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_Rec2025-04-20 20:45:10
[스크린 너머 세계 속으로… 스웨덴] 술과 인생에 대한 찬사와 경고 그 사이에서
영화 <어나더 라운드> 리뷰
현실적이면서도 환상적이게
영화 <어나더 라운드>는 한마디로 술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다. 단순히 술의 영향을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으로 구분 짓는 대신, 술이 지닌 복합적인 특성과 그 이면을 섬세하게 들여다본다. 술은 억눌린 감정을 해방시키고 자신감을 불어넣는 도구가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면의 공허함을 더 깊게 파고들며 현실을 도피하게 만드는 위험한 자극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처럼 술이 주는 해방감과 파괴력, 그 상반된 성질 사이의 긴장감을 유지하며, 현실적이면서도 때로는 환상적인 방식으로 술과 인생을 조명한다. <어나더 라운드>는 술과 삶을 다층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찬사와 경고의 경계선에 서 있는 작품이다.
일상의 권태
니콜라이, 마틴, 피터, 토미 4명의 주인공들은 모두 중년 남성으로, 같은 고등학교에 교사로 근무하고 있다. 의욕 없는 학생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이들은 삶의 권태를 느낀다. 일터에서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의 갈등과 무기력함 속에서 이들은 삶에 좋은 자극을 줄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데, 니콜라이는 “인간에게 결핍된 혈중 알코올 농도 0.05%를 유지하면 적당히 창의적이고 활발해진다”는 흥미로운 가설을 내세운다. 결국 그들은 지속적으로 적당량의 술을 섭취하며 이 농도를 유지하는 음주 실험을 시작한다. 일상에 환기를 누구보다 바랐던 이들에겐 이건 단순한 실험이 아니라 어느새 식어버린 열정과 지나버린 관계들을 향한 간절한 몸부림이었을지도.
'생략'을 통해 표현되는 삶의 이면
인물들의 개인적인 배경이나 고통은 구구절절 설명되지 않는다. 대신 짧은 장면, 대화, 표정 속에서 그들이 처한 상황이 암시된다. 마틴과 아내의 갈등, 그가 느끼는 가족 관계에서의 소외감은 오히려 술을 마시기 전보다 술로 인해 망가진 이후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영화 초반에서 관객들은 마틴을 비롯한 주인공들이 술에 집착하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오히려 이렇듯 절제된 방식으로 그려내었기 때문에 그들이 겪는 삶의 고단함이 너무 개인적인 문제로 축소되지 않는다. 모두가 타인의 고통과 고민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듯이, 절제된 표현을 통해 비춰지는 삶의 조각들을 통해 영화는 소외감과 무력감 같은 개인적인 감정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감정으로 자연스럽게 이끈다.
입체적인 캐릭터로 다시금 강조되는 '술'의 양면성
영화에는 4명의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만, 그 중 가장 중심으로 서사가 다루어지는 인물은 마틴이다. 그는 역사 교사로 일하고 있으나 아이들과 부모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으며 무기력한 일상을 살아간다. 가족 관계에서 소외감을 느끼며 특히 아내와의 갈등도 자주 비추어진다. 처음에는 술을 마시는 것에 가장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초반에는 운전을 이유로 술자리를 거절하지만 친구들의 권유에 술을 마시며, 억눌렸던 즉흥적이고 생기 있는 면모를 드러낸다. 이후 친구들과 음주 실험을 하며 가장 먼저 농도를 높이고, 학교에서 몰래 마시는 방법을 고안하는 등 때론 주저하고 때론 대담한 모순적인 인물이다. 이렇듯 술에 늘 호의적이지 않는 그 누구라도 술의 유혹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하였듯 이 영화는 술에 대한 경고를 하면서도 술이 주는 해방감과 자유로움, 알코올이 선사하는 ‘환각’의 황홀함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심리학 교사인 니콜라이는 육아와 가정에서 오는 스트레스, 그로 인한 번아웃을 겪고 그가 처음 제안한 음주 실험에 빠져든다. 술로 점점 망가지는 삶들을 보며 실험의 위험성과 한계를 직접 겪고서도, 알코올이 주는 긍정적인 효과(불안 완화, 긴장 해소)를 끝까지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특히 영화 후반부 의대 진학에 실패할거라며 불안해하며 자책하는 학생에게 니콜라이는 몰래 술을 권하고, 학생은 술을 마시고 성공적으로 시험에 임한다. 술의 파괴력을 직접 겪고도 술의 힘을 믿는 니콜라이를 보며 술이 인간에 미치는 다양한 영향에 대해 생각해보게한다.
