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2-11-03 16:24:54
위로와 용기를 주는 영화 추천해주세요!
<플라이 투 더 스카이> <불량소녀, 너를 응원해!> <울고 싶은 나는 고양이 가면을 쓴다>
안녕하세요! 씨네랩입니다.
1:1 맞춤 영화 큐레이션 시간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번에 신청 받은 주제는 바로 '위로와 용기를 주는' 영화입니다.
이 게시물 혹은 씨네픽 인스타그램에 올라간 동일 내용의 콘텐츠 게시물에
자신이 보고싶은 영화에 대해 적어주신다면 다음 콘텐츠를 올릴 때 여러분들의 댓글을 바탕으로
1:1 맞춤 영화 큐레이션을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1:1 맞춤 영화 큐레이션 시작해볼까요?٩( ᐛ )و
플라이 투 더 스카이
ⓒ 네이버 영화
synopsis
이태리에서 돌아온 성환이 교환과 재회한다.
cine pick!
꿈,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전반적으로 다루는 영화 <플라이 투 더 스카이>는
2x9의 색깔로 무겁고 진지한 위로보다는 가볍게 위로를 전한다.
싱 스트리트
ⓒ 네이버 영화
synopsis
전학 간 학교에서 만난 라피나에게 첫눈에 반한 코너. 잘 보이고 싶어서 밴드를 하고 있다는 거짓말을 한 코너는 덜컥 라피나를 뮤직비디오에 섭외하고, 그날부터 코너는 급하게 밴드 멤버를 모으기 시작한다.
cine pick!
<원스> <비긴 어게인>에 이은 존 카니 감독의 세 번째 작품인 <싱 스트리트>는
도전을 하라는 용기와 함께 노래 가사로 위로를 주기도 한다. 도전을 주저하는
사람들에게 이 영화를 추천한다.
예스 맨
ⓒ 네이버 영화
synopsis
대출회사 상담 직원 칼 알렌(짐 캐리)은 ‘NO’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매사 부정적인 남자. 하지만 친구의 권유로 ‘인생역전 자립프로그램’에 가입하면서 그의 인생이 180도 뒤바뀐다!
cine pick!
YES의 힘을 보여주는 영화 <예스 맨>은 긍정의 힘을 보여주며 용기를 내서 도전하다 보면
많은 경험과 하루 하루 새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무기력함에 빠진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불량소녀, 너를 응원해
ⓒ 네이버 영화
synopsis
공부와 담을 쌓은 구제 불능으로 학교에서 낙인찍힌 사야카. 하지만 그녀를 절대적으로 믿어주는
엄마와 포기를 모르는 츠보타 선생을 만나 명문대 진학 도전을 선포하게 된다.
cine pick!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불량소녀, 너를 응원해>는 깊은 위로를 주는 명대사가 많은 영화이다.
성장 영화로, 도전하고 노력하는 주인공의 모습 그 자체만으로도 관객에게 위로와 용기를 준다.
울고 싶은 나는 고양이 가면을 쓴다
ⓒ 네이버 영화
synopsis
좋아하는 남자친구에게 고백하기 위해 고양이가 된 소녀의 여정을 그린 애니메이션
cine pick!
부드러운 따뜻한 색감과 작화로 호평을 받은 <울고 싶은 나는 고양이 가면을 쓴다>는
고양이 가면이라는 색다른 소재를 사용하여 따뜻한 위로와 감동을 주는 영화이다.
영화 속 OST 역시 많은 이들에게 사랑 받았다.
씨네랩 에디터 Hizy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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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곳적 복수 신화를 지금 소환하는 이유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서기 895년, 해외 정복을 마치고 자신의 왕국으로 돌아온 '아우반디르(에단 호크)' 왕은 왕비 '구드룬(니콜 키드먼)'과 어린 암레스 왕자와 재회한다. 그러나 막 성인식을 치른 아들에게 본격적인 후계자 수업을 해주기도 전에 그는 동생 '푤니르(클라에스 방)'의 반란으로 목숨을 잃는다. 푤니르는 구드룬 왕비와 왕국을 차지하고, 암레스는 바다 건너로 도망간다. 이후 세월이 흘러 바이킹의 일원이 된 '암레스(알렉산더 스카스가드)'는 왕국을 잃은 푤니르가 망명지인 아이슬란드에서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에 노예로 신분을 위장한 그는 노예선에서 만난 마녀 '올가(안야 테일러 조이)'의 도움을 받아 푤니르의 땅으로 들어가고, 아버지의 복수를 준비한다.
로버트 에거스 감독의 신작 <노스맨>은 바이킹 왕자 암레스의 사랑과 복수를 노래하는 영화로, 중세 시대극이자 근래 할리우드에서 보기 힘들었던 에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피비린내 나는 10세기 북유럽의 모습이 가장 먼저 눈을 사로잡는다. <그린 나이트>처럼 상징적이고 시각적인 방식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며 신화적 영웅의 비현실적 여정을 압도적인 분위기와 미장센으로 녹여낸다. 주술사가 이끄는 암레스의 성인식이나 피 튀기는 바이킹의 전투 장면은 거칠고 잔혹하다. 폭풍이 몰아치는 북대서양의 거친 바다부터 아이슬란드의 화산에 이르는 웅장하면서도 잔인한 자연의 풍광이 더해지면 그 시대의 야만성이 눈앞에서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심심찮게 등장하는 절단 장면은 '이 정도로 잔인할 필요가 있나?'라는 의문을 자아낸다.
하지만 강렬한 영상에서 눈을 돌려 주인공 암레스의 여정에 빠져들다 보면 그 의문은 자연히 답을 찾는다. 특히 중세 스칸디나비아 전설 속 영웅인 암레스 왕자가 셰익스피어 비극의 주인공 햄릿의 원형이라는 점, 하지만 암레스와 햄릿의 이야기가 사뭇 다르다는 점에서 그 답은 더욱 명확해진다. 덴마크의 왕자인 햄릿은 삼촌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그에게 복수하려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분노와 슬픔을 다 풀어내지도 못한 채 예기치 못한 사건사고에 휘말린다. 혼란 속에서 그는 미친 듯 보이는 현실과 미쳐 가는 자아를 화해시키지 못하고, 복수마저도 온전히 끝내지 못한 채 죽는다.
햄릿의 복수는 허망하다. 복수심이 도리어 파국을 가져온다는 것을 복수가 결코 건강한 선택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듯 보인다. 사실 복수의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작품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당장 <일리아스>만 해도 그렇다. 친구를 죽인 헥토르를 향한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시작한 <일리아스>는 헥토르의 아버지를 만난 후 그의 용기와 부성애에 감동한 아킬레우스를 비추며 헥토르의 장례식으로 끝난다. 분노에 가득 찬 야수였던 아킬레우스가 복수심을 버리고 사랑, 희생, 용기를 아는 고결한 인간으로 거듭나는 이야기인 것이다. 비록 그 끝은 조금 달라도 햄릿과 아킬레우스는 모두 복수의 무용함을 이야기한다.
<노스맨>과 암레스는 다르다. 영화는 햄릿, 아킬레우스와는 달리 복수의 완성을 통해 생명력을 되찾고 한 명의 인간으로 거듭나는 암레스를 보여준다. 복수와 삼촌의 죽음을 다짐하며 바다를 건넌 간 암레스는 바이킹의 배를 탄 채로 다시 등장한다. 배에서 내려 한 마을을 공격하는 바이킹들 사이에서 암레스는 다른 바이킹들과 전혀 다를 것이 없다. 그저 사람을 죽이는 데 몰두한다. 적군을 죽이고 그 몸을 입으로 물어뜯으며 울부짖는 그의 모습에서는 목적 없이 배회하는 한 마리의 외로운 늑대가 보일 뿐이다.
