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필 K2021-04-14 01:36:34
학교생활! - 정녕 실사화는 답이 없는 것인가
필자가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본 일본 만화가 있다. "학교생활!"이라는 일상물을 탈을 쓴(?) 좀비 아포칼립스 애니메이션인데, 개인적으로 상당히 흥미롭게 봤다. 귀엽고 예쁜 여자 캐릭터들이 몇몇은 죽고, 좀비 소굴 속에서 버틴다니. 그 뿐만 아니라 진중하고 상당히 암울한 스토리가 필자의 관심을 끌었다. 작품을 평가도 좋아서 애니메이션화도 됐는데, 여기서 더 나아가 실사화까지 되었다. 일본 애니 실사화는 거의 일본 영화계의 적폐(?) 수준으로 평을 받다보니, 이것도 역시 그럴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는 이 영화를 제작년 BIFAN에서 스크린으로 소수의 관객들과 관람을 했다. 그 당시 든 생각은 이 영화는 여기서 안 보면 스크린으로는 볼 기회가 절대 없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좀비 영화를 좋아해서 그런 것도 있고. 그런데 아뿔싸. 결론은 역시다. 이번에도 실사화의 저주는 계속 되었다.
보통 이러한 모에 계열 만화(좀비 아포칼립스라고는 소개했지만 모에 요소도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다)를 실사화하는 경우에는 만화와 실사의 괴리감이 심한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문제점이 본 작품에도 존재한다. 심해도 너무 심하다. 이 중 심각한건 배우들의 연기력이다. 배우들의 연기가 너무도 어설퍼서, 정상적으로 관객이 집중하는 것이 불가능한 수준이다. 그리고 좀비 영화에서 보기 힘든 12세 관람가라는 등급은 보기 전부터 불안감을 선사했는데, 그에 보답하듯 좀비와의 전투씬은 심심하기 짝이 없다. 피도 볼 수 없고, 잔혹한 현장도 없다. 그나마 원작의 전개를 영화화 하기 위해 바꾼 스토리는 볼만하지만, 실사화의 치명적인 단점으로 인해 볼만한 스토리도 못볼게 되버리고 말았다.
코스프레로 끝나고 만다는 일본 애니 실사화의 단점을 피하기 위해 배우들의 헤어 컬러를 염색하지 않는 등의 새로운 시도는 참신해보였지만, 그 외의 단점들은 여전히 존재할 뿐더러 더 부각된 부분들도 있다. 만화 실사화의 반면교사들 중 하나. 이 영화는 역시 수입사 측에서도 흥행성이 없다고 평가 되었는지 꼼수 개봉 후 VOD 직행되었다. 혹시 원작을 좋아하거나, 실사화 애니가 어떤지 궁금하다면 한번 봐봐도 좋다. 부디 나를 탓하진 말아달라.
*이 글은 원글 없이 새로 작성된 글이며, 출처란에는 작성자의 인스타그램 주소를 기재하고 있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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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화양연화>, 시작점이 모호한 사랑에 대하여
굉장히 오래된 영화이지만 한 번도 본적이 없었기에 리마스터링 개봉이라는 소식을 듣고 영화관에서 봤던 영화 <화양연화>.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의 사랑이야기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다.^^;; 그저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작품이 아니어서 놀랐고, 굉장히 잘 만들어진 작품이어서 두 번 놀랐던 작품이었다.
영화 화양연화 시놉시스
화양연화花樣年華 가장 아름답고 찬란했던 시절에 대해 다룬 작품으로, 영화는 같은 날 같은 아파트로 이사 온 첸 부인과 차우의 서사를 보여준다. 이사 첫날부터 자주 마주치던 두 사람은 차우의 넥타이와 첸 부인의 가방이 각자 배우자의 것과 똑같음을 깨닫고 그들의 관계를 눈치챈다.
그 관계의 시작이 궁금해진 두 사람은 비밀스러운 만남을 이어가고 감정이 깊어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지만, 서로에게 점점 빠져들기 시작한다.
“많은 일이 나도 모르게 시작되죠”
*본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조했습니다.
언제 시작했는지 모를 사랑에 대한 이야기
화양연화에 대한 내용을 아예 몰랐을 때 나는 이뤄지지 않은 첫사랑을 다룬 작품이라고 생각했었다. 유명한 대사인 “시절은 지나갔고, 이제 거기 남은 것은 없다”를 듣기만 하고 지나간 첫사랑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을 담은 내용인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이렇게 제목과 영화 사진 하나, 대사 하나 3가지 조합만으로 영화를 속단하면 안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영화 전반적으로 불륜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서 초반에는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상대의 배우자들이 불륜을 하고 있으면서도 나름 담담하게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었고, 더불어 그들 역시 불륜과 비슷한 상황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사랑이라는 감정이 자신도 모르게 찾아온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표현했다고 느껴졌다.
내적으로는 참담하고 비참한 감정을 느꼈을 주인공들이 자신들 역시 똑같은 불륜을 저지르면서, 그리고 그 과정을 굉장히 가랑비 내리듯 감정을 발전시키다보니 언제 이 감정이 시작되었는지 모르지만 어느샌가 상대방을 사랑하고 있는 그 모호한 사랑의 시작에 대해 너무나도 잘 표현한 작품이었습니다.
비밀의 배우자들
영화 <화양연화>에서 인상적이었던 연출은 상대 배우자들의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첸부인과 차우는 각각 결혼을 해서 가정이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배우자들은 목소리와 뒷모습만 등장할 뿐 단 한 번도 그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
이 연출은 이렇게 둘 사이의 관계를 의심하면서 첸부인과 차우의 시점에서 불륜을 일으킨 배우자들을 관찰자적인 마인드로 보게 만들었다. 그래서 더더욱 이 둘이 어떻게 만나게 됐고, 어쩌다가 시작을 하게 됐는지 굉장히 궁금하게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점차 영화가 전개될수록 첸부인과 차우 역시 서로에 대한 감정을 키워가면서 저 둘 역시 첸부인과 차우처럼 우연한 계기로 만나 자신들도 모르게 감정이 커졌겠구나 싶었다. 일부러 첸부인과 차우의 모습만 보여준 연출은 아마 불륜의 시작점을 궁금하게 만들며서 그 시작은 알 수 없고 모호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라고 생각이 들었다.
