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내용
- 영화 소개, 줄거리
- 긴장감을 끌어올리는 요소들
- 붕괴되는 부모
- 사건의 피해자들이 의미하는 것
- 거울 같은 연출
보통의 가족 (A Normal Family, 2024)
뒤엎어진 테이블, 그 위에 남은 추한 본성들
개봉일 : 2024.10.16.
관람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장르 : 드라마, 스릴러
러닝타임 : 109분
감독 : 허진호
출연 : 설경구, 장동건, 김희애, 수현
개인적인 평점 : 4 / 5
쿠키 영상 : 엔딩크레딧 시작 전에 하나
나는 보통 아주 재밌거나 취향에 딱 맞는 영화를 만나면 미쳤다고 표현한다. 그런데 미쳤다는 뭔가 한순간 강하게 후려치는 느낌이 있다. 그래서 <보통의 가족>은 미쳤다기보단 시종일관 우아하게 돌고 있는, 돌아있는 영화라고 표현하려 한다.
<보통의 가족>은 왈츠를 추듯 우아하게 합을 맞추는 배우들과 함께 부드럽게 턴을 돌며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예상을 벗어나는 이야기의 흐름은 호기심을 일으키고 서서히 상승하는 대비감과 극 전반에 흐르는 클래식 음악은 우아한 긴장감을 끌어올리며 한눈 팔 틈을 주지 않는다.
<보통의 가족>은 헤르만 코흐의 소설 [더 디너]를 리메이크한 영화로 한 테이블에 모여 식사를 하고 있는, 보통의 가족처럼 보이는 이들의 이면을 거침없이 털어내는 작품이다.
영화는 다른 성격의 두 형제, 묘한 신경전을 벌이는 내부인과 외부인 같은 두 여자, 속을 알 수 없는 아이들 사이에 얼룩진 거울 한 장을 대놓고는 동일한 질문을 던진다.
“자, 이런 문제가 생겼어. 너는 어떻게 할래?”
동시에 튀어나온 각자의 응답은 서로 얽히고 설키며 새로운 쟁점을 만들고 거울 앞에 앉은 인물들은 시시각각 태도를 바꾸며 식은땀을 흘린다. 땀이 지나간 자리엔 서늘함과 축축한 불쾌감만이 남는다.
영화는 주인공들에게 자극적인 음식을 반복해 대접하며 그들이 언제까지 태평한 척을 할 수 있는지 실험한다. 이들은 애써 꼿꼿한 자세와 평온한 호흡을 유지하며 자리를 지키지만 결국엔 폭발하여 테이블을 뒤엎는다. 이제 이 가족의 테이블 위에 오가는 건 이기적인 합리화와 책임 전가, 추한 본성뿐이다.
아이들을 사이에 두고 충돌하는 어른 재완, 재규, 연경, 지수 역을 맡은 설경구, 장동건, 김희애, 수현 배우는 예리하게 갈아낸 각자의 캐릭터를 손에 쥐고 쉴 틈 없는 칼싸움을 펼친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팽팽한 대립구도는 극의 텐션과 몰입력을 한도 없이 끌어올린다.
개인적으로 설경구, 장동건 배우의 경우 최근 필모그래피의 방향이 조금 아쉽다고 느끼고 있었는데, 이 영화를 보고 ‘아직은 이 배우들을 더 믿어봐도 괜찮을 것 같다’는 믿음이 생겼다.
재완은 살아있는 멧돼지를 사냥하고 재규는 죽어가는 사람을 살린다. 재완은 악질 가해자에게 ‘(돈을) 얼마나 줄 수 있냐’고 묻고 재규는 피해자가 병원 수납을 마치지 못했음에도 그의 생명을 위해 우선 다음 수술 날짜를 잡는다. 돈을 좇는 재완과 돈보다 올바름이 중요한 재규. 재완과 재규는 형제지만 다른 신념을 갖고 있다.
재규의 아내인 연경은 재규와 비슷하게 선한 신념을 갖고 살아간다. 그는 성공한 프리랜서 번역가이자 아동 복지에 힘을 보태는 어른이며 치매가 온 시어머니를 돌보는 착한 며느리다. 최근 가족이 된 재완의 아내 지수는 재완의 재력 덕분에 생긴 여유를 즐기고 있다. 지수는 자신을 외부인 취급하는 연경과 약한 대립각을 잡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오래 유지하지 않고 스스로 이 가족과 한 발자국 정도 거리를 둔다.
- 아래 내용부터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붕괴되는 부모들
아이들 사건의 피해자, 노숙자가 의미하는 것
재완은 나래 사건의 합의를 위해 가해자와 대화를 나눌 때 이렇게 말한다.
“(부모는) 자식 앞에선 약해지기 마련이죠.”
이 말은 혜윤의 부모인 재완, 시호의 부모인 재규, 연경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재완, 재규, 연경은 자신의 삶에 있어선 각자 다른 신념을 가진다. 하지만 ‘내 아이가 죄를 저질렀다’는 문제에 있어선 각자의 신념을 무너트린 채 비슷하게 행동하고 결국 같은 결론을 낸다. 부모들은 아이를 위해 눈물 흘리고 싸운다. 그리고 붕괴된다.
