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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을 대하는 태도
죽음을 떠올리면 두려움이 느껴진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우리는 그 죽음을 잊고 삶을 살아간다. 죽음이 느껴지는 순간은 누군가 다른 사람의 장례식장에 가거나 큰 사고를 당하는 순간들일 것이다. 잊고 지내다가 그런 순간을 맞이하면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순식간에 두려움이 마음을 가득 채우고 죽음을 피하려 무척 조심하게 된다. 모두에게 결국 찾아오는 죽음은 두려운 존재이지만 그렇게 아주 가끔만 우리를 괴롭힌다.
만약 나의 목숨이 여러 개라면 죽음을 두려워하게 될까. 죽음은 나라는 존재의 소멸을 의미하기도 한다. 완전히 소멸해 버린다는 두려움은 살아있는 모든 존재에게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죽었지만 다시 살아날 수 있다면 조금은 더 용감하게 위험한 일에 도전해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다른 도전을 하고 위험한 일들도 해나가다 보면, 어쩌면 하나의 생을 살아가는 것보다는 다른 것을 보고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목숨이 하나 밖에 남지 않은 장화신은 고양이
영화 <장화신은 고양이:끝내주는 모험>의 주인공 장화신은 고양이(목소리:안토니오 반데라스)는 9개의 목숨을 가지고 있다. 영화 속 그가 모험을 하는 모습에서는 두려움의 태도를 볼 수 없다. 언제나 자신감이 넘치고 위험한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유쾌함은 그런 두려움 없는 삶에서 오는 것이다. 죽어도 다시 삶을 이어갈 수 있다는 확신은 그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못하게 한다. 실제로 그는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많은 경험을 했고 그런 삶을 즐긴다.
그는 배부른 왕이나 영주를 괴롭힌다. 엄청나게 축적된 곡물과 돈을 훔쳐 하층민들에게 돌려준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위험에 처하고 실제로 그에게는 엄청난 현상금이 걸려있기도 하다. 많은 사람에게 쫓기는 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여유가 넘친다. 그런 그는 모험 중에 여덟 번째 죽음을 맞는다. 잠시 후에 다시 깨어난 그는 크게 신경 안 쓰는 것 같았지만 이제 한 번만 더 죽으면 완전히 죽게 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달라진다.
그때부터 늑대 모습을 한 죽음은 장화신은 고양이를 따라다닌다. 처음 늑대를 본 장화신은 고양이의 반응은 겁에 질린 모습 그대로다. 털이 곤두서고 몸이 떨린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겪어보지 못한 공포가 그에게 찾아온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특유의 긍정적인 태도도 사라져 버린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살던 그에게 죽는다는 공포는 일반 사람이 느끼는 것에 비해 훨씬 큰 것처럼 보인다.
사실 우리 모두 누군가의 죽음을 종종 겪는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마음을 아프게 하고 또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게 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평소에는 죽음에 대해 크게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저 일상을 살다가 어느 순간 죽음이 공포스럽게 다가오는 때가 있다. 모두의 목숨은 하나지만 매번 죽음의 공포 속에 살지는 않는다. 하지만 장화신은 고양이에게 죽음은 전혀 생각하거나 고민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잠자는 것처럼 잠시 기절했다 깨어나는 과정이 죽음을 느낄 수 있는 전부였기에 8개의 목숨까지 그는 죽는다는 공포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죽음 앞에 두려워하는 장화신은 고양이의 극복기
영화가 보여주는 겁에 질린 장화신은 고양이의 모습은 인상적이다. 그는 겁에 질린 나머지 자신이 살아오던 삶의 모습을 포기해 버린다. 지금까지 자신이 쌓아왔던 명성과 이미지를 모두 버리고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곳으로 숨어버린다. 그가 다른 고양이들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모습 속에는 삶의 활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장화신은 고양이가 공포로 인해 삶의 의지를 잃어버리는 과정이 무척 설득력 있게 그려진다.
