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니엘2022-08-22 00:42:41
멋진 시를 쓰는 김종석씨와 그림을 잘 그리는 김춘나씨가 보여주는 전시회!
<작은새와 돼지씨> 시사회 리뷰
김춘나씨는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고 김종석씨는 시를 멋지게 잘 짓는다. 이 두 부부는 예술을 본업으로 하지 않는 자칭 아마추어 예술가이다. 김춘나씨는 자연의 풍경을 본 것을 그대로 그림으로 그리고 취미로 배우는 서예 실력도 상당하다. 김종석씨는 경비원으로 자신이 겪은 경험을 시로 쓰는데 그가 쓴 시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똑같은 종이책에 적는다. 서로를 사랑하는 두 부부는 각자 자신의 별명이 있다. 김춘나씨는 별명은 작은새이고 김종석씨의 별명은 돼지씨이다. 고단한 삶을 살아온 김춘나씨와 슈퍼를 차렸지만 생업이 잘 안됐던 김종석씨는 자신들이 창작한 작품들을 모아 전시회를 하기로 한다. 딸인 김새봄씨는 자신의 부모인 김춘나,김종석씨에게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묻는데 두 부부는 무엇이라고 대답할까?
삶의 고단함을 그림으로 표현한 김춘나씨와
자신의 어려웠던 시절을 시로 쓴 김종석씨에게 진짜 예술가는 무엇이냐고 물을 때 어떻게 대답할까?
두 부부의 삶의 흔적이 담긴 작품들은 각각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
세월이 지나도 작품은 영원히!
김춘나씨는 어렸을 때부터 장래희망이 회사원이었고 일찍 취업을 해서인지 대학교에 가거나 미술을 공부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젊은 나이에 다 해보라는 그녀의 말은 지금의 청춘들에게도 후회하지 않으려면 도전을 해야 한다는 의미를 전해준다. 또한 김종석씨는 슈퍼를 차렸으나 집주인이 나가라는 핀잔이 계속되면서 자신의 생업을 그만두었다. 그 이후로 그는 경비원으로 일하면서 힘든 과거를 통해 만든 시가 많기에 그중에 아주 잘 쓴 게 많다고 딸인 김새봄씨는 칭찬한다. 그동안 세월이 흘러 힘든 시간도 많았지만 김춘나씨의 그림과 김종석씨의 시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작품들로 전시회에 전시된다. 이들에게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는 무엇이냐고 딸인 김새봄씨가 묻자 자신들은 아마추어와 프로의 경계는 딱히 구분이 없다고 한다. 과연 프로와 아마추어는 어떤 것이 다를까? 이 영화는 작은새(김춘나)와 돼지씨(김종석)의 이야기이다. 수많은 작품들이 탄생하기까지 많은 세월의 노고를 견딘 그들의 작품은 프로와 견주어도 아깝지 않다.
프로 되기가 쉽지 않지만 아마추어라도 프로만큼 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니엘의 주관적인 영화 평가!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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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율이 맞지 않는 시의 아름다움, <문라이즈 킹덤>
*영화추천*
문라이즈 킹덤 Moonrise Kingdom, 2012
감독: 웨스 앤더슨
운율이 맞지 않는 시의 아름다움, <문라이즈 킹덤>
아이들은 하루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한다. 어른들의 간섭에 벗어나기 위해선 그들과 같은 위치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그 욕망을 아이들이 가진 미성숙함이라 여긴다. 어른의 개입은 아이가 더 좋은 삶을 살기 위해 꼭 필요한 절차다. 자연스러운 욕망과 당연한 절차. 꽤 중요한 의미를 품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이와 어른이 각자의 입장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복잡하고 어려운 대화를 회피하기 위해 만든 단순한 대답이다. 상대방에게 나의 입장을 선언하는 목적 말고는 아무 의미 없는 말로, 운율이 맞아 오히려 이해하기 힘든 시 같은 거다.
완벽한 사람이 완벽한 사랑을 하는, 그런 완벽한 세상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문라이즈 킹덤>엔 위와 같은 아이와 어른이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운율이 맞지 않는 시를 품고 사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목적에 따라 아이와 어른이란 두 역할로 나뉜다. 그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위험한 실수를 저지르고, 서로의 해결 과정을 지켜보며 자신을 기다리는 결말에 가까워진다. 그들은 점차 자기가 맡은 역할이 상대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아차린다. 다른 길을 걷고 있으나 같은 풍경을 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어느새 아이와 어른은 서로를 구분 지었던 장막을 없애고 ‘나’의 진심을 털어놓으며 예정되지 않은 선택을 한다.
영화는 세상과 우릴 아이와 어른, 감성과 이성, 솔직함과 거짓말 등으로 나누지 않는다. 빠르고 쉽게, 편리하게 분류하지 않는다. 열두 살 샘과 수지가 벌인 사랑의 도피를 섬 경찰과 수지의 부모, 카키 스카우트 대장, 사회복지국 직원이 개별적으로 겪는 사건과 같은 선상에 놓는다. 인물들은 감독이 구축한 독보적인 세계관(공간) 안에서 살아 숨 쉬며 끊임없이 격돌한다. 운율이 맞지 않은 시들의 위험한 실수가 충돌할 때마다 이야기는 위트와 진솔함을 넘나들고, 결과적으로 모두의 마음을 따뜻하게 적신다.
<문라이즈 킹덤>은 황홀하고 우아한 영상미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것만큼이나 더 매력적인 건 인물들의 대사다. 이들의 대화 속엔 영화가 끊임없이 보여줬던 상징이나 명확한 의도가 없다. 독립적인 장치로서 사건을 이끌고, 정체된 인간관계를 변화시키면서 어느 순간 관객에게 무언가를 깨닫게 한다. 그리하여 이 모든 것이 함께 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는 듯한 확신을 갖게 한다. 운율이 맞지 않는 시가 선사하는 아름다움이랄까.
분명 비밀스럽고도 마법 같은 경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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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반쪽의 이야기>, 닫힌 방을 연 멍청이들
*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넷플릭스보다 왓챠를 더 많이 보고 있다. 간이 콩알만 한 탓에 제목은 알면서도 차마 보지 못한 넷플릭스 오리지널이 수두룩하다. 궁금하긴 하지만 아직까지는 호기심이 쫄보를 이기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알게 된 게 <반쪽의 이야기>. 플라톤의 향연을 인용하면서 시작된 영화에서, 약간은 낮고 덤덤하게 나오는 주인공 엘리의 목소리가 좋았다. 다른 톤의 목소리였다면 처음부터 이렇게 와 닿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큰 틀에서는 익히 봤던 전개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전한 편지를 대필해 주는 것도, 마음을 얻기 위해 좋아하는 것들을 샅샅이 파헤치는 것도, 그러다 이상하게 정드는 것도. 아, 엘리가 애스터를 좋아하는 건 반전이 아니다. 처음부터 애스터를 바라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하지만 엘리의 목소리처럼 묘하게 다른 이야기가 있다. 목소리만큼이나 덤덤하고 시니컬한 엘리가 과제 대행 '거래'를 하는 점. 분량마다 금액도 정해져 있고, 과제 성적도 꽤 좋게 받을 수 있다. 돈독 올랐다고 하면 서럽다. 용돈벌이를 하는 게 아니라 전기 요금 등 생활비를 벌고 있다. 엘리를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로 여기면서도 과제 대행을 자연스럽게 맡기는 동급생들. 대부분은 무관심하고, 일부는 기차소리와 엘리 추라는 이름을 섞어 '처기처기 추추'라면서 기차소리로 놀려댄다. 플라톤의 사랑이란 주제로 대행 과제를 포함해 총 6개 과제를 내고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는 선생님. 엔지니어링 박사학위 등 전문성을 갖추고도 영어실력이 부족해 커리어의 시작인 줄 알았던 스쿼헤이미쉬에 주저앉은 아버지. 유쾌하고 재밌는 성격이었을 것 같은 사진만 남기고 일찍 세상을 뜬 어머니. 스쿼헤이미쉬 반은 갖고 있다는 지역 유지의 아들 트리그에게서 보이는 여유와 자신감, 트리그에게 열광하고 동경하는 수많은 학생들. 평생 이곳을 떠난 적 없는 사람들. 사람이 사는 곳엔 늘 문제와 상황이 난무하지만, 겉으로 평화로워 보인다고 해서 괜찮은 상태는 아니다.
누가 그랬나. 삼각형은 완전하고, 삼각관계도 완전하다. 엘리와 폴 모두 애스터를 좋아한다. 엘리는 교회를 가지도 않는데도 4년간 교회에서 피아노 반주를 했다. 애스터 아버지가 목사인 교회에서 과제 대행으로 바쁜 엘리가 황금 같은 주말을 두고 반주를 한다면? 별다른 설명은 없지만 애스터 때문일 거라는데 손모가지도 걸 수 있다. 매주 만났을 텐데도 애스터와는 별다른 친분이 없다. 우연히 마주쳐서 한 첫마디가 '난 엘리 추야' 하는 자기소개인 걸 보니 알만하다. 이름은 알지만 가까워지지 못했다. 엘리와 애스터 중 누구 하나 서로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폴의 이름 뒤에서 편지로, 고스트 메신저로 애스터를 만나게 된 후로 엘리는 정말 이해받는 기분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둘이 그렇게 잘 맞을 수가 없다. 추상화와 문학을 좋아하는 것도, 제법 진지한 고민을 털어놓는 것도.
