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3-10-09 14:56:15
[BIFF 데일리] 우리가 사랑한, 우리가 사랑할
영화 <노란문: 시네필 다이어리> 리뷰
Director] 이혁래
Program note]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봉준호 감독의 첫 단편 <룩킹 포 파라다이스>를 본 이들은 ‘노란문 영화연구소’의 멤버 십여 명뿐이다. 어둡고 더러운 지하실의 고릴라가 똥벌레의 공격을 피해 낙원으로 향하는 이야기의 이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은 청년 봉준호가 속해있던 ‘노란문’의 송년회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이후 30년간 오동나무 상자에 담겨 봉준호의 서재에 깊숙이 숨겨져 있던 8mm 필름 상자가 열리자 90년대 초 시네필들의 추억도 와르르 쏟아진다. “다들 미친 듯이 영화 공부를 하던” 영화광 시대에 ‘노란문’은 그들만의 시네마테크이자 영화학교였고 무엇보다 이상적인 청년공동체였다. <노란문>은 한국 영화 문화의 르네상스를 여는 아주 특별한 시대에 대한 꼼꼼하고 생생한 보고서다. 깨알 같은 일화들 속에 영화사 걸작들의 클립을 보는 즐거움은 덤이다. (강소원)

갑작스러운 고백. 사실 나는 ‘라떼 토크’ 듣는 것을 꽤나 좋아한다. 누군가의 호시절 이야기는 언제나, 지금으로서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의 아련한 반짝거림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야기 듣는 걸 좋아하는 건 사람의 본능이므로, 나 같은 사람이 꽤 많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람들이 ‘라떼 토크’를 싫어하는 이유는 그게 옛날 이야기라서가 아니라, 그 안에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그러니 내 말을 들어라)’ 식으로, 현 세대를 향한 은은한 책망이 묻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므로 은은한 책망도 기묘한 질투도 서리지 않은, 순수하게 호시절을 그리워하는 이야기는 누구나 마음 편히, 아름답게 들을 수 있는 거니까.
하물며 지금도 빛나는 이들이 열심과 야심으로 똘똘 뭉쳐 있던 시절의 이야기라면, 탐나지 않을 길이 없다. (GV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감독 인사 영상 대신 나온 봉준호 감독의 영상에서도, ‘부럽습니다’라는 말이 몇 번이나 튀어나왔다. 이 감독과 이 영화의 의의를 관객에게 짚어주고 ‘노란문’에 대한 아득한 그리움을 분명히 알뜰살뜰 챙겨 말했건만, 체감하기론 ‘부럽습니다’만 듣다 끝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영상이었다.
<노란문: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는 <미싱타는 여자들>을 공동 연출한 이혁래 감독의 작품인 동시에, 10월 27일 공개될 넷플릭스 다큐멘터리이기도 하다. 봉준호 감독을 비롯한 ‘그 시절 시네필’들이 대거 출연하는 영화, ‘청년 봉준호’를 엿볼 수 있는 영화에 수많은 영화 팬들의 티켓팅 경쟁이 몰릴 것은 자명했다. 감독의 전작을 인상 깊게 보았지만 티켓팅에 취약한 나로서는 일찌감치 물러나 넷플릭스 공개를 기다리는 것도 좋은 방법일 터였다. 그러나 어영부영 티켓이 잡혀서 영화를 보았는데, 보면서 깨달았다. 이 영화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보아야 더 좋을 수밖에 없는 영화구나.
https://www.youtube.com/watch?v=ZHMHMl83JI8

영화는 봉준호 감독뿐 아니라, 이미 중년이 된 다양한 이들의 얼굴을 담았다. 영화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냥 모여 들었던, 카메라의 작동 원리도 모르는 상태로 모여 초점 나간 사진을 찍으면서 시작했던, 젊고 보송했던 얼굴들. 그냥 서로서로 가르치고 배우고, 그냥 즐겁게 모여서 그러는 게 자연스러웠던 시절. 원대한 목표와 계획을 차르르 펼치는 게 아니라 모여서 뭐라도 거창하게 해보았던 시절.
빛나는 시절은 그 빛을 스스로 몰라야 완성이 된다. ‘나는 이렇게 빛나고 있지’라고 인지하면서 빛나는 시절은 없다. 내가 ‘라떼 토크’를 좋아하는 이유도 하나 더 깨닫는다. “그냥 좋아서” 만난 이들의 그 시절 이야기는, 그냥 좋다는 바로 그 이유로 더없이 빛난다는 걸. 에너지를 미친 듯이 분출할 수 있는 건 젊은 시절의 특권이고, 그렇기에 어떤 노래 가사처럼 ‘한 밑천’이며, 또 다른 노래 가사처럼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니까.
이들은 영화를 의식적으로 공부해 영화계에 들어선 영화인으로는 한국에서 거의 첫 세대다. 장산곶매를 비롯한 다양한 시네필 모임들이 영화를 공부하고, 상영하고, 만들고… 여기에는 비디오 문화라는 기술이 있었다. (같은 맥락에서, 지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상영된 <일시정지> 혹은 최근 개봉한 <킴스 비디오>를 떠올리게 되기도 한다. 같이 묶어 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 지금처럼 OTT나 유튜브로 영화를 보는 시절이 아니라, 서로 알음알음 복제한 비디오를 통해 영화를 보는 시절. 다시 말해 영화를 본다는 행위가 타인과의 교류 없이는 어렵던 시절.

