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두codu2021-12-23 21:30:27
아빠는 보이지 않아도 언제나 곁에 있을거야
우베르토 파솔리니 감독의 영화 <노웨어 스페셜>(2021)
해당 리뷰는 씨네랩의 초청을 받아 관람 후 작성했습니다. :)
노웨어 스페셜
존(제임스 노튼)은 서른네 번째 생일을 맞았다. 그의 서른다섯 번째 생일은 아마 오지 않을 것이다.
창문 청소부로 일하고 있는 존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고, 네 살짜리 아들 마이클(다니엘 라몬트)에게는 새로운 가정이 필요하다.
마당이 있는 넓고 좋은 집, 많은 아이들이 함께 생활하는 집, 아이를 바라는 다양한 후보들 사이에서 존은 망설인다.
마이클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는 중대한 결정을 자신이 내려도 괜찮을까. 마이클은 아빠의 죽음과 새로운 가족과의 만남을 점차 이해하기 시작한다.
훗날 자신의 부모를 궁금해할 마이클을 위해 ‘기억 상자’에 물건들을 하나하나 담듯이 영화는 존과 마이클의 마지막 여정을 한 장면 한 장면 소중히 눌러 담는다.
죽음을 말하는 방법
우베르토 파솔리니 감독의 전작 <스틸 라이프>(2014)는 누구나 홀로 감당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죽음 앞에서 삶과 사람의 소중함을 이야기했다.
이번 영화 <노웨어 스페셜>은 예견된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을 담는다. 존의 마지막이기도 하지만, 마이클의 새로운 시작을 위한 준비다.
아이의 눈높이에서 바라본 죽음은 회색 하늘로 날아간 빨간 풍선과도 같다. “슬픈 게 아니라 그냥 없어”져서 보이지 않는 것.
마이클은 동화책과 빨간 풍선, 움직이지 않는 딱정벌레를 통해 죽음을 이해한다. 감독은 누군가의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지속되는 삶에 더 집중한다.
<스틸라이프>가 죽음 이후에 삶을 되짚어 보았다면, <노웨어 스페셜>은 죽음의 앞에 선 채로 삶을 응시하고, 죽음 이후에 남는 것을 찾아내려 하는 영화다.
존의 희망
아이를 버리고 떠난 엄마와 너무 일찍 죽어버린 아빠. 존은 마이클이 친부모를 잊기를 바라는 동시에 자신을 "창문 청소부로" 기억하기를 바란다.
마이클을 위한 기억 상자에도 창문 청소도구는 빠지지 않고 담긴다. 창은 존재하되 보이지 않아야 한다.
존은 자신이 보이지 않더라도 마이클이 자신의 존재를 기억해주기를 바란다.
존에게 있어 유리창은 현실과 이상의 경계이다. 창의 존재조차 잊을 정도로 깨끗이 닦아낸 창문 너머의 풍경은 그가 닿을 수 없는 희망을 담고 있다.
창 너머의 단란한 가족, 장난감으로 가득한 아이의 방, 교복을 입은 아이. 창 너머의 삶과 행복은 존이 바라던 삶의 모습이다. 손에 닿을 듯 보이나 창문 너머로 갈 수는 없다.
존의 생일 케이크에 마이클은 서른네 개의 초를 꽂는다. 그리고 붉은색 초 하나를 존에게 건넨다.
존은 그 초를 꽂은 서른다섯 번째 생일 케이크를 볼 수 없지만, 마이클의 곁에 있기를 바란다.
타오르지 못할 붉은 초 하나는 기억 상자에 고이 담긴다.
마이클을 위한 기억 상자는 마이클이 행복하기를 바라고, 자신을 잊지 않기를 바라는 존의 희망이 담겨 있다.
For Michael, 마이클에게
존과 마이클은 서로를 깊이 바라본다. 서로의 모습을 한순간이라도 더 눈에 담겠다는 듯이 말이다. 우베르토 파솔리니 감독이 두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사려 깊음이 묻어난다.
두 사람이 대화를 시작하면 카메라는 말을 끊지 않고 지그시 바라봐준다. 서로의 얼굴은 가까운 클로즈업으로 자세히 본다.
존의 수척하고 푸석한 얼굴과 마이클의 섬세한 표정 변화를 느낄 수 있다. 마이클은 존의 병세가 악화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본다.
거칠고 고통스러워하는 얼굴과 떨리는 손을 본다. 존은 마이클의 옅은 미소와 뾰로통한 입술로 표현되는 미세한 감정의 변화를 응시한다.
두 사람이 함께 할 때는 정다운 투샷을 놓치지 않는다. 두 사람의 모습을 소중하게 담아 간직하려는 것처럼.
존은 마이클이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것을 기억 상자에 담는다. 영화 <노웨어 스페셜>은 그 자체로 두 사람을 위한 하나의 앨범 혹은 '기억 상자'와도 같다.
떠나는 사람도 남는 사람도 서로를 기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시선으로써 서로의 기억을 존재 깊숙이에 각인한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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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들리 스콧은 왜 로마 신화를 소환했을까?
할리우드 대표 거장 리들리 스콧은 여전히 배고프다. 아흔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의 나이가 숫자에 불과하다는 걸 증명하는 듯, 백전노장은 해마다 신작을 선보이며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올해 리들리 스콧은 두 편의 영화 엔딩 크레딧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SF호러 장르의 시초이자 1편 감독을 맡았던 '에이리언' 시리즈의 스핀오프 '에이리언: 로물루스' 제작에 참여했고, 11월에는 24년 만에 속편으로 컴백한 '글래디에이터 2' 메가폰을 잡았다.
전혀 다른 장르의 두 작품인데 하나의 교집합을 형성하고 있다. '에이리언: 로물루스'와 '글래디에이터 2' 모두 로마 건국 신화를 영화 소재로 삼은 것. 그동안 연출작들을 통해 진보적인 성향과 메시지를 전달해 온 리들리 스콧이었기에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는 왜 로마 건국 신화를 소환했을까?
본론에 들어가기 앞서, 로마 건국 신화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로마의 건국자로 알려진 로물루스와 레무스 쌍둥이 형제는 권력을 뺏길까 두려워한 아물리우스 왕 때문에 태어나자마자 티베리스 강에 버려졌으나 지나가던 암컷 늑대에 의해 목숨을 건졌다. 이들은 암컷 늑대의 젖을 먹으며 자랐고, 이후 양치기 손에 발견돼 양치기로 자랐다.
훗날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쌍둥이는 세력을 키워 자신들을 죽이려 했던 아물리우스를 죽이고 새로운 도시를 세우기로 했다. 하지만 도시 건설을 둘러싸고 형제간 반목하게 됐고, 이는 전쟁으로 번졌다. 이 전쟁에서 동생 레무스가 사망하고, 형 로물루스는 자신의 이름을 따 도시 이름을 로마로 명명하며 초대 국왕이 됐다.
왕국을 건설했지만 주민 수가 부족했다. 로물루스는 도망자, 망명자들을 받아들이며 남성 수를 늘렸으나, 여성의 숫자는 여전히 부족한 상태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이웃국가들에게 혼인관계를 맺자고 청했지만 전부 거절당했다. 이에 로물루스는 이웃의 사비니인들을 초대해 여성들을 납치하고 나머지를 추방시켰다. 이는 로마-사비니 전쟁으로 이어졌고, 사비니 여성들이 직접 중재에 나서면서 휴전을 맺고 양 국가는 공동 통치체제를 갖췄다
(※ 로마 건국 신화는 다른 신화들처럼 여러 가지 버전으로 전해져 오고 있으니, 참고하길 바랍니다.)
'에이리언: 로물루스'의 로마 건국 신화: 생존을 위해 서로 죽이거나 힘을 합치는 형제
이제 '에이리언: 로물루스'(이하 1.5편) 이야기를 해보겠다. 1.5편은 연출을 맡은 페데 알바레즈 감독이 '에이리언' 1편을 만든 리들리 스콧을 찾아가 아이디어를 주고받으며 스토리를 개발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로마 건국 신화를 스토리라인 기반으로 삼았다.
1.5편이 제작되기 앞서 '에이리언' 시리즈의 프리퀄 '프로메테우스'에서 로마 신화를 차용한 바 있다. '에이리언' 세계관에서 대립하는 인류와 에이리언은 창조주(엔지니어)에 의해 탄생한 피조물이며, 이를 한 배에서 같이 태어난 로물루스&레무스 형제로 빗댄 것. 쌍둥이 형제가 왕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듯, 두 종족은 생존, 최상위 포식자 자리를 위해 서로를 죽이며 경쟁하는 관계가 됐다. 그래서 '에이리언' 시리즈 내내 두 종족의 혈투가 이어진다.
1.5편에선 쌍둥이에게 젖을 물린 늑대의 존재가 등장하는데, 바로 우주 거대기업 웨이랜드 유타니. 이들은 우주를 지배하는 데 주요 원동력인 자본과 힘을 앞세워 인간을 통제하고 동시에 케인의 자식(인간형 에이리언)이 화석화된 고치를 회수해 에이리언 유전자를 연구개발했다. 웨이랜드 유타니가 키워낸 쌍둥이 형제들은 침범해선 안될 영역을 넘어버리면서 처절한 생존싸움을 벌인다.