영화에는 강아지 페로가 장화신은 고양이가 같이 모험을 하게 된다. 페로는 어린 시절부터 버림받았던 캐릭터이다. 그런데 그의 삶의 태도는 무척 긍정적이다. 자신은 늘 버림받았고 운이 안 좋았으며 죽을 수도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삶에서 좋아하는 것들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친구들에게 버림받으면서도 친구들의 장점을 말하는, 다르게 보면 바보 같은 캐릭터다. 하지만 그런 점 때문인지 그에게는 두려움이나 공포가 적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을 만큼 최선을 다해 친구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게 돕는다. 자신의 목숨은 하나뿐이지만 다시 아홉 개의 목숨을 가지고 싶어 하는 장화신은 고양이를 위해 최선을 다해 돕는 페로의 모습은 무척 감동적이다.
장화신은 고양이가 자신의 삶에 처음 찾아온 죽음을 어떤 식으로 대해야 할지 모르는 캐릭터라면 페로는 그가 어떤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약간은 달관한 듯한 페로의 모습은 오랜 삶을 살았던 장화신은 고양이보다 더 성숙해 보인다. 그에게 중요한 건 지금의 삶이고 자신의 옆에 있는 친구들이다.
드림웍스사가 오랜만에 내놓은 영화 <장화신은 고양이: 끝내주는 모험>은 <슈렉>의 조연으로 등장했던 장화신을 고양이를 주인공으로 한 두 번째 영화다. <슈렉>의 세계를 좀 더 확장하여 보여주는 이 영화는 장화신은 고양이와 강아지 페로의 이야기를 통해 죽음과 삶에 대한 철학적 이야기를 쉽고 흥미롭게 전달하고 있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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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통 불가능성' 앞에서 영화가 할 수 있는 일
일본어, 한국어, 중국어, 수화를 동시에 사용하는 연극을 상상해보자. 관객이야 무대 위 프롬프터에 나온 자막을 보며 극을 이해할 수 있다고 치자. 그러나 서로 다른 모국어를 가진 배우들은 상대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기에 느낌과 감정, 천천히 맞춰온 합으로 대사를 주고받아야 한다. 언어가 다르기에 돌발 상황에서 애드리브로 능청스레 넘어갈 수도 없다. 대사 타이밍이 살짝만 어긋나도 극의 흐름이 깨져버리는 고난도의 무대. 막막하고 두렵다.
연출을 맡은 가후쿠는 배우들이 '대체 언제 움직이며 연습할 거냐'라고 물을 때까지 대본 리딩을 반복한다. 지루하고 건조한, 몸이 근질거리는 그 시간이 반복되면,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배우들 사이에 무언가가 ‘일으켜지고’ 이것이 관객에게까지 확장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결국 중요한 건 시간이다. 시간을 쏟은 정성 들인 노력, 여기서 만들어지는 호흡은 타인의 마음에 무언가를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노력과 호흡이 ‘기계적 기예’에 그쳐서는 안 된다. 기계적 기예는 매끄러울 순 있지만 상대에게 가 닿을 순 없다.
사실 가후쿠는 두 번의 큰 상실을 겪었다. 딸은 네 살 때 폐렴으로 죽었고, 가후쿠가 사랑해 마지않던 아내도 갑자기 죽었다. 아내의 죽음은 가후쿠에게 특히 큰 트라우마를 남겼다. 딸을 잃은 상실감에 휘청이던 가후쿠가 전적으로 의지해오던 아내가 다른 남자와 섹스하는 모습을 목격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죽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는지조차 듣지 못한 채 급작스레 이별한 것이다.
그런 가후쿠의 마음을 여는 건 극단에서 배정해준 운전기사 미사키다. 그녀는 어린 시절 엄마의 폭력에 시달린 후 도망치듯 도시로 나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운전 일로 생계를 이어가던 중이다. 가후쿠는 아내와의 추억이 담긴, 자신이 오랫동안 길들인 차의 운전대를 남에게 맡기기를 꺼린다. 그녀가 차에 깃든 가후쿠의 내밀한 관계와 감정 사이에 끼어드는 것이 긴장을 자아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바꾼다. 미사키의 능숙한 운전 솜씨 때문만은 아니다. 조용하고 무뚝뚝한 그녀는 금세 가후쿠가 지금껏 차를 아껴온 마음과 이 차에서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지를 알아차린다. 연극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말은 중요하지 않다. 그녀가 시간과 정성을 들여 가후쿠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느꼈다는 게 중요하다.
