카야가 체이스에게 ‘여지’를 줄 일은 없으리란 것을 납득하게 했다.
체이스는 곧 단순한 ‘나쁜놈’이 아닌 범죄자로 밝혀지고, 카야는 ‘포식자’를 처리한다. 영화는 그 비밀을 엔딩에 이르러서야 암시하지만, 사실 에드가 존스의 연기에 있는 디테일을 통해 미리 짐작할 수 있었다. 출판사 미팅에서 ‘수컷을 잡아먹는 암컷’에 관한 대화를 하던 중 카야는, “자연에 선과 악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살아남기 위한 제스처이기도 하죠.”라고 진지하게 말한다. 초점을 잃고 떨리며 내리깔리는 눈동자는, 그 대사를 학문적 서술보다는 사회적 선언이자 개인적 고백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결론적으로 작품은 가부장적/폐쇄적 사회 내 가정 폭력, 데이트 폭력, 레이시즘, 슬럿 쉐임, 그리고 무엇보다 ‘아웃사이더’들을 세상이 손가락질하고 삭제하는 방식을 카야의 삶 안에 녹였다. 그 중심에는 카야와 테이트의 판타지적 로맨스보다는, 습지(“가재가 노래하는 곳”)에 대한 카야의 사랑이 있었다. 그는 분노와 아픔을 타인에게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대신 습지와 자연에게는 마음껏 뿜어냈다. 마구 달리거나, 모래밭에 쓰러지거나, 가슴에 있는 응어리를 전부 담아 갈라지도록 소리를 지르거나, 저 먼 곳을 아련하게 응시하는 등의 움직임이 대사보다 더 많은 것을 들려주기도 했다.
데이지 에드가 존스에겐 적당히 거리를 두다 그렇게 한순간 스스로를 내던져 버릴 수 있는 감각이, 용기와 무방비함이 있다. 첫인상은 가녀리고, 그 안에 독특한 장난기가 있다. 상처와 우울이 자리할 공간 역시 있다. 더 들어가면 단단한 핵이,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싸울 강한 면모가 있다. 습지에서 수영하고 낚시를 하는 등 스턴트를 직접 소화했다는 사실은 어쩐지 당연하게 다가온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2022)
낭만적이고 올드한 멋이 있는 작품, <가재가 노래하는 곳>. 같은 해에 공개된 <프레시>는 장르, 시대적 배경, 연출 스타일… 무엇하나 같지 않은 영화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 주인공의 삶을 중심으로 굴러간다면, <프레시>의 중심에는 상황과 사건이 있다. 그러나 카야와 노아가 겪은 폭력의 핵은 비슷한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특수한 주인공을 내세운 시대극인 <가재가 노래하는 곳>에 드러나는 폭력의 양상은 ‘평범’하고, <프레시>의 특수한 설정은 현실의 ‘평범’한 비정상성을 적나라하게 비유한다. ‘프레데터 남성을 피해 여성이 처단하고 그 과정에 남성 ’구원자‘가 끼어들기를 허용하지 않는’ 전개도 닮았다. 카야에게는 어떤 아련함, 사연 가득한 여백이 있어야만 했다. 영화는 그의 삶 전체를 다룬다. 카야가 사건을 프로세스하고, 타인과 교감하고, 행동을 취하는 방식은 과거의 경험과 엮여 설명된다. 반면 <프레시>는 개개인의 서사보다는 현 시점에 일어나는 사건을 중심에 둔다. 물론 노아에게도 과거사가 있고 영화에 잠깐 언급되기도 하지만- 중요하게 다루어지지는 않는다.
로맨틱 코미디로 시작해 이스케이핑 스릴러, 슬래셔까지 발을 걸치며 장르를 노련하게 바꾸는 영화. 이런 작품에서 배우는 매 장면 ‘기능을 수행’하면 되는가?(당연히 아니지만,) <프레시>의 감독과 배우들은 오히려 인물들의 개성을 돋보이게 하는 방식으로 영화의 매력을 살려 몰입을 이끌어냈다. 주연 배우들의 재치있고 깔끔한 연기는 세련되고 스타일리시한 연출과 최상의 조합을 이루었다. 데이지 에드가 존스는 다층적인 심리를 두르고 훌륭하게 균형을 잡았고, 세바스찬 스탠은 가면을 바꿔 쓰며 기꺼이 '야수beast’와 ‘광대’가 되었다. 그들이 변화하는 다이나믹에 따라 맞춘 호흡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에 대한 완전한 이해로부터 온다. 이들은 모든 장르를 능숙하게 소화하며 ‘기가 막힌’ 연기를 선보이는 가운데, 관객이 메시지에 주목할 수 있도록 톤을 적절히 조절했다.
그 매력은 오프닝, ‘최악의 데이트’ 씬부터 드러난다. 인종차별에 성차별을 일삼고 스카프를 음식에 빠트리기까지 하는 남자. 노아는 예의는 차리는 와중 남자에게 휘둘리지 않고, 그가 ‘어떤 놈인지’ 파악한다. 대놓고 불쾌감을 표하지는 않으나, 기울어진 고개, 일그러진 눈썹과 입술, 애매한 효과음으로 적당히 거부감을 드러낸다. 배우의 자잘한 재치다. 아마 이 장면부터 시청자는 노아에게 공감과 호감을 모두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플롯도 플롯이지만, 노아와 스티브의 캐릭터를 여러모로 잘 구성했다는 감탄이 나왔는데, 배우들 본연의 매력을 바탕으로 한 듯 보이기도 했다. 노아는 꾸밈없고 솔직하다. 제 대사처럼 “f*** it”의 태도가 있다. “미국 악센트 데뷔”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자연스럽고 쿨한 말투. 스티브가 “동물을 먹지 않는다”고 하자 보이는 울상은 또 얼마나 ‘재미있는’지. ‘문제 없이’ 로맨틱한 만남을 가질 시기, 두 사람은 불편함 없이 매우 잘 어울린다. 이것이 바로 ‘케미스트리’. 세바스찬 스탠은 일부러 제 주위 허들을 낮추며 묘하게 상대의 경계를 늦추고, 데이지 에드가 존스는 노아답게 ‘당신의 마음에 들기 위한’ 제스처보다 ‘당신이 마음에 든다’는 표현을 건네며 순간을 온전하게 즐긴다. 그러나 스티브가 목적을 위한 다음 수를 두며, 노아의 얼굴 한구석엔 긴장이 들어선다. 노아는 내내 불안해했다. 자각하지 못하더라도 무의식중에 이미 ‘이게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에드가 존스는 이 ‘보편적 불안’의 정체를 이해하고 드라마 안에 녹였다.