여기에 웨이랜드는 자신들이 그토록 원했던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합성체(오프스프링)까지 등판시키며 또 다른 쌍둥이 형제(인간-오프스프링 혹은 에이리언-오프스프링)를 양산했다. 이들의 유혈이 낭자하는 골육상쟁으로 인해 르네상스 우주기지는 참혹한 현장으로 변모한다.
동시에 1.5편의 주인공 인간 레인(케일리 스페이니)-합성인간 앤디(데이비드 존슨)의 관계성을 통해 로물루스-레무스 형제 신화를 뒤집는다. 영화 중간에 서로를 배신하는 상황이 발생했지만, 이들은 오래전부터 이어온 끈끈한 유대를 재확인한 뒤 힘을 합쳐 에이리언들의 위협에서 벗어나 '낙원' 이바가로 향하는 엔딩을 맞이한다. 상대방을 희생하여 경쟁에 우위를 점하는 살해 대신 공존이라는 새로운 해법을 찾아냈다.
'글래디에이터 2'의 로마 건국 신화: 형제의 갈등과 봉합, 그리고 정당성 확보
리들리 스콧의 '글래디에이터' 시리즈는 실제 인물과 역사를 일부 차용했을 뿐 자신의 상상으로 만든 '고대 로마 판타지'다. 1200년 간 존속한 로마의 역사에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 3세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선택한 건, 21세기 오늘날과 닮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콤모두스(호아킨 피닉스, 1편)와 카라칼라(프레드 헤킨저)-게타(조셉 퀸) 형제는 국가운영을 뒷전으로 두고 유흥에 빠졌으며, 대규모 검투 대회를 열어 군중의 시선을 콜로세움에서의 피비린내 나는 유희로 돌려놨다. 이 여파로 로마는 부정부패가 일상화되어 나라 전체가 피폐해졌는데, 마치 대중매체, 미디어를 장악하여 3S 정책처럼 자극적인 오락거리로 국민들을 좌지우지한 현대 정치 엘리트들과 맞닿아있다. 이렇게 보면, 리들리 스콧은 '글래디에이터'를 통해 황혼에 접어든 현대 민주주의와 대중의 속성을 비판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때 일개 검투사인 막시무스(러셀 크로우, 1편)-루시우스(폴 메스칼, 2편) 부자가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며 주최자(황제)에게 대항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지니게 된다. 이들은 단순히 콜로세움의 스타를 넘어 로마 공화정으로 되돌리려고 하는 'SPQR'(로마의 원로원과 시민, 로마 공화정을 상징함)의 아이콘으로 등극하게 된다. 리들리 스콧이 무리수를 두는 역사왜곡까지 감행한 건, 영웅의 힘을 빌려서라도 무너진 대중민주주의를 바로잡고 올바른 공론이 회복됐으면 하는 자신의 이상주의가 반영된 것이다.
그중 카라칼라-게타 형제는 로물루스-레무스 형제와 오버랩됐다. 형제가 서로 의지하고 연대하며 국가를 다스리긴 하나, 시간이 지날수록 카라칼라는 게타가 자신에게 위협이 될 것이라고 의심을 키웠다. 결국 그는 동생을 살해하게 되는데, 서로 힘을 합쳤다가 생존 경쟁 때문에 동생 레무스를 공격하여 죽인 형 로물루스의 모습이 보였다.
2편 후반부 시퀀스인 새 황제 마크리누스(덴젤 워싱턴)가 이끄는 황실 근위대와 루시우스를 따르는 군단이 일촉즉발 대치 하는 장면 또한 마찬가지. 로마의 상징인 카피톨리노 동상이 설치된 성문을 경계로 양 군단이 갈라서있는데, 뜻을 함께 하던 같은 편이었다가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누고 전쟁을 벌이게 된 쌍둥이 형제를 연상케 했다.
여기에 루시우스와 마크리누스 1대 1 듀얼 결투는 권력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택한 형제의 혈전이었고, 결국 루시우스가 갈등을 끝내고 하나의 사회를 통합하는 레물루스가 되었다. 이렇게 리들리 스콧은 로마 건국 신화를 하나의 장치로 활용하여 자신의 메시지를 관철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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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F 데일리] 판빙빙×이주영,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조합!
녹야/Green Night
Hong Kong, China/2023/92min
한슈아이 감독/'갈라 프레젠테이션' 세션
5일 오후 2시, 부산 KNN타워 KNN시네마에서 〈녹야〉 기자회견이 열렸다. 〈녹야〉는 한슈아이 감독이 연출하고 판빙빙, 이주영 배우가 주연을 맡은 영화로, “거장 감독의 신작 또는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화제작”을 소개하는 부산국제영화제 ‘갈라 프레젠테이션’ 초청작이다.
〈녹야〉는 여성 로드무비다. 인천항 여객터미널 검색대에서 일하는 진샤(판빙빙). 그녀는 어딘가 지쳐 보이는 얼굴이다. 진샤의 얼굴에는 짜증과 권태를 넘어선 체념의 표정이 깃들어 있다. 그런 그녀 앞에 초록머리(이주영)가 나타난다. 평범한 옷차림이지만 그를 뚫고 나오는 에너지를 가진 초록머리는 표정과 행동(그리고 이를 비추는 카메라 워크)에서부터 자신이 진샤에게 어떠한 변화를 가져다 줄 것임을 암시한다.
진샤는 영주권 취득 문제로 폭력적인 남편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고, 초록머리 역시 마약을 유통하는 남자친구 때문에 몰래 이를 운반하는 일을 하는 중이다. 즉 그녀들은 모두 남자에게 구속당하는 동시에 그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두 여자의 만남은 어떠한 변화를 촉발해낸다. 그리고 새로이 시작된 변화에서 두 사람은 남자를 매개하지 않은, 즉 위태롭지만 매혹적인 날 것의 자유를 마주한다.
매사에 조심스럽고 조용한 성격의 진샤와 모든 일에 즉흥적이고 본능대로 행동하는 초록머리. 영화는 가난과 폭력 속에서 살아온 두 여자가 만들어내는 로드무비의 질감을 과감하고 풍성하게 담아낸다. 지금껏 대체로 화려하고 강단 있는 캐릭터를 연기해온 판빙빙이 수수한(혹은 초췌한) 맨얼굴로 선보이는 감정 연기와 진샤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이주영의 새로운 매력이 잘 어우러지는 영화다. 〈녹야〉는 퀴어 캐릭터의 재현, 과도한 상징과 암시, 여성 로드무비 클리셰의 반복 등에서 아쉬움을 남기기도 한다. 그러나 〈녹야〉의 과한 선명성은 〈델마와 루이스〉 이후 수없이 변주되어온 여성 로드무비를 아껴온 장르 팬들에게는 장르의 문법과 상징을 극대화하여 최대치로 맛보게 해주는 영화로 기억될 수도 있을 것이다.
기자회견에서 배우와 감독은 한목소리로 조심스럽고 얌전한, 마음에 숨긴 게 많은 여성 진샤와 그녀와는 완전히 다른 매력의 초록머리가 서로에게 끌리며 겪는 변화를 이 영화의 매력 요소로 꼽았다. 이 모든 걸 설득해내는 것은 두 배우의 연기다. 판빙빙은 〈녹야〉가 “여성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하는 영화”라며, “여자들은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이를 직면하고 해결하며 다른 여성을 도울 수 있다”고 말했다. 〈녹야〉를 별 망설임 없이 선택했다는 그녀는 영화가 서로 다른 두 여성의 관계를 다룸으로써 사랑을 한층 더 다원적으로 발전시켜 표현했다는 점에 만족감을 표했다.
기존과는 다른, 도발적이고 관능적인, 때로는 동물적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초록머리를 연기한 이주영은 〈녹야〉 출연 제안을 수락하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고 고백했다. 자신이 이 역할을 소화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두 여자가 고난을 헤치고, 달려 나가는 영화가 있다면 그 영화를 보고 싶고, 출연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녹야〉에 합류했다고 밝혔다. 출연 여부를 고민하던 중 판빙빙의 진심을 담은 손 편지 덕에 〈녹야〉에 대한 감독과 배우의 열정을 전달받아 최종 결정하게 되었다는 점도 덧붙였다.
코로나 팬데믹이 절정이던 시기에 촬영했기에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다는 〈녹야〉는 스토리와 메시지뿐 아니라 제작 과정 역시 하나의 도전이었다. 판빙빙은 이 어려움을 이겨낸 현장 스태프 대부분이 여성이었다는 점을 들어 〈녹야〉를 완성해낸 힘도 여성의 역량에 있었다고 강조했다.
진샤와 초록머리가 마주한 체계적이고, 구조적이며, 만연한 (남성) 폭력 앞에서 둘은 종종 무너지고 때로는 꺾이기도 했다. 하지만 끝내 그 누구도 앗아갈 수 없는 둘 만의(여성들만의) 경험과 감정에 기반해 전에 없던 초록빛 밤을 만들어냈다. 여성 로드무비의 2023년판 버전이자 판빙빙, 이주영 두 배우의 변신과 케미가 빛나는 〈녹야〉, 2023 베를린영화제 파노라마 부문에 초청된 이 화제작을 부산에서 즐겨보길 권한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을 통해 기자로 초청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는 10월 4일부터 10월 13일까지 진행됩니다. 영화 상영 시간표와 상영작 정보는 아래의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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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앤서니, 영화는 시(poetry)이자 모호함(ambiguity)이다." 저는 항상 그런 식으로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늘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브레이킹 아이스> 안소니 첸 감독 인터뷰 (2)
1편에서 이어집니다.