때문에 미사키에게 내 차를 운전해달라(‘드라이브 마이 카’)는 가후쿠의 요청은 인간의 소통 가능성에 관한 감동적인 제언이 된다. 기계적‧기능적 관계를 넘는, 말로는 전할 수 없는 내밀한 소통의 관계가 바로 이 운전을 매개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말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건 이때부터다. 가후쿠가 미사키에게 건네는 말(“살아가야 해. 우린 틀림없이 괜찮을 거야.”)은 언어 이전의 보다 근본적 층위에서 교감이 이뤄진 후에야 서로를 위로하고 엮어주는 말이 될 수 있다. 만약 이들이 어느 날 느닷없이 카페에 마주 앉아 서로의 사연을 나눈 후 위와 같은 말을 주고받았다면, 이 영화가 전하는 감동이 가능했을까? 불가능한 일이다. 말은 그저 건조한 의미를 전달할 뿐이다. 그 의미를 두텁게 만드는 건 진심 어린 존중으로 쌓아 올린 시간이다. 제아무리 화려하고 명쾌한 말도 이를 대신할 수 없다.
어떤 철학자는 타자를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가 폭력이라고 말한다. 이해한다는 건 타자를 내가 가진 틀에 맞추어 재단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소통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건 이런 맥락에서 나온 명제다. 하지만 소통 불가능성을 인정하는 것과 이 불가능성 속에서도 서로에게 가 닿기를 갈망하는 건 별개의 문제다. 냉소적‧회의적 태도는 불가능성을 사실로 확정함으로써 이 권위를 재확인하지만, 그럼에도 가 닿겠다는 처연한 의지는 불가능성에 어떤 균열을 낸다. 〈드라이브 마이 카〉가 보여주는 건 이 자그마한 균열이 자아내는 감동이다. 연극이든 삶이든, 그 어떤 소통 불가능성 속에서도, 우리는 이를 거스름으로써 조금은 더 가까워질 수 있다. 가후쿠와 미사키가 그러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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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경 운동을 하면 사랑도 할 수 있다고? <디피컬트>
힘들다. 매년 나아져야 하는데, 매년 더 나빠지고 있는 상황을 보고 있노라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경제 성장은커녕 유지만 해도 감지덕지고, 오르지 말라고 기도하는 물가는 청개구리처럼 점프를 해댄다. 이런 상황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일은 아니다. 저 멀리 프랑스도 매년 위기를 맞이하고 더 힘든 상황을 반복한다. 이를 배경으로 한 <다피컬트>는 채워도 채울 수 없는 소비사회 속 대출과 빚의 늪에 빠진 이들을 전면에 내세운다. 더 나은 미래를 향해가다가 삐끗한 이들에게 남은 거라곤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공허함과 외로움. 영화는 이들에게 위안을 건넨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방식은 환경보호 운동을 통해서 진행된다.
블랙프라이데이 당일, 오픈런을 위해 백화점을 찾은 알베르(피오 마르마이)는 입구 앞에서 환경 보호 운동가인 캑터스(노에미 메를랑)와 대치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람들은 저마다 갖고 싶은 물건을 향해 몸을 던지고, 알베르 또한 그 무리에 편승해, 자신이 원하는 TV를 얻는 데 성공한다. 그의 목적은 단 하나, TV를 중고 시장에 되팔아서 차액을 남기기 위함이다. 하지만 세상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 법. 어렵게 구한 물건 구매자 집에 도착한 알베르는 쇼핑 중독에 의한 파산으로 자살 시도를 한 브루노(조나단 코헨)를 발견해 가까스로 살린다. 이날 이후, 이것도 인연인지 빚더미에 앉아 파산 직전인 이들은 우연히 공짜 맥주의 유혹에 이끌려 환경 단체 모임에 참석한다. 그곳에서 알베르는 캑터스의 연설을 듣게 되고, 엉겁결에 환경 단체 일을 돕는다.
<디피컬트>는 과잉 소비로 인해 인간도 환경도 위협받는 현실을 일깨우는 영화다. 일종의 계몽영화처럼 무겁게만 느껴질 수 있자만, <언터처블: 1%의 우정> <세라비, 이것이 인생!> 등 연출을 맡은 올리비에르 나카체, 에릭 토레다노 감독의 전작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코믹함과 긍정성이 작품 전반에 깔려 있다.
