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2022-02-15 22:17:42
루는 죽지 않았어!
영화 리뷰,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
하시모토 나오키 / 일본 / 2022 / 126분
새로운 세상을 알려준 루가 봄과 함께 떠났다 사야카는 처음 겪는 이별이 낯설기만 하다 오래전 아들을 잃은 할아버지 후세와 함께 헤어진 이들을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나려 하는데… 그곳에서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재일 한국인 2세인 작가 이주인 시즈카(본명 조충래)의 동명 단편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아쿠타가와상과 더불어 일본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으로, 대중소설 작가에게 수여하는 가장 높은 상이기도 한 나오키상 수상작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단행본 소설이다. 하시모토 나오키 감독은 소설을 처음 접하고, 영화화하기까지 1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마음을 아리게 만들기에 변함없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루는 죽지 않았어-
영화는 난생처음 상실과 이별을 경험하게 된 8살 소녀 사야카(니이츠 치세)와 오래전 아들을 잃은 할아버지 후세(오이다 요시)의 만남을 10년 후 사야카의 내레이션(아리무라 카스미)을 통해 들려준다. 소중한 관계의 상실과 이별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다 영화에서 벌어지는 사야카가 맞이하는 이별은 작별인사 기회조차 주지 않는 어린이에겐 너무 어려운 경험의 연속이다. 이렇게까지 잔인한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하기엔 영화는 슬프고 우울한 분위기보다는 왠지 모르게 살랑한 봄의 여행길 같다.
좁은 문을 통해 강아지 루를 따라 들어간 벽으로 둘러싸인 들판은, 말 그대로 둘만의 공간이었다. 유일한 친구인 루만이 함께하는 공간은 그 어디보다 외롭지 않고 벽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가장 자유로운 공간처럼 느껴진다. 벽 너머로 수평선까지 보이는 듯한 바다조차 맑은 하늘에 푸르게 반사되지만 사야카 혼자 다시 들판에 갔을 때는 벽의 헤드룸을 좁혀 하나도 특별할 것이 없는 일반 공터로 만들어버린다. 그만큼 세상을 다르게 느끼게 해주는 존재에 대해 보여준 덕에 사야카의 상실감의 폭은 더욱 크게 와닿는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첫 장면이다. 첫 장면이 강렬한만큼 후반부는 약해지기 마련이다. 사야카가 느끼게 된 소외의 너무 짧은 전사나 스토리 전개의 속도, 카메라를 바라보는 듯한 사야카의 시선에는 다소 아쉬움이 남지만 적어도 루와 사야카의 관계는 의심할 수 없는 꾸밈없는 관계였다.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초청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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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국제영화제 온라인 상영작 추천
안녕하세요! 씨네랩입니다.
드디어 전주국제영화제 개막까지 단 하루만 남았죠.
전주국제영화제 예매 화력을 보면서
많은 분들이 이 영화제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는데요.
전주국제영화제를 가지 못하시는 분을 위해 '온피프엔'에서 온라인 영화제를 개최한다고 합니다.
예매를 놓치신 분들도 온라인 영화제로나마 즐길 수 있으니 좋을 것 같습니다.
다만, 모든 영화를 상영하는 건 아니고 217편 중 112편을 상영한다고 합니다.
또한 결제 및 관람은 4월 28일(목) 11시부터 가능하다는 점!
그럼, 지금부터 씨네랩이 추천하는 전주국제영화제 온라인 상영작 추천!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٩( ᐛ )و
힘찬이는 자라서 (2022)
ⓒ 네이버 영화
SYNOPSIS'정희'는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였던 '소연'의 집에 집들이를 간다.늦게 도착하는 또 다른 친구 '보영'을 기다리면서 '정희'와 '소연','소연'의 남편 '강석'은 '정희'가 쓰고 있는 시나리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설전을 벌이게 된다.CINE PICK!
<소화불량>과 <작용과 반작용>을 연출한 김은희 감독.
이번에 연출한 <힘찬이는 자라서>는 여성들이 맞닥뜨리고 있는 실제 문제를 다룬 영화이다.
파리의 책방 (2021)
ⓒ 네이버 영화
SYNOPSIS'빈첸초'는 파리에 있는 자기 소유의 서점과 딸을 위해 일생을 바친다.어느 날, 유쾌하고 아름다운 '욜랑드'가 서점으로 뛰어들어온다.이탈리아의 영화 거장 에토레 스콜라 감독이 각본으로 참여한 작품으로친밀하고, 시적이며, 감동적인 이야기다.CINE PICK!
에토레 스콜라 감독의 작품이 원작인 영화 <파리의 책방>.
영화의 분위기에 맞는 피아노 음악과, 삽입곡이 영화의 매력 중 하나이다.
홍콩의 밤 (2021)
ⓒ 네이버 영화
SYNOPSIS2019년, 홍콩의 밤은 여전히 매혹적이고 아름답지만 일상의 모습은 조금씩 변해간다.감독은 코즈웨이베이 거리를 거닐며 고가도로를 따라 도시의 리듬과 분위기를 기록한다.CINE PICK!
차이밍량 감독은 대만 뉴웨이브를 대표하는 감독 중 한 명이다.
감독이 직접 담아낸 2019년 홍콩의 풍경은 어떨까?
마녀들의 땅 (2021)
ⓒ 네이버 영화
SYNOPSIS이중 유방 절제술을 받은 후 젊은 간호사를 데리고 스코틀랜드의 전원 지역으로요양을 떠난 '베로니카 겐트'의 이야기다.수술 과정으로 자신의 존재에 의문을 품게 된 그는 과거의 트라우마에 대해 묻고 맞서기 시작한다.CINE PICK!
샤를로트 콜베르 감독은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활약하며,
새로운 방식으로 인물과 캐릭터에 접근하는 감독으로 알려져 있다.
본 영화는 2021년 로카르노국제영화제 신인감독상을 수상한 작품이기도 하다.
새벽 두시에 불을 붙여 (2022)
ⓒ 네이버 영화
SYNOPSIS1995년 화원여자기술학원. '서리'는 이곳에서 있었던 화재 사건과 '유림'에 대해 이야기한다.그토록 불을 두려워했지만 기어코 불을 보고자 했던 소녀에 대해.CINE PICK!
유종석 감독은 2019년 작품 <아쿠아마린>으로 전주국제영화제에 초청된 적이 있다.
영화는 1995년 일어났던 여자 기숙학원의 실제 방화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강렬한 미장센이 돋보이는 영화이다.
해왕성 로맨스 (2021)
ⓒ 네이버 영화
SYNOPSIS어느 공상 세계의 전자 폐기물 쓰레기장. 반식민주의 해킹 집단은 일대의 천연자원과 사람들을 착취하는 권위주의 정권을 전복하고자 한다. 탈출한 채굴 노동자와 인터섹스 도망자는 서로를 마주하고, 이들의 결합은 거대하고 신성한 전기회로에 결함을 촉발한다.CINE PICK!
미국의 시인, 음악가이자 배우인 솔 윌리엄스와 아니샤 우제이먼의 첫 번째 장편 연출작이다.
영화는 SF 퀴어 뮤지컬 영화로 르완다의 한 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플라스틱의 기호학 (2021)
ⓒ 네이버 영화
SYNOPSIS어린 시절 장난감으로 표현한 인간의 생애CINE PICK!
라두 주데 감독은 <배드 럭 뱅잉>으로 베를린국제영화제 황금곰상을 받은 감독이다. 라두 주데 감독은 "우리 삶의 본질을 말뿐만이 아니라 순수한 장난감의 이미지로 전하는 영화를 상상했습니다."라며
<플라스틱 기호학>을 표현했다.
씨네랩 에디터 Hiz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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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블로 베르헤르의 <로봇 드림>
본 글은 씨네랩을 통한 시사회 관람 후 리뷰를 요청받아 쓴 글입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애니메이션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리듬감이라고 생각한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의 특성상 영화라면 카메라가 놓일 공간과 조명의 위치로 인해 인물 동선과 장면화의 많은 제약들이 애니메이션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좀 다른데 픽사, 디즈니, 지브리의 애니메이션들 모두 그들만의 독특한 리듬감이 전달하는 감흥은 꽤나 아름답다고 느껴지기까지 한다.