씨네랩 | 특히, 전작 <일로 일로>는 감독님의 자전적 이야기라고 들었는데요. 감독님의 작품들은 언제나 사적인 감정에서 출발하지만,그 안에 보편성이 녹아있는 것 같습니다. <브레이킹 아이스> 역시 본인의 청춘과 닮아 있는 지점이 있을까요? 더불어, 개인적인 기억을 영화로 확장시킬 때 가장 중시하는 것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안소니 첸 | 솔직히 말해서 <브레이킹 아이스>가 제 청춘을 많이 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저는 이 시대의 청년들을 담아내려고 했고, 그 세대가 제 세대와는 정말 많이 다르다고 느꼈거든요. 저는 80년대에 태어났지만, 90년대나 2000년대 이후에 태어난 젊은 세대와는 정말 다르다고 생각해요. 70~80년대 세대는 정말 열심히 일하고 결코 포기하지 않는 세대였어요. 그냥 계속해서 나아가고 또 나아가는 세대였죠. 그래서 저는 요즘 중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유행하는 '탕핑(躺平, 누워서 산다)' 현상이 굉장히 흥미로웠고 궁금했어요. 왜 사람들이 일을 멈추고, 꿈을 멈추고, 기본적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는 걸까? 제 세대는 그렇지 않았거든요. 우리는 계속해서 나아가고 또 나아갔으니까요.
제가 기억하기론, 정신 건강에 대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도 사실 불과 10년 정도밖에 안 되었어요. 예전에는, 예를 들어 상사에게 혼이 나더라도 그냥 참아내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지나갔거든요.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은 “내 정신 건강을 챙겨야 해요”라고 말하는 걸 자주 듣게 돼요. 실제로 포스트 프로덕션 회사에서 회의 중에 어떤 젊은 친구가 갑자기 회의실을 나가더니 우는 걸 보기도 했죠.
이런 차이를 이해해 보려 노력하기도 했고, 특히 영화를 팬데믹 기간 중에 만들었기 때문에 그들의 심리에 더 공감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팬데믹 동안 저도 꽤 우울했거든요. 그 불안감, 우울감, 그리고 환멸감을 저 또한 강하게 느꼈어요. 그래서 이 세대의 청년들과 연결되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아요.
사실 제 청춘은 많이 달랐던 것 같아요. 저는 25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학생일 때 결혼했거든요. 그래서 어떤 모험을 즐긴다거나 삶을 허비하는 식의 시간을 거의 보내지 못했죠. 그래서 이 영화는 저에게 굉장히 즐거운 작업이었어요. 다시 젊어진 듯한 기분이 들었거든요.
또 작품에는 두 개의 내러티브가 있잖아요. 하나는 카메라 앞에서 배우들이 재미있게 연기하는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카메라 뒤에서 저와 배우들이 매일 먹고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 시간이죠. 마치 제가 이 젊은 세대의 일부가 된 것 같았어요. 팬데믹 동안 우울했던 제가 다시 젊음을 되찾은 것 같은…
씨네랩 | 특히, 영화 속 세 인물의 청춘은 모두 다르게 그려지고 있는데요. (꿈에 좌절한 청춘(나나), 타인의 기대에 맞춰 버겁게 달리다 탈이 난 청춘(하이펑), 주어진 삶만 살아내다 의미를 잃은 인물(샤오)를 통해 ‘청춘의 불안’이 다양한 형태로 드러났던 것 같은데, 세 인물 중 가장 공감가는 인물과, 그리기 가장 어려웠던 인물은 누구였는지 궁금합니다.
안소니 첸 | 저는 '하오펑'을 담아내는 게 가장 힘들었던 것 같아요. 정신 질환을 다루는 게 정말 어렵다고 늘 생각했거든요. 우울증이나 정신 질환을 영화에 담아내는 건 어려운 작업이니까요. 그런데 흥미롭게도, 촬영하면서 점점 더 그(하오펑)와 연결되어 갔어요. 우울과 그의 싸움이 제 싸움처럼 느껴졌거든요. 팬데믹 기간에 제가 느끼던 바로 그 감정들과 씨름하고 있었던 거죠.
아시다시피, 저는 정말 그와는 접점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어떤 지점에서 그와 연결된 거죠. 사실 저는 굉장히 긍정적인 사람이라서, 삶이 저를 절대 쓰러뜨릴 수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거야, 계속 갈 거야'라는 식으로요. 그런데 그를 촬영하면서, 이 캐릭터가 느끼는 감정들에 깊이 공감하게 됐다는 게 흥미로웠어요. 저는 그게 팬데믹 기간 동안 저 자신, 즉 영화감독으로서 겪었던 위기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게 이 영화를 만들게 된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야만 했어요. 영화관이 문을 닫았을 때, 정말 너무 막막했거든요. 언제 다시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싶어서 너무 혼란스러웠죠. 아시다시피 저는 잔잔하고 절제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에요. 장르 영화나 공포 영화, 대작 같은 걸 만드는 감독이 아니거든요. 흥행 위주의 영화를 만드는 감독도 아니고요. 저는 정말 조용하고 섬세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인데, 사람들이 별다른 사건이 없는 작고 조용한 영화를 보러 극장을 다시 찾게 될 때, 과연 제가 영화감독으로서 계속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거든요.
그리고 그런 이유 때문에, 약간의 위기나 우울증 같은 것에 빠졌던 것 같아요. 아시다시피, 막다른 길에 다다랐을 때, 거기서 벗어나는 방법은 새로운 출구를 찾는 거잖아요. 이 영화가 저에게는 새로운 출구였습니다.
이 영화는 제가 이전에 시도하지 않았던,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만들었습니다. 저 자신에게 말했어요. 제 첫 두 편의 영화는 싱가포르에서 만들었는데, 이제 제가 안전하고 편안함을 느끼는 고향으로 돌아가, 저에게 익숙한 공간에서 영화를 만들지 않을 거라고 저 스스로 다짐했거든요. 그래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낯선 땅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기후에서 영화를 만들도록 스스로 다그쳤습니다. 같이 일해본 적 없는 새로운 스태프들과 함께 영화를 만들었고요. 익숙한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보통은 늘 같은 조감독이나 같은 배우들 한두 명이 있었고, 편안함을 주는 익숙한 사람들이 있기 있었죠. 하지만 이번엔, 그냥 저 자신을 그 밖으로 끌어냈고, 한 번도 만들어보지 않은 영화를 만들 거라고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했고요.
씨네랩 | 저희는 특히, 단군신화가 등장하는 것도 흥미로웠는데요. 영화가 “불안한 청춘들에게 보내는 러브레터”인 만큼, 100일의 인고 끝에 갈망하던 사람이 된 곰의 서사가 청춘에게 위로를 건네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감독님께서는 타국의 신화의 어떤 지점이 흥미로웠는지, 극으로 발전시키는데 고민은 없으셨는지 그 과정이 궁금합니다.
안소니 첸 | 음, 중국엔 ‘장백산’이 있고, 아시다시피 한국에는 ‘백두산’이 있잖아요. 산을 처음 본 순간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었어요. 저와 제 프로듀서가 함께 그 산을 올랐던 기억이 나는데, ‘천지’라고 불리는 호수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더라고요. 정말 감동적이고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저는 이걸 꼭 영상으로 담고 싶었고, 이곳을 배경으로 쓰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 산에 대해 조사를 많이 해봤는데, ‘곰’에 관한 이 전설과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됐죠. 그리고 유명한 한국 노래 ‘아리랑’과도 연결되어 있고요. 그 신화에 대해 더 자세히 읽어봤을 때, 사실 예전에도 들어본 적은 있었지만 모든 세부 사항은 알지 못했거든요.
그런데 곰이 인내하고 견뎌내서 결국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했다는 사실에 너무나 감동했어요. 정말 시적이고 감동적이라고 느꼈습니다. 저는 그걸 현실로 가져오고 싶었어요. 그래서 대본을 쓸 때, ‘우리는 그냥 전설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게 아니라, 직접 곰을 보여줄 거야’라고 생각했죠. 그리고 정말 그렇게 했고요. 저는 ‘나나’라는 인물의 캐릭터와 이 ‘곰’ 사이에 어떤 유사점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 같아요. 나나가 자신의 실패를 마주해야 하는데, 그 서사에서 위안을 얻거든요. 저는 그 경험에 믿을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감동적인 무언가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네, 저는 그 신화가 지닌 문화적, 정치적 의미나 부담 같은 건 크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제게는 그 신화 자체, 그 전설 자체가 개인적으로 너무나 감동적이었거든요. 그리고 그 ‘곰’을 영화 속에 데려오는 건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씨네랩 | 그리고 영화에 아리랑이 등장하죠. 아리랑을 듣는 세 청춘의 모습을 보면서, ‘승화’라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승화’는 에너지를 전환하는 개념인 만큼, 물리적, 심리적인 측면에서 모두 활용되는데요. 그런 측면에서, 감독님이 영화를 비유할 때 사용하신 얼음이 가지는 물리적인 성질과 세 인물들이 여러 경험을 통해 얻는 심리적인 변화가 맞물려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한’을 담고 있는 아리랑이 정말 알맞은 곡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감독님께서는 ‘한’과 ‘아리랑’을 어떻게 알게 되셨는지, 어떤 의미로 선택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안소니 첸 | 네, 백두산에 관한 글을 읽어보다가, 그 민요(아리랑)가 백두산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아리랑은 여러 버전이 있잖아요. 그런데 아주 초기 버전에 ‘가장 추운 겨울에도 백두산에는 꽃이 피어난다’는 구절이 있었어요. 그 구절이 너무 감동적이었고, 영화에 꼭 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캐스팅팀에게 이 곡에 맞는 목소리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죠. 그들이 그 가수를 찾아주었고, 그녀를 캐스팅하고 녹음을 진행했어요. 저는 노래가 위로가 되면서도 동시에 좀 애절하고, 씁쓸한 느낌이 들게 불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복합적인 방식으로 당신을 감동시키는 목소리를 찾는 게 중요했습니다.
