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3-10-09 14:56:15
[BIFF 데일리] 우리가 사랑한, 우리가 사랑할
영화 <노란문: 시네필 다이어리> 리뷰
Director] 이혁래
Program note]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봉준호 감독의 첫 단편 <룩킹 포 파라다이스>를 본 이들은 ‘노란문 영화연구소’의 멤버 십여 명뿐이다. 어둡고 더러운 지하실의 고릴라가 똥벌레의 공격을 피해 낙원으로 향하는 이야기의 이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은 청년 봉준호가 속해있던 ‘노란문’의 송년회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이후 30년간 오동나무 상자에 담겨 봉준호의 서재에 깊숙이 숨겨져 있던 8mm 필름 상자가 열리자 90년대 초 시네필들의 추억도 와르르 쏟아진다. “다들 미친 듯이 영화 공부를 하던” 영화광 시대에 ‘노란문’은 그들만의 시네마테크이자 영화학교였고 무엇보다 이상적인 청년공동체였다. <노란문>은 한국 영화 문화의 르네상스를 여는 아주 특별한 시대에 대한 꼼꼼하고 생생한 보고서다. 깨알 같은 일화들 속에 영화사 걸작들의 클립을 보는 즐거움은 덤이다. (강소원)

갑작스러운 고백. 사실 나는 ‘라떼 토크’ 듣는 것을 꽤나 좋아한다. 누군가의 호시절 이야기는 언제나, 지금으로서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의 아련한 반짝거림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야기 듣는 걸 좋아하는 건 사람의 본능이므로, 나 같은 사람이 꽤 많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람들이 ‘라떼 토크’를 싫어하는 이유는 그게 옛날 이야기라서가 아니라, 그 안에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그러니 내 말을 들어라)’ 식으로, 현 세대를 향한 은은한 책망이 묻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므로 은은한 책망도 기묘한 질투도 서리지 않은, 순수하게 호시절을 그리워하는 이야기는 누구나 마음 편히, 아름답게 들을 수 있는 거니까.
하물며 지금도 빛나는 이들이 열심과 야심으로 똘똘 뭉쳐 있던 시절의 이야기라면, 탐나지 않을 길이 없다. (GV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감독 인사 영상 대신 나온 봉준호 감독의 영상에서도, ‘부럽습니다’라는 말이 몇 번이나 튀어나왔다. 이 감독과 이 영화의 의의를 관객에게 짚어주고 ‘노란문’에 대한 아득한 그리움을 분명히 알뜰살뜰 챙겨 말했건만, 체감하기론 ‘부럽습니다’만 듣다 끝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영상이었다.
<노란문: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는 <미싱타는 여자들>을 공동 연출한 이혁래 감독의 작품인 동시에, 10월 27일 공개될 넷플릭스 다큐멘터리이기도 하다. 봉준호 감독을 비롯한 ‘그 시절 시네필’들이 대거 출연하는 영화, ‘청년 봉준호’를 엿볼 수 있는 영화에 수많은 영화 팬들의 티켓팅 경쟁이 몰릴 것은 자명했다. 감독의 전작을 인상 깊게 보았지만 티켓팅에 취약한 나로서는 일찌감치 물러나 넷플릭스 공개를 기다리는 것도 좋은 방법일 터였다. 그러나 어영부영 티켓이 잡혀서 영화를 보았는데, 보면서 깨달았다. 이 영화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보아야 더 좋을 수밖에 없는 영화구나.
https://www.youtube.com/watch?v=ZHMHMl83JI8

영화는 봉준호 감독뿐 아니라, 이미 중년이 된 다양한 이들의 얼굴을 담았다. 영화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냥 모여 들었던, 카메라의 작동 원리도 모르는 상태로 모여 초점 나간 사진을 찍으면서 시작했던, 젊고 보송했던 얼굴들. 그냥 서로서로 가르치고 배우고, 그냥 즐겁게 모여서 그러는 게 자연스러웠던 시절. 원대한 목표와 계획을 차르르 펼치는 게 아니라 모여서 뭐라도 거창하게 해보았던 시절.
빛나는 시절은 그 빛을 스스로 몰라야 완성이 된다. ‘나는 이렇게 빛나고 있지’라고 인지하면서 빛나는 시절은 없다. 내가 ‘라떼 토크’를 좋아하는 이유도 하나 더 깨닫는다. “그냥 좋아서” 만난 이들의 그 시절 이야기는, 그냥 좋다는 바로 그 이유로 더없이 빛난다는 걸. 에너지를 미친 듯이 분출할 수 있는 건 젊은 시절의 특권이고, 그렇기에 어떤 노래 가사처럼 ‘한 밑천’이며, 또 다른 노래 가사처럼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니까.
이들은 영화를 의식적으로 공부해 영화계에 들어선 영화인으로는 한국에서 거의 첫 세대다. 장산곶매를 비롯한 다양한 시네필 모임들이 영화를 공부하고, 상영하고, 만들고… 여기에는 비디오 문화라는 기술이 있었다. (같은 맥락에서, 지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상영된 <일시정지> 혹은 최근 개봉한 <킴스 비디오>를 떠올리게 되기도 한다. 같이 묶어 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 지금처럼 OTT나 유튜브로 영화를 보는 시절이 아니라, 서로 알음알음 복제한 비디오를 통해 영화를 보는 시절. 다시 말해 영화를 본다는 행위가 타인과의 교류 없이는 어렵던 시절.

물론 이들의 영화 사랑이 기술에만 기인하지는 않는다. 극중에서도 봉준호 감독은 “덕후의 원동력은 집착”이라며 눈을 빛내고, 이들은 집요하게 롤랑 바르트, 기호학, 포스트모더니즘, 그놈의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같은 것들에 열중한다. 지금 돌아보면 “거창했네요”, “뭐가 이렇게 거창했어” 소리가 저절로 나올 만큼, 과도한 진중함이 조금은 우스워 보일 수도 있다. 잘 모르기에 더욱 무겁고 거창하게 말할 수 있는 시기의 사랑이란 것이 있다. 젊은 서툶에 기인하기에 더욱 무거운 언어를 사용하는, 아주 조금 지난 후에 보면 수치스럽고, 아주 오래 지난 후에 보면 그조차 정겹고 사랑스러운.
봉준호 감독이 아르바이트비를 털어서 샀다는 첫 장비의 긴장과 기쁨과 설렘. 그 장비로 소중하게 남긴 기록들. 힘들게, 처음으로 만든, 그걸 보여준 시절이 있었다. 귀 밑까지 빨개질 만큼 긴장해서, 상영되는 내내 뒤에 숨어 있어야 했던 기록이. 누구에게나 처음이 있다. 이들이 사랑한 거장들에게도, 영화 중간중간 나오는 위대한 대작을 만들어낸 거장들에게도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먼 훗날 우리가 사랑한 거장으로 기억될, 우리가 사랑하는 영화인 봉준호에게도.
이들의 대화 속에서 7080년대 초기 시네필들이 한국에 영화제와 영화 학교 없음을 슬퍼하고 한탄했다는 말을 듣는데 격세지감을 느낀다. 그럼에도 영화를 꾸준히 사랑하고 공부하고 가까이 한 이들의 존재와, 90년대부터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 영화제들, 2000년대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왔는가’ 하는 평을 받았던 다양한 영화인들과, 산업이 커지고 대기업이 들어오고… 이제는 K-컬처라는 말조차 진부해진 세상에서, 이토록 커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파행 위기에도 놓였고 어떤 사건들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영화제와 영화가 계속된 것에 대해서, 생각한다.