그러나 마녀의 환시를 보고, 자신이 복수를 완수할 운명이라는 예언을 들은 후 그는 새롭게 태어난다. 삼촌의 땅인 아이슬란드로 향하기 위해 인간 대우도 받지 못하는 노예로 위장한 암레스는 가장 낮은 계급이지만 오히려 가장 살아있어 보인다. 집을 나가 떠돌던 외로운 늑대는 이제 무리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 눈이 이글거린다. 복수를 통해 암레스의 인생이 죽음에서 삶으로 전환되는 이야기는 영화의 결말이 가장 단적으로 드러난다. 용암이 치솟는 화산에서 삼촌을 죽임으로써 마침내 꿈꾸던 복수를 하는 데 성공한 암레스. 그는 삼촌과의 결투에서 입은 상처로 인해 죽음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클로즈업되는 그의 표정은 환희와 평화로 가득하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지켰고, 아버지와 자신의 왕통을 이을 아이들도 남겼으면, 응어리 진 분노도 온전히 터뜨린 후 해소하여 온전한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다른 인물들의 서사 역시 복수의 긍정적인 면을 드러내 보인다. 당장 푤니르만 하더라도 그는 단순히 복수의 목표물이 아니다. 왕의 배다른 동생이자 사생아인 그는 자신의 삶을 무시한 이복형에게 복수한 인물로, 비록 영지를 잃어버리기는 하지만 가족들과 따뜻한 삶을 영위한다. 그래서 암레스에게 가족을 한 명씩 잃어가는 그의 모습에서는 간악함보다는 인간적인 연민이 느껴진다. 그의 어머니인 구드룬 왕비가 마찬가지다. 삼촌 푤니르에 인해 강제로 결혼하여 비극적인 삶을 사는 것처럼 보였던 그녀는 알고 보니 푤니르를 추동한 만악의 근원으로 밝혀진다. 그녀는 노예로 팔려와 강제로 결혼하고 후사를 낳아야 했기에 증오 가득 찬 결혼 생활을 끊기 위한 복수를 감행한 것이다. 그래서 구드룬은 분노하는 암레스 앞에서 자신의 선택에 후회가 없었고 지금의 삶이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고 일갈한다.
이에 더해 올가와의 관계도 흥미롭다. 일반적으로 신화 속 여성은 남성의 성장을 위한 도구로 활용되어 왔다. 여성과의 사랑을 통해 남성은 상처를 치유하고 질적으로 다른 인간으로 거듭나는 반면, 여성은 분기점 외의 특별한 역할을 맡지 못한 채 해피 엔딩 속에서 존재감을 잃는 경우가 많다. <노스맨>은 다르다. 암레스는 올가를 만나 사랑을 나눈다. 복수를 함에 있어서 적잖은 도움도 받고, 또 서로의 목숨도 구해준다. 하지만 올가는 암레스의 운명에 종속되지 않는다. 암레스는 사랑을 통해 복수심을 잊고 성숙한 인간이 되는 대신 목숨을 걸고 복수하는 늑대로 남을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들의 사랑은 쌍둥이를 잉태한 채 그 관계가 끊어질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암레스는 온전히 마음의 평화를 얻을 기회를 잡고, 올가는 노예에서 벗어나 위대한 왕통을 이어갈 새로운 미래를 개척해 나간다. 이처럼 <노스맨> 속 복수는 단지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힌 싸움이 아니라 바람직하고 정당하며 옳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피할 수 없는 싸움이다.
물론 혹자는 <노스맨>의 복수극이 그리 특별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햄릿과 암레스가 복수에 성공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차이를 제외하면 이 영화의 각본은 어디서 본 듯한 기시감을 떨쳐내지 못한다. 이는 2시간을 넘는 137분의 러닝타임 동안 느린 템포로 진행되기에 꽤나 지루한 인상이 남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 멋지게 복수하는 쾌락을 선사한다는 특징은 고전 중의 고전인 알렉상드르 뒤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특출 난 게 아닐 수 있다.
이에 더해 신화 원전의 분위기를 재현하는데만 집중한 것도 비판의 여지가 있다. 일례로 작년에 개봉한 <오필리아>는 햄릿을 원작으로 하면서도 햄릿의 아내인 오필리아를 전면에 내세워 햄릿의 비극을 여성의 시선에서, 그간 주목받지 못했던 이들의 시선에서 재해석한 바 있다. 그에 반해 죽음과 폭력, 예언과 마법으로 가득한 <노스맨>의 세계는 굳이 이 신화를 지금 이 시점에 만나야 할 이유가 있는지 의문을 남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암레스의 세계를 잘 살펴보면 <노스맨>에 숨겨진 시의성이 그 모습을 찬찬히 드러낸다. 화산을 배경으로 암레스는 복수를 위해 목숨을 바쳐도, 싸우다 죽어도 좋다는 마음가짐으로 마지막 결투에 임한다. 바이킹에게 정당한 복수를 위해 싸우다가 죽는 것은 그들의 천국인 발할라로 갈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죽을힘을 다해 속에 가득한 울분을 온전히 표출하면, 전장에서 죽은 후 발할라에 들어가 라그나로크가 올 때 오딘의 옆에서 함께 싸우는 영광을 누릴 수 있다. 즉, 이 세계는 복수를 긍정하며, 오히려 되갚아주지 못하는 이들이 손해를 본다는 믿음이 지배적인 세상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노스맨>의 현대적 맥락을 볼 수 있다. 지금의 사회는 외관만 다를 뿐 암레스의 세상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SNS 상에서 오가는 설전, 리벤지 포르노의 등장,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적을 제거하려는 정치인들과 지지자들의 모습까지. 일상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이 모든 현상은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과거의 수많은 전쟁과 갈등의 변주일 따름이다. 범죄자들에 대한 형량을 강화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엄벌주의에 대한 갈망 역시 국가나 사법 제도가 복수를 대신한다는 믿음이 약해졌음을 방증한다. 암레스처럼 직접 당한 만큼 돌려주고 정의를 바로잡는 복수의 욕구가 나날이 높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지나치게 충실한 재현 같아 보이는 <노스맨>의 접근법은 결코 과하지 않다. 태곳적 복수 신화를 성공적을 소환하는 심장 박동을 닮은 북소리와 극한의 현실 고증을 통해 신화에 설득력을 더하는 비주얼이 인상적이다. 암레스의 세계와 그의 행적이 가능한 사실적으로, 그리고 실감 나게 느껴질수록 관객 역시 영화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현실에서 커져가지만 실천에 옮기기 어려운 욕망을 분출하는 공간을 경험할 수 있으므로.
암레스가 발할라에 들어가는 결말이 대표적이다. 화산에서 죽어가는 그의 앞에 하늘이 열리고, 발키리가 날개 달린 말을 타고 내려와 그를 발할라로 이끄는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환상이다. 하지만 이는 복수를 통해 평화를 찾은 암레스의 심정을 그 어떤 방식보다도 훌륭하게 반영하는 연출이기도 하다. 성인식부터 전설 속의 검을 얻는 장면에 이르기까지 복수에 미친 그가 다양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모습을 이미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지나치게 재현적이고 현대적 맥락에서는 동 떨어져 있는 듯 보이는 <노스맨>에서는 원형적인 복수 신화를 통해 현대 사회를 반추하게 만드는, 단순한 영화적 재현 이상의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A(Acceptable, 무난함)
태곳적 복수 신화를 재소환하는 현대의 야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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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 잃은 딸들의 긴 우울
- 영화 <로스트 도터(2021)>는 배우 매기 질렌할의 감독 데뷔작이며, 제78회 베니스 국제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이러한 권위적인 수식은 개개인의 솔직한 판단에 침묵을 강요하는 듯하여 썩 즐기지는 않으나, 영화를 감상한 후엔 각종 수상 이력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로스트 도터>가 시의적절하게 제작 및 공개된 작품이라는 데엔 이견을 갖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특히 딸을 잃어버린 어머니조차 '잃어버린 딸'이라는 미아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황이라는 것을 그려내니, 이 작품은 어쩌면 세상이 잃어버린 모든 딸들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리라.포스터에서 확인할 수 있는 영화의 캐치 프레이즈 “딸을 버렸어요. 그리고 집을 나왔죠.”는 <로스트 도터>가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는지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물론 영화계에서 신화화된 모성을 해체하려는 시도는 지속적으로 이어져왔다. 예컨대 우리는 <케빈에 대하여(2011)>를 경험했고, 봉준호 감독의 <마더(2009)>역시 보았다. 