<로봇 드림> 또한 그 특유의 리듬감이 꽤나 아름답다. 하지만 이 리듬감에는 독특한 무언가가 숨어있다고 느껴진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감독이 영화를 사랑한다고 느껴지는 어떤 확신에서 오는 감흥일 것이다. 감독의 인터뷰를 찾아보면 많은 오마주들을 확인시켜준다. <이터널 선샤인>, <오즈의 마법사>은 감독이 인정한 레퍼런스고 관객들은 <A.I> 같은 영화를 떠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가장 중요한 레퍼런스는 뮤지컬 영화인 <파리의 아메리카인>이다. <오즈의 마법사>와 동시에 떠오른 이 뮤지컬 영화가 기억에 자리 잡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외에도 <첨밀밀>이나 <라라랜드>, 자크 타티 영화의 면면들이 보이고, 핼러윈 날에는 <샤이닝>, <나이트메어>, <뱀파이어> 등이 보인다. 물론 <사이코> 같은 영화들은 분명하다. 이 레퍼런스들은 단지 씨네필들을 위한 숨은 그림 찾기는 아니다.
두 번째로는 <로봇 드림>에서 대사는 들어오지 않는다. 무성 영화의 리듬감을 떠올리게 만드는 도그와 로봇의 움직임과 쇼트들의 결합은 꽤나 인상적이다. <Septepber>가 흘러나올 때의 몽타주 시퀀스는 흥미롭다. 특히 이 음악은 감독이 인터뷰에서 자신의 딸 생일이 9월이어서 사용한 음악이라고 밝혔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물론 가사에서 명확하게 가리키는 날짜가 9월 21일이고, 감독의 딸 생일도 9월 21일이다. 영화에서 해수욕장이 폐장되는 건 9월이다.
우선 영화 제목부터 보자. 로봇 드림. 로봇의 꿈. 영화를 보고 난 다음 이 제목에 의아했다가 수긍했다가 다시 질문으로 돌아간다. 영화는 도그의 시점으로 시작한다. 외로운 도그, 옆에 있어줄 누군가를 찾다가 로봇을 주문한다. 로봇은 친구가 되고, 특이한 사정으로 인해 헤어진다. 그 뒤로는 도그와 로봇의 시간을 각각 보여준다. 하지만 제목이 로봇 드림인 것은 로봇의 꿈은 세 번 나오고, 도그의 꿈은 한 번 나와서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왜 로봇의 꿈은 세 번 나오고, 도그의 꿈은 한 번 나오는가. 영화가 끝나자마자 나의 질문이었다.
복기해 보면 로봇의 첫 번째 꿈은 도그를 찾아가지만 도그가 집에 없다. 두 번째 꿈은 도그를 찾아가서 그를 보게 되지만 그는 다른 로봇과 있다. 세 번째 꿈은 위에서 언급한 <파리의 아메리카인>처럼 뮤지컬 시퀀스로 진행되면서 하나의 화폭 안의 꽃들이 도그의 형상으로 끝맺음을 한다. 혹은 <오즈의 마법사>로 이야기해도 될 것이다. 이 꿈들을 이어붙여보면 도그를 찾아갔지만 없었고, 배신당했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여전히 도그를 기억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도그의 꿈은 어떠한가. 도그의 꿈은 로봇의 꿈보다는 훨씬 꿈처럼 느껴진다. 눈사람을 만나고, 그와 함께 볼링을 치러 간다. 볼링장에서 웃음거리가 된 도그는 꿈에서 깬다. 마치 악몽을 꿨다는 듯. 도그의 꿈엔 로봇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누군가를 원하지만 미끄러진다. 이건 마치 도그가 로봇과 헤어진 뒤에 겪는 일들의 연장선처럼 보인다. 도그는 로봇의 구조를 실패한 뒤 스키장에서 친구를 사귀어보려고 하지만 실패하고, 덕이라는 멋진 오리를 만나 사랑하지만 이 역시 실패한다.
여기서 <로봇 드림>의 제목이 왜 도그 드림이 아니라 로봇 드림인지 명확하게 드러난다. 도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사랑을 갈구하지만 로봇은 도그를 사랑했다. 이 애니메이션의 잔인함 중 거의 대부분은 로봇이 당하는 폭력에 맞춰져 있다. 로봇은 다리가 잘리고 폐기처분된다. 인간으로 말하자면 살해당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행위인 것인데 그렇게 잔혹한 행위에서 자신을 살려낸 또 하나의 사랑을 발견한다. 그것은 바로 새로운 애인(?)이다. 로봇은 아직 도그를 그리워하지만 새로운 사랑이 옆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로봇은 이제 꿈을 꾸지 않는다. 상상을 한다. 아니, 정확히는 가정을 한다. 자신이 도그와 재회를 하게 된다면 관계가 꼬일 것을 명확하게 인지한다. 그렇기에 로봇은 도그와의 재회를 포기한다.
<라라랜드>의 마지막 플래시 포워드는 그들이 함께 했을 미래를 그린다. 하지만 로봇의 가정은 그들이 함께 한다면의 미래를 그린다. 함께 한다면이라는 가정은 함께 할 수 있지만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가정이다. 나는 여기서 위험한 혹은 어쩌면 소설일지도 모르는 생각을 하나 이야기하고 싶다.
왜 배경이 1980년대 뉴욕인가. 감독은 왜 뉴욕에 보내는 러브 레터라고 이야기했을까. 이 질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곱씹어 보면 이 귀엽고 깜찍한 캐릭터들과 예쁘게 그려진 그림들을 보면서 불길한 이미지들 몇 가지가 순식간에 지나간다. 히치콕의 <사이코>, 큐브릭의 <샤이닝>, 그리고 무수히 많은 시리즈를 낳은 <나이트메어>의 이미지들과 함께 세계무역센터의 모습은 불길하기 짝이 없지 않은가. 우디 앨런의 <맨해튼>이 나왔던 것도 빼놓을 순 없겠으나 감독은 뉴욕이라는 도시의 양면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은 지울 수 없다.
여기에다가 하나 더. <Septepber>는 9월이다. 9월과 세계무역센터. 그리고 80년대는 중동의 전쟁이 미국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한 그때가 아닌가.
미국의 1980년대는 60년대부터 이어진 불바다의 시대를 지나 안정된 시기로 일컬어지는 게 보편적이다. 하지만 그 안에는 백래시 현상부터 시작하여 무수히 많은 내적 갈등을 지닌 시기인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장하는 바는 <로봇 드림>은 뉴욕이라는 도시가 또 하나의 주인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면 로봇이 해수욕장에 있을 때 새 한 마리가 둥지를 틀고 알을 낳는다. 태어난 아기 새들은 미운 오리 새끼를 연상한다. 이 희망찬 동화 아래에는 물질주의가 팽배하게 자리 잡는다. 이제 곧 고물상이 다가와 로봇을 수거해 만신창이를 만들고 분해할 것이다.
도그는 자신의 외로움을 채워줄 멋진 덕을 만난다. 그녀(?)는 오토바이를 타고, 멋있게 질주를 한다. 게다가 성격도 아주 쿨하다. 마치 그녀가 진정한 사랑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어느 순간 떠나버린다. 아메리칸드림의 허상. 결국 도그는 생명체를 만나지 못하고 방수 로봇을 구입(!) 한다. 이 영화에는 인간이 나오지 않고 동물들이 주로 등장하지만 우리는 동물과 로봇의 차이를 분명하게 인지한다. 만약 로봇이 생명체라고 인지되었다면 그는 폐장된 해수욕장에 있을 수 없을 것이다. 혹은 다리가 잘리지 않을 것이다. 혹은 분해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영화가 끝나고 든 즉각적인 생각은 성별이 주어지지 않았는데 왜 4인의 결합은 불가능 한가였다. 너무 보수적인 시각 아닌가. 인간 세상도 아니고 애니메이션인데 왜 그것이 불가능하냐는 불만에 툴툴거렸다. 하지만 생각을 정리하면서 이제는 알겠다. 4인의 결합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이곳이 뉴욕이기 때문이다. 도그가 로봇을 구해내지 못한 것이 도시의 규율 때문인 것처럼 로봇은 뉴욕의 규율 때문에 도그와 재회하지 못한다. 80년대 뉴욕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굉장히 엄격한 곳이다. 희망찬 곳이었지만 눈물이 들어찰 공간이다.
2024년 03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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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마른 땅처럼 죄의식마저 갈라져버린 황폐한 마을
2017년 골드 오스트레일리아 도서상, 올해의 ABIA 문학상, 올해의 인디북 문학상 등 주요 문학상을 휩쓸고 뒤늦게 발간된 영국에서도 ‘이 책이 데뷔작이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는 찬사와 함께 워터 스톤스와 선데이 타임스에서 이달의 스릴러로 선정되었으며, 영국 장르문학의 최대 권위 CWA 골드 대거 상에도 노미네이트된 호주 작가 제인 하퍼의 월드 와이드 베스트셀러이자, 장편 데뷔작을 원작으로 제작된 호주 영화 드라이 리뷰이자, 시사회 후기입니다. ‘나를 찾아줘’와 매력적이게 보았던 HBO 시리즈 ‘빅 리틀 라이즈’등을 성공으로 이끈 유명 제작자 브루나 파판드레아가 참여했고 ‘트로이’, ‘시간 여행자의 아내’ 등으로 국내에서도 친숙한 배우 에릭 바나가 주연을 맡아 호주 개봉 당시 3주 연속 박스오피스 1위 및 자국 영화 중 5번째로 높은 오프닝 스코어를 기록하며 이례적인 흥행을 기록했다고 하니 충분한 매력을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되었습니다. 더불어 ‘인비저블 맨’의 촬영 감독 스테판 두시오 역시 이번 작품을 통해 2021 호주 아카데미 시상식(AACTA)에서 최우수 촬영상을 수상했다고 하니 웰메이드 미스터리 스릴러에 대한 기대를 하며 감상하였습니다.
