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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나친 관음증에 가려버린 야심 찬 재해석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아버지를 모른 채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던 '노마 진(릴리 피셔)'은 정신병에 시달리던 엄마에게 학대당한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정신병원으로 이송된 후 그녀는 아버지가 할리우드에서 일했다는 말 한마디를 간직한 채 보육원에서 지내게 되고, 노마는 배우로서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꿈을 키워 나간다. 이후 염색한 금발 머리와 섹슈얼리티가 두드러지는 외모를 무기 삼아 '마릴린 먼로(아나 데 아르마스)'로 거듭난 그녀는 스타덤에 오른다. 그러나 아버지의 부재가 남긴 공허함 때문에 먼로는 남자에게 집착하기 시작하고, 아울러 스타로서 화제의 중심에 서야 하는 독특한 삶의 무게에 짓눌리면서 그녀는 마릴린과 노마 사이에서 혼란에 빠진다.
앤드류 도미닉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아나 데 아르마스가 마릴린 먼로를 연기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블론드>는 개봉 전부터 숱한 논란의 중심에 서 있었다. 제79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 진출작이라는 점과 아나 데 아르마스의 높은 싱크로율은 기대를 키우기에 충분했다. 반면 원작인 조이스 캐럴 오츠의 동명 소설이 논픽션이 아닌 소설이라는 점을 두고 고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적지 않았다. 일례로 미국의 영화 평론가 그레이스 랜돌프가 이 작품을 "전기 영화인 척하는 강간 판타지"라며 평론을 거부했다. 마침내 공개된 <블론드>는 이처럼 상반된 기대와 우려가 모두 옳았음을 보여준 영화였다. 시대의 상징을 재해석하려는 감독의 야심은 그 자체로 인상적이지만, 야심을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아쉬움을 넘어 불쾌한 대목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블론드>는 자칫 단순히 금발의 섹스 심벌이라는 이미지에 갇힐 수 있는 마릴린 먼로를 더욱 입체적인 인간상으로 그려내려 한다. 그녀를 둘러싼 사건과 루머가 너무나도 유명한 만큼 과감한 접근법을 택했다고 볼 수도 있다. 구체적으로는 빛나는 할리우드 스타의 깊은 심연을 들여다보며 먼로를 치열한 정체성 싸움을 펼치는 역동적인 캐릭터로 재해석하려 했던 야심을 드러낸다.
카메라가 포착하는 마릴린 먼로의 모습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 뿌리 없이 자란 꽃과도 같은 그녀의 괴로움에 초점을 맞춘다. 영화는 정신병에 걸린 엄마와 함께 지난 유년 시절을 보여주면서 배우 이전에 자연인 '노마 진'의 엘렉트라 콤플렉스를 자세히 묘사한다. 할리우드에서 일한다는 아버지는 사진만으로도 엄마의 폭행과 학대에 시달리는 어린 노마에게 큰 위안이 된다. 더 나아가 보육원에서 자라게 된 그녀에게 아버지의 존재는 그 자체로 안정되고 따뜻한 가정의 상징이 되어 버린다.
동시에 영화는 마릴린 먼로라는 스타와 노마 진이라는 자연인의 간극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한 인간의 모습을 포착한다. 무섭게 열광하는 레드카펫의 군중들과 카메라를 비추는 모습. 그 유명한 치마가 바람에 휘날리는 먼로를 찍는 사진기들까지. 마릴린 먼로에 가까워질수록 노마 진이 사라지는 삶, 유명세를 감당하고 시대의 심벌로 거듭나는 삶이 얼마나 힘든지를 놓치지 않는다. 그렇기에 영화는 커리어의 정점에 도달한 순간 LA를 떠나 뉴욕으로 향하는 그녀처럼 노마 진의 흔적을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 한 여성을 역으로 포착할 수도 있다. 이처럼 <블론드>는 어릴 적 트라우마, 스타로서 소비되는 이미지, 이중적 생활로 인한 불안 심리 상태에 초점을 맞춰 마릴린 먼로의 이미지를 새로이 구축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영화 분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그녀의 염문과 가십은 단순한 스캔들의 영상화가 아니다. 그보다는 '노마 진'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갈증을 강조한다. 그녀가 여러 남편을 '아빠 Daddy'라고 호칭하는 것이 단적이 예시다. 노마 진은 거듭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할 사람을 쫓고, 그 아버지와 행복할 가정을 이룰 아이에게 집착하며 공허한 자신의 뿌리를 채워 넣으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는 마릴린 먼로의 가십을 항상 날아갈 듯한 희망과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듯한 절망의 이미지로 대비시켜 보여준다. 스타가 아닌 한 개인의 시점에서 제시하기에 그 명암은 더 짙다.
작중 처음으로 마음의 안식처로 생각했던 '찰스 채플린 주니어(제이비어 새뮤얼)'와의 관계는 사랑하던 아이를 포기해 두고두고 그녀의 원죄가 되어 버리는 낙태로 귀결된다. 그녀가 가장 화려한 스타로 발돋움하는 찰나에, 또 아버지를 만날 거라는 희망으로 부풀어 있던 순간 마주해야 했던 '조 디마지오(바비 카나베일)'의 프러포즈는 노마를 학대받던 어린 시절로 되돌려 보낸다. 극작가인 '아서 밀러(에이드리언 브로디)'에게 자신의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지만 정작 아서가 그녀의 사연을 영화 시나리오의 한 조각으로 활용하는 사실을 알게 되자 깊이 좌절한다. '존 F. 케네디(카스파르 필립손)'와의 루머를 풀어내는 대목은 마릴린과 노마 사이에서 결국 체념해버린 그녀의 모습을 암시하듯 고통스럽고 기괴하다.
