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작가2022-09-10 22:15:23
피노키오, 너는 이미 '진짜 아이'인 걸
디즈니플러스 [피노키오] 비교
공통점
홀로 사는 목공, 제페토 할아버지가 나무인형 '피노키오'를 만든다. 제페토는 잠들기 전, 푸른 요정에게 "피노키오를 진짜 소년으로 만들어달라"라고 소원을 빈다. 그 소원을 들은 푸른 요정은 마음씨 착한 제페토의 소원을 들어주어 피노키오를 살아 움직이게 만든다.
푸른 요정은 나무로 만든 소년인 피노키오에게 "남을 먼저 생각하고 착하고 용감한 소년이 되어야만 진짜 아이가 될 수 있다"라고 조건을 건다. 그리고 피노키오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도록 귀뚜라미 '지미니 크리켓'이 양심이 되어 도우라고 지시한다.
제페토는 살아 움직이는 피노키오를 보고 뛸 듯이 기뻐하며 피노키오를 학교에 보낸다. 하지만 학교에 가던 중, 피노키오는 사기꾼 여우인 어니스트 존과 그의 부하 고양이 기디온을 만난다. 그들의 꾀임에 넘어간 피노키오는 인형극의 단장인 '스트롬불리'에게 팔려가 공연을 하게 된다. 욕심쟁이 스트롬불리는 피노키오 덕에 돈을 많이 벌자, 피노키오를 새장에 가둔다. 그 사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피노키오를 찾기 위해 제페토는 밤거리를 돌아다닌다.
피노키오는 새장에서 가까스로 탈출하지만, 집에 돌아가던 중에 이번에는 '오락의 섬'에 끌려가게 된다. 그곳은 말썽꾸러기 아이들을 당나귀로 만들어 파는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피노키오는 당나귀 귀에 꼬리까지 생겼지만 가까스로 도망쳐서 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이미 제페토는 피노키오를 찾기 위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간 상태였다. 아빠를 구하러 간 피노키오는 먼스트로라는 고래 뱃속에 제페토와 함께 갇히고 만다. 제페토와 피노키오는 고래 뱃속에 불을 피워 재채기를 하게 만들어 먼스트로가 입을 벌렸을 때 탈출한다.
아빠를 무사히 바닷가로 데려온 피노키오는 용감하고 착하며 남을 먼저 생각하는 '진짜 아이'가 된다.
차이점
1. 요정을 대하는 지미니 크리켓의 태도
알다시피 실사판 [피노키오]에서는 푸른 요정이 민머리의 흑인으로 나온다. 이와 다르게 애니메이션에서는 푸른 요정이 백인에 금발의 머리를 하고 있다. 별것 아닐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애니메이션과 실사판을 비교하며 볼 때 지미니 크리켓의 태도가 너무 달랐다.
백인 요정이 나왔을 때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고, 스스로 나서서 피노키오의 양심이 되겠노라고 자처한다. 요정이 시키기도 전에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하는 등 예의를 차리면 차렸지 함부로 대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흑인 요정이 "이 아이의 양심이 되어 주겠니?" 하고 요청하자 칼같이 거절한다. 그러다가 요정이 갈 데 없이 떠돈다고 팩트 폭력을 날려 버리자 마지못해 알겠다고 한다.
이런 작은 디테일이 논란을 더욱 키운다고 생각한다. 세월이 많이 흐르기도 했고, 실사판을 거치며 많은 것이 각색되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백인과 흑인을 대하는 곤충의 태도가 너무 다르지 않은가. 온전히 똑같이 재현할 것까진 없겠지만, 적어도 우호적인 태도는 유지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2. 푸른 요정, 어니스트 존과 기디온의 반복등장
어니스트 존과 기디온은 영화 [피노키오]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악당이다. 이 인조 사기단인 여우와 고양이는 학교에 가고 있는 피노키오를 꾀어내 극단으로 향하게 만든다.
애니메이션에서는 이 사기단이 피노키오를 스트롬불리와 오락의 섬으로 이끄는 역할을 모두 수행하지만, 실사판에서는 처음에 딱 한 번 등장하고 만다. 애니메이션에서의 움직임을 제법 재미있게 잘 살렸는데, 극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위해 각색한 듯하다.