단순한 bgm으로 영화를 제작하다
영화에서 음향의 효과는 굉장히 크다. 관객의 감정을 미리 끌어올리는 역할로 음향은 많이 사용되면서 영화에서는 다양한 bmg을 활용한다.
하지만 영화 <화양연화>에서는 그 다양한 bgm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유메지의 테마’와 ‘Quizas, Quizas, Quizas’ 두 곡을 가지고 영화를 이끌어간다. 그리고 노래 자체가 임펙트가 강한 편이어서 이 두 곡만 활용하면 오히려 루즈해지지 않을까 우려스러웠다.
하지만 이 두 가지 bgm만으로도 영화 자체를 꽉 채워줬다. 절망적일 때, 선을 넘고 싶을 때, 포기하고 싶을 때, 무료할 때, 행복할 때, 기대감이 가득 차있을 때 등 굉장히 다채로운 감정과 모두 어울리는 bgm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모든 감정신들과 잘 어울렸고, 특히, bgm이 흘러나올 때의 미장센은 정말 아름다웠다. 더불어 청각적인 부분에서의 단순함을 첸부인 역을 맡은 장만옥의 화려한 치파오를 통해서 어느정도 채워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왜 명작이라고 하는지 너무나도 잘 느낄 수 있었던 작품 <화양연화>, 카메라 미장센부터 연출, 그리고 음향, 배우들의 연기까지 조합이 너무나도 잘 어울렸던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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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싱타는 여자들 영화 시사회 후기 - 여성 노동자들이 겪은 삶의 이면을 보여주다.
과거 대한민국은 급격한 산업화로 발전을 했지만 지금에 비해 노동자들의 인권과 대우가 잘 지켜지지 않았다. 미싱타는 여자들이라는 영화는 공장에서 노동을 하던 어린 학생들이 공권력의 탄압을 받으면서 생겼던 트라우마와 그날의 기억들을 담고 있는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이다. 이들은 평화시장이란 곳에서 시다 일을 했다. 학교 교육도 제대로 못 받아서 노동교실이란 곳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 당시에 노동자의 환경이 좋지 못했기 때문에 불편하게 일을 했는데 정해진 근무시간이 없고 일을 쉬지 않고 했을 때가 많았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일찍 일을 해야 했던 그들에게 왜 이런 일이 생겨야만 했을까? 마침내 불편함을 참아낸 그 시대의 여성노동자들이 겪었던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을 털어놓는다.
대한민국의 산업화 시대에서
열심히 살아간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트라우마도 생기기 시작했다.
하니엘의 영화 미리 소개
산전수전 다 겪어본 여성 노동자들이 과거의 기억을 마주하면서 그동안 겪었던 고통을 털어낸다.
대한민국의 과거는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발전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일찍 철이 든 여성 노동자들은 정규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로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그걸 알기에 노동교실을 만들어서 그나마 학습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성 노동자들의 대우는 여전히 좋지 못했다. 노동자라는 이유로 버스 요금도 할인받을 수 없었고 그때 당시에 사회가 노동자들을 바라보는 시선도 곱지 못했다. 가족들을 먹여살리기 위해서 고군분투한 삶을 살았던 그녀들의 절박함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삶을 잘 버텨온 게 아닌가 싶다. 그 삶의 이면에는 많은 고생과 아픔의 눈물이 있었을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나의 부모님 세대에 나라를 위해 헌신하신 분들이 계셨기에 더 나은 근무 환경에서 일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함을 느꼈다.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편리함의 이면에는 누군가의 희생이 밑바탕이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아무런 절차 없이 거쳐온 게 아니기 때문이다. 산업화 과정을 겪은 대한민국이 경제대국이 될 수 있었던 그 누구보다 다음 세대에 가난을 물려주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었을까?
내가 누리는 편리함의 이면에는
과거 누군가의 불편함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인 것 같다.
하니엘의 주관적인 영화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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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정한 '나'로 거듭나게 해줄 꿈
** 본 리뷰는 <마이 뉴욕 다이어리>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감독: 필리프 팔라도
출연: 마가렛 퀄리, 시고니 위버, 더글러스 부스 등
장르: 드라마
러닝타임: 101분
개봉일: 2021.12.09
작가 지망생 조안나, 꿈에 닿기까지
1995년 미국, 작가 지망생 '조안나'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부푼 꿈을 안고 뉴욕에 입성한다. 뉴욕의 허름한 아파트에 살고, 한가로운 카페에서 담배를 피며 글을 쓰는 여느 작가들처럼. 꿈을 위해 남자친구와 이별 후 뉴욕에 사는 친구의 아파트에서 생활을 하던 조안나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자리를 구한다. 그렇게 그는 작가의 꿈을 잠시 접어둔 채 뉴욕에서 가장 오래된 작가 에이전시의 CEO인 '마가렛(시고니 위버)' 밑에서 비서로 일하게 된다.
조안나는 <호밀밭의 파수꾼>을 쓴 작가 'J.D. 샐린저'를 담당하며 작가에게 온 팬레터를 관리하게 되는데, 샐린저 작가는 답장을 하지 않는다는 기계적인 응대만을 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일개 직원인 조안나는 마가렛의 지시를 그대로 따르지만, 작가적 마인드가 활활 타오르는 그의 심리 상태로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몇 개월동안 기계적인 업무만 처리하며 작가를 꿈꾸었던 과거의 꿈을 잊어가던 찰나에 조안나는 다시금 자신의 인생을 뒤바꿀 큰 결심을 내린다.
꿈과 현실 사이의 고민
조안나는 잡지에 자신이 쓴 시를 등재한 경험이 있는 어엿한 작가 지망생이지만, 뉴욕에 온 후 쉽사리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결국 글쓰기라는 자신의 열망을 잠시 접어두고 작가 에이전시에 취직하여 자신의 롤모델의 뒷켠에서 남들의 원고를 지켜봐야만 했다. 이러한 조안나의 행보는 순수하게 꿈을 좆던 어린 대학생이 현실이라는 벽 앞에 부딪혀 돈을 벌기 위한 다른 직업을 택하는 모습과 굉장히 닮았다. 이러한 청춘들의 삶은 1995년이나 2021년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오히려 2021년인 지금 취업난이 더욱 심화되었다.)