그렇기에 원작 제목 <블론드 Blonde>를 고수한 것 역시 도미닉 감독의 야심이 집약된 선택으로 보인다. 마릴린 먼로가 금발로 염색해서 이미지를 확립한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영화는 통념과 달리 마릴린 먼로로 변모하는 과정 이면에 숨어 있던 심상을 금발에 투영한다. 섹슈얼리티한 이미지의 구축보다는 노마 진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불안함과 노마 진으로 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필사적인 노력을 제목에 담는다.같은 맥락에서 흑백과 컬러를 오가고, 현재 영화 제작 시 사용되는 대부분의 화면 비율을 한 번 이상 활용하며, 심리 변화에 따라 화면이 늘어지거나 휘어지는 연출도 눈에 띈다. 쉽사리 짐작하기 어려운 노마 진과 마릴린 먼로의 내면을 영상으로 풀어내기 위한 노력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관건은 감독의 야심이 시청자들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될 수 있느냐다. 여기서 <블론드>는 패착을 두었다. 다만 영화 속 마릴린 먼로와 실제 먼로의 삶이 다르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실 원작자인 조이스 캐롤 오츠부터 자신의 책이 논픽션이 아닌 소설이라고 공언한 만큼, <블론드>의 내용이 실제 사건과 다르다고 비판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을 수 있다. 마크 저커버그의 페이스북 창립 스토리를 다룬 <소셜 네트워크>가 동명의 논픽션을 원작으로 하는데도 실제 사건과 여러 차이점이 있다는 것, 그런데도 봉준호나 타란티노와 같은 감독들이 이 작품을 2010년대 최고의 영화 중 하나로 꼽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다만 작품 속 묘사가 실제 사건과 다를 경우 그 이유는 제시되어야 한다. <소셜 네트워크>가 실제와 다르게 표현한 대목은 마크 저커버그라는 캐릭터가 자신의 이익과 결부되지 않으면 타인의 심리를 파악하고도 고의적으로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음을 강조한다. 그 덕분에 세상 모든 사람들을 연결해줄 페이스북이라는 거대한 SNS를 탄생시킨 주인공의 주변에 정작 친구도, 연인도, 동료도 남아있지 않는 아이러니한 엔딩의 비극성은 더욱 빛을 발한다. '소셜 네트워크'라는 제목의 이중적인 의미를 전달하는 데 톡톡히 기여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블론드>는 실제와 달라야 하는 그 이유를 보여주지 못했다. 영화는 아버지와 가정의 부재가 남성들과 아이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진 과정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마릴린 먼로라는 캐릭터의 고통을 더 과장하고 그녀의 내적 혼란을 부추겼다. 실제로는 없었던 사건인 먼로의 낙태가 스토리 라인에 삽입되고, 연인 관계가 아니었던 남성들과의 관계나 확인되지 않은 루머가 적잖은 분량을 부여받은 것은 극적 전개를 위한 선택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선택을 보여주는 방식은 영리하지 않다. 2시간 30분이 넘는 긴 러닝 타임에도 불구하고 각 에피소드 사이에서 널뛰는 먼로의 감정선을 제대로 그려내지 못했다. 대신 아버지의 부재와 불우한 어린 시절이라는 한 원인에서 모든 이야기가 비롯되었다는 단순한 불행 포르노를 답습하는 데 그친다. 그 결과 왜 먼로가 몇십 년 동안 그토록 불안정한 상태여야 했는지를 전혀 납득시키지 못한다.
더 나아가 마릴린 먼로를 소비해 왔던 기존의 시각을 비판하면서, 정작 감독 본인도 같은 행태를 반복하는 내로남불에 빠지고 만다. 영화는 그녀를 둘러싼 수많은 카메라의 압박, 그녀를 착취하는 영화 업계 사람들의 무자비한 태도, 그녀를 성적으로 소비하고 활용하는 언론과 대중들을 마치 굶주린 괴물처럼 묘사한다. 결국 먼로의 내밀한 이야기를 드러내어 결과적으로 그녀를 자극적으로 탐닉한 이들이 한 여성을 비극으로 몰고 간 과오를 비판하려는 뉘앙스를 풍긴다. 그래서 영화는 먼로가 캐릭터를 재해석해서 원작자인 아서 밀러조차 깨닫지 못했던 캐릭터의 이야기를 보충하는 장면처럼 숱한 스캔들의 주인공이기 이전에 연기에 진심이었던 여배우의 모습도 단편적으로나마 제시한다.
문제는 <블론드>의 시점도 먼로에 대해 마찬가지로 선정적이고, 소비적으로 접근한다는 점이다. 지나치게 노골적이고 관음증적인 앵글과 시선을 통해 집중적으로 포착된 마릴린 먼로의 사생활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를 그저 정신적으로 쇠약한 인물로 그려낸다는 인상을 준다. 또 그녀가 단지 성적인 존재로만 남겨졌다는 식의 묘사 역시 불쾌함을 남긴다. 그래서 이러한 연출에 대한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해명과 반론은 케네디와 먼로의 만남 장면처럼 구체적인 상황 묘사가 불필요한 대목에 힘을 준 순간 의미를 잃어버린다. 결국 영화의 결말은 그저 불편하고 찝찝할 뿐, 재해석의 의도나 야심은 작품을 곰곰이 따져보지 않는 한 와닿지 않는다. 그렇게 넷플릭스 <블론드>는 그 모든 고통을 표현해 낸 아나 데 아르마스의 열연만 남긴 채 막을 내린다.
P(Poor, 형편없음)
야심 찬 재해석에 절제의 미덕만 갖추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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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겨진 명작] 맞아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밖에는 비가 내린다. 내가 앉은 카페 맞은편에는 '풍천장어 직판점'이 있다. 그리고 그 비가 오는 길거리에 한 남자 전화를 하며 걸어가고 있다. 저 사람은 누구와 통화하고 있을까? 조잘조잘 웃으며 환하게 웃는다. 마스크가 없는 얼굴에 미소가 더 잘 보인다. 왠지 사랑하는 사람과 통화하고 있을 것 같다. 그냥 친구랑 통화하는 거면 저렇게 환하게 웃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이 카페에 앉아서 늘 먹는 아이스티를 주문했다. 내가 앉아 있는 자리의 또 옆에는 화분이 덩그러니 있다. 그 화분에 '사랑합니다'라는 문구가 써져있다.
으른들의 취향과는 거리가 먼, 초딩입맛인 나. 이 카페는 large 사이즈가 4천 원 언저리라서 부담 없이 오기 좋다. 사회복무요원의 신분 덕에 돈이 없어 경제적인 선택을 하는 것도 맞지만 여기는 내가 좋아하는 메뉴들을 크고 싸게 한다. 카페모카 류의 커피가 들어간 음료들도 비슷한 가격대지만 난 단 것만 판다. 딱 이런 것만 보면 청승맞은 이유가 있다. 적지 않은 시간들을 보내와도 난 역시 단 게 좋고 군것질이 좋다. 내 연인이 마이구미를 좋아하면 과연 어떤 기분이 들까? 그걸 매일 먹으면 한 편으로 신기하다고 생각할 것 같다. 금세 비가 오는 밖의 모습이 보인다. 우산 한 개를 가지고 두 커플이 손 꼭 잡고 걸어가고 있다. 내 우산은 누가 갖다 줄까?라고 자신에게 반문한다. 확실한 건 뭔가 으-른의 취향을 가진 사람이 매력적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다. 난 추적추적 비 맞으며 그냥 뛰어가야겠다. 2001년의 한국 어느 곳에서도 우산을 혼자 쓴 남자가 고민에 빠진 것 같다. 왓챠로 달려가 보자.