다만 앞선 두 작품은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모성의 불안정성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매기 질렌할의 작품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하기사, <케빈의 대하여> 혹은 <마더>에서 제시한 아들은 모두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이기도 하니 대립적 관계 형성이 더 쉬웠을 수도 있겠다만.어머니와 딸의 미묘한 관계에 대해서는 <레이디 버드(2017)> 등과 같은 영화를 통해 재현되었지만, 대개는 딸의 성장 서사를 기반으로 하는지라 세대갈등으로 해석하거나, 모녀관계는 본디 복잡하기 마련이라는 추상적인 표현을 하는 경우가 잦았다. 엔딩에서 미적지근한 화해라도 내비쳤단 뜻이다(<크루엘라(2021)의 경우 생물학적 어머니와 양어머니의 구분을 둠으로써 이러한 질문을 피해 간다). 이러한 점에서 <로스트 도터>는 적지 않게 유의미한 영화이다. 딸을 버린, 아니 가정에 소원한 어머니의 시점에서 영화가 전개되며 딸인 비앙카와 마사의 서사를 삭제하였고, 주인공인 레다(올리비아 콜먼)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적절한 발화를 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정을 버린 어머니에 대해 고운 눈길을 보내지 않는 사회에 대해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끈질기게 살아남는 것, 시대와 사람 앞에 이러한 자신이 존재하노라고 보여주는 방법 밖엔 없다.※ 스포일러 주의레다라는 개인우선적으로 레다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레다는 이탈리아 비교문학을 전공한 학자이자, 그리스의 해변가로 휴가를 보내러 온 교수이다. 젊었을 적부터 빛나는 능력을 발휘한 그는 외모 역시 아름답다고 묘사된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레다가 매력적인 여성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로스트 도터>의 레다는 마흔여덟이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매력적이라고 평가하며 본인 역시 반짝이는 젊은이들의 생기를 전혀 잃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레다는 한 두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굉장히 입체적인 인물이다. 해변가에서 조우한 니나(다코타 존슨)와 그의 가족들과 껄끄러운 첫인상을 남겼음에도 다음 만남에서 곧바로 화해하며, 니나의 가족이 위험한 사람이라는 경고를 받았음에도 굳이 그 무리와 거리감을 만들지 않는 담대함을 보인다. 영화관에서 소동을 피우는 남자를 강하게 비난하며 안내원을 부르는 장면은 레다가 어떤 인물인지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이렇듯 레다는 대체로 여러 계산을 한다기보단 자신의 직감이 따르는 선택을 하는 것으로 보이며, 그래서인지 그의 선택이 언제나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레다가 늘 자상하기만 한 단편적 인물이 아님에도 짧은 휴가 기간 동안 다양한 사건에 얽히게 된 데에는 타인의 오해가 가장 큰 원인이 아니었을지 생각하게 된다. 지적인 직업여성이라는 데에서 오는 확실한 정체성과 마흔이 넘은, 딸 두 명을 키운 어머니라는 이미지에서 흔히 연상하는 푸근함 따위로 레다를 해석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 아니겠는가.당연하지만 시선은 언제나 주관적인 것인지라 레다 역시 해변가에서 만난 니나에게 자신을 투영한다. 딸을 사랑하고, 남편과의 관계에서 행복하다고 말하지만 동시에 도망치고 하는 니나, 딸이 자신을 미치게 만든다고 털어놓는 니나는 레다의 젊은 시절과 몹시 유사하다. 또한 영화 초반, 해변가에서 니나는 딸을 잃어버리는데 이를 통해 레다는 오래전 바다에서 비앙카를 잃어버렸던 자신을 떠올린다.잃어버린, 아니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딸영화의 제목은 <로스트 도터>로 잃어버린 딸을 뜻한다. 그러나 위에서 말했듯 이 영화는 어머니의 시선에서 전개된다는 점에서 어머니가 딸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묻는다. 어머니란 대체 무엇이기에 그들은 딸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을까? 젊은 레다(제시 버클리)가 남편 조(잭 파딩)에게 숨이 막히는 듯하다고 표현한 까닭은 무엇일까? 아니, '어머니 됨'이란 대체 무엇이며, 레다는 어째서 모성의 거부를 외칠 수밖에 없었을까?많은 이들이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어머니 됨'은 기본적으로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일인데,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활발해진 요즈음이라지만 이 부담은 그다지 줄어들지 않았다. 아무리 함께 가정을 꾸렸다 하더라도 돌봄 부담은 여성에게 부과되는 경우가 대다수이며, 이미 다수의 논문에서 기혼여성들은 일과 가정의 양립에서 비롯되는 부담과 지나친 역할 요구로 인해 정신 건강이 위협받고 있다고 밝혀진 바 있다(윤명숙, 유현경, 이수비. 2022). 영화 <로스트 도터>에서는 여성이 부딪히는 현실을 뚜렷하게 그려낸다. 레다는 남편 조와 마찬가지로 공부와 가정을 양립시키고자 하지만 뜻대로 일을 할 수 없다. 조는 교수로부터 전화를 받으며 아내에게 가사와 양육을 미루고 출장을 가지만 레다는 출장을 가기 직전까지 가사도우미에게 모든 것을 설명해내야 한다. 남편이 집을 비운 동안엔 둘째 딸의 울음에 몇 초만 기다려달라는 레다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첫째 딸은 무한히 애정을 갈구하니 육체적/정신적으로 한계에 몰린다. 논문, 혹은 번역과 같은 작업에 필요한 기간은 너무나 촉박하다. 모든 것이 그를 옥죄어온다. 이때 밝혀지는 한 가지 사실은, 레다 역시 그리 좋은 환경에서 자라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역시도 친정을 버리고 뛰쳐나온 딸 - 로스트 도터이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신체적/정신적 부담을 이기지 못한 여성/어머니에게 배려와 도움을 내밀긴커녕, 억압만을 지속적으로 부여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기에 레다의 우울은 더욱 길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이아름, 정정희(2021)에 따르면 양육스트레스가 지나치게 높아진 어머니의 경우 방임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레다 역시 한동안 가정을 떠나 있었다. 그러나 그런 그가 일시적으로 돌아간 순간에조차 잭은 레다에게 당근을 건네지 않는다. 그는 레다가 가정으로 돌아올 때 누릴 수 있을 생활의 안정을 제시하거나 양육 부담을 나눠줄 계획을 공유하긴 커녕 '자꾸 이렇게 행동한다면 아이를 키우기에 적합하지 않은 환경인 레다의 어머니에게 두 딸을 보내겠다'라고 협박한다. 비앙카와 마사는 레다만의 딸이 아니라, 본인의 딸임에도 불구하고 돌봄 노동은 여전히 어머니의 몫이다.아울러 세상이 여성을 어떻게 프레이밍하려 하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은 하디 교수(피터 사스가드)와 레다가 불륜을 저지르는 장면일 것이다. 하디는 유부녀를 유혹하면서도 도덕적 우위를 점하고자 레다에게 당신이 먼저 시작해야 한다고 한 발 물러나는 모습을 보이며, 딸과 전화하는 것이 달갑지 않다고 고백하는 레다에게 그런 식으로 이야기해선 안된다고 훈계하기까지 한다. 정리하자면, 자신은 완전무결하다고 합리화를 끝낸 하디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가정을 버리고 자신을 유혹하는 팜므파탈로서의 레다'라기보다는 '딸을 버리는 어머니로서의 레다'인 셈이다. 가족을 저버린 생활이 어떠했느냐고 묻는 니나에게 상상 이상이었다(It felt amazing.)고 대답했던 레다의 말엔 펼쳐놓기 어려운 감정과 시절이 모두 압축되어 있었으리라.길 잃은 딸들의 긴 우울레다가 젊은 자신을 회상하게 된 인물인 니나는 젊은 레다보다도 코너에 몰린 생활을 하고 있다. 남편은 집을 자주 비우고, 시누이는 니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딸은 사랑스럽지만 인형 하나에 세상이 사라진 것처럼 행동하고 니나와 분리불안이 있는 것처럼 여겨질 때도 있다. 니나는 레다에게 묻는다. 이 감정, 우울증인지 무엇인지 모를 절망감이 끝내 지나가기는 하느냐고. 레다는 질문을 들은 순간에는 답하지 않다가, 영화 후반부에서야 대답한다. 지나가지 않으리라고.실제로 레다는 영화 내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함으로써 영화 내의 팽팽한 긴장감을 유발한다. 니나의 딸 엘레나(아테나 앤더슨)가 잃어버린 인형에 대해 이성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집착을 보인다. 영화는 이런 레다의 행동에 대해, 그리 편안하지 못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유년 시절을 함께 이겨낸, 레다의 애착 인형 '미나(mini-mama)'가 비앙카와의 실랑이 사이에서 산산이 부서졌던 것이 주요한 원인일 것을 암시한다. 