푸른 요정의 등장 횟수도 다르다. 애니메이션에서는 처음 피노키오가 말을 하게 되었을 때, 피노키오가 새장에 갇혔을 때, 총 두 번 등장한다. 하지만 실사판에서는 처음 한 번 등장하고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마지막에 피노키오와 제페토가 집으로 돌아갈 때 간접적으로 도움을 주긴 하지만) 이런 각색 덕분에 피노키오의 '모험'을 잘 살릴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3. 피노키오가 겪는 시련
영화에서 피노키오는 끊임없이 선택의 기로에 선다. 하지만 그 선택에 대한 책임과 대가를 애니메이션에서는 피노키오에게 온전히 지우곤 한다. 때때로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린아이에게 가혹하다. 하지만 실사판에서는 피노키오가 선택한 일들을 아이의 책임으로 돌리기보단 나쁜 어른들과 사회의 어두운 단면 때문에 순수한 아이가 유혹의 길로 빠진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애니메이션에서 피노키오는 자신의 선택으로 학교에 가지 않는다. 그 때문에 벌을 받는다는 느낌이다. 새장에 갇혀 푸른 요정을 만나면서도 거짓말을 하는 피노키오는 갱생 불가한 나쁜 소년처럼 보인다. 오락의 섬도 마찬가지다. 어니스트 존에 발 놀림에 꾀이긴 했지만 애니메이션에서 피노키오는 그 섬에서 노는 것을 즐긴다.
하지만 실사판에서 피노키오는 꿋꿋이 학교에 갔다가 쫓겨나고 만다. 나무 인형은 학교에 올 수 없다는 교장의 발길질과 아이들의 비웃음. 비정한 사회의 편견이 피노키오를 결국 스트롬불리의 극단으로 내몰고 만다. 또한 실사판 피노키오는 오락의 섬에서의 행동들에 거부감을 느낀다. 맥주를 마시지도, 물건을 부수지도 않는다.
그 때문인지 지미니 크리켓의 태도도 많이 변한다. '어디 한 번 나 없이 잘 해봐라!'하는 태도에서 '우리 피노키오를 내가 지켜야 해!'하는 모멘트로 말이다.
4. 파비니아의 등장
파비니아는 실사판에서만 등장하는 인물로 스트롬불리가 노예처럼 부리는 인형 조종사다. 파비니아는 등장인물 중에 유일하게 피노키오를 도우려는 선한 인물이다. 또한 인형 조종사들과 함께 스트롬불리를 감옥에 보내고 평등한 인형 가족 극장을 만드는 정의로운 인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인물의 등장은 피노키오를 학교에서 쫓아내거나, 새장에 가두거나, 당나귀로 만들어 내다 파는 나쁜 어른들 속에서도 착한 어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물론 영화 자체가 아이들을 위한 것이기에 희망과 어른에 대한 믿음을 주려는 의도일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영화를 보는 어른들에게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하는지를 상기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감상평
실사판 [피노키오]는 애니메이션과 전체적인 맥락과 흐름은 같지만, 중간중간 각색된 디테일들이 돋보이는 영화였다. 무엇보다 피노키오의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성장을 중요시했다는 점에서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피노키오가 어린아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는 것도 장점 중 하나다. 요정에 대한 논란이 약간 아쉽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좋았다.
사실 마지막 장면에서 눈여겨보지 않으면 피노키오의 무릎 뒤의 이음새가 변하는 것을 눈치채기가 힘들다. 처음에는 이 사실을 알고 피노키오가 '진짜 소년'으로 변했다고 생각해 조금 실망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나무 이음새가 사라질 때 푸른 요정의 증표인 파란 불빛이 반짝이지 않는다.
"넌 언제까지나 나의 진짜 아들이란다. 뭐 하나도 바꿀 게 없단다. 네가 정말 자랑스럽구나. 그리고 널 많이 사랑한단다."
제페토는 자신을 구해준 피노키오에게 말한다. 이미 피노키오는 자신에게 진짜 아들이라고. 그리고 이 말은 피노키오가 '진짜 아이'로 변한 것이 말 그대로 '변했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다른 사람에게 피노키오는 여전히 나무인형에 불과하지만, 제페토에게만큼은 진짜 아이 못지않은 소중한 존재이다. 그렇기에 제페토와 함께 걸어가는 피노키오의 뒷모습은 진짜 아이처럼 보이는 것이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게 해주는 지미니 크리켓처럼, 우리는 언제나 아이들의 양심이 되어야 한다. 귓속에서 작은 목소리로 언제나 알려줄 수는 없더라도 행동을 함으로써 아이들에게 알려줄 수 있는 것이다.
피노키오가 나무로 만든 아이라서, 진짜 아이가 아닌 가짜 아이인 걸까? 그건 아니다. 누구든 피노키오를 진심으로 대해준다면 피노키오는 그 사람에게 '진짜 아이'가 될 수 있다.
어떤 아이든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진심으로 대하는 사람에게는 마음을 연다. 아이를 정직하고 용감하며 남을 위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아이의 몫이 아니다.
아이가 어떤 어른으로 성장하는지는 어른들의, 우리 모두의 몫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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