※ 최대한 자제하였으나 일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 영화 드라이 정보, 줄거리
정말 루크가 한 짓이라고 생각해요?
계속된 가뭄으로 갈라지고 메마른 호주의 키와라 마을의 외딴 농장, 한 집안에서 갓난아기를 제외하고 일가족이 죽는 사건이 발생하고 호주 연방 경찰 에런에게 연락 한 통이 옵니다. 그렇게 어린 시절 친구였던 루크 가족의 죽음으로 20년 만에 고향으로 내려와 장례식에 참석하지만, 자신의 기억 속 강물이 흐르고 수풀이 우거졌던 마을은 바싹 말라버렸고 과거 엘리의 사건 이후 떠났던 그를 사람들은 반기지 않습니다. 뉴스에서는 루크를 아내 캐런과 어린 아들 빌리를 죽이고 자살한 존속 살인으로 보도 중이고 사람들 대부분도 그렇게 믿고 있지만, 루크 아버지는 사건의 진실을 밝혀달라 그에게 부탁합니다. 더 이상 머물고 싶지 않았던 그는 거절하지만, 과거 사건의 진실을 언급하며 협박 섞인 어투로 회유하고, 결국 에런은 사건을 파헤치기 시작하는데...
예고편│ Trailer
원제 : The Dry│감독 : 로버트 코놀리│각본 : 해리 크립스, 로버트 코놀리│원작 : │출연진 : 에릭 바나, 제네비에브 오렐리, 키어 오도넬, 존 폴슨 외 多│장르 : 범죄, 드라마, 미스터리, 스릴러│상영 시간 : 117분│개봉일 : 2022년 3월 30일│국가 :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영국│등급 : 15세 관람가│평점 : 로톤 토마토 신선도 90% 팝콘 89%, IMDB 6.9, 메타 스코어 69점│시청 가능 서비스 : 3월 30일 개봉 예정
# 영화 드라이 평점
너무 오랫동안 거짓말을 하다 보면 그냥 그게 몸에 배죠
장르가 미스터리, 스릴러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읽어보진 않았지만, 베스트셀러에 올랐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기대감을 가지고 관람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장르적으로 전개 속도나 BGM도, 스토리도 심장을 쫄깃하게 옥죄어 오는 연출 방식을 채택하지 않고 일가족 존속살인으로 처리된 사건에 남은 몇 안 되는 단서와 실마리, 인터뷰 등을 통해 범인을 추리해 나가는 과정과 주인공의 과거 시간이 플래시백 형태로 비치며 현재와의 연결점을 보여주고자 노력합니다. 결말에 이르러 두 가지 사건 모두가 해결은 되지만, 특별한 개연성보다는 과거로부터 이어진 주인공의 심적 갈등과 죄책감을 해소하는 정도에서 일단락되다 보니 조금은 허무하게 느껴졌습니다.
전체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가리기 위해 조작한 서류가 화를 자초하고 이를 무마하기 위해 진실을 아는 직원과 일가족을 살인해버린 사람, 그리고 과거 자신이 딸을 죽였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며 살아오다 정말 다른 사람이 죽였다고 믿어버리는 거짓말 같은 상황들을 그립니다. 가뭄으로 말라버린 땅처럼 작은 마을 안에서 모든 이들이 각자의 거짓말로 인해 갈라져 있던 것이죠. 그것은 과거 에런 자신이 남기고 간 죄책감에 대한 혼란을 일으켜 현재의 사건에 머물게 하는 단초가 되고 보는 이들로 하여금 변화하는 그의 심리를 따라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원동력이 되어주기도 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잔잔한 흐름과 각 인물들의 심리묘사를 섬세하게 그렸다는 점은 장점이지만 장르적으로 명확한 한계가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계속해서 보이는 황망한 사막과도 같은 마을 배경은 진실을 쫓는 그의 건조한 시선을 계속해서 유지시키고 반복되는 플래시백을 통해 과연 현재와 과거에는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게끔 만듭니다. 표면적으로 자신의 죄의식이 쉽사리 떠나지 못하게 한다는 점이 뚜렷해 보여 애초에 과거 엘리를 죽인 진범을 알고 있었기에 미련이 더 남은 것이 아닌가란 생각도 들게 하죠. 그렇기에 마을 사람들의 거짓말은 그저 하나의 수단일 뿐, 최악의 가뭄으로 바닥이 드러난 강바닥처럼 변해버린 마을과 그 안에서 야기되는 사람들의 이기심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 반성이나 속죄라는 의미를 나타내기보단 의문스러운 엔딩을 그려내고 있어 굉장히 모호한 시선을 그대로 유지한 채 끝을 맺습니다. 에릭 바나라는 배우가 가지고 있는 깊고 어두운 눈매가 러닝 타임 내내 분명 빛을 발하지만, 글쎄요, 빈 공간을 채우기에는 혼자 너무 버거운 느낌이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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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혼의 사무라이
황혼의 사무라이
'황혼의 사무라이'는 중의적 제목이다. 주인공 이구치가 하급 사무라이로 창고지기 노릇을 하며 가족을 부양하느라 해가 떨어지면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야 해서 '황혼'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이구치가 살던 19세기 중반은 '사무라이'라는 계급이 사라지기 직전이어서 역사적으로 사무라이의 '황혼'이기도 했으며, 마지막 '사무라이'로 살았던 이구치가 관군의 총탄에 죽음으로써 계급으로의 사무라이는 '황혼'을 맞이했다는 의미를 갖는다.
영화는 하급 사무라이 이구치의 막내딸, 다섯 살 이토의 나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이 영화는 이토의 눈으로 본 세상이며, 회고이기도 하다. 영화에서는 명확하지 않지만, 이토는 다섯 살에 등장해 나중에 일흔 살의 노인으로 나온다. 그렇다면 '메이지 유신'을 중심으로 나이를 살펴보면, 이토는 1860년생으로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 70년을 더 하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1930년대가 된다.
이토의 나이가 중요한 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역사가 매우 빠르게 군국주의화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인데, '메이지 유신'으로 일본의 수십 개 막부가 사라지고, 일본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이 강화된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이 종료되는 것과 동시에 조선을 침략하고, 곧바로 식민지를 확대한다. 가장 가까운 나라가 조선이었고,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도 일본 식민지로 전락한다.
이런 일본의 침략은 유럽과 미국 강대국의 폭력 앞에 무릎 꿇은 뒤, 선진문물을 수입해 빠르게 개화하면서, 아시아에서 가장 발빠르게 최신 무기로 무장할 수 있었고, 여기에 자신감을 얻어 이웃 나라들을 침략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부적으로는 여전히 지방에 남아 있던 막부의 토호세력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고, 식민지에서 얻는 이익을 일정부분 공유하며, 일본 내부의 화합을 유지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했다.
일본에서 군국주의가 부활한 것은 '메이지 유신' 이전의 막부와 관련이 있다. 형식적으로 막부는 사라졌지만, 지방의 토호세력은 여전히 힘을 가지고 있었고, 이들은 메이지 천황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막부에서 귀족으로 신분이 바뀌어 중앙 정부 또는 지방 정부에서 권력을 가진 세력이 된다. 이들 지방 귀족들은 어쩔 수 없이 천황제에 동의하기는 했지만, 천황을 신성한 존재로 여기지는 않았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전체주의 체제가 오래 이어져 오고 있었고, 정치적으로 기반이 약한 메이지 천황제에서 과거 막부의 전통, 사무라이의 신성화 등이 군대, 군인을 우상화하고, 군인의 정치적, 사회적 위상이 높아지면서, 군국주의가 등장하게 된다.
1860년대 초, 우나사카 막부 휘하에서 하급 사무라이로 살아가는 이구치는 막부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평시에 성의 곡식창고에서 하급 관리로 일하고 있다. 그는 매우 가난해서 한달에 50석에 해당하는 임금을 받으며 일하는데, 그 돈으로는 생활이 궁핍해 퇴근하고 저녁에 새장을 만들어 파는 부업을 하고 있다.