억울한 피해자인 노숙자와 나래는 재완, 재규 형제의 신념 변화를 보여주는 장치다. 노숙자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지만 폭행이라는 큰 신체적 충격을 받고, 나래는 어른들의 싸움 때문에 사고를 당하고 병원에 입원한다. 재완, 재규는 아이들이 독단적으로 벌인 폭행 사건을 알고 큰 충격을 받는다. 노숙자는 혼수상태가 되고 나래는 큰 수술을 받으면서도 삶을 위한 사투를 벌인다. 재완, 재규는 충격을 받은 후에도 아직 남아있는 각자의 신념에 따라 ‘이대로 숨길 수 있다’, ‘시호를 자수 시켜야 한다.’ 주장하며 옥신각신 싸움을 한다. 그러다 노숙자는 사망, 나래는 상태가 다시 나빠지게 되고 그 시점에 시호와의 진솔한 대화, CCTV 영상의 발견이라는 상황을 뒤집을 사건이 터진다. 이때 형제의 굳건했던 신념은 붕괴되고 뒤바뀌게 된다.
처음엔 피해자의 눈물에 공감하며 나래 엄마에게 예배당을 알려주던 재규는 그곳에 앉아 가해자인 아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고 피해자인 노숙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갑자기 입맛이 돌기라도 하는지 식판을 싹싹 비워낸다. 아내인 연경은 시어머니의 냄새 나는 옷을 갈아입히다 이 소식을 듣고 여러모로 깨끗하게 해결된 상황에 만족하며 웃음 짓는다. 반대로 돈을 위해 가해자를 옹호하던 재완은 복잡한 얼굴로 노숙자의 집에 찾아가 돈 봉투를 밀어 넣는다. 이후 세 사람은 바뀐 신념을 주장하며 더 강하게 충돌한다.
지수는 이 ‘신념의 붕괴’라는 사건에서 제외되는 유일한 어른이다. 연경은 지수를 혜윤의 엄마가 아닌 사람, 외부인으로 반복해 칭하는데 지수는 여기에 열을 내기보단 그럭저럭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사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지수는 혜윤과 큰 친밀감이 없고 부모라기엔 조금 먼 느낌이 있다. 그래서 지수는 재완, 재규, 연경과는 다르게 객관적인 외부인의 시선으로 혜윤, 기호의 사건을 바라보게 되고 마지막엔 CCTV 영상을 공유하며 엇나간 재완의 신념을 붕괴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다.
숨겨둔 양면성을 꺼내놓다
인물들의 심경 변화, 거울 같은 연출
사람에겐 한 가지 면만 있을 수 없다. 누구나 추하고 부끄러운 면을 갖고 있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포장하느냐에 따라 보이는 게 다를 뿐이다. 영화는 우아하게 와인을 마실 것 같아 보이지만 실제론 턱에 초고추장을 묻히고 와인을 소주처럼 들이키는 지수, 고급스러운 정장을 차려입고 꼿꼿하게 앉아있지만 사실은 꽉 끼는 옷에 숨도 못 쉬어 화장실에서 몰래 지퍼를 푸는 연경, 정정당당함을 이야기했으면서 시호를 위해 극단적인 사고를 치는 재규를 보여주며 완벽함 뒤에 숨겨진 부끄러운 모습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재완은 이들과 다르게 부끄러운 모습을 먼저 보여주고 후반부에 들어 그 뒤에 있는 보통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 중에서 양면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은 재규다. 그는 가족들 앞에서 정의로운 척을 하지만 뒤에선 아이들과 똑같은 일들을 저지른다. 그는 술을 먹고 노숙자를 폭행, 유기한 아이들처럼 술을 먹고 고라니를 친 후 사체를 유기한다. 두 사고 장면은 비슷한 연출 요소들로 채워진다. (피해자를 질질 끌고 가는 가해자와 바닥에 그려지는 피, 비슷한 카메라 구도)
노숙자의 소식을 듣고 시호와 대화를 나누며 포장을 걷어낸 재규는 CCTV 속 아이들이 했던 말과 비슷한 결의 발언들을 내뱉고, 재완이 가해자를 옹호하며 했던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며 그를 차로 쳐버린다. 이제 재규에게 남은 건 뻔뻔한 본성뿐이다. 흘러가듯 들렸던 ‘재규가 알고 보면 무서운 사람’이라는 어머니의 말, ‘너랑 나랑 진짜 나쁜 형제 새끼’라는 재완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상영이 끝난 후에도 이래저래 떠들고 싶게 만드는 영화가 있다. <보통의 가족>이 딱 그렇다. 영화가 끝나면서 테이블 위 조명도 모두 꺼졌지만 극 중 인물들이 남긴 첫맛과 끝 맛은 여전히 입안을 맴돌며 아쉬움을 남긴다. 나는 아직 이 화려한 갈등의 테이블 위에 차려진 인물들을 더 씹고 뜯고 맛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