조안나는 매일 같이 에이전시에 출근하며 단순 반복 작업을 수행하면서도 자꾸만 글에 대한 열망이 샘솟는다. 마가렛의 지시를 어긴 채 팬레터에 답장을 보낸 것 또한 상상력과 문학적 감수성이 넘치는 조안나의 성격이 드러난 부분이다. 하지만 작가를 조수로 쓰지 않는다는 마가렛의 신조 때문에 조안나는 이러한 성향을 최대한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쓴다. 조안나는 작가가 아닌 작가 에이전시 직원으로서의 능력도 출중했다. 몇 개월동안 근무하며 마가렛의 신임을 얻었고, 단독으로 서적 판매에도 성공하는 등 직장에 성공적으로 적응해 나갔다. 그에게도 나름대로 안정적인 길이 펼쳐진 셈이다. 하지만 조안나는 고민 끝에 에이전시를 박차고 나와 다시 글을 쓰고자 한다. 결국 현실과 꿈 사이의 기로에서 꿈을 택한 것이다. 누군가는 좋은 직장을 마다하고 모험을 나선 조안나를 세상 물정 모르는 청춘이라 말할 수도 있지만, 모두가 마음 속에 품고만 있던 꿈에 대한 열망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공감할 수 있다.
디지털 VS 아날로그, 책의 미래는?
1990년대는 컴퓨터가 대중화되기 시작하면서 이전의 아날로그 문화와 새롭게 나타나는 디지털 문화가 혼재된 시기였다. 극중 작가 에이전시의 CEO인 '마가렛'은 아날로그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로, 컴퓨터를 비롯한 최신 기기들을 흉물 보듯 대하고 타자기를 활용한 작업을 고집한다. 그는 디지털 기술로 인해 시행된 전자책 산업을 비판하며 이같은 기술의 발전이 출판업의 종말을 불러올 것이라 한탄하기까지 한다.
반면, X세대인 조안나는 타자기보다는 데스크탑으로 원고를 타이핑하는 것을 더 편리하게 생각하는 인물이다. 그는 분명 문명을 대하는 태도가 마가렛과는 다르다. 그렇지만, 젊은 사회초년생을 대표하는 조안나가 과연 훗날 종이책을 버리고 전자책만을 사용하게 될까? 전혀 그렇지 않다. 세대에 관계없이 문학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감성 하나만은 모두가 동일하다. 종이책만이 가져다줄 수 있는 따뜻한 정서와 마음을 향한 울림이 있기 때문에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여전히 종이책을 꾸준히 소비한다. 따라서 마가렛의 입장은 지나치게 보수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의 완고한 고집은 문학에 대한 사랑과 헌신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충분히 이해는 간다.
'아무개'에서 '나'로 불려지기까지
조안나는 '샐린저' 작가로부터 첫 전화를 받았을 때 자신의 직책과 이름을 소개하지만 청력이 좋지 않았던 작가는 그를 '수잔나'라고 제멋대로 부른다. 주인공도 이러한 작가의 부름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데, 작가 본인에게 일개 직원의 이름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조안나의 자리는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인원으로 대체된다 할지라도 회사나 작가에게 아무런 영향이 없고, 누구든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조안나는 샐린저의 업무를 관리하며 그와 계속 통화를 하게 되는데, 그에게만큼은 자신이 글을 쓴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샐린저 또한 조안나의 마음을 알아차린 것인지 계속해서 글을 쓰라는 말을 강조한다. 그리고 영화 후반부에 퇴사를 앞둔 조안나는 베일에 쌓여 있던 샐린저를 드디어 마주하는데, 그는 처음으로 '수잔나'라는 별칭 대신 조안나라는 제대로 된 이름을 불러준다. 이는 결국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일을 할 때, 비로소 온전한 '나' 자신이 될 수 있다는 해석으로 비춰진다. 자신의 꿈을 잊고 무기력하게 회사에 소속되어 '아무개'로 살아가는 삶이 아닌 꿈을 향해 용기를 갖고 나아가는 삶을 살아보자는 감독의 응원이 아닐지.
- 씨네랩 크리에이터 popofil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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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랩 크리에이터로 시사회에 초청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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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었다
베테랑을 본 날, 그날은 문화의 날이었다. 그래서 영화를 두 편을 봤다. 그 중에 하나가 암살이다. 암살과 베테랑은 오랫동안 걸려있어서 몇몇 사람들은 독과점 같다는 이야기도 하지만 사실 이 영화들은 사람들이 많이 봤으면 하는 마음이 크다. 특히 암살은 여운이 남는다.
여기도 믿고보는 배우들이 나온다. 베테랑에서도 만난 믿고보는 오달수, 또 믿고보는 하정우. 사실 씬 자체는 몇 컷 안 되지만 두 영화의 신스틸러.. 언제나 중요한 역할 믿고보는 진경.
암살은 쉽게 말하면 독립운동을 그리는 영화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알고 있는 독립운동이 아닌 다른 독립운동이었다.
이 영화가 나오자 마자 표절시비가 붙었다. 100억 소송이었나? 역사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나 소설의 표절시비라 의아했다.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플롯이 얼마나 비슷한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 식으로 소송을 하면, 세상에 많은 사극들은 조선왕조실록의 표절이 아닌가. 뭐 이런 얘기다. 저런 표절시비가 붙고 나서 작가는 책을 재출간했고, 아마 '암살이 표절한 책'으로 홍보를 해서 꽤 돈을 벌었을 것이다. 뉴스를 보니 영화 측에서 표절시비 책 전량회수를 요구했다고 하는 것 같다. 그래야지. 그런 악의적인 소송이라니.
여튼 독립운동을 하는, 특히 적극적으로 육체적으로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배신과 배신이 난무하고, 깨달음이 있다. 고민하는 자신의 모습과 두려워하는 자신의 모습을 감추기 위해 과하게 밝게 행동하고, 자신이 독립운동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모든 상황들을 유쾌하게 받아들이는 속사포는 마음을 짠하게 했다. 돌아와줘서 좋았으나 그 이후의 상황이 예상이 되어서 돌아오지 말지 그랬니.. 하는 안타까움도 들었다.
배우의 구멍이 없었다. 다들 연기를 잘했다. 연기를 못한다고 까이는 전지현이지만, 사실 나는 전지현이 그렇게 연기를 못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특히 베를린에서의 그 절제된 연기는 썩 마음에 들었었다. 이번에 연기도 마찬가지 였다. 딱 그 사람. 딱 이 사람. 같았다.