다만 문제는, 이러한 그의 과거를 니나와 라일(에드 해리스) 등과 같은 제삼자로서는 알 길이 없다는 것이며, 레다 역시 자신의 행동을 뚜렷하게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학계에서 인정받는, 이토록 놀라우리만큼 똑똑한 여자가 자신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행위를 반복하고 설명하지 못하는 원인은 무얼까. 사회가 여성의 우울을 너무도 오랜 기간 방치하고 개인의 잘못으로 떠밀었기 때문이진 않을까. 세상은 지금껏 여성의 심리에 대해 적절한 언술을 하지 않았다. 마련된 단어가 없으니 레다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적합한 설명을 해낼 수 없다. 목을 조르는 듯한, 숨을 쉴 수 없는 듯한 갑갑함을 남편에게 이해시킬 수 없으며 엘레나의 인형을 숨겼다가 급작스레 니나에게 되돌려주는 이유를 마련하지 못한다.그러나 니나의 질문에 답함으로써 자신의 우울이 쉽사리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입 밖으로 꺼낸 레다는 영화 말미에서 스스로를 껴안는 데에 성공한다. 깊게 찔리며 상처입었더라도 말이다. 딸을 잃어버리며 스스로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중압감에 시달렸던 바닷가에서 쓰러지고, 파도가 오가는 틈 속에서 눈뜨며 딸과 연락하지만 그저 그뿐이다. 그는 더 이상 이전과 같은 과중한 책무를 느끼지 않는다. 과거로의 회귀를 갈망하지도 않으며 보편적 인식 속 모성애를 다하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지도 않는다. 모래사장에 몰아치다가도 물러나는 파도처럼 감정과 삶은 동적인 연속체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파도가 바위에 가닿고 동굴이 깎여나가는 것과 같이 인생에 있어 피할 수 없는 지점들은 언제든 있기 마련이다. 그 시점에 맞추어 마땅히 물러나야 하는 때가 다가온다면 물러나는 것이 옳은 선택일 터다. 영화 중반에 등장한 여성 히치하이커의 말처럼, 우리의 일생엔 너무나 바보 같은 의무라는 이름의 일들이 산재해 있다("We are obliged to do so many stupid things.").나는 레다의 모든 족적에 대해 '옳았다'라고 말하진 않겠지만, '어머니'라는 역할을 깊은 고려 없이 무작정 관습적으로만 재생산해내고, 가정의 일엔 깊게 개입할 수 없다는 스탠스를 유지하는 사회 문화만큼은 재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문정(2021)은 자신의 논문을 통해 어머니로서의 역할에 대해, 생물학적 양육과 정서적 안정을 주는 것 그 이상이라 표현했다. 어머니란 존재는 가사와 양육을 담당하는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욕망하는 딸을 키워내고, 가정에 소홀하더라도 사회의 노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용인받는 아들을 키워내며 기존의 젠더 관습을 공고히 하는 강력한 매개자이기 때문이다. 특히 모성은 사회적 산물에 불과함에도 '본능'이란 단어와 함께 쓰이는데, 이러한 무책임한 모습은 버릴 때가 왔다(아니, 버릴 때가 한참 지났다. 지금은 21세기이다.). 올바른 양육법/어머니의 의무/모성의 바람직한 모습은 시대에 따라 변화해 왔으며, 미국의 임상심리학자 다시 로크먼은 자신의 저서 『은밀하고도 달콤한 성차별』을 통해 '엄마가 접하는 사회적 세계가 엄마의 행동을 형성한다'고도 썼다. 사회 관습적 어머니 역할을 거부하는 여성을 젠더 질서를 교란시키는 문제적 인물로만 낙인찍을 때가 아니다. 우리는 그들의 말을 듣고, 이렇게 돌이켜보아야 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딸들을 편안한 말로 외면하고 억압해왔는가?참고문헌김문정 "『여자의 전부』에 나타난 모성의 거부와 젠더 질서의 교란" 어문론집 85 pp.239-261 (2021)윤명숙, 유현경, 이수비 "미혼 성인자녀 둔 여성의 돌봄 부담과 스트레스, 우울의 관계 : 남편 돌봄분담 만족의 조절된 매개효과" 정신건강과 사회복지 50.2 pp.145-169 (2022) : 145.이아름, 정정희. "어머니 양육스트레스와 유아 문제행동의 관계에서 어머니 우울의 종단적 매개효과".열린유아교육연구,26(3),37-62. (2021)★★★★*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한 후, 주관적 견해에 따라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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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다비전> 완다가 보여주는 MCU의 새 비전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서로 다른 시리즈와 영화들이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이야기를 펼치는'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성공리에 안착시킨 처음이자, 모범이고, 유일한 성공 사례인 MCU. 그러나 이들도 두 가지 비판은 피할 수 없었다. 우선 영화라는 미디어의 본질적인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2시간 내외라는 시간의 한계로 인해 주인공들을 제외한 인물들은 편의에 따라 플롯의 소재로 등장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해야 했다. 심지어 '인피니티 사가'의 대미를 장식하는 <어벤져스: 엔드게임>은 3시간의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브루스 배너와 헐크의 화해나 토니가 시간 여행 기술을 발명하는 과정 등을 대사 한 줄이나 몇 초 간의 장면으로 처리했다.
또한 모든 영화들이 큰 그림을 위한 스케치이자 하나의 부품으로써 다루어지다 보니 스토리텔링, 연출, 편집, 액션, 음악, 영상미 등이 균등한 완성도를 보여주지만 특출 난 독창성과 신선함을 조금씩 잃어 갔다. 자신의 실명과 정체를 당당히 공개하며 슈퍼히어로 영화의 클리셰를 파괴했던 <아이언맨>과 진지함과 무거움을 내던지고 유쾌함과 감동을 모두 갖춘 음악으로 무장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새로움이 들어설 자리가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대신 그 자리는 안정적인 유머와 화려한 볼거리, 익숙한 서사로 무장한 채 제2의 <아이언맨>과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를 노리는 작품들이 대신했다. <아이언맨>과 <어벤져스: 엔드게임>이 개봉한 같은 해에 DC에서 각각 <다크 나이트>와 <조커>를 선보인 역사는 이러한 MCU의 문제점을 요약해 보여준다.
그러나 캡틴 아메리카와 토르의 부실한 액션을 지적하자 <윈터 솔져>와 <라그나로크>로 응답했으며, 인상적인 빌런의 부재라는 빈틈은 타노스로 채워버린 의지의 MCU는 페이즈 4의 첫 작품인 <완다비전>을 통해 자신들의 단점을 비교적 깔끔하게 해결했음을 증명한다. 미국의 한 마을 웨스트 뷰에서 이웃들처럼 평범한 회사원과 주부의 삶을 누리는 '완다(엘리자베스 올슨)'와 '비전(폴 베타니)'. 어느 날 그들은 외부의 소음과 함께 마을에서 보지 못한 남자와 흑백의 세상에 나타난 빨간 장난감 헬리콥터처럼 이상한 사건들을 연이어 목격한다. 완다는 시간을 돌려 해당 사건의 존재를 부정하고, 비전은 그런 완다와 완다를 도와주는 이웃 '애거사(캐스린 한)'를 보면서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한편 완다가 만든 가상현실 장벽의 밖에서 '모니카 램보(티오나 패리스)'와 '헤이워드(조쉬 스템버그)' 국장을 비롯한 S.W.O.R.D.는 가상현실 내부의 상황을 파악하고 완다와의 소통을 시도하기 위해 장벽 안으로의 진입을 시도한다.
우선 <완다비전>은 조각나 있던 완다와 비전의 서사에게 온전한 모습을 되찾아준다. 사실 안드로이드 로봇과 마녀 간의 사랑 이야기는 MCU의 흐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좀처럼 명쾌하고 충분히 설명될 기회를 부여받지 못했다.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와 <엔드게임> 등 팀업 영화에서만 모습을 비추다 보니 완다의 불우한 과거사와 감정선은 다른 히어로들의 그것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분량을 할당받았고, 완다와 비전이 호감을 느끼다 연인으로 발전하는 과정은 갑작스러웠다. <인피니티 워>에서 연인을 파괴해야 하는 둘의 애절한 로맨스가 어벤져스의 이길 수 없는 저항을 더욱 비장하게 만들었지만 비전의 이름은 엔드게임에서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마침내 그 둘의 이야기는 처음으로 온전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완다가 빚어낸 가상현실 속 세계는 그녀의 내면이 처음으로 시청자들에게 선보여지는 채널이라는 점에서 특히 인상적이다. 초능력을 주체하지 못하는 우스꽝스러운 부부가 자아내는 웃음은 부모, 오빠, 히어로의 삶을 가르쳐주던 멘토들, 연인과 연달아 이별해버린 완다의 외로움, 고독함, 슬픔, 덧없음을 은연중에 노래하며 그녀의 이야기를 하나로 모아준다. 타노스에게 마인드 스톤을 뺏긴 후 완다의 힘에 의해 다시 태어난 비전 역시 자신의 진정한 기억, 존재, 신체를 되찾기 위한 과거로부터 미래에 이르는 여정을 경험한다. 이처럼 그간 무대 밖으로 밀려나 있던 이들의 이야기를 보여주겠다는 마블의 각오는 <앤트맨>의 우, <토르>의 달시, <캡틴 마블>의 모니카 램보처럼 잠시 잊혔던 캐릭터들을 소환해 같은 사건을 상이한 시점에서 다루는 대목에서 더욱 명확해진다.