<언터처블: 1%의 우정>의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만 봐도 한 명은 전신 불구고, 한 명은 무일푼 백수다. 희망보단 절망에 더 가까운 삶을 보내는 이들의 만남과 우정은 그 자체로 웃음을 불러일으킨다. 자학 개그처럼 느껴지는 영화의 코미디 요소는 마치 ‘진정으로 웃으려면 고통을 참아야 하고, 나아가 고통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찰리 채플린의 명언을 영상화한 듯한 느낌이 든다.
그 연장선상으로 <디피컬트> 또한 힘든 상황 속 이들의 웃픈 코미디를 계속해서 보여준다. 환경 보호보다는 캑터스에 반해 환경 운동에 앞장서는 알베르와 못마땅한 표정으로 어쩔 수 없이 그와 함께하는 브루노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환경 운동 최전선에 서서 다양한 활동을 하는 상반된 모습은 그 자체로 웃음을 유발한다. (물론, 환경 보호가 아닌 다른 목적이 껴 있지만) 특히 바보 듀오 알베르와 브루노의 코믹 티키타카는 긍정적 나비효과처럼 러닝타임 내내 계속 쌓여가며 극의 재미를 부여한다.영화는 이런 기조 아래 과소비 행태와 환경 보호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극 중 주요 인물들이 만나게 된 건 아이러니하게도 과소비 때문이다. 알베르와 브루노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저마다 행복을 위해, 공허함을 위해 더 많은 소비를 하고, 시장경제는 이를 더 부추긴다. 무분별한 소비로 인해 환경은 파괴되고, 기후변화까지 이어져 결국 인간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메시지는 그 자체로 생각할 거리를 전한다.
특히 영화는 캑터스를 통해 변하는 알베르의 모습, 그리고 서로 다른 지향점을 가진 이들이 사랑이란 감정을 통해 함께 하는 과정을 보여주며, 연대의 중요성을 전한다. 감독은 입으로만 힘든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말만 하는 국가와 사회에 기대기보다 힘든 상황 속에서 색안경을 벗고 따뜻한 마음으로 손을 잡고, 포옹하고, 춤을 출 수 있는 마음을 갖고 있다면 그 힘으로 버티며 살아갈 수 있다고 거듭 강조한다. 후반부 파리 도심에서 캑터스와 알베르가 함께 춤을 추는 장면만 봐도 이를 알 수 있다.하지만 비극 속 피어나는 코믹함과 과소비 행태가 부른 사회 문제 심각성 사이의 균형감은 아쉽다. 특유의 긍정성이 사회 문제의 심각성까지 먹어버린 듯한 느낌이랄까. 해결되지 않은 사안이 많음에도 사랑과 연대의 힘으로 모든 게 해결되는 듯한 급작스러운 마무리로, 영화가 제기한 소비, 환경 문제가 흐릿해진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계속 지켜보게 하는 건 국가가 다름에도 우리의 모습이 엿보이는 배우들의 연기 덕분이다. 피오 마르마이와 조나단 코헨의 연기는 한 번쯤 돈 때문에 힘들었던 기억을 새록새록 떠올리게 만들고, 노에미 메를랑의 연기는 환경 보호에 노력하지만, 그만큼 실천하기가 어렵다는 걸 깨닫게 한다. 여기에 과소비 방지를 목적으로 활동하는 자원활동가 앙리 역에 마티유 아말릭은 과소비 방지 원칙을 소개하지만, 그 또한 도박의 유혹에 시달리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공감대를 형성한다.
아마 영화를 본 후에도 우리의 삶은 변함없이 힘들 다. 하지만 그 힘듦에 주저않기보다는 뭔가 행동으로 옮기려는 마음은 생길 터. 필요한 물품만 사고, 쓰지 않는 물건은 나눠주고, 이를 통해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 이들과 대화하며, 친분을 쌓으면 더 나은 사회가 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어보자. 그게 단 1%라도 말이다.