암살도 임무를 마친 그들의 모습을 보여 통쾌한 마음이 들었으면 했지만, 되려 무거워졌다. 베테랑에서 느끼던 통쾌함은 느낄 수가 없었다. 이는 아마 우리 곁에 여전히 남아있는 친일파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이건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마지막의 이정재의 죽음은 그들의 마지막 임무완수가 아니라 이정재의 죄책감에서 나온 상상이 아닐까 싶다. 늙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났던 안오균과 이정재의 죄책감의 하나인 그... 후배.
그리고 이정재가 쓰러진 그 마당은 이미 발전한 서울에서 문을 열고 나갔을 때 보이는 모습이라고 보기에는 동떨어진 모습이었다. 너른 들에 흩날리는 천들은 아무것도 없는 이정재의 마음을 표현한 것은 아닐까. 그게 이정재가 혹시 자살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이건 내 생각이기는 하지만.
누군가 하정우가 죽지 않았다면? 이경영이 자살을 했다면? 이라는 의문을 남겼다. 하정우가 죽지 않았다면 너무 뻔한 사랑이야기가 되어 버렸을 것 같고, 이경영이 자살을 했다면 그들의 임무가 찜찜하게 되었을 것 같다. 그 임무를 위해 죽은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말이다. 그리고 어쩐지 내 마음도 찜찜했을 것 같다.
이경영의 자살은 어쩐지 '에잇 ㅅㅂ, 나는 잘못이 없어. 딸 손에 죽느니 그냥 내가 죽고 말지' 이런 느낌이 들었을 것 같았달까? 결국 딸 손에는 죽지 않았지만... 이경영의 자살은 어쩐지 좀 분하다.
사실 하정우의 죽음은 안타깝기 마련이다. 미란다호텔에서 두 사람의 조합은 정말 환상이었는데! 조금씩 엇갈린 것 같아 안타깝기도 했다.
이정재는 관상에 이어서 악역인데, 의외로 악역이 잘 어울리면서 맛갈나게 소화를 한다. 특히 관상에서 부터 들려줬던 그 특유의 걸걸한 목소리가 사람의 마음을 살살 긁는다. 짜증이 나게? 어쨌든 잘 소화해 냈다. 악역을 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이 영화를 보고, 배우들과의 이야기를 들은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하나. 하정우와 전지현의 멜로. 벌써 몇 번이나 만났지만 제대로 된 멜로를 연기하지 못한 두 사람에게 정통멜로 하나를 던져주는 것은 어떨까? 어서 물어보세요, 멜로의 떡밥을(정통멜로가 아니어도 좋아오 로멘틱코미디도 좋으니 물어주세요, 떡밥을).
아,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었다. 라는 건 씁쓸하지만 지금 우리나라의 승리자는 친일파라고 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나라를 위해 희생된 수많은 인물들이 묻히고, 지금에서는 국정교과서까지 추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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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이지 에드가 존스의 영민한 본능
<천국의 깃발 아래(Under the Banner of Heaven)>(2022, FX)
<가재가 노래하는 곳(Where the Crawdads Sing>(2022, 올리비아 뉴먼)
<프레시(Fresh)>(2022, 미미 케이브)
* 위 작품들의 핵심 전개 포함
데이지 에드가 존스는 펜데믹 속에서 스타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연기에 관심을 두었던 그는 십 대 때 <Cold Feet>에 캐스팅 되며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후 HBO와 Fox, 연극 무대를 오가며 커리어를 쌓았다. 세상이 그를 주목하게 된 계기는, hulu 시리즈 <노멀 피플>. 상대역 폴 메스칼이 이후 <로스트 도터>나 <애프터썬> 등에 출연하며 인디/아트 필름 씬의 사랑을 받은 반면 데이지 에드가 존스는 메이저 방송사에 조금 더 머무르게 되었는데, 선택한 서사와 캐릭터에 어쩐지 겹치는 데가 있었다. 이 글에서는 그 특정한 작품들과, 에드가 존스의 영리한 연기가 빛을 더한 인물들을 다룬다.
<프레시>의 노아로 그를 처음 만났다. 특유의 솔직한 유쾌함, 단호함과 확실함이 인상적이었다. 현대적인 이미지와 능숙하고 몰입력이 뛰어난 퍼포먼스로 그를 기억했다. 다음번 스크린에서 만났을 때 에드가 존스는 몇십 년 전 분장을 하고 있었다. 한 작품에서는 살인 사건의 피해자, 다른 작품에서는 용의자였으나, 오히려 비슷한 위치에 있었다. 폐쇄적인 집단에서 대놓고 혹은 암묵적으로 낙인찍힌 여성들이었다.
60년대 작은 시골 마을, 숲 속 습지대 근처의 집에서 홀로 자란 카야는 마을 사람들에게 평생 따돌림을 당했고,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몰린다.(<가재가 노래하는 곳>) 80년대 유타 주, 이름있는 모르몬교도 가문의 막내아들과 결혼한 브렌다는 남편의 형제들에게 살해당한다.(<천국의 깃발 아래>) 현대 미국 어딘가, 우연히 만난 멋진 남자와 연애를 시작한 노아는 ‘인육 사업’을 하는 그의 집 지하실에 갇혀 ‘고기’로 팔릴 위기에 처한다.(<프레시>) 단편적으로 에드가 존스의 인물들을 설명했다. 카야와 브렌다는 아름다운/불경한 이방인 취급을 받았고, 카야와 노아는 데이트 상대였던 남성에게 배신당하고 위협당했다. 셋 모두 여성혐오적 폭력을 겪었다. 이 공통점의 원인은 외부에 있다.
그러나 세 사람이 상황을 인식하고 반응하는 방식 역시 닮아 있었다. 이들은 저항했다. 고통에 둔감한 것은 아니었다. 상처입고 괴로워하며 딛고 일어났다. 노아와 브렌다는 비슷한 처지의 여성들과 공감하고 연대했다. 카야와 노아는 끝내 제 손으로 프레데터를 처단했다. 브렌다는 결국 살해당하지만, 그의 행동은 타 여성들을 지켰고, 남편을 깨닫게 했고, 가해자들을 단죄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그들의 내면에서 나오는 에너지의 모양은 유사했고, 그 색은 각자 다르고 고유했다.