눈빛 교환만 의미심장
왜 엘리와 애스터는 진작에 가까워지지 않았을까? 애스터가 학교의 "그 트리그가 좋아하는 예쁜 애"고, 엘리는 "과제 대행하는 중국애"라서? 트리그와 트리그 팬클럽에는 끌려다니면서 마음 맞는 아싸 친구와는 다닐 수가 없어서? 애스터를 좋아하지만 애스터는 엘리 같은 애는 모를 테니 멀리서 지켜보는 게 나아서? 학교에서의 이미지와 인간관계가 아니라면 종교 때문일까. 목사인 아버지가 엘리는 종교가 없어서 친하게 지냈다면 혹시 말리셨을까.
영화에서 나를 무너뜨린 대사는 이해받는 기분이 어떤 건지 아냐(You know what it's like to finally meet someone in your age who gets you?)는 엘리의 말 때문이었다. 세상에 누군가 나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도 어려운데, 내 또래고 내 근처에 있고, 심지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니. 그 순간만큼은 눈물 날 정도로 부러웠다. 마음을 건드리는 것들은 늘 내게 모자라거나 비어 있는 것들이다. 대사를 듣기 전까지는 아무 생각 없었는데 놀라울 정도였다. 어쩌면 평생 이해받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가서, 그래도 엘리 너는 행복하면 됐다 싶다가도, 그 대상이 끝내 나는 아닐 것 같은 생각이 들어버려서였을 것이다. 누구보다 반쪽에 진심이었던 건 아니었나 싶게.
4년 만에 처음 대화인 건지
하지만 그런 엘리와 애스터 사이에도 장벽은 있다. 애스터가 "상황이 다르고, 내가 달랐다면.."이라고 말하는 그 이유 때문이다. 엘리가 폴인 척하고 애스터와 연락을 했던 건 애스터에겐 분명 당황스럽고 배신감이 들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우리도 별로 화가 안 나는 게, 폴과 엘리의 결이 너무나 달라서 짐작을 못했을 리 없는 정도다. 글로는 멋진 말을 던질 줄 알고 관심사도 똑같은 사람이, 만나면 긴장했다고 얼어붙어서 대화가 몇 단어 이어지지도 않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글은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이고, 말은 침묵이 반이지만 어딘가 든든한 느낌이었던 것도.
애스터에게 약간은 실망했다면 미술 전공을 선택한 것 이외에 주체적인 결정을 내린 적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엘리 말대로 상황이 다르고, 내가 다를 일은 없다. 엘리가 트리그의 프로포즈에 안돼!라고 소리치지 않았다면 애스터는 못 이기는 척 트리그와 결혼했을 것이다. 엘리를 엘리라고 불러주지 않고, 농담이긴 하지만 heathen (이교도= 비종교인)이라고 불렀다. 엘리는 저 멀리 아이오와로 떠나갈 예정인데도. 다만 그녀가 보여준 대담한 선택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노천온천에 데려간 점. 그곳에서 야말로 가장 자연스럽고 적극적이고, 자신도 얼마나 이해받는 기분이었는지 표현했다. 그렇게 이해받는 느낌을 주는 사이더라도, 완전히 이해받는 건 또 다른 문제다. 완전히 이해받는 건 완전한 반쪽을 찾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니 무너질 필요는 없다. 이해받았던 순간과 그때의 마음만 잘 간직하더라도, 그 순간을 되감아 보는 것만으로도 버틸 만하다. 엘리가 대학 가서 보자고 하지 않나. 이 둘 사이는 두고 볼 만하다.
요즘도 편지 쓴다
엘리는 폴에게 여러 번 놀라곤 한다. 고민이 많은 엘리에 비해 폴은 그 고민을 말도 안 되게 쉽게 풀어버린다. 말도 나눠보지 않은 애스터를 '사랑'한다고 확신하고선 엘리에겐 사랑에 빠져 본 적 없는 것 같다며 정곡을 찌른다. 엘리가 뒤통수에서 따갑게 듣던 '처기처기 추추' 놀리는 소리에 맞서 소리쳐 준다, 사랑하는 건 노력하는 게 아니냐는 명언도 남기고, 사랑의 방식이 다양하다는 것도 겸허히 받아들인다..
영화를 보면 폴이 점점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단순하고 말 주변 없는 빙구라 생각하면 오산. 뭣도 모르고 짓는 미소도 약간 어설프게 뛰는 달리기 폼도 귀엽다. 이거 참 큰일이다. 귀여워 보이면 답이 없는데. 무엇보다 폴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애스터랑 말 한 번 해보지 못했지만 편지를 써보자. 누가 요즘 편지를 쓰냐고? 로맨틱하잖아. 말을 잘 못하니 엘리에게 도움이 필요하다고 찾아도 가고. 폴이 처음에 애스터에게 보내려던 편지를 살펴보자. 애스터 너는 똑똑하고, 착하고, 예뻐. 그중 2개만 해당되어도 너를 좋아했을 거란다. 우습게 들릴 수도 있다. 근데 정말 그럴까? 사실 저 조건이 맞추기 더 힘든 게 필요한 건 어지간히 다 들어있다. 실제로 호감을 갖는데 저보다 더 남다른 이유가 넘쳐날까? 단순 무식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게 답일 수도 있다. 폴이 글 솜씨나 말솜씨가 투박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생각이 얕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말은 잘 못해도 타이밍은 놓치지 않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애스터에게 타이밍 좋게 고백도 하고 손도 잡고 키스도 하고. 할 건 다 한다. 애스터가 폴과 함께 있으면 안전한 느낌이 든다는 건, 그런 든든함일 것이다. 실패할까 고민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되게 할지를 고민하니까.
폴에게 유일하게 뜨악한 건 풋볼 경기에서 득점한 후에 엘리에게 키스를 하려던 때였다. 갑자기 생뚱맞게 느껴질 수도 있었겠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다. 어머니는 늘 말씀하셨다. 꼭 저러다가 정든다고. 누구 이어주려고 도와주다가 둘이 좋아진다고. 저번 주까지 폴이 애스터랑 사귀게 됐다고 들떠하면서 키스하던 사이인 걸 떠올리면 '저놈이!' 하고 등짝을 때리고 싶은 건 사실이다. 엘리가 키스를 받아들였어도 참으로 이상한 상황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바로 뒤에 애스터가 나타나 버렸으니까. 조금만 잘못 나갔으면 장르가 치정물이 될 뻔한 순간. 폴을 지켜보다 보니 마음이 넘쳐서 키스로 확인하고 싶은 건 알겠는데, 그래도 먼저 하려던 말을 했어야 한다고 본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는 좀 궁금하다. 아쉬운 부분이다. 영화의 묘미가 대화에 많이 있었기 때문에 폴이 애스터에게 했던 고백과 어떻게 달랐을까는 상상에 맡기게 되었다.
타코 소시지, 그 맛이 궁금하다
폴이 왜 엘리를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분명하다. 엘리는 폴을 성장하게 해 준 사람이다. 엘리는 폴이 누군가를 좋아하는 저 세 가지 조건(똑똑하고, 착하고, 예뻐) 중 두 가지 이상 혹은 전부를 충족한다. 폴이 혼자서는 하지 못했던 일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애스터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줬다. 비록 시작은 편지 한 통에 50달러인 비즈니스였지만, 엘리가 각종 분야 선생님처럼 트레이닝해 주는 걸 보면 열정 페이라는 건 본인도 알고 있을 터. 타코 소시지를 응원하고 유명해질 수 있도록 음식 비평가에게 몰래 편지도 보내주었다. 맛있는 거 더하기 맛있는 거는 그냥 맛있는 거라며 영화 내내 밀어붙이던 타코 소시지. 그쯤 되니까 한 번 먹어보고 싶더라.
