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3-07-04 07:37:24
[BIFAN 데일리]소수자 신체성에 토대한 유쾌한 반격
제2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호랑이 소녀〉

호랑이 소녀(Tiger Stripes)
‘부천 초이스: 장편’ 섹션
아만다 넬 유 감독
Malaysia/2022/95min
장난기 많은 12살 소녀 자판. 때로는 유쾌한 성격 탓에 선생님과 부모님에게 혼나기도 하지만, 그녀는 친구들과 즐겁게 학교생활을 하는 중이다. 그러던 어느 날 자판의 생리가 시작된다. 동급생 친구 중 처음이었다. 그러자 모든 것이 순식간에 반전된다. 늘 자판과 함께 지내던 친구들은 생리혈 냄새에 대한 비난과 그 냄새를 따라다니는 귀신 이야기를 수군대며 자판을 멀리하기 시작한다. 남들보다 2차 성징이 빠르게 시작된 자판에 대한 또래의 질시와 생리를 ‘불결한 일’로 대해온 오랜 문화가 섞인 결과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생리에 이어 알 수 없는 신체의 변화가 생겨 자판의 고민은 더욱 깊어만 간다.

영화는 왜 자판이 괴상한 신체적 변화를 겪는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생리 이후 그 변화가 조금씩 진행되었다고 말할 뿐이다. 이 모호성은 전략적이다. 자판이 겪는 신체 변화의 이유가 명확히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은 그녀의 경험이 사회가 낙인찍은 여러 소수자의 신체성을 포괄할 가능성을 연다. 손가락질 받는 모든 소수자의 신체적 특징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자판의 경험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실은 이 변화가 더 강한 존재로 거듭나는 과정이었다는 점은 소수자 신체가 품은 힘과 가능성을 고민케 하기도 한다.
장애인의 몸, 퀴어의 몸 등 사회에서 주변화된 몸은 ‘정상성’에서 벗어났다고 여겨져 차별과 낙인의 대상이 되었다. 여성의 생리에까지 부정적 편견이 깃들어 있다는 점은 우리가 소수자의 신체적 특징을 악마화하여 ‘정상 신체’의 내용과 범주를 확정해왔음을 보여준다. ‘정상’이 먼저 있어서 ‘비정상’이 규정된 것이 아니라, ‘비정상’으로 낙인찍힌 몸을 통해서만 ‘정상’ 신체가 무엇인지 답할 수 있는 것이다. 〈호랑이 소녀〉는 소수자 신체성이 숨겨야만 하는 것일 때는 괴로움을 유발하지만, 이를 마음껏 펼쳐낼 환경이 있다면 기존 위계가 뒤집힐 수 있다는 점을 소녀의 성장기와 버무려 선보인다. 자판의 유쾌하고 당찬 여정은 신체의 문제로 수치심을 느낀 적이 있는 모두에게 즐거운 위안으로 다가갈 것이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을 통해 기자로 초청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제2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는 6월 29일부터 7월 9일까지 온오프라인에서 진행됩니다. 오프라인 상영 시간표와 온라인 상영작 리스트는 영화제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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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국의 나날들 Day of Heaven - 테렌스 멜릭
천국의 나날들 Day of Heaven - 테렌스 멜릭
멜릭 감독은 데뷔작 '황무지'를 연출하고 3년만에 다시 명작을 만들었다. '황무지'에서 보여준 황량하고 메마른 장면들이 여기도 등장한다. 주이공들 역시 '황무지'에서의 연인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고, 이 영화에서도 떠돌이 노동자로 전전한다.
영화를 처음 봤을 때와 두번째 봤을 때 사뭇 다른 감정이 들었다. 이 영화를 처음 보고 쓴 글이 아래에 이어지고 있지만, 사회적 분석을 떠나, 이 영화는 처연하고 슬픔이 너무 깊어 그것을 쉽게 말하지 못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빌(리차드 기어)은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노동자다. 그는 시카고에 살며 영세한 제철소에서 힘겹게 일하고 있다. 역사적 배경은 1916년 무렵이니까 업튼 싱클레어의 소설 '정글'의 배경과 비슷하다.
하지만 빌은 공장에서 일을 하다 관리자와 마찰을 빚고, 의도하지 않게 관리자를 살해한다. 이 앞부분은 매우 빠르게 진행하므로 관객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어리둥절하다. 더구나 공장 내부의 소음이 너무 커서 빌과 관리자의 대화 내용이 들리지 않는다. 이 장면은 마치 쏘련 영화에서 볼 수 있는 '몽타주 기법'처럼 보이기도 한다.
빌은 애인 애비(브룩 아담스)와 여동생 린다(린다 만츠)를 데리고 시카고를 떠나 남쪽 텍사스까지 내려와 떠돌이 노동자들이 넓은 밀밭을 수확하려 모여 드는 곳에 주인공들도 일자리를 얻는다. 빌은 애비를 애인이나 아내가 아닌, 여동생으로 소개하는데, 부부라고 하는 것보다 유리한 점이 있기 때문에 빌이 의도적으로 선택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정직한 태도는 아니었다.
떠돌이 노동자로 일하려면 부부라고 말하는 게 유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빌은 애인 애비를 여동생이라고 말한 이유는, 언젠가 애비와 헤어질 거라는 예상을 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할 수 있다. 즉 빌은 자신이 공장관리자를 실수로 살해하고 도망하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삶이 비극적으로 끝날 거라는 짐작을 했을 수 있다. 그래서 애인 애비의 삶을 위해 자기와 묶어두기 보다는 조금 느슨하고 자유롭게 연결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밀 수확을 하는 농장의 농장주는 젊은 백인으로, 그는 돈이 많았지만 아직 결혼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병을 앓고 있었고, 가족도 없었다. 수백 명의 일꾼들이 수확철이 되면 기차를 타고 몰려왔다가 수확이 모두 끝나면 임금을 받고 다시 뿔뿔이 흩어졌다. 끝이 보이지 않는 평야에 오똑한 집 한 채에 머무는 농장주는 부유해도 외로운 사람이었다.
그 농장주가 우연히 애비를 발견하게 되고, 호감을 갖는다. 빌은 우연히 농장주가 시한부 삶이라는 걸 엿들었고, 애비에게 농장주와 결혼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한다. 빌의 생각은 애비가 농장주와 결혼하고, 농장주가 곧 죽으면, 농장을 물려받아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이었으리라.
밀 수확이 끝나 떠돌이 노동자들이 모두 사라진 뒤에도 빌과 여동생, 애비는 농장에 남아 허드렛일을 하며 농장주와 함께 살기 시작하고, 곧 농장주와 애비는 결혼식을 올린다. 그렇게 농장주와 애비는 공식 부부가 되었고, 빌은 농장주의 처남이 된다.
네 사람은 밀 수확이 끝난 들판에서 노동을 하지 않고 매일 매일을 행복하게 지낸다. 이 영화에서도 데뷔작 '황무지'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나레이션이 나오는데, 빌의 여동생의 시각이다.