다른 하나는 새로운 형식의 스토리텔링과 연출의 도입이다. 이를 통해 마블은 단지 안정적인 흥행과 시리즈의 유지는 물론 가능성과 독창성의 확인 및 도전도 자신들의 목표에 포함되어 있음을 증명한다. 드라마는 크 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우선 1~3화, 그 뒤의 몇몇 에피소드들은 1950년대의 흑백 시트콤부터 90년대의 홈비디오를 거쳐 <모던 패밀리>에 이르는 미국 시트콤의 형식을 차용한다.
한편 4화부터는 현재 시점에서 완다가 만들어내는 혼란을 목격하고 대응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화면 비율부터 의상과 색상에 이르는 디테일의 차이를 통해 같은 사건을 대하는 인물들의 시점 차이는 직관적으로 전달된다. 사실 마블 작품들이 상당히 높은 타율의 유머를 선사한다는 점은 언제나 다른 시리즈와 차별화된 지점이었지만, 시트콤을 전면에 내세운다는 것은 이전까지는 기대하기 어려운 선택이기도 했다. 이와 더불어 완다의 수상한 이웃인 애거사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장면을 마치 고전 뮤지컬을 보는 듯한 연출로 풀어낸 대목도 마찬가지다.
더 나아가 <완다비전>은 단순히 영화적 형식을 새롭게 도입했을 뿐만 아니라, 그 변화 자체를 하나의 스토리텔링 장치로 활용하면서 자신들의 시도를 더 돋보이게 만든다. 각 시대를 상징하는 시트콤의 형식과 내용은 시종일관 마음속 한 구석에 있던 어두움을 애써 억누르고, 희망을 쫓아 어두움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 치던 완다의 이야기를 단적으로 상징한다.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미국 시트콤을 보는 것이 유일한 인생의 낙이었던 완다는 잃어버린 부모님, 오빠, 연인을 대신할 수 있는 남편과 쌍둥이 아이들을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세계 안에서 다시 만난다. 이처럼 TV 쇼는 현실 속 그림자, 절망, 슬픔을 빛, 희망, 행복으로 탈바꿈시키는 도구이자 탈출구이기에 단순한 연출 방식의 변화 이상의 감동을 준다. 이는 완다가 마침내 '스칼렛 위치'로 각성하고, 자신의 마법을 마음껏 선보이는 마지막 회보다도 현실을 TV 속 공간으로 바꾼 그녀의 능력, 그녀의 과거사, 이 드라마가 시트콤으로 시작한 이유를 알려주는 8화의 임팩트가 더 강렬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렇게 <완다비전>은 MCU라는 건물을 올리는 것은 물론 그 외양을 다채롭게 만들고, 기초를 단단히 다지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완다비전> 역시 드라마 내외적으로 여전한 한계점을 노출한다. 드라마 내적으로는 기존의 MCU 작품들이 보여준 것에 비해 지나치게 단순한 선악의 대립 구도를 선보인다. 드라마는 한 마을에 사는 이들의 자유의지를 박탈하고, 거대한 혼란을 낳은 완다에게 시종일관 동정적인 시선을 보낸다. 완다가 초래한 온갖 문제는 그녀와 과거사와 개인사 앞에 무게감을 잃고, 그녀의 손에는 면죄부가 주어진다. 더 나아가 그녀를 대량살상무기로 취급하며 단순히 악인으로만 묘사되는 S.W.O.R.D.의 헤이워드 국장 덕분에 면죄부는 그 반대편에 위치한 완전한 선인인 완다의 면죄부는 더욱 강한 정당성을 확보한다.
이는 그간 마블이 보여준 것과는 다른 선택이다. 선악이 공존하는 입체적인 캐릭터들의 존재, 그리고 자신들의 과오를 반성하는 이들의 서사가 선사하는 뭉클함은 그간 마블이 수많은 관객의 선택을 받은 이유였다. 이 세계의 히어로들은 본질적으로 선하지만, 때때로 악에 가까운 결과를 만들어낸다. 토니 스타크는 선의였지만 울트론을 만들고, 이로 인해 캡틴 아메리카와 크게 대립했다. 캡틴 아메리카도 생명을 무엇보다도 우선시했다가 타노스를 막지 못했고, 토르 역시 복수심에 눈이 멀어 영웅으로서 타노스를 죽이지 못하는 과오를 범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결과적으로 행한 악을 외면하지 않는다. 고뇌하면서 해결책을 강구한다. 그러나 <완다비전>은 완다에게 이러한 복합적인 면모를 심어주지 않았고, 이 선택은 회차가 진행될수록 완성도가 낮아지며 초반부 회차에서 선보인 독창성을 유지하지 못하는 부메랑으로 되돌아온다.
사실 이러한 작품 내적 문제는 MCU 시리즈 특유의 패턴과도 관련이 있다. 많은 마블 작품은 극 중 발생한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는 대신 의문을 남기거나 일부분의 엔딩만 보여준 채 일단락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떡밥은 항상 후속 작품의 발단으로 이어진다. <어벤져스>에서 파괴된 뉴욕은 <스파이더맨: 홈커밍>의 발단이 된다.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서 파괴된 소코비아는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속 사건의 원인이 되고, <시빌 워>에서 마무리되지 않은 토니와 스티브의 갈등은 <엔드게임>에 이르러서야 종결된다. 또 <엔드게임>에서 평행우주로 도망간 로키는 드라마로 만들어질 예정이다.
MCU의 패턴은 일장일단이 있다. 시리즈 간의 연계가 긴밀해지는 것이 장점이라면, 한 작품이 온전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단점이다. 완다의 선한 면모와 안타까운 사연만 강조하는 연출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연출은 설사 드라마 자체의 완성도는 다소 해칠 지언정 그녀가 초래했거나 직접 행한 악의 결과물들이 <닥터 스트레인지 인 멀티버스 오브 매드니스>에서 다루어질 것임이 이미 확정되었기에 가능하다. 향후 전개에 대한 기대감을 끌어올리는 것은 덤이다. 이처럼 <완다비전>은 그 도전적인 시도와는 별개로 하나의 기계를 만드는 부품으로써 존재하기에 하나의 완성된 작품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문제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완다비전>이 MCU의 새로운 시대, 페이즈 4의 미래를 환히 비추는 것은 분명하다. 마법이 주된 소재로 등장한 것이나 완다와 비전처럼 독자적인 서사를 부여받지 못했던 캐릭터들이 향후 디즈니+에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펼칠 것이라는 점은 닥터 스트레인지의 속편을 비롯한 다음 전개에 대한 기대를 높인다. 또한 당장은 허사에 그쳤으나 다시 한번 던져진 엑스맨 등장의 떡밥은 덤이다. 무엇보다도 기존의 구조나 문법에서 벗어나고도 훌륭한 드라마를 선보였다는 점에서 <완다비전>이 보여준 완다, 비전, 그리고 마블의 비전은 완벽하지 않을지언정 충분히 만족스럽다.
A(Acceptable, 무난함)
앞으로의 발전이 더 기대되는 마블의 착실한 오답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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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이 달달해지는 로맨스 영화 -7-
❣️[CineLab Curation] ❣️
이번 주 씨네랩의 뉴스레터 씨네-뉴스에서는 발렌타인 데이를 맞아 달달한 로맨스 영화를 준비해 봤어요!
우리 모두 혈당 스파이크 조심해야 하니까..
