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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wr2023-05-14 17:29:01

발렌시아가와 H&M, 두 세계를 오가는 롤러코스터

〈슬픔의 삼각형〉 리뷰

6★/10★

 

  2017년, 〈더 스퀘어〉로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에게 또 한 번의 황금종려상을 선사한 〈슬픔의 삼각형〉은 한 모델 오디션장에서 시작된다. 상의를 탈의한 채 오디션을 기다리고 있는 남성 모델 무리 사이로 한 방송 진행자가 들어선다. 그는 재치 있는 입담으로 몇몇 모델을 인터뷰한 후, 개중 몇몇을 벽 앞에 세운 뒤 짓궂은 제안을 건넨다. ‘발렌시아가’ 포즈와 ‘H&M’ 포즈를 취해보라는 것. 둘 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의류 브랜드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전자는 명품이고, 후자는 저가의 패스트 패션이다. 방송 진행자가 말을 잇는다. 발렌시아가 모델은 다소 거만한 표정으로 거들먹거리며 네가 우리 제품을 사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이 굴어야 하고, H&M 모델은 백인, 흑인, 아시아인이 나란히 서서 밝은 얼굴로 ‘우린 행복해! 우리는 평등해!’라고 외치며 환하게 웃어야 한다는 것. 설명을 마친 진행자가 발렌시아가와 H&M을 번갈아 외치면, 앞에 선 모델들은 그에 따라 오만한 표정과 밝은 표정을 교차로 짓는다. 진행자는 두 브랜드의 이름을 점차 빠르게 바꿔 부르고, 모델들 역시 그에 맞춰 재빨리 포즈와 표정을 바꾼다. 

 

  모델들의 몸짓과 표정으로 재현되는 두 브랜드의 교차는 〈슬픔의 삼각형〉의 주제와 맞닿아 있다. 이 영화는 롤러코스터처럼 두 세계를 오가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힘껏 풍자한다. 오디션에 참가한 모델 칼과 그의 인플루언서 애인 야야는 야야에게 협찬된 티켓으로 호화 크루즈에 탑승한다. 승객은 대부분 큰 부자들이고 승무원들의 서비스는 완벽하다. 돈을 낸 사람과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사람 사이에는 분명한 위계가 있고, 탑승객과 승무원은 모두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탑승객은 발렌시아가의 세계에 살고, 승무원은 H&M의 세계에 산다.

 

 

  그런데 한 탑승객이 ‘우리는 평등하다’고 주장한다. 친절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승무원이 기뻐했으면 좋겠다며 모든 승무원이 거대한 미끄럼틀 튜브를 타고 놀며 즐기는 모습을 보여 달라는 것. 그리하여 모두가 함께 기쁨을 느껴 ‘평등’해지자는 것. 그러나 H&M의 세계에 사는 우리는 승객의 요구가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안다. 두 집단이 발 디디고 있는 세계를 그대로 둔 채 같은 행위를 하고 감정을 느끼는 것 만으로 평등해지자고 외치는 건 어불성설이다. 요컨대, 발렌시아가가 H&M 홍보 문구를 읊는 우스운 꼴이다. 발렌시아가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의 황당한 요구는 계속 이어진다. 웃통 벗은 승무원이 불편하다는 탑승객의 말에 해당 승무원이 단번에 배를 떠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바다 한 가운데를 항해하는 크루즈의 돛이 더러워 경관을 해친다며 청소를 요구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H&M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이들의 요구를 모두 충실히 수행한다. 두 세계가 기울어져 있고, H&M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발렌시아가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에게 돈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변곡점이 찾아온다. 선상 파티를 하던 중 폭풍이 찾아와 크루즈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크루즈의 흔들림은 곧 탑승객과 승무원이 자리한 세계의 흔들림을 의미한다. 탑승객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우아하게 고급스러운 요리를 고상하게 먹으려 하지만 욕지기는 점점 더 강해진다. 그리고 도저히 ‘눈 뜨고는 못 볼’ 구토 장면이 연달아 이어진다. 비싸고 화려한 옷을 입은 탑승객들이 자신들이 먹은 일품요리를 끝도 없이 토해내는 장면과 그 옆에서 승무원들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탑승객을 배려하며 서빙과 청소를 이어가는 장면은 무엇을 시사할까? 이 장면은 세계가 ‘뒤집히면’ 누가 혼란을 느끼는지에 대한 대답이다. 구역질 날 정도로 적나라한 구토(심지어 설사)는 발렌시아가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의 몸속에 무엇이 쌓여 있는지를 폭로한다. 수류탄을 만들어 전 세계에 판매하는 무기회사를 운영하는 한 노부부가 UN 규제 때문에 힘들었다며 불평하는 대목에서 알 수 있듯, 화려하고 비싼 명품으로 치장된 탑승객들의 외면이 실은 몸속에 쌓인 토사물과 설사(즉 추악한 자본 축적)를 감추기 위한 속임수였다고 고발하는 것이다.