평생 가난하게 살았던 빌과 여동생, 애비는 농장에서의 삶이 마치 천국에서 지내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풍족한 생활, 일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움, 아름다운 자연, 누구도 간섭하지 않는 온전한 시간들이 이들에게는 처음하는 경험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농장주는 아내 애비와 처남 빌의 관계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낌새를 챈 빌은 농장을 떠나고, 세 사람은 다시 밀을 심고, 수확할 때까지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애비는 처음에 농장주와의 결혼이 정략결혼이었고, 애정이 없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다정한 농장주의 태도에 자신도 남편(농장주)을 사랑하게 되는 마음을 느낀다.
한 해가 지나고, 다시 밀 수확철이 되었을 때, 떠났던 빌이 멋진 자동차를 타고 나타난다. 농장주는 다시 빌과 애비를 의심하기 시작하고, 결정적 장면을 보게 된다. 하지만 밀밭에 메뚜기 떼가 나타나자 모든 사람들이 나서서 메뚜기를 없애려 바쁘게 움직이는 가운데, 농장주는 빌에 대한 분노와 배신의 감정으로 가득 찼고, 우연인지, 고의인지 알 수 없는 불씨를 밀밭에 던지며 밀밭이 모두 불에 타버리도록 방치한다.
농장주는 빌을 죽이려고 총을 들고 다가서지만 빌의 공격으로 살해당하고, 빌은 다시 애비와 린다를 데리고 도망한다. 보안관들이 빌의 뒤를 추적하고, 마침내 빌은 보안관의 총에 맞아 사망한다. 애비와 린다는 빌의 주검 앞에서 오열하지만, 살인자 빌은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받은 것이다.
이후 애비와 린다는 서로 헤어져 다른 삶을 살게 된다. 애비는 전쟁터로 나가는 군인들과 함께 기차에 올라타 어디론가 사라지고, 린다 역시 무용학원에서 친구와 함께 도망쳐 철길을 따라 사라진다.
결말은 세 명의 주인공이 죽거나 미래를 알 수 없는 운명에 놓인다는 것이다. 이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게 될지, 어떤 삶을 살 것인지 누구도 알 수 없다. 다만 이들의 운명이 가난에서 시작했고, 가난은 사회의 구조적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노동자의 삶은 비참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당시 시대 상황에 관한 인식은 아래,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썼던 글로 대신한다.
천국의 나날들. 1978년 테렌스 멜릭 감독 작품. 젊은 나이의 리차드 기어와 샘 쉐퍼드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멋진 영화임에 틀림 없지만, 이 영화가 보여주는 시대적 상황과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영화가 가진 힘을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라고 하겠다.
스토리만 보면 단순한 줄거리를 갖고 있다. 비교적 평면적인 이야기 구조 속에 미국의 20세기 초를 살아가는 가난한 노동자의 삶을 비극적으로 그리고 있는데, 영화가 보여주는 시대성, 역사성을 잘 구현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20세기 초의 미국 즉 1900년에서 1930년대까지의 미국 사회를 살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즉 업튼 싱클레어가 쓴 소설 '정글'부터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로 이어지는 일련의 미국 현대 소설들은 당대의 현실을 매우 비판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그 시기에 이미 놀라운 판매와 함께 여론을 집중한 베스트셀러였다.
'정글'과 '분노의 포도' 사이에 이 영화의 시대가 있다. '정글'은 시카고 도살장에서 일하는 유르기스는 리투아니아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가난한 노동자다. 그는 도살장에서 일하는데, 그가 일하는 도축장의 현실은 생지옥이 따로 없는, 참혹한 환경이다. 그가 받는 임금은 집세를 내기에도 버겁고, 말할 수 없이 더럽고 참혹한 공장 환경을 비롯해 그가 살아가는 환경은 최악이다.
'정글'은 이 시기의 노동자들이 겪는 고통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지만 그보다는 주인공 유르기스가 고통스러운 삶에 허덕이는 평범한 노동자에서 각성하는 사회주의자로 변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시기에는 미국에서도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상이 노동자를 중심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는데, 이런 상황은 30년대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다.
'분노의 포도'에서도 조드 일가가 겪는 고통스러운 삶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들이 가진 재산을 모두 잃고 이주노동자로 살아가는 것은 바로 이 영화와도 관련이 있는 내용이다. 또한 '분노의 포도'에서도 당시 미국의 노동자들이 사회주의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영화의 무대는 텍사스의 농장이다. 대도시인 시카고에서 노동자로 일하던 빌은 공장장과 말다툼을 하다 의도치 않게 살인을 하게 되고, 그의 애인과 여동생을 데리고 도망한 곳이 텍사스의 농장이다. 광활한 농장은 밀을 키우는데, 수확철이 되면 떠돌이 노동자들을 불러 들여 그들을 먹이고 재우면서 밀 수확을 하게 된다.
백여 명이 넘는 이주노동자들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리고 그 노동자들은 왜 떠돌이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이 물음에 답을 하려면 어쩔 수 없이 미국의 자본주의를 들여다 봐야 한다. 20세기가 시작되면서 지금 우리에게 매우 낯익은 이름들-J.P 모건, 록펠러, 카네기, 제이 굴드 등-이 등장한다. 이들은 미국의 자본주의 역사에서 유명한 자본가들의 이름이며, 지금까지도 미국의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강력한 힘으로 작동하는 지배집단이기도 하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미국의 자본주의는 자본과 노동계급의 대립이 매우 격렬하게 맞붙게 되는데, 이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하워드 진의 '미국민중사(이후출판사)'에서 볼 수 있다. 지금의 미국사회는 거대 자본에 저항하는 세력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순치되어 있는 반면, 20세기 초에는 미국에서도 강력한 노동조합과 사회주의자들의 활약으로 미국노동자들의 계급적 각성은 세계에서도 알아줄 정도로 훌륭했다.
하지만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고 미국의 자본가들은 러시아에서 권력을 장악한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이 미국의 노동자 계급으로 전이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폭력적인 방법으로 노동조합을 박살내고 사회주의자들을 살해하는 범죄를 저질렀다.
도저히 먹고 살 수 없을 정도로 낮은 임금과 장시간 노동은 노동자들이 자본(가)을 향해 투쟁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았다. 결국 모든 노동쟁의와 반자본투쟁의 원인은 바로 자본(가)이 만든 것이다. 이것을 마르크스는 '자본의 내적 모순'이라고 정확하게 지적했고, 자본주의가 붕괴되는 것 역시 이러한 내적 모순에 의해서라고 말한 바 있다.
물론 미국의 자본주의는 지금도 여전히 잘 작동하고 있지만, 폭력적인 방법으로 노동운동을 파괴하고 말살시킨 이후, 미국은 제3세계를 통해 착취한 이윤의 일부를 자국의 노동자들에게 분배함으로써 노동계급의 불만을 완화했고, 미국의 노동자들은 순치되었다.