대화가 핑퐁 같다고 핑퐁 치면서 대화한다
그뿐인가. 엘리는 대화를 이어가는 법을 알려주고, 포기하고 싶거나 멍청하다고 느껴질 때 진심으로 응원했다. 15년 만에 풋볼 팀이 득점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게 해 준 것도 엘리다. 애스터를 좋아하지 않은 건 아니겠지만, 엘리와 있을 때 자연스러워 보였던 것도 사실이고. 엘리에게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을 짚어보라면, 엘리를 궁금해하기 시작했을 때다. 애스터를 더 잘 알기 위해 잠입 수사를 하던 중 엘리에게 배고프지 않냐고 물어본 차 안. 엘리 아버지와 어머니 이야기를 물어보기 시작했을 때. 마음을 확실하게 알게 된 건 엘리의 기타 소리를 길 건너편에서 들었을 때 보이던 그 표정부터였다. 피아노 조율을 망쳐서 졸업생 공연을 망칠 뻔한 엘리에게 네 곡을 연주하라며 도와주었을 때도, 뒤풀이에 가서 술에 취한 엘리를 챙기며 자신의 집에 데려왔을 때도. 애스터를 좋아하는 걸 알고 무너졌을 때도. 있는 그대로의 엘리를 응원하며 기차역에서 헤어지던 때에도. 엘리로 인해 폴의 눈빛은 참 많이도 변했다. 이렇게 한 사람에게 많은 눈빛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영화 속에 간단히 나온 '닫힌 방' 이야기를 떠올려 보면 엘리의 아버지, 엘리, 폴, 애스터, 모두 각자 닫힌 방에 있었다. 엘리의 아버지는 과거에 갇혀 있었다. 항상 모든 영화에는 최고의 순간이 있다던 아내를 떠올리면서 그 장면을 보았고, 엔지니어로서 시작점이 되었어야 할 스쿼헤이미쉬에선 기차역에서 기계조차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엘리는 스쿼헤이미쉬에 주저앉은 아버지가 마음에 걸려 떠나지도 못하고, 돈을 벌기 위해 원하지도 않는 과제를 했고, 원하지도 않는 대학에 장학금을 받고 가려고 했다. 폴은 스스로 말했듯 소시지 레시피를 바꾸고 싶지만, 넷째 아들이라 운영할 순서도 아니고,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레시피를 바꾸면 할머니, 어머니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표현하지 못했다. 애스터는 트리그와 결혼하고 싶어 하지 않았는데도, 자신의 아버지가 트리그네 집과 결혼 이야기를 하는 걸 보고 결혼하게 된다 해도 받아들일 모양새였다. 이들이 있는 스쿼헤이미쉬는 닫힌 방의 온상이다.
하지만 도로의 표지판에 쓰여있었던 것처럼, 뭔가가 스쿼헤이미쉬에 일어나고 있다. 모두들 조금씩 달라졌다. 엘리는 그리넬 대학으로 가는 길에 질색팔색하던 파인애플, 부엉이, 안경 쓴 애벌레 이모지를 쓸 수 있게 됐고, 폴은 음식 비평가들에게 좋은 평을 받고 자신만의 소시지 연구에 한창이다. 애스터는 포트폴리오를 준비해서 미술을 공부할 예정이다. 엘리의 아버지는 자신을 걱정해서 떠나지 못하는 딸을 대신해 그리넬 대학에 원서를 넣고, 가는 길에 든든히 먹으라고 만두도 빚어 넣었다. 이제는 멀끔하게 차려입고 기차역에서 쓰지 않던 기계를 작동하고 있다. 닫힌 방과 열린 문은 한 끗 차이다.
엘리와 폴이 영화를 본 어느 날, 엘리는 떠나는 기차를 쫓아오는 사람을 멍청이라고 말했다. 멍청하다고. 기차를 앞지르는 사람은 없다고. 그런 장면은 진부하다고. 하지만 그래서 바로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에게 똑같은 일이 일어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멍청한 건 맞지만, 겪어보면 멍청하다고 나쁜 것만은 아니지. 엘리와 폴이 보던 영화에서는 모두 슬프게 울고 마는 이별이었지만 엘리의 이별은 슬프지 않았다. 엘리의 눈물은 슬프지 않았고 아버지, 애스터, 폴 역시 울지 않았다.
어느 순간에 우리는 외로워하며, 사랑받지 못하고, 이해받지 못할 것이다. 놀랄 것도 없다. 외로움이 중력에 대한 물질의 반응이라면, 외로움은 이 지구 상에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 역시 존재한다는 걸 입증할 뿐이다.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하고 그 자체로 사랑하는 건 인류 역사를 관통한 영원한 숙제이니 엄두도 나지 않는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게 아니겠나. 안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기꺼이 몸소 멍청이가 되는 것. 망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괜찮은 그림에 대범한 선을 그려 넣는 것. 언제든지 상처 받을 수 있다는 걸, 나도 당신도 완벽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힘껏 노력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미 우리의 반쪽은 채워질 조짐이 보인다.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이 아쉽지 않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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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날로그의 손을 들어주는 첩보물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디지털 상으로 모든 기밀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인공지능 '엔티티'가 등장하자 세계 각국은 혼란에 빠진다. IMF 역시 '에단 헌트'(톰 크루즈)에게 엔티티를 조종할 수 있는 열쇠를 찾으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에단은 엔티티를 조종하기보다는 파괴하는 게 더 적절하다고 판단한다. 엔티티는 인류의 미래까지 통제할 수 있는 위험한 무기이기 때문.
이에 에단은 상부의 명령을 거스르고 '일사'(레베카 페르구손), '벤지'(사이먼 페그), '루터'(빙 레임스)와 함께 엔티티의 열쇠를 지닌 미지의 여인 '그레이스(헤일리 앳웰)를 쫓는다. 그러나 엔티티의 대리자인 '가브리엘'(에사이 모랄레스)이 그의 앞에서 나타나면서 에단은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의 생명과 중요한 임무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함정에 빠진다.
<미션 임파서블>에게 기대 안 한 재미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PART ONE>(이하 <미션 임파서블 7>)은 잘 팔릴 수밖에 없는 영화다. 흥행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 우선 톰 크루즈의 존재감이 있다. 그는 한국에서 최소한의 흥행을 보장하는 티켓 파워를 지녔다. 작년에도 <탑건: 메버릭>으로 자기 존재감을 증명했다.
또 <미션 임파서블>이라는 장수 시리즈의 힘이 있다. 이 시리즈는 팬데믹 이전 기준으로 못해도 500만 관객을 기대할 수 있는 프랜차이즈다. 믿고 보는 액션 영화인 점도 한몫한다. 보기만 해도 짜릿한 톰 크루즈 표 스턴트 액션은 늘 화제를 몰고 다닌다.
<미션 임파서블 7>은 위의 기대를 모두 충족한다. 톰 크루즈는 여전히 우리의 '에단 헌트'다. 시리즈 내내 이어진 전통과 팀업 액션은 오래된 팬도, 새로운 팬도 만족시킨다. 그런데 이상하다. <미션 임파서블>에게 기대조차 하지 않은 맛이 유달리 강하기 때문이다. 단순한 팝콘 무비 이상의 시의성과 통찰력이 그것이다. 그 중심에는 인공지능 빌런 '엔티티'가 있다.
'엔티티'와 '데드 레코닝'
엔티티는 낯선 존재다. 시리즈 최초로 등장한 인공지능 빌런이기 때문이다. 디지털화된 모든 것을 해킹하는 엔티티는 모든 정보기관의 적이다. 하지만 가장 강력한 무기는 따로 있다. 계산력이다. 모든 사람의 정보를 수집하고 사람들의 상호작용을 계산해 발생할 일을 예측한다. 마음만 먹으면 전 세계 사람들을 조종해 미래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실제로 에단과 그의 팀은 잠시라도 디지털 기기를 활용할 때마다 임무에 실패한다. 엔티티는 에단을 쥐고 흔든다. 제때 일사에게 가지 못하도. 또 공항에서는 cctv가 해킹당한다. 베니스에서도 통신망을 엔티티에게 내준다. 엔티티가 심고 만들어낸 두려움과 공황 때문에 그들은 잘못된 판단을 내리기 일쑤다.
이에 에단은 1과 0으로 이루어진 엔티티의 세상에 인간적인 방식으로 맞선다. 싸움을 아날로그 세상에 국한하면서 엔티티에게 일격을 가한다. 부제가 '데드 레코닝'인 이유이기도 하다. '데드 레코닝'은 항해 용어다. 추측항법을 말한다. 외부 시스템에 의존하는 대신 지도만 보고 경로를 정한다는 말이다.
기준점은 가브리엘이다. 엔티티에게 오류가 없을지언정 대리자인 가브리엘에게는 오류가 있기 때문. 에단 앞에서 그는 실수를 연발한다. 엔티티를 없앨 도구 중 하나인 키는 기차에서의 혈투 끝에 빼앗기고 만다. 엔티티의 예측대로 배신자가 될 운명인 패리스를 제거하려 하지만 실패한다. 그 대가로 에단은 엔티티의 소스코드에 접근할 권한을 얻는다. 소스코드가 침몰한 러시아 잠수함에 있다는 정보도 파악한다.
디지털과 아날로그 세계의 충돌은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에 기대치 않은 시의성과 통찰력이 느껴지는 이유다. 비록 종류는 같지 않아도 챗GPT를 비롯한 현실의 인공지능을 엔티티에 겹쳐 보는 건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션 임파서블 7>은 짜릿하다. 디지털 세계의 신이 개입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인간 찬가는 부정하기 힘든 소구력이 있다.
인공지능과 첩보물의 만남
<미션 임파서블 7>의 인간 찬가는 다른 이유 덕분에 더욱 빛난다. 인공지능이 초래하는 불안감을 장르적으로 영리하게 승화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이 발전할수록 사람들은 불안해한다. '인간이 인공지능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온다면? 인공지능이 인간의 영역을 모두 차지해 버린다면?' 같은 우려가 커진다.
<미션 임파서블 7>은 이 불안감을 첩보물답게 풀어낸다. 작중 전 세계는 위기에 빠졌다. CIA는 본인들이 만든 엔티티를 통제하지 못한다. 오히려 엔티티가 권력을 휘두른다. 어떤 국가의 기밀도 알 수 있고, 그 어떤 유력 정치인도 조종할 수 있는 권력이 엔티티 손안에 있다. 모든 국가는 엔티티의 공격을 두려워하면서도 엔티티의 권력을 손에 쥐려 한다.