꼭 생물체가 아니어도, 공동체에도 흥망성쇠가 있지만. ‘노란문’이라는 모임의 끝이 꼭 슬프기만 하지는 않았다. 영화 속 김민향 님의 말대로 시간이 지나도 기억하고 싶고, 시작이 되어주고, 그곳을 떠난 후에도 이어지는 길이 되어 준 곳이라면. 영화 속 사람들 중에는 여전히 영화인의 삶을 사는 사람도 있고, (“이 출연자 분들과 나는 세대가 다르다”고 연령의 선을 명확히 그으신 이혁래 감독님도 포함된다.) 영화가 아닌 다른 일을 하고 계신 분들도 많다. 그래서 더 좋았다. 그냥 모두 제각각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한때 어느 순간 같은 것을 미치도록 사랑했던 기억 있음이. 그 호시절을 간직하고 행복하게 돌아볼 수 있음이.
영화는 제작 과정에서도 대개 혼자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감상과 사랑에 있어서도 혼자 할 때보다 집단으로 할 때 더 행복한 일인 것 같다. 영화제는 집단의 경험 그 중에서도 정점에 있다. 영화제에서 같이 영화를 보고, 같은 대목에서 웃고, 사람들과 감상을 나누고, 가끔은 졸다 깨는 영화조차 어쩐지 아름답게 회상되고… 그래서 예산 삭감이라는 차가운 말이 걱정된다. R&D 예산조차 삭감된 세상에서 반 토막 나버린 영화제 예산을 누가 챙겨줄까 싶어 한숨이 나오면서도,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는 시간. 이 영화 끝에서 생각해 본다. 제각각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한때 어느 순간 같은 것을 미치도록 사랑하는 어느 순간. 그 순간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그러므로 영화제도, 영화도, 계속되어야 한다고.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2023.10.04-13) 상영시간표]
10월 06일 16:30 CGV센텀시티 6관 (090)
10월 08일 20:30 CGV센텀시티 5관 (243)
10월 11일 13:0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5관 (467)
*10월 27일 넷플릭스에도 공개 예정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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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사를 이끌어 가는 대화
<우연과 상상>은 <드라이브 마이 카>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신작이자 세 편의 단편을 엮어 만든 소품같은 영화다. 걸작임에도 러닝타임이 길고 등장인물이 많아 관객을 부담스럽게 만들었던 전작과는 달리 <우연과 상상>은 두 시간여의 적당한 러닝타임에 편당 주요 등장인물의 수가 세 명을 넘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줄어든 등장인물의 자리를 꿰찬 것은 이들이 나누는 대화다. 이들의 대화는 때로는 독백의 형태로, 때로는 낭독의 형태로, 때로는 상황극의 형태로 발현되어 우연을 드러내거나 상상을 이끌어 낸다. 보다 스케일도 크고 로케이션도 다양했던 전작과는 달리 <우연과 상상>은 등장인물 수도 적고 배경도 한정되어 있지만 이들의 대화를 통해 밝혀지는 진실은 <드라이브 마이 카> 못지 않게 흥미진진하다. 세계의 주목을 집중시켰던 <드라이브 마이 카>보다는 감독의 초기작 중 하나인 <열정>의 전개 방식에 <해피 아워>의 서사를 담은 것만 같은 <우연과 상상>은 하마구치 감독의 초심을 담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마구치 감독은 어째서 복잡한 비유나 상징을 이용하는 대신 직설적인 발화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을 택했을까.
영화 언어에서 발화 언어를 통한 서사 전개는 촌스러운 방식으로 여겨진다. 직접성보다는 간접성을 통해 수용자의 다양한 해석을 이끌어내는 예술은 정답을 이끌어낼 여지가 있는 직설적인 표현을 꺼려한다. 아예 언어가 배제되는 회화나 무용의 경우는 색감이나 예술가의 신체 등 다양한 표현을 사용하지만 발화 언어를 사용할 선택지가 있는 영화 예술은 이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예술성을 평가받기도 한다. 대사에 복잡한 비유와 상징을 담아 직설성을 배제하기도 하지만 대개 발화 언어는 직접적인 표현 방법에 쓰인다. 특히 상대적으로 대중성을 담보로 하는 예술인 영화는 대사를 알쏭달쏭하게 꼬는 대신 관객에게 정보를 전달하거나 의미를 함축하더라도 직접적인 의미 전달과 간접적인 의미 함축이라는 두 역할을 수행하게끔 만들곤 한다. 이는 추리물을 포함한 반전 서사에서 가장 두드러지는데 관객에게 반전의 충격을 안겨주려면 간단한 대사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반전 영화에서는 플래시백으로 시각적인 효과를 노리더라도 나레이션을 사용해 관객에게 충격을 안겨준다.
<우연과 상상>은 소소한 반전을 품은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플래시백이 전혀 없다. 등장인물들은 현재 시점에서만 존재하며 과거의 이야기는 전부 대사로 관객에게 전달된다. 플래시백을 영화 기법에서 제외하는 경우 관객은 한가지 의문을 품을 수 있다. 등장인물들이 하는 대사는 전부 진실에 기반하는 것인가? 3화 「다시 한번」에서 아야(카와이 아오바 분)의 입을 통해 드러나는 반전은 아야만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관객은 아야의 말에 의구심을 느끼지 않는데 그 이유는 아야가 드러낸 진실이 진실인지 아닌지가 크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연과 상상>의 대화들은 내용의 진실성에 크게 구애받지 않으며 관객이 느끼는 감정에 충실하다. 대개는 즐거움인데 대화가 <우연과 상상>을 한층 좋은 영화로 만들어주는 이유는 정작 대화를 나누는 등장인물들에게는 진지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우연과 상상>은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명언을 그야말로 충실하게 수행한다고 볼 수 있다.
첫 에피소드인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은 퇴근길 택시에 합승한 메이코(후루카와 코토네 분)와 츠구미(현리 분)의 대화를 오래도록 보여주지만 대화의 내용은 한 줄로 요약이 가능하다. 츠구미가 새로운 남자를 만났고 마음이 잘 통하는 사람이라는 것. 중요한 것은 이 대화 직후에 이루어진다. 메이코는 택시에서 내려 어딘가로 향하고 그 곳은 바로 츠구미가 만난 남자 카즈아키(나카지마 아유무 분)가 일하는 곳이다. 카즈아키와 이코는 역시나 긴 대화를 이어가지만 대화의 내용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메이코가 이 장소를 떠나는 순간이 되어야 중요한 사건이 벌어진다. 카즈아키가 메이코를 따라가지 않는 것이다. 첫 에피소드에서 대화는 많은 것을 알려주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인물들의 행동 사이에 존재하는 배경으로 작용할 뿐이다. 이 에피소드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대화가 거의 들리지 않는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다. 그리고 카즈아키가 대화를 할 수 있는 유리창 내부의 공간으로 이동했을 때 발생하는 대화는 주로 메이코의 머릿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첫 에피소드는 대화를 낭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대화를 인물들의 행동을 연결하는 매개체로 혹은 맥거핀으로 유연하게 사용한다.