행복 회로 위이잉
우리의 주인공 봉수는 그냥 직장인이다. 작은 아파트 단지에서 직장을 다니는 주인공. 매일매일 똑같은 일상에 좀 질렸다. 어느덧 결혼 적령기에 들어선 봉수. 봉수는 고민이 있다. 바로 결혼을 하는 친구들이다. 나는 왜 결혼을 못하는 걸까? 마음이 답답해진 봉수. 나 정도면 직장도 있고 성격도 괜찮아서 할 만하지 않나? 사실 아내는 고사하고 여자 친구도 없는 봉수지만 생각이 많아진다. 이러다 평생 혼자 사는 것 아닐까? 불안한 예감이 현실이 된다고 봉수의 불안은 점점 이뤄지는 것 같은 느낌이다. 어우 이 끔찍한 이 기분.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데, 옆구리가 시린 느낌이 평소 때보다 더한 것 같다.
이 외로움을 친구에게 주절주절 터놓는 봉수. 어느 날 지하철을 탔는데 나만 빼고 사람들이 통화하는 꼴이 처량했다. 친구는 곧바로 답한다. “나한테 하지!” 눈치가 없는 건지 일부러 그러는 건지 속을 몰라주는 것이 답답하다. 그래도 봉수의 삶에 다행인 것이 있다. 바로 대화를 나누고 있던 친구였다. 그래도 너라도 있어서 참 다행이야. 내가 독신주의자인 너보다 먼저 할 테니까. 친구는 곧이어 대답한다. “너 민정이 알지? 걔 결혼한대.” “누구랑 해?” “나랑.” “그날 네가 사회 봐라” 알고 보니 기만자였다. 진짜 너무한다. 사회 보라는 말이 없었다면 비교적 덜 염장을 질렀을지도 모르겠다. 으아!!!!!! 나같이 성실하게 사는 사람이 왜 결혼을 못하는 거야? 세상은 역시 미스터리 투성이지만 그중 최고는 역시 결혼이거나 연애다. 나만 왜 못하는 걸까? 절규를 우아아아아악 내지르지만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회사에 출근해야 하는 봉수. 직장에 출근해서 일을 하는데, 한 여자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해맑게 웃는 여자와 뭐든 해내는 남자의 사랑이야기
영화는 봉수와 원주의 사랑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한 로맨틱 코미디물이다. 우리가 아는 사랑 영화는 다양하게 있다. 사실 이 영화는 우리가 아는 맛이다. 귀여운 주인공들, 엇나가는 마음, 풋풋한 내면까지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다. 근데 이 영화는 다른 작품들에 갖는 분명한 이점이 있다. 바로 타격감이다. 주인공들의 성격 묘사가 섬세한 느낌이다. 특정 장소 앞에서 내면을 털어놓는 장면, 형광등 가는 장면, 원주의 성격 묘사까지 영화는 파릇파릇한 장면으로 러닝타임을 채워놓았다. 그중 생각하는 최고의 풋풋함은 봉수가 마술을 배우는 장면이다. 현대 2022년으로 치면 MBTI쯤 될 마술. 사랑을 위해 마술을 배운다는 게 왠지 우리의 초등학생 시절이 떠올라 귀엽다. 근데 이런 자질구레한 소심함 설경구 배우가 캐릭터를 잘 살려서 귀여운 요소로 작용한다. 헤어스타일 + 코디 + 왠지 짠내 나는 성격 + 말투까지 실제로 이런 사람이 꽤나 많았을 것 같은 느낌이다.
또 다른 여주인공 원주의 캐릭터도 귀엽다. 원주는 보습 학교 선생님이다. 제법 따뜻한 선생님인 원주. 아이 한 명이 엉엉 울고 있어 ‘무슨 일이니’ 묻는다. 그리고 아이는 대답하다. “애들이 선생님 닮았다고 놀려요!" 예전에 기타리스트 조정치 님이 나와서 '같은 반 애들이 조정치 닮았다고 놀려요'라는 고민상담을 들어주던 짤이 생각나는 장면이었다. 이 영화의 원주는 그것보단 유연하게 대처한다. 착한 원주. 우리가 아는 전도연 배우의 비주얼에 그런 캐릭터를 부여한 게 솔직히 납득이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아이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돌봐준다. 원주는 그렇게 내면이 깨끗한 사람이다. 영화는 이렇게 파릇파릇한 캐릭터들로 러닝타임을 끌고 간다.
풋풋한 이 느낌
두 주인공 설경구-전도연 배우의 이 작품 전작 <박하사탕>과 <해피엔드>가 생각난다. 광기가 폭발하던 <박하사탕>이나 불륜을 다뤘던 <해피엔드>까지 이 영화에선 볼 수 없었던 상큼 발랄한 모습이 보인다. 특히 전도연 배우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의 대척점에 서있다고 볼 수 있다. 내가 전도연이란 사람을 실제로 아는 건 아니지만 왠지 이 배우는 상상력으로만 연기를 하는 건 아닐 것 같다. 이런 상큼 발랄한 성격이 내면에 있을 것 같다. 근데 설경구 배우의 짠내 나는 모습은 정말 새롭다. <킹메이커>에서 보여준 카리스마 있는 모습이나 <네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의 뒤틀린 내면까지 요즘 관객들은 모를법한 인물 연기가 재밌었다. 뭔가 왓챠라는 OTT의 순기능 같은 느낌?
있을 때 잘해라 인마
인연이라고 하는 것이 얼굴에 또박또박 적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근데 그런 미래를 예지 하는 능력 따윈 없으니 사랑에 울고 웃는다. 이 울고 웃는 것에서 오는 난제는 역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좋아?'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일 것이다. 영화는 이 난제에 대한 묘사도 빼먹지 않았다. 막상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지'만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하는 남자 주인공의 욕심은 사실 우리와 그렇게 차이가 있진 않다. 나도 주말마다 카페에서 궁상과 주접을 떨지만 '아무나랑 사귀어라'라고 하면 싫다. 좀 별 것 아닐 것 같은 상황과 처지지만 이런 구석구석 디테일한 인물 묘사는 강점으로 작용한다. 또 다른 미묘한 내면묘사는 '뒤돌아 본다'라는 행동이다. 내내 사랑스러운 톤과 분위기로 이끌어가지만 상실과 부재에 대한 인상적인 장면이 있으니 이 부분도 관객에게 강점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있을 때 잘해라. 그리고 현재의 네 삶을 사랑하라'라는 고루한 주제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어떤 마음과 정서가 우리의 마음속에 남는 이유는 각본의 꼼꼼함 덕이라고 볼 수 있다. 또 다른 장점은 엔딩이다. 두 주인공의 성격이 오롯이 담겨있는 이야기에 마음이 흐뭇해진다. 이래서 로맨스 영화를 보나 싶다.