<천국의 깃발 아래> 첫 화, 시청자가 처음 목격하는 브렌다는 이미 죽어 있다. 피해자인 줄로만 알았던 그의 서사는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깊어진다. 주로 남편 엘렌의 회상을 통해 그려지나, 작품은 그를 외부의 해석이 들어간 대상보다는 의지와 감정을 지닌 한 사람으로 생생하게 다루기를 택한다. 주체적으로 모르몬교 원리주의자들에게 맞섰던 사람. 용기와 야망이 있고, 똑똑하고, 다정하고, 사교적이고, 센스있고, 판단과 대처 능력이 뛰어나고, 종교를 초월하는 올곧은 잣대를 지닌 여성. 에드가 존스는 엘렌이 알아채지 못했을 우울함이나 흔들림까지 기억의 단면에 녹여내는 데에 성공한다.
대부분의 시청자는 어떤 식으로든 브렌다와 데이지에게 반하고 말 것이다. 피범벅이 된 제이컵의 손을 조용히 닦아 주는 따스함과 사려깊음, 자신을 성적으로 착취하려는 교수를 도리어 이용하는 기지, ‘래퍼티가 와이프들’이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고 불평등한 관계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설득력과 용기… 배우의 집중력과 재치로 인해 더욱 돋보이는 장면들이다. 이미 한참 전부터 내 마음에 들어와 있었던 그에게 마침내/완전히 반했던 것은, 마지막 화, 브렌다가 생을 마감한 날의 순간들이 화면에 재생되었을 때였다.
남편의 형제들에게 살해 협박을 받는 상태,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브렌다의 뒷모습에는 불안한 망설임이 있다. 다이애나의 편지를 발견하자 온 몸이 가벼워진 듯 즐거워하고, 답장을 쓰며 생각에 잠긴다. 그 일련의 미묘한 심리 변화는 에드가 존스의 몸과 얼굴이 지닌 다채로운 결로 표현된다. 그리고 댄 래퍼티가 문을 두드린다. 건장한 두 남자에게 짓눌려 정신없이 울부짖지만, 틈이 보이자 기어가 아이가 있는 방문 앞을 막아서는 브렌다의 중심은 무너지지 않는다. 울며 설득하고 애원하다 어느 순간(아마도 저들이 자신을 죽이고 말 것임을 깨닫고), 가쁘게 몰아쉬던 숨을 서서히 다스린다. 저들의 멸망을 예언한다. 눈물과 피로 덮인 눈에 어린 빛은 성스럽고, 음성은 떨리지만 서늘하고 차분하며, 애절하고 풍부하다. 신적인 존재가 있다면 분명 그의 말을 들었을 것이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2022)
<천국의 깃발 아래>는 있었던 일을 따라가며 ‘피해자 브렌다 래퍼티’가 ‘누구’였고 무엇을 해냈는지 보여 주었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 또한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의 구성을 띠는 작품이다. 이번에 데이지 에드가 존스의 첫 포지션은 ‘용의자 캐서린 클라크’다. 영화는 에드가 존스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보안관을 피해 나무 뒤에 숨은 모습으로 처음 시각적 등장을 한 그는 이후 한동안 입을 열지 않는다. ‘표현’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힘껏 달아나고, 모터보트를 몰고, 물 속에서 헤엄치는 동작들에 묻어나는 것은 급박함보단 간절함. 그 정서는 이후 유치장이나 법정에서 고요하게 허공을 응시하거나 눈을 내리까는 제스처들과 연결되는데, 거기 말 못할 사연이 어려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마을 사람들의 시선으로 그를 “습지 소녀”로 응시하던 영화는, 오래 지나지 않아 그의 ‘목소리’를 돌려준다. 캐서린 클라크가 입을 열고 스스로를 ‘카야’로 칭하며, 이야기는 그의 입장에서 전개된다. 관객은 카야의 감정과 심리를 따라가며, 그가 무서워하면 공포를 느끼고, 상처 받으면 아파하고, 마음을 열면 함께 열게 된다. 그리고 무언가 숨기는 것이 있다면 감지하게 된다.
하나 고백하자면, 영화의 중반부 테이트와의 로맨스 서사가 이어지는 동안, 카야가 남성 중심 판타지의 영향을 받은 캐릭터는 아닌지 의심했다. 외딴 곳에 혼자 사는 ‘순수하고 순진한‘, 모든 것이 ’내‘가 처음인, 평소엔 티셔츠에 오버롤을 입다 ’나‘를 맞이할 때는 하늘하늘한 블라우스나 원피스를 입는, 전형적 뷰티 스탠다드를 착실히 갖고 있으면서 ‘야생적인’ 매력을 추가로 지닌, “다른 여자들과 달리 깃털을 보면 무슨 새인지 아는”(카야) 괴짜, 체이스의 대사를 빌리면 “somethin’ else”, “my marsh girl, nobody know, nobody sees, but me”. 의심은 곧 해소되었다. 카야는 입체성을 갖고 성장하는 인물, 앞선 묘사는 체이스가 왜곡한 “습지 소녀”일 따름이었다. 의심이 감동을 뒤덮지 않게 한 것은 에드가 존스의 진정성 있는 연기였다.
테이트가 떠난 후 카야는 체이스와 연애를 시작한다. 유해한 남성성의 표본인 그가 행하는 당연하고 일상적인 기만에서는 악의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두 남자와 카야의 관계를 묘사할 때 대놓고 대조적인 연출이 사용됨에도, 카야의 감정을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는 없었다. 그 차이를 설명하려면 구구절절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 테이트를 향한 카야의 감정적 제스처에는 주저가 섞였을지언정 늘 일종의 확신이 있었다. 경계심은 점차 사라지고, 편안한 애정과 설렘이 들어섰다. 에드가 존스의 연기가 더 돋보였던 부분은 테이트보다는 체이스를 향한 표현의 흐름에 있었다. 경계와 의문, 단순한 흥미에 점차 관심이 더해지는데, 거기엔 한동안 불안이 함께한다. 체이스의 무례에 대한 거부감과 그 역시 떠나리란 불신 사이에는, 스스로의 마음에 대한 불확신 또한 있다. 시간이 흐르고 신뢰가 쌓이며 점차 익숙한 애정과 즐거움이 싹트지만, 거기엔 무언가 결여되어 있다. 몇 년 만에 돌아온 테이트를 바라보는 눈빛에 그- 언어로 모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체이스에게 오래된 약혼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카야는 호흡곤란 증세를 보인다. 그 정서는 테이트가 돌아오지 않았을 때의 아픔과는 종류가 다르다. 테이트에게 느낀 배신감과 서운함이 그의 특정한 행동과 떠난 가족들에 대한 기억이 엮이며 발생된 것이라면, 체이스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는 인간 자체의 됨됨이에 대한 깨달음으로부터 오는- 상대의 진심, 함께한 기억 전부를 뒤집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테다. ‘그들’이 “I can explain!”이라고 한다면 이후의 말을 들어 볼 의향이 생기는가/아닌가의 차이라고 할 수도. 에드가 존스의 심리 묘사가 카야가 체이스에게 ‘여지’를 줄 일은 없으리란 것을 납득하게 했다.