서사를 완벽하게 가르는 오프닝 크레딧이 흐르고, 노아가 깨어난다. 어리둥절하지만 일상적인 상태로 있다가, 상황을 파악하고 패닉해 울먹이기까지. 에드가 존스는 노아의 심리 변화를 투명하게 드러낸다. 관객은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 볼’ 수 있다. 그는 단지 겁에 질려 있기만 한 것이 아니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선택에 대해 후회하며 자책하고 있다, 제 잘못이 아님에도. 두려움에 잠긴 목소리, 짐짓 가다듬고 또렷하게 내보내지만 고르지 못한 발성, 점점 일그러지는 눈가, 구석에 박힌 채 움츠러들어 굳은 등과 어깨, 가빠오는 숨… 이러한 디테일은 계산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와 작업한 감독들이 말하듯 ‘본능’이다. 관객의 집중력을 붙들고, 노아에게 이입하게 만드는 연기다.
노아에겐 단계-페이즈가 있다. 조금 뜬금없지만 매혹적이고 달콤한 연애를 하는 전반부, 완전히 좌절해 ‘피해자’로 스스로를 소비하게 하는 후반부-의 초반, 괴로움을 딛고 어둡고 냉정하게 계획을 세우는 중반, 그리고 다른 여성들과 힘을 합쳐 스티브를 처단하는 결말.(이렇게 이름 붙여도 된다면, 원치 않았던 ‘히어로’로의 불필요한 ‘성장’이라고 할까.) 그 사이 노아의 눈가에 드리워진 그늘에 일종의 자괴감은 있을지 몰라도, 스톡홀름 증후군에 빠지거나 감정을 교류한 페니를 두고 홀로 나간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가 구체적으로 등장하지 않아도, 우리는 노아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꾸밈없고, 유머러스하고, 독립적이고, 솔직하고, 영민하다. 일상 속에서 드러난 인간성은 위기에 처했을 때 형태를 달리해 나타난다. 따라서 그가 금방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탈출을 시도하는 전개는 설득력이 있다. 실패하고, 노아는 모르핀과 무기력한 증오에 취해 멍하고 살짝 무덤덤하기까지 한 상태가 된다. 홀로 있을 때나 스티브를 마주할 때보다는 같은 처지에 있는 옆방 페니와 대화할 때 날것의 감정을 드러내는데, 테이트나 습지에게 마음을 터놓는 카야가 떠오르기도 한다.
스티브가 자신을 “다른 여자와 다르”게 대했다는 것을 알고, 노아는 참을성 있게 탈출과 복수를 노린다. 섣불리 관심을 꾸며내기보단 떠보며, 저쪽에서 다가오게 한다. 스티브가 그랬듯 상대의 페이스에 맞춰 주며 서서히 자신의 페이스에 말려들게 하는 작업. 스티브가 원피스를 ‘선물’하며 마음에 드냐고 묻자, 삐딱하게 누워 뱉는 “It’s pink.”에 있는 틈과 톤, 스티브가 나가자 옅은 미소를 거두는 흐름. 심리를 적당히 숨기는 시니컬한 태도가 왠지 노아의 다음 시도는 성공하리란 예감을 하게 한다. 노아는 계획을 입 밖으로 내지 않지만, 시청자는 에드가 존스의 표정과 자세가 내보내는 아우라를 통해 ‘노아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짐작할 수 있다. (놀랍지 않은가.)
처음 저녁 ‘식사’에 초대되어 스티브의 ‘스토리’를 듣는 노아의 얼굴엔 혐오와 공포가 들어서나, 이 단어들이 주는 느낌처럼 전면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스티브는 모르고 관객은 알 수 있는 균형. ‘미트볼’을 입에 넣었을 때 노아의 혀가 감지하는 것은 씹는 음식의 맛이 아니다. 방금 전 스티브가 설명한- 여성을 극단적으로 상품화해 소유하길 원하는 “1퍼센트 중의 1퍼센트” 남성들에게 ‘씹히고 삼켜지는 맛’이다. 작품은 편집으로 이를 은유하는데, 에드가 존스의 낯빛에도 그 감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인육의 값에 대한 노아의 반응 “That’s crazy.”를 스티브는 ‘말도 안 되게 비싸다’는 뜻으로 넘겼으나, 관객은 노아의 억양과 고갯짓, 눈빛에서 ‘그런 짓을 벌이는 인간들이 있다니 미쳤다’라는 의미를 읽어 낼 수 있다.
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화장을 한 노아는 시니컬한 농담을 하며 웃는다. 마주 웃는 스티브의 얼굴엔 ‘순수한’ 즐거움이 있다. 그러나 노아의 웃음에는 자조, 경멸, 증오, 공포가 전부 섞여 있다. 스티브의 시선이 닿지 않는 순간-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며 긴장해 있는 눈빛과 나란히 보면, 무너지거나 폭발하지 않기 위해 부러 유머를 택한 것 같기도 하다. 노아는 화제를 돌리지 않고 ‘고기’를 소재로 하는 농담을 지속하는데, 처한 상황, 어쩔 수 없이 해야 했던 역겨운 행동을 외면하는 대신 직시하고 해결하려는 의지를 반영한 것이 아닐까.
<프레시>에는 노아와 스티브가 춤을 추는 장면이 두 번 나온다. 초반, 그들이 (적어도 노아의 입장에서는)평범한 데이트를 하고 있을 때, 그리고 노아가 스티브의 ‘포로’인 채로 ‘디너 데이트’를 할 때다. 전자의 끝에 스티브는 노아에게 (꿍꿍이가 있는) 여행을 제안했고, 후자의 끝에 노아는 스티브를 (해하기 위해) 침대로 이끈다. 이 의도적인 연출은 에드가 존스가 입은 정서로 완성된다. 온몸에 가득했던 순수하고 생생한 즐거움은 이제 없다. 그 동그랗고 생기 없는 눈에는 어떤 의지, 목적, 광기, 장난기마저 있다. 우여곡절 끝에 두 여성과 함께 탈출한 노아는, 만신창이가 된 스티브에게 총을 겨누고, 그가 자신에게 했던 대사, “Come on, give me a smile.”을 돌려준다. 그… 누아르스럽기도 한 씬에는 노아가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겪은 과정이 죄다 엉켜 있었다. 배우가 지닌 가능성 역시.