깨알같이 담겨있어
어느 각도에서 보면 이 영화는 이야기 전개에 진전이 없다. 경우에 따라서는 '너무 잔잔하다!'라고 생각하실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소소한 디테일에서 오는 재미가 있다. 왠지 점점 이뻐지는 듯한 원주, 우산으로 시작한 첫 장면, 봉수의 찌질한 대사 톤까지 소박하고 순수한 사랑을 기대하고 있는 분들이라면 이 영화가 좋은 대리만족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요즘 우리나라 영화에서 이런 작품들을 많이 못 본 것 같다. <연애 빠진 로맨스>같이 19금 코드가 적절히 들어있는 게 떠오르지 극장에서는 찾기 힘들었던 것 같다.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이제 안정세에 접어든 만큼 우리 한국영화의 힘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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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평의 여정이 수직적인 세상에 가져올 변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거센 비가 내리는 어느 날 밤, ‘소영(이지은)'은 부산의 한 교회 베이비 박스 앞에 아기 '우성'을 내려놓고 떠난다. 때마침 베이비 박스 당직을 서던 ‘상현(송강호)'과 '동수(강동원)'는 소영이 남긴 쪽지에 아기의 이름이나 연락처가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아기를 몰래 데려간다. 그러나 다음 날 빚에 시달리며 세탁소를 운영하는 상현이 불법 입양 브로커로서 길을 나서려는 찰나에, 예상치 못하게 엄마 소영이 아기를 되찾기 위해 돌아온다. 아기가 사라진 것을 안 소영이 경찰에 신고하려 하자 결국 자신들이 브로커임을 고백한 상현과 동수. 이에 소영은 우성이의 양부모를 찾는 여정에 동행하기로 한다. 한편 이 일련의 과정을 빠짐없이 관찰한 형사 '수진(배두나)'은 후배 ‘이형사(이주영)'와 함께 두 브로커를 현행범으로 잡기 위해 그들의 뒤를 쫓는다.
베이비 박스는 부모의 사정상 키울 수 없는 아기를 두고 가는 장소로, 한국에서는 2009년 서울 관악구 주사랑공동체 교회에서 처음 시작된 후 현재 3곳의 종교시설에서 운영되고 있다. 사실 베이비 박스는 선한 목적과는 별개로 논란의 대상이었다. 비판하는 쪽에서는 그 존재 자체가 아이를 유기하게 만든다고 말해왔고, 긍정하는 쪽에서는 아이를 지킬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라고 말해왔다. 그러나 미혼 부모처럼 아이를 양육할 능력이 부족한 이들의 현실과 이에 무관심한 한국 사회의 태도가 중첩된 결과 베이비 박스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양측 모두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처음으로 한국에서 촬영하고 연출하여 제75회 칸 영화제의 경쟁 부문에 초청된 영화 <브로커>가 베이비 박스 앞에서 시작되는 것은 놀랍지 않다. 이미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들은 가족이나 소외된 이들의 삶처럼 사회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문제들을 스크린 위로 끄집어 올리기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또 그의 작품은 서늘한 현실감을 유지한 채 해당 문제들을 파고들면서도, 섣불리 비판할 대상을 정하는 대신 그 문제를 겪는 당사자들의 내면을 깊게 들여다보면서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경우도 많다. <브로커>도 마찬가지다. 영아 납치와 인신매매를 자행하는 브로커의 여정을 포착한 이 로드무비는 악행과 선의 사이에서 피어나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수직적인 세상에서 볼 수 있는 모순
그 아이러니는 울진의 한 수산물 시장에서 볼 수 있다. 우성이를 사려는 한 부부를 만난 소영, 동수, 상현. 부부는 우성이의 눈매나 눈썹을 살펴보면서 못생겼다며 외모를 품평하고, 친부의 직업이나 과거사를 따진다. 기대에 미치지 못했는지 본래 약속보다 낮은 가격에 할부로 우성이를 구매하겠다는 제안하는 부부. 이에 당황한 상현과 동수는 어떻게든 거래를 이어가기 위해 흥정을 해보지만, 아기를 비하한 부부에게 분노한 소영 덕분에 흥정은 이내 끝이 난다. 이 장면은 수많은 모순으로 가득하다. 수산물 시장에서 생선 대신 아기가 거래 대상인 것이나, 아기를 파는 사람이 아기의 가치를 존중해 달라고 구매자의 부도덕함을 비난하는 것이나, 브로커에게 더 나은 구매자를 찾아달라는 소영의 모습은 무엇 하나 말이 되지 않는다. 아기를 팔려고 하는 순간 이미 도덕과 윤리와는 거리가 멀어진 듯 한데, 그 안에서 또 도덕을 따지는 아이러니가 느껴진다. 이처럼 악행을 저지르는데 정작 그 안에서는 선의가 느껴지는 모순은 러닝타임 동안 다양하게 변주되어 나타난다.
이때 작중 모순은 서로 다른 세상의 논리가 충돌해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수직적인 세상 안에서 수평적인 관계가 부딪힌 결과다. 우선 <브로커>의 세상은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낸 (...) 계급 우화"인 <기생충>처럼 수직적으로 묘사되며, 영화는 꾸준히 오르고 내린다.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는 날에 소영은 아기를 버리기 위해 골목길을 올라가고, 수진과 이 형사는 그런 소영을 내려다본다. 보육원에서 같이 자란 친구를 만나 꿈을 이룰 수 있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 헛헛한 인생 이야기를 한 동수는 보육원으로 향하는 긴 계단을 걸어 올라간다. 동선과 시점에 더해 인간관계도 수직적이다. 조폭들에게 5,000만 원을 빚진 상현은 일원 중 하나인 태호 앞에서 쩔쩔매고, 후반부에는 그와 담판을 짓기 위해 지하철역으로 내려간다. 영화의 배경마저도 수직적인데, 부산답게 걸어 올라가기조차 벅찬 계단들이 잊을 법하면 등장한다.
거듭 오르락내리락하는 동선, 시점, 관계는 세 인물이 사회적 시스템에서 가장 아래에 있고, 밀려난 이들이라는 공통점을 보여준다. 이는 영화에서 등장하는 여러 상자인 베이비 박스, 네모난 봉고차와 보육원의 모습으로도 나타난다. 한 명만 들어갈 수 있는 베이비 박스가 상현, 소영, 동수 개개인의 삶이라면, 자동차는 가족을 상징하며, 보육원은 가족보다 조금 더 큰 사회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보육원 밖에는 사회라는 가장 큰 상자가 있다. 이때 가장 큰 상자로부터 작은 상자로,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어려움은 결국 베이비 박스에 아이가 들어가게 만든다. 상현은 조폭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불법 브로커로 활동한다. 보육원을 떠났지만 이렇다 할 희망을 찾지 못한 동수는 상현과 함께 봉고차를 타고 돌아다니며 아이들을 밀매한다. 가족을 이룰 수 있는 형편이 아닌 소영은 아기를 베이비 박스 앞에 내려놓는다. 이렇게 영화는 수직적인 세계에서 고통받는 이들의 사연을 베이비 박스 안에 담는다.