사진 제공= (주)블루라벨픽쳐스 / TCO(주)더콘텐츠온
평점: 3.0/ 5.0
한줄평: 경제도, 환경도, 사랑도 힘든 이들과 나누는 위안의 연대
* <씨네랩〉 초청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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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3년, 1974년, 2023년의 임신중지
1963년, 1974년, 2023년의 임신중지
〈앵그리 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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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 소설 《사건》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레벤느망〉에서 주인공 안은 두 번의 임신중지를 시도한다. 뜨개질바늘을 사용해 혼자서 한 번, 불법 시술소에서 또 한 번. 〈레벤느망〉은 이 고통스러운 순간을 비껴가지 않는다. 안의 거친 호흡과 고통스러운 신음, 날카로운 시술 도구가 안의 몸으로 들어가는 순간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럼으로써 ‘불법’이라는 추상적 규범이 초래하는 위험과 이것이 우리에게 남기는 수치심을 고발한다.
〈레벤느망〉의 배경은 1963년의 프랑스다. 〈앵그리 애니〉는 그로부터 10년 후의 일을 다룬다. 두 아이가 있는 엄마 애니는 임신중지가 가능한 곳을 수소문해 한 서점을 찾는다. 서점 직원은 찾는 책이 있다면 말해달라고, 혹시 모임에 온 것이라면 커튼 뒤쪽으로 가 보라고 말한다. 커튼 뒤에는 ‘불법이지만 비밀은 아닌’ 일이 이뤄지는 중이다. 그곳에 모인 여성들은 임신중지가 필요한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한다. 그러자 누군가가 그들에게 사려 깊은 태도로 앞으로 어떻게 일이 진행될지 상세한 설명을 해준다. 임신중지에 어떤 도구를 활용할지 하나하나 일러주고, 모든 궁금증에 상냥히 응대한다. 겁에 질려 그곳을 찾은 여성들의 긴장이 조금씩 풀린다. 그들은 MLAC, 임신중지와 피임의 자유를 위한 운동의 활동가다.
이제 이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시작된다. 애니는 임신중지를 위해 침대에 눕는다. 의사 한 명과 활동가 둘이 애니 곁에 있다. 그들은 애니에게 거울로 자궁을 살펴보기를 권한다. 자기 몸의 아름다움을 긍정하기 위함이다. 의사는 애니가 불편함을 느끼는지 지속적으로 확인하고, 활동가는 애니의 손을 잡고 눈을 맞추며 내내 곁을 지킨다. 아름다운 선율의 노래를 불러주기도 한다. “끝났다고요?” 임신중지가 마무리되자 애니가 깜짝 놀라 묻는다. 임신중지 경험이 있는 애니에게는 이토록 쉽고 간단하고 안전하게, 심지어 정서적 안정감을 느끼며 임신중지가 이뤄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레벤느망〉의 임신중지 장면과 달리, 〈앵그리 애니〉의 임신중지 장면은 심지어 ‘편안해’ 보이기까지 한다. 두 영화가 임신중지를 재현하는 방식의 차이는 여성의 임신중지 경험이 어떤 환경과 맥락에 놓여 있는지에 따라 완전히 달라질 수 있음을 극적으로 대비한다.
MLAC 덕에 공포가 안도로 바뀐 애니는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경험에 계속 잊히지 않는다. MLAC의 도움으로 임신중지를 하는 여성은 안전하고 믿음직한 환경에서 임신중지를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원하는 경우에 한해서만 기부금 형식으로 비용을 지불하면 됐다. 그들의 활동이 자신에게 가져다준 커다란 평온에 감명받은 애니는 순수한 호기심이 인다. “왜 이렇게까지 하세요?” 불법 행위를, 심지어 비밀리에 진행하지도 않는 이들은 모두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하고 있는데, 애니는 그런 그들에게 마음이 움직인다.
그러던 중 애니에게도 각성의 순간이 온다. MLAC 조직이 여러 곳에서 활동하긴 했어도 임신중지를 원하는 모든 여성을 돕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즉, 여전히 많은 여성이 위험한 환경에서 임신중지를 시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여성이 이 과정에서 죽었다. 애니의 이웃도 마찬가지였다. 애니는 본격적으로 MLAC 활동을 시작한다. 활동을 통해 자신의 편견을 조금씩 수정해나가고, ‘생명 파괴’ ‘문란함’ 등의 낙인 때문에 여성들이 임신중지에 얼마나 큰 심리적 부담을 느끼고 있는지도 직접 대면한다.