사실은 본래 가지고 있던 것
실험을 통해 인물들이 술을 마시면 수업이 잘 된다거나, 인간관계가 개선되고 자신감이 생겨보이는 듯 하지만 영화는 “그 가능성들은 본래 그들 내면에 존재했던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마틴이 단순히 술을 마셔서 수업이 재미있게 변한걸까? 기분 좋은 환각으로 자신감을 북돋아준 것 뿐, 결국 그 역사적 지식이나 아이들을 리드하는 능력은 잠재되어있던것일 것이다. 체육 교사 토미의 아이들을 위하는 따뜻한 마음, 음악 교사 피터의 아름다운 하모니를 향한 염원, 심리학 교사 니콜라이의 학생을 응원하는 마음 -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이들의 내면에 이미 존재했던 것들이다. 술은 단지 자극제로 존재할 뿐, 변화의 본질은 결국 내면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 영화는 ‘술’이라는 도구를 단순히 긍정적 혹은 부정적으로 이분법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 우여곡절을 겪고서도 영화는 술을 마시는 청춘과 중년의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오프닝에서는 축제를 벌이는 청춘이 느끼는 해방감과 자유를, 엔딩에서는 중년의 주인공들과 졸업하는 학생들이 함께 술을 마시며 서로의 삶을 응원하며 축복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어쩌면 이는 술이 인생의 파편 속에서 어떻게 다른 의미로 작용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게 아닐까.
죽음과 이별과 같은 어둠이 있더라도 ‘살아있는’ 감정과 관계를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적인 여운을 남기며,
영화는 다시 잔을 올린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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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팜 스프링스 (2020)
* 본 리뷰는 <팜 스프링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팜 스프링스 (2020)
감독: 맥스 바버카우
출연: 앤디 샘버그, 크리스틴 밀리오티, J.K 시몬스
장르: 로맨스, 코미디
러닝타임: 90분
배급: Hulu (훌루)
개봉일: 2021.08.19 (한국)
휴양지 결혼식, 갇혀버린 두 사람
11월 9일은 팜스프링스 리조트에서 신랑 '에이브'와 신부 '탈라'의 결혼식이 있는 날. 신부 탈라의 친구 '미스티'의 남자친구로 결혼식에 참석한 '나일스(앤디 샘버그)'는 결혼식에서 좌중을 압도하는 축사를 남기며 파티를 유유자적 즐긴다. 마치 이 날을 처음 겪는 게 아닌 사람처럼. 동생의 결혼식에 큰 흥미가 없던 언니 '세라(크리스틴 밀리오티)'는 나일스와 대화를 하며 그에게 끌리게 되고, 뜨거운 하룻밤을 보낼 뻔한다. 동굴 근처에서 사랑을 나누던 사이 갑자기 누군가 나일스에게 화살을 쏘며 죽일 듯이 쫓아오고, 나일스는 그와 함께 동굴로 빨려들어간다. 세라는 영문 모를 상황에 나일스를 걱정하며 동굴로 따라가게 되고, 결국 세라는 나일스와 함께 무한 반복되는 하루에 갇히고 만다.
뻔한 소재를 유쾌하게 비트는 재주
스릴러, 판타지, 로맨스, 코미디 장르를 불문하고 숱한 영화의 소재로 활용되었던 '타임루프'는 어느덧 식상해져버린 주제다. 세부적인 줄거리에만 차이가 있을 뿐 타임루프물은 기본적으로 죽음 혹은 잠이라는 장치로 하루가 무한 반복되는 동일한 플롯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해피데스데이>, <러시안 인형처럼>과 같은 작품에서처럼 반드시 죽어야만 하루가 리셋되는 것은 아니지만, <팜 스프링스> 역시 결혼식 당일이 무한반복되는 스토리가 메인이기 때문에 소재 한정으로는 신선함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소재의 한계가 지닌 약점을 가볍고 유쾌한 리듬감으로 보완하며 고전적인 플롯에 근래의 감성을 더한다. 세라가 타임루프 세상에 들어오게 되면서 두 주인공은 환장의 케미를 보여주는데, B급 코미디 영화를 연상케 할 정도로 유머가 풍성하다. 사실상 난장판에 가까운 극 중반부는 판타지 코믹 활극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다채롭고, 인물들에게서는 생동감이 넘친다. 극의 공간적 배경 또한 휴양지 리조트라는 작은 공간으로 제한적이지만, 빠른 속도감을 통한 연출로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며 지루함을 탈피한다. 뻔한 소재를 활용한 작품임에도 평단의 호평을 받은 이유는 이와 같은 내러티브의 신선함 때문일 것이다.
양산형 B급 코미디 영화와의 차별점
그렇다면, <팜 스프링스>는 그저 단순하게 웃기기만 한 영화일까? 만일 본작이 여타 B급 코미디 영화들처럼 맥락 없이 웃기는 데만 집중했다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극은 중반까지 오늘만 사는 인생을 즐기기 시작한 주인공들의 코믹한 기행이 중심이지만, 이와 같은 생활에 일명 '현타'를 느낀 세라의 심경 변화를 기점으로 영화의 메시지는 달라진다. 매일매일이 반복되는 평화로운 하루에서 유유자적 하고 싶은 나일스와 달리 세라는 자신의 정상적인 삶을 되찾고자 애쓴다. 양자물리학을 전투적으로 공부하며 스스로 탈출구를 찾으려는 설정은 소재의 클리셰를 깨부수며 신선함을 더한다.