제가 항상 믿어왔던 것이기도 하고, 영화 학교 시절, 파벨 파블리코프스키라는 정말 훌륭한 폴란드 감독님께 배웠죠. 그는 영화 <이다>로 오스카를 받았고, 칸에서도 상영된 <콜드 워>라는 영화를 만들었죠. 그분이 영화 학교에서 저에게 늘 말씀하셨어요. "앤서니, 영화는 시(poetry)이자 모호함(ambiguity)이다." 저는 항상 그런 식으로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늘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합쳐질 때 영화는 정점에 도달할 수 있죠. 제가 하려고 했던 것도 바로 그거였습니다. 저는 항상 시와 모호함을 찾으려고 노력해요. 그리고 그 모호함은 '이건가? 아니면 저건가?' 같은 질문에서 오는 거죠. 흑백처럼 명확하지 않다는 거예요. 영화의 아름다움은 바로 그 '회색 지대'에 있을 때 나타나죠. 뭔가 깊은 감동을 받았지만, 완벽히 이해하거나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는 그런 지대요.
그게 파벨 감독님이 학교에서 저에게 가르쳐주신 거고, 아, 사실 저는 최종 편집본을 확정하기 전에 항상 감독님께, “감독님, 바쁘신 거 알지만, 편집을 마쳤어요. 2일 안에 봐주실 수 있나요? 제가 최종 편집본을 확정해야 해서요.”라고 말하며 편집본을 보내드려요. 그리고 감독님은 항상 저를 위해 그렇게 해주셨습니다.
씨네랩 | 감독님께서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국제적인 성공을 거두셨는데, 이 부분이 이후의 작품 활동에 영향을 끼친 부분이 있을까요? 질문 드린 이유는, 감독님께서는 작품 간 텀이 긴 편인데, 작품 구상이나 시나리오 작업 등을 긴 호흡으로 작업하는 걸 선호하시는 걸까요?
(*안소니 첸 감독은 2013년 영화 <일로 일로>를 통해 칸 영화제에서 황금 카메라상을 수상했다.)
안소니 첸 | 예전에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작업하곤 했어요. 그래서 이 영화가 정말 특별한데, 어느 순간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충동이 확 일어났거든요. 팬데믹 동안 2년 내내 집에만 앉아 있는 게 너무 지겹고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영화감독으로 존재해야 해. 내가 아직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걸 느껴야 해'라고 스스로에게 말했죠.
그리고 이번에 처음으로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고 중국에 있는 제 프로듀서 파트너에게 연락해서 "영화 만들 겁니다!" 했더니, 그가 "무슨 영화요? 대본 있어요?" 묻더라고요. "아니요" 했죠. 정말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했는데, 정말 미친 일이었어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아이디어가 있었고, 한겨울인 12월에 촬영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게 8월이었습니다! 12월 1일에 촬영을 시작했는데, 아이디어는 8월에 떠올렸고, 10월 4일에 중국으로 날아갔어요. 그리고 21일 동안 격리까지 해야 했죠. 그 이후에 백두산을 직접 오르고, 연길의 모든 장소를 답사했습니다.
그리고 배우들을 제가 직접 전화로 캐스팅했어요. 중국에서 정말유명한 배우들이라 보통은 굉장히 바쁘거든요. 그런데 팬데믹 기간 중에는 사람들이 비교적 한가하다는 걸 알게 됐죠. 일이 줄었으니까요. 그래서 제가 말 그대로 전화해서 "영화를 만들고 싶은데, 12월에 시간 되세요?" 했더니 그들이 "네" 하더라고요. 아마 농담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사실 답사까지 마친 다음에도 완전한 대본이 없었어요. 조금 더 확장된 스토리와 트리트먼트 정도만 있었죠. 그리고 상하이로 돌아갔는데, 배우들이 다 저를 만나러 날아왔던 게 기억나요. 다 같이 점심을 먹었습니다. 세 명 모두요. 중국에는 개별 룸이 많은데, 거대한 원형 테이블에 주동우 배우를 비롯해서 세 배우가 앉아 있었죠. 그들 뒤편에는 매니저들이 있었고요. 점심을 먹는데 그들이 묻더라고요. "그래서 대본은 있나요?" 그때는 이미 10월 말이었죠.
아직 대본이 완성되지 않았다고 말하자, '아, 그럼 스토리가 뭐예요?' 이런 분위기였죠. 그래서 제가 스토리를 들려주기 시작했어요. '피겨 스케이터가 있는데, 투어 가이드로 일하고... 그리고 누구랑 같이 산에 올라가는데, 그러고 나면 이런 일이 벌어지고, 곰을 만나고... 그리고 아주 감동적인 순간이 있고... 그리고 이런 일이 벌어지고...' 이런 식으로 장면들을 묘사해줬어요. 어떤 장면은 대본이고, 어떤 장면은 그냥 제 머릿속에 있는 거였죠.
그리고 마지막에 그들이 저를 보더니 '와, 정말 시적이고 감동적으로 들리네요. 그런데 대본이 없잖아요?'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아직도 기억나는데, 그들에게 물었죠. "그래도 이 영화 하실 거예요?" 그랬더니 다들 "네" 하는 겁니다! 그 모습을 보고 매니저들은 다들 "아아아아..." 이런 표정을 하고 있었어요. ‘완전히 망할 수도 있겠다.’ 라고 생각했던 거죠. 이렇게 모든 사람들을 설득한 거죠.
결국, 촬영 10일 전까지 아무도 대본을 읽지 못했어요. 제가 촬영 10일 전에 최종 대본을 완성했거든요. 그때 연길에 있었는데, 12월 1일에 촬영을 시작했으니 11월 한 달 내내 연길에 있었던 거죠.정말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11월 20일 오전 9시에 대본을 끝냈습니다. 잠을 안 잤죠.
낮에는 장소 답사를 하고 회의를 하면서, 대본을 쓰고 쓰고 또 썼죠. 그 사이에 배우들이 베이징에서 연길로 출발했고, 매니저들이 '지금 출발하는데, 대본을 볼 수 있을까요?' 묻는 겁니다. 프로듀서는 '아, 아직 대본이 준비가 안 됐어요. 10시에 드릴게요'라고말했고, 배우들이 탄 비행기가 오후 3시에 도착했죠. 마침내 제 대본이 완성되었을 때, 팀 전체가 복사하느라 바빴습니다. 아무도 대본을 읽어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복사하고 복사하고 또 복사하고... 그리고 저녁 7시가 됐죠.
호텔 방에 배우들, 촬영 감독, 프로듀서, 각 부서 팀장들, 미술 감독까지 다 같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대본을 처음으로 읽었죠. 특히 배우들이 대본을 읽고, 또 읽고, 많이 읽더라고요. 많이 다른 캐릭터들이니까요. 그리고 마지막에 촬영 감독님이 "와, 이거 정말 감동적이고 아름답네요"라 말했고, 저는 "좋아요, 그럼 이제 촬영합시다!" 외쳤습니다. 네, 촬영 시작 10일 전에 대본이 완성되었던 거였죠.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에필로그)
인터뷰를 진행하며 안소니 첸 감독님의 MBTI도 살짝 엿볼 수 있었는데요. 확신의 E(외향형)일 것 같았지만, 역시나 E(외향형)이었던 감독님. 관련한 일화도 들어봤습니다.
안소니 첸 | (MBTI 아시나요?) 네, E랑 I 같은 거요. 압니다. 제가 고등학교 16살 때 MBTI 테스트를 해봤어요. 기억은 나는데, 제가 완전 외향형(E)이라는 건 확실히 기억나거든요. 나머지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외향형인 건 분명해요.
제가 만든 영화 중에 가장 미친 영화였어요. 상하이 격리 호텔에서 대본을 쓰기 시작했거든요. 첫 주가 지난 후에, 어느 시점에 싱가포르에 있는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어요. "나 정말 큰일에 휘말린 것 같아. 이 배우들을 다 영화에 참여하게 했는데, 대본이 안 나오고, 완성된 대본을 만드는 게 너무 힘들어." 그냥 '프로젝트 취소한다고 하고, 코로나에 걸렸다고 말해버릴까?' 싶었죠. 코로나 걸렸다고 하는 게 최고 변명이잖아요.
그런데 아직도 기억나는 게, 친구들이 제게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야, 네가 이 미친 영화를 만들겠다고 도전을 시작했으니, 그냥 끝내야지."라고요. 그래서 그냥 밀어붙였습니다.