<프레시>(2022)
세 작품을 관람하는 동안 데이지 에드가 존스에게서, 노련한 커뮤니케이터, 영리하고 지혜로운 전사, 현명하고 열정적인 학자, 솔직하고 친근한 연인, 진실되고 정 많은 친구를 발견했다. 캐릭터의 포지션에 한계가 있었던 <천국의 깃발 아래>를 제하면- <프레시>에서도 <가재가 노래하는 곳>에서도 에드가 존스는, 작가/감독이 원하는 방향대로 인물을 소화함을 넘어- 온전히 제 언어로 체화하는 스토리텔러였다. 유사성이 있는 역할들을 맡았으나, 그 연기에는 무한한 깊이와 폭이 있었다, 스스로를 아주 놓아버릴 수 있는. 그건 앞서 언급했듯 하나의/복합적인 감정에 몸을 내던져 터트린다는 뜻이 될 수도, 타인에게 자신을 완전히 맡긴다는 뜻이 될 수도, 혹은 자신을 아주 내려놓아 차분해진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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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독한 지성에 돌 던지기
추락의 해부보다도 해부되는 것들의 추락. 이 법정 가족 스릴러 드라마 안의 모두가 진실이 무엇인가를 두고 싸우지만 역설적으로 극 밖의 관객은 ‘무엇이’ ‘왜’ 진실인지가 전혀 중요치 않으며 ‘그 중 어떤 것이' '어떻게’ 발화되는가가 훨씬 중요하며 흥미롭다는 것을 빠르게 깨닫게 된다.
거의 모든 씬이 긴장감과 흡인력의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극 중 가장 흥미를 끈 것은 남편 사뮈엘이 자신의 가사노동 기여도를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잘 나가는 작가이자 실질적 가장인 부인 산드라 대신 가사와 육아에 더 집중하길 선택했던 사뮈엘은 몰래 녹취한 부부 싸움에서도, 아들 다니엘의 마지막 증언 속에서도 일관되게 자신의 ‘희생’을 말하고 있다. 그는 ‘늘 남들을 먼저 챙겨야 해서‘ 힘들었다고, 파트너를 위해 일상 리듬, 시간, 언어까지 모두 맞춰주며 살았다고 절규한다. 사뮈엘은 심지어 시각장애인 다니엘에게 없어선 안 될 안내견 스눕에 자신을 투사한다.
그런데 이 기이한 플래시백에 다니엘의 음성을 빌어 입혀진 사뮈엘의 서사를 접한 관객은 희한한 기시감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평생 독박 육아와 독박 가에 시달리던 부인들이 분노에 차 내지를 법한 진술 아닌가.
사뮈엘의 잘 계산된 분노는 같은 노역을 부인들 중 상당수가 여전히 당당하게 발화하지 못하는 와중 취해진 전략이기에 더욱 씁쓸하다. 아직 초등교육을 받는 아이가 있는 가정에서 혼자 쉬는 시간을 가져본지 너무 오래됐으니 무려 1년의 안식년을 달라고 주장하는 여성 가정주부의 사례는 분명 흔치 않다. 여자들이 평생 군말 없이 자신을 희생해 남편을 내조하고 아이를 홀로 키웠으므로 사뮈엘 역시 군말 없이 복종해 억울함을 마냥 삼키라는 그런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법정에서 실질적 경제활동을 도맡았던 산드라를 두고도 ‘남편이 위층에서 힘들게 일을 하는데’ 아래층에서 팬과 놀아났다든가 ‘남편의 고통을 무시했다’든가 기를 세워주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검사 측 증인들의 성차별적 진술을 연이어 듣다 보면, 그들이 공교롭게도 전원 남성이었음을 생각해 보면 사뮈엘의 언어와 여성들의 언어가 각기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를 곱씹게 된다. 산드라처럼 성공한 작가는 끝내 되지 못했어도 제1세계 지식인인 사뮈엘이 과연 그 여자들과 자신의 차이를 몰랐을까.
'남성' 주부로서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는 걸 잘 아는 사뮈엘은 고분고분한 가정의 천사 따위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자기 삶을 재구성해 저항적 서사의 질료 삼아 투사로 거듭난다. 그리고 사뮈엘이 의도했든 아니든 그는 가사노동의 경제적 가치와 구조적 경력단절의 부당함을 인정받기 위해 몇 백 년간 투쟁한 여성들의 지적 노고를 너무나 쉽게 전유하고 있다. 사회적 약자의 권리 투쟁의 언어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전파되기 마련이다. 피해자 정체화에 유용한 담론은 누구나 탐내기 때문이다. 정확한 타겟을 위해 고안되었던 언어가 대중적으로 남용되고 결국 최초의 본질과 다른 방향성을 띠게 되는 탈취의 과정을 우리는 어디까지 허용해야 하는가.
그런데 더 흥미로운 것은 산드라 역시 전형적인 ‘남편’의 언어를 구사한다는 점이다. 부부 싸움 당시 산드라는 ”왜 이렇게 흥분했냐“고, ”사소한 데 집착하지 말자”고, “나도 고생하고 있다”고 사뮈엘을 달래는 것 같지만 실은 그를 책망하는 말을 건넴으로써 그의 화를 점점 더 돋운다. 산드라가 이기적이고 자기 시간만 중한 줄 안다고 말하는 사뮈엘의 규명은 분명 일리가 있다. 첫 장면부터 그는 질문이 많다며 불안해하는 학생 조에에게 ”아, 괜찮아, 시간은 아주 넘치도록 많아“라고 답하지 않는가.