두번째 에피소드인 「문은 열어둔 채로」에서 관객의 시선을 가장 오랫동안 붙잡아두는 발화 언어는 나오(모리 카츠키 분)가 세가와 교수(시부카와 키요히코 분)의 책을 낭독하는 부분이다. 상당히 오랜 시간 일부러 민망한 부분을 골라 낭독하는 나오의 목소리는 관객으로 하여금 웃음을 유도하지만 동시에 세가와 교수가 보이는 반응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도록 만든다. 민망해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멈추게 하거나 화를 내지 않으며 낭독을 듣는 세가와 교수는 이 낭독을 즐기는 것일까 아니면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일까. 문을 닫으려는 나오의 행동만을 저지하며 긴 낭독을 듣고 나오의 고민상담을 해준 세가와 교수는 나오로부터 사건의 전말을 듣고서야 당황한 모습을 보인다. 나오의 질문에 대한 세가와 교수의 대답은 일반적으로 관객이 생각하는 것과 다른 방향으로 흐르며 관객에게 쾌감을 안겨준다. 하지만 이들의 대화가 무용지물이었다고 말하기라도 하듯 이 에피소드의 결말 또한 전혀 다른 곳으로 향한다. 특히 가장 충격적인 결말은 나오의 발화가 아닌 오타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2화 또한 대화를 훌륭한 매개체로 활용했다고 볼 수 있다.
대화를 발화 언어의 목적 그 자체에 가장 충실하게 활용한 에피소드는 3화인 「다시 한번」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에피소드의 가장 큰 반전은 아야의 입을 통해 전달되지만 아야와 나츠코(우라베 후사코 분)는 결론적으로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나츠코를 자신의 집에서 대접하며 오랫동안 이야기를 이어가던 아야는 사실 대화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 어떤 정보를 알아내려고 했던 것임이 드러난다. 반면 대화 자체가 목적이었던 나츠코에게 이는 충격으로 다가오는데 이후 대화를 이어가려고 하는 쪽은 나츠코가 아니라 아야다. 관객에게 가장 큰 충격을 전달하는 것은 이후 이어지는 대화를 통해 드러나는 진실이지만 서사를 마무리짓는 것은 폭로 이후에 이어지는 상황극이다. 특히 아야가 나츠코를 배웅하며 역 앞의 육교에서 벌이는 상황극은 대사는 상황극일지언정 두 캐릭터의 감정만큼은 진실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이 에피소드에서도 대화는 아야와 나츠코의 과거를 들려주고 스스로를 힐링하는 수단으로 기능한다(실제로 심리 치료에도 사이코드라마라는 비슷한 기법이 활용되기도 한다).
그다지 변화가 없는 배경, 적은 수의 등장인물을 가지고 대화만으로 흥미로운 서사를 이끌어 냈지만 사실 대화가 서사를 잇는 매개로서 작동한다는 점에서 <우연과 상상>은 영화 예술에서 대사의 활용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굳이 어려운 비유와 상징을 사용하지 않아도, 혹은 대사 없이 이미지로만 보여주려 하지 않아도 대사는 영화에서 많은 역할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하마구치 감독이 증명해낸 셈이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 비하면 소소해 보이는 영화지만 <우연과 상상>은 초심으로 돌아간 감독이 관객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안겨준다.
*본 리뷰는 씨네랩의 시사회에 초청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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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루엘라 (2021)
*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주인공이 필요하다.” 영화를 소개하는 이 문장처럼, 영화 <크루엘라>의 주인공은 디즈니가 다룬 과거의 순수하고 결백하며 완전하게 선하기만한 주인공들과는 다르다. 영화 <크루엘라>는 디즈니가 자사의 작품인 <101 마리의 달마시안개>에서 달마시안의 모피를 호시탐탐 노리는 악역 크루엘라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이전 작품과의 접점은 많지 않아 보인다. <크루엘라>는 전작의 악역인 크루엘라라는 캐릭터의 설정을 그대로 쓰되 캐릭터를 재해석한 작품이라고 하는데, 전작을 기억하지 못하는 입장에선 전작과의 연결고리가 어찌되었든 별로 신경쓰지 않고 봤다. 전작에 대한 사전지식 없이 봐도 영화 <크루엘라>는 전체적인 완성도가 높고, 굉장히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작품이다.
악당을 잡기위해 악역이 된다는 설정이나 복수담과 성장담을 담은 스토리, 주인공의 출생부터 시작되는 순행적인 플롯. <크루엘라>의 전반적인 이야기는 평이한 편이다. 특별히 부족한 점도, 특별히 뛰어나다고 말할 부분 역시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가치없는 영화라는 의미는 아니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스토리를 전달하는 방식에 있다. 과감한 컷연출과 엠마 톰슨과 엠마 스톤의 불꽃튀는 대립구도, 1970년대의 런던, 러닝타임 내내 쉴새없이 파괴와 혁명을 부르짖는 헤비메탈과 락 사운드의 음악들, 크루엘라가 자신의 개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에 적합한 창조적 파괴의 펑키룩, 부담스러울 정도로 과격하고 파괴적인 영상이 이어지는 가운데, 중간중간 피로를 풀어주기 위해 가미된 깨알같은 개그코드까지. 영화를 구성하는 절대 다수의 컷들이 높은 밀도를 갖고 있는 영화로, 그 과함탓에 피로를 느낄수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꽉찬 영상으로 거침없이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이 영화에 가장 어울리는 방식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속박하는 금기라면 얼마든지 깨부수고, 한껏 열망하라.
선악과를 먹지 말란 금기를 어긴 아담, 아벨을 죽인 카인 등. 예로부터 죄의 낙인은 언제나 금기를 어긴 자들에게 주어졌다. 영화 <크루엘라> 또한 수많은 금기(-을 하지말라)를 받는 인물이지만, 동시에 거의 모든 금기(맨 마지막, 바로네스를 죽여선 안된다는 금기는 깨지 않았다)를 깨는 인물이다. 이 영화에서 금기를 깬다는 것은 에스텔라에겐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에선 그녀를 빌런(악당)으로 만드는 모순적인 행위이기도 하다. 금기를 깨고 자신이 열망하는 것을 추구하는 작중 주인공인 크루엘라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그 중 하나.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금기를 깨는 인물로서 크루엘라가 이 영화속에서 보여주는 가장 결정적인 장면은 늦은밤, 리버티 백화점 점장의 사무실을 청소하는 크루엘라가 술을 발견하고 술을 들이키고 취기에 쇼윈도를 꾸미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내겐 아담이 선악과를 따서 먹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크루엘라는 금기된 장소에서 탐해선 안될 것(리버티 상표가 붙은 와인)을 기꺼이 탐한다. 금기를 깨트린 그녀에겐 분명히 죄인의 낙인이 찍히게 될 것이고, 그 이유로 그녀는 빌런으로 불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에스텔라는 사회가 정해놓은 금기를 깨서라도 세상이 정해놓은 자신의 한계와 위치를 넘어서고자 한다.
금기를 깨트린 그녀에겐 분명히 죄인의 낙인이 찍히게 될 것이고, 그 이유로 그녀는 빌런으로 불리게 될 것이다
에스텔라가 와인을 꺼내어 마시는 행위는 신과 같이 군림한 절대적인 체제와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한 종속적인 여성의 위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며, 취기에 쇼윈도를 자신의 재능으로 장식해 놓는 것은 거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이 세계에 자신의 재능으로 되묻고 있는 것이다. 마치 카인의 죄를 물으려는 신에게 왜 신께선 아벨만을 찾으시는 것이냐고 반문하는 것처럼, 에스텔라는 내게도 이만한 재능이 있는데, 왜 기회를 주지 않느냐고 적극적으로 반항하고 기꺼이 원죄자가 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때, 에스텔라는 쇼윈도에 전시된 마네킹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거는데, “너를 이 꼴로 둘 순 없어. 그건 너무 잔인해.” 이 말은 에스텔라 자신을 향하는 것이기도 하다. 취기에 자신의 재능을 해방하는 에스텔라. 그녀는 자신이 열망하는 바를 위해 사회가 정해놓은 한계와 금기 따위라면 얼마든지 깨고, 넘어서서 자신의 재능을 펼치는 것이야말로 곧 사회가 정해놓은 종속적인 위치에서 해방되는 길임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여성, 내 포효를 들어라.” 영화 <크루엘라>의 곳곳에서 울려터지는 크루엘라의 포효는 열망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사회의 금기를 넘어서서 진정한 자신을 찾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의 목소리 말이다.