무엇보다 세라는 나일스처럼 휴양지에서의 편안한 하루가 반복되는 삶에 안주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자신의 심리적인 고통과 마주하며 다시 제대로 살아보기로 결심한다. 죽지도, 아프지도 않는 영원한 삶을 두고 고독과 허무를 실감하며 시간이 흘러가는 현실을 택하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다. 영화의 코믹함과 가벼운 전개에 묻혀 인물들의 고뇌가 심각하게 그려지지는 않지만, 영원과 무릉도원 같은 삶이 능사가 될 수는 없으며 누군가와 함께 새로운 인생을 만나며 살아가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가치관을 전한다. 다소 철학적으로 흘러갈 수도 있는 내용이지만 영화가 가진 청량한 리듬감을 잃지 않으며 메시지를 무겁지 않게 풀어낸다. 따라서 아무 생각 없이 볼 수 있는 팝콘무비로 소비될 영화는 아니라고 본다.
배우들의 빛나는 연기력
주연과 제작을 맡은 '앤디 샘버그'는 SNL의 크루 출신으로 유명한데, <팜 스프링스>에서만큼은 그보다 여주인공 '세라'를 연기한 '크리스틴 밀리오티'의 연기력이 상대적으로 돋보인 것 같다. 무언가 사연이 있어 보이는 듯한 울적한 표정부터 타임루프를 만끽하며 난동을 부릴 때의 광기, 그리고 환히 미소지을 때의 사랑스러움까지. 90분이라는 비교적 짧은 러닝타임의 영화이지만, 그 시간동안 다면적인 성격을 지닌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그려내며 극에 활력을 더한다. 코미디로는 빠지지 않는 '앤디 샘버그' 옆에서도 코믹 연기로 우위를 점했다는 것은 '크리스틴 밀리오티'의 열연이 돋보였음을 알 수 있는 지점이다.
물론, '앤디 샘버그'의 존재감이 미약했던 것은 아니다. 하와이안 셔츠와 맥주캔을 들고 다니며 느긋하고 낙천적인 행동들을 영락 없는 타임루프에 갇혀 무념무상이 된 인물 그 자체다. 한량 같은 나일스와 행동력 강한 세라의 정반대의 성격이 대비됨으로써 두 인물의 조화는 더욱 빛을 발하고, 마치 SNL 크루로 오랫동안 호흡을 맞춘 것마냥 기량을 맘껏 발휘한다.
*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언론 시사회에 초청 받아 작성한 게시물입니다 *
- 씨네랩 크리에이터 popofil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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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청춘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영화의 제목이자 핵심인 문장이다. 우리는 어디에 있을까. 또는 대체 우리는 누구일까. 약 6분 내외의 단편영화지만, 그 짧은 시간에 많은 의미들이 영상 속에서 부유하고 있다.
단편영화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는 단 두 명의 인물로만 흐름을 전개한다. 단편영화의 특성이나 한계가 명확하기에 적은 인원을 사용하지는 않았을까, 생각할 수 있다. 평론을 하는 입장에서 그것을 정확히 파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겠지만 그 부분이 사실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주목해야 하는 것은 단편영화가 가지는 그 한계점을 '적은 인원으로도 관객에게 충분히 소구 가능한' 이야기로 타파해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와 식물들의 관계에는 무엇이 있는가
비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과거가 있다. 그것도 아름다우면서도 슬픈 사랑의 과거가 있다. 청춘에 사랑이 빠질 수 있으랴. 우리는 한 아파트의 야외에서 우산을 펼치고 비를 맞으며 쪼그려 앉아 있는다. 첫 카메라 앵글에서 우리는 정말 비를 맞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이내 미래가 뿌리는 '가짜 비'라는 것을 관객은 알게 된다. 우리는 왜 비를 맞고 있나.
러닝타임 내내 영화 곳곳에서 식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종류는 다양하다. 토마토, 딸기 모종, 몬스테라. 미래는 우리에게 토마토를 준 적이 있고, 우리는 토마토를 기른 적이 있다. 토마토는 햇빛과 물만 있으면 쉽게 자란다. 우리도 그걸 알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애써 그 사실을 부정한다. 그 토마토 화분을 버린 적도, 그렇다고 기르지 않은 적도 없지만 열매가 맺는 것은 우리와 다른 상황에 놓여있는 것이 된다. 우리는 아직 비를 맞고 싹을 틔우지 못한 상황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 슬픈 사랑의 과거가 자기 자신의 성장을 저해하는 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 싹도, 햇빛도 들지 못한 마음에 열매를 맺은 토마토를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을까.
미래는 그런 우리에게 희망을 심는다. 지금 마음이 어떨지 몰라도 심고 기르다 보면 마음이 편해진다고. 우리의 마음에 볕을 들게 하라는 듯이 말을 건넨다. 미래의 할머니가 미래에게 전한 말이기도 하다. 우리의 시간보다 곱절은 더 많은 시간을 보냈을 할머니의 말을 잘못됐다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 말을 듣고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미래가 기르는 몬스테라는 방 안에서 길러지고 있다. 인공조명의 도움으로 빛을 받고 자란다. 어쩌면 우리와 비슷한 모습으로 보인다. 우리는 스스로 물을 받아내지 못해 위층에서 미래가 물을 뿌려주어야만 하고, 스스로 마음에 빛을 들이지 못해 미래에게서 위로되는 말들과 조언을 들어야만 한다. '답답하지 않을까'. 우리가 몬스테라를 보고 처음으로 꺼낸 말이다. 일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진다. 우리와 미래는 몬스테라 화분을 방에서 끄집어내고, 계단을 통해 내려보내고, 끌차로 끌어 햇빛을 보게 하려 한다.