그는 시종일관 여유 있는 승자의 자세를 취하고 때론 이기적인 가부장 특유의 나르시시즘을 재현한다. (이 오롯이 자신만의 편안함을 위해 기울어진 자세를 지켜보는 스눕이 물고 있는 공은 어느 층에서 누가 떨어뜨린 것일까. 혹시 그때 누가 그의 그 대답을 들었을까.) 그는 자신의 지위와 매력 자본을 십분 활용해 상대를 무장 해제시키고 대화를 자기 입맛대로 끌어가며 이를 지켜보는 관객에게 미묘한 불편함을 선사한다. 그는 복종이나 저항보다 우아한 군림이 선천적으로 어울리는 타입, <타르>의 리디아 타르를 떠올리게 하는 영리하고 냉정하고 자기애로 충만한 여성이다.
자, 어차피 한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는 저울에 두 사람이 올랐다. 가사와 육아 때문에 저술 작업에 집중할 수 없다며 자신의 취약함을 이미 드러내버린 사람과, “내 걱정 마. 난 어떻게든 써.”라고 얄밉게도 틀린 말 없는 선고를 내려버린 사람. 산드라가 말한 것 중 가장 날카로웠던 진실, 그래서 사뮈엘이 가장 인정할 수 없었던 진실은 아마 “당신은 스스로 선택한 삶을 두고 날 원망하는 거야. 혼자 덫을 놓은 거야”보다도 “(가사노동의 배분에) 완벽한 균형은 없다고 봐. 순진하고 딱한 발상이지.”였을 것이다. 한 가정이란 무대가 이갈리아처럼 충분히 전복되기엔 너무나 작은 섬이었던 것이 비극이라면 비극이다. 이 싸움에서 누가 패자인지는 명백하다. 이때 패자에게 중요한 건 ‘왜’ 지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지느냐다. 녹취 사실을 의도적으로 숨긴 사뮈엘은 최대한 지저분하게 부인을 옭아매기를 선택한 듯하다.
남편의 죽음을 두고 검사는 살인을, 변호사는 자살을 주장하는 꼭두각시 극에서 주연이 된 부인은 또 한 번 남편보다 한 수 위인 역량과 그릇을 입증한다. 결론적으로 변호사 뱅상에 의해 저지당하기는 하나, 죽은 남편을 불안정한 환자로 초장부터 몰아가는 쉬운 길을 피해 오히려 ’지저분한 이야기는 빼자‘며 파트너의 품위도 자신의 것과 마찬가지로 지켜주고 싶어하는 그의 선택은 감탄을 자아낸다. 그 선택에는 배려와 도덕성뿐만 아니라 온전한 진실에 대한 본능적 지향이, 또 그 모든 걸 가능케 하는 고도의 지성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산드라는 자기주장을 입증하기 어려운 논쟁이 자기 파괴로 귀결되더라도 그 논쟁 자체를 피할 이유는 없다고 판단하는 사람이다. 그는 오히려 그런 류의 복잡성을 추구하고 거기서 희열을 느낀다. 그리고 비범한 작가인 그의 재능은 남편이 말하지 않고 어쩌면 그 스스로도 몰랐던 무의식 너머의 욕망과 좌절, 왜곡된 인식과 뒤틀린 감정들을 정확히 간파하고 만다. ‘큰 상황의 아주 일부’만 보고 두 개인 사이 축적된 역사의 전부를 짐작하지 말라는 산드라의 논리정연한 호소는 검사를 비롯한 청중의 적의를 잠시라도 멈춰세울 수 있다.
그러나 이 ‘아주 일부’는 결국 얼마나 효과적으로 지적이고 강인하고 야망 있는 여성을 무너뜨릴 수 있는가. 부부간 원망은 덜하고 동등한 수준에서의 지적 교류는 더 활발했던 시절, 사뮈엘의 허락 하에 그의 개요를 가져다 소설로 발전시킨 산드라는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사뮈엘이 제기한 표절 시비에 걸려 넘어질 수밖에 없게 됐다. 양성애자로서 언제든 남성을 거부하고 남성 없는 삶을 꾸릴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산드라는 남편과 그의 정신과 상담의, 검사와 수사팀장을 위시한 남성들에게 위협적이고 미스테리한 존재가 된다.
농담이 아니라 산드라가 ‘웃지 않는’ 즉 전형적으로 독일적인 여성이라는 점부터가 그의 - 프랑스 법정에서의 - 이질적 존재감을 한 번 더 강조하는 알레고리나 마찬가지다. 그는 여러모로 남성-내국인-지식인들과 다르며 오로지 자신의 능력만으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드문 이방인 여성이므로. "여성이 지능과 야망, 정신적 강인함 때문에 어떻게 공격당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다"는 쥐스틴 트리에 감독의 의도는 재판이 모두 끝난 후 산드라가 얻은 것이 오로지 고독뿐이라는 결말의 암시를 통해 슬프게 빛을 발한다.
열악하고 적대적인 상황 속에서 산드라는 아들을 위해서라도 자신이 생각해낸 설을 밀어붙여야 하는 처지로 몰아붙여진다. 산드라에게 아직 미묘한 애정을 품고 있는 게 거의 확실해 보이는 변호사 뱅상은 그를 믿는다고 공언한 유일한 어른이지만 애석하게도 ‘판단하는 게 느껴진다’는 이유로 정작 산드라의 믿음을 획득하지 못한다. 뱅상은 법정에서 단 한 번 사실을 넘어선 추정을 ‘실수로’ 흘리는데 이때 그는 자기 피고인의 욕망(진실에 최대한 가까이 접근한다) 또는 자신의 직업인으로서의 의무(피고인의 결백을 입증한다)보다도 인간 뱅상으로서의 욕망(산드라를 보호한다)에 잠깐 휩쓸린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산드라를 지키기 위해 사뮈엘을 비난하고 찢어발긴 후, 사뮈엘이었던 것을 다시 제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재조립해 사뮈엘의 형상을 띈 것으로 창조한 직후. 지금까지의 변호 중 가장 감정적으로 설득적이었던 반론을 펼친 그가 마주한 것은 산드라의 화난 얼굴과 단호한 거부 제스처다. 말했듯 산드라는 악의나 계략에 맞서는 것보다 진실을 최대한 손상 없이 전달하는 데에 가치를 두는 이이기 때문이다.