그는 얼마 전 폐병을 앓던 아내가 사망했고, 장례를 치를 돈이 없어 매우 난감하고 고통스러운 기억이 있다. 게다가 어머니는 치매를 앓고 있고, 어린 두 딸은 이제 열 살, 다섯 살이어서 그가 오로지 돌봐야 하는 어려운 환경에 살고 있었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하루 일과가 끝나면 함께 술집으로 몰려가 술을 마시며, 여흥을 즐기지만 이구치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 집안 일을 하고, 어머니도 돌봐야 하고, 아이들도 보살펴야 한다. 여기에 부업으로 새장을 만들어야 하니 그는 조금도 쉴틈이 없는 것이다.
하루는 영주가 곡식창고 시찰을 나왔는데, 이구치가 직접 보고를 하다 몸에서 냄새가 나는 걸 영주에게 들키고 말았다. 다행히 영주는 덕이 있는 사람이라 다른 말을 하지 않았으나, 영주의 부하인 관료들이 더 난리를 부리고, 이구치의 집안 어른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구치의 삼촌이 그날 저녁 집으로 달려와 영주 앞에서 망신 당한 사실에 대해 노발대발 하고, 자기가 점지한 지인의 딸이 있으니 재혼하라고 윽박지른다. 하지만 이구치는 어린 두 딸과 치매를 앓는 노인이 있는 집에 어떤 여자가 올 것이며, 설령 온다해도 고생만 할 뿐이니 자기는 재혼할 의사가 없노라고 말한다.
이구치는 성정이 따뜻하고 다정다감한 사람이다. 그는 술도 마시지 않고, 신분이 낮은 사람에게도 함부로 대하지 않으며, 무엇보다 폭력을 싫어한다. 그는 사무라이 계급이고, 그 자신 어려서 무술을 배워 출중한 실력을 갖추고 있으나, 먼저 칼을 빼는 일은 결코 없다. 더구나 그가 아버지에게 물려 받은 가장 아끼는 보검은 아내의 병구완을 위해 일찌기 팔아버렸다. 그의 꿈은 농부가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구치는 운명을 잘못 타고 태어난 인물이다. 그는 사무라이보다는 농부나 학자가 되는 것이 본성에 어울리게 보이는데, 사무라이에서도 하급에 머무른 것은 그가 욕심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봄이 되어 진달래가 피는 따뜻한 날, 이구치는 두 딸과 함께 들판으로 나와 나물을 뜯는다. 그때 개울에 떠내려오는 어린 아이의 시신을 보게 되고, 몇 년 째 계속되고 있는 흉년으로 사람들이 굶어죽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나마 이구치의 가족은 근근히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구치는 친구 이누마를 만난다. 이누마는 한 달 정도 오사카 막부와 쿄토의 황성을 다녀왔는데, 막부의 움직임과 황성과의 갈등이 심상치 않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얼마 전, 결혼했던 여동생 토모에가 이혼하고 집에 와 있다고 말한다. 토모에의 전 남편 코다 역시 사무라이였고, 부유한 집안이었다. 하지만 술 마시고 아내를 때리며, 학대해서 오빠 이누마가 막부에게 직접 부탁해 이혼을 하게 된 것이다.
그의 말을 듣고 집에 돌아오니 뜻밖에도 토모에가 와 있었다. 이구치는 몹시 반가웠지만 내색하지 않고, 토모에 처지를 위로한다. 토모에를 집까지 바래다주는 길에, 토모에 집앞에 도착했을 때, 집안에서 싸움이 벌어져 소란스러웠다. 토모에의 전 남편 코다가 찾아와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 코다는 토모에보다 그의 오빠 이누마가 더 괘씸하다고 화를 낸다. 그러면서 이누마에게 행패를 부리고 싸우자고 덤벼드는데, 이때 이구치가 나서서 싸움을 말리고, 코다를 힘으로 제압한다. 코다는 화가 나서 이구치에게 정식으로 대결을 신청하고, 두 사람은 목숨을 건 싸움을 하게 된다.
이누마는 자기 때문에 코다와 싸우게 되었으니, 자기가 나서겠다고 하지만, 이구치는 이누마의 실력으로는 코다에게 죽임을 당할 수 있으므로 나서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진검이 아닌, 목검을 들고 코다와 맞선다. 이 시기에는 이미 사적 폭력이나 개인적 결투는 막부에서 금지하고 있었지만, 사무라이들은 목숨을 걸고 일대 일 승부를 겨루는 경우가 드물게 있었다.
코다는 이구치가 목검을 들고 서자 자기를 얕잡아 본다며 진검으로 달려든다. 이구치는 가볍게 코다를 제압하고, 이누마와 함께 돌아온다. 이 영화에서 사무라이가 칼을 들고 싸우는 장면은 두 번 나온다. 이구치가 코다와 싸울 때, 이때는 목검을 들었지만 사무라이의 검술이 어떤 모습인가를 짐작하는 동작이 나온다. 목검이 아니고 진검이었다면, 코다는 두세합 만에 목숨을 잃게 된다.
또 한 장면은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구치와 요고 젠에몬의 결투인데, 전혀 과장하지 않은 사실주의 형식으로 사무라이가 어떻게 싸우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들 사무라이의 결투는 일본 사무라이의 환상을 깨뜨리고, 막부 시대의 사무라이가 어떤 존재인가를 가감없이 드러낸다.
이구치가 집에 돌아오니 토모에가 보낸 편지가 있었고, 이구치는 토모에의 마음을 읽는다. 이후 토모에는 이구치의 두 딸 키야노와 이토의 '엄마'가 되어 생활의 중심이 된다. 어린 키야노에게 살림살이를 알려주고, 함께 놀아주며, 나들이도 하면서 엄마 역할을 해주는데, 이구치는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한다.
이누마는 이구치에게 토모에의 재혼을 거론한다. 이누마도 이구치를 좋아하는 친구이고, 토모에는 어려서부터 함께 소꿉놀이를 하던 동생이었으니 서로 남다른 감정을 갖고 있는 진정한 벗이었다. 이누마는 부잣집 아들이지만 가난한 이구치를 차별하지 않고 친구로 어울렸고, 나이 든 지금도 변함없이 친구로 지내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누마의 인성도 훌륭하고, 토모에는 어려서부터 이구치를 좋아했었다. 다만 입으로 말하지 않았을 뿐. 그건 이구치도 마찬가지였지만, 집안이 너무 기울어져 토모에가 자기와 결혼하면 불행하게 될 거라고 생각한 이구치는 혼인을 거절한다.
이누마는 한달 전, 에도(교토)에서 영주가 사망하는 바람에 후계자 문제로 내부 권력투쟁이 일어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매우 심각한 상황이 일어날 수 있다고 이구치에게 알려준다. 이구치는 최하급 말단 사무라이여서 위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자기와는 직접 문제될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창고관리 사무장인 쿠사카가 이구치를 찾아온다. 두 사람은 우나사카 가문의 고위 관료인 호리 댁으로 찾아가 명령을 하달받는다. 요고 젠에몬이 할복하지 않아 죽이러 간 무사들이 오히려 요고에게 죽임을 당하고 있으니 이구치가 가서 요고 젠에몬을 죽이라는 명령이다.
이구치는 애써 변명하며 거절하지만, 호리는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라며, 말을 듣지 않으면 무사 계급을 박탈하고 번에서 내쫓겠다고 협박한다. 하는 수 없이 승락하고 돌아온 이구치는 죽음을 의식하며 마음을 정리한다.
이구치는 몸종 나오타에게 심부름을 보내, 토모에에게 와달라고 부탁한다. 나오타의 전언을 들은 토모에는 급하게 달려오고, 전투를 앞두고 몸치장을 해야 하는 이구치의 부탁을 듣고 그의 몸단장을 돕는다. 이 과정에서 이구치는 자신이 마음에 담아두었던 진심을 털어놓는다. 토모에를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어릴 때부터 늘 좋아했고, 결혼하고 싶었으며, 결혼한 이후에도 토모에를 잊지 않고 있었노라고. 지금 결투를 하러 떠나지만, 살아 돌아오면 토모에에게 청혼하겠노라고. 지난번 오빠를 통해 재혼 이야기를 들었지만, 부잣집에서 귀하게 자란 토모에가 자신과 혼인하면 평생 고생만 할텐데, 그건 자신이 용납할 수 없었다고. 하지만, 진심으로 사랑하기에 고백하노라고.