애니가 MLAC 활동가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영화의 질문은 확장된다. 〈앵그리 애니〉는 그저 임신중지의 합법화만을 요구하지 않는다. 영화에는 더 크고 깊은 질문이 담겼다. MLAC를 찾는 여성들이 늘어나면서 기존 활동가, 의사만으로는 모든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워진다. 이에 오랫동안 단체에서 의사를 돕던 활동가들이 직접 임신중지 시술을 집도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그러나 주로 남성으로 구성된 MLAC의 의사들이 반발한다. 자칫 위험한 상황이 생길 수 있기에 전문가만 이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설득력이 있는 말이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 여성들은 의사 없이 임신중지보다 훨씬 더 위험한 출산을 인류의 탄생 때부터 서로 도우며 해왔고, 시술법이 발전한 덕에 임신중지의 절차가 비교적 간단해지기도 했다. 무엇보다 MLAC 여성 활동가들은 여성들의 느끼는 공포에 공감하고 연대할 수 있었다.
이는 남성/국가/전문가 집단이 여성의 몸에 대한 통제권을 독점하는 상황에 대한 문제제기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야 애니는 화를 내는데(‘앵그리 애니’), 그 이유도 이 때문이다. MLAC의 활동이 큰 이슈가 되어 임신중지가 합법화되었으나 합법화가 의료 기관이 그 권한을 독점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MLAC에서 가능했던 여성들 간의 연대, 여성 경험의 가시화 등은 배제된 채(즉 MLAC에서 여성들이 쌓아 온 역량이 사라질 위기에 놓인 채) 여성이 다시금 남성/국가/전문가의 수동적 객체로 위치지어질 수 있다는 문제의식 때문에 애니는 화가 난다. 임신중지가 합법화된 후 병원에서의 임신중지는 위험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여성을 다시금 외롭게 만들지도 모른다.
이외에도 MLAC 활동을 하며 애니가 가족에 ‘소홀해지는’ 과정과 이로 인한 가족 내 갈등을 통해서는 여성이 가사노동의 책무 때문에 사회 활동을 하는 데 제약을 받는 상황을 짚기도 한다. 〈앵그리 애니〉는 단순히 낙태죄 폐지가 진보·정답이 아님을, 여기에는 이를 초과하는 다양한 결의 질문과 고민이 동반되어야 함을 보인다. 임신중지에 관한 단편적 이해와 서사를 넘어, 여기에 무수히 많은 이슈가 결합되어 있음을 보이는 이 영화는 낙태죄가 페지된 이후에도 여전히 아무런 후속 입법 조처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 무책임한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임신중지 이슈에 관한 필람작이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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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다섯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개봉직후 1위에 올랐던 <댓글부대>를 꺾고 <파묘>가 1위를 재탈환했습니다.
1100만을 앞두고 있는 파묘의 흥행질주는 언제까지 이어질까요?
[국내박스오피스]
영화 <파묘>가 신작 공세에도 주말 극장가에서 1위를 지켰습니다. <댓글부대>는 개봉 당일 <파묘>를 제치며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으나, 하루 만에 1위를 내주게 되었습니다. 1100만을 앞두고 있는 <파묘>의 관객몰이는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이며 한편 <고질라 X 콩: 뉴 엠파이어>가 23만여 명의 관객을 끌어모아 3위에 올랐습니다.
[북미박스오피스]
<고질라 X 콩: 뉴 엠파이어>가 개봉 3일 만에 8000만 달러의 스코어를 달성하며 북미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습니다. 영화는 상상초월의 거대한 위협에 맞서 힘을 합친 고질라와 콩이 몬스터버스사상 최강의 팀업을 펼치는 액션 블록버스터로 국내에서도 외화 영화 박스오피스 1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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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축한 대지 위에 그려낸, 가장 건조한 장르의 로맨스
나는 주로 혼자 영화 보는 것을 즐기는 부류의 관람객이다. 하지만 종종 영화관을 나서며 타인의 존재가 간절해지는 때가 있다. 정리되지 못한 채 쏟아지는 서로의 언어를 갈구하게 하는 영화를 만나고 난 후, 상기된 얼굴로 나와 바깥의 차가운 공기와 마주할 때 더욱 그렇다. 영화 <퍼스트 카우(First Cow)>는 바로 그런 영화다.