이 영화는 그러한 미국의 사회적 배경을 바탕으로 공장에서 쫓겨나거나 배제된 노동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게 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 빌과 그의 애인 애비, 여동생은 텍사스의 농장에서 밀 수확을 하게 되는데, 그 농장의 주인은 미혼의 젊은 남성으로, 애비를 눈여겨 보게 된다. 빌은 자신의 애인을 여동생이라고 소개하는데, 그들이 애인 사이인 것을 드러내면 불이익을 받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 사이에서 오가는 미묘한 감정 싸움은 빌이 애인인 애비를 설득해 농장주와 결혼하라고 권하면서부터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빌은 농장주가 병이 있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고, 결국 빌과 애비의 관계를 눈치 챈 농장주(샘 셰퍼드)는 빌과 다투는 와중에 빌에게 살해당한다. 두 번씩이나 사람을 죽인 빌은 도망자가 되어 쫓기다가 결국 경찰관의 총에 맞아 죽게 되면서 이야기는 끝나지만, 겉으로 드러난 빌의 범죄-살인-는 의도하지 않은 상황에 몰린 노동자가 두려움에 저지른 실수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미국의 자본주의가 급격하게 발전하던 시기였던 20세기 초는 특히 노동자의 생존 조건이 말할 수 없이 열악했고, 노동자는 그야말로 소모품에 불과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던 때였다. 지금의 미국은 자본주의와 함께 민주주의도 발달한 나라로 인정받고 있지만, 적어도 지금의 상황까지 오는 동안 미국의 프롤레타리아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과 탄압은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거의 유일하게 하워드 진의 '미국민중사'가 그것을 증거하고 있을 뿐이다.
이 영화는 영상의 아름다움이 탁월한 작품이다. 멜릭 감독은 이 영화로 음악에서는 엔리오 모리꼬네가 영국 아카데미에서 상을 받았고, 전미비평가협회 최우수영화상, 뉴욕비평사협회 감독상, 로스엔젤레스비평가협회 쵤영상,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다.
영화의 장면 한컷 한컷이 마치 회화처럼 아름답다. 이것은 영화의 주제와 내용이 매우 처연하고 슬픈 것과 대비되며, 사회의 구조적 모순 속에서 희생되는 떠돌이 노동자의 삶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비극적으로 대비하고 있어 명작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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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나는 여기에 있다] 씨네랩 VIP 시사회 참여
*이 영화는 씨네랩의 초대를 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오랜만에 씨네랩의 초청을 받아 영화를 보러 갔다. 본디 액션을 선호하지 않는 편인데, 최근에는 세계관이 재미있는 액션 영화가 많아서 관심이 갔다. 게다가 조한선 배우가 나온다고 하길래 궁금했다.
영화 티켓을 받았는데 팝콘과 음료 세트를 할인해 주고 있었다. 어쩐지, 사람들이 다 팝콘이랑 음료를 들고 있더라. 밥을 안 먹고 와서 나도 사서 기다리고 있는데, 옆에 사람들이 북적대고 있었다. 뭐지..? 하고 가서 봤는데 조한선 배우가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음!!! 가까이서 실물 보는데 잘생겨서 깜짝... 그리고 영화를 보기 전, 배우들의 짧은 무대인사가 있었다. 우왕... 너무 멀어...ㅠㅠ 멀어서 잘 안 보였는데도 잘생김이 뿜어져 나오고 있음. 역시 괜히 반해원의 남자가 아닌... ㅋㅋㅋ
영화 [나는 여기에 있다]는 액션에 매우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영화가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사건의 전개 자체를 액션으로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 선두와 규종, 두 사람은 장기이식자라는 콘셉트인데, 그래서 숨을 몰아쉬면서 격렬하게 싸우는 모습을 일부러 길게 보여준다.
영화의 소재가 획기적으로 독특하지는 않다. 하지만 '장기이식자의 성격이 공여자에게 영향을 받는다'라는 컨셉은 좋았다. 아쉬웠던 건 컨셉을 풀어나가는 전개력이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뭔가 더 있을 것 같은데'라는 느낌이 강했다. 영화 속 규종의 성격 변화를 보여주려면 공여자를 더 디테일하게 보여줬어야 하는데, 제대로 비추지 않고 지나가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쯤 나오려나'하고 기다리다가 끝나 버렸다.
영화의 시작과 끝은 CCTV 화면이다. 수미상관의 매듭을 지으려고 했던 것을 보면, 시나리오 자체는 탄탄하고 꽤 흥미로웠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영상으로 옮겨오는 과정에서 중요한 부분들이 많이 사라진 것 같아 아쉬웠다. 사건이 단순할수록 캐릭터에게 더 큰 기대를 하게 되는데, 캐릭터를 보여줄 틈이 없이 영화가 끝나버려서 제대로 몰입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끝났다.
다만 조한선 배우는 확실히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썼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 온 힘 다해 연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고. 열혈 형사라는 캐릭터가 잘 어울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마지막에 캐릭터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캐릭터가 입체적으로 변화하는 것을 보여주려면 그에 응당한 시간이 있어야 하는데 이마저도 보여줄 틈 없이 영화가 끝나버렸다. 컨셉과 캐릭터를 풍미 있게 살릴 수 있었는데, 하는 진한 아쉬움이 남는 영화다.
*이 영화는 씨네랩의 초대를 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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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랙호크 다운 Black Hawk Down
블랙호크 다운 Black Hawk Down
저녁에 영화가 보고 싶어서 DVD를 뒤적거리다 이 영화를 골랐다. 이미 본 영화지만, 이번에 다시 보니 더 재미있게 느껴진다. 리들리 스콧 감독은 그 명성에 걸맞게 액션 씬이 매우 뛰어나다.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과 같은 생동감이 관객을 긴장하게 만들고, 전투 현장에 있는 듯한 긴박함을 느끼게 한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는데, 마크 보우든이 쓴 같은 제목의 넌픽션 원작을 영화로 만들었다.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소말리아 내전에 관해 알아봤다.
소말리아는 영국 보호령이었던 북부와 이탈리아의 신탁통치를 받던 남부로 갈라져있었다가 1960년에 통일되어 소말리아 민주 공화국이 탄생했다. 1969년 시아드 바레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1991년까지 22년간 소말리아 대통령을 역임했다.
미국은 친소정부였던 시아드 바레를 지지했다. 1986년 시아드 바레가 자신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부족들을 특수부대인 레드 베레로 공격하자, 소말리아 혁명이 시작되었다.
1991년 1월 26일 시아드 바레 대통령이 모하메드 파라 아이디드가 이끄는 군벌연합의 쿠데타로 축출되어 퇴임한 이후, 소말리아 혁명에 반대하는 혁명이 발생했다. 내전에 따른 폭력의 증가는 인권 마비, 무정부상태를 초래했다.
내전이 격화되자, 소말리랜드라고 불리는 소말리아 북서부 지역이 소말리랜드 공화국으로 독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어느 나라도 독립을 승인하지 않았다. 북동부 지역은 푼트랜드라고 불린다. 푼트랜드도 1998년 자치 공화국을 선포했으나, 인접한 소말리랜드와 달리 푼트랜드는 소말리아에 대해 명백하게 독립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소말리아 수도 모가디슈는 남부 지역에 속해있다.
미국은 1993년 소말리아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델타포스를 모가디슈 전투 (1993년) 에 파병했다가 현지 민병대원에게 헬기 두 대가 격추당하고 18명의 병사가 체포돼 목숨을 잃었던 이른바 "블랙호크 다운"의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1991년 부터 20년간의 내전속에서 소말리아인 40만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되며 57만명은 난민이 돼 인접국으로 떠돌고 140만명이 살던 곳에서 쫓겨난 것으로 알려졌으며, 소말리아인들은 지금의 무정부 상태보다 시아드 바레 정부 시절이 훨씬 좋았던 '황금시기'였다고 생각하고 있다.