물론 이들의 영화 사랑이 기술에만 기인하지는 않는다. 극중에서도 봉준호 감독은 “덕후의 원동력은 집착”이라며 눈을 빛내고, 이들은 집요하게 롤랑 바르트, 기호학, 포스트모더니즘, 그놈의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같은 것들에 열중한다. 지금 돌아보면 “거창했네요”, “뭐가 이렇게 거창했어” 소리가 저절로 나올 만큼, 과도한 진중함이 조금은 우스워 보일 수도 있다. 잘 모르기에 더욱 무겁고 거창하게 말할 수 있는 시기의 사랑이란 것이 있다. 젊은 서툶에 기인하기에 더욱 무거운 언어를 사용하는, 아주 조금 지난 후에 보면 수치스럽고, 아주 오래 지난 후에 보면 그조차 정겹고 사랑스러운.
봉준호 감독이 아르바이트비를 털어서 샀다는 첫 장비의 긴장과 기쁨과 설렘. 그 장비로 소중하게 남긴 기록들. 힘들게, 처음으로 만든, 그걸 보여준 시절이 있었다. 귀 밑까지 빨개질 만큼 긴장해서, 상영되는 내내 뒤에 숨어 있어야 했던 기록이. 누구에게나 처음이 있다. 이들이 사랑한 거장들에게도, 영화 중간중간 나오는 위대한 대작을 만들어낸 거장들에게도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먼 훗날 우리가 사랑한 거장으로 기억될, 우리가 사랑하는 영화인 봉준호에게도.
이들의 대화 속에서 7080년대 초기 시네필들이 한국에 영화제와 영화 학교 없음을 슬퍼하고 한탄했다는 말을 듣는데 격세지감을 느낀다. 그럼에도 영화를 꾸준히 사랑하고 공부하고 가까이 한 이들의 존재와, 90년대부터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 영화제들, 2000년대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왔는가’ 하는 평을 받았던 다양한 영화인들과, 산업이 커지고 대기업이 들어오고… 이제는 K-컬처라는 말조차 진부해진 세상에서, 이토록 커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파행 위기에도 놓였고 어떤 사건들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영화제와 영화가 계속된 것에 대해서, 생각한다.

꼭 생물체가 아니어도, 공동체에도 흥망성쇠가 있지만. ‘노란문’이라는 모임의 끝이 꼭 슬프기만 하지는 않았다. 영화 속 김민향 님의 말대로 시간이 지나도 기억하고 싶고, 시작이 되어주고, 그곳을 떠난 후에도 이어지는 길이 되어 준 곳이라면. 영화 속 사람들 중에는 여전히 영화인의 삶을 사는 사람도 있고, (“이 출연자 분들과 나는 세대가 다르다”고 연령의 선을 명확히 그으신 이혁래 감독님도 포함된다.) 영화가 아닌 다른 일을 하고 계신 분들도 많다. 그래서 더 좋았다. 그냥 모두 제각각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한때 어느 순간 같은 것을 미치도록 사랑했던 기억 있음이. 그 호시절을 간직하고 행복하게 돌아볼 수 있음이.
영화는 제작 과정에서도 대개 혼자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감상과 사랑에 있어서도 혼자 할 때보다 집단으로 할 때 더 행복한 일인 것 같다. 영화제는 집단의 경험 그 중에서도 정점에 있다. 영화제에서 같이 영화를 보고, 같은 대목에서 웃고, 사람들과 감상을 나누고, 가끔은 졸다 깨는 영화조차 어쩐지 아름답게 회상되고… 그래서 예산 삭감이라는 차가운 말이 걱정된다. R&D 예산조차 삭감된 세상에서 반 토막 나버린 영화제 예산을 누가 챙겨줄까 싶어 한숨이 나오면서도,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는 시간. 이 영화 끝에서 생각해 본다. 제각각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한때 어느 순간 같은 것을 미치도록 사랑하는 어느 순간. 그 순간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그러므로 영화제도, 영화도, 계속되어야 한다고.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2023.10.04-13) 상영시간표]
10월 06일 16:30 CGV센텀시티 6관 (090)
10월 08일 20:30 CGV센텀시티 5관 (243)
10월 11일 13:0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5관 (467)
*10월 27일 넷플릭스에도 공개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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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톺아보기] 김혜윤 배우 출연작 파헤쳐 보기!
안녕하세요!
영화/OTT 큐레이션 매거진 '씨네랩'입니다.
오늘의 톺아보기 주인공은 2000년에 개봉한 영화 리메이크작 <동감>에 출연할 예정이며,
오늘이 바로 생일인 배우인데요. 바로 배우 '김혜윤'입니다!!
그럼, 바로 김혜윤 배우의 필모그래피를 톺아보러 가볼까요?!