사실 제 역할을 못하는 국가의 모습은 이미 익숙하다. <위기의 국가>에서 바우만과 보르도니가 지적한 바와 같다. 현대 사회에서 국가는 초국가적 자본, 기술, 조직에게 권력을 내줬다. 사회 갈등을 해결하는 중재자, 경제 규제의 주체, 안전의 보장자라고 보기 어렵다. '독립체(Entity)'라는 이름을 지닌 인공지능에게 끌려 다니는 첩보 기관이 낯설지 않은 이유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배경은 첩보원이 활약하기 가장 좋은 판이다. 첩보물은 국가의 역할과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스파이 영화는 이해관계의 충돌을 다룬다. 첩보원, 첩보 기관, 국가의 이익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서스펜스가 핵심이다. 달리 말해 과연 국가가 누구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지 질문을 던지는 장르다.
에단도 다르지 않다. 그는 IMF 소속이지만 미국 정부의 뜻대로 움직이지는 않는다. 미국 정부가 엔티티를 이용해 전 세계의 군사적 패권을 확보하려 하자 엔티티를 파괴하기 위해 열쇠를 쫓는다. 국가의 이익과 시민의 신념이 충돌할 때 무엇을 우선시해야 하는지 묻는 셈이다.
이 질문은 에단을 추적하는 CIA 요원에게 향한다. 그들은 옳은 일을 한다는 처음의 확신을 잃고, 점차 고뇌에 빠진다. 누가 옳은 일을 하는지 혼란스러워한다. 그렇기에 에단과 가브리엘의 갈등 못지않게 에단과 CIA의 추격전 비중도 클 수밖에 없다.
첩보물의 또 다른 매력
동시에 <미션 임파서블 7>은 첩보물의 다른 매력도 놓치지 않는다. 첩보 영화는 대부분 씁쓸한 뒷맛을 남기기 마련이다. 흑백의 이분법으로 이루어진 스파이 세계는 다양한 색을 지닌 개개인의 이야기를 짓밟는 경우가 많기 때문. 이번 작품도 다르지 않다. 특히 에단의 죄책감과 존재 의의에 초점을 맞춘 드라마가 돋보인다. 이 감정을 히로인과 빌런에 제각기 투영해 보여주는 대목도 인상적이다.
우선 영화는 에단 헌트의 죄책감을 계속해서 부각한다. 그는 1편에서 팀 전체가 몰살당한 트라우마를 여전히 떨치지 못했다. 그는 임무 완수와 사랑하는 이들의 목숨을 구하는 것 사이에서 계속해서 고뇌한다. 엔티티는 에단의 약점을 놓치지 않는다. 그에게 끊임없이 선택을 강요한다. 일사와 그레이스 중 누구를 구할지. 그렇게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에단은 굴하지 않고 '선택'해야 한다고 말한다. IMF에 들어온 선택이 헛되지 않을 거라는 오프닝 대사처럼. 트라우마와 죄책감을 딛고 일어서서 어떻게 살아갈지 선택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가브리엘이라는 빌런의 등장이 인상적인 이유다. 과거에 그는 에단과 같이 활동했던 여성을 살해했고, 에단은 이를 계기로 IMF 합류를 '선택' 했다. 가브리엘은 그의 선택과 존재 의의를 환기하는 존재인 셈이다.
가브리엘이 모든 미래를 예측하는 엔티티의 대리자라서 에단의 선택을 거듭 강조하는 연출은 더 의미심장하다. 자기 선택에 따라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에단이 그레이스에게 선택지를 주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그는 전 세계 첩보 기관의 표적이 된 그레이스에게 죽음을 피하기 어려울 거라고 경고한다. 그러면서도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일러준다. 범죄로 점철된 과거를 버리고 IMF를 '선택'하라고.
이렇게 보면 <미션 임파서블 7>의 '데드 레코닝'은 단지 임무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자기 위치를 스스로 추정하고, 그다음 경로를 선택하는 추측항법은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이기도 하다. <미션 임파서블 7>이 스토리에 놀라며 영화관을 빠져나오는 블록버스터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날로그 액션으로 방점을 찍다
시의성 있는 소재, 본질을 꿰뚫는 장르, 인생을 통찰하는 드라마. 이들은 아날로그 감성이 가득한 액션 안에서 하나 된다. 일례로 에단과 그레이스가 신뢰를 쌓고 한 팀이 되는 일련의 과정은 액션에서도 고스란히 표현된다. 로마에서 도망칠 때 오합지졸인 둘과 추락하는 기차에서 함께 사투를 벌이는 둘을 비교해 보면 차이가 극명하다.
사실 새로운 액션은 없다. 다른 영화에서도 볼 수 있는 장면이 많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찍었다는 인상은 확실하다. 시퀀스 하나하나 버릴 것 없기 때문이다. 공항 추격전, 로마에서의 카 체이싱, 베니스에서의 육탄전, 마지막 기차 액션 시퀀스까지 모두 호흡이 길고 촘촘하게 짜여 있다. 사막에서의 오프닝 총격전도 짧지만 강렬하다. 그 덕분에 액션을 간접 체험하는 것만으로도 영화의 주제와 이야기는 직관적으로 각인된다.
달리 말하면 톰 크루즈라는 스타의 매력이 물씬 풍긴다. 에단 헌트가 인공지능과 싸울 때 톰 크루즈는 영화 산업을 구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듯 보인다. CG로 점철된 블록버스터가 넘쳐 나고, 관객은 영화관을 가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는 지금. 톰 크루즈는 직접 발로 뛰면서 '무비 스타'의 가치를 증명한다. <탑건: 메버릭>처럼. 그래서일까? 두 차례나 나오는 톰 크루즈의 트레이드 마크, 전력 질주는 유달리 감동적이다.
어쩔 수 없는 한계와 기대
다만 <미션 임파서블 7>에게도 단점이 있다. '파트 1'이라는 근본적인 한계를 넘지 못한다. 캐릭터 활용만 해도 약간 아쉽다. 그레이스가 대표적이다. 그녀가 다음 편에서 더 좋은 모습을 보일 수는 있다. 하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엄연히 답답함을 유발하는 캐릭터였다. 인기 캐릭터인 일사 파우스트가 다소 허무하게 퇴장해서 아쉬움은 더 크다.
또 엔티티와의 결전을 위한 판을 깔아 두는 전개도 양날의 검이다. 생각보다 드라마가 많고, 스토리가 늘어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163분이라는 시리즈 역사상 가장 긴 러닝 타임도 한몫한다. 다음 편에서 엔티티의 목적이 더 자세히 드러나야 비로소 서사가 완성된다는 점도 근본적인 한계를 넘지 못한 방증이다. 그럼에도 상당히 깔끔한 결말은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PART TWO>가 이번 편보다 더 짜릿할 거라는 기대감을 심어주기에는 충분하다.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톰 크루즈의 달리기에는 항상 진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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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 추천작] 다정한 상상력 깃드는 곳에
1988년. 미라 나이르 감독의 <살람 봄베이>가 세상에 등장한다. 지금도 여성 감독이 손꼽히는 나라 인도에서.
연극을 하고 다큐멘터리를 만들던 사람의 첫 장편 극영화였다. 거리의 아이들이 가진 힘을, 또 그들이 처해 있는 현실을 더 많은 곳에 실어 나르겠다는 의지 표명이었다. 예술이 과연 현실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한 결과물이었다. 거리의 아이들을 배우로 기용하고, 아이들이 사는 바로 그곳에서, 인파 통제도 없이 바글바글하게 찍었다고 한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이 영화는 상업 배급망을 타고 해외에 흘러간 첫 인도 영화가 되었다. 칸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을 받고, 아카데미 시상식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오르는 등, 세계 곳곳에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미라 나이르는 영화의 성공에서 멈추지 않고 거침없이, 자신의 질문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예술은 현실에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마치 그 대답처럼. 미라 나이르는 재단을 만든다. <살람 봄베이>의 수익금으로 거리의 아이들을 후원하는 단체. 이는 집과 밥을 제공받는 아이들뿐 아니라 미라 나이르 감독 본인에게도 선물 같은 존재였다. 예술이 현실에 무언가 할 수 있음을 말해주는. 목말랐던 질문을 해갈하는.
그리고 30여 년이 흘렀다.
2021년. "아주 특별한 단짝dostojee"이라는 제목으로, 인도에서 또 한 편의 영화가 나왔다. 2022년 전주국제영화제에, 어떤 드라마가 우리에게 알려준 <깐부>라는 단어를 제목으로 달고 우리를 찾아왔다. 그리고 다시 묻는다. 예술은 현실에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깐부>의 시놉시스만 읽었을 때에는 좀 더 잔혹한 이야기를 상상했다. 이웃집에 살며 모든 걸 함께하는, 단짝인 두 아이가... 한 아이는 힌두교 집안, 다른 한 아이는 이슬람교 집안. 평화로웠던 마을에 서서히 흘러들어오는 종교 간의 긴장감. 그때 찾아오는 이별.