소말리아 인권단체들은 정부군의 20%(5000∼1만 명), 반군 병력의 80%가 소년병이며 9세 어린이까지 전장에 투입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위키 백과'에서 가져 옴)
결국 미국은 세계경찰을 스스로 떠맡아 여러 분쟁 국가에 개입을 했는데, 소말리아에서는 체면을 구긴 셈이다. 영화 끝에서도 나오지만, 이 전투로 소말리아 민병대는 약 1천 명이 사망했고, 미군은 19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소말리아 반군 지휘관인 아이디드는 결국 미군에 의해 암살당한다.
이 영화는 당연히 미국의 시각에서 보여지고 있고, 소말리아 민병대를 '적'으로 그리고 있다. 영화에서도 나오지만, 소말리아 반군은 미국을 내정간섭을 하는 적으로 여기고 있고, 그들의 전쟁에 개입하지 말 것을 경고한다.
미군(미국)의 국제 분쟁 개입은 미국의 이익을 위한 것이니, '정의'니 '평화'니 하는 수식어는 가당치 않다. 다만 이 영화에서는 미군 병사들의 전투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고, 그들이 어떻게 작전을 수행하는가 하는 전술적인 면과 실제 전투를 하는 듯한 생생한 전투 씬이 관람의 포인트가 되겠다.
소말리아는 약소국으로 유럽과 강대국에 의해 분할 통치되어 결국 내전까지 일으키게 되는 불쌍한 나라이다.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들이 그렇듯, 강대국에 의해 착취당하는 약소국의 설움과 분노를 이 영화에서도 볼 수 있다.
영화는 미군이 소말리아 반군 지도자를 체포하러 도시로 진입하면서 발생한 전투를 매우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영화를 거듭 보면서 새롭게 발견하게 된 내용은, 1) 지휘관의 전략, 전술이 얼마나 중요한가, 2) 현대의 시가전 양상, 3) 정규군사조직과 민병대의 차이, 4) 무기의 차이에 따른 전력의 크기, 5) 전우애 등이다.
반군 지도자를 체포해야 한다는 명령은 '백악관'에서 강력하게 내려오고 있는 상황이고, 소말리아의 모가디슈에서 부대 전체를 지휘하는 윌리엄 개리슨 소장이 부대와 군인의 생명을 책임지고 있다. 소말리아의 미군은 모두 특수부대로 구성되어 있는데, 미군 정예 가운데서도 정예라고 자부하는 '델타포스', '제75레인저연대', '제160특수작전항공연대' 부대가 연합 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미군은 소말리아 민병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무장을 했고, 압도적 화력을 가졌지만, 시가전은 예측할 수 없는 전투라는 걸 가볍게 생각한 면이 있다. 미군이 본격 시가전을 치른 것은 2차 세계대전 말엽, 유럽의 도시에서가 전부였으니 50년 전의 상황이었고, 그나마 중동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라고 해봐야 아주 작은 국지전 정도였으니, 소말리아에서 시가전을 벌이는 것도 그 정도로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다.
지휘부에서 시가전에 대한 심각성을 병사 모두에게 인지하지 않았다는 건 영화에서도 드러난다. 병사들도 두어 시간이면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올 걸로 생각하고, 전투에 필요한 준비물을 완벽하게 챙기지 않고 전투에 나서는 모습이 보인다. 이것은 전투의 승리와 병사의 생명을 다루는 전투에서 가장 옳지 않은 태도였다.
시가전투의 전형은 2차 세계대전에서 쏘련군과 독일군이 벌인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들 수 있다. 독일군은 레닌그라드 바로 코앞의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으로 수십만 명의 독일군을 투입한다. 이 당시 전쟁의 전략적 위치로만 보면, '스탈린그라드'는 독일군이 굳이 점령하지 않아도 되는 지역이었다. 독일군은 쏘련의 서남부 지역을 점령해서 유전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상황이었지만, 히틀러가 스탈린과의 자존심 대결을 벌이며, 쏘련의 상징이기도 한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면 쏘련과 스탈린의 자존심을 꺾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스탈릴그라드는 약 90%까지 독일군에게 빼앗긴 상황까지 몰렸지만, 쏘련군은 병사를 전장에 갈아넣는 인해전술로 독일군의 마지막 진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도시는 완전히 파괴되었고, 건물 잔해가 자연스럽게 은폐물이 되었다. 시가전은 게릴라 전투 형식을 띄는데, 최소 단위의 부대가 움직이면서 적을 치고 빠지는 전투가 끊임없이 동시다발로 일어나는 상황이다.
그러다보니 쏘련군과 독일군이 담장 하나 사이로 지나치기도 하고, 같은 건물에서 뒤섞여 전투를 하는 상황도 발생한다. 조금 크게 말하면 서로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전투를 하니 대형무기보다는 소형무기와 수류탄 따위의 개인화기 중심으로 싸우게 된다.
모가디슈의 시가전에서도 민병대는 소총과 RPG, 기관총이 무기의 전부였다. 비정규군이고 대형무기를 구입하기 어려운 상황이기도 해서 소말리아 민병대의 무기 보유는 개인화기가 중심이다. 반면 미군은 장갑차를 비롯한 중장비와 월등한 개인화기는 물론 '블랙호크'와 '코브라' 공격형 헬기 등도 보유하고 있어 화력에서는 비교할 필요도 없이 월등한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미군이 시가전에서 큰 피해를 당한 이유는 전술이 없었고, 도시의 지형지물을 몰랐으며, 지형의 유리한 위치를 민병대가 선점했기 때문이다. 시가전에서 유리한 위치는 전투의 승패를 가를 정도로 중요하다. 시내로 진입하는 순간부터 민병대는 건물 옥상과 주요 길목을 선점했고, 미군 장갑차를 공격했다. 이 영화의 핵심이 되는 '블랙호크'가 추락하는 건 민병대가 쏜 RPG 한 방이었는데, 단순한 비용으로만 봐도 몇 십만원짜리 포탄 하나로 500억짜리 전투기를 격추한 것이니 엄청난 전과다.
그럼에도 이 시가전의 결과는 미군의 압도적 우위로 드러났다. 미군이 19명 사망, 87명 부상인 반면, 소말리아 민병대는 약 1천 명이 사망했다. 처음 작전 투입에 대대 병력이 들어갔다면, 블랙호크가 다운되고, 지상군이 도시의 골목에 막혀 심하게 공격 당하자 개리슨 소장은 대규모 병력 지원을 요청한다. 기존의 유엔군과 다른 기지에 있던 미군까지 총동원하면서 헬기와 탱크 등 중화기와 수백 명의 병사를 추가 투입한다.