초콜렛 대신 씨네랩이 준비한 영화와 함께 달달한 발렌타인 데이 보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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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캡틴을 봤지만 옛날 캡틴이 그리운 이유
새로운 캡틴을 봤지만 옛날 캡틴이 그리운 이유
연이은 부진한 영화 성적으로 마블은 연간 영화 2편, 드라마 3편 정도만 제작해 콘텐츠의 품질에 신경 쓰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그 시작은 아니지만, 영화의 질에 집중하는 과정으로서 <캡틴 아메리카 : 브레이브 뉴 월드>(이하 '브뉴월')는 꽤나 상징적이다. '캡틴'이 '어벤져스' 내에 의미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앞으로의 마블 영화의 방향에 아주 중요한 순간에 새로운 '캡틴'의 이야기를 그려낸다는 것은 기존 마블 골수팬들은 물론, 마블의 전성기 영화를 라이트하게 즐겼던 일반 대중들에게도 일종의 '마지막 희망'으로 서 작동했다. '인피니티 사가'의 스토리를 따라갔던 그 열광과 매력을 다시 느낄 수 있길 간절히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브뉴월'은 그렇게 작용했을까? 분명 낯선 캐릭터도 아니며, 우리가 익히 아는 반가운 얼굴들을 다시 보지만 어쩐지 영화를 보고 나면 과거의 마블 영화가 으레 그랬듯 어떠한 '기대감'보다는 '헛헛한' 감정이 제일 먼저 든 이유는 왜일까.
첫 번째 이유 : 고뇌하지 않는 인물
"You are NOT STEVE ROGERS"
기어이 미국의 대통령직까지 달성하게 된 '로스' 대통령이 새로운 캡틴 아메리카가 된 '샘'에게 했던 대사다. 필자의 생각엔 이 질문이 '브뉴월'을 끌고 나아가는 동력이 되었어야 했다. '스티브 로저스'가 아닌 '샘 윌슨'의 캡틴 아메리카를 보여주려면 그에 대한 차별화된 답이 제시 됐어야 했다. 우리가, 이미 인피티니 사가의 스티브 로저스의 캡틴에 익숙해져 있는 일반 관객이 '샘 윌슨'을 2대 '캡아'로 인정하려면 공감 가는 서사가 뒷받침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영웅적 신념, 고민이 선대와 다른 것이 무엇인지, 필연적으로 비교될 수밖에 없는 '2대'의 이야기와 그로 인한 고통, 그리고 성장 서사... 등등 '2대'라는 것이 갖고 있는 여러 특질들을 '샘 윌슨'이라는 캐릭터에 녹여낼 수 있어야 했다. 그렇다면 관객은 좀 더 공감하며 새로운 캡틴에 비로소 익숙해지고 지지하게 되지 않을까. 우리 모두는 '2대'가 갖고 있는 설움을 겪어본 적이 있지 않던가.
하지만 '브뉴월'의 '캡틴'은 정말 그저 '군인 캡틴'으로만 전락하고 말았다. 본인의 신념보다는 '명령'이 우선인 군인 캐릭터는 우리가 '캡아'에게 기대했던 것이 아니다. 그가 '미국'을 직접적으로 상징하는 만큼 동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마땅히 '정의'라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정부에 저항을 해서라도 지켜나갈 줄 아는 '뚝심'을 말이다. 하지만 다분히 정치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미 대통령'과 '캡틴 아메리카'의 대립적 관계는 그저 '로스 장군'의 개인적인 심장병 문제, 약물 문제, '리더'의 계략이라는 제3의 문제로 희석된다. 우리가 기대하는 어떠한 정치적 함의를 내세우지 못한 채, '샘'만이 갖고 있는 신념도 드러내지 못한 채, 그저 '로스'와 '샘'의 개인적 싸움에서만 그친다. 레드 헐크로 변한 '로스'를 잠재운 것도 '샘'만의 신념이 아닌 '배티'와의 약속이라는 다분히 감성적인 요인인 것도 본래 '캡아'만이 갖고 있는 정치적 재미를 심하게 희석시킨다.
우리는 고뇌하지 않는 영웅 캐릭터에 매력을 잃은 지 오래되었다. <다크나이트> 트릴로지가 영화계에 등장한 이후, 단순한 히어로 캐릭터를 보는 것은 이제 매력적이지 못하다. 선대 '캡아'와의 관계에서 '2대 캡아'인 '샘'의 위치, 그러한 '샘'만의 신념, 그리고 그러한 신념을 위한 고뇌가 없는 영웅이었던 '브뉴월'의 캡틴, 그래서 필자는 엔딩크레딧이 올라간 후 '스티브'의 캡틴이 다시 떠올랐고, 그래서 '헛헛한' 감정을 느꼈다.
(물론, '브뉴월'에서 '샘'의 서사를 보여주기 위한 내적 고뇌는 바로 '슈퍼 혈청'도, 최첨단 슈트도 없는 평범한 인간인 내가 히어로를 할 수 있을까? 였다. 그러나 정작 레드헐크를 제압하는 데 사용된 슈트는 '와칸다'의 최신 기술이 들어간 슈트였으며, '로스'와의 갈등을 해소한 것도 그저 '샘'의 '감성 팔이'라면... 앞으로의 활약이 기대된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두 번째 이유 : 매력 없는 빌런의 배치
'히어로' 영화 장르는 프로타고니스트가 '히어로'인 만큼 빌런인 안타고니스트의 매력도 중요하다. 수작이라 평가받는 히어로 영화의 '빌런' 캐릭터는 '히어로' 캐릭터만큼이나 공을 들여서 만든다. 프로타고니스트와 안타고니스트가 서사에서 서로 상호대립하며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갖는 것처럼, 히어로와 빌런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브뉴월'의 빌런은 어떠한가? 이 영화에는 총 세 명이 등장한다. 서펀트 소사이어티의 리더 격인 '사이드 와인더', 그들과 협력 관계로 있었던 최종 보스 '리더(사무엘 스턴스)' 그리고 그의 복수 대상인 미 대통령 '레드 헐크(로스)'. 사실 각각의 빌런 캐릭터만 떼어 놓고 보면 꽤 괜찮은 서사와 매력을 가지고 있다. '사이드 와인더'는 전형적인 정치 스릴러 내지 첩보물의 빌런이며 '리더'는 '제모 남작', '리들러'와 같은 전형적인 두뇌형 악당 캐릭터, '레드 헐크'는 헐크와 맞먹는 힘과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때려 부수는' 빌런 캐릭터. 사실 아주 매력적이다. 하지만 이 캐릭터들이 스토리 속에서 기능하는 방식 혹은 배치되어 있는 방식으로 인해 서사의 힘이 떨어져 보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충분히 매력적인 캐릭터임에도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브뉴월'의 가장 아쉬운 부분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말하고 싶은 건 '리더'의 등장이다.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리더의 분장도 맘에 썩 들진 않았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취향의 영역이니 제쳐두더라도, '리더'의 등장이 너무 빨랐다. '리더'는 좀 더 비밀스럽고 음침하게 어둠 속에서 미국을 조종하고 있어야 했다. 사람들을 조종하고, 그 배후가 누구인지에 대한 추리는 이 영화를 좀 더 '정치 스릴러적'인 분위기로 끌고 갔을 것이다. 또, 큰 문제는 '리더'가 대립하고 있는 상대가 '캡틴 아메리카'인 '샘 윌슨'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실험실에 가두고 미국을 위한 실험쥐처럼 이용한 '로스'에 대한 복수를 하고자 한 것이다. 너무 빨리 정체가 공개된 '리더'의 '개인적 복수심'은 거대한 정치적 스릴러였던 초반의 분위기를 평범한 SF로 희석시킨다. 개인적인 심장 문제로 딸과의 화해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더 벌고 싶어 하는 '로스'의 개인적 욕망, 10년간 '로스'에게 갇혀 미국의 실험쥐로 이용당한 '리더'의 개인적 복수심 사이, 우리의 주인공 '캡아'의 신념은 사실 설 자리가 없다.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서사적 갈등이 문제인 것이 아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캡틴 아메리카'의 서사에 이러한 개인적 복수심과 개인적 욕망은 힘을 잃는다는 것이다. (물론 '리더'가 미국 전체를 공격하고 그것을 막기 위한 캡틴의 대결이라 볼 수도 있지만, 리더의 복수의 대상이 하필이면 미 대통령이 된 것이지 미국 체제의 전복이 그의 주목적은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리더'와 '캡틴 아메리카'의 대립은 어딘지 모르게 '붕 떠있는' 느낌을 주게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차라리 '리더'의 등장이라도 늦췄으면 어땠을까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사이드 와인더'의 분량이다. 작중 유일하게 '캡틴 아메리카'와 뚜렷한 대립각을 세우는 인물이라면 '리더'도, '레드헐크'도 아닌 '사이드 와인더'이다. 하지만 서펀트 소사이어티라는 집단에 대한 설명이 명확히 되지 않았다. 마블에 대한 '찐팬'이 아니라면 대체 뭐 하는 집단인지, 왜 캡틴 아메리카랑 대립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극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평범한 액션 첩보극의 빌런으로서 대중들이 낯설어하는 인물을 아니지만, 그렇다고 캡틴과의 서사적 관계가 뚜렷이 드러나지 않아 관객 입장에서는 몰입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더구나 중반부, 그는 '캡틴'에게 아주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게 되고 이후에 내뱉는 대사는 관객들에게 아직 우리는 적대 관계임을 보여주는 작위적인 대사까지 등장한다. 대체 서펀트 소사이어티가 캡틴을 싫어하는지, 왜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지에 대한 설명 없이 그저 보여주기만 한다. 관객은 충분한 이해 없이 따라갈 뿐이다. 그래서 멋진 CG 액션이 등장하지만 과거처럼 몰입하기 힘들다. 이 또한 꽤 아쉬웠던 부분이다.