체이스는 곧 단순한 ‘나쁜놈’이 아닌 범죄자로 밝혀지고, 카야는 ‘포식자’를 처리한다. 영화는 그 비밀을 엔딩에 이르러서야 암시하지만, 사실 에드가 존스의 연기에 있는 디테일을 통해 미리 짐작할 수 있었다. 출판사 미팅에서 ‘수컷을 잡아먹는 암컷’에 관한 대화를 하던 중 카야는, “자연에 선과 악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살아남기 위한 제스처이기도 하죠.”라고 진지하게 말한다. 초점을 잃고 떨리며 내리깔리는 눈동자는, 그 대사를 학문적 서술보다는 사회적 선언이자 개인적 고백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결론적으로 작품은 가부장적/폐쇄적 사회 내 가정 폭력, 데이트 폭력, 레이시즘, 슬럿 쉐임, 그리고 무엇보다 ‘아웃사이더’들을 세상이 손가락질하고 삭제하는 방식을 카야의 삶 안에 녹였다. 그 중심에는 카야와 테이트의 판타지적 로맨스보다는, 습지(“가재가 노래하는 곳”)에 대한 카야의 사랑이 있었다. 그는 분노와 아픔을 타인에게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대신 습지와 자연에게는 마음껏 뿜어냈다. 마구 달리거나, 모래밭에 쓰러지거나, 가슴에 있는 응어리를 전부 담아 갈라지도록 소리를 지르거나, 저 먼 곳을 아련하게 응시하는 등의 움직임이 대사보다 더 많은 것을 들려주기도 했다.
데이지 에드가 존스에겐 적당히 거리를 두다 그렇게 한순간 스스로를 내던져 버릴 수 있는 감각이, 용기와 무방비함이 있다. 첫인상은 가녀리고, 그 안에 독특한 장난기가 있다. 상처와 우울이 자리할 공간 역시 있다. 더 들어가면 단단한 핵이,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싸울 강한 면모가 있다. 습지에서 수영하고 낚시를 하는 등 스턴트를 직접 소화했다는 사실은 어쩐지 당연하게 다가온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2022)
낭만적이고 올드한 멋이 있는 작품, <가재가 노래하는 곳>. 같은 해에 공개된 <프레시>는 장르, 시대적 배경, 연출 스타일… 무엇하나 같지 않은 영화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 주인공의 삶을 중심으로 굴러간다면, <프레시>의 중심에는 상황과 사건이 있다. 그러나 카야와 노아가 겪은 폭력의 핵은 비슷한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특수한 주인공을 내세운 시대극인 <가재가 노래하는 곳>에 드러나는 폭력의 양상은 ‘평범’하고, <프레시>의 특수한 설정은 현실의 ‘평범’한 비정상성을 적나라하게 비유한다. ‘프레데터 남성을 피해 여성이 처단하고 그 과정에 남성 ’구원자‘가 끼어들기를 허용하지 않는’ 전개도 닮았다. 카야에게는 어떤 아련함, 사연 가득한 여백이 있어야만 했다. 영화는 그의 삶 전체를 다룬다. 카야가 사건을 프로세스하고, 타인과 교감하고, 행동을 취하는 방식은 과거의 경험과 엮여 설명된다. 반면 <프레시>는 개개인의 서사보다는 현 시점에 일어나는 사건을 중심에 둔다. 물론 노아에게도 과거사가 있고 영화에 잠깐 언급되기도 하지만- 중요하게 다루어지지는 않는다.
로맨틱 코미디로 시작해 이스케이핑 스릴러, 슬래셔까지 발을 걸치며 장르를 노련하게 바꾸는 영화. 이런 작품에서 배우는 매 장면 ‘기능을 수행’하면 되는가?(당연히 아니지만,) <프레시>의 감독과 배우들은 오히려 인물들의 개성을 돋보이게 하는 방식으로 영화의 매력을 살려 몰입을 이끌어냈다. 주연 배우들의 재치있고 깔끔한 연기는 세련되고 스타일리시한 연출과 최상의 조합을 이루었다. 데이지 에드가 존스는 다층적인 심리를 두르고 훌륭하게 균형을 잡았고, 세바스찬 스탠은 가면을 바꿔 쓰며 기꺼이 '야수beast’와 ‘광대’가 되었다. 그들이 변화하는 다이나믹에 따라 맞춘 호흡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에 대한 완전한 이해로부터 온다. 이들은 모든 장르를 능숙하게 소화하며 ‘기가 막힌’ 연기를 선보이는 가운데, 관객이 메시지에 주목할 수 있도록 톤을 적절히 조절했다.
그 매력은 오프닝, ‘최악의 데이트’ 씬부터 드러난다. 인종차별에 성차별을 일삼고 스카프를 음식에 빠트리기까지 하는 남자. 노아는 예의는 차리는 와중 남자에게 휘둘리지 않고, 그가 ‘어떤 놈인지’ 파악한다. 대놓고 불쾌감을 표하지는 않으나, 기울어진 고개, 일그러진 눈썹과 입술, 애매한 효과음으로 적당히 거부감을 드러낸다. 배우의 자잘한 재치다. 아마 이 장면부터 시청자는 노아에게 공감과 호감을 모두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플롯도 플롯이지만, 노아와 스티브의 캐릭터를 여러모로 잘 구성했다는 감탄이 나왔는데, 배우들 본연의 매력을 바탕으로 한 듯 보이기도 했다. 노아는 꾸밈없고 솔직하다. 제 대사처럼 “f*** it”의 태도가 있다. “미국 악센트 데뷔”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자연스럽고 쿨한 말투. 스티브가 “동물을 먹지 않는다”고 하자 보이는 울상은 또 얼마나 ‘재미있는’지. ‘문제 없이’ 로맨틱한 만남을 가질 시기, 두 사람은 불편함 없이 매우 잘 어울린다. 이것이 바로 ‘케미스트리’. 세바스찬 스탠은 일부러 제 주위 허들을 낮추며 묘하게 상대의 경계를 늦추고, 데이지 에드가 존스는 노아답게 ‘당신의 마음에 들기 위한’ 제스처보다 ‘당신이 마음에 든다’는 표현을 건네며 순간을 온전하게 즐긴다. 그러나 스티브가 목적을 위한 다음 수를 두며, 노아의 얼굴 한구석엔 긴장이 들어선다. 노아는 내내 불안해했다. 자각하지 못하더라도 무의식중에 이미 ‘이게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에드가 존스는 이 ‘보편적 불안’의 정체를 이해하고 드라마 안에 녹였다.