영화에서 시가지 전투를 벌이기 전까지, 미군 기지에서 생활하는 병사의 모습이 조금 지루할 정도로 보이는데, 이것은 영화의 주제에 해당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막상 전투가 벌어지면서 죽거나 부상당하는 병사가 발생하고, 병사들은 이들을 끝까지 보호하고 후방으로 옮긴다. 개리슨 소장 역시 전장에 병사를 남기고 돌아온다는 건 있을 수 없다고 말하고, 단 한 명의 병사라도 반드시 귀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막강한 화력을 지원하면서 시가전을 펼쳤고, 실제 피해 규모로만 보면 소말리아 민병대가 밀린 것 같지만, 이 전투는 명백히 미군이 패한 전투였다. 상황을 안이하게 판단한 것, 시가전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한 것, 미군의 피해가 상대적으로는 적지만, 전투의 규모로 보면 매우 크다는 것 등을 패배의 원인으로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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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마가 이사왔다 | '엑시트'를 꿈꿨던 오컬트 로코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제2의 <엑시트>를 꿈꾸다
2019년 여름 극장가의 주인공이었던 <엑시트>는 겉과 속이 달랐다. 예고편과 포스터만 보면 평범한 한국형 코미디 같았다. 특히 배우들의 이미지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영화처럼 느껴졌다. <건축학개론> 속 조정석의 코믹한 이미지와 <공조>에서 강한 인상을 남긴 임윤아의 푼수 연기를 전면에 내세운 게 분명해 보였다.
실상은 달랐다. 구조 헬기를 부르는 장면처럼 확실한 웃음 포인트를 선보이면서도 재난 영화로서의 긴장감을 잃지 않는 균형감이 돋보였다. 특히 취준생 주인공들을 내세워서 가상의 재난을 현실에 비유한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화학 가스에 뒤덮인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 빌딩 위로 향하는 그들은 마치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끊임없이 사다리를 두고 경쟁해야 하는 스크린 밖의 2030 세대와 다를 바 없었다.
<엑시트>의 이상근 감독이 선보인 신작, <악마가 이사왔다>는 제2의 <엑시트>가 목표다. 로맨틱 코미디라는 겉모습과는 달리 내용물은 오컬트를 활용한 코미디와 신파로 가득한 가운데, 위로와 치유의 메시지로 여러 장르를 묶어 놓은 모양새가 <엑시트>와 유사하다. 그러나 이 전략은 유효하지 않다. <엑시트>와는 달리 다양한 장르를 묶어줄 연결고리가 허술한 나머지, 그럴듯한 소재에 비해 결과물은 아쉬움을 남기기 때문이다.
서양식 오컬트와 코미디의 만남
<악마가 이사왔다>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요소는 오컬트다. 차이가 큰 동서양 오컬트를 코미디와 드라마, 로맨스를 엮는 실로 활용하는 스토리텔링이 인상적이다. 사실 서양과 동양의 오컬트는 사뭇 다르다. 전자가 대체로 악마 같은 대상을 퇴마하는 과정을 다루지만, 후자는 원혼이나 귀신의 트라우마나 사회적 억압 등에서 비롯된 한을 풀어주는 이야기가 많다.
그렇기에 동서양 오컬트를 한 작품 내에 녹여내기는 쉽지 않다. <파묘>만 봐도 알 수 있다. 수십 년간 한 맺힌 원혼을 달래기 위해 파묘를 하고 굿을 하는 전반부는 동양적 오컬트 영화에 가까웠다. 그에 반해 후반부는 한국을 배경으로 일본의 오니를 등장시키면서도 서양식 오컬트의 퇴마 의식과 비슷한 전개를 보여줬다. 천만 관객을 돌파하고도 <파묘>에 대한 반응이 꽤 엇갈렸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악마가 이사왔다>의 초반부는 서양식 오컬트 외양을 띤다. 퇴사 후 무료한 일상을 보내던 중 아랫집에 이사 온 '선지'(임윤아)에게 첫눈에 반한 '길구'(안보현). 하지만 그는 밤마다 전혀 다른 인격을 변하는 선지를 목격한 뒤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그녀의 정체를 탐색하고, 마침내 그는 선지의 아버지 '장수'(성동일)로부터 진실을 듣는다. 새벽마다 깨어나는 악마 '밤선지'가 '낮선지'에게 붙었으며, 이 악마를 퇴마하는 법은 없다는 것.
장수는 반신반의하는 길구에게 새벽 동안 밤선지를 돌보는 아르바이트를 제안하고, 제의를 승낙한 길구는 난동 벌이는 밤선지를 제어하느라 새벽마다 고통받는다. 그녀의 난동은 코미디의 소재이기도 하다. 밤선지가 편의점 신제품을 매일 싹쓸이한 뒤 한발 늦게 온 고객을 조롱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소소하게 일상의 금기를 깨는 악마적인 사건들로 구성된 광경은 마치 <핸섬이즈>와 유사한 결의 웃음을 자아낸다.
한국형 오컬트로 빚은 신파
하지만 밤선지의 사연이 드러나는 순간부터는 동양식 오컬트가 전면에 나선다. 수백 년 전 기근이 닥쳤을 때, 밤선지는 굶주림으로 가족을 잃었고, 마을 사람들은 고아가 된 그녀를 굿의 제물로 바쳤다. 이후 원혼이 된 그녀는 불에 탄 본인 유해가 담긴 옹기에서 조용히 소멸 날을 기다렸다. 하지만 낮선지의 외조모가 그녀를 옹기에서 내쫓으면서 휴식을 방해하자 그녀는 선지의 가족에게 대를 이어 붙어 있는 것으로 복수했다.
즉, 그녀는 퇴치해야 할 악마가 아니라 한을 풀어줘야 할 원혼이었다. 서양식 오컬트의 겉모습을 빌렸지만, 이면에서는 동양식 오컬트 서사를 착실히 쌓아 올린 셈이다. 이러한 스토리텔링은 여러 장르의 가교 구을 한다. 감성과 형식이 다른 두 오컬트가 동시에 등장해도 어색하지 않다. 오컬트의 성격이 달라지는 순간 코미디가 신파로 전환되기에 영화의 흐름도 끊어지지 않는다.
이에 더해 진부함과 식상함의 농도도 옅어진다. 기근으로 가족을 잃고, 제물로 희생되었다는 사연은 여러 사극에서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클리셰다. 하지만 길구가 원혼의 한을 덜어주기 위해서 그녀가 담겨 있었던 옹기를 찾으러 제주도에 도착한 순간, 이 클리셰는 비로소 눈치채지 못했던 복선을 찾는 재미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제주도는 유달리 기근으로 고생을 많이 했고, 육지와는 다른 문화를 간직해 온 공간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제주도는 경신대기근으로 인해 1670년 9월에 42,700여 명이었던 인구가 불과 2년 만에 27,578명으로 줄어드는 피해를 바 있다. 또 비극적인 역사와 고립된 지형으로 인해 제주도는 고유의 무속 신앙 전통이 뿌리 깊다. 지금도 해원상생굿을 통해 4.3 사건 피해자를 기리고 있으며, 환자굿으로써 당시의 트라우마를 달랜 생존자들도 많다. 이처럼 특수한 지역적 서사를 발견하는 순간, 기구한 원혼의 사연은 차별화될 수 있다.
빵과 옹기의 의미
유달리 자주 등장한 소재인 빵과 옹기의 의미 또한 같은 맥락에서 찾을 수 있다. 선지는 낮에도 밤에도 유달리 빵에 집착한다. 낮에는 제빵사로 일하면서 프랑스 제빵 유학도 준비한다. 국가대표 유망주였을 뿐만 아니라 올림픽 메달도 거뜬할 수영 재능을 지녔는데도 제빵사의 꿈에만 매달린다. 밤에는 편의점에서 파는 시폰 케이크에 집착한다. 진열대에 제품이 올라가는 즉시 전량 구매해서 먹어버릴 정도다.