정말 미친 모험이었죠. 제 인생에서 이런 식으로 영화를 만든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아마 이런 식으로 영화를 만드는 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 같아요. 매일 심장마비 올 것 같았거든요. 아시다시피, 너무 불확실하니까요. 보통은 대본 하나 쓰는 데 2년 정도 걸리거든요? 그런데 어딘가 모르게 정말 자유로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나나의 아파트를 찾고 있었는데, 그래서 여러 부동산 중개인들과 약속을 잡고 다른 아파트들을 보러 다녔던 게 기억나요. 중간중간에 시간이 빌 때, 공원을 하나 봤어요. 공원에 들어가서 현지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보자고 했죠. 그런데 사람 대신 동물들을 발견했어요. 원숭이랑 사슴 같은 게 있더라고요. '이게 뭐지?'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그들이 이곳에 들어가는 장면을 썼습니다. 거기는 동물원이 아니에요. 실제로는 공원인데, 누구나 걸을 수 있는 공공 공원이에요. 도심 한가운데 있는 센트럴 파크 같은 곳이라고 상상해보세요. 동물들이 정말 많았죠. 그래서 밤에 그곳을 배경으로 하기로 결정했어요. 정말 비현실적이었고, 제가 본 모든 것이 영화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제 인생에서 이렇게 즉흥적이었던 적은 없었어요.
좀 미친 짓이었죠. 하지만 스스로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살면서 한 번쯤 미쳐보고 싶다면, 아직 젊을 때 지금 해야 해." 왜냐하면 제가 40대, 50대가 되면서는 이런 종류의 위험을 감수할지 모르겠거든요. 위험을 덜 감수하게 되고, 훨씬 안전하게 가려고 할 테니까요. 그렇죠? 그래서 이런 식으로 영화를 만드는 건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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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르: 러브 앤 썬더 (2022)
** 영화 <토르: 러브 앤 썬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토르: 러브 앤 썬더 (2022)
감독: 타이카 와이티티
출연: 크리스 헴스워스, 나탈리 포트만, 테사 톰슨, 크리스찬 베일, 타이카 와이티티
장르: SF, 액션, 판타지
상영시간: 118분
개봉일: 2022.07.06
토르, 오락영화의 본질을 되새기다
MCU 영화 중 최초로 네번째 솔로무비를 갖게 된 '토르'.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이 각각 은퇴와 사망으로 하차한 이후 '어벤져스 빅3' 중 유일하게 현역 히어로로 잔류한 '토르'의 행보는 세대교체로 이어질지, 새로운 플롯과 함께 영광스러운 은퇴식을 거행할지 귀추가 주목되어왔다. 특히 '토르4'의 타이틀이 <토르: 러브 앤 썬더>로 확정되고, 과거 히로인으로 출연했던 '제인 포스터(나탈리 포트만)'의 복귀가 예고되면서 그녀가 연기하는 '마이티 토르'가 '토르(크리스 헴스워스)'의 뒤를 이어 히어로로 활약하는 작품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실제로 '쉬헐크'나 '케이트 비숍'처럼 현 시대상에 맞춰 젠더 스와프를 표방한 작품들이 MCU 내에서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가능성이 적어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토르: 러브 앤 썬더>는 이러한 의미부여성 스토리에는 관심이 없다. 감독이 연출한 전작(토르: 라그나로크)처럼 스페이스 오페라의 화려한 영상미와 코믹스러운 연출에 포커스를 두며 마블 영화는 본래 어린아이들도 쉽게 즐길 수 있는 대중오락영화였음을 시사한다. 이는 다른 MCU 작품들과 달리 어린아이들을 스토리에 적극 활용한 부분에서 두드러진다. 극중 빌런 '고르(크리스찬 베일)'에 의해 납치된 아스가르드 아이들은 결말부에 썬더볼트로부터 힘을 얻어 괴수들과 직접 맞서 싸운다. 약자인 어린이들은 히어로들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는 클리셰를 깬 부분이다. 최근 개봉했던 마블 영화들이 극중 설정만으로 관객에게 피로도를 증가시켰던 것을 생각하면 현재 MCU의 흐름보다는 가볍게 볼 수 있는 액션오락영화라는 본질에 좀 더 비중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시리즈의 연장 속 답보 상태에 놓인 토르
마블 영화의 초심으로 되돌아가고자 함이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의 의도였다면 본작의 스토리 흐름과 기획 방향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현재 다면적으로 세계관을 확장 중인 MCU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토르: 러브 앤 썬더>는 페이즈4 내에서 아무 기능도 해내지 못한 채 그저 평이한 MCU 시리즈 홍보물에 가까울 정도로 보인다. 히어로물은 보통 트릴로지 정도로 구성되는 게 일반적인데, '토르'는 무려 4편까지 제작되었다. 이는 신화적 성격이 강했던 1-2편과 달리 <토르: 라그나로크>를 시점으로 '토르' 솔로 무비의 스타일이 '코미디+스페이스 오페라'로 완벽하게 변화하였고, <어벤져스: 엔드게임> 이후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일행에 합류하면서 등장인물 중 가장 변화무쌍한 행적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였다. 고향인 아스가르드는 소멸되고, 가족과 소중한 친구들을 잃었으며 '엔드게임'을 끝으로 소행을 다했기 때문에 '토르'라는 인물의 다음 페이지를 새롭게 써내려갈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본작은 '토르'의 성장도, 인상적인 행보도 이끌어내지 못하는 것은 물론 MCU 시리즈 내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감을 가진 히어로 중 하나였던 '토르'의 본래 매력마저 선명하지 못하다. 지금까지의 <토르> 시리즈는 주인공의 성장을 이끌어내는 작품이었다는 점에서 매 편마다 기획의도와 명분이 뚜렷했다. 반면 이번 작품은 가만히 살펴보면 <토르: 라그나로크>의 구조를 그대로 가져온 채 오히려 지금까지 빌드업해온 시리즈를 퇴보시키는 행보를 보인다. 존재감 강한 강력한 빌런의 등장은 '헬라'에서 '고르'로 대체되었으며 부모를 잃은 것에 대한 슬픔으로 가득찼던 '토르'는 추가로 친구와 동생을 잃어 삶의 의미를 상실한 상태의 모습 그대로로 등장한다. 판타지적 배경으로 등장했던 사카아르 행성은 옴니포턴스 시티와 섀도우 렐름으로, 핵심 무기(?)를 손에 쥐고 있던 '그랜드마스터'는 '제우스'로 뒤바뀌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3편과 4편에서 겹쳐보이는 인물이나 장치들이 완벽하게 동일한 포지션에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전작을 떠오르게 하는 요소가 많다는 것은 변함 없는 사실이다. 스토리 면에서는 퇴보했고, '토르'의 서사보다는 히로인인 '제인'과 빌런 '고르'의 이야기가 영화의 중심이 되면서 주인공은 이렇다 할 역할도 하지 못한 채 내내 붕 떠 있기만 하다. '토르'라는 인물 자체로서는 더 이상 써내려갈 성장담이나 이야깃거리가 없는데, 시리즈물을 과하게 연장하다보니 발생한 문제점이랄까. 차라리 본작이 '토르'의 은퇴나 세대교체, 혹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멤버들과 함께 꾸리는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였다면 이렇게까지 맥없는 작품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탈리 포트만, 의미 있는 복귀였나
<토르: 러브 앤 썬더>에서 가장 주목받는 캐릭터는 단연 묠니르를 들고 9년만에 컴백한 '제인 포스터(나탈리 포트만)'이다. '나탈리 포트만'은 <토르> 1-2편에서 히로인으로 활약했지만 이후 제작진과의 의견 충돌로 하차하면서 시리즈에 등장하지 않았다. 작중 설정도 '토르'와 '제인 포스터'가 사귀었다가 결별한 것으로 일단락 되는 듯했다. 하지만 제인은 4편을 기점으로 다시 복귀하였고, 단순히 히어로가 보호해야 하는 여주인공이 아닌 적과 대등하게 맞서는 '마이티 토르'가 되어 돌아왔다. 천문학자인 제인이 묠니르를 들고 근육질 몸매가 되어 적에 맞서 싸우는 장면은 본작의 제일 큰 볼거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마이티 토르'는 결과적으로 제인의 다음 페이지를 기약하기 위한 장치는 아니었고, MCU와의 아름다운 이별을 기리는 일종의 선물 같은 존재였다. 이를 통해 갑작스러운 하차로 일전에 깔끔하게 마무리짓지 못했던 '토르'와의 러브스토리를 정리하고, 두 편이나 히로인으로 등장했던 '제인 포스터'라는 캐릭터를 허투루 쓰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었다. 다만 '토르'와 '제인'의 9년 공백을 채우기 위해 등장한 회상 장면들은 관객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었던 두 남녀의 애정을 전달하는데 역부족이었고, 작중 투샷으로 비춰지는 장면들도 애인보다는 전투 콤비로서의 성향이 더 강했다. 또한 '사랑'이라는 핵심 소재가 '고르'와의 대립이라는 또다른 주요 소재와 맞물리지 못하고 충돌하면서 토르와 제인의 애틋한 관계가 생각보다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즉, 주인공에 비해 상대적으로 수동적인 위치에 놓였던 캐릭터를 전투신에서 전면에 나서 싸우는 캐릭터로 변화시키는 방향으로 이뤄졌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나 그 이상의 의미를 끌어내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나탈리 포트만'이 연기한 '마이티 토르'의 모습은 신선했다.)