마지막으로는 '레드 헐크'는 서사의 도구로서만 사용되고 버려진다. '레드 헐크'는 '브뉴월'의 예고편 속 등장으로 굉장한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정작 작중 등장시간은 최후반부 전투씬이 전부다. 그마저도 이전의 마블 영화들의 최후 전투씬에 비해 다소 빈약한 액션신을 보여준다. 영화의 대부분은 사실 '로스' 장군이라는 인물의 이야기가 주된 내용이다. 그가 갖고 있는 딸과의 갈등, 이전의 모습과 달라져서 딸과 화해하고 싶은 욕망이 극을 이끌어가는 그의 주된 동기이다. 그의 욕망을 방해하는 것은 '리더'의 혈청 투약으로 인한 내적 분노뿐이다. 그의 욕망을 방해하는 주된 요인이 자신의 정의를 실현시키려는 '캡틴 아메리카'의 활약이라면 좀 더 몰입감 있는 플롯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 이유 : 구심점 없는 스토리
사실 '브뉴월'은 평이하게 잘 만든, 잘 볼 수 있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우리가 새로운 캡틴의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영화를 보고 난 후 관여도가 낮게 되는 이유의 가장 큰 문제는 구심점 없는 이야기가 크다고 생각한다. 위에 설명했듯, 인물의 관계가 각자 '따로 노는' 느낌이다. 이렇다 할 매력적인 조연 캐릭터도 사실 크게 없다. 2대 팔콘이 되려는 '토레스'도 왜 팔콘이 되고 싶어 하는지 설명해주지 않는다. 인물이 작동하는 방식에 '왜'를 설명하기보다 그저 보여주고 관객은 따라갈 뿐이다. '토레스'의 열정이 이해되지 않은 채 전투기 액션 장면에서 소위 과한 열정으로 '나대다가' 위험에 빠지는 클리셰는 지루할 따름이다. 인물의 유기적 관계가 없어 이야기의 구심점을 잃는다. 보여주고 싶은 것은 많지만 그것을 하나로 엮는 것에 충분한 고민이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충분히 잘 만든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앤트맨과 와스프 : 퀀터매니아>처럼 혹평을 들을 만한 영화는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마블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에는 조금은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결국 캐릭터의 매력도가 높아야 한다. 우리가 캐릭터를 맘에 들어하고 그 캐릭터를 '덕질'하는 것이 마블과 같은 히어로 장르가 나아가야 할 길이기 때문이다. 평면적인 인물들이 보여줄 것만 보여주는 식의 안정적이지만 그 이상이 없는 전개는 앞으로의 마블을 기대하기란 어렵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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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라이트만 담백하고 나머지는 어수선한
전설과 함께
이 영화의 주인공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손기정과 1947년 보스턴 마라톤대회 우승자 서윤복이다. 영화의 첫 장면은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부분이다. 세계 신기록을 세운 손기정. 하지만 우승의 기쁨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시상식에 올라가는 손기정. 입고 있던 옷에 그려있는 일본 국기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손에 들고 있던 묘목으로 가슴의 일장기를 가린다. 뒤집힌 조선 총독부. 손기정을 겁박한다. ‘내 개인의 승리가 아닌 우리 일본 국민의 승리’라는 말을 마지못해 기록한다. 손기정의 육상선수 커리어는 그때 끝났다.
영화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1947년에서 시작된다. 냉면집에서 서빙 일을 하는 서윤복은 돈 생각에 머리가 아프다. 어머니가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 입원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손기정은 나라가 일제에게 벗어났다 하더라도 영 즐거운 일이 없다. 아들과 떨어진 일상. 매일을 술로 보낸다. 국민적인 영웅이라 ‘손기정 상’ 같은 시상식에 초대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런 건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이런 그가 친한 동료 남승룡, 냉면집 아르바이트생 서윤복과 함께 보스턴 마라톤 대회라는 꿈을 꾸기 시작한다.
태극기 휘날리며
이 영화의 메가폰을 잡은 강제규 감독은 충무로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1996년 <은행나무 침대>로 데뷔한 강제규 감독은 3년 후의 <쉬리>로 당시 한국영화 관객 신기록을 경신한다. <쉬리> 이후 4년이 지난 2004년. <태극기 휘날리며>로 11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다. <실미도>가 천만 관객을 동원하고 얼마 되지 않았던 일이라 당시의 충무로도 반향이 컸다. 이렇게 강제규 감독이 상업영화라는 분야에 있어 두각을 드러냈던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감정적으로 진한 장면을 연출할 수 있고, 큰 규모의 신을 찍을 때 인물들을 깔끔하게 정돈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묘사하는 끔찍한 전쟁의 참상은 영화의 후반부를 위해 필수적이다. 격렬하고 광폭한 전쟁이 이들에게 큰 상처를 줬다는 걸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몇 인물들은 전쟁의 광기에 혹해버렸다. 광기에 취한 인물들이 전투 도중이나 군 막사에서 분노를 표출하는 장면이 영화에서 인상적이다. 뿐만 아니라 전투 장면을 시각화하는 방식에도 감독의 장기가 들어가 있다. 이 <태극기 휘날리며>의 전투 장면은 좋은 의미에서 너절하다. 후반부 진태(장동건)가 피 흘리며 전투를 벌이고 난 후 다음 장면은 깔끔하게 씻은 진석(원빈)이다. 심지어 진태가 처절하게 싸우는 반면 진석은 누군가와 조용한 분위기에서 대화한다. 당연히 진태의 상황이 더 두드러질 수밖에 없는데, 두 인물 간의 시각적인 대비로 전쟁의 속성을 묘사한 것이다. 이렇게 <태극기 휘날리며>는 칙칙한 색감, 깔끔한 인물 동선, 처절한 전장의 분위기를 카메라로 담으며 한국전쟁이라는 지옥도를 구현한다. 이 지옥도가 격렬하면 격렬할수록 후반부 ‘돌아온다고 했잖아요’ 신이 감동적인 효과를 노린 것이다.
이번 강제규 감독의 신작 <보스턴 1947>는 강제규 감독의 장기들이 알차게 들어가 있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하이라이트 신은 당연히 마라톤 장면이다. 이 장면은 <태극기 휘날리며>와 마찬가지로 영화의 핵심이 되어 한국사회의 강인함과 서윤복의 단단한 내면을 상징한다. 인물이 뛰어가는 모습을 촬영한 방식이 영화의 몇 사건을 비유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영화는 주인공 3인방을 보스턴에 곱게 보내지 않는다. 몇 가지 위기를 만드는데, 그 위기 이면에는 당시 한국의 상황과 관련이 있다. 1947년은 미군정이 한반도를 통치하는 시기였다. 한국정부가 들어서기 전이라 대회 참여의 금전적, 행정적 부분에서 지원이 열악할 수밖에 없다. 이 현실적인 어려움을 대응하는 과정은 혼자 하는 스포츠라는 점에서 마라톤과 유사하다. 사실상 1부의 초중반부와 2부의 후반부가 반복되는 것이다. 이 과정을 암시하는 서윤복의 마라톤은 영화의 웅장함에 안성맞춤이다. 사실 이 영화를 보기 이전에 글쓴이를 포함한 적지 않은 관객들이 '또 억지로 눈물 쥐어짜는 요소 넣었겠네' 우려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영화는 이 우려를 무색하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인간의 결기와 의지를 영화 후반부에 방점 찍어 마무리했다. 이 장중한 하이라이트를 위해 강제규 감독이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당시 보스턴의 날씨를 구현하기 위해 호주에서 촬영한다거나, 임시완, 배성우 배우가 러닝 연습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는 것이나 400여 명의 외국 배우와 함께했다는 기사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실화라는 양날의 검
이 영화는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참여한 세 사람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이 영화는 이를 경제적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이야기 안에서 한국정부가 수립되기 전이라는 설정은 굉장히 중요하다. 1,2부의 이야기 이면에 깔려있는 시한폭탄임과 동시에 강제규 감독이 전달하고 싶었던 국민성을 보여주는 소재이기 때문이다. 이 설정이 정직하게 작동하는 경우도 있다. 초반부 주인공 3인방은 선수 엔트리 등록을 위해 관련 부처를 찾아간다. 이 장면에서 담당 공무원이 손기정 일행에게 '이런 문제가 있다'라고 설명하는 장면은 사실적이다. 영화 제일 마지막 장면에서 손기정 선수와 관련한 부분이 몇 등장하는데, 이 문제와 1947년의 보스턴은 큰 차이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정부의 지원 없이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한 것은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만 봐도 비슷한 예시가 몇 있다. 또한 궁핍한 한반도를 보여주는 방식도 극 중 등장인물들이 마라토너라는 점에 잘 어울린다. 신발은 이 영화의 인물들에게 중요한 문제다. 영화는 신발을 수급하는 문제를 무작정 으쌰 으쌰가 아니라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여길 만큼 합리적으로 해결한다. 이 현실성과 관련한 부분은 2부에서도 마찬가지다. 2부에는 역사의 사소한 부분도 놓치지 않은 꼼꼼함이 느껴진다. 영화 중반부부터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실존인물이라고 한다. 후일담을 찾아보면 이 인물들을 꽤나 잘 살렸다는 걸 알 수 있다. 또 마라톤 장면에서 특정 사건이 약간 영화적인 왜곡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 장면 역시 1947년의 보스턴에서 실제로 이뤄졌던 일이라는 것이 놀랍다. 영화가 실화라는 점을 잘 활용한 것이다.