선지의 행동에는 단순한 개인 취향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는 듯하다. 육지와는 달리 제주도에서 카스텔라, 롤케이크, 단팥빵 같은 빵이 전통적으로 명절 차례상이나 제사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제음식이기 때문이다. 즉, 항상 빵을 갈구하는 그녀의 행동은 허기짐을 표현하는 장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간 그녀가 받지 못했고, 또 가족들에게 차려주지 못했던 제사상에 대한 한이 담긴 음식이 바로 빵인 셈이다.
그녀가 새벽마다 옹기를 찾아 돌아다니는 이유도 지역적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녀는 쓰레기장이나 꽃집을 돌면서 유독 화분이나 여러 항아리를 살펴본다. 본래 자신의 쉼터여야 할 옹기를 찾기 위해서. 이때 옹기 역시 제주도의 특수성을 상징하는 소재로 활용된다. 제주도 특유의 고냉이찰흙으로 빚어진 옹기는 불로 구웠을 때 천연 유약인 ‘자연유’가 저절로 입혀지는 등 육지의 다른 옹기와의 차이가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제주 옹기는 음식의 맛을 돋우고, 내용물의 변성을 막으며, 물을 정화하기로 유명하며, ‘숨 쉬는 항아리’로 불리기도 한다. 이러한 특징은 과거 사람들이 소녀의 유해를 화장해 옹기에 담은 이유, 선지의 외조모가 그 옹기를 발견한 뒤 씻어낸 후에 김치를 담그다가 원한을 산 계기로 이어진다. 즉, 옹기 또한 사후에도 평화를 얻지 못한 아픔을 강조하는 또 하나의 영화적 장치인 셈이다.
실종된 긴장감과 달함
하지만 오컬트 소재를 신파로 풀어내는 사이에 <악마가 이사왔다>는 오컬트 장르 본연의 서스펜스와 쾌감을 놓치고 말았다. 우선 낮선지와 밤선지라는 아이디어는 거의 활용되지 못했다. 선지와 영화 <잠>에서 몽유병을 앓는 듯 보이는 '현수'(이선균)는 처지가 유사하지만, 그를 지켜보는 주변인들의 두려움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후자와 달리 전자는 낮과 밤이 다른 선지가 유발하는 공포감을 거의 조성하지 못한다.
오컬트 분위기를 고조할 캐릭터도 제대로 못 활용했다. 무당처럼 보이는 '영식'(신현수)이 등장하지만, 그에 대한 설명은 다. 그가 선지에게 깃든 원혼을 노리는 이유도, 원혼을 퇴치하는 데 한 차례 실패한 뒤 다시 접근하지 않는 이유도 알 길이 없다. 그러다 보니 그의 등장 장면은 제대로 된 위기 상황을 만들지 못한다. 자연히 선지에게 악마가 아니라 원혼이 붙었다는 진실이 밝혀지는 반전의 순간도 임팩트가 줄어든다.
악역의 빈약한 존재감은 로맨스에도 악영향을 준다. 로맨스 영화에서 남녀 주인공은 함께 위기를 극복하면서 관계를 발전시킨다. 학교나 회사에서는 어려운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고, 집에서는 부모의 반대를 꺾는 식으로. 영식이라는 캐릭터가 별다른 기능을 못 하는 이상, 길구와 선지는 함께 극복할 특별한 위기 상황을 맞지 못한다. 결국 그들의 관계가 아파트 이웃, 직장 동료 이상으로 발전할 만한 계기도 찾아볼 수 없다.
몇 안 되는 이벤트마저 길구와 밤선지의 몫이다 보니 로맨스의 주인공도 애매하다. 길구와 낮선지가 서로 호감을 느낀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정작 길구와 밤선지의 관계가 변화하는 모습에 분량과 비중이 집중된 이상, 길구와 낮선지가 주도적으로 로맨스를 만들어 나간다는 인상은 받기 어렵다. 그 결과 길구와 낮선지가 연애를 시작하는 결말은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하며, 로맨틱 코미디로서의 만족감도 절대 크지는 않다.
무위에 그친 성공 방정식
로맨스의 실종은 길구의 서사를 공기화하면서 <악마가 이사왔다>의 완성도를 결정적으로 저해한다. 길구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되짚어 보면 영화의 의도는 유추할 수 있다. 아마도 밤선지의 한을 달래주는 여정을 겪으면서 길구가 자신의 아픔도 이겨내는 과정을 보여주려 한 듯하다. 타인을 향한 선의가 자기 아픔도 치유할 수 있다는 메시지로 무장한 것.
이는 <엑시트>가 '용남'(조정석)을 활용한 방식과 매우 유사하다. 취준생으로 지내며 무기력해졌던 용남은 잊고 있었던 장기, 클라이밍 기술을 살려서 재난 상황을 극복하는 영웅으로 거듭난다. 용남에게 재난이 덮쳤다면, 인형 뽑기가 재능인 길구에게는 귀신이 찾아왔다. 회사 생활이 남긴 상흔을 술과 인형 뽑기로 애써 가리며 지내던 길구는 선지와의 모험을 통해 자기 아픔도 치유하고, 재능을 살릴 수 있는 새로운 길도 찾아낸다.
그런데 로맨스 서사가 약하고, 오컬트에서 비롯된 신파가 중심 스토리라인이다 보니 길구의 서사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길구 감정선이나 내적 변화와 성장까지 들여다볼 시간이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그가 선지를 만나기 전까지의 그의 일상을 보여주는 초반부는 대체 왜 필요한 건가 싶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달리 말해 길구가 주인공이어야만 하는 이유를 관객에게 제시하는 데 실패했다.
그 결과 <악마가 이사왔다>는 재난 영화를 빼고 오컬트를 더해서 제2의 <엑시트>가 되고 싶었던 꿈을 이루지 못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예상할 수 있 맛과 의외의 신선함을 모두 선사한 <엑시트>와 달리, <악마가 이사왔다>는 예상한 맛이 안 나는 와중에 예상 못 한 맛도 특별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임윤아라는 배우가 드라마뿐만 아니라 영화도 이끌 수 있는 주연임을 확실하게 증명했다는 성과가 있을 따름이다.
Poor 형편없음
두 번은 안 통한 <엑시트>의 성공 방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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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만 알 수 있었던 당신의 몸짓 그 모든 것
봄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영경(한예리)과 수환(김설진)이다. 친구의 결혼식, 외로운 영경의 눈에 누군가 들어온다. 과묵한 남자 수환. 둘은 몇 마디 말을 주고받지만, 깊은 말을 나누지 않아도 이미 서로 연결된 것처럼 보인다. 국어교사였던 영경, 사업에 실패한 수환. 두 사람의 마음에는 깊은 흉터가 있고, 몸은 이미 망가지고 있었다. 살아있다는 건 무엇일까? 사는 길은 있는 걸까? 거리의 나뭇잎과 꽃은 환하지만, 두 사람은 시들어간다. 더 시들기 전에, 그들은 사랑에 빠진다.