수평의 동행이 만든 가족
그러나 <브로커>는 아픈 사연에만 집중하지는 않는다. 지상과 지하, 계단 위와 아래 사이에 냄새조차 넘어가서는 안 될 명확한 선이 있었던 <기생충>과는 달리 <브로커>는 비극으로 치닫지 않는다. 상승과 하강의 세계가 극한으로 향하기 전에 동행이라는 이름의 수평축을 새로이 끼워넣기 때문이다. 소영이 동수에게 자신이 꾸는 꿈에 관해 이야기하는 장면은 이 수평적 동행이 갖는 의미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꿈속에서 비를 맞고 깨끗해지는 꿈을 꾼다는 소영은 그 꿈이 그저 꿈일 뿐이라고 자조한다. 그러자 동수는 두 명이 쓸 수 있을 만큼 큰 우산이 있으면 되지 않겠냐고 반문한다. 소영이 비를 맞으며 아이를 버렸던 것을 생각하면, 고물이 되어버린 봉고차 안에서 만난 이들과의 관계가 그 비를 피할 우산이 될 것임을 유추할 수 있다. 봉고차를 세차하던 중 다섯 일행이 비눗물을 뒤집어쓰고, 상현과 소영이 각자 쓰던 가명 대신 본명을 털어놓으며 깨끗해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리고 이 과정은 수직적인 세상과 대조되는 수평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수평선이 보이는 동해안 도로를 따라 이어지는 봉고차의 여정과 인천으로 향하는 KTX의 모습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동행은 수직적인 세계에서 지친 이들, 특히 가족이 부재한 이들이 봉고차 안에서 새로운 가족을 이루고 서로를 어루만지며 치유하는 과정이라서 특별하다. 성매매 여성인 소영은 상현과 동수를 만나 가족이라는 공동체 안에 소속된 느낌이 무엇인지를 새로이 깨닫는다. 보육원 출신인 동수는 소영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에게 되돌아오지 않은 엄마의 심정을 이해한다. 이혼 후 딸과 별거 중인 상현은 몰래 보육원을 빠져나와 봉고차에 탄 해진에게서 딸의 모습을 본다. 이는 오르내리는 대관람차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어 속마음을 털어놓는 장면이 유독 인상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 찬가로 이어지는 봉고차
이때 영화는 유대감과 치유의 이야기를 인간 내면의 순수함과 도덕성에 대한 믿음으로 확장한다. 사실 상현과 동수, 그리고 소영은 예기치 못하게 만났고 또 좋은 일로 만난 것도 아니었다. 아기를 유기하는 소영의 행동이나 그 아기를 교회에서 맡아 기르는 대신 팔아버린 상현과 동수의 행위는 누가 뭐라 해도 범죄였다. 그러나 영화는 악행 기저에 깔린 선의들의 만남에 주목한다. 아기를 베이비 박스에 두고 떠났지만 되돌아온 소영의 모성애, 아기를 잘 키워줄 적임자를 찾아주려 했다는 상현의 배려심, 버려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상처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동수의 동병상련은 한 데 모여 치유의 드라마를 써 내려간다. 물론 자신들의 행적을 둘러대려는 의도도 있었겠지만, 부분적으로나마 진심인 선의가 만나 새 가족을 만들고 감동을 선사한 것이다.
이 감동은 엄마이자 딸로서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기로 결심한 소영이 모두에게 전하는 "태어나줘서 고마워"라는 대사로 함축되어 있다. 달리 말해 이 대사에는 악행을 저지른 모든 이들의 내면에도 미처 꺼내지 못했을 선함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 선함 덕분에 모두의 생명이 특별하다는 인간 찬가가 담겨있는 것이다. 실제로 영화의 끝에 다다르면 모두가 최선을 선택하며, 자신들이 마주해야 했던 인생과 비극을 반복하지 않으려 한다. 모든 책임을 아이 엄마에게 묻는 대신 그녀의 마지막 선택에도 정당성을 부여한다.
이러한 인간의 선의에 대한 희망은 <브로커>만의 따스함이 감도는 영상 덕분에 더욱 특별하다. 인위적인 설정 대신 햇빛과 같은 자연의 움직임을 기다리며, 있는 그대로 포착해 찍어낸 덕분이다. 상현과 소영의 진심이 튀어나오는 KTX 안에서의 대화 장면이 밝음과 어둠을 자연스럽게 오가는 것이 대표적이다. 또한 이처럼 수직의 세상에 피어난 선함이라는 주제는 송강호에게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이 돌아간 이유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누구보다도 소시민적으로 수직적인 세상을 사는 인물이면서도 수평적 여정의 끝에서 인간의 선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인 상현은 영화에 담긴 아이러니를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다.
흔들리는 편견과 고정관념
그렇다고 해서 <브로커>가 마냥 따뜻하고, 희망적이고, 밝은 태도만 견지하는 것은 아니다. 고레에다 감독의 작품답게 상현, 동수, 소영을 무조건 미화하거나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려고 하지는 않는다. 대신 영화는 이 아이러니를 관찰자의 시점에서, 즉 수진의 시점에서 따라가도록 권한다. 그래서 영화의 시작은 수진의 세계를 보여준다. 수진이 소영을 내려다보는 구도는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소외된 이들을 보는 시점으로, "버릴 거면 낳지를 말라"는 수진의 태도가 잘 반영되어 있다. 또 아기를 실은 상현의 봉고차를 수진이 조용히 쫓는 장면에서 영화의 타이틀이 등장하는 것도 관찰자이기에 관객이 쉽게 동일시할 수 있는 그녀의 관점을 강조해준다.
그리고 수진의 관점과 태도가 뚜렷하기에 브로커 일행을 쫓는 그녀의 여정에는 더욱 깊은 드라마가 담긴다. 단순한 관찰자였던 그녀가 가족이 되어가는 이들의 동행을 따라가면서 그들의 이면을 마주하고, 자기 내면에 찾아온 혼란을 만나기 때문이다. 그녀의 냉철한 신념과 태도는 "낳고 나서 죽이는 게, 낳기 전에 죽이는 것보다 죄가 더 가볍냐"는 소영의 반박에 꺾인다. 아이를 매매하는 것은 엄연히 불법이지만, 그들을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간 편견과 제도의 공백이 그녀를 흔든다. 또 멀쩡한 부부에게 입양되어야만 비로소 우성이가 행복할 거라는 그녀의 고정관념은 "아이를 가장 팔고 싶은 건 나였나 봐"라는 대사를 통해 고발된다.
이렇게 <브로커>는 베이비 박스가 필요 없는 세상을 원한다면 이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사람의 선의를 믿으며, 미리 단정 짓지 말자고 설득한다. 정당화될 수는 없어도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수직과 수평의 충돌 안에 담는다. 사회 제도에 대한 의문과 통념으로 자리 잡은 윤리적 판단에 대한 의심으로 악행과 선의의 딜레마를 장식한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수진과 동일한 입장에서 영화를 보다 보면 결말을 마주한 순간 긴 여운 속에서 영화의 메시지를 곱씹으며 자신을 성찰하는 깊은 상념에 빠지게 된다.