급한 마음에 사고가 잇따르는 것은 필연일까, 우연일까. 그 과정에서 몬스테라가 심어져 있는 화분이 떨어져 깨지고 만다. 깨진 화분을 들고 갈 수는 없다. 끌차에 올려 끌고 갈 수도 없다. 몬스테라를 심었던 그 흙들은 이미 모두 깨진 화분의 틈새로 새어 나와 주워 담을 수 없게 된다. 우리와 미래는 결단해야 한다.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결국 몬스테라를 봉지에 담아 바깥에 아주 심기로 택한다. 인공조명과 미래가 주는 물로 애써 생명을 이어가던 몬스테라는 이제 자유로이 빛을 받고 물을 머금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우리가 있다. 우리가 몬스테라에게 그 기회를 주었고, 직접 몬스테라를 이고 가 심어준다.
우리에게도 그럴 기회가 있어야 할 것이다. 직접 빛을 받아야 할 것이고, 직접 물을 머금을 기회를 가져야 한다. 그 누구도 인공적으로 도움을 준대도, 직접 하지 않으면 그 어느 것도 온전히 자기 자신의 양분이 되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미래에게 의존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도 우리의 힘으로 자유롭게 방향과 양분을 찾아야 한다.
과거는 오래 간직해도 좋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 그 위에도 결국 다시 싹이 튼다고 한다. 어떤 과거에도 새로 싹은 트고, 삶은 다시 한번 새롭게 트여 계속해서 돋아날 것이다.
단순히 작 중의 우리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 즉 '우리'에게도 통하는 말이다. 사랑과 이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모든 시도에는 실패가 따르기 마련이고 좌절이 있기 마련이다. 주변에서 건네는 위로와 조언들이 많겠지만 언제까지나 그 인공적인 것들에 의존하며 살 수는 없다. 우리의 삶이 우리만의 것이듯, '우리'의 삶도 '우리'의 것이니까.
많은 좌절과 실패 끝에는 자기혐오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 또한 필연적인 것이다. 불행한 운명이라면 운명이라 하겠지만, 현시대의 인간이라는 존재는 계속해서 그 틀을 깨고 부숴 나아가야 한다. 어떤 형태의 과거이든 간에 그 위에 새로이 싹을 틔우고 돋아나게 해야 한다. 그렇게 나아간다.
영화의 종반부에서 재미있는 구도를 보여준다. 바로 우리가 카메라에 직접 물을 뿌려 주는 것. 우리는 몬스테라에게 물을 줬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왜 그 모습을 보는 '우리'에게 주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우리가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는 감정을 느끼는 몬스테라에 물을 뿌려주는 것처럼, 결국 '우리'도 '우리'에게, 정말 '우리' 스스로가 아니더라도 동일시할 수 있는 것들에 힘을 주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안에 있는가 바깥에 있는가. 안에 있다면 바깥으로 가야 하는가. 바깥에 있다면 안으로 가야 하는가. 그 어느 곳에도 정답은 없지만, 안에 있다가 보면 바깥으로 나가야만 하는 순간이 오고, 바깥에 있다 보면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순간이 온다. 마치 작 중에 등장하는 몬스테라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몬스테라이고, 몬스테라는 우리다. 몬스테라는 바깥에 없다. 바깥에 없다는 것은 직접 무언가를 쟁취할 수 없다는 것이 된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된다. 우리의 마음도 바깥에 없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는 그 속에서 변화할 기회를 모두 놓친다. 우리 또한 몬스테라처럼 그렇게 야외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그 메시지는 영화의 끝에서 몬스테라가 심어지게 되는 그곳, 자유롭게 햇빛을 쬐고 물을 머금을 수 있는 그곳이지 않을까. 실내에서만 지내던 몬스테라가 야외에서 어떻게 잘 살아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영화에서조차 그 이후의 이야기는 다루지 않는다. 그래도 우리는 몬스테라에게 물을 준다. 우리 자기 자신도 미래도 서로를 그렇게 믿고 방치해야만 한다. 사랑이 오면 떠나가야 하는 순간이 온대도, 모든 시도에 실패와 좌절이 따를 수밖에 없대도 직접 뿌리내리고 고개를 치켜들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게 진정한 삶이고, '우리'를 향한 애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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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일대학교 사진영상학부 학생들의 단편영화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는 유튜브에서 관람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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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 첩보물의 문법 속에서 현실 액션을 담다
고전 첩보물의 문법 속에서 현실 액션을 담다
영화 <브릭레이어> 리뷰감독] 레니 할린
출연] 아론 에크하트, 니나 도브레브
시놉시스] CIA의 최고의 요원들이 연이어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하고, 브릭레이어라는 별명의 전설적 존재로 불리우던 전직 CIA 요원 ‘스티브 베일’을 다시 불러들인다. 베일은 현직 CIA 요원 ‘케이트 배넌’과 파트너가 되어 사라진 요원들을 추적하지만 예상치 못한 반전과 갈등에 휘말리게 되는데.. 과연, 베일은 자신의 과거와 싸우며 적들을 제압하고, CIA의 존폐를 위협하는 숨겨진 적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 운명을 걸고 펼쳐지는 치열한 추적과 반전의 연속 모든 것을 걸고 싸워야 하는 순간이 다가온다.