죽음으로 향하듯
이 영화에 나오는 두 사람은 세상과 멀리 떨어져있다. 이 거리감을 표현하는 방식은 이 영화의 첫 시작부터 잘 드러난다. 기본적인 설정 중 하나는 두 사람이 친구의 결혼식에서 만났다는 것이다. 결혼식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영화 역시 새롭게 시작한다. 영경과 수환의 첫 만남. 운명처럼 만났다. 대화가 통하는 두 사람. 글쓴이가 어제 본 <슈퍼맨>처럼 대화가 통하는 남녀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그 수많은 사람들이 다 검은 옷을 입고 엎드려있는 장면을 보여줄 뿐이다. 검은 옷을 입고 누워있다는 건 자연스럽게 죽음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리고 대화하는 남녀가 엎드려있는 군중 속에 있다. 결혼식이라는 행사에 고의적으로 생기를 없애버렸다. 심지어 결혼식에서도 죽음에 가까운 두 사람. 세상과의 거리감과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들 사이들 중 가장 죽음에 가까운 남녀의 모습을 초현실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이후에 이어지는 장면. 두 사람이 포장마차에서 만난다. 서로의 사연을 공유하는 수환과 영경. 영경은 국어교사였다. 남편과 헤어진 영경. 영경에겐 아들밖에 없었다. 하지만 친권을 뺐겼다. 마음에 흉이 졌다. 술로 빈자리를 채웠던 영경. 마흔셋의 이른 나이에 교직을 내려왔고 술로 일상을 보내야만 한다. 수환은 결혼에 실패했다. 사업에도 실패했다. 병이 생겼다. 류머티즘 관절염을 앓는 수환. 온 몸이 아파 심지어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다. 육체는 살아있을지 몰라도 두 사람은 죽어있다. 여기서 수환이 내뱉는 대사는 이 영화의 플롯을 한 번에 요약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동시에 두 사람이 서로를 만나기 전 각자가 쌓아온 사연을 함축한 대사이기도 하다. 죽음으로 향하다가 새롭게 시작했다. 그리고 그 죽음 사이에서 나누는 사랑이 남는 것이다.
이 영화의 원작이 소설이었다는 점 역시 본작이 죽음에 관한 작품이라는 암시처럼 느껴진다. 원작 권여선의 <봄밤>은 두 주인공의 일대기가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두 사람의 가족들이 나온다. 영경의 자매들이 대표적으로 그렇다. 심지어 두 사람이 함께한 시간이 12년 구체적으로 명시되어있기도 하다. 이야기로서의 기능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원작. 영화는 이 구조와는 거리가 있다. 인물들의 사연은 캐릭터들의 대사로 짧게 묘사된다. 과거회상을 통해 극적으로 몰입되는 감정선도 배제한다. 거두절미하고 딱 죽음 사이의 인물만 보여준다. 여자는 여자의 삶을 살다가 죽어가고 남자 역시 마찬가지다. 단지 그 둘이 서로를 만나 함께 죽어가고 있다. 영화는 그 이미지와 고유의 리듬감이 핵심인거지 이야기로 구구절절 설득할 생각 없다. 카메라도 동선을 최소화한 방식을 차용한다. 수환이 영경을 업을 때 업는 동작마다 짧게 잘라서 숏을 구성한다던가,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준다던가하지 않는다. 그냥 행위와 잔상만 남는다. 편집도 마찬가지. 위의 촬영방식과 연장선상으로 죄다 분절되어있다. 감정을 극적으로 몰아붙인다던가 하는 선택지는 애초에 없었던 듯 하다. 인물들은 움직이기만 하고 그 움직임만 영화가 보여준다. 죽어있지만 단 한가지만 살아있는, 죽어가는 사람들의 영화라는 점을 영화가 표현하고 있다. 아마 감정이입을 허락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듯 하다. 어차피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영화가 동정이나 연민을 허락한다면 이 영화가 보여주는 처연함과 모순된다는 점에서 타당한 선택이다.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이 영화는 생동감을 보여주는 장면이 규칙적으로 반복되며, 그 반복의 중심에는 김수영 시인의 시 ‘봄밤’이 있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로 시작하는 이 시는, 영경이 수환에게 업혀가는 장면에서 처음 등장하며, 사랑이 깊이 자리잡힐 때까지 반복된다. 영경은 자주 이 시를 읊고, 수환은 그 곁에서 듣는다.
영화는 마치 1시간짜리 음악처럼 각기 다른 장면과 상황을 이 시의 반복으로 이어간다. 시의 각 구절이 달라지지만,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 오오 봄이여’와 같은 후렴은 매번 같아, 인물들의 변화 없는 삶을 암시하는 듯 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시를 읊음으로서 느껴지는 리듬감이다. ‘삶은 결코 죽은 동일성의 복제가 아니다. 매 순간 새로운 차이를 생성하는 생성의 운동’이라고 말한 들뢰즈처럼 이 시는 죽음을 형상화한 플롯에 생기를 부여한다. 그 사이 시의 이미지들은 영화의 배경이자 정서적 풍경이 되고,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않는 두 사람의 태도처럼, 이들의 사랑 또한 거창하거나 화려하지 않고 조용히 스며든다.
몸짓과 눈빛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영화적 요소는 몸짓이다. 몸짓은 죽어가는 삶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있음을 드러내는 가장 단적인 증거다. 대사가 아닌 몸의 움직임, 그 느릿하고 무거운 동선 속에 인물들의 감정과 시간이 고스란히 담긴다. 영경이 수환에게 업히는 장면,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걷는 모습, 병든 몸을 간신히 이끄는 수환의 걸음걸이. 잠시 떨어져있던 두 사람이 재회할 때. 영경의 외로움. 그 외로움을 못이겨 술을 들이키는 영경. 이 모든 몸의 궤적이 말보다 선명하게 인물의 상태를 보여준다. 간단하지만 명료한 상태. 이 사람들은 죽어가고 있지만, 서로 사랑하고 있다.
이 몸짓을 바라보는 인물들의 시선은 몸짓을 보여주는 단적인 연출방법 중 하나다. 표정을 보여주면서 감정적인 여운을 부각시키기도 했지만 이 시선은 타인의 존재를 기본적으로 전제했다는 점에서 이야기에 맞닿는다. 움직이는 몸이 있고 그 움직이는 몸을 바라보는 장면을 카메라로 촬영한다. 감정이 오고감에 따라 영향받는 캐릭터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시선을 보여주는 카메라워킹은 결국 후반부로 갈수록 하나의 키워드로 이어진다. 사랑이 죽었다는 건 물리적으로만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 결국 사랑이 인간에게 남기는 유산은 상대가 나에게 선물했던 모든 몸짓이라는 점이다.