<와이드 스크린에 끝도 없이 펼쳐진 황야. 그 거칠고 메마른 땅 위를 고독하게 걸어가는 카우보이의 뒷모습. 뿌연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내달리는 말에 올라탄 개척자들...> 이러한 영화적 풍광은 아마도 영화 장르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서부 개척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라는 문구가 자연스럽게 상기시키는 관습적인 이미지일 것이다. 서부 개척사는 유럽 정착민들에게 역사적 자긍심을 고취하는 미국사의 토대라고 할 수 있다. 가장 미국적이라고 할 수 있는 웨스턴 장르는 따라서, 의도적으로 '개척되어야 마땅한 서부의 이미지'를 제시함으로써 문명과 야만이라는 이분법적 대립구도를 정당화한다. 웨스턴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말(馬)과 서부 영웅들의 존재감은 프런티어(frontier)를 확장하는 개척의 역사만을 포섭하는 주체의 의지를 드러낸다. 그 이면에 감춰진 '타자화된 개인들'의 역사가 흐려지는 지점이다. 켈리 라이가트(Kelly Reichardt)의 '축축한 웨스턴'은 바로 이 지점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서술해나가기 시작한다.
"the bird a nest, the spider a web, man friendship"
(새에게는 둥지가, 거미에게는 거미줄이, 인간에게는 우정이)영화의 오프닝 타이틀에는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지옥의 격언(Proverbs of Hell) 속 한 문구가 새겨져 있다. 새둥지와 거미줄. 그곳의 정주자들은 스스로 몸 뉘일 곳을 부지런히 쌓아 올려 삶을 일궈낸다. 그리고 한 시인은 인간의 우정을 그에 견줄 만한 것이라고 보았다.
영화는 전통적인 관점에서 주변인이라고 할 수 있는 킹 루(King-Lu)와 쿠키(Cookie) 이 두 사람의 우정을 통해 잊힌 서부 '정착사'의 토대를 그린다. 뒤집힌 채 배를 보이며 바둥거리는 도마뱀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섬세한 감수성을 지닌 쿠키는 모피 사냥꾼들의 요리사다. 숲 속에서 버섯을 줍던 쿠키는 발가벗은 도망자 신세인 킹 루와 조우하고 그에게 덮을 것과 잠깐의 안식처를 제공한다. 이후 정착민 마을에서 재회하는 킹 루와 쿠키 두 사람은 술과 거주 공간을 그리고 서로의 꿈을 공유하며 우정을 쌓아 나간다.
Cookie : You speak good English.. for an Indian.(인디언치곤... 영어를 잘하는군요)
King-Lu : I'm not Indian.(난 인디언이 아닌데요.)
Cookie : Oh.
King-Lu: Chinese.(중국인이죠)
Cookie : I didn't know there were Chinese in these parts.(이쪽에 중국인들이 있는지는 몰랐네요)
King-Lu : Everyone is here. Everyone wants that soft gold. It's why you're here, isn't it?
(모두가 여기에 있죠. 모두가 모피를(혹은 노다지) 원하잖아요. 당신이 여기에 있는 이유도 그 때문 아닌가요?)(Google search : First Cow script, 의역이라 오역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들의 첫 만남에서 오가는 대화는(위) 서로 다른 얼굴과 언어를 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서사가 진행되며 이들의 목소리는 구별되지 않고 함께 들려온다. 부족의 언어로 인디언 사공과 소통하는 킹 루의 모습도 이질적이지 않게 다가온다. 이는 마치 오프닝 시퀀스에 등장하는 두 구의 백골이 스스로 그들이 누구인지 말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출신지나 피부색, 언어가 지워진 채 땅 속에 묻혀 나란히 누워있을 뿐이다. 킹 루의 말대로 그곳에는 모두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 위로 그곳의 역사가 세워진 것이다.