이 장면에서 이구치와 토모에의 모습은 담담하지만 깊은 슬픔을 간직하고 있어 감동으로 다가온다. 가난한 이구치와 부잣집 딸 토모에의 신분, 어릴 때부터 서로 좋아했지만 겉으로 드러낼 수 없었던 감정들, 체면과 권위로 살아야 하는 사무라이와 사회 제도로 억눌린 여성의 지위와 감정을 드러내면 안 되는 수많은 제약들. 그런 환경 속에서도 서로의 마음을 믿으며 조용히 살아온 두 사람의 깊은 사랑을 읽게 되면서, 시대와 역사를 떠나 인간 본연의 사랑의 실체를 만나는 느낌이다.
하지만 토모에는 이미 혼담이 들어왔고, 자기도 그 혼담을 받아들였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불러줘서 고맙다고 담담히 말한다. 이구치는 자기가 하면 안 되는 말을 한 것 같아 몹시 당황하면서 마침 도착한 길잡이를 따라 집을 나선다.
요고 젠에몬은 상당한 실력을 지닌 사무라이다. 그를 죽이러 간 다른 사무라이들이 칼 한 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죽임을 당할 정도였는데, 이구치는 내심 자신 있었지만, 그래도 긴장한다. 그는 조심스럽게 요고의 집안으로 들어간다. 마당에는 먼저 들어갔던 사무라이의 주검이 쓰러져 있고, 그 주변으로 파리들이 요란하게 날아다니고 있다.
하지만 의외로 요고는 이구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요고는 이구치에게 싸우지 않겠노라고, 자기는 도망갈 것이고, 도망가도록 길을 터달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요고는 자기가 살아왔던 과거를 이야기한다. 그 역시 사무라이로 쇼군을 모셨으나, 그 쇼군이 다른 쇼군에게 지면서 가산이 몰수당하고, 자기 가족도 쫓겨나 낭인으로 7년을 떠돌다 어렵게 하세가와의 수하로 들어올 수 있었고, 하세가와의 은혜를 입었기에 그를 은인으로 생각한다고 말한다. 7년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아내와 딸이 병으로 죽었다는 말을 하고, 이구치 역시 자기 아내가 병으로 죽은 것을 알고 있으니, 하급 사무라이들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말한다.
이구치도 아내의 병구완을 위해 명검을 팔고, 싸구려 검을 가지고 다닌다는 말을 한다. 이때 갑자기 요고가 화를 내며, 싸구려 칼로 자기를 베러 왔느냐고 소리친다. 요고의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두 사람은 결투를 하고, 이미 지쳐 있던 요고는 이구치의 칼을 맞고 죽는다. 두 사람이 싸우기 전에 나눈 대화는 하급 사무라이의 처지를 드러내는 의도적 장치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의 존재가 이제 시대의 막바지에 있다는 걸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결투에서 이기고 돌아온 이구치를 맞이하는 건 토모에였다. 토모에는 이미 집안에서 재혼 혼담이 오가고 있고, 상대도 정해졌지만, 집안의 반대를 무시하고 독단으로 이구치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한다. 이후 이구치와 결혼하고 두 딸과 행복하게 살지만, 그 기간은 불과 3년이었다. 이토의 나레이션으로 이어지는 토모에와 이구치의 사연은, 이구치가 관군과의 전투에서 총에 맞아 사망하고, 토모에는 두 딸을 데리고 도쿄로 이주해 그곳에서 두 딸을 훌륭하게 키운다. 토모에가 나이 들어 숨지자, 카야노와 이토는 아버지 이구치와 어머니 토모에를 한 무덤에 모신다.
막부가 해체되고,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면서 일본은 메이지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의 국가체제로 발전한다. 그 와중에 마지막 사무라이였던 이구치와 토모에의 애틋하고 깊은 사랑과 저물어가는 사무라이의 역사를 온몸으로 보여주었던 이구치의 삶을 보면서, 역사 속에서 개인의 삶과 운명에 대해 새삼 생각하게 된다.
역사는 거대한 담론으로 강물처럼 흘러가지만, 그 속에는 무수한 개인들의 삶이 담겨 있고, 한 평생이 들어 있고, 개인의 희노애락이 담겨 있다. 역사를 덩어리로만 볼게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개개인의 삶을 깊이 들여다 보는 과정에서 우리의 삶에 거울이 되는 장면을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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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장이 건네는 말 '행복해지자꾸나'
글과 기억의 공통점이 무엇일까? 바로 다시 읽어보면 엥? 싶은 것이다. 나 나름대로 나 자신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적었지만 신파 가득한 영화가 된 것 같아 '엥?' 싶다. 그럼 포스팅의 수정 버튼으로 마우스가 움직인다. 이거 고쳐야지. 저거 고쳐야지. '~하도록 하자'라는 말이 뭔가 어색하다. 읽는 사람들은 이 영화의 장단점을 읽고 극장에 가고 싶어서 이 포스팅을 클릭한 것인데 왠 알지도 못하는 놈이 설교하면 이상하잖아?
그래도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나 자신에게 하는 말, 그리고 나와 입장이 비슷한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다. 그게 뭐 나쁜 것도 아니고 그 나름의 의미는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타인이 나를 혐오하는 건 사실 그렇게 큰 페널티가 아니었다. 전 여자 친구 같은 존재가 아니면 신경 안 쓰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삶을 마주하며 느끼는 감정 중에서 이겨내기 힘든 건 자기혐오였다. 그래서 난 <매그놀리아> 리뷰를 쓰며 신파와 유사한 글을 쓰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근데 뭐 그게 나쁜 걸까? 다들 그게 삶이라고 느끼니까 그와 관련된 많은 창작물이 나오는 거 아닐까 싶다. 옆 나라 일본에 사는 거장이 이런 우리에게 (비교적) 서툰 화법으로 따뜻한 진심을 건네고 있다. 프랑스 칸을 경유하고 입국한 영화를 지금 극장에서 만나보자.
생각하지 못했던 변수
어딘가 머뭇거리고 있는 것 같다. 머뭇거리는 여자. 비가 오는 밖, 여자는 무언가를 어느 곳에 놓고 나왔다. 바바닥에 내려놓은 무언가를 자세히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여자가 내려놓은 건 아이다. 그것도 방금 태어난 아기였다. 여자는 아이에게 미안하다는 메시지와 함께 사라진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다른 여자. 그 다른 여자는 바닥에 놓여있던 아이를 상자 안에 밀어 넣는다.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는 상현. 상현은 아마 혼자 살고 있는 것 같다. 보육원에서 일하고 있는 동수. 동수의 보육원에선 베이비 박스를 운영하고 있다. 상현과 동수는 이 베이비박스를 악용해서 아이를 입양하고 싶은 부모들에게 인신매매를 하는 일을 벌이고 있다. 엄연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둘. 둘에게 아이 한 명이 왔다. 아이의 이름은 우성이라고 한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인신매매를 준비 중인 상현. 상현은 동수에게 감시카메라를 삭제하라는 말과 함께 다른 가족들을 찾기로 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아이의 엄마 소영이 다시 베이비 박스로 돌아왔다. 그렇게 계획대로 착착 이어질 것 같았던 둘은 새롭게 생긴 돌발변수를 맞이하게 된다. 소영과 상현, 동수는 그렇게 새로운 부모를 찾아 나선다. 그 과정에서 세 인물은 가까워지게 된다. 마치 월미도에 여행을 간 가족들처럼.
변주해서 만든 이야기
이 영화를 보다가 생각난 작품은 폴 토머스 앤더슨의 <매그놀리아>다. 일단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제시되기도 했다. <매그놀리아>의 하이라이트 신에 삽입되었던 OST를 주요 지점에 배치했다. 이 <매그놀리아>를 각본에서 삽입한 만큼 이 영화에도 그와 비슷한 모티브가 쓰였다. <매그놀리아>는 러닝타임이 3시간인 영화다. 3시간 동안 각자 다른 인물 9명이 자기혐오와 연민 속에서 빠져드는 이야기가 영화의 줄거리다. 이 러닝타임 동안 극의 전개를 비트는 장면이 있다. 이 인물들은 이 사건을 기점으로 삼아서 조금의 구원을 얻는다. 이 영화 <브로커>역시 각자 인물의 사정을 조금씩 다르게 묘사했다. <매그놀리아>에서 남자의 입장에서 여자를 섹슈얼리티로 유혹하거나, 마약과 매춘에 피해자였던 여자의 입장을 중후반부에 한 사건으로 엮어놓았던 방식은 '아기'로 인물들을 묶은 것과 유사하다. 네 명의 사람들에게 각자 다른 입장을 2시간 안에 때려 박고도 각본의 구멍이 없게 착착 녹아들었다는 것은 역시 '거장은 거장'이라는 수식을 주기 충분하다. 이 영화를 보고 '내가 뭘 봤나' 생각해보면 인물의 말이나 제스처가 기억에 남는다. 근데 그 인물의 특성들이 꼼꼼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하이라이트 신까지 극에 몰입하는데 용이하다. 그런데, 이 영화는 단점도 있다.