하지만 이 실화라는 틀에 안주한 흔적이 아쉽다. 어쭙잖은 신파극을 가볍게 벗어난 후반부의 하이라이트가 아니더라도 플롯의 나머지 부분들은 예상가능하다. 이에 대한 근거로 인물들이 납작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대표적으로 박은빈 배우가 맡은 역할은 이야기에서 비중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단지 서윤복에게 특정 행동을 반복하는 데에만 그치고 있다. 박은빈 배우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기 전의 작품이 아니었어도 이 인물에 대한 아쉬움은 남을 수밖에 없다. 한국인들이 어렵게 대회에 참여해서 상을 받았어. 그럼 곱고 순한 여성 캐릭터는 영화에서 어떤 비중을 차지할 것 같은가? 이 문제의 답은 너무나도 간단하다. 또 영화 1, 2부에 등장하는 거의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무례하다. 구체적으로 2부의 하이라이트 신에서 어떤 두 미국인이 갖고 있는 비중이 크다. 이 두 인물은 관객들에게 '빨리 화 내!' 겁박하는 느낌마저 든다. 인종차별에 대한 논의가 지금처럼 활발하지 않던 1947년이라지만 현실감이 지나치게 떨어지는 것이다. 또한 2부에서 벌어지는 가장 큰 위기를 해결하는 방식은 더 차갑고 냉정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었다. 실제 서윤복이 어떤 모습으로 달리기를 했는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차라리 이 부분을 구현하는 게 이야기의 현실성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합리적으로 보인다. 영화의 기획의도에 희생된 인물들이 아쉬웠다.
슬렁슬렁 넘어가다
영화는 인물들의 욕망과 관련한 문제를 손쉽고 전형적으로 해결한다. 먼저 이야기할 것은 주인공 서윤복이다. 서윤복에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어머니다. 서윤복은 아픈 어머니를 위해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초반부에서 영화는 서윤복의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일이 될 것이라고 암시한다. 하지만 서윤복은 실행력이 있는 사람이다. 서윤복이 초반부에 달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몇 번 대사를 치는 부분에서 주인공이 마냥 이상만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란 걸 보여준다. 그럼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영화의 1부가 가진 큰 과제 중 하나였을 것이다. 영화는 이 문제를 굉장히 쉽게 해결한다. 물론 그 사건이 이 인물의 동기부여가 될 수 있다. 그건 인물의 동기부여에 대한 문제인거지 실제 이 인물이 처한 현실적인 어려움과는 좀 동떨어져 있다고 느껴진다. 사실 이 문제는 2부에서 원인만 달라진 채로 반복된다. 영화 2부에서도 이 부분을 다루기 때문에 1부의 어설픈 마무리가 더 아쉽게 느껴진다. 남승룡의 경우에도 문제를 맺고 끝는것이 불확실하다. 이 인물은 달리고 싶다는 욕망이 강하다. 하지만 이 욕망을 가진 다른 인물들과는 다르게 남승룡은 이 문제를 손쉽게 해결한다. 단 조금의 과정도 없이.
영화가 가진 아쉬운 점 중 하나는 통일성이다. 이 영화를 보며 느꼈던 가장 큰 이물감 두 개는 배성우와 하정우 배우다. 우선 배성우 배우와 하정우 배우는 다른 연기를 하고 있는 듯하다. 하정우 배우가 맡은 손기정 역은 <수리남>의 강인구와 별 차이가 없다(심지어 헤어스타일도 비슷하다). 이러다 보니 손기정과 남승룡이 아니라 하정우와 배성우 배우 각자가 대화하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이는 임시완 배우 역시 마찬가지다. 달리는 신이 아닌 선에서, 이 영화에서 본 임시완 배우는 어쩐지 <미생>과 <불한당>에서 본 기시감이다. 김상호 배우도 이 배우가 등장했던 사극의 어느 장면처럼 연기한다. 대표적으로 이 인물들이 2부에서 밥을 먹는 신이 있다. 배우들의 일상연기에서 자연인으로서의 모습이 더 두드러져 강제규 감독의 역량을 생각한다면 아쉽다고 느껴지는 부분이다. 비단 연기 말고도 편집에서 이야기의 흐름이 매끄럽지 못하다는 단점이 있다. 신파극에 대한 반발심리를 너무 의식해서인지 이야기는 생략된 것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특히 남승룡의 서사에서 더 느껴진다. 아마 배성우 배우의 개인적 에피소드 때문인 듯). 이것 덕분에 뚝뚝 끊긴다. 심지어 인물이 오롯이 대사를 칠 때에도 컷전환이 캐릭터를 방해한다는 느낌마저 든다. 대표적으로 손기정이 남승룡, 서윤복과 대화하는 장면들이 그렇다. 서로 대화하는 신인데 말 중간에 시점이 바뀐다. 그동안 강제규 감독이 규모가 큰 신을 깔끔하게 연출했다는 점과 반대로, 소수의 인원이 대화하는 신에서는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다.
밑반찬이 아쉽네
앞에서 쓴 바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는 기획의도에 충실하다. 스포츠 신파극에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관객들도 충분히 설득할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휴먼 드라마를 지향하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마지막 장면은 멋진 장면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주변 등장인물을 콘셉트 아래에 가둬놓은 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든다. 큰 덩어리들은 있는데 중간단계들이 좁고 얕다. 이 얕은 깊이 덕에 영화 자체가 올드하게 느껴진다. 정작 영화가 우려하는 점은 다 보완했지만 이를 덮기 위한 수가 반대로 단점이 되어버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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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사랑하는 영화,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 담긴 상징들 #2
환몽(幻夢) CINE 리뷰 2화_ 우리가 사랑하는 영화 '시간을 달리는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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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보고나서 마구 생각하고, 마구 떠들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준비했습니다.#시간을달리는소녀 #시달소 #호소다마모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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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리슨> 메인 예고편
가난한 이민자 출신으로 런던 교외에서 3남매를 키우며 살아가는 벨라. 어느 날 청각장애를 가진 딸의 몸에 난 멍자국이 정부 당국의 오해를 부르고 벨라의 아이들은 강제입양 당할 상황에 처한다. 자신의 가난과 남편의 실직, 그리고 딸의 장애에도 침묵하던 사회 시스템은 한 순간에 나타나 그녀와 가족의 삶을 아프게 흔들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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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엘리트들: 못다한 이야기> 티저 예고편
[2021년 6월, 넷플릭스 공개]
《엘리트들》 시즌 4가 시작됩니다. 하지만 그 전에 봐야 할 게 이렇게나 많답니다! 《엘리트들: 못다 한 이야기》
첫 번째 이야기: 구스만 + 카예 + 레베
두 번째 이야기: 나디아 + 구스만
세 번째 이야기: 오마르 + 안데르 + 알렉시스
네 번째 이야기: 카를라 +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