#스포일러 유의#
익숙하지만 안정적이었던 무난한 연출브릭레이어는 진직 CIA 요원이 다시 작전에 투입되면서 벌어지는 고전적인 서사의 틀을 따른다. 익숙한 구조지만 전개 자체는 비교적 탄탄하게 짜여 있어서 액션을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몰입을 방해하지 않는 수준이다. 초반에 인물과 배경들을 빠르게 소개하고, 위기와 반전을 잇다라 배치함으로서 전형적인 리듬감 있는 액션 영화의 전개를 따르고 있다.
다만 이야기의 전체 흐름은 액션 장르의 팬이라면 예측가능한 수준이었다. 반전도 일정 부분 예상 가능했고, 악역의 정체나 도기 역시 참신함 보다는 관습적인 설정에 가깝다. 하지만 이러한 틀 속에서도 사건 간 인과성이나 각 캐릭터들의 동기가 논리적으로 맞물려 있어서 허술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이러한 액션 영화에서는 가장 큰 약점이라 한다면 여성 캐릭터일 것이다. 영화 브릭레이어 역시 정보 제공자 및 위기 유발자로서 입체적 성격이 부여되지 않고 주인공 스티브 베일을 보조하는 데 그치고 있어 이 부분은 조금 아쉬웠다.
현실적인 액션과 주제를 담다주인공 스티븐 베일은 헐리우드 첩보물에서 자주 등장하는 트라우마를 지닌 은퇴 요원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다. 레니 할린 감독은 화려한 CG나 과장된 액션 보다는 현실감과 타격감이 느껴지는 연출을 선택했다. 요즘 첩보 액션 물에서 보기 드문 연출이었다. 특히 총격전과 근접 전투 장면은 관객으로 하여금 통쾌함과 짜릿함을 느끼게 해줄 정도였다.
현실감 넘치는 액션 속에서 영화는 주인공 베일의 내면 속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조명한다. 베일은 다시 현장에 복귀하면서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갈등한다. 베일은 평범한 삶을 살고자 하지만 자신의 과거가 만든 파급력으로 인해 다시 그를 현장으로 끌어드린다. 영화는 이를 통해 국가 안보라는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개인이 희생되고 있는지 그리고 그 희생이 정당화 될 수 있는지 묻는다. 영화는 노골적으로 이 주제를 드러내진 않지만 베일의 내면 묘사와 갈등 속에서 관객들이 이를 느낄 수 있도록 배치해 두었다.
<영화 브릭레이어>
- 개봉 : 2025. 5. 28. (수)
- 한줄평 : 현실감 있는 액션과 익숙한 서사 속 내면 갈등을 조화롭게 그린 정통 첩보 액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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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도 면허처럼, 드라이빙 스쿨.
이태경 배우님을 비롯한
여러 배우님들의 열연으로 더 빛났던
단편영화를 소개합니다.
삶도 면허도 뭔가 금방 해낼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쉽지 않은 그런 상황을 잘 표현한 영화인데요.
바로 드라이빙 스쿨 입니다.
적절한 거리와 너무 붙잡지 않아야 잘 나아갈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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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쥐려는 마음이 오히려 빠져나가게 만든걸까요
최선은 최선을 다하지만 모든 것을 쥘 수 없었습니다.
직업도, 연애도, 면허도.
마지막 기회로 이 모든 것을 다시 쥘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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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WIFF 데일리] 어쩌면 나만 섬인가봐
* 제목은 타블로의 노래 <airbag>에서 인용
절해고도(A Lonely Island in the Distant Sea)
감독 : 김미영
상영시간 : 110분
시놉시스 : 20대 때 청년조각상을 받았지만 지금은 인테리어 업자로 살아가는 40대 이혼남 윤철에게 10대 딸이 있다. 미술가로 장래가 촉망되던 딸이 어느 날 절에 들어가 스님이 되겠다고 한다. 윤철도 한때 예술가로 성공하지 못하면 신부나 스님이 되겠다고 생각했었다. 윤철은 자신이 꿈만 꾸고 가지 못한 길을 딸이 가는 것 같아 인생을 도둑맞은 것 같은 느낌이다.(출처: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우스갯소리로 예술하는 남자는 절대 만나지 말라고 한다. 소위 대박이 터지기 전까지 생활의 궁곤함은 차치하고, 기질적인 예민함과 높은 이상, 비대한 자의식이 가까운 사람을 괴롭히기 때문일 거다.