황홀한 영상미, 그에 반하는 개그 남발
<토르: 라그나로크>로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우주 곳곳의 영역을 환상적으로 그려낸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은 이번에도 영상미로는 뒤지지 않는 연출력을 선보였다. 특히 토르 일행이 '제우스(러셀 크로우)'를 만나기 위해 찾아간 '옴니포턴스 시티'는 전지전능한 신들이 모인 쾌락의 공간답게 황금빛으로 물들인 장관으로 그려진다. (극장의 큰 스크린으로 본다면 그 시각적 감동은 좀 더 클 것이다.) 마치 십여년 전 MCU 영화에 '아스가르드'가 처음 등장했을 때 느꼈던 황홀감과 비슷했다. 후반부 '고르(크리스찬 베일)'와 전투신이 펼쳐지는 쉐도우 렐름을 피폐한 흑백으로 처리한 것도 빌런의 스산함과 공포스러움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기에 적절했다. 화려한 컬러로 대변되는 '토르'와 흑백으로 표현되는 '고르'의 선명한 대비는 애니메이션 속의 클래식한 선악 구도로 느껴져 이 부분에서도 어린이들을 핵심 타겟으로 잡은 감독의 지향점이 드러났다.
그러나 <토르: 러브 앤 썬더>는 영상미를 빼면 남는 것이 많지 않다. 감독은 <토르: 라그나로크>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개그성 장면들이나 대사들을 수없이 가미했는데, 문제는 의도한 코믹함이 재미있지 않다는 것이다. 본작의 핵심 플롯이 무엇인가. 병마와 싸우다 '마이티 토르'가 되어 마지막 생명력을 다 소진할 때까지 전투력을 불사르는 '제인', 그리고 신들의 외면으로 하나뿐인 딸을 잃고 신에 대한 증오에 사로잡혀 스스로 악당이 된 '고르'의 이야기다. 가볍고 유쾌하게 풀어내기보다는 진지하고 무겁게 접근해야 할 스토리라는 것이다. 제인과 토르의 사랑과 이별이 절절하게 느껴지지 않고, 고르의 결말이 어물쩍하게 이뤄진 것처럼 보인 것도 이 때문이다. 웃으라고 넣은 장면과 대사들이 웃기지도 않고, 영화의 전반적인 톤 자체를 흐렸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는 큰 실책이 되었다.
토르는 다시 돌아온다고 했다...
마지막 쿠키영상에서 보았듯이 '토르'는 다시 돌아온다는 예고편을 날렸다. 시리즈의 후속편이 나올 것이라는 쪽이 가장 가능성이 높겠지만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같은 다른 시리즈물에 등장할 것이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사랑하는 이들을 모두 잃은 토르에게는 자신을 죽이려 했던 고르의 딸, '러브'가 생겼고 부녀가 함께 우주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돕는다는 스토리라인이 추가되어 토르의 후속편을 기약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의 영향일까. 더 이상 '토르'의 이야기가 크게 궁금하지는 않다. 한때 자신을 죽이려 했던 빌런의 아이를 갑자기 키우게 되고, 두 사람이 전투 콤비가 된다는 것은 지금까지 '토르'가 써내려온 이야기 중 가장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토르: 라그나로크>로 급상승되었던 시리즈에 대한 평가가 본작으로 인해 다시 급락하게 되었으니 다음 작품을 내놓을 생각이라면 명분과 방향성이 확실한 스토리를 반드시 갖춰야 할 것이다.
(+)
믿었던 '토르'마저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는 반응을 남김으로써 MCU의 향후 행보가 크게 위태로워질 듯하다. <닥터 스트레인지2>는 <완다비전>과의 연계성과 '멀티버스'라는 설정의 본격적인 도입으로 진입장벽이 높아졌다는 확실한 리스크가 있었고, <이터널즈>는 신생 시리즈라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크게 낮았다. 따라서 극명하게 갈렸던 두 작품의 평가는 어느 정도 이해할 여지가 존재하나 <토르: 러브 앤 썬더>는 많은 이들이 호평을 보장할 만한 시리즈였다. 페이즈3까지만 하더라도 마블 영화들은 절대적인 호평을 받는 추세였으나 페이즈4에 진입하면서 혹평이 지속되고 있다. 물론 계속해서 흥행에는 성공하고 있지만, 이전과 같은 완성도를 구현하지 못하는 현상이 장기화된다면 제아무리 MCU라 할지라도 하락세가 찾아오지 않으리란 법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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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립 투 그리스> 오디세우스의 두 발자국을 쫓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국 유명 배우 '스티브(스티브 쿠건)'와 '롭(롭 브라이든)'은 ‘옵저버’ 매거진의 제안으로 6일 동안의 그리스 여행에 나선다. 터키 아소스를 시작으로 이타카에 이르기까지 <오디세이아> 속 오디세우스의 발자취를 따르는 둘은 동시에 레스보스 섬에서는 레즈비언이라는 단어의 유래, 델포이 신전에서는 신탁을 받는 방법, 아테네 디오니소스 극장에서는 그리스 비극과 희극의 차이 등 온갖 주제로 인생과 예술, 사랑에 대해 토론과 농담을 나눈다. 이처럼 유쾌하던 여행은 스티브가 아들의 예상치 못한 전화를 받고 롭이 아내의 빈자리를 절실히 느끼는 찰나에 뭉클한 인생 여정으로 변모한다.
2010년 <트립 투 잉글랜드>를 시작으로 <트립 투 이탈리아>와 <트립 투 스페인>을 거쳐 2021년 <트립 투 그리스>로 이어지는 마이클 윈터바텀 감독의 '트립' 시리즈는 단순히 유명 관광지를 둘러보는 작품이 아니다. 마치 <꽃보다 청년> 시리즈를 영화관에서 보는 듯한 독특한 매력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을 대표하는 배우 스티브 쿠건과 롭 브라이든이 여러 도시를 여행하며 보는 풍광과 즐기는 음식,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영화는 때로는 극적으로, 때로는 그들 바로 옆에서 함께 여행을 즐기는 것처럼 사실적으로 전달한다.
시리즈의 네 번째 영화인 <트립 투 그리스>도 다르지 않다. 여름날 에게 해의 바다를 수영하는 행복, 다 무너져가는 델포이 신전에서 안개 낀 그리스의 산등성이를 바라보는 벅참과 허무함, 그리스의 자랑인 꿀술에 곁들인 다양한 해산물과 육류 요리의 향연은 당장 영화관을 박차고 그리스로 날아가고 싶은 욕구를 자극한다. 여행지에서의 로맨스와 예상치 못한 만남은 이 모든 경험을 더욱 화려하고 다채롭게 즐기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이 영화를 이국적인 도시와 매력적인 레스토랑, 맛있는 음식 뜨거운 태양과 푸른 바다의 향연만으로는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 <알쓸신잡> 마냥 영국의 시인 윌리엄 워스워즈, 낭만파 시인 바이런과 셸리, 세르반테스와 돈키호테와 같이 특정 인물을 발자취를 따라가며 그에 대한 깊은 대화를 나누었던 전작들처럼, <트립 투 그리스> 역시 터키 아소스에 위치한 트로이 유적지로부터 오디세우스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리스를 대표할 수 있는 수많은 인물들과 영웅들 중 굳이 오디세우스를 여행의 나침반으로 선정한 것은 <트립 투 그리스>에서 가장 흥미로우면서도, 영화를 특별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자타공인 그리스 신화 최고의 영웅인 헤라클레스와 그리스의 수도인 아테네의 시조 테세우스를 비롯해 아르고 호의 원정을 이끈 이아손의 행적을 따라가더라도 영화에서 보여주는 대부분의 장소를 둘러보는 데 사실 아무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에 더욱 의미심장한 선택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두 주인공이 겪는 서로 다른 모습의 삶에 담겨 있다.
성공에 대한 야망이 가득해 유럽 곳곳을 돌아다니던 스티브는 어느새 성인이 된 아들로부터 할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접한다. 즐거운 여행과 로맨스를 즐기다가 갑작스러운 충격에 빠진 스티브에게 이제 그리스는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다. 그리스인들이 저승세계의 입구로 여겼다는 동굴 안에서 그는 자신이 마치 아버지 대신 스틱스 강의 뱃사공 카론이 모는 나룻배를 타는 듯한 불길한 느낌을 받고, 밤에는 영혼들이 영원히 떠돌아다닌다는 아스포델 들판에서 아버지를 만나는 악몽까지 꾼다. 결국 마지막 목적지인 이타카로 향하던 중 부고를 접한 스티브는 급히 아들이 있는, 20년 전에 이혼한 아내와 함께 살았던 집으로 돌아간다.
한편 편안한 여행을 추구하는 롭은 일주일 간 여행을 떠난 것에 불과한데도 끊임없이 가족을 그리워한다. 낮과 저녁을 가리지 않고 딸에게 영상통화를 거는 그는 자신만이 그리스의 미를 즐기는 것이 불편하고, 잠시 집을 떠난 사이 더욱 커지는 아내의 빈자리를 좀처럼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스티브가 영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그는 아내를 마지막 목적지였던 이타카로 불러 멋진 재회를 즐기고, 그녀와 함께 여행을 계속하며 그토록 바라던 소소하고 행복한 일상을 영위한다.