영화에 서린 밤
볼 때는 내내 무표정이지만 보고 나서 계속해서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아프다면서 왜 저렇게 술 마셔? 너무 거리두는 거 아닌가? 술 살 돈은 어디서 났대? 하지만 이런 무던함이 무색하게 극장을 나오고 나서는 길에 그 아팠던 상처가 나에게도 생겼다. 언제는 운명처럼 반해야만 사랑이었나. 나에게 기억에 남았던 건 사랑하던 것/사람들이 생생하게 펼치던 몸짓이었다. 그 몸짓이 나의 밤에 선명하게 남았다. 이 영화는 이 밤을 상기시키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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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납작해진다고 네가 튀어나오진 않는다
까놓고 말해 <분노의 추격자>는 새로울 것이 없는 서사에, 이제는 티켓파워를 많이 잃은 주연배우 제라드 버틀러를 얹어 가소로운 액션을 담아낸 진부하기 짝이 없는 영화다. 원제(<Last Seen Alive>)는 둘째치고라도 번역된 제목부터 80년대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데 가장 큰 문제는 여성 캐릭터에 있어 발전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몇 안되는 여성은 대부분 아내로 그려지고 남성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며 감정적으로도 무기력한 상태다. 평면적이고 수동적인 여성 캐릭터와 더불어 영화의 가장 큰 문제는 남성 캐릭터들조차 새로울 것이 없다는 것이다. 좋은 평가를 받아온 남성 중심의 서사는 입체적인 남성 캐릭터를 보완하는 평면적인 여성 캐릭터를 발판삼곤 했다. 하지만 <분노의 추격자>가 얄팍한 긍정 평가조차 받을 수 없는 이유는 여성 캐릭터를 희생시키고도 메인 캐릭터 전부가 개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경찰로 보이는 한 남성과 범죄자로 보이는 다른 남성의 대화로 시작된다. 경찰은 범죄자의 목을 조르고 있고, 대낮에 겁도 없이 여자를 납치했다고 상대방에게 겁을 주고 폭력을 휘두른다. 언뜻 보아서는 선악을 가르기 힘든 두 남성 간의 알력 싸움처럼 보이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굳이 사용할 필요가 없었던 플래시 포워드 장면임이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이 첫 장면 때문에 관객은 패터슨 경감(러셀 혼스비 분)에 대한 신뢰도가 하락한 상태에서 관람을 시작하는데, 패터슨 경감이 극에서 담당하는 역할이 거의 없음을 상기해보면 관객에게 강제된 혼란은 무쓸모에 가깝다. 패터슨 경감에게 폭력을 당하는 너클스(이선 엠브리 분) 또한 첫 장면만을 별도로 보았을 때 리사 납치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잔가지에 불과하다. 즉 강렬한 인상을 줄 수도 있었던 첫 플래시 포워드가 시간낭비가 된 가장 큰 이유는 조연인 패터슨 경감과 너클스마저 진부한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혼란스러운 플래시 포워드 장면이 끝나면 윌(제라드 버틀러 분)과 리사 부부가 차 안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관객은 어렵지 않게 리사가 납치될 것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이는 히치콕이 말했던 서스펜스 효과와는 정반대로 기능한다. 플래시 포워드 장면을 제외하고라도 서스펜스가 증발한 이유는 이 단순한 장면에서조차 운전대를 잡고 있는 것이 윌이고 아내인 리사는 조수석에 앉아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기 때문이다. 부부의 대화가 진행되며 부부의 문제점이 드러나지만 납치 사건과는 무관하다. 즉 안됐지만 부부가 차 안에서 나누는 대화 장면은 여전히 대부분 서사를 위해 기능하지 못한다. 오히려 플래시 포워드 장면에서 이어지는 긴장감을 떨어트리고 관객을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며 오로지 종종 인서트되는 플래시백 장면을 위해서만 기능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장면의 존재 이유는 서사의 중심인 윌과 윌의 보조 캐릭터로서만 활용되는 리사를 소개하는 것이 전부다.
단순히 리사가 무기력한 캐릭터이고 윌이 그런 리사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캐릭터라는, 다분히 구시대적인 성 이분법적 역할 분배는 차치하고라도 여성인 리사에게 불화의 책임마저 떠넘기는 것은 그야말로 무책임한 서사다. 리사는 우울했지만 그 원인이 제시되는 대신 우울감으로 인한 외도라는 결과만이 제시되고 아마도 원인 제공자였을 윌은 순수한 구원자로서 자리매김한다. 윌은 부동산 중개업자로서 가난하지도 않고, 플래시백 장면으로 미루어 리사에게 소홀한 남편도 아니다. 심지어 리사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리사의 외도조차 외면하는데다 우울한 리사를 처가에 데려다주기까지 한다. 인물 설정을 성별에만 기대어 한 것도 통탄스럽지만 한쪽 성별에 갈등의 원인을
전가하는 것은 그 이상의 문제가 된다. 단순히 여성을 무기력하면서 모든 문제의 원인 제공자로 묘사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리사를 굳이 구하려는 윌의 서사가 주저앉기 때문이다. 아내이지만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외도까지 한 여성을 목숨을 걸고 구하려는 윌의 캐릭터 또한 설득력을 잃고 무너진다.몰빵직업조차 묘사되지 않고, 아니 직업의 유무조차 묘사되지 않고 완벽해 보이는 남편 뒤로 외도하는 리사를 발판삼는 윌이 리사를 희생해서 얻는 것은 무엇일까. 리사가 스크린에서 사라지고 카메라는 윌에게만 포커스를 맞춘다. 액션이 중점이 되었어야 할 이후 시퀀스들은 <테이큰>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브라이언 밀스(리암 니슨 분)는 전직 요원이었지만 윌은 부동산 중개업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가진 것이라곤 건강한 신체뿐인 브라이언이 사력을 다해 가족을 구원하고 구시대적 가부장으로 회귀하는 것이 <테이큰>의 셀링 포인트이자 한계였다면 <분노의 추격자>는 양쪽 어딘가에도 미치지 못한다. 윌은 납치된 아내를 찾을 수 있는 전문가가 아니며 가진 것이라곤 분노뿐이다. 윌의 액션은 거칠고 투박하며 많은 것을 가지고도 처가로부터 무시당한다. 브라이언의 전 아내 레노어(팜케 얀센 분)는 딸 킴(매기 그레이스 분)을 제발 찾아달라고 브라이언에게 기대지만 윌의 장인과 장모는 윌조차 의심한다. 윌이 아내를 되찾아온다고 해도 가부장의 권위를 세우기는 어려워 보이며, 이는 구시대적인 사고를 가진 관객에게조차 영화가 소구할 구석이 없음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는 꼴이다.
(아마도 제라드 버틀러의 팬을 제외한) 어느 관객에게도 소구점이 없어 보이는 <분노의 추격자> 혹은 이와 비슷한 영화가 계속해서 양산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성 서사가 힘을 얻고 인기를 얻어가는 이 시대에도 낡은 가부장의 권위를 어떻게든 세우고 싶어하는 이들이 자본의 권력을 쥐고 있기 때문인 건 아닐까. 자본을 쥔 이들이 영화를 어떻게 제작할지는 그들의 자유지만, 목적을 이루기 위해 배우와 캐릭터성을 희생시키는 건 투자한 예산에 대한 무책임이다. 이제는 낡은 서사에 남성 캐릭터를 몰아넣고 어설픈 액션을 쏟아붓는다고 해서 팔리는 시대는 한참 지났기 때문이다. 납작한 남성 캐릭터를 살리기 위해 여성 캐릭터들을 더 납작하게 누른다고 해서 남성 캐릭터들이 살아 숨쉬는 건 아니다.
*이미지는 씨네랩 제공 및 네이버영화입니다.
*본 글은 씨네랩 시사회 초청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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