배우 '김혜윤' 프로필
ⓒ sidusHQ
이름 | 김혜윤
출생 | 1996년 11월 10일
소속사 | 싸이더스 HQ
데뷔 | KBS2 드라마 <TV소설 삼생이>
배우 '김혜윤' 데뷔 과정
ⓒ sidusHQ
배우 김혜윤은 중학교 때부터 배우의 꿈을 키워오다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배우를 준비했다고 한다. 2013년 KBS2 드라마 <TV소설 삼생이>로 데뷔 후, 약 50여 편의
작품에 단역으로 출연하며 연기 경력을 쌓았다.
배우 '김혜윤' 활동
ⓒ sidusHQ
데뷔 후, 2014년 드라마 <나쁜 녀석들>에서 시청자들에게 눈도장을 찍으며, 처음으로 언론사
와 인터뷰를 가지기도 했다. 2016년, 웹드라마 <전지적 짝사랑 시점>에서 소소하게 인기를
끌었으며, <SKY 캐슬>을 시작으로 많은 이들에게 이름을 알렸고,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배우 '김혜윤' 대표작
SKY 캐슬 - 강예서
ⓒ JTBC
배우 김혜윤은 공부에 있어서 항상 에너지가 넘치며 야망이 넘치는
명문 신아고 학생 역할인 '강예서' 역을 맡았다.
------------- 시청 가능한 OTT -------------
넷플릭스, 티빙, 디즈니+
새벽 - 선영
ⓒ 네이버 영화
합격이라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초년생 '선영' 역을 맡았다.
------------- 시청 가능한 OTT -------------
왓챠
어제 - 혜지
ⓒ 네이버 영화
김혜윤 배우는 영화를 찍는 취미를 가진 고등학생 역할인
'혜지' 역을 맡았다.
------------- 시청 가능한 OTT -------------
티빙, 왓챠
어쩌다 발견한 하루 - 은단오
ⓒ MBC
김혜윤 배우는 심장병을 가졌으며, 백경을 10년 동안 짝사랑한
만화 속 캐릭터 '은단오' 역을 맡았다.
------------- 시청 가능한 OTT -------------
웨이브, 왓챠
서정시작법 - 서정
ⓒ 네이버 영화
김혜윤 배우는 이상의 시를 좋아하고, 자신만의 세계가 견고한 인물로
백일장을 수상한 전학생 '서정' 역을 맡았다.
------------- 시청 가능한 OTT -------------
티빙, 왓챠
미드나이트 - 소정
ⓒ 네이버 영화
김혜윤 배우는 '종탁'의 하나뿐인 가족으로 모든 사건의 시작을 알리는
대학생 '소정' 역을 맡았다.
------------- 시청 가능한 OTT -------------
티빙
어사와 조이 - 김조이
ⓒ Tving
김혜윤 배우는 시대를 앞서 나간 현실주의자이자,
행복을 찾아 돌진하는 기별(이혼) 부인 '김조이' 역을 맡았다.
------------- 시청 가능한 OTT -------------
티빙
불도저에 탄 소녀 - 혜영
ⓒ 네이버 영화
김혜윤 배우는 거침없는 언행으로 건드리면 폭발할 것 같은 화 많은 성격을 가졌으며,
어린 동생과 집을 지키기 위해 온몸을 내던지는 '혜영' 역을 맡았다.
------------- 시청 가능한 OTT -------------
넷플릭스, 웨이브, 티빙
씨네랩 에디터 Hiz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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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틱, 틱... 붐! / Tick, Tick... Boom!, 2021
최근 개봉한 <돈 룩 업>을 보듯이 "CGV"에서 "넷플릭스"의 공개에 앞서 극장에서 개봉하는 협업을 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는데, 할인권과 뱃지까지 증정하니 마음 같아선 보고 싶지만 쪼들리는 지갑 사정과 빠듯한 시간은 포기를 강요하게 만드는데요..
그럼에도, <틱, 틱... 붐!>은 꼭 극장에서 만나고 싶었습니다. - 이어폰이 아닌 극장의 음향 시스템으로 이 "뮤지컬"을 영접하고 싶었습니다. (결국 그러지는 못했지만...)
'과연, 어떤 작품이었는지?' - <틱, 틱... 붐!>의 감상을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어느덧, 나이 서른을 앞둔 뮤지컬 작가 "조나단"은 자신의 역작 <슈퍼비아>의 설명회를 앞두고 있습니다.
좋은 일들이 한꺼번에 몰아치듯이 그에게 있어 중요한 일들이 몰아치는데요.
꼭 있어야 하는 노래는 떠오르지 않고, 여자 친구와의 사랑까지 "조나단"은 이 모든 것들을 쟁취할 수 있을까?시간은 그렇게 또 흘러간다.
1. 엥, 원래부터 유명한 작품인데?
먼저, <틱, 틱... 붐!>이 어떤 작품인지를 잠시 미뤄두고서 이를 연출한 '린-마누엘 미란다'라는 이름이 눈에 띄는데요.
그도 그럴 것이 최근 "넷플릭스"에 공개된 <비보의 살아있는 모험>처럼 그만큼 "뮤지컬"에 진심인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데요.
최근 극장에서 개봉한 <인 더 하이츠>부터 <메리 포핀스 리턴즈>, <모아나>까지 우리는 지금 "뮤지컬 그 자체"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죠.
그런 점에 <틱, 틱... 붐!>은 충분히, 관심이 갈만한 작품이었습니다. - 근데, 이 영화 원작이 따로 있더라고요.또 나만 몰랐나?