크루엘라, 잔혹한(Cruel) 세상에 맞서다.
금기를 깨는 인물로서 크루엘라가 싸우고자 하는 것은 특정한 인물이 아닌, 금기로 가득 차있는 세상이다. 물론, 이 영화는 바로네스와 크루엘라의 명징한 대립구도로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다. 하지만, 이 대립구도에 조금 더 주의를 기울여본다면 크루엘라와 바로네스의 갈등은 단순히 개인간의 다툼이 아니라, 변화를 요구하는 신세대로 상징되는 크루엘라와 고유명사인 동시에 남작부인이라는 구시대의 권위적인 이름이 의미하듯이, 권위적이며 잔혹한 구세대로 상징되는 바로네스의 대립으로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크루엘라>는 영화의 초반에서 자신이 싸우고자 하는 대상이 엄마가 아니라 세상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니까, <크루엘라>의 대립 구도는 미래와 과거 각각 크루엘라(futuer)와 바로네스(남작 부인이라는 구시대의 권위적인 이름이 의미하듯이)로 상징되는 부정한 기득권 세력과 기성 사회에 저항하는 신세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 정의로워 보이는 싸움에는 한가지 덫이 있다. 부정한 세계를 향해 똑같이 부정한 방법으로 저항한다면, 그러니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해복수를 행한다면 결국 똑같은 사람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진 것 하나 없는 에스텔라가 이미 사회의 높은 곳에서 업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바로네스를 상대로 정당하게 싸우는 일이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기에 에스텔라는 자신이 갖고 있는 폭력적이고 과격하며 킬러같은 잔혹한 본성(Cruel)으로 바로네스와 맞서고자 한다. 에스텔라는 복수를 다짐한 순간, 그녀의 어머니가 예의바르고 착한 아이가 되라며 붙여준 이름인 에스텔라를 버리고, 자신의 진짜 본성을 상징하는 이름, 크루엘라가 되어 복수를 위해 바로네스와의 긴 싸움을 시작한다.
<크루엘라>의 대립구도는 미래와 과거 각각 크루엘라(futuer)와 바로네스(남작 부인)로 상징되는 부정한 기득권 세력과 기성 사회에 저항하는 신세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구시대의 유산은 버리고.
이미 기울어질대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선의의 경쟁은 불가능하다. 때문에, 에스텔라는 저 높은 곳에서 군림하고 있는 악인을 추락시키기 위해서 크루엘라라는 이름의 악인이 된다. 유산을 되찾는 것에서 복수로 목표가 바뀌었을 때, 크루엘라는 이전과는 다른 태도와 행동을 취한다. 우선, 미래를 상징하는 그녀가 구시대 유럽 귀족들의 단장(短杖)을 들고 나타나서, 재스퍼와 호레이스의 아침 식사를 엎어버리고 자신이 할말을 하는 모습을 보면 그녀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보이는데, 어딘지 불편한 기시감이 느껴진다.
복수를 다짐한 크루엘라에게서 보여지는 이 불편한 기시감은 크루엘라가 뒤엎으려는 부정한 기득권인 바로네스의 모습과 닮아 있는데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크루엘라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후로 그녀는 마치 자신의 진짜 친모인 바로네스처럼, 얼마든지 타인을, 힘든 유년기 시절을 함께 보낸 자신의 가족이나 다름없는 호러스와 재스퍼마저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고자 한다. 그리고 크루엘라는 바로네스가 그러했듯이 한동안은 자신의 재능과 카리스마로 주변 사람들을 사로 잡는다. 하지만, 그녀는 점차 바로네스의 부정한 면들까지 닮아가고 있었고,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점차 잃어가고 있었다. 그런 그녀는 결국 킬러의 본능을 가진 바로네스에게 뒤를 잡히고, 죽음의 위기에 놓인다.
유산을 되찾는 것에서 복수로 목표가 바뀌었을 때, 크루엘라는 이전과는 다른 태도와 행동을 취한다.
“이 목걸이(유산)때문에 나는 죽게 될 거야.”
영화가 시작하면서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에스텔라의 말처럼, 그녀는 결국 유산(가보인 목걸이)을 되찾는 과정에서 좌절하고 죽음의 순간을 맞이한다. 하지만, 이때의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간 유산이란 바로네스로부터 물려받은 잔혹한 킬러의 본능, 즉 정신적인 유산을 의미하기도 한다. 때문에, 에스텔라가 맞이하는 이 첫번째 죽음은 바로네스의 재능은 물론, 킬러의 본능이라는 사악한 유산까지 물려받은 크루엘라의 상징적인 죽음이다. 이 상징적인 죽음을 통해서 크루엘라는 새롭게 태어난다.
부정한 세상에 반발하여, 부정한 구시대를 무너뜨릴 신세대라면 당연히 부정한 그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어선 안 될 것이다. 크루엘라는 여전히 폭력적이고 과격하지만, 이젠 자신에게 유산을 물려준 이와 똑같은 형태의 악당이 되는 것을 거부한다. 그녀가 새롭게 태어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엄마를 비롯한 자신의 가족들의 마음을 되돌아보는 것이다. 그녀는 여전히 거칠게 저항하고, 열망하며, 꿈꾸지만, 타인을 해치지 않고 타인들의 마음을 돌아본다. 이렇게 정리한다면 다소 순진해보이지만, 그 영악한 순진함이 크루엘라라는 캐릭터의 매력이고, 순진하면서도 영악한 그 본성으로 세계를 뒤흔드는 인물인 크루엘라가 디즈니가 제시하는 새로운 시대에 필요로 하는 새로운 주인공이다. 덧붙여, 영악한 순진함이란 말은 모순적이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태도를 실현하기 어려울 뿐이다.
이 죽음은 바로네스의 재능은 물론, 킬러의 본능이라는 사악한 유산까지 물려받은 에스텔라의 상징적인 죽음이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주인공이 필요한 법.
처음과는 완전히 달라진 크루엘라는 자신의 가족과 동료, 지지자들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유산을 되찾는데 성공한다. 이때, 크루엘라는 유산을 되찾는 과정에서 순진하게 금기와 권력을 따르는 여성상인 에스텔라에게 죽음을 준다. 그리하여 새롭케 태어난 크루엘라는 바로네스의 잔혹한 유산을 물려받은 인물도 아니며, 캐서린의 금기를 따르는 순진한 인물도 아니다. 크루엘라는 이전 세대에게 유산으로 물려받은 이름과 정체성 모두를 죽이고, 자신만의 이름과 정체성을 선택한다.
이 악당의 성공담 또는 성장담은 디즈니가 제시하는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주인공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누구도 해치지 않되, 영악하게 자신의 권리를 되찾는 여성, 그리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거침없이 드러내는 한편, 기성세대가 유산으로서 물려준 이름과 잔혹한 본능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이름과 자신만의 능력과 열정을 발휘하는 여성. 영화속 크루엘라의 성격을 이렇게 풀어본다면, 디즈니가 새롭게 해석한 빌런 크루엘라는, 그동안 디즈니가 지켜온 전형적인 주인공 틀에서 벗어난 새로운 주인공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 이상을 시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주인공을 탄생시키기 위해서, 낡은 시대의 주인공을 두 번 죽인다. 그 첫 번째 죽음은, 바로네스로부터 잔혹한 구시대의 정신을 이어받은 크루엘라의 죽음이며, 두 번째의 죽음은 권력이나 환경에 기대어 순진하게만 살아가는 여성 에스텔라의 죽음이다. 이 두번의 죽음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 크루엘라는 온갖 사회적 금기들로 속박되고 억압된 여성상에서 해방되어 낡은 금기를 깨부수고, 영악하게 자신의 개성과 재능을 발휘하는 인물이다. 디즈니는 구시대적인 인물에게 두 번의 죽음을 안겨준다. 그리고 그 끝에서 새롭게 태어난 주인공인 엠마 스톤의 크루엘라는, 디즈니가 1970년대의 런던을 지나 우리시대, 즉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새로운 주인공”으로 제시하는 인물상이기도 한 것이다.