서사를 완벽하게 가르는 오프닝 크레딧이 흐르고, 노아가 깨어난다. 어리둥절하지만 일상적인 상태로 있다가, 상황을 파악하고 패닉해 울먹이기까지. 에드가 존스는 노아의 심리 변화를 투명하게 드러낸다. 관객은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 볼’ 수 있다. 그는 단지 겁에 질려 있기만 한 것이 아니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선택에 대해 후회하며 자책하고 있다, 제 잘못이 아님에도. 두려움에 잠긴 목소리, 짐짓 가다듬고 또렷하게 내보내지만 고르지 못한 발성, 점점 일그러지는 눈가, 구석에 박힌 채 움츠러들어 굳은 등과 어깨, 가빠오는 숨… 이러한 디테일은 계산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와 작업한 감독들이 말하듯 ‘본능’이다. 관객의 집중력을 붙들고, 노아에게 이입하게 만드는 연기다.
노아에겐 단계-페이즈가 있다. 조금 뜬금없지만 매혹적이고 달콤한 연애를 하는 전반부, 완전히 좌절해 ‘피해자’로 스스로를 소비하게 하는 후반부-의 초반, 괴로움을 딛고 어둡고 냉정하게 계획을 세우는 중반, 그리고 다른 여성들과 힘을 합쳐 스티브를 처단하는 결말.(이렇게 이름 붙여도 된다면, 원치 않았던 ‘히어로’로의 불필요한 ‘성장’이라고 할까.) 그 사이 노아의 눈가에 드리워진 그늘에 일종의 자괴감은 있을지 몰라도, 스톡홀름 증후군에 빠지거나 감정을 교류한 페니를 두고 홀로 나간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가 구체적으로 등장하지 않아도, 우리는 노아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꾸밈없고, 유머러스하고, 독립적이고, 솔직하고, 영민하다. 일상 속에서 드러난 인간성은 위기에 처했을 때 형태를 달리해 나타난다. 따라서 그가 금방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탈출을 시도하는 전개는 설득력이 있다. 실패하고, 노아는 모르핀과 무기력한 증오에 취해 멍하고 살짝 무덤덤하기까지 한 상태가 된다. 홀로 있을 때나 스티브를 마주할 때보다는 같은 처지에 있는 옆방 페니와 대화할 때 날것의 감정을 드러내는데, 테이트나 습지에게 마음을 터놓는 카야가 떠오르기도 한다.
스티브가 자신을 “다른 여자와 다르”게 대했다는 것을 알고, 노아는 참을성 있게 탈출과 복수를 노린다. 섣불리 관심을 꾸며내기보단 떠보며, 저쪽에서 다가오게 한다. 스티브가 그랬듯 상대의 페이스에 맞춰 주며 서서히 자신의 페이스에 말려들게 하는 작업. 스티브가 원피스를 ‘선물’하며 마음에 드냐고 묻자, 삐딱하게 누워 뱉는 “It’s pink.”에 있는 틈과 톤, 스티브가 나가자 옅은 미소를 거두는 흐름. 심리를 적당히 숨기는 시니컬한 태도가 왠지 노아의 다음 시도는 성공하리란 예감을 하게 한다. 노아는 계획을 입 밖으로 내지 않지만, 시청자는 에드가 존스의 표정과 자세가 내보내는 아우라를 통해 ‘노아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짐작할 수 있다. (놀랍지 않은가.)
처음 저녁 ‘식사’에 초대되어 스티브의 ‘스토리’를 듣는 노아의 얼굴엔 혐오와 공포가 들어서나, 이 단어들이 주는 느낌처럼 전면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스티브는 모르고 관객은 알 수 있는 균형. ‘미트볼’을 입에 넣었을 때 노아의 혀가 감지하는 것은 씹는 음식의 맛이 아니다. 방금 전 스티브가 설명한- 여성을 극단적으로 상품화해 소유하길 원하는 “1퍼센트 중의 1퍼센트” 남성들에게 ‘씹히고 삼켜지는 맛’이다. 작품은 편집으로 이를 은유하는데, 에드가 존스의 낯빛에도 그 감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인육의 값에 대한 노아의 반응 “That’s crazy.”를 스티브는 ‘말도 안 되게 비싸다’는 뜻으로 넘겼으나, 관객은 노아의 억양과 고갯짓, 눈빛에서 ‘그런 짓을 벌이는 인간들이 있다니 미쳤다’라는 의미를 읽어 낼 수 있다.
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화장을 한 노아는 시니컬한 농담을 하며 웃는다. 마주 웃는 스티브의 얼굴엔 ‘순수한’ 즐거움이 있다. 그러나 노아의 웃음에는 자조, 경멸, 증오, 공포가 전부 섞여 있다. 스티브의 시선이 닿지 않는 순간-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며 긴장해 있는 눈빛과 나란히 보면, 무너지거나 폭발하지 않기 위해 부러 유머를 택한 것 같기도 하다. 노아는 화제를 돌리지 않고 ‘고기’를 소재로 하는 농담을 지속하는데, 처한 상황, 어쩔 수 없이 해야 했던 역겨운 행동을 외면하는 대신 직시하고 해결하려는 의지를 반영한 것이 아닐까.