영화의 주인공 "조나단 라슨"은 뮤지컬 <렌트>의 작가입니다.
그렇기에 굳이, 이 작품이 아니더라도 "네이버"에 그의 이름을 검색하면 "어떤 작품을 만들었는지?"와 함께 그의 생애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점이 "전기 영화"를 보는데 맥을 빠지게 만드는데, 그렇다면 <틱, 틱... 붐!>은 '이를 어떻게 타개해야 하는지?"가 가장 큰 고민거리일겁니다.
그런 점에서 본 작품은 "뮤지컬"이라면 응당 나와야 하는 클리셰들을 활용해 관객들의 집중도를 확 잡아당깁니다.2. 유치하지않는 뮤지컬이 가능할까?
대개, "뮤지컬"을 보는 관객들이 가지는 선입견은 스토리가 유치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주인공들이 부르는 노래의 가사들이 캐릭터들의 심정을 옮겨 적은 것으로 직관적인 느낌이 강합니다.
여기에 군무 장면까지 더한다면, 손발이 오그라들다 못해 쪼그라들고 말 텐데요.
<틱, 틱... 붐!>에서도 이런 장면들이 나오지만, 이를 보는 관객들의 감정은 부끄러움이 아닙니다.
이런 이유에는 "앤드류 가필드"를 비롯한 주연 배우들의 연기도 있지만, 이를 보여주는 감독의 연출에도 있습니다.어떻게와 어떡해의 차이
이전 <할로윈>의 리뷰를 인용하자면, '필자가 생각하는 좋은 공포란 입가에 "어떡해"가 나오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중략) 뻔히 결과를 알고 있음에도 "어떡해"가 나오는다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성공적입니다.'라는 문장에서 보듯이 이에 몰입되어 조마조마한 감정이 오는 "물아일체"의 느낌이야말로 스토리의 완성도를 가늠케 하는데요.
그런 점에서 영화는 <틱, 틱... 붐!>이 진행되는 공연장과 <슈퍼비아>를 준비하는 두 가지 시간대를 제시해 전개되는데요.
특히, 감정이 몰아치는 장면에서는 두 가지 시간대를 교차해 빠르게 오버래핑하는데, 이 방법으로 감정 몰입을 좀 더 빠르게 휘몰아나갑니다.3. 장르를 뛰어넘는 공감과 연대감!
장르의 태생적 한계를 보완시킨 <틱, 틱... 붐!>의 고민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틱, 틱... 붐!>의 장르는 "뮤지컬"이니 관객들이 이어폰이 아닌 극장의 큰 스크린과 스피커로 보려는 건 작품만이 가진 매력적인 넘버들일 겁니다.
결과부터 말하면, 제목들이 떠오르지는 않지만 <틱, 틱... 붐!>이 보여주고 들려주는 장면들은 '극장이 왜, 있어야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악기들과 열리는 세트 무대까지 의도가 다분한 시퀀스부터 쿵쿵거리는 발소리로 만드는 즉흥 무대까지 영화는 공간의 크기를 가리지 않고 노래하고 관객들을 즐겁게 만드는데 도가 튼 작품입니다.그래도, 가장 큰 무기는 공감!
이렇게, <틱, 틱... 붐!>은 "뮤지컬"의 형식에 있어 가장 최상의 결과물을 만들어낸 작품이지만 가장 큰 무기는 "공감"이라 생각합니다.
극 중 "며칠 후에 나는 30살이 되고, 아직 이룬 것은 없다"라는 노래가 흘러나오는데요.
이는 이 글을 저도 마찬가지로 찐한 공감대 혹은 연대를 불러일으키는데, 여기에 잘나가는 친구들과의 비교까지 빠질래야 빠질 수밖에 없는 작품인데요.
이를 극장이 아니라 '갤럭시 노트 10'으로 보고, '버즈 2'로 들은 건 저에게 있어 이 상황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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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범한 몰락과 사소한 구원
이 글은 씨네랩에서 초대 받아 작성한 영화 시사회 리뷰입니다.
* 스포일러 주의
누구나 한번쯤은 처절한 비참을 경험한다. 더 내려갈 곳이 없다고 생각했는데도 비극은 해일처럼 밀려오고, 밑바닥이 없는 것처럼 끝없이 추락하는, 그런 우울한 날들을. 나 자신의 다른 이름이 패배자, 실패자인 것만 같은 그런 순간들. 그 내용은 제각기 다를 테지만, 어쨌든 '밑바닥을 찍는다'는 것은 꽤나 보편적인 경험이다. 그런 지극히 '평범한 몰락'의 한복판에 있을 때, 우울의 파도는 사람을 집어 삼키고 그는 언제나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된다. 더 나아질 길은 요원할 것만 같고 스스로의 무력함에 몸서리친다. 그러나, 그 비참이 우리의 마지막이 되지는 않는다. 밀물이 왔다면 썰물이 가는 법이며 고통스러운 우울이 지난 길에는 환희가 싹트기 때문이다.
물론, 운명이 우리에게 짊어지우는 과업들은 적지 않은 경우 혼자 힘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다. 설령 우리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버거운 비극은 우리의 눈과 귀를 가려서 그러한 힘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잊게 하곤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응달 밖으로 걸어나갈 수 있을까? 해답은 간단하다. 도움을 받는 것이다. 우리에게 우리 스스로 설 힘이 있음을 속삭여 줄, 아주 사소한 구원자로부터.