묘하게 느껴지는 이질감
영화에 단점이 없진 않다. 사실 분명하기까지 하다. 일단 예고에서도 나타났던 부분이기도 하다. '우리 이제 행복해지자꾸나' 이 말. 난 내가 하는 이 세상에서 몇 번 못 들어봤다. '우리 이제 행복하자'도 아니고 '행복해지자꾸나'라니. 보면 영화 대사가 아니라 2000년대 초반에 나올 법한 우리나라 단편소설 문장 같다. 이 이질감은 반복된다. 예를 들어 소영과 동수가 대화하는 장면이 있다. 그러면서 '나 이 말 두 번 하는데'라고 하면서 손가락 두 개를 표시한다. 이게 뭐 무리수를 뒀다던가 그런 건 아닌데, 굳이? 싶은 것이다. 이게 고의적으로 디렉팅을 이렇게 한 거면 과하다고 생각한다. 일본 감독이 각본을 써서 그런지 이게 예전 우리나라 드라마에 나올 법하다는 걸 모르고 쓴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이런 무언가 어색한 대사 방식은 이주영 배우가 맡은 이형사 역에도 똑같이 반복된다. 이형사의 상관인 수진과 차에 타고 있을 때 누군가와 대화하는 신이 있다. 이주영 배우가 평소에 쳤던, <메기>나 <꿈의 제인>, <이태원 클라스>에서 볼 수 있던 말하기 방식이다. 그런데 이 익숙함에도 불구하고 이 장면은 많이 어색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만든 이 영화의 강점으로 작용하는 요소들은 분명하다. 근데 단점도 그만큼 뚜렷한 셈이다.
그리고, 하이라이트 신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난 거의 두 달 전에 우리나라 독립영화 <태어나길 잘했어>를 봤다. 이 <태어나길 잘했어>를 보고 느꼈던 건 좋은 작품인 건 안다. 그런데 뭐랄까 한국 예술영화들이 거의 이런 톤인 느낌? <벌새>, <우리들>, <찬실이는 복도 많지>, <소공녀> 등등 버거운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우리에게 격려를 하는 건 좋다. 당연히 나 역시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 신에서 위로받았으니까. 그런데 <원더풀 라이프>에서 '당신을 대표하는 기억은 무엇인가요?'를 간접적으로 전했다는 것과는 뭔가 다르다. 스스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이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거구나' 느끼는 것이다. 퀄리티 있는 연출법을 갖고 있던 사람이기엔 엥? 싶은 구석이 있다. 또, 소영이 누군가에게 쌍욕을 늘어놓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에서 '강간'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영화 자체가 어떤 이야기를 허구를 중심으로 만들었다고 하지만 이 대 사 자체의 개연성이 좀 많이 떨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거기서 굳이 그런 이야기를 할 사람은.. 한 20000명의 1명쯤? 솔직히 아예 없다고 말하고 싶다.
근데 잘 만들었어
그렇게 단점이 뚜렷함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수작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일단 앞에서도 썼듯 캐릭터 설정에 부여한 섬세한 디테일이 탁월했다. 특히 송강호 배우기 연기했던 상현은 나쁜 사람이다. 그 사람의 이유가 어찌 됐건 자기의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인신매매를 하는 사람이다. 심지어 자기 딸과 아내에게도 잘 못했다. 아마 도박 빚 때문에 두 사람을 떠나보낸 것으로 보인다. 이 사람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직업은 '세탁소 사장'이다. 무언가를 '빨아 다시 써야만 하는' 상현의 입장과 유사하다. 이뿐만이 아니라 이 인물은 자기 내면의 모순까지도 인지하고 있는 듯하다. 소영이 상현에게 '이 사람들을 일찍 만났다면 우성이를 보내지 않아도 될 텐데'리고 말한다. 상현은 대답한다. '아직 늦지 않았어'라고. 근데 그 '아직 늦지 않았어'라는 대답이 소영에게 잘 들리지 않는다. "응? 뭐라고?" 소영이 답한다. 상현은 다시 대답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삶이 계속해서 같은 하향곡선을 계속 찍게 되면 세탁으로도, 비가 내리는 것만으로도 국면전환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어쩌면 극에서 각본을 쓴 사람이 유지하고자 했던 거리감은 이런 디테일한 부분까지 묘사하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또 다른 장점은 수진 캐릭터다. 수진은 단서가 없는 인물이다. 수진이 왜 우성을 베이비박스 안에 놨는지도 제시되지 않는다. 그리고 왜 소영을 미워하는지, 엔딩부에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런 입장까지 놓였던 이유는 뭔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철저한 의도 아래 놓여있는 인물 설정이었다고 생각한다. 감독은 과감하게 이 인물의 원인과 동기부여를 생략해서 감정적으로 진하게 느껴질 수 있는 부분을 넓혔다. 그리고 그게 중요하지 않다는 걸 인지해서 경제적으로 극 전개를 이끌어낸다. 이 인물에게 <매그놀리아>의 래퍼런스를 넣은 이유는 분명히 있다. <매그놀리아>는 9명의 인물이 각자의 이유를 들어 자기혐오를 토하는 영화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자기혐오를 우연처럼 보일 수 있는 일을 바탕으로 극복해낸다. 그 에피소드가 각자가 갖고 있는 상처를 본질적으로 해소할 수 있냐? 아니다. 전혀 상관없는 방식이다. 근데 이 사람들이 자기혐오를 겪는 이유를 일일이 찾으려면 너무 복잡해서 풀 생각조차 안 든다. 그렇게 복잡한 사정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 <매그놀리아>가 던지는 해결 방식은 탄력을 얻는다. 그리고 그 에피소드 덕에 인물은 각자의 구원을 조금이라도 찾게 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역시 이런 방식을 택했다. 폴 토머스 앤더슨은 자기혐오의 해결 방식을 얼핏 보면 생뚱맞은 수를 골랐다면 본 작의 각본가는 그냥 이유를 없애버렸다. '인과관계가 뚜렷한 해결책' 대신 '문제의 원인을 없애버린' 설루션을 고른 것이다. 이렇게 수진 캐릭터의 설정으로 영화는 관객에게 자기 연민에 빠진 사람에게 용서할 수 있는 실마리를 안겨준다. 또 이렇게 괄호 쳐져 있는 인물을 배두나 배우가 잘 소화하기도 했다. 이미 합을 맞춰본 적이 있어서 그런가 배우의 장점을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수진 캐릭터가 아니더라도 감독 특유의 꼼꼼한 손길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중후반부 소영이 어떤 인물을 쳐다보는 신이 있다. 한 인물이 어떤 행동을 한다. 근데 카메라는 그 행동을 찍어주지 않는다. 그 대신 소영의 모습을 클로즈업한다. 감독이 생각하는 이 영화의 거리감인 셈이다. 그렇게 소영이 자기를 용서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걸 묘사하는 꼼꼼한 연출이다. 또 월미도의 놀이동산에 가는 신이 있다. 이 부분도 인물들의 입장과 놀이동산이 잘 어울리는 부분이 있다. 또 장소 설정도 좋았다. 극본의 하나하나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에 집중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기 충분하다. 아무튼 이 부분은 여러분이 직접 보시길 바란다. 극에서 엄청 중요하기 때문이다;; 또 난 엔딩도 이 영화의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적절하게 끊었다. 덧붙이는 무언가가 있었으면 많은 분들이 매긴 이 영화의 평점들이 0.5점은 더 깎이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그리고 하이라이트 신에서 단점으로 작용했던 부분이 오히려 장점으로 발현되기도 한다. 버거운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게 하고 싶던 말이었던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감독에게 감사한 마음이었다.
이유가 있었던 칸의 선택
이 영화로 송강호 배우가 칸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2007년 역시 송강호 배우가 나왔던 영화 <밀양>에서 전도연 배우가 여우주연상을 받고 15년 만에 이룬 한국영화의 쾌거다. 이 영화에서 연기 정말 잘했다. 송강호 배우가 과연 어디에선 연기 못했나? 싶긴 하다. 근데 뭐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잖아? 이 작품에서 정말 반짝반짝 빛났다. 9할이 착하고 1할이 악한 인물의 이중성을 묘사하는데 탁월했다. 아마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이 송강호 배우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만든 것 같다. 전반부보다 후반부의 상현이 더 빛난다. <밀양>의 전도연 배우처럼 초장부터 끝까지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는 퍼포먼스가 아니더라도 이 영화의 배경을 만드는 연기였으니 과연 상 받을만하다. 근데 개인적으로는 송강호 배우의 최고작까지는 아니었다.