그가 산드라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둘의 얼굴이 한 숏에 잡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사실 역시 산드라라는 독특한 인물의 불가피한 고립을, 단독자로서의 운명을 예고하는 듯하다. 산장 부엌에서 이뤄진 뱅상-산드라 간의 첫 진술 장면, 바로 직전까지 아주 가까이 앉은 둘을 한 번에 잡는 바스트 숏이 수 차례 등장했는데도 산드라가 진술하고 뱅상이 질문하기 시작하자 각 인물의 음성이 전개될 때마다 얼굴을 정면으로 비출 뿐이다. 함께 있는 모습을 의도적으로 피해가는 카메라의 빠르고 단호한 시점 전환 때문에 관객은 거의 부자연스러울 정도의 단절을 의식하게 되는데, 이는 후일 법정에서 증인석에 선 채로 검사와 변호사 측 증인들의 말을 번갈아 듣고 혼란스러워하는 다니엘을 트래킹 패닝 숏으로 잡은 것과 완벽한 대조를 이룬다.
이 대칭이 상징하는 바는 명확하다. 산드라를 두고 다니엘은 흔들리나 이어지고 뱅상은 확고하나 불통한다. 뱅상은 설원에서 취한 채 함께 담배를 피우고 텐션 가득한 농담을 할 때도 산드라를 마주 보고 있으나 카메라는 다정히 이어지는 시선 대신 각자의 후면 혹은 측을 보여줄 뿐이다. 아들의 축객령으로 우는 산드라를 뱅상이 태워 어두운 산길을 내려가는 씬에서도 그는 거의 음성으로만 등장하고 화면은 산드라의 표정에 집중한다.
법정에서의 지난한 싸움이 다 끝나고 승리감에 도취해 단둘이 남겨지자 또 한 번 숨 막히는 텐션이 오르지만, 뱅상은 반쯤만 기대 오는 산드라를 딱 그 반만큼만 안아줄 수 있으며 관객 역시 그이들을 ’창 밖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다. 그것도 한 사람은 또다시 등만 보이는 채로. 우리에게 온전한 관람이 허락되는 교감은 뱅상과 산드라의 포옹이 아니라 귀가한 산드라와 다니엘의 한밤 침실에서의 보다 완전한 포옹이다.
산드라의 이해자는 변호인단이나 조에 같은 팬들이 아니라 극 중 유일한 미성년인 다니엘이다. 엄마의 언어와 아빠의 언어가 다르고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중간 지점을 택한 부모 사이에서 가엾은 소년 역시 ‘남은 한쪽이라도’ 살리기 위한 선택을 한다. 다니엘은 사고 이후 고도 근시를 가진 소년으로 다시 태어난 존재, 그렇기에 무지와 단차와 오해를 필연적으로 달고 다니는 존재다. 극 중 산드라의 진술보다 다니엘의 진술이 먼저 의심받는 것은 우연이 아니며 법정에 선 산드라가 문득 다니엘의 시점에서 관찰되듯 그려지는 구도 역시 우연이 아니다. 흐릿한 실루엣을 집요히 좇는 그는 엄마의 진술을 듣고 가장 효과적이고 힘 있는 이야기를 생각해낸다.
완성형 작가 그리고 이제 막 자기 이야기를 처음 써낸, 작가의 운명을 타고난 아들. 그들의 ‘생각해냄’이 recall인지 invent인지 우리는 영원히 추측만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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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F 데일리] 130년의 고독을 건너 울려 퍼지는 역사에 관한 물음
다호메이 Dahomey
France/Benin/Senegal/2024/68min
*시놉시스
영화는 파리 케 브랑리 박물관이 보유했던 다호메이 왕국의 보물 26점을 본국으로 반환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베냉으로 송환된 보물은 방문자들이 감상할 수 있도록 박물관에 진열해야 할까, 아니면 본래 종교적 오브제로서의 기능을 살려 대중에게 돌려줘야 할까?
130년 동안 태어난 땅에서 단절되어 어둠 속에서 존재하던 무언가가 있다. 그는 내내 침묵을 강요당해 자기 의사를 말할 수 없었다. 그가 견뎌야 했던 고독은 가혹할 정도로 절대적이었다. 한 세기가 훌쩍 넘었다. 그는 다시 빛의 세계, 즉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의 고독은 낯섦과 현기증으로 바뀐다. 이제는 익숙하지 않은 곳, 자신이 떠나올 때와는 많은 것이 달라진 곳이 야기하는 감정이다.
그는 다호메이 왕국 출신의 조각상이다. 현재는 아프리카의 베냉 공화국이 있는 자리다. 다호메이의 문화재 7천여 점은 프랑스에 식민 통치를 당하던 시절 바다를 건너 강탈당했고, 그중 26점이 이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참이다. 제74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황금곰상 수상작 〈다호메이〉의 영화적 성취는 인간이 아닌 이들 문화재에 목소리를 부여한 데서 나온다. 프랑스와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상어 문장(紋章)을 한 반인반수 조각상의 모습을 한 다호메이의 왕은 이 귀환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감정을 느낄까? 영화 초반부에 등장하는 다호메이 왕(조각상)의 목소리는 영화의 질감과 정서를 단번에, 그리고 근본적으로 주조한다. 그는 동시대 베냉‧프랑스 역사의 주인공이자 영화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다호메이 조각상의 귀환은 단일한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저 제국주의자들에게서 빼앗긴 문화재를 돌려받았다는 단선적인 설명은 그의 낯섦과 현기증을 온전히 설명하지 못한다. 감동적인 귀환이 마무리되고, 다호메이를 국가 차원에서 환영하는 대대적 행사가 영화에 나오기 시작하면서 그의 낯섦과 현기증은 본격화된다.