1. 어느 평범한 몰락
영화 <레슬리에게>의 주인공, 레슬리는 복권 당첨자다. 한순간에 일확천금을 얻었고 친구들과 메스컴은 이제 '팔자 펼' 일만 남았다며 축하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레슬리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그 막대한 돈으로 말미암아 행복을 살 수 있으리라 믿었다. 사랑하는 아들과 가게를 내겠다는 소박한 꿈도 손쉽게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짜릿한 행복 뿐일 것이라고.
그러나 손쉽게 얻은 돈은 손쉽게 떠났다. 술과 도박이 그를 장악했고, 그 손쉬운 쾌락을 쫒는 사이, 레슬리는 사랑하는 아들과 친구들마저 저버리고 말았다. 촌구석에서 난 '행운아'는 상종하기 힘든 '밑바닥 인생'으로 전락하는 것은 정말 순식간의 일이었다.
2. 구제 불능 알콜 중독자의 방랑
레슬리는 몇 년 동안 모든 것을 잃었다. 돈도, 사람도, 그 자신을 지탱하는 어떤 힘조차도. 현실은 비참했다. 술을 마시면 잠시라도 그 비참을 잊었고, 레슬리는 더더욱 그것에 매달렸다. 그것이 그를 망가트린다는 것을 그도 모르지 않았을테지만 그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그것에 길들여진 지 오래였으리라. 술을 끊겠다는 숱한 다짐은 그 자신의 충동으로 인해 깨지고 말았을 것이다.
갈 곳이 없고, 잘 곳도 없다. 그에게 남은 것은 아들과의 추억을 담은 작은 분홍 가방 하나 뿐.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장성한 아들을 찾지만, 그마저도 잘 풀리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는 기여코 고향으로 돌려보내진다. 그의 행운과 불행이 싹텄던 가장 원점으로.
3. 갈 곳 잃은 자를 구한 사소한 관심
고향 사람들은 레슬리의 몰락을 모두 알았다. 그가 얼마나 매력적이고 잘나가는 젊은이였는지를 아는 만큼, 그가 얼마나 형편없는 벗이요, 엄마가 되었는지도 모르지 않았다. 소위 '막나가는' 알콜 중독자에게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조소 뿐이다. 레슬리도 나아지고 싶지만 그게 쉽지 않다. 정신 차리고 보면 술을 사 마셨다. 얼큰하게 취하고 나면 그가 조금이나마 쌓아올린 것들이 무너져 내렸다. 마치 쳇바퀴 돌듯이.
고향 땅에서조차 부랑자 신세를 면치 못한 레슬리에게 손을 내민 것은 일면식도 없던 남자, 스위니였다. 친구와 함께 변변찮은 모텔을 운영하던 그는 충동적으로 레슬리에게 제안하고 만다.
"좋아요, 당신을 채용하겠어요. 일당은 7달러, 숙식도 제공하는 조건으로요."하고.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알콜 중독자에 부랑자이기까지 한 사람을 아무 조건 없이 채용하는 것은 그리 현명한 일이 아니다. 스위니도 그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레슬리를 채용했다. 차마 그를 내버려 둘 수 없었으므로. 어쩌면 그건, 스위니가 '자기도 모르게' 레슬리의 결함 너머에 있는 어떤 진실됨을 발견하고 말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4. 레슬리의 홀로서기
알콜 중독의 관성으로부터 벗어나려면 타인의 호의에만 기대는 습관을 벗어야만 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레슬리는 온갖 실수와 만행을 반복했다. 스위니는 그런 여자를 채용한 것을 수없이 후회했다. 둘 사이는 삐걱거렸다. 스위니의 구원은 얼마든지 무색해질 수 있었다. 다행히 레슬리는 변하고자 했고 스위니는 그런 그에게 다시금 기회를 주었다. 레슬리는 아들 제임스와의 행복했던 추억을 연료 삼아 오래도록 벗했던 술과 결별하고 소위 '착실한' 삶을 살고자 했다. 여전히 그를 둘러싼 시선들은 따갑고 매섭기 짝이 없었지만, 그래서 몇 번이고 그 지독스러운 술에 다시금 입 댈 뻔 했지만, 레슬리는 그럼에도 그 가시밭길을 나아갔다.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아들에 대한 절실한 애정과 그를 보통 사람처럼 대하는 스위니의 평범한 관심이었다. 레슬리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구했다.
레슬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까? 글쎄, 그것은 장담할 수 없다. 그는 이제 막 지옥으로부터 걸어나왔고 인생에는 언제나 부침이 있는 법이니까. 그러나 레슬리는 그것을 이겨낼 것만 같다. 그는 이제, 자기가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
<레슬리에게>는 마냥 우울하게 치달을 수도 있는 '알콜 중독자'의 이야기를 때론 덤덤하게, 때론 유머러스한 방식으로 풀어나간다. 영화 속 인물들은 아주 입체적이다. 완전한 악역도, 완전한 선역도 없는 그 세계는 우리의 세계의 한 부분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것만 같다. 인물들은 선을 베풀면서도 고뇌하고, 악을 행하면서도 그것을 정당화한다. 그리고 때때로 그것을 후회한다. 그런 것들이 반복되는 사이 그들은 무언가를 깨닫는다. 어떤 형식으로든 변한다. 카메라는 그런 사람들의 성장을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낸다.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명백하다. 누군가가 나락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아주 평범한 관심의 한 조각과, 그 관심으로 말미암아 일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 그 용기란 쉬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그 누군가의 재기는 더욱 눈부시다는 것. 이건 누구에게나 적용 가능한 교훈일 것이다.