송강호 배우 이야기는 아니지만 배두나 배우의 연기가 기억에 남는다. 이 영화에서 느껴졌던 '일본어를 한국어로 옮긴 괴리감'이 유일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배우이기도 하다. 또 뭔가 사연 있는 눈빛이나 후반부에 가서 드러나는 인물의 입장까지 뭔가 신비로운 캐릭터 설정을 잘 소화했다. 그리고 이지은 배우도 잘했다. 무난했다. 의외로 욕을 잘해서 놀랐다. 근데 몸싸움은 잘 못하는 듯하다. 아. 난 이 영화를 보고 아이유의 팬이 되었다.
너무 예쁘.....동수 역의 강동원 배우의 영화 필모그래피에서 이 <브로커>가 가장 기억에 남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유약해 보이지만 깊은 남자의 내면이 느껴지는 연기였다. 잘할 수 있는 연기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오리지널리티에 있었으니 과연 물 만난 물고기인 셈이다.삶이란 게 지겹긴 해도 좋은 게 맞는 것 같아
태어나길 잘했어라는 말, 사실 참 어려운 이야기다. 각자가 갖고 있는 상처는 가지각색으로 다르다. 0대 100쯤의 과실이라면 모르겠지만 우린 인간이기 때문에 조금의 책임을 가지고 있다. 그 일 때문에 태어나길 잘했다고 나 자신에게 말하는 것은 참 어렵다. 나도 그렇다. 그런데 이럼에도 불구하고 참 이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짠하게 느껴지곤 한다. 이렇게 서글픈 우리를 <브로커>는 놀이동산으로 데려간다. 우리에겐 기회가 있다. 또 행복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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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에게 오는 끝을 준비하는 자세
눈은 아일랜드 전역에 내리고 있었다. 눈은 음울한 중부 평야의 구석구석에도, 나무 없는 구릉지대에도 내리고, 앨런의 늪에도 소리 없이 내리고, 더 멀리 서쪽으로 섀넌 강의 어둡고 거친 물결 위에도 소리 없이 내리고 있었다. 눈은 또한 마이클 퓨리가 묻혀 있는 언덕 위의 그 쓸쓸한 교회 부속묘지의 구석구석에도 내리고 있었다.
기우뚱한 십자가와 묘석 위에도, 작은 출입문 위의 뾰족한 쇠창 위에도, 그리고 앙상한 가시나무 위에도 눈은 바람에 나부끼며 수북이 쌓이고 있었다. 그가 눈이 온 세상에 사뿐이 내려앉는 소리를 듣고 있는 사이에, 그리고 그들의 최후의 종말의 강림처럼 눈이 모든 산 이와 죽은 이들 위에 사뿐히 내려앉는 소리를 듣고 있는 사이에 그의 영혼은 서서히 스러져갔다.
제임스 조이스의 단편소설 <죽은 사람들> 중
당신은 상실에 얼마나 초연한가? 모든 사람들은 삶의 끝에 죽음을 맞이하고, 동시에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목도한다. 만약 당신이 상실에도 절망하지 않고 무던할 수 있다면 그건 좀 슬픈 일일지도 모른다. 사람이라면 모두, 삶의 끝에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스스로의 생에 죽음이 개입하는 순간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죽음으로 인한 상실을 경험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가까운 이를 잃는 순간을 상상하면 언제나 깊은 공포와 절망감에 사로잡힌다. 올해 초 친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누구나 예외 없이 예기치 못한 죽음과 이별을 경험하기에, 그때를 준비하기 위해 마음의 두께를 단단히 만들며 살아야 한다고 말이다. 그것이 피할 수 없는 세상의 이치라면, 잘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 거니까.
그런 나의 생각이 무의식에 적용된 것인지,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지만 최근 연달아 죽음을 다룬 작품들을 보게 되었다. 형을 잃은 후 직장을 그만두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이 된 책 나는 메트로폴리탄의 경비원입니다 부터, 부검을 통해 죽은 자들이 남긴 말을 산 자들에게 전하는 법의학자들의 드라마 언내추럴. 그리고 마지막은 오늘 이야기할 작품이자, 존엄사를 선택한 친구 마사와 그를 지켜보는 친구 잉그리드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룸 넥스트 도어> 이다.
영화 룸 넥스트 도어 소개 및 줄거리
영화 룸 넥스트 도어는 스페인의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첫 영어 장편 영화이며, 2020년 발간된 시그리드 누네즈의 소설 <어떻게 지내요> 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올해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최고 등급의 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는데, 상영 시 18분간의 기립박수를 받으며 베니스 국제영화제의 신기록을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국내에는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으로 첫 상영되었고 10월 23일 공식적으로 영화관 개봉을 하였다. 개인적으로는 부국제에서부터 궁금했던 터라 개봉 다음 주에 영화를 보고 왔다.
영화는 출간 기념 사인회를 위해 뉴욕 맨해튼을 찾은 유명 작가 잉그리드(줄리안 무어)가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친구 마사(틸다 스윈튼)의 암 투병 소식을 듣고 병원에 찾아가며 시작된다. 이후 잉그리드는 뉴욕에서 마사의 곁을 지키며 살아온 인생 이야기를 듣는다. 하지만 마사의 병세는 점점 악화되어 시한부 선고를 받고, 마사는 잉그리드에게 안락사 계획을 밝히며 자신의 마지막 순간에 옆방에 있어 달라는 부탁을 한다.
삶과 죽음을 대하는 자세
마사(틸다 스윈튼)의 부탁을 들은 잉그리드(줄리안 무어)는 충격에 빠진다. 미국에서는 일부 주에서 안락사가 허용되고 있지만 뉴욕주는 그 일부가 아닐뿐더러, 잉그리드는 저서를 통해 '생명이 어째서 죽음에 이르러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라고 말할 만큼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마사는 그녀에게 부탁하기 전 이미 가까운 친구들에게 '자살에 동조할 수 없다'라며 거절을 당한 상태였다. 잉그리드가 느꼈을 두려움은, 만약 내가 친구에게 같은 부탁을 들었다면 어땠을까를 상상하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아무리 시한부라고 하더라도 그런 부탁은 충격적이고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죽음이 목을 조이는 생생한 감각을 느껴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투병(鬪病)이라는 단어에는 싸울 투에 병 병 자를 사용한다. 그야말로 적극적으로 질병과 싸우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당연히 치열하게 질병과 맞서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며 병을 완치하는 것이 싸움에서의 승리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영화 속 말기 암 환자이자 마사는 이렇게 말한다. 세상은 암 환자가 계속 싸워주길 바라고, 투병 결과에 따라 승자와 패자를 나눈다고 말이다. 그러고는 굴욕스러운 고통 속에서 죽지 않는 것으로 전쟁에서 승리하리라 선언한다.
"난 잘 죽을 권리가 있어."
마사의 대사 중
감독은 잘 사는 것만큼이나 잘 죽고 싶은 마음도 당연한 인간의 욕구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은연중에 탄생과 죽음이 선과 악처럼 나누어져 있는 것을 꼬집는다. 살아있음은 옳은 것이고 죽음은 부정한 것일까? 모두가 삶의 끝에 죽음을 만난다는 것만 봐도 무리한 가정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글의 도입에서 언급한 일본의 드라마 <언내추럴> 에서는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온다.
"죽는 것엔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없습니다. 어쩌다 목숨을 잃지요. 그리고 우리는 어쩌다 살고 있는 겁니다. 어쩌다 살고 있으니까 죽음을 불길하게 여겨선 안돼요."
마사는 종군 기자였다. 평생 살아있음과 죽음이 공존하는 전쟁터를 다니며 남겨진 사람들을 만나왔다. 삶을 사랑하는 것과 별개로 이미 죽음은 두려워하기에 너무나 가까운 것이었다. 전쟁터 속에서 그녀는 어쩌면 삶이 그저 '남겨지는 것'이라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10대 때 베트남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남자친구 프레드를 만나 아이를 임신하지만, PTSD에 시달리던 프레드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싶어 하며 떠난다. 시간이 흘러 마사는 친부의 존재를 추궁하는 딸을 위해 그의 근황을 수소문하고 화재 현장에서 살려달라는 환청을 듣고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후 딸 미셸과도 점차 멀어진다. 살아냈지만 시간이 해결할 수 없는 고통 속에 남겨진 프레드. 자신보다 일을 우선순위에 두는 엄마와 존재도 모르는 아빠를 용서하지 못하고 탄생을 저주했을 미셸. 그리고 혼자 남겨져 치열한 삶을 전쟁처럼 치러냈던 마사까지. 이들의 모습은 비극적이지만 그 누구도 패배자라고 말할 수 없다.