먼저 지금 프랑스에서 다호메이를 돌려받는다는 것의 의미다. 이야기의 주체는 다호메이 조각상이지만, 그를 운반하는 주체는 국가다. 베냉 공화국에서 다호메이 조각상은 순식간에 국가, 민족, 역사, 문화의 상징이 된다. 국가주의적, 민족주의적 상징물로서 집단적 피식민 주체성을 주조하는 수단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두 번째 낯섦과 현기증이 파생된다. 문화재를 돌려받는 것의 의미에 대한 토론회에서는 시민들의 다양한 의견이 폭발하듯 분출한다. 누군가는 현 대통령의 조상이 프랑스 편에 섰던 자였다는 점을 들어 위정자의 역사 세탁을 고발한다. 누군가는 수천 점의 문화재 중 26점만 반환된 것에 강한 불만을 표한다. 또 다른 누군가는 이번 반환이 프랑스의 이미지 정치의 일환일 뿐, 베냉이 여기서 주도적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제국주의 역학의 문제를 짚는다. 돌려받은 문화재를 어떻게 교육하고 관리할 것인지도 문제다. 다호메이가 국가적 상징이라면, 도시에 사는 사람과 시골에 사는 사람들의 접근성 격차는 어떻게 할 것인가? 노동자와 자본가에게 이들 문화재는 각각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 이번 반환을 출발점 삼아 변화를 모색하자는 희망파와 오만한 프랑스에 또 한 번 놀아났다는 비관파 등등 논쟁은 끝도 없이 이어진다.
이렇게 다호메이의 목소리는 동시대 베냉 공화국 시민들의 목소리와 공명하며 낯섦과 현기증의 세계로 진입한다. 130년 만의 귀환이라는 초현실적 판타지가 자아내는 낭만은 다층적 권력 관계가 어지러이 교차하는 현실의 한복판에서 희미해진다. 그 대신 첨예해진다.
다호메이 조각상은 이렇게 말한다.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인가?” 이 말은 자신을 마냥 환영해주지 않는 후손들에 대한 한탄일까? 그렇지 않다. 또 다른 목소리를 들어보자. “나는 당신들을 통해 나를 선명하게 본다.” 다호메이는 어둠에서 빛으로의 이행이, 프랑스에서 베냉으로의 이동이 온전한 기쁨과 승리의 역사일 수만은 없음을 잘 알고 있다. 130년을 고독 속에 있던 만큼, 자신이 의탁할 곳이 자신을 둘러싸고 폭발하는 담론의 바다에서 지난한 시간을 거쳐 마련되리라는 것도 알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 베냉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얼굴을 비추는 영화의 시선은 후손을 바라보는 다호메이 조각상의 시선이다. 그 다양한 삶에서 솟아나는 치열한 토론과 논쟁 끝에 이른 합의의 지점에 자신을 맡기겠다는 의지의 표명을 드러내는 시선 말이다. 하나의 목소리지만 여러 목소리가 혼재된 듯하고, 누군가 꿈과 환상으로부터 말을 걸어오는 듯한 조각상의 목소리도 같은 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약탈과 반환, 지배와 피지배의 단순한 이분법을 넘어 역사를 이해하고 논쟁하는 법에 관한 〈다호메이〉의 물음은 베냉만의 것이 아니다. 다호메이의 목소리는 식민자와 피식민자 모두에게 역사에 대한 복잡한 사유를 긴급하게 요청한다.
*영화 상영시간
10-03/10:00/롯데시네마 센텀시티 5관
10-04/10:30/롯데시네마 센텀시티 6관
10-09/20:30영화의전당 하늘연극장
https://www.biff.kr/kor/html/schedule/date.asp?day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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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K로 담아낸 거대한 무의미
다큐멘터리에 스포일러랄 게 있겠으나, 그래도 스포일러를 포함한다고 미리 명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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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라는 말은 비현실적이다. 비현실적이라 함은 현실이 아닌 것일진대, 현실은 참으로 지난하고 지리멸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일 '현실적인' 고민들로 머리가 터질 지경이다. 현실적으로 먹고 살 만한지, 현실적으로 내 수준에 맞는 사람은 누구인지, 현실적으로 어느 정도 투자하는 게 옳은지. 나아가 '현실적인 조언 구합니다'라는 게시판 글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현실적인'이라는 말이 앞에 붙는다는 것은, 극대의 행복이 아니라 어느 정도 고만고만한, 내 능력 한에서 최대로 가능한 정도를 말하는 게 대부분이다. 턱걸이 같다. 턱걸이를 넘기 위하여 우리는 얼마나 고군분투해야 하는가. 대부분의 의미는 턱걸이를 할 철봉 위에 있다. 그것을 넘어야만 의미를 갖는다.
요즘은 주식에, 부동산에, 코인에, 그러니까 돈이 곧 의미다. 자산을 증식하지 못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무의미하므로 행하지 않는다. 자기계발이라는 아름다운 착취 속에서 삶의 의미를 부지런히 찾아 보기도 한다.
그렇다면 무의미한 건 무엇인가. 모이지 않는 월급, 오르지 않는 노동가치, 그러므로 살 수 없는 부동산, 애프터 없는 소개팅에서 지불한 돈, 건설적이지 않은 잡담, 뭐 그런 것들일까.
의미와 기호로 가득한 세상 너머, 해발 1,500미터 고지에 '오제'라는 습지가 있다. 그 습지는 인간으로부터 무언가를 빼앗지 않고, 인간 역시 그 무엇도 앗아가지 않는다. 박혁지 감독은 <행복의 속도>라는 제목으로 카메라에 풍경을 담았다. 아니, 그 속에 살고있는 사람을 담았다는 게 더 정확하겠다.
카메라가 집요하게 쫓는 대상은 대략 80kg의 짐을 지게에 싣고 걸어서 산장까지 가는 '봇카' 이가라시, 이시타카이다. 박혁지 감독은 광활한 습지를 4K의 해상도로 보여주고, 봇카들의 걸음을 뒤쫓는다.
나는 자본주의와 얼마간의 거리를 두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영화 초반 그들이 80kg를 지고 산을 오르고 걷는 걸 보면서 '모노레일을 깔면 안 되나?'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우리나라는 산 곳곳에 모노레일이 깔려 있어 필요한 짐이며 도구들을 실어 올린다. 모노레일을 깔면 무거운 짐들을 금방 보낼 텐데. 게다가 '몸빵을 하면 돈은 많이 벌겠지?' 라는 생각까지.
그러다 후반부에 가서는, 그런 생각이 얼마나 자본주의적이며 포드주의 비슷한지를 생각했다. 히말라야도 아닌 산을 걸어서 짐을 옮기는 행위를 경제적이지 않다, 즉 무의미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노동의 가치를 그만 자본과 연결시키며, 노동을 자본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나도 역시 이 체제 속의 인간일 뿐이었다.