장점과 단점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 같은 것이라 장점도 았다. 예민한 사람들이 가진 다정함과 배려심, 감각적인 표현과 시선 같은 것들, 먹고 사는 문제나 돈 벌 궁리 말고 다른 이야기들을 밤새워 할 수 있다는 새로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건 내가 전공자이기 때문이다.
<절해고도>는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 혹은 작업하는 사람의 이야기, 예술과 재능과 운에 대한 이야기다. 먼 바다에 있는 외로운 섬, 한때는 유배지를 절해고도라 불렀다.
너무 멀리 있어서 눈에 보이지만 다다를 수는 없는 섬이 있다. 그런 섬을 상상해보자. 먼 바다 끝에 보물섬이 있다. 어떻게든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무리 헤엄을 쳐도 닿지를 않고 배를 타고 갈 수도 없다. 그 섬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미 거기에 있다. 어쩌면 그 섬에서 태어났을지도 모른다.
20대에 청년조각상을 한 번 받은 후에 그렇다할 작업물 없이 인테리어 업자로 살아가는 윤철에게 현업 조각가의 꿈은 먼 바다의 섬 같다. 한때 자기보다 못했던 후배도 개인전을 여는데, 조금만 하면 될 것 같은데.
아버지와 딸은 거푸집에서 찍어낸 듯 닮기도 한다. 나도 그렇고 내 친구들도 그렇고 야구선수 이대호의 딸도 그렇고 윤철의 딸 지나도 그렇다.
지나는 미술에 재능이 있는 아이다.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종종 그렇듯 질투와 시기의 대상이 된다. 하필이면 질투는 경쟁자들보다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한다. 때로는 가족이, 때로는 가장 친하다고 믿었던 친구가.
같이 그림을 그리던 친구가 남긴 '쓰레기'라는 댓글은 예술하는 19세 청소년에게는 감당하기 버거울 만큼의 무게를 지닌다. 지나는 예술가이므로 자기 감정을 학교 블라인드에다가 표현해놓고 학교를 떠난다. 그림이 너무 잔혹했기 때문에 학교 선생은 지나의 부모를 호출한다.
학교에서 선생을 만나고 돌아온 윤철은 지나에게 '그림에 재능있기가 쉽지 않다'는 말만 주구장창 한다.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고 스님이 되겠다는 지나를 보며 한때 자기도 종교에 귀의하고 싶었던 것을 떠올린다.
그러나 금우스님의 말처럼, 윤철은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다. 지나는 윤철이 멀리서 보기만 해야 했던 그 섬에서 태어난 아이다.
지나는 머리를 깎고 '행자 도맹'이 된다. 이제 윤철과 지나의 관계는 부녀에서 행자-거사의 관계로 바뀐다. 이들은 남남처럼 서로 존대하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다.
윤철은 더 이상 인테리어 소품을 만들지 않고 국숫집을 꾸린다. 술도 팔지 않는 국숫집이다. 매일 똑같은 시간에 가게 문을 열고 국수를 삶는 일은 행자의 수행과 다름없다. 이 부녀는 요원한 섬을 꿈꾸며 허우적거리는 대신 고독한 수행자가 되는 방식을 택한다.
절해고도는 유배지의 다른 이름이었다. 컨테이너 작업장에 스스로를 유폐하는 삶과 시장으로 나가 국수를 삶는 삶 중 어느 쪽이 폐쇄적인가를 생각해보면, 어쩌면 윤철은 유배를 마치고 돌아온 쪽에 가깝다. 이전에는 어울리지도 않는 자리에 끼지 못해 좌절감과 자격지심으로 괴로웠다면 이제는 잘 맞는 옷을 찾아 입은 셈이다.
이번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 <러빙 하이스미스>라는 제목의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관련 다큐멘터리 영화가 상영된다. 영화 <캐롤>과 <리플리>의 원작으로 유명하다. <당신은 우리와 어울리지 않아(민음사, 2009)>라는 제목의 단편집이 있는데, 러닝타임 내내 '어울리지 않는 사람'에 대하여 생각했다.
김미영 감독은 영화에서 '관계를 통한 성장'에 방점을 찍었으나 윤철과 매우 긴밀한 관계였던 영지(강경현 분)의 존재는 이 텍스트와 어울리지 않아 생략했다. 관계보다는 작업하는(만드는) 인간으로서의 윤철에게 더 집중했다. 나는 윤철과 비슷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영화 초반 지나는 윤철에게 "평생 그렇게 살"라고 가시돋힌 말을 던진다. 그러나 모두가 자기 자리를 찾아갔을 때, 마침내 윤철도 자기 자리와 할 일을 찾았으므로 절해고도 같은 유배지에서 벗어나게 된다. 평생 그렇게 사는 게 아니라 다르게 살기 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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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2022년 8월 27일 | 16:00 - 17:50 /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5관
2022년 8월 29일 | 19:30 - 21:20 /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6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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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
스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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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은선이라는 친구가 두 명 있었다. 있었다고 하는 이유는 한 명이 개명을 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한 명밖에 없다. 나는 은선이들을 볼 때마다 실버라이닝을 생각했다.