요컨대, 영화 <크루엘라>는 과거의 속박되고 억압된 여성상에서 해방되어 거침없이 자신의 개성과 재능을 발휘하는 현대적인 여성상을 엠마 스톤의 크루엘라를 통해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새로운 주인공”으로써 제시하고 있기도 한 것이다.
캐릭터의 성격을 한층 더 살리는 <크루엘라>의 미술과 음악
자신의 것을 되찾기 위해서 바로네스와 맞서는 크루엘라의 퍼포먼스는 굉장히 과격하고, 기존의 세계를 흔들 정도로 파격적이다. 파격적이고 과격한 <크루엘라>를 장식하는 음악과 패션도 이 영화에 굉장히 잘 어울린다. 영화에서 쉬지않고 들려오는 1960년대 ~ 1970년대 런던을 중심으로 유행했던 헤비메탈 / 하드락 사운드의 음악들하며,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새로운 주인공 크루엘라를 장식하는 펑크풍의 패션은 이 영화의 매력을 한껏 끌어올리고, 크루엘라의 개성을 더욱 강조한다.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주인공이 되기위해 전력으로 질주하는 영화 <크루엘라>의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해방과 혁명을 부르짖는 과격한 헤비메탈 사운드는 영화속의 낡고 부정한 세계를 뒤흔든다.
평이한 플롯과 스토리는 아쉽지만.
영화 <크루엘라>의 플롯과 이야기는 전형적이고 평이한 편이다. 따라서 다양한 평가가 나오는 듯한데, 다양한 장르의 예술이 섞인 복합 예술인 영화를 두고 메세지나 스토리, 플롯만 두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다소 아쉬운 평가가 아닌가 싶다. 요컨대, 두 엠마의 불꽃튀는 신경전만 해도 충분히 볼 만한 영화가 아니었던가? 물론, 사람에 따라 무엇을 중요시 여기느냐는 저마다 다르고 존중해야겠지만, <크루엘라>와 같은 작품은 일단 플롯은 간결하니 플롯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고, 스토리상으로는 논리적 오류만 없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크루엘라>와 같은 장르 영화의 매력은 스토리 역시 중요하지만 이야기 자체보다는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시 · 청각적인 요소(배우들의 연기력, 컷 연출, 미술, 음악 등)들이다. 그러니 이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면, 그냥 쉽고 간결하게 질문하고 대답하면 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재밌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사적이고 개인적인 대답을 하자면, 이 영화는 분명 흡입력있는 재밌는 영화라고 대답할 것이다. 물론, 개인의 취향에 따라 평가는 다르기야 하겠다만(아마 영상 전체에 흐르고 있는 과한 에너지 탓에 피로를 느낄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개인적으로는 캐릭터의 매력이 강렬한, 재밌는 영화라고 평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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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급 영화의 꽃말: ‘누구나’의 영화, <인천스텔라>를 기점으로
C급 영화의 꽃말: ‘누구나’의 영화, <인천스텔라>를 기점으로
당장 오늘 저녁에도 우주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심지어 그 방법이 매우 간단하다. 베란다에 방치된 냉장고 택배 박스가 바로 우주선이다. 박스를 접은 뒤, 네모나게 길쭉한 구멍을 옆면에 뚫고 그 안에 탑승하면 우주로 갈 준비는 모두 마쳤다. 만일 냉장고 박스가 없다면 대안책은 어디에나 있다.
“네? 이게 우주선이라고요? 이건 그냥 자동차잖아요.”
극 중 탐사대원이 국장에게 던지는 말이다. 어떻게 우주에 자동차를 타고 갈 수 있어. 어떻게 우주에 택배 박스를 타고 갈 수가 있어. 영화 〈인천스텔라>는 이 ‘어떻게’라는 물음에 기존에는 존재하지 않던 해답을 제시한다. 별다른 우주복이나 우주 함선, 산소 탱크도 필요없다. 1980년대를 호령하던 ‘스텔라’ 모델의 중고차 한 대만 있다면, 인천의 모 고등학교 운동장을 활주로 삼아 언제든 우주로 출발할 수 있다.
적극적인 패러디: C급 영화의 탄생
<인천스텔라>는 말 그대로 인천의 ‘스텔라’(별)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SF 장르의 독립영화다. 인천이 배경인 이유는 인천영상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만들어졌다는 이유도 있지만, 인간(人)과 하늘(天)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주인공 ‘기동’과 그의 딸 ‘규진’은 밤하늘의 밝은 별을 보며 세상을 떠난 그들의 가족을 추억한다. 그 별은 한 때 기동의 훌륭한 동료 우주 대원이자 아내였고, 규진의 엄마였던 ‘선호’다. 어느 날 규진은 선호가 가지고 있던 프로젝트 파일을 우연히 발견하고, 엄마가 끝내 알아내지 못한 외계 신호를 누군가의 도움으로 해독하는 데에 성공한다. 그리고 규진의 해독을 기반으로 좌표를 알아낸 기동은 탐사팀과 함께 우주선 ‘인천스텔라'를 타고 우주로 향한다. 그리운 아내와 엄마를 생각하며, 기동과 규진은 우주와 지구에서 각자 고군분투한다.
제목과 줄거리를 들었을 때 <인터스텔라>가 떠오른다면 그것은 지극히 감독의 의도에 부응하는 바다. 주인공의 딸 머피처럼 규진이 암호 해독에 성공하게 도와주는 인물은 미래 시간대 우주에서 온 기동이다. 우주에서 조난당한 아빠가 블랙홀에 빠져들어 미지의 공간에 도착하고, 책장 너머로 딸에게 소리치며 들리지 않는 소통에 안간힘을 쓰는 장면은 동일하다. 다만, 전자가 광활하고도 장엄한 우주와 압도되는 스케일의 책장을 보여준다면 후자는 정확히 그 반대다. 평범한 가정집의 적당히 낡아 친숙한 책장을 두드리는 모습과 투박한 블랙홀의 CG 효과가 돋보인다. 쉽게 책장을 보지 않는 딸 규진을 향해 “책 좀 읽어. 책 좀 봐.”라고 외치며 웃음을 자아내기까지 한다. 백승기 감독은 <인천스텔라>를 메이저 우주영화 <인터스텔라>의 ‘자매품 영화'라 소개하고, B급을 넘어 아예 제대로 된 ‘C급' 영화임을 당당하게 표명한다. 제한된 예산으로 만들어야 하는 독립영화의 현실에 기반하여 어설프게 따라할 바에야 ‘제대로 못 만든 영화’를 만들자는 파격적인 선언이다. 이렇게 백승기 감독만의 장르, B급을 넘어선 C급 영화가 탄생했다.