영화는 이가라시와 이시타카의 차별점을 조명한다. 둘 다 봇카이지만 둘은 꽤 다르다. 우선 이시타카는 '일본청년봇카대' 회장으로서 봇카를 널리 알리고자 하는 활동가이다. 겨울이 되어 오제의 산장도 문을 닫고, 봇카도 할일이 없어졌을 때 도시로 나가 봇카를 홍보한다.
이시타카가 걷는 도시의 거리는 오제의 속도와는 정반대다. 다급하게 점멸하는 신호등, 그에 맞추어 발걸음을 재촉하는 행인들, 다급한 발걸음 사이에 이시타카가 서 있다. 사람들은 봇카 일에서 어떤 보람을 얻는지 묻는다. 이시타카는 말한다. 산장이 있음으로써 내가 있고, 내가 있어서 산장이 있음이 좋다고.
행위에 보람이든, 의미든, 뭔가가 있어야 하는 걸까?반면 이가라시는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것도 모자라 목에 카메라까지 걸고 걷는다. 오제의 풍경을 카메라에 섬세하게 담는다. 두 아들의 아버지이기도 한 그는, 여름방학을 맞아 큰아들을 데리고 짐을 가져다 주던 산장에 가기도 한다. 잠자리를 잡고, 뛰어놀고, 밤하늘의 별을 바라본다. 이가라시의 아내는 농장에서 일한다.
때는 설이다.
이시타카와 이가라시 가족 모두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간다. 이시타카의 부모는 몸으로 하는 일인데 몸이 상하면 어떻게 할 건지, 그때 되면 어떻게 먹고 살건지를 묻는다. 물론 걱정되어서 하는 말이지만 이시타카의 표정은 어둡다.
이가라시는 노모에게 봇카를 하면서 찍은 사진을 보여준다. 노모는 마치 아이처럼 그 풍경을 반긴다. 이제 가기 힘들어진 그곳, 그 나무, 그 꽃들. 계절과 햇빛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감탄한다.
힘들지 않느냐는 물음에 이가라시는 대답한다. 누가 기다리고 있고, 시간이 정해져있다면 힘들었겠지만 자기 속도로 걷다 보면 도착하기 때문에 힘들지 않다고.
생각해 보면, 등산을 할 때 나 혼자 느릿느릿 걸어가면 그렇게까지 힘들지 않다. 그런데 여럿이 갔을 때 무리의 제일 끝에 산을 올라가면 그보다 힘들 수가 없다. 그때부터는 산의 풍경이고 뭐고 보이지도 않는다.
여기서 질문할 수 있겠다. 우리는 왜 힘든가. 무엇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가.
남들보다 빨리 걷기 위하여, 남들보다 높은 곳에 도달하기 위하여 바삐 움직여야만 하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인들이 등에 지고 있는 짐과 봇카의 짐 중 무엇이 더 무겁다고 말하기 쉽지 않을 거다.
카메라는 봇카들의 가쁜 숨, 무거운 발걸음을 집요하게 담다가, 그들의 가정으로 이동했다가, 또 오제의 광활한 자연을 비추기도 한다. 새로운 풍경이 아니다. MSG를 치지 않은, 그래서 맹맹하고 심심한 그들의 일상이다.
초반부에는 영화가 지루하다고 생각했고, 계속 이렇게 걷기만 할 것인가 생각했다. 기승전결도 없고 문제도 없으며, 변화라고는 오제에 찾아오는 계절 뿐인데. 114분의 시간을 어떻게 버티나.
봇카들이 걸음을 거듭하고, 나는 봇카들의 걸음을 눈으로 좇으면서 나는 어디로 걸어가고 있고, 어떤 의미들을 만들어내려고 애쓰고 있는지, 그 의미는 대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왜 내 눈에 아름다운 오제에 모노레일을 깔지 않는 저들이 이상했는가.
저들의 행위가 무의미하고 현실적이지 않게 보인 거지. 저렇게 힘든 일을 할 거면 도시에 나가서 돈을 버는 게 좋지 않을까, 같은 너무나도 현실적인 생각.
그래서 행복의 속도는 무엇일까.
'인생은 속도가 아닌 방향이다'라는 말은 사실 틀린 말이다. 속도는 방향을 포함한 벡터값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행복의 속도란 행복의 속력과 방향을 내포한 제목일 것이다.
느림이 마냥 행복할 수는 없다. 속력이 문제가 아니라, 어디로 가고 있으며 왜 가는지가 더 중요하겠다. 사물에서, 사람에게 덕지덕지 붙은 의미와 상징과 기호들을 걷어내야만 비로소 그것 자체가 보인다.
봇카들은 오제에 거대한 의미를 두지도 않고, 그들이 하는 일에서도 역시 내일은 더 빨리 가야지, 내일은 더 무거운 짐을 들어야지 하고 포부를 갖지도 않는다. 그저 하루하루 자기 속도로 걸어갈 뿐.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어쩌면 너무 뻔하게도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이 떠올랐다.
우리들이 조금은 비현실적으로, 어쩌면 지난하고 외로울 길을 각자의 속도로 걸어갈 수 있기를 바라며.
*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시사회에 참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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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를 만들 때 하지 말아야 할 것들
코로나 이전과 비교하여 급감한 관객수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있다. 하지만 이동진 평론가가 지적했듯 헐리우드 영화의 관객 수는 코로나 이전과 비교하여 92% 가량으로 거의 회복한 모양새다. 전 세계적으로 ott가 발달하면서 극장을 찾는 관객 수가 감소하긴 했지만 여전히 관객들은 극장에서만 할 수 있는 경험을 원하고, 그 수요를 충족시키는 영화들은 보란듯이 스크린에서 맹활약 중이다. 그러나 한국 영화계는 전에없는 위기를 경험 중이며, 특히 올 한해 손익분기점을 넘긴 영화가 극히 드물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비상사태에 봉착한 상황이다. 관객은 여전히 티켓가 인하를 외치고 있고, 극장과 제작사는 인하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관객도 극장도 모두 정답을 알고 있다. 관객은 좋은 영화에 대해 얼마든지 현재의 티켓가를 지불할 의향이 있다는 것을.