구름에 가려진 햇빛이 만들어내는 가느다란 은색 선은 먹구름으로 가득한 하늘이 곧 갤 거라는 희망이다.
보통 이름에 쓰는 '은'자는 은혜 은(恩)자가 많을 테지만 아무렴 어떤가.
그레이스 라이닝이든 실버 라이닝이든, 아무튼 실제로 아직까지 은선이인 은선이는 먹구름 뒤 실버라이닝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언제나 조금 다른 아이였다. 다르다고 말하니 나에게 무척 관대한 기분이 든다.대학생활을 하면서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던 취업 준비나 스펙 쌓기 같은 유익한 것에는 하등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내일 같은 것을 생각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을 아무렇게나 사랑하고, 쉽게 상처받으며 휘청거리며 걸었다.
그때 은선이가 있었다.
팻은 정신병원에서 퇴원한다. 아내와 불륜 관계였던 학교 선생을 시원하게 패버리고 아내인 니키에게 접근금지 및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병원에서 긍정적인 태도로 최선을 다 하면 한 가지 빛을 얻을 수 있다고 들었으니 긍정의 힘을 믿으며 다시 아내와 만날 거라고 생각한다.
감정 통제가 되지 않는 그에게 아내를 만나게 해줄 리가 없다. 불륜도 폭력도 문제이니 어느 쪽 편도 들기 어렵지만.
친구 로니의 저녁식사에 초대된 팻. 친구의 처제 티파니도 그곳에서 만난다.
(로니의 아내 베로니카 역으로 나오는 줄리아 스타일즈의 모습과 목소리가 반갑다. <너를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에서 본 캣의 얼굴 그대로에, 나이만 들었다. 매력적인 배우다)
식사 중 언니의 말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티파니, 집에 데려다준 팻에게 나한테 마음 있는 거 다 안다, 같이 자자고 하지만 팻은 거절한다.
팻의 뺨을 후려치는 티파니의 감정기복을 보통 사람들은 따라가기 어렵다.
그런데 이런 사람 제법 봤다.
영화여서 극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별 생각 없고 뜻도 없이 남자들을 만나고, 자는 사람들. 표면적으로만 보면 욕 먹기 쉽고, 욕 하기도 쉬운 사람들이다.
티파니도 자신을 "미친 과부 걸레"라 부른다.
그 말을 들은 남자, "나중에 술 한잔 할래요?"라는 말은 한번 자보겠다는 거다. 티파니는 아마 왕왕 그랬을 터.
그들의 기저에는 사랑으로 인한 상처가 있다. 그 전에는 손에 쥐면 부서질까 두려울 만큼 소중한 사랑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외부적 요인으로 깨지는 순간 그토록 소중하게 여겼던 사랑이 이렇게 가치없는 것임을 증명해야만 덜 상처받는다.
아무튼 티파니도 남편과 사별했다. 팻은 굳이 티파니에게 남편이 죽은 이야기를 계속 한다.
팻은 저돌적으로 접근하는 티파니에게 절대 넘어가지 않는다.
비닐봉지를 덮어 쓰고 달리기를 하는 또라이지만 아내를 향한 사랑은 일관적이다.
이 또한 일반적인 사랑은 아니다. 아내는 이미 떠났고, 그는 아내와 떨어져 지낸 지 1년이 다 되어 간다.
형태도 없고 목소리도 들을 수 없는 아내를 마냥 기다리고 사랑하는 팻. 집착도 사랑이라면 사랑이다.
옛날 집과 직장을 찾아갔다가 경찰이 오기도 하고, 아직도 결혼식 음악이나 아내와 관련된 것들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결혼식 비디오가 없어졌다고 새벽 3시에 온 집을 뒤지고 난리를 치며, 아내는 이용당한 거라고 피해망상에 빠진다.
난리를 치고는 또 미안하다고 울먹이는 것까지 너무나 핍진하다.
여기서 이웃 사는 남자애는 진짜 끔찍한데, 과제를 한다며 조울증 환자를 인터뷰하려고 하고 소동이 벌어졌을 때도 카메라를 가지고 나타난다.
우울증 환자를 보는 사회의 여러 가지 반응 중 하나다. 동정, 공포, 호기심 등등.
그런 팻에게 티파니가 불쑥 나타나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지 않아도 감정을 통제하고 흥분하지 않아야 하는데, 우울증이나 감정조절에 문제가 있는 사람은 변수를 통제하기 어려워한다.
티파니도 오기가 생긴다. 다른 남자들은 자자고 꼬시면 오케이였는데, 이 남자는 안 된다. 무슨 짓을 해도 안 된다.
결국 이 남자의 트리거인 아내에 포인트를 맞춘다. 아내에게 편지를 전해주겠다는 것.
하지만 조건이 있다. 자신과 함께 댄스 대회에 나가는 것.
자기를 아내 니키라고 생각하고 춤추라는 티파니, 춤이라고는 춰 본 적도 없는 팻.
처음부터 스텝이 엉키지만 둘은 감정의 교감부터 시작해서 조금씩 춤을 맞추어 나간다.