다만 영화적 뚝심과는 별개로 <브로커>의 완성도는 아쉬움이 크다. 다루려는 이야기가 너무 많은 나머지 짜임새가 부족하다는 인상이 강하다. 영화는 크게 세 가지 여정, 곧 소영과 우성이/브로커인 상현과 동수/브로커를 추적하는 수진과 이 형사의 여정을 다루고 있다. 사실 영화의 메시지와 주제를 고려하면 이 많은 캐릭터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나, 그들의 이야기를 온전히 담아내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껴진다. 이는 특히 최후반부에 얽히고설키는 상현, 소영, 동수, 수진의 선택에서 그들의 심경 변화가 한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더해 보육원 시퀀스처럼 대사가 명확히 들리지 않는 기술적인 문제도 감상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된다.
물론 이러한 단점은 이지은의 연기가 눈부시게 빛나는 것과 같은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선사하기도 한다. 서로 다른 캐릭터들의 사연을 하나로 묶는 접점도 소영이고,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담당하는 것도 소영이기 때문에 자연히 그녀의 퍼포먼스가 눈에 띌 수밖에 없다. 덕분에 언제나 수심 가득하던 얼굴에 슬며시 웃는 미소를 지나 당찬 의지가 담기고, 진한 스모키 화장이 지워지는 그녀의 변화만 따라가도 <브로커>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히 알 수 있다.
다만 완성도 때문에 영화의 온기와 따스함이 지닌 설득력이 약화되는 게 결국 문제다. 인신매매와 살인처럼 결코 경시할 수 없는 심각성을 지닌 소재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다소 낙관적이고 편의적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려고 한 듯한 경향성이 살짝 엿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이상적이고 작위적인 화법 때문에 영화의 결말에 끝내 설득되지 않는다면, <브로커>는 그저 순진하게 풀어낸 인간 찬가로 기억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 영화의 메시지와 주제가 갖는 중요성과 가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역량과 명망을 생각하면 이는 퍽 안타까운 결과다.
A(Acceptable, 무난함)
인간의 선함을 믿어보자는, 따뜻함과 나이브함 사이에 있는 설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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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찌질한 남성 서사마저 '예술'로 만드는 거장의 저력
표면만 보자면, 레오 카락스 감독의 신작 〈아네트〉는 다소 뻔한 영화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천재적 재능을 가진 남성 예술가(스탠드업 코미디언 헨리 맥헨리)가 여성 예술가(오페라 가수 안 델그레코)와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 그런데 아내는 승승장구하는 데 반해 자신은 정체되고 퇴보한다는 생각에 열등감에 빠지기 시작한다. 그는 점차 폭력적으로 행동하며 아내를 괴롭힌다. 그럼에도 열등감이 해소되지 않자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죄를 범한다. 아내뿐 아니라 딸도 자기 욕망에 따라 마음대로 휘두르려 한다. 파국 이후에 또 다른 파국이 닥친다. 점점 꼬여만 가는 그의 삶은 철저한 외로움, 고독으로 귀결된다.
즉, 〈아네트〉는 다소 뻔한 방식으로 남성 예술가 서사를 재현한다. 〈아네트〉에 레오 카락스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가 부분적으로나마 담겼다는 점도 감독이 ‘고독한 남성 예술가’라는 구닥다리 자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지를 의심케 한다.
하지만 영화 심층의 주제의식을 파고들어 가다 보면 표면의 주제의식을 전복하는 해석이 가능하다. 영화가 진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기 위해선 전 세계적으로 극찬을 받았던 레오 카락스의 전작 〈홀리 모터스〉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홀리 모터스〉 스틸컷
주인공은 매일 다른 역을 연기하는 배우 오스카다. 그는 구걸하는 노파, 3D 모션 연기자, 흉측한 광인, 괴팍한 아빠, 악기 연주자, 살인자, 부자 노인, 원숭이 등으로 분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진짜’ 오스카가 없다는 사실이다. 즉 무대 뒤에 ‘진짜 오스카’와 무대 위의 ‘배우 오스카’를 구분하기는 불가능하다. 오스카는 그가 연기하는 배역 그 자체다. 배역이 바뀔 때마다 변주된 삶을 이어가는 것이다.
〈홀리 모터스〉는 인간의 주체성이 본질적인 자아에 근거한다는 전통적 철학 명제에 반기를 든 수행성 이론을 강력하게 환기한다. 우리는 무대 뒤에 ‘진짜 나’가 따로 있고, 사회생활(무대 위) 중에는 필요로 하는 자아를 상황에 맞춰 연출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수행성 이론은 이런 구분을 거부하며 본질적 주체·자아란 허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흔히 우리가 본질적 자아라 일컫는 것이 상황에 따른 수행적 이미지의 연속체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수행성 이론을 〈홀리 모터스〉에 대입해 보자면, ‘진짜 오스카’가 배역을 '연기'하는 게 아니라, 매일 오스카가 연기하는 다른 배역의 연속이 오스카 그 자체다.
수행성 이론은 인간을 상황적·맥락적 존재로 바라봄으로써 우리를 본질적 구속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일례로, 주디스 버틀러는 《젠더 트러블》에서 우리가 본질적이라고 여기는 ‘남자’와 ‘여자’라는 범주가 ‘남자답게’, ‘여자답게’ 반복적으로 행동한 결과 만들어진 상상적 구성물일 뿐이라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젠더 역할의 수행적 반복이 성별 범주를 '본질'로 착각되게끔 만든다. ‘남자’와 ‘여자’라는 본질이 있어서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이 있는 게 아니라, ‘남자다움’, ‘여자다움’을 강제하는 사회가 남녀라는 본질이 존재한다는 환상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아네트〉 스틸컷
〈홀리 모터스〉가 수행성 이론을 다소 불친절하게 영화화한 작품이었다면, 〈아네트〉는 이를 더욱 극적으로(동시에 암시적으로) 드러낸 영화다. 인기 있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인 주인공 헨리 맥헨리는 자신의 쇼에서 “코미디는 살해되지 않고 진실을 말할 유일한 방법”이라 익살스레 말한다. 그가 아직 안 델그레코를 만나 열등감에 무너지기 전의 일이다. 자신은 '무대 위'에서 진실을 말한다는 헨리의 자기재현이 그럴듯하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헨리는 범죄가 탄로 나 재판을 받으며 진실을 말할 것을 추궁받자 전혀 다른 말을 한다. 그는 “(진실을 말하면) 날 죽일 테니까”라고 중얼거리며 입을 열지 않는다. 이 대사는 이제 헨리가 더 이상 무대 위에 있지 않음을, 즉 그가 무대에서 내려왔음을 의미한다. 무대 위의 헨리는 진실을 말해도 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무대 위에서 추방당한 그는 이제 더 이상 진실을 말할 수 없다. 무대 밖의 헨리는 진실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수행성 이론으로 돌아가 보자. 수행성 이론에서 ‘무대 밖’은 없다. 우리는 모두 ‘무대 위’의 연속일 뿐이다. 그렇다면 헨리의 두 번째 말은 그가 삶의 바깥으로 튕겨 나갔음을 의미한다. 그가 진실을 말할 수 없는 공간, 즉 무대 밖에 있음을 인정하는 건 자신의 삶이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패배적 선언에 다름 아니다.