아름다움으로 설득하는 페드로의 미장센
다채로운 미술은 시한부나 죽음 같은 소재를 슬프고 우울한 동정 거리로 만들지 않는다. 세련된 미감과 선명한 색감이 만드는 페드로의 미장센은 감각이 모든 서사를 선명하게 심지어는 아름답게 인지하도록 돕는다. 모든 로케이션과 장면이 아름다워서 영화를 보는 내내 눈이 즐거웠다. 마사가 죽음을 준비하며 샛노란 자켓과 빨간 립스틱을 바르는 장면은 카타르시스가 느껴질 정도이다.
우리는 모두 끝을 향해 가고 있다. 각자의 속도가 조금씩 다를 뿐. 끝을 향해 가는 이 여정을 얼마나 다채롭게 채우느냐는 모두가 가진 숙제일 것이다.
미술과 의상은 그 자체로 페드로의 언어다. 페드로의 드높은 미적 감각은 배우를 즐겁게 한다. 페드로는 내가 녹색 터틀넥을 입으면 틸다는 푸른 재킷을 입게 했다. 이미 그 대비만으로 멋진 구도인데 카메라까지 켜지자 ‘세상에, 우리가 페드로의 세계로 들어왔어! 우리가 페드로의 머릿속에 있어!’라는 느낌을 받았다. 페드로의 세계는 마법 같고 또 동화 같다. 우리의 눈이 회색빛으로 일상을 본다면, 페드로의 눈은 총천연색의 테크니컬러로 세상을 감각한다. 그 세계 안에 발을 디디는 순간 새로운 눈이 열리고, 말초적이라 오히려 인간적인 감정이 내 깊은 뿌리를 자극한다. 관객이 페드로의 영화에 느끼는 반응과 비슷하다. 일상의 삶과 거리를 두는 상상적인 세계가 펼쳐지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감정의 근원만은 관객의 마음에 특별하고 놀라운 방식으로 가닿듯 말이다.
줄리안 무어의 씨네 21 인터뷰 중
다양한 예술가와 작품을 언급하며 은유적으로 사용한 점도 흥미롭다. 에드워드 호퍼의 1960 작 <People In The Sun> 도 그중 하나이다. 도시 속 인간의 고독을 그린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은 이미 오래전부터 영화 속에서 오마주 되어왔다. 대표적으로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작품들이 그 예이다. <룸 넥스트 도어> 에서는 마사와 잉그리드가 함께 떠난 숙소에서 해당 작품의 모작이 걸려있는 것으로 직접 언급된다. 또한 의자에 기대어 같은 방향의 허공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습을 같은 구조로 사용하여 직접적으로 오마주 하였다. 영화 속에서는 숙소 테라스의 선베드로 표현하였으며 왼쪽에는 집이 오른쪽에는 자연이 위치한 것도 동일하다.
영화에서 선베드는 자주 비춰지며 상징적인 장소로 사용된다. 마사는 이 장소를 아름답다고 표현하며 마음에 들어 한다. 같이 외출할까 하고 묻는 잉그리드에게 마사가 좀 더 여기에 있고 싶다고 하는 장면도, 닫힌 문을 보고 마사가 죽었다고 생각한 잉그리드가 무너지는 장면도, 끝내 마사가 죽음을 선택하는 장면도, 그리고 마사와 똑닮은 딸 미셸(틸다 스윈튼)과 잉그리드가 누워있는 위로 눈이 내리는 엔딩 장면도 모두 이 테라스의 선베드에서 이뤄진다. 같은 장소에서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지만 다른 생각을 하는 인물들을 통해 결국에 동시대에 살고 같은 것을 겪더라도, 탄생과 죽음이 고유하듯이, 인간은 개별적으로 고유하며 각자의 자아로 다른 선택을 하는 존재라는 걸 체감했다. 그러니 인간이 느끼는 필연적인 외로움이 안쓰럽다가도 숭고하게 느껴졌다.
삶은 임시적이고 끝은 반드시 온다
앞서 말했듯이 영화는 '끝'의 존재가 그저 사실이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마사의 질병이 가장 대표적이지만 기후 위기에 대한 언급도 감독이 다루는 종말 중 일부이다. 가장 먼저는 대기 오염으로 인한 뉴욕의 분홍색 눈이 그 예이다. 본격적으로는 마사와 잉그리드가 오래전 만났던 애인이자, 환경 전문가인 데미언은 통해 이야기한다. 그는 악화되는 기후 위기에 미래에 대한 희망도, 사람들이 옳은 일을 할 거라는 기대도 없는 회의론자이다. 아들 부부의 출산에 화를 낼 정도이다. 페드로 감독은 데미언의 입을 빌려 진지하게 기후 위기가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지 설명한다. 그 또한 우리가 지금 혀끝에 있지 않아 외면할 뿐인 또 하나의 종말이다.
희망이 없는 게 아니야. 비극 속에서도 살아갈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
잉그리드 대사 중
비관적으로 흐를 수 있는 내러티브를 환기시키는 건 바로 잉그리드(줄리안 무어)라는 인물이다. 나는 이 영화의 주인공이 잉그리드라고 생각한다. 죽음을 삶의 대척점에 두며 '생명의 적'으로 여겼던 잉그리드는 결국 마지막 순간 옆방에 함께 있어 달라는 마사의 제안을 수락한다. 갑자기 두려움이 없어진 것이 아니다. 죽음은 여전히 소중한 무언가를 앗아가고 상실은 숨 막히게 아프지만 삶이 일시적이며 끝은 반드시 온다는 것이라는 걸 받아들이고 마사의 선택을 존중한 것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제각기 종말을 준비하는데, 그중 잉그리드의 태도만 다른 점이 인상깊다. 비관적인 미래에 대해 말하는 데미언에게 잉그리드는 비극 속에서도 살아갈 방법이 있다고 말한다. 자신의 가치관과 반대되는 마사의 선택에도 용기를 내어 기꺼이 손을 잡아준다. 부모와 손절한 채 살아온 미셸에게는 엄마인 마사를 용서할 수 있는 다리이자 숨구멍 역할을 해준다. 끝을 잘 준비하는 것만큼, 삶에 충실한 것도 중요하기에 잉그리드는 최선을 다한다.
페드로 감독은 <룸 넥스트 도어>를 만들기 한참 전, 살아있는 무언가가 (특히 자신이) 언젠가 죽는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다고 자주 말했다고 한다. 그 인터뷰를 보고 이 영화의 주인공은 잉그리드라는 걸 확신하게 되었다. 그녀는 변화하는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회의적인 다른 인물들을 강인한 따뜻함으로 포용하는 잉그리드는 감독이 그리는 이상적인 인간상이 아닐까. 종말이라는 비극은 외면할 수 없는 사실이기에 몇 번이고 무너지고 쓰러지지만, 결코 비극에 휩쓸리거나 지지 않을 수 있는 그런 강한 사람 말이다.
안락사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여러기지 의견과 논란이 많다. 영화 하나만으로 다룰 수 있는 주제도 아니다. 극 중 주인공인 마사는 스스로 안락사를 선택하기에 영화는 존엄사에 대한 영화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난 이 모든 서사 속 삶과 죽음을 이야기하는 근본적인 부분에 더 집중하고 싶다. 영화 중간에 소설 <죽은 사람들>의 구절을 언급하는 부분이 나온다. 이 글 맨 처음을 그 구절로 시작했다. 영화 마지막은 그를 인용한 잉그리드의 대사로 끝이 난다.
- 눈이 내린다. 산 자와 죽은 자 위로. 나와 네 딸 위로.
마사의 죽은 자리에 앉은 마사와 똑같이 생긴 딸 미셸 위로, 함께 걷던 숲속 위로 내리는 눈처럼 죽음은 평범한 삶 곳곳에서 언제나 존재한다. 오늘도 누군가의 옆집에서는 생명이 죽고, 같은 날 다른 곳에서는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 죽은 자의 온기가 남은 자리에서 새로운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의 규칙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를 배운다. 언젠가 또다시 상실의 고통에 잠식되는 날이 오더라도 맘껏 슬퍼하고 그리워하지만서도 힘차게 살아가고 싶다. 오랜만에 힘을 잔뜩 주어 긴 글을 적었다. 끝에 대해, 상실에 대해 어떻게 하면 의연해질 수 있을까 고민하던 나에게 인상적인 영화였다. 아름다운 페드로의 연출에 그리고 틸다 스윈튼, 줄리안 무어 두 배우의 섬세한 연기에 박수를 보낸다.
[참고자료]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106270&utm_source=naver&utm_medium=news
https://www.chosun.com/culture-life/culture_general/2024/10/25/FZTF4Z5KOFHGPJXTXPADTMHJII/
영화 <죽은 사람들> 2004
드라마 <언내추럴>
https://www.m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93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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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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