그러나 막상 <깐부>를 보면 많은 부분이 참 동화적이다. 시골에서 아이들이 어떻게 노는지를, 한참 공들여 보여준다. 마땅한 장난감이 없는 아이들이 어떻게 창의력을 발휘해 멋진 장난감을 만들어 내는지, 용돈이 마땅치 않은 아이들이 어떻게 신박한 방법으로 용돈 대용품을 마련하는지, 값싼 장난감(그중에는 '똑딱이'라고 나오는, 요즘 애들이 갖고 노는 푸쉬팝 같은 것도 있다. 애들은 동서고금 똑같은 걸까?) 하나로 얼마나 깊은 소통을 할 수 있는지... 가난하지만 잔잔한 인도의 시골 풍경에서 귀여운 아이들의 모습이 편안하게 펼쳐진다.
얼핏 보면 시대적 배경을 가늠하기도 어렵다. 개인적으로는, 지금은 노인이 된 유명 배우의 젊은 시절 포스터가 나왔을 때에야 옛날임을 겨우 느낄 수 있었다. 인도 시골은 90년대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 건, 내가 외국인이기 때문이다. 인도 사람들은 아마 영화 초반에 시대적 배경을 단박에 눈치챘을 것이다. 비 오는 밤, 라디오 방송을 통해 흘러나오는 이야기. 타밀나두에서 버스 테러가 있었고... 사원 파괴 사건 진상 조사회가 꾸려졌고...
1992년이다. '바브리 마스지드'라고 불리는, 인도의 이슬람 사원 하나가 파괴된 해. 힌두교도들의 행동이었다. 이는 단박에 종교 분쟁으로 번져,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남부의 타밀나두 지역은 잠시 마비되었다.
여기까지만 들어도 제법 끔찍하지만, 바브리 마스지드 사원 파괴 사건은 오랜 시간 겹겹이 쌓여 온 힌두교-이슬람교 분쟁사의 한 장면일 뿐이다. 수많은 사건들은 사슬고리처럼 연결되어 있고, 이 사건 또한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전의 사건에서 이어져 와, 이후의 사건으로 연결되었다. 피는 피로, 긴장은 긴장으로.
그 영향력은 두 아이가 사는 시골마을까지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들어온다. 원래 나란히 이웃한 두 아이의 집이, 낮고 얇은 담장 하나로 가볍게 갈라져 있던 두 집이 실은 여러 모로 대칭적이었음을 깨닫게 한다.
힌두교 소년인 팔라시의 집에서는 아빠보다 엄마가 부각되고, 여동생이 있고, 농사를 짓는다. 이슬람교 소년 사피의 집에서는 엄마보다 아빠가 부각되고, 누나가 있고, 베틀을 돌린다. 이제는 대칭의 모양보다 차이가 부각되기 시작한다. 큰 교류도 없지만 큰 갈등도 없었던 양쪽 집에서는 두 아이에게 슬슬 눈치를 준다. 간식을 나눠 먹는다든지, 친구의 집에 들어서는 일, 같이 노는 일, 물 한 컵을 마시는 일조차 눈치 보이는 일이 되어 간다.
팔라시의 어머니는 불안하다며 이사를 가고 싶어 한다. 사원이 파괴되었으니 사원을 새로 지어야 한다며 이슬람교도들은 시장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힌두교도들은 그에 맞서 연극패를 부르고 새 신상을 세우기로 한다. 새로 세우려는 신상의 주인공인 라마를 모셔본 적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하지만... 상황이 몰아치는 대로 어른들은 그렇게 몰려 간다. 불안하니까. 어른들은 그동안 너무 많이 본 것이다. 종교적으로 소수파가 되는 순간 학살당하는 장면을 많이 목격했고, 거기서 너무 많은 피를 보았다. 불안해지지 않기 위해 더욱 이를 악물고, 맞불을 놓아야 한다고 외친다.
아이들은 그렇지 않다. 아이들은 경계가 무엇인지 모르고 넘어선다. 무대 위에서 원수였던 연극배우들이 무대 뒤에서 나란히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보며 "원수지간 아니었어요?" 하고 놀랄 만큼 순진무구하다. (배우들은 "먹고살려면 다 그런 거다."라고 대답하는데, 사실 어른들의 종교 싸움도 기원을 따져 보면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아이들이 그걸 깨닫기까지는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었다.)
아이들은 누구도 위협하지 않는 싸움 놀이를 한다. 종이 모자를 만들어 끈끈이를 바르고 허공에 휘둘러, 반딧불이가 붙은 빛나는 모자를 만들어 쓰고 "왕처럼 싸워 보자"라고 한다. 어른들이 맞불을 놔야 한다고 얘기할 때, 반짝이는 것들을 모아 붙인 채 밝게 웃으면서 칼싸움을 한다. 서로 반대되는 지점에 서 있어도 누구도 다치지 않는 것. 아이들의 동화 같은 상상력과 아이다워 사랑스러운 모습이, 현실적인 어른들과 대조되어 더욱 눈이 부시다. 그렇기에 두 아이의 "이별"이 더욱 눈물겹고 놀랍고 애달프지만.
두 아이가 우연히 애벌레를 발견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밟아 터뜨리거나 저 멀리 툭툭 털어버릴 만한, 털이 부숭부숭한 애벌레를 보고 팔라시는 사피에게 묻는다. "나비 만들래?" 백번 양보해서 나비가 될 때까지 애벌레를 키우기로 결심한다 해도, 그런 문장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신선한 문장이었다. 살리는 힘, 앞으로 나아가는 힘이 깃든 문장이라 마음에 깊이 남았다.
창조의 상상력. 생명을 품는 상상력. 그 마음은 사실 대단히 엄숙하고 중요해 보이는, 이를 테면 종교의 사원이나 중요해 보이는 어른들의 회합 자리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그냥 단순하게 같이 있는 마음. 그 다정한 상상력 끝에서 발휘되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데서. 나란히 똑같은 자세로 서서 뻗어보는 발끝, 친구를 부르면서 웃는 눈초리 끝, 소중한 사랑의 이름을 나무에 새기는 마음 끝, 그런 데서.
얼핏 보면 매우 특수한 인도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는 것 같지만, <깐부>를 보면서 나는 인도 바깥의 것들을 더 많이 떠올렸다.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의 분쟁과 그 안에서도 빛나는 어린 시절을 담은 영화 <벨파스트>부터, 지금도 분쟁이라는 이름 하에 신음하고 있는 지역의 어린이들까지도. <깐부>는 인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마음의 벽을 쌓고 사는 사람들이 함께 있는 모든 사회의 이야기이다.
다시 미라 나이르 감독의 질문으로 돌아가 본다. 예술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 미라 나이르 감독 본인이 확인했듯, 그렇다. <살람 봄베이>가 미라 나이르 감독의 첫 장편 극영화였듯, <깐부> 또한 프라순 차터지라는 젊은 감독의 첫 장편 극영화이다. 실제로 영화의 배경과 비슷한 지역에 10년 넘게 살았다는 그는, 실제로 본인의 삼촌도 종교 분쟁 중 사망했고 그로 인해 할아버지가 마음의 병을 얻었다는 그는, 차기작 또한 경계를 넘는 영화가 될 것이라 말한다.
<깐부>가 어디까지 갈지는 모르겠지만, 국경선이 정해진 이래 한 번도 사라진 적 없는 인도의 무수한 경계와 담을 허무는 영화로, 인도뿐 아니라 세상 멀리까지 흘러가 주길 기대한다. 예술이 현실에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또 한 번 보여주는 영화가 되길 기대한다.
[전주국제영화제 <깐부> 상영]
▶ 여기에서 영화제 기간(2022년 4월 28일~5월 7일) 내내 온라인 시청이 가능합니다. :)
▶ 5월 5일 11:30 CGV전주고사 1관에서도 관람이 가능합니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의 초청으로, 전주국제영화제에 프레스로 참석하였습니다.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는 2022년 5월 7일까지 전주 영화의거리 일대에서 계속 진행됩니다.
일부 온라인 상영작도 있으니 어디 계시더라도 이 시간 놓치지 마시길 추천드립니다. 전주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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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 끝은 있는거야! 영화 <트루먼쇼>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여기 딜레마가 하나 있다. 한 아이가 있다. 이 아이가 세상에 나오면 다른 다수의 사람들은 힘들어진다. 다른 사람들 때문에 이 아이는 영원히 갇혀 살게 된다. 한 사람의 희생으로 다수가 행복한 게 중요하다면, 웰컴 투 공리주의. 최대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람의 수에 따라 행복과 불행의 크기를 비교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나만 해도 어느 면접에서 '공리주의를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불가피하다면 최선이라고,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트루먼쇼>, 영화 한 편으로 정말로,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앞서 말한 바로 그 딜레마가 가정이 아니라 실제상황이라면? <트루먼쇼>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트루먼 버뱅크, 태아 때부터 30대로 추정되는 현재까지 하루 24시간 그의 모든 것이 전 세계에 방송된다. 나의 모든 것이 나도 모르는 이들에게 공유된다니. 이건 비밀인데, 하던 말, 나만 알고 싶은 민망하고 부끄러운 일까지 모두. 소름끼친다. 방송국에 입양되었으니 이런 식으로 쓰일 수 있다나.