〈아네트〉 스틸컷
영화는 헨리의 딸 아네트의 대사를 통해 무대 밖으로 내쳐진 헨리의 ‘죽음’을 확언한다. 마지막 장면 직전까지 아네트는 내내 인형으로만 등장한다. 아네트가 자기 의지를 가지지 못한 채 헨리의 비뚤어진 예술욕에 수동적으로 이용되었음을 그로테스크한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인형으로만 나오던 아네트가 사람으로 바뀌는 장면이 있다. 바로 그가 헨리를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할 때다. 아네트가 자기 의지를 갖고 처음 말하는 순간 그녀는 인형에서 사람이 되었고(생명을 얻었고), 사람이 된 후의 첫 대화를 통해 아버지를 무대(삶) 밖으로 완전히 추방했다. 거만하게 군림하다 아내와 딸, 아내의 또 다른 연인에게 물리적‧정신적 폭력을 가했던 헨리에게 이제 남은 삶(무대)은 없다. 이처럼 〈아네트〉는 〈홀리 모터스〉에 이어, 다시 한번 무대 밖 삶은 없음을, 모든 것은 무대 위의 수행적 구성물임을 보인다. 무대 밖은 삶으로부터 추방된 곳, 즉 '죽음'의 영역이다.
〈아네트〉는 찌질한 남성 예술가 서사를 철학적 메시지로 내파함으로써 ‘예술’이 되었다. 여기에 강렬한 음악과 실험적 연출, 뮤지컬 영화의 장르적 성격 등이 잘 어우러져 영화의 격을 높인다. 무엇보다 헨리 역의 아담 드라이버의 연기가 돋보인다. 그는 카리스마적 예술가와 딸에게 애정을 구걸하는 아버지 사이의 간극을 체화한 연기로 몰입감을 높인다. 마리옹 꼬띠아르와 사이먼 헬버그의 연기도 영화를 탄탄히 받쳐준다. 여러모로 매혹적인 영화다.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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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객을 끝까지 속이는 스릴러
사람마다 영화를 보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나에겐 일상의 환기의 영역이 크다. 영화를 보면서, 쉬거나 새로운 인사이트를 얻는 게 영화를 관람할 때 첫 번째 포인트이기 때문에, 긴장하면서 봐야 하는 영화를 보는 것은 언제나 마지막 선택이 되었다. 아름다운 것만 봐도 모자란 시간에 두려움에 떨거나, 피가 튀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소 확고한 영화 취향에도 불구하고 일 년에 한두 번 용기를 내어 보게 만드는 건, 잘 만들었다고 소문난 ‘서스펜스 스릴러’ 영화다. 불안하고 긴장이 되어 조마조마한 기분을 계속 느껴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촘촘하게 설계된 이야기 구조의 놀라움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장르니까. 세상에 천재가 많구나 하는 감탄과 동시에 뇌가 확장되는 느낌이 들어 다른 의미로의 일상의 환기가 된다.
이 감독 천재인가? 이 작가 천재인가? 리스트는 한 둘이 아니지만, 나에게 서스펜스 스릴러라는 장르의 매력에 눈 뜨게 해준 영화는 <인비저블 게스트>이다 (이상하게도 넷플릭스에만 ‘세 번째 손님’이라는 이름으로 올라와 있다.)성공적인 사업가 아드리안은 누군가의 지시로 호텔에서 내연녀 로라와 만난다. 의문의 습격으로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 보니 로라는 죽어 있고, 들이 닥친 경찰에 체포된다. 밀실살인사건이니 만큼 아드리안은 유력한 용의자가 되고 만다. 한번도 패소 해 본적이 없다는 변호사 버지니아를 선임해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려고 하고, 검찰 측 증인이 나타나 3시간 후면 아드리안이 법정으로 소환될 상황이 되어, 그 시간안에 사건을 재구성하기로 한다.
인비저블 게스트는 한 살인 사건을 시작으로, 다른 사건들이 연관되어 나타나며 이를 엮어서 이야기진행시키는 이야기의 전개 방식을 쓰고 있다. 사실 이런 구조 자체는 특별히 신선하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추측할 만한 등장인물은 그리 많지 않고, 과거로부터 현재로 거슬러 올라오는 이야기의 흐름이 관객들에게 혼란을 주며 제한된 인물들 가운데, 범인을 추리 하도록, 그리고 진실에 대해 궁금증을 일으키도록 끝까지 끌고 가도록 하는 힘이 좋았다.
매력적인 스페인어와, 으슬으슬한 겨울 공기 마저도 이 영화의 조연처럼 느껴지는 연출, 긴장된 공기 속에 강렬한 눈빛과 카리스마 있는 말투로 같은 사건을 다른 시선으로 보게 만드는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지만, 이 영화의 백미는 단연 결말이다. 범인은 바로 너 ! 추리 꽤나 한다는 나도, 함께 본 지인도 전혀 생각하지 못한 마지막 장면을 향해 달려 간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영화속의 많은 장면들이 다시 플래시백으로 관객들의 머릿속에 떠오르며, 뒤늦게 아 – 하고 감탄하게 만드는 영화.
아직 보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이 추리게임에서 이길 수 있을지 끝까지 보길. 그리고 이 결말을 맞춘 천재가 있다면, 널리 널리 자랑하길. 마음을 다해 감탄하고 부러워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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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세한 접근에서 강렬한 확장을 향해
사려 깊은 소거와 냉랭한 응시
김미조 감독이 연출한 영화 <갈매기>는 사려 깊으면서도 번뜩이는 영화다. 주인공 오복은 시장 상인들이 모인 술자리에서 벌어진 성폭행 사건의 피해자가 되는데, 이때 <갈매기>는 사건을 상세하게 묘사하지 않는다. <갈매기>는 오복의 심리를 묘사할 때에도 또한 관련 정보를 전부 드러내지 않는다. <갈매기>는 인물의 고통을 묘사하는 방식에 있어 매우 섬세한 접근을 보여준다. 어떤 면을 소거하고 어떤 면을 부각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영화다. 그런 일관성은 영화의 진정성을 뒷받침한다. 이렇게 생략을 동반하는 <갈매기>의 화법은 영화를 지배하는 원동력이 된다. 카메라는 오복을 집요하게 따라가면서도, 시종 냉랭하고 건조한 시선을 유지한다. 즉 <갈매기>는 감상적 태도에 매몰되는 상황을 경계한다. 이 묘한 이중성, 인물의 심리를 섬세하게 어루만지는 태도와 쉽사리 몰입하지 않으려는 냉정함이 <갈매기>에 공존하는 듯 보인다.