그의 첫 작품은 팀 버튼 감독의 <가위손>을 패러디한 <망치손>이다. 집에 망치가 있었다는 단순한 이유에서 출발했다. 지하철역에서 촬영한 <은하전철 999>와 300명의 인원을 모으지 못해 3명으로 대폭 축소한 <3>, 가내 수공업 3D 안경으로 구현한 <아바타>까지. 모방이라는 도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원본에 비해 현저히 낮은 퀄리티와 강화된 유머로 승부하는 그만의 패러디 전략은 일상의 상상력을 내세운다. 백승기 감독이 주축인 영화 제작사 ‘꾸러기’는 C급 전문 영화사라는 타이틀을 자랑스럽게 내세우며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 항상 ‘C’가 있다고 말한다. 그가 소개하는 C급 영화란 카메라(Camera)로 코믹(Comic)하게 찍어서 컴퓨터(Computer)로 편집해 영화관(Cinema)에 내건 창의성의 산물(Creative)이다. 즉, C급 영화야말로 완전한 영화의 본질을 관통한다고 역설한다. 백 감독의 영화는 단순히 원작의 ‘하위호환 모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처럼 의도된 패러디를 통해 새로운 주제와 형식을 전달한다.
‘인천스텔라’만의 기발한 우주를 완성하다
영화 <인천스텔라>는 현실에 기반한 엉뚱한 상상력을 발휘해 우주를 표현한다. 우주에서 온 신호를 해독하기 위해 고작 카세트 CD 플레이어의 버튼을 누른 뒤 헤드셋을 낀다거나, 우주로 가기 위해 학교 운동장에 주차된 빨간 중고차 ‘인천스텔라’에 탑승하는 것처럼 말이다.
심지어 우주로 향하는 그들이 입은 유니폼은 우주복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다. 실제 우주복은 모두가 알다시피 외부의 열을 차단하는 헬멧, 통신 헤드셋과 이어폰, 생명 유지장치 등 복잡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영화 속 그들은 은박 유니폼을 입은 뒤 오토바이 헬멧을 머리에 쓰고, 방한 장갑과 하얀 장화를 낀 채로 너무나도 태연하게 자동차에 올라탄다. 쿠킹 호일을 두른 것처럼 번쩍거리기만 하는 우주복을 착용하고 유유히 우주를 유영하기까지 한다. 다소 어설픈 행색에도 대원들의 얼굴은 사뭇 진지하다. 웃음을 터뜨리는 게 괜히 미안할 만큼.
탐사팀에게 항로를 안내하는 인공지능 로봇이나 멋있는 AI 음성도 없다. 우주복을 입은 곰돌이 그림으로 덧칠한 블루투스 스피커만 덜렁 놓여 있을 뿐이다. ‘LG U+ 클로버 스피커’를 대신하는 ‘세잎클로버’다. 중력을 계산할 때는 공학용도 아닌 가정용 계산기 하나만 있으면 충분하다. 집에 굴러다니던 계산기와 무선 이어폰만 있다면, 영화 속 장면을 완벽한 싱크로율로 재현할 수 있다.
SF+독립영화+C급= ?
흔한 SF 장르의 우주 영화를 생각하고 이 영화를 감상했다면 의문이 들 수 있다. 광활한 우주를 수놓는 웅장한 풍경도, 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픈 계기판과 수식도, 최첨단 기술의 집합체인 근사한 우주선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발한 아이디어들이 대신 자리하고 있다. 주인공의 직장은 NASA가 아닌, ASA(아시아항공우주국)이다. 우주 신호를 감지하는 헤드셋과 카세트 플레이어, 블랙홀 시공간을 통제하는 블루투스 스피커, 나아가 새로운 행성 ‘STAR GAM(갬성)’의 토양을 검사하는 홈-매트 훈증기까지.
다른 장르도 아니고, 무려 우주 SF 영화를 집에서 당장 재현할 수 있을 정도로 만들었다니. 상당히 파격적인 도전이 아닐 수 없다. 3,700배 차이가 나는 제작비로 만든 영화는 저예산 인터스텔라를 넘어, 홈 메이드 인터스텔라에 가깝다. ‘이런 것도 영화라고', ‘이 정도는 나도 만들겠다'는 식의 관객의 반응이 예상되지만 백승기 감독은 오히려 이런 반응을 처음부터 바랐다. 실제로 그는 인터뷰에서, ‘이게 영화라면 나도 만들겠다'던 댓글에 “제발 같이 만들자"고 답했다. C급 영화는 누구나 감독이 될 수도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무대다. 할리우드 영화 중에서도 가장 높은 예산과 스케일을 자랑하는 우주 영화를 저예산 독립영화에서 만들어보겠다는 발상은 상당히 위험하지만, 그렇기에 이 영화의 주제와 일맥상통한다.
C급 영화의 꽃말: ‘누구나’의 영화
본래 패러디와 모방은 고급 예술을 따라한 저속하고 값싼 대중예술로 그려지곤 했다. 그러나 고급과 저급, 진짜와 가짜는 이제 분명히 구분되지 않는다. 저속한 대중예술이라 불리던 ‘키치’ 또한 새로운 스타일로써 우리 삶에 빠른 속도로 스며들었다. 과연 B급 감성과 그것을 넘어선 C급 영화는 ‘진짜 예술’을 밀어내는 저급하고 촌스러운 유행일 뿐일까. 더군다나 거대 자본과 투자력을 갖춘 할리우드의 것임이 분명했던 SF 장르를 구현했다면. 성공과 실패를 떠나서 시도만으로도 의의가 있는 과감한 도전이다. 이 영화를 단순히 모방 작품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이유도 그들이 그리는 하찮은 우주에서 우리의 일상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스 하나만 있다면 우주로 갈 수 있으며 언제든 우주에 가 닿을 수 있는 존재. 그렇기에 우리는 특별하다. 영화의 주제는 그 모습만큼이나 간단하다. 마지막 장면을 장식하는 초신성(super nova)은 영화의 영제목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관객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마치 태아의 모양을 본뜬 듯한 별의 폭발은 죽음의 상태를 일컫는 초신성의 뜻과는 달리, 생명의 탄생을 예고한다. 탄생과 소멸을 모두 겪을 수 있는 별은 각자의 인생과 닮아 있다고 말한다. 많은 자본이 투자되거나 화려한 CG와 소품은 없지만 오히려 부족하기 때문에, 우주의 빈 공간을 개개인 모두로 채울 수 있다며 역설한다. 때로는 촌스럽고 유치하고, 어설퍼 조잡해 보이는 장면에서 마침내 우리를 발견해내기까지의 과정은 즐겁다.
거실을 한 바퀴 둘러보면 이곳은 이미 항공우주국의 한 가운데, 우주비행선의 발사대다. 아직 버리지 않은 택배 박스는 이제 우주비행선의 단단한 몸체가 되고, 어릴 적 읽던 전집이 꽂힌 투박한 책장은 다른 머나먼 우주 공간에 있는 가족이 애타게 나를 부르는 차원의 문이 된다. 시공간을 접어 차원의 지름길을 만드는 <인터스텔라>처럼, 인(人)과 천(天)이 단숨에 맞닿는 순간을 부족함 없이 표현한다. 인류를 구해야 하는 거대 자본 SF영화의 사념은 가족을 구하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으로 바뀌지만, 영화가 주는 진리와 울림은 불변한다.