혹시라도 당신 자신이 쓸모 없는 사람이라고 여겨진다면, 이 사실을 꼭 알아주길 바란다.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당신은 사실 꽤 괜찮은 사람'이다. 눈가리개를 풀고 당신 안을 들여다보라. 변화의 씨앗은 언제나 그 안에 있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걸 싹틔우는 것은 온전히 당신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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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으세요. 굶으면 구원받습니다.” 극단주의의 메커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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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사람이 집단 자살한 사건이 발생했다고 가정해보자. 그 배경에 대한 온갖 말과 추측이 난무할 것이다. 명확한 것은 그들이 죽었다는 사실뿐이니까. 사람들은 금세 혀를 찰 것이다. 파편화된 채 흩뿌려진 근거는 그 어떠한 경우에도 집단 자살을 할 만한 그럴듯한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죽은 자들은 곧 ‘극단주의자’, ‘정신이상자’ 등으로 불릴 것이고, ‘상식적인’ 사람들은 금세 그들을 잊고 일상으로 돌아갈 테다. 그러나 그리 간단치가 않다. 집단 자살에 동참한 사람 중 그들처럼 ‘상식적인’ 사람이 포함되어 있다면? ‘상식적인’ 사람을 정신적으로 취약하게 만들어 위험한 신념을 품게 하는 메커니즘이 존재한다면? 죽은 자들을 ‘이상한’ 사람으로 성급히 단정 짓는 일은 왜 그들이 그런 선택에 이르렀는지 질문할 기회를 박탈한다. 〈클럽 제로〉는 상상력을 발휘해 왜 누군가가 극단주의의 강력한 추종자가 되는지, 그 과정은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질문한다. 다양한 형태의 극단주의가 난립하는 요즘 시대에 긴요한 상상력이다.
상류층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학교에 노백이 영양교사로 임명된다. 노백은 늘 끝까지 단정하게 단추를 채운 카라티를 입고 다니며 흥분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한다. 옷차림부터 언행까지, 노백이 특정한 형태의 완벽주의/극단주의의 상징임이 암시된다. 그는 다양한 이유로 식이법을 고민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수업을 개설하고, 그들에게 ‘의식하며 먹기’를 제안한다. 처음에는 심호흡하며 먹기 등의 간단한 요법만 제시하던 노백은 점차 식사량을 줄이고 마침내는 아무것도 먹지 않음으로써 얻게 될 자유를 설파한다. 학생들을 자신의 신념에 동참시키기 위해 노백이 사용하는 기술들은 기묘하고 절묘하다. 이런 유의 얼토당토않은 극단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참고할 만하다.
먼저 학생 개별에 밀착하여 각자의 사연에 맞는 계몽을 제공한다. 그리고 그들을 주체로 호명한다. 호명은 주체화의 조건이다. ‘너는 새로운 식이법의 주인공이야’라는 속삭임은 자기 쓸모와 미래를 고민하는 인간의 내면을 파고든다. 방황하는 인간이 갖기 어려운 주체로서의 역능과 효능감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주체성의 토대가 마련되면, 그에 반하는 행동(즉, 먹기)에 죄책감을 느끼게끔 한다. 힘에 부칠 때는 의지로 돌파해야 한다고 북돋는다. 이탈자나 회의자가 생기기도 하지만 지속적인 계몽으로 이것이 자유를 향한 고난의 길임을 강조한다. 당연하게도 기성 사회의 상식에 반하는 가치, 즉 진정한 자유의 추구에서 과학적 사고는 거부된다. ‘옳은 일’에는 과학 따위가 들어설 곳이 없다.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신념을 잘 따라오는 자에게는 포상이 주어진다. ‘클럽 제로’라는 비밀 조직에 입회할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클럽 제로 입회가 자유를 성취했다는 증거라는 사고의 연결고리가 형성된다. 비밀 임무를 주어 내부자들의 결속과 소속감을 다지기도 한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선민의식을 낳는다. 진짜 자유를 아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에 위계가 생기는 것이다. 같은 신념을 가진 사람들끼리 총화總和하면서는 서로의 어려움을 나누고 신념을 재확인한다. 내부 구성원 이외의 관계망을 약화시키거나 끊는 건 필수다. 이 영화에서는 자녀의 거식拒食을 걱정하는 부모가 그 관계망의 핵심이다. 부모의 애정 어린 간섭의 의미를 자유에의 훼방으로 뒤바꿔놓는 것이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조차 구성원 간 신념의 차이는 존재한다. 그러나 이제는 그 누구도 이 신념 공동체를 완전히 이탈하지 못한다. 먹지 않아 쓰러지는 친구 옆에서 몰래 먹으며 눈치를 볼 뿐이다. 구성원들에게 이 신념 공동체에서 이탈한다는 것은 곧 사회적 사망 선고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사람들의 눈에 띄는 건 이때다.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부모, 학교 당국이 논의를 시작하지만 이미 늦었다. 노백을 해고해도 아이들은 바뀌지 않는다. 그의 신념은 아이들에게 이미 깊숙이 새겨졌다. 식이법에 대한 학생들의 간절함에서 시작된 노백의 극단적 신념 공동체는 그들이 클럽 제로 입회 후 ‘위대한 길’로 갔다는 말과 함께 사라지는(혹은 ‘구원’받는) 사건으로 마무리된다. 그 아이들이 정말 ‘낙원’으로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가족‧학교에 머물며 만들어갈 미래가 사라졌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부모와 학교(사회)는 진작 더 촘촘하게 아이들(구성원)의 마음을 살폈어야 했다.