영화에서 트루먼을 제외하고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방관한 모든 인물이 악당이다. 그러나 한 사람만 꼽자면 프로듀서를 대표적으로 꼽겠다. 트루먼쇼는 트루먼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한 모욕의 집합체다. 그는 사람 대접을 받은 게 아니라 돈 되는 투자처였다. 트루먼쇼는 트루먼에 대한 동의없는 일방적인 사기이자 감금, 사생활 침해, 인권 유린이자 착취다. 죄목을 몇 개나 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트루먼은 진실을 알지 못한다. 프로듀서는 그의 신인 양, 그의 아버지라도 되는 양 스크린에서 그를 쓰다듬고 원하는 방향으로 조종한다. 프로듀서는 그가 진실을 알지 못하도록, 즉흥적인 삶을 살지 못하도록, 이 섬을 벗어날 수 없도록 그에게 트라우마나 시련을 주었다. 물을보면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도록. 그를 위해 섬을 전부 꾸몄고, 인간관계는 배우들로 채워넣었다. 수많은 사람들은 그를 롱런하는 드라마를 보듯 흥미롭게 시청할 뿐이다. 그들에겐 어차피 '방송 프로그램'일 뿐이니까. 가끔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소수에 불과하다. 트루먼쇼는 대세다.
하려면 빈틈없이 제대로나 하지, 곳곳에서 그의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실수가 일어났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는 방송이 라디오에서 들렸다. 하늘에선 조명이 떨어졌다. 그가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하면 모두가 당황한다. 아이를 갖자는 아내 메릴은 사실 별로 그를 안 좋아한다. 겁쟁이인 줄 알았던 그가 수많은 눈과 카메라를 속이고 그렇게 무서워하던 물로 나아갔다. 고분고분하게 말을 듣지 않은 대가로 프로듀서가 만든 폭풍우에 휩쓸릴 뻔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화내지 않았다. 모두에게 위트있게 인사를 한다. '미리 인사하죠, 굿애프터눈, 굿 이브닝, 굿 나잇.' 그는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만들어진 세상, 거짓된 진실, 빈 껍데기의 평온한 일상에서. 다들 그를 시청하기만 했지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다. 심지어 그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한 프로듀서마저도. 그는 행복하지 않았다. 멍청한 듯 했지만 똑똑했다. 시청자가 느낀 감동과 재미는 프로듀서의 눈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남의 이야기가 세상 꿀잼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프로듀서를, 시청자들을 못됐다고 비난만 할 수 있을까. 1998년에 만들어진 트루먼쇼는 놀랍게도 최근의 예능 트렌드와 흡사하다. 프로듀서는 10년, 20년을 앞서 본 선구자인 것이다. 트루먼쇼는 그냥 쇼가 아니었다. 시청자를 들었다 놨다 하는 열일하는 연출로 더 많은 광고와 각종 부가가치를 창출하며 작은 국가의 GDP 수준의 경제적 성공을 이뤘다. 트루먼이 함께 하는 이상 이 수익은 고정적이다. 누가 아나. 늘 단역 자리는 필요하니 일자리를 창출하고 그의 생활 속 제품 홍보로 소비를 촉진시키고, 그 수익으로 파이를 분배하는 등 사회문제를 해결하는데 이바지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정신적 안정감은 어떤가. 트루먼이 성장하는 것을 다같이 흐뭇하게 보며 울고 웃는다. 먼 얘기는 아니다. 우리 역시 만나본 적도 없는 연예인과 프로그램 참가자들에게 공감하고 위로받고 힐링받는다.
트루먼쇼의 프로듀서의 말은 사실이다. 트루먼쇼는 좋은 의도와 영향력을 갖고 있다. '많은 사람에게 희망과 기쁨, 위로를 주는 프로그램.' 다만 많은 사람 중 한 사람이 빠졌을 뿐. 전 세계 TV는 리얼리티 쇼가 가득 채웠다. 모델, 가수, 아이돌 등을 뽑는 부분적인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2016-17년 예능을 쥐어잡은 <나 혼자 산다>, <미운 오리 새끼>, <슈퍼맨이 돌아왔다> 까지. 일상을 노출하는 정도의 차이일 뿐 그리 다르지 않다. 앞의 두 프로그램은 연말 예능프로그램에서 온갖 상을 휩쓸었다. 차이가 있다면 당사자가 프로그램에 참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 집집마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일상에 자리잡았다. 집을 공개하고, 생활하는 날 것의 모습을 아낌없이 보여준다. 더 많은 사람들이 마치 출연자의 '진짜 모습'을 안다고 믿도록. 물론 무엇이 어디까지 진짜인지는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 지금은 진실의 경계가 혼란스러운 정도지만, 나중엔 사람들의 역치가 높아질 것이다. 더 강한 자극은 진실된 존재의 진실된 감정에서 온다. 몰래카메라가 재밌는 이유와 같다. 예전에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란 존재 자체가 익숙하지 않았다. 어차피 방송은 짜고 치는 대본이 암암리에 있는 게 아니던가? 사람들은 불신했다. 그러나 지금은? 익숙하다. 진심이 있는 부분도 많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미래는? 트루먼쇼 같은 것이 없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시청률이 잘 나오니까. 돈이 되니까. 사람들이 열광하니까.
훌륭한 프로듀서가 뜻밖의 상황을 맞이할 때의 자세
냉정하게 생각하자. 프로듀서의 역량은 훌륭하다. 눈치를 채고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트루먼에 대처하기 위해 그 역시 열심히 대처하느라 바빴다. 갑자기 돌아가신 설정의 아버지를 우연찮게 만나자 시청률을 끌어올릴 수 있는 전개와 대사를 마련한다. 트루먼의 고뇌에 대한 위로, 트루먼과 아버지의 재회. 기쁨의 눈물. 바로 클로즈업을 해선 안 된다. 서서히 멀리서부터 마지막 그의 얼굴로 다가가야 한다. 트루먼이 그가 만든 세상을 박차고 나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는 프로였다. 그는 의도적으로 나쁜 역할을 맡기도 했다. 트루먼이 폭풍우에서 모진 고생을 하게 만들었고 폭풍이 지나간 쨍쨍한 햇살에 비친 만족감을 대조하며 극의 밀도를 높였다. 마지막 문을 열고 나가기 전 이 곳에서 계속 함께하자며 그의 내면의 두려움을 건드렸다. 물론 진심도 있었을 것이다. 나와 오래 함께 하자. 그러나 한 구석으로는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끝날 때 끝나더라도 레전드는 만들어야지. 부정할 수 없는 최고시청률을 갱신하며 전 세계 사람들에게 감동과 재미를 선사했다. 프로듀서의 현실을 생각해보면 트루먼에게 마냥 좋은 일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그만두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전 세계의 시청자, 자신의 밑에서 일하는 수많은 사람들, 얽힌 이해관계자의 기대에 찬 눈빛. 그는 트루먼의 인생동안의 시간만큼 그들의 무게 아래 짓눌려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저울에 두자면 프로듀서 입장에서는 트루먼의 벗어나고 싶다는 고민은 묵인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에게 이 상황은 딜레마가 아니다. 이제와서 부조리가 가득한 세상에 나가지 않는 것이 트루먼에게도 좋다고 생각하니까. 어차피 스타가 된 이상 바깥 세상에서도 그가 원하던 자유는 얻을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니까. 여기선 고작 갑갑할 뿐이지만 진짜 세상에서 그는 욕을 먹고 상처를 받을테니까. 게다가 적어도 트루먼에게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하고 있기도 하니까. 심지어 이혼한 후에 재혼할 두번째 아내까지. 귀차니즘이나 결정장애에 빠져있다면 이 만한 직업도 없다.
프로듀서는 트루먼쇼를 딜레마로 보지 않았다. 한 사람의 완전한 희생으로 다른 이들이 이득을 보는, 일방이 희생하는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한 사람의 스타와 지켜보는 수많은 지지자들, 윈윈이나 협조 관계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에게 인간도 아니라고 비난의 화살만 퍼부을 텐가. 그는 자신의 일을 그저 잘 알고, 잘 하고 있는 전문가였다. 그는 쇼는 끝이 없다고, 계속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하나뿐인 스타인 트루먼은 쇼도 끝이 있는 거라며 문을 박차고 나갔다. 프로듀서는 말문을 잃었다. 갑자기 예상치 못한 끝을 맞이한 것이다. 아직 트루먼을 보내줄 어떤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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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욱신욱신하는 모든 이의 이름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지금 우리의 의학발전은 인정하기 싫게도 과거 사람들에게 행해진 생체실험 덕분이라는 말이었다. 그래, 인정하기 싫게도, 맞는 것도 같다. 수많은 이에게 규칙적으로 바닷물 주사를 투여하지 않았다면 비브리오 패혈증의 존재는 보다 늦게 알려졌을 것이다. 바닷물이 혈액을 대신 할 수 있다는 거짓으로 판명된 가설 대신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지금은 인간에겐 하진 않고 실험용 동물을 쓴다. 매정하게 말하자면 과정은 비인간적이었으나 결과는 인간을 위하는 것일 때도 있다. 그 판단을 어떤 사람도, 어떤 시대도 쉽게 내릴 수는 없다. 우리는 시대 아래서 자유롭지 못하다. 시대가 펼쳐놓은 판에, 말이 되어 이리저리 움직인다. 시대가 만약 신이라면 참 체계적인 큰 손이 아닐까. 때맞춰 부딪히는 이념을 널어두고, 갈등을 만들어내면서 사람을 시험한다. 우리는 시험당하고 시험하는 존재이다. 태어날 때도 내 원이 아니었건만 사는 것도 내 원이 아닌 바에야 이게 대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러나 '소용'은 애당초 성립되지 않는 말이다. 쓸모가 있고 득이 되는 것. 살아가는 것은 쓸모와 득으로는 나눌 수 없는 것이다. 영화 <동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게 그 말을 속삭이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말했다. 일제강점기 하에서 윤동주와 송몽규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윤동주는 당대에는 빛을 발하지 못했으나 그의 시는 대대손손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오래오래 남아있다. 송몽규는 일제강점기에서 열심히 앞장서 싸웠으나 결국 이름 하나 남기지 못했던 사람이라고. 이준익 감독 또한 윤동주는 과정은 좋지 않지만 결과가 좋았고, 송몽규는 결과는 없지만 과정은 훌륭했던 사람이라고 말했다. 윤동주의 아름다운 결과와 함께 과정이 아름다웠던 송몽규를 함께 보여주고 싶었다고.