영화 <인천스텔라>에서는 사람이 모두 위대하고 아름다운 별이 된다. 거대 자본과 화려한 CG, 정교한 소품의 부재가 남긴 빈 자리는 사람과 사랑에 대한 애정과 따뜻한 유머가 채운다. 이 C급 세계관에서 우리는 모두 존재 자체로 특별한 항성이다. 분명 <인천스텔라>는 어딘가 이상하고 빈틈이 많으며 개연성이 부족한 영화다. 마치 내가 사는 평범하고 서툰 삶처럼. 그래서 따뜻하고, 그래서 특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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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남자의 활어회 같은 입담여행, <트립 투 그리스>
- 트립 투 그리스(The Trip to Greece, 2020)
제작 : 영국, 코미디 │ 감독 : 마이클 윈터바텀
출연 : 스티브 쿠건, 롭 브라이든
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 러닝타임 : 103분"소소한 행복감을 계속 선사하던 시리즈를 그리스에서 제대로 마무리한다"
-이동진 영화평론가-
영국 대표 배우 스티브 쿠건 & 롭 브라이든
환상의 팀워크로 완성한 낭만 가득 여행기
여행이 한결 다채로워지는 순간은 언제일까. 좋은 사람과 함께할 때, 그리고 여행에 대한 풍부한 교감으로 그 깊이를 확장할 때. 영화 <트립 투 그리스>의 두 남자 ‘스티브 쿠건’과 ‘롭 브라이든’이 떠나는 여행은, 그 두 가지 여건을 충족시키는 여행이 아닌가 싶다.
스티브 쿠건과 롭 브라이든은 영국의 내로라하는 배우이자 입담꾼들이다. 그들이 함께 여행을 시작한 건 <트립 투 잉글랜드>에서였다. 감독 ‘마이클 윈터바텀’은 이 영화의 영감을 실제 두 배우들과의 점심식사 자리에서 얻었다고 한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유머와 풍부한 지식은 그렇게 ‘트립’ 시리즈가 되어, 잉글랜드에서 이탈리아로, 이탈리아에서 스페인으로, 이번에는 그리스로까지 넘어왔다.
중년 남자 두 명이 떠나는 여행이 그리 재밌을 줄은 미처 몰랐다. 마치 다듬어지기 전의 비방용 영상을 보는 것 같았다. 끊임없이 주고받는 서로를 향한 짓궂은 장난과 성대모사 등은 기본이고, 그때 그때 여행지에서 떠올리는 노래와 상황극 등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생생하게 이어진다. 감독이 영감을 받았다던 두 사람의 대화가 어떤 것이었을지 짐작해볼 수 있었다.
두 사람의 해박한 지식 또한 영화를 보는 재미에 한 몫한다. 두 배우의 나이는 50대다. 인생의 절반을 살아오는 동안 켜켜이 그들의 삶에 쌓여온 문화예술과 역사, 미식에 대한 잡다한 지식들은 그들이 끊임없이 농담 같은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원천으로 적극 활용된다. 물론 영화 촬영을 위해 사전에 전달된 상황과 정보들은 몇 가지 존재한다. 하지만 그 소수의 사전 정보를 제외한다면 절반 이상이 거의 두 배우의 즉흥적인 티키타카로 채워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영화의 정체성은 바로 그 날 것의 힘에 있었다. 여행지를 다니면서, 빼어난 음식을 맛보면서, 두 배우가 떠오르는 대로 아는 대로 이야기하는 것. 그리고 그 대화가 곧 씬이 되고 영화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트립 투 그리스>다.
그러다가도 문득문득 그들이 가족의 구성원이자 가장이라는 느낌을 선뜻 느끼게 하는 대목도 존재한다. 스티브의 아버지는 여행 중 병세가 심해지시는데, 그때마다 아버지의 상황을 아들로부터 듣는 스티브의 모습은 영락없는 50대 가장이자, 누군가의 아들이었다. 롭도 마찬가지다. 그는 시종일관 스티브를 놀리고 개구진 성대모사를 하다가도, 아내나 딸과 통화할 때면 영락없는 애처가 기질을 드러낸다. 두 배우의 사회적인 모습과, 개인적인 면을 둘 다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묘미가 더욱 짙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두 배우가 함께 ‘트립’ 시리즈로 호흡을 맞춘 지도 어언 10년. 두 배우의 어디서도 본 적 없던 활어회 같은 형태의 여행을 보고 있자니, 이상은의 <삶은 여행>이라는 노래의 노랫말이 문득 떠오른다. 10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호흡을 맞추며 보낸 두 사람의 시간 또한 커다란 의미에서 여행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의미를 모를 땐 하얀 태양 바라봐 / 드넓은 이 세상 어디든 평화로이
춤추듯 흘러가는 신비를 / 오늘은 너와 함께 걸어왔던 길도
하늘 유리 빛으로 반짝여 / 삶은 여행이니까 언젠가 끝나니까
인생의 황금기를 지나 50대가 된 두 배우, 두 사람의 관록, 여행과 우정, ‘오디세우스의 발자취’라는 뻔하지 않는 여행 테마, 날 것의 대화. 이 모든 요소들이 트립 시리즈를 관통하는 색이자 매력이 아닐까.
<트립 투 그리스>를 끝으로 트립 시리즈는 마무리가 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이 시리즈 덕에 알게 된 두 배우의 남은 발자취는 두고두고 응원하게 될 것 같다. 삶이라는 여행이 언젠가 끝난다던 이상은의 노래처럼, 두 배우는 서서히 노년이 되어가겠지. 하지만 두 사람을 보고 나면 인생이든 진짜 여행이든, 끝을 향해 가는 여정이 그리 두렵지만은 않아진다.
성격도 꿈도 다르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여행 메이트가 되어주었던 두 사람을 보는 103분 동안 너무 즐거웠다. 그리고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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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콤달콤 (2021); 새콤달콤은 어디에? 남은 건 씁쓸함 뿐
새콤달콤 (2021)
새콤달콤은 어디에? 남은 건 씁쓸함 뿐
새콤달콤 (2021) 정보
감독: 이계벽
출연: 채수빈, 장기용, 크리스탈
개봉: 6/4 (넷플릭스)
장르: 로맨틱 코미디, 로맨스
상영시간: 102분
현실 단짠 로맨스(?)
비정규직 간호사 '다은(채수빈)'은 황달로 입원한 공대생 '혁'에게 유일하게 친절하게 대해주는 인물이다. 혁은 자신을 챙겨주는 다은을 사랑하게 되고, 순수한 애정 공세에 다은도 조금씩 마음을 연다. 퇴원한 그는 다은을 다시 못보게 될 거란 생각에 좌절하지만, 어렵게 연락을 취하게 되면서 '간호사-환자'로 만난 인연에서 연인으로 발전한다. 혁은 다은에게 굉장히 헌신적이었고, 살집 있는 몸매에서 다이어트에도 성공하고 대기업 파견직 사원으로도 발탁되며 승승장구한다. 달콤한 연애를 하고 있던 두 사람이지만, 혁이 바빠짐에 따라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고 권태기에 접어들면서 다은과 혁의 관계는 점차 나빠진다. 그리고 혁 앞에 나타난 회사 동료 '보영(정수정)'의 새콤한 매력 탓에 혁은 점점 다은과의 연애에 집중하지 못한다. 이렇게 파국으로 접어든 커플의 관계 속에서 영화는 말미에 놀라운 반전을 선사한다.
2000년대 로맨스 소설 원작,
구시대적 설정
<새콤달콤>은 일본의 연애소설 '이니시에이션 러브'를 원작으로 만들어진 로맨스 영화다. 원작이 2000년대 작품인 탓일까. 2021년 영화로 보기에는 굉장히 올드하고 전형적인 속성들이 많다. 순박하고 숙맥인 공대오빠와 예쁘고 매력있는 간호사와의 로맨스. B급 로맨스 만화 설정이 느껴지는 영화 초반부의 구성은 이런 스토리의 영화가 아직까지도 나온다는 사실에 한숨을 불러일으킨다. 오빠 소리 못 들어서 환장한 귀신이 붙었나? 그 놈의 오빠 소리에 설렌다는 설정은 도대체 언제까지 나오는 건지...퇴원 후 '혁이오빠'가 다은을 찾기 위해 핸드폰 번호를 캐내서 전화를 거는 장면은 사실상 범죄다. 그런데 전화를 받고 당황하기는커녕 집으로 오라는 다은의 태도는...현실감각이 많이 떨어지는 내용이다.