 

 

  폭풍이 지나간 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해적이 배를 습격하는 사건마저 발생해 일부 탑승객과 승무원이 ‘무인도’에 표류된다. 이제 기존 권력관계는 별 의미가 ‘없다’. 무인도에서는 돈보다 생존 능력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그에 맞춰 새로운 위계가 구축되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발렌시아가’와 ‘H&M’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점에 주목해보자. 조난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물건은 이들과 함께 떠내려온 프레츨 스틱과 물, 즉 식량이지만 여전히 누군가는 죽은 부인에게서 다이아몬드를 뺀 후 몰래 주머니에 넣는다. 무인도에서 건설될 세상은 결코 완전히 새로울 수 없다. 새 세상은 결코 기존 세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도 없다. 영화 전반부에서 신랄하고 날카롭게 활개 치던 계급 사회 풍자가 다소 길을 잃는 듯 맥이 빠지는 건 이 때문이다. 배가 난파당하기 직전, 미국의 공산주의자와 러시아의 자본주의자가 만취해 우리 세계를 두고 토론하던 장면이 보여주듯,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발디딘 곳에 제한된 상상력만을 가질 수 있다. 그 어떤 새 출발도 ‘백지’에서 시작할 수는 없다. 우리의 현실은 우리의 상상력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다.

 

  무인도에서 젠더 위계가 뒤집히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영화의 전반부, 평범한 모델인 칼과 인플루언서 모델인 야야가 데이트 비용을 두고 갈등하는 장면이 있다. 우리 시대는 전통적 남성 부양자 모델이 더는 작동하지 않는 사회다. 그러나 기존 젠더 관념은 현실이 달라졌는데도 우리를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칼은 데이트 비용을 하나하나 계산하느라 초조하고, 데이트 비용에 무관심한 야야에게 화가 난다. 반면 야야는 여자라는 이유(임신, 출산 등)로 언제든 자기 경력이 끝장날 수 있는 불확실성 속에서도 자신이 안전하게 기댈 수 있는 남자를 찾는다. 둘의 현실과 현실 인식이 내내 충돌하는 것이다. 젠더 권력의 복잡성은 크루즈에서도 이어진다. 진상 승객과 만취한 선장을 대신해 크루즈를 완벽한 상태로 유지하는 여성 매니저 폴라, 크루즈에서 화장실 청소를 담당했으나 무인도에서는 뒤집힌 세계의 꼭대기에 자리하는 아시아계 여성 애비게일은 세상을 굴러가게 하고 우리를 생존하게 하는 재생산 노동이 ‘여성의 일’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세상이 뒤집혀도 재생산 노동은 여성이 담당하는 현실을 비꼬듯 풍자해 영리하게 활용하기도 한다.

 

 

  계급과 젠더의 얽힘, 그리고 뒤집힌 세계에서도 완전히 새롭게 출발할 수는 없는 사람들. 영화 제목인 ‘슬픔의 삼각형(Triangle of Sadness)’은 미간의 주름 모양을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우리가 슬픔 등의 부정적인 감정을 느껴 얼굴을 찡그릴 때 생기는 주름의 이름인 것이다. 영화는 이 주름을 야기하는 감정이 ‘자연 발생적’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결과물’이라고 말한다. 여러 위계가 교차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시시때때로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며 미간을 찡그리곤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억눌린 역능을 되찾고 행복해질 수 있을까? 다음의 대사가 말하듯, 〈슬픔의 삼각형〉은 세상이 뒤집혀야 된다고 말한다. “여기선 내가 캡틴입니다. 자, 내가 누구라고요?”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작성자 . rewr

출처 . https://brunch.co.kr/@cyomsc1/277/wr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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