이름을 훗날 길이길이 남기는 것은 누구나 꿈꾸는 일이다. 내 이름이 이왕이면 좋은 쪽으로 칭송을 받는다면야 그보다 좋을 일은 없다. 그러나 동주와 몽규가 그랬을까. 둘이 그 말을 들으면 어떻게 반응할지 상상해보았다. 동주와 몽규에게만은 적어도 과정과 결과, 그런 이분법을 두는 것이 옳은 것인지 의문이다. 그게 영화에서 불편하던 포인트였던 것 같다. 그건 마치 영화 구석구석 드러나던 선택지와 같다. 처음 영화 시작부터 나타났던 신앙과 공산주의에 대한 고민. 일본순사가 교실을 박차고 들어와 내밀던 개인주의냐 전체주의냐, 일본사람이냐 아니냐, 하던 불편한 선택지. 혹은 아버지가 내미는 진로선택의 일침과도 같았다. 이과냐, 문과냐. 문학을 공부하는 것이 무슨 쓸모냐 의사가 되어 사람을 구하는 것이 쓸모지. 마지막 자기 확신에 빠져 있는 일본 취조인의 이야기와도 같다. 야만이냐, 문명이냐. 국제법에 대강 끼워맞춰서 자발적인 듯 보이게 진술서를 받으면 문명이고, 그런 것조차 모르는 무지한 조선인은 야만이고. 이분법은 수많은 경우와 변수를, 이야기의 목을 댕강 잘라버린다. 마찬가지다. 과정과 결과는 그들이 원하지 않았을 이분법이다. 무엇이 과정이고, 무엇이 결과인가. 나에겐 동주와 몽규 모두 과정도 좋았고, 결과도 좋았다. 평생을 애써 자신이 뜻하는 바에 다가가려한 과정이 훌륭하다. 한스럽게 숨을 거뒀지만 이렇게 지금 다시 살아나 남은 우리가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게 하는 결과가 훌륭하지 않은가.
아주 확고하게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동주는 몽규의 그림자이자 2인자였다. 마지막엔 무려 동주가 절규하면서 몽규의 그림자인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드러나지 않았다고 동주가 수동적이며, 재능이 없고, 목적과 이유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물론 동주는 몽규에 비해 수동적인 것처럼 보인다. 동주가 먼저 몽규를 부르지 않는데 비해 몽규는 영화 내내 '동주야'하면서 그를 부른다. 가장 귀에 많이 익은 대사이기도 하다. 동주가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은 여자에게 쭈뼛쭈뼛하면 몽규는 모르는 척 도와준다. 날 선 대화로 서로에게 흠집이 되는 말을 나눈 직후에도. 먼저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고 기뻐하기는 커녕 동주 상심하지 않게 말할 것을 먼저 고민하는 몽규다. 그는 당선되지 않아 시를 꽁꽁 매어두는 동주에게 직접 잡지를 만들어 시를 발표하자고 제안한다. 원하던 대학에 붙고도 동주가 붙지 않으면 바로 대안을 찾느라 바쁘다. 몽규는 기분이 상한 동주가 좋아하는 정지용, 백석의 시집을 가져다 주면 이윽고 동주가 자신과 눈을 맞추리란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몽규와 동주의 관계는 극단적으로 몽규의 일방적인 적극성과 헌신, 동주의 일방적인 소극성과 고집으로 이뤄진 것인가? 형만한 아우없다더니 역시 동주는 몽규같은 형을 만나 재능을 알아봐주고 뒤늦게 날개를 펴게 된 건가? 아니다. 몽규와 동주는 서로 다른 사람이다. 그 선을 넘지 않으면서 서로를 소중히 하려고 노력한다. 몽규는 시보단 산문의 힘을, 현실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것을 중요시하고 동주는 문학, 시 그 자체의 울림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을 중요시한다. 몽규는 다른 이를 말로 설득하고 총을 들고, 동주는 시를 계속 쓴다.
어느 순간 몽규에게 동주는 동주이면서. '윤 시인'이다. 동주말마따나 시집도 안내고 등단도 안했는데 왜 시인이라고 당당하게 소개할 수 있는걸까. 그건 영화 속에 나온 것처럼 동주가 그림자도 2인자도 아니며, 전혀 수동적인 사람도 아니기 때문이다. 드러나지 않을지언정 시에 대한 그의 뚝심은 영화 내내 흔들리지 않는다. 그가 존경하던 정지용 선생님이 시를 그만 쓰라고 하는데도 그는 꿋꿋하게 내내 우리말로 시를 쓰고 모아둔다.
다카마쓰 교수가 그에게 시를 써보는 게 어떻냐고 물었을 때 그의 기분은 어땠을까. 동주는 사실은 시를 쓰고 있다고 대답했다. 출판을 하지 않아 시인은 아니지만 시를 쓰고 있다고. 그 때 다카마쓰교수는 조선어로 된 시라서 출간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며 한 마디를 날렸다. 그가 쟁여두고 있어서 출간하지 않았던 이유보다도 더 큰 이유는 시대가 정해놓은 한계이기도 했다. 그것을 교수가 지적한 것이다. 당신 잘못이 아니라 시대의 잘못이라고. 출간이 자유로웠다면 그는 아마 못이기는 척, 부끄러워하면서도 출간했을 것이다. 그가 부끄러운 것은 시를 줄곧 써서 현실을 바꾸지 못하고 숨어드는 것 같은 자책이다. 하지만 본질적인 이유는 자신있게 자신의 생각을 담은 그 시를 선뜻 낼 수 없는 시대때문이다. 다른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울리지 못하고 혼자만의 우물에서 울리는 파장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시대가 막아놓은 둑에서도 물 한방울씩을 알뜰히 모아두고 있었을 뿐인데.
영화에선 쿠미라는 일본인 학생의 도움으로 영어로 시집을 출판하려 했다. 겁이 없이 진행된 해외 출간. 수동적인 이미지의 동주라면 마지막까지 쿠미가 알아서 빨리 출간을 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엔 그 원고를 쿠미가 아니라 동주가 직접 보내겠다고 한다. 그 소심하고 겁많은 사람이. 그걸 하려고 그는 잡힐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몽규와 함께 가지 않고 하루를 꼬박 기다렸다. 그건 수동적인 사람이 할 수 있는 선택이 아니다. 실제로 윤동주는 직접 한정판이나마 출판을 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고, 출판이 실패하고 다른 사람에게 원고를 넘겨두기도 했다. 동주는 학교의 필수적인 교련도 거부하고, 창씨개명도 최대한 늦게 하려한다. 그 거짓부렁이 진술서에도 서명하지 않겠다고 한다. 이런 윤동주의 과정이 좋지 않고, 결과만 좋다고 할 수 있을까.
몽규 역시 마찬가지다. 몽규는 결과가 없지만 과정이 좋은 사람인가. 과정과 결과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문제이다. 동주와 몽규 사이의 과정과 결과를 생각해보면 의미는 달라진다. 동주를 '대기는 만성이다'하면서 질투에 휩싸이게 할 정도로 이른 나이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술가락'이 있다. 홀연히 독립군 활동을 하고 돌아오고 공부를 시작하곤 잡지 <문우>를 직접 발간했다. 거기엔 동주의 시도 있지만, 몽규의 우리말 뜻인 꿈별이라는 이름으로 쓰인 시 '밤' 이 있다. 조선일보에 실렸던 <하늘과 더불어>까지. 영화에 나오지 않았으나 영화를 보고 나면 동주의 시만큼 몽규의 작품도 좋고 궁금해져서 나눠본다.
< 술가락 >
- 송한범(송몽규 아명)
우리부부는 인제는 굶을 도리밖에 없엇다.
잡힐 것은 다 잡혀먹고 더잡힐 것조차 없엇다.
「아- 여보! 어디좀 나가 봐요!」 안해는 굶엇것마는 그래도 여자가 특유(特有)한 뾰루퉁한 소리로 고함을 지른다.
「………」 나는 다만 말없이 앉어 잇엇다. 안해는 말없이 앉아 눈만 껌벅이며 한숨만 쉬는 나를 이윽히 바라보더니 말할 나위도 없다는 듯이 얼골을 돌리고 또 눈물을 짜내기 시작한다. 나는 아닌게 아니라 가슴이 아펏다. 그러나 별 수 없었다.
