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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wr2022-04-20 09:17:44

파주, 책이라는 꿈을 꾸었던 사람들의 도시

영화 〈위대한 계약 : 파주, 책, 도시〉 리뷰

 

  좋은 책은 어떤 식으로든 변화를 만들어낸다. 누군가의 내면을, 집단적 정체성을, 한 사회의 구조를 송두리째 흔들어 새롭게 갱신시키는 수단으로 책이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 현대사에 한정해서 말하자면, 군사독재 시절이 특히 그랬다. 책은 비판적 사유를 모색하는 사람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무언가를 제공해주었다. 이른바 ‘금서禁書’로 불리던 책이 존재했음이 이를 증명한다. 

 

  출판인들은 힘겹게, 그러나 굳건하게 군사독재 시절을 거쳤다. 그리고 엄혹한 시절이 일단락되자 더 큰 꿈을 꾸기 시작했다. 책에 담긴 꿈을 물리적 공간으로 확장하고자 한 것이다. 파주 출판단지는 그 결과물이다. 출판인들은 자신의 꿈을 도시 공간으로 구현하고자 백방으로 노력했고 끝내 “위대한 계약”이라는 제목의 계약서를 작성했다.

 

  책을 만드는 사람들이 한 장소에 집단적으로 터를 잡고 공간을 설계하는 일은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다큐멘터리 영화 〈위대한 계약: 파주, 책, 도시〉는 이 놀라운 일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그리고 출판인들의 꿈이 지금은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를 다룬다. 출판단지 조성은 처음부터 많은 어려움에 부딪혔다. 군부대와 인접해 고도 제한이 있어 행정기관뿐 아니라 군을 상대로도 협상을 벌여야 했다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파주 출판단지가 고군분투 끝에 만들어졌다는 걸 알게 되어 괜스레 짠하기도 했고, 출판인들이 군대와도 협상했다는 점에서는 그 당시 출판사의 위상이 대단하긴 했구나 싶어 생경하기도 했다.

 

 

  영화는 출판인들의 인터뷰가 죽 이어지는 방식으로 전개되는데, 출판인 외에 인터뷰이로 가장 많이 참여한 사람들은 건축가다. 건축가들은 출판인들의 꿈을 물리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여러 아이디어를 제공했고, 이를 현실화했다. 갈대숲과 습지를 그대로 둔 채 설계된 출판단지의 전경 하나하나에는 건축가들의 세심한 고민이 담겨 있다. 출판인들의 꿈에 ‘땅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더하고자 했다는 한 건축가의 인터뷰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요컨대, 파주 출판단지는 출판인과 건축가 모두에게 ‘역사적 소명과 시대 의식을 담은’, 꿈을 현실로 만든 공간이었던 셈이다.

 

  이 영화의 장점은 출판단지를 낭만적으로만 그려내지 않는다는 데 있다. 파주 출판단지는 아름다운 이상에 기초해 만들어진 공간이지만, 당연히 흠도 있다. 영화에는 불편한 교통·도심과의 거리로 인한 직원 출퇴근 문제, 주차·주거 공간의 부족, 회사 규모가 수시로 달라지는 출판사의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는 공간 탄력성 등의 아쉬운 점이 차례로 언급된다. 이는 출판단지를 처음 조성할 때의 ‘낙관주의’에 대한 성찰로 나아간다. 즉, 낭만적 이상과 간단치만은 않은 현실이 함께 공존하는 공간으로서 파주 출판단지의 현재를 담담히 그려내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낙담하지 않고 ‘위대한 계약’이 꾸었던 꿈은 아직도 진행 중이라 말한다. 영화 중후반은 출판단지에 입주한 영화사, 예술가에 할애된다. 출판단지가 품은 남북 문화 교류의 가능성과 생태적 가치 등도 의미 있게 조명된다. 난관에 부딪힌 출판인들의 꿈이 실패하지 않고 끊임없이 갱신되어 이어지고 있음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결국 남는 질문은 한 출판사 대표의 말마따나 ‘모두가 어우러지는 공동성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이는 출판인의 사명을 오늘의 관점에서 어떻게 다시 쓸 수 있을지에 대한 물음이다. 출판단지가 처음 시작될 때와 지금은 많은 것이 바뀌었다. 가장 단적인 게 출판인의 인구 구성이다. 영화에 나오는 출판인들은 대부분 머리가 희끗한 노년의 남성, 즉 책으로 사회운동을 하던 시절의 출판사 설립자들이다(출연자 중 여성 출판사 대표는 사계절 출판사의 강맑실 대표가 유일하다). 그들은 책으로 어두운 시대를 밝게 비추고자 했고 어느 정도 자신의 사명을 다했다. 그러나 지금은 편집자, 마케터, 디자이너 등 책을 만드는 사람 중 여성이 훨씬 많다. 그리고 이들은 군사독재 시절처럼 비장한 사명을 갖고 책을 만들지 않는다.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에 기여하기 위해 다양한 책을 만들지만, 이들을 하나로 묶을 만한 사명 같은 건 없다는 소리다.

 

  이와 같은 출판계의 변화는 〈위대한 계약: 파주, 책, 도시〉에 대한 아쉬움으로도 이어진다. 영화가 책, 영화, 예술로 이어지는 파주 출판단지의 외연 확장이 아닌 출판계 내부의 변화와 그로 인한 역동성을 보여줬으면 어땠을까 싶었다. 다소 심심하게 출판단지의 변천을 조명하기보다, 파주로 응집된 책이라는 꿈이 여러 변화 속에서 어떻게 비판적·발전적으로 계승되고 있는지를 질문했을 때, ‘위대한 계약’의 현재적 의의가 더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지 않았을까?

 

  많은 출판사가 파주를 떠나고 있다. 영화가 조금은 더 용기를 내어 이런 상황을 조명하고, 젊은 출판인의 사명은 무엇인지를 질문해줬다면 더 좋았을 또 다른 이유다. 출판사에서 일하는 내게, 파주는 그저 이직하게 되면 멀리 출근해야만 하는 지역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즉, 내게 파주는 ‘위대하지’ 않다. 파주가 문화예술 도시로서 어떻게 변모하고 있는지가 궁금한 사람이라면 이 영화가 충분히 유익하겠지만, ‘책의 사명’과 파주를 연계지어 고민해보고 싶은 사람에게 이 영화는 여러 아쉬움을 남긴다. 선배 출판인들의 멋진 무용담만으로는 파주를 향한 후배 출판인들의 애정을 부풀리긴 어려워 보인다. 그리하여 다시 생각한다. 지금, 우리는 왜 책을 만드는가?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작성자 . rewr

출처 . https://brunch.co.kr/@cyomsc1/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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