새콤하고 달콤하지도 않다,
그래서 하이퍼 리얼리즘 연애인가?
그래도 초반에 '장기용'이 등장하기 전 파트의 로맨스는 B급 감성을 감안하고 보면 나름대로 귀엽다. 하지만 장기용이 등장하고, 채수빈과 정수정 사이를 오가는 아슬한 관계 속 균열들이 나타나며 이야기는 씁쓸함과 지루함만을 남긴다. 결말에 뒤통수를 칠 만한 반전을 선사하기 위해 중후반부의 내용을 포기한 건가 싶을 정도로 멕이 빠진다. 도대체 어떤 부분에서 '새콤달콤'함을 말하고 싶은 건가 의문이 들다가도, 새콤달콤한 연애를 원함에도 현실의 찐연애는 씁쓸하고 하루하루가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를 반영한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단순히 현실연애의 씁쓸함만을 반영했다고 하기에는 '장기용'이 맡은 '장혁' 캐릭터가 너무 쓰레기처럼 비춰져 혁과 다은의 연애가 유독 최악인 것처럼 보인다. 모두의 연애가 이들처럼 끔찍하게 끝나는 건 아닐테니.
채수빈의 인상적인 연기, 그럼에도 아쉬움이 남는 캐릭터
잘생긴 외모의 '장기용'과 천덕꾸러기 같은 면과 새침한 면을 동시에 보여준 '정수정'의 연기도 좋지만, 새콤함과 달콤함의 매력을 가장 절묘하게 표현한 '채수빈'의 연기가 제일 인상적이었다. 영화 초반의 애교 섞인 모습부터 중반부의 달콤한 연인의 모습까지. 특별한 임팩트는 없더라도 영화의 중심을 탄탄하게 잡아준다.
하지만, '채수빈'의 훌륭한 연기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다은'이라는 인물에게 너무나 불친절하다. '다은'은 영화에서 시종일관 피해자로 그려진다. 남자친구인 '장혁'은 다은에게 매일 같이 거짓말을 하고 연애의 권태기를 표현하지 못해 안달이며 임신과 낙태까지 겪게 한다. 그럼에도 다은을 옆에서 챙기기는커녕 일을 핑계로 보영과 함께 하고, 다은에게 소홀히 대한다. 이러한 장혁의 태도 앞에 다은은 어떻게 하는가. 다은이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모습은 영화 속에 1도 담겨져 있지 않다. <새콤달콤>이 철저하게 남자주인공의 시선에서만 영화를 전개하고 두 여성 캐릭터는 주제를 어필하기 위한 수단으로 밖에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말의 반전은 쓰레기 같은 남성 '장혁'을 징악함으로써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하게끔 한다. 하지만 영화는 '다은'의 시선을 전혀 그려주지 않았는데, 단순히 자신을 사랑해주는 다른 남자를 만났다는 것만으로 관객이 느꼈던 불쾌함이 해소가 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엔딩 크레딧이 내려갈 때까지 관객이 통쾌함을 느낄 수 없다는 게 바로 그 이유다.
* 본 콘텐츠는 블로거 겔겔겔스타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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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극장과 같은 영화 <더 랍스터>
1. ’더 랍스터’의 첫 번째 세계인 호텔은 커플이 되지 못하면 동물이 되는 곳이다. 극단적인 이분법적으로 나뉘어진 세계이기도 하다. 주인공 데이비드는 이혼을 하고 호텔에 들어온다. 데이비드는 커플이 되지 못할 시 스스로 랍스터가 되길 원한다. 100년 가까이 살고, 무한한 번식을 하고, 귀족처럼 푸른 피를 가졌다는 이유에서 말이다. 어찌됐든 데이비드는 동물이 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이성에게 구애를 하거나, 커플이 되기 위한 필수조건인 ‘공통점’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느 날 문득 ‘감정이란 억지로 만들어내는 것이 감추는 것 보다 더 어렵다’라고 느끼게 된다. 그리고 작정한 듯 찔러도 피 한방울 날 것 같지 않은 냉정한 여성에게 ‘비정한 여자의 말투와 짧은 머리가 마음에 든다’고 구애를 하기 시작한다.
물론 자기도 냉정한 척하는 모습을 보인다. 감정을 감추는 일이 어렵지만 불가능한 일은 또 아니어서 여성과 커플은 성사 되지만 형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모습 그녀 앞에서 그는 끝까지 연기하지 못하고 포기한다. 이 세계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며, 없는 감정 또한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사회의 시스템에 100% 순응할 확률이 높을 것이다. 하지만 데이비드는 그러기에는 마음이 너무 약한 사람이었거나, 자기 자신을 너무도 사랑하는 사람은 아닐까 싶다.
2. 데이비드는 호텔을 뛰쳐나와 숲 속으로 오게 된다. 이 곳은 자유로운 삶은 보장받는 대신, 사랑을 금지하는 곳이다. 호텔의 세계와는 다른 극단적인 이분법의 세계이다. 여기서 데이비드는 아이러니 하게도 근시라는 ‘공통점’이 있는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된다.
절대적으로 사랑을 금지하는 숲 속의 리더에게 사랑이 발각되고 근시의 여성은 시력을 잃게 된다. 공통점이 사라진 데이비드는 다른 공통점을 찾게 된다. 결국 숲 속으로부터 도망쳐 도시로 오게 되고, 그 또한 자신의 시력을 잃게하여 사랑의 매개체의 ‘공통점’을 유지하려 한다.
3. 커플이 된다는 것은 사랑을 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사랑은 보이지 않고 그저 동물이 되지 않기 위해 기계적으로 공통점을 찾고 커플이 되려한다. 현실 안에서 사랑하기에 앞서 조건을 궁금해한다. 나와 어느 정도 비슷해야 하겠고, 수준이 비슷한 수준의 사람을 만나야 행복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비슷하게도 현실의 우리도 사회가 정해놓은 행복의 기준을 ‘진짜 행복’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가기도 한다.
4. 호텔도 숲 속도 모두 정해 놓은 시스템에서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 중간을,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듯하다. 의심하지 않고 아무런 반감없이 시스템에 맞춰 사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보여주는 영화인 것 같다. 행복을 그리고 사랑을 정해진 시스템에 맞춰 살면 편할 수도 있겠지만 정해진 시스템과 정해놓은 사회적인 강요에서 조금씩 벗어나 자신만의 행복을 찾을 때 진정한 행복이 찾아오지 않을까 싶다.
씨네랩 에디터 Hez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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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영상은 결말을 포함하고있습니다. 영화: 메리,퀸 오브 스코틀랜드
영화에취한다 비지니스메일: allwey02@gmail.com
사용중인 이어폰 : 저지연 무선이어폰 GTW270 hybr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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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봄 모든 의심의 끝, 옹성병원 그곳에 인간과 괴물이 있었다 《경성크리처》 파트1 12월 22일, 오직 넷플릭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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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내일 지구가 망해버렸으면 좋겠어> 공식 예고편
국적, 다 다르다.
성격, 제각각이다.
외국인 학생들이 모인 한국의 한 대학 국제 기숙사.
이곳에서 그들은 우정을 쌓고, 사랑에 들뜨고, 세상을 배운다.
대부분 엉망진창 뒤죽박죽이지만?