영화 <차박 - 살인과 낭만의 밤>은 안타까울 만큼 기존의 서사와 캐릭터를 답습하며 한국 영화의 고질적인 문제점으로 지적되어 왔던 문제들을 반복한다. 이런 영화들에 대해서는 기존에 수많은 리뷰를 통해 때로는 직접적으로, 때로는 간접적으로 불만을 표해 왔기에 이번만큼은 완곡한 표현 없이, 순서를 매겨 문제점을 지적하는 편이 효율적일 것으로 보인다.
1. 인물 간의 관계와 캐릭터성의 진부함
주연배우가 데니안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영화를 보고 나면 이 영화를 리드해 나가는 것은 김민채 배우가 연기한 미유라는 것이 확연히 드러난다. 본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가 안타까울 만큼 진부한 캐릭터를 답습하긴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문제인 것은 미유다. 김민채 배우의 빛나는 연기력이 아쉬울 만큼 미유는 기존의 한국 영화와 드라마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던 '감정적인 여성' 혹은 피해자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자신을 찾아온 사촌동생에게 단호하게 대처하거나 무시하는 대신 겁에 질린 모습을 보여준다거나 남편에게 애교가 많으며 나약한 여성상을 보여준다는 점이 대표적이다. 비록 후반부에서는 능동적으로 살인마에게 대항하는 등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미유는 감정적이다.
감정적인 여성 캐릭터가 문제인 이유는 남성은 이성적이고 여성은 감정적이라는 구시대적인 성별 구분법적 캐릭터 설정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과거 반복되던 서사에서 여성은 감정적인 모습을 약점을 드러내는 동시에 이를 성적으로 어필하는 데 활용해왔다. 남성 구원자에게 나약한 여성은 자신의 남성성을 확인하기 위한 손쉬운 대상이다. <차박>에서 이 점이 더더욱 큰 문제였던 이유는 심지어 미유가 사촌동생과 근친관계였음을 노골적으로 암시하기 때문이다. 미유가 가진 비밀은 미유 자신의 야망이나 삶에서의 목표가 아닌 연애 관계에 머무른다. 이는 미유만의 문제가 아니다. 수원(데니안 분)에게 자신의 남성성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고작 아내인 미유를 보호하는 것뿐이라는 점은 서사뿐만 아니라 캐릭터 설정에서도 문제다. 설상가상으로 수원은 이 부분에서도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다.
2. 신선한 소재가 전혀 활용되지 않음
언론 시사회에서 감독이 스스로 밝혔듯 차박은 여지껏 영화에 활용된 선례가 극히 드문 신선한 소재다. 익숙한 공간인 집을 공포의 공간으로 바꾸어 일상의 공포를 활용하던 방식은 한때 신선했지만 점점 흔해져 이제는 전단지의 카피로도 활용되지 못한다. 차박은 일상의 공간에서 벗어나 미지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동시에 영화에서는 미유와 수원이 단 둘이 보낼 수 있는 어둠의 배경이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는 차박이라는 소재를 영화 초반 잠시 미쟝센으로만 활용하고 결국 공포의 배경으로 야산과 살인마가 활보하는 건물 내부를 택한다. 제목에도 활용된 차박은 영화를 보고 나면 대체 왜 차박이라는 소재가 필요했는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잠시 등장했다가 장렬하게 전사한다. 서사의 시발점이 되는 소재만큼은 신선하지만 이를 이끌어 나가는 동력이 없는 점은 최근 한국영화가 겪는 고질적인 문제 중 하나다.
3. 주조연을 가리지 않고 인물의 서사가 지나치게 생략됨
<차박>에는 주연으로 활약하는 미유와 수원 외에도 꽤 많은 인물이 등장하지만 이들에 대한 설명은 전무하다.
인물을 설명하는 데 있어 때로는 미지의 과거가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인물의 행동 경위를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생략되는 경우는 관객을 혼란스럽게 할 뿐이다. 기실 전사를 알 수 없어 매력적인 캐릭터는 조커와 안톤 쉬거를
제외하곤 극히 드물다. 이 두 캐릭터조차도 이들 외의 인물은 전사가 알려져 있거나 짐작할 수 있어 한층 빛을 발했던 경우다. 영태(홍경인 분)의 경우 영화 초반부 등장해 관객에게 의문을 남기고, 영화 후반부에 재등장해 나름의 활약을 보여주지만 관객에게 영태는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일 뿐이다. 영태의 전사가 어렴풋이 짐작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사 내의 행동을 전부 설명해주진 못한다.
무엇보다도, 서사에 드러난 미유와 수원의 전사 또한 이들의 행동을 그다지 잘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결국 캐릭터의 문제가 서사의 개연성 부족으로 이어진다.
<차박>에서 지적할 수 있는 부분들은 이외에도 많다. 굳이 필요하지 않은 근친 소재를 사용한다거나
소아성애가 암시되는 것, 모든 행동의 이유가 단순히 사랑으로 설명된다는 점 등이 부수적인 문제점이다.
한국 관객들이 단순히 스크린에서 스펙터클만을 기대해서 한국 영화를 보지 않는 것이 아니다.
한국 관객은 이제 보다 발전된 서사와 깊이 있는 메시지를 원할 뿐이다.
*본 리뷰는 씨네랩 시사회 초청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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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으로 리뷰/소개]시간이 흘러도 이 영화가 좋은 이유
#집으로#집으로리뷰#추석개봉영화
추석을 맞이하여 재개봉하는 영화입니다. 시간이 흘러도 좋은 영화는 좋은 영화인가 봅니다. 여러분의 기억을 댓글로 달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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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우리의 지구> 공식 예고편 ?
우리 모두의 터전, 경이로운 지구를 만난다. 최신 기술을 사용한 《우리의 지구》는 50개국이 넘는 나라를 누비며 UHD 4K로 모든 영상을 촬영한 다큐멘터리. 이국적인 정글에서 깊은 바닷속까지, 인류와 자연이 공유하는 생명의 터전을 탐험한다. 데이비드 애튼버러 경이 내래이션을 맡은 《우리의 지구》, 4월 전 세계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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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바이러스가 퍼진 학교, 그곳에 고립된 효산고 학생들. "우리를 구할 사람은 우리 밖에 없어" 살고싶다. 살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