이러한 스티브와 롭의 이야기는 <오디세이아> 속 오디세우스를 구성하는 두 모티브를 각각 나누어 재해석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집으로 가고 싶은 지친 여행자이면서 호기심 가득한 열정적인 여행자라는 두 개의 모티브가 겹쳐진 영웅이고, 그래서 선역도 아니고 악역도 아니며 매우 입체적이고 인간적이기에 가능한 해석이다. 우선 오디세우스는 지친 여행자다. 단순히 트로이에서 10년을 보내고, 바다에서 10년을 떠돌았기 때문이 아니다. 세상 끝에 다다른 항해 중 잠시 들른 저승에서 어머니 안티클레이아의 혼을 만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깊은 슬픔에 빠지기 때문이며, 갓난아기 이후로 보지 못한 아들 텔레마코스가 자신을 대신해 가족을 지탱해야 했던 것에 죄책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작중 스티브는 이러한 오디세우스를 닮았다.
동시에 오디세우스는 열정적인 여행자다. 그는 키르케와 칼립소가 제안하는 안정적이고 죽지 않는 삶을 마다하고 바다로, 이타카로, 아내를 향해 끊임없이 항해한다. 어떤 괴물과 시련이 기다리고 있어도 그리워하던 아내 페넬로페를 만나고, 그녀를 괴롭히던 모든 구혼자들을 죽이고 행복을 누릴 때까지 결코 여행을 멈추지 않는다. 그의 여행은 새로운 세상을 탐구함과 동시에 집으로 돌아가는 과정이다. 이 오디세우스는 유머와 호기심으로 무장한 채 스티브의 여행까지 이어받은 롭의 모습으로 재탄생한다.
중요한 것은 스티브와 롭의 서사로 나뉜 오디세우스의 여정을 하나로 합쳐서 들여다볼 때, <트립 투 그리스> 속 주인공들이 오디세우스의 항해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이는 오디세우스가 그리스의 모든 영웅들과 가장 다른 삶을 추구한 영웅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는 그를 그리스인 중 최초의 현대인이라고 볼 수 있는 이유이고, 그렇기에 그가 현재를 사는 우리들의 삶을 일주일 간의 여행으로 축약시키는 이 영화가 본보기로 삼기에 가장 적합한 그리스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다.
그가 다른 그리스 영웅들과 목표가 다르다는 사실은 아킬레우스와의 만남과 이후 그의 행동에서 엿볼 수 있다. 오디세우스는 저승에서 만난 아킬레우스에게 살아생전에 가장 위대한 전사였고 그 이름은 죽은 후에도 세상에서 영원히 빛난다고 위로를 건넨다. 이에 아킬레우스는 "죽음에 대해 내게 그럴싸하게 말하지 마시오. 영광스런 오디세우스여! 나는 세상을 떠난 모든 사자들을 통치하느니 차라리 지상에서 머슴이 되어 농토도 없고 재산도 많지 않은 가난한 사람 밑에서 품이라도 팔고 싶소이다”라고 답한다. 이러한 아킬레우스의 한탄을 들은 후 오디세우스는 옛 전우의 말대로 살아간다. 칼립소와 함께 영원히 살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하며 인간으로서 자신의 유한함을 인정하고, 귀향하여 페넬로페와 함께 이승에서의 시간을 행복하고 값지게 살아나간다.
이때 '칼립소(kalupso)'라는 이름이 그리스어로 '감추는 자'라는 뜻임을 고려하면, 오디세우스가 영원히 살되 세상에서 잊히고 자신의 삶이 무의미해지는 것을 거부했음을, 대신 아킬레우스가 말한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으로의 복귀를 삶의 의미로 선택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삶을 포기하면서까지 불멸의 명성을 추구하던 그리스 영웅들과는 달리 지금 당장의 삶의 아름다움에 주목했고,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행복을 손에 넣기 위해 발버둥 친 영웅인 것이다. 그 결과 오디세우스는 완전무결해 보이는 신화 속 인물들과 달리 인간적이고 소박한 면모를 가졌고, 그 어떤 영웅들보다 현대인들의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다. 따라서 두 주인공이 오디세우스의 발자취를 따르는 건 최선의 선택일 수밖에 없다. 오디세우스는 그리스 여행 중 현재까지의 삶을 되돌아보고, 여행의 끝에서 일상의 소중함을 느끼며, 결국 각자의 삶으로 되돌아가는 여정을 가장 먼저 경험한 그리스인이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트립 투 그리스>는 오디세우스의 인간적인 삶을 답습하는 것을 벗어나서 그의 여행을 현실적인 범주로 확장시키기도 한다. 스티브가 영화 촬영 당시 자신을 도왔던 스태프를 만나 난민 캠프로 가는 시퀀스가 대표적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머나먼 남의 땅에 와서 기약 없는 생활을 지속하고, 지중해 온갖 곳을 표류하며 집 없이 전전긍긍하며, 정착할 수 있는 집으로 가고 싶어 하는 난민들의 모습은 수천 년 전에 살았던 한 남자를 닮았다. 이때 대본 없이 실제로 운영하는 레스토랑에 들어가 현지 상황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면서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원터바텀 감독의 연출은 그리스의 현실을 자연스럽게 영화와 오디세우스의 이야기에 스며들도록 유도하면서 더 크고 짠한 울림을 남긴다.
물론 <트립 투 그리스>의 모든 점이 좋지는 않다. 차 안에서 서로 자신이 가성을 더 잘 쓴다면서 '그리스'의 테마곡 'Grease is the word'를 부르는 장면처럼 두 배우의 상황극이나 농담이 과하게 길어지는 순간에는 극본 없이 배우들의 역량을 믿는 윈터바텀 감독의 스타일이 성공과 실패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듯 보인다. 허구와 사실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영화에 생동감을 불어넣기는 하지만, 또 그렇기에 안정된 형식의 부재가 낳는 태생적 불안함을 떨치지 못하는 것이다. 이에 더해 그리스 신화나 비극, 역사 등을 비롯한 인문학 전반에 대한 관심의 차이에 따라 만족도가 널뛸 수 있는 작품이라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단점들이 그리스 여행이라는 코스 요리를 즐기는 것 그 자체의 즐거움을 가리지는 못하기 때문에, 두 배우의 여행과 대화가 선사하는 낭만은 충분히 만족스럽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그리스 최초의 현대인을 따라 걷는 그리스의 과거와 현재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영화 <트립 투 그리스>의 시사회 관람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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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공자>의, 귀공자에 의한, 귀공자를 위한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필리핀에서 불법 복싱 경기를 뛰며 어머니 수술비를 마련하던 복싱 선수 ‘마르코’(강태주). 어느 날, 평생 본 적 없는 한국인 아버지가 보낸 변호사가 마르코의 앞에 나타나고, 그는 아버지가 자기를 찾는다는 말에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마르코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목숨을 건 추격전에 휘말린다. 비행기에서 잠깐 대화를 나눴던 정체불명의 남자 ‘귀공자’(김선호)는 곧장 마르코의 숨통을 조여 온다. 마르코의 이복형인 재벌 2세 ‘한 이사’(김강우)도, 필리핀에서 우연히 마르코와 만났던 ‘윤주’(고아라)도 제각각의 이유로 마르코를 쫓기 시작한다. 이처럼 영문 모를 추격전의 끝에서 마르코는 자기 인생을 바꿀 충격적인 진실을 마주한다.
또 한 번의 변주
한국형 누아르의 진수를 보여줬던 <신세계>. 빛이 너무 강했기 때문일까? 박훈정 감독의 작품은 언제나 <신세계>와 비교될 운명이었다. 실제로 몇몇은 <신세계>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박훈정 감독은 꾸준히 변화를 시도했다. 누아르라는 장르 밖으로 나가지는 않되, 그 안에서 변주를 줬다. 일례로 <마녀>는 <신세계>와 달리 여성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관객에게 어필했다.
<낙원의 밤>은 서사적인 측면에서 변화를 꾀했다. 한국형 누아르의 관습적인 이야기를 거부했다. 의리와 정을 강조하는 사나이 대신 같은 트라우마를 지닌 두 남녀에게 주목했다. 우정처럼 보이기도 하고, 가족처럼 보이기도 하며, 이성 간의 사랑 같기도 한 이야기를 보여줬다. 덕분에 <낙원의 밤>은 서정적인 누아르였다.
박훈정 감독의 신작 <귀공자>도 마찬가지다. 이번 변화의 핵심은 캐릭터다. 공들여 만든 '귀공자'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장르, 이야기, 메시지를 마음껏 가지고 논다. 귀공자가 한 인물의 이름일 뿐만 아니라,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이기에 가능한 시도다. 다만 성공적인 변화인지는 의문이다. '귀공자'에 너무 힘을 준 나머지, 전반적인 균형까지는 챙기지 못했다.
귀공자의 영화
귀공자. 처음 보거나 들으면 꽤 어색한 제목이다. 근래에 잘 쓰이지 않는 말이라서 오글거리거나 과한 느낌도 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생각이 조금 달라진다. 이보다 적확한 제목도 없는 듯하다. 따져 보면 이 영화는 어떤 맥락에서든 귀공자의 영화가 맞기 때문이다.
사전적으로 귀공자는 "귀한 집 아들. 또는 귀한 집 젊은 남자를 이르는 말"이다. 실제로 <귀공자>에는 눈에 보이는 귀한 집 아들과 숨겨진 귀한 집 아들이 있다. 한 이사는 눈에 보이는 귀공자다. 재벌 2세인 그는 이복여동생 '가영'(정라엘)과 치열한 경영권 다툼 중이다. 마르코는 숨겨진 귀공자다. 필리핀에서 병에 걸린 어머니와 함께 하루하루 연명하는 그. 마르코는 한 이사의 또 다른 이복동생이자, 귀한 집 아들로 밝혀진다.