한편, 강박증 환자인 팻의 아버지는 팻이 있어야만 풋볼팀 이글스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글스에 배팅을 하기 때문에 더욱 예민하다.
겨우 팻을 설득해서 직관을 가지만 팻은 결국 거기서 도발하는 상대팀 팬을 또 시원하게 패버린다.
우리의 팻. 팰 때는 가차없다. 정신을 놓고 팬다.
집으로 돌아와서 가족들에게 사과하는 중에 제대로 열받은 티파니까지 찾아온다.
팻은 티파니와 만나기로 해놓고 말도 없이 약속을 어겼다.
티파니는 그의 탓을 하는 팻의 아버지에게 미신과 징크스에 대해 조곤조곤 반박하는 데 그치지 않고, 노름쟁이 팻 아버지의 돈을 다 따간 영감에게 '묻고 더블로' 배팅을 하자고 한다.
풋볼 대회에다가 댄스대회 점수까지. 10점 만점에 5점을 받으면 팻 아버지의 승리다.
누구라도 이기기만 하면 대박날 이중 배팅이다.
12월 28일, 댄스대회에 출전한 두 사람. 예상했듯이 그 대회에 팻의 전부인 니키도 온다.
팻과 티파니는 무대에서 지금까지 갈고닦은 기량을 선보인다.
심사위원 의점수는 정확히 5.0. 이글스도 이긴다.
가족과 친구들의 응원과 티파니와 승리의 기쁨을 누리는 것도 잠시, 팻은 니키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니키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인다.
티파니는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티파니를 쫓아 나간 팻은 티파니에게 편지를 건넨다.
팻은 지금까지 니키가 쓴 답장이라고 줬던 편지들을 다 티파니가 썼다는 걸 알고 있었다.
드디어 두 사람은 피해망상의 구름 위에서 현실로 무사히 착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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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는 팻이 니키의 귀에 대고 무슨 말을 하는지 나오지 않지만 아마도 "티파니가 나를 이렇게 멋지게 바꾸어주었다"는 내용이 아닐까 싶다.
우울증은 흔한 병이다. 누구든 상처를 받으면 마음을 다칠 수 있다. 상처를 안 받아도 기질적으로 그럴 수도 있다.
우울증이 있거나 우울증이 있는 가족이 주위에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정답을 아는 사람은 없다.
팻의 주치의 말처럼 약을 꾸준히 먹고 계획을 세우는 것. 그것도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함부로 말할 수는 없으나 우울증은 일부 유전적인 면도 있다.
문제가정처럼 비치지 않아도 도박중독에 강박증(아마도 도박 중독으로 인한 강박증이겠지만) 아버지, 영화 내내 수동적인, 겁먹은 듯한 어머니 아래에서 팻이 감정적으로 조금 미숙할 수도 있다.
가정에서부터 우울증의 토대가 깔린 시나리오였다면 가정을 조금 더 극적으로 보여주었겠지만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은> 환자에 집중한 영화이다.
악화일로였던 팻과 티파니의 상처는 상처받은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함으로써 극복된다.
사랑이 남녀간의 사랑일 필요는 없을 테고, 어떤 종류의 사랑이든 사랑은 사람을 바꾼다.
"우리가 제일 잘 하는 게 사랑"이라는 영화 <마미>의 대사가 나를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쉽게 많이 사랑해버릇하고 쉽게 다치고 상처받는 내 사랑도 이제는 특기라고 말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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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랜75 - 또 다른 의미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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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영상은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써 2월 8일 개봉하는 '플랜75'의 개봉전 시사회를 다녀온 뒤 제작된 영상입니다]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가까운 미래의 일본. 청년층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정부는 75세 이상 국민의 죽음을 적극 지원하는 정책 '플랜 75'를 발표한다. 명예퇴직 후 '플랜 75' 신청을 고민하는 78세 여성 '미치' 가족의 신청서를 받은 '플랜 75' 담당 시청 직원 '히로무' 개인별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플랜 75' 콜센터 직원 '요코' '플랜 75' 이용자의 유품을 처리하는 이주노동자 '마리아' '플랜 75'의 세상,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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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봄, 디즈니와 픽사가 선사하는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로 여러분을 소환합니다?? 지구 소년 '엘리오'의 은하계 모험 [엘리오] 티저 예고편 대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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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는 다정한 남편, 8살 아들 ‘테오’와 함께 산다.
옆집에 사는 이웃 ‘셀린’에게도 남편과 8살 아들 ‘막심’이 있다.
자매처럼 친한 친구로 서로의 아들을 아끼는 ‘알리스’와 ‘셀린’.
어느 날 ‘막심’이 실수로 지붕에서 떨어져 죽고
‘셀린’은 이 사고를 목격하고도 막지 못한 ‘알리스’를 원망한다.
한편, ‘막심’을 구하지 못한 죄책감에 사로잡힌 ‘알리스’는
아들 ‘테오’와 가족들에게 안 좋은 일이 연달아 발생하자
급기야 ‘셀린’이 자신에게 복수를 꾀한다는 의심의 굴레에 빠진다.
완벽한 삶은 비극적인 사고로 사라지고
깨져버린 두 사람의 관계는
결국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