노백이 아이들을 휘어잡는 과정의 서스펜스 강도가 더 높았다면 좋았겠다 싶다. 그러나 동시에 바로 여기서 영화 속 극단주의와 우리 주변의 극단주의를 면밀히 비교해볼 적당한 비평적 거리가 생기기도 한다는 점은 감안될 필요가 있다. 개인적으로 ‘극단적 신념 공동체’의 일원이었던 적이 있던(지금도 그럴지도 모르지만) 사람으로서, 영화는 적당한 객관화의 계기가 되어주기도 했다. 극단적 신념의 메커니즘을 미스터리 장르로 버무려내는 시도는 장르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유의미한 일이다. 그러나 끝끝내 남는 질문도 있다. 어떠한 극단적 신념이 정말 옳은 것이라면? 그 신념으로 부조리한 세계를 뒤집어 자유를 얻을 수 있다면? 역사는 때때로 극단주의가 옳았음을 증명한다. 때문에 ‘극단주의’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무엇이 ‘좋은’ 극단주의인지를 감별하는 안목과 구성원이 ‘나쁜’ 극단주의에 거리를 둘 수 있게끔 하는 사회의 자정 능력이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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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과 동시에 펼쳐지는 밀실의 공포
개봉 당시 로튼 토마토 신선도 99%라는 이름으로 유명했던 영화였던 ‘겟 아웃’. ‘놉’이 개봉한다는 소식에 미루고 있던 조던 필 감독의 ‘겟 아웃’을 보게 되었다. 충격적이고 소름 끼치며 공포를 넘어선 놀라움이라는 말로 포스터가 장식되어 있는 이 영화는 직접적인 공포보다는 소름 끼치는 스릴러에 가까운 영화다. 인종차별을 필두로 가히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눈을 뗄 수 없게 곳곳에 복선을 깔아두고 있다. 어떤 무서움보다 더 무서운 인간의 욕망이 펼쳐질 이 곳은 ‘겟 아웃’ 이다. 흑인인 크리스와 백인인 로즈는 연인 사이이고 로즈의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간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로즈의 집, 직접적인 인종차별은 아니었지만 걱정했던 대로 여러 곳에서 묻어나는 편견들로 인해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이상한 점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지만 애써 무시하며 로즈와 함께하는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던 중 어딘가의 밤에 빠져든다. 꿈같은 순간에서 빠져나온 크리스는 집에 빠져나가고 싶어 하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은 순간들을 맞이하게 된다. 백인 손님들로 가득한 파티에서 크리스는 관심의 중심이 되고 흑인 손님에게는 흑인 특유의 문화를 느낄 수 없어 더욱 혼란스러운데, 카메라를 꺼내 들면서 크리스의 혼란은 더욱 커진다. 그가 겪는 이 모든 것은 어디에서 온 걸까.