전통 시장은 사람 냄새 가득한 정겨운 공간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갈매기>의 수산시장 거리는 오갈 데 없는 오복을 서서히 조여오는 잔인한 공간이다. 사실 영화 속 오복은 시장에서 벗어나서 다른 공간에 몸담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위안 받지 못한 채 고립된다. 오복이 누군가에게 전화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숨겨왔던 속내를 털어놓던 오복에게 치매가 걸린 어머니는 시큰둥한 반응과 함께 딴소리를 늘어놓는다. “뭐? 꼬막이 먹고 잡다고?”. 오복은 말문이 막혀 버린다. 가장 힘이 되어줘야 할 남편은 오복에게 크나큰 상처가 되는 추잡한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낸다. 딸들이 엄마 오복을 도와주려 하나, 각자의 삶의 영역이 불편하게 들러붙는 가운데, 부질없는 갈등만 늘어간다. 전기세를 아끼려 에어컨 대신 선풍기 바람에 의지하는 억척스러운 오복은 집에서조차도 마음 편하게 의지할 대상을 찾지 못한 채 끙끙대며 속앓이만 반복한다.
<갈매기>는 이해관계로 둘러싸인 상황을 쉽사리 재단하지 않는다. 즉, 오복의 복잡한 심리부터 시작해서 그녀뿐 아니라 생활고에 시달리는 주변인들의 사연까지 담아낸다. 오복을 성폭행한 기택은 시장 공동체를 이끄는 주축이라는 이유로, 상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오복과 친하게 지냈던 상인들은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 그들은 보상금을 타낸다는 명목으로 오복의 편에 서는 걸 주저한다. 기택이 경찰서를 들락날락하게 된다면, 그를 중심으로 권리를 쟁취하려는 상인들의 공동체가 와해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그들은 정당한 보상을 챙길 수 없을지도 모른다. <갈매기>는 오복의 서사를 따라가는 영화임에도 한편으로는 그녀만의 이야기에만 몰두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클로즈업으로 인물의 내면을 환기하는 상황 또한 종종 등장하지만, 많은 장면에서 현실감을 한껏 부각하여 영화가 감상적으로 매몰될 가능성을 줄여나간다. 이 영화는 따라서 음악을 지운 자리를 현실과 맞닿은 퍽퍽한 요소들로 빼곡히 채운다.
<갈매기> 스틸컷 © 영화사 진진
강렬하게 부각하는 그 순간
소외된 타자의 사연에 주목하는 영화의 골격에서부터 제법 디테일한 영역까지 면밀히 따져봤을 때, <갈매기>에는 기존의 영화들을 참고한 지점들이 제법 보인다. 따라서 <갈매기>는 섬세하긴 하나 독창적이진 않다. 그럼에도 우리가 <갈매기>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 영화의 결단에 있다. 고군분투에도 불구하고, 오복은 따스한 관심과 위로는 커녕 볼멘소리와 따가운 시선을 마주한다. 이후 오복은 결심한다. 오복은 불특정 다수를 향한 시위의 방식으로 억울함을 호소하는 대신 자신을 성폭행한 가해자 기택에게 호소문을 보여준다. 이 순간 카메라는 관계의 층위를 확장하는데, 오복을 바라보는 기택의 시점이 아니라, 정면 구도에서 오복을 응시하고, 오복 또한 카메라를 응시하는 듯한 오묘한 시선으로 관객과 대면한다.
다시 말해 <갈매기>는 시종 관조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관객에게 요청한다. 현실을 차마 벗어나지 못해 그저 맴돌 수밖에 없는 갈매기. 이 갈매기 오복이 선택한 행위가 카메라를 매개로 관객에게 가닿는다. 관객이 확인할 수 있는 건 종이 속의 내용도 아니고, 기택의 표정도 아니고, 오로지 오복의 얼굴이다. 오복은 기택을 향해 피켓을 들고 있지만, 카메라는 그 행위를 스크린 바깥의 관객이 목도하는 것으로 치환한다. 기택의 자리를 관객으로 대체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를 통해 <갈매기>는 분명하게 묻고 있다. 오복의 인생을 망쳐놓고, 난관에 봉착하게 만든 걸로도 모자라 무심하게 방관하기까지 하는 섬뜩한 공동체는 영화 속에만 존재하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목소리를 내는 데 어려움을 겪는 소외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할 공동체는 바로 스크린 너머에 있는 현실 속의 관객들이 아닐까.
<갈매기> 스틸컷 © 영화사 진진
본 콘텐츠는 '씨네랩'으로부터 초청 받은 '영화 <갈매기> 언론/배급 시사회'를 통해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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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인은 없지만 엘리베이터에 있는 사람들은 죽게 됩니다 [반전리뷰/결말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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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카바티 : 극락축구단 - FC안양을 되찾기 위한 작은 움직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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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영상은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써 7월 31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수카바티 : 극락축구단]의 개봉전 시사회를 참여한 뒤 제작된 영상입니다.
“아주 붉은 것은 이미 보라색이다” 잃어버린 팀을 되찾기 위한
FC안양 서포터즈 RED의 네버 엔딩 러브스토리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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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설계자> 메인 예고편
"정말 우연이라고 생각해요?” 의뢰받은 청부 살인을 사고사로 조작하는 설계자 ‘영일’(강동원) 그의 설계를 통해 우연한 사고로 조작된 죽음들이 실은 철저하게 계획된 살인이라는 것을 아무도 알지 못한다. 최근의 타겟 역시 아무 증거 없이 완벽하게 처리한 ‘영일’에게 새로운 의뢰가 들어온다. 이번 타겟은 모든 언론과 세상이 주목하고 있는 유력 인사. 작은 틈이라도 생기면 자신의 정체가 발각될 수 있는 위험한 의뢰지만 ‘영일’은 그의 팀원인 ‘재키’(이미숙), ‘월천’(이현욱), ‘점만’(탕준상)과 함께 이를 맡기로 결심한다. 철저한 설계와 사전 준비를 거쳐 마침내 실행에 옮기는 순간 ‘영일’의 계획에 예기치 못한 변수가 발생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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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킹스맨 : 퍼스트 에이전트> 30초 예고편
역사상 최악의 폭군들과 범죄자들이 모여
수백만 명의 생명을 위협할 전쟁을 모의하는 광기의 시대.
이들을 막으려는 한 사람과
그가 비밀리에 운영 중인 독립 정보기관,
‘킹스맨’의 최초 미션이 시작된다!
베일에 감춰졌던 킹스맨의 탄생을 목격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