<귀공자>는 기본적으로 이들의 추격전이다. 한 이사는 쫓고, 마르코는 쫓긴다. 한 이사는 급하다. 심장병으로 죽어가는 아버지를 살려 내서 유언 내용을 고쳐야 한다. 그래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마르코를 사로잡으려고 한다. 그의 건강한 심장을 이식하면 아버지를 살릴 수 있으니. 아버지를 만나는 줄 알았던 마르코는 이내 필사적으로 도주한다. 평생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살던 그가 이복형을 위해 순순히 죽을 이유는 없다.
귀공자에 의한 영화
두 귀공자의 갈등을 틈타 속셈을 알 수 없는 세 번째 '귀공자'가 등장한다. 그 역시 귀공자의 사전적 정의에 부합한다. "생김새나 몸가짐이 의젓하고 고상한 남자"이기 때문이다. 오프닝 장면에서 그는 마치 제임스 본드 같다. 깔끔한 패션과 헤어스타일을 자랑한다. 일 하는 솜씨도 프로다. 신속 정확하게 목표를 처리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속물적이다. 명품 구두에 피가 튀면 크게 화내며, 빗방울이 떨어지자 양복이 젖을까 봐 추격을 멈추기까지 한다. 그 덕분에 귀공자가 본모습인지, 귀공자를 동경하는 경박함이 진짜 정체인지 알기 어렵다.
그의 행적은 이러한 양면성을 반영한다. 러닝 타임이 지나도 그의 속셈은 오리무중이다. 그는 마르코를 한 이사에게 데려가던 사람들을 습격한다. 마르코를 빼낸 후에는 몸값으로 천만 달러를 요구하며 한 이사를 협박한다. 그렇다고 마냥 마르코를 돕지도 않는다. 스스로를 친구라고 소개하지만 정작 마르코에게 총을 겨누기도 한다. 선과 악이 분명한 한 이사와 마르코 사이에서 '귀공자'는 물음표가 가득한 영역에 발을 딛고 있다.
영화의 전체적인 콘셉트도 그의 양면성과 맞닿아 있다. '귀공자'의 계획이 끝까지 베일에 싸여 있다 보니 영화 분위기도 그의 행보에 따라 달라진다. 마르코가 추격전에 휘말리는 전반부는 진지한 누아르에 가깝다. 그런데 '귀공자'가 난입하는 순간부터 분위기가 달라진다. 피 튀기는 액션과 만난 그의 유머와 기행이 무거움과 경박함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균형을 이룬다. 박훈정 표 누아르가 블랙코미디로 넘어가는 전환점인 셈이다.
귀공자를 위한 영화
이들 세 귀공자가 모이면 영화는 마침내 본심을 털어놓는다. 그 중심에는 한국인과 필리핀인 사이 혼혈 '코피노'가 있다. 전반부는 마르코의 일상을 자세히 비춘다. 그는 불법 복싱으로 어머니 치료비를 마련하다가 끝내 범죄를 저지른다. 아버지의 도움은 없다. 이 대목은 코피노에게 무관심한 한국 사회를 비판한다. 마르코와 한 이사의 만남도 문제를 고발한다. 한 이사는 마르코를 잡종이라 부르며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어머니가 필리핀 사람이기 때문. 이는 서서히 이슈화되는 동남아 차별의 한 형태를 보여준다.
단순히 문제를 제기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영화적 상상력으로 문제를 해결하기에 <귀공자>의 시도는 더 인상적이다. 후반부에 '귀공자'는 자기도 코피노라고, 피 튀기는 추격전도 인질극도 다 자기가 계획한 일이라고 고백한다. 그 순간 귀공자 3명의 관계가, 익숙한 재벌가 다툼은 다시 쓰인다. 차별하는 한국인과 차별받는 코피노, 그리고 차별적인 사회 구조를 뒤엎으려는 코피노가 새롭게 보인다. 마르코의 진짜 정체를 둘러싼 반전도 허를 찌른다. 귀공자라는 허상조차 막지 못하는 차별이 존재하는 현실이 무겁게 다가온다.
일말의 아쉬움은 있다. 모든 코피노를 하나의 정체성 안에 가두는 섣부른 일반화가 눈에 띈다. 원색적인 언행을 걸러내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귀공자>의 시도는 여전히 인상적이다. <슬픈 열대>가 본래 제목인 이유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상업영화에서 코피노라는 소재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경우가 흔치 않기 때문이다.
귀공자만을 위한 결과
하지만 <귀공자>의 결과물은 기대 이하다. 과감한 시도는 좋았으나, 의도가 스크린 위에 온전히 구현되지는 않았다. 귀공자라는 키워드를 강조하려다 놓친 캐릭터가 많다.
고아라가 연기한 윤주가 대표적이다. 강렬한 첫인상과는 달리 그녀는 사건의 배경과 전개를 설명하는 기능적인 인물에 불과하다. 퇴장도 작위적이다. 추격전의 흐름을 한 번 더 꼬기 위해 갑자기 사라진다. <마녀>와 <낙원의 밤>에서 매력적인 여성 주인공을 만든 전력이 있다 보니 이러한 활용법은 의아하기까지 하다.
'귀공자'라는 캐릭터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파생된 문제도 있다. 반전의 임팩트를 극대화하기 위해 그에게 모든 역할을 몰아준 결과 다른 두 주인공은 그저 소모된다. 우선 매력적인 마스크를 지닌 신인 강태주를 찾아 놓고도 마르코를 제대로 써먹지 못했다. 그를 진중하고 수동적인 캐릭터로 설정하다 보니 친구가 되어야 할 '귀공자'와의 합이 잘 맞지 않는다. 복싱이라는 소재를 액션 영화가 살려내지 못한 것 역시 실망스럽다.
한 이사 역시 전반부와 후반부의 괴리가 두드러진다. 김강우의 광기 어린 연기는 인상적이지만, 그는 '귀공자' 주도로 장르가 전환될 때 일관성을 잃어버린다. 전반부에는 무게감 있는 사이코패스였지만, 후반부에는 무게 잡는 척만 하는 평범한 악역으로 전락한다.
이에 더해 액션 누아르를 표방하는 영화치고 액션씬의 임팩트가 약하다. 카 체이싱 장면의 경우 템포가 다소 느리다. 차 안에 있는 사람을 비추는 앵글이 고정되어 있고, 차체를 비추는 앵글은 자동차 광고를 보는 듯하다. 그 결과 역동감이나 박진감이 부족하다. 잔인하게 피 튀기는 액션도 인상적이지 않다. 계속해서 흔들리는 카메라 때문에 정확히 어떤 사건이 화면에서 벌어지고 있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박훈정 감독은 개봉 전 기자간담회에서 "차별받은 이들이 차별하는 이들에게 한 방 먹이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라고 밝혔다. 귀공자와 코피노, 두 키워드를 엮어낸 스토리에서 그 의도는 분명하게 읽혔다. 하지만 그 의도가 스크린에서 적절하게 펼쳐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 결과 이번에도 박훈정 감독의 변주는 절반의 성공으로 보인다. <신세계>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는 날도 다음을 기약한다.
Poor 형편없음
달리 말하면 김선호의, 김선호에 의한, 김선호를 위한 영화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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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vielog #28] 복제인간이 묻는 삶과 죽음의 의미-영화 서복
공유와 박보검 배우가 주연한 영화 서복이 지난 주 개봉했습니다.
불신지옥, 건축학개론을 연출했던 이용주 감독의 세 번째 연출작인데요.
이번에도 드라마적인 이야기가 강한 영화입니다.
복제인간이 등장하기 때문에 SF장르의 표피를 두르고 있고 액션도 가미되어 있는데요.
이 영화는 볼거리 보다는 두 주인공 기헌과 서복의 관계를 통해 하고 싶은 메시지를 전하는데 더 집중하고 있어요.
그래서 다양하고 박진감 넘치는 볼거리를 원하시는 분들이라면 실망하실 거에요.
그래도 공유와 박보검의 연기가 좋은데, 특히 박보검 배우는 서복과 너무 잘 맞는 연기를 보여줍니다.
자세한 리뷰는 영샹을 참고하세요!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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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경관의 피> 15초 예고편
출처불명의 막대한 후원금을 받고 고급 빌라, 명품 수트, 외제차를 타며 범죄자들을 수사해온 광역수사대 반장 강윤의 팀에 어느 날 뼛속까지 원칙주의자인 신입경찰 민재가 투입된다. 강윤이 특별한 수사 방식을 오픈하며 점차 가까워진 두 사람이 함께 신종 마약 사건을 수사하던 중 강윤은 민재가 자신의 뒤를 파는 두더지, 즉 언더커버 경찰임을 알게 되고 민재는 강윤을 둘러싼 숨겨진 경찰 조직의 비밀을 마주하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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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나폴리: 작은 갱들의 도시> 메인 예고편
마피아의 도시, 나폴리. 자연스레 마약 밀매 사업에 뛰어들게 된 십 대 소년 '니콜라'는 거침없는 행동으로 어른들에게도 밀리지 않으며 새로운 실세가 된다. 그러나 곧 다른 구역과의 전쟁이 시작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