처음 이 영화를 접했을 때, 사실 예고편도 보지 않았다. 공포 영화에 대한 흥미를 느끼지 못하기도 했고 진부한 결말이 다가오지 않을까 하는 내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을 모두 부수고 들어오며 어떤 장면도 지나칠 수 없게 만들었다. 겉보기에 사라진 편견들이 어떻게 곳곳에 파고들어 있는지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해 드러내고 영화 자체에서도 소름끼치는 요소들로 펼쳐내는 마법을 펼친다. 특히 영화를 보고 나서 알게된 보이는 존재들에 의한 욕망으로 인해 더욱 몸서리 쳐진다. 무서운 장면들 없이도 무서울 수 있는 이 영화를 만나고 싶다면 추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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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레스와 그로밋: 복수의 날개
세상이 다 미워질 때가 있다. 나에 대한 자책이 과해지고, 그에 따라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리액션을 해주어야 할지 모르겠을 때가 있다. 말하자면, 아주 약한 번아웃이었을 수도 있고, 그냥 짜증이 반복되어 지쳤던 것일 수도 있다. 모든 것이 다 귀찮아질 때, 병원을 가는 게 좋을 수도 있지만 나는 그럴 때마다 나에게 한 번씩 처방을 내린다. 과거의 해맑았던 내가 봤을 법한 영화로 다시 회귀하곤 한다. 정작 회귀를 실행할 때는 몰랐다가 그 시기를 지나고 생각해보면 그 시기 내가 참 우울했구나 생각하곤 한다. 최근에도 그런 폭풍우가 한 번 지나갔는데, 그 때 나는 나의 어린시절에 항상 함께했었던 애니메이션 '월레스와 그로밋'을 봤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며, 새로운 시즌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현실을 잠시 잊기 위해서, 잠시 생각을 환기시키기 위해서
1. 언제쯤 사고를 안 치실 예정이십니까, 월레스
항상 느끼던 바였지만 이번에도 가장 큰 빌런은 월레스였다. 모든 시즌에 악역들이 등장하곤 했지만 나는 이 애니의 가장 큰 빌런은 월레스라고 생각한다. 어쩜 저렇게 캐릭터가 맹할 수 있을까. 사람도 너무 잘 믿고, 너무 머릿속이 꽃밭이다. 항상 그로밋을 하대하는 것도 사실 조금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리고 꼭 사건이 터지면 하대하던 그로밋의 도움을 꼭 받고 나서야 그로밋의 소중함을 깨닫는 금쪽이가 따로없다. 이번에도 역시나 원흉은 월레스였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미워할 수 만은 없어서 여전히 월레스가 정상적으로 살아가기를 바라게 되는데, 기계에게 점령당한 삶을 살다가 강제로 아날로그의 삶을 살게 된 그가 버벅대는 걸 보는 것도 나름 하나의 오락적 요소였다. 월레스를 보고 있자면, 기계에 잠식될 현대 인간의 미래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핸드폰을 포함한 기타 기계들에게 점점 삶을 의지하고 있다. 지식을 찾아볼래도 백과사전을 찾아볼 바에 인터넷 검색을 하는 것이 더 편해진 세상에서 월레스가 차 하나 제대로 못 우리는 건 우스워보여도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나도 곧 저렇게 되려나 생각해보게 되었다.
2. 그로밋이 월레스에게 충성하는 이유가 뭘까.
보다보면, 월레스는 그로밋의 주인이지만 사실은 그로밋이 월레스를 케어한다. 모든 수상한 낌새는 그로밋이 다 채고, 가끔 자기 뽕에 취해 그로밋을 무시하기도 하는 월레스의 단점을 다 이해하는 그로밋의 마음은 무엇일까. 항상 그로밋은 도움을 주는 포지션에 있을 뿐, 그로밋의 속마음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그로밋에게는 그 어떤 대사도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시즌을 보면서 그로밋이 월레스에게 충성하는 이유가 뭘지 궁금해졌다. 그저 자신을 친구로 인정해준 고마움 때문인가, 아니면 월레스를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처럼 보는 걸까. 확실한 건 월레스는 그들이 친구 관계를 가장한 주종 관계라고 주장하고 싶겠지만 사실은 그들은 그냥 서로가 없으면 안되는 관계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월레스는 그로밋이 없으면 안되는 건 누가 봐도 알겠지만 그로밋은 월레스가 꼭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지 대사로 표현된 바가 없어 그저 추측만 할 뿐이다. 자신을 친구라고 생각해주는 월레스가 가끔 사고는 치고 다녀도 '사람은 착하다'는 마인드로 케어하는 것일까 싶었다.
세상이 다 나를 싫어하는 것 같을 때, 가끔은 행복했던 내 과거로 회귀하는 것도 현실 도피로 나쁜 선택은 아니다. 어렸을 때 내 자신을 보면서 잠시 추억에 잠겼다가 킬링타임으로 봐야 할 내용을 가지고 그로밋이 월레스에게 충성하는 이유까지 생각해보며 딴 생각에 빠질 수 있어서, 그렇게 잠시 즐거울 수 있어서 좋았다. 이래저래 불평불만이 많았지만 나는 그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또다른 미래에 내가 지쳤을 때, 나를 위로해주는 시리즈로 남아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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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과 함께2 인과 연, 존버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 영상엔 스포일러가 아주아주 가득합니다!
** 영화에 대한 '무분별한' 비하나 비난의 의도는 없습니다.
신과 함께2 : 인과 연이 개봉했습니다.
1편에선 신파 함께로 실컷 놀림 받았는데,
2편은 뜬금없는 쥬라기월드와 존버로 기억되진 않을까 걱정됩니다.그래도 이 영화는 성공할 겁니다.
그리고 3편이 나올...#신과함께인과연 #패러디 #신과함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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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잔하면서도 아름다운 청소년 성장드라마 / 너의 색 / 사람의 색을 보는 아이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너의 색" 후기입니다.
*볼만한 쿠키영상이 엔드크레딧과 함께, 그리고 다 끝나고 1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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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나쁜 녀석들: 라이드 오어 다이> 145초 무삭제 예고편
함정에 빠진 나쁜 녀석들!? 용의자가 된 녀석들의 짜릿한 액션 수사가 시작된다!? [나쁜 녀석들: 라이드 오어 다이] 145초 무삭제 예고편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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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사보타지 1941> 메인 예고편
행복한 미래를 꿈꾸던
10대 소녀 ‘조야’
어느 날, 그녀는 전쟁에 참여했던
사랑하는 남자 ‘진’의 죽음을 알게 되고
자원입대로 사보타주 대원이 된다.
하지만 작전을 수행하던 중
나치군에 붙잡히게 되는데…
그들에게 결코 굴복하지 않은
‘조야’의 역사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