<프레시>에는 노아와 스티브가 춤을 추는 장면이 두 번 나온다. 초반, 그들이 (적어도 노아의 입장에서는)평범한 데이트를 하고 있을 때, 그리고 노아가 스티브의 ‘포로’인 채로 ‘디너 데이트’를 할 때다. 전자의 끝에 스티브는 노아에게 (꿍꿍이가 있는) 여행을 제안했고, 후자의 끝에 노아는 스티브를 (해하기 위해) 침대로 이끈다. 이 의도적인 연출은 에드가 존스가 입은 정서로 완성된다. 온몸에 가득했던 순수하고 생생한 즐거움은 이제 없다. 그 동그랗고 생기 없는 눈에는 어떤 의지, 목적, 광기, 장난기마저 있다. 우여곡절 끝에 두 여성과 함께 탈출한 노아는, 만신창이가 된 스티브에게 총을 겨누고, 그가 자신에게 했던 대사, “Come on, give me a smile.”을 돌려준다. 그… 누아르스럽기도 한 씬에는 노아가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겪은 과정이 죄다 엉켜 있었다. 배우가 지닌 가능성 역시.
<프레시>(2022)
세 작품을 관람하는 동안 데이지 에드가 존스에게서, 노련한 커뮤니케이터, 영리하고 지혜로운 전사, 현명하고 열정적인 학자, 솔직하고 친근한 연인, 진실되고 정 많은 친구를 발견했다. 캐릭터의 포지션에 한계가 있었던 <천국의 깃발 아래>를 제하면- <프레시>에서도 <가재가 노래하는 곳>에서도 에드가 존스는, 작가/감독이 원하는 방향대로 인물을 소화함을 넘어- 온전히 제 언어로 체화하는 스토리텔러였다. 유사성이 있는 역할들을 맡았으나, 그 연기에는 무한한 깊이와 폭이 있었다, 스스로를 아주 놓아버릴 수 있는. 그건 앞서 언급했듯 하나의/복합적인 감정에 몸을 내던져 터트린다는 뜻이 될 수도, 타인에게 자신을 완전히 맡긴다는 뜻이 될 수도, 혹은 자신을 아주 내려놓아 차분해진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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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 윤여정의 시작 <화녀>, 50년 만에 스크린으로 돌아오다!
영화 <화녀> 포스터,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배우 윤여정이 제 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한국 배우 최초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면서 국내외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이로써 윤여정은 영화 <사요나라>(1957)로 여우조연상을 받은 우메키 미요시에 이어 아시아인으로서는 64년 만에 두 번째 수상자가 되는 영광을 안았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동료 후배 배우들의 수상 축하 물결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그녀가 수상소감으로 언급했던 故 김기영 감독과 함께한 그녀의 데뷔작 <화녀>가 50년 만에 스크린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알리며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화녀>는 시골에서 상경해 부잣집에 취직한 가정부 명자(윤여정)가 주인집 남자의 아이를 낙태하면서 벌어지는 파격과 광기의 미스터리 드라마다. 1971년 개봉 이후, 50년 만의 스크린 재개봉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화녀>는 김기영 감독 연출, 윤여정 배우 주연의 작품으로 개봉 당시 신인 배우 윤여정에게 대종상, 청룡영화제, 시체스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 등 각종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길 정도로 극찬을 불러모은 작품이다. 여기서 윤여정은 한 가정을 파멸로 몰고 가는 가정부 '명자'역할로 캐릭터의 독보적이고 파격적인 비주얼과 광기어린 모습을 보여주며 신인답지 않은 과감하면서도 탁월한 연기를 선보였다.
또한 윤여정 배우가 '천재적인 감독'이라 특별 언급할 정도로 감사를 표한 김기영 감독의 독창적인 연출력과 새로운 촬영 방식, 파격적인 서사는 시대를 앞서가는 작품으로 손꼽히며 5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봐도 신선한 충격을 전한다. 한국영화 사상 가장 독창적인 세계관을 가진 김기영 감독만의 획기적이고 감각적인 연출은 윤여정의 과감한 연기와 함께 우리에게 다채로운 볼거리를 선사할 예정이다.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윤여정은 <미나리>의 감독, 스태프, 가족에 대한 감사 인사와 함께 마지막으로 자신이 첫 출연한 영화 <화녀>를 함께한 故 김기영 감독을 언급하며, "김기영 감독에게 감사하다. 저의 첫 영화를 함께 만드셨는데, 아주 천재적인 감독이셨고, 살아계셨다면 수상을 기뻐하셨을 것이다'라는 벅찬 수상 소감을 전했다. 이번 <화녀>의 재개봉 소식은 지금의 그녀를 있게 한 김기영 감독과의 첫 작품을 스크린으로 만나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또한 배우 윤여정의 전성시대가 열린 지금, 그녀의 50년 연기 인생의 시작을 조명할 수 있어 더욱 반갑고 특별하게 다가온다.
누군가의 시작을 보는 것은 지금의 그 사람을 설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다. 누군가는 그녀의 인생을 두고 지금이 그녀의 전성기라 말하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최고의 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배우. 매 순간 최선을 살아가는 '배우 윤여정'의 시작은 과연 어떠했을지 영화 <화녀>를 통해 함께 확인해 보자.
씨네랩 에디터 J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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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퀴어] 끝장리뷰 | 육체와 정신 | 종교적 해석 | 뱀, 죄수복, 권총, 야헤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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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2025)에 대한 헐거운 리뷰
Chapter 1 육체와 정신
Chapter 2 종교적 해석
00:00 CGV 단독개봉
02:05 육체와 정신
06:22 종교적 해석
11:17 별점 및 한 줄 평
11:36 다음 리뷰 예고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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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2주 최신 개봉영화(싱크홀, 프리가이, 더 톨:함정, 암살자들, 생각의 여름)
[WEEKEND CHOICE MOVIE] 2021년 8월 2주차 #개봉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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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https://blog.naver.com/rainbbox
@Weekend Choice 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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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이번엔 잘 되겠지> 메인 예고편
구 에로 영화 감독, 현 치킨집 사장인 승훈에게
코로나라는 일생 최악의 위기가 찾아오고
가족 같던 닭 집 식구들마저 떠나보내야 할 상황에 처한다.
승훈의 앞에 블록버스터 대작의 기운을 물씬 풍기는
시나리오가 나타나고 다시 한번 재기를 꿈꾸지만 쉽지만은 않다.
가는 곳마다 번번히 퇴짜를 맞고 순조롭던 영화 촬영에도
예측불가한 상황들이 일파만파 커지는데..
“버티고 또 버티면, 이번엔 잘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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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괴짜들의 로맨스> 30초 예고편
강박증을 앓고 있는 두 사람은 우연한 만남으로 거울처럼 닮은 서로를 알아본다ㅏ.
썸에서 사랑 마침내 소울메이트가 된 이들,
우리,평범하게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랑의 세상 안에서 우리는 모두,괴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