(좌)<믹의 지름길(Meek's Cutoff)>(2019) (우)<퍼스트 카우(First Cow)>
영화적 발화자의 범위를 넓혀가는 라이카트 감독의 전작 <믹의 지름길(Meek's Cutoff)>의 첫 장면을 잠시 돌이켜보자.(위 그림, 좌) 감독은 '물'과 '소'의 이미지를 관객과 처음으로 소통하는 지점인 오프닝 시퀀스에 담기로 선택했다. 그의 웨스턴이 정주, 즉 '뿌리내림'이라는 우리의 근원적인 욕구를 품고 있다고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감독은 캐스팅을 위해 펼쳐놓은 수많은 소들의 헤드샷(headshots)을 검토하는 중에 가장 큰 눈을 가진 소, Evie를 만났다고 한다. 영화에서 Evie는 흐르는 강의 물결을 따라 유유히 정착민들의 땅을 향해 다가온다.(위 그림, 우) 삶을 일구는 기본적인 조건인 물과 함께 흘러와 이 땅에 첫 발을 들이는 젖소의 모습은 경이롭게까지 느껴진다. 유목적 삶에서 벗어나 정착하기를 꿈꾸는 이들의 열망이 겹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현상학을 경유해 장소의 정체성을 연구한 에드워드 렐프(Edward Relph)는 인간의 실존을 거주, 즉 '뿌리내림'에서 찾았다. 렐프에 의하면 장소란 우리 자신을 외부로 지향시키는 출발점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에게 '진정한 장소감'이란 개인으로서 그리고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내부에 속해있는 느낌이다. 렐프의 의견을 빌리자면 우리의 일상을 지탱하는 장소감은 정주함으로써 얻어진 공동체적 감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블레이크가 사랑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는 우정을 정주의 자리에 넣어놓은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의 배경인 1820년대 킹 루와 쿠키가 도착한 곳은 새로 이주한 이들에게 뿌리내림의 역사가 부재한 곳이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상업적 자본주의의 논리다. 무엇이든 교환 가능한 것이 곧 가치가 되는 이곳에서 두 사람의 만남은 꽤나 낭만적이다. 서로를 향해 비스듬히 기대어있다는 안도감이 그들만의 교환가치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부유한 자본가의 소유인 젖소의 우유를 훔친다. 그들의 완전한 정주를 가능하게 할 빵을 만들어 팔기 위해서다. 한국인들에게 갓 지은 쌀밥의 모락모락 한 김에서 올라오는 달콤한 향이 '집'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듯, 유럽인들에게 우유를 넣어 갓 구운 빵 한 조각은 떠나온 그곳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자극한다. 쿠키가 구워낸 빵의 온기가 그들의 작은 거주공간을 가득 채우고, 허기진 이주민들의 마음을 채우는 동안 불안의 기운이 덮쳐온다. 그들은 과연 이 축축한 자투리 땅 위에서 계속해서 빵을 구워낼 수 있을까?
변용된 ‘스파게티 웨스턴’이 공간적 배경을 저 멀리 구대륙으로 옮겨 놓았다면, 라이카트의 <퍼스트 카우>는 프레임에서 내뿜는 분위기(atmosphre), 냄새까지 바꿔놓았다. <믹의 지름길>에서와 마찬가지로, 4:3 화면비율을 고집한 감독의 선택과 더불어 피사체와 카메라 간의 밀착된 거리는 다른 향을 뿜는 서부극을 빚어낸다. 그의 카메라가 포착하는 서부의 이미지가 양 옆으로 길게 뻗어 '점령하고 전복해야 할 황야'로 느껴지지 않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폐쇄적이고 빽빽한 감각이 프레임을 메운다. 그리고 그 안의 인물들은 그곳에서 새로운 깊이를 만들어낸다. 그렇게 서부의 메마른 모래먼지로 점철된, 가장 건조한 장르의 로맨스가 버섯이 피어나는 축축한 땅 위에 그려진다.
아직 역사가 기입되지 않은 그곳을 걸으며 영화는 우리에게 말한다.
"History hasn't gotten here yet, "
* 해당 리뷰는 씨네 랩(CINE LAB) 크리에이터 시사회 참석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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