둘 사이에는 다시 침묵이 흘럿다.
「아 여보 조흔수가 생겻소!」 얼마동안 말없이 앉아 잇다가 나는 문득 먼저 침묵을 때트렷다.
「뭐요? 조흔수? 무슨 조흔수란 말에 귀가 띠엿는지 나를 돌아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을 한다.
「아니 저 우리 결혼할 때… 그 은술가락말이유」
「아니 여보 그래 그것마저 잡혀먹자는 말이요!」 내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안해는 다시 표독스운 소리로 말하며 또 다시 나를 흘겨본다.
사실 그 술가락을 잡히기도 어려웟다. 우리가 결혼할 때 저- 먼 외국 가잇는 내 안해의 아버지로부터 선물로 온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 술가락과 함께 써보냇던 글을 나는 생각하여보앗다.
「너히들의 결혼을 축하한다. 머리가 히도록 잘 지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는 이 술가락을 선물로 보낸다. 이것을 보내는 뜻은 너히가 가정을 이룬뒤에 이술로 쌀죽이라도 떠먹으며 굶지말라는 것이다. 만일 이술에 쌀죽도 띠우지 안흐면 내가 이것을 보내는 뜻은 어글어 지고 만다.」 대개 이러한 뜻이엇다.
그러나 지금 쌀죽도 먹지 못하고 이 술가락마저 잡혀야만할 나의 신세를 생각할 때 하염없는 눈물이 흐를 뿐이다마는 굶은 나는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없이 「여보 어찌 하겟소 할 수 잇소」 나는 다시 무거운 입을 열고 힘없는 말로 안해를 다시 달래보앗다. 안해의 빰으로 눈물이 굴러 떨어지고 잇다.
「굶으면 굶엇지 그것은 못해요.」 안해는 목메인 소리로 말한다.
「아니 그래 어찌겟소. 곧 찾아내오면 그만이 아니오!」 나는 다시 안해의 동정을 살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없이 풀이 죽어 앉어잇다. 이에 힘을 얻은 나는 다시 「여보 갖다 잡히기오 발리 찾어내오면 되지 안겟소」 라고 말하엿다.
「글세 맘대로 해요」 안해는 할 수 없다는 듯이 힘없이 말하나 뺨으로 눈물이 더욱더 흘러내려오고잇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전재산인 술가락을 잡히기에는 뼈가 아팟다.
그것이 운수저라 해서보다도 우리의 결혼을 심축하면서 멀리 ××로 망명한 안해의 아버지가 남긴 오직 한 예물이엇기 때문이다.
「자 이건 자네 것 이건 자네 안해 것-세상없어도 이것을 없애서 안되네」 이러케 쓰엿던 그 편지의 말이 오히려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런 숟가락이건만 내것만은 잡힌지가 벌서 여러달이다. 술치 뒤에에는 축(祝)지를 좀 크게 쓰고 그 아래는 나와 안해의 이름과 결혼 이라고 해서(楷書)로 똑똑히 쓰여잇다.
나는 그것을 잡혀 쌀, 나무, 고기, 반찬거리를 사들고 집에 돌아왓다.
안해는 말없이 쌀음 받어 밥을 짓기 시작한다. 밥은 가마에서 소리를 내며 끓고잇다. 구수한 밥내음새가 코를 찌른다. 그럴때마다 나는 위가 꿈틀거림을 느끼며 춤을 삼켯다.
밥은 다되엇다. 김이 뭉게뭉게 떠오르는 밥을 가운데노코 우리 두 부부는 맞우 앉엇다.
밥을 막먹으려던 안해는 나를 똑바로 쏘아본다.
「자, 먹읍시다.」 미안해서 이러케 권해도 안해는 못들은체 하고는 나를 쏘아본다. 급기야 두 줄기 눈물이 천천이 안해의 볼을 흘러 나리엇다. 웨 저러고 잇을고? 생각하던 나는 「앗!」하고 외면하엿다. 밥 먹는데 무엇보다도 필요한 안해의 술가락이 없음을 그때서야 깨달앗던 까닭이다.
<밤 >
- 꿈별(송몽규 필명)
고요히 침전(沈澱)된 어둠
만지울듯 무거웁고
밤은 바다보다 깊구나
홀로 헤아리는 이 맘은
험한 산길을 걷고
나의 꿈은 밤보다 깊어
호수군한 물소리를 뒤로
멀-리 별을 쳐다 쉬파람 분다
< 하늘과 더불어>
- 꿈별
하늘-
얽히여 나와 함께 슬픈 쪼각하늘
그래도 네게서 온 하늘을
알 수 있어 알 수 있어..
푸름이 깃들고
태양(太陽)이 지나고
구름이 흐르고
달이 엿보고
너하고만은 너하고만은
아득히 사라진 얘기를 되풀고싶다
오오- 하늘아-
모-든것이
흘러 흘러 갔단다.
꿈보다도 허전히 흘러갔단다.
괴로운 사념(思念)들만 뿌려 주고
미련도 없이 고요히 고요히...
이 가슴엔 의욕(意欲)의 잔재(殘滓)만
쓰디쓴 추억(追憶)의 反(반)추만 남아
그 언덕을
나는 되씹으며 운단다.
그러나
연인(戀人)이 없어 고독(孤獨)스럽지 않아도
고향(故鄕)을 잃어 향수(鄕愁)스럽지 않아도
인제는 오직-
하늘속의 내맘을 잠그고 싶고
내맘속의 하늘을 간직하고 싶어
미풍(微風)이 웃는 아침을 기원(祈願)하련다.
그 아침에
너와 더불어 노래 부르기를
가만히 기원(祈願)하련다.
몽규는 연희전문학교에 들어가 2등으로 졸업했다. 그 때 그는 분노할 때 분노하는 사람이었다. 2등 상이 어이없게도 대동아공영, 일본의 군국주의를 정당화하는 책이었고 받자마자 이따위 것을 상으로 준다며 집어 던져버렸다. 그것이 세상을 바꾸게 하지는 못했더라도, 그 자리에 있던 불편한 사람들의 마음은 아마 세상 속 시원하게 바꿔주었을 것이다. 동주와 일본으로 유학길을 떠날 땐 다시 교토제대에 합격했던 코스를 보면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은 얻을 수 있었던 능력자였다. 다만 동주와 마찬가지로 시대가 관여하는 일, 독립군 활동, 일본 내 유학생을 규합하려던 사건 등은 일이 목적대로 이뤄지는 것이 쉽지 않았을 뿐이다. 몽규는 영화에서 동주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딪히고, 싸우고, 도전하며 멋진 형이자 동반자로 등장했다. 끝까지 동주보다 먼저 태어나 조금 늦게 세상을 떠났으니 참 인연은 인연이다. 그의 좋은 결과는 간략하게 설명하려 한다.
이 쯤되면 영화의 제목이 왜 <동주>여야만 했는지는 의문이다. 영화의 포인트 상으론 몽규도 같이 담겼어야 할 텐데 말이다. 게다가 왜 영화는 흑백이었을까. 어느 한 순간도 빠짐없이. 하지만 알 것도 같다. 영화를 보고 나면 동주, 몽규, 이렇게 성을 떼고 부르게 된다. 멀리 있는 분들이 가깝게 느껴진다. 동주는 윤동주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동주야, 하고 부르던 몽규의 목소리가 담겨있다. 영화에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살아남아 동주의 시를 같이 고민하고, 동주의 시를 출간해준 사람들의 목소리가 담겨있다. 동주는 대명사인 것이다. 마음의 색이 흑백으로 강제로 물들고, 모든 선택이 흑백같이 이분법으로 재단되던 시대에 좋은 과정을 보여주려 끊임없이 노력하고도 자신을 부끄러워했던 이들, 우리는 설사 모른다 하더라도 이토록 좋은 결과를 우리에게 이렇듯 감사하게 건네준 수많은 이들의 숨, 눈빛, 목소리, 마음이 담겨 있는 대명사. 들으면, 부르면 마음 한 켠이 욱신욱신해지는 그 모든 이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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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안나라수마나라> 스토리 예고편
진짜 마술사가 있다고 생각해? 네가 어렸을 땐 믿었잖아. 《안나라수마나라》 5월 6일 공개. 오직 넷플릭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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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종말의 발키리 시즌2> 공식 예고편
월간 코믹 제논》에 연재되며, 단행본 누적 발행 부수 1,400만 부를 돌파한 초인기 만화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이 마침내 시즌 2에 돌입한다! 원작은 '이 만화가 대단하다! 2019' 남성 편, '전국 서점 직원이 추천하는 만화 2019', '제2회 만화 신문 대상' 등 다수의 상을 수상한 화제작! 이 만화의 박력 넘치는 세계관을 영상으로 옮긴 곳은 《십이대전》, 《헬로 월드》를 제작하고, 《무한의 주인 - IMMORTAL》, 《프로메어》, 《걸즈 앤 판처》의 수많은 격전을 3D CG로 구현한 그래피니카 스튜디오. 인류의 존망을 걸고 전 세계의 신과 인류의 대표가 일대일로 맞붙는 13판의 승부가 지금 다시 막을 연다! 피가 끓고 살이 떨리는, 서로의 